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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100세 시니어 공모전’ 시상식 “이제 ‘마이 라이프’는 ‘브라보’”
- 브라보 마이 라이프’ 매거진 창간 5주년을 맞아 열린 ‘인생 100세 시니어 공모전’. 4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시‧산문‧미니자서전‧국문 서예 등의 분야에 시니어를 비롯한 초등학생, 청년 등 전 세대가 지원했다. 9월 1일 홈페이지를 통한 당선작 발표에 이어, 10월 16일에는 시상식이 마련돼 영광의 얼굴들과 기쁨을 함께 나눴다. 이번 행사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방역 지침 준수 하에 소규모로 진행됐다. 자리에 함께한 임혁 이투데이PNC 대표는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시기가 아닌, 마음가짐에 있다. 오늘 오신 분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청춘이다”라며 수상자들을 독려하고 감사인사를 전했다. ‘나이 듦의 품격’, ‘대한민국 시니어로 산다는 것’, ‘새로운 시니어의 정의’ 등 세 가지 주제로 펼쳐진 이번 공모전을 통해 우리 중장년 세대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깊은 성찰을 엿볼 수 있었다. 전 연령대가 참여한 수많은 작품은 윤정모 소설가를 비롯한 문인, 서예가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의 엄정한 심사를 거쳤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대상에는 산문 부문의 ‘울퉁불퉁 삶을 품어주는 보자기’가 올랐다. 대상 수상자 정순옥 씨는 “50대 중반까지 아이들을 가르치며 감정을 표출할 통로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글이었다”며 “60대에 들어서면서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자꾸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번 대상을 계기로 큰 자신감을 얻었고, 앞으로도 열심히 글을 써서 내 이름이 박힌 수필집을 두 딸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소감을 말했다. 아울러 “공모전의 주제를 고민하며 나이 듦의 소중한 가치에 눈 뜰 수 있었다. 단순히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뒷걸음치기보다는, 오늘에 충실하며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이야기했다. 부문별로는 시 이춘실(다시 피고 있었다), 산문 윤여임(은퇴는 습관을 바꾸는 일이구나), 미니자서전 이호권(마늘이 잘 마르듯 그렇게 나이가 든다), 국문 서예 이은희(한글 판본체) 씨가 수상했다. 이춘실 씨는 “떫은 감처럼 덜 익은 시를 뽑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100세 시대에 앞으로 20~30년을 어떻게 살까 고민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이번 공모전 당선이 ‘나이 들어도 괜찮아. 열심히 하면 돼’라는 희망과 용기를 줬다”며 제2청춘을 잘 살겠노라는 다짐을 내비쳤다. “최근 뜻하지 않게 생업을 접게 돼, 글로써 마음을 정리해보고 싶었다”는 윤여임 씨는 “한때 글을 쓰다가 3년 정도 절필했는데, 이번 계기를 통해 다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마이 라이프가 브라보가 되도록 더욱 정진하겠다”며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 남편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한복을 입고 고운 자태로 참석한 이은희 씨는 “붓을 잡은 지 20년이 훌쩍 넘었는데, 그동안 숱한 공모전에 참여했지만 낙선이 허다했다”며 “이렇게 좋은 결과를 얻으니 제2인생에 신선한 바람이 부는 듯하다. 붓을 내려놓지 않고 앞으로도 나만의 개성과 생각을 알리는 글을 쓰겠다”는 포부를 다지기도 했다. 이날 개인 사정으로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한 이호권(43) 씨는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동안 노후 대비에 대해 막연히 생각해왔는데, 이번 공모전을 통해 구체적으로 제2인생을 고민하고 그릴 수 있었다. 이런 계기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하다”며 전화로나마 소감을 들려줬다. 수상자들은 나이가 들면서 주춤했던 마음이 공모전을 통해 활짝 열리며 자신감을 되찾았다는 공통된 이야기를 내놓았다. 이들이 그러했듯, 수많은 시니어에게 희망과 용기를 선사할 ‘인생 100세 시니어 공모전’의 다음을 기대해본다.
- 2020-10-22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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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마골소극장’ 셋방살이 극장 미래를 여는 극장으로 우뚝 솟다
- 한 극장이 오랜 세월 명맥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지금까지 힘없는 연극인들은 도시 개발, 상권 확장에 쉽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기억 속으로 사라진 극장만도 헤아릴 수 없는 요즘, 부산의 가마골소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 소극장의 옛 추억을 간직한 시니어 세대와 무대를 지키고 싶은 젊은 연극인의 꿈이 담겨 있는 공간 가마골 소극장에 다녀왔다. 오늘도 내일도 극장문은 활짝 열린다 지난 7월 7일, 부산시 기장군 일광면. 조용했던 마을에 풍악이 울리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낯익은 배우가 박자에 맞춰 덩실덩실 춤추고 모두의 얼굴은 상기돼 기쁜 모습이었다. 한산했던 시골 동네에 부산 연극의 중심이던 가마골소극장이 들어섰다. 6층짜리 화려한 건물 안에는 공연장을 비롯해 주점, 카페 등 연극인과 시민이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채워졌다. 1986년 부산 광장동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가마골소극장은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산실을 담당하던 곳이다. 연희단거리패의 활동 무대가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졌을 때도 꾸준히 실험연극을 비롯해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면서 시민의 사랑을 받았다. 중앙동과 광안리, 다시 광복동을 거쳐서 거제리로 무대를 옮겨 다니면서도 다수 공연의 매진 행렬과 최대 유료객석 점유율을 기록한 내실 있는 극장이었다. 그러나 시대 기류에 못 이겨 폐관이 기로에 서기도 했다. 결국 길고 길었던 셋방살이 30년에 종지부를 찍고 100년 길이 남을 극장으로 기장군에 세워졌다. 역사와 추억을 품다 “현재 부산 기장군에 신축 중인 6층짜리 가마골소극장의 건물 1층은 포장마차로, 2층은 카페 오아시스로 꾸밀 생각이라고 한다. 위층은 극장과 극단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될 것….”(2017년 7월호 브라보가 만난 사람, 연극연출가 이윤택 인터뷰 中) 가마골소극장에 관한 계획은 작년 7월 연희단거리패의 꼭두쇠 이윤택 인터뷰를 통해 본지에 소개된 바 있다. 막연한 계획이 아니었다는 것을 극장 건립을 통해 보여준 것. 1층에는 목로주점 양산박이 있다. 이윤택이 신문기자이던 시절 한 시인을 돕기 위해 부산일보 기자 네 명과 함께 출자해 부산시 광복동 입구에 차렸다던 ‘양산박’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2층은 부산 국제시장 근처에 있던 클래식 음악 카페 오아시스의 향수가 묻어나는 곳으로 꾸몄다. 이윤택이 20대이던 시절 당시 돈 80원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음악 듣고 시 쓰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곳이 바로 카페 오아시스였다고. 그때처럼 LP판은 아니지만 지금의 카페 오아시스도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 천장에는 지금까지 연희단거리패가 공연했던 작품의 포스터가 촘촘하게 붙어 있다. 극단과 극장의 세월을 가늠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 콘서트, 세미나, 북콘서트를 통해 시민과 교류하는 만남의 장소로 이용할 계획이다. 2층에는 가마골소극장과 연희단거리패를 대표하는 여배우이자 연출가였던 故 이윤주의 기념관과 북카페 ‘책굽는 가마’가 함께 자리했다. 2015년 투병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꽃같이 사라진 배우이자 연출가 이윤주를 기리는 이윤주기념관에서는 그녀 연극생활의 시작과 끝을 만날 수 있다. 가마골소극장의 대표로서 서울보다는 부산 연극무대를 지켜왔던 이윤주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비한 몸짓과 목소리를 가졌던 배우이자 연극쟁이였다. 아동극 연출과 연극 에서 배우를 마지막으로 영영 사라진 그녀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북카페 ‘책굽는 가마’에는 연희단거리패가 지금까지 출판했던 도서와 연희단거리패 연극 200선을 구비해놓고 판매도 한다. 조용히 책을 읽고 차를 마시기에 좋다. 3층과 4층이 바로 가마골소극장이다. 120석 규모의 극장은 작은 무대이지만 높이와 경사각이 깊어 무대가 답답해 보이지 않는 장점이 있다. 5층과 6층은 배우들의 숙소와 연희단거리패의 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아카이브도 마련돼 있다. 배우와 스태프가 직접 만들고 운영까지 하는 곳 가마골소극장에는 남다른 시스템이 있다. 바로 극단의 모든 구성원이 운영 주체다. 1층과 2층의 주점과 카페에서 일하는 종업원들도 배우들과 스태프다. 분장을 하고 커피를 만들거나 서빙을 하고, 셔틀버스를 운행한 배우가 곧바로 무대에 올라가기도 한다. 극장의 무대, 조명, 음향, 객석 등 사람들이 오가는 곳곳에도 극단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이 서려 있다. 연희단거리패 조명감독 겸 가마골소극장 대표인 조인곤씨는 “가마골소극장은 연희단거리패와 극단가마골, 가마골소극장의 역사 저장창고라고 생각한다”며 “시간이 지나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역사적 유물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기장에는 미역도 있고 멸치도 있고 해수욕장도 있다. 그리고 가마골소극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라!
- 2017-09-05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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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이상희 헤어팝’ 이상희 원장
- 그녀는 뽀얗고 하아얀 뭉게구름 같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색다르고 기발한 발상이 피어오른다. 집중해서 듣자니 성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이상희 헤어팝’의 이상희(李相熙·56) 원장. 직업은 미용사인데 그녀 인생에서 봉사를 뺀다면 삶이 심심할 것만 같다. 손에 익은 기술을 바탕으로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니 말이다. ‘누군가를 돕는다’란 말에 백만 개의 하트풍선이 ‘뿅뿅’ 터지는 그녀의 환한 얼굴과 마주했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가 감사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하루하루가 감사해요. 저는 되게 감사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감사’라는 단어를 꺼낸다. 열 손가락이 성한 가운데 기술을 배운 것도, 그 기술을 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있어서 감사하단다. “미용기술을 배울 때 돈만 벌기 위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한 달에 네 번 봉사를 간다면 나머지 시간은 봉사를 가기 위해 미용실에서 일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거든요. 제 이름이 서로 ‘상’에 빛날 ‘희’거든요. 말 그대로 상희답게 사는 거죠.” 어려운 이들을 만나면 뭔가 해줄 수 있어 좋고 자신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후배들이 잘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이상희 원장을 만난 것은 5월 말. 본인 스스로가 정한 인생의 안식년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미용실을 계속하면 쉴 수 없겠더라고요. 원래 하던 넓은 미용실을 4월 30일까지만 하고 5월 1일 철거했어요. 저와 오래 일했던 디자이너들이 일할 곳을 마련해 지금의 아파트 상가로 옮겼어요. 이성적으로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철거하던 날 잠이 안 오더라고요. 안식년이라 해도 두 손 다 노는 게 아니라 그런지 다음 날부터는 잠이 너무 잘 왔어요.” 그런데 그 안식년이란 것 말이다. 대부분 휴식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한다. 이상희 원장은 그 하고 싶다던 일(?)에 더 빠져보려 미용실 운영 대부분을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맡겼다. 벌여놓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 당장 앞두고 있었던 새터민 결혼식에 피부 관련 사업, 매달 있는 봉사, 새로운 봉사, 미용인의 처우 개선 등 쌓이고 쌓인 일을 보니 이게 안식년인가 싶다. 봉사와 업(業)이 하나인 인생을 구상하다 전라북도 정읍 출신인 이상희 원장은 성공하려고 미용계에 입문했다. 미용실에 갔더니 기술을 배우면 서울도 갈 수 있고 해외도 갈 수 있다고 말해줬다. 솔깃한 말에 응시한 미용 자격증 필기시험에 떡하니 붙었고 곧바로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학원 안 다니고 미용실에서 연습했어요. 고등학교 친구들 데리고 가서 머리 잘라주면서 두세 달 정도 훈련했고 합격 1년 정도 후에 상경했죠.” 서울에 오자마자 당시 유명했던 미용실에 취업한 이상희 원장은 일주일을 못 다니고 그만뒀다. 줄지어 서 있는 거울에 헤어디자이너의 이름이 아닌 번호가 붙어 있었다. “큰 미용실 가야 성공한다기에 들어갔는데 거기선 사람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요. 적응하기 힘들더라고요. 제가 시골 애였지만 자존감은 있었거든요.” 서울살이 초반 20대의 이상희는 걷기도 많이 걸었다. 집이 있던 상도동을 지나고 한강다리 건너, 숙대, 남대문시장.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신호등 앞에 있는데 파마가 막 말아지는 거예요. 다시 미용을 해? 돈 많은 남자 만나서 미용실을 열어? 가난해서 걷고 고민하면서도 걷고. 그렇게 내린 결론이 나를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 성공하겠다는 거였어요.” 머리 자르는 미용기술 외에도 머리를 올리는 ‘업스타일’에 ‘메이크업’ 기술도 할 수 있어야 했다. 다니던 미용실 원장과 선배, 동료에게 양해를 구해 시간을 마련했고, 잘살던 친구에게 학원비를 부탁해 메이크업 학원에 등록했다. 선후배 관계가 수직적이고 딱딱하던 시대였지만 업무시간을 배려받고 학비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더욱 완벽한 미용사로서 비상을 꿈꿨다. “후배들에게 돈과 시간이 없어서란 변명을 하지 말기를 당부해요. 꼭 해야 할 일이고 열정이 있으면 누구든 도울 테니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해요.” 20대는 미용사 이상희로서 삶을 채우는 시간이었다면 30대는 그것을 바탕으로 존중하고 돕고 깨치며 살아갔다. ‘높임말’과 ‘봉사’는 철칙 서른 살의 나이, 자신의 이름을 단 미용실을 열었다. 개업과 함께 이상희 원장이 철칙으로 삼았던 두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직원들 사이에 높임말 사용이었다. 당시는 손님이고 미용사들이고 서로에게 함부로 하던 시절이었다. “저희 때는 디자이너와 스태프가 같이 앉아 밥도 안 먹었어요. 솔직히 미용기술에는 차이가 있지만 사람 차이는 없잖아요. 그래서 오픈할 때부터 높임말을 사용했어요. 혹여 함부로 하는 손님이 있으면 더 예의를 갖춰 말했어요. 구두며 유니폼도 갖춰 입었습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바꿨어요.” 두 번째는 바로 봉사다. 한 달에 한 번은 전 직원이 봉사하기로 했다.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좋은 일에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교, 지역 그 어떤 것도 따지지 않고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어려운 이웃과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 찾아서 봉사했던 곳이 가난한 마음의 집이라는 곳이었어요. 1990년대에는 메이크업이 아주 강할 때였어요. 장애우들이 저희를 보고 놀라서 숨는 거예요(웃음). 그래도 몇 번 가니까 친해졌어요. 봉사하다 보니 새터민과도 연결이 됐어요.” 어렵던 시절 동료들과 친구의 도움으로 메이크업을 배운 것이 두고두고 고맙다는 이상희 원장. 좋은 마음이 모여 얻은 기술이기에 봉사를 할 때 더없이 기분이 좋다. “미용실 열고 1년쯤 돼서 어떤 손님이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러시아 여자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민이 결혼식을 하는데 메이크업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요. 제가 메이크업을 한다는 걸 몰랐던 손님인데 말입니다. 당연히 좋다고 했죠.” 봉사한다는 게 알려지면서 놀이처럼 재미있고 기획력 있는 봉사가 이어졌다. 정부 지원이 어려운 틈새 청소년들을 위해 일일찻집을 열고, 산골 아이들을 위해 자전거도 사주고 고아원에 세탁기도 기증했다. “손님들에게 이건 꼭 약속했어요. 우리 미용실에 와서 머리를 하면 그 일부는 다른 사람들 위해 쓰인다고요. 제가 그렇게 좋은 일을 하면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 복을 받는 거잖아요.” ‘K뷰티’와 ‘뷰티엔젤’ 봉사의 중심에 서다 2000년대 중반에는 한·일 미용인 간의 세미나가 자주 있어서 일본에 갈 기회가 많았다. 그때 일본의 성년의 날과 우리나라의 성년의 날에 대한 의문과 고민이 일었다. “일본에 갔는데 일본 젊은이들이 기모노를 많이 입더라고요. 예쁘기도 하지만 그 나라 문화잖아요. 그런데 일본의 ‘성인식’은 공휴일인데다가 자치단체에서 큰 잔치를 열어요. 기모노 입고 화장과 머리를 하고. 이 모든 게 다 미용실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함께 일본에 방문하고 온 미용실 원장들에게 우리 청년들을 위한 성년의 날을 특별한 날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메이크업과 머리손질은 미용실에서 도움을 주고, 한복은 당시 이상희 원장이 다니던 우석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미르’에서 만난 지인이 공급해주기로 했다. “연세대학교 다니는 손님한테 학교 대동제 때 성년식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했어요. 단, 스마트폰으로 한복 입은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학생들에게만 기회를 주기로 했어요. 2011년 5월에 이틀 동안 저희가 준비한 성년식에 300여 명이 참여했어요.” 이 행사를 계기로 K뷰티디자인협회의 시초가 된 한국업스타일협회를 창설했다. “일본에 같이 다녔던 미용인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서 좋은 일도 하고 미용실 손님도 우리 손으로 오게 하자고 말씀드렸어요. 한국업스타일협회는 이후 좀 더 의미를 넓혀 지금의 K(Korea)뷰티디자인협회가 됐습니다.” 이상희 원장의 또 다른 활동 영역은 뷰티엔젤이다. 미용실 개업 초기 직원들과 다니던 봉사가 주위 미용인들과 함께하는 한국미용봉사회로 이어지다가 누구든 함께 참여하는 연합봉사 형태의 ‘뷰티엔젤’로 탄생했다. 한국 봉사는 물론 캄보디아 미용기술 지원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미르’의 박문희 원장님이 의료진하고 캄보디아 봉사를 간다고 머리를 하러 오셨어요. 제가 ‘의사들은 너무 좋겠다, 다른 나라 가서 봉사도 하고’ 그랬더니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봉사를 하게 된다면 저는 미용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게 진행이 됐어요. 그쪽 아이들 미용기술 가르칠 생각을 시작하니까 잠이 안 왔어요.” 캄보디아 봉사는 이상희 원장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20년 넘게 많은 사람을 도우며 살아왔지만 처음의 그 에너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캄보디아 봉사를 앞두고 느꼈어요. 왜 잊고 있었지? 친구 한 명의 도움으로 내가 20대를 살았는데 지금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난해도 여자가 기술을 배우면 자식교육 시킬 수 있고 생활고에서 나아지니까 공부는 늦게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두 번의 캄보디아 미용기술학습프로그램을 통해 20명을 지원했다. 학비뿐만 아니라 숙식과 생활보조금까지 지원하는 사업이라 매년 할 수 없다고 한다. “캄보디아 아이들과도 약속한 것이 있어요. ‘너희가 성공을 하면 한 사람을 가르쳐라.’ 그게 약속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캄보디아에 미용실 오픈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곳 아이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거죠.” ‘미용복지사’라는 직업 멋지지 않나요? 안식년이라는 본인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매달 13일 레드엔젤(청년응원단체)과 함께 K-컬처 콘서트를 개최한다. 2~3개월에 한 번씩은 다른 봉사단체와 연합활동도 한다. 캄보디아는 물론 올가을 새터민 합동결혼식도 계획 중이다. 미용인으로서의 고민도 남다르다. “미용은 보건의 개념도 있지만 지금 사회에서는 복지의 개념입니다. 형편은 되는데 거동이 힘들어서 미용실에 못 오시는 경우가 있잖아요. 현재 미용은 이동 미용이 안 됩니다. 환자 외에는요. 미용복지사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미용사의 새로운 직업에 대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고령화 사회 시니어들의 복지에 대한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다. 이외에도 한류로 인해 유입되는 외국 여행객에게 보다 친근하게 한국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뷰티존’을 만들어 세계에 한국 문화와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단다. 미용실을 작은 평수로 옮기면서 ‘손아당(蓀雅堂)’이라는 공간도 만들었다. 뜻 맞는 사람들이 모여 봉사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허브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근데 저는 생각하는 게 예쁜 거 같아요. 끊임없이 꿈을 꾸는 거 같아요. 내가 만일 미용 일에서 손을 뗀다면 내 직함을 뭘로 하지?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 이상희로 불리면 어떨까 하는데 되겠죠?”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를 꿈꾸는 그녀의 입에서는 이쁘다(예쁘다)라는 말이 참으로 많이 흘러나온다. 자주 쓰는 단어에는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이 담겨 있다. 그녀의 이쁜 마음이 영원하길 지지하고 응원한다.
- 2017-07-1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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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미풍이 아빠’ 배우 한갑수
- 처음 그를 봤던 그때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다. 마치 온몸에 전기가 감돌고 있는 전기맨(?) 같았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 로비에 나온 젊고 낯선 배우는 차갑고 깊은 까만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바로 MBC 드라마 에서 열연한 배우 한갑수(韓甲洙·48)다. 불꽃 카리스마로 연극 무대를 내달리더니 어느 날 갑자기 TV 속에 나타났다. 그것도 강아지 같은 함박웃음과 함께 말이다. 연기 인생 30년. 그 누구도 몰랐던 반전 연기로 사랑받은 배우 한갑수를 만났다. 아직도 사람들의 시선이 익숙하지 않다는 대세 배우의 삶과 가족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아이고 어른이고 많이도 알아봅니다 “촬영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다가와서 친구 부르듯 그냥 이름을 불러요. 제가 아무리 ‘이놈! 아저씨한테!’라며 무서운 표정을 지어도 신이 나서 그러는 거예요.” MBC 주말 드라마 는 한갑수에게 드라마 하나 끝난 것 그 이상의 의미 있는 작품이 됐다. 배우로 살면서 처음 가져보는 기분을 안겨줬다고나 할까. 무대에 올라 관객의 박수를 받아왔지만, 조명이 없는 거리로 나서면 박수갈채는 온데간데없었다. 이 드라마는 달랐다. 촬영장에 모인 아이들은 한갑수를 “아바디”를 목 놓아 외치는 또래 친구 대훈이로 대했다. 드라마가 끝난 다음에는 사람들이 알아봐도 너무 알아보니 인기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인생을 바꿔준 대박 드라마가 된 것. 지금 와서 하는 얘기이지만 한갑수는 방송 연기 초반 배우로서 자존심이 상해 고사하는 일이 많았다. “캐스팅 디렉터들이 제 연극을 봤는지 연락을 해오더라고요. 한 회 잠깐 출연할 수 없냐고요. 그런데 처음에는 기분 나쁘다고 안 한다고 했어요. 내가 연극을 몇십 년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연락을 해오던 디렉터 중 한 명이 한갑수의 마음을 움직였다. 연극은 많이 했어도 카메라 연기는 안 해봤으니 경험해보라 권유했다. 미디어 매체에도 시선을 줬으면 한다고 말해줬다. 연극을 많이 했지만 생각해보니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이후 경찰이건 면접관이건 주어지는 역할은 작건 크건 열심히 해냈다. 한갑수가 시청자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한 작품은 MBC 드라마 과 이다.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특히 이휘향에게 간 이식을 해주는 오빠 역할을 했던 은 인생작 로 가는 도움닫기 역할을 해주었다. “의 김사경 작가님이 을 보시고 저를 추천하셨어요. 당시 북한 외교관 태영호씨가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제 역할이 그와 비슷한 북한의 고위직이라더군요. 이제는 좀 지성인을 연기하나 싶었죠. 드라마가 시작하고 한참 지나 제가 등장하는 대본이 나왔다며 작가님이 연락하셨어요. 그런데 열 살 아이 연기가 가능하냐고 묻더라고요.” 연극 에서는 피바람을 일으키는 윤원형을, 유진 이오네스코의 잔혹극 에서는 잔인한 방법으로 수학을 가르치는 교수 역할을 했던 그다. 무대 위 선 굵은 배우, 아이를 연기하다 잔인함과 공포를 연기하던 배우가 열 살 아이 지능을 가진 연기라니. “네? 저는 열 살 연기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어요. 바보냐고도 물어봤어요.” 걱정돼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일상의 언어로 흐르는 드라마에 나이 든 남자가 아이처럼 연기하는 것이 과연 어울릴까 걱정에 걱정을 더해갔다. 이에 김사경 작가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아이처럼 본능대로 말할 것과 북한 아이만의 순수함을 표현해 달라고 했다. “순수를 어떻게 하지? 일단은 맑게 웃자는 것이 큰 콘셉트였어요. 내가 눈도 크고 쌍꺼풀도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걸 시청자가 귀엽게 봐줬던 거 같아요. 그리고 이휘향 선배님과 (임)수향이가 너무 악한데 제가 팍팍 시원하게 요즘 말로 사이다처럼 이야기하니까 많이들 좋아하신 것 같아요. 두 분이 잘했기 때문에 제가 덕 본 겁니다. 드라마 속에서는 사이가 나빴지만 평소에 제일 친했어요.” 연기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영역이었다. 시청자에게 이렇게까지 사랑받을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에 자신의 능력보다 함께한 선후배의 도움이 컸다며 겸손하게 공을 돌리는 배우 한갑수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얼굴, 꽤 쓸모 있습니다 경남 거창 출신인 한갑수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지역의 한 청소년 극단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도우며 연극을 시작했다. 무일푼 극단 생활 3년 만에 배우로 무대에 오른 그는 경남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연극제의 연기상을 휩쓸었다. 괴물 같은 연기력을 눈여겨본 연출가 이윤택이 2001년 그를 서울 무대에 올려세웠다. 30대 중반의 한창 물이 오른 남자 배우의 연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의 역할은 늘 실제 나이에 비해 한참이나 많았다. 지금도 주어지는 역할은 실제보다 열 살 이상 많다. 현재 방송되고 있는 KBS 2TV 저녁 일일 드라마 에서도 주인공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나이가 많은 선배 연기자가 아들로 혹은 동생으로 등장하는 일은 이제 다반사다. 본인의 나이와 맞지 않은 역할을 하는 게 서운하지 않을까? 아니라고 했다. “연출가들이 좋아하더라고요. 이번 드라마를 하면서도 연출가님한테 흰머리가 좀 있는데 염색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제 헤어스타일이 좋다면서요. 한 촬영 감독님은 오히려 제가 늙어 보이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왜냐하면, 실제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면 대사 암기가 좀 어렵고 50대 연기는 남자 배우나 여자 배우나 할 수 있는 배역이 많이 없다더라고요. 제가 사실 많이 하는 역할이 주인공 아버지 역할입니다. 대부분 60대 역할일 수밖에 없죠.” 이번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도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다. 상대 배역으로 등장한 배우가 예순두 살이었는데 한갑수가 오히려 나이가 더 들어 보였던 것. 결국, 상대 배역을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하려고 분장팀이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나는 내가 노안이라는 걸 알아요. 어디 가서 나이 얘기하면 깜짝 놀라더라고요. 변희봉 선생님이 저에게 ‘몇 살이냐’고 물어봐서 ‘오십입니다’ 했더니 ‘애’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또 좋은 건 역할도 역할이지만, 나이가 한참 들어 보이니까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더라고요(웃음).” 천생 배우 어린 아내의 특급 매니지먼트 한갑수는 소속 회사 없이 아내 변혜경(39)씨와 촬영 현장을 다니고 있다. 아내가 한갑수의 매니저인 셈. 드라마를 하게 되면서 단 하루도 떨어져본 적이 없다. 드라마 촬영 현장에 가면 사람들이 아내 변혜경씨를 더 많이 찾는다. 배우 이휘향도 그랬다. “미스 변 어디 있느냐고 이휘향 선배님이 그러세요. 밥 먹으러 가야 한다고요. 나랑 가자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랑요. 감독님도 너무 좋아하셨어요.” 아내는 현장 스태프와 친해질 수 있게 해주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잘 웃고, 모르는 사람들한테도 인사를 잘했다. “만약 저 혼자 다녔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제 스타일이 원래 연기에 집중해야 하니까 누구랑 말도 안 하고, 친해질 수 없거든요. 그런데 옆 사람이 분장이나 의상 스태프랑 친하니까 편안하게 이것저것 부드럽게 부탁합니다. 우리 집사람 덕분에 참 좋죠. 현장에서 저 혼자 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을 아내가 해주고 있습니다.” 배우 한갑수의 아내로 매니저로 사는 변혜경의 직업 또한 배우다. 그것도 천부적인 연기실력을 갖춘 몇 안 되는 배우. 무대 위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관객과 호응하던 모습이 생생한 멋진 배우였다. 열 살 차이 어린 여배우는 2001년 무대에서 연기 연습을 하는 한갑수를 보고 반해버렸다. “거창에서 연희단거리패로 옮겨서 연극을 할 때였는데 밀양에서 합숙생활을 했어요. 아내는 연희단 소속 배우였고요. 아침마다 단원들이 조별로 다 모이는데 한 달 내내 아내가 ‘한갑수 내 꺼다’ 하고 소리치는 겁니다. 정말 장난인 줄 알았어요. 저리 가라고도 했어요.” 장난 같던 아내 변혜경의 고백은 사실이었다. 결국 연극의 주인공으로서 공연을 닷새 앞두고 아내는 사랑의 탈출(?)을 하고야 말았다. 장례가 촉망되는 여배우의 결혼을 극단은 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하고도 극단 대표인 이윤택 선생님 마음에 우리가 남으셨나봐요. 진주에서 신혼살이할 때 그 지역으로 강연을 오신 적이 있었어요. 강연하시다가 ‘한갑수 저놈이 우리 혜경이를 훔쳐갔어요’ 그러셨답니다(웃음). 이 선생님이 아내를 딸처럼 예뻐해서 상심이 크셨을 거예요.” 최악의 궁합을 이기고 최고 부부가 되다 “결혼 전에 저희가 결혼하면 아내가 죽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애를 못 낳거나 낳아도 불구가 될 거란 말을 들었어요. 다행히 애도 낳고 별일 없는가 싶었는데 아내가 아이 낳고 100일 만에 쓰러졌습니다.” 깨소금 냄새나는 신혼생활도 잠시, 시련의 연속이었다. 아이를 낳고 얼마 안 있어 아내 변혜경씨에게 이상한 증세가 나타났다.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고 급기야 상대방의 말도 왜곡돼 들린다고 하다 정신을 잃었다. 뇌전증이라고 했다. “병원에 다녀도 원인이 나오지 않았어요. 한의원에도 갔었고, 심지어 신병이란 말도 들었어요.” 처가에서 아이를 대신 키워주고 병원비 대부분을 지원했지만, 가족 부양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장인어른이 서울대병원 앞에 가서 시위도 했어요. 딸의 머리라도 한 번 열어봐 달라고요.” 발병 7년 만에 아내 변혜경씨는 뇌 수술을 받았다. 수술 두 번째에 문제의 위치를 찾아냈고, 세 번째 누운 수술대에서 원인을 제거했다. 수술 직후 만난 아내는 딸도 한갑수씨도 못 알아봤다고. 그래도 젊은 사람이라 의료진이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몸이 좋아졌다. 배우가 숙명인 한갑수의 해피스토리 작년 하반기 한갑수는 가족과 함께 경남 진주에서 서울 근교로 이사 왔다. 이곳으로 오고 얼마 안 있어 드라마를 하게 된 것뿐만 아니라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자신의 직업이 가진 숙명적 불안감과 사랑 사이에서 여전히 고민하는 진짜 배우였다. “배우는 오래가기 쉽지 않습니다. 소모되고 금방 잊히죠. 평생 숙명처럼 배우를 하고 싶다고 해서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찾아줘야죠.” 한갑수라는 배우가 지금보다 선명해질 때까지 소속사에 들어가는 일 없이 아내와 함께 일할 생각이다. 지금의 상태로 소속이 되면 다작을 해야 하거나 정체성이 모호해질 것을 우려한다고 했다. 그리고 아내가 다시 배우를 할 수 있었으면 한다. “우스갯소리로 ‘10년 후에는 나는 일을 좀 쉬고 아내가 열심히 연기했으면 한다’고 말합니다. 이제 몸도 완쾌되고 아이도 다 키웠으니 아내도 연기를 많이 하고 싶어 해요. 하지만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해줍니다.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오히려 혜경이가 나이 들면 연기자로서 더 빛을 낼 것이라고 봅니다. 현장을 같이 다니는 이유가 많이 보고 배웠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거든요.” 현장을 함께 다닌 덕에 아내 변혜경씨도 잠깐이나마 에 얼굴을 비치기도 했다. 매니저 일을 하는 틈틈이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아내가 대견스럽다. “부부생활 15년을 해보니 조금씩 서로 알게 된 거 같습니다. 힘든 것이 좀 거쳤으니 저뿐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 2017-04-26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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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막아낸 녹색연합 공동대표 박그림
- 산이 그리웠던 사나이는 꽉 막힌 도시생활을 접고, 설악산이 바라다보이는 탁 트인 곳으로 떠났다. 자연과 벗삼으러 갔지만 행복도 잠시였다. 돈 되는 일에 목마른 인간의 욕심이 푸르른 숨통을 조여 왔다. 올무에 걸린 듯 이곳저곳 상처 난 설악산을 위해 사나이는 발길 닿는 대로 찾아가 세상에 알렸다. 오랜 세월이 흘렀고 그의 소원대로 설악산에는 바라던 평화가 찾아들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박그림 선생님!” 환경단체 녹색연합 공동대표 박그림(朴그림·69)씨가 내 앞을 지나갔다. 귀신에 홀린 듯 정류장 의자에서 일어나며 이름을 불렀다. 밤늦은 종로 한복판. 반갑게 인사를 이어나갔지만 신기했다. 박그림 대표와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하던 중 그가 도깨비처럼 내 앞을 걸어온 것이다. 인연이었다. 국정농단 사건의 파장이 일파만파이던 12월 말,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대단한 사건 하나가 있었다. 1995년부터 강원도 양양군에서 추진해오던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사업이 사실상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지금까지 환경과 관련한 정부나 지자체 사업은 시민단체나 주민이 발 벗고 반대해도 무사통과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결국 계란으로 바위를 깬 것. 박그림 대표가 몸소 뛰어다닌 노력으로 이제 더 이상 설악산에 케이블카가 생겨나지 않게 됐다. 마른 체구, 바람에 낡아버린 모자를 쓰고 점퍼를 입은 그는 세상 짐을 다 지고 있는 성자의 모습이었다. 도시 남자, 산속에서 환경지킴이 되다 박그림 대표는 오랜 시간 설악산 지킴이로, 산양들의 아빠로 살아왔다. 하지만 그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깍쟁이란다. “서울에서 사업을 했어요. 의료 부자재 관련 사업도 하고 종목을 바꿔가면서 개인사업을 했죠. 그런데 잘될 수 없었어요. 늘 마음이 산에 가 있었거든요.” 1992년 가족들과 함께 결단을 내리고 설악산이 보이는 곳으로 옮겨갔다. 아내 또한 서울 삶에 큰 미련이 없었다. 산이건 어디건 괜찮다고 생각했다. “무일푼으로 갔어요. 다들 서울로 가는데 시골로 오느냐고 주변에서 그러더군요.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하고, 뭘 먹고 살 것인지 말들이 많았습니다. 아내와 저는 마음의 정리가 됐기 때문에 내려갔죠. 그냥 가서 부딪치면서 살았어요.” 그렇게 박그림 대표의 진짜 인생이 시작됐다. 산을 좋아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환경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환경의 눈으로 항상 산을 바라봤던 것은 아니지만 산에 다니면서 ‘저거는 괜찮은가?’ 하는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그전부터 배달녹색연합(지금의 녹색연합) 회원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제가 가자마자 속초 청초호유원지 건립에 필요한 환경영향평가가 진행되고 있었어요. 청초호 40%를 매립해 유원지를 만들겠다는 계획이었죠. 이를 막기 위해 ‘청초호를 되살리는 시민의 모임’에 합류해 힘을 모았습니다. 그 이듬해에 공사가 진행됐고 고민이 많아졌어요. 그때 지역 단체보다는 전국 규모 단체의 지부를 만들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저는 온전히 설악산 문제에 매달리겠다는 마음으로 설악녹색연합을 창립했어요. 1993년 3월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케이블카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사업 초기에는 오색약수터에서 대청봉까지 케이블카를 놓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환경부 국립공원위원회에서 부결됐고, 이후 노선을 달리해 추진했지만 그 일대가 남설악의 산양 최대 서식지였기에 또다시 제동이 걸렸다. 최종적으로 대청봉이 아닌 끝청봉(대청봉에서 1.4km 떨어진 지점)을 상부종점으로 정하고 하부종점까지 3.5km 노선을 정했지만 결국 사업 무산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환경부 국립공원위원회에서 승인했던 사업을 상위법인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에서 10명 위원 전원 만장일치로 사업을 부결했습니다. 1년 넘게 설악산 자연실태조사를 거쳤기에 재심을 해도 통과는 어렵다고 봐요. 현재 설악산 대청봉을 오가는 사람은 연간 40만~50만 명 정도입니다. 설악산은 벌써 다 망가진 상태죠. 만약 케이블카가 설치돼 탑승객까지 더한다면 100만 이상이 될 것이고 결국 설악산 전체는 무너지게 됩니다.” 설악산 산양 아빠 거리로 나서다 박그림 대표는 앞서 말했지만 ‘산양 아빠’로 불려왔다. 설악산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는 산양에 대해 관찰하고 조사해 알리는 일을 나서서 해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산양 아빠라는 별명이 붙게 됐다. “산양은 천연기념물 217호이면서 멸종위기종 1급입니다. 마음놓고 살 수 있게 놓아두지 않으면 멸종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아주 절박한 상황이죠. 계속 어떤 상황인지를 알려야 했어요. 이게 바로 산양이구나, 우리가 정말 관심을 갖고 사랑해야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양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산양을 향한 사랑은 케이블카 사업을 반대하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2000년대 초부터 반사판으로 된 커다랗고 동그란 피켓을 들고 다니면서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에 대한 현장 상황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늘 들고 다녔어요. 케이블카 사업이 부결되기 전에는 어디든 약속이 있으면 만남 시간 한 시간 전에 와서 피켓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어느 장소건. 이것을 그저 운동으로 생각했으면 못했을 거예요. 내 삶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이죠.” 박그림 대표는 피켓을 들고 있는 동안 당당하고 올곧았다. 제재하면 제재하는 대로 밀리면 밀리는 대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설악산의 상황을 발길 닿는 곳 어디에서든 알렸다. 싸운 적도 없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인데 싸우고 그러면 안 되잖아요.” 박그림 대표는 젊은 활동가들에게 자신의 삶을 통해 꿈꿔온 세상을 만들어나가라 말한다고. 일로 보는 순간 결과를 따지게 되기 때문이다. 된다, 안 된다 결과에 집중하면 포기하기 쉽지만 삶으로 나아가면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박그림 대표의 설명이다. 이제 자연보호법을 개정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국립공원에 케이블카 설치는 안 된다는 조항을 넣을 생각이다. “국립공원 내에 인공 시설물도 사실 너무 많아요. 데크나 계단 등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시설을 하잖아요. 국립공원은 최소한의 시설만을 설치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난간과 계단을 하나의 시설물로 만들어놓았어요. 일본 쿠시로 습지의 경우 옆으로 떨어지면 이탄지대라 쑥 들어가요. 난간이 없어요. 산도 정말 이 지역이 위험해서 안 되겠다 싶으면 기본적인 사다리만 딱 걸쳐놓고. 안전은 산을 오르는 각자의 책임입니다. 관리 당국이 어떻게 안전을 확보해주냐는 거죠. 위험이 없고 불편함이 없으면 무엇 때문에 산으로 가는 겁니까? 그럼 그건 자연이 아닙니다.” 시니어, 산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져야 한다 갑작스런 궁금증이 생겼다. 시니어 세대 또한 산을 즐기고 싶을 텐데 케이블카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나이가 들어도 대청봉에 올라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박그림 대표는 욕심이라고 말했다. “20대는 올라갈 수 있지만 70대는 못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문제가 있죠. 시니어들을 위해 케이블카를 놓아야 한다면 그게 왜 설악산뿐이겠습니까? 그리고 왜 케이블카뿐이겠습니까? 그 나이가 되면 산을 바라만 보고도 설렐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꼭 산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옛 조상들은 산을 바라만 보고도 진경을 느끼고 시심이 일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왜 정상을 갈구하는지. 그것이 의문이라고 했다. “진경산수화 같은 것도 정말 멀리서 바라보고 그린 그림이잖아요. 바라봤지만 깊이 있게 들여다봤죠. 우리는 지금 빨리, 아주 높이 올라가지만 겉핥기식으로 산을 오르고 내려옵니다. 탄성을 지르고 내려오지만 남는 것이 없죠. 어떤 시설이 없을 때는 힘들여 산을 오르게 됩니다. 오랜 인내를 통해 올라간 정상에서는 더 많은 것들을 바라볼 수 있죠. 나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자연과 일체를 이룰 수 있는 그런 상황을 맞이하기 때문에 훨씬 다르게 산을 느끼게 됩니다.” 손자·손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박그림 대표가 케이블카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래세대를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는 설악산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 캠프도 진행한다. 산을 돌아다니면서 산양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며 바람 소리를 몸으로 느끼는 시간이다. “바람의 느낌을 지식을 통해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아이의 손을 잡고 바람 부는 언덕에 서면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는 ‘이게 바람이구나’하고 느낄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국립공원 22개가 차지하는 넓이는 전국토의 5%밖에 안 된다고. 그것마저도 아이들에게 온전하게 되돌려줄 수 없다면 이다음에 어디에서 지친 영혼을 달랠 수 있을까를 박그림 대표는 걱정한다고 말했다. “제게는 다섯 살짜리 손자와 돌 지난 손녀가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아름다운 청년으로 자라났을 때 바라볼 설악산이 어떠해야 되는가를 난 늘 꿈꾸거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일을 멈출 수 없습니다.”
- 2017-03-2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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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아직도 건재한 현역 테일러, 여용기 "옷 잘 입으니까 인생이 술술 풀려요"
- 마치 전투복을 입은 것 같다. 여기서 전투란 미(美)를 향한 전투다. 여용기(64)씨를 처음 보는 사람은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옷을 잘 입는 사람이 있나’ 하고 놀라게 된다. 그러나 여씨는 단순히 옷만 잘 입는 사람이 아니다. 1953년생인 그는 부산의 남성 패션숍 ‘에르디토’의 마스터 테일러로 근무하는 패션 전문가이기도 하다. 화려한 남자다. 들여다보니 그 화려함을 지탱시켜주는 인생의 궤적도 있다. 그를 멋있는 남자로 만들어주는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여용기씨의 삶과 철학이 궁금했다. 17세에 부산으로 상경한 거제도 소년은 우연히 양복 기술을 배우게 된다. 훗날 ‘부산의 닉 우스터’라 불리며 시니어 패션의 바로미터로 불리게 되는 여용기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형의 옷을 물려받아 입던 가난한 섬 출신 소년이었다. 그러나 일을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그는 22세에 최연소 재단사가 되고 29세에 부산 광복동에 자리한 모모양복점을 인수해 자신의 가게를 연다. 인생에서 일찌감치 성공의 과실을 맛본 셈이다. 화려한 성공과 깊은 실패의 나락 “당시에는 옷을 맞춰서 입었지, 사 입는 사람이 없었죠. 그래서 벌이가 상당했어요. 아무나 광복동 재단사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서울 명동보다도 부산 광복동이 옷을 잘 만든다는 얘기를 듣던 시절이었으니까.” 당시를 회고하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이른 나이에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아 사장까지 했던 과거는 분명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진 것이다. 대기업에서 만드는 기성복이 양복 시장을 장악하는 바람에 여용기씨의 양복점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던 맞춤 양복점들까지 모두 극심한 불황에 직면하게 됐다. “기성복 시장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시도를 해야 했는데 미숙했던 겁니다.” 다른 양복점들도 차례로 사라지는 상황에서 그 또한 버티기가 어려웠다. 30대 후반에 접어들 즈음 양복점 문을 닫았다. 이후 오랜 시간 건설업, 주차요원 등을 하며 혼자 두 아들을 키우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한 노력과 연구 “다른 걸 해보니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기술이든 10년은 해봐야 자기만의 노하우가 생기는 것 같아요.” 결국 그는 재단사였다. 지인이자 마스터 테일러인 양창선씨로부터 재단 일을 다시 해보자는 제의를 받았다. 여씨와 친하게 지냈고, 여씨의 모모양복점 옆에 코코양복점을 나란히 개업했던 양씨의 제안에 그는 잃어버린 고향과도 같았던 재단사로 복귀했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실과 바늘을 놓고 지낸 세월. 감각을 되찾는 게 우선이었다. 작심하고 한 달 동안 시간을 내서 재단사로서의 옛 감각을 되찾는 동시에 새롭게 도래한 시대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 연구했다. 어떤 마음으로 옷을 만들어야 하냐는 질문에 “시대적 흐름을 잘 봐야 한다”고 거듭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그러한 노력으로 환골탈태했다. 그 결과 작년 6월 부산 중구 남포동에 오픈한 남성 패션숍 ‘에르디토(EREDITO)’의 마스터 테일러를 맡게 됐다. 멋을 내려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여용기씨는 요즘 가장 인기 있는 SNS 스타이기도 하다.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이미 4만 명을 넘어섰다. 그가 올리는 그의 사진들을 보면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눈에 봐도 ‘옷을 잘 입는다’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사진들이다. 센스와 위트를 겸비한 스타일링이 좋은 편인 그는 패션 잡지에 나오는 옷을 그대로 만들어 직접 입어봤다. 모자, 안경, 양말, 벨트, 신발, 넥타이를 맞춰 입고 액세서리로 꾸몄다. 그런 뒤 SNS에 올리니 20~30대 팔로어가 댓글을 단다. 그에게 자신을 코디할 때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는지 물어보자 “체형”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특히 머리와 얼굴 쪽에 주안점을 두고 옷을 입는 편입니다. 그런데 난 어떻게 입어도 자신 있어요. 나는 옷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옷을 더 잘 입어야 해요(웃음).” 하루에 두 시간은 두덕산을 등산하고 그중 30분은 근력운동을 한다는 그는 시니어들에게 필요한 패션 전략을 “줄여 입어라”라는 말로 요약했다. “‘아저씨와 오빠는 한 끗 차이’라는 말이 정말 맞는 말입니다. 줄여 입으면 젊은 사람들이 입는 핏이 나와요. 그런데 막상 그렇게 입으려고 하면 겁부터 납니다. 불편하기도 하겠죠. 하지만 멋을 내려면 불편한 게 있을 수밖에 없어요. 멋을 내려면 감수해야 해요. 우리가 젊었을 때도 그랬어요. 당시에는 공중화장실이 대부분 재래식 화장실이라 일을 보려면 앉아야 해서 옷이 구겨졌잖아요? 그 구김을 만들지 않으려고 바지를 벗어서 걸어놓고 일을 본 적도 있어요.” 비스포크 맞춤은 한 벌의 슈트를 만들기 위해 1만2000땀의 손바느질이 필요하다. 비접착 방식으로 천연 광목을 대고 하나하나 손바느질 작업을 하면서 옷의 형태를 잡는다. 비스포크 슈트는 한 달 이상 걸리는 고도의 기술력을 요구한다. 이러한 정성이 깃든 슈트를 입으면 마음가짐도 반듯해지고 말도 신중하게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옷을 잘 입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다. “진심을 다해 만든 양복은 사람의 겉모습만 바꾸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도 바꿀 수 있어요. 좋은 사람이 입는 옷이 멋진 옷이죠. 멋진 옷으로 완성하는 건 결국 예절이거든요. 예절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죠.” 슈트는 내 인생의 최고 선물 흰 수염에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신사가 양손에 줄자를 들고 정장을 맞추러 온 손님의 치수를 잰다. 곧이어 그는 커다란 테이블에 양복감을 깔고 바늘과 실을 무기 삼아 작업에 나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이 흐르는 노신사가 두꺼운 돋보기를 코에 걸고 열정적으로 손마름질하는 모습은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감동적이다. 여씨는 나이 들어서도 멋있게 보이고 싶다면 펑퍼짐한 옷은 벗어 버리고 젊은 사람들이 입는 옷을 연구하라고 조언한다. 나이 들어도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최고의 재단사로 불리면서 자신의 사업체를 가졌던 사람이 그 일을 그만두고 완전히 다른 일을 수십 년간 해야 했다. 그 좌절은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깊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오랜 고통 끝에서 자신이 좋아하고 보람을 느꼈던 과거를 다시 찾고 재도전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변화를 꾀하고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다시금 맞이한 인생의 봄은 그러한 마음가짐과 시도를 통해 도착할 수 있었다. 그의 외견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년의 아우라가 단단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멋진 옷을 만들어 입고 제일 먼저 누구한테 보이고 싶냐 물었더니 아직 싱글(돌싱)인 그는 이렇게 답했다. “모 방송사 만남 주선 프로그램에서 저를 출연시켜준다고 합니다. 상대 파트너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스트라이프 슈트로 폼 좀 내볼까 해요. 슈트는 내 인생의 최고 선물이니까 또 행운을 가져다줄지도 모르죠.”
- 2017-02-06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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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지금은 라디오 시대> DJ, 그리고 <최유라쇼>의 쇼호스트 최유라의 인생 후반전은 지금이 최고의 순간
- 롯데홈쇼핑의 인기 프로그램 를 시작하기 위해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최유라(51)의 모습은 전문 CEO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녀를 MBC 표준FM 의 DJ로만 기억하는 사람은 그녀의 절반만을 알고 있는 셈이다. 그녀가 진행하는 는 2009년에 시작해 올해 무려 8년 차를 맞이하고 있는 독보적인 홈쇼핑 프로그램이다. 가 세운 매진과 완판의 기록은 최유라를 명품 비즈니스 업계의 블루칩으로 각인시켰다.그녀가 말하는 쇼호스트로서의 삶 그리고 인생 후반전을 들어본다. “저는 살면서 홈쇼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직접 만지고 느껴보고 사는 것이 재미가 있거든요. 어떻게 남의 말을 듣고 사느냐 하는 생각이 있었죠. 그리고 그걸 파는 사람이 물건을 얼마나 알아서 저렇게 말할 수 있는가 싶었어요. 그래서 아예 안 봤죠.” 현재 홈쇼핑에서 가장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는 독보적인 홈쇼핑 프로그램 의 쇼호스트이자 를 이끌고 있는 베테랑 라디오 DJ로 모르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운 최유라가 하는 말이다. 홈쇼핑에 전혀 관심도 없었기에, 그녀가 홈쇼핑 쇼호스트가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쇼호스트, 결정까지 1년이 걸리다 “홈쇼핑 회사들이 저한테 제안을 해왔어요. 결정하는 데 1년이 걸렸죠. 이들이 제 요구사항을 결정하는 데 8개월 걸렸어요. 제 요구사항은 ‘내가 쓰는 것, 먹는 것, 우리 집에 있는 것부터 하자. 그럼 하겠다’였어요.” 그녀는 “내가 쇼호스트도 아닌데 직접 써보지 않은 걸 어떻게 팔아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에 회사들은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장은 단호했다. “지르듯 한 말이었기 때문에 요구사항을 보낸 후에는 잊고 있었어요. ‘그게 될까?’ 싶은 마음도 있었죠. 그런데 받아들이지 않으면 할 필요가 없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좀 답답하게 사는 사람이라…. 굳이 돈벌이하려는 거면 방송에서 벌면 되지 싶었고.” 당시 그녀의 제안을 가장 심사숙고한 회사는 롯데홈쇼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계약이 체결되고, 최유라는 홈쇼핑 무대에 서게 된다. 그게 벌써 7년 전 이야기다. “2년 차, 3년 차까지는 참 힘들었어요. 일단 업체들의 검증도 필요했고, 업체들에서는 ‘저희는 아직 홈쇼핑 계획 없습니다’라고 하고. 특히 외국 업체들은 명품 홈쇼핑 개념을 모르더군요. 독일도 일본도 마찬가지였죠. 저가 물건들의 판매를 홈쇼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홈쇼핑의 위력은 시간이 흐르면서 꾸준하게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나갔고, 마침내 폭탄이 터졌다. 최유라가 쇼호스트를 맡은 제품들 중 명품 가전제품을 만드는 다이슨의 제품들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연속 매진을 기록한 것이다. “직접 영국 다이슨 본사에 가서 확인하고 공장도 보면서 공을 많이 들였어요. 신제품을 방송하면서 대박을 쳤죠. 다이슨을 수입하는 수입사가 깜짝 놀랐어요. 그러면서 다이슨의 모든 신상품은 백화점과 최유라에게만 준다는 방침을 세웠죠.” 마담 초이, 인생이 바뀌다 최유라의 인생도 그때를 기점으로 변했다. “그때부터 계속 해외에 나가게 됐어요. 매해 2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암비안테 박람회가 열려요. 세계의 주방 가전 명품이 모이는 세계 최고의 박람회죠. 물건 판매는 안 하고 계약만 체결되는 자리예요. 그러다 보니 각 업체 CEO들과 친분도 쌓게 됐어요. 참 신기한 일이죠.” 그녀는 초청을 받아 암비안테 박람회 휘슬러 부스에서 라이브 요리쇼를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요리를 소개하면서도 휘슬러의 우수성을 선보이는 일석이조의 자리다. 이제는 박람회에 가면 ‘마담 초이’ 안 오냐며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그녀의 인스타그램에는 박람회와 비즈니스 업계를 통해 친해진 친구들로 가득하다. “제가 정말 꿈에 그리던, 이건 이뤄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 돼버렸어요.” 그녀가 확고한 자부심을 갖고 있음은 인터뷰 도중에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단순한 쇼호스트가 아니라 자신이 데리고 있는 스태프들과 함께 기획에서부터 디렉팅까지 전부 컨트롤하고 있었다. 인터뷰 도중에도 스태프들에게 꼼꼼히 지시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프로페셔널한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자신답지 않은 것’을 거부하는 여자 최유라는 마흔다섯 살 때부터 은퇴를 준비했다고 한다. “남편에게 말했어요. 은퇴를 할 때는 신중히, 오랜 시간을 두고 놓치는 거 없이 차근차근 마무리하고 싶다고. 그래서 은퇴에 걸리는 시간을 10년으로 잡자고.” 그녀는 예순 살이 되기 전에 뭔가를 이뤄놓고, 예순 살을 전후로 앞뒤 10년을 자신이 ‘키운 아이들’ 모습을 보면서 쉬고 싶었다. 남편은 좋다고 승낙했고, 그때부터 최유라의 인생 후반전은 시작된 셈이다. 그때 마침 홈쇼핑에서 제안이 들어온 것은 운명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방송 출연, MC 섭외도 많이 와요. 그런데 제가 재미가 없어요. 30대라면 할 수도 있겠는데 은퇴 준비를 하면서 방송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거죠. 너무 소모적이기 때문이에요. 감각적인 재미와 과장된 그 무엇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생각해보니 지금 하는 라디오와 홈쇼핑의 와 역행하는 거예요.” 그녀는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뒤에서 욕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저건 뭐 혼자 잘났다고 잘난 척하고…. ‘아니, 를 왜 안 해? 웃기다 이거지?’ 이런 얘기도 듣고. 그런데 저는 정말 할 얘기가 없어서 안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따지는 사람도 있었어요. ‘웃기고 있네, 네가 왜 할 얘기가 없어? 너같이 말 잘하는 애가.’” 그녀는 정말 할 얘기가 없어서 나가지 못한다. 대부분의 방송 프로그램, 특히 가족 이야기가 주가 되는 토크형 프로그램은 아이들이 말썽도 부리고 가출도 하는 등 갈등이 있어야 시청자들이 재밌다. 그런데 최유라의 아이들은 너무 ‘평범하게’ 자랐다. 아침 먹고 학교 가고 돌아오는 일상의 반복. 그러니 방송에서 원하는 ‘에피소드’가 없는 게 당연하다. “다 상술인 줄 알았는데 믿음이 간다”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 최유라의 성격은 쇼호스트 일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쓰는 물건만을 소개한다. 그래서 소위 ‘지르는’ 식의 제품소개를 질색한다. 그녀가 생방송 중에 실제로 요리를 하는 것은 꼭 필요한 사람만 사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방송 진행 중에 단점까지 다 말해버릴 정도로 그녀는 정직하다. “솔직히 홈쇼핑의 모든 용어가 불편해요. ‘추가 구성’이라는 말도 어떻게 보면 미끼죠. 살 것도 아닌데 사게끔 만드니까. 그래서 ‘추가 구성이라고 하지 말고 선물이라고 하자’ 했어요. 그런데 선물이라는 표현이 심의에 걸리더군요. 너무나 걸리는 게 많아(웃음). 결국 부속이 아니라 동급의 명품으로 함께 줄 수 없으면 본 제품만 판매하고 가격을 낮추자는 쪽으로 정리를 했죠.” 그녀의 성공적인 도전은 소비자들의 반응으로 확인되고 있다. “중심을 잡아주는 게 정말 중요해요. 사람들은 다 느껴요. 내가 잘난 척을 하는지 말로만 어떻게 하려는 건지. 그래서 명확하게 해야 해요. 어떤 분이 문자를 보낸 적이 있어요. ‘홈쇼핑은 다 상술인 줄 알았는데 믿음이 간다’고. 그래서 저는 모든 의견을 받을 수 있는 SNS를 개방했어요. 물건 예고편, 개인적인 얘기까지 알려주는 공간을 만든 거죠.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쓰는 사람들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정직으로 승부한다’고 말하는 그녀는 기업에서 봉급을 받는 게 아니라 롯데홈쇼핑에서 월급을 받고 있다. 그래서 기업에 ‘물건만 잘 만들라’고 말할 수 있다. 물건에 하자가 있으면 방송에 올라오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어떤 때는 포장이 안 좋아 방송을 그만둔 적도 있어요. 회사가 고맙긴 해요. 그런 내 만행을 다 받아주니까. 그러잖아요, 고객을 만나는 건데, 부실하면 말이 안 되죠.” 내 이름을 걸고 하는 ‘토크쇼’ 좋은 물건은 소통의 매개체이며 그걸 잘 이용하고 싶다는 최유라는 혼자 해도 어색하지 않은 토크쇼를 할 수 있는 게 행운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최유라는 지금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를 하고 있는 셈이다. 소위 MC들이 가지는 꿈,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를 하고 싶다는 꿈을 그녀는 이미 이루고 있다. 그녀는 휘슬러를 판매하기 위해 쇼를 시작할 때, 그날의 시사와 사회, 가사에 대한 내용으로 오프닝을 한다. 스토리가 있는 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자신의 쇼를 대하는 진정성의 증거다. 그리고 그 진정성은 자신이 판매하려는 제품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물건을 팔 때 그 물건을 왜 써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잘 사용하는 것인지도 알려줘야 소비자들의 마음이 움직이겠다 생각했죠. 그런 촘촘한 배려가 소비심리가 얼어붙은 요즘에도 계속 매진행렬을 만들어내는 이유라고 봐요.” 이제 51세. 그녀가 말한 예순 살 이전 10년이라는 인생 후반전의 초반이다. “작년은 건강과 환경이 캐치프레이즈였어요. ‘좋은 명품은 환경적으로 우수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실행했죠. 그럼 2017년은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어떤 캐치프레이즈를 제시해야 할까? 스태프들에게 물으니 다들 거창하게 생각하더군요. 저는 올해 ‘우리의 기본 밥상을 바꾸는 것’이 목표예요. 특히 설탕, 소금에 대한 것들을 바꿀 거예요. 설탕은 참 백해무익하죠. 그런데 안 들어가면 안 되는 재료예요. 바로 그 부분에 대한 답을 드리려고 해요.” 스쳐가더라도 기억에 남는 사람 되고파 “요즘이 가장 좋아요. 우리 부부는 살면서 더 좋아지는 중이에요. 서로가 서로에게 느꼈던 아픔과 상처들이 있지만, 지금은 편안해요. 가감 없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거든요. 젊었을 때 저 사람 없이 못 살겠다는 생각 해본 적 없는데 이제는 저 사람과 끝까지 살 수 있다는 게 행복해요.” 최유라는 아이들에게 ‘내가 이렇게 너희들을 위했는데’ 하는 기대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들과 인생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됐다. 이제 그 나이에 이르렀음이 행복하고 요즘 그 행복을 온전히 누리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언뜻언뜻 스치는 기억들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말한다. “사정이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위로를 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좋은 연예인, 괜찮은 사람, 그렇게 스쳐가더라도 남는 사람.” 그녀의 소망을 듣고 있자니 마치 라디오를 듣는 듯 편안했다. 그녀의 아날로그적 매력이 훅 하고 밀려왔다. ‘마음’, ‘진정성’, ‘기준’이라는 단어들과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참 드문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최유라가 만들어갈 인생 후반전이 기대되는 이유다.
- 2017-01-31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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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박시룡 前 한국교원대학교 생물교육과 교수
- 인터넷 기사를 뒤적거려봤다. 박시룡(朴是龍·65) 前 한국교원대학교 생물교육과 교수의 기사는 그저 황새복원의 역사다. 읽다 보면 ‘박시룡’이 아닌 ‘황시룡’으로 읽힐 정도다. 한국에서 멸종된 황새 복원을 위해 살아온 세월만 20년. 황새들의 안녕을 잠시 뒤로 하고 사회에서 허락한 현역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고별 강연 준비에 여념이 없던 1월의 어느 날, 교원대 교정에서 박시룡 교수를 만났다. 한 분야의 대가를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인생에서 그 분야의 것을 빼면 어떤 얘기를 하게 될까? 박시룡 교수와의 인터뷰가 궁금했다. 그래서 황새 복원에 관한 이야기는 최소화해보려 노력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말 그대로 ‘기 승 전 황새 복원’. 박 교수가 교원대에서 한 마지막 강연 제목도 ‘황새를 부탁해’였다. “고별 강연 주제는 제가 정했어요. 제2권역인 충북을 통해서도 황새 야생 복귀를 실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제가 떠나고도 교원대를 중심으로 황새 복원 사업이 계속돼야 하기 때문이죠.” 은퇴를 앞뒀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박 교수는 여전히 바쁘고 할 일이 많았다. 황새를 한반도 땅에 다시 날게 한 사람으로서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황새 복원 男, 알고 보니 박쥐 박사? 박시룡 교수는 원래 박쥐 연구로 공부를 시작했다. 경희대학교 학부와 석사과정을 통해 박쥐의 유전과 관련한 연구를 했고, 독일 유학 시절 박쥐 행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마쳤다. 그것도 흡혈박쥐에 관한 연구였다. “독일 유학 당시, 본 대학교에서 지도교수를 만나 박쥐를 연구하겠다고 했습니다. 마침 그분이 흡혈박쥐를 연구하는 분이셨어요. 세계보건기구(WHO) 파견으로 흡혈박쥐 주 서식지인 남미 코스타리카에서 연구하고 돌아온 전문가셨습니다. 흡혈박쥐를 독일로 옮겨 실험하고 있었죠. 저는 박쥐의 감각, 생리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초음파를 이용한 일상적인 박쥐의 음성학적 소통에 대한 학위 논문을 쓰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교원대 동물학 분야 교수가 됐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교육환경이 독일에 비해 매우 열악했다. 독일에서 썼던 초음파 녹음기는 당시만 해도 몇천만원 되는 고가 장비여서 살 엄두를 못 냈다. 교육부에서 기자재 지원 비용을 얻어냈지만 필요한 장비들이 너무 많았다. “소리를 분석하는 분석기가 필요해서 그걸 먼저 샀어요. 초음파 녹음기는 비싸서 포기하고 가청음이라고 있어요. 릴 테이프로 녹음하는 건데 그건 얼마 안 비싸더라구요. 가청음은 어디다 쓰냐면 새소리 녹음을 할 수 있었어요. ‘파라볼라(우산 모양의 극초단파 중계용 안테나)’라는 집음기를 들고서 새 가까이 가서 소리를 녹음해 수집하는 거죠. 그런데 저는 파라볼라가 없어서 TV안테나 뽑아서 썼어요(웃음). 조잡하다고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런 식으로 연구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황새 복원 사업이 중요하다고요? 왜죠? 굳이 다른 얘기를 해보자고 해놓고 뜬금없이 물었다.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드러났다. 황새 복원은 멸종된 동물을 복원해 이 땅에 살게 하겠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유학길에 올랐던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때가 1981년이었는데 광주 민주항쟁 바로 직후였어요. 외국에 처음 나가본 거죠.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르푸트한자를 타고 이동하는데 프랑스 대학생 무리가 한쪽 좌석에 무리 지어 앉아 있었어요.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데 그게 그렇게 부럽더라고요. 그 당시 우리가 많이 못살았어요. 저애들은 여유 있게 왔다 갔다 하는데 나는 지금 이 나이에 뭘 배우겠다고 유럽이라는 곳을 가고 있나. 눈물이 나더라고요.” 유럽에 가보니 모든 것이 풍부했다. 대형 마트가 넘쳐났고 사람들은 활기차 보였다. 문화충격이었다. 당시 한국은 모두가 급물살을 이겨내며 살던 시절이었다. 시국을 의식한 듯 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도 조심스럽게 꺼냈다. “박근혜 대통령하고 저는 1952년생 동갑입니다. 대학 시절 학생들이 데모한다고 계엄령을 내리고 학교 문을 닫아버렸어요. 공부를 못했어요. 저는 주동자가 아니었지만 경찰에 끌려들어갔다가 훈방조치됐고, 장발족 단속에 걸려 또 경찰서에서 하루 있다 나오고요. 통제당하고 어려운 시대에 박 대통령은 세상 물정 모르고 학교만 다녔어요. 나라의 아픔도 느끼고 성장했어야 하는데….” 또다시 유학생활의 단상이 이어졌다. 6년 동안 유럽 친구들과 허물없이 지내면서 그들의 ‘배려’하는 국민성에 놀랐고, 과거·현재·미래와 함께하는 장묘문화가 새롭게 느껴졌다. “독일의 경우 우리와 정말 다릅니다. 묘소가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데 화단으로 돼 있어요. 더 충격인 것은 30년이 되면 법적으로 없어집니다. 제한된 곳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는데 그걸 다 놔둬버리면 지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황새 복원 사업은 근본적인 상생운동 박 교수는 독일 유학생활 이야기를 통해 황새 복원 사업의 가치를 전하려는 듯했다. 배려를 기본 바탕으로 자연과 마주하고 미래 세대를 걱정하는 독일인들의 삶이 귀감이 됐다. 황새가 대한민국 땅에 뿌리를 내리고 개체 수를 늘려간다는 것은 상생과 순환의 근본을 잡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황새 복원 사업은 자연이 살고, 나라가 살고, 우리가 잘사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국민의 배려가 밑바탕이 돼야 합니다. 사람도 생태계의 한 구성원입니다. 사람은 숫자가 많으므로 표면적으로 잘 몰라요. 그런데 멸종 위기종, 한 개체의 멸종은 100년 200년 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겁니다. 그 종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요. 황새의 멸종은 결국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넘어 우리 사회의 문제를 보여줍니다. 가령 ‘농약을 얼마나 많이 썼기에 개체의 멸종을 가져왔을까?’ 예를 들어 일고여덟 쌍 중 한 쌍이 불임이라고 해요. 1960~1970년대에는 1cc당 1억 마리 정도 정자가 생성됐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1cc당 5000만 마리밖에 안 된답니다. 4000만 마리 밑이면 불임이라고 말해요. 우리가 알게 모르게 화학 물질에 어려서부터 노출되어 왔다는 거죠. 우리 생애는 너무 짧아요. 황새를 복원하기에는요. 황새를 넘어서 결국 우리 인간의 삶에 부메랑이 돼 어떤 형태로든 드러날 것입니다. 제가 말했던 것처럼 사람을 포함한 생태계와 우리 생활, 사회 전반에도 영향을 미칠 거로 생각합니다.” 황새는 현재 한국교원대 사육장에 96마리, 예산에 67마리가 있고 자연 방사로 서식하는 개체 수는 14마리다. 작년에는 자연 번식을 했던 암컷 두 마리가 전신주에 걸려 죽으면서 어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전반적인 시스템 재고의 필요성도 황새 복원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법적인 정년퇴직을 맞은 저는 겨우 20년 했는데 이 사업이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꼭 좀 이어져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품은 것은 40년, 그림 그린 것은 1년 박 교수는 은퇴를 앞두고 있던 작년 말,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황새와 자연을 주제로 한 수채화 전시회를 가졌다. 손사래를 치면서도 “유년 시절 미술 선생님이 ‘수’는 꼭 줬다”며 청문회식 답변(?)으로 본인의 소질을 인정했다. “유학 시절이 외롭더라고요. 독일 본은 흐린 날이 많아요. 그래서 가끔 스케치를 하고 그랬어요. 수채화의 대가 에밀 놀데(1867~1956)의 수채화 책을 보고 난 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 속앓이를 했습니다.” 독일 유학 시절 그림을 팔아서 학비를 벌 정도였다고 하니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본에서 유럽 박쥐학회가 있었어요. 그때 박쥐를 그려 액자에 넣어 30점 정도를 전시했는데 다 팔렸어요. 그림 팔아 번 돈으로 몇 개월 생활비로 썼습니다.” 그는 황새복원사업의 홍보를 위해 그림 재능을 활용하고 있다. 시중에 본격적으로 판매하는 것은 아니지만 컵이나 텀블러, 홍보용 티셔츠 등에 직접 황새를 그려넣었다. 글씨 디자인에도 관심을 갖고 있어 틈틈이 연습해 다양한 제품에 적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박 교수가 그린 황새 그림 100점은 질소 처리돼 고별 강연 이후 타임캡슐에 저장됐다. 이 캡슐은 100년 후인 2096년에 열게 된다고. “몇 작품은 학교 박물관에 기증했고 100점은 타임캡슐에 넣었습니다. 100년 후에 결국 황새가 복원됐는지 안 됐는지 알 수 있게 되겠죠. 이 그림과 함께요. 사람들이 그림을 보면서 생각할 겁니다. 우리 후손들이 되겠죠.” 은퇴 후 박 교수는 예산황새공원(충남 예산군 광시면) 쪽에 사무실을 얻어 황새 복원을 위해 다시 뛸 계획이다. 살면서 다른 길을 가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단 한 번도 없다는 듯 멀리 시선을 둔 채 미소만 짓는다. “그래도 자연에 대해서 경외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인생을 살면서 감동 아닌가요? 황새와 상생할 100년 후를 상상해봅니다.”
- 2017-01-2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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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과천시민극장 연극 <우리읍내>
-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감격에 젖은 백전노장은 손을 번쩍 들어 객석과 무대를 향해 감사 인사를 했다. 정확히 27년 만의 커튼콜. 과천시민극장의 연극는 백발이 돼 돌아온 노배우의 재기와 시민들의 소망을 이루어준 ‘꿈의 무대’였다. 두려움을 떨치고 조명 앞에 당당하게 선 그들만의 이야기는 밤새도록 끊일 줄 몰랐다. 과천시민극장의 다섯 번째 연극 작년 12월 1일 과천시민회관 소극장. 공연을 이틀 앞둔 극장 안은 긴장감과 설렘이 감돌았다. 소품을 나르고 무대를 걷는 시민배우들의 모습에서 전문배우 못지않은 집중력마저 느껴졌다. 과천시민극장은 작년까지 5기수의 시민배우를 배출했다. 작년 9월 치열한(?) 오디션을 거쳐 5기 시민배우 12명을 선발했고 출연자가 많은 의 특성상 시민배우 1기에서 4기까지 총출동해 공연을 완성했다. 시민극장이라 해서 수준 이하일 것이라는 생각은 절대 금물. 극단 ‘모시는 사람들(모들)’의 전문배우들이 시민배우를 도와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백제예대 방송연예과 서민희 교수의 연출, 극단 모들 이재훤 배우의 연기 지도로 전문성을 한층 올렸다. 오랜 호흡을 맞춰온 과천시민극장의 음향과 조명, 무대 스태프 또한 꼼꼼하게 무대를 챙겼다. 과천시민극장의 드림팀은 직장인·주부·선생님·학생, 20대에서 60대 남녀노소 나이를 불문하고 배우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무대가 그리웠던 그가 돌아왔다, 연극배우 전한원 본지 지난해 11월호 ‘브라보가 만난 사람’에서 찾아뵀던 김정숙 연출가는 인터뷰 당시 시니어 연극을 이야기하다 과천시민극장에 참여하는 60대 배우를 언급한 바 있다. 젊은 시절 연극을 그만뒀던 김정숙 연출가의 극단 선배가 시민배우로 돌아왔다고 했다. “인생이라는 공부를 열심히 하셔서 이제 진짜 배우가 될 것 같다”고도 말했다. 그가 바로 무대감독 역의 전한원(65)이다. 전한원은 1989년 연극 공연을 마지막으로 연극계를 떠났다. 이후 평범한 가장과 직장인으로 살아온 그는 은퇴 후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무대로 돌아왔다. 시민극장을 통해서다. “연극을 그만둔 뒤 대학로를 지나갈 때면 고개를 돌리고 다녔습니다. 아예 그곳에서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도 않았어요. 집에서는 드라마도 안 봤습니다.” 이 작품에서 무대감독은 이 연극을 이끌어가는 주요 배역. 30년 가까이 무대를 떠났던 그에게 맡겨졌다. “부담스러웠어요. 대본을 딱 읽어보고 이것은 내가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배역이 주어지고 나니까 두렵고 떨렸습니다. 배역 소화를 잘 할 수 있을까? 원래 제가 자신감 덩어리인데 말입니다(웃음). 연습 과정에서 자신감이 떨어지기도 했고 또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부터 ‘옛날에 내가 배우였지’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조금 편해졌습니다.” 는 사람이 죽고 사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기에 삶의 깊이를 아는 배우가 필요했다. 무대감독은 전한원이 적역이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노련했고 연기는 더욱 깊어졌다. 은퇴 뒤 넉넉한 웃음과 기품 또한 넘쳤다. 이제 연극이든 영화이든 무조건 도전할 겁니다 에서 의사 깁스 역의 권용각(57)씨는 충훈고등학교 국어 선생님. 잘생긴 이목구비에 나긋하고 지긋한 목소리에 정확한 발음까지. 배우가 아닌 교사가 본업이라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권용각씨도 한때 연극과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았다. “국어국문학이 전공이지만 대학교 때 연극을 했습니다. 졸업하면서 국립극단에 들어가 연출을 하다가 나왔어요. 과천여고에서는 연극부를 만들어 학생들이랑 연극도 했고요. 대본을 외워 아이들과 하는 독서모임에서 모노드라마 연기도 했습니다. 시민극단은 우연히 오디션 공고를 보고 들어오게 됐습니다.” 작년 2월 권용각씨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심근경색이었다. “제가 수술을 한 다음 심근경색으로 죽은 사람을 세 명이나 봤습니다. 아플 때 생각한 것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한번 해보자’였습니다. 그래서 시민배우에 도전했어요. 지금 너무 행복해요. 무대 위에서 걸어 다니는 게 너무 좋아요. 저는 바로 시작할 겁니다. 안 되면 영화 엑스트라나 하고 다니지요 뭐.” 공연이 끝나고 무대 뒤에서 대기할 때 앉아 있었던 의자와 자신의 그림자를 카메라에 담던 권용각씨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덤덤하게 무대를 거닐던 모습. 이제 아이들의 선생님에서 만인의 배우로 거듭날 것이다. 과천시민극단에서 만난 시민배우들은 직업만큼이나 각자의 이야기 또한 다양했다. 배우의 꿈을 이루고 싶은 전업주부, 전직 연극배우였다가 아이를 다 키우고 다시 돌아온 여배우, 은퇴 후 배우가 되겠다는 직장인, 요가 선생, 방과 후 선생님, 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 속에 농사를 짓다가 오디션에 참가한 배우 등 과천시민극장의 는 사연과 사연이 만나 아름다운 공연을 만들어냈다. 행복한 시민배우들의 공연, 올해 또 이어지기를 바란다. ☞연극 연극 는 미국 북동부 뉴햄프셔 주의 그로버즈 코너즈라는 가상의 마을에서 1901년에서 1913년 사이에 일어난 평범한 일상을 의사인 깁스와 지방신문 편집장 웹의 집을 중심으로 보여주는 연극이다. 극중 주인공인 조지 깁스와 에밀리 웹의 사랑과 결혼 그리고 죽음을 통해 담담하지만 소중한 하루하루를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 2017-01-12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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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파독광부 민석기씨
- 1977년 10월 24일 김포공항. 자유로운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시기.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생이별을 앞둔 인파로 가득했다. 한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형제, 자매와 조카까지 모두 공항에 자리를 잡았다.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고, 힘줘 잡은 두 손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곧 먼 이국의 땅으로 떠날 파독(派獨)광부들을 환송하는 자리. 그 자리에는 만삭의 아내와 두 아이를 끌어안고 이별을 고하는 민석기(閔錫基·66)씨도 있었다. 그리고 39년이 흘러, 그는 이날의 이야기를 자서전에 기록해 세상에 내놓았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소협조 Frenchie B 1960년대 초 대한민국. 당시 경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박정희 군사정권 초반 시행한 경공업 위주의 수출 지향 정책은 되레 실업자 양산과 외화 부족 현상을 증가시켰다.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된 방안 중 하나가 바로 ‘인력 수출’이다. 당시 독일은 ‘라인 강의 기적’이 완성돼가고 있었다.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했고, 일자리는 많았지만 사람이 없었다. 일자리를 고를 수 있는 상황에서 거친 일을 하려는 사람이 부족했다. 당연히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일자리는 외면당했다. 독일 정부 역시 비슷한 선택을 했다. ‘인력 수입’이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3년부터 1980년까지 약 7900여 명의 광부가 독일에서 근무했다. 500명을 모집했던 첫해, 첫 번째 모집에는 4만6000여 명이 몰릴 만큼 좋은 일자리는 절실했다. 민석기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독일에서 찾던 ‘경력 광부’ 한때 광부만 2000명이 넘었던 함태광업소. 사촌누나와 매형 덕분에 광부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2년을 일했다. 독일로 갈 사람을 뽑는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도 그때였다. “독일로 갈 광부를 뽑는다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어.” 동료 광부의 전언이 계기가 됐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민석기씨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고 했다. 당시 독일 광부들의 월급은 600마르크(약 160달러) 정도로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제가 독일에 지원했던 시기는 파독광부제도 시행 후반이었어요. 초기에는 해외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 만한 머리 좋은 사람들을 주로 뽑았죠. 처음에는 대학생들이 많이 갔는데, 일을 안 하고 요령 피우는 친구들이 많았나봐요. 그래서 힘쓸 만한 사람들 위주로 뽑았더니 이번엔 폭력사건이 골치를 썩였죠. 그래서 독일 측에서 요구했대요. ‘진짜 광부’를 보내달라고. 이때 탄광일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우대해줬고, 저도 되겠다 싶어 지원하게 됐죠.” 들어 올리지 못했던 가마니 영화 에는 파독광부를 지원했던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가 체력시험을 보는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반드시 합격하겠다는 일념으로 쌀가마니를 힘겹게 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장면. 1977년에는 그 체력시험이 서강대학교에서 있었다. 독일인 심사관도 통역을 받으며 지원자들을 지켜봤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와 달랐다. 번쩍 들 필요도 없이 어깨 위에 들쳐 매기만 하면 됐는데 그것조차 되질 않았다. 쌀 대신 모래가 들어 있던 60kg짜리 가마니는 꼼짝도 하질 않았다. “시원하게 떨어졌죠. 이해할 수 없었어요. 평소 같으면 쉽게 들 수 있었을 텐데 안되더라고요. 요령이 없었나봐요. 그렇게 풀이 죽어 태백으로 돌아갔는데, 후에 연락이 왔어요. 다시 시험을 보라고. 그래서 서울로 향하기 전에 열심히 모래가마니를 들어올리는 연습을 했어요. 그것도 열심히 하니까 요령이 생기더라고요.” 두 번째 도전에서는 필기시험까지 일사천리로 합격했다. 합격하고 나서도 독일로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경비가 30만원이나 됐다. “당시에 대구에서 집 한 채 사는 데 150만원이었으니 엄청나게 큰돈이었죠. 하지만 돈을 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요. 그 시절에는 ‘독일 가는 데 돈 좀 빌려달라’고 하면 잘 모르는 사람도 선뜻 빌려줬어요. 그만큼 파독광부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신용도 높았어요. 어떤 기수는 한국에서 한 달짜리 사전교육까지 다 마쳐놓고도 떠날 날짜가 자꾸 미뤄져 빚이 늘어나는 경우도 있었어요. 곧 독일에서 큰돈을 벌 테니까 하는 마음에 빚으로 흥청망청 생활했던 거지요. 다행히 저는 사전교육을 제대로 마칠 수 없을 정도로 출국일이 급하게 잡혀 별일 없이 독일로 향할 수 있었어요.” 3년 후 돌아오겠다는 약속 못 지켜 “3년만 꼭 참아. 3년만 참고 일하면 한국에서 잘살 수 있을 거야.” 출국심사를 하기 전 눈물을 흘리는 아내에게 민석기씨는 이렇게 말했다. 기본 계약이 3년이었으니 그 시간만 채우고 돌아오면 한국에서 무엇을 시작해도 쉽게 할 수 있는 밑천을 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자신의 귀국이 훨씬 늦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도 못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과 곧 대구의 시댁으로 내려가야 하는 아내를 뒤로 한 채 그는 루프트한자 항공기에 올랐다. “당시엔 비행기 자체가 신기했던 시대였으니까요. 타고 있던 커다란 것이 두둥실 떠오르면서 진짜 떠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젠 내릴 수도 없고, 도망갈 곳도 없다는 현실이 체감됐어요.” 버스는 어둠 속을 5시간을 넘게 달렸고, 잔뜩 겁먹은 얼굴의 한국인 무리가 낯선 향기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차에서 내렸을 때 그들은 딘슬라켄의 땅을 밟고 있었다. 이들이 독일의 광부로서 생활을 시작한 로벡 광산이 있는, 먼 훗날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아리랑파크’가 건립된 장소였다. “처음엔 말도 못하게 고생했어요. 말이 안 통했으니까요. 이걸 들라는 건지 내리라는 건지 당기라는 건지 밀라는 건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죠. 멍하니 들고 서 있을 때가 태반이었어요. 망치, 톱, 정 같은 공구 이름도 전혀 몰랐고요. 갱도 내에서는 무전으로 지시를 받는 경우가 많아 더 알아듣기 힘들었어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저녁에는 괜한 군기를 잡겠다는 선배들의 괴롭힘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역시 지옥 같은 갱도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00m쯤 갱도를 내려가면 작은 터미널 같은 것이 나와요. 개미굴같이 여러 소규모 갱도들로 연결되는 철로들이 집결되는 곳이죠. 거기서 열차를 타고 10분 넘게 들어가면 다시 지하로 내려가야 하고, 내려가서 실제 작업하는 곳까지 다시 수백m를 더 들어가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내려가고 들어가기를 여러 번 반복하기도 했고요. 석탄을 찾아 따라다니는 것이죠. 공기가 공급되는 환풍기 근처는 찬바람 때문에 서늘했지만, 바람이 통하지 않는 곳은 지열 때문에 40℃가 넘기 일쑤였죠. 거기서 독일인들의 고함을 들어가며 일했어요.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고.” 그래도 말이 들리고 일이 익숙해지자 독일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변했다. 한국에선 쉬는 날도 없이 작업시간이 길었지만 독일은 달랐다. 주 5일 근무에 공휴일도 꼬박꼬박 쉬었고, 하루에 8시간만 근무하면 그만이었다. 막장에 들어가는 데 1시간, 나오는 데 1시간,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면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5시간에 불과했다. 독일에서 나 홀로 이름 지어본 ‘새마을협동농장’ 처음에는 3년만 있자 하고 온 독일이었지만, 첫 휴가는 그보다 훨씬 뒤인 7년 만에 이뤄졌다. 한 달 휴가 동안 도로공사나 다른 일을 하면 큰돈을 쥘 수 있었고, 더 돈을 모아 금의환향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한국에 도착했을 땐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8남매가 모두 모여 민석기씨를 환영했다. 형제 대부분이 직·간접적으로 독일에서 큰돈을 벌고 있는 민석기씨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빨갛고 파란 테두리가 그려진 아빠의 국제우편을 늘 기다리던 막내는, 막상 난생 처음 아빠를 만나자 낯설음에 뒷걸음쳤다가 곧 아빠 품에 안겼다. 그렇게 가족들은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었다. 휴가 때 그의 마음을 흔든 것 중 하나는 ‘새마을운동’이었다.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조국은 많이 변해 있었고, 그 변화의 중심에 새마을운동이 있다고 믿었다. “당시에 전 기숙사를 나와 인근 마을의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농장에서 지내는 것이 훨씬 편했고,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었으니까요. 주말에 시간이 남는 한국인 광부들을 유혹하는 것들은 너무나 많았어요. 전 아예 나와 있어서 이런 유혹을 피할 수 있었고 농장일로 가욋돈까지 벌었죠. 그때 농장 주인의 제안으로 빈 땅에 직접 배추와 무, 갓 등을 심으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새마을협동농장이라고 이름을 지었죠.” 후에 그의 이 농장은 현지 신문에 소개되면서 지역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그의 ‘외도(?)’가 회사에까지 알려져 곤란을 겪기도 했다. 외로운 말년의 파독광부 많아 한때 아이들을 독일로 불러 완전한 정착도 꿈꿔봤지만, 아이들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자 1989년 민석기씨는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왔다. 휴일도 없이 일해서 모은 목돈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리라 기대했지만 돌아와서 보니 그것과는 먼 삶이었다. 다른 파독광부들처럼 남의 손에 관리가 부탁된 돈들은 형제들에게 그리고 처가로 스며들었고, 되찾기 어려운 상황이 돼 있었다. “잘된다는 말만 믿고 형님 건설회사에 계손 돈을 보탰지만, 실제로는 까먹기만 했어요. 또 처가 쪽으로도 돈이 흘러가 수중에 남는 게 없었죠. 결국 가기 싫다는 아이들을 설득해서 독일에서 엄마와 살게 했고, 전 딸아이와 한국에 남았어요. 그 후 식당일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죠. 건강이 나빠졌을 때는 간이식을 받으러 중국까지 갔었어요. 굴곡이 많은 삶이었지만 그래도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고 잘 살아온 것 같아요.” 독일로 가 인생의 대박을 맞이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어려움이 많았던 민석기씨. 그렇다면 다른 광부들의 사정은 어땠을까. “파독광부들이 잘산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요. 독일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300명 정도의 사람들은 돌아오고 싶어도 못 돌아오는 상황인 거죠. 한국에 돌아온 사람들 중 주변 사람들에게 속아 빈털터리가 된 경우도 적지 않아요. 심지어 재산권 때문에 ‘오지 말라’고 하는 친척들도 있죠.” 마침 그를 만난 12월 9일은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발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날이었다. 민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가결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 소식을 듣는 그의 표정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읽혔다. 현 대통령의 아버지에 의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고, 또 평생을 지지했는데, 이제는 상당수 국민이 그의 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로서는 명쾌하게 답을 낼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그래도 독일에 다녀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광부들이 한국인의 성실함을 몸으로 증명했기 때문에 경제성장의 동력이 된 차관도 독일로부터 빌려올 수 있었죠. 또 조국과 민족, 가족을 위한다는 마음이 있어 막장에서도 그렇게 열심히 일할 수 있었고요.” 민씨의 이야기는 가족과 부모 이야기를 자서전으로 엮는 회사 ‘뭉클스토리’의 기획 행사에 선정돼 함께 독일에 다녀온 간호사 노금희, 황보수자씨의 이야기와 함께 책으로 만들어져 지난 10월 정식 출간됐다.
- 2017-01-06 1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