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대 가까이에 피어나는 봄꽃
- 해마다 봄이 다가올 무렵이면 사람들은 꽃을 보러 나서기 시작한다. 홍매화를 보러 절 마당을 찾고, 진달래나 철쭉, 산수유, 튤립... 등등 쉬지 않고 피어나는 봄꽃들을 찾아 사람들은 멀리멀리 떠나곤 한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 먼길을 다시 돌아오면 결국 그 모든 꽃들이 서울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고궁에 기품 있는 홍매화가 있고 도심 한 복판 사찰의 기와 위에 산수유가 노랗다. 버스만 타도 진달래가 가득 피어난 산이 있고 지하철역을 나서면 푸짐한 개나리 동산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아름다운 고택의 담벼락에 피어난 능소화를 찾아 남녘으로 달려가지 않아도 된다. 가까운 공원에 능소화 터널이 있고, 동네 구청 화단에, 가까운 향교 돌담에, 심지어는 도로변에도 꽃담을 이루어 능소화의 전설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먼 남쪽의 산하에, 그 들판에, 고즈넉한 사찰과 함께, 그 마을 뒷산에서 또는 그곳의 숲에서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사실이다. 스님의 맑은 미소가 봄볕처럼 따사로운 절 마당에 피어난 홍매화가 더없이 아름답다. 몽글몽글 빛나는 대웅전 뜰의 빛망울이 분홍빛 진한 홍매를 돋보이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야생화가 언 땅을 뚫고 나왔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광명의 구름산에 야생화가 지천이다. 남양주 쪽의 운길산과 청노루귀의 검단산이 있다. 차를 몰고 영흥도와 구봉도 쪽으로 잠깐 달리면 겨우내 낙엽더미 속에 묻혀있다가 고개를 내민 노루귀를 볼 수 있다. 아직 녹지 않은 눈 속에서 피어난 노오란 복수초가 환하다. 보물찾기 하듯 찾아낸 손톱만 한 야생화와의 조우가 짜릿하다. 반나절만 나서면 봄의 전령사들을 만날 수 있고 바다가 보이는 자연 속의 봄꽃을 귀한 손님처럼 맞을 수 있다. 겨우내 땅 속에 묻혀있다가 강인한 생명력으로 존재감을 보여주느라 애썼다고 눈인사를 하고 싶은 순간이다. 그 산비탈에 엎드려 봄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수줍은 바람꽃을 향해 렌즈 초점을 맞추며 행복하다. 렌즈를 통해서 바라보는 자연의 섭리와 변화를 만끽하는 기쁨에 감사한 시간이다. 반갑게 마주보고 고맙게 담아내고 조심히 남겨두고 발걸음을 옮긴다. 머잖아 꽃망울을 터트리며 개화를 알릴 매화나무도 추위 속에 싹을 틔우는 게 보인다. 온갖 풍상을 겪어 고목이 되어버린 나무에 봉오리가 맺혀있다. 비로소 나무의 굴곡진 꺾임의 멋도 눈에 들어온다. 굳이 멀리 떠나지 않아도 가까이에 봄이 있고 봄꽃이 싹을 틔우고 있다. 봄볕 드는 버스 창가에 앉아 꽃을 보러 가는 기분을 누려볼 수 있다. 봄 하늘은 푸르고 찬 공기는 상쾌하다. 매년 이런 계절을 맞으며 이 땅에 사는 맛을 비로소 즐겨본다. 뒤늦게 내가 사는 세상이 고맙고 애틋하다. 추위를 견디고 피어난 꽃들이 향기도 좋다고 한다. 매섭던 겨울이 지나고 해마다 이렇게 돌아오는 봄에 다투어 피어나는 봄꽃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네 인생은 감사하다.
- 2018-02-21 16:42
-
- 일본을 구한 조선 도공의 후예 박무덕(朴茂德)
-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가 조선 도공 후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90년이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 외상으로서, 전쟁 회피와 종전 교섭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이 조선인 후예였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름은 박무덕(朴茂德). 조선인 피를 받은 그가 어떻게 그런 높은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걸까? 의문을 풀기 위해 애썼지만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는 철저한 일본인으로 살았던 우수한 관료였다. 그러나 그가 외무성 관료로 활동한 시기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극심했던 시절이어서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사찰로 악명 높았던 일제 경찰이 까다로운 외교관 임용 신원조사를 왜 그토록 허술하게 했을까. 이것이 제일 큰 의문이었다. 그의 출신지와 가계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조선 도공의 후예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일본 제국의 마지막 각료로 패전을 맞을 때까지 그에게는 ‘조선인 후예’라는 천형 같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조선인 피를 가진 사람이 대신이 되어 폐하를 모시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가 두 번째로 외상이 되었을 때 이 같은 괴문서가 정부와 시가지에 뿌려진 일이 있었다. 극우세력이 저지른 일이었다. 군 내부에 동조 세력이 나타나 술렁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옥에 갇히게 되자 사람들은 더 흥분했다. 그의 고향 가고시마(鹿兒島) 현 미야마(美山) 옛집에 돌팔매까지 했다.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이 떨어졌을 때 ‘전범이므로 나쁜 사람’이라는 낙인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을 민족 절멸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사람’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의 옛집에 세운 공덕비 비문에는 “종전(終戰) 공작의 주역을 맡아 대업을 완성하고 일본국과 국민을 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비문은 당시 일본 관방장관 사코미즈 히사쓰네(迫水久常)가 썼다. 그 뒤 그의 집이 있던 자리에는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들어섰고, 그를 연구하는 모임까지 생겨났다. 이러한 현실은 시대 조류의 급격한 역류를 의미하고 있다. 도고 시게노리에 관한 이야기는 도예가 ‘14대 심수관’으로부터 들었다. 1990년 7월 미야마에 있는 그의 가마를 찾아갔을 때였다.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는 옛 이름으로 유명한 ‘사쓰마 야키(薩摩燒)’ 발상지 취재차 찾아간 특파원에게 그는 고향 자랑을 하면서 ‘도고 센빠이(선배)’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외무성 관료가 되어 금의환향한 그가 모교에 찾아왔을 때 “심수관이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심수관이 손을 들고 나가자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도공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을 입구에 “거짓말하지 말라, 지지 말라, 약한 자를 괴롭히지 말라, 도고 선배를 본받자”는 내용이 쓰인 팻말이 세워져 있었던 때라 그는 어깨가 으쓱해졌다고 한다. 평생을 시게노리 현창(顯彰) 사업에 바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은 그가 발의해 사업 추진까지 도맡았다.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의 도자기 작품을 수집해 미술관에 기증한 사람도 그였다. 시게노리의 아버지가 뛰어난 도공이자 유능한 사업가였다는 사실도 세상에 알렸다. 시게노리는 1882년 나에시로가와 심수관의 이웃집에서 박수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수승은 세상을 읽는 눈이 뛰어난 사업가였다. 메이지 정부의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로 사족(士族) 신분을 박탈당하고 관요(官窯)가 폐지되어 나에시로가와 도공 마을에 찬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각자도생의 길을 헤쳐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역경이 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도쿄 요코하마를 무대로 외국인들에게 도자기를 팔고 수출하는 사업에 눈을 뜬 것이다. 그 재력을 바탕으로 가고시마 시내로 이주, 명문 도고(東鄕) 가문의 족보를 사들여 도고 성(姓)을 취득한 그는 당당한 일본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박수승은 ‘도고 주카쓰(東鄕壽勝)가 되었고, 네 살배기 무덕은 ‘시게노리(茂德)’가 되었다. 시게노리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아이였다. 사족 가문 성을 가진 데다 뛰어난 두뇌와 아버지의 재력 덕에 사족 출신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교 가고시마 제일중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족 출신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폐번치현 이후 나에시로가와는 ‘옹기마을’로 불리며 급속히 ‘천민부락’으로 전락했다. 그가 옹기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급우들이 다 아는데 어떻게 사족 대접을 받았겠는가. 대접은커녕 ‘가짜 사족’ 놀림까지 받았다. 도고시게노리기념사업회가 펴낸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그는 입학 후 점점 말없는 소년이 되어갔다. 사정을 알아주는 친구 하나를 제외하고 어울리는 친구가 없었다. 그는 무섭게 공부에만 매달렸다. 영어사전의 단어를 다 외우고 그 페이지를 찢어 씹어 삼켰다는 일화는 가고시마의 전설이 되었다. 손자 도고 시게히코(東鄕茂彦)가 쓴 ‘할아버지 도고 시게노리의 생애’에 나오는 일화는 그의 치밀하고 느긋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소학교 시절 하굣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친구들은 다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 비를 피하는데 시게노리만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시게노리, 뭐하는 거야? 빨리 뛰어와!” 하고 소리쳤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쪽에도 비가 오는걸요.” 그렇게 말하고는 집까지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1901년 제일중학을 졸업한 뒤 그는 가고시마 7고에 입학한다. 문부성 직할 구제 고등학교였다. 학교 이름에 번호가 붙었다 해서 ‘넘버 스쿨’로 불리던 일본의 명문고교였다(1고는 도쿄, 2고는 센다이, 3고는 교토, 4고는 가나자와, 5고는 구마모토, 6고는 오카야마, 8고는 나고야에 있었다). 그해 개교한 7고에는 각 넘버 스쿨 입시에 낙방한 학생들이 몰려들어 경쟁이 치열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재들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사투리가 심해 학교 측은 고심 끝에 가고시마 방언과 표준어로 된 두 가지 안내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시게노리는 7고를 졸업하고 도쿄대학교 문학부 독문학과에 진학한다. 아버지는 법대를 나와 내무성 관리가 되기를 원했지만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던 시게노리는 아버지 염원을 배반했다. 그러나 끝까지 아버지의 소원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졸업 후 외교관 시험에 도전, 3수 끝에 합격의 영광을 얻는다.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외교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를 의식한 탓도 있지만, 고향 선배 외교관의 영향이 컸다. 독일 문학에 몰입했던 대학교 시절의 이상이었던 ‘동서양 문화의 조화’를 실현할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첫 부임지는 만주였다. ‘펑톈(奉天) 일본국 영사관 영사관보’가 공식 직함이었다. 펑톈은 지금의 선양(瀋陽)이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그는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해 열차로 만주에 부임했다. 뒷날 발견된 당시의 메모에는 열차로 한반도를 종주하면서 느낀 감회는 한 구절도 없었다. ‘경복궁’과 ‘한강’. 아무 감상 없이 언급한 고유명사만이 조선과 관련한 메모의 전부였다. 아마도 그의 의식을 지배하던 ‘조선 트라우마’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고 부임을 준비하던 무렵,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수모를 겪는다. 결혼을 약속한 도쿄의 명문가 규수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해온 것이다. 이유는 끝내 밝히지 않았지만 출신성분 조사에서 조선 도공의 후예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게 일본 외교가의 정설이다. 그 뒤로 그는 결혼을 포기하고 살다가 37세 노총각 시절 아이가 다섯이나 딸린 독일인 이혼녀 에디 드 라론드와 결혼, 뒤늦게 가정을 이룬다. 그가 트라우마를 가졌다 해서 조선인의 피를 부끄럽게 여긴 흔적은 없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금의환향했을 때 옥산궁(玉山宮)을 참배한 일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옥산궁이란 나에시로가와에 있는 단군 사당이다. 비록 일본 관복 차림이었지만, 마을 수호신을 찾아 고마움을 표하며 합장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단군의 후예라는 뿌리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외교관 시절의 일화도 있다. 외무성 본부 국장 시절, 퇴근길에 조선인 과장 장철수를 허름한 술집으로 데리고 가 “사실은 내게도 조선인 피가 흐른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게, 인내라는 말을 소중히 하고!” 하면서 동족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독일대사, 소련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거치며 ‘외교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들어온 그는 마침내 외무대신 자리에 오른다. 미국과의 사이에 전운이 감돌던 1941년 대미 교섭 임무를 짊어졌던 첫 외상, 종전 교섭의 사명을 띤 두 번째 외상 직무의 하이라이트는 1945년 8·15 광복 직전의 무조건 항복 결정이었다. 연합국 수뇌들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지만, 전쟁광 집단인 일본 군부는 결사항전 태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덩달아 언론도 연일 군부의 ‘1억 옥쇄론’을 부채질하는 사설을 내보내던 때였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까지 참전한 상황에서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수상을 필두로 한 군부는 미치광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원자폭탄 피해의 심각성을 파악한 시게노리는 천황을 찾아가 전쟁 종결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각료들에게도 같은 주장을 거듭했지만 군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교착상태에서 또 하나의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그날부터 일본 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무조건 항복이냐, 결사항전이냐를 앞에 둔 운명의 갈림길에서 시게노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쿠데타설과 암살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종전 결정의 불가피성을 설득해나갔다. 군부의 위세에 눌려 입을 닫고 있던 각료들은 13일 각료회의에서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라”는 수상의 요구에 12명은 ‘포츠담선언 수락’ 또는 ‘수상 결정에 위임’, 3명은 반대 의견을 냈다. 14일 어전회의에서 천황은 외무대신의 전쟁 종결 의견에 각료 다수가 찬성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나는 연합국의 포츠담회담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했다. 만주 침략으로 시작된 길고 긴 15년 전쟁의 종결 선언이었다. 전후 시게노리는 연합국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을 선고받고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50년 7월 23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68세. 도쿄재판 도중 그에게 조선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아사히신문은 “도고는 꼭 외국인이 일본어를 말하는 것 같은 억양으로 진술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보도했다.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에둘러 강조한 것이다. 한 신문은 ‘과거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지역 출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조선인 출신이라는 낙인이 천형처럼 그의 이마에 찍혀 있었던 셈이다. 1990년 미야마에 처음 갔을 때 시게노리 생가는 폐가처럼 버려져 있었다. ‘A급 전범’이라는 멍에 탓이었다. 마당에는 잡초가 키 높이로 자라 있었고, 대문에는 각목을 X자로 못 박아놔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가 일전되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경제번영의 격양가 속에 자연스레 ‘민족 절멸의 위기에서 일본을 구출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2010년 남규슈 여행길에 들렀을 때 가 보니 생가 터에 아담한 기념관이 들어서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사코미즈 히사쓰네의 비문이 선명하게 보이는 송덕비, 그 오른편으로는 시게노리의 동상이 서 있다. 기념관 안에는 도쿄대학교 시절 시게노리의 모습과 외상으로 지냈을 때의 초상화, 복역 중일 때 가족과 면회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말과 일본말로 나에시로가와 마을과 조선 도공을 설명하는 안내서도 걸려 있다. “나에시로가와에서는 메이지 시대가 끝날 무렵까지 조선의 풍속과 언어가 남겨져 있었다. 조선 도공의 수호신이 된 옥산궁 신사에서는 머나먼 고향을 그리워하는 제사가 행해졌다.” 안내문의 한 줄 내용에 이 마을의 400년 역사가 함축되어 있었다. 도공 박문(朴門)의 업적을 소개하는 안내문에는 “박정관이 제작한 백 사쓰마 도자기가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사쓰마 도자기 이름을 유럽까지 알렸다”고 씌어 있다. 안내문에 나오는 박정관(朴正官)은 근세 사쓰마 야키를 일으켜 세운 사람으로 추앙되는 인물. 정유재란 당시 사쓰마에 끌려온 도공들의 리더 박평의(朴平意)의 후손이다. 시게노리의 손자는 할아버지 일대기에 “할아버지 가문이 박평의 후손이라는 근거는 없지만, 그때 끌려온 도공 가운데 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고, 같은 도공이었다는 점에서 할아버지와 피가 통하는 관계로 본다”고 썼다. 시게노리와 에디 사이에는 이세(いせ)라는 이름의 딸이 유일한 혈육이다. 시게노리는 외동딸을 자신의 비서관 출신 외교관과 결혼시킨 뒤 사위를 양자로 삼았다. 그는 훗날 주미대사를 역임한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다. 사위 겸 양아들 후미히코와 딸 이세 사이에는 아들 쌍둥이가 있다. 1945년생인 손자 시게히코는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나와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아사히신문 기자를 거쳐 워싱턴포스트로 옮겨 오랜 기간 도쿄 특파원으로 지냈다. 동생 가즈히코(東鄕和彦)는 도쿄대학교를 나와 3대 외교관이 되었다. 북미국장 주미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두루 거쳤고 퇴직 후에는 미국, 대만 등지의 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활동했다. 2007년에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강의한 적도 있다. 그는 역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외교관으로 유명하다. 현역 시절 김대중 납치사건, 문세광 사건 등 한일 현안 문제에 관여한 경력이 있으며, 2006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중단을 요구하는 회견으로 일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 2018-01-25 16:45
-
- 전북 김제 시골에 사는 이경주·지관 부부
- 차갑고 흐린 겨울 한낮. 집 앞 황토 구릉지 쪽에서 불어온 맵찬 바람이 나무들의 몸을 흔든다. 이미 누드로 늘어선 초목들은 더 벗을 것도 떨굴 것도 없다. 그저 조용히 삭풍을 견딘다. 좌정처럼 묵연하다. 봄이 오기까지, 화려한 꽃들을 피우기까지 나무들이 어떻게 침잠하는지를 알게 하는 겨울 정원. 봄이면 화들짝 깨어날 테지.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꽃들이 제전을 펼친다지. 6년여를 공들인 정원이다. 정원의 임자는 이경주(61) 씨. 그녀는 귀촌 이후 거의 모든 날들을 정원 가꾸기에 매달렸다. 애초 근사한 정원을 만들고 싶어 귀촌했다. 나무를, 꽃을, 자연을 가꾸고 배우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꿈은 그녀의 오래된 숙원이었다. 하지만 자꾸 미루어야 했다. 도시를 벗어나기 쉽지 않아서였다. 박인환의 시구였던가. ‘인생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인 것.’ 일과 관계의 고리에 코 꿰어 진부한 일상에 안주하기 십상인 게 삶이다. 그러나 꿈꾸지 않고서도 숨 쉴 수 있는 방법이 있던가. 저마다 오아시스 하나를 내심에 담고 사는 게 아니던가. 이 씨는 시골에 살며 정원을 맘껏 가꾸는 일로 티끌세상을 사뿐하게 넘어서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녀에겐 롤 모델이 있다. 미국의 동화작가 타샤 튜더. ‘타샤의 정원’이라는 책으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 타샤는 100여 권의 동화책을 낸 작가이자 지상 낙원과도 같은 정원을 창조한 원예가다. 텃밭을 일궈 거둔 채소와 과일로 특별한 밥상을 차린 요리의 대가이며, 어지간한 생필품은 손수 만들어 조달한 자연주의자였다.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 즈음, 내가 나의 삶을 진정 사랑하며 살아왔던가 하는 회의가 몰려들 즈음, 이 씨는 타샤의 삶과 책에 함빡 필이 꽂혔다. 해서, 타샤의 삶을 닮기로 했다. 타샤가 그랬듯이, 50대 중반에 이르러 시골로 이주했다. 전남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한 그녀는 서양화가로, 미술교사로 살아왔었다. 귀촌을 통해 정원 가꾸기에 일단 신명을 바친 뒤 그림에도 치열하게 몰두하겠다는 게 그녀의 스케줄. “지난 30대부터 50대까지의 인생이 어쩌면 허송세월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회의가 밀려들었어요. 물론 제가 맡았던 일엔 늘 최선을 다했죠. 리더로 뛰기도 했어요. 찬사도 자주 들었어요. 하지만 한 분야를 깊이 파 이름을 날린다거나 부를 누릴 인물은 아니었죠. 나는 도대체 뭘 했지? 이게 진정 나를 위한 삶이었나? 이젠 바꾸자, 육십이 다 됐지만 뭐 늦은 건 아니잖아? 이제라도 한바탕 근사하게 살아보는 거야! 그런 생각, 그런 작심으로 귀촌했어요.” 옳다구나! 내 삶의 행보에 회의가 있고서야 어찌 행복하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늙고 병들어 죽음이라는 놈과 턱 조우하기 이전에 정말 내가 바랐던 삶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는 일이지 않겠는가. 어중간하게 늙은 이제라도 가슴 쿵덕거리는 일에 나를 거침없이 쏟아 붓는 일은 가상한 미담에 속한다. 그녀는 복스럽게도 귀촌 장소를 물색하는 수고는 면제받았다. 유년기에 병아리처럼 뛰놀던 기억이 서린 외갓집에 자리를 잡았으니까. 전북 김제시 백구면의 농촌이다. 이 씨의 외할아버지는 근현대 불교미술의 거장 일섭 스님(1900~1975). 일섭은 자신의 고향인 이곳 백구면에 태고종 사찰 부용사를 창건했다. 현재 부용사의 주지는 이경주 씨 남편인 지관 스님이다. 전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직을 그만두고 돌연 삭발 출가, 아내의 외가 쪽 개인사찰 주지 소임을 맡은 거다. 기혼자가 어이 스님을? 의아해할 수 있지만, 태고종은 승려의 혼인을 허용한다. 남편은 태고종 승려 교수에서 승려로 신분이 바뀐 남편의 뒤를 따라 이경주 씨가 부용사에 딸린 외갓집으로 귀촌한 것은 지난 2012년의 일. 몇 년의 시차를 두고 부부가 차례로 오랜 삶터였던 광주를 벗어났다. 주야로 도 닦는 남편과 사는 일은 수월할까?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라지? 남편에게 부처님 대접을 받아 날마다 평강하신가? “남편이나 저나 서로 원했던 삶을 산다는 데에 아무런 불만이나 불편이 없어요. 선(禪)을 추구하는 남편, 자연과의 교감을 원하는 나. 서로 다른 길이지만 각자가 바랐던 길을 간다는 게 만족스러워요. 소소한 언쟁은 가끔 벌어지지만 피차 적당한 침묵으로 충돌을 피하죠. 새로운 무기랄까, 그런 건 생겼어요. 아니, 스님이라는 사람이 그래서야 되겠어요? 그리 밀어붙이면 꼼짝 못하니까.(웃음)” “선에 마음을 둔 스님은 속세의 뜻을 이미 접었을 테고, 자연으로 쏠린 이 선생의 마음도 비슷한 풍경일 것 같고, 그렇다면 부부가 공히 수행자처럼 사는 거예요? 부군을 따라 덩달아 출가할 생각을 하진 않았나요?” “살아가는 자체가 수행이라는 게 남편의 생각입니다. 사실 자주 참아야 하고, 자주 져줘야 하는 결혼생활만 하더라도 치열한 수행일 수 있겠죠. 그런 기본 인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남편과 저의 길은 달라요. 각자의 개인적인 삶이니까. 출가?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하질 않았어요. 그럴 만한 인재가 되질 못해서.” “인재? 경 읽고, 우렁차게 목탁 치고, 얌전히 좌선할 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녜요? 발심(發心)이 선행한다면.” “반듯한 생활에 자신이 없어서죠. 제가 원래 너그럽고 원만하고 순한 천성의 소유자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유분방한 성향이에요. 매우 온순해 보이지만 삐딱한 기질도 다분해요. 하지 말라는 건 오히려 더 나서서 해보고서야, 아 그렇구나, 그렇게 직접 느끼고 깨닫는 걸 좋아해요. 그림만 하더라도 대담하고 열정적인 작풍을 좋아하고, 뭔가 격한 기복과 강약 리듬이 있는 생활을 선호했어요.” “교직 역시 적성에 맞질 않았겠어요. 범생이들을 길러내자면 교사 자신부터 범생이 시늉을 해야 할 테니까.” “교직을 일찍 그만뒀죠. 저와 어울리질 않아서. 교사란 보편적이고 모범적이고 규칙적인 생활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데 저는 그런 틀에 갇히는 게 싫었어요. 내 개성과 성질을 죽여야 하는 공기가 싫었던 거죠.” 미술교사직에서 물러난 그녀는 요상하게도 정당 활동에 뛰어들었다. 처신도 운신도 교묘하게, 머리도 여우처럼 굴려야 할 정치판. 그 북새판에 가담해 실력을 발휘, 모 정당의 여성부장까지 맡았더란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뒷전에서 구경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일까. 하지만 이제 와 날카롭게 돌아보면 그마저 자신의 진정한 일은 아니었다는 것. 실수나 실패의 기록은 드물고 일련의 성취가 뚜렷했지만, 내가 나를 정말 기쁘게 하는 종목은 아니었다는 것. “마음은 점점 자연으로 흘러갔어요. 원래부터 자연을 사랑하는 성향의 여자라는 걸 깨달았던 거예요. 사람들 속에서보다 자연 속에서 나 자신의 본성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사람과의 대화보다 자연과의 대화가 더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걸 알았던 거죠. 사소한 풀 한 포기를 바라보며 풀꽃아, 너는 왜 그렇게 예쁘니? 이렇게 말을 건넬 수 있는 감성, 맑은 정서, 그런 게 제 본성에 더 가깝다는 걸 알았던 거예요. 이와 같은 자신에 대한 재발견이 귀촌을 추동했죠. 시골에서 정원을 가꾸며 스스로 정직하게 사는 게 인생을 잘 마무리하는 길이라 판단했어요. 그게 교직에 있었던 사람의 도리라는 생각도 했고.” 수굿하고 정겨운 정원의 꽃 잔치 이경주 씨의 정원엔 이제 알아주는 눈들, 일부러 찾아와 감상하는 객들이 많단다. 6년여 동안 땀 흘린 덕이다. 애면글면, 그녀는 온몸을 써 노동을 했다지. 온갖 꽃씨를 뿌리고, 갖가지 나무를 심고, 제초를 하고, 거름을 주고, 전지를 하고, 마치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이 너른 마당을 초목으로 채워나갔다. 정원 전면엔 백련 방죽을 조성했고, 장미나무 터널을 거쳐 연지를 한 바퀴 휘돌 수 있는 산책로를 마련해뒀다. 담장이라는 게 일체 없으니 저편 황토 구릉지와 한달음에 이어지는 조망이 시원하다. 그녀는 인위적 조경을 극도로 배격했다. 최대치의 자연미를 구현한다는 미학을 염두에 두었다. 인위가 만들어내는 허영과 허식에서 벗어나 무위로 돌아가고자 하는 내심을 담았을 수도 있겠지. “어릴 때 보았던 시골의 꽃 풍경을 재현하고 싶었어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동요 ‘고향의 봄’에 나오는 그 곱고 애틋한 경치를 말이죠. 사실 인위적 치장을 할 돈도 없었어요. 비싼 조경수나 조경석을 사들일 형편이 아니었죠. 억척스럽게 모든 걸 자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어요. 손수 정원용 도예 작품들을 만들어 슬쩍슬쩍 꽃밭에 배치했고, 무너진 폐가에 뒹구는 돌이나 기왓장, 인삼밭가에 버려진 폐목을 수시로 손수레로 날라 조경 소재로 재활용했어요.” 자로 잰 듯 치밀하게 꾸민 인공 정원이나, 규모로 압도하는 수목원과 달리 이 씨의 정원은 스산한 이 겨울에 보더라도 각별히 아기자기하고 수굿하고 정겹다. 꽃들이 연달아 피어나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방문자들이 즐비하단다. 그녀는 더욱 많은 사람들을 꽃 잔치에 불러들일 작정이다. 내친 김에 꽃과 자연, 문화와 예술이 남실거리는 공간으로 진급시킬 계획이다. ‘야가(野歌)문화예술촌’이라는 이름도 이미 지어두었다. 뜻을 같이 하는 도시의 지인들을 인근에 귀촌시켜 함께 거사를 도모할 작정이다. 생활도 낭만도 꿈도 도시에서보다 자연의 원초적 숨결이 뜨거운 시골에서 그 성취 가능성이 한층 높다는 게 이 씨의 지론. 그녀는 자연의 그 무엇에 매료를 느낄까? “자연 안에 사는 생명들의 자유스러움이랄까, 태연한 생태와 순환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무상의 혜택이죠. 사람을 순하게 만들고, 안심을 부여해요. 말없는 초목들과의 대화는 얼마나 값진지요. 그건 사람들과의 영혼 없는 대화보다 진실하고 절실해요. 결국은 자기 성찰에 이르게 되죠.” “나름의 파란만장을 겪으며 반백 년 이상을 산 사람들의 배후엔 저마다의 상처가 아른거리죠. 자기성찰이 치유의 길일까?” “일테면, 불가에선 남들에게 미소를 건네는 것만으로도 보시를 했다 보는데요, 그러나 그게 쉽지가 않아요. 자연 속에 살다 보면 어느 정도는 그게 자연스럽게 됩니다. 귀촌의 이점은 한두 가지가 아녜요.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다질 수 있고, 생활비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고, 영감이 솟구치고, 성숙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으니까. 도시에서 부대끼며 허겁지겁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뭐람.” 도시라고 악조건의 수렁일 리가. 그러나 자연에 삶의 한 자락을 슬며시 걸치고 살아가는 귀촌생활이란 자주 마음을 돌보게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겠지. 삶의 고통을 다루는 기술엔 늘 초심자에 불과한 우리에게, 자연은 성찰의 눈을 달아주기도 하니까.
- 2018-01-08 15:29
-
- 수종사 삼정헌(三鼎軒)
- 한국 시니어블로거 협회에서 주관하는 토요3시간 걷기 행사가 남양주에 있는 수종사에서 있었다. 경의중앙선 열차를 타고 운길산역에서 내려 도보로 수종사까지 한 바퀴 도는 것이다. 필자는 며칠 동안 감기 기운으로 망설이던 끝에 전 날 저녁에 참석하기로 최종 마음을 정했다. 상봉역에서 만난 회원들이 경의중앙선 운길산역에서 내렸다. 미리 도착한 회원들까지 11명의 회원들이 합류하여 수종사를 향해서 걷기 시작하였다. 해발 610m 운길산 중턱에 자리 잡은 수종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사찰이다. 영하5도의 쌀쌀한 날씨에 살랑살랑 불어대는 산바람이 제법 매섭게 옷깃을 파고들었다. 운길산 역에서 수종사로 가는 길은 계곡의 등산로나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가파른 경사로를 힘들게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필자 일행은 처음에는 계곡의 산길을 따라 오르다가 중간에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섰다. 등산로와 산비탈 여기저기에는 적지 않은 눈이 쌓여있어 여간 미끄럽지가 않았다. 헐벗은 겨울 산 나뭇가지 사이로 옹알옹알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언덕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땀이 차오른다. 이 길은 필자에게는 지울 수 없는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단풍이 곱게 물들던 10여 년 전의 어느 가을날, 지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이 곳을 찾았다가 수종사 입구에서 운명처럼 만난 여인과 불타는 사랑에 빠졌던 필자의 지인이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다. 추억을 꺼내 두런두런 음미를 하다 보니 어느덧 수종사 일주문이 눈에 들어올 때 쯤엔 등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운길산 수종사는 대한불교조계종 봉선사의 말사로 창건연대의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세조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부스럼을 앓던 세조가 오대산 상원사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깨끗이 낫고 한강을 따라 환궁하는 길이었다. 양수리까지 오니 밤이 이슥해 쉬어 가는데 운길산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신하가 알아보니 천년 고찰 터 암굴 속에 십팔 나한상이 앉아 있고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는 것이라 했다. 세조는 이곳에 절을 복원해 수종사라 부르고 이 은행나무(500년)를 하사했다고 한다. 500년 수령 느티나무 두 그루의 환영을 받으며 경내로 들어서자 겨울 속에 빠진 사찰의 고즈넉함이 불쑥 다가왔다. 경내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나니 마당 앞에 아담하게 지어진 전각 다실, 삼정헌(三鼎軒)이 눈에 들어왔다. 필자 일행은 툇마루에 배낭을 벗어놓고 다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료다실 삼정헌에서는 약수를 끓여 이곳을 찾는 중생들에게 차를 제공하고 있었다. 투명하고 탁 트인 통유리 밖으로 두물머리의 풍경을 감상하며 녹차 한 잔을 여유롭게 마실 수 있는 삼정헌은 수종사만의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은은한 녹차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정오를 갓 지난 말간 겨울 햇살이 섬섬옥수처럼 다실 안을 비추고 있었다.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경내까지 당도하느라 이미 땀으로 촉촉해진 몸이 한기(寒氣)가 엄습하기 이전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 곳 삼정헌에서 보살님의 녹차 공양은 덤으로 맛볼 수 있는 행복이다. 시원한 전망과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은 마음에 찌든 때까지 말끔히 거두어간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도란도란 둘러앉아 우려낸 녹차 한잔을 나누면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뻑뻑했던 피로는 가시고 젖어있던 속옷도 대충 말라가고 있었다. 운길산 수종사를 한번쯤 찾았던 사람들은 이런 맛에 잊지 않고 다시 이 사찰을 찾아오곤 하나보다. 따뜻한 다실 분위기에 공짜로 차까지 얻어마셨으니 어찌 고맙지 않을 손가? 나오는 길에 시주함에 소박한 정성을 담았다. 삼정헌에서 감미로운 시간을 보낸 필자 일행은 하산 길에 올랐다. 낮에 잠깐 녹았던 길이 저녁이 되면서 다시 살얼음이 살짝 얼어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내리막길에서 우려하던 일이 기어코 일어나고야 말았다. 2명의 대원이 급경사로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는데, 부축을 해서 일으켜 놓고는 하늘을 향해 네 팔 벌린 나무 같다고…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몸과 마음이 한없이 움츠러드는 겨울, 12월의 첫 주말에 시니어 회원님들과 더불어 운길산 수종사를 찾아 활기차고 좋은 시간을 보냈다. 엄동설한 맹추위에 대항하여 가슴을 활짝 펴고 씩씩하게 걸었던 회원님들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 2017-12-18 09:38
-
- 전광석화 같았던 나고야 성의 축성과 폐성
-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임진·정유 국란의 왜군 출진기지는 규슈(九州) 서북 해안 나고야(名護屋) 성이다. 일본 중부의 중심도시 나고야(名古屋)와 구별하려고 히젠(肥前)이란 옛 지명을 붙여 ‘히젠 나고야’라 불리는 곳이다.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에서 버스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40여 분 달리면 닿는 요부코(呼子) 포구 언덕 위에 있다. 굴곡이 심한 해안선 깊숙한 만(灣)에 얼마든지 배를 숨길 수 있고, 조선과의 거리가 제일 가까운 지리(地利)를 고루 갖추어 옛날부터 왜구의 소굴로 유명했던 곳이다. 26년 만에 다시 찾아본 나고야 성은 그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흘러간 옛 노래 ‘황성옛터’를 연상시키는 무너진 성벽이 옛날 그대로였다. 일본이 군신으로 떠받드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글씨로 ‘名護屋城址’라고 쓴 비석도 같은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헛꿈을 조롱한 쇼와(昭和) 시대 하이쿠 시인 아오키 겟토(靑木月斗)의 시비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수십 년이 걸린 성터 발굴·복원사업이 끝났다지만 겉보기에 변한 것은 없었다. 주말 낮인데도 탐방객 발길이 뜸해 적막하기만 했다. 성터 입구에 자리 잡은 박물관과 그 앞에 조성된 상가만이 옛날에 없었던 건물이다. 도고 헤이하치로 글씨로 된 성적(城跡·성터) 비는 1930년, 겟토의 시비는 1940년에 세워졌다. 그러나 두 돌의 언어는 사뭇 다르다. 도고의 비에는 옛 성터라는 글자뿐이지만, 그것이 세워진 시대와 세운 자의 뜻에 히데요시의 대륙 정복 야망을 그리는 마음이 오롯이 드러나 보인다. 1930년이라면 일본의 만주 침략 야욕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다. 내무성이 그 돌을 세우면서 러일전쟁 영웅에게 글씨를 부탁한 가슴 밑바닥에는 일본인들이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존숭하는 뜻이 꿈틀거렸으리라. 1940년에 세워진 겟토 시비는 히데요시의 망상을 비웃는 것 같다. “다이코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지만 바다에는 안개만 자욱해.” ‘다이코(太閤)’란 천황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관백(關白) 자리를 아랫사람에게 물려주고 상왕처럼 물러앉은 이를 말한다. 히데요시는 조카(秀次·히데쓰구)에게 양위한 뒤에도 만사를 제멋대로 한 사람이다. 그런 권력자가 아무리 대륙 진출 야망으로 용을 써도 그 꿈은 안갯속에 가물가물하다는 뜻으로 읽히지 않는가. 실제로 성터에서 바라본 현해탄 바다에는 쓰시마의(對馬島) 모습조차 어렴풋했다. 26년 만의 탐방객을 놀라게 한 것은 성터에 우거진 고목나무 가지에 달려 있는 올레길 리본이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천수각 가는 길가 나뭇가지에 달린 것이었다. 반가워 카메라를 들이대니 일본인 탐방객이 “그게 무엇이기에 사진을 찍느냐”고 물었다. 한국 제주도 올레길 표시라는 말에 그들은 “천수대 터에도 많다”고 알려줬다. ‘제주 올레가 일본과 몽골에 수출되었다더니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 너무 반가웠다. 그의 말이 맞았다. 금빛 찬란한 천수각이 있었다는 천수대 터에는 쇠막대기로 만들어 세운 올레 표지물도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가라쓰에서 규슈 서북단 히라도(平戶) 섬에 이르는 해안선 구간에 올레길이 조성되어 한국인 여행객에게 인기가 있다 한다. 나고야 성을 찾아가는 도로표지판마다 한글이 병기된 것도 그래서구나 싶었다. 7년 동안 나라를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했던 왜란 출진기지가 평화의 길이 된 것을 400여 년 세월의 작용이라고만 보아 넘기기에는 좀 미진한 뒷맛이 남았다. 임진왜란 400주년 기획 시리즈 취재 차 나고야 성에 갔던 1991년에는 유적지 발굴사업이 한창이었다. 옛 성터를 정비해 관광자원으로 삼기 시작한 때여서 일본인 관광객 발길이 잦았다. 그 르포기사가 신문에 보도된 것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차츰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 규슈 관광의 인기 코스가 되었으니, 세월의 두께를 새삼 음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모습 그대로 두는 것이 역사의 참뜻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무너진 성을 보존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특파원을 안내해준 진제이(鎭西) 초(町·일본의 행정구역 단위) 직원은 복원사업이 현상을 그대로 두고 발굴만 하는 것이라 했다. 히데요시 이후 염전·반전사상의 결과로 폐허가 된 성을 그대로 두는 것도 역사의 뜻이라는 것이었다. 정작 옛 자취를 찾게 된 것은 나고야 성 주변에 촘촘히 자리 잡았던 130여 개 번국(藩國)의 진터다. 독재자 히데요시는 휘하 영주[大名]들에게 전쟁기간 중 출진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 아래 대기하도록 요구했다. 출진 후의 병력보충 병참 등 임무를 강제했기 때문에 전국의 영주들은 수많은 예비 병력을 거느리고 눌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진터들은 전후 폐허가 되었다가 사유지로 바뀌어 흔적마저 감추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복원사업의 큰 틀은 그 땅을 사들여 옛 모습의 윤곽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물관을 지어 전쟁의 배경과 경과, 그리고 양국 평화의 지향점을 모색하고 홍보하자는 것이었다. 나고야 성은 축성과 폐성이 모두 전광석화 같았다. 인구 20~30만 명의 거대한 병영도시 나고야 성은 번개같이 건설되어, 또 그렇게 해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최고 권력자가 사라지고 세상이 바뀌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건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처럼 철저하게 무참하게 파괴된 일은 흔하지 않으리라. 일본 통일의 꿈을 이룬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를 손아귀에 넣어 동아시아 패권을 잡겠다는 망상으로 1590년부터 대륙 침략을 꿈꾸기 시작한다.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영토를 넓혀 부하들에게 봉토를 나눠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 계획에 비판적이던 동생 히데나가(秀長)가 죽고, 천금보다 귀히 여기던 외아들 쓰루마쓰(鶴松)마저 잃어 심신이 극도로 피폐했던 1591년 8월, 그는 규슈 지방 영주들에게 ‘대륙 경영 사업’ 개시를 선언하고 적지에 출진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한다. 당시 일본에 와 있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에는 그때 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관백(히데요시)이 조선으로 가장 쉽게 건너갈 수 있는 항구가 어디인지를 묻자 가신들은 나고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가 있는데, 수천 척의 선박이 안전하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전국의 영주들을 나고야에 집결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각자의 부담으로 궁전과 해자와 저택으로 꾸려진 화려하고 넓은 성채들을 조속히 축조하되, 교토에 지은 것보다 뒤떨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문장에서 주목할 것은 교토에 뒤지지 않는 화려한 궁전과 성채를 영주들 각자의 부담으로 건설하라는 ‘후신(普請) 명령’이다. 후신이란 불교에서 민간에 널리 시주를 청해 불당이나 탑을 짓거나 수선하는 사업이란 뜻이지만, 절대 권력자가 영주들에게 갖가지 토목·건축사업을 시킨 일을 뜻했다. 나랏돈은 10원도 쓰지 않고 국책사업의 돈과 인력을 영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아무리 봉건시대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횡포와 전제가 있었는지 흥미롭다. 프로이스는 영주들이 꼼짝 못하고 명령을 수행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다른 영주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이었다. 작업 중 사소한 부주의를 저지르면 감독들에게 공개적으로 질책을 당하게 되고, 그것이 관백에게 무능력자로 낙인찍혀 추방당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축성 책임자는 히데요시의 오른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공사 책임자는 뒷날 이 지역 영주가 된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澤廣高)였다. 원래 있었던 가키조에(垣添) 성을 헐어 규모를 크게 확장하고, 사방 3km 이내에 130여 번국 영주들의 진영(陣營)을 건설하는 일본 역사상 초유의 대토목 공사였다. 성 공사는 착공 6개월 만에 완공되었고, 영주들의 진영이 완성되는 데는 8개월이 걸렸다니 얼마나 공사를 서둘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본성 공사는 규슈 지역 20여 명의 영주들이 비용과 공력을 분담했고, 나머지 공사는 각 영주들 책임 아래 시행되었다. 해발 89m 나지막한 구릉 꼭대기에 혼마루(本丸)를 짓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5층 규모의 천수각을 세웠다. 그 아래로 니노마루, 산노마루 등 부속시설과 병사를 배치하고, 주변에 견고한 석축을 쌓아올려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 외성은 주변에 해자를 둘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전형적인 왜성이었다. 성의 총면적 50만 평은 일본 최대의 오사카 성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성의 크기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시대 인구 30만을 가진 도시는 오사카 말고는 없었다. 성내에는 히데요시의 측실(廁室)을 위한 사찰과 다실, 전통 가무극 ‘노(能)’ 공연장까지 있었다. 그 시대에 그려진 병풍도에는 성내의 건물 약 70여 동, 그 아래 조카마치(城下町)의 일반 백성 주택과 점포 260여 동, 진영 시설 70여 동 등 400여 동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나고야는 외국인 왕래가 잦은 국제도시이기도 했다. 병풍도에는 명나라 사절단 40여 명과 포르투갈인 등 260여 명의 통행인이 그려져 있는데, 이 가운데는 조선에서 잡혀온 포로들을 사들여 해외로 팔아넘기는 노예 상인들도 있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정희득(鄭希得)은 실기(實記) 에 “나고야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의 반 이상이 조선인”이라고 썼다. 그들 대다수가 붙잡혀간 사람들이었다. 통행인 가운데는 남자들 소매를 잡아끄는 유녀(遊女)의 모습도 보인다. 해안 거리에는 유곽과 술집이 줄지어 있고, 각 번의 진에서는 수많은 사졸이 할 일 없이 소일하고 있었다. 노예장사로 재미를 본 외국인들도 돈을 풀어 즐거움을 샀을 것이다. 발굴 작업 중 천수각 주변에서는 금박기와편이 많이 출토되었다. 벽면뿐 아니라 기와에도 금박을 입혀 금빛으로 번쩍이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성의 건설과 전쟁 수행에 시달린 일본 민중의 고난이 기록으로 남았다. 병력 1만5000명을 할당받은 사쓰마(薩摩) 번(藩·제후가 통치하는 영지)의 경우 7000명이 넘는 아시가루(足輕·보병)와 6000명이 넘는 인부를 징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모두 농·어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었다. 갖가지 무기와 장비, 병량과 말먹이, 군수품 및 병선 조달과 운용도 백성들 몫이었다. 백성들 고난은 그것으로도 모자랐다. 히데요시는 곧 조선으로 건너가겠다면서 중간에 머물 이키(壹岐) 섬과 쓰시마(對馬島)에도 성을 쌓고 궁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려 부하들과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키 섬에는 아직도 그때의 성터가 뚜렷이 남아 있다. 백성들의 피땀을 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 ‘아방궁’을 지은 것이다. 침략군 출진은 1592년 3월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 대부터 하시바 히데카쓰(羽柴秀勝)의 9번 대까지 총출진 병력 15만8800명, 출진을 도운 예비부대와 병참요원 등을 합친 총인원은 30만5300명으로 기록돼 있다(역사군상 시리즈 ). 비탈진 구릉 도시에 인파가 북적거렸을 날에 비해 오늘의 정적(靜寂)과 정일(靜逸)은 너무 대조적이다. 히데요시는 침략군이 떠난 3월 26일 교토를 떠나 4월 25일 나고야에 착진(着陣), 1년을 머물며 전쟁을 지휘했다. 그 기간 협상 사절로 온 명나라 유격 심유경(沈維敬)을 접견하기도 하고, 여러 장수들이 조선에서 보내오는 보고서와 진귀한 전리품을 받아들고 천하를 얻은 듯 기고만장했다. 심유경의 거소는 명군 유격이 머물던 곳이라 ‘유게키마루(遊撃丸)’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런 영화의 무대였던 나고야 성은 전후 곧바로 참담하게 해체되었다. 히데요시가 죽고 가스미가세키 패권 전쟁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전투에 공을 세운 데라자와 히로타카에게 히젠 나고야 땅을 영지로 주었다. 성을 축조할 때 공사 총감독으로 기여하고 조선에 출병한 공로까지 인정한 것이다. 데라자와는 1602년 나고야 성을 허물고 가라쓰 해변에 자신의 성을 축조했다. 조선 침략의 상징물인 그 성을 허문 것은 일개 영주의 결정이 아니었다. 조선과의 무역 재개와 친선관계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이에야스는 성을 허물어 전쟁에 반대했던 자신의 뜻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전쟁 기간에 아버지와 남편을 잃었거나 오래 빼앗겼던 민중은 전쟁에 치를 떨었다. 7년 동안 헐벗고 굶주린 것이 모두 전쟁 탓이라 여겼던 민중의 염전사상(厭戰思想)은 하늘을 찔렀다. 반전사상과 염전사상은 지금 허물어진 성터 위에 아기 불상의 모습으로 남았다. 데라자와는 그렇게 허문 성석과 건물의 자재를 고스란히 자신의 성 쌓기에 사용했다. 마쓰우라(松浦)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나지막한 구릉 위에 한껏 멋을 부려 쌓아올린 가라쓰 성은 멀리서 보면 학이 나래를 펴고 춤을 추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무학성(舞鶴城)이라 불린다. 그렇게 헐린 나고야 성은 얼마 후 일반 민중의 공격으로 또 한 번 상처를 입는다. 163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독교 탄압과 가혹한 조세가 원인이었던 시마바라(島原) 민란 때였다. 성터 입구 ‘나고야 성 박물관’ 현관 앞에는 제주도 돌하르방 부자가 서서 탐방객을 맞아준다. 일본인들은 이 낯선 ‘수문장’ 앞에서 반드시 발길을 멈추고, 더러는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 박물관의 성격이 ‘일본열도와 조선반도의 교류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전시물이 한국 고미술의 상징인 반가사유상 복제품이다. 7세기 중국과 조선반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 처음 율령 국가가 세워졌다는 설명문이 그 아래 붙어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이 거북선 모형이다. 실물보다 많이 축소된 것이지만 여수나 통영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다. 문을 들어서 처음 맞닥뜨리는 공간에 자리한 거북선 옆에는 당시의 일본 전함 아타케부네(安宅船) 모형과 두 나라 병기, 무복, 전황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전쟁을 조명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 2017-12-06 09:27
-
- 아차산 보물찾기
- 입동을 지나서 겨울로 가는 길목이다. 희망설계재능기부연구소 회원들과 광나루역에 모여서 아차산에 올랐다. 서울 광진구와 경기 구리시에 걸쳐 있는 나지막한 아차산(295.7m)은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도심 속 여행지다. 전철 5호선 광나루역이나 아차산역, 7호선 용마산역에서 바로 오를 수 있다. 한강과 도시 전경이 어우러진 전망과 흥미로운 유적이 많아 사시사철 사람들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차산은 수고에 비해 얻는 보람이 큰 곳이다. 야트막하고 산세가 험하지 않아 누구나 오르기 쉽고, 등산로가 잘 닦여 아이들과 다녀오기도 좋다. 아차산을 등반하는 코스는 여러 개인데, 아차산 생태공원을 거쳐서 가는 아차산성길과 아차산정상길, 영화사 쪽에서 오르는 고구려정길을 많이 이용한다. 연결된 용마산과 함께 산행을 즐기기도 한다. 아차산성길은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숲 속 오솔길로, 야자 매트가 깔려 걷기가 한결 수월하다. 숲 사이로 복원에 한창인 아차산성(사적 234호)도 살짝 보인다. 아차산정상길과 고구려정길은 오르내리기 편한 나무 계단이다. 곱게 물든 단풍을 감상하며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새 나지막한 봉우리가 이어진 산등성이에 닿는다. 이곳이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각축장이었던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보루성이라고도 불리는 보루는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낮은 봉우리에 쌓은 소형 석축산성으로, 산성에 비해 규모가 작은 군사시설을 말한다. 아차산 보루군은 분포지역으로 볼 때 고구려가 5세기 후반에 한강유역을 진압한 후 신라와 백제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긴 6세기 중반까지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정세를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고구려정, 해맞이광장, 아차산5보루 등 전망 좋은 곳이 늘어서 굳이 정상까지 가지 않아도 아차산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 한강 쪽으로 사람이 잘 다니지 곳에 ‘3층 석탑’ 이정표가 있다. 보통 석탑은 사찰이나 절터에 무리지어 있다. 헌데 이탑은 보통 사람은 알 수 없는 곳에 홀로 서있다. 역사에 조예가 깊은 박주순 소장의 안내를 받아 풀숲은 한참 걸어서 겨우 찾았다. 마치 손으로 주물러 놓은 것처럼 생겼다. 오늘 찾는 아차산 보물이다. 해맞이광장은 교통 접근성이 뛰어난 곳이다. 한강과 간이 어우러진 손꼽히는 명소다. 새해 일출관란 계획을 새워보기를 권하고 싶다. 재밌게도 고구려정과 같이 남서쪽으로 시야가 트인 곳에선 서울 시내가, 동쪽이 바라보이는 곳에선 구리시 전경이 같은 듯 다른 모습을 뽐낸다. 아차산 5보루에 서면 모두 아우르는 환상적인 파노라마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아차산은 일출과 일몰이 좋고 야간 산행도 가능해, 더 풍성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아이들과 함께 나선 길이라면 아차산 자락에 조성된 아차산생태공원을 둘러보자. 연꽃과 수련이 자라는 습지원, 나비정원, 자생식물원 등 여러 가지 생태 체험 학습 공간을 무료로 운영한다. 아차산 정상을 거쳐 영화사 쪽으로 하산하였다. 해물파전과 막걸리 한사발로 즐거운 산행을 마무리하였다.
- 2017-11-24 14:02
-
- 람사르 고창갯벌에 가보았나요?
- 한때 갯벌 살리기를 운동이 한창이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갯벌을 막아 새로운 땅을 만드는 일이 나라와 지역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는 미명 하에 계속 진행되었고 정부와 대기업을 향해 힘겨루기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새만금 간척 사업을 반대하던 시민단체나 종교단체의 갯벌 살리기를 염원하는 목소리를 국민들은 흘려듣지 않고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갯벌 간척사업이 영토확장이라 여겼던 정부도 갯벌 살리기를 지원하고 지자체에서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자연과 환경을 살리려는 사람들의 희생을 무릅쓴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전북 고창에 가면 아름다운 자연 속에 갯벌이 잘 지켜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필자가 그곳을 갔을 때는 기온이 뚝 떨어지고 바람이 몹시 불었다. 고창은 고즈넉한 사찰인 선운사나 메밀꽃과 해바라기 그리고 청보리밭으로 많이 알려진 학원농장으로 사진 찍으러 여러 번 갔었지만 갯벌을 찾아서 온 적은 없었다. 마침 좋은 기회를 얻어 직접 갯벌에 다가가 이해하고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을 가져보았다. 갯벌에 나가기 전에 지역 주민들이 마련한 교육프로그램을 관람하고 함께 즐기는 시간이 있어서 유익하고 재미있었다. 람사르 고창 갯벌센터에서 보여준 고창의 갯벌을 위한 주민들의 적극적인 노력은 가히 감동적이다. 갯벌생태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직접 손으로 만들어낸 교육자료나 동화 구연과 해산물 쿠기 만들기와 같은 체험과 실습을 위한 섬세한 준비까지 모두 직접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모두 함께 먹었던 점심식사도 고창 만돌마을에서 생산된 굴과 바지락을 넣은 떡국과, 갯벌에서 채취한 김을 인심좋게 넉넉히 넣어 만든 김전은 고창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였다. 고창갯벌에서는 갯벌체험 프로그램도 있다. 갯벌 전용 차량으로 15분 정도 달리면 갯벌에 내릴 수 있다. 이곳에서 아이들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만끽하며 바지락을 캐고 바닷바람에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장화를 신고 갯벌을 걸으며 주름진 물결무늬의 신비함을 생생히 들여다보며 저무는 바다에 서 보는 경험은 풍요롭고 짜릿하다. 바다만큼이나 드넓은 고창갯벌은 람사르 습지로 지정 등록된 곳이다. 람사르는 생태나 환경 등에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습지를 보전하고 인류와 환경을 위해서 체계적으로 보전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협약이다. 그야말로 세계가 인정한 청정 갯벌인 것이다. 갯벌의 보전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직접 광활한 갯벌에 들어와 보니 스스로 조용한 다짐을 하게 되는 기회가 된다. 일상에서 오염물질을 무심히 방출하지 말아야겠고 생명체를 간직한 이 땅을 소중히 여겨야 함을 말이다. 붉게 노을이 내리는 갯벌 한쪽엔 김 포자를 붙여 키우는 그물인 김 발장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어민의 손길이 바쁘다. 바지락과 백합 등의 생물들이 지천이던 고창갯벌에 희귀종의 염생식물과 검은 머리 물떼새가 날고 있던 갯벌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 2017-11-22 19:00
-
- 북한산 백운대 오르기
- 북한산 백운대 산행을 위하여 새로 개통한 북한산우이선 경전철을 탔다. 좌로 흔들, 우로 뒤뚱거리면서 무인 경전철은 잘도 달렸다. 사람이 만든 꼬마 전철은 운전원도 없이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도선사 입구 종점이 말끔하게 새 단장을 하였다. 산행인파가 근래에 보기 드물게 많았다. 능선을 따라서 지원센터를 거쳐 하루재에 이르렀다. 가을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산장을 지나서 떠밀리듯 천천히 올랐다. 위문을 지나 정상까지는 밧줄을 붙잡고 바위를 오르는 본격적인 등반이다. 오르는 사람과 내려오는 등산객이 뒤엉켜서 정체가 발생하곤 하였다. ‘우측보행’ 누군가 부르짖지만 이내 인파에 묻히고 말았다. 서다가기를 수없이 반복하였다.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대 정상은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려웠다. 친구와 품앗이로 기념사진 한장 겨우 남겼다. 미세먼지로 하늘이 희부옇다.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것 같다.맞은편의 깎아지른 듯 인수봉이 울긋불긋 단풍에 둘러싸여 있다. 암벽등반가들이 꽃술처럼 매달려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북한산 국립공원은 1983년에 1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 면적은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걸쳐 78.5㎢에 이른다. 우이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된다. 북한산국립공원은 보기 드문 도심 속의 자연공원으로 연평균 탐방객이 500만에 이르고 있어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북한산 기슭에는 세검정과 성북동·정릉·우이동 등 여러 계곡들이 있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주요 암봉 사이로 수십 개의 맑고 깨끗한 계곡이 형성되어 산과 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빚어내고 있다. 삼국시대 이래 과거 2,000년의 역사가 담겨진 북한산성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문화유적과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선사를 비롯하여 태고사·화계사·문수사·진관사 등 많은 사찰, 암자가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비봉에는 신라 진흥왕이 세운 진흥왕 순수비의 복사본이 있다. 이는 신라 진흥왕이 세운 순수척경비 가운데 하나로, 한강 유역을 신라 영토로 편입한 뒤 진흥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 진흥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이유 등이 기록돼 있으며, 대부분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진흥왕 순수비는 1972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북한산은 백운대(837m)·인수봉(810m)·만경대(800m) 세 봉우리가 마치 뿔처럼 날카롭게 솟아있는 데서 유래해 고려시대부터 근대까지 삼각산이라 불려졌다. 1915년 조선 총독부가 북한산이란 명칭을 사용한 이후 1983년 북한산국립공원 지정과 함께 북한산이란 명칭이 공식화됐다. 북한산성 입구로 내려가는 길은 울긋불긋 단풍이 한창이었다.
- 2017-11-15 21:50
-
- 오랜미래신화미술관장·화가 김봉준, 문화 창조는 비주류가 한다
- 하고 싶은 말이 매우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교과서에서도 풍문으로도 들어본 적 없는 민족의 뿌리와 신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남자. 탁성에 파장 깊은 목소리는 빠르게 내달렸지만, 여성 방청객이 많았던어느 날의 분위기와 맞지 않았다. 투박하고 투쟁적이었다고나 할까?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끝마치지 못한 남자에게 다가가 시간을 드릴 테니 못다 한 뒷얘기를 해달라고 청했다. 시대의 풍파를 억척스럽게 이겨낸 예술가이자 오랜미래신화미술관장 김봉준(金鳳駿·63)은 한 일도 또 할 일도 많다. 트라우마의 근원을 찾아 헤매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서울에서 자가용으로 두 시간 정도 거리. 찻길을 지나 숲길, 논길, 밭길을 거쳐 다다르면 옛 기억을 찾아 떠나는 곳, 오랜미래신화미술관(이하 신화미술관)이 있다. 김봉준 관장이 이곳에 터를 잡은 지도 24년째다. 서울 토박이 김봉준 관장은 도시 삶의 피로감을 피해 시골로 탈출을 감행(?)했다고 말을 꺼낸다. “나는 자유롭게 살아왔어요. 직장생활도 해본 적이 없고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 질서에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불편하고요. 생존하려고 적응하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죠. 그러니 20년 넘게 여기서 살아온 것입니다.” 강원도 산골까지 왜 왔는지에 대해 스스로 자문하다가도 ‘천생 팔자이고 운명’이라는 답에 이른다. 그리고 세월의 흔적과 아픔 또한 신화미술관에 담으며 살아왔다. “나를 치유하고 거듭나지 않았으면 온전하게 살지 못했을 겁니다. 망가졌겠죠. 죽었거나 정신병자가 됐거나. 신화미술관 건물도 제가 지었어요. 꿈을 이뤄보겠다는 생각에 돈 한 푼 없이 맨땅에서 시작했습니다.” 신화미술관은 김봉준 관장의 안식처이자 낙원이다. 어릴 때부터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렸기 때문. 이 상처를 끊어내기 위한 여정의 결과가 신화미술관에 깃들어 있는 셈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많이 맞고 자랐어요. 그게 트라우마가 됐죠. 한국전쟁 직후 세대인데 전쟁으로 인한 폭력 문화가 그대로 계승된 사회였습니다. 군인 출신 아버지에 군대를 경험한 선생이 있는 학교. 체벌이 너무 쉽고 당연한 사회였죠.” 김봉준 관장은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 2차 폭력을 가하는 야만적 해소 대신 트라우마를 풀 수 있는 예술을 택했다. “‘예술가가 되고 싶다’라기보다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이 더 컸죠. 딴 전공은 생각해본 적 없이 홍대 미대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입대한 군대에서도, 심지어 민주화 운동을 할 때도 폭력은 계속됐다. “같이 운동하는 선배한테도 그런 일을 당했어요. 예술을 하는 입장이니 마음도 여리고 폭력을 당한 이후에 그것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것으로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 눈뜬 것이 바로 탈춤이었다. 역동적인 예술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학교에 동아리를 만들었다. ‘굿’은 풍물 자체이자 문화의 뿌리다 “제가 그때 풍물에 미쳤어요. 홍대 탈춤반을 데리고 1970년대에 우리 가락이 있던 곳을 찾아서 답사를 다녔어요. 전라북도 남원, 진안, 임실이 풍물로 가장 유명해서 찾아갔습니다. 남원 산골에 갔더니 할아버지가 ‘농악’이란 말을 못 알아듣더라고요. 열심히 설명을 해드렸더니 그제야 ‘굿, 우리 굿이 셌지’라고 하셨어요.” 농악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우리 가락을 깎아내려서 부른 말이었다. ‘굿’의 의미에는 무당의 굿만 있는 게 아니었다. “풍물, 마을 전체를 합쳐서 하는 큰 행사를 대동굿, 별신굿이라 불렀어요. ‘굿 구경 가자’ 하는 것이 예술굿이었고, ‘두레굿하자, 풍장굿하자’ 하는 것은 노동굿이었죠. 노동의 조직만이 아니라. 이 마을의 난리굿이 셌어. 의병굿이 셌어. 이런 말도 해요.” 당시 일제는 조선민속연구를 통해 조선 사람의 조직적인 힘의 원천이 굿에 있다고 보고 이를 없애고자 했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의병운동도 당시 사람들은 ‘의병굿’으로 불렀으니 굿이라는 말이 지금보다 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민중의 언어는 한자말이 아니잖아요. 그 말을 써왔고 굿이 다 그 말을 포괄했다고요. 동학굿을 난리굿이라고 불렀어요. 동학 때 그냥 갔을 거 같아요? 풍물굿이 같이 갔습니다. 그리고 신앙으로서의 굿이 있단 말이야. 그 공동체에서 내려오던 자기 신앙. 옛날부터 뿌리 신앙 굿이었던 거죠.” 탈춤에 미쳐 있던 시기 자연스럽게 탈에 표현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불화(佛化)를 배우게 됐다. “옛날 탈을 만들려고 보니까 대학에서 배운 그림 기법으로 안 되는 거야. 가만 보니까 단청 그림하고 비슷해. 양식이 내가 배운 수채화나 유화로는 표현할 수 없겠더라고.” 고민하다 보니 탈에 표현된 느낌이 단청하고 같은 양식이었다. 고대부터 내려오는 그림을 배워야겠다 싶어서 인간문화재인 봉원사의 만봉 스님을 찾아갔다. “대처승이던 만봉 스님이 단청 장인이었어요. 어떤 절이든 상관없이 주문이 오면 후불탱화를 그려주는 분이셨어요. 인간문화재로 등록된 사람은 배우겠다는 사람을 가르칠 의무가 있어서 한 달에 얼마씩 지원금이 나왔고 저는 무료로 불화를 배웠습니다.” 만봉 스님에게 배운 불화는 고대부터 내려온 화법이었다. 대학교의 동양학과에서도 가르치지 않는 고유의 것. 그렇게 대학 생활 3년 동안 힘을 기울여 배운 불화는 김봉준의 그림과 조각, 글씨에 그대로 배어 여전히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유학을 포기하고 신화미술관 문을 열다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도시 생활을 했던 김봉준 관장은 탈춤을 계기로 접하게 된 마을 문화와 지역 신앙, 정신에 매료되기에 이른다. “마을 문화를 공부해야겠다 싶어서 외국 유학을 포기했습니다. 친구들 대개 뉴욕이나 파리로 유학을 가는 거야. 미대 조소(彫塑)학이다 보니 서양을 유학의 성지라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나는 거꾸로 이리로 온 것이죠. 더 공부해야겠다. 그래서 마을 문화부터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지역 문화 축제를 열고 관여하다 2007년에 문화관광부가 지원하는 지역 문화 만들기 프로젝트에 선정돼 받은 돈으로 신화미술관을 개관했습니다. 2008년 10월에요.” 의문이 생겼다. 지금까지 탈춤으로 시작해 굿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는데 왜 탈춤이 아닌 신화를 선택했는가 하는 점이다. “신화에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죠. 굿을 뿌리로 한 신화 구조이죠. 신화에는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가 있고, 일종의 기도, 음악, 춤, 미술, 모든 것이 있습니다.” 신화미술관 안에는 김봉준 관장이 직접 제작한 다양한 형태의 조각상들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여신상을 모아놓은 구역이 있고, 건국신화를 비롯해 창세, 토템(동물상), 저승, 도깨비, 마을의 신화를 모아놓은 것이 각각 있다. “현대 사회는 마을을 무시하지만 아주 중요한 단위입니다. 가족, 마을 문화가 무너진 광장 문화는 의미가 없습니다. 뿌리가 없는데 시민사회 공동체가 이뤄지겠어요? 사람도 세포가 있어야 형성되는데 마을 문화도 일종의 세포입니다.” 암 환자의 의지, 씩씩한 조각상으로 초야에 묻혀 사는 것처럼 보여도 김봉준 관장은 지극히 사회 참여적인 인물이다. 광화문에서 열렸던 촛불 집회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 현장에도 찾아가 유족들을 위로하는 조각상과 판화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오랜미래신화미술관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화가로, 탈춤에 빠져 있었던 연출가로, 시민운동가로 살고 있다. 그저 마음이 가고 발길이 닿는 곳에서 어떤 형태로든 행동하고 반응하는 전천후 예술가의 삶이 김봉준 관장의 하루하루에 녹아 있다. 그러다 보니 몸에 병이 든 줄도 모르고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부천에서 시민운동을 하다 이곳으로 왔는데 임파선암 3기 말이었어요. 자가진단을 한 것이 잘못이었어요. 위쪽인 줄 알고 위 내시경만 했거든요. 다행히 전이가 안 된 상태였어요. 암 치료받은 지 17년 됐고 아주 씩씩하고 용감하게 살고 있습니다.” 미술관 건물은 아프고 난 다음에 지었다고 했다. 암과 한바탕 결투를 벌인 이후 만든 조각상이라 씩씩하고 힘찬 느낌이라고. “암에 이기지 못하면 지는 거잖아요. 절망의 시기를 겪고 죽음의 절벽과 언덕을 넘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블랙리스트 인생이 지금의 나를 만들다 “나는 3번의 블랙리스트를 겪은 거 같아.” 1980년대에는 5·18 포고령 수배자였다. 1년 후 다행히 포고령이 풀려 개과천선하고 살 수 있나 싶었는데 1990년 윤석양 이병이 들고 나온 보안사 민간인 사찰 문건에도 김봉준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난 정부 9년 동안 그는 예술가 지원 정부 사업에서 제외됐다. 인터뷰 초반 ‘자유롭게 살아왔다’는 말은 알고 보니 당시를 추억하는 씁쓸한 넋두리였다. “근데 말이지 문화 창조는 비주류에서 나온다고. 지금은 주류에 임박했는데(웃음).” 과거 그는 사회 구성원으로 살 수 없었다. 탈춤을 찾아 방황하고 탈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배움의 길을 닦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은 대학 졸업을 해도 이미 사회에서 계속 찍혀왔기 때문에 좋은 직장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어요.” 신화미술관 한편에는 그림이 빼곡히 걸려 있다. 동양적 색채가 강한 그림과 광장을 표현한 판화 등 다양하다. 지금의 정권이 아니었다면 걸어놓지도 못했을 거라고 웃어 보인다. “그런데 촛불 집회 때문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예전에는 꼭꼭 숨겨두기도 했습니다. 판화도 다양하게 많은데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팔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에게 컬렉터들이 붙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 눈치도 빠른 거 같아요. 춥고 배고플 때 좀 사주지(웃음).” 생업 작가로서의 삶은 계속된다 정말 본의 아니게 전업 작가로 살아온 60여 년의 세월이다. 홍대 미대 출신, 깔끔하고 단정하게 뉴욕의 화랑에서 멋들어진 전시회 여러 차례쯤은 열었을지도 모를 사람. 그러나 많은 시간을 숨어 살았고 민족의 뿌리 문화를 찾아 헤맸으며 지금은 신화와 숨 쉬는 인생을 살고 있다. “나 그래도 판화도 팔고, 디자인 주문 들어오면 글씨도 써요. 70년대부터 스님으로부터 고법으로 붓을 쓰는 법을 잘 배웠잖아(웃음).” 예술가로서 마음속으로 꿈꾸는 좋은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물었다. “과정에서 좋은 미래로 가는 길을 차근차근 한 발 한 발 가는 거겠죠. 내 세대의 징검다리에서 다음 세대의 징검다리로 조금씩 사회를 변화시켜나가야겠죠. 내가 가는 길이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나 또한 예술을 배반하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것이 뿌듯합니다. 당당합니다.”
- 2017-11-14 09:14
-
- [송유재의 미술품 수집 이야기] 골동품 수집, 연적과 꽃창살문
- 문방사우(文房四友)란 벼루[硯], 먹[墨], 붓[筆], 종이[紙]를 말한다. 예로부터 선비나 문사(文士)들 곁에는 이 네 가지가 늘 함께 있었다. 벼루에 먹을 갈고 붓에 먹물을 적셔 종이에 글씨를 쓰면 서찰(書札)도 되고 시(詩)도 되고 서화(書畵)도 되고 상소문(上疏文)도 되었다. 보조기구로는 벼루와 먹을 넣어두는 연상(硯箱)이 있고 종이를 말아서 보관하던 지통(紙筒), 붓을 꽂아두는 필통(筆筒)도 있으나 역시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연적(硯滴)이라 할 수 있다. 토기나 도자기 혹은 놋쇠로 만들어진 연적은 먹을 갈 때 필요한 물을 담아두는 작은 기물이다. 그런데 그 기형이 다채롭고 격이 높아 선비들의 호사(豪奢)가 되기도 했다. 서울이나 지방의 고미술 상점을 지날 때마다 연적에 눈이 쏠려 만져보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서예 수업이 있어서 준비물로 문방사우와 연적을 갖추긴 했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조악한 품질의 것들을 팔았으나, 연적은 없어서 컵이나 주전자에 물을 준비해 조금씩 따라 먹을 갈았다. 그래도 열서너 명은 집에서 어른들이 쓰던 사기 연적을 갖고 왔는데 청채(靑彩)의 붕어 모양이 제일 많았다. 나는 형이 쓰던 푸른 문양의 사각형 사기 연적을 갖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만들어 팔던 ‘왜사기’였다. 그들은 우리나라 도자기에 매료되어 그것들을 수집하려고 부산 등지에 현대식 사기 공장을 크게 짓고 밥그릇, 국그릇, 종지, 접시, 요강, 연적들을 만들어 방방곡곡을 누비며 우리의 청자, 백자, 분청자기와 바꿈질을 했다. 그래서 오지의 초가 구석에 있던 간장종지까지 산뜻한(?) 왜사기로 바뀌게 되었다. 시골 장날이면 우리의 민속품이나 도자기들은 바리바리 일본 상인에게 들려 바다 건너로 사라졌고 흔하던 붕어연적도 씨가 마를 정도가 되었다. 나는 향리에 갈 때마다 옛 벗들에게 붕어연적을 탐문했으나 구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인사동의 고미술상에 있는 연적들은 희귀하고 예술성이 높은 것들이라 값이 비싸 구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말마다 황학동 일대의 벼룩시장, 답십리 고미술 상가를 훑고 다녔지만 옛것을 모방한 현대의 것들뿐, 조선조 말기의 것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 출장 중에 골동품점에서 처음 청채 연적을 구입했다. 붕어라기보다는 잉어에 가까웠는데, 구부린 자태며 비늘과 수염까지 정교한 데다 은은하고 맑은 코발트 유약이 일품이고 수구(水口)며 밑 처리도 깔끔해 얼른 지갑을 열었다. 그 뒤로 인사동 도자기 경매장에서 여러 형상의 연적들을 구입했다. 개중에는 중국을 통해 북한에서 흘러온 것들도 있었다. 한 30여 년 수집하다 보니 조선조 중기에서 말기까지의 것이 100여 점 되고, 현대 도예가들에게 부탁해 빚은 연적이 300여 점이나 있다. 언젠가는 소장한 연적으로 작은 전시회를 꾸밀 계획이다. 지금은 물건이 귀해져 값이 만만치 않지만, 내가 연적을 마음에 두고 수집하기 시작할 때는 다른 도자기(항아리, 다완, 주병 등)에 비해 가벼운 편이었다. 팔각(八角) 국화문이나 풀 무늬의 것[사진 1]은 선이 비뚤고 각(角)이 아홉인 것도 있다. 지방 가마에서 이름 없는 도공이 무심히 빚고, 우리 땅에서 나는 탁한 토청(土靑)을 바른 그 소박함이 좋다. 고미술상에는 도자기는 물론 석물(石物), 목물(木物), 서화 등 그 구색이 다양한데 고졸(古拙)한 멋의 책상이나 소반, 반닫이, 목판 따위에 밀려 한 귀퉁이에 박혀 있는 문짝에 관심을 가져볼 일이다. 대부분의 문짝들은 구옥(舊屋)이 헐리면서 수습된 것이기에 그 짜임도 지방 따라 다양하고 목수 솜씨에 따라 품질이 각색이지만, 연대가 깊지 않아 가격이 저렴하다. 20~30cm의 작은 문짝들도 그 짜임이 조밀하고 문살도 가지런해 조형미가 그만이다. 다락방 들창이었거나 고방(庫房)의 환기창으로 소용되었을 문짝 한 쌍을 벽에 걸고 보면, 벽 너머 푸른 하늘이 열릴 것 같은 아련한 환상에 젖는다. 우리나라 문화를 사랑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는 우리의 목기를 ‘자로 잰 듯 반듯하지 않고 손으로 툭툭 다듬은 것처럼 비뚤고 세련되지는 않지만 균형 잡힌 든든함’이라 칭송했다. 창살 모양에 따라 완자문(卍字門), 아자문(亞字門), 격자문(格子門), 정자문(井字門), 용자문(用字門) 등 그 이름이 다양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백미는 ‘꽃창살문’이다. 일반 사가(私家)보다는 사찰 문에, 일일이 꽃 모양을 깎아 맞추고 단청으로 장엄(莊嚴)한 문을 바라보면 황홀경에 빠지게 된다. 전북 부안의 ‘내소사(來蘇寺)’ 법당 문의 꽃창살은 1633년에 창건된 법당과 함께 만들어졌다. 긴 세월 비바람에 단청마저 퇴색되었으나, 색을 덧바르지 않고 나무의 속살 그대로를 드러낸 채 속계(俗界)와 선계(禪界)의 통로가 되고 있다. 연꽃, 국화, 모란의 꽃들이 사선으로 혹은 나란히 연결된 채 500년 가까이 침묵의 고태미(古態美)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법당 문의 문창살을 이토록 정교하게 빚어낸 것은 형태와 빛깔 그 자체가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理事無碍法界]라는 저 화엄(華嚴)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강조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석지현(釋智賢, 1946~) 승려 시인의 말이다. 문짝[사진 2]은 지리산 산록에 거주하며 옛 목기들을 정성스레 재현하고 있는 한 목수의 솜씨다. 1 대 2의 비율로 문틀을 짜놓고, 사선으로 문틀에 꽉 차게 두 종류의 꽃 모양을 조각한 문살을 끼웠다. 뒷면에 창호지를 바를까 하다가 공간의 멋을 즐기려 그냥 서재 책장 옆에 걸어두고 있다. 골동품을 수집하려면 주변의 민속품에 먼저 눈길을 줘보자. 아직은 값이 싼 실패, 골무 등 규방의 것부터 홀대받고 있는 작은 문짝들까지 모으다 보면 5~6년 후엔 값도 많이 오를 것이고 심미안도 높아져 ‘우리 것을 지킨다’는 자긍심이 저절로 우러날 것이다. 청채의 붕어, 해태, 나비 모양 연적도 눈에 띄거든 주저 말고 수집할 일이다.
- 2017-11-02 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