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네
그렇습니다. 봄바람이 붑니다. 춘삼월 다시 돌아오니 산에 들에 또다시 바람이 붑니다. 처녀, 총각 가슴에도 봄바람이 붑니다. 그 봄바람 따라 봄 야생화들이 다시 또 피어납니다. 복수초, 노루귀, 제비꽃, 변산바람꽃, 중의무릇, 현호색, 양지꽃, 개별꽃, 광대나물 등등. 그런데 이런 봄꽃이 한두 송이가 아니라 수백, 수천 송이씩 떼로 피어 온통 꽃밭이 되는 보물섬이 있습니다. 야생화 애호가들은 그곳을 꽤 오랫동안 제 지명이 아닌, 보통명사 ‘서해 꽃 섬’으로 불러왔습니다. 가능한 한 이름을 감춤으로써 찾는 발걸음을 줄여, 야생화 자생지 훼손을 최소화하자는 선의가 담긴 고육책이었습니다. 하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듯 비밀의 정원은 소문나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 인기 TV 예능 프로그램 등에도 소개되면서 국내 최고의 야생화 자생지로 전 국민에게 알려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안산시 단원구 풍도가 바로 그곳입니다. 풍도의 야생화 탐사는 선착장이 내려다보이는 비탈면에 형성된 마을 뒤 해발 177m의 후망산을 오르면서 시작됩니다. 배를 타고 풍도까지 가는 동안 과연 꽃이 피었을까 의심하던 조바심은 후망산 오르막 길섶에서 광대나물과 개별꽃, 개지치 등 작은 풀꽃들이 하나둘 깨알 같은 꽃봉오리를 연 걸 보며 눈 녹듯 사라집니다. 그리고 마을이 끝나고 숲이 시작되면 곧바로 복수초가 건배라도 하듯 황금 잔을 여럿 모은 채 길손을 맞이합니다. 봉인 해제된 비밀문서의 페이지마다 은밀한 정보가 가득하듯 후망산 오솔길마다, 산등성이마다, 골짜기마다 귀한 봄 야생화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원래 단풍나무가 많아 ‘풍도(楓島)’라 했으나, 1894년 청일전쟁의 시발이자 일본이 청나라 함대를 기습해 대승을 거둔 ‘풍도해전(豊島海戰)’을 기념하기 위해 섬을 불법 점거한 일본이 ‘풍도(豊島)’로 고쳐 불렀다는 아픈 역사를 간직한 섬. 봄이면 섬 전체가 야생화 군락지라 할 정도로 다양한 꽃이 풍성하게 필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 없는 고유종도 2개나 간직하고 있습니다. 종전에 변산바람꽃으로 구별 없이 불리다 깔때기 모양의 꽃이 크고 형태가 다소 다르다는 이유로 변산바람꽃의 신종으로 분류된 데 이어 ‘풍도바람꽃’이란 별도의 국명으로 등재된 게 그 하나요, 붉은대극과 유사하지만 잎이 좁고 총포 내에 털이 밀생한다고 해서 ‘풍도대극’이라 불리는 게 또 다른 하나입니다. 이들의 별도 국명과 관련, 미세한 차이를 내세워 새로운 종으로 분류하는 게 타당한지 의문이라는 주장이 있기도 합니다.
어쨌든 봄바람 부는 3월 내내 풍도에는 이들 외에도, 샛노란 복수초와 분홍·보라·흰색의 노루귀, 순백의 꿩의바람꽃 등 색색의 야생화가 곳곳에서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 화사하고 아찔한 색의 향연을 펼칩니다. 그럼에도 현지 주민 및 야생화 동호인은 “5~6년 전만 해도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여러 종의 야생화가 섬 전체에서 지천으로 피어났었다”면서 “해마다 야생화 군락이 크게 줄고 있어 안타깝다”고 입을 모읍니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특정 기간 야생화 자생지의 출입을 금지키로 하는 등 대책을 세우고 있습니다.
◇ Where is it?
대부도에서 남서쪽으로 24km 떨어져 있는 풍도는 섬 둘레 5.4㎞, 전체 면적 1.84k㎡에 불과한 작은 섬으로 현재 60여 가구, 100여 명의 주민이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평상시 섬을 드나드는 수요가 그리 많지 않아 하루 1회 여객선이 왕복 운항할 뿐이다. 오전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을 떠난 여객선은 대부도 방아머리항을 거쳐 풍도에 닿았다가 당일 곧바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야생화를 찬찬히 살펴보려면 최소한 1박을 해야 한다. 다만 3월이면 야생화를 찾는 이들이 전국에서 찾아와 단원구 탄도항이나 당진의 도비도항, 서산 삼길포항 등지에서 단체로 낚싯배 등을 빌려 아침 일찍 섬에 들어 한나절 돌아본 뒤 오후에 되돌아 나오곤 한다.
하늘에 별과 달이 있다면, 땅에는 풀과 꽃이 있다. 몽골의 여름 초원에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의 뜻을 온몸으로 기억할 것이다. 계절이 봄을 지나 가을이 시작되기 전의 여름이라야 한다. 세상 꽃의 원형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즈음 거기에 다녀온 내 친구는 “목 놓아 울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나는 여기서 많은 꽃을 만났다. 늦은 나이에 무슨 꽃 타령! 그래도 좋다. 누가 뭐라 해도 상관없다. 내게 꽃은 나이와 상관이 없다.
꽃은 하늘의 구름, 우리의 달 항아리처럼 사내를 철들게 하는 창조주의 세심한 장치임에 틀림없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남쪽 톨강과 자이슨을 싸안고 있는 나지막한 산에는 소나 낙타들이 어슬렁거리고, 여기저기 누워 풀을 뜯고 있는 풍광은 낯설도록 평화롭다. 조금 더 오르면 나무나 관목이 없는 느슨한 구릉이다. 거기에는 온통 키 작은 들꽃으로 빽빽하다. 아무데서나 그냥 언덕을 오르면 모두 꽃밭이고 풀밭이다. 땅바닥에서 흙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나라에서 귀하게 취급받는 에델바이스 또한 흔하다. 다람쥐와 새, 그리고 나비와 벌들도 바쁘게 평화롭다.
아내는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펴, 걸어 말리기에 좋은 들풀들을 모아 싼다.
비가 한 차례 더 후드득 지나간다. 아내에게 양산을 펴주고, 난 비옷을 꺼내 덧입었는데 이내 그친다.
흩어지는 구름 사이 하늘은 더 파랗다.
개울물이 늘어 소리 또한 청량하고 맑다.
딛고 오르는 땅과 풀의 감촉이 더할 나위없다.
초원을 지나 산에 오를수록 갈잎과 자작나무가 빼곡한 숲이다.
관목이 둘러싸인 풀밭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들꽃과 각종 나무향이 코끝을 스친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 묘사했던 숲의 몇 장면이 떠오른다.
마침 윙윙 소리를 내며 두터운 몸집의 호박벌이 지나간다.
그가 나오는 영화 ‘일 포스티노’를 다시 보고 싶다.
집에 돌아와 아내가 가져온 들풀을 세 종류로 나누어 노끈으로 묶어 창가에 걸어 놓았다. 오종종한 녀석들, 긴 녀석들, 그리고 에델바이스. 함께 싸온 풀과 꽃을 구분하며, 색과 선의 세련됨에 우린 새삼스레 다시 놀란다.
땅의 풀들은 풀대로, 하늘의 별들은 별대로, 구름은 구름대로 사랑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 늙은이의 메마른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비밀의 코드가 드러나 보인다. 무슨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특별한 무슨 얘기나 사연이 있어서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아름다움이며, 사랑이다. 색은 색대로, 선은 선대로, 감촉은 감촉대로 그 자체가 의미이며 감동이다. 꽃도 구름처럼 추상이다.
그래서 꽃을 오래 본다는 것은 우주를 가까이 본다는 것이다.
나 같은 평민은 감히 우주를 가까이 볼 수 없다. 나와 우주는 별개가 아니며 내 머리 위가 하늘이고 바로 우주라고 억지를 부리지 않는 한 하늘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기회를 잡기란 쉽지 않다. 그렇게 아무리 하늘을 오래 쳐다보아야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사진을 하며 꽃은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가까이 볼수록 새롭게 열리는 꽃의 아름다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래, 아주 오래 볼 기회를 여러 번 갖다가 알게 되었다. 꽃을 오래 본다는 것은 우주를 가까이 본다는 것을.
그렇게 시간적인 척도가 공간과 호환될 수 있다는 것을 난 사진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