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산성을 ‘유럽의 이름난 고대 산성보다 빼어나다’고 보는 이도 있다. 최고 22m에 달하는 성벽의 높이로 대변되는 삼년산성의 위용과 정밀한 축조과학을 우월하게 평가해서다. 그러나 오랫동안 별로 거들떠보는 이가 없었다. 흔히들 소가 닭 보듯 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야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의 답사와 학술 연구가 시작됐다. 이젠 깊숙이 들여다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역사탐방로로, 걷기 좋은 산성길로 입소문이 나고 있다.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는 이 산성을 국내 1000여 개의 산성들 중 단연 ‘명물’이라 단정한다.
유심히 살펴볼 게 많은 산성이다. 성벽의 구조와 풍치가 빼어나서다. 산성 내 암자 보은사에는 고려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어수룩한 얼굴 표정이 푸근해서 좋다. 홀로 절을 지키는 노스님을 통해 산성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삼년산성은 보은읍 대야리 오정산(326m)을 통째 보듬듯이 아울러 만든 석성이다. 고구려나 백제보다 국력이 약했던 시기의 신라가 전략 거점 확보를 위해 쌓았다. 축성을 한 때는 470년. 이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렇게 명확한 축조 연대를 실마리로 역사가들은 그 당시 신라의 놀랄 만한 축성법에 관한 다각적 분석은 물론, 군사 전략과 외교 관계까지를 파고들었다. 삼년산성이 사가들의 역사적 상상력에 불을 댕겨준 셈이다.
주 출입구는 서문지(西門址). 성내로 들어서자 감탄사부터 나온다. 좌우로 펼쳐지는 성벽의 모습이 우람해서다. 그러나 산성의 시간은 진즉에 저물었다. 태생 시의 용도를 잃고 유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침묵으로 웅변할 따름이다. 폐허 아닌 폐허이며, 잠 아닌 잠을 잔다. 산성의 사정이 그러하나, 살아 있는 것들은 퍼렇게 깨어 여름날의 한때를 누린다. 저 푸른 숲을 이룬 나무들이 그렇고 철부지처럼 재잘거리는 새들이 그렇다. 고대의 시간과 역사가 고여 있는 유적지에서, 나무와 새는 영원하고 성벽은 덧없다.
성벽은 능선을 따라 보기 좋게 펼쳐진다. 물론 옛날 그대로의 성벽은 아니다. 웅장하고 강고한 성채도 세월 앞에선 무기력하다. 무너지거나 사라진 대목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삼년산성은 대체로 원형을 유지한 몇몇 산성 가운데 하나다. 붕괴되거나 파손된 부위의 상당 부분은 1980년대 이후의 복원사업으로 보충되었다. 헌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것이다. 고대의 기술과 현대의 공법이 겨루는 형국으로도 보인다. 구성벽과 신성벽의 비율은 7대 3 정도라고 한다.
길은 성벽 아래로 가지런히 이어진다. 그러니까 한쪽으로는 성을 끼고, 또 한쪽으로는 수풀을 곁에 두고 걷는 길이다. 한 손엔 역사를, 다른 한 손엔 자연을 쥐고 걷는 기분이다. 이색이라면 이색이다. 혹은 아이러니? 산성이란 무엇인가? 전쟁을 전제하고 지은 건축이다. 국가를 위해서라면 하나밖에 없는 아까운 목숨마저 초개처럼 버리리라 결의한(또는 결의를 당한?) 사람들을 모아두는 장소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여기에서도 양육강식의 스릴러가 일부 상영된다. 그러나 여차하면 맞짱뜨자고 있는 게 자연이 아니다. 나무와 나무는 햇볕 한 조각이나마 더 거머쥐기 위해 다툴망정 아군과 적군으로까지 나뉘어 증오로 대결하진 않는다. 상극보다 상생의 힘으로 조화로운 생태계를 이루는 게 자연이지 않은가.
삼년산성의 축조에는 고도의 공법이 쓰였다고 한다. 축성 당시로선 첨단의 성곽이었다는 얘기다. 성벽의 폭부터 8~10m로 넓다. 게다가 대단히 튼튼하게 쌓은 성벽이다. 길을 걷다 보면 알 수 있다. 붕괴로 인해 내부가 드러난 성벽 단면의 영리함을. 외벽과 내벽은 반듯하게 자른 큰 돌을 층층으로 쌓은 한편, 양자 사이의 공간엔 흙이 아니라 자잘한 돌을 세밀하게 채워 넣었다. 성벽의 외부 아래쪽엔 보축 성벽까지 추가로 쌓았다. 이 두 겹 축조 방식은 삼년산성에서만 확인되는 특장이다. 철옹성이라 불러도 무방할 삼년산성의 견고한 구조는 이와 같은 적극적인 공법들의 도입으로 가능했던 셈이다.
그 덕분일까? 삼년산성에서 전략을 펼친 신라의 전쟁에는 패배의 기록이 없다. 승전의 결과로 체제를 수호하고, 나아가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전쟁은 필요악일까? ‘도덕경’은 이르기를 “대국(大國)은 사람을 키우기를 꿈꾼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웬 판타지? 힘센 나라일수록 전쟁을 능사로 삼았다. 정의이거나 정의가 아니거나 상관없이 인류는 언제나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전쟁으로서 전쟁을 야기해왔다. 절대자의 비루한 탐욕을 채우는 전쟁도 비일비재했다. 죽어나는 건 항상 애먼 ‘아랫것’들이었다.
숲은 산성 안에서 더 찬연하다. 쓸모를 잃어 이제는 전쟁에서 풀려난 성곽은 고즈넉한 정적에 몸을 묻고 쉬어간다. 대지예술처럼 장중한 저 허연 성벽들도 언젠가는 자연으로 돌아가리라. 세월에 실려가다 보면.
밤하늘의 별을 보며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던 소년은 색약 판정으로 꿈을 저버리고 만다. 절망으로 보낸 질풍노도의 시기, 그를 붙잡아준 건 한 그루의 나무였다. 어떤 악조건에도 가지를 뻗어가는 나무가 보여준 단단한 삶의 태도. 그렇게 얻은 인생의 가르침을 보은으로 여기며 우종영(禹鍾榮·64)은 아픈 나무들을 위해 나무의사가 됐다. 어느덧 인생 후반, 나이가 들수록 제 속을 비우고 작은 생명들을 품는 고목을 보며 그는 다짐한다. 남은 날들을 꼭 나무처럼만 살아가자고.
나무의사 우종영은 그동안 나무로부터 얻은 삶의 지혜와 깨달음을 나누고자 에세이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를 펴냈다. 20년 전 출간한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와 메시지는 비슷하지만, 중년 이후 인생의 깊이가 더해지며 한층 더 성숙해진 모습이다.
“사르트르가 이런 말을 했어요. ‘자연은 늘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 말을 번역하는 것은 인생의 경험이다.’ 나무뿐만 아니라 어떤 생명이든 우리에게 말을 걸고 표정을 짓는데, 그건 저마다의 경험에 비춰 해석하게 된다는 거죠. 연륜이 쌓인 만큼 자연이나 사회를 대하는 시각과 깊이가 달라졌어요. 나무를 바라볼 때도 단순히 특성보다는 그 품성을 이해하려 하고요.”
그는 누군가를 만날 때면 줄곧 그이와 닮은 나무를 떠올리곤 한다. 전에는 겉으로 보이는 성향을 두고 비슷한 나무를 찾았다면, 이제는 사람과 나무가 지닌 사연과 태도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닮고 싶은 나무’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단다.
“한때는 소나무를 닮아야지, 대나무를 닮아야지 그랬다면, 이제는 꼭 어떤 나무를 정하지 않아요. 가령 산에 가면 바위틈에 자라는 작은 팥배나무를 볼 수 있는데, 이 나무가 산 아래 계곡에서 뿌리를 내리면 어마어마한 거목이 돼요. 그러니 산에 있던 팥배나무는 자신이 뿌리내린 곳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본성을 억제한 거죠.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우연히 만난 팥배나무에게 인내와 강인함을 발견하듯, 요즘은 그때그때 마주치는 나무들의 품성을 본받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요.”
높아질수록 뿌리와는 멀어진다
척박한 땅에서도 하늘을 바라보며 자라던 나무들은 어느 순간 성장을 멈추기 시작한다. 계속 자라기만 하면 하늘에는 가까워져도 뿌리와는 멀어져 양분이 고갈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성장을 멈추는 것이다. 그는 나무가 멈춤의 시기를 갖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드론으로 위에서 찍은 숲 사진을 보면 나무들의 키가 거의 일정합니다. 그건 숲에 사는 나무 간의 약속이에요. 한 나무가 자라면 또 다른 나무도 더 자라려고 경쟁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존을 위한 동맹을 맺는 겁니다. 그에 반해 인간 사회는 경쟁이 난무하죠. 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더불어 살기 위해 스스로 멈출 줄 아는 나무의 자세는 우리가 배울 점이라 생각해요.”
이러한 나무의 성장과 멈춤은 ‘우듬지’가 조절한다. 우듬지란 나무 맨 꼭대기의 줄기인데,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자라게 하는 동시에 아래 가지들이 제멋대로 뻗는 것을 통제한다. 인간으로 따지면, 우듬지는 곧 삶의 구심점이자 목표, 방향 등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우듬지는 나무가 나이를 먹을수록 점차 소멸한다. 그는 자신 역시 우듬지가 거의 사라진 상태라며, 그것이 순리에 맞다고 설명했다.
“젊을수록 우듬지는 왕성하죠. 일종의 줏대이기도 하고, 때론 희망이나 꿈의 역할을 하니까요. 그러나 나무가 우듬지를 소멸시키듯, 사람도 나이가 들면 스스로 멈춰야 할 때를 알아야 해요. 과거와 똑같이 경쟁하고, 벌고, 쓴다는 건 무리입니다. 덜 경쟁하고, 덜 벌고, 덜 쓰면서 그 안에서의 행복을 찾아야죠. 나무는 자신에게 필요한 햇빛을 쬘 만큼의 하늘만 확보되면 더는 욕심부리지 않습니다.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그런 자기만의 하늘을 가진 거라고 봐요. 그땐 우듬지가 사라져도 길을 잃거나 방황하지 않죠.”
그는 나이가 들수록 우듬지보다는 ‘틈’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역시 나무에게서 얻은 깨달음이란다.
“오래된 숲일수록 적당한 틈이 존재합니다. 어른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에 틈이 없다면, 키 작은 어린 나무들은 햇볕을 쬘 수 없잖아요. 그보다 더 아래에서 사는 풀이나 꽃, 곤충 등은 더 심할 테고요. 숲에 틈이 있어야 빛이 들고, 새로운 희망이 자랄 수 있는 겁니다. 큰 나무는 그런 틈을 내어줍니다. 동시에 어린 생명들이 안전하게 자라도록 비바람과 눈보라를 막아주는 버팀목 역할도 해주죠. 우리네 인생에서도 이런 큰 나무 같은 어른이 많아져야 합니다.”
수목장의 불편한 진실
마지막 순간까지 주변을 보듬고 살다 미련 없이 흙으로 돌아가는 나무처럼, 그는 자신의 인생 말미 또한 그러하길 바라고 있다. 그렇게 삶의 끄트머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는 수목장과 관련해 한마디했다. 친환경적인 장례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가혹한 행위라며 우려를 내비쳤다.
“대개 나무 아래 유골함을 묻는 방식인데, 그러면 뿌리가 다칠 수밖에 없어요. 뿌리가 상한 나무는 오래 살 수가 없습니다. 나무에게도 고인에게도 불편한 상황이 벌어지는 거죠. 수목장이 발달한 스웨덴은 ‘회상의 숲’을 만들어 운영해요. 우리와 다르게 지정된 숲에 유골을 뿌리는 식이죠. 산골(散骨) 장소를 별도로 표시하거나, 숲에 들어가거나 꽃, 나무를 심는 것도 금지합니다. 유족이 그 장소나 식물을 망자의 흔적이라 여겨 집착하는 것을 막는 동시에, 자연을 훼손하지 않기 위함이죠. 또 나무 앞에서 추모하는 일도 없습니다. 대신 숲 둘레길 등을 걸으며 고인을 회상합니다. 그게 숲을 건강하게 지키면서 고인을 편안히 모시는 길이라 여기는 겁니다.”
어떻게 사느냐와 더불어 어떻게 죽느냐까지 고민해야 하는 세상. 그는 웰다잉의 한 방법으로 ‘나무 심기’를 제안했다. 물론 나무의사로서의 당부도 잊지 않았다.
“나무를 심고 10년만 지나면 그 그늘 안에서 책을 읽고 쉴 수 있습니다. 여유 땅이 있다면 나무를 심어보길 권해요. 이때 내가 좋아하는 나무보다는 그 땅을 좋아할 나무, 내가 심고 싶은 곳보다는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위치를 골라야 건강하게 잘 키울 수 있습니다. 나무의 생명력은 인간의 수명을 뛰어넘죠. 우리 세대의 손으로 키운 나무들이 먼 훗날 후손들에게도 위안과 지혜를 준다면,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11월의 첫 날 충북 보은군 속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세조길을 걷기 위해 속리산으로 향했다.
몇몇이 함께 몇 번 와본 적이 있던 곳이어서 이번엔 혼자 걷기로 했다.
단풍이 절정임에도 평일 오전이어서 단체 관광객들 몇 팀만 보였다. 단체팀을 운 좋게 피하면 속리산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겠다는 생각에 등산 복장이 아닌데도 호기롭게 입장했다.
세조길은 법주사에서 시작하여 세심정까지 계곡옆을 따라 조성한 길로 왕복 5Km 가량의 거리다. 2016년에 조성되어 국립공원의 품격에 맞는 경치는 물론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고 특히 장애인 등을 배려한 무장애 탐방로 구간이 있어 호평을 받는 길이다.
법주사 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천천히 올라가다 보면 조선의 7번째 임금인 세조가 피부병을 치유했다는 목욕소, 세조가 잠시 바위에 머물며 생각에 잠겼었다는 눈썹바위, 세심정 등을 만날 수 있다.
올라갈 때는 세조길로 가고 내려올 때는 도로 옆의 오래된 나무로 우거진 단풍을 만나는 것도 속리산 단풍을 예쁘게 즐기는 방법이다.
지난날 왕위와 권력을 얻기 위해 저질렀던 모든 악행과 잘못을 참회하며 걸었을 세조의 속내를 더듬어보며 아주 천천히 걸어봤다.
충북 보은군 장안면 개안길 10-2에 위치한 ‘보은 우당 고택’은 속리산 천왕봉에서 흘러내리는 삼가천의 물줄기 가운데 있는 국가민속문화제 제 134호로 지정된 99칸의 한국 전통 가옥이다.
서원계곡 끝자락 소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지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안담으로 둘러친 사랑채가 있다. 오른쪽에 다시 안담을 가진 안채가, 그리고 두 본채 사이를 걸어가면 별도의 담을 가진 사당이 자리해 있는 구성이다. 안채 뒤켠으로는 전국8도의 장독대 800개가 모여 장관을 이룬 모습도 보여진다.
선민혁(72세)의 말에 의하면 이 고택은 전남 고흥 일대에서 부를 쌓은 보성 선씨 집안의 18세손 우당 선영홍공이 1900년 초에 이곳에 터를 잡고 당시 유명한 궁궐 목수 방대문을 도편수로 참여케 하여 십여년에 걸쳐 지었다고 한다
또한 선씨 집안은 선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라는 ‘위선최락(爲善最樂)’이라는 가풍에 걸맞게 사비로 우수한 인재를 양성을 위해 노력했으며 마을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많이 베풀어 주위에 배고픈 이들이 없었다고 한다.
삼천평이 넘는 이 고택 이곳 저곳에는 잘 익은 감이 주렁 주렁 열려있고 그윽한 향을 풍기는 노란 탱자나무가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돌담들을 따라 피어난 꽃들과 담쟁이, 영글어 익은 빨간 나무 열매들과 함께 풍성한 가을을 만끽할 수 있다.
솔향기길 1코스는 충남 태안군 이원면 만대항에서 꾸지나무골 해수욕장까지 약 10km 구간에서 전개된다. 숲길을 거닐며 바다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명품 둘레길. 구간의 일부만을 탐방해도 뿌듯하다. 어느 구간이건 차량 접근도 쉽다.
뭍의 끝자락에, 작은 포구 만대항. 포구에선 들뜬다. 드나드는 고깃배들의 생기 때문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대낮부터 술 마시는 어부들의 파안대소 때문이다. 한나절을 머물러도 무료하지 않은 게 포구다. 정들기도 정 두기도 쉬운 게 어항이다. 쏠리는 마음을 거두고 산길로 접어든다. 만대항은 솔향기길 1코스의 기점이다.
이 둘레길은 바다로 가는 산길이다. 해변으로 이어지는 숲길이다. 산과 바다가 동행하는 해안길이다. 산이 있어 푸르고 바다가 또한 푸르러 천지가 통째 푸르고 푸르다. 잿빛 도시에 발목 잡힐쏘냐, 한달음에 내달아 닿은 게 감옥 밖이다. 철창 없는 철창. 비정한 성시(成市)를 그리 이르는 게 아니다. 감옥이 마음 안에 있지 어디 밖에 있더냐. 좀스러운 자는 자주 마음의 해방을 갈구한다. 그런 나에게 산과 바다는, 자연은 특별사면을 허한다. 자연이라는 유토피아 외 믿을 만한 의지처가 다시 있던가.
해송 숲 사이로 구불구불 길이 펼쳐진다. 뇌수까지 건드리는 솔바람, 콧등을 치는 솔향기에 심취한다. 창고에 처박힌 오감이 훌훌 먼지를 털고 깨어나는 순간이다. 감관이 잠 깨면 눈앞의 사물이 자못 새롭게 느껴진다. 모처럼 공정한 눈으로 풍경의 진실을 살핀다. 나는 지금 숨을 헐떡이며 오르막을 오르고 있다. 그러나 오르막을 오르막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보는 방향에 따라 오르막은 내리막이며, 내리막은 오르막이다. 숲 덤불에선 이 꽃이 피고 저 꽃이 진다. 이게 단지 꽃만의 일이겠는가.
숲길 저 너머로, 저 아래로 자주 바다가 보인다. 쪽빛? 코발트블루? 울트라마린? 바다색은 찬연히 푸르다. 반할 게 색뿐이랴. 광활해서 장엄하고, 잔잔해서 은은하고, 쾌청해서 요요한 저 바다. 이 모든 미덕의 총합을 ‘그지없는 아름다움’이라 해두자. 아련한 수평선 위로는 하늘이 피어오른다. 해는 중천에 떠 활을 겨누듯 바다를 겨냥해 햇살을 쏜다. 그러자 수면에 어리는 수천수만의 물비늘들. 찰나에 반짝이다 찰나에 스러지는 저 시리도록 눈부신 빛의 알갱이들. 윤슬이라고 하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는 건 이슬이지만, 윤슬은 순간에 명멸한다. 저건 어쩌면 잡아둘 수 없는 시간의 허무한 잔상이다. 야야, 덧없다, 생성과 소멸이 한 몸이다, 그런 뉴스를 전하며 황홀하게 떠난다, 윤슬.
산은 낮고, 숲은 무성하다. 길은 거칠 게 없으니 구미에 맞다. 다정도 하여라. 나무들은 그 따뜻한 손을 내밀어 숲길로 인도한다. 내 몸을 어루만진 해풍은 산을 넘어 어느 꿈의 교각 아래에 나를 눕힐 것인가. 딱딱한 바위 벼랑에 뿌리 내린 나무들은 어떤 마법의 묘약을 마셨기에 저토록 굳센가. 보매 의연한 초목이며 사람만 갈피없이 설렌다. 수려하기로는 또한 산경(山景)이며 경이롭기로는 바다다. 보라, 솔향기길의 명소를, 미모를, 쾌활을…. 당봉, 가마봉, 여섬, 칼바위, 용난굴 등 빼어난 조망과 신비를 자랑하는 경승이 즐비하다.
솔향길에는 ‘보은의 길’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지난 2007년, 이른바 ‘태안 기름 유출사건’ 당시 전국에서 사람들이 쏜살같이 달려와 불철주야 해안에 들러붙은 기름을 닦아냈다. 당시의 자원봉사자 123만 명이 작업하기 편하도록 지역민들이 황급히 길을 닦고 밧줄을 매단 게 솔향기길의 시발이었다지.
흔쾌히 발 벗고 나섰던 사람들의 선의는 실로 고귀하다. 일왕에게 도시락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의 열정에 맞먹을 장쾌한 행장이었다. 지옥으로 통하는 길조차 선의로 분장된 세태라지만, 계산이 없는 선의는 얼마나 위력적인가. 봉사자들의 선의에 찬 연대는 결국 자연을 살렸고, 사람의 마을을 데웠다.
홀연히 날개를 펼친 선의로 세상과 만나는 자, 그는 사랑을 아는 자다. 자연에 기생하길 습으로 삼은 게 인간사이지만, 그들은 공생의 도리를 알아 사랑을 실천했으니 매혹의 행장이지 아니한가. 솔향기길에 감도는 솔향에 살포시 포개진 저 선의의 향. 두 겹 향이 가슴을 채운다. 일몰의 수평선엔 어느덧 놀빛 너울거리고.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두 번째는 보은 법주사이다.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에 위치한 법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로 사적 제503호이며, 속리산 천황봉과 관음봉을 연결한 그 일대는 명승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속리산은 해발 1057m의 천황봉을 비롯해 9개의 봉우리가 있어 원래는 구봉산이라 불렀으나,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 의신(義信)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이곳 산세의 웅장함과 험준함을 보고 불도(佛道)를 펼 곳이라 생각하고, 큰 절을 세워 이름 붙였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의신 조사가 법주사를 창건하고 진표 율사가 7년을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하나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전하는 바는 조금 다르다.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 그 후 진표 율사가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不思議房)으로 돌아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 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다. 그때 진표 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 하였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 법회를 열었다고 하니, 현재의 법주사는 진표 율사의 뜻에 따라 영심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진표 율사가 세운 금산사와 이곳 법주사는 모두 미륵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후 56억 7000만 년이 지나 미륵이 오면 용화수(龍華樹) 나무 아래서 세 번에 걸친 설법(龍華三會)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니 금산사가 제1도량, 법주사가 제2도량, 금강산 발연사가 제3도량으로 창건한 용화삼회(龍華三會) 설법도량인 것이다.
고려 문종의 아들 대각국사 의천의 동생 도생 승통(導生 僧統)이 절의 주지를 지냈으며 1363년(공민왕 12)에는 왕이 절에 들렸다가 양산 통도사에 칙사를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로 옮겨 봉인토록 하였으니 지금도 법주사 내에 모셔져 있다.
조선 세조 때에는 신미 대사가 주석하면서 크게 중창되어 이후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大刹)이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사명대사 유정 스님이 20년에 걸쳐 팔상전을 중건하였으며 벽암 각성 스님이 황폐화된 절을 중창하였고 그 뒤 수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려 인조 때까지도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제목의 시가 실린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정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다.
법주사가 보유한 문화유산으로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팔상전(국보 제55호)·석련지(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보물 제848호)·대웅보전(보물 제915호)·원통보전(보물 제916호)·법주괘불탱화(보물 제1259호)·소조삼불좌상(보물 제1360호)·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철확(보물 제1413호)·복천암 수암화상탑(보물 제1416호)·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복천암학조등곡화상탑(보물 제1418호)·보은 법주사 동종(보물 제1858호) 등이 있으며, 주변에는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호) 등이 있다.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속리산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경상북도 상주시에 걸쳐있는 명산으로 예로부터 우리나라 8대 경승지로 전해지며 해발 1058m 천황봉을 중심으로 관음봉·비로봉·경업대·문장대·입석대 등 해발 1000m 내외의 산봉우리들이 있다. 그중 문장대는 속리산의 빼어난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경승지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그 남쪽 수정봉 아래 좋은 자리에 법주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속리산 일대는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터널을 뚫어 보은에서 법주사까지 쉽게 갈 수 있지만 예전에는 꼬불꼬불 열두 굽이를 돌아 올라가는 말티재를 넘어야 했다. 이 고갯길은 고려 태조 왕건이 법주사에 행차할 때 닦은 길이라고 전해지며 조선 세조는 즉위하기 전 상환암에서 백일기도를 올렸으며, 즉위 후에는 복천암에서 사흘간 치병(治病)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개를 올라서면 세조에게 벼슬을 제수받은 정이품송이 있고 이어 옛 사하촌(寺下村)이었을 산채백반 식당들이 빼곡한데, 그 이후 일주문까지는 길 양쪽으로 떡갈나무 숲이 아름다운 오리숲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정이품송과 식당가를 지나 산사 7곳 중 가장 비싼 입장권(4000원)을 끊고 떡갈나무 우거진 맑은 계류(溪流)를 따라 오리 숲길을 걸어 들어가노라면 일주문이 나오는데 ‘호서제일가람(湖西弟一伽藍)’, 즉 호서(충청)지방 제일의 절집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그 아래 안쪽에는 ‘속리산대법주사(俗離山大法住寺)’라고 씌어 있어 대단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오리 숲길을 산책하듯 걸어 일주문을 지나면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와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가 나오는데 역사적인 의미가 있으니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는 것이 좋다.
속리산사실기비는 1666년(현종 7)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썼는데 명산 속리산에 세조가 행차한 사실과 수정봉 위 거북바위를 당 태종이 자르게 했다는 이야기 등이 적혀 있다고 한다. 비각 속에 보호되고 있으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이다.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는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조선중기 고승 벽암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1664년(현종 5)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정두경이 짓고 글씨는 선조의 손자 낭선군이 썼는데 커다란 암반 위에 홈을 파서 비석을 세웠다.
오리 숲길을 벗어나 계류에 걸쳐진 다리를 건너면 비로소 법주사 경내로 들어서는 사실상 첫 관문인 금강문이다. 마곡사가 해탈문이 첫 관문이듯 법주사는 금강문인데 그 안에 모셔진 분들은 문수, 보현보살과 금강역사로 똑같다.
다만 마곡사는 보현과 문수 모두 동자상을 모셨는데 법주사는 어린 동자상이 아닌 보살상을 모신 점과 해탈문이 아닌 금강문으로 부르는 점이 다르다. 금강문으로 들어서면 산중에 위치한 산사(山寺)지만 전체적으로 평지 지형에 크고 작은 당우(堂宇)들이 자리 잡고 있다.
금강문 오른쪽에 있는 쇠솥(鐵鑊, 보물 제1413호)은 신라 성덕왕 때 당시 승도(僧徒) 3000명을 먹일 쌀 40가마가 들어간다는 것인데, 반대편인 왼쪽 끝에는 우리나라 최대크기인 80가마가 들어가는 돌솥(석조(石槽),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이 있어 대조적이다.
철당간 옆에 있는 석련지(石蓮池)는 원래 용화보전 앞에 희견보살상, 사천왕석등과 한 줄로 서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용화보전이 없어지면서 본래의 자리를 잃고 그 축(軸)을 벗어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법주사의 중앙에는 팔상전(八相殿)이 있다. 우리나라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은 사찰 창건 당시 의신 조사가 초창했다고 전하나, 정유재란 때 불탄 후 사명대사와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다고 하며 지난 1968년에는 완전 해체, 수리하였다.
팔상전에서 대웅보전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쌍사자 석등이 있다.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독특한 형태다. 디딤돌 위에 선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대고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인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사자의 갈기와 다리 근육 등이 매우 사실적인 통일신라 석등의 대표작이다.
법주사 금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철확(쇠솥)이 있고 왼쪽으로 철당간과 석련지, 돌확(석조)이 있다. 금강문 정면으로는 두 그루 나무가 버티고 선 사천왕문이며 팔상전을 지나면 쌍사자 석등이 있고 이어서 대웅보전이다. 마침내 부처님이 계신 곳이다.
법주사는 법상종 사찰이며 미륵신앙 도량이기에 대웅보전과 미륵전(용화전) 양대 불전이 핵심이다. 미륵전은 조선 말기 대원군 때 훼손되었기에 천년고찰 법주사의 주불전은 바로 이 대웅보전이며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근래에 다시 지어 팔상전 왼쪽에 우뚝 서 있다.
그런데 석가모니가 주불이라면 대웅보전이 맞겠으나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셨다면 대적광전이나 대광명전으로 불러야 하는데 옛 기록에 대웅대광명전이 흥선대원군 시절 미륵장륙상을 헐어갈 무렵 대웅보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대웅보전에 오르는 중앙계단의 넓은 폭과 중앙의 답도(踏道)가 특이하며 좌우 소맷돌 위쪽에 새겨진 원숭이 석상도 눈길을 끈다.
이렇게 금강문을 들어서서 사천왕문, 팔상전을 지나 쌍사자 석등과 대웅보전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축선이 화엄 신앙축이라면 팔상전에서 왼쪽으로 사천왕 석등과 석연지, 희견보살상을 연결 후 용화보전으로 이어지는 축선이 미륵 신앙축이었는데, 용화보전과 장륙상이 없어지는 통에 이 축선은 없어지고 중간에 있었던 석연지와 쌍사자 석등이 흩어져버렸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배치와 조화가 무너지고 산만해 보인다. 게다가 최근에 과거 용화보전 자리에서 남쪽으로 자리를 옮겨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우뚝 세우니 법주사의 상징 팔상전이 눌려 보이는 점이 다소 아쉽다.
대웅보전 앞 오른쪽으로는 네모꼴 모양의 원통보전이 있는데 관세음보살을 모셔 관음전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창건 당시 의신조사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 된 후 1624년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으며 안에는 목조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원통보전 옆에는 희견보살상이 세워져 있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옛 용화보전 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위치가 변경된 상태이다. 희견보살은 법화경의 소신(燒身)공양을 실천하는 모습을 세운 것인데 부처님께 최대의 공양을 올리기 위하여 1200년 동안 자신의 몸에 향과 기름을 바르고 먹고 마신 후 스스로 불을 붙여 1200년 동안 태워서 공양하였다는 것이다.
금동미륵대불은 원래 용화보전에 미륵장륙상을 봉안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미륵장륙상이 사라지고 난 후 중건할 때 금동미륵장륙삼존상을 다시 모셨으나, 이도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시 당백전 만들려 헐어갔고 용화보전도 무너져 초석만 남았다는 것이다.
1939년에 미륵불상 조성이 다시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은 사람이 요절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재개되어 1964년 완공됐지만, 아쉽게도 시멘트로 만든 불상이었다. 1986년에 이를 헐고 25m 높이의 청동미륵상과 8m 높이의 기단부에 용화전 등을 준공한 것이 1990년이며 2002년에는 청동불에 개금불사를 완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법주사 경내는 대략 돌아보았다. 물론 대웅보전 앞 왼쪽으로 사대부 솟을대문과 담장을 두른 선희궁 원당이 있는데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나중에 위패를 모셔가 조사당으로 쓰고 있다거나 금동미륵불 남쪽으로 통도사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모신 세존사리탑과 능인전 등이 있다.
또한 진영각, 삼성각, 명부전 및 선원을 포함한 스님들 요사채 등 당우들이 많지만 특별하게 눈길을 끄는 곳은 청동미륵대불 아래 바깥쪽으로 나가는 방향으로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거기 새겨진 마애여래의좌상이다.
한국의 대표 산사(山寺)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속리산 법주사. 깊숙한 산속이지만 오붓한 평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최근 세운 거대한 미륵불 외에는 옛 절집 모습 그대로 남아 천년고찰의 역사와 향기를 가득 품고 있는 호서제일 가람이다.
지난 6월 30일(현지시각),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의 산사(山寺) 7곳이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열세 번째 유네스코 세계 유산을 갖게 되었으니 7곳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다.
당초 통도사와 부석사, 법주사, 대흥사 등 4곳만 등재될 듯하였고, 봉정사, 마곡사, 선암사 등 3곳은 보류될 처지였으나 세계유산위원회의 21개 위원국이 만장일치로 한국이 신청한 7곳 모두를 받아들여 등재되었다.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등재된 7개 산사 외에도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대단한 절집들, 예컨대 송광사나 해인사, 화엄사, 직지사, 수덕사 등은 왜 누락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과정을 살펴보았다.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하기 위하여 전국의 절집들을 대상으로 전통사찰, 산지입지,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여부 등을 1차 선별기준으로 적용하여보니 전통사찰법에 의거 인정된 곳이 952곳이었으며, 이중 산지입지 조건을 충족시킨 곳이 785곳, 여기에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기준을 대입하니 63곳이 일차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7~9세기 창건 여부와 창건 시기를 증빙할 자료를 확인해본 결과 다음 25곳으로 압축되었으니 관룡사, 귀신사, 금산사, 기림사, 내소사, 대흥사, 마곡사, 무량사, 무위사, 범어사, 법주사, 봉암사, 봉정사, 부석사, 불영사, 쌍계사, 선암사, 선운사, 수덕사, 용문사, 운문사, 장곡사, 전등사, 직지사, 통도사 등이었다.
마지막으로 선원(禪院)의 운영과 원래 지형을 유지하는지 여부 등을 확인하니 최종적으로 위 7곳이 선정되어 등재 신청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쟁쟁한 사찰들이 누락된 이유는 무엇인가.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경우, 9세기 무렵 길상사라는 암자로 시작하였으나 지금의 대찰은 12세기 후반 보조국사 지눌에 의한 것이다. 7~9세기 창건에 한참 늦었으며 삼보사찰 중 팔만대장경을 보유한 법보사찰 해인사의 경우 9세기 창건의 기록은 확인되었으나 이후 고려시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다. 팔만대장경은 조선시대에 해인사로 옮겨진 것이며 특히나 근래 사찰의 원형을 변형시킬 만큼 많은 공사가 있었음이 그 이유였다.
또한 화엄사의 경우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사찰의 중수나 중창 자료가 불충분하며 직지사나 범어사, 선운사 등은 건물의 상당 부분이 변형되거나 원형 유지가 애매한 점 등이 그 이유였다. 여기서 최근 유서 깊은 절집들의 무분별한 중창불사나 대규모 확장 건설공사가 역사성이나 문화적 가치에 반하는 일임이 드러났으니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을 하나씩 답사해보기로 한다.
태화산(泰華山) 마곡사(麻谷寺)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의 태화산 동쪽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 본사이다.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고려 명종 때인 1172년 보조국사가 중수하고 범일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신라 보철화상 때 설법을 듣기 위해 계곡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형태가 삼밭의 삼대, 즉 마(麻)와 같다 해서 마곡사(麻谷寺)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도선국사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세조가 이 절에 들려 ‘만세에 망하지 않을 땅(萬世不忘之地)’이라 평가하고 영산전(靈山殿) 현판을 사액한 일도 있었다.
마곡사가 위치한 공주 유구 지역은 정감록 등 각종 비결서(秘訣書)에 전해오는 ‘십승지지(十勝之地)’에 해당되는 곳으로 그만큼 명당이라는 얘기이며,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라고 하여 봄날 생기 움트는 나무와 봄꽃들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이다.
마곡사에 아쉽게도 국보급 문화재는 없으나 5층 석탑(보물 제799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제269호)과 제6권(보물 제270호)이 있으며 범종과 청동향로 등 지방문화재와 세조가 타고 왔다가 두고 갔다는 연(輦)이 있어 오랜 전통과 유서 깊은 절임을 말해준다.
또한 마곡사는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시해사건 때 일본군 장교를 살해 후 숨어들어 승려로 지내기도 했던 곳으로 해방 후 찾아와 심은 향나무가 지금도 자라고 있어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는 곳이다. 불화(佛畵)를 그리는 화승(畵僧)들이 많이 활동하여 오늘날까지 화승들을 추모하는 다례제를 지내는 화소사찰(畵所寺刹)이다.
예전에 마곡사는 개울을 멀리 돌지 않고 허리를 뚝 잘라 옆구리로 진입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진입로를 잘 정비하고 주차장을 갖추어 놓아 누구나 자연스럽게 입구로 들어와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다리를 건너 북원 마당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됐다.
진입로 중간에 있는 일주문은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사실상 해탈문(충남문화재자료 제66호)이 마곡사의 첫 관문인 셈인데,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 중앙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면서 양편에는 금강역사상(인왕상)과 문수 및 보현동자상을 봉헌하였다.
해탈문을 지나면 사천왕문(충남문화재자료 제62호)이 나오는데 사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숭상하던 신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수미산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마곡사 사천왕상은 조선 후기 소조불로 봉안되었으며 발밑에 악귀상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눈길을 끈다.
이렇게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왼쪽의 영산전 영역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계류를 흐르는 다리를 건너니 마곡사의 중심영역인 오층석탑과 대광보전, 대웅보전이 나타난다.
오층석탑(보물 제799호) 꼭대기에는 보기 드물게 청동제 머리 장식을 얹었는데 고려 말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들의 라마탑을 본떠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1층 남쪽에는 자물쇠 모양을 새겼으며, 2층에는 사방에 불상을 새겼고 지붕돌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5층 지붕돌에만 1개가 매달려 있다.
마곡사의 중심 법당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모셔져 있는데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과 같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세계의 주인으로 서쪽에 앉아계신다지만 비로자나불을 왜 서쪽에 앉혔는지는 알 수 없어 궁금하다.
대광보전 뒤에 솟아오른 2층 지붕은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인데 안에는 석가모니와 서쪽에 아미타, 동쪽에 약사여래를 모셨는데 약사여래불이 약합을 들지 않고 아미타여래와 같은 수인을 하고 있다.
마곡사의 중심 영역 서쪽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백범당(白凡堂)이 있으며 그 옆으로는 1946년 이곳을 다시 찾은 김구 선생이 심은 향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 마곡사 개울가에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삭발 바위가 있어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이렇듯 마곡사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에 돌아 나오는 길에 해탈문과 사천왕문 옆 영산전을 찾아본다. 영산전(보물 제800호)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러 찾아왔다가 못 만나자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고 한다.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마곡사. 승가 공동체의 생활과 전통양식을 잘 보전하여 ‘한국의 산사’ 7곳에 포함되었고 불화를 그리는 유명 화승(畵僧)들의 맥을 이어가는 절집이다.
조선왕실의 뿌리 '전주'를 떠나다
전주(全州)는 전주 이씨의 시조(始祖)와 조상들이 태어나고 자란 조선왕실의 뿌리라 할 수 있는데, 대대로 살아오던 이곳에서 이성계의 4대 조상 이안사에 이르러 전주를 떠나게 된다.
훗날 이성계에 의하여 목조대왕으로 추존된 이안사는 시조 이한의 18세가 되며 전주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지금의 이목대(梨木臺)가 그곳인데 ‘전주읍지(全州邑誌)’에 ‘전주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발산(鉢山)은 발산(發山), 또는 발리산(發李山)이라고 이른다. 발리산 남쪽 아래에 자만동(滋滿洞: 現 校洞)이 있었는데, 이 자만동에 목조대왕의 집이 있었다’고 하였다.
지금의 전주시 교동, 한옥마을 위쪽에는 이안사가 살던 곳 이목대(梨木臺)와 이성계가 남원 운봉까지 내려와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개선하던 길에 잠시 들러 잔치를 베풀었다는 오목대(梧木臺)가 남아 있다(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
시조 이한부터 누대에 걸쳐 이곳 전주에 살던 이성계의 조상들은 4대조 이안사에 이르러 전주를 떠나게 되는데 1230년경, 27세쯤이던 그가 전주의 고급 관리들과 갈등을 빚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당시 전주에는 안렴사(按廉使)와 산성별감(山城別監), 주관(州官) 등 고급 관리가 있었는데 때마침 전주에 산성별감이 새로 부임하게 되자 주관은 바쳐야 할 관기(官妓)를 목조대왕께 청탁하였으나 거절당했으며 이를 관의 명을 거절했다 하여 핍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는 사병(私兵)을 가진 무신들이 전횡하던 시대인지라 군사를 보내 굴복시키려 살해위협이 예상되는바 화를 면하기 위하여 부모와 일족을 이끌고 전주를 떠나게 되었다. 이때 그를 따른 혈족과 외족이 170여 호나 되었다고 한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자료).
왕조 창건의 태몽,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전설
이안사가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온 지 1년 후 부친상을 당한다. 마땅한 묏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한 도승으로부터 소 백 마리(百牛)를 잡아 제사 지내고 금관(金棺)에 안장해 장례를 치르면 5대손 안에 왕이 태어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형편이 그렇지 못한 이안사는 하얀 소(白牛)를 구하여 ‘百牛’를 ‘白牛’로 해석하고 들에 널린 귀리 짚으로 관을 감싸니 금빛이 도는 금관이 되어 도승의 말을 실천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이안사는 아버지 양무장군의 묏자리를 잘 써서 5대손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여 왕이 되었으며, 이성계는 4대 조상을 모두 왕으로 추존하여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칭하였으니 이곳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活耆里)는 황제가 나왔다는 황터, 곧 황기(皇基)라고 전한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 건국 후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고 수호군(守護軍)을 두고 관리하였으며 삼척을 선대의 묘가 있는 곳이라 하여 현(縣)에서 부(府)로 승격시켰다. 고종 때(1899) 이르러 묘호를 준경(濬慶)으로 공식 추봉하고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준경묘는 큰길에서 40분 넘게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금강송 군락지를 통과하는 길이다. 특히 이곳에는 전국에서 가장 멋진 소나무로 뽑힌 미인송(美人松)이 있는데 2001년 충북 보은 속리산에 있는 정이품송과 혼례를 치르고 후손을 받아 키우는 그 나무이다.
이렇게 전주에서 삼척으로 옮겨 온 이안사는 부모를 모두 삼척에 묻었는데 부친 양무 장군의 묏자리가 군왕이 나온다는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조선왕조의 탄생을 예약 한 곳이다.
당시 해안지역은 이곳 강원도까지도 왜구의 침략이 빈번하였으며 몽고군이 일곱 차례나 전국을 초토화시키며 휘젓고 다닐 때다. 이에 이안사는 대규모 족단(族團)을 이끌며 외적에 항전하면서 잘 지내고 있었으나 전주에서 충돌했던 산성별감이 강원도 안렴사로 부임해 옴으로써 수년 만에 다시 짐을 꾸려 더 북쪽으로 올라가야 했다.
시골에 내려가 살기를 원하는가? 그러나 시골에 거처를 마련할 실력이 여의치 않은가? 빈손인가? 걱정 마시라. 찾다 보면 뾰족한 수가 생긴다. 일테면, 재각(齋閣)지기로 들어앉으면 된다. 전국 도처에 산재하는 재실, 재각, 고택의 대부분이 비어 있다. 임대료도 의무적 노역도 거의 없는 조건으로 입주할 수 있다. 물론 소정의 면접은 치러야겠지만 당신이 남파된 간첩이 아닌 한 딱지맞을 일은 없다. 폐교를 빌려 쓰는 방법도 고려할 만하다.
서양화가 원덕식(46)씨는 산골 폐교를 빌려 살고 있다. 귀촌한 지 어언 6년이 지났다. 그녀 곁엔 동화작가 노정옥(49)씨가 그림자처럼 동행한다. 이들은 서울에서 뜨거운 연애를 하다 부부 사이로 발전했다. 결혼식은 이곳 폐교 운동장에서 치렀다지. 귀촌의 첫 장을 혼례로 기록한 셈이다.
원씨 내외는 별반 손에 쥔 것이 없는 채로 산골에 들어왔다. 맨몸으로 신접을 차렸다. 온몸을 다해 귀촌 초기를 개척했다. 수천 평 부지에 들어앉은 낡은 폐교를 부부 단둘이 덤벼들어 단장을 하길 날마다 반복했다. 첫해 엄동엔 난방이 안 돼 냉장고보다 찬 사택에서 덜덜 떨며 밤잠을 자야 했다. 살을 에는 추위를 덜기 위해 방 안에 텐트를 치고 선잠을 잤다는 게 아닌가. 도깨비 나올 듯 뒤숭숭한 교사를 고치고 때우고 꾸미고 칠하는 일도 고스란히 부부의 몫이었다. 강철 같은 기세로 운동장을 뒤덮고 우르르 들솟는 풀들을 뽑는 일은 신역이 자심한 반면 좀체 표가 나질 않더란다. 이래저래 고역에 고난에 고심이 첩첩 겹쳤겠지. 신혼의 달콤한 훈김이 시련을 덜어줬을 법하지만, 제주도로 유배를 당한 추사도 아닌 것을, 어쩌자고 으스스한 폐교에 둥지를 틀었단 말인가? 원씨의 얘길 들어볼까.
“시골생활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처음엔 많이 염려했어요. 과연 잘 살 수 있을지, 견뎌낼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많았죠. 하지만 그런 근심에 사로잡힐 겨를조차 없이 온갖 일에 매달려야 했어요.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시설을 고치거나 운동장의 풀을 뽑아내는 일들이 화급했으니까. 몸으로 부닥쳐야만 하는 그런 일들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어요. 그러나 잘 견디며 지내왔어요. 남들이 보기엔 무모하거나 철없는 귀촌일 수 있겠지만 저희에겐 뚜렷한 목적이 있었으니까요. 폐교의 너른 교실 공간을 손질해 미술 작업실로 쓰자, 그것으로 작품에만 매진할 여건을 조성하자는 게 귀촌 동기였거든요.”
글쟁이에겐 골방에 컴퓨터 하나면 그만이지만, 화업(畫業)엔 널찍한 공간 확보가 필수다. 서울의 임대료는 비싸다. 화가들이 그래서 흔히들 교외나 시골에 작업실을 마련한다. 폐교를 임대해 활용하는 이들도 많지만, 수년 안짝에 철수하는 사례도 흔하다. 원씨 내외도 초기 한때엔 서울로 되돌아가는 문제를 놓고 갈등을 했더란다. 주거 환경이 너무도 열악하고, 덩치 큰 폐교의 안팎을 보수하는 일이 버거워서였다. 그러나 서서히 자리가 잡혀 이젠 정착에 이르렀다.
부부는 미친 듯이 창작에 진력할 작정이었다. 남편은 글을 쓰고, 아내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치열하게 하자는 게 귀촌의 목적이자 초야에 건 약속이었던 것. 그러나 다소 길이 달라졌다. 마을 주민들을 끌어들인 ‘생활문화공동체사업’을 펼쳤다. 관이 행하는 마을 사업 공모전에 응모,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면서부터였다. 부부는 마을 안길에 미술 조형물을 설치했다. 교사 안에 소규모의 농업박물관도 개설했다. 주력 사업은 주민들에게 그림 그리기나 시 쓰기, 도자기 만들기 같은 걸 가르쳐 전시회를 여는 일이다. 반응도 성과도 좋았다지.
소외된 촌로들을 공방으로 끌어들이다
주민의 대다수는 노인들. 평생을 두더지처럼 땅을 파며 살아온 농부들. 그들에게 글과 그림이란 생판 생소한 딴 세상의 물건이기 십상이다. 실상이 그렇지만 노인들은 손수 만든 작품으로 전시회까지 여러 차례 흐뭇하게 치렀다. 도시에 번성한 문화 예술은 좀체 시골에 손을 내밀지 않는다. 원씨 부부의 행장은 이 점에서 가상하다. 소외된 촌로들의 고즈넉한 삶을, 파묻힌 기층문화를 수면 위로 돋우는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눈여길 건 노인들을 모아들인 원씨 부부의 출중한 사교 능력. 그들은 배타적이거나 고독한 노인들을 폐교의 공방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였다. 처신을 어떻게 했기에?
“시골 어머니들의 삶은 참 고달파요. 겨울 한철을 빼곤 늘 농사일에 매여 살죠. 새벽에 들에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귀가하는 일상을 지켜보면 안쓰러워요. 얼굴엔 주름투성이이고, 손발은 갈퀴처럼 거칠고, 벌레에 물린 자국으로 온몸이 얼룩지고, 그러면서도 강인하고 씩씩하고요, 가슴 찡해지는 모습이죠. 그런 어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자주 접촉하고 수시로 스킨십을 하고 그랬어요. 애교도 부리고, 장난도 치고, 옥희씨! 순자씨! 그렇게 이름도 불러드렸고요. 스스럼없이 다가가 다정한 관계를 맺었어요.”
“예술을 한다고 외돌아 앉아 오불관언식 처세를 했다면 미운털이 박혀도 야무지게 박혔겠죠? 이웃을 마주칠 때마다 인사만 참하게 잘해도 기특하다는 평이 돌아오는 게 시골이죠. 툭하면 벌어지는 마을 술판에서의 호출에도 가급적 득달같이 달려가는 게 현명한 처신이고 말이죠.”
“술자리 참석은 남편의 전공 분야입니다(웃음). 마을의 갖가지 경조사에도 부지런히 찾아다녔어요. 내 부모 대하듯 어르신들의 얘기를 경청하고 존중하는 버릇도 남편의 처신에 배었죠. 괜한 참견이나 잔소리에도 토를 달기는커녕 고맙게 받아들였어요. 덕분에 소통이 쉬웠던 것 같아요. 음, 복된 관계랄까, 일찌감치 저희는 자식처럼 따뜻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어요. 이런 정황 하에 마을공동체사업을 원활하게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시골의 부당한 텃세를 운운하지만 저희는 그런 조짐조차 느끼질 못하고 지냈어요. 텃세란 귀촌자의 처신 여하에 달린 문제이지 않겠어요?”
“세태란 야박해서 내 안의 이기적 유전자를 발동하지 않고선 남에게 당하거나 밀리기 십상이죠. 날이면 날마나 피 튀기는 복싱이 벌어지는 게 서울이라는 사각 링일 뿐일까? 시골의 풍정은 안도해도 좋을 만큼 평온한 거예요?”
“도시의 인간관계란 대체로 메마른 계산 중심으로 흘러요. 시골은 좀 달랐어요. 그 머릿속에 계산이 전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시골 할머니들의 태도엔 순응이랄까, 순수랄까, 그런 기본 정서가 농후하게 서려 있어요. 그러나 내면엔 아픔, 슬픔, 상처가 가득 고여 있죠. 개인의 꿈은 접고, 고단한 시골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억지로 살아온 한평생에 관한 한(恨)! 할머니들의 이 억압된 꿈과 깊은 한을 주제로 한 그림 작업, 요즘 저는 거기에 몰두하고 있어요.”
원씨는 알아주는 눈들이 많은 화가는 아니다. 주변의 촉망을 한 몸에 받는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죽을 여자도 아니렷다. 그림을 평생의 본분사로 삼았으니 말이다. 그녀가 진정 남김없이 열정과 깡을 다해 작업에 임하는지는 그녀 자신만이 알 일이겠지만, 미술을 위해 귀촌을 결행했으니 그녀 내부엔 나름 큼직한 사이즈의 포부가 들어 있을 테지. 최근엔 해외 아트페어에서 할머니들의 고달픈 노년에 서럽게 잔존하는 여성성을 주제로 한 작품 몇 점이 팔려나가기도 했다. 그녀는 이를 의미심장한 신호로 읽는다. 비로소 작풍의 방향을 찾았다는 안도감에서다. 아울러 이를 귀촌의 선물로 간주한다. 마을 할머니들과의 애정에 찬 교제의 산물로 여긴다.
상처에서도 애틋한 싹이 돋고 잎이 나오고 꽃이 핀다
자연으로부터도 많은 걸 얻었다. 다채로운 걸 느끼고 배우고 담았다. 자연이란 흔연한 사랑을 닮아 조건 없이 준다. 수업료를 받지 않고 강좌를 펼치며 음성을 내지 않고도 메시지를 전달한다. 산봉우리에 오르면 그 높음을 배울 수 있으며, 물길을 만나면 그 맑음을 배울 수 있다. 소나무에서는 그 푸름을, 달에서는 그 밝음을 배울 수 있다. 한적한 시골의 삶에도 남모를 부침이 있고 일희일비가 교차하는 법. 갈등과 괴로움 없이 삶을 건널 수 있던가. 마음이 쑥대밭처럼 뒤엉킬 때면 원씨는 자연 풍경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게 자연의 품에 안겨 살아가는 귀촌 생활자의 특권이라는 것.
“사람을 보듬어주는 자연을 느끼며 살아가는 게 만족스러워요. 도시에선 좀체 만나기 어려운 새소리, 물소리, 달과 별, 숲과 적막, 이런 것들이 들끓던 고민들을 순식간에 잊게 해주는 거예요. 작업이나 일로 힘들었던 하루가 저문 깜깜한 밤에 운동장에 나가면 허공에 모인 별들이 빛을 뿜어요. 초롱초롱 빛나는 그 별들을 바라보면 저절로 피로가 가시고 근심이 달아나요. 남편과 다투고 난 뒤의 상심도 씻겨나가죠.”
“자주 다투세요? 이는 우문이리. 밑바닥까지 드러난 감정 충돌이 잦은 게 부부 사이라서. 결혼 자체가 짐이나 멍에일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왜들 결혼을 할까(웃음).”
“소소한 다툼이 생기곤 해요. 이건 어쩌면 긍정할 만한 기회이기도 해요. 서로 간에 미처 몰랐던 상대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오해에서 벗어나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찬스이기도 하고요.”
고적한 시골에서 날마다 24시간 부부가 붙어 사는 삶엔 창작만큼이나 각별한 재능이나 내공이 요구될 수도 있겠지. 사람이란 천성적으로 ‘삐딱이’가 아니던가. 본능의 밑뿌리인 에고이즘과 ‘귀차니즘’이 불러들이는 불협화음으로 소소한 상처를 주고받는 게 부부 사이 아니던가. 그러나 상처도 인간 내부의 자연이다. 상처에서 애틋한 싹이 돋고 잎이 나오고 꽃이 핀다.
“허황한 욕망과 소비 중심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에서 살았다면 부부 관계가 한결 단조로웠을 것 같아요. 귀촌 덕분에 남편의 내면을 더욱 깊이 있게, 또는 성숙한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죠. 남편은 섬세하고 다정해요. 욱하는 성질은 좀 있지만 독한 게 없어요. 요리도 잘하고, 늘 내 편이라는 게 고맙고 좋아요. 자연이 주는 안정감 같은 걸 남편에게서 느낍니다.”
“두 분, 가진 것 없이 귀촌을 해 온몸을 쓰는 노역으로 폐교를 가꿔 활달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소박하고 간소한 살림, 수굿한 태도, 긍정심, 이런 것들이 보기에 좋아요. 소유에 대한 예찬과 경쟁이 극에 달한 이 세속에서 그렇게 순하게 살기란 쉬운 게 아니라서.”
“틀에 박히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삶, 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게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걸 귀촌을 통해 확인하고 있지요. 점점 더 미니멀한 삶으로 가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줄어들고 있어요. 훗날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여러모로 여전히 불편하고 어려운 점들이 많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이행하는 이 과정엔 회의가 없습니다.”
원씨의 언어는 정밀하거나 기민한 맛을 결여한 대신 유연하고 온순해 평화롭다. 아둔한 나의 머리엔 잡념이 술렁인다. ‘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 과연 실현 가능할까, 불가능할까.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이기나 할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고요히 혼자 떠나 볼 수 있는 때다. 물론 둘이, 여럿이도 괜찮다. 온몸에 한기가 엄습하고 찬 이슬이 피부에 촉촉이 느껴지는 저수지의 새벽이다. 일출 이전의 어둠 속에 서서 물체를 확인하는 시간이 주는 혼자만의 충만함, 여럿이 함께 있다 해도 이럴 때는 혼자가 된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괴산의 문광저수지에 도착한 것은 새벽 여섯 시가 될 무렵이었다. 동트기 전 어스름 새벽안개의 정적을 느끼며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근처 자동차에서 커피를 꺼내 마시던 분들이 거리낌 없이 한 잔 건네 온다. 따끈한 차 한 잔의 고마움이 더 따스히 온몸에 스민다. 그 동네 사는데 이렇게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물안개가 신비할 때면 자주 나온다고 했다. 보온병에 커피 가득 담아서 나오는 그들의 새벽 나들이가 부럽고 순수하게 차 한 잔 나누어주는 인심이 고맙다.
저수지의 어둠이 조금씩 걷히고 낚시꾼들의 수상 좌대의 빨간 지붕들이 이쁜 반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꽂아놓은 듯한 고목들의 무수한 반영들이 저수지의 파문에 아른거리며 비구상 그림을 연상시킨다. 차츰 은행나무길도 노란 색감을 자랑하고 가끔 지나가는 차량들의 바퀴 사이로 은행잎이 회오리치듯 날린다.
마침 그 지역 사진작가협회 회원께서 나와 사진 찍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고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시어 셔터를 누르는 즐거움이 더 컸다. 그리고 괴산만의 맛난 음식점으로 이끌어서 정갈한 나물반찬으로 시골 아침밥을 먹었다. 그런데 어딜 가나 각자 부담이 확실한데 그분께서 굳이 식사비를 계산하신다. 부담을 드릴 수 없어서 드리는 돈을 한사코 받지 않아 그분의 트렁크에 선물을 실어드렸다. 그리고는 또 다른 멋진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안내도 받는 멋진 수확에 감사할 따름이다. 연로하시지만 인자한 모습으로 차분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는 그분의 순박하고 선한 마음씨가 훈훈하다.
어차피 충청북도 지역에 왔으니 대청호를 들릴 일이다.
대청호는 넓다. 충북 청주 옥천, 보은은 물론이고 대전도 걸쳐져 있어서 대청호 오 백 리 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호수 주변에 작약이 필 때도 있고 자연의 풍광이 시시때때로 다르거나 위치에 따라 풍경이 다른 몇 군데가 있다. 현재 6구간까지의 길이 있어서 가을을 맛보고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이번에는 가을바람에 어울리는 갈대습지를 찾았다.
호숫가의 갈대가 반짝이며 바람에 일렁인다. 갈대가 배경이 되어주는 가을호수다. 거기서 조금 더 내려가니 호수를 중심으로 넓은 잔디밭이 있었고 한가로이 벤치가 누군가를 기다린다. 천천히 거닐며 호수에 풍덩 빠져있는 푸른 가을 하늘의 반영에 감탄했다.
그때 벤치에 조용히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두 여자분이 "우리 둘 모습 좀 찍어주실래요?" 하며 휴대폰을 내밀기에 가을 풍경에 잘 어울리도록 구도를 잡아 찍어줬다. 그리고 앞모습뿐 아니라 “뒷모습의 분위기가 더 좋아서 한 장 더 찍어드릴게요” 했더니, "어머, 고맙습니다. 우리 둘이 지금 환갑 놀이하는 거예요." 하면서 따뜻한 연륜의 미소를 보여준다.
갈대와 가을 하늘이 넓게 펼쳐진 호숫가 벤치에 앉아 친구와 살아온 시간을 자축하는 모습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환갑이나 무슨 기념일이면 해외로 여행을 떠나거나 멋들어진 잔치를 했다는 말들을 듣기도 하는데 이분들의 모습이 특별하고 이뻐서 몇 번씩 뒤돌아보곤 했다. 아름다운 정경이 아름다운 가을을 만들어 준다.
가을바람 따라 이름 모를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온 힐링의 시간을 더듬으며 그 분들처럼 따뜻한 차 한 잔이나 미소를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잘 나이 먹어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세상은 흉흉한 뉴스가 연일 나오는데 가을은 이렇게 눈치 없이 이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