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작품과 안 좋은 작품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우“단연 최고의 작품은 입니다. 는 사실 내가 만들었다기보다는 우리 조상의 집단의식을 발견한 것입니다. 워스트 작품은 또 다른 나의 베스트라고 생각하는데 입니다. 내가 가지고 전통과, 현실과 예언적인 것과 이런 것들 모두 포함된 것인데 평단에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어요. 는 내가 너무 앞질러 갔어요. 그런데 김숙현이라는 분이 도솔가를 가지고 엄청 긴 논문을 썼더라고요. 알고 보니까 그분의 석사학위 논문이더라고. 라는 작품이 연극 학자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텍스트가 됐다는 점에서 워스트라고 할 수 없으니 내 인생에는 워스트인 작품을 없지 않을까요? 제 작품에 워스트는 없습니다.(웃음)!”
형이상학적 가족사랑? 가족을 패거리 품 안에…
이윤택은 연극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단원들과 줄곧 생활해 왔다. 국내는 물론 외국 각지를 돌며 공연하고 강의하는 삶, 쉬지 않는 일상을 반복했다. 연극 장인에게 가족은 삶에서 어떤 의미일까? 어떤 아버지, 가장으로 살아왔을까?
“사람들은 내가 가장으로서 행동을 안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절대 그렇지가 않아요. 결과론적으로 얘기하면 안사람이 밀양연극촌 자료관장으로 있고, 큰딸이 연극·뮤지컬 작가이자 연출가고, 내 작은딸은 도요출판사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 내 가족이 완전 100% 가업을 물려받고 있는 거잖아요? 가정을 팽개친 아버지라고 할 수 없죠.”
이 특별한(?) 예술인 가족은 지금도 같이 살지 않는다. 이윤택은 도요에, 부인 이연순씨와 두 딸 채경, 상경 자매는 밀양연극촌 안에 있는 집에 살고 있다.
“나는 일상적인 것과 가정적인 것을 경계하는 사람입니다. 왜냐면 예술적 거리라는 것이 필요해요. 너무 일상적인 것과 가정적인 것은 예술적이지 않다고 보거든요. 예술은 좀 낯선 것이다, 가정적이지 않아 보이죠. 하지만 대단히 창조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 나는 결코 가정적이지 않다고 볼 수 없어요.”
“딸들이 서운해 한 적은 없었나?”라는 질문에 목소리를 죽이며 “많이 하지, 많이 하지”라고 말하는 이윤택. 그러면서도 본인은 무조건 아버지로서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카페 ‘오아시스’를 운영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편안한 질문을 던졌다. 평생을 내달린 그에게도 나름 색다른 인생에 대한 갈구가 있지 않았을까? 흥미롭게도 커피숍을 운영하고 싶다고 했다.
“부산 국제시장 근처에 ‘오아시스’라는 커피숍이 있었어요. 당시 돈으로 80원만 내면 하루 종일 있어도 뭐라 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 커피숍이 문을 닫던 날 마지막 손님이 나였죠. 그날 다짐했죠. 그런 다방을 만들겠다고요.”
20대 젊었던 시절 도서관이며 음악실이었던 공간의 따뜻함을 잊을 수가 없다고. 현재 부산 기장군에 신축 중인 6층짜리 가마골 소극장의 건물 1층은 포장마차로, 2층은 카페 오아시스로 꾸밀 생각이라고 한다. 위층은 극장과 극단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커피는 바리스타 자격증 있는 단원이 하면 될 것 같고, 나는 음악을 틀어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웃음).”
시간은 그에게 남다른 여유와 또 다른 시도를 주고있다. 휘몰아치던 폭풍을 맞은 뒤 푸르고 따뜻한 숨으로 정화해 버렸다고나 할까? 기 세던 그에게서 잔잔한 흐름이 느껴졌다. 현재 그는 올해 하반기 부산 기장 가마골소극장과 서울에 삼공스튜디오 개관을 앞두고 있다. 그의 또 다른 도전과 방랑은 계속될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은 날마다 축제라 그가 말했듯. -끝.
얘기를 하다 보니 '시니어 연극'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이윤택의 작품에서 중요한 중심인물이 바로 어머니다. 와 , 최근작 (오타 쇼고(太田省吾) 작·연출·일본)까지 나이든 여성이 주인공이다. 2014년에는 여든 한 살의 배우 오순택이 열연한 를 연출했다. 노배우가 무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감동이던 이 연극은 이듬해 제4회 대한민국 셰익스피어어워즈 대상과 연출상을 받았다.
7월 7일부터 7월 24일까지 대학로 게릴라극장아트홀에서 ‘첫사랑이 돌아온다’는 윤대성이 쓴 희곡으로 치매요양원을 배경으로 한 사랑이야기다. 지난 6월말 부산 초연 이후 서울에서 처음 하는 공연이다.
“내가 연출을 맡았는데 치매 걸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서로 남남인데 할머니는 기억상실증이고 할아버지는 완전히 치매인데 처음 보는 할머니를 보고 자꾸 첫사랑이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할머니는 아니라고 하다 헷갈리다가 아 내가 이 남자의 첫사랑이었구나 그래되는 과정입니다. 웃기면서도 감동적입니다."
이윤택은 실버세대를 위한 연극이 필요하다면서 내년에는 같은 악극을 공연할 계획이라고 한다.
연극을 접해보지 못한 시니어 참여 연극의 가능성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이미 시도는 해봤다고.
“밀양에서 을 할 때 밀양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밀양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공동체 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밀양은 서로 집중 되는 힘이 있거든요. 공연하기 전 저희에게 욕을 하던 할머니도 연극을 하고난 뒤 너무 고마워했어요. 내 인생에 내가 어떻게 배우로서 무대에 설 수 있었겠느냐면서요.”
세계적인 많은 연출가들이 나이가 들면 아동극이나 실버극을 시도하지만 사실 어렵다고 했다. 일본의 극작가 겸 연출가 (오타 쇼고(太田省吾)가 극단을 해체하고 실버극을 시도했었으나 실패했다. 타데우스 칸토르(1915~1990·폴란드)의 경우 성공했지만 식자층이었던 자신의 친구들를 모아 을 공연한 것은 성공했었다고. 꾸준히 시니어 배우, 공연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이윤택이기에 시니어세대를 위한 연극을 힘들겠지만 계속해서 시도해주기를 부탁드린다.
10여 년 전만 해도 연희단거리패 출신의 배우들을 영화 속에서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천만 관객 요정 오달수와 의 곽도원, 배우 이민정이 대표적인 연희단거리패 출신이다.
“이번에 이민정을 만났는데 민정이가 밀양연극촌에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밀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밀양에서 모기한테 한 백방쯤 모기한테 물려서 다시가 새까매진 거. 그리고 우리집 내가 사는 흙집을 짓는데 지붕 위에 올라가서 지붕을 이었다는 거야. 민정이가. 그런데 민정이가 부산 가마골소극장에서 이라는 공연을 했었는데 관객들이 장난이 아니었어. 너무 예쁘고. 너무 잘한다는 거지. 어떻게 이런 배우가 부산에서 하느냐고 그랬어. 오달수는 부산 출신이라 말이 안돼서 마임을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배우가 말을 해야지 그러면 안된다고 하면서 일본공연에 함께 한 적이 있었습니다. 곽도원은 7년 반을 여기에 있었는데 굉장히 게을렀어요. 여기는 아침에 일어나서 단체 생활을 해야하는데 말입니다. 대신에 이 친구는 개인적으로 순발력이 굉장히 뛰어난 배우였어요. 연극보다는 영화가 훨씬 어울리는 배우였던 거죠.”
이 외에도 최근 대세인 배우 황석정도 연희단거리패에서 오랜 시간 공연을 했던 배우다.
나이가 들며 독한 눈빛을 거둬내다
젊은 시절 이윤택은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단어로 표현된다. 1980년대 언론사태를 이야기한 , 잔혹극 등으로 연극 초반 강하게 어필하던 그였다. 이후 인기 공연으로 자리를 잡은 와 또한 삶과 죽음을 다룬다는 점에서 만만치 않은 작품이었다.
“특수성과 보편성의 문제죠. 가는 길이 그렇습니다. 처음에 예술을 시작할 때는 독자성,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게 됩니다. 실험적인 시대를 거쳐 어느 정도 지나, 나 같은 경우 ‘전통’과 ‘대중’을 만나게 됐어요. 내가 한국인으로서 전통을 이해하지 못하면 되겠느냐. 그래서 탄생한 것이 이고, 연극이 꼭 식자층의 놀음이 아니지 않느냐 해서 로 대중을 만났습니다. 밀레니엄 전후로 총체적 규모의 극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 와 을 공연했습니다. 지금은 어떤 상태가 됐냐면 내가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이윤택 스타일’이라는 게 특수성으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래서 올해 연희단 거리패 30주년 공연으로 안톤 체홉의 을 선택한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관객들이 알고 있는 작품을 사용하되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스타일을 보편적인 의미 속에서 고수할 것. 그것을 나이가 드니 할 수 있게 되더군요.”
치열했던 이윤택의 초기작도 좋지만 조금 마음 놓고 볼 수 있는 최근작 또한 편하게 볼 수 있다. 이는 이윤택의 연극 세계가 조금 더 보편화 됐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아이는 물을 많이 먹어요.” “저 아이는 추위에도 잘 자라죠.” 애정 어린 말투로 야생화들을 ‘아이’라고 부르는 백경숙(白慶淑·63) 백경야생화갤러리 대표. 그녀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갑작스러운 병마로 교단을 떠나야 했지만, 야생화 아이들과 싱그러운 ‘인생 2교시’를 맞이하고 있다는 그녀의 정원을 찾았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백 대표는 건강하게 자라나는 야생화를 보면 자신의 몸과 마음도 튼튼해지는 것 같다고 한다. 예쁜 꽃망울이 맺히면 덩달아 마음도 예뻐지는 듯하고, 촉촉이 이슬을 머금을 때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화분 하나하나에 정성이 깃든 만큼 감정이 스며 건강한 기운을 똑같이 느끼게 된다는 그녀다.
“아침에 일어나 정원에 나가보면 화분마다 이슬이 맺혀 있어요. ‘아! 이슬 먹고 산다는 게 이거구나’라고 느낄 정도로 싱그럽죠. 바짝 말라 있던 이파리가 이슬을 먹고 촉촉해지면 나도 그 이슬을 먹은 듯하고, 흙과 땅의 기운도 나누는 것 같아요. 그런 모습을 보고 느낄 때 엔도르핀이 마구 솟아나죠.”
백 대표의 인생 활력소인 600여 개의 화분 중에서도 가장 큰 힘이 되는 ‘아이’는 20여 년을 함께한 ‘둥굴레’다. 그녀가 병마와 싸울 무렵부터 현재까지의 희로애락을 모두 알고 있기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다. “몸이 아프지만 교직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동네 한 화원에 갔더니 가게 주인이 팔다 남은 것을 한번 키워 보라면서 둥굴레 두 뿌리를 줬어요. 아플 때 꽃을 키우면 위안이 된다는 말도 함께 건네면서 말이죠. 지금은 얼마를 줘도 팔지 않지만, 아마 당시 한 뿌리에 500~1000원 정도 했을 거예요. 그랬던 ‘아이’가 큰 화분을 가득 채울 만큼 무럭무럭 자랐죠. 지금은 작은 화분에 분재해서 가꾸고 있어요. 꾸준히 이 ‘아이’에게서 생명력을 받았고, 덕분에 지금의 야생화 인생도 꽃피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녀를 기분 좋게 하는 또 다른 ‘아이’는 ‘석창포’다. 백 대표는 매일 아침 물을 줄 때마다 “어머, 네가 나를 건강하게 해줄 수 있니?”라며 석창포를 쓰다듬는다. 둥글게 솟아 얇고 긴 이파리가 수북하게 난 석창포를 어린아이 머리 매만지듯 문지르면 상큼한 향이 올라온다. 아침마다 이 향을 맡을 때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정신이 맑아진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의미 있는 화분이 많다. 흔하게 생긴 야생화라도 그녀에겐 저마다 특별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백 대표 역시 몸이 아프지 않았거나 지금의 나이에 이르지 않았더라면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젊어서는 자연을 모르고 살잖아요. 할 일이 너무 많고, 자기 미래를 생각하며 굉장히 힘들 때니까요. 저도 그랬고요. 사람마다 취미나 성향이 다르긴 하겠 지만, 그런 성장기를 지나 나이가 들면 자연을 돌아보게 돼요. 흙과 공기가 중요하다, 자연을 섭취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런 게 정말 피부로 와 닿는 거죠. 특히 야생화 가꾸기는 자연과 더불어 적은 돈으로 평생 할 수 있는 취미생활이기 때문에 중·장년의 관심이 높다고 생각해요.”
잘만 키우면 평생 취미가 될 수 있다는 야생화. 무엇보다 경제적으로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백 대표는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데는 한 달에 30만~50만원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마음껏 꽃과 흙을 사고 화분을 가꾸는 데 드는 돈이 그만큼이기 때문이다. 연금도 있고 강의료도 나오는 덕분에 야생화와 함께하는 그녀의 노후는 평안하다. 그러한 삶의 여유는 새로운 것들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여기에 오니까 사람들이 왜 장을 안 담가 먹느냐는 거예요. 예전에는 직장생활에, 몸도 아프니까 친정이나 시댁 어머니가 담가주시는 걸 먹었죠. 근데 두 분이 다 돌아가시고 얻어먹을 곳이 없어졌잖아요. 여기 와서 생활이 익숙해지니까 장이 담가지더라고요. 정말 신기하죠. 아파트에 살았을 땐 꿈도 못 꿨을 일들을 나이 들며 자연하고 살다 보니 되는 거예요. 우리 집에 항아리가 세 개 있는데, 많아서 우리 식구만 먹을 수도 없어요. 그걸 또 이웃과 나누어 먹죠. 그런 게 사람 사는 것 아닐까 생각해요.”
△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 102-39번지에 있는 ‘백경야생화갤러리’의 모습. 담벼락이 없어 자유롭게 방문하고 구경할 수 있다.
“이 아이는 물을 많이 먹어요.” “저 아이는 추위에도 잘 자라죠.” 애정 어린 말투로 야생화들을 ‘아이’라고 부르는 백경숙(白慶淑·63) 백경야생화갤러리 대표. 그녀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갑작스러운 병마로 교단을 떠나야 했지만, 야생화 아이들과 싱그러운 ‘인생 2교시’를 맞이하고 있다는 그녀의 정원을 찾았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교사 시절, 시험 감독을 위해 교실에 들어선 백 대표는 이내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화장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방광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통증과 빈뇨(頻尿)가 점점 심해졌고, 결국 병원을 찾은 그녀는 ‘발작성 방광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유명하다는 비뇨기과를 수소문해 가보고, 좋은 치료법이라면 뭐든 해보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별수 없이 퇴직을 결심한 그녀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 눈물로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몸이 아프고 집에 있으면 정말 울음밖에 안 나와요.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고통을 주시나 하늘이 원망스러웠죠. 병에 좋다는 건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는데 그래도 안 낫더라고요. 암 같은 병도 아니라니까 이런저런 치료를 해가며 집에서 지냈죠.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그게 참 더디고 힘들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백 대표는 “꽃구경 가자”는 동생의 권유로 양재동 꽃시장 구경에 나섰다. 그때, 순백의 청초한 자태를 뽐내는 꽃 한 송이가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말발도리’라는 야생화였다. 말발도리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당장 꽃을 사려 했지만 꽃가게 주인은 “그 꽃은 팔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못내 아쉬워하는 백 대표에게 솔깃한 이야기를 꺼냈다.
“가게 주인이 꽃을 파는 대신 야생화 강사를 한 분 소개해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야생화를 배운다는 건 생소했죠. 시민녹화교실이나 분재 수업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야생화를 배운 건 그때부터였어요. 점점 집에 화분이 늘어났고, 제 삶도 활기를 더하게 됐죠.”
몸 상태가 몹시 안 좋았을 때는 패드를 하고 다닐 정도로 잦은 고통이 찾아와 그녀를 괴롭혔다. 야생화와 함께할수록 베란다에 화분이 가득해졌고 백 대표의 일상에도 한층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갑갑하고 지루한 하루하루 속에서 고통으로 눈물짓던 그녀가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머금게 된 것. 그러나 그런 중에도 고민은 생겨났다.
“꽃에 집중하다 보니 화장실도 차츰 덜 가게 됐고, 화분에 물을 주고 다듬는 등의 활동이 소근육 운동이 돼 몸도 건강해졌어요. 온갖 치료법을 동원해도 낫지 않던, 그야말로 난치병이었는데 말이죠. 모두 야생화 덕분이에요. 그런 야생화가 많아져서 좋았지만, 좁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우기엔 공간의 한계가 있었어요. 그렇다고 그 고마운 아이들을 처분할 수도 없었죠. 야생화를 위해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결심했어요. 그건 나를 위한 선택이기도 했죠.”
이사를 하려고 마음먹었을 즈음 화분 수는 200여 개에 이르렀다. 백 대표는 동생과 함께 전원주택이 있는 지역을 둘러봤고, 고심 끝에 현재 백경야생화갤러리가 있는 서원마을(서울시 강동구 암사동)에 정착했다.
“동생 도움이 컸어요. 아파트에서 살다가 전원주택으로 옮기기 힘들다고들 하잖아요. 동생이 ‘언니 우리 함께 살며 의지하면 어떨까?’라고 제안했죠. 그 말에 힘입어 식구들을 설득해 두 가족이 편안하게 지내면서도 야생화 갤러리를 꾸밀 수 있는 ‘모던한 전원주택’을 콘셉트로 설계했어요. 함께 살다 보니 어려움을 나눌 수 있게 됐고, 경제적으로도 더 여유가 생겼죠. 무엇보다 야생화를 자유롭게 키울 수 있다는 점이 좋았고요.”
‘서로가 원하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서원마을에 온 지도 어언 7년. 화분은 점점 늘어나 이제 600여 개에 달한다. 보살펴야 할 꽃이 많아지면서 백 대표의 손길은 더 분주해졌다. 야외 정원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피부도 건강한 빛으로 그을려져 갔다. 백 대표는 이 마을에 오고 자신의 건강이 95% 정도는 회복됐다고 자부한다. 몸에 활력이 생길수록 야생화를 향한 그녀의 애정은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어느 날 갤러리를 찾아온 분이 ‘원예치료사’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했죠. 처음 그 단어를 듣고는 ‘아, 꽃도 아플 수 있으니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식물을 이용해 사람과 소통하고 마음을 치유하는 거더라고요. 괜찮겠다는 생각에 찾아봤더니 건국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커리큘럼이 있었어요. 그 길로 등록하고 논문 쓰고 실습도 다니며 원예치료사 자격을 취득했죠.”
전문가가 되고 나니 강사 자격으로 야생화갤러리, 유치원, 주간노인복지요양원 등에서 야생화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20년 넘게 교사생활을 했던 덕분에 수강생을 가르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여한 이들이기에 수업 분위기는 늘 화기애애했다.
“꽃을 배우러 오는 수강생 얼굴을 보면 찡그리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그게 꽃이 주는 즐거움이기도 하죠. 더군다나 자기가 필요해서 배우러 오는 분들이기 때문에 적극적이라 힘들이지 않고 수월하게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어요.”
지난 2년간은 외손주를 돌보기 위해 미국을 오가느라 야생화 교실이 뜸했지만, 여전히 찾아오는 이들이 있어 행복하다는 백 대표다. 특히 자신과 같은 중년 여성들의 방문을 적극적으로 환영한다.
“여자들은 정말 갈 데가 없어요. 그런 분들이 야생화갤러리에 와서 꽃도 보고 수다 떨고 하는데 저는 그냥 오라고 안 해요. 기왕 오는 거 옷도 아름답게 입고 예쁜 앞치마도 하나 가져오고 기분 좋게 찾아오라 이야기하죠. 여기 오면 바람도 선들선들 불고 우리끼리 소통하면서 꽃과 함께 예쁘게 놀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공간에서 그런 즐거움을 나누며 지내고 싶어요.”
나무야 나무야 큰 나무야
사과나무야
힘에 겨워 업에 겨워
모진 삶을 살았느뇨
허리가 휘어지게
서글픈 구절로 시작하는 이 시의 제목은 ‘척추측만증’이다. 이 시인의 다른 작품들의 제목을 살펴보면 ‘인술(仁術)’, ‘골다공증’, ‘약이되는 사람’ 등 다소 생소하다. 그도 그럴 것이 김연아나 박지성 등의 허리를 책임졌던 자생한방병원의 신준식(申俊湜·64) 이사장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 신준식’의 시는 손이나 약,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제공 자생의료재단
신준식 자생한방병원 이사장은 한의사이자 정식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환자의 마음의 병까지 치유하는 심의(心醫)가 되고자 노력한 결과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아픔’에 관한 이야기가 유독 많다. 한 번은 척추측만증인 여학생이 그를 찾아왔다. 16세밖에 안 된 이 학생은 안타깝게도 척추가 구조적으로 비뚤어져 교정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그렇게 치료를 위해 땀을 흘리는 도중 소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봤다. 소녀의 고통과 아픔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척추측만증’이다.
그렇게 시를 쓰기 시작한 지가 20여 년이 됐다. 2012년 종합문예지 월간 의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 당선돼 시인으로 정식 등단했다. 그해 에 그의 시 ‘생의 반환점에서’ 등 2편이 선정되기도 했다. 이렇게 꾸준한 작품활동을 통해 지난해에는 네 번째 시집인 를 출간했다.
“시에 대한 영감은 주로 진료실에서 나오죠. 선친은 늘 저에게 마음의 병부터 치료하는 심의(心醫)가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그의 마음은 그의 시 ‘인술(仁術)’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아버지는 나에게/의사는 시내인술(是乃仁術)이라 하셨다/의사는 의술로만 치료하지 말고/인술로 치료해야 한다/마음의 병부터 치료하는 심의(心醫)가 되라.”
실제로 그는 선친의 뜻을 따라 영혼까지 치료하려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임직원과의 소통도 시로 한다. 병원 블로그 등에는 그가 직원들에게 전달하는 시가 심심치 않게 게시되곤 한다. 처음에는 낯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진심을 담아 한 줄 한 줄 자기 생각을 시로 전달했다. 그러자 직원들에게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환자를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졌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그가 시를 놓지 않는 이유다.
“하루는 직원 한 명이 제게 메신저로 수시로 보내주시는 이사장님 시 덕분에 삶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했다면서, 감사함을 환자에게 갚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빈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 시를 쓰는 보람을 새삼 느낍니다.”
이러한 소통 방식은 전국 18개 자생한방병원 분원과 임직원 1500여 명을 하나의 연결고리로 묶고, 국내 최대 규모의 한방 의료재단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1988년 자생한의원으로 시작해 2013년 11월 국내 최대 한방 공익 의료재단으로 거듭났다.
7대째 이어오는 한의사 집안
신준식 이사장의 집안은 7대째 한의업을 이어오고 있는 한의사 집안이다. 선친은 양의사이면서도 한의사였다. 외과의사로 양·한방을 함께 진료했던, 당시로선 매우 드문 의료인이었다. 한국전쟁 때 충청도 시골 마을로 피란을 갔는데 환자들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서울로 돌아오는 것을 포기했었다. 환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니느라 신 이사장의 가족은 무려 17번이나 이사를 했다.
충남 당진에서 한의원을 운영했던 선친은 환자들이 돈이 없다고 하면 쌀이나 감자, 옥수수 등을 받고 병을 고쳐주기도 했다. 그러다 척추 골절과 척추 결핵으로 6년간 앓다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그렇게 병으로 고생하실 때 꼭 낫게 해드리겠다고 약속했어요. 하지만 결국 그 약속은 지킬 수 없었죠. 척추 질환을 꼭 정복하겠노라고 맘먹은 것도 그때쯤이었어요. 경희대 한의대에 들어가서 같은 뜻을 가진 동기들과 추나요법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해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덕분에 전국에 안 가본 곳이 없었어요. 국내에 추나요법에 관한 자료가 많지 않아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허릿병을 잘 고친다는 사람 따라다니다 쫓겨나기도 부지기수였죠. 비방(祕方)으로 추나요법을 전수받은 한의사를 설득해 배우기도 하고, 때로는 안마사에게도 고개를 숙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연구에 매달리다 보니 빛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2700년 역사 자랑하는 추나요법
척추질환은 현대사회의 대표적인 질환 중 하나다. 과거에는 통증을 줄이기 위해 수술요법을 많이 선택했지만, 수술의 높은 난이도와 재발의 위험성 때문에 비수술 요법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고 있다. 양의학에서도 절개를 최소화하는 최소침습시술 방식이 인기를 얻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한방에서 치료하는 ‘추나요법’은 대표적 비수술 요법이다.
대개 비수술 치료는 약물과 추나요법 등을 통해 상태를 호전시킨다. 약물과 추나요법만으로도 2~4주 이내에 회복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디스크가 빠져나오면 인체는 그것을 이물질로 간주해 강력한 면역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추나요법이란 어긋나거나 비뚤어진 뼈와 관절, 뭉치고 굳은 근육을 바로잡아 울체(鬱滯, 막히거나 가득참)된 기혈을 정상적으로 순환시켜 통증을 개선하고, 인체의 자연치유력을 회복하여 질병의 원인을 해소하는 수기(手技) 치료법이다. 골관절과 근육, 인대, 근막 등 주변 연조직의 기능적인 불균형으로 인해 발생하는 척추관절질환을 치료한다. 시술자의 손과 지체(肢體, 팔다리와 몸)의 다른 부분을 사용하거나 보조기기 등을 통해 인체의 특정 부위(체표의 경혈, 근막의 압통점, 척추와 전신의 관절 등)를 조작하고 인체의 생리적·병리적 상황을 조절함으로써 치료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즉, 한의사가 수기법을 통해 가하는 힘이 관절·골격 또는 환자의 특정 부위를 교정함으로써 치료 효과를 내는 것이다.
추나의 역사는 길다. 2700여 년 전 이라는 한의서엔 안마와 지압이, 그리고 밀고 당겨 어긋난 관절을 맞춰주는 에도 수기 치료가 기록돼 있다. 추나(推拿)라는 말은 한의학 경전인 에 나오는 치료법인 ‘도인’, ‘안교’에서 유래됐다. 그러다 명나라 때 문헌에 처음으로 ‘추나’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청나라 때는 황실의 의료를 담당하던 태의원(太医院)에 ‘추나과(推拿科)’를 설치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선 손으로 하는 의술을 천시한 데다 환자들이 신체 노출을 꺼려 빛이 바랬다가 서양의 카이로프랙틱이 들어오면서 역사 속의 추나요법이 부활했다. 물론 부활의 중심에는 신준식 이사장이 있었다.
한의학 세계화 이끌다
1992년 대한한의학회에서 추나학회(현 대한척추신경추나의학회)가 공식 인준되었고 그동안 별다른 관심을 얻지 못하던 추나요법은 마침내 공동 연구의 광장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한의대에서 추나학을 교과목으로 채택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민간요법의 하나로 홀대받던 추나요법이 이젠 한방 치료법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자생의 설립 목적에는 신 이사장의 의료철학이 담겨 있다. 한의학의 과학화·표준화다. 그는 소위 비방(祕方)이라는 명목 아래 등한시해왔던 한의학의 치료 효과를 과학적으로 밝히는 연구를 하고 있다. 이를 위해 SCI급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매년 수차례 게재하고 있다.
“한의학 또한 양방의학과 마찬가지로 치료의학의 우수성을 입증할 수 있도록 임상을 통한 증명 자료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근거 중심의 임상치료 데이터를 모아 우수 논문들을 주류의학인 양방의학계에 발표해 한방을 과학화하고 인정받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병원 경영이 안정돼야 연구도 하고 논문도 쓸 수 있습니다.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병원의 현상 유지를 위한 행정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이러한 연구성과가 뒷받침되면서 신 이사장의 의술은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미국 어바인의과대학 선택과목 채택(2002), 미국 하버드대 의대 협력 연구(2006) 외에도, 2011년부터 미국 러시대학메디컬센터, 미시건주립대학교 정골의과대학, 시더사이나이 병원, 러시아국립의과대학교 등 해외 굴지의 대형 종합병원과 의과대학의 초청을 받아 강의하고 있다.
올해 6월에는 키르기스스탄 대통령병원 개원 70주년 기념 국제 콘퍼런스에 초청을 받아 비수술 한방 척추디스크 치료법 강연을 했다. 이 자리에서 신 이사장은 한방 추나요법과 침 치료법(동작침법) 등 강연을 하며 현지 급성요통환자에게 동작침법을 시연하기도 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척추환자가 통증으로 고통 받으며 수술 치료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비수술적 치료방법인 우리 전통 한의학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진정한 명의(名醫)란
명의(名醫). 사전적 의미로는 ‘병을 잘 고쳐 이름난 의원이나 의사’를 뜻한다. 말 그대로 유명한 의사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준식 이사장 또한 명의일 것이다. 하지만 신준식 이사장이 생각하는 명의는 명망 있고, 병을 잘 고친다고 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다. 환자의 마음까지 다스릴 줄 알아야 ‘진정한 명의’라고 강조한다.
“동의보감에는 ‘약을 잘 처방하면 약의(藥醫)로 삼등(三等)의사요, 음식을 잘 조절하면 식의(食醫)로 이등(二等)의사요, 마음을 잘 다스리면 심의(心醫)라 일등(一等)의사’라 했어요. 환자의 아픔을 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치료해 더 이상은 고통 받지 않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진정한 명의예요. 저는 환자들이 아픈 몸을 치료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병원을 찾아다녔고,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을 들이며 힘들어 했는지 잘 압니다. 그러기에 제 방문을 열고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면 따뜻한 미소와 포근한 말과 정성스런 손길로 얼어붙어 있는 환자의 마음을 안아주고 싶습니다.”
시가 시대를 장식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는 글귀로 시작되는 시 을 한 번이라도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문학의 죽음이 얘기되고 시가 소수에게만 향유되는 취미가 된 현재를 비웃듯 은 단 세 문장으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지금도 저릿하게 만들며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을 쓴 시인이자 현재 공주문화원 원장을 맡고 있는 나태주(羅泰柱·71) 시인은 요즘 시의 인기와 더불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일흔이라는 나이를 넘겼음에도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그를 만나 시, 삶, 그리고 죽음에 관해 물어봤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너도 그렇다’
사람들은 시 의 이 마지막 연에서 굉장한 위로를 받는다.
“지쳐 있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니까요. 그것이 제가 생각해왔던 시의 의도나 작업과 이 세상의 의도나 필요와 맞아 떨어진 거죠. 내가 시를 엄청 잘 써서가 아니라 내 작업과 세상 사람들의 요구가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단 세 문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시 의 나태주 시인은 요즘 강연과 초청의 연속으로 부쩍 바빠졌다. 하지만 그런 현상에 대해 나 시인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잠시 나한테 몰렸다고 봐야죠. 귀찮다고 소홀히 대하면 교만해졌다고 할 테니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웃음)”
시는 사랑처럼 유용해야 한다
시는 자신을 살리는 밥이고 물이고 공기라고 말하는 나 시인은 시가 다른 사람에게는 울리고 응원하고 살리는 정신적인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게 안 될 때는 시가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러한 내용의 러브레터를 세상에 수없이 보냈어요. 그런데 그중의 몇 개가 세상과 맞아 떨어져서 세상이 수용을 한 거죠. 덕분에 바빠졌고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사람이 됐어요. 웬만하면 그 요구들을 다 들어주고 싶어요. 그것이 시인이 가져야 할 세상에 대한 봉사라고 생각해요.”
글을 쓴다는 건 세상에 대한 봉사라고 말하는 나 시인은 봉사의 기준을 자기가 태어난 세상보다 조금 더 낫게 만드는 것에 두고 있었다.
“많이가 아니에요. 조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많이에 집착해요. 누군가 삶에 대해서 말하길 ‘나는 모래밭에 와서 모래알 두세 개 만지고 간다’고 했어요. 그런 간편함이 있어야지 세상을 개혁하고 혁명한다는 얼뜬 인간들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운 거예요.”
그가 좋아한다는 말은 온고지신(溫故知新). 그는 우리가 맨날 어떻게 바뀔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금 더 나아지는 삶이었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소망이었다. 그처럼 간단하고 소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라는 시인의 말은 그의 시 세계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거창하게 쓰지 않고 간결하고 쉽게 와닿게 쓰라는 것이 그의 창작의 근원이다.
“심플(Simple), 숏트(Short), 이지(Easy), 베이직(Basic)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늘 우리는 아침으로 돌아가잖아요. 아침에 피는 꽃처럼 아름답게 하루를 시작할 줄 알아야 해요.”
삶이란 계속 가야하는 길
나 시인은 삶에 행복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되는 연장선일 뿐이며 그 과정에서 시야가 넓어지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삶은 가지 않은 길이 아니라 계속 가는 길입니다. 저는 강연에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요. 언제부터 여름이고 언제부터 가을인가. 가을은 낮에 오나 밤에 오나. 뻐꾸기는 밤에 울까 안 울까. 이런 것들에 대해 사람들이 너무 모르고 있어요. 무심한 거지.”
나 시인은 시인의 감성이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가는 것을 세심하게 바라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영혼의 양식이고 영혼의 양식은 세미(細微)한 신의 소리에서 옵니다. 미세한 간극에서 오는 것입니다. 시도 세미한 틈을 타고 옵니다. 시장통이나 터미널에서도 시인은 세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와 세미한 틈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는 의외로 쉽고 가깝고 작은 것입니다.”
영혼끼리는 설명이나 분석이 필요 없다
나 시인은 글을 쓰는 시간을 따로 설정하지 않는다. 시라는 장르의 특이성 때문이다.
“산문은 시간을 정해야 하고 시는 시간을 정하면 안 돼요. 시는 언제라도 나오면 써야지 나올 때 안 써주면 가버려요. 휘발성이 강해서 보존이 잘 안 되거든요, 시는 주도권이 나한테 있지 않고 시 쪽에 있어요. 언제 올지 기약이 없어요. 말 하나하나가 그때의 교감과 흥취에 따라 달라져요. 산문은 작정하고 쓸 수가 있어서 설계가 가능하지만 시는 계속 쓰면 본래 흥취에서 벗어나죠. 그래서 저는 퇴고를 잘 안 해요.”
시는 사람을 울리고 위로해주고 살려준다. 그는 이 세 가지 단계를 해줄 때 시를 안 읽을 사람은 없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시인은 그런 시를 쓰고 있나요? 혹시 본인들만 잘나서 쓰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 자식이 사무관이고 딸은 돈을 얼마를 벌고…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가라고 하죠. 그러나 ‘나는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올라왔고 지금 작은 데서 만족하고 이것을 좋다고 생각한다.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해야 사람들이 다가옵니다. 지금은 나하고 같이 울어주며 동행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 가르치려는 사람이 필요한 때가 아니에요. 시는 투 티치(to teach)도 아니고 투 액션(to action)도 아니고 투 무브(to move)예요.”
그는 쉬운 걸 어렵게 말하는 건 아주 나쁜 짓이라고 비판했다. 예술적인 것은 어려운 걸 쉽게 말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예술의 대표적 접근은 초월이에요. 영혼과 초월로서 설명 없이 하는 것이죠.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요. 그러자 베드로가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걸 주님도 아시나이다’라고 말하죠. 이게 영혼의 대화예요. 시의 바탕이 이거예요. 영혼끼리는 설명이나 분석이 필요 없어요.”
가장 중요한 일은 무겁고 느린 일
나 시인은 일에 있어 엄격한 자기관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해야 할 일을 네 가지로 나눠서 다뤘다.
“일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일의 완급이 있고 경중이 있어요. 일의 1순위는 중하고 급한 겁니다. 예를 들어 집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그것이야말로 1순위죠. 2순위는 경하고 급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걸 늘 빨리 해요. 2순위를 제일 먼저 하는 이유는 3순위를 잘하기 위해서예요. 제가 제일 열심히 하는 일이 3순위인 완하고 중한 것입니다. 이게 성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사람들이 제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4순위인 완하고 경한 거예요. 그런데 많은 이들이 거기에 시간을 쏟습니다. 그래서 저는 3순위를 늘 챙기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면 내 앞에 쌓이는 게 있어요.”
나 시인의 3순위는 당연한 것처럼 들리지만 ‘시 쓰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진 소원은 책과 글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쓴 책이 시집만 37권이고 총 93권입니다. 책과 글에서 해방은 안 될 거예요. 그런데 끝내 해방되고 싶은 심정으로 쓸 거예요. 열심히 써서 더 이상의 책이 없다, 더 이상의 글이 없다고 할 때가 제가 해방될 때예요. 내 안에 있는 걸 모두 끄집어냈을 뿐더러 더 이상 내가 쓴 글로는 돈을 벌 수 없다, 그렇게 됐을 때가 해방일 거예요.”
무엇보다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내
나 시인의 나이도 일흔을 넘겼다. 아무래도 나이를 의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 부모님이 밥맛이 없다고 말할 때 이해 못했는데 요즘 내가 밥맛이 없어요. 모든 사람은 두 가지로 죽어요. 하나는 밥을 못 먹어서 굶어 죽고 둘째는 숨을 못 쉬어서 죽고. 마더 테레사는 숨을 못 쉬어서, 미당 서정주는 영양실조로 죽었죠. 나이 먹는다는 징후는 별게 아니에요. 숨쉬기 어렵고 밥 먹기 어렵다는 게 그것입니다.”
그는 세상에 사람으로 다시 오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이 들어서도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다.
“내가 누군가의 아들로, 친구로, 제자로, 아버지로, 선생으로 사는 건 너무 힘들어요. 다시 한 번 시련을 당하는 건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요. 하나님이 안 시켜주셨으면 좋겠어.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열심히 살고 싶어요.”
집착하고 있지만 해방되고도 싶은 마음. 책과 글에 대한 나 시인의 이중적인 태도처럼, 삶과 죽음 또한 그렇게 이중적이다. 그 말에는 그렇게 치열하게 살고 그렇게 의미를 둔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아우라가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이것만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다.
“가족의 소중함, 이건 아주 흔한 거예요. 하지만 놓치면 안 돼요. 특히 부부는 더욱 그래요. 부부는 마지막 보루고 자식보다 중요한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이혼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쪽이 죽으면 그게 바로 이혼이니까요.”
이윤택은 부산일보 편집부 기자로 6년 6개월을 일했다. 등단 시인에 평론도 쓰며 안정적인 삶을 살던 그는 굳이 연극을 하겠다며 1986년 사표를 냈다.
“앞으로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과정들을 예측해봤을 때 인간은 갈수록 개인주의화 되고 대중 속에서 고립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시스템의 노예가 되고 말이죠. 특히 80년 대 중반부터 언론의 분위기가 삼당통합을 위해 여야가 야합을 하면서 변질되기 시작했어요. 여야가 없고 신념 체계도 없고, 과거의 적이 동지가 되고 이런 혼탁한 시대에 기자라든지 문필가 이런 것이 위선적이고 힘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세상에 살 바에는 유랑광대 극단을 만들겠다 해서 이름도 ‘연희단거리패’라고 지은 것입니다. 연희단패거리, ‘패거리가 있어야 되겠구나!’ 하고 연극을 시작했습니다.”
연희단거리패? 이제 패거리도 나쁘지 않다!
그의 입에서 쉽게 ‘패거리’라는 말이 나왔다. 이제까지 그는 연희단이 ‘패거리’로 불리는 것을 불편해 했다
“패거리가 좋지. 원래는 ‘거리패’인데 사람들이 (좀 비꼬면서) ‘패거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한 때는 그게 싫었어요. 패거리라 그러면 집단적인 위기에서 뭉치고 그러는 것인데 지금은 역설적으로 패거리 의식이 너무 없는 것이 문제잖아요. 패거리를 이루고 있다는 게 힘이 됩니다. 공동체도 힘이 있는 것이죠. 세상으로부터 독립이 될 수 있는. 그래서 앞으로 패거리 의식이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웃음).”
차갑고 비정한 어른을 존경하지 않는 세상
30년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이윤택이지만 그도 벌써 64세. 일반 직장인이었다면 은퇴를 하고도 남을 나이다. 스스로도 현역 연극인으로서 나이가 많다고 얘기한다. 주위 사람들도 대부분 은퇴해서 활동을 안 한다고.
“지금 내 주위 친구들은 거의 다 명함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요. 명함이라는 것은 소속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명함이 없는 인생은 대단히 자유로워야 하는데 그 반대였습니다. 한 대학교수는 자신이 평생 모은 자료를 모교에 기증한다고 했는데 학교에 보관할 곳이 없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거부했습니다. 그 학교 1기 출신인데도 말입니다. 지금 세상은 대단히 차갑고 비정하고 어른을 존경하지 않는 세상, 공경하지 않는 세상이란 말입니다.”
그런 세상에 현역이고 은퇴가 없어 살아있는 동안은 연극 연출가로 살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하는 이윤택 자신의 선택이 결국을 옳았다고 말았다. 자신이 어떤 조직에 속하지 않고 내 스스로가 패거리를 만들었다는 게 괜찮은 선택이었다 말한다.
1964년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시작으로 경제기획관, 경제기획국장, 재무부 차관보, 재무부 차관, 한국산업은행 총재 등을 거치며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위해 살아온 이형구(李炯九·76) 전 노동부 장관. 대개 한 분야에서 탄탄대로 삶을 산 이들은 자기계발서나 자서전을 쓰곤 하지만, 그는 그만의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일생의 사명감을 가지고 쓴 을 통해서 말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2008년 이 전 장관이 출간한 에서 그가 제시했던 문제들에 대한 결론이 담긴 책이 바로 이다. 단순 명료한 책 제목만 보아도 이전보다는 더 포괄적이고 굵직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단순히 경제 관련 일을 해왔기 때문에 책을 낸 것은 아니다. 은 그의 인생에 대한 자부심이자 사명감, 후세대를 위한 바람이 담긴 ‘인생작’과 같다. “이제 내 할 일을 다 했다”며 시원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다.
“2005년에 세종대학교에서 교수로 지내면서 준비했던 책이 입니다. 번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건을 역사, 정책, 문화적 상황에 따라 설명했어요. 그 책을 쓰면서 꼭 그에 대한 결론을 내는 책을 쓰고 죽겠다고 결심했었죠. 한 10년쯤 후에 쓸까 했는데 여러 가지 상황으로 그보다 훨씬 앞당겨 쓰게 됐어요.”
그가 예상보다 책을 일찍 쓰게 된 이유 중 하나가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 사태다. 번영학은 신자유주의의 경쟁을 바탕으로 한 시장 논리와 ‘경제하려는 의지(will of economize)’를 바탕으로 한다. 리먼브라더스 사건은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시장이 왜곡되면서 신자유주의 경제논리를 무너뜨렸다. 갑작스러운 경제 상황의 변화로 그는 하루라도 일찍 펜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인위적인 통화 공급으로 인해 신자유주의가 무너져버렸죠. 여러 가지 발전 전략이나 가치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어요. 신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이 경쟁이거든요. 발전하려는 의지가 중요한데, 우리나라로 치면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예로 들 수 있죠. 신자유주의의 경쟁체제를 가지고 개발도상국 시대의 발전의 의지를 접목하자. 거기에 정부의 역할이 조금 확대돼야 한다는 게 번영학의 기본이자 의 결론과 같아요.”
모두 다 한번 잘살아 보세~
번영(繁榮)이란 번성(繁盛)과 영화(榮華)를 이른다. 번성은 객관적으로 번창하고 풍성한 상황, 즉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한 경제적 풍요를 의미한다. 영화는 주관적으로 느끼는 호화로움과 영예를 뜻하는데, 객관적인 경제적 의미보다는 사회적 의미의 주관적 상황과 개인의 행복을 뜻한다. 따라서 번영이란 경제적으로 풍족한 조건과 더불어 개인의 영예, 행복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할 수 있겠다. 거기에 현재의 번영이 미래에도 지속 가능할 것이냐에 대한 확신이 뒤따라야 한다.
“만약 내가 현재 연간 소득이 1억원이라 하면, 10년 후에도 1억원이면 되겠어요? 현재보다 발전한 소득수준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돈이 많다고 행복한가? 그 돈이 영예로워야 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도둑이 훔친 돈으로 잘 먹고 잘산다고 하면 소득 수준에는 문제없겠지만 내 가족이나 이웃에는 떳떳하지 못하잖아요. 나를 번창하게 하는 그 돈이 영예로워야죠.”
그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관용을 베푸는 것 또한 중요한 덕목이라고 했다. 그래야 개인의 삶의 질 향상은 물론, 공동체의 행복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
“과거에 우리는 너무나도 가난하게 살았잖아요.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들었는데, 그런 내가 삼시 세 끼 챙겨 먹으면 행복하지 않겠어요? 소위 절대빈곤 타파라 하는데, 그저 세 끼 먹는다고 만족할까요? 매일 채소만 먹는 것보단 고기반찬도 먹고 해야 좋을 거 아녜요. 그게 생활의 질이에요. 그러면 내가 좋은 반찬을 배불리 먹는다고 행복할까요? 이웃도 잘 먹고 잘살게끔 관용을 베풀 줄 알아야죠. 그래야 ‘저 사람 참 훌륭하다’는 인정도 받고 개인이 자랑스러워질 수 있는 거예요. 상대에 대한 관용과 인정이 행복 조건의 중요한 가치입니다.”
현재 삶의 행복 점수, 70점
행복 가치 추구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는 그에게 자신은 얼마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70점 정도”라고 대답했다. 이 전 장관은 현실적으로 채우지 못하는 30에 연연하기보다는 소소하게 채워진 70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글을 쓰는 일도 행복하고, 손주를 보는 것도 즐겁죠. 다들 그런 재미로 사는 거 아니겠어요? 집 근처에 서재를 마련했으니 글을 쓰고 싶거나 책을 읽고 싶을 때는 자유롭게 나올 수 있는데 그런 것도 행복해요. 이번에 책을 내고 동료들이 의견을 내서, 실제 관련 일을 했던 이들 중심으로 한국번영학회를 설립하기로 했어요. 6월에 시작하는데, 내가 일을 벌였으니 학회장을 맡았죠. 근데 뭐 그게 일인가요. 이제 나이 들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는 거니까 일종의 놀이인 셈이죠. 아주 즐거워요.”
아쉬운 30점에 대해서도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돈을 좀 더 잘 모아둘 걸 하는 마음은 있어요. 그랬다면 더 의미 있는 일들을 해볼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봉사나 기부도 그렇고요. 그런데 내가 재벌이나 기업가도 아닌데 돈이 그렇게 많으면 되겠어요? 그리고 이미 지난 일이잖아요.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괜찮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아주 주관적인 평가거든요. 본인이 기준을 잘 설정해서 만족하고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나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도 얼마나 많겠어요. 아쉬운 점은 있지만 고맙게 생각해야죠. 나름의 기준은 있어 점수를 매길지는 모르지만, 사실 지금 나이에 그것에 좌지우지되거나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아요.”
현재의 삶이 행복하고 고맙다고 말하던 그는 인터뷰 중 올해 1월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떠올렸다. 인터뷰 전 날이 바로 어버이날이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잘해주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챙겨드릴 부모님이 이제는 안 계시다는 것이 못내 허전하다고 했다. 해마다 어버이날이면 부모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노력했던 그다. 그렇지만 마음은 편안하다고. 그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부모님 덕분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5년 전에, 어머니는 100세를 사시고 금년 1월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 어머니는 1990년대에 고향집을 떠나 서울로 오셨어요. 그때부터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제가 사는 여의도에 집을 마련하시고 생활을 하셨죠. 아마 두 분이 계속 시골에 사셨더라면 부모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 적었을 것 같아요. 근처에 사시니 매일 보고 이야기도 하고 무엇이라도 해드릴 수 있었죠.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분들이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지금도 마음이 편안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진정한 은퇴 라이프의 시작
3년을 투자한 끝에 출간한 . 자기만족만을 위해 썼다면 그만큼 책임감을 느끼며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동체의 번영과 행복, 후손들을 위한 지침서 역할을 하리라는 바람을 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로 대학교 4학년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그때도 참 보람 있고 좋았어요. 하지만 내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은 사무관부터 시작해 최고위직에 이르기까지 나라 경제계획에 참여했다는 거예요. 힘든 점도 많았지만 가슴 뿌듯한 일이 더 많았죠. 다른 점에서 볼 때 난 그다지 특별한 사람은 안 되지만, 그만큼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많은 일을 한 사람으로서는 특별한 사명감을 느껴요. 개인적으로 나를 위해 했던 일도 아니니 후세대를 위한 무언가를 남겨야죠. 그들이 보고 ‘과거의 경제 계획은 이랬구나. 이러한 이론이 있고 상황은 어떠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말이죠.”
그는 자신은 잠시도 가만있는 성격이 아니라고 했다. 실제 일을 할 때도 해외 여러 나라를 다니며 일했고, 테니스와 골프 등을 즐겼으며, 요즘도 중국어를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학원에 다닌다. 하지만 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3년간은 해외 일정이나 모임 등을 자제하고 원고 작성에만 몰두했다.
“책 출간하느라 바빠서 운동도 잘 못 다니고 해외도 거의 못 나갔어요. 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흔히들 말하는 은퇴 라이프가 다소 건조하긴 했죠. 한편으로는 그 시간이 오히려 나를 더 충만하게 하고 즐거움을 줬는지도 모르겠어요. 최근까지는 원고를 쓸 때가 가장 즐거웠으니까요. 정말 죽기 전에 꼭 하자 하는 것을 이뤘으니, 이제 죽기 전까지는 좋아하는 책도 읽고 여행도 다니며 지내려고 해요.”
노인이 되지 말고, 어르신이 되라
그가 지금까지 낸 책은 모두 경제와 관련된 전문서적들이다. 그 스스로 이야기할 정도로 남들이 선망할 만한 일을 많이 해왔는데도 자서전을 낼 생각은 없다고 한다. 자신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노년기 삶에서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 그런 데에는 아내의 조언이 한몫했다.
“아내에게 매일 듣는 말이 ‘노인네가 되면 안 돼요. 어르신이 돼야 해요’입니다. 상당히 좋은 충고라고 생각해요. 노인네가 된다는 게 뭐겠어요. 목소리 높이고 잔소리하고 대접받으려 하고 그런 거잖아요.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저 사람 참 잘 늙었구나’해야 어르신이 되는 거죠. 전에는 경제정책 운용과 관련해서 정부가 뭐를 한다 그러면 언론에 글도 쓰고 그랬어요. 근데 요새는 그런 것도 안 하고 있어요. 그렇게 떠들어봐야 늙은이 잔소리니까요.”
그는 최근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에 관한 글을 읽고 본받아야겠다고 느낀 점이 있다고 한다. 김 교수의 사위가 쓴 글이었는데, ‘장인어른은 가족 문제나 자식 일에 대해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자식이나 손주의 일에 가능한 한 나서지 않고 간섭을 줄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외의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밥 먹고 생각하는 게 늘 나라 경제 운용에 대한 것이니까, 물론 얘기야 하고 싶죠. 내가 볼 때 잘못됐다고 느낀 것이나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나 왜 없겠어요. 그렇지만 내가 현재의 장관이며 총리며 하는 이들에게 이야기한다고 내 생각처럼 바뀌겠어요? 아니거든요. 결국 잔소리거든요.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모두 에 담았어요. 거기에 그동안 살면서 쌓은 경험, 지식, 조언 등이 담겨 있으니 자서전과 다름없지요.”
“저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 나왔지?” 영화 에서 본 장광(張鑛·64)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영상을 압도하는 무서운 표정의 배우는 어디서도 보기 드문 악역 전문이 될 거라 믿었다. 첫 영화 이후 4년이 흐른 지금, 장광은 매서운 눈매를 치켜세우거나 혹은 선한 눈을 하며 웃어도 어울리는 자유로운 배우로 사랑받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은퇴할 나이에 혜성같이 나타나 ‘대세 배우’로 살아가는 배우 장광을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글 권지현 9090ji@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소협조 전광수 커피하우스 대학로점
배우 장광과 걷는 대학로는 앞으로 나아가기 쉽지 않았다. 그날따라 일일장터가 열린 탓이기도 했지만 내 옆에 걷는 이가 잘나가는 장 배우(?)이기에 인사를 하거나 악수를 청하는 사람들이 꽤 됐다. 나도 모르게 매니저 아니면 경호원이 된 듯 보호본능을 일으키며 주위를 살핀다. 인기 배우와 함께 있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다.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우선 시청자로서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어떻게 매번 인기 흥행작에만 유독 얼굴을 비출 수 있는지 말이다. 영화는 물론이고 출연했던 TV드라마를 눈여겨보면 장광은 중년층이 즐겨보는 일일드라마나 주말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없다. 5월 초 막을 내린 tvN , 출연이 예정돼 있는 KBS 퓨전 사극 도 젊은 세대를 겨냥하거나 해당 방송사 주력 시간대 드라마다. 굳이 유행하는 작품만 고르는 걸까?
“아니요. 그런 거 생각 안 해요. 그냥 들어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사실 이번에 일일드라마에서도 제의가 있었는데 과 시간이 겹쳐 하지 않기로 했어요. 일부러 고르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캐스팅 1순위, 대체불가 배우로 꼽히지만 4년 전만 해도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 다른 무명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오디션에 응시하고, 고배 마시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정년퇴직할 나이, 생애 최고의 영화를 만나다
그러다 만난 작품이 바로 영화 다. 이 영화 한 편으로 배우 장광은 인생역전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사실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사기 당하고 큰 손해를 입어 문제가 아주 심각했습니다. 7~8년 동안 서서히 숨통이 조여 왔어요.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다 보니 다른 사람들한테 더 이상 도움 받을 수가 없었어요. 기도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영화 를 만나는 과정을 신앙인으로서 기도와 말씀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타 매체 인터뷰에서 자신의 종교 신념을 표현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이어나갔다.
“매일 새벽기도에 나갔습니다. 집사람과 기도원이라는 기도원은 다 다녔죠. 그런데 를 만났던 2011년, 40일 동안 하는 새벽기도회에서 목사님이 ‘여러분들에게 앞으로 찾아올 10년, 20년이 생애 최고의 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돌이켜보니 그때 내가 우리 나이로 쉰아홉이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정년퇴직하고 손 놓을 때잖아요. 그런데 앞으로 10년, 20년이라는 비전을 가지라더군요. 현실적으로는 정말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40일 기도회가 끝나기 바로 며칠 전에 영화 오디션 소식이 들렸다. 오디션 보게 될 배역을 보자마자 가족 모두 하나님이 보내신 거구나 생각했단다.
“영화 에서 원하는 배역이 50대 후반의 대머리여야 하고 연기는 잘해야 하는데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선한데 뒤에서 악랄한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이 준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장광이 맡은 1인2역의 교장과 행정실장은 교회 장로였다.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서 부담됐지만 기도로 받은 역할이라 생각했다. 800명이 지원해 단 한 명, 장광이 선택됐다. 이 배역이 정해지지 않아 6개월 여 난항을 겪다 장광이 합류하면서 바로 영화 촬영이 진행됐다고. 실화를 다룬 영화, 19금 등 흥행을 저해하는 요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460만(누적 466만2 914명) 관객이 영화관을 찾았다. 실제 도가니 법(장애 여성, 아동 등을 성폭행으로부터 보호하자는 법) 제정에도 큰 영향을 줬다. 사회적으로 파장이 커서일까? 영화를 만든 스태프와 배우에게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쫑파티를 못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는데 우리는 손님 많이 들었다고 웃고 즐길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할 분위기도 아니었죠. 상영 시작하고 한 달 뒤, 전라도 어디 초등학교 폐교에 가서 쫑파티 했습니다(웃음).”
주인공으로 등장한 배우 공유(본명·공지철)도 공유지만 쌍둥이 교장과 행정실장을 연기한 장광이 더욱 더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무엇보다 영화 이후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부드러운 인지도를 쌓아 나갔다.
“하여튼 예능 프로그램은 다 돌았던 거 같아요. 우리집 식구 다 찍고 그러고 나니까 처음 했을 때는 ‘저 얼굴도 보기 싫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도 싫다. 나쁜 놈, 못된 놈, 더럽게 생겼다’ 이렇게 나오다가 나중에는 ‘귀엽다’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로 날개를 달다
악역에만 국한되지 않는 전천후 배우로 활약하게 된 첫 번째 작품이 배우 이병헌과 함께 했던 영화 다.
“를 찍을 땐 참 재밌었습니다. 악독한 배역이었다가 ‘내시’를 한다는 게 말입니다. 보통 ‘내시’라고 그러면 가늘고, 마르고, 앵앵거리는 소리를 내는 거만 생각하는데 감독님은 저한테 ‘아주 듬직한 고목나무 같이 끝까지 상감을 보필하는 우직한 내시를 연기해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영화 를 연출한 추창민 감독은 장광의 연기를 꼼꼼하게 챙기고 요구했다. 영화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를 때라 완벽하게 따지고 확인해 주는 추 감독의 도움이 컸다고.
“그때 칭찬 받았던 것이 뭐냐면 감독이 원하는 딱 그만큼만 한다는 거였어요. 차지도 넘치지도 않게 말입니다. 그래서 촬영 과정에서 연기 잘한다는 얘기가 들리더군요.”
작년 8월 개봉했던 영화 에서는 사이비 교주 역할을 맡았다.
“난 그런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것이 재밌습니다. 성우를 할 때도 그랬는데 강한 캐릭터나 만들어내기 어려운 것, 과연 저걸 어떻게 만들까하는 역할을 많이 했어요. 의 스탠스 필드(게리 올드만 분), 의 펭귄맨, 애니메이션 더빙으로는 와 도 해봤고요. 이 성공하지 못하고 완성도도 약해서 아쉽긴 했지만 사이비 교주 역은 아주 재밌었습니다.”
집안에서 나는 60~70점짜리 가장
얼굴이 알려진 이후 단 한 번의 기복도 없이 배우 생활을 하고 있는 장광.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본인의 점수를 물어보니 60~70점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광의 부인 전성애, 딸 장윤희, 아들 장영 모두 연예인이다. 서로의 일상이 바쁘지만 돈독한 가족애를 위해 노력하고 살고 있단다.
“각자 스케줄 때문에 여행을 못해요. 그게 좀 아쉽지만 가족 예배를 드릴 때가 있기 때문에 볼 시간도 있고 기도 제목을 얘기하면서 서로의 고민을 나눕니다. 친구 부부들과 함께 만날 때면 우리 부부가 편안하게 말을 많이 한다더라고요. 내 친구들은 자식들 걱정에 속이 썩어들어 가도 말 못할 때가 많다는데 저는 다행이죠.”
내 아들, 미안하다! 사랑한다!
코미디언으로 활동하고 있는 딸 장윤희씨와는 정말 친구처럼 지낸다는 장광. 그런데 아들 장영씨와는 조금은 서먹함을 느낀다고 했다.
“아무래도 남자라서 그런지 밖으로 돌고 그래요. 물론 서로 할 만큼은 하는데 내가 어렸을 때 아들에게 상처를 많이 준 거 같아요. 따지고 보면 잘되게 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런 거죠. 우리 나이 아버지들이 대부분 다 그렇잖아, 자기는 잘 못했으면서 아이들은 제대로 시키려고 강제적으로 하는 거요.”
어느 날 꼭 날을 잡고 아들에게 사과할 생각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 교회 프로그램이던 아버지학교에서 편지를 써서 아들에게 보내고, 안아도 봤는데 풀리지 않더라고요. 스킨십도 하고 사랑한다 말도 해야 한다는데 아버지가 아들한테 그런 말 하는 게 쉽지 않아요. 젊은 사람들은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나이는 너무 어렵습니다. 꼭 언젠가 아들에게 얘기해 줄 겁니다. 미안하다고요.”
집밥 백선생님? 장광 배우님 어떠신가요?
사실 영화 로 카메라 앞에 서기 전, 성우로 일을 할 때도 줄곧 주인공을 맡아 인정받는 성우로 살아온 장광. 오디오와 비디오의 차이일 뿐이지 사랑을 많이 받고 산 사람이라 스스로 평가한다고. 물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도 겪었지만 현재를 생각하면 많은 것이 감사하다. 신앙적으로도 를 전후해 하나님을 깊이 만난 것도 인생에서 너무 고마운 부분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뭔가 배우고 싶다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사실 젊었을 때는 탭댄스를 정말 배우고 싶었습니다. 진 켈리가 나왔던 뮤지컬 영화 를 보고 정말 멋지다고 느꼈습니다. 지금은 뭐 따라하는 정도일 거고 제 나이에 맞는 스포츠댄스를 운동 삼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배우고 싶습니다.”
최근까지 교회 공동체에서 기타를 배워보기도 했는데 정말 매일 미친 듯이 쳐야 늘 것 같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배우고 싶다는 것이 있었다.
“이제는 요리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 같아요. 요즘 분위기로 남자들도 요리는 좀 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혹시 이 글을 tvN 제작진이 읽기를 바라며 시즌3에는 꼭! 장광 배우를 섭외하길 권한다.
‘배우’.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기하는 사람들에게 배역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그 어떤 옷을 입는다 해도 충격이지 않게 단지 그의 연기로 몰입하게 만드는 배우가 우리 주위에 얼마나 있을까? 배우 장광이 지금 별처럼 빛나는 이유? 바로 그것!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