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을 맺어주는 국제결혼회사의 주선으로 베트남 현장에 가 봤다. 한때 중국 신부가 인기였지만, 지금은 베트남 신부가 1위라는 것이다. 솔직히 베트남 여성을 신부로 맞이하려는 한국 남성들은 대부분 농촌 총각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40대 화물차 운전기사, 50대 중소기업회사 사장, 60대 작곡가 등 연봉이 최소 5000만 원 이상 되는 사람들이었다. 또 대부분 재혼이었다. 국제결혼을 하려면 연 수입이 최소 1800만 원이 넘는다는 증빙이 있어야 한다. 그리 높은 기준은 아니지만, 농촌 총각들은 연 수입을 증빙할 자료가 없는 것이 문제다.
베트남 신부를 맞이하려는 한국 남자들에게 물어봤다. 왜 결혼 상대자를 한국이 아닌 베트남에서 찾느냐고. 한국 여자들과의 아픈 추억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한국 여자들은 결혼 조건이 너무 까다롭다는 것이다. 제일 큰 조건은 재산이다. 특히 재혼의 경우 그 조건이 더 혹독하다고 말한다. 아내의 지나친 씀씀이에 지쳐서 이혼했다는 사람, 지나친 잔소리에 한국 여자가 무서워졌다는 사람, 한국 여자와 결혼하면 충돌이 잦을 것이니 차라리 외국 여자를 데려오면 친구같이 대해주겠다는 자녀의 요청 등 외국에서 상대자를 고르는 이유는 다양했다. 쓰라린 추억을 빨리 잊고 새 인생을 개척해보겠다는 사람, 한국 여자들이 눈이 너무 높아 차라리 백지장에 새 그림을 그려 완성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 여성들은 출산을 기피하는 데 반해 베트남 여성들은 출산을 선호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한국의 겨울 날씨가 너무 추워 겨울 처가가 있는 베트남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남자도 있었다.
베트남 신부들이 한국 남성을 보는 시각은 좋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경제력이다. 베트남은 일인당 국민소득이 2014년 기준 2000달러 수준이다. 우리나라는 3만 달러를 목전에 두고 있다. 약 10배 정도 차이가 날 때 국제결혼이 왕성하다고 한다. 그러나 호치민, 하노이 등 대도시는 이미 일인당 국민소득이 5000달러 수준이고 매년 100달러씩 오르고 있다니 그 격차는 점점 더 좁혀지고 있다. 베트남은 역동적인 나라다. 1억 명 가까운 인구에 35세 미만 인구가 전체의 60%라는 추정을 봐도 그렇다. 중국에 이어 곧 우리나라 제2의 교역국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베트남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지금이 피크이고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맞선에 나온 베트남 여성들의 직업은 학교 교사 등 다양했다. 아버지가 작은 어선을 갖고 있어 경제적으로 넉넉하다는 여성도 있었다.
필자가 본 베트남 신부 후보들은 한결같이 예쁜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몸매도 날씬했다. 피부도 이웃 동남아 국가들과 달리 하얗고 깨끗했다. 긴 생머리에 옅은 화장, 세련된 의상 등 누구에게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 외모였다. 외모를 중요시하는 한국 남성들에게 신부 후보들의 외모는 불만이 없어 보였다. 대부분 순수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간혹 너무 키가 작다고 거절하는 사례는 있다.
그러나 말도 안 통하는 베트남 여성과 과연 의사소통이 가능할지 궁금했다. 그러나 구글 번역 앱이 있어 스마트폰에 대고 말하면 곧바로 베트남어로 번역되어 나온다. 베트남어도 한글로 번역되어 나온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기 때문에 초기에는 오해도 생긴단다. 또 3년 정도면 의사소통하는 데 큰 불편함은 없다고 한다.
당구가 2020년 도쿄올림픽 정식종목에 도전했으나 다른 종목에 밀려났지만, 2024년 파리하계올림픽에서 정식종목 채택에 재도전한다고 한다.
여러 보도에 따르면 당구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은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당구 동호인으로서도 반가운 일이다.
정식 종목 채택은 당구를 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달라져 당구의 위상도 높아진다. 당구 치러 간다고 하면 지금은 오락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앞으로는 운동하러 간다는 말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프로 당구 선수들의 위상도 높아질 것이며 당구를 즐기는 동호인들의 자부심도 커질 것이다. 그러면 저변인구는 더 폭넓게 늘어날 것이다.
정식 종목 채택 여부는 세계 몇 나라가 참여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당구는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유럽이 강하다. 유럽 외에는 남미, 이집트, 터키, 베트남, 중국, 일본, 우리나라도 저변 인구가 넓다. 저변 인구 면에서는 자격이 충분하다. IOC위원의 상당수가 유럽 사람들이라는 점도 긍정적으로 보인다.
아시안게임에서는 1998년 방콕 대회부터 2010년 광저우 대회까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었다. 2002년 부산 대회 3쿠션 결승에서 황득희 선수가 우승해서 금메달리스트로 남아 있다.
당구는 스누커, 캐롬, 풀(포켓볼)을 3대 큐 스포츠 종목으로 본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강세인 종목은 3쿠션 종목인 캐롬이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작년에 이어 올해 세계팀3쿠션대회에서 우승하는가 하면 김행직 선수는 2017년에 세계 대회에서 연속 2회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들 외에도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가 여럿 있고 자라나는 새싹들 중에도 세계정상을 노리는 선수들이 많다. 반면에 스누커와 풀 종목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대중화 되어 있지 않아 앞으로 국가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종목이다.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배출한 스켈레톤을 봐도 우리 선수들의 재능으로 볼 때 당구는 훨씬 성공 가능성이 더 높다.
3쿠션이 올림픽 종목에 채택된다면 개인전과 세계팀3쿠션대회처럼 단체전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작년에 이어 우리 선수가 연속 우승한 것을 보면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딸 가능성은 높다. 유럽 선수들 플레이를 보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공을 맞히기 위해서 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수들은 한 사람씩 교대로 치는 스카치 방식에서 다음 선수가 치기 좋은 공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히 보인다. 이것이 우리의 강점이다.
댄스스포츠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게임에 시범 종목으로 채택된 바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저변인구가 북반구 몇 나라에 국한되어 있고 심판 기준도 애매해서 정식 종목 채택이 어려운 상태이다. 반면에 당구는 심판의 기준이 비교적 명확하다. 판정 시비가 생길 우려가 적다. 필요하다면 비디오 판독으로 더욱 명확한 판정을 볼 수도 있다.
베트남 커피 진하게 한잔 내려서 거실 소파에 앉아 일간지를 펼쳐든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새벽녘 잠결에 ’받들어 버린‘ 마나님의 분부가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엄명을 좇아 먼저 베란다 구석에 있던 큼지막한 빨래 통을 옮겨온다. 아내가 덮고 자는 흰 이불을 그 안에 담는다. 세재를 세 가지나 섞어 골고루 뿌려준다. 충분히 적실만큼 물을 쏟아 붓는다. 그리곤 자근자근 밟는데 철퍼덕 철퍼덕 거품과 더불어 주말 오전 한바탕 소동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결혼이후 처음이지 싶다.
온몸 여기저기 축축해진 땀방울에 이만하면 되었을까 하는 순간, 귀신같이 보내온 아내의 메시지엔 베란다 세탁기 돌리는 방법이 마저 적혀있다. 헹굼, 탈수 등 순서에 따라 꾹 꾹 버튼을 눌러 세팅을 따라하는데 제대로 된 건지 미심쩍다. 외출한 사람한테 전화를 하자니 그것도 뭣하다. 오래된 세탁기라 그런지 필자로선 참 복잡하기만하다. 씨름 끝에 이윽고 좔 좔 좔 쏟아지는 급수를 확인하곤 겨우 한숨을 돌려 본다. 그 사이 식어버린 잔속엔 아직도 반 넘게 남아 있는 커피. 여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그래~ 이왕이면 묵혀둔 숙제도 해버리자, 새해특집으로 칭찬도 함 받고.” 그것은 바로 현관 센스 등 교체 미션! 가끔씩 깜빡거리던 센스등은 요즘 들어 부쩍 그 상태가 심각해졌다. 아예 잘 켜지지도 않아 제법 성가셨는데도 차일피일 해왔던 것이다. 새삼 올려다보니 제법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게 현관 센스 등. “어디 잘 함 해보셔” 하는 표정도 역력하니. 우선 스페어 전구를 찾고(실은 한 참 만에 겨우) 의자도 가져온다. 손 장갑도 껴보는데 드라이버도 기본으로 있어야지 싶다. 소매를 걷고 몸을 위로 올려 허공으로 두 팔을 뻗어본다. 손끝으로 대충 만지작거리니 원형커버는 어렵지 않게 분리할 수 있었다. “뭐 이정도면 어렵지 않네, 이젠 전구만 교체하면 되겠지.” 아뿔싸 그만 쑤셔오기 시작하는 양 어깨와 팔. 까치발을 딛고 커버 안쪽의 백열전구를 겨우 돌려서 빼내는데 급기야 부르르 떨리기까지 한다. 천장이 높은 탓만은 아닐 것이다. 정작 문제도 다른 데 있었다. 스페어 전구로 갈아 끼웠는데도 깜빡거림은 마찬가지다. 슬슬 열리기 시작한다. 이때 갑자기 떠오른 생각 한 자락. 동생은 바로 전기기술자! ‘득템’이라도 한 듯 바로 콜을 외쳐본다. 그런데 동생은 무릎을 다쳤다며 지금 병원에 입원중이라고.
“여기까지 인가? 그만 스톱? 아니다 해도 밝았는데 마나님한테 새로운 면모도 보여 주어야지” 원격으로라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동생의 말을 믿고 한 걸음에 마트로 달려간다. 여러 제품들 중 고른 것은 15W용으로 가격은 17500원인데 아예 전구도 필요 없는 제품. “뭐라고” 잠시 놀라기까지 한다. ‘생활의 발견’이랄까? 포장지를 뜯고 매뉴얼을 훑어보는데 설명은 비교적 간단하다. 다시 걸상위로 올라가 천정에서 나온 한 가닥 전기선의 피복을 벗기는데 혹여나 감전 때문에 마음을 졸인 탓이리라. 손가락은 마구마구 떨려오고 높이 때문에 전선 연결부위 등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몸체를 천정에 고정 하려는데 드라이버 끝에 매달린 나사못이 끝내 구멍을 못 찾고 바닥으로 떨어져 자취를 감추고 만다. 오 마이 갓.
사단은 실은 지금부터다. 꼬인 전선 가닥을 풀려는데 갑자기 지지직거리며 불꽃 아닌 불꽃이 번쩍 거린다. 분명 스위치는 내렸는데 어떻게 된 것일까? 더욱 더 떨리는 손끝으로 전기선 가닥을 만져보는데 왠지 전류가 통하는 듯 느낌이 영 별로다. 그냥 동네 철물점 아저씨나 부를 걸 괜히 뭔 짓인지? 직접 했다며 시침 뚝 떼면 그만일 테고 출장비 몇 만 원이 대수인가? 이러다 괜히 불상사라도 생기면? 별 생각이 다 든다. 바로 그 순간이다. 현관문이 열리며 이윽고 계단을 오르는 소리! 지나치다 건네는 눈인사가 전부였던 아래층 아주머니다. 뒤이어 그 아래층 아저씨도 계단을 쿵쿵 거리며 올라온다. TV보는데 갑자기 맛이 갔다며 인터넷도 안 된다고. “전 특별히 따로 손댄 게 없는데요?” 일단 시치미부터 떼고 본다만 켕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까 그 ‘지지직’ 스파크가 필시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다.
이웃의 재발견이랄까! "저희 집도 마침 센스 등에 문제가 있어 전기아저씨 부를 참이었는데 이참에 한 번에 해결 하시죠", "전 테스트기 가져올 테니 잠시 기다려보시죠" 평소 주차 때문에 한 번씩 교대로 콜을 주고받던 2층 아저씨, 테스트기로 한 번 더 문제점을 체크해 주신다. 천군만마를 만난 기분이다. 방학한 아이들 잘 있냐며 오히려 안부까지 물어 오시는 3층 아주머니, 이제 보니 무지 말씀을 잘 건네신다. 잠시 후엔 장을 많이 봤다며 아이들 간식까지 내민다. 두 분 다 성도 안내고 참 신기한 일이로다.
2층 아저씨랑 합동 점검에 들어간 끝에 원인제공은 당연히 필자의 서투른 작업과정 에서 스파크가 생긴 탓이었다. 그 때문에 건물 1층 현관 입구에 있는 메인 차단기가 내려간 것이었다. 처음엔 생각이 거기까진 미치지 않아 각자 집안의 스위치만 온오프를 반복하고 있었던 거였다. 원인을 찾아내고 나니 그 뒤론 저절로 풀린다. 옆에서 보조를 해주니 없던 힘도 생기고 진척도 빠르다. 센스 등 몸체를 양쪽으로 두 개의 나사못으로 단단히 고정하고 드디어 스위를 ON 해본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대박. 너무 환하다. 마치 대낮같다. “진작 할 걸”
일을 하다 보니 새롭게 배운 꿀팁 하나. 센스 등 한 귀퉁이엔 옵션모드가 있더라는 사실. 낮에도 켜지게 하는 모드와 밤에만 켜지게 하는 모드가 그것이다. 벌건 대낮에 굳이 센스 등이 켜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두운 실내를 제외하곤 말이다. 의기양양해진 필자, 2층 3층의 센스 등도 들여다보곤 모드를 조정해주는 오지랖을 발휘한다. 흠흠.
우연찮게 시작된 두 이웃과의 대화는 센스 등에서 출발해 겨울철 실내 단열문제, 옥상 방수 및 누수문제로 이어지며 서로의 집도 왕래하면서 제법 시시콜콜한 대화까지 나누게 되었다. 십여 년 가까이 살면서 처음 있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처음에 소동은 일으켰지만 결국 필자의 손으로 현관 센스 등도 무사히 교체했고 덕분에 이웃과의 ‘소통’도 ‘연결’도 복원하는 결과를 낳았다. 정말 큰일 했다는 생각이다. 지금 당장 여러분의 현관 센스 등을 확인해 볼 일이다. 정말이다.
“그래도 마지막엔 부부밖에 없어!”
나이 들어가면서 친구들에게서 자주 듣게 되는 말이다. 올해 69세가 되었다. 70대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니 예전과 또 다른 느낌이 든다. 나름으로는 신세대처럼 살아왔다고 여겼으나 전반적 생활을 되돌아볼 때 가부장적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중 하나가 아내에 대해 이렇다 할 만한 선물을 하지 못한 점이다. 돈을 아껴서가 아니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란 생각이 든다. 가난한 시골에서 자라 생일 같은 기쁜 날에도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고 다른 가족에게 선물해본 적도 없다. 설날이 되면 옷가지나 양말 등 설빔을 부모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 전부다. 그러한 삶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아내에게 이렇다 할 선물을 하지 못하고 살아왔고 그것이 버릇이 되어 아내도 아예 그러려니 하며 살아왔다.
얼마 전 지인 한 사람이 자그마한 기념품 하나를 손에 쥐어준다. 포장지를 뜯어 보니 ‘결혼 35주년 산호혼식 기념’이란 글자가 새겨졌다. 부부가 좋은 날 지인들과 기쁨을 나누는 행복한 모습이 떠올라 필자의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2년 전쯤 친구들과 칸막이가 되어 있는 서울의 한 한식점에서 저녁을 먹던 중 옆자리에서 들려온 여성 손님들의 수다 내용이 떠오른다.
두 여인이 있다. 두 여인 다 남편을 여의었다. 나이는 비슷한 50대 중반이다. 한 여인은 남편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유산으로 받아 돈 많은 과부가 됐다. 다른 여인은 재산은커녕 오히려 남편의 카드 빚까지 짊어졌다. 돈을 많이 남겨준 남편은 생전에 검소하고 알뜰해 낭비하지 않았고 재산을 늘리는 데에만 몰두했다. 그렇다 보니 부인에게 추억거리 하나 남겨주지 못했다. 받은 것이라고는 남겨준 재산뿐인 셈이다. 여인은 밤새 생각해봐도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남편 얼굴도 잊힐 듯하다. 지난 세월이 아쉽기만 했다.
다른 여인의 남편은 조금 달랐다. 돈은 잘 벌지 못했으나 필요할 때는 카드 빚을 지고서라도 생활을 즐겼다. 부인을 위해 그럴듯한 이벤트도 해주었고 함께 여행도 즐겼다. 남편이 갑자기 죽은 후 카드 빚을 짊어져야 했지만 함께 여러 가지 추억도 남겨주었다. 여인은 남편과의 즐거웠던 여행의 추억을 떠올리며 애통해했다. 남편이 마지막으로 준 생일 선물을 보면 남편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자기를 위해 최선을 다하던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멈추지 않았다.
필자는 과연 어떤 남편으로 남게 될까? 상상해본다. 필자의 아내도 추억거리를 찾지 못할 듯하다. 게다가 재산도 모으지 못했으니 이도 저도 아닐 성싶다. 그냥저냥 세월 흐르는 대로 지낼 수도 있겠지만 너무 덤덤한 삶이 될 것 같다. 생각 날 때, 시간이 될 때 한두 가지 추억들을 만들어감도 좋지 않을까? 세월이 더 가기 전에 부부의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하지 싶다. 여느 해보다 심한 한파가 기승을 부린다.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줄 따사로운 마음의 온기가 필요하다. 화재 참사로 해주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처지의 마음만 아픈 사람도 주변에 생겨나고 있다.
“있을 때 먹어라~“ 하시며 음식 그릇을 필자 앞으로 내미시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난다. ‘있을 때 잘해~’라는 가요도 정겨워지니 나이를 먹긴 먹었나보다. 아내는 1월 초에 친구들과 4박 5일 일정으로 베트남을 여행하고 왔다. 3일 뒤 다시 예전에 살던 동네의 부인들과 10일 여정으로 제주도 올레길 걷기 여행을 떠나 어제 돌아왔다. 여행 가방을 챙겨주는 필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한마디 한다.
“여보~ 이제 눈치가 보이려 하네요.”
“눈꺼풀만큼도 눈치 볼 필요 없어요. 당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세요! 돈 더 필요하지 않아요?”
그동안 남편의 도리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난해에는 추억거리 만들려고 아내와 중국 태항산을 다녀왔다.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어떤 남편으로 기억될까?” 한 번쯤 생각해볼 화두다.
국제당구 대회에서 우리나라 허정한 선수와 베트남 선수가 30점 초반 대까지 박빙의 승부를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베트남 선수가 친 공이 3 쿠션이냐 2 쿠션이냐로 판정 시비가 붙었다. 허정한 선수는 곧바로 이의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기는 그대로 이어지고 허정한 선수에게도 기회가 왔지만, 평범한 뱅크 샷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승부의 추는 베트남 선수에게로 기울어졌다. 평소보다 스트로크가 강하게 나가면서 미세하게 뱅크 샷의 각이 모자라게 도달한 것이다. 그 뒤로 베트남 선수에게 석연치 않은 타임 파울을 선언해 분위기 반전을 노렸으나 무위에 그쳤다. 베트남 선수도 3 쿠션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찜찜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정심을 잃지 않은 덕분에 이겼다고 본다.
필자와 당구를 치던 지인이 있다. 한 큐마다 정교하게 치는 사람으로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다. 마지막 3개부터 필자가 카운트를 했다. 마지막 한 개를 남겨 두었을 때 그가 평범한 공을 안 치고 3 쿠션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분명히 “하나 남았다”고 멘트를 해주었으나 그는 못 들은 모양이었다. 마지막 하나를 어렵게 3 쿠션으로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다시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필자가 다시 “하나 남았다”며 멘트를 했다. 어려운 공 배치였으나 정교하게 와서 맞았다. 그는 이긴 것으로 간주하고 승리의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필자가 이제 마지막으로 3 쿠션을 쳐야 한다고 하자 화를 버럭 내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 남은 것을 이미 쳤고 마지막을 3 쿠션으로 마쳤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게임이 종료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당히 분위기가 머쓱했다. 그래서 그가 이긴 것으로 하자고 했으나 그럼 3 쿠션을 한 번 더 치겠다고 했다. 그 샷은 실패로 돌아갔고 다음 차례에 필자가 3 쿠션까지 한 큐에 끝냄으로서 게임이 종료되었다.
당구에서의 판정 시비는 종종 일어난다. 허정한 선수의 경우는 억울한 마음에 평정심을 잃었을 것이다. 원래 당구 룰에 ‘선수는 3 쿠션을 분명하게 보여줘야 한다’ 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3 쿠션 여부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는 국내 같으면 무효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 무대였고 심판이 이미 판정을 내린 것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 당구는 미세한 멘탈 게임이므로 이런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제어하기 어렵다.
동호인들끼리 당구를 칠 때에도 공이 맞았느니 안 맞았느니 시비가 일어난다. 당구장의 조명이 어릿어릿하여 잘 못 볼 수도 있다. ‘희망사항’이라고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은 당구장에 ‘다시 보기’ 화면으로 반금 친 공의 움직임을 보는 시설을 갖춘 곳이 많다. 공도 단색은 미세한 움직임은 잘 안 보이므로 다른 칼라의 점을 집어넣어 움직임 여부를 쉽게 판정하게 한다.
필자와 지인의 경우에는 지인이 너무 게임에 열중한 나머지 카운트 착각을 한 것이다. 자신이 센 카운트와 필자가 센 카운트가 다른 경우인데 필자가 센 카운트가 더 객관성이 있다. 상대 선수는 게임하고 있는 사람의 카운트를 예의상 해주기 때문에 그것만 신경 쓰고 있는 데 틀릴 리가 없다. 즐겁게 한 게임인데 너무 승부에 집착하다 보면 둘 사이가 머쓱해진다. 앞으로도 자주 치게 될 것인데 그렇게 지나치게 승부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면 같이 치기 싫어지는 것이다. 지인도 그렇지만, 필자도 지지 않기 위해 승부에 집착하는 게임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약 한 주(13일~20일) 동안 해운대에서 열리는 부산 영화제에 다녀왔다. 부산 영화제는 크게 두 분야로 거행되었다. 벡스코 A동에서는 영화기기관련 사업이 진행되었으며 벡스코 B동(Asian Project Market-APM )에서는 75개 국가에서 298편의 영화를 출품하여 선보인 영화사 담당자들을 만나서 영화를 수출입하기 위한 상담 업무가 진행되었다. 영화분야는 필자가 잘 아는 분야는 아니나 담당하고 있는 일이 국제계약분야이다 보니 한 주 동안 영화 수출입 관련 상담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한 주를 보냈다.
주간에는 APM 부스에서 상담을 하고 빈 시간에는 출품된 영화 시사회( P&I Screening)에 참석하느라 분주했고 야간에는 영화제 개막식 파티, 홍콩, 필리핀, 타이완 등의 영화사 초대로 Standing buffet 파티에 참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파티에 가면 유명 연예인들을 만나 대화도 나누고 기념사진도 함께 촬영하는 행운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이번에 필자는 릭키 김 및 차 인표 씨와 팬으로 만나 기념사진을 찍어서 간직하는 기회가 있었다.
통상 영화제 기간 동안에 상영되는 영화는 영화의 전당, 롯데 시네마 센텀시티, CGV 센텀시티, 메가박스 장산 해운대 그리고 소향극장 센텀시티에 분산되어 일반 영화처럼 상영된다. 인기 있는 영화는 미리 인터넷을 예약을 하지 않으면 보기 힘들 정도로 영화 동호인이 많은 것 같다.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미리 회원증을 매입해두면 아주 편하다. 하루에 5편씩 영화를 관람할 수 있으며 행사장에 가려고 하면 자가용 및 버스를 제공하여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 되어 있다. 회원증 구입비는 초기에 구입하면 10만원, 중기 15만원, 말기 20만원으로 차별화 되어 있어 영화 애호가들은 매년 7월 쯤 미리 구매하여 두면 경제적인 영화 관람을 즐길 수 있다.
영화제작을 하시는 제작자나 감독하시는 분들은 출품하여 영화제 상연 작품으로 선정되면 감독 및 회사 대표에게 항공권과 호텔 숙박권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물론 국내 언론사와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된다.
APM 부스는 사전 신청하면 개설을 할 수 있고 회원증을 갖고 있는 사람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어 영화 수출입 상담을 위해서는 회원증을 발급 받는 것이 필수다. 부스에서 상담은 영화제 시작 전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여 상담일정이 정해지면 약 30분씩 오전 10시 부터 오후 6시까지 계속하여 상담을 할 수 있다. 필자도 사전 예약으로 많은 수출상들과 상담을 하였으며 상담했던 영화 수출 담당자들이 수상자로 선정되는 순간은 마치 내가 수상자가 된 것처럼 기뻤다.
벡스코에서 거행된 APM 마켓은 화요일까지만 진행했다. 대부분의 주요 담당자들은 바쁜 일정으로 주말인 14일 부터 17일까지 상담을 끝내고 대부분 다음 행선지로 가거나 귀국하였다.
아직 개봉되기 전 작품인 ‘유리정원’이 개봉작으로 선정되었으며 폐막작은 중국 영화인 상애상친이었다.
‘유리정원’은 한 차원 높은 예술영화로 한 여인의 사랑과 아픔을 환상과 현실사이에서 신수원 감독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보여주는 영화다. 문근영이 박사과정의 학생 장애인으로 등장하여 나무에서 추출한 녹색의 피로 죽은 애인에게 주입하여 살아있는 나무로 살리려는 연구를 시도하였다. 연구 내용이 한 소설가의 문학작품으로 보도되어 인기를 얻자 실화임이 입증되어 경찰에 쫒기는 내용으로 스토리가 구성되어 있었다. 폐막작 ‘상애상친 (Love Education)은 딸이 아버지 산소 이장 문제로 고향에 살고 있는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과 갈등을 소재로 다룬 영화로 그 배경음악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이번 부산 영화제의 수상자는 아래와 같다.
1.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상
수상자 : 스즈키 세이준 (감독/일본)
2. 한국영화공로상
수상자 : 크리스토프 테레히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집행위원장/독일)
3. APM 프로젝트 시상결과
1) 부산상. 부 탁 추옌 (베트남)
2) 브라이트이스트필름어워드: 리샤오펑 (중국)
3) CJ엔터테인먼트어워드 : 리리 리자 (인도네시아)
4) 로데 어워드 : 오승욱 (대한민국)
5) 한국콘텐츠진흥위원장상: 윤가은 (대한민국)
6) 아르떼상: < 비영한,까칠한, 위험한> 비삼 샤리프 ( 프랑스, 레바논)
7) 노르웨이사우스필름펀드상 : 민 바하드르밤 (네팔, 프랑스, 독일)
8) 모네프상 : 오승욱 (대한민국)
E-IP 마켓 시상 결과
New 크리에이터상 (북투필름): 이정연/고즈넉이엔티
New 크리에터상 ( E-IP 피칭) : 이수아 (주) 위즈덤 하우스
금년 부산 영화제 기간에는 문재인 대통령께서 부산을 깜짝 방문하여 영화인을 격려하고 향후 부산 영화제의 발전을 위해 영화인들과 함께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서 영화인들과 동호인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나날이 발전해 가는 부산 영화제 23회 2018 BIFF가 우리나라 및 세계영화산업 발전의 큰 도약의 전기가 되길 고대해 본다.
TV 당구 채널이 생겨 하루 종일 당구 시합을 볼 수 있다. 국내 경기도 있고 국제 경기도 있다. 아무래도 국내 프로 선수들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이제는 국내에서도 프로 선수들은 얼굴이 알려져 연예인 급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아직 당구 대회가 많지 않고 상금도 약하지만, 프로 당구 선수들은 당구 만으로 생업이 가능해졌다. 상금 외에 유명세 만으로도 레슨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꽤 되는 모양이다. 'LG U+' 대회는 올해 우승 상금이 8천만 원이었다. 앞으로 더 높아질 것이라 하니 우승하고 나면 상금만으로도 상당한 수입이다.
지난 'LG U+' 대회에서 우승한 이탈리아의 자네티 선수는 경기 중에 스트로크 할 때마다 다양한 개성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었다. 멋진 기술이 통했을 때는 자기 자신을 뿌듯해 하기도 하고 실수를 했을 때는 안타까운 표정도 잘 지었다. 너무 경망스러워 보이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었지만, 해설자도 “프로 선수들은 그래야 한다”라고 거들어 줬다. 4대 천왕이라고 불리는 산체스, 쿠드롱, 야스퍼스, 브롬달 선수를 보면 자네티 만큼은 아니더라도 얼굴 표정에 여유가 있어 보인다. 약간의 익살이나 쇼맨십도 있다. 그런 것을 잘 할수록 팬이 늘어난다. 물론 베트남의 응유엔 선수나 프랑스의 뷰리 선수는 큐를 다루는 모습이 불량스러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선수들도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프로 당구 선수들의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 모두 너무 비장해 보인다. 노련한 프로 당구 선수나 이제 갓 성년이 된 젊은 선수나 또는 여자 선수들까지도 남녀노소가 모두 같다. 웃음 띤 모습은 전혀 볼 수 없고 항상 진지하고 심각해 보인다. 경기가 끝나고 나서야 승자는 웃음을 보이고 패자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악수를 받아 준다. 물론 승패가 걸렸으니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그리고 일단 자기 차례가 왔을 때는 스트로크, 당점, 큐 스피드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하여 공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너무 경직되면 스트로크 또한 경직되게 나간다. 점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공략법이 있는데 시야가 좁아지니 제 페이스를 못 찾고 공타가 늘어난다.
선수도 아니고 동호인끼리 당구를 치면서도 표정 관리는 중요하다. 너무 심각한 표정으로 플레이를 하게 되면 지나치게 승부욕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경하는 사람들까지 경직되게 만든다. 승패 이전에 같이 즐기는 게임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댄스에서도 표정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초보자들은 스텝을 익히기 바쁘지만, 정작 경기 대회에서는 스텝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당연히 스텝은 연습하면 익힐 수 있는 것이고 수없이 반복 연습을 하면서 경기 대회에서 스텝을 틀리는 선수는 거의 없다. 틀린다 해도 선수들마다 루틴이 다르므로 심사위원들이 잡아내기 어렵다. 그렇다면 결국 심사위원들의 시선은 최종적으로 선수들 얼굴 표정으로 간다. 스텝을 틀린 사람은 얼굴 표정에서 나타난다. 파트너를 믿지 못하는 선수는 파트너의 스텝이 불안해서 시선이 아래로 떨어진다. 그러나 파트너를 믿게 되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위를 향하며 여유가 있어 보인다. 춤을 추는 동안에 심사위원들과 눈도 맞추고 객석의 응원하는 사람들과도 소통한다. 프로는 얼굴 표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은 ‘레 미제라블’, 캣츠‘, ’오페라의 유령‘과 함께 세계 4대 뮤지컬로 꼽히는 작품이다. 이것을 1989년 초연에서부터 25년간 전 세계 28개국 300여 개 도시 15개 언어로 공연되다가 25주년에 맞춰 영화로 찍었다.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작품 중의 하나로 추천할 만 하다.
상영 시간이 무려 175분이다. 거의 3시간에 가까운 상영 시간 동안 잠시도 눈을 못 떼게 하는 대작이다. ‘레 미제라블’, 캣츠‘, ’오페라의 유령‘을 제작한 카메론 매킨토시 작품이다. 출연진은 크리스 역에 앨리스테어 브라머, 킴 역에 에바 노블자다, 킴의 약혼자 투이 역에 홍광호, 엔지니어 역에 존 존 브라이언스가 나온다. 투이 역의 홍광호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배경이 동양이다 보니 한국인이 베트남 남자 역할을 맡은 것이다.
1975년 베트남 전쟁 말기, 그 당시 미군으로 참전한 크리스는 사이공의 클럽 드림랜드에서 킴을 만난다. 비록 성매매로 이루어진 값싼 사랑이었지만, 크리스는 킴과 사랑에 빠지고 베트남 식으로 결혼식까지 올린다. 그러나 전쟁 막바지의 소용돌이 속에 크리스는 킴을 놔둔 채 미국으로 귀국한다. 13살 때 약혼한 투이가 새 정부의 실력자가 되어 킴에게 다시 합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킴은 크리스의 아들 탬 때문에 일편단심이다. 투이가 탬을 죽이려하자 킴은 투이를 총으로 쏴 죽인다. 1978년 킴은 엔지니어와 함께 보트 피플이 되어 태국에 정착한다. 여전히 밤무대에서 생업을 이어가다가 미국에 수소문한 결과 미국여자와 결혼한 크리스와 연결된다. 크리스가 태국에 오고 킴이 크리스의 아들을 낳아 기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킴은 아들 탬을 미국에 데려가 거리의 여인 아들이라는 오명 대신 미국인으로 잘 키워주기를 바라고 자살한다.
이 작품을 대하는 우리도 편하지 않다. 하필 ‘킴’이 우리나라 성씨 김 씨를 생각나게 한다. 전쟁 말기 미군에게 제발 미국에 데려가 달라고 매달리는 베트남 사람들을 보며 우리도 비슷한 전쟁을 겪은 나라이기 때문에 찡하다. 더구나 우리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베트남 여인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수많은 혼혈아들을 놔둔 채 귀국했다. ‘미스 사이공’은 세계적인 뮤지컬 작품이 되었지만, 베트남 사람들이 이 공연을 보면 가슴이 무너질 것 같다. 다른 뮤지컬처럼 단순한 사랑, 이별 얘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에게는 두 명의 여자가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킴이 낳은 자신의 아들이 있다. 두 여자 모두 사랑의 대상이다. 두 여자도 크리스를 사랑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난감하다. 일부일처제의 비극을 보는 것 같다. 모두 같이 살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작품에서는 아들은 미국에 데려가 입양하고 킴에게는 생활비를 보내는 것으로 결론 낸다.
그러나 킴의 입장에서 보면 크리스는 현재 법적인 미국인 처가 있다. 킴의 오빠를 사칭하며 기회의 땅 미국에 가겠다고 매달리는 엔지니어라는 남자가 있다. 킴은 약혼자 투이를 죽인 죄책감도 있다. 그래서 자살을 택했을 것이다. 그 비극적인 마지막 장면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필자의 여고 시절 제2 외국어를 선택할 때 영어 선생님께서 문학이나 웅변을 하려면 독일어를 택하고, 사랑을 하려면 불어를 택하고, 돈을 벌려면 영어를 열심히 공부 하라는 우스개 소리를 하셨다.
오래 전에 작고하신 친정 아버지는 의사이면서 정치를 부업으로 하셨다. 비록 정치에 실패를 하셔서 많은 돈을 날리셨지만, 본업인 의사로 재기를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워낙 욕심이 많으셔서 우리 집 6남매 중 아들 셋 중 둘은 의사로 하나는 약사로, 딸도 셋 중 둘은 간호학과를 입학 시켜서 작은 병원을 하나 운영해도 되겠다는 소리를 어렸을 때부터 우스개 소리로 많이 들었다.
그런데 친정 6남매 중 필자만 유일하게 문과인 영문과를 전공으로 택하였다. 사실은 필자까지도 아버지가 의대를 가라고 했으나 아버지가 대한 이유 없는 반항으로(?) 영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영문과를 입학하자 마자 교수님들이 소개로 소위 재벌 가 자제의 영어 과외를 맡아서 하게 되었는데 그 시절 대기업 사원보다 수입이 많아, 일반 사립대보다 훨씬 싼 서울대 학비는 벌고도 남았다.
등록금을 내고도 남은 돈으로는 우리 집 가전제품도 새로 구입하고 또 동생 두명의 취미 생활에 필요한 것도 사줄 수 있었다. 당시에 텔레리비젼이 처음으로 생산되어 판매되기 시작했는데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딸려 지금의 일가구일주택 정책처럼 한 가족당 한 대만 살 수 있었다.
동생들의 취미를 위해서는 스케이트나 정구 라켓은 물론 Made in Italy 자전거까지 남동생에게 사 주었다. 그 때 산 배드민턴 장비도 지금은 별거 아니지만 그때는 아무나 못 사고 또 뭔지도 몰라서 동네 길 바닥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놀면 친구들이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던 기억이 있다.
또 대학을 졸업 후 홍콩에서 외국 항공사 스튜어디스로 근무를 했는데, 봉급이 여자로서는 다른 직종보다 많은 편이었다. 그 때는 워낙 우리나라가 못 살던 1970년도 시절이라, 항공사에서 함께 일하던 ‘홍콩 차이니즈’라 불리는 중국 아이들도 우리가 영어를 못한다고 깔보고 뒤에서 수군거리곤 했다.
그 때 중국 애들은 얼굴은 중국인이지만 당시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영국 여권을 갖고 다니며 우리 나라를 우습게 보았다. 또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화폐 가치가 형편 없고 너무 낮아서 월급으로 받은 달러를 서울의 부모님에게 보내면 남대문 시장에서 야미(?)로 바꾸면 은행의 거의 두배가 되어서, 홍콩의 비싼 주거비와 생활비를 제외 하더라도 우리나라 대졸 임금의 두배 가량을 저축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파키스탄이나 베트남 출신의 동남아 근로자들이 한국 생활을 어려워하듯이, 필자도 부모 형제들과 떨어져서 생활 해야했기 때문에 외로움과 또 낯 선 외국 생활에 적응이 쉽지 않았다. 결국 일 년 반 만에 모든 걸 정리하고 도망치듯이 귀국하여, 그 후로 결혼도 하였다. 결혼 후에도 남들과 달리 계속해서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 것은 현지에서 배운 영어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요즘은 영어는 기본이고 제2.3 외국어까지 잘하는 젊은 사람이 많아도 직업 선택이 쉽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고향 떠나 긴 세월에 내 청춘 어디로 가고 삶에 매달려 걸어온 발자취 그 누가 알아주랴 두 주먹 불끈 쥐고 살아온 날들 소설 같은 내 드라마…’ -케니 김 1집 ‘내 청춘 드라마’ 케니 김(70). 그는 LA의 트로트 가수다. 한국에서 온 연예인도, 주체할 수 없는 끼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소심한 성격에 낯가림도 심하던 그가 무대 위에서 그것도 뽕짝을 부르는 가수가 됐다. 연매출 200만 달러의 식품회사 경영권도 아내에게 넘기고 말이다. 올해로 데뷔 7년 차. 1집 ‘노신사의 노래’에서 따끈따끈한 신곡 ‘무명가수’까지. 그의 노래 속에는 43년간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5개의 직업, 불도저 케니 김
1946년 경북 대구에서 나고 자란 그의 집안은 지독히 가난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20대.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돈 없고 빽 없고 가방끈까지 짧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작은아버지 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군대에 지원해 월남에 갔어요. 월남전 막바지라 참 위험했는데 나에게는 막막한 세상으로부터의 탈출구 같았습니다.” 베트남에서 처음 만난 미국은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꿈을 꾸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나라, 가난하고 힘없고 배운 것 없어도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때마침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한국에도 미국 이민 문호가 활짝 열렸다. 머나먼 그곳에 친척 고모 한 분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단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기술 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고압용접 자격증을 땄다. 1973년, 스물다섯의 청년 김종길은 그렇게 고국 대한민국을 떠나왔다. 그리고 미국 땅에서 케니 김이 되어 살아온 지 어느덧 43년이다. “먼 친척 고모뻘 되는 분이 살고 있는 오하이오 주 데이톤으로 무조건 갔죠. 물론 얼굴 한 번 본 적 없었고요. 300달러 손에 쥐고 공항에 내렸는데… 이상하게 겁이 하나도 안 나더라고요. 오히려 정말 원했던 것을 이뤘다는 희열을 느꼈어요. 걸리는 것은 딱 하나, 한국에 두고 온 약혼자 순이였죠(웃음).” 용접기술을 배워간 덕분에 취업도 쉬웠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이 작업에만 열중하는 그를 사장들은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인데도 말이다. 6개월 만에 비행기 티켓을 마련해 약혼자에게 보냈고 꿈에 그리던 순이는 미국으로 와서 케니 김과 결혼했다. 지금의 아내, 우순이(68)씨다. 이듬해 두 사람은 뉴올리언스로 이주한다. 당시 뉴올리언스는 석유 시추의 선봉에 서 있었다. 시추선에서 작업하는 고압용접 기술자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만큼 위험하고 고된 일이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석유 시추선에 한 번 오르면 2주일은 그곳에 머물러야 했어요. 물론 동양인은 나 하나였죠. 그래도 일만 하면 되니까 괜찮았는데 문제는 아내였죠. 당시 첫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거든요. 나 없을 때 아기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설마설마하던 일이 진짜 생기더라고요.”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병원에서 아내는 홀로 아기를 낳았다. 첫딸 제인이었다. 어쩔 줄 몰라 울기만 하던 아내와 시추선 위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남편. 이제는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참 고단하던 시절이었다. “둘째 지나가 태어난 이후로는 정말 손이 무르도록 일만 했어요. 아내가 일했던 세탁소와 가발가게가 두 딸의 놀이터였죠. 겨우 돈을 좀 모아 자동차 바디숍을 인수했는데…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됐어요. 후에 미시시피 강에서 모래를 파 올리면 돈이 된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그해 여름 허리케인으로 모든 것이 다 떠내려갔고요. 주저앉아 울 틈이 어디 있어요? 새끼들 데리고 살아야 하는데. 그야말로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었지요.” 시푸드 레스토랑의 성공으로 기반을 다진 부부는 1994년 지금 살고 있는 샌디에이고로 이주한다. 이곳에서는 농사꾼이 되어 오이, 참외 등을 기르기 시작했다. 농사의 ‘농’ 자도 모르던 케니 김씨는 한국농촌진흥청까지 날아가 오이농사 비법을 배워왔고 결국은 농장 사업도 크게 성공시킨다. 하지만 또다시 시련이 찾아온다. 지인으로부터 멕시코 농장 투자 사기를 당한 것. 김씨는 수십만 달러의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돈도 돈이었지만 믿었던 사람의 배신은 오랫동안 김씨를 괴롭혔다. “화재로 잿더미에도 앉아보고 홍수로 다 떠내려가기도 했고 사업도 수차례 망해봤지만 한 번도 좌절한 적은 없었어요. 다시 시작하면 됐으니까요. 그런데 믿었던 사람한테 속은 것은 정말이지… 힘들더라고요. 홀로 멕시코 시골에 틀어박혀서 1년을 지냈는데 그때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가수 선언! “나도 가수다”
가발가게, 세탁소, 피자가게, 시푸드 전문점, 패스트푸드점, 야채농장, 광산개발, 부동산, 콩나물 공장… 어느 날은 부부가 작정하고 미국에서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봤다고 한다. 종사했던 비즈니스가 25가지나 되었다. 이들 부부가 남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는 데에는 케니 김씨의 역할이 크다. 우순이씨는 남편에게 ‘불도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뭐 하나에 꽂히면’ 기필코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마디했다.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는 양반이에요!” 김씨는 1998년 해조류 가공업체 ‘켈프누들’을 설립, 재기에 성공한다. 다시마를 가공해 만든 국수 ‘씨탱글’이 주력 상품이었다. 그는 에스콘디도 산자락 불모지에 공장을 지었다. 버려진 컨테이너로 공장 건물을 올리고 국수를 뽑아내는 기계는 직접 설계해 만들어냈다. 대부분 고물상에서 구입한 고철들을 용접으로 붙여가며 이루어낸 작업이었다. 이어 영어에 능통한 딸들을 불러들여 시장을 공략했는데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웰빙바람으로 ‘씨탱글’은 무섭게 팔려나갔다. 현재 켈프누들 제품은 홀푸드, 마더스 마켓 같은 미국 최대의 유기농 마켓에 납품되며 유럽 등 10개국에도 수출되고 있다. 연매출 200만 달러에 이르는 알짜배기 기업이다. 전쟁 같던 이민생활에 조금씩 평화가 찾아오고 어느덧 두 딸도 짝을 만나 슬하를 떠났다. 이제 겨우 숨 좀 돌리려고 보니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 젊은 시절 함께 고생하던 친구가 병을 얻어 덧없이 가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헛헛했다. 장례식을 다녀온 날 김씨는 큰 결심을 하고 가슴에 꼭꼭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래, 나 하고 싶은 것 한번 해보자 했죠! 중학교 때 학원비 떼어먹으며 배운 기타가 내 음악 인생의 전부이지만 한 번도 가수에 대한 꿈을 저버린 적은 없었어요.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이야기겠지만 진심으로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하하.” 가장 놀란 사람은 아내 우순이씨였다. 남편의 트로트 사랑이 유별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수라니. 그것도 자기 노래를 만들어 앨범을 내는 진짜 가수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허투루 말하는 법이 없고 한 번 결심하면 무슨 일이든 해내는 사람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아내는 기분 좋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자기를 위해서는 평생 1달러도 안 쓰던 사람이에요. 야채 농사를 지어 LA로 배달을 나갈 때 왕복 4시간 운전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떠올랐어요. 아, 이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이었구나… 마음이 찡하더라고요. 그래 그렇게 열심히 살았으니까 선물을 하자. 그래서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했죠. 그런데 앨범 하나로 끝날 줄 알았는데 벌써 4집까지 나왔네요. 하하하.” 아내의 허락(?)이 떨어지자 과연 불도저답게 밀어붙였다. 한국에 나가 고시텔에 묵으며 직접 가사를 쓰기 시작했고 곡을 붙여줄 작곡가를 수소문했다. 작곡가 김준규씨와의 만남은 그야말로 운명이었다. 김준규씨는 1980년대 가수 주현미를 스타로 만들었던 트로트 메들리 앨범 ‘쌍쌍파티’의 제작자다. 2010년 케니 김 1집 ‘노신사의 노래’가 나오기까지는 꼬박 1년이 걸렸다. 매일 4시간씩 노래 지도를 받았고 모든 노래 가사를 직접 썼다. 케니는 따근따끈한 자신의 앨범을 훈장처럼 품에 안고 돌아왔다. 그렇게 케니 김은 63세에 늦깎이 가수가 되었다.
당신께 바치는 노래
이때부터 아내 우순이씨는 가수 케니 김의 매니저이자 팬클럽 회장이 됐다. 한인 라디오 방송국 ‘라디오코리아’에 남편의 앨범을 보냈고 이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곧 방송을 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가수 케니 김의 사연과 노래가 미 전역의 이민 1세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그들 모두가 척박한 미국 땅에서 눈물과 땀을 쏟아냈던 또 다른 케니 김이고 우순이였다. 방송이 나간 후 팬이 되고 싶다는 전화와 편지들이 쏟아졌고 부부는 이들에게 하나하나 앨범을 선물했다. 밑지는 장사였지만 케니 김은 행복했다. “애당초 음반을 팔아 돈 벌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그저 힘들게 위로가 되었던 노래가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게 부른 노래가 또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데뷔 7년. 어느덧 케니 김은 4집 앨범까지 낸 어엿한 중견가수가 됐다. 크고 작은 한인 행사에 초대가수로 불려가고 종종 한국에서 오는 가수의 공연에 오프닝 무대를 장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돈벌이는 여전히 안 된다. 초대받은 행사에 가서 출연료는커녕 기부금까지 내고 오기 일쑤다. 몇 해 전부터는 5월 어버이 날이 되면 100여 명의 노인들을 집으로 초청해 효도잔치를 하고 있다. 그 역시 효도를 받을 나이이지만 누군가를 섬길 수 있다는 것을 큰 기쁨이자 보람으로 생각한다. “어느 해 집 주위에 매실이며 살구가 너무 실하게 열렸더라고요. 우리 둘이 먹기에는 너무 많아 주위의 노인분들에게 오셔서 따가시라 했죠. 너무들 좋아하시더라고요. 미국에 살면서 나들이도 제대로 못하며 살았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어요. 잔치 한번 열어드리려 한 것이 연중 행사가 되어버렸어요. 맛있는 것 실컷 먹고 노래 실컷 부르면서 즐기시는 거 보면 덩달아 기분 좋습니다. 친구 생각,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도 나고요. 뭐 이게 사는 재미 아니겠습니까.”
아메리칸 드림이 별거 있더냐
케니 김씨는 자신만을 위해 시작한 노래를 이제 다른 이를 위해 부르고 있다. ‘수많은 날들 비바람에도 쉬지 않고 걸어온 우리, 여보 정말 고생 많았소~’ 덤덤한 노랫말이 인상적인 ‘무지개’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노래이고, 귀에 착 감기는 미디움 템포의 ‘아메리칸 드림’은 먼 이국땅에서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모든 이민자들에게 바치는 노래다. 성공을 위해 별의별 일을 다 해본 이민자 케니 김은 아메리칸 드림은 별게 아니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의 진솔한 고백이다. “아메리칸 드림이요? 이루었죠!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에요. 돈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죠. 많은데도 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하면, 없어도 많은 것처럼 살 수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나에게 꿈과 희망이 있냐는 것입니다. 한국을 떠나오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실패해도 두렵지 않았던 것은 또다시 꿈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을 향한 그의 열정과 집념은 삶의 원동력이다. 열심히 바쁘게 살면 늙을 시간도 없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불도저 케니 김이 요즘 푹 빠져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뮤직비디오 제작이다. 아마추어 친구들이 힘을 모아 ‘아메리칸 드림’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는데 무척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훨씬 쉽게 노래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노래를 부르고 듣기에도 참 좋아진 세상이에요. 저는 좋아하는 가요 카세트테이프를 겨우 구해서 늘어질까봐 아끼고 아껴서 듣던 시절에 살았어요. 캘리포니아에 이사 오면 한국어로 라디오가 나오고 트로트를 실컷 들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당시엔 샌디에이고까지는 잘 안 나오더라고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아무튼 노래듣기에도 가수하기에도 참 편하고 재미있는 세상입니다.” 지난 4월, 따끈따끈한 새 음반이 두 장이나 나왔다. 하나는 ‘쌍쌍파티’의 리메이크 앨범 ‘케니 김 주연하의 쌍쌍파티’, 또 하나는 케니 김의 4집 앨범이다. ‘쌍쌍파티’는 현재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절찬 판매중이다. 지난달 음반 판매 수익금 88만원도 받았다. 데뷔 7년 만에 처음으로 번 돈이다. 4집 앨범의 타이틀 곡은 ‘무명가수’, 흥겨운 댄스곡이다. 물론 이번에도 직접 가사를 썼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노래 불러요
스트레스 날리고 장단에 맞춰
박수치며 노래 불러요
행복의 바이러스 드리겠어요
나는나는 무명가수야
우리들에게 행복의 바이러스를 주겠다는 LA의 무명가수 케니 김.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꿈이 자리 잡고 있다. 장인의 노래가 18번이라는 든든한 첫째 사위와 CCM가수인 둘째 딸 지나와 함께 가족 콘서트를 여는 것이다. 딸과 함께 부르는 트로트 메들리도 멋지지 않겠나. 매니저이자 팬클럽 회장에서 이제는 의상 코디며 메이크업까지 담당하고 있는 아내는 가만히 미소짓는다. 아내의 미소는 늘 케니 김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주곤 했다. 머지않아, 그의 새로운 도전이 또다시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