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개띠들이 하면 유행이 된다. 폭발적인 우리 사회 인구증가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58년생들은 사회 변화와 유행을 주도한, 지금으로 치면 ‘완판남’·‘완판녀’로 부를 수 있는 세대다. 그들의 문화적 파괴력은 굉장했다. 여러 분야 중 특히 여행과 관련한 58개띠들의 문화주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빈궁에서 벗어나 경제성장의 혜택을 보기 시작한 이들은 다양한 여행을 경험해나갔다.
1978년. 58개띠들이 만 스무 살이 되던 해. 당시 8월 17일자 경향신문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린다. ‘바캉스 파장 … ‘고요’ 되찾는 산하, 연인원 5천만 기록’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당시 여름휴가를 위해 산과 계곡, 바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는지를 증언한다. 재미있는 내용 중 하나는 작년 대비 피서객이 40% 늘었다는 대목이다. 예년보다 높은 기온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성인이 된 58개띠들이 피서객 증가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당시에도 제주도는 관광지로 인기가 좋았다. 평소 600석 내외로 운영되던 서울-제주 간 항공편은 피서기간에는 1000석 이상으로 증편돼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 다음 해인 1979년, 철도청은 고급여행을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새마을호 객차 확충을 서둘러 진행했다.
물론 58개띠들이 여행 보따리를 맘껏 싸기 시작한 원인에 경제성장의 수혜도 빼놓을 수 없다. 1977년은 우리 경제의 상징적인 시기였다. 1인당 GDP가 처음으로 1000달러를 돌파해 1034달러를 기록했고, 수출 역시 최초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배고픔은 점차 잊히고 있었다.
가장 원하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
그렇다면 58개띠들의 신혼여행은 어땠을까. 통계청이 2011년 발표한 ‘최근 30년간 초혼자료 분석’에 따르면, 1981년의 남성 초혼 연령은 26.4세, 여성은 23세로 나타났다.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58개띠들의 결혼이 이뤄진 시기는 이들이 23세에서 26세를 지낸 1981년에서 1984년 사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1982년 5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젊은이들의 신혼여행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등장한다. 한국갤럽이 18세 이상의 남녀 121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많이 다녀온 신혼여행지는 부산(21.6%), 경주(12.6%) 순이었다. 아무래도 비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제주도는 3위(12.2%)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재미있는 것은 순위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존재다. 당시 지방 거주민들에게 서울은 충분히 매력 있는 여행지였다. 신혼여행으로 서울을 선택한 이들은 5.4%나 됐다.
가고 싶은 신혼여행지로는 역시 제주도(46.5%)가 가장 많이 꼽혔고, 당시 왕래가 여의치 않았던 외국을 꼽은 이들도 13.1%나 됐다. 3위는 설악산(11.8%)이 꼽혔는데, 다녀온 여행지에서 7위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설악산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 1978년 진갑을 맞은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관광지도 개발이 막 시작된 설악산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천지개벽’
58개띠가 해외 땅을 밟은 것은 ‘여행’보다 ‘일’이었다. 물론 해외 출장이라고 쉬운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고위직 공무원이나 주요 기업의 임원이 해외 출장이라도 나가면 모두 기삿거리가 됐다. 그만큼 해외 방문은 쉽지 않았다. 출장이 목적이어도 회사의 매출 규모가 낮은 기업은 여권을 받기도 어려웠던 시절.
중동에서 일어난 건설 붐은 58개띠들의 해외 구경의 좋은 구실이 됐다. 굳이 따지자면 58년생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말까지 일었던 중동 붐의 막차를 탄 세대다.
1985년 해외로 나간 한국인은 약 48만 명이었다. 일본과 미국을 방문한 이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많았다.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다.
서울올림픽 개최 다음 해인 1989년이 되면서 전 국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졌다. 1983년만 하더라도 50세 이상인 사람이 관광예치금을 200만 원 이상 맡겨야 관광여권을 받을 수 있었지만 매년 대상 연령이 낮아지다가 1989년에 완전 자유화가 이뤄졌다.
해외여행 자유화는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1990년부터 신문 지면에는 ‘배낭여행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고, 즐겨 찾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에서 태국이나 필리핀으로 바뀌었다.
세운상가 외제장사 아시나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해외 출장 근로자들의 부업 중 하나는 바로 소니와 산요로 대표되는 일본 가전제품을 내다 파는 일이었다. 이들이 면세점 등에서 구매해 들여온 카메라, 오디오, 전기밥솥 등은 세운상가 상인들에게 늘 환영받았다.
그러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지면서 소비자들이 해외에서 직접 물건을 사갖고 들여오는 문화가 확산됐다. 이런 문화의 아이콘으로 ‘코끼리 밥통’이 있다. 일본 조지루시 전기밥솥은 밥맛이 좋다고 입소문을 타면서 고소득층 사이에서 필수품 대접을 받았고, 점차 대중화되어갔다.
매일경제신문은 1992년 광복절 ‘일제선호 불치병인가’란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일본 버블경제의 거품이 꺼져가면서 가전제품 상점가가 몰려 있는 아키하바라역 인근 가게들은 불황을 겪고 있지만, 한국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밥통 등 가전제품을 사주는 덕에 상권이 유지되고 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최근 중국 관광객 유커들이 백화점에서 한국산 밥통을 사재기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당시 58개띠들의 나이는 34세였다. 김포공항 입국 수속 행렬에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당시 신문에 게재된 해외여행 광고를 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도 일본, 미국, 동남아로 지금과 차이가 나지 않았고, 도쿄 4일 여행상품이 70만 원 선, 필리핀 4일 여행 상품이 48만 원 선으로 가격도 비슷하다. 다만 다른 부분이 있다면 중국 관광의 유무다. 58개띠들이 중국 관광지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1994년 중국여행 전면자유화 이후부터다.
[추억 한토막] 대전역 가락국수 맞먹는 앵커리지공항 우동의 추억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났던 대전역. 선로가 붐비고, 대기시간이 길었던 탓에 대전역 승강장의 가락국숫집은 승객들이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됐다. 비행기 여행과 관련해서도 대전역 가락국수와 비슷한 추억의 공항이 있다. 다소 엉뚱하게도 미국 알라스카 앵커리지공항이 그곳이다.
대한항공이 1975년 서울-파리 여객노선을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 노선이 늘기 시작하면서 앵커리지 공항은 상당수 여객기가 들러야 할 경유지였다. 당시 여객기들의 비행거리가 짧았고, 냉전으로 인해 소련 영공을 지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인 절차였다. 이런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 버블시대 해외 여행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던 일본의 항공사들도 이곳을 들러야 했다.
환승보다는 급유의 목적이 컸기 때문에 앵커리지에서 머무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해외 출장이 잦았던 상사맨들이나 항공사 관계자들은 당시 앵커리지의 추억을 기억한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근무했던 안영희 동년기자는 “한 시간은 있어야 했는데 승객들이 딱히 할 만한 것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면세점들이 장사가 잘됐죠”라고 설명한다.
이 공항에서 인기가 가장 높았던 매장은 바로 ‘우동’. 해외 왕래가 잦았던 한국과 일본의 ‘밀리언 마일러’ 사이에선 반드시 거쳐야 할 일종의 성지였다. 일본의 몇몇 사이트에 남아 있는 기록의 편린을 맞춰보면, 앵커리지 우동은 주인이 두 번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주인은 미국계 일본인으로 육수 제작과 제면을 직접 하는 정통파여서, 본토 일본인들도 인정할 정도였다고. 가격은 10달러 내외로 비싼 편이었다. 지금도 일본에선 ‘앵커리지 우동’이란 단어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수준 높은 우동집을 칭하는 대명사처럼 통용되고 있다.
장사가 잘되자 한 항공사 자회사가 주인을 밀어낸다.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 물론 우동은 인스턴트로 바뀌었다. 냉전의 종말과 항공기 성능의 향상으로 앵커리지 경유 노선이 줄자 이 우동집은 한국인 사업가에게 넘어간다. 맛도 한국식으로 변했고, 단무지는 별매여서 원성을 사기도 했다.
대한항공에서 정년퇴직한 정용진 기장은 “당시 조종사들 사이에서 앵커리지공항의 우동은 자주 언급될 정도로 유명했어요. 우동과 함께 팔았던 연어 고기도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물건이어서 인기가 많았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필자의 여고 시절 제2 외국어를 선택할 때 영어 선생님께서 문학이나 웅변을 하려면 독일어를 택하고, 사랑을 하려면 불어를 택하고, 돈을 벌려면 영어를 열심히 공부 하라는 우스개 소리를 하셨다.
오래 전에 작고하신 친정 아버지는 의사이면서 정치를 부업으로 하셨다. 비록 정치에 실패를 하셔서 많은 돈을 날리셨지만, 본업인 의사로 재기를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워낙 욕심이 많으셔서 우리 집 6남매 중 아들 셋 중 둘은 의사로 하나는 약사로, 딸도 셋 중 둘은 간호학과를 입학 시켜서 작은 병원을 하나 운영해도 되겠다는 소리를 어렸을 때부터 우스개 소리로 많이 들었다.
그런데 친정 6남매 중 필자만 유일하게 문과인 영문과를 전공으로 택하였다. 사실은 필자까지도 아버지가 의대를 가라고 했으나 아버지가 대한 이유 없는 반항으로(?) 영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영문과를 입학하자 마자 교수님들이 소개로 소위 재벌 가 자제의 영어 과외를 맡아서 하게 되었는데 그 시절 대기업 사원보다 수입이 많아, 일반 사립대보다 훨씬 싼 서울대 학비는 벌고도 남았다.
등록금을 내고도 남은 돈으로는 우리 집 가전제품도 새로 구입하고 또 동생 두명의 취미 생활에 필요한 것도 사줄 수 있었다. 당시에 텔레리비젼이 처음으로 생산되어 판매되기 시작했는데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딸려 지금의 일가구일주택 정책처럼 한 가족당 한 대만 살 수 있었다.
동생들의 취미를 위해서는 스케이트나 정구 라켓은 물론 Made in Italy 자전거까지 남동생에게 사 주었다. 그 때 산 배드민턴 장비도 지금은 별거 아니지만 그때는 아무나 못 사고 또 뭔지도 몰라서 동네 길 바닥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놀면 친구들이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던 기억이 있다.
또 대학을 졸업 후 홍콩에서 외국 항공사 스튜어디스로 근무를 했는데, 봉급이 여자로서는 다른 직종보다 많은 편이었다. 그 때는 워낙 우리나라가 못 살던 1970년도 시절이라, 항공사에서 함께 일하던 ‘홍콩 차이니즈’라 불리는 중국 아이들도 우리가 영어를 못한다고 깔보고 뒤에서 수군거리곤 했다.
그 때 중국 애들은 얼굴은 중국인이지만 당시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영국 여권을 갖고 다니며 우리 나라를 우습게 보았다. 또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화폐 가치가 형편 없고 너무 낮아서 월급으로 받은 달러를 서울의 부모님에게 보내면 남대문 시장에서 야미(?)로 바꾸면 은행의 거의 두배가 되어서, 홍콩의 비싼 주거비와 생활비를 제외 하더라도 우리나라 대졸 임금의 두배 가량을 저축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파키스탄이나 베트남 출신의 동남아 근로자들이 한국 생활을 어려워하듯이, 필자도 부모 형제들과 떨어져서 생활 해야했기 때문에 외로움과 또 낯 선 외국 생활에 적응이 쉽지 않았다. 결국 일 년 반 만에 모든 걸 정리하고 도망치듯이 귀국하여, 그 후로 결혼도 하였다. 결혼 후에도 남들과 달리 계속해서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 것은 현지에서 배운 영어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요즘은 영어는 기본이고 제2.3 외국어까지 잘하는 젊은 사람이 많아도 직업 선택이 쉽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수입, 일과 직결되는 인기의 부침이 심한 연기자, 가수, 개그맨 등 많은 연예인은 다양한 부업을 통해 고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연기나 음악 등 연예활동을 지속해서 펼쳐나간다. 연예인 마케팅 분야와 방식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연예인의 명성이 수입으로 직결되면서 연예인의 부업도 크게 변화하고 있다.
탤런트 김종결의 고기 음식점 ‘주신정’, 개그맨 부부 김학래-임미숙의 중국식당, 배우 선우재덕의 스파게티 전문점, 황보의 음식점 등 그동안 연예인 부업은 고깃집 등 음식점이나 카페, 유흥주점 등 요식업이 주를 이뤘다.
연예인 부업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요식업은 여전히 수많은 연예인이 부업으로 하고 있는데 최근 들어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배우 홍석천이 서울 이태원에서 이탈리아 레스토랑, 타이음식점, 퓨전 중국음식점을 잇달아 오픈하며 이전과 다른 부업 형태로서의 요식업 모습을 드러냈다. 프랜차이즈화하며 요식업의 부업을 확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패션 분야, 연예인 부업 텃밭
요식업 다음으로 연예인들이 많이 하는 부업은 바로 인터넷 쇼핑몰이다. 백보람, 백지영, 유리, 김준희, 이혜영, 황혜영, 박탐희 등 수많은 연예인이 의류 관련 쇼핑몰 등 다양한 인터넷 쇼핑몰을 부업으로 하고 있다. 연예인이 운영하는 인터넷 쇼핑몰은 부침이 심해 생기는 업체도 많지만 망해서 사라지는 곳도 적지 않다.
최근에는 인기가 많은 스타를 중심으로 스타의 이미지나 이름을 특정 상품화에 사용하는 라이선스 사업을 부업으로 하는 연예인들이 늘고 있다. 배우 하지원은 자신의 이름을 건 화장품 브랜드 ‘제이원(J.ONE)’을 론칭했고, 배우 고현정은 소속사 아이오케이컴퍼니와 함께 화장품 브랜드 ‘코이’ 상품을 출시한 데 이어 패션 브랜드 ‘에띠케이’를 선보였다. 걸그룹 소녀시대의 전 멤버 제시카는 선글라스 브랜드 ‘블랑(BLANC)’을 론칭한 데 이어 브랜드 이름을 ‘블랑&에클레어’로 바꾸고 여성의류 브랜드로 부업 영역을 확장했다. 고소영, 엄정화, 황신혜 등 일부 스타들 역시 자신의 이름을 딴 의류 브랜드 등을 출시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연예인들이 자신의 취미, 관심사를 부업으로 연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 김나운과 홍진경은 김치 사업을 시작으로 부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머리숱이 적은 박명수는 탈모 관련 사업을 부업으로 하고 있다. 몸 관리와 운동에 관심이 많은 이훈은 헬스센터를 운영하고, 만남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박수홍은 웨딩업체를 이끌었다. 자동차 레이싱이 취미인 류시원은 레이싱팀을 만들어 연예인 부업의 새 영역을 개척해 눈길을 끌었다.
이색적인 연예인의 부업도 적지 않다. 개그맨 유세윤은 바이럴 광고를 만드는 소규모 광고 제작사를 경영하고 있고, 개그우먼 이세영은 웹에 19금 소설을 쓰는 작가 일을 부업으로 하고 있다. 스타 최민수는 공방을 차려놓고 가죽공예를 하고 있고, 개그맨 정형돈은 웹 영화 시나리오 작가 일을 부업으로 택했다.
‘인지도=부업성공’ 공식 없어
부업을 하다가 전업으로 삼는 연예인도 있다. 가수 김태욱은 성공한 연예인 출신 사업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지난 2002년 웨딩업체 아이웨딩네트웍스를 설립해 수백억원대 매출액을 자랑하는 규모로 성장시켰다. 김태욱은 현재 가수활동을 접고 웨딩업에 올인하고 있다.
스파게티, 고깃집 등 다양한 부업을 갖고 있는 선우재덕은 “연예인들은 고정적인 수입이 들어오지 않는 직업이다. 인기가 높을 때는 일이 많아 수입도 많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1년 내내 작품 하나 못해 수입이 전혀 없을 때도 있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불안정하고 인기의 부침이 심하므로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하고 연예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 부업을 많이 한다”며 연예인이 부업을 갖는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부업을 갖고 있는 연예인들 중에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사람도 있지만 실패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부업 실패로 연예활동을 접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발생하기도 한다. 단란주점, 커피전문점, 매니지먼트, 삼계탕집, 연기학원, 프로덕션 등 다양한 부업을 가졌다가 모두 실패한 개그맨 이봉원은 “우선 특정 분야에 경험이 없는데도 돈벌이가 된다는 그럴듯한 말에 이끌려 부업을 시작했다가 실패했다. 나를 포함한 상당수 연예인이 동업하자는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했다. 연예인들에게 부업이나 동업을 권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대중적으로 얼굴이 알려진 인지도만을 이용할 뿐 사업 파트너로 대접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투자금이 바닥나고 나서야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말했다.
연예인 이미지에 영향도
연예인이 부업에 성공하면 연예활동도 지속해서 할 수 있지만 실패할 경우 그 영향이 심해 연예활동에 지장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중견 연기자 김해숙은 “음식점을 한 번 크게 했다가 길에 나앉을 정도로 실패한 적이 있었다. 지하철 탈 차비도 없을 정도였다. 현실을 이겨낼 수 없어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게 됐다. 한동안 연기활동을 중단했다”고 말하며 앞으로 부업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며 연기활동에만 전념하겠다고 했다.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면서 사용후기 조작 등 물의를 일으킨 일부 연예인과 유흥주점을 운영하며 청소년 접대부를 고용한 연예인 등 안정적인 연예활동을 하기 위해 선택한 부업이 오히려 연예인의 생명인 이미지와 인기를 훼손시키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물론 선우재덕, 김종결, 김나운, 홍진경 등 부업의 성공을 발판삼아 연예활동을 더 왕성하게 전개해나가는 연예인도 많다. 김종결은 “연예인의 인기만 믿으면 부업은 반드시 실패한다. 연기에 최선을 다하듯 부업에서도 최선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반려동물 인구가 1000만명을 넘었다. 사랑을 주며 함께 놀아주던 ‘애완동물’의 시대가 가고 삶을 함께하는 동반자 ‘반려동물’의 시대가 왔다. 시대를 반영하듯 신조어도 생겨났다. 바로 펫팸족, 즉 반려동물을 뜻하는 ‘펫(pet)’과 가족이란 뜻의 패밀리(family)를 합쳐 ‘가족만큼 소중한 존재로 반려동물을 생각하고 함께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혼자 사는 인구의 증가가 불러온 문화현상. 시니어들도 예외는 아니다. 자식과 가족들이 떠난 자리, 반려동물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의 ‘혼남’ 신중년 주병진
펫팸족의 위상은 요즘 TV를 틀어 봐도 알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방송을 타기 시작한 JTBC , 채널A 는 최근 펫팸족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고 있다. 특히 의 출연자 중 주병진(56)은 혼남(혼자 사는 남자의 준말) 신중년 펫팸족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혼자 살기에는 너무 큰 주병진의 200평대 펜트하우스에 웰시코기 세 마리가 입양해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병진은 신중년 나이답게 서툴지만, 정성껏 반려견들을 돌본다. 입양에서부터 배변 운동, 강아지 발톱 깎기, 목욕하기 등 소소한 펫팸족의 일상이 지나간다. 무엇보다 관심가는 부분은 회가 거듭할수록 주병진과 집의 표정이 훈훈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화 없이 사람 혼자 살던 집에 반려동물이 가족으로 들어와 서로 교감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배운다’는 설정이 펫팸족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환상을, 펫팸족에게는 공감을 주고 있다.
시니어 펫팸족을 찾아서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거주하는 박성천씨(朴性天·78)는 말 그대로 펫팸족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개를 무척이나 좋아해 100평 단독주택의 방 하나를 개집으로 쓸 정도였다. 일본과 부산에 족보 좋은 미니어처 핀서가 있다기에 쫓아가 구매했다고. 유명한 명견대회에서 기르던 개가 챔피언을 해 전국에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부업으로 강아지 분양도 하고 명견대회에도 틈틈이 참여하면서 개 없이는 못 사는 인생(?)을 살아왔다.
박성천씨는 작년 말 지금까지 개들을 키워온 실력을 바탕으로 양재동 노인종합복지관에서 반려동물 관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최연장자 반려동물 관리사 1호’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반려동물관리사는 집을 비우는 반려인들(반려견과 생활하는 사람)을 대신해 반려동물을 대신 돌봐주는 ‘반려동물 돌봄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때도 박성천씨는 반려견을 관리하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박성천씨는 지금도 역시 반려견과 함께 산다. 이른바 시니어 펫팸족. 아내와 함께 15살 된 푸들 다다를 키우며 살고 있다. 아들, 딸들을 시집장가 보내고, 교수 만들고 나니 집에는 아내와 다다 그리고 박성천씨만 남았다. 그래도 집에 들어올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고 혹시나 아프면 안부를 물어오듯 핥고 바라봐주는 다다가 있어 즐겁고 행복할 따름이다. 박성천씨는 반려견을 키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예전에는 애완견이었지만 지금은 반려견이라고 불러요. 보살핌보다는 같이 사는 가족의 의미를 부여한 거죠. 그러니까 반려견과 함께 살려면 무조건 사랑하고 인내해야 해요. 그리고 끝까지 책임져야 합니다. 유행이라고 마구 사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박성천씨는 반려동물을 괴롭히는 사람을 보면 왜 같이 사는지 묻고 싶다.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들이기 전, 자기와 가족 모두가 한 생명체를 책임질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먼저 판단하기를 당부했다.
일본 통신원 이태문 gounsege@gmail.com
시는 울림이어야 하고, 잠언 혹은 금언은 공감을 얻어야만 시대를 뛰어넘어 빛나는 법이다. 수많은 위인과 명인들이 저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철학을 담은 명언을 남겼지만, 시바타 도요(柴田トヨ) 할머니의 이 한마디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다’는 참으로 깊은 울림이며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영원히 빛날 것이다.
1911년 6월 26일 일본 도치기현 도치기시에서 쌀가게를 하는 부유한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난 할머니는 시와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다. 10세 무렵 아버지의 가산 탕진으로 집안 형편이 안 좋아져 학교를 갑자기 그만두었고, 이후 전통 여관과 요리점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 더부살이를 했다. 그런 와중에 20대에는 결혼과 이혼의 아픔까지 겪었다. 그리고 33세에 평생을 함께할 요리사 시바타 에이키치를 만나 재혼해 외아들을 낳았다. 그 후 재봉일 등 부업을 해가며 알뜰살뜰 그리고 정직하게 생계를 꾸렸고, 1992년 남편과 사별한 후에는 우쓰노미야(宇都宮)시에서 20년 가까이 홀로 생활했다.
이처럼 글 쓰는 일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이 살아오던 할머니는 허리가 아파 취미였던 일본 전통무용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돼 크게 낙담했고, 그런 모습을 본 60세를 넘긴 외아들의 권유로 92세 때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산케이신문’ 1면 최상단에 위치한 ‘아침의 시’ 코너의 단골 투고자였으며, 일본의 대표적인 시인 신가와 가즈에(新川和江)는 그녀의 시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던 가운데 2009년 10월, 99세의 나이에 자신의 장례비용으로 모아둔 100만 엔을 털어 첫 시집 를 자비 출판했다. 그 후 아스카신샤(飛鳥新社)가 내용을 추가하고 양장판으로 재출판해 2012년 8월 시점에 160만 부를 돌파하는 초베스트셀러가 됐다.
할머니는 일본의 유명 샹송 가수 구보 도아코(久保東亞子)가 대표 시 ‘약해지지 마’에 곡을 붙여 노래한 것이 계기가 되어 NHK 라디오 제1방송 에 출연해 “많은 사람들의 애정을 받아 지금의 내가 있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2010년 12월 31일에는 NHK TV의 휴먼 다큐멘터리 이 특별 방영됐으며, 2011년 9월엔 만 100세를 맞이한 기념으로 두 번째 시집 (아스카신샤)가 출판됐다. 그해 10월 10일 NHK TV에서 가 방송돼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특히 그해 3월 11일에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 일본 열도가 큰 충격과 상처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여서 온갖 풍상을 다 이겨내고 삶에 대한 긍정적 생명력이 녹아들어 있는 할머니의 시는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시바타 할머니는 2013년 1월 20일 0시 50분께 우쓰노미야시 자택 부근에 있는 사설 요양원에서 향년 10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외아들은 “어머니께서 정말 평화롭게 고통 없이 가셨다”며 “100세 때까지 계속 시를 쓰셨고 원기는 있으셨지만, 지난 반년간은 걸을 때 부축을 받아야 했다”고 전했다. 할머니가 숨진 그해 늦깎이 시인의 인생을 그린 영화 가 제작돼 개봉됐다. 국내에서는 세상을 등지기 직전 가 번역 출판됐으며, 대만과 미국 등 해외에서도 속속 번역본이 소개돼 한 시대 국경과 이념을 초월한 인류의 희망 전도사로 자리 잡았다.
92세에 시작해 100세까지 시와 함께하며, 지난 100년간의 삶을 잔잔하게 들려준 할머니는 초고령사회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당당하게 맞서 스스로의 길을 새롭게 일구어나갔다는 의미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향기로운 결실을 맺은 인생의 황금기가 100세이며, 뒤늦게 발견한 자신의 재능을 활짝 꽃피운 것도 바로 100세였다.
독자들은 세계 최고령 시인이자 인생의 선배인 시바타 할머니를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고, 용기의 메시지를 통해 저마다의 삶을 추스르는 힘을 얻는다. 그것은 할머니 시인의 오래 묵어 우러난 인생철학이자 삶의 구수한 맛일 것이다.
비록 할머니는 이 세상을 떠나 저 하늘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지만, 아직도 이렇게 우리들에게 속삭이고 있다.
민주화를 위해 독재정권에 각을 세웠던 그다. 그의 아버지도 그랬고, 그의 아들도 그랬다. ‘3대가 시위 투쟁 집안’이라는 기사까지 났다. 그랬던 그가 20년 넘게 모은 토기 1582점을 국가에 기증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 이후 모았던 토기들도 다섯 차례 더 기부했다. 토기가 부업이라면 청동 수저 수집은 취미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마저 모두 내놓았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최영도(崔永道·77) 변호사를 수식하는 단어는 다양하다. 인권변호사로 유명하지만, 1971년 사법파동의 주역으로 찍혀 1973년 유신 때 재임명 탈락 전까지는 법복을 입고 판사로 활동했다. 또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젊은이들을 위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민변의 창립발기인이자 회장을 맡았고, 참여연대의 공동대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까지 맡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해 왔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클래식 음악에 관한 에세이를 엮은 와 유럽 미술관들을 다룬 등 여러 저서를 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이 더 널리 알려지게 된 사건 중 하나는 2001년 평생 모아온 토기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일이다. 모두 6차례에 걸쳐 토기 1668점과 청동 수저 51점 등 도합 1719점의 유물을 기증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그의 이름으로 된 기증실에 약 60여 점의 토기가 전시되어 있다. 수집 과정과 기증 후의 이야기까지 엮어 이라는 책도 냈다.
토기 박물관 만들자 결심해 수집 시작
그가 유물 수집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73년 해직판사가 돼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처음엔 백자 연적이나 유병(油甁)과 같은 도자기 소품을 모으다 고미술 시장에서 만난 후배의 권유로 토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 가치 있는 토기들을 모아 박물관을 건립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즈음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투박한 토기는 청자, 백자 등 다른 유물들에 비해 박물관이나 학계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외국인들이 사들여 해외로 유출하고 있었죠. 그래서 토기들을 수집해 박물관을 차리고 싶었습니다. 판사복을 벗었으니 평범한 법률가로 남겠다 싶었는데 인생의 목표가 생겼던 것이죠. 아내가 대찬성을 해줘 즐겁게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토기는 멀게는 신석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오랜 기간 우리의 삶과 함께했다. 현재는 장례 때 많은 토기를 부장품으로 넣는 것이 유행했던 가야 때 것이 가장 많이 남아 있고, 장묘제도의 변천으로 부장품을 적게 넣어 출토가 적은 고려, 조선 시대 토기가 가장 보기 힘들단다. 그가 기증하기 전까지 국립중앙박물관도 고려, 조선 시대의 토기는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 거의 없었을 정도. 수집가들의 기증문화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물론 이러한 수집은 쉽지 않았다. 포기해야 할 것도 있었다. 라운딩 한 번 나갈 돈이면 저렴한 토기 1~2점은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골프도 끊고, 술도 줄였다. 인사동과 장안평을 샅샅이 뒤지느라 1000원짜리 감자탕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많았고, 차에서 전투식량으로 요기를 하기도 했다.
유물의 해외 유출을 막기도 했다. 1983년 인사동에서 백제토기 ‘쇠뿔잡이항아리’를 만나 반했지만, 200만 원이라는 비싼 가격에 망설였다. 그러다 평소 눈독을 들이던 프랑스 외교관이 곧 사갈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돈을 마련해 갈 테니 항아리를 숨겨 두라고 부탁해 겨우 확보하기도 했다.
감정방법부터 관리방법까지 이론 익혀
초창기부터 박물관 건립을 고려했기 때문에 수집 형태도 남달랐다. 개인적 기호와는 무관하게 시대, 지역, 기형, 문양 등 4가지 기준을 놓고 학술적 가치까지 고려해 수집했다. 학술적 가치가 있다면 싼 것도 모았고, 상품가치가 없을 수 있는 파편도 사들였다.
수집을 위한 연구와 노력 덕분에 토기와 관련한 전문적인 지식도 얻었다. 토기를 감정하는 나름의 7가지 방법을 터득해 진위뿐만 아니라 학술적인 분류까지 할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어 토기를 보면 살짝 혀끝을 그릇에 대보는데, 진품인 경우 토기 내부에 다공층이 있어 혀가 잠깐 달라붙는다고. 그때 나는 기분 좋은 곰삭은 냄새는 즐거운 덤이다. 토기를 구입하면 경질토기와 연질토기를 구분해 각각의 특성에 맞게 세척하거나 건조하는 방법도 익혀야 했다.
실제로 그가 기증한 유물 1719점에 대한 초록을 제작할 때, 박물관 측과 유물 분석에 대한 수십 건의 이견이 있었지만 몇 건을 제외하곤 대부분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2010년 발간된 이 은 그가 제안한 분류법대로 편집됐다.
그렇게 20년 이상 수집이 진행돼 고미술 시장에서 더 이상 사고 싶은 토기를 보기 어렵게 되자, 본격적인 박물관 건립을 추진했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서울 인근에 소박하게 아이들이 와서 보고 갈 수 있는 규모의 박물관이 되려면 300억 원 이상 필요하겠더라고요. 제 돈으로는 어림도 없어 대기업이나 정부에 모아놓은 것을 모두 무상 기증할 테니 토기 박물관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퇴짜 맞기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끌어안고 고민만 하다가 국립중앙박물관 측에서 여러 차례 요청이 와 기증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기증을 결심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모아놓은 토기들에 대한 걱정이 너무나 컸던 것도 있다. 혹시 사고라도 당하게 되면 그 토기들이 어떻게 될까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해외를 나갈 때, ‘내게 문제가 생기면 토기들을 국·공립 박물관이나 대학 박물관에 무상기증을 하라’는 내용의 유서를 반드시 남겨놨다고 했다. 여행을 할 때마다 유서를 쓰고 찢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횡단보도에서 이러다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토기들은 어떡하나 하고 똑같은 걱정을 반복하다, 아끼는 것일수록 박물관에서 오래도록 전시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증 결심이 섰다고.
오래 관리되고 기억되길 원해 기증 선택
기증처가 국립중앙박물관이 된 것은 그전부터 이어오던 인연 때문이다. 1997년 국립중앙박물관 토기 전시회에 44점을 찬조 출품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이 지금의 위치인 용산으로 이전을 계획할 때, 기증관 구성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면서 최영도 변호사 측에 제안해 기증이 이뤄졌다. 물론 다른 박물관에 비해 뛰어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관리, 전시 능력도 매력적이었다. 그는 이 과정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부터 “선택받았다”라고 표현했다.
2001년 기증 후에도 그의 토기 수집에 대한 습벽은 쉽게 멎지 않았다. 그만해야지 싶다가도 좋은 유물이 나타났다는 전화에 흔들리기도 했고, 궁금해서 일단 보면 지갑 열기를 멈추지 못했다. 아예 눈을 닫으려고 하면, 상인들이 토기를 들고 사무실로 들이닥쳐 외상으로 맡기고 갔다. 이렇게 토기들이 더 모여 몇 차례 계속 기증하길 반복했다.
한눈에 반한 토기를 만나면 며칠이고 침대에 두고 끌어안고 잘 정도로 사랑이 남달랐던 그다. 때문에 시집보낸 딸처럼 토기들이 눈에 아른거릴 법도 한데, 기증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잘했다 싶단다.
“평생을 바쳐 모은 수집품들이 주인을 잃고 나서 허망하게 시장에서 뿔뿔이 팔려 나가거나, 풍비박산이 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또 사설 박물관도 후대로 넘어가면 초심이나 전문성을 잃는 사례가 있습니다. 때문에 기증문화의 발전은 문화유산의 보존을 위해 중요합니다. 유물은 국가와 국민의 소유이고, 수집가들은 그것을 잠시 맡아 두는 창고지기일 뿐입니다.”
모든 토기를 기증하고 나서는 기쁨과 해방감을 함께 맛봤다고 말했다.
“무거운 관리 책임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어깨가 가벼워짐을 느꼈습니다. 수집은 명예인 동시에 속박이라는 것을 느꼈고, 모두 다 기증하고 나니 마음이 가볍고 자유로워졌습니다. 박물관에게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쉽게 기증 결정할 수 있게 제도 개선돼야
해외 미술관을 돌며 관찰해 이를 엮어 책까지 발간한 그이기에 기증문화에 대한 의견은 현실적이다. 특히 기증을 하는 것만큼이나 기증을 받는 쪽의 태도 변화도 절실하다고 이야기한다.
“학계나 관련 기관에서는 수집가나 고미술 상인을 낮춰보거나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수집은 단순히 돈을 주고 가져오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고 신중한 과정을 거치는데, 직접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친 만큼 수집품에 대한 지식과 애정 또한 상상 이상입니다. 그런 ‘귀한 자식’을 받아주는 일인 만큼 받는 쪽에서도 애정을 갖고 기증품을 다뤄줬으면 합니다. 전시 과정에서도 기증자에 대한 부각이나 배려가 고려된다면 보람도 느낄 수 있고, 기증에 대한 동기유발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기증자들이 스스로를 박물관의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외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경우 기증자의 이름이 잘 보이도록 크게 써 놓거나, 아예 액자에 새겨 넣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최영도 변호사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기증자 대표로 기증 후 몇 년간 추대 받아 활동하기도 했고,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기증과 관련한 강연 등의 요청이 와 이런 의견들을 밝힌 적도 있다고 했다.
최영도 변호사는 문화 발전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이 절실하다고 조언했다.
“수집가라고 모두 다 엄청난 재산가는 아닙니다. 수집을 위해 평생의 재산을 바치는 경우도 허다한데, 이런 경우 기증 후에는 생계를 걱정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우려가 기증에 장애가 될 수도 있는 것이죠. 때문에 수집가들을 위한 세제 혜택이나 연금제도의 도입 등을 고려해야 합니다. 세제 혜택 제도는 기증품에 대한 평가가 어려워 법까지 만들어 놓고 시행하지 못한다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특히 세제 혜택 마련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기증품에 대한 가치평가와 관련해선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면 될 일이라고 강조했다.
“관과 학계, 업계, 수집가들로 구성된 공동평가기구를 만들어 기증품의 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된다면 세제 혜택뿐만 아니라 기증을 후원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열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요즘 필자의 부업(副業) 중 하나는 주례를 서는 것이다. 말이 부업이지 돈이 생기기는커녕 꽤나 품과 시간이 들어가는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흔쾌한 마음으로 주례를 서고 있다. ‘저출산·고령화시대에 주례가 없어서 결혼을 못하면 안 되지~’ 하는 은퇴연구소장으로서의 애국심(?)이 아니라면 진작부터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주례랍시고 다소 무례한 줄 알면서도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집 마련에 관한 부분이다. 집을 샀다면 어느 지역의 몇 평짜리를 얼마에 샀으며, 전세는 몇 평짜리가 얼마냐 하는 세세한 내용까지 다 털어놓게 만든다. 요즘 젊은이들의 집에 대한 생각과 함께 부동산시장의 흐름을 짚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신혼부부들의 연령대는 대부분 30대 초·중반이다. 이들은 한마디로 집사기를 꺼려하고 있다. 무엇보다 앞으로 집값이 오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전셋값이 오르고 있지만 둘(맞벌이가 대부분)이 벌어서 충당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 집을 샀다가 집값이 떨어질 경우 당해야 할 충격과 손실은 피하고 싶다는 것이다. 결국 30대와 40대 초반 연령대들은 ‘지금까지는 집이 주거의 대상인 동시에 투자의 대상이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주거의 대상이지 투자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먼저 집을 사야 하고 집을 사면 무조건 오른다는 신화(神話)를 가지고 있는 세대에게는 신선하면서도 생뚱맞은 생각일 것이다.
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일까? 물론 양가의 도움을 받더라도 집을 사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돈을 모으더라도 반드시 집부터 사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집보다는 좀 더 좋은 차, 특히 외제차를 사고 싶고 둘이서 여기저기, 특히 해외로 여행 다니고 싶다는 것이다. 실제로 요즘 신혼부부와 양가 부모의 갈등이 외제차 구입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말로만 듣다가 우리 집 아이들이 그럴 줄 몰랐다”는 부모들의 푸념도 심심찮게 들린다.
서론이 길었지만 젊은 층의 주택관을 들여다본 이유는 이들이 앞으로 주된 주택수요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30대는 집에 대한 애착이 없는 세대이다. 왜냐하면 부모 세대는 악착같이 벌어서 가난과 집 없는 설움을 벗어나는 게 인생 최대의 목표였지만 이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가 마련한 집에서 집 없는 설움을 거의 겪지 않고 자란 세대들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과연 5저(저성장, 저금리, 저물가, 저고용, 저자산가치) 2고(고령화, 고소득화)시대, 특히 소득 3만~4만 달러의 고소득시대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부동산 선호가 계속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가계자산 중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1993년 76%에서 2001년에는 83%까지 높아졌었다. 하지만 이후 점차 낮아져서 작년에는 68%까지 떨어졌다. 아직도 부동산, 부동산 하지만 13년 만에 고점(83%) 대비 68%로 15%포인트나 줄어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부동산 보유비중이 계속 하락할 것인가? 부동산 보유비중은 부동산 가격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움직인다. 예를 들면 아파트 등 부동산 가격이 오를 것 같으면 사람들이 너도나도 더 많은 부동산을 보유하려고 할 것이다. 반대로 부동산 가격이 내릴 것 같으면 부동산을 줄이는 대신 다른 자산으로 보유하려고 할 것이다. 이 같은 점은 최근 수년간 부동산시장이 침체했던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지역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신혼부부는 물론 주된 수요층인 40대가 집을 사지 않고 버티면서 주택가격은 하락안정세를 보인 반면 전세가격은 급등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감안해야 할 것은 부동산시장의 사이클과 함께 소득수준에 따라서도 부동산 선호도가 달라지리라는 점이다. 이를 보기 위해서는 우리나라보다 소득 3만, 4만 달러를 먼저 간 선진국의 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라마다 인구밀도, 출산과 고령화, 주택건축규제, 주택소유에 대한 인식과 관습, 세제 등에서 다르기는 하겠지만 어떤 공통점을 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도출해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처럼 주식시장보다는 은행 위주의 금융제도를 가지고 있는 독일, 프랑스, 일본의 경우 소득 1만 달러에서 2만 달러 사이에서 부동산 보유비중이 고점을 치고 소득이 3만, 4만 달러로 갈수록 부동산보유비중이 계속 줄어든다는 것이다. 주식시장이 잘 발달되어 있는 미국과 영국처럼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미국인들의 부동산보유비중은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의 호·불황에 따라 30~40%에서 움직이고 있다. 개인들의 주식보 유비중이 높은 데다 국토가 넓고 주택 개발지가 널려 있는 반면 인구밀도는 낮기 때문이다. 반면 독일과 프랑스의 부동산 보유비중은 1980년대에 각각 72%, 71%로 최고를 기록했었다. 이후 조금씩 낮아져서 최근에는 60% 안팎에서 움직이고 있다. 일본의 경우 부동산 거품기였던 1980년대에 부동산 보유비중이 65%에 달하기도 했지만 부동산 가격이 계속 떨어지면서 최근에는 40% 안팎까지 내려와 있다.
필자는 소득수준과 부동산 보유비중의 이 같은 관계를 ‘부동산 포화의 법칙 또는 부동산 포화계수’라고 부르고 있다. 부동산포화계수는 1인당 소득수준이 1만 달러와 2만 달러 사이에서 부동산 보유비중이 고점을 치고 내려오면서 소득이 높을록 부동산보유비중은 줄어드는 대신 금융자산 보유비중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나라도 소득 1만 달러(1994년)와 2만 달러(2006년)의 중간지점이었던 2001년에 83%로 고점을 기록한 부동산 보유비중이 지금도 계속 하락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소득 1만 달러시대를 돌아보면 ‘내 집 마련’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소득 2만 달러를 넘어 3만 달러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지금은 집은 이제 됐고 ‘늘어나는 소득을 어떤 자산으로 굴릴 것인가, 즉 예금, 보험, 주식과 같은 금융자산을 어떻게 굴릴 것인가?’로 자산관리의 초점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간 부진했던 수도권 부동산시장이 회복되기 시작하면 부동산 보유비중이 다시 올라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예전처럼 80%에 근접하기보다 70% 초·중반대로 올라갔다가 부동산 경기에 따라 다시 하락하는 흐름을 보일 것이다. 특히 부동산보 유비중이 높아지더라도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줄어들기 시작하는 2017년을 고비로 다시 하락세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1인당 소득 4만 달러가 넘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의 선례를 따라간다면 2020년경 우리나라 가계의 부동산 보유비중은 현재의 68%에서 60% 안팎까지 낮아질 것이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보험연구소장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나는 면소재 중학교 교사가 되길 바라던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선택한 도시생활이었지만 50이 넘으면서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농촌의 현실은 아직도 어려웠다. 직장 생활과 농사를 병행하며 시골 살이를 시작했다. 이제 표고재배 등 새로운 희망을 품고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 겪으면서 귀향 결심
‘인간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나는 농촌의 중농가정에서 나서 성장하는 동안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동화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요즘이야 논농사, 밭농사 모두 기계화되고 일손이 많이 가는 농사는 기피하면서 단위 노동력당 경영하는 면적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60~70년대에는 논농사만 하더라도 두엄내기, 논갈이, 써레질 등을 전부 수작업으로 하거나 일부 축력에 의존했다. 간혹 기계를 사용했지만 아주 초보적인 기계에 의존하는 정도였다.
농촌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는 동안에도 퇴비장, 토끼사육장 같은 시설에서 토마토 같은 밭농사나 토끼사육 등 농사 체험을 배우고 익혔다. 이후 가까운 지역의 지명도 있는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공무원이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들의 소망에 따라 농업관련 대학에서 공부했다. 이때 체계적이고 학문화된 각 부문의 농업이론을 배우고 실습을 하는 등 과정을 이수했다.
대학을 졸업하자 부모님은 중등교사 자격증을 이용해 면 소재 중학교 교사가 되길 바라셨지만 농촌생활의 갖가지 어려움, 각종 편의시설의 부족, 2세 교육을 위한 교육환경의 열악함 등을 이유로 대도시의 대기업에 입사했다. 부모님이 보유한 농지는 두 분이 충분하게 경작 가능하리라는 생각이었다.
80년대 말 변환기에 나와 중소기업에 몸담게 됐다. 그러면서 값싼 노동력을 찾아 회사가 중국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10여년 간의 중국생활을 했다. 한 때 거침없는 성장으로 코스닥에 상장했던 회사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영업이익이 공장손실을 메꾸지 못하는 등 경영 악화로 이어졌다. 공장을 통폐합하고 조직을 축소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이젠 떠날 때가 됐다고 판단돼 사직했지만 퇴직금도 못 받고, 회사주식에 투자했던 여유자금마저 상장 폐지되는 바람에 허공에 날리고 실업자가 됐다.
실업급여를 받는 6개월 동안 ‘취업이야 되겠지’하는 기대 속에서 인크루트를 비롯한 취업포털을 통해 수많은 회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취업에 실패했다. 50을 넘긴 나이가 핸디캡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작은 아이가 대학졸업을 3년이나 남겨두고 있어 하루라도 소득이 없어서는 안 되는 중차대한 시기였다. 가정주부라는 틀을 벗어난 적이 없던 안식구가 참다못해 월 100만 원 정도 급여를 주는 직장을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팔순이 넘은 어머님 농사를 도우며 작은 농가 소득이라도 올리고자 고향으로 내려왔지만 계산해 본 예상농업소득만으로는 아이 대학 교육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됐다. 그래서 농사를 지으며 부업으로 직장에 다니는 동네 친구를 따라 월 130만원 정도의 보수를 받으며 출근을 시작했다. 출근해서 8시간 내내 예초기를 메고 도로 가장자리에 늘어지고 제멋대로 우거진 잡초와 작은 나무를 베는 일을 했다. 겨울에 눈이 오면 제설작업을 하면서 고된 2년여의 시간이 지나갔다.
고용노동부 취업포털인 워크넷(worknet)에 올린 내 이력서를 보고 주유소 소장을 제의해 온 주유소가 있어 일을 시작했지만 전 소장은 퇴사하지 않고 모든 일을 알아야 한다며 계산원, 주유원 등으로 월 130만원의 보수를 주고 일만 시켰다.
회사에 불만이 많은 가운데 계속적인 취업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한 지역 중소기업으로부터 입사제의를 받고 연 3300만원의 보수로 출하관리 업무로 출근하면서 농사일을 병행해 나갔다. 농사를 지으며 모르는 부분은 경험 많은 어머님이나 친구한테 자문을 구하며 또 남들이 하는 상황을 보거나 과거에 봐왔던 기억을 살려 해나가고 있다.
논에는 벼농사를, 밭에는 고추농사는 단모작, 감자농사는 후작으로 무를, 마늘 심은 후작으로 메주콩을 심고 논둑이나 유휴지에는 검은 콩, 들깨, 호박, 가지, 상추, 고구마, 쪽파, 시금치, 오이, 참외, 토마토 등 채소나 잡곡을 심어 자급하고 있다. 요즘엔 고라니가 많아져서 콩, 옥수수 등은 수확을 못 할 정도로 피해가 많고 논에도 수확기에는 적지 않은 피해를 준다. 하지만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다 지인의 표고농장을 보고 온 뒤 기대를 가지고 실험적으로 시작한 농사가 표고재배다. 매년 11월부터 1월 사이에 엔진 톱을 구해 산에 있는 참나무나 밤나무를 베어 1m 전후의 길이로 토막을 내고, 표고종균을 넣을 수 있는 가는 나무는 나무보일러에 들어갈 정도의 길이로 잘라두었다가 화목으로 쓴다.
1월말에 군 산림조합에 표고종균을 신청하고 3월말 종균이 도착하면 모아 놓은 참나무에 5cm 폭에, 길이 10cm 전후의 간격으로 천공기로 구멍을 뚫고 성형종균을 넣고 물 주기 좋게 쌓아두고 15일 간격으로 물을 주고 차양 막을 설치해 주는 등의 관리를 한다.
◇바쁜 일 없는 시기 수입 짭짤한 표고농사
관리를 잘 하면 종균을 넣은 당년 가을에 표고를 수확할 수 있다고 교재에 나와있지만 내 경우에는 다음해 가을에 표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수확된 생표고는 거래처가 없어 저장성을 높이기 위해 먹을 수 없는 부분을 다듬어서 햇볕에 말려 저장했다가 구매자가 나타나면 시중가인 1kg에 5만 원에 팔고 있다.
표고재배는 중장비 도움 없이 하려면 통나무를 자르고 나르고 세우고 하는 일련의 일들이 중노동이지만 표고수확이나 물주기 등이 비교적 수월한 일이다. 어느 곳에서나 중국산 표고가 넘쳐나기 때문에 가격이 낮아 일이 힘든 것에 비해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온성 표고를 선택하면 3~4, 10~11월에 수확되기 때문에 일이 없을 때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부족한 지식을 메우고자 산림조합에서 출간한 ‘표고재배기술’이라는 책자로 공부하고 의심나는 부분은 찾아 읽으며 다른 고수익 버섯품종도 찾아보았다. 표고 전업농이 되기 위해서는 3만본 정도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정도의 원목을 살 수 있는 거래처를 확보하고 급수 설비 등 시설에 대한 투자를 위해서는 토지 비용 제외하고 연 5000만원 정도 자금이 필요하다.
현재 실험적으로 재배하는 표고는 한 해에 200본씩 확보하여 5년 정도 지나면 1000본정도 되고 그 중 800본 정도가 수확된다. 연차적으로 농사에 필요한 40m×8m 규모의 못자리용 비닐하우스를 보조금 제외한 420만 원에 설치하고 백미 및 현미가공이 가능한 가정용정미기를 140만 원에, 비닐 피복 및 소규모 로터리 및 두둑 만들기가 가능한 아세아 관리기를 120만 원에 구입하는 등 최소 규모의 투자도 진행 중이다.
◇직장과 농사를 병행하는 것도 방법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나이 들어 남의 밑에 가서 거슬리는 말 참아가며 직장 다니지 말고 농사에 올인 하면서 편히 살라고. 그러나 나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직장생활과 농사를 병행할 생각이다. 또 관심 있는 금송, 장뇌삼, 블루베리, 복숭아 등을 시험적으로 심고 가꾸면서 가능성도 따져보고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바로 낙원이라는데 직장을 정년퇴직하면 젖 짜는 산양도 두세 마리 키워서 산양유를 짜서 마시고 남으면 치즈 등 제품 개발도 해보고 싶다. 또는 벌통을 두세 통 사서 남향 따뜻한 곳에 놓고 주위의 아카시아나 밤꽃 등의 꿀도 따고 작물의 수분도 좋게 하는 일들도 좋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여러 곳에 흩어진 조상님들의 산소도 정리하고 내가 흙으로 돌아갈 준비도 착실하게 해 놔서 후세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조상을 숭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작은 바램이다.
* 귀농 전 거주 지역: 중국 대련에서 10년 거주
* 귀농 전 직업: 생산관리
* 귀농 결심동기: 노후준비
* 귀농 선택작목: 벼, 무, 배추, 감자, 표고버섯
*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없음
* 귀농연도: 2008년
* 귀농 시 나이: 52세
* 귀농지 선택사유: 고향마을
* 귀농시 영농기반: 논 4000평, 밭 1000평
* 귀농 초기자금: 없음
* 재 영농규모 : 귀농시와 동일
* 연간 수익: 논 농사 800만원, 밭 농사 450만원(감자 100만원, 무·배추 100만원, 고추 100만원, 표고버섯 150만원)합 1250만원
월가의 큰 손이 유럽 부동산 시장을 ‘찜’ 하고 있다.
부실기업 사냥꾼으로 유명한 윌버 로스 WL로스그룹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유럽 부동산 시장에 베팅할 것을 권고했다고 1일(현지시간) 미국 CNBC가 보도했다.
그는 CNBC와의 인터뷰에서 “유럽의 저평가된 부동산 시장이 투자 매력이 있으며 특히 아일랜드와 지중해 등 리조트 지역이 그렇다”고 운을 뗐다. 로스 회장은 “유럽의 리조트 지역은 현재 외부에서 대규모 자금이 유입되고 있다”며 “영국 러시아 독일 부자들이 앞다퉈 부동산을 사고 있으며 유럽 전체 시장의 회복도 여기서 시작되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 부동산 시장은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아일랜드 주택 가격은 지난 2007~2012년 57% 하락했으며 스페인은 2008~2012년에 23% 빠졌다. 그러나 부동산 부문, 특히 상업용 부동산은 다른 시장에 비해 공급과잉 문제가 심각하지 않아 쏠쏠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고 로스 회장은 진단했다.
그는 “아일랜드 대도시의 임대용 1등급 빌딩을 사면 자본환원율이 7.0~7.5%에 이른다”며 “이는 유럽은 물론 글로벌 기준으로 봐도 높은 비율”이라고 강조했다. 자본환원율은 상업용 부동산의 가치를 평가할 때 많이 쓰이는 기준으로 미래 추정 이익을 현재 가치로 전환할 때 적용하는 할인율을 뜻한다.
로스 회장은 “스페인시장도 비슷한 환원율을 보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스페인의 약 26%에 이르는 높은 실업률 때문에 부동산 투자를 주저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해 로스 회장은 “스페인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거리를 직접 거닐게 되면 거지를 잘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며 “이는 스페인 공식 통계가 이른바 ‘회색 경제(Grey Economy)’ 종사자를 집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회색 경제는 부업이나 물물교환 등 공식통계에 제대로 잡히지 않는 경제활동을 뜻한다.
5년 동안의 병상생활을 굳건히 지켜주던 아내마저 인공심장판막 이식술과 부정맥 확장 수술을 받았다. 몸을 추스르기 위해 찾아온 순창의 월곡마을. 농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지역 주민들과 더불어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건강도 일도 찾은 당당한 농사꾼이 됐다.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려고 온 월곡마을 = 내 고향은 전북 정읍이다. 어렸을 적 도시로 나가 인천에서 살다가 건강이 좋지않아 산 좋고, 물 좋은 청정지역인 이곳 순창으로 7년 전에 이사를 왔다. 그 때 당시에는 몸이 너무 아파 힘든 농사는 생각하지도 못했고 그저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이나 하려는 생각이었다. 마침 처갓집이 순창 팔덕면 월곡리이기에 이곳 월곡마을로 오게 됐다.
처음 이곳에 올 때, 땅 640평을 구입해 집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처음 집을 지으려 할 때부터 쉽지는 않았다. 마을에서는 이런 저런 말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집의 위치가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마을 상류에 살면서 축산업을 할까봐서 집을 못 짓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절대 축산업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하게 됐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집 문제로 마을에서는 임시 총회가 열렸고 찬반 투표까지 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5대 5라고 전해 들었지만 그래도 집은 계속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과 관계가 매끄럽지 못했던 그때 돌파구가 된 계기가 있었다. 당시에 월곡교회 목사님이 팔덕면 독거노인 70분에게 반찬도시락을 배달하고 계셨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나누어 드리는 일을 맡아서 하게 됐다. 집을 지으면서도 봉사활동 하는 날에는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참여했다. 그런 노력 때문이었는지 집을 짓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집 짓는 일이 거의 마무리 될 무렵은 가을 추수 때가 다 되어서였다. 아스팔트 도로가에다 벼를 말릴 때였다. 오가다보니 다 말린 벼를 자루에 담는 일도 어른들에게는 힘든 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 일이 보일 때마다 가서 도와 드리게 됐다.
아무런 의도도 없이 그냥 기쁜 마음으로 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의 인심이 얼마나 좋은지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추수가 끝나고 나니 그분들이 제일 먼저 쌀가마니를 우리 집으로 가지고 오신 것이었다. 농사를 짓지 않던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은총 같은 선물이었다. 40킬로그램의 쌀을 1포씩 가져다 주셨는데 집안에는 일곱 포대가 쌓였다. 그 쌀은 농사를 짓지 않는 우리 가족이 1년 동안 충분히 먹을 식량이었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했던 기억들이다.
◇주민들과 함께 살다보니 ‘성공한 귀농’= 이런 일이 있으면서 내가 가진 기술을 통해 보일러도 무상으로 고쳐드리고 차
량봉사도 시작했다. 말이 봉사지 그리 거창한 일도 아니었다. 순창에는 5일마다 장이 서는데 차가 없는 분들을 위해 장터까지 모셔다 드리고 장터에서 점심도 같이 사 먹었다. 그럴 때마다 잔잔한 정담들을 나누며 가까워 질 수 있었다.
또한 마을에 농악단이 있었는데 농악에 취미를 붙이면서 지역 주민들과 더욱 가까워지게 됐다. 행사가 있으면 함께 즐거워하면서 마음이 통하게 된 것이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더욱 더 합심하려고 노력했다.
이듬해 마을 농가에서 수확한 오디와 복분자를 서울과 인천에 사는 지인들에게 직거래로 팔아드렸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나는 대부분의 농산물을 직거래로 판매해 드렸는데 고사리와 잡곡, 고추 등은 직거래 고객이 많이 늘어나 지금은 인기가 아주 좋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이미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던 사람들처럼 너무나 친숙한 마을 주민이 됐다. 이렇게 마을 분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우리 부부의 건강도 좋아졌고, 살림살이도 늘어나면서 이제 당당한 농사꾼이 됐다. 꾸지뽕 묘목을 재배해 많은 소득도 올렸고 3000평이 넘는 부지에 꾸지뽕 농장을 만들었으며 이제는 꾸지뽕나무를 분재와 관상용으로도 만들어 농가 부업으로 활용 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는 꾸지뽕 가공식품 개발에 많은 연구와 노력을 할 계획이다. 더불어 우리 농장을 관광농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부부가 건강을 되찾은 것을 꼽을 수 있다. 지금은 이곳에 이사 오길 참 잘 했다고 부부가 얘기한다. 농가소득도 늘어나 지금은 연간 6000만 원 정도 소득을 올릴 수 있어 행복한 귀농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던지 우리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귀농·귀촌을 꿈꾸고 있다. 그 중에 여섯 가정(17명)이 이곳 순창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우리 자녀들의 가정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가는데 자연스럽게 홈스테이를 하게 된 이유다.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머무는 동안 귀농 후의 삶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정말 반가운 일은 또 있다. 귀농인들과 함께 마을에 빈집들을 보러 갔을 때 마을 분들이 얼마나 친절을 베풀어 주시는지 모른다. 진심으로 예비 귀농인들을 환영해 주시는 탓에 감동하여 꼭 이 마을에 오고 싶다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이 살 집들을 현재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순창서 얻은 경험, 귀농인들에게 모두 전할 생각 = 장류의 고장 순창에 이사를 와서 제일 먼저 배우고 싶었던 것은 고추장, 된장, 청국장 만드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마을 할머니들을 집으로 모셔다가 고추장 만드는 방법도 배우고, 장 담그는 방법을 배우면서 어르신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어르신들에게 배운다는 자세로 다가서니 할머니들께서 직접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모르는 부분은 일부러 이웃 사람들에게 물어 가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알려 주시기도 했다.
그렇게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전북대학교 식품공학과에서 실시하는 장류 만드는 방법에 대한 교육을 수료하게 됐고, 지금은 아주 맛있는 고추장, 된장, 청국장을 만들 수 있다. 이제는 내 나름의 비법을 레시피로 만들 수 있는 수준으로, 도시에 사는 형제들과 교회의 아는 사람들을 통해 상당한 양의 직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도시민들과의 직거래는 여러 가지 농산물을 다 팔수 있으므로 한번 고객은 영원한 고객이 된다. 정성을 들여 정직하게 거래를 하면 신뢰를 쌓게 되고, 그 신뢰가 소개로 이어져 거래처가 계속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이곳 순창으로 귀농·귀촌 하시는 사람들에게는 고추장, 된장, 청국장 만드는 방법이나 여러 가지 조언을 아끼지 않고 함께 연구하여 순창의 장류사업 발전에 힘을 보태고 지역발전에 적극적으로 노력할 생각이다. 그리고 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며 살 계획이다.
꾸지뽕 농사는 다른 작물에 비해 농가 소득이 많은 반면에 노동력은 적어서 아주 효율적이고 부가가치도 높다. 꾸지뽕나무를 접목하는 기술이나 재배 방법, 판매 방법 개발에 더욱 경주할 생각이다. 꾸지뽕을 첨가한 식품 개발 연구를 통해 부수적
인 농가 소득은 물론 순창 지역 발전에 힘을 보태고 싶다. 이를 위해 그동안 경험한 모든 기술은 순창이 좋아 귀농 하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공개할 예정이다.
◇도시에서 살다 왔다고 더 잘 난 것은 없다 = 이런 생각들이 결실을 얻었는지 이번에 또 다른 두 가정이 귀농을 결심하게 되었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 앞으로 귀농이나 귀촌을 하시는 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스스로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서라는 것이다. 농촌은 지역이 매우 좁아서인지, 아니면 낯설음에서 오는 편견 때문인지 외부사람들에 대한 경계가 매우 심
하기도 하다. 우선 어떤 사람들인가 하고 지켜보는 경우가 많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타지에서 이사 오는 사람들이 간혹 마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느끼는 것이 지역 주민들과 빠른 시일 내에 가까워져야 좀 더 편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며 정착이 빨라진다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는 지역사회 봉사활동 한두 가지 정도는 같이 해야 할 것 같다. 나 같은 경우에는 자율방재단에 가입해 봉사하면서 보람을 얻기도 한다. 지역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지역 주민들에게 신뢰를 얻고 정착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내가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이 그들과 소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마음이 통해야 그들과 친해질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소통하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다. 그저 진심을 다해
도왔고, 진심으로 배우길 원했고, 진심으로 이 마을주민이 되고자 했기에 마을 사람들도 그 진심을 알아주게 되면서 마을 분들 역시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여 주신 것 같다.
진심은 이렇게 통한다. 도시에서 살다 왔다고 마을 주민들보다 더 잘 난 것은 없다. 도시에서 알던 지식이나 생활 방식들은 오히려 이곳에서 쓸모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도시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에게 더 낮은 자세로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남을 먼저 존중해야 나도 존중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통하는 가장 기본인 것이다. 이런 기본에만 충실 하다보면 빠른 정착의 지름길이 되리라 생각한다.
·귀농 전 거주 지역: 인천
·귀농 전 직업: 생산직
·귀농 결심동기: 요양
·귀농 선택작목: 꾸지뽕
·귀농귀촌 교육이수: 없음
·귀농 연도: 2006년
·귀농시 나이: 55년생
·귀농지 선택사유: 처가 인근
·귀농시 영농기반: 없음
·귀농 초기자금: 1억
·연간 수익: 6000만원(꾸지뽕 3500만원 이상, 묘목·고사리 등 2500만원)
·향후 계획: 꾸지뽕 가공공장 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