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뤄주고, 남의 추함을 이뤄주지 않으나, 소인은 이와 반대로 한다.(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
-‘논어’ 안연편
필자가 오늘 소개할 세 사람은 바로 군자(君子)가 추구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늘 자기를 살펴 고치고, 그동안 해온 업(業)을 배움과 덕으로 더욱 널리 펼치는 모습이 지극히 아름답고 숭고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된 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 어느결에 새 마음이 헌 마음이 되었습니다. 다져 먹었던 결심과 각오는 흔들리고, 마음에 새겼던 약속은 또 다른 변명과 구실을 찾느라 분주합니다. 영웅호걸 찾기 힘든 시절, 업을 이어 승화시킴으로써 세상에 나누는 여장부(女丈夫) 세 사람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 합니다.
대설 내리는 날, 구둣방에서
혹독한 한파가 몇 날 며칠 계속되더니 드디어 큰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한 날 이른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동안 미루고 미루던 남편 등산화 수선을 맡기러 평소 눈여겨보던 답십리 사거리 구둣방을 찾은 것입니다. 하필이면 대설로 천지 분간도 안 되는 날을 잡았지 뭡니까. 교차로 신호등이 바뀌기 무섭게 잰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저만치 백열등 알전구가 노란 불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휴, 다행이다. 속으로 안심하며 드르륵 가게 문을 열고 “안녕하세요, 사장님?” 인사를 건넵니다.
이곳은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구두 수선집입니다. 40년 가까이 해온 이 일의 진짜 주인은 남자 사장님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여자분이 가게에 종종 보이더니 아예 사장님 자리를 꿰찼네요.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조심스레 여쭤보았습니다.
“사장님이 바뀌셨나요? 남자 어르신은 이제 안 보이시네요. 어디 편찮으신가요?”
대답을 듣지 못해 민망해진 필자는 더는 묻지 못하고 본론을 꺼냈습니다. 등산화 바닥이 많이 망가져서 고칠 수 있는지 물어보았지요.
세상 뜬 남편 대신 업을 이어 붙이며
“한 3년 됐어요.”
낡은 신발 바닥을 잘라내고, 덧대고, 기우고, 못질로 신발 몸체와 단단히 연결시키는 과정을 빨려들듯 지켜보느라 처음에는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아무 대꾸도 않는 제게 그녀는 다시, “칠십도 안 된 남편, 담낭암과 황달로 3년 전에 보냈어요. 그이 생전에 어깨너머 배운 것과 밖에서 제대로 교육받은 걸로 닫았던 가게 문 다시 열었어요.”
왜 맨손으로 작업하시느냐 물으니 장갑을 끼면 감각이 무뎌져 정교함을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손톱 밑이며 손바닥과 손등까지 시커멓게 변한 손이 마치 ‘뻬빠’(사포) 같습니다. 거친 자신의 몸을 문대어 운동화며 구두며 장화며 부드럽고 매끄럽게 하니까요.
신발 바닥 덧대는 여자
요즘엔 서방 알기를 개떡같이 아는 세상이 되어서인지 몰라도 남편 구두 반짝반짝 닦아 현관에 대령은커녕 벗어놓은 신발 걷어차거나 밟지 않으면 다행이라고들 합니다. (이 말은 제 뒤에 앵클부츠 한 짝을 들고 온 초로의 여자분이 필자에게 요즘 젊은 것들 흉보며 한 말입니다.) 필자 역시 별다르지 않아서 먼지투성이 남편 신발을 꺼내놓자니 갑자기 부끄러워지더라고요. 한데 구둣방 여주인은 험하고 더러운 데며 온갖 곳을 돌아다녔을 등산화를 소중히 안고 구석구석 매만지고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를 헤매고 다녔는지,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는지, 왜 관리는 제때 안 했는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 자그맣고 여린 손으로 낡고 더러워진 신발을 귀한 물건인 양 정성스레 대하는 그녀 머리 뒤로 후광이 퍼지는 듯 마음이 짜르르해졌습니다. 아프고 상처 난 마음, 억울함과 분노로 막히고 뭉친 마음에 반창고 붙인다고 다니는 필자는 그날 비좁은 구둣방에서 숨고 싶어질 만큼 작아졌습니다.
숟가락 장단에 희로애락 담아
‘찐찐찐찐 찐이야 완전 찐이야 진짜가 나타났다 지금’
나무 숟가락 두 개를 한 손에 쥐고 유행가 따라 장단을 맞추며 춤추는 이복자 숟가락난타협회 대표. 실용음악 재즈피아노를 전공하고 음악치료 석사과정을 공부한 이 대표는 일평생 음악학원을 하며 생업을 이어오다, 환갑이 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했습니다. 이 대표는 평소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도 형편이 되지 않아 아예 시도하지 못하거나, 배우는 과정이 어려워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를 안타까워했습니다. 이에 일상에서 흔히 쓰는 도구를 악기 삼아 연구하고 연습하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해 즐길 수 있도록 악보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단순명료하게 만들었습니다. 세모, 네모, 별, 화살표, 이렇게 딱 네 개 기호만으로 만든 그녀만의 악보는 화살표를 따라가다 보면 별도 볼 수 있고, 세모, 네모 다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음악에 대한 갈증을 쉬운 악보와 도구로 풀어준 이 대표는 숟가락 난타를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린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코로나19 위기가 가져온 인생 반전
이 대표는 숟가락난타협회를 만들어 울산을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대면, 비대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강사 양성과 공연에 열중했습니다. 그 공로로 2021년 제40회 스승의 날 기념 ‘한국강사신문이 선정한 제1회 대한민국 명강사 12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숟가락 난타 강사이자 음악가로 활동하며 자신이 양성한 제자들이 전국 방방곡곡 숟가락 난타 열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힐링·음악치료 분야에서 수상한 만큼 그 정성과 열정을 인정받은 셈이지요.
어쩌면 코로나19는 이 대표에게 인생 2막을 열어준 전화위복의 불씨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면 수업 중심이던 음악학원이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아 모든 활동이 멈췄을 때 비대면 온라인 교육을 접하며 활로를 모색할 수 있었으니까요. 30년이 훌쩍 넘도록 운영해온 음악학원을 딸에게 물려준 이 대표는 ‘내 삶의 주인공’으로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노후에 펼칠 로망으로 간직했던 꿈을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음악 분야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악기와 음악을 쉽게 접하고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을 더 늦기 전에 펼치게 되었지요. 오랜 궁리 끝에 ‘세상에서 가장 쉽고 빠르게 배워서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바로 숟가락 난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악기 가운데 관객 호응이 가장 좋은 점도 함께 즐기기 안성맞춤이고요.
마음 장단 맞추기는 참 어려워요
흥과 끼라면 지구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우리 민족은 악기가 있건 없건 가락과 장단에 맞춰 잘 놀 줄 압니다. 쿵짜락 쿵짝 삐약삐약. 왕년에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하고 춤춰보셨습니까. 지역마다 독특한 장단이 있습니다. 장단 맞추기 쉬울까요? 즐겁고 행복한 인생 2막을 위해 숟가락 난타를 개발해 전국을 다니며 장단 맞추기를 가르쳐온 이 대표에게도 가장 어려웠던 것은 인간관계에서 부딪히는 갈등이라고 합니다. 어제 막역한 친구였다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날 적이 되어 자신을 공격해오는 경우는 정말 마음이 힘들었다고 하네요. 평생 음악학원에서 십대 안팎 어린 교육생들만 상대하다 숟가락 들고 만나는 어른들은 영판 달랐으니까요. 스스로 마음 단련하는 법을 익히느라 고생도 했지만, 숟가락 두드리며 가슴속 진심이 상대에게 전해져서 서로 위안이 되는 따뜻함을 나누었으면 하는 게 이 대표의 바람입니다. 밥 먹던 숟가락이 이제는 신명과 즐거움을 먹고 그 행복을 베풀게 되었습니다.
높이 말고 낮게, 예술을 나누는 천사
하프 소리는 사람이 듣기에 가장 좋은 음파를 낸다고 합니다. 서툰 연주도 신경을 긁지 않고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할까요. 초보자가 연주해도 아름답게 들린다는 게 하프가 지닌 강점이라네요. 심금을 울린다는 말이 그런 게 아닐까요. 하늘에서만 연주할 것 같은 고상하기 그지없는 하프를 지상으로 가져와 누구든지 어디에서나 배우고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든 이가 바로 안영숙 한국하프교육협회 회장입니다. 사실 회장보다 교수라는 호칭으로 오랜 세월 살아온 안 회장은 한국에서 하프 연주자, 일명 하피스트 1세대로 불리는 유학생 1호입니다.
악기 제작자로 변신한 하피스트
하프 대중화라는 목표에는 우리 국민의 마음이 정서적으로 따뜻해지기를 바라는 안 회장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하프는 이동과 보관이 너무 불편할 뿐 아니라 실제 연주할 때도 불편을 넘어 고통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은, 정말 까다롭고 비싼 악기입니다. 이런데도 그동안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은 걸 이상하다고 느낀 안 회장은 자신이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용감하게 뛰어들었습니다. 주변의 무관심과 싸늘한 시선을 뒤로하고 결국 목공학교를 5년이나 다니면서 사서 고생을 한 끝에 미니 하프 ‘줄리’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배운 것을 나누고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정서적으로 풍부하게 만들겠다는 사명감이 아니었다면, 그 힘든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까요.
그녀의 노고는 속속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2022년 12월 10일 제1회 줄리 하프 국제 콩쿠르 본선을 한국영상대학교에서 열어, 초등부에서 실버 부문까지 전 연령대에 걸쳐 수상자를 선정하며 하프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또 12월 21일에는 ‘2022 한국 소비자 베스트 브랜드 대상’ 악기 개발 및 하프 교육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직접 만든 소형 하프로 하프 대중화와 악기 시장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안영숙 회장. 줄리 하프는 해외 시장에도 진출해 악기 수출뿐 아니라 교육센터를 통해 누구나 쉽게 하프에 접근해 즐길 수 있도록 저변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충남 공주시 단골 철물점에서 직접 고른 철사줄을 매어 하프를 손보던 안 회장은 가게에서 즉석 연주를 합니다. 오드리 헵번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연주했던 ‘문 리버’(Moon River)가 그녀의 손을 타고 계룡산까지 울려 퍼지는 듯합니다.
오늘도 헌 구두 하나 꺼내며
옆 사람 표정과 눈빛에 상처 입고, 가족이 내뱉은 말 한마디가 폐부 깊이 찌르는 송곳이 되어 아플 때. 이런 날이면 필자는 신발장을 기웃거립니다. 뭐 고칠 것 없을까 공연히 이 신 저 신 꺼내놓습니다. 오늘은 아들 구두 손볼 차례입니다. 새 신 바닥 앞뒤로 미리 고무창을 덧대면 발바닥도 덜 아프고, 우툴두툴 고무 요철이 미끄럼도 막아주고, 신발 수명도 늘려준다고 하니 일석삼조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구둣방에 미리 오신 옆자리 손님은 자기 것과 딸내미 롱부츠까지 바닥 창을 덧대달라는 주문을 하네요. 구두처럼 우리 마음에도 다치기 전, 아프기 전 미리 반창고 하나씩 붙여보실까요.
이제 다시 시작이다, 찬란한 내 인생
좋은 꿈 꾸셨습니까? 마음 반창고 새해 첫 번째 이야기는 내가 가장 빛났던 순간 혹은 내가 제일 잘나갔던 순간, 그도 아니면 내가 가장 찬란해질 그 순간을 떠올리며 시작합니다. 우리 삶을 춘하추동(春夏秋冬) 네 계절에 피는 꽃으로 비유해볼까요. 아직은 한참 먼 봄소식을 가장 빨리 알려주는 산수유를 시작으로 봄철에는 매화, 목련, 진달래, 개나리, 살구꽃, 복사꽃, 벚꽃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햇살이 더욱 눈부신 여름이 되면 무궁화부터 찔레꽃, 작약, 패랭이꽃, 장미가 형형색색 산천을 장식합니다. 코스모스, 국화, 과꽃, 나팔꽃, 도라지꽃은 가을을 알리는 전령사입니다. 동백꽃은 단연코 외로운 겨울을 홀로 지킵니다.
이처럼 꽃도 피우는 시기가 다 다릅니다. 차례대로 자기 순서에 맞춰 꽃을 피웁니다. 식물은 계절의 변화를 인지하고 낮의 길이와 온도 같은 최적의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 꽃을 피우는 정교한 작동원리를 갖고 있습니다. 식물과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바로 그 순간은 사람마다 다른 시간에 찾아옵니다. 저마다 꽃 피우는 때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나다라 배우며 글꽃을 찾은 마음
오십 해가 넘도록 시장통에서 생선 비린내 맡으며 자식 키우고 살아낸 정백안(79세), 서경임(74세) 부부는 영암에서 목포까지 칠흑같이 깜깜한 새벽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 갑니다. 오가는 데 무려 네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오일장 서는 날을 빼고는 거르지 않습니다. 지난 11월에는 전남인재평생교육원에서 주최한 평생교육수기 공모에서 경임 씨가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열여섯에 처음 만난 내 이름, 일흔 넘어 활짝 핀 글자꽃’이란 제목으로 상도 받고, 이름 없이 사느라 아팠던 마음도 아름다운 글꽃으로 승화시킵니다. 세 살에 부모를 여의고 제때 배우지 못한 아픔을 늦깎이 학생이 되어 글로 녹여내며 지난 삶을 돌아보고 멍들었던 마음도 구석구석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온통 눈물과 서러움뿐이었던 삶이 배움을 통해 재밌는 살판으로 바뀌었다는 부부. 학교에 다니면서 어딜 가도, 누굴 만나도 당당하다는 경임 씨는 쓰는 글마다 큰 상을 받으며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둥지 속에 갇힌 새처럼 세상 밖 외면하고 일만 하던’ 경임 씨에게 배움의 기쁨은 기적처럼 찾아온 행운입니다. 호미자루 연필 삼고 밭고랑 공책 삼아 마음을 써내려가는 지금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날이 아닐까 미소 짓습니다.
쏜살같은 세월에 지지 않고, 해마다 먹는 나이에 꺾이지 않고 자기 때와 자기 사람을 기다린 이가 있습니다. 무려 72년을 기다린 주인공은 바로 강태공입니다. 3000년 전의 인물로 알려진 강태공의 본명은 강상(姜尙)으로, 선조가 여(呂) 땅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고 하여 여상(呂尙)이라고도 불립니다. 훗날 주나라 문왕이 되는 서백(西伯)이 강태공을 초빙하며 선왕 태공이 간절히 바라던(望) 성인(聖人)이라고 일컬었기 때문에, ‘태공망’(太公望)이라는 이름도 얻었습니다.
강태공이 버린 낚시 3600개
위수(渭水)에서 낚시 3600개를 버려가며 문왕을 기다렸던 강태공은 일흔두 살이 될 때까지 매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극진(棘津)이라는 나루터에서 지내며 하는 일이라고는 독서와 낚시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물고기를 잘 잡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드리운 낚시에는 바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늘이 있었지만 곧게 펴져 있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튼 물고기를 잡으려고 낚싯대를 드리운 것이 아니니까요. 강태공이 낚시터에서 기다린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때’였습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바로 그 사람을 만나, 자신의 재능과 실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기회. 강태공은 ‘그 때’와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72년을 기다린 것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을
문왕을 만나기 전까지 강태공은 어떻게 지냈을까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에 이르러 집안이 몰락한 강태공은 천문, 지리, 병학(兵學) 등 온갖 학문에 능통한 희대의 천재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학식과 통찰력 그리고 큰 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오로지 책만 읽으며 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러다 보니 집안 살림에 도통 관심이 없는 강태공 대신 그 책임을 아내 마 씨(馬氏)가 모두 떠맡게 됩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에 지친 아내는 날마다 남편을 닦달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강태공은 여느 때처럼 책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거든 마당에 널어놓은 강피(곡식의 한 종류)를 꼭 거두라고 신신당부한 아내 말을 까맣게 잊은 채 소나기에 그만 강피를 모두 쓸려 보내고 말았습니다. 이에 진절머리가 난 아내는 그 길로 이혼을 선언하고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을….” 강태공은 떠나는 아내를 향해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나의 꿈은 꺾이지 않았다
혼자서 살림까지 도맡아야 했던 강태공은 오십이 넘도록 여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힘들게 살았고, 그 뒤로는 백정 일을 했는데 도마 위에 놓은 고기가 썩을 때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마침내 위수가로 옮겨 낚시를 시작했고 오랜 세월 끝에 문왕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중국은 은나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주왕(紂王)이 달기의 치마폭에 싸여 폭정을 일삼아 민심이 크게 동요하던 때였습니다. 이와 반대로 덕망이 있었던 문왕은 자신을 도와 천하를 다스릴 인재를 찾던 어느 날 사냥을 나가기 전 사관 편(編)에게 점을 치게 했습니다. “위수에서 사냥을 하면 장차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용도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도 곰도 아닙니다. 장차 패왕을 보필할 스승이며 그 공이 3대(代)에까지 미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문왕은 3일 동안 목욕재계를 한 후 위수로 사냥을 떠났고, 강태공과 극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비록 낡은 옷의 초라한 늙은이가 낚시를 하고 있었지만 문왕은 한눈에 그가 비범한 사람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강태공 역시 자신의 뜻을 알아줄 현자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학문과 수양에 매진하며 그 긴 세월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강태공은 자신의 성공과 명예, 부귀영화보다 남을 잘 되게 하려는 마음으로 부국강병의 술법을 끊임없이 공부하고 마음을 닦으며 10년 동안 3600개의 낚시를 버리면서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강태공이 지쳐 포기했다면, 언제 찾아올지 모를 ‘자신의 때’를 끝내 기다리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오랜 세월을 견뎌내며 자신이 쓰일 때를 기다리고 준비했기에 ‘강태공’, ‘태공망’이라는 이름을 후세에 남길 수 있었지요.
차근차근, 차곡차곡, 차례차례
반면에 필자는 조급함, 성급함이 얼마나 자신을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고, 외롭게 하고, 또 때로는 절망하게 하고, 화나게 하는지 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2018년 12월 말에 첫 책 ‘혼자 술 마시는 여자’를 나이 오십에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동안 미루고 도망가다 만들어진 책인 데다 제 생애 모든 것 사랑, 열정, 가족까지 다 녹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엄청 기대가 컸습니다. 욕심도 너무 많았습니다. 책이 딱 나오면 세상이 바뀔 줄 알았습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 작가가 되어 텔레비전 프로그램 ‘아침마당’에 초대되고, ‘인간극장’에 출연하는 상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상상과 현실은 참 달랐습니다. 이게 하루아침에 될 수 없는 건데, 머리로는 알지만 막상 책을 내고 보니 그건 다 잊어버린 채 금방 유명해질 줄 알고 커다란 꿈과 야망, 욕심과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 욕심 때문에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겁니다. 주변 지인들과 가족들한테 더 실망하게 되고요.
‘나를 조금 더 챙겨주지.’
‘왜 책을 안 사줄까.’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왜 책을 안 알려줄까, 다른 사람 책은 홍보해주면서.’
마음에 별의별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라고요. 마치 고구마 줄기 걷어 올릴 때 한 넝쿨에 끝도 없이 흙 속에서 끌려나오는 것처럼요. 책을 구매하고 SNS에 소개해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잠시뿐이고, 관심도 없고 구매도 홍보도 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서운해하면서 원망하는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괴로워하던 어느 하루. 필자 대학원 논문 심사위원이었던 주철환 교수님께 책 소식을 전해드렸습니다.
‘차근차근, 차곡차곡, 차례차례’.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답장으로 주신 세 마디가 다른 어떤 말보다 큰 위로가 되고, 대단한 응원이 되었습니다. 그래, 차근차근 가야지.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인데 한 발짝 한 발짝 떼어야지. 차곡차곡 쌓아야지, 돌담을 쌓듯이. 크고 작은 자갈, 큰 돌, 작은 돌이 사이사이에 다 채워져야 탄탄한 울타리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 교수님의 말은 필자가 힘들고 지칠 때마다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해줍니다. 나만의 때와 사람을 기다리며 차츰차츰 나아갈 용기가 생깁니다.
시유기시 인유기인
아, 왜 이렇게 삶이 힘들까?
아, 왜 이렇게 일이 안 풀릴까?
아, 왜 이렇게 인간관계가 꼬일까?
‘시유기시 인유기인’(時有基時 人有基人), ‘때에도 그 때가 있고, 사람도 그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거나 앞으로 일을 펼칠 때 길잡이가 되고 안내가 되는 말입니다. 어떤 일을 도모할 때 타이밍이 안 맞아서 실패하거나 어긋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일이 거의 다 만들어지고 프로젝트가 왕성하게 되어 있는데, 꼭 ‘그 사람’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강태공이 그토록 오랜 세월을 기다린 것처럼, 경임 씨가 글꽃을 피우며 만학도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처럼 필자도 차근차근, 차곡차곡, 차례차례 다음 책을 준비하며 새로운 사람들, 시절인연 만날 설렘을 안고 강의실로 들어갑니다. 자기 걸음에 집중하면서 말입니다.
주변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속도와 방향에만 신경 쓰며 새해 새 사람, 새 때를 기다려볼까요. 당신의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장면 1 자동차 안 : 그러니까 남편이지
모처럼 교외 드라이브에 나선 어느 부부. 조수석에 앉은 아내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며칠 전 OOO 교수가 쓴 글 봤어요? 그동안 참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번 글은 좀 실망이네요. 균형감을 잃었고,너무 부분적으로 알고 섣불리 판단한 것 같아요. 팔로어 많다고 자랑하는 것도 좀 그렇고….”
“그래? 나도 그 글 잠깐 봤는데 전혀 그렇게 생각되지 않던데. 그리고 한 번 정도 갖고 실망하고 성급해 보이네, 당신. 그분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데.”
이렇게 시작된 논쟁에 점점 불이 붙습니다. 말을 할수록 아니꼬워진 아내는 그 사람 안 좋은 점만 들추어내려 애씁니다. 상대가 여자 교수라 더 기분이 나빠진 건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입니다.
“아니, 당신은 그 여자 책 한 권도 안 읽고 일면식도 없으면서 평생 같이 산 나보다 그 여자 편을 들어요? 그렇게 잘 알아요?”
급기야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맙니다. 외출을 망치고 집에 돌아와 생각할수록 분이 풀리지 않는 아내. 왜 내 편을 안 드느냐고 실컷 따지고 싶은데 치사해서 참으려니 속이 말이 아닙니다. 흥! 그러니까 남의 편, 남편이라 그러는 거지!
#장면 2 형광등을 가는 참 딱한 내 편
화장실 등이 나가자 평소와 달리 자기가 갈아주겠다고 큰소리 치는 남편. 요즘 전등은 가는 방식이 까다로워 해보지 않으면 헤매기 십상입니다. 이렇게 해봐도 저렇게 해봐도 뚜껑조차 열리지 않아 땀을 뻘뻘 흘리는 남편. 팔짱을 끼고 옆에서 얼마나 잘하나 지켜보던 아내가 참다못해 “이리 주고 그만 의자에서 내려와요!” 명령을 합니다.
희한하게도 쌔가 빠지게 돈 벌어다주는 남편은 밉고, 허구한 날 돈 갖다 쓰는 자식새끼는 예쁜 법입니다. 퇴직한 남편이 은행 일, 살림살이 물을라 치면 ‘그것도 못 하냐, 그것도 모르냐’며 통박에 구박을 얹어 핀잔하기 일쑤입니다. 반면 자식이 세상 물정, 시시콜콜 온갖 문제 물어보면 세상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답하는 우리 아내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장면 3 부부 동반 모임
“닥쳐.” 앞자리에 마주 앉은 부부 중 아내가 남편한테 큰소리를 냅니다. 순간 좌중이 고요해지고, 나머지 부부들은 그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놀라서 서로 얼굴을 쳐다봅니다. 남편이 한 얘기가 가당치 않다고 그랬다는데, 남들 앞에서 그 정도로 남편을 모욕하는 아내가 집에서는 얼마나 남편을 잡을지 안 봐도 뻔합니다. 심지어 70대 부부로 이뤄진 친목 모임에서 그랬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입니다.
깜짝 놀라셨나요? 아니 우리 부부 얘기를 어떻게 알았냐고요? 이 세 장면은 주변에서 직접 겪거나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열두 번째 마음 미장공은 부부 싸움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댁의 남편은, 댁의 아내는 안녕하십니까?
님 놈 남 : 님이 남이 되는 순간
1992년 세상에 나온 이 노래, 가사부터 살펴볼까요?
도로남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고
님이 되어 만난 사람도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 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
가슴 아픈 사연에 울고 있는 사람도
복에 겨워 웃는 사람도
점 하나에 울고 웃는다
점 하나에 울고 웃는다 아 인생
돈이라는 글자에 받침 하나 바꾸면
돌이 되어버린 인생사
정을 주던 사람도 그 마음이 변해서
멍을 주고 가는 장난 같은 인생사
가슴 아픈 사연에 울고 있는 사람도
복에 겨워 웃는 사람도
정 때문에 울고 웃는다
돈 때문에 울고 웃는다 아 인생
정곡을 찌르는 노랫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도로남’이 되려면 그 사이에 ‘놈’이 되는 과정을 거칠 때가 많습니다. 최근 일반인 부부들이 겪는 실제 갈등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화제입니다. 출연한 사람들 연령대에 관계없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바로 말입니다. 서로를 부르는 말, 특히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말에 화들짝 놀랍니다. ‘야’, ‘너’는 다반사고 말끝마다 ‘X새끼’, ‘XX새끼’ 소리가 따라다닙니다. 심지어 자녀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말합니다. 말이 짧아지면 마음도 짧아지고, 그러다 몸도 상처로 골병들게 마련입니다.
살리는 말, 죽이는 말
우리는 말로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서로 나눕니다. 말이 없는 부부도 문자메시지는 주고받습니다. 말, 글, 언어를 떠나서 소통하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가족과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이 가진 힘은 큽니다.
‘체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말이 씨가 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등 말에 대한 속담이 참 많습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법정에서 증언 한마디가 무죄 판결을 끌어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를 내 마음 밭에 뿌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이 던진 말을 그냥 흘려보냈으면 큰 사달이 나지 않을 텐데, 그 말을 내 마음 밭에 툭 떨어뜨려 씨를 뿌리는 순간 그 말에 뿌리가 생기고 줄기가 뻗어나가고 잎이 생기고 결국 열매를 맺어 그 말대로 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요?
누가 나쁜 말을 하더라도 우리 마음 밭에 뿌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쁜 말이 자란 가시덩굴에 긁히고 찔리지 않도록 아예 마음 밭에 들이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남도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남의 편을 진실한 내 편으로 만들어 서로 지키고 살리는 지름길은 없을까요?
말 한마디, 언덕
나를 살리고 남도 살리는 비법은 바로 말에 덕(德)을 붙이는 것입니다. 덕 중에서 가장 큰 덕이 바로 ‘언덕’(言德)입니다. 덕을 베풀려면 보통 물질이나 자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돈 한 푼 안 드는 게 이 언덕입니다. 또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습니다. 말에 덕을 붙이면 그 사람도 잘되고, 그 말을 하는 나도 덩달아 잘됩니다. 덕과 득이 되는 말이 있고 독이 되는 말이 있습니다.
덕(德)이라는 글자는 누군가를 도와 혜택을 받게 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득(得)도 마찬가지로 화폐를 손에 쥐고 있는 모습, 즉 재물을 획득한 모습을 뜻합니다. 덕과 득은 비슷한 의미를 지닙니다. 말에 덕을 붙이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을 잘되게 하는 것, 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언덕(言德)은 덕담(德談)과 일맥상통합니다. 남 잘되기를 비는 것이 덕담이니까요. 생판 남을 만나서 님이 될지, 놈이 될지, 또 무심결에 던진 한마디 말이 덕과 득이 될지 아니면 독이 될지는 오로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말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니까요.
내 삶의 기준은 하희라 씨입니다!
남편 얘기가 나올 때마다 번번이 소환되는 연기자 최수종 씨. 우주 최강 ‘아내바라기’ 일등 남편으로 등극한 뒤 한 번도 왕좌를 내주지 않는 그 남자. 아내 하희라 씨가 14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자, “지금까지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거고, 마지막 그 순간까지 정말 잘해낼 겁니다”라며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항상 옆에서 지켜보며 함께할 거라고 사랑을 다짐하며 약속합니다. 예전에는 그런 표현이 방송용 가식이나 위선이 아닐까 삐딱한 시선도 없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 진심이 사무치도록 감동을 줍니다.
무조건 내 편, 있습니까?
친정에 갈 때면 아버지는 식사 뒤 커피 한잔 해야지 하시며 믹스커피 봉지를 따십니다. 그걸로 부족한지 달디단 커피에 꿀을 듬뿍 넣어주십니다. 꿀 같은 아버지 사랑에 온몸과 맘이 따뜻해집니다. 무조건 언제나 든든한 내 편 1호입니다. 그렇다면 남편은 내 편 몇 호일까요?
내가 혹 잘못된 판단을 해도, 내가 한쪽 얘기만 듣고 흥분해 길길이 뛸 때도, 내가 어처구니없는 고집을 피워도, ‘당신 말이 맞아! 당신이 잘했어! 누가 감히 우리 여보를 화나게 했어? 다 죽었어!’라고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꼭 필요합니다. 만약 없다면 당신이 먼저 무조건 그의 편이 되어주면 어떨까요.
마음 미장공 열두 번째 이야기이자 2022년 마지막 인사로, 남편을 떠올리며 썼던 제 글 한 편을 대신 올립니다. 한 해 동안 제 편에서 마음 다해 응원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저도 무조건 당신 편입니다.
내 편
무조건 나를 믿어주는 사람
헤맬 때도 기다려주는 사람
때로 속여도 넘어가는 사람
미워도 예쁘다 해주는 사람
야속해도 허허 넘기는 사람
실수조차도 묻지 않는 사람
허물 모른 척 덮어주는 사람
종종 가슴 아픈 말 하는 사람
최고라고 추켜세우는 사람
훌륭하다고 말해주는 사람
귀신같이 우울함 아는 사람
딱 그때 술 한잔 권하는 사람
난 그런 사람이 좋더라
서로 다른 계산법
한동안 모 가수를 둘러싼 부모와 형제 사이 분쟁이 전 국민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언론을 연일 장식하더니 최근에 또 다른 모 방송인과 부모, 형과 형수 사이 고소고발이 텔레비전은 물론 인터넷, 소셜 미디어 서비스를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당사자들은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으면 가족 면면 사생활과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도 개의치 않는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피를 나눈 형제자매가, 부모와 자식이,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는 부부가 소송과 맞소송을 벌이는 건 계산법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 아닐까요? 내가 베푼 은혜는 100인데 상대가 갚은 것은 10도 안 된다거나, 오히려 부모, 자식, 배우자 등골을 빼먹은 마이너스라고 여기는 데서 갈등이 촉발됩니다. 급기야 봉합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며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말 그대로 불구대천(不俱戴天) 원수가 되는 것은 아닐까 되물으며 마음 미장공 열한 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한 부엌에서 은혜와 원수가 난다
“한 부엌에서 은혜와 원수가 나는 것이니, 나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나에게 원수가 되며 은혜가 될 수 있는가.” 성철 스님 생전 법문을 좀 더 깊이 새겨보겠습니다. 나를 그 누구보다 제일 잘 아는 아내, 남편, 자식, 형제, 친구, 선후배가 은혜도 되고 원수도 되기 쉽습니다. 같은 부엌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큰동서와 작은동서가 둘도 없이 각별한 사이가 되는가 하면, 그 각별함이 도리어 화근으로 작용해 철천지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나한테 도움을 받은 사람이 반드시 나를 위해 이롭게 행동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반대로 생면부지 남보다 더 헐뜯고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베푼 은혜가 거꾸로 원수가 되는 이야기를 드라마를 통해 살펴볼까요.
‘가족끼리 왜 이래’ 속 불효 소송
“그저 잘 되라 잘 되라만 가르쳤지 인생에 대해 감사하는 법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해서 이 못난 애비가 뒤늦게나마 뉘우치고 자식들한테 회초리를 들까 하는데 자식들의 머리는 너무 굵었고 저는 초라하여 손에 힘이 없습니다, 판사님. 그러니 법으로 그 회초리에 힘을 좀 실어주십시오. 제 인생의 마지막 회초리입니다. 이 회초리가 우리 자식들 인생에 선물이 될 수 있도록 부디 한 번만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2014년 방영된 주말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KBS-2TV)에서 주인공 차순봉(유동근 분)이 삼남매에게 불효 소송을 제기하며 자신의 입장을 판사에게 호소합니다. 원고와 피고가 된 부모와 자식. 합의할 때까지 조정을 계속하겠다는 판사. 마침내 세 남매 월급 가압류 해지와 소송 취하 약속에 대한 선행 조건을 내걸고 합의에 도달합니다. ‘아버지의 소원판’이란 제목으로 적은 합의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엔 암 선고를 받아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삶이라는 전제가 들어 있긴 합니다.
① 애들(삼남매)이랑 밥 같이 먹기
② 애들이랑 하루에 한 번씩 전화 통화로 안부 묻기
③ 우리 딸 짝 찾아주기
④ 우리 큰아들 내외랑 3개월 동안함께 살아보기
⑤ 우리 막내아들한테 한 달에 백만 원씩 용돈 받기
⑥ 고고장 가기
⑦ 가족 노래자랑
소송을 제기한 아버지 역을 연기한 배우 유동근은 그해 연말 KBS에서 연기 대상을 받았습니다.
“저를 뒤돌아보는 여정이 되었습니다. 극 중에서 두 아들이 젊은 날의 저였습니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데 이제라도 제가 뭘 잘못했는지 알게 돼서 너무나 다행입니다. 그게 너무 고맙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너무 죄송합니다. 지난날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제 아이들이 잘 되게끔 지켜봐 주십시오.”
은혜는 빨리, 원수는 아주 느리게
고마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급속도로 옅어지다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뭐 그까짓 것쯤이야 하고 가벼이 생각하거나, 그만큼은 당연한 거 아니냐며 처음 마음을 눙치기도 합니다. 변명할 구실을 찾느니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물질이 여의치 않으면 말로라도 반드시 고마움을 전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신에 원수는 최대한 천천히,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그 당시엔 분하고 화가 치밀지만 3초 심호흡, 3분 명상, 30분 산책, 이렇게 3시간, 3일 원수 갚을 일을 늦춥니다. 그러다 보면 태산만큼 억울했던 가슴 아픔도, 밤새 바늘로 찌르던 두통도 어느덧 잦아들고 큰 문제가 사소한 일로 줄어들기도 합니다. 원수를 갚는다는 것은 ‘피 묻은 칼을 피로 씻어내는’ 것과 매한가지입니다. 피는 맑은 물로 씻어야 깨끗해지듯 원수 갚으려는 마음이 자연스레 사라지도록, 원수가 누구였는지 떠오르지도 않을 만큼 나를 정화해야 합니다.
품기가 쉬울까 버리기가 쉬울까 : 후한 광무제의 도량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가 왕망을 무찌른 뒤 왕망이 살던 궁에서 편지 한 뭉텅이를 발견했습니다. 각 군현의 관원과 지방 유지들이 왕망과 주고받은 편지에는 왕망을 칭송하고 유수를 헐뜯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바로 살생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유수는 관원과 호족들을 불러놓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편지를 불살랐습니다. 이를 ‘분소밀신’(焚燒密信)이라 부릅니다. 그 이유를 묻는 막료에게 과거의 은혜와 원한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려고 불살랐다고 답했습니다. 광무제의 도량은 앞으로 적이 될 수도 있었던 이들을 감복시킬 만큼 넓었나 봅니다. ‘채근담’(菜根譚) 전집 136장에도 “은혜와 원수는 지나치게 밝혀서는 안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두 마음을 품어 배반하게 된다”(恩仇不可太明 明則人起携貳之志)는 말로 일침을 가합니다.
은혜와 원수는 한 끗 차이
같은 책 108장에는 원수와 은혜의 본질과 대처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원망은 덕으로 인하여 나타나니
남들이 나에게 덕이 있다고
여기게 하기보다는
덕과 원망 모두 잊게 하느니만
못하고,
원수는 은혜로부터 생겨나니
남들이 나의 은혜를 알게
하기보다는
은혜와 원수를 모두 없게
하느니만 못하다.”
(怨因德彰 故使人德我
不若德怨之兩忘
仇因恩立 故使人知恩
不若恩仇之俱泯
-‘채근담’(菜根譚) 前集 108장
은혜와 원수는 마주 댄 양 손바닥처럼 딱 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매우 친밀하고 소중한 사람한테 은혜와 덕을 베푸는데, 내가 베푼 덕이나 은혜를 못 알아보고 몰라줄 때, 그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억울함이나 원망이 생겨서 은혜를 입었던 사람이 오히려 원수가 되고 척이 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불효 소송을 하는 것도 인정과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요. 내가 베푼 은혜와 덕에 값을 쳐서 돌려받으려는 셈법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 친구와 원수가 되시렵니까. 아니면 줬다는 것조차 잊고 다정하게 지내시렵니까.
‘명심보감’ 계선편(繼善篇)에 “사람들에게 은혜와 의리를 널리 베풀어라. 사람이 살다 보면 어느 곳에서든 서로 만나지 않겠는가. 사람들과 원수와 원한을 맺지 마라. 길이 좁은 곳에서 만난다면 회피하기 어렵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을 주변에 둘지, 나를 해치고 망하게 하려는 사람을 곁에 둘지 참 답은 쉬운데 실천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우리가 몰라서 못 하는 게 아니라 알면서 못 하는 게 더 큰 어리석음이지 싶습니다. 저부터도 그렇습니다. 시 한 편 함께 나누면서 마음 미장공 열한 번째 이야기 마무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늘 셈법
삶은
가까이 보면
공정하지 않고
부당하고
억울한 일투성입니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빈틈없이 공정합니다.
언제 단 한 번이라도
봄이 가고 겨울이 온 적이 있던가요.
가을이 가고 여름이 온 적이
있던가요.
더하기 빼기는
짧은 순간엔 맞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내가 밑졌으니
더 받아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하늘의 방정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보다 더 가지고
더 많이 누리는 게
얼마나 축복과 호사인 줄 모릅니다.
하늘 같은 가호로
보살핌을 받았는지 느끼지 못합니다.
내가 저지른 큰 잘못이
아주 조그만 손해로 청구되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
내가 준 상처가
당신이 준 상처보다
훨씬 크고 깊었음을
너무 뒤늦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만하기 다행입니다.
- ‘혼자 술 마시는 여자’ 182~184쪽
불효자 방지법 : 은혜와 원수를 대하는 자세
부모 재산을 증여받은 자녀가 부모를 외면한 때 은혜를 저버리는 망은(忘恩) 행위에 대해 증여한 재산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민법 개정, 이른바 ‘불효자 방지법’이 추진되고 있지만 몇 년째 국회 발의에 머무른 채 논란은 여전한 상황입니다. 앞선 드라마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부양료 청구 소송(불효 소송)은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송을 제기한 부모가 거의 패소한다는 게 현실입니다. 2020년 98세 아버지가 셋째 아들을 상대로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며 20년 전 증여한 선산을 돌려받으려고 제기한 민사 소송에서 패소한 경우처럼, 불효자 방지법은 자식이 부모 재산을 받고 효도나 부양을 하지 않은 채 ‘먹튀’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인데 입법이 되기까지 쉽지만은 않습니다.
한편 지난해 법무부가 사전 상속재산을 회수할 수 있는 방안과 가능성, 여파 등을 종합적으로 논의하기로 하면서 이를 둘러싼 공방은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유럽 국가들은 우리보다 앞서 이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독일 민법 제530조는 ‘증여자에게 중대한 배은 행위를 저질러 비난을 받을 경우 증여를 철회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고, 프랑스 민법 제953조도 ‘증여를 받은 자가 학대·모욕 범죄를 저지르거나 부양을 거절하는 경우 증여 철회가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결혼 생활은 쪽팔림의 연속이에요. 서로가 서로한테 쪽팔려요. 쪽팔려도 가장 나를 이해하고 믿어줄 거라는 그러한 믿음 하에 쪽팔림을 그냥 겪고, 또 그걸 겪으면서 감당해나가는 겁니다.”
6월 6일 방송된 ‘오은영 리포트-결혼 지옥’(MBC)에서 5년째 문자로만 소통하고 신체적·정서적 접촉이 전혀 없는 부부에게 내린 솔루션 말미에 나온 말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쪽팔림의 역사
실제로 부부의 삶이란, 아이들을 키우고 결혼 생활을 해나가는 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혹은 부모가 자식한테, 자식이 부모한테 끊임없이 쪽팔려 하는 시트콤 같습니다. 품위와 체면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비단 결혼 생활뿐 아니라 인간관계도 비슷합니다. 불편한 진심을 끄집어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 마음을 표현하려면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 비난하는 것도 아닌데 본인은 굴욕감을 심하게 느낍니다. 관계도 어색해지기 마련입니다. 마치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 ‘관리의 죽음’에서 주인공이 그랬듯이요. 내 치부와 허물을 붙잡고 죽음으로 몰고 가기보다 때로는 당당하고 뻔뻔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 쪽팔릴 준비 되셨습니까? 마음 미장공 열 번째 이야기는 쪽팔릴 줄 아는 용기를 북돋우면서 시작합니다.
안톤 체호프의 ‘관리의 죽음’
어느 아름다운 저녁, 행복에 겨워 오페라에 심취해 있던 회계원 이반 드미트리치 체르바코프. 갑자기 재채기를 한 그는 앞자리에 앉은 상급 관리 브리잘로프 장군의 민머리와 목덜미에 침이 튀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실수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괜찮다는 답을 들었음에도 그는 다음 날 접견실까지 찾아가 또 사과를 합니다. 일방적이고 계속되는 사과에 병적으로 집착하다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당사자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별일 아니니 괜찮다고 지나간 것을 기어이 들쑤시고 후벼 파서 상대와 자신을 괴롭히는 어리석은 짓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해왔을까요. 섣부른 판단과 고정관념, 선입견으로 일상을 지옥으로 만든다면 얼마나 불행할까요.
사랑은 쪽팔림의 결정판
지난 추석 연휴에 케이블방송에서 영화 ‘접속’(1997)을 봤습니다. 아직 개인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PC통신 대화방의 상대인 줄 모르고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 앉아 있던 두 주인공(한석규, 전도연 분) 사이에 한 청년이 손잡이를 잡고 섭니다. 말을 심하게 더듬는 왜소한 체격의 그 남자는 물건을 팔 거라는 승객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말이 유독 서툴고 어눌하지만 창피를 무릅쓰고 이 자리에 선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에 말버릇을 고쳐보려 용기를 낸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이야말로 쪽팔림을 기꺼이 감수하게 하는 마법이 아닐까요.
쪽팔려서 좋은 것들
버스에 안내원이 있던 시절 “여기서 내려요!” 이 말을 못 해서 내려야 할 곳을 몇 정거장 지나쳤던 적이 있습니까? 기어드는 목소리로 부들부들 떨지라도 쪽팔림을 불사해야 하는 이유는 가야 할 곳을 가기 위해서입니다. 학교나 직장에서 첫 발표를 했던 순간을 떠올려봅시다. 윗사람한테 신랄한 평가를 받았을 때 좌절하지 않고 자신을 성장시키려면 역시 쪽팔림을 이겨내야 합니다. 쪽팔림을 장벽으로 여겨서 주저앉을지, 징검다리로 생각해 다음 단계로 나아갈지 자문해보면 답이 나올 것입니다. 사랑도 일도 일단 저질러볼까요. 이럴 때 ‘아니면 말고’와 ‘싫으면 말고’ 정신이 도움이 됩니다.
쪽팔릴 줄 아는 것도 용기입니다
‘아니 젊을 때야 뭔 짓을 못 해.’ ‘내가 그 나이만 됐어도 그 정도는 껌이지.’ 이런 말로 주저하고 쭈뼛거리며 변명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조용히 물어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필요한 것이 바로 쪽팔릴 줄 아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렇다면 쪽팔리는 상황은 어떤 때일까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때는 부끄럽거나 치욕스러울 일이 거의 없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려고 할 때, 무슨 말을 꺼내려 할 때, 그 마음먹은 바를 행동으로 옮길 때라야 비로소 쪽팔릴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나이를 걸림돌로 의식하지 않고 일을 도모하는 당신은 그래서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이왕이면 모양 빠지지 않고 근사하게 쪽팔리는 비법은 없을까요?
근사하게 쪽팔리는 방법
•내가 실수한 것은 화끈하게 인정합니다.
•약속에 늦었을 때는 반드시 사과합니다.
•모르는 것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어디서나 묻습니다.
•사랑과 감사 표현도, 친구랑 만남도 내가 먼저 제안합니다.
•조언이나 의견을 먼저 구합니다.
•‘그 나이에 왜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먼저 인정하고, 사과하고, 질문하고, 고백하고, 고맙다 하고, 제안한다고 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과해야 할 때 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야말로 훨씬 쪽팔리고, 면이 안 서는 짓입니다. 나이를 빌미로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말리거나 막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뭘 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고 합니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자존심을 구기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존심 살리고 자존감도 높이는 행위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것은 죽어도 못 하겠다면 하다못해 인터넷 검색을 해서 확인해도 됩니다. 혹시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내비게이션대로 운전해도 헤매고 있을 때 아직도 주유소에서나 주변 사람한테 묻지 않습니까? 예에 통달한 공자도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물어보고 또 물어봤다고 합니다. 풍습과 관례를 최대한 존중하면서요. 그러니 묻는 것은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고, 서로 체면을 살려주는 일입니다.
‘근자감’에 희망을 준 사람
‘근거 없는 자신감’을 줄인 말이 ‘근자감’입니다. 지난 50년 가까이 수학계 난제로 남아 있던 리드 추측(Read's Conjecture)을 대수기하학의 한 갈래인 호지(Hodge) 이론을 통해 증명해 수학계 노벨상으로 꼽히는 필즈상을 거머쥔 허준이 교수가 모교인 서울대학교 후배 학생들을 위한 강의에서 한 말입니다. 그동안은 과대망상이다, 허세다, 만용이다 하며 비웃음을 사거나 조롱감이 되었던 신조어가 바로 근자감입니다. 그런데 근거 있는 자신감도 줄이면 근자감이 될 텐데 왜 줄여서 부르지 않는지, 허 교수 얘기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성적이나 입상 경력 같은 근거 있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은 여러 가지 불운한 일이 겹쳐서 힘든 과정을 만나고 그 근거를 잃게 될 경우 쉽게 부서질 수 있습니다. 반면 근거 없는 자신감을 지닌 사람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힘든 과정에 놓일 때도 유연하게 자신의 목표를 변경합니다. 근자감은 인생을 끝까지 잘 살아가게 하는 큰 힘이 되더라고요.”
근자감이야말로 쪽팔림을 소화해낼 수 있는 바탕이자 에너지가 아닐까요. 이것 때문에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없더라도 나는 잘 해낼 수 있다는 무조건적인 자신감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간절해집니다.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얼굴이 예뻐서, 내 말을 잘 들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수를 하고 방황을 해도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부모 마음도 근자감의 원천이 됩니다. 그런 믿음이 있어야 쪽팔림을 당당하게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틈과 흠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빛
부서진 조각을 모은다 해도 온전히 합칠 순 없다
(중략)
완벽한 것은 없다
어디에든 틈은 있기 마련
빛은 그곳으로 들어오리니
우리에게 ‘I’m your man’이란 노래로 알려진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이며 소설가입니다. 그가 1992년 발표한 ‘송가’(Anthem)의 이 노랫말은 임상심리학 박사이자 불교 명상 지도자로 유명한 잭 콘필드(Jack Kornfield)의 책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담은 허술하게 쌓은 것 같지만 강한 바람에도 무너지는 법이 없습니다. 커다란 현무암 사이에 생긴 틈이 바람이 다니는 길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돌 사이 빈틈이 담장을 살리고 금이 간 틈새로 빛이 들어오듯, 사람 사이의 틈과 거리가 관계를 숨 쉬게 하고 살리게 하는 묘책이 아닐까 합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구슬 목걸이를 만들 때 일부러 흠집 있는 구슬 하나를 꿰어 넣는다고 합니다. 그 구슬을 ‘영혼의 구슬’(Soul Bead)이라고 부르는데 ‘모든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혜를 담고 있다고 하네요. 고대 페르시아에서도 최고급 카펫을 짤 때 아주 작은 흠 하나를 굳이 짜서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페르시아의 흠’(Persian Flaw)이라 부르는 이 행위는 ‘영혼의 구슬’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완벽할 수 없으며 불완전한 존재라 믿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빈틈이나 흠결을 들킬까봐 전전긍긍하지 맙시다. 자신에게나 상대에게나 완벽한 잣대를 내려놓은 채 ‘근자감’을 등에 업고 ‘쪽팔릴 줄 아는 용기’로 무장한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 하나 없는 멋진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저와 당신이 지닌 틈과 흠에서 아름다운 빛이 나올 거니까요. 고맙습니다.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1989)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모든 시간이 머뭇거림과 탄식과 질투로 가득했다고 고백합니다. 끝없이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했지만 끝내 한순간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참회합니다. 혹시 질투의 불길 속에서 자신을 태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질투로 아파하는 모든 분과 마음 미장공 아홉 번째 이야기 함께하겠습니다.
아직도 질투에 사로잡힌 당신에게
살림하는 전업주부로 산 세월이 많던 시절, 무릎 나온 바지에 애들 안 입는 낡은 티셔츠 입고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든 날 아침, 승강기에 같이 탄 이웃을 나도 모르게 훔쳐보게 됩니다. 옷차림부터 머리 매무새며, 들고 있는 서류가방, 풍기는 향수 냄새까지. 저는 물론 세수도 하지 않은 채입니다. 머리부터 발끝, 아니 구두 끝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또래로 보이는 여인. 역한 냄새 나는 쓰레기봉투를 든 나와 예쁜 백을 단정하게 든 그녀.
‘아 저 여자는 무슨 일을 할까? 얼마나 전문적이고 근사한 직종에 있는 걸까? 출근해서는 얼마나 재미 있고 또 의미 있게 하루를 보내고 돌아올까?’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보던 때도 많았습니다. 시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아이들 챙기느라 자신을 가꿀 수 없었던 제 모습이 창피스럽기도 했습니다. 발코니에서 내려다보이는 사람들 모습, TV에 나오는 유명인이나 드라마 속 주인공을 보다가 당신은 시기와 질투, 시샘하는 마음이 올라온 적이 있습니까? 이 감정이 도대체 뭐길래 나를 초라하게 하고 내 신세를 형편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할까요.
질투의 대상과 거리 : 최소한 사촌은 돼야 배가 아프다
친구가 성공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는다.
-고어 비달, 미국 소설가
영성이 높은 한 수도사가 금식 기도하며 수련 중에 있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유혹하고 훼방하려 해도 안 통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오늘 교구 인사에서 당신 동생이 주교가 되었다고 하는데….” 말을 맺기도 전에 “진짜? 말도 안 돼” 하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질투의 대상은 질투의 거리와도 밀접합니다. 부부나 연인, 형제자매, 친구 사이처럼 그 사람이 나와 얼마나 가까운지가 관건입니다. 거론한 대상이 자신과 너무 동떨어지고 격이 차이가 나면 질투가 거의 생기지 않습니다. 또래일 경우 질투의 불길은 활활 타오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사돈의 팔촌이 아니라 나와 가까운 혈연 관계인 사촌이 땅을 샀기 때문에 내 배가 아픈 법입니다. 평생 일면식도 없던 먼 친척이라면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기 마련이니까요.
만만할수록 불붙는 질투심
수십조 혹은 수백억 달러를 상속받았다거나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일론 머스크한테 질투를 느끼는 경우는 매우 드물 것입니다. 막연히 부러워하거나 경탄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그러나 매일 같이 운동하는 이웃이 경매로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샀다거나, 내 옆자리 동료가 주식으로 3000만 원을 벌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상대가 성취한 부와 행복의 크기가 내가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할 때 질투가 솟구칩니다. 또 이미 세상을 떠난 과거의 예술가나 과학자에게 질투가 일어나는 경우는 드뭅니다. 고인(古人)과 경쟁을 하지는 않으니까요. 동시대를 사는,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질투가 한결 커집니다. 질투는 시간적이나 공간적으로 나와 가깝고, 내용이나 크기로도 만만할 때 더 폭발해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질투는 죄가 없다?
질투(嫉妬)라는 글자에서 질(嫉)의 핵심은 계집 녀(女)에 있는 게 아니라 병 질(疾)에 있습니다. 괴로워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하고 성급한 마음 때문에 근심하다 결국 나한테 독이 되고 남에게도 독이 되는 것. 이러한 괴로움이 질투에 들어 있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투(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돌을 던졌으니 병이 들 수밖에요. 말이나 행동, 관계 따위로 손해나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병든 상태가 질투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질투의 신은 누구일까요? 바로 젤로스(Zelos)입니다. 한자 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는 질투를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로 꼽을 만큼 여자한테만 덮어씌웠는데, 서양에서 질투를 맡은 젤로스가 남신이라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젤로스는 폭력의 신 비아와 권력과 힘의 신 크라토스를 형제로, 승리의 신 니케를 누이로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서양 문화권에서 젤로스는 질투의 개념보다는 경쟁, 열의, 전념 같은 긍정적인 뜻을 더 많이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질투의 이중주 : 스타 탄생과 몰락 이야기
1937년 ‘스타 탄생’이란 이름으로 처음 영화로 만들어졌고, 2018년 세 번째 리메이크된 ‘스타 이즈 본’(A Star Is Born)은 사랑 영화이자 음악 영화로 알려져 있지만 질투가 주인공 못지않은 역할을 하는 작품입니다.
애리조나 하늘같이 타오르는
그대 눈동자
날 보는 그대 눈길에 불타고 싶어
내 영혼 깊숙이 캘리포니아
황금처럼 묻힌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빛을
찾아낸 그대
목이 메고 할 말을 찾지 못해
헤어질 때마다 가슴이 아파
해가 지고 밴드가 연주를 멈출 때
우리 모습 영원히 이대로
기억할 거야
(중략)
그대가 날 바라보면
온 세상이 사라지고
우리 모습 영원히 기억할 거야,
이대로
-OST ‘Always Remember Us This Way’(우리 모습 영원히 이대로 기억해)
중에서
나를 발견해주는 사람을 조심하라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외모가 걸림돌이 되어 낮에는 웨이트리스로, 밤에는 무명 가수로 무대에 오르던 앨리(레이디 가가 분). 천재 기타리스트이자 컨트리 뮤지션으로 명성을 날리는 슈퍼스타 잭 메인(브래들리 쿠퍼 분). 순회공연 중 우연히 찾은 바에서 노래하는 앨리를 보고 잭은 첫눈에 ‘캘리포니아 황금처럼 영혼 깊숙이 묻힌’, 그녀도 몰랐던 내면의 빛을 발견합니다. 나를 찾아내고, 무대에 세우고, 나를 키워주고 응원하는 사람과 결혼한 그녀. 내 진가를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무대에서 직접 만든 노래를 부를 기회를 주었으니, 두 사람은 이제 사랑밖에 할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망쳤어. 당신이 부끄러워. 안쓰럽고 그래. 당신 더럽게 못생겼어. 얼굴에 자신이 없어서 남한테 잘 보이는 게 더럽게 중요하지.”
전성기에서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잭과 달리 앨리는 스타 시스템에 힘입어 대형 토크쇼에 초대되는가 하면, 그래미상 3개 부문 후보로 선정될 정도로 승승장구합니다. 기쁜 소식을 들은 바로 그날, 잭은 술과 마약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독설과 폭언을 퍼붓습니다. 심지어 신인상을 받게 되어 시상식에 초대된 날, 앨리가 수상 소감을 말하는 옆에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소변을 보고 맙니다. 그 뒤 마음을 다잡고 알코올 중독 치료도 하는가 싶더니, 아내 앨리의 대형 해외 투어를 앞두고 목을 매달아 세상을 등집니다. 한 여자를 살렸지만 자신은 살리지 못했던,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남자. 앞선 기형도 시인의 독백과 겹쳐집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죄
질투는 오로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부정적인 감정 상태로 자신을 방치해 병이 되게 해서는 곤란합니다. 열의, 열정, 전념을 담당하는 젤로스 신을 불러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면 어떨까요. 제가 처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게 된 것은 남편의 공이 큽니다. 그 옛날 원고지에 글 쓰던 시절, 시외삼촌의 권유로 타자를 배운 남편을 보면서 마음에 질투의 불씨가 당겨졌습니다. 하지만 질투에 굴복하지 않고 선의의 경쟁과 열정이란 긍정적인 감정으로 바꾸어 저도 당시 ‘한메타자교사’로 컴퓨터와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물리적으로 매우 가까이에 있는 친밀한 관계에서 생기는 질투를 내 삶의 좋은 에너지로 바꿀 수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뭔가를 해내는 것을 지켜보는 건 자신에게 굉장한 자극을 주기 때문입니다.
질투를 놓아주고 나부터 행복해집시다! : 마음의 주인 노릇
질투에 함몰되어 자기 비하와 자학으로 자신을 파괴할 것인지, 그 감정이 나를 옭아매지 않도록 방향을 선회해 자기 발전, 자존, 자족, 건강한 자극으로 동기를 부여할 것인지 그 선택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주인이 나일 때만 가능합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그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질문해보세요. 질투는 남보다 나를 망칩니다. 내 화살로 나를 쏘는 것과 같습니다. 남을 질투할 시간에 나를 더욱 사랑해보면 어떨까요. 남과 견주며 끝없는 고통과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지 말고 나부터 행복해집시다.
층간소음을 대하는 자세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마음을 좀 바꿔보았거든요. 윗집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에 짜증만 낼 게 아니라 차라리 그 시간에 도서관 가서 시원한 바람 쐬며 밀린 책을 읽기로 했습니다.”
퇴근하고 나서 집에서 좀 쉴라치면 매번 위층 아이들 콩콩콩 쿵쿵쿵 뛰어다니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는 청취자 사연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옵니다. 분노가 폭발해 인터폰을 누르고 쳐들어갈까 별 생각을 다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아, 내가 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답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놨던 독서 목록도 챙기고 이참에 은퇴 이후 설계도 할 겸 주택관리사와 노무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사연의 주인공은 아주 밝은 목소리로, 마음을 탁 달리 먹었더니 퇴근하는 발걸음이 전처럼 무겁지 않고 한결 가벼워졌다고 고백합니다.
화살의 방향과 성격 유형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나 고통을 당할 때 이웃집을 탓하고 남을 탓하고 세상을 탓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눈앞에 닥친 불행과 갈등을 오로지 자신을 탓하며 자책하고 절망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살의 방향을 외부로 겨눌수록 점점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에너지가 자신을 둘러싸고 사방팔방으로 퍼집니다. 비난과 원망과 책임 전가라는 독화살을 누구에게 쏠지 그 궁리로 밤을 새우기도 합니다. 온통 뾰족한 가시를 두른 사람에게 누가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까요. 그 화살은 자기 자신에게 향할 때도 마찬가지로 치명적입니다. 화살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 생각해보면서 나는 어떤 유형인지 살펴볼까요.
‘남 탓 형’과 ‘내 탓 형’ 인간
자신에게 어떤 사건이나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남 탓을 하는 유형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일이 꼬인 것은 그 사람 탓이야’, ‘내가 마마보이가 된 것은 순전히 우리 엄마 탓이지’ 이런 식으로 아내는 남편을, 자식은 부모를 탓합니다. 탓할 사람이 없으면 친구를 탓하거나, 직장 상사를 탓하거나, 아니면 길에서 부딪혔거나 지하철에서 만났던 사람조차 탓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 자식, 배우자 등 가까운 사람부터 탓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남을 탓하고 원망하고 증오하는 경우를 ‘남 탓 형’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매사에 남 탓을 하는 사람은 정작 자기는 멀쩡합니다.
“나 걔랑 헤어졌어. 내가 찼지. 애가 좀 사이코야. 베풀 줄도 모르고. 수십 번 만나도 밥은커녕 커피 한잔을 안 사더라고, 인색하기 그지없어. 아 시원하다.”
연애가 깨졌어도 상대방 때문에 그렇다고 판단을 내립니다. 자기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굳게 믿는 탓에 스트레스도 별로 받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기분이지 남 사정이나 생각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정신의학에서 인간이 방어기제로 흔히 사용하는 ‘투사’(Projection)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문제의 원인이 자기 외부에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매사 남 탓을 하면 불안과 죄책감에서 잠시나마 피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경우가 ‘내 탓 형’입니다. 어떤 일이 터질 때마다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겁니다. 모든 일을 무조건 내 탓으로 돌리는 ‘내재화’(Introjection)라는 방어기제도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화살의 방향을 떠올리면 훨씬 이해하기 쉽습니다. 겉으로는 착하고 겸손해 보일지 모르지만, 어떤 사건이나 갈등이 발생했을 때 자신을 꾸짖고 벌주고 심판하고 자책하고 자학하는 유형입니다. 분노나 불안을 억눌러놓아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겁’과 ‘오만’ 사이
남 탓을 하는 경우는 한마디로 비겁한 병에 걸린 분들입니다. 자기는 쏙 빼고 다른 사람을 들들 볶는 사람이니까요. 거꾸로 내 탓 형은 오만한 병에 걸린 경우입니다. 자기 자신을 달달 볶는 사람입니다. ‘아, 내가 왜 그랬을까’, ‘그때 그렇게 행동했으면 안 되는데’, ‘거기서는 이 말을 했어야 했는데’ 이러면서 자꾸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고 자책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유형입니다. 두 유형 모두 부족하고 실수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게 아니면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완강하게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사람은 자신이 없을 때 그렇습니다. 어떤 선택이나 판단에서 책임을 자신이 지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기 때문에 비겁합니다.
어떤 유형이 더 위험할까요?
내 탓 형이 오히려 더 위험합니다. 자신을 완벽하고 빈틈없고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라 규정합니다. 거기에서 바로 오판이 시작되고 ‘오만(傲慢) 병’이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높은 기대치에 도달했던 몇몇 순간의 모습만 자기 본모습이고 오로지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착각과 불행이 쌍두마차로 자신을 끌고 가기 시작합니다. 그로 인해 두 가지 유형 모두 상처를 입고 불행한 상황에 놓이는데, 더 심각한 것은 남 탓을 하는 것보다 내 탓을 하는 경우입니다.
남 탓도 종종 해야 합니다!
하지만 남 탓을 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때가 의외로 참 많습니다. 살다 보면 내가 원인이 아닌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인과가 분명해 보이는 문제는 대안을 찾아 자기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고칠 수 없는 문제까지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으려 하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처방전처럼 헛짓거리를 하게 됩니다. 최소한 남 탓이라도 하면 삶을 놓아버리는 극단적 선택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그럽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남 탓은 필수라고요. 남 탓을 열심히 해야 자신이 정신적으로 안정된다고 말입니다. 고칠 수 없는 문제에 자기 탓을 하면 자존감은 추락하고 마음은 갈수록 조급해져 불안과 우울을 달고 살 수 있으니까요.
남 탓을 하기는 쉽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탓은 위험합니다. 자신을 탓하는 병에 걸리면 그 오만함이 어떻게 펼쳐지냐면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 허물에 겉으로는 관대한 척하고 다 품고 배려하는 척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속으로는 무시하고 경멸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세운 높은 기대 수준을 타인에게도 부지불식간에 요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오만함은 위험천만한 부분입니다. 당신은 어느 쪽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십니까?
탓탓탓 말고 타타타!
그렇다면 대안은 없을까요? 이 노래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그런 거지 음음음 어 허허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후략)
‘꽃순이를 아시나요’, ‘은하철도 999’ 주제가를 불렀던 김국환이 1992년 세상에 선보인 노래, ‘타타타’. 마지막에 ‘어허허허허허!’ 웃음소리가 백미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타타타’는 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뜻합니다. 변하지 않는 궁극적인 진리라고도 하며,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이라고 합니다.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없는 걱정도 만들어서 일평생을 살아가는 게 우리입니다. 이 세상을 ‘탓탓탓’ 하지 말고 ‘타타타’ 하면서 살아 볼까요. 편 가르고 고집과 만용을 부리며 대립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삶으로 남은 인생 아름답게 수놓아볼까요. 그럴 때 ‘탓 병’이 치유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더위와 습기 탓하지 말고 허허허 웃으며 몸도 맘도 건강하시길 빕니다. 마음 미장공 여덟 번째 이야기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딸아, 되는 대로 살아. 걱정한다고 잘 되는 것도 아니더라. 그만하면 됐니라.” 아침 안부 전화 끝에 여든 중반을 넘긴 아버지, 툭 한마디 던지십니다. 갑자기 참았던 눈물이 울컥 터져 휴대전화 바탕화면이 부옇게 번집니다. 우리는 가끔, 어쩌면 자주 마음이 바닥을 치고 속절없이 주눅 들 때가 있습니다. 보잘것없이 초라해진 자신에게 되는 대로 살아도 된다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고 말해준다면 어떨까요? 살아보니 별것 없다고 끌탕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누군가 곁에 계십니까? 이런 물음으로 마음 미장공 일곱 번째 이야기 열어봅니다.
왜 ‘추앙’ ‘추앙’ 하는 걸까요?
5월 29일 방송이 끝난 뒤에도 화제와 열풍 속에 있는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jtbc). 4년 남짓 공들여 이 드라마를 준비했다는 박해영 작가가 이제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며 내세운 것이 ‘추앙’입니다. 텔레비전 뉴스 자막은 물론이고 프로야구 경기장 응원 구호에도 ‘추앙’이 등장하고, 광고 문구에서도 ‘추앙’이 빠지면 섭섭할 만큼 대세 중의 대세가 되었습니다. 추앙(推仰), 높이 받들어 우러러보는 것을 뜻합니다. ‘새가 앞으로 날 수 있도록 손으로 밀어준다’는 추(推)와 자기 앞에 있는 사람에게 무릎 꿇고 경배하는 모습을 표현한 앙(仰)자가 합쳐진 것입니다.
다른 삶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날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소주 네 병씩 마시는 남자 구 씨(손석구 분). 공장일도 밭일도 없는 날은 아침부터 마신 술로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고 넘어지고 맙니다. 얼굴이 깨진 채 피를 흘리는 그 모습이 오늘따라 눈에 띈 순간. 나도 딱 그런 상황임이 분명합니다. 남자친구에게 버림받고 빚까지 떠안아 신용불량자가 되기 일보 직전인 데다 카드회사 계약직으로 일하며 폭언과 모욕을 일삼는 팀장에게 영혼마저 빼앗길 지경인 여자 염미정(김지원 분).
“날 추앙해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절벽 밑바닥으로 추락한, 텅 비어버린 자신을 ‘추앙’으로 채워달라고, 자기 밑바닥까지 보여준 남자에게 명령합니다. 그것은 아마 상대가 아닌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이고 선언이며 다짐에 진배없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힘들어하는지도 알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눈길이 갔으니까요. 원래 나와 당신은 하나니까요. 당신이 아프면 나도 아프니까요. 인간(人間)이란 말처럼 우리는 사이에서 존재를 발견하니까요.
예전과 달라진 나를 경험하는 방법
“확실해? 봄이 오면 너도 나도 다른 사람 되어 있는 거?”
“확실해.”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인생 종점에 도착한 것마냥 지리멸렬한 두 남녀가 그렇게 서로 ‘추앙’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법이 시작됩니다. 자책과 자학이 일상이던 자신이 어느 순간 사랑스러워집니다. 그러다가 상대방도 예뻐 보입니다.
“자꾸 답을 기다리게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두고 봐라 나도 이제 톡 안 한다 이런 보복은 안 해요. 당신의 애정도를 재지 않아도 돼서 너무 좋아요. 그냥 추앙만 하면 되니까. 당신 톡이 들어오면 통장에 돈 꽂힌 것처럼 기분이 좋아요.”
아무리 지랄 맞은 성미도, 문자 메시지를 읽고 씹든 안 읽고 씹든 그냥 웃으며 받아들입니다. 그 사람이 내뱉는 말에 휘둘리거나 끌려다니지 않고 행간을 읽을 줄 알게 됩니다. 말 자체, 글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괄호 안에 숨어 있는 속뜻을 보물찾기처럼 찾아내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렇게 드라마 속 구 씨와 미정은 달라집니다. 화려한 겉모습이나 남 부러워하는 직업, 유창한 말솜씨 같은 포장지 따위가 필요 없습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 나와 남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참사랑, 추앙이 싹트니까요.
‘추앙’ 그리고 나마스테
아인슈타인은 어느 날 TV 뉴스를 통해 인도 거리에서 두 손 모아 인사하는 맨발의 간디를 봅니다. 카스트 계급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으로 멸시받던 사람들에게도 합장하며 절을 하던 간디. 그가 뭐라고 인사하는지 궁금해진 아인슈타인은 편지를 보내고, 간디는 이렇게 답장을 합니다.
“나는 온 우주가 거하는 당신 내면의 장소에 절합니다. 빛과 사랑, 진리와 평화, 그리고 지혜가 깃든 당신 내면의 장소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것이 ‘나마스테’의 뜻입니다.”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께 문안드립니다. 인도와 네팔에서 흔히 주고받는 인사말로, 만났을 때나 작별할 때도 사용합니다. 다신교인 힌두교 문화권에서는 수많은 신이 각자의 몸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상대방을 신처럼 여긴다고 합니다. 자신이 믿는 신은 물론 상대가 숭배하는 신에게도 경의를 표하는 마음이 이 인사에 깔려 있습니다. 유일무이한 우주적 가치를 지닌 당신에게 온 마음으로 경배를 드린다는 뜻의 ‘나마스테’. 상대의 존재 가치에 가장 높은 존경을 나타내는 말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간디의 답장을 받은 당대 최고의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뒤통수를 세게 맞은 충격에 휩싸입니다. 우주의 신비를 풀기 위해 평생을 바친 아인슈타인이 그토록 찾아 헤맨 답이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나마스테’와 같은 뜻을 지닌 말이 있습니다. “반갑습니다!”와 “고맙습니다!”가 그렇습니다. ‘반’이나 ‘고마’는 우리 고대 선조들이 신(神)을 뜻하는 인칭대명사로 썼다고 합니다. ‘당신은 반(신)과 같습니다’, ‘당신은 신과 같은 사람입니다’라는 의미를 지닌 최상의 인사였다고 전해집니다. ‘반’은 ‘환하다’, ‘하늘의’라는 뜻으로 넓어져 지금까지도 우리 일상생활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품이 바를 때 우리는 ‘반듯하다’고 하고, 신의 뜻이나 약속처럼 꼭 이루어지는 것을 ‘반드시’라고 말합니다. ‘반짝반짝’, ‘반딧불’처럼 밝고 온전한 신의 속성을 표현한 말에도 ‘반’이 들어갑니다.
이렇게 깊고 아름다운 뜻이 우리말에 들어 있는 줄 저 역시 잘 몰랐습니다. 내 마음 밭에 미움과 증오의 씨앗을 뿌릴 게 아니라 나와 상대를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는 말씨를 심으면 좋겠습니다. 말이 지닌 참뜻을 새기면서 승강기에서 마주친 새로 이사 온 이웃께 먼저 인사를 건네볼까요. 반갑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음 미장공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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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앙’하는 마음을 꼭 닮은 노래
내 마음속 성역에 누가 있습니까? 섣불리 충고나 조언하지 않고 원치 않는 평가나 판단도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있는 그대로 나를 지켜봐 줄 사람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 사람 인생에 개입해서 간섭하지 않고 있습니까? 원망 한 톨 없이, 미움 한 줄기 없이 그저 아낌없이 사랑만 줄 수 있다면, 나도 당신도 그 누구라도 해방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나도 살고 그 사람도 살아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떡시루처럼 켜켜이 쌓이고 쌓인 증오를 딱 멈추고, 눈 뜨자마자 달려드는 내 생애 침입자들을 쓰러뜨리지 않고 웃으며 환대할 때 진정한 사랑, 추앙이 완성되지 않을까요. 1981년 당시 라트비아 가요 콘테스트 우승곡 ‘마라가 준 인생’()에 1997년 심수봉이 직접 가사를 붙여 새롭게 부른 ‘백만 송이 장미’. ‘추앙’도 ‘나마스테’도 ‘반갑습니다’도 절묘하게 담겨 있습니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 오라는
진실한 사랑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중략)
이젠 모두가 떠날지라도 그러나
사랑은 계속될 거야
저 별에서 나를 찾아온 그토록
기다린 인연인데
그대와 나 함께라면 더욱더 많은
꽃을 피우고
하나가 된 우리는 영원한 저 별로 돌아가리라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2015년 가수이자 방송인 서유석이 발표한 노래,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단다’입니다. ‘나이 듦’을 솔직담백하게, 때로는 풍자와 해학으로 묘사한 노래 중간에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는 아름다운 시절이 정말 소중했던 시간이라고 되새깁니다. “인생이 끝나는 것은 포기할 때 끝장”이라던 세상 떠나신 아버님 말씀이 새롭게 들린다는 그의 고백은 노래가 끝나도 긴 여운을 남깁니다. 여섯 번째 마음 미장공 이야기는 ‘검버섯 핀 바나나’로 시작합니다.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단다!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단다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 출발이다
삼십 년을 일하다가 직장에서
튕겨 나와 길거리로 내몰렸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백수라 부르지
월요일에 등산 가고 화요일에 기원 가고
수요일에 당구장에서
주말엔 결혼식장 밤에는 상가집
(중략)
누가 내게 지팡이를 손에 쥐게 해서
늙은이 노릇하게 했는가?
세상은 삼십 년간 나를 속였다
마누라가 말리고 자식들이 놀려대도
나는 할 거야
컴퓨터를 배우고 인터넷을 할 거야
서양말도 배우고 중국말도 배우고
아랍말도 배워서
이 넓은 세상 구경 떠나나 볼 거야
(후략)
검버섯 핀 바나나
지난 어버이날 부모님 뵈러 갔을 때입니다.
“어느 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는데 바나나 껍질이 거뭇거뭇하게 된 걸 통째로 버렸지 뭐니? 그 귀한 걸….”
그게 너무 아까워 어머니는 경로당에 가져가서 어르신들과 같이 드셨다는 겁니다. 바나나. 지금은 사시사철 가장 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흔하디흔한 과일로 전락했지만 어린 시절 얼마나 귀한 과일이었나요. 한 다발은커녕 낱개 하나도 먹기 어려워 부잣집 아이들 먹는 것 바라보며 군침만 흘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에야 귀하든 아니든 어머니 입장에서는 먹는 걸 버린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던 거죠. 한편으론 이제 늙고 병들어 쓸모없어졌다고 버림받는 자신을 보는 양 서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 얘길 들으면서 제가 몇 해 전 쓴 시가 떠올랐습니다.
검버섯 핀 바나나
샛노란 바나나 한 다발
하얗고 단단한 속살
며칠 지나 남겨진 세 송이
그새 늙어 검버섯 점점이
어떻게 이별할까 궁리 끝에
우유 붓고 보들보들 살점 썰어
드륵드륵 클클클클
바나나 셰이크로 안녕히
숨 거두기 전 가장 달콤했던 이여
바나나는 익을수록,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에 더 가까울수록 진가를 발휘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순간, 비록 겉모습은 시커멓고 말라비틀어졌지만 더 아름답고 더 찬란하고 더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설익었을 때는 설탕이나 시럽, 꿀처럼 단맛을 첨가해야 바나나 음료가 제값을 겨우 합니다. 무르익지 않으면 떫고 신맛이 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성숙하지 않은 시절엔 뭘 넣어도 부족한 맛이 납니다. 깊이 농익었을 나이엔 이것저것 넣지 않아도 그 자체로 그윽하고 충분하고 깊습니다.
노인은 살아 있는 박물관
노인, 어르신 한 사람이 죽는 것은 살아 있는 박물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격언이 있습니다. 그만큼 어르신들이 드리워주는 그늘, 아낌없이 나누는 지혜와 경험, 그 울타리는 박물관 하나를 꽉 채울 만큼 큽니다. 우리 속담에도 ‘일 못 하는 늙은이, 쥐 못 잡는 고양이도 있으면 낫다’, ‘늙은 고양이랑 늙은이는 없으면 옆집에서 꾸어 와서라도 모시는 게 좋다’란 말이 있습니다. 비록 젊을 때처럼 팔팔하게 역할은 못 하더라도 언제든 의지하고 의논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겉으로는 쓸모없을 듯 보여도 나름대로 쓸 데가 있기 마련입니다. 바나나만 하더라도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기 전, 쓸모없다고 느껴질 때가 가장 찬란하게 빛나고 가장 달콤하다는 게 우리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습니다. 부모님을 뵈러 가서 잠깐 들었던 이야기가 시 한 편으로 연결되었네요. 그분들이 저희에게 음으로 양으로 큰 기운과 가르침을 주신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고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찬밥을 대하는 자세
봄이 완연해지더니 계절은 이제 초여름으로 향해 갑니다. 이럴 때 유독 신경 써야 할 게 있습니다. 바로 밥과 반찬입니다. 쉬이 상하고 금방 맛이 갑니다. 기껏 지은 밥이며 된장찌개, 고등어조림이 상할라치면 만든 사람 속도 무척 상합니다. 재료가 아까운 건 물론이고 장 보고 다듬고 만든 정성에 마음이 참 쓰리고 아픕니다. 저는 이렇게 먹다 남은 찬밥을 모았다가 누룽지를 만듭니다. 버리지 않고 고쳐 쓰는 부모님, 할머니 마음을 닮고 싶어서입니다.
찬밥이 누룽지가 되는 과정은 절묘합니다. 적당히 태워 생긴 탄소 입자는 날카롭지 않아서 세포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몸속 독소를 흡착, 분해해 씻어낸다고 합니다. 누룽지는 자신을 태워 훌륭한 영양제이자 해독제로 변신합니다. 전날 과음으로 힘들 때나 소화가 안 될 때 누룽지 끓여 먹으라는 어른들 말씀이 매우 일리 있었네요. 다만 성질을 누그리지 않으면 누룽지 만드는 일이 화를 돋우는 참사가 되기도 하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냉장고 안 찬밥을 모아
누룽지를 만듭니다.
급한 마음에
미처 다 눋지 못한 밥알들
주걱으로 긁을라치면
손목도 시리고
모양도 죄다 흐트러집니다.
진득이 기다리면 될걸
조금만 더 참으면 될걸
날 선 마음 누그리고
모난 마음 둥글리고
먼 산 한 번 바라보고
강아지 눈 맞춰
잘 잤니 인사하고
솥뚜껑 열어
누우렇게 고운 빛깔
얼굴 반쪽 내민
누룽지 만났습니다.
(‘혼자 술 마시는 여자’ 178~179쪽)
묵은지 유감(遺憾)
‘먹방’, ‘쿡(Cook)방’이 개인방송 채널까지 대세로 자리 잡은 지 벌써 여러 해입니다. 더욱이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어느 때보다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면서 의식주(衣食住)가 아닌 ‘식의주’(食衣住) 시대가 왔나 봅니다. 다종다양한 요리 방송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식재료가 바로 ‘묵은지’입니다. 오랫동안 숙성되어 푹 익은 김장김치를 일컫는 묵은지. 요리에 재능이나 관심이 없거나 요리할 시간이 없는 사람에게는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질 운명이기 십상입니다. 발효음식 특유의 역한 군내와 물컹한 식감까지, 김치냉장고 속 골칫거리에 불과하니까요.
할머니와 묵은지
하얀 곰팡이가 다닥다닥 피어올라 도저히 못 먹을 것 같은 묵은지 한 포기라도 버리지 않고 흐르는 물에 몇 번이고 빨아서 김치만두로, 비지찌개로 새롭게 만들어주시던 우리 할머니. 거북이 등가죽처럼 거친 손으로 맛난 음식을 뚝딱 해주시던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립습니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묵은지라도 그 감별 기준은 버릴 것인가 쓸 것인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먹을 것인가, 아니면 속을 털어내고 깨끗이 빨아서 먹을 것인가 이 두 가지였습니다. 취사선택이 아니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잘 쓸 것인가입니다.
누룽지와 묵은지 닮은 마음
좋은 것, 쉽고 편한 것, 화려한 것만 취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함부로 대하거나 버렸던 것은 아닐까. ‘살림살이’한다는 주부가 정작 살리는 일이 아닌 버리는 일, 죽이는 일을 거리낌 없이 해왔던 것은 아닐까. 낡았다고, 싫증 났다고 홀대했던 것은 아닐까 되묻습니다. ‘나이 듦’, ‘늙음’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였던 것은 아닌지 자꾸 부끄러워집니다. 그래서 또 배웁니다. 검버섯 핀 바나나, 자신을 태워 누룽지로 승화한 찬밥, 곰삭은 묵은지처럼 익을수록 깊고 달콤하고 구수한 삶을 살겠노라 다짐합니다.
“시어머님 간병을 번갈아 할 수 없으니까 정말 애가 타고, 일주일 넘게 혼자 맡아 하시는 형님께는 너무 죄송해서 어쩔 줄 모르겠더라고요.”
코로나19 확진자가 하루 60만 명에 육박할 정도였던 지난 3월 중순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시어머니가 입원한 B씨. 큰동서와 번갈아 간병을 할 요량으로 PCR 검사를 하려는데 본인이 코로나19 확진 후 격리 해제한 지 2주가 지나지 않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좌절했다.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가족까지 급박하게 대처할 일이 많은 상황에서 고통과 역할을 함께 나누지 못한다는 현실이 너무 괴로웠다고 토로했다.
어떤 가족은 자녀가 시간을 내어 찾아와도 요양원에 격리된 부모님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장례식에 조문도 받을 수 없었다. 방역 단계가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예약한 결혼식장과 날짜는 번번이 바뀌고 연기되다가 예비 신랑 신부와 그 가족은 끝내 갈등 속에 파투가 나는 경우도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가족, 친구, 동료, 이웃과 사회를 갈라놓았다. 특히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방역지침은 심리적 거리마저 소원하게 해 인간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끼쳐온 것이 사실이다.
마스크의 역설?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강제했던 실외 마스크 착용이 5월 2일부터 해제되었다. 혹시나 하고 청계천으로 산책 나선 날.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마스크 벗은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기까지, 그리고 다음 날 외출할 때도 거리나 공원, 버스정류장, 지하철 등에서 마스크와 함께했다. 지난 2년 남짓 마스크에 길들여져, 규제가 이제는 생활의 도구가 된 것일까.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남겨준 불편함과 제한이 안전과 건강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준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2020년 첫 발병부터 지금까지 온 세상을 휩쓴 코로나19라는 역병(疫病)이 어느 정도 감당할 수준이 되면서, 그동안 단절되고 막혔던 부분을 어떻게 복구하고 대처해나갈지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가족의 재발견
2021년 영국 통계청이 발표한 연령대별 행복도 조사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코로나19 기간 중 SNS를 활용한 노년층의 행복도가 젊은 세대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직접 대면하는 활동이 왕성했던 청년층은 행복도가 떨어진 것과 달리 비대면이더라도 가족과 유대를 잃지 않았던 노년층은 행복도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연령이 높아질수록 자신이 가진 인맥 안에서 깊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열망이 더 크기 때문이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가 2020년 조사를 바탕으로 발간한 ‘대한민국 행복지도 2021-코로나19 특집호’에서도 친밀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더욱 많이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노년층이 젊은 세대보다 감정을 잘 다스리고 삶의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있다는 점도 행복에 영향을 준 요인으로 밝혀졌다.
인간관계에서 폭은 줄이되 깊이에 초점을 맞추면서 가족 간 대화가 늘어 사이가 더 좋아졌다는 사례도 많이 발견된다. 예전 같으면 퇴직한 아버지나, 취업 준비하는 자녀나 밖으로 돌기 바빠 ‘빈 둥지 증후군’인 어머니의 마음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부모 역시 MZ세대 자식이 얼마나 따로국밥 불통인지 화병이 났을 텐데, 코로나19 덕분에 온 가족이 서로를 지켜보고 관찰할 시간이 생기면서 ‘많이 힘들지?’ 물어봐 줄 수 있게 되었으니 한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까 싶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자기를 들여다보고 주변을 살펴볼 특별한 시간을 주었다. 또 일상에서 찾는 소소한 행복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접촉 아니어도 언제나 접속 중
긴 코로나19 터널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점점 비대면 문화에 익숙해지고 있다. SNS나 메신저, 원격 화상회의 장치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때로는 폭넓게 때로는 깊숙한 이야기까지 자유롭게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영유아부터 청장년 대상 활동뿐 아니라 시니어 관련 교육, 봉사, 인지치료 등에도 비대면 화상 방식이 선호되는 추세다. 변화에 앞질러 새로운 환경에 대처하는 곳도 눈에 띈다. 인천을 지역 기반으로 치매 예방 및 인지 교육을 펼치는 한국시니어교육센터의 경우, 예전처럼 요양원이나 주간보호센터로 직접 찾아가는 대신 매주 일정한 시간에 원격 화상강의 방식을 이용해 어르신들을 만나 소통하고 있다. 비대면 화상 프로그램 시행 초기에는 방역과 안전을 내세웠지만, 2년 남짓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면서 장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방역 기준이 완화되면서 온라인과 오프라인 소통을 병행할 수 있으니 그 효과와 만족도는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일상의 소중함과 연결 : ‘딥 콘택트’(Deep Contact)
코로나19 이전 우리는 잘 차려입고 꾸미고 시간을 들여 어딘가로 이동해서 누군가를 만나 사교와 업무를 수행해왔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대면 대화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는지 돌이켜보자. 그런데 코로나19를 겪으며 대부분의 만남이 비대면, 재택(혹은 특정 장소가 아닌 카페나 대중교통 등)으로 바뀌면서 모종의 해방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인간관계에서 고립과 단절을 가져와 고통으로 다가왔던 사람들도 어느덧 방역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여기저기 걸쳐놓고 집중하지 못했던 관계는 과감히 정리하고 자신에게 소중한 관계에 깊이 몰입하는 ‘딥 콘택트’의 시대가 주목받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