고령화 속도 세계 1위. OECD 노인 빈곤율 1위. 하지만 아무도 노인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활동적인 시니어가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치를 이뤄가고 있는 스타트업 ‘내이루리’의 탄생 배경이다.
‘내이루리’는 60세 이상 시니어 배송원을 정규직으로 고용해 물류 정기배송을 대행하는 서비스 ‘옹고잉’을 운영하는 스타트업이다. 물류 시장이 앞으로 커질 것이라고 내다본 정현강 내이루리 대표는 시니어에게 적합한 배송 서비스를 고민했다. 처음에는 ‘실버라이닝’이라는 회사로 시니어가 살아온 동네에서 도보로 배달하는 ‘할배달’ 서비스를 론칭했다. 하지만 불규칙한 배송 주문과 길 찾기의 어려움으로 일을 지속하는 시니어가 많지 않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시니어의 미래를 책임진다는 의미를 담아 ‘내이루리’로 사명을 변경하고 ‘옹고잉’이라는 정기배송 및 수거 대행 서비스를 론칭했다.
근속률 90% 실버 배송원
옹고잉 서비스는 2021년 11월 29일 차 한 대로 시작했다. 2022년 10월 기준 옹고잉의 배송원과 보유 차량은 45명과 45대가 됐다. 월 발생 정기배송 물량은 11만 3000인분. 배송 지연율은 0.3%에 불과하다. 내이루리 매출은 2022년 6억 원으로 1300% 성장했으며, 누적 13억 3000만 원을 투자받았다. 정규직 고용률은 90%, 근속률도 90%에 이른다. 정현강 내이루리 대표는 “자신이 일을 해보고 주변 지인에게 추천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제안한다는 건 그만큼 만족도가 높다는 것 아닐까?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단순 일자리 제공뿐 아니라 시니어 배송원을 ‘프로’라고 부르며 그들의 자존감과 성취감도 높여주고 있다.
정 대표는 실버라이닝에서의 시행착오를 발판 삼아 정기배송 시장을 공략했다. 같은 업체에 고정 배차를 통해 주기적인 배송을 하는 것으로, 시니어가 예측 가능한 시각에 원하는 시간만큼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옹고잉 배달원 근무 시간은 3시간, 6시간 중 고를 수 있으며, 하루 4.5시간 근무 기준 월평균 임금은 125만 원 수준이다.
또한 길 찾기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시니어에 특화된 UX, UI를 반영해 배송 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배송 스케줄, 배송 시간 예측, 물품 오배송 방지 등 정기배송 맞춤 기능을 스마트폰으로 전화나 문자 이용만 가능하다면 누구든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내이루리의 최적 배송 경로 생성 기술 및 머신러닝 기반 알고리즘 개발 역량을 인정해, 지난해 9월 기술창업 지원 프로그램 ‘팁스’를 통해 2년간 총 5억 원의 개발·연구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정 대표는 “학력이나 소득 수준과 별개로 시니어의 상황 판단 능력과 인지 능력은 아무래도 조금 다를 수밖에 없다”면서 “특정 색깔의 버튼에 어떤 기능이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각인시켜드리고 과정을 단순하게 해 시니어에게 적합한 툴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전국을 넘어 세계로
옹고잉은 정규 배송원을 각 사에 전담 배치해 배송이 안정적으로 이뤄진다. 또한 배송 외에 음식 용기 수거 서비스나 고객사 요청에 맞춘 케이터링 서비스도 진행한다. 이에 고객사 만족도도 높다. 처음에는 전체 물량의 5%만 주었던 한 고객사는 이제 60%의 물량을 옹고잉에 맡긴다. 업계에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 먼저 찾아오는 고객사도 생겼다. 시니어 배송원 고용을 늘리면서 그만큼 일자리를 더 만들기 위해 고객사를 확장할 계획이다. 또한 앞으로는 다회용기, 세탁물, 폐기물 등 정기 수거·회수 시장으로 서비스 영역을 넓히고자 한다.
정기배송을 넘어 마지막에는 시니어 인력 매칭 플랫폼으로 성장하는 것이 목표다. 시니어가 배우기에 쉬우면서, 하루에 짧은 시간 일할 수 있되, 생활임금 이상 보장될 수 있는 일자리를 계속해서 발굴할 계획이다. 배송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기업과 시니어를 연결하는 일자리 플랫폼을 만들고자 하는 이유다. 또한 서비스 지역 역시 전국으로 확장할 예정이다.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중국 등 고령화가 심각한 동아시아 시장 진출까지 생각하고 있다. 정 대표는 “한 기업이 낼 수 있는 임팩트 크기의 끝까지 가보고 싶다”며 포부를 밝혔다.
정현강 대표
“가치있는 일자리를 향해”
“저희의 목표는 ‘부모님께 권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면접을 하면서 많은 시니어분들을 만나보았는데, 단지 생계를 위해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소비하는 가장 가치 있는 방법이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오늘 하루 무엇을 하며 보낼지 고민하다가 왔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분은 외딴 바다에 혼자 떠 있는 섬 같다고도 표현하셨습니다. 봉사활동을 할 수도 있고 취미 생활을 할 수도 있지만, 일정한 루틴을 원하셨어요. 그만큼 소속감을 가지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걸 알았습니다. 간담회에서 감사하게도 ‘우리 회사가 오래가야 한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배송 시장에서 수백만 개의 시니어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다짐한 만큼, 성장을 이어가며 시니어분들이 일을 통해 활력을 얻을 수 있도록 앞으로도 좋은 파트너가 되겠습니다.”
옹고잉 배송원이 되고 싶다면?
▶ 옹고잉은 2023년 정규 배송원을 50명에서 15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배송원 신청은 △서울시50플러스재단 △서울 강남구 시니어클럽 △대한노인회 강남구지회 △옹고잉 홈페이지를 통해 할 수 있다.
▶ 옹고잉에서 배송원으로 일하려면 기본적으로 스마트폰을 사용해 전화와 문자가 가능하면 된다. 또한 운전은 필수다. 배송 서비스 태도가 좋다면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지원하면 내이루리에서 3일간 동승 교육을 진행하므로 부담 없이 신청해보자.
경기도 안산이냐, 서울 마포냐, 단원 김홍도의 고향을 두고 설왕설래가 있지만 고증이 없어 미지수다. 그런데 단원이 안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할 만한 단서가 있다. 안산은 18세기 조선 예원(藝苑)의 총수였던 표암 강세황이 30여 년을 머문 고장이다. 표암의 시문집 ‘표암유고’에 단원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가령 ‘단원은 젖니를 갈 때부터 나의 집을 드나들었다’고 했다. 일찍이 맺어진 표암과 단원의 사제 인연은 길게 이어졌다. 단원을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 일컬은 이도 표암이었다. 정황이 이러니 안산 사람들은 뿌듯하다. 안산의 풍토와 풍정이 표암의 가르침과 함께 단원을 거목으로 길러냈다고 보기에. 안산시가 김홍도미술관을 만든 연유가 완연하다.
김홍도미술관은 안산시 외곽 노적봉 기슭에 있다. 야산 치맛자락을 거머쥔 형국이다. 노적봉 산책과 미술 관람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입지다. 건물은 모두 네 동. 현대미술전이 펼쳐지는 1•2관, 단원콘텐츠관인 3관, 그리고 아동들을 위한 상상미술공장으로 구성했다. 너른 뜰엔 조각 작품도 많다. 전체적으로 독특할 것 없는 구색이지만 미술 작품으로 얼마든지 활갯짓할 수 있는 공간이라 훤칠하다. 뒷산의 수목들은 제법 울창해 조연으로 손색없다. 산기(山氣)를 싣고 스쳐가는 청명한 바람과, 연달아 착륙하는 햇살의 대열도 도회를 벗어난 관람객에겐 반가운 작품이다. 미술관 입구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도 있다.
단원콘텐츠관으로 들어간다. 이렇다 할 꾸밈과 치레 없이 간결한 전시관이다. 김홍도미술관의 핵심 공간이다. 단원의 광활한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기획한 콘텐츠 전시가 펼쳐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소년 김홍도, 노적봉에서 세상을 담다’전이 진행되고 있다. 조선시대 때 안산에 있었던 단원이라는 이름의 숲과 서호(西湖) 바다를 모티브로 한 전람회로, 단원이 어린 시절을 보낸 안산의 옛 풍경을 상상해보게 하는 전시회다. 어물 장수나 고기잡이 풍속을 그린 단원의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단원이 교유한 표암, 심사정, 최북의 작품도 있다. 단원의 예술 정신을 현대적 관점에서 풀어낸 애니메이션과 미디어아트도 등장해 볼거리를 확대했다. 안산의 고지도를 전시한 건 관객을 과거의 안산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일 테다.
흥미롭기론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다. 아집도? 아집은 아회(雅會)와 같은 말로 묵객들이 모여 시와 술을 나누며 노니는 야유회다. 그걸 그린 게 아집도다. 즉 ‘균와’라는 산골짝에 화가 여럿이 모여 소풍을 즐기는 광경을 그린 게 ‘균와아집도’다. 때는 1763년 4월. 봇물처럼 터진 춘색이 영롱해 어지러웠으리라. 봄꽃 필 때 묵객은 유난한 ‘심쿵’으로 설렌다. 산야에서 작당해 꽃과 더불어 한잔 아니 마실 수 없다. 모인 이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그림 상단 오른편에 쓰인 발문에 다 나온다. 보자. ‘거문고를 타는 사람은 표암 강세황이다. 그 곁엔 어린 김덕형이 있다. 담뱃대를 물고 앉은 이는 현재 심사정이다. 차건을 쓰고 바둑을 두는 이는 호생관 최북이며, 퉁소를 부는 사람은 단원 김홍도다.’
등장인물 모두 안산과 연이 깊었더란다. 다들 일세를 풍미한 거장이다. ‘균와아집도’는 조선 후기 묵객들의 놀이 스타일을 여실히 보여준다. 단원이 퉁소를 불고, 강세황이 거문고를 탔으니 고급스러운 피크닉이다. 일행이 한자리에 모여 그린 합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그 가치가 이채로워 우뚝하다. 학자이자 서화가인 허필이 쓴 발문의 귀띔에 따르면 그림의 전체 구도를 잡은 건 표암이다. 능란한 필치로 휘늘어진 솔과 옹골찬 바위를 그려 담황색을 입힌 건 심사정과 최북이다. 당시 19세였던 단원은 가는 붓을 날렵한 속필로 휘저어 인물들을 묘사했다. 10대 청년이던 단원이 대가들과 어울려 붓을 적셨으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단원의 예술적 기량이 일찍부터 수승한 것이었음을 알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아쉬운 건 전시장에 나온 작품 전부가 영인본이라는 점이다. 애초 단원의 진본 작품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컸으나 빗나갔다. 단원의 현존하는 그림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파악하기 어려운 개인 소장 작품을 빼더라도 300점이 넘는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미술관이 다수를 소장했다. 삼성미술관 리움은 신선의 무리를 그린 ‘군선도 병풍’(群仙圖 屛風, 국보 제139호)을 소장했다. 안산시도 7점을 보유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김홍도미술관이 2년마다 펼치는 진본 기획전을 통해 공개된다. 2021년엔 ‘표암과 단원’전을 열어 진본들을 전시했다. 진본 가운데 ‘공원춘효도’는 조선 후기 과거시험장의 풍속을 보여주는 유일한 사료(史料)로 평가된다.
신기루처럼 미묘한 매화를 그려
단원 김홍도는 조선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이름을 들날린 화가다. 그의 돛을 밀어준 건 표암이었다. 인생의 눈을 트이게 하고 예술의 길을 열어준 이가 표암이었다. 단원을 궁중 화가로 천거한 이도 표암인데 단원은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표암이 괜한 선심을 베풀었으랴. 그는 일찌감치 단원의 됨됨이와 천재성을 발견했다. 단원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용을 보았다. 표암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글을 써 단원을 극찬했다.
‘단원의 화풍은 새로워 개벽을 이룰 정도다. 그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저마다 부르짖었다. 그림을 구하려는 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어 단원이 잠을 자고 밥을 먹을 겨를이 없을 지경이다.’
나는 모자라 단원에 대해 아는 게 드물다. 그럼에도 김홍도미술관을 관람하며 그의 아우라가 허공에 감도는 것 같은 환(幻)을 느낀다. 전시작이 많지 않아 단원이 항해한 예술의 바다에 풍덩 빠졌다 나온 기분을 맛보긴 어렵다. 다만 단원의 옷깃에 살랑대는 실바람 한 오라기를 움켜쥔 느낌이다. 생각나는 건 언젠가 화첩에서 본 단원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가 불러일으킨 쓸쓸한 정취다.
주상관매라, 배 위에서 매화를 보다! 단원은 매화 마니아였다. 매화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매화를 가슴에 담았으니 생애엔 매향이 난분분? 단원은 부끄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주상관매도’의 매화는 어이 아득한 허공에 떠 우련한가. 백일몽처럼, 신기루처럼 미묘한 매화를 그렸다. 천길 벼랑에 걸린 매화 위로는 하늘이 있고 아래엔 강물이 있지만, 뿌연 안개처럼 경계 없이 흐릿하게 그려 천하가 아득하다. 강기슭에 멈춘 조각배에 비스듬히 앉아 매화를 지켜보고 있는 노인의 모습엔 우수가 실려 있다. 초연하다기보다 쓸쓸한 기색이 여실하다. 노경이란 외로워 매화마저 무상감을 돋운다는 걸까? 이 그림은 단원의 노년기 작품이다. 이상을 좇는 열정보다 허무의 성분이 커진 시절에 그렸다.
말년의 단원은 곤궁했다. 정조가 붕어하면서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됐다. 가세가 기울어 고달프게 살았다. 단원의 종신(終身)은 미스터리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전해오는 게 없다. 작품이야 불멸! 그가 그림 안에 가둔 자연과 인간사의 총량은 장강(長江)과 맞먹는다.
대중 요구에 부응하는 기획전으로 전진
정미영 김홍도미술관 문화예술교육사
야수파의 거장 마티스와 입체파 창시자 피카소. 둘은 사제지간이었다. 마티스는 일찍이 피카소의 천재성을 읽어 지지와 조언을 했고, 피카소는 마티스를 평생 따랐다. 표암 강세황과 단원 김홍도. 이 조선의 커플 역시 사제지간으로, 예술적 동지로, 지음(知音)으로 평생 교유했다. 정미영 김홍도미술관 문화예술교육사의 얘기는 이렇다.
“복 중의 복은 인연 복이라 하는데, 단원이 표암 강세황을 만난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최고의 스승을 만났으니까. 작품 하나를 완성하면 단원은 흔히 표암에게 먼저 보여줬고, 표암은 강평을 해주었다.”
단원이 표암으로부터 화풍의 영향도 받았나?
“단원이 그 누군가에게 화풍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흔적은 없는 걸로 알려졌다. 표암은 정신적 스승으로서 단원을 북돋았던 셈이다. 단원은 천재였다. 게다가 못 말릴 노력파였다. 부단한 노력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던 거다.”
단원은 풍속화가로 알려졌다. 그의 풍속화에 나타난 사회의식도 호감을 산다.
“안산시가 소장한 단원의 진본 7점 중 하나인 ‘공원춘효도’에도 사회의식이 드러난다. 과거제도에 만연한 부정행위를 풍자한 그림이니까. 단원의 풍속화는 30대 초반에 이미 절정에 도달했다. 그러나 단원의 작품 스펙트럼은 훨씬 드넓다.”
표암과 더불어 정조 임금 역시 막강한 스폰서 역할을 함으로써 단원의 순항을 가능하게 한 것 같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대체로 단원이 표암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됐다고 보더라. 그런데 단원의 출중한 재능을 알아본 정조가 대단한 후원을 했다.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단원이 주장하도록 하라’고 할 정도였다. 궁중 화가로서 단원은 일종의 공공그림을 그렸으나 퇴근 뒤엔 자기 그림을 그렸다. 단원의 집 문간엔 그림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루었다고 한다.”
단원의 성향을 알 만한 일화가 있다면?
“풍류에도 일가견 있는 단원이었다. 특히 매화 사랑이 지극했다. 언젠가 한번은 단원의 그림을 원하는 이가 찾아와 작품값으로 3000전을 내놓고 갔다. 단원은 그중 2000전으로 매화를 사고, 800전으로는 술을 사 친구들과 매화를 즐기며 대작했다. ‘매화음’(梅花飮)이라는 이름의 술자리였다. 결국 남은 돈은 200전뿐이었는데, 이걸로 쌀과 장작을 사 집에 들였으나 하루 땟거리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중인(中人, 양반과 평민의 중간 계급) 출신인 단원의 신분 상승 욕구도 정진의 발판이었던 것 같은데.
“선비가 되고 싶은 마음, 선비정신의 정상에 선 삶을 갈망하며 끝없이 노력했다. 말년에 그린 ‘포의풍류도’에 이와 같은 지향이 드러난다. 문방사우와 악기 등 갖가지 기물과 선비의 모습 등을 그린 작품이다.”
‘포의풍류도’에는 이런 화제를 붙였다. ‘종이로 만든 창과 흙벽으로 된 집에 살지만, 평생토록 벼슬하지 않고 시가나 읊조리며 살고자 한다.’ 단원의 유토피아가 구현된 그림이다. 그러나 정작 그의 말년은 고단했다.
“정조가 별세하면서 단원의 고난이 시작됐다. 아들의 월사금도 내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으니까. 그러나 선비다운 태도는 끝까지 지니고 살았다. 이게 단원의 빛나는 정신이지 않을까?”
섬이니까 늘 감싸주는 바다가 있다. 마을마다 바람막이처럼 산이 든든하다. 너른 평야는 풍요한 사계절을 보여준다. 긴 역사를 품은 유적과 숨 쉬는 자연의 강화 섬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거길 걷기만 해도 이름이 붙는 여행길이 반기는 곳, 강화 나들길이다.
강화나들길은 20개 코스가 있다. 여행자들을 위한 각 코스별 특색이 담긴 도보여행 길을 걷는 맛은 가히 중독이다. 무엇 하나 지루할 틈 없다. 코스마다 오랜 시간이 담긴 자연 속으로 사람이 걸어간다. 지형상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던 돈대와 유구한 역사 이야기, 고인돌이나 옛 건축물, 갯벌 위로 저어새가 나는 생태 이야기, 들녘의 바람길 따라 해가 지는 포구마을까지 이 땅의 멋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걸을 수 있는 도보여행 길이 펼쳐진다.
가을이다. 이번에는 강화나들길 16코스인 서해황금들녘길이다. 가을 길이라면 누렇게 곡식이 익어가고 갈대숲이 일렁이고 온 누리에 뿌려지는 가을 햇살과 기왕이면 시원한 바닷바람까지 불어주는 곳을 떠올려 본다. 그런 곳이 있을까 싶지만 이곳 서해황금들녘길이 가을 길로 딱 맞춤 코스다. 걸으며 강화 스탬프 투어를 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course16. 서해황금들녘길 -창후리 선착장- 망월돈대- 계룡 돈대- 용두레 마을- 황청 저수지- 망양 돈대- 외포 여객터미널 - 거리 13.5km / 소요시간 대략 4시간 / 난이도: 하
가을 하늘 아래 청정자연, 창후리 포구의 힐링
창후리 포구 가까이 갈수록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갯내음이 반긴다. 예전엔 강화의 교동섬을 가려면 이곳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이제는 2014년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왕래가 편리해졌지만, 창후리 앞바다가 삶의 터전이던 주민들에겐 뱃길이 끊겨 상권의 하락으로 이어진 것이다. 인적이 뜸해진 창후리 작은 포구엔 가을을 맞아 가게마다 갓 잡아 쏟아낸 생새우가 산더미였고 소금에 버무리는 풍경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다. 반쯤 물이 빠진 한적한 앞바다에서는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의 뒷모습만으로도 여유롭다.
황금빛 너른 들 따라 망월돈대와 계룡 돈대
가을 들녘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는 길이 눈앞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다. 넓디넓은 강화 들판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망월돈대와 계룡 돈대가 자리 잡았는데 그 길 끄트머리에 망월돈대가 있다. 하점면의 망월돈대는 드넓은 망월 평야 속에 놓여있어서 찾아가는 길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사실 망월 평야는 애초엔 바다였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 천도가 이루어졌고 갑작스러운 이주로 늘어난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바다를 메우기 시작했다. 망월 평야 역시 간척을 한 땅이다.
황금들녘을 마음껏 누리며 지나다 보면 가끔씩 도보여행자들이 좀머 씨처럼 묵묵히 걷는 걸 본다. 어쩌다 그 사이로 라이딩족들이 휙휙 지나가기도 한다. 논 옆으로 드문드문 정미소나 미곡창고와 같은 커다란 건물이 들녘의 풍경으로 한 몫 한다. 아예 들판에서 바로 탈곡을 하고 도정을 하느라 분주히 기계가 돌아가는 걸 볼 수도 있다. 강화의 너른 들판에서 밥맛 좋기로 이름난 강화 섬쌀이 이렇게 생산되는 것이었다.
망월돈대는 들판의 둑 옆으로 자리 잡았다. 대부분의 돈대가 약간의 높이가 있는 해안가의 언덕쯤에 놓인 것과는 달리 갯가 낮은 지역에 설치되었다. 외적이 수로를 타고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방비책이다.
가을에 망월돈대에 가면 강화의 가을을 모두 맛볼 수 있다. 들판은 물론이고 천혜의 갯벌이 어찌나 고스란한지. 그 갯벌 위로 꽃처럼 자라난 염생식물이 붉게 퍼져있다. 갈대와 가을꽃으로 뒤덮인 한적한 그 제방으론 도보 여행자들이 서너 명 걸어오는 게 보인다. 돈대 좌우로 만리장성이라 불리는 둑은 강화 나들길 16코스인 창후리 선착장과 황청리 용두레 마을로 이어진다.
멀지 않은 곳의 계룡 돈대도 들녘에 위치해 있다. 계룡 돈대는 망월 평야의 독립된 고지 위에 있어서 전망이 좋다. 현재 강화도에는 53개소의 돈대가 남아있는데 계룡 돈대는 조선 숙종 때 설치된 구조물이다. 돈대 위에 서면 양쪽으로 바다와 평야가 동시에 눈에 들어오는 조망이다. 바다에서 작업하는 어민의 모습과 갯벌 위 군락지를 이루어 피어난 붉게 물든 칠면초, 서해의 가을 풍경이 잔잔하고 평화롭다. 이곳에서 조금 전 망월돈대에서 만났던 일행들을 또 만났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인사는 즐겁다. 황금 들녘은 끝없고 길가에 지천으로 피어난 갈대와 들꽃은 반짝이는 가을볕에 더없이 예쁘다.
호젓한 마을에 잠기다, 용두레마을과 황청 저수지
할아버지들의 구수한 전승민요 용두레질 노랫가락이 들녘으로 퍼지고 예부터 맑은 물이 흘러 큰 인물이 난다는 용두레 마을, 주변으로 석모도와 서해가 보인다. 마을에서 보는 노을이 일품인 마을이다. 들판의 농로엔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몇 마리 학이 이삭을 쪼고 있다.
곧 이어지는 내가면의 황청 저수지는 낚시터로 조성되어 짜릿한 손맛을 즐기는 강태공들을 위한 좌대가 즐비하다. 깊은 산과 노송들로 아늑한 저수지 제방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을과 들판이 고즈넉하다.
언덕 위 숲 속 망양 돈대와 외포항의 갯내음
이제 강화나들길 16코스 서해황금들녘의 막바지다. 외포항을 내려다보는 곳에 세워진 망양 돈대는 고려 삼별초와 인연이 깊다. 역사적으로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를 예속화하려는 몽고의 정책과 종속적 위치로 특권을 유지하려던 일파들에게 항거한 병사들의 항쟁이다. 결국 진도로 떠나가는 것은 쫓겨가는 길이었고 거기서 다시 제주로 떠나면서 항쟁의 불꽃은 꺼져만 갔다. 그렇게 삼별초가 떠났던 외포항에 400년이 넘어서 들어선 돈대가 망양 돈대다.
망양 돈대 오르는 길에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라고 새겨진 삼별초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뒤에는 비석을 세운 취지가 새겨져 있다. 그 옆으로 제주와 진도를 상징하는 돌하르방과 진돗개 조형물이 우뚝하다. 진도군이 삼별초 호국 항몽의 역사를 바탕으로 자매결연을 맺고 진도군민이 진돗개상을 기증했다.
유허비 뒤편 경사진 언덕길을 올라가면 정사각형에 가까운 널찍한 망양 돈대가 숲에 둘러싸여 있다. 이제 외침의 불안 따윈 없지만 역사적 의의를 알게 하는 돈대와 강화나들길의 의미를 이렇게라도 되새겨 본다. 그 옛날 삼별초가 출항했던 물 빠진 앞바다에 갈매기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돈대 저편 외포항 바닷가 마을엔 오늘을 살고 있는 여행자들이 오간다. 선선한 가을을 맞아 해산물과 젓갈을 찾는 이들로 외포리 수산물 직판장이 분주한 모습이다.
새소리 바람 소리를 들으며 들녘을 걷고 살아있는 갯벌을 곁에 둔 생태마을을 지났다. 가끔씩 바다와 논둑 사이 풀숲에 앉아 몸과 마음을 열고 자연과 소통을 하던 한나절, 강화의 자연이 나를 보듬어주고 역사가 말을 건네 오던 시간들. 오롯하게 강화를 만끽할 수 있는 하루다. 창후리 여객터미널부터 외포 여객터미널에 이르는 비순환형 강화나들길 16코스 서해황금들녘길의 종료 스탬프를 찍는다.
새파란 가을 하늘 아래 녹색 공원이 있고, 호수가 있고, 산책로가 있다. 안산시 외곽 개활지에 있는 화랑유원지다. 시월 한낮의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산책 삼아 한가하게 거니는 이들이 많다. 이름은 유원지지만 왁자한 분위기가 아니라서 안락하다. 경기도미술관은 화랑유원지 안에 있다. 자리 한번 기차게 잘 잡았다. 풍경과 산책과 미술품 감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미술관이라니. 접근성이 매우 뛰어난 입지이기도 하다.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미술관 관람의 목적을 호주머니에 담았을지도 모른다.
미술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미술관 보기를 소가 닭 보듯 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소란스러운 세상을 생동감 넘치는 감성으로 수용하는 눈을 얻을 수 있는 게 미술관이다. 하지만 따분하고 난해하다는 선입견으로 외면한다. 미술관 운영자들은 이런 현실이 야속하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의 관심과 호감을 살 수 있을까. 오나가나 골똘히 고민하는 문제가 그렇다.
얼마 전에 종료됐지만, 경기도미술관을 찾아간 날엔 ‘미술관의 입구: 생태통로’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는 고민의 한 결과물이다. 미술관의 진입장벽을 낮춰 관람객을 불러들일 방법을 모색해 꾸린 기획전이니까. 유원지를 가로지르는 통행로이기도 한 미술관 야외 길에 설치작품 다수를 전시했다. 하나같이 쉽고 재미있었다. 미술은 어렵다는 통념이 오해에 불과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미술이 지닌 위계와 경계를 철거해 관람객들을 포용하고자 했다. 사람들에게 한결 친절하고 살갑게 다가가고자 하는 미술관 측의 선한 의도가 완연해 인상적이었다. 환경 악화로 고립된 동물들의 활로로 쓰이는 ‘생태통로’처럼, 외부 전시물 전체가 공감과 소통의 가교로 기능하고 있었다.
경기도미술관은 2006년 경기도가 설립했다. 운영은 경기문화재단이 맡았다. 공립미술관답게 건물 규모부터 크고 훤칠하다. 안산시에 사는 미술 애호가들은 언제든 찾아가 무료로 손쉽게 예술을 즐길 수 있는 환경 형성에 반색했겠다. 나는 경기도미술관에 관한 작은 기억 하나를 가지고 있다. 이 미술관은 세월호 침몰 때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안산 단원고와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한결 절절한 애도 분위기에 이끌린 건 그래서였을까. 세월호 2주기인 2016년 4월, 경기도미술관 측은 희생자들을 추념하는 ‘사월의 동행’ 전을 열었다.
당시 정치권에선 세월호 사고 원인 규명 문제 등을 놓고 두꺼비씨름을 하고 있었다. 사립미술관도 아닌 공립미술관이 앞장서서 추모 전람회를 들고 나서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문학계에서는 추모시가, 음악계에서는 추모곡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술계의 반응은 상대적으로 미지근하던 때였다. 따라서 경기도미술관의 추념 미술전이 야기한 반향이 작지 않았다. 햐! 미술관이 진정 아름다운 레퀴엠을 헌정했구나! ‘사월의 동행’ 전소식을 듣고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눈앞에 있는 현상과 형상을 넘어 무한으로 달려가는 게 예술이다. 그러나 현실의 거대한 아픔과 슬픔에 무디다면? 눈치를 보고 공기만 살핀다면? 그건 예술이 아니라 정치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사월의 동행’전은 예술의 역할이 무엇인지 새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전람회이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작가들은 무엇을 표현할 것인지, 세상에 만연한 모순과 고통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졌던 셈이다.
유명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해
미술관 건물 입구로 다가가자 최정화의 설치작품 ‘꽃꽂이’가 눈길을 잡아당긴다. 플라스틱으로 꽃들과 열매를 만들어 설치한 작품이다. 원색의 붉은 인조 꽃떨기가 밤에 쓴 성급한 연애편지처럼 격정적이라 강렬하다. 최정화는 한국에서 요즘 가장 바쁜 화가다. 자칭 ‘설치작품으로 설치는 사람’이다. 그는 플라스틱 폐품 등 ‘눈부시게 하찮은 것들’을 모아 이를테면 꽃처럼 특별할 것 없는 외적 형상을 조형한다. 플라톤식으로 말하면 ‘저급한 모방’이다. 그러나 대중은 그의 메시지를 지체 없이 수신한다. 최정화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가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정말 그럴까? 플라스틱도 제2의 자연 아닐까?” 그는 아까 얘기한 세월호 추념 전시회에선 10m 높이의 대형 설치작품 ‘검은 꽃’을 선보였다. 공기주입기로 작품에 공기를 넣어 꽃잎이 피었다 졌다 반복하게 해 세월호 희생자들의 부활을 기원했다.
먼 과거에 경기도미술관 일대는 바다였다. 이후 바닷물을 밀어낸 간척지였다. 지금도 호수가 있지만 원래 물이 머문 자리였던 것. 이와 같은 역사성과 장소성에 착안해 물 공간을 디자인 요소의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설정하고 건축 설계를 했다. 미술관의 남쪽과 동쪽 면에 사각의 대형 수조를 만들어 물을 채움으로써 저만치에 있는 호수 경관과 연계성을 갖도록 했다. 나아가 건물을 통째 물 위에 뜬 배로 간주하고 심벌을 입혔다. 거대한 철골 프레임에 유리판을 끼워 돛대 형상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예술을 싣고 삶의 대양을 항해하는 중?
국내 미술관 가운데 거의 최초로 시도된 자동 개폐식 천창(天窓) 시스템도 비범하다. 전시실에 자연광을 뿌리기 위한 채광 장치다.
설계자는 프랑스의 유명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다. 일찍이 30대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설계해 세계 건축계에 표나게 데뷔한 인물이다. 국내에도 이미 이름난 사람이다. 경기도미술관 건물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는 건축에 자연 요소를 적극 융합한다. 세련된 기술로 추상적인 건축 언어를 발신한다.
지하 공간으로 건축을 끌어들인 데다 ‘빛의 계곡’까지 구현한 ‘이화여대 캠퍼스센터’(ECC)는 세계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2021년에 착공한 지하 건물 ‘영동대교 광역복합환승센터’도 페로의 작품인데, 태양광을 흡수해 반사하는 초대형 라이트 빔을 쏴 지하 깊은 곳까지 자연광을 배급하는 시스템이라니 흥미롭다.
전시 공간은 2층에 있다. 방문 당시 ‘당신의 가장 찬란한 순간’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디지털 문명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욕망을 무한 소비하는 풍속을 돌아보게 하는 전시회다. 경기도미술관의 컬렉션 중에 ‘감각적인 작품’ 22점을 골라 선보이는 ‘소장품으로 움직이기’전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재미있기론 지구 곳곳에 이름을 알린 강익중의 대형 벽화 ‘오만의 창, 미래의 벽’이다. 미술관 1, 2층 벽면 한쪽을 통째 점유한 가로 72m, 세로 10m 크기의 대형 벽화다. 전국의 어린이 5만 명이 3×3인치짜리 나무판에 그린 그림 5만 점을 모둠으로 엮은 대작이다. 강익중은 뉴욕에서 노점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습작을 했다. 퇴근길 지하철이 유일한 작업실이었으며, 지하철에서의 짧은 이동시간 중에 그림을 한 점씩 그렸다. 그렇게 해서 강익중표 ‘3×3인치 미니 캔버스 작품’이 나오게 됐다. 그는 5만 어린이들의 작은 그림들이 모여 뿜는 웅장한 에너지에 심취했나? 동어 반복적인 벽화 작업을 연달아 해왔다. 작은 그림들이, 작은 꿈들이 모여 삼라만상과 우주를 이루는 장관을 보라! 강익중의 메시지가 그렇다. 그는 백남준이 제자로 인정한 유일한 화가다. 명성과 감흥은 겉돌지 않는다.
“제게 주어진 숙제를 다 하고 유튜브를 운영하는 지금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 같아요.” ‘최초의 대법관 출신 유튜버’로 유명한 박일환(71) 변호사는 40년 넘게 법조인의 삶을 살고 있다. 그 사이 직업에는 변화가 있었다. 판사에서 대법관을 거쳐 현재는 변호사 겸 유튜버로 활동 중이다. 삶에서 법조인이었던 시간이 아니었던 시간보다 더 긴데도 여전히 법을 사랑하는 그를 만나봤다.
1973년 제15회 사법시험에 합격, 1978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1998년 특허법원 부장판사, 2003~2005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2005년 제주지방법원장, 2005~2006년 서울서부지방법원장, 2006~2012년 대법원 대법관.
박일환 변호사가 법조인이 됐을 당시는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동네나 모교에 축하 현수막이 걸리던 때였다. 현재는 로스쿨도 생기고 많은 변호사가 양성되고 있다. 이에 대해 박일환 변호사는 “장점이 많아졌다고 생각한다. 특허 담당 변호사, 등기 전문 변호사 등 전문 분야를 가진 변호사가 많아지고 있다”라고 짚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법조인도 많아졌고, 중요한 법도 달라지고 있다. 박일환 변호사의 법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대한민국의 역사가 보인다. 이는 그가 지금까지도 꾸준히 법 공부를 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는 통찰력을 지녔기 때문일 터. 현재 박일환 변호사가 유튜버로 활동하는 것도 시대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법이라는 것이 지루할 틈이 없어요. 옛날에 있었던 사건은 없어지고 새로운 사건이 계속 나오니 공부를 계속해야 해요. 제가 젊었을 때는 약속어음 문제, 교통사고, 산재 사고 등이 대부분이었어요. 예전에는 교통사고와 절도 사건도 굉장히 많았는데, 지금은 블랙박스와 CCTV가 있으니까 많이 줄었죠. 대신 층간 소음 같은 신종 문제가 발생하고 있죠. 또 IT 관련 저작권 사건들도 많이 일어나고요.”
법과 함께한 35년
경상북도 군위군 출신인 박일환 변호사는 고등학생 때 법조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그때는 1960년대니 직업이 별로 다양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유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법조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박 변호사는 스물세 살의 이른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대학 동기들 중에서 시험에 빨리 합격한 편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1970년대 후반이 되면서 회사가 많이 생겼는데 종합상사가 특히 인기였다. 동기들 대부분은 회사에 취직했고, 결국 법조인이 된 사람은 20% 정도밖에 안 된다”고 덧붙였다.
박일환 변호사는 연수를 받고 군법무관으로 근무한 뒤 1978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그때부터 판사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앞서 말했듯이 화려한 이력을 남겼다. 그리고 ‘이왕 법원에 온 것 방점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대법관에 지원했다.
대법관은 최고법원인 대법원의 법관을 말한다.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며, 대통령이 임명한다.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 특히 대법관은 청문회도 하는데, 박일환 변호사는 탈세·위장전입·표절 등 문제되는 것이 전혀 없었다. 더불어 현재 박 변호사의 유튜브 채널에서도 악플을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다. ‘최초의 대법관 출신 유튜버’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의 채널은 댓글 청정 구역을 유지하고 있다.
박일환 변호사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대법관을 지냈다. 2009년부터 2011년에는 법원행정처장도 겸임했다. 그 시기를 회상하며 그는 “1년 365일 계속 일해야 한다. 판결문, 기록물 등 봐야 할 양이 매우 많다. 대법관들은 병이 많이 생긴다”고 토로했다. 대법관으로서 느낀 책임감과 부담감이 동시에 전해졌다.
현재 대법원은 상고허가제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 대법원에 사건이 과도하게 접수돼 적체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상고심에서 다툴 가치가 있는 사건은 선별한다는 취지다. 박 변호사는 “사실 대법원에서는 심판만 하고 결론을 내리는데 변론을 하지 않는 것이 제일 아쉽다”면서 상고허가제 도입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현재 대법원에서 처리하는 사건이 1년에 2만 건 정도라고 해요. 아무리 우수한 사람이라도 하루에 10건 처리하기란 힘든 일이죠. 미국도 적체가 많아서 상고허가제를 도입했어요. 1년에 딱 100건 정도만 대법원에서 맡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상고허가제를 도입해 중요한 사건을 맡고 변론도 하게 되면 재판의 질이 올라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35년을 법조인으로 살면서 수많은 판결을 내린 박일환 변호사.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무엇일까. 그의 대표적인 판결로는 ‘소리바다’의 저작권 침해 책임을 인정한 것과 ‘초코파이’ 상표와 관련해 어느 회사라도 사용할 수 있다는 판결이 꼽힌다. 또 하나 제주도지사 무죄 판결이 있는데, 박 변호사는 이를 언급했다.
“2007년 김태환 전 제주도지사에게 무죄를 판결하며 압수수색 과정에서 증거가 위법하게 수집됐다면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는 ‘위법수집 증거배제 원칙’을 적용했죠. 요즘도 그 판결이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디지털 정보를 수집할 때나 포렌식을 할 때 본인 확인 절차 없이 하면 위조가 가능하고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역할을 하고 있죠.”
유튜버로 인생 제2막
박일환 변호사는 퇴직 후 약 1년의 짧은 휴식기를 갖고 2013년 법무법인 바른의 고문 변호사가 됐다. 왜 변호사를 선택했냐고 묻자 “나이가 60세 넘었는데 새로운 걸 배워서 할 수도 없고,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더불어 지금은 판사 때처럼 치열하게 일하지 않는다며 “지금은 일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이 상태로 있는 것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2018년 박일환 변호사는 딸의 권유로 유튜브를 시작했다. 유튜브 채널명은 ‘차산선생법률상식’. 과거 할아버지가 지어준 호로, 한시에 나온 표현인데 ‘저 산’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박일환 변호사가 친근하게 법에 대해 말하는 영상이 쌓여가자 구독자 또한 점점 늘어났다. 2020년에는 구독자 10만 명을 달성해 실버 버튼을 받았다.
처음에는 영상 촬영을 어떻게 해야 좋은지 전혀 몰랐다. 무작정 휴대폰을 앞에 두고 영상 촬영을 했고, 시간이 지난 지금은 조금 익숙해지고 있다. 이제는 좋은 각도, 좋은 배경 등이 눈에 들어온다. 자막을 입히는 편집은 금융업계에서 일하는 딸이 맡아 하고 있다. 그는 “저도 딸이 일을 하는 데 도움을 많이 준다. 상부상조하는 셈이다. 딸과 대화도 많이 하게 되고 더 가까워진 것 같다”면서 웃었다.
박일환 변호사는 자신의 딸처럼 법을 모르는 사람도 알기 쉽게 법을 알려주겠다는 마음으로 영상을 찍어 올리고 있다. 일종의 사회공헌 활동이다. 최신 이슈나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조명하고 관련 법을 알려주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주제를 정하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구독자 대부분은 20·30대로 법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제 유튜브에서 특히 많이 본 영상은 ‘농담으로 한 ‘회사 그만둘래’ 발언 후 퇴직 발령?’이에요. 실제로 회사에서 농담으로 퇴사한다고 했다가 퇴직 발령을 받은 사건을 다룬 것인데, 사람들이 궁금해할 이야기죠. 또 부모의 빚을 자식이 갚아야 하느냐, 인터넷상 명예훼손은 어디까지인가 등의 영상도 많이 보셨더라고요. 요즘 사람들의 관심사를 알 수 있고, 반응이 좋으면 뿌듯함을 느낍니다.”
박일환 변호사는 60세가 넘어 70세인 현재까지도 일하고, 심지어 유튜버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어쨌든 자기 직업에 전문성을 갖고 30년 넘게 일하다 보니 이런 기회도 온 것 같다”고 자평했다.
박 변호사는 은퇴 후 무료한 삶을 사는 지인들에게 유튜버 활동을 추천한다. 나름대로 신념도 있다. 유튜버 활동을 일종의 창작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유튜브를 통해 즐겁고 재밌게 살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업에서 완전히 은퇴하면 전문 유튜버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일반 회사에 다닌 지인들을 보면 60세까지 일한 사람이 거의 없어요. 보통 55세까지 일했죠. 그 사람들은 은퇴한 지 벌써 17년이나 지났거든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교육 기간을 합쳐봤자 16년인데 그에 비하면 17년이라는 세월이 얼마나 길어요. 그런데 앞으로 또 17년은 더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게 되죠. 한 80%는 그냥 건강하게 살자를 최대 목표로 두고 살아요. 어떤 새로운 도전을 해서 수익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10%도 안 되죠.”
박일환 변호사를 보면서 진짜 어른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단지 똑똑해서, 법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사람 자체에서 기품이 느껴졌다. 법과 함께 한평생 살아왔지만 사실 법이 필요 없는 사람이 아닐까 한다.
“헌법에서 ‘인간은 존엄하다’라는 조항을 가장 좋아합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목숨 내걸고 싸워라’, ‘충신이 되어라’라고 말하는데, 사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이념이 인간보다 먼저일 수는 없는 거거든요. 저는 제 인생의 목표는 달성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죽을 때 편안하게 잘 죽는 일만 남았죠.”
간밤에 내린 비로 배롱나무꽃이 많이 떨어졌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꽃을 보기란 참 애매하다고는 하나 배롱나무는 가을의 문턱을 넘었어도 붉은 꽃을 보여준다. 요즘 하는 말로 핫핑크 색감이다. 땡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어나기 시작해서 가을까지 피고 지는 식물, 강한 생명력으로 더위에 지친 이들에게 화려한 꽃 호강을 선사한다. 배롱나무꽃을 보려거든 서천이다. 서천의 해안도로를 달리면 배롱나무꽃 길이 우리를 맞아주고 전통 건축과 어우러진 꽃 무리가 운치를 더한다.
빗소리는 주룩주룩 빈 당에 가득한데 / 낮 꿈을 막 깨고 나서 붓을 바삐 찾노니 / 마음이 맑아 절로 사사로운 뜻 없는지라 / 더위 한 번 식혀준 은혜 하늘에 감사하네.
고려 삼은 중 한 분인 목은(牧隱) 이색 선생의 시를 찾아보았다. 충남 서천의 문헌서원은 목은 이색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은 곳이다. 기록에 따르면 창건 연대는 1594년이고 당시 이름은 효정사였다. 그 후 정유재란으로 소진되었으나 이전하여 광해군 때 문헌(文獻)이라 사액받았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고종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졌으나 뜻있는 유림들이 복설하였고, 문헌서원 역사마을 조성사업에 따라 현재에 이르렀다.
배롱나무꽃과 함께하는 서원의 품격
서천 솔바람길을 따라 이색 선생 동상이 보이는 정원이 평온하다. 서원의 홍살문을 넘으면 연지 위 경현루의 반영이 잔잔히 흔들린다. 예스러움이 은은한 연못은 배우 박보검이나 유아인이 드라마와 영화를 촬영하던 곳이기도 하다.
널찍한 잔디밭을 걸어 외삼문인 진수문과 정면의 진수당에 들면 양쪽으로 유생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 잡고 있다. 문헌서원(文獻書院)이라는 현판은 진수당 마루 안쪽으로 걸려 있어 들여다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뒤편 돌계단으로 오르면 떡하니 장판각이 중심 잡듯 위치한다.
담장 따라 효정사, 교육관, 영모재, 그 길 안으로 목은 선생의 영정을 보관하는 영당(影堂)을 따로 앉혀 아늑하다. 이색의 선비 정신과 성리학, 그리고 풍류가 깃든 기린산 중턱의 묘소를 바라보며 세월을 거슬러 보는 시간이다. 산수 좋은 수려한 자연 속을 산책하다 보면 옛 어른의 멋과 정취, 정신과 자연관의 교감에 빠진다.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힐링 여행지다. 숲이 감싼 산줄기 뒤편으로 선비의 기개를 닮은 듯 쭉쭉 뻗어 울창한 소나무가 든든하다.
바로 영당 뒤편 노거수 두 그루에서 해마다 여름이면 배롱나무꽃을 풍성하게 피워 올린다. 전통 건축의 지붕 위로 진분홍 배롱나무꽃 무리가 몽글몽글하다. 지난밤의 비바람으로 이미 많은 꽃이 떨어졌지만 배롱나무의 강한 생명력은 계속 이어진다. 아무리 꽃이 붉어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대단한 권력 또한 1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부귀라는 꽃말의 배롱나무꽃은 7~9월까지 계속 꽃을 피워서 백일홍 나무라고도 불린다. 무려 석 달 열흘 동안 피어나니 비바람에 꽃을 좀 떨구었기로서니 그저 슬플 일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지지대에 의지한 채 노구를 딛고 서서 해마다 꽃을 피워내는 문헌서원의 배롱나무를 본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충분하다.
문헌서원 옆 전통 한옥 숙소
이렇게 고즈넉한 곳에 짐을 풀고 하루나 이틀쯤 쉬며 돌아보는 소도시 여행은 휴식이 된다. 하룻밤 묵어갈 숙소로 문헌서원 전통호텔이 서원 입구에 있다. 정부와 서천군의 전통역사마을 조성사업계획에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지은 우리나라 고유의 한옥마을 형태다. 나무를 이용한 서까래와 온돌, 돌을 이용한 기단, 문풍지가 정겨운 두 겹 곁문을 열면 친환경자연 속에 스미듯 지은 옛 가옥의 따스함이 다가온다. 안온하게 스며든 햇살을 받으며 툇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거나 가만히 쉴 수 있는 시간은 가히 ‘득템’이다.
한옥 스테이를 할 경우 미리 예약하면 식사도 가능하다. 문헌 전통 밥상은 모두 지역 제철 농수산물을 사용해 만든 신토불이 건강식이다. 상쾌한 새벽 산책 후 한옥 마당을 내다보며 받는 소박하고 정갈한 아침 밥상은 추천할 만하다.
한산 모시와 소곡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산 모시 짜기. 전통의 맥을 잇고자 서천에서는 모시풀을 처음 발견한 건지산 기슭에 한산모시관을 개관했다. 모시관 담장 아래 푸릇하게 자라고 있는 모시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전시관에서 모시의 모든 것을 관람한 후, 모시 체험과 중요무형문화재 전통직조기능 보유자의 시연 공방도 볼 수 있다. 모시 짜는 여인상이 있는 정원 아래 너른 마당에서는 여행자들이 투호 던지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옛날 백제 유민이 나라를 잃고 한을 달래기 위해 빚어 마신 백제 궁중 술이라고 전하는 한산 소곡주. 보통 추수가 끝난 가을에 빚어서 100일 동안 땅에 묻는다. 술이 독해서 며느리가 젓가락으로 찍어 맛보면 취해서 일어나지 못하고 앉아서 엉금엉금 긴다는 일화는 물론, 조선 시대에 과거 보러 가던 선비가 한산에서 쉬다가 술맛에 눌러앉아 과거 시험장에 가지 못했다 하여 앉은뱅이 술이라고도 전해 내려오는 소곡주다. 취해도 좋을 가을이다.
솔바람 숲 맥문동과 서해 갯벌
다시 꽃구경, 서천의 장항 쪽으로 달리다 보면 장항 송림 산림욕장이 나타난다. 방풍림만으로도 압도한다. 수령 50년 이상 된 해송이 하늘을 가려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여름이 끝날 무렵이면 해송 아래 온통 보랏빛 맥문동 물결이다. 이곳에 오토캠핑장이 있어서 공기 밀도 걱정 없이 휴식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유롭다.
해솔밭 산책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기벌포 장항 스카이워크 전망대가 바다 위로 우뚝하다. 15m 높은 상공에서 시원한 바닷바람 맞으며 상쾌한 시간 속에 서는 것은 멋진 일이다. 이곳 이름이 기벌포 해전 전망대인데 백제의 마지막 해전지였다. 발아래로 해송림이 있고 눈앞에는 서천 바다 갯벌이 있다. 멀리 서해 근대산업의 중흥을 이끈 장항제련소도 보인다.
레트로 장항 골목 여행과 서천 맛집
옛날 기찻길을 지나 장항 골목 여행의 묘미도 쏠쏠하다. 편하게 레트로 흐름대로 놀거나 시대극처럼 양산 예쁘게 쓰고 느린 감성으로 즐기는 여행도 어울릴 듯한 곳이다.
장항에 맛집들이 즐비한 6080 음식 골목 맛나로(路). 특히 홍어탕과 아귀찜이나 탕으로 유명한 식당이 몇 군데 있으니 그중에서 끌리는 곳으로 들어가면 바로 맛집이다. 탕에 향긋한 미나리가 푸짐하다. 식사 후 맛나로 옆 골목을 걷노라면 레트로 분위기가 솔솔 난다. 라테 위에 달고나 듬뿍 얹은 달고나 라테를 먹을 수 있는 명물 카페도 빠뜨릴 수 없다. 때에 따라 체험도 가능하다. 지역의 젊은 청년들이 지역사회 살리기를 위한 건강한 일꾼 역할을 자처했다.
서해 바다를 바라보며 즐길 수 있는 전통 횟집 또한 장항 부근에 많다. 매일 공급되는 제철 해산물을 이용해 고급스러운 코스 요리를 합리적인 가격에 맛볼 수 있다. 소박한 물회 한 상으로도 바닷가 식사를 만끽할 수 있다. 이제 홍원항 전어가 제철이다.
니스에 머물면서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 중에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모나코와 칸이 있다. 버스나 지하철로 한 시간 이내면 모두 가능한 거리여서 누구나 당연히 여행 코스에 넣지 않을 수 없다. 꼭 니스가 아니어도 근교의 생폴드방스나 에즈빌리지에서도 연결되는 교통편이 있으니까 알뜰한 여행으로 즐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니스 일주일 살기가 끝나간다.
◇모나코(Monaco)
모나코에 대해서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밖에 아는 게 없다고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부터 그레이스켈리의 모나코에 간다는 기분이다. 모나코행 버스 타는 곳에 기다리는 줄이 의외로 길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30분쯤 달린 버스 차창 밖으로 도시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마치 서울에서 시외버스 타고 가까운 수도권 도시 어드메쯤 온 듯하다. 니스 역에서 기차를 타도 30분 남짓 가까우니 잠깐 교외 나들이 나온 듯하다. 그러나 관광 국가답게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움과 넘치는 볼거리가 금방 압도한다.
여긴 미국의 영화배우에서 모나코의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의 모나코다. 모나코는 국경선 길이 4.4㎞, 면적 1.95㎢., 로마 바티칸시티(0.44㎢)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 소국이다. 1297년 1월 8일에 독립한 나라로 프랑스 남동부 끝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있다.
버스에서 내리면 몬테카를로가 가깝다고 했지만 일단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몬테카를로...”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환하게 웃는 얼굴로 “저쪽으로~”라고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킨다. 이들의 당연한 손짓이 이 작은 나라의 주 수입원이 국제 중계무역과 카지노 산업이라더니 이렇게 체감시킨다. 몬테카를로로 가는 길에 있는 열대 정원 Jardin Exotique에는 주민인듯한 사람들이 산책하거나 벤치에 앉아 휴식 중인 모습이다. 몇 걸음쯤 더 걸어가니 오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카지노 몬테카를로(Casino De Monte-Carlo)가 보인다. 그 옆의 노천카페엔 모나코를 즐기는 모습의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게 뭐라고 무수한 저들은 이곳에 모여드는 걸까.
도박을 하는 건축물이라고 하기엔 고풍스럽고 우아하다. 파리의 오페라 극장을 설계했던 샤를 가르니에가 설계한 덕분에 고급 사교장 느낌이다. 카지노 앞에는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고급 자동차 전시장처럼 번쩍거리는 차들이 잔뜩 주차되어 있다. 이곳 카지노에서 나오는 수익금은 모두 국가의 재정이 되고 중요한 관광산업으로 관리된다. 세계적인 부호들이 오가는 곳이다 보니 럭셔리하고 화려함이 더해진다. 아이러니한 점은 모나코 국왕에 의해 모나코 국민들의 도박 행위는 금지되어 있다. 또한 병역과 세금이 없는 나라다. 그래서 세금을 피해 이주해온 부자들 덕분에 유난한 사치스러움을 어디서든 볼 수 있다.
시내 전체가 관광지화되어있어서 지나가는 누구나 여행자 같아 보인다. 휴양도시인 모나코의 풍족한 삶을 보여주듯 카지노 주변엔 일반 가게처럼 쇼핑센터나 명품샵이 즐비하다. 유명 브랜드의 스포츠카가 내 옆을 계속 지나간다. 어쩐지 도박장 귀빈들의 거리로 특화된 양 요란하다. 볼거리 놀거리를 위해 만들어진 듯한 풍경이다.
우리가 태어나 세상을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또는 아프거나 뿌듯해하며 기쁘고 성내고 노력하며 산다. 그런데 그런 당연한 일상을 모르는 사람들의 놀이터에 온 느낌이다. 그런 곳을 대충 챙겨 입은 여행자의 모습으로 심드렁하게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다. 느슨하게 온 몸의 긴장을 풀고 그렇게 어슬렁거리는 맛을 즐긴다.
모나코 사람들을 먹여 살려주는 카지노였기에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 나라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 Grace Kelly뿐이다. 모나코의 유일무일한 브랜드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의 왕자 레니에 3세와 결혼하여 영화 같은 인생을 살았던 그녀다. 전설의 허리우드 여신에서 모나코의 왕비가 된 것이다. 모나코의 상징이기도 했던 그녀의 나라에 와 있다.
구시가지 언덕에 위치한 그녀가 살았던 화려한 모나코 궁전을 바라보며 살짝 가슴이 뛰기도 했다. 어릴 적 TV 명화극장에서 자주 보았던 그녀의 영화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려졌기 때문이다. 해안가의 거리에도 바닷가 미풍에도 그녀의 삶이 녹아있을 것만 같았다. 절벽의 절경에 잘 앉혀져 있는 이쁜 집들, 에흐귤르 항구에 가득하게 정박해 있는 고급 요트, 궁전과 대성당이 있는 구시가지를 지나 해양박물관도 볼거리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모나코 빌리지의 골목까지 걸어볼 수 있다면 아쉬울 게 없다. 해안가로 나와 눈앞에 펼쳐지는 도박꾼들의 화려한 요트로 가득 찬 항구를 멍하니 구경하다 보면 하나둘씩 가로등이 켜지고 지중해 저편으로 서서히 노을이 찾아온다. 어릴 적 알았던 영화배우의 나라에서 확인하듯 내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잠깐 머물다 온 ‘그레이스 켈리의 나라’ 모나코였다.
◇칸(Cannes)
일주일 동안 머물며 여유롭게 지내던 니스를 떠나는 시간이 오후 네 시다. 느슨하게 반나절 시간을 칸에서 보내고 출발하기로 했다. Nice Ville에서 Ter기차를 타고 열 정거장쯤 지나면 Cannes 기차역에 30분 만에 도착한다. 호기심과 신기함과 설렘으로 보내기 딱 좋은 30분이다. 기차 2층 칸에서 보이는 외곽의 풍경이 마치 서울을 벗어난 지하철 1호선 같다. 아침햇살이 쏟아지는 칸느역에 오가는 사람들. 긴장감이라곤 일 그램도 안 느껴지는 모습들. 여행 중엔 이런 모습을 부러워할 틈 없이 바로 전염되듯 나 역시 빠르게 긴장감 풀고 무장해제~.
지중해에서 가장 화려한 휴양도시 CANNES. 남국의 화려한 꽃과 달콤 새콤 향의 과일들이 길거리로 나오고 사람들은 어디든 마음대로 걷거나 주저앉거나 세상 편함 그 자체다. 칸느 영화제가 열리는 팔레 데 페스티벌이란 건물이 앞에 있다. 매년 5월이면 영화 축제가 열리는 곳, 세계 3대 영화제라 불리는 칸느,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 중의 하나인 Cannes 국제영화제는 우리에겐 이미 익숙하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배우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레드카펫을 밟고 들어가는 길엔 공사가 한창이다. 전도연이 영화 '밀양'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곳을 그렇게 쓰윽 한번 보며 지나간다. 올해는 박찬욱 감독이 감독상을 송강호 배우가 남우주연상도 탔다. 영화 배경 속을 걷듯 칸의 햇살 속을 걷는다. 세계적인 영화인들의 숨결을 느껴보는 시간 또한 즐겁다. 종려나무들이 즐비한 해안가에서 느긋하게 놀아보라. 해피바이러스는 이런 것이란 걸 알게 된다.
해안가로 나가보면 햇살 쏟아지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수많은 고급 휴양 요트들이 줄지어 있다. 지중해에서 가장 럭셔리하다더니 요트의 화려함이 아찔하다. 쏟아지는 태양, 짙푸른 바다가 마냥 눈부시다. 어딜 보아도 여유가 뚝뚝 떨어지는 풍경이다. 도무지 다른 세상이다. 이 도시는 사실 영국과 이탈리아를 오고 가던 유럽 사람들이 별장들을 세우고 요트들로 항구를 오고 가며 휴양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곳 역시 호텔과 카지노가 많아서 프라이빗한 휴가를 즐기거나 돈 많은 도박꾼들을 기다리는 곳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길거리 노천카페는 이미 테이블 세팅을 마쳤다. 칸느 역 주변으로 앙티브 거리(Rue d’Antibes)는 내가 보아도 알만한 명품 브랜드들이 줄줄이 있다.
프랑스 남부의 지중해 도시 칸. 도시 전체에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살에 몸을 내맡기고 카푸치노 한 잔 마신다. 지중해를 향해 앉아 그 햇살 한 번 원 없이 받아본다. 환한 태양 아래서 마음껏 누리던 사람들이 기억될 칸(Cannes)이다.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한국문화원연합회(이하 연합회)가 9월 30일 기념식을 시작으로 10월 1일까지 양일간 지역문화박람회를 연다.
킨텍스 제1전시장 그랜드볼룸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는 30일 오전 ‘한국문화원연합회 창립 60주년 기념식’으로 화려한 막을 연다. 기념식에는 연합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이동환 고양특례시장, 지방문화원 임직원 및 포상 유공자 등 400여 명이 참석했다.
기념식은 ‘대한민국 문화플랫폼’이라는 연합회의 새로운 슬로건을 중심으로 다양한 축하공연과 비전 선포, 유공자 포상 등이 진행됐다. 연합회 측은 “창립 60주년을 맞은 연합회가 향후 새로운 60주년을 준비하기 위한 참여와 공감의 장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김태웅 한국문화원연합회장은 “60주년을 맞은 지금, 지역의 축제, 지역향토문화의 수집과 보존, 지역학의 학문화, 지역주민들의 문화향유 등의 영역에서 지방문화원을 제외하고는 지역문화를 논할 수 없게 되었다”며 “이는 그간 231개 지방문화원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묵묵히 자기를 지켜온 덕분”이라고 감사를 표했다. 이어 “다가오는 60년은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방문화원이 지역문화의 등불이 될 것”이라며 “연합회가 231개 지방문화원의 확성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기념식 직후 열린 지역문화박람회는 올해 처음으로 진행되는 사업이다. ‘오래된 미래, 다시 그리는 대한민국 문화지도’를 주제로 한 박람회에서 한국문화원연합회 60주년 전시를 비롯해 다양한 전시와 체험, 공연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참관객들은 지역문화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확인할 수 있을 예정이다.
연합회는 지역문화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돕고, 지역문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가능하도록 박람회의 규격화된 부스를 없앴다. 또한 콘텐츠 분류 기준을 지역이 아닌 특정 주제로 ‘모으고, 섞고, 어우러지도록’ 융합해내 소개하는 ‘융합형 전시’를 시도했다.
총 5개의 테마로 구성된 박람회에는 지역문화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중심으로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재조명이 필요한 지역의 ‘문화인물’, 평범하지만 지역문화를 지켜내는 ‘우리 이웃들’의 모습이 담겼다.
첫 번째 테마 ‘지역문화 공공수장고’는 지역다움을 상징하는 대표 문화자원부터, 지역자원을 예술로 승화시킨 명작들을 전시한다. 관람객들로 하여금 지역문화가 변방의 문화가 아닌 우리 문화의 정통성과 예술적인 가치를 담아내고 있음을 경험케 한다.
두 번째 테마 ‘지역문화 아트마켓’은 다양한 지역자원을 모티브로 지역예술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선물’같은 문화작품들을 선보인다. 다양한 소품과 일상에서 활용 가능한 오브제를 중심으로 소비자의 구매력을 자극할 수 있는 상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세 번째 테마 ‘문화원 덕분愛’는 지방문화원의 다양한 교육, 체험 사업 결과물들을 일상적인 공간에 재배치하는 형태의 전시다. 지역정서에 기반해 다양한 세대와 예술이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지역문화의 단면을 감상할 수 있다.
네 번째 테마 ‘오물樂 조물樂’은 각 지방문화원이 진행하는 체험 프로그램들을 모아 박람회 관람객이 현장에 무료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키트형 체험 도구부터 지역을 상징하는 원형 체험물까지 관람객들의 흥미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공간이다. 울산 ‘쇠부리 불매 체험’, 원주 ‘한지 모빌 만들기’, 태안 ‘설위설경 종이 오리기’, 제주 ‘바다의 눈물 공예품 만들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이틀간 총 5회차에 걸쳐 운영된다.
다섯 번째 테마 ‘THE 한마당’은 각 지방문화원이 추천한 전통적인 지역 상징 공연과 지역에서 활동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합동공연 형태로 준비돼 있다. 부산 동래문화원의 ‘동래 학춤’, 고양문화원의 ‘대취타’, 서귀포 문화원의 ‘해녀의 바당’ 등 전통적인 공연 장르와 MZ세대 예술가의 공연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이번 기회는 지역문화나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지역문화박람회는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된다. 모든 전시, 체험, 공연관람은 무료로 참여 가능하다.
장례지도사이자 장례지도사교육원 원장을 맡고 있는 김종호 씨(67). 과거의 그는 죽음의 최전선에서 일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건축 분양 사업을 했던 김종호 원장은 1997년 IMF 직격타를 맞아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그 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영업직밖에 없었다. 김 원장은 여러 회사를 전전하면서 영업 일을 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간 곳이 상조회사였다. “장례라는 부분이 제게 참 생소했다. 장례를 치러본 적도 없었다. 영업을 하려면 장례 용어나 진행 순서를 알고 있어야 하는데 많이 힘들었다”고 그는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때 지인이 대학교에 장례학과가 있다고 추천해줬다. 이에 김 원장은 서라벌대학교 장례학과에 진학했다. 수업은 주말에 서울에서 진행됐고, 그는 2년간 공부에 매진했다.
2000년부터 장례지도사로 일하고 있는 김종호 원장. 2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며 젊은 장례지도사도 많아지고, 사회적 인식도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도 죽음에 대해 막연히 무섭게 생각했는데 일을 하면서 깨우친 바가 많다.
“예전에 친구 아버님 병문안을 간 적이 있어요. 그 병실에 어르신분들만 계셨는데 저를 기피하시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장례지도사라고 하니까 저승사자 같아 보이셨나 봐요. 웃기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죠. 그런 일도 있었는데, 점점 인식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김종호 원장은 장례지도사로 현장에 있다 보면 금세 고객과 친해진다고 했다. 3일 동안 유족과 얘기를 나누면서 함께 공감하고 슬픔을 나누는 것이다.
“3일간 고생해도 마지막에 헤어질 때 유족분들이 손을 잡아주면서 고맙다고 말씀해주실 때 큰 보람을 느껴요. 특히 젊은 미망인이나 자식을 잃은 분들의 슬픔이 큰데, 제 덕분에 다시 살아갈 희망을 품게 됐다고 말씀해주시면 울컥하죠. 저도 마음이 많이 쓰이는 분들에게는 문자를 한 번씩 보내드리곤 합니다.”
“수많은 죽음을 봤고, 수많은 고객을 만났다”는 김종호 원장. 그의 기억에 가장 남아 있는 장례 현장은 언제일까. 그는 단번에 한 가족의 이야기를 전했다. 6.25 참전용사였던 아버지는 수유리 국립묘지에 잠들어 계시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상황이었다. 생전에 어머니는 수유리에 묻힐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자식들에게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자식들은 어머니를 아버지 옆에 묻어주고 싶어 하는 상황이었다.
“자녀분들이 유골을 반으로 나눠서 반은 묘지에, 반은 바다에 뿌리면 안 되냐고 하더라고요. 우리나라는 그게 안 되거든요. 그래서 제가 수유리에 가서 상의한 끝에 방법을 찾았습니다. 묘지 옆에 구덩이를 파고 거기다 어머니의 유골을 모셨고, 비석에는 두 분의 이름을 같이 적었습니다. 가족분들이 정말 고마워하셨고, 지금도 종종 연락을 하십니다.”
김종호 원장은 고령화 사회에 장례지도사의 전망은 밝다고 짚었다. 특히 “이 일을 시작하면 그만두지 않고 오랫동안 하는 사람이 많다”면서 정년이 보장된 직업이라고 강조했다. 김 원장은 “저도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일하고 싶다”면서 각오를 다졌다.
“태어날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듯이 세상을 떠날 때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인생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장례지도사는 최후의 봉사자라고 생각하고, 그 사명감으로 일하고 있어요. 장례지도사들이 이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장례지도사를 마주하실 때 ‘고생한다’고 말씀해주시면 그분이 크게 감동하실 겁니다.”
강화도 바다가 보인다. 썰물에 쓸린 오후의 싯누런 바다가 개펄 너머에서 굼실거린다. 쏟아지는 가랑비가 따가운 양 잔등을 실룩이며 수평선엔 오선지에 매달린 음표처럼 즐거운, 점점이 흩어진 작은 섬들. 섬에 왔으니 해안도로를 달려 해변 풍경부터 눈길에 쓸어 담지 않을 수 없다. 정작 목적지는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해든뮤지움이지만 한동안 해변에서 해찰한다. 바다도 보고, 미술관도 보고. 흥취가 겹일 테니 애초 그러려 했다. 다시 말하자면 해든뮤지움은 바다를 덤으로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미술관이다.
해든뮤지움은 야트막한 야산 자락에 있다. 숲 가장자리에 있다. 그래 나무들이 내뿜는 초록이 사위에서 범람한다. 푸르기는 미술관도 마찬가지다. 너른 야외 정원 역시 초록을 흩뿌리고 있으니. 미술관 건물은 외견상 주역이 아니다. 절반 이상 지하로 스며든 건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상의 풍경은 다소 휑한 맛을 풍긴다. 그래서 좀 고즈넉하나, 사실은 군더더기 없이 시원해 첫눈에 수려하다.
이와 같은 풍광은 그저 그렇게 저절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면밀한 구상과 지향을 오롯이 구현한 결과물이니까. 설계 콘셉트 자체가 모든 구조물이 주변의 자연경관과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원래부터 있었던 자연스러운 지형을 뭉개거나 변형하는 걸 최대한 자제했다. 해든뮤지움을 보며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나오시마 섬에 지은 지중미술관을 연상하는 이들이 있다. 지하에 미술관 건물을 집어넣었다는 점에서 닮았기 때문이다. 지상으로 불쑥 솟은 건축을 할 경우 주변 풍경을 망칠 수밖에 없다. 과격한 인위로는 자연을 제압하는 결례를 범하기 마련이다. 해든뮤지움은 차라리 겸손하게 자연의 품에 안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군사용 벙커도 아닌 것이, 은밀한 마약 제조 공장도 아닌 것이 마냥 땅속에 폭 파묻힌다면 어떻게 흥미를 주겠는가? 이 미술관은 지형을 기술적으로 활용해 통유리창을 벽면 일부에 설치함으로써 숨통을 틔웠다. 유리창을 통해 빛을 끌어들여 전시장에 공급한다. 투명한 유리벽으로 외부의 숲 경관을 끌어들인다. 모르긴 몰라도 난이도 높은 건축 기법이 적용되었을 테다. 개관한 해인 2013년, 이 미술관은 한국건축가협회가 주관한 ‘올해의 건축 베스트 7’에 뽑혔다. 설계자는 건축가 배대용. 자연환경을 고려해달라는 설립자의 주문을 고스란히 반영한 설계로 예술품에 맞먹을 미술관을 귀결한 그의 변은 이렇다. “미술관의 속성을 유지하면서, 자연 파괴 없이 주변 환경에 순응하는 건물 설계에 중점을 두었다.”
경사로를 따라 지하 1층에 있는 미술관 입구로 내려간다. 출입문 앞에 로버트 인디애나의 작품 ‘HOPE’가 있다. ‘H’, ‘O’, ‘P’, ‘E’ 4개의 알파벳을 사각형 격자 모양으로 구성한 설치 작품이다. 딱히 뜯어볼 것도 없이 밋밋해 보인다. 단순한 알파벳 조형이다. 그나마 특징이 있다면 ‘O’자를 살짝 기울여 따분함을 다소 누그러뜨렸다는 점일 뿐이다. 로버트 인디애나는 이와 유사한 작품 ‘LOVE’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앤디 워홀과 함께 미국 팝아트의 거장으로 부상했다. 남들이 안 하거나 못 하는 걸 하라! 평범한 걸 비틀어 비범해 보이게 하라! 이건 팝아트의 본령이다. 인디애나는 누구나 뚝딱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작품으로, 그러나 아무도 하지 않았던 작품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영예가 온전하지는 못했다. 상업주의 작가라는 꼬리표가 세상 떠날 때까지 붙어 다녔으니까.
거울로 산야를 끌어들여
6개로 이루어진 전시장 전관에서는 ‘메타·화양연화전 :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김창겸, 이이남, 장 샤오타오 등 6인의 미디어 아티스트가 참여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준비한 기획전이다. 이 시대 한국의 미디어 아트가 매우 전위적인 행진을 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전시회이기도. 미술관 중정엔 베르나르 브네의 ‘두 개의 불확실한 선’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9년 전 개관한 이래 해든뮤지움은 일반 관람객은 물론 미술 전문가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기획전을 다수 펼쳤다. 개관전인 ‘현대미술의 거장’전은 설립자 박춘순 관장의 컬렉션을 내건 전시회였다.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이 망라돼 호응을 끌어냈다. 2018년에 치른 ‘샤갈’전 역시 대형 전시회였다. 몽환적인 색채와 비현실적 공간 구성으로 샤갈의 진품 다수를 전시해 커다란 반향을 야기했다.
이제 미술관을 나와 정원을 거닌다. 탁 트인 정원이라 저만치의 숲도, 저 위의 하늘도, 구름도, 새소리도 사뭇 가깝게 다가온다. 이 충만한 자연은 모든 진리의 압축 파일이다. 상처투성이 마음을, 초라한 생각을 어루만져주는 자비의 손길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치유의 정원? 이름이 붙어 있다. ‘미러가든’이다. 이는 해든뮤지움의 시그니처 구조물이다. 미감을 살려 배치한 초대형 거울 여러 점이 단박에 관람객의 발길을 붙들어 맨다. 여느 미술관에서 볼 수 없는 이색이다. ‘거울 셀카’의 촬영 명소다.
맑은 거울 앞으로 다가가자 누군가 거울 속에서 멈칫거린다. 바로 나 자신이다. 별것이라 생각했던 내가 별것 아닌 몰골로 거울 속에 있다. 나의 이미지를 객관화하고, 심지어 속내까지 투명하게 까발리는 거울의 불심검문에 켕길 수밖에 없다. 인간의 성찰 능력은 거울이 만들어지면서 한결 발육했을지도 모른다. 해든뮤지움은 거울 벽이 끌어들이는 자연 풍경을 보라고, 자연의 일부인 나를 보라고 거울을 조성했지만, 사람들은 대개 반짝이는 거울 앞에서 사진 찍기를 즐긴다. 행복은 그런 여흥의 언저리에 감도는 법이다.
거울 벽 앞에는 브론즈 조각 한 점이 놓여 있다. 머리와 두 팔이 잘려나간 상반신을 조형한 데다, 비스듬히 기운 품새라 처연해 보이지만 웅장한 맛을 풍긴다. 빨아들이듯 눈길을 당기는 작품이다. 폴란드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이의 ‘이카루스의 토르소’다. 이카루스는 밀랍 날개를 달고 태양 가까이 날아올랐으나 밀랍이 녹아내려 지상으로 추락한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이다. 해서 ‘이카루스의 날개’는 흔히 광활한 자유를 갈구하지만 결국은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빗댄 은유로 쓰인다.
미토라이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내 작업은 이미 만들어진 것을 재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삶의 드라마를 친숙한 형상으로 빚으려는 시도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카루스의 토르소’는 비루한 삶에 휘둘리면서도 날아보고 싶은 열망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재미있는 건, 등짝에 조형해 붙인 메두사의 머리 위에 이카루스의 날개가 자그맣게 달려 있다는 점. 메두사로부터 이렇게 페가수스가 태어난다. 페가수스는 이제 곧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를 것 같고. 숨은 그림처럼 실린 드라마가 한둘이 아니다. 해든뮤지움이 주는 재미가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