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都鍾煥·62)의 는 그가 교사직을 그만두고 깊은 산 속 황토 집에 머물며 쓴 산문집이다. 책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그는 가슴 따뜻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시인으로 불렸지만, 10여 년이 흐른 지금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이라는 수식어가 덧붙었다. 그동안 세상도 참 많이 변했고, 그를 향한 몇몇 대중의 눈길도 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들국화를 좋아하고, 연민의 눈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자 한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10여 년 전, ‘자율신경 실조증’이라는 희귀병을 앓던 그는 깊은 산골의 한 외딴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거북처럼 오래 그리고 느리게 살고 싶어 ‘구구(龜龜)산방’이라 이름 지은 그곳에서의 성찰을 담은 책이 바로 이다.
“그곳은 나에게 ‘영혼이 성숙하는 집’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집은 비싸고 넓은 집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는 동안 영혼이 성숙해질 수 있는 집이죠. 거기서는 몸도 아팠고, 아주 쓸쓸하고 외로웠어요. 그러나 쓸쓸하지만 평화롭고, 외롭지만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죠. 내 생에 가장 깊어질 수 있었던 시절에 쓴 책인데, 당시 출판사가 단행본 사업을 중단하면서 책이 절판됐어요. 찾는 독자도 많고 나도 이 책을 그렇게 죽게 두긴 너무 아까워서 다시 내게 됐죠.”
그는 책 제목처럼 누구나 저마다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꽃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길 바란다고 했다. ‘깨달음이란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라는 이현주 목사의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장미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 봐요. 하지만 사람마다 끌리는 꽃이 다르죠. 누군가는 목련, 또 누군가는 라일락, 코스모스 등. 자기 내면에 그 꽃과 같은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끌리게 되는 거예요. 백합에 끌리는 사람은 백합 같은 마음으로 사는 게 중요한데 ‘왜 나는 장미가 되지 못했을까’라고 생각하지 말자는 거죠. 장미처럼 아름다운 사람도 있지만, 국화처럼 우아한 사람도 있고 저마다 자신이 본래 지닌 빛깔과 향기를 알고 아름답게 사는 게 중요해요.”
그런 그가 좋아하는 꽃은 무엇일까? 그는 오래전부터 들국화를 좋아했고, 들국화 같은 인생을 살고 있노라고 답했다.
“벚꽃은 진달래를 보고 질투하지 않아요. 개나리가 산수유 꽃을 보고 뒤에서 험담하지 않을 거고요. 그게 자연의 이치니까요. 그러나 사람은 다른 이와 비교하고, 미워하거나 선망하기도 하죠. 들국화는 봄꽃이 사람들의 관심과 박수를 받을 때 그 주변에 눈에 띄지 않고 머물러 있에요. 그러다 먼저 핀 꽃들이 지고 황량하고 쓸쓸해진 들에 피어나잖아요. 나는 그런 들국화 같은 존재입니다. 다른 친구들이 인정받고 두각을 나타낼 때 흔적도 없었지만, 언제고 피어날 것을 알기에 초조하거나 애타지 않았어요. 언제 피느냐보다 자신이 언제 핀다는 것을 믿고 사랑하면서 사는 게 중요한 거죠. 그러면 남과 비교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어요.”
다시 고요한 강물이 되어 만나리
스스로는 남과 비교하며 살지 않지만, 그의 모습을 두고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달라진 점은 많지만,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고 설명했다.
“10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죠. 구구산방에서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지금은 실천으로 옮기고 행동해야 하는 자리에 와있어요. 물론 권력에 눈이 멀었다며 비난하는 사람도 있죠. 고요했던 강물이 돌길을 지나면 격류가 생기기도 하고, 낭떠러지를 만나면 거세지기도 하잖아요. 그러나 강물은 그대로 강물이죠. 저 역시 그래요. 내가 산속에 있는지, 정치 한복판에 있는지에 따라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할 거예요. ‘너는 원래 고요한 물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거세질 수가 있느냐’며 말이죠. 그러나 그 외형만 변했을 뿐, 내가 강물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어요.”
돌길을 지나고, 낭떠러지를 만나며 폭포처럼 거친 모습을 지닐 때도 있지만, 그는 여전히 강물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시를 쓸 때도, 그리고 정치를 하는 현재에도 변함없는 마음속 연결고리는 ‘연민’이다.
“길에 핀 꽃 한 송이에도 걸음을 멈추고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게 시를 만나는 거거든요. 교육도 그래요. 어렵고 힘든 아이를 보면 연민을 느끼고 사랑하게 되죠. 정치도 마찬가지예요. 제대로 된 정치는 연민의 눈으로 국민을 바라보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해온 일들의 공통분모를 찾자면 바로 ‘연민’이라 할 수 있어요. 연민으로 바라보다가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하다가 연민이 생기기도 하죠. 때론 상처도 받아요. 시가 잘 안 써져 고통스럽기도 하고, 아이들 때문에 마음 아플 때도 있고, 국민의 혐오를 감당해야 하기도 하죠. 그러면서도 다시 또 사랑하게 되는 것, 그런 일을 하는 게 내 운명이라 생각해요.”
결국 가슴속 사랑이 남는다
상처 입고 고단한 삶에도 그가 힘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그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자, 존재 이유와도 같았다.
“국회에서 정치하는 거 사실 굉장히 힘들거든요. 나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반대하고 욕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도 이런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건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를 고민해 보면, 결국 내가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준 게 남는 거라 생각해요.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남는 것이 바로 사랑 아닐까요? 내가 죽고 나면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지겠지만, 내가 준 사랑이 누군가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동안 나는 살아 있는 셈이죠. 내가 진정 연민의 마음으로 누군가의 가슴에 남는 사랑을 주고, 그런 시를 쓸 수 있다면 좋겠어요.”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여전히 펜을 놓지 않는 그다. 자신을 강물에 비유했던 것처럼 글을 쓰는 본질은 같지만, 평지의 고요함에서 느껴지는 성찰보다는 돌밭의 거친 돌들이나 진흙탕을 지나며 느끼는 아비규환, 낭떠러지에서의 분노와 환멸 등 현실적인 소재를 다루게 됐다고 설명했다. 다시 고요했던 강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지 궁금했다.
“폭포로만 이어진 강물은 없죠. 언젠가는 저절로 다시 잔잔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게 될 거예요. 강물이 흐르면 본래보다 더 깊고 넓어지는 것처럼, 저도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끝으로, 그는 결국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자 하는가에 대해 물었다.
“‘좋은 시를 쓰던 사람’ 그리고 ‘정의롭게 살려고 애쓰던 사람’으로 남길 바랍니다.”
이재준
안네 소피 무터(Anne Sophie Mutter, 1963~ )의 바이올린 독주회 맨 앞자리에 김영태 시인과 나란히 앉아,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 k.304를 들었다. 41개 바이올린 소나타 중 유일한 단조의 선율은, 봄밤을 깊은 심연의 사색에 잠기게 하였다.
연주가 끝나고 울퉁불퉁한 돌길을 휘적휘적 걸으며 잠시 하늘을 보았다. 아련한 산사나무 꽃향기 사이로 멜로디의 여운이 눈물 되어 흘렀다. 긴 계단을 내려와 차도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얼마 전 부군을 사별한 안네의 망부곡 같았어요. 검은 의상은 상복일 테지요.”
스스로를 ‘풀먼지 같은 존재, 어눌한 말주변’에 빗대어 초개눌인(草芥訥人)이라 자호(自號)한 분이 김영태(1936~2007) 시인이다. 비교적 작은 키에 작은 손으로 평생 글쓰기와 그림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홍익대 회화과에서 김환기 화백(1913~1974)의 훈도를 받았고, 재학 중 박남수 시인(1918~1994)의 추천을 거쳐 ‘사상계’잡지에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17권의 시집을 비롯하여 소묘집, 시론집, 산문집, 무용평론집 등 70여 권의 저작물은 가히 초인적인 문화 활동이란 말 이외에 더 무슨 수사가 필요할까.
일찍이 독일문화원에서의 첫 전시를 비롯해 7~8회 회화전도 열었으나 그림 수집의 인연은 아주 늦게 찾아왔다. 그의 화풍은 독특해서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프랑스산 판화지에 철필과 몽당붓을 짙은 먹이나 검은빛 잉크에 찍어 윤곽의 선을 구획하고, 유화용 까칠한 붓으로 면을 마감하는데, 서예의 갈필(渴筆)같이 선묘(線描)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림의 기초 단계인 스케치 실력이 상당하지 않고서는 강철 같은 선(線)을 뽑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2007년 이른 봄 초개 선생 댁에서 ‘토슈즈 끈을 매고 있는 헤르미아’를 만났다. 셰익스피어 원작을 멘델스존이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으로 작곡했고, 이를 무용으로 공연한 발레리나의 포즈를 형상화한 빼어난 작품이다. 물 흐르듯 먹의 농담이 한 송이 꽃으로 살아 있다.
드로잉(drawing)을 선인들은 화골(畵骨)이라 일컬었다. 그리기의 단단한 뼈대가 곧 선긋기에 있음을 강조함이다. 유화나 짙은 수채화 등은 물감을 덧칠하여 잘못 그린 선들을 감출 수 있으나, 연필, 목탄, 먹, 파스텔은 그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는 게 매력이다. 초개 선생의 그림 속에는 일절 꾸밈이 없다. 색칠의 남용도 없다. 탄탄한 구성과 간결한 선들의 얽힘이 화면 가득 흐른다.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2)의 피아노곡을 즐겨 듣고, 모차르트 음반을 많이 소장하였다.
2007년 7월 운명하기 전까지 화랑가를 산책하고 음악회, 무용 공연장을 찾았다. 생전에 그가 즐겨 앉았던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가열 123번 좌석은 그를 추모하는 예인들에 의해 ‘초개눌인 석’으로 명명 헌정되었다.
문학과지성사는 1978년부터 문학과지성 시인선(詩人選) 시리즈로 시집을 475권째 발간해 오고 있는데, 표지에는 시인의 얼굴을 컷으로 표현하는 게 특징이 다. 이 컷은 2007년 김영태 선생이 작고하기 전까지는 김영태, 이제하 두 분이 그렸으나 이후는 이제하 선생이 혼자 그리고 있다. 컷을 그리기 전에 시집의 원고를 읽고, 시인들이 제공한 얼굴 사진을 보고 컷을 그리는데, 선이 잘 풀려 나올 때는 불과 몇 분 만에, 안 풀릴 때는 수주일이 걸린다는 말을 두 분에게서 들었다.
이제하(1937~ )는 시인, 소설가, 화가, 영화평론가의 그 어느 장르에서도 건필을 견지하고 있는 분이다. 자작곡의 노래에 기타반주로 음반도 취입한 바 있다. 홍익대 조소과에서 미술공부를 하였으나 중도에 독창적인 창작의 길로 전환하였다. 경남 마산에서 고교시절인 1956년 ‘새벗’잡지에 동화가 당선되어 문학도의 선망이 되었고, 1959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고교 시절에는 김상옥(1920~2004), 김춘수(1922~2004), 김남조(1927~ ) 같은 시인들에게 국어수업을 받았음을 자부하기도 했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광화사’등의 소설로 이상문학상등을 수상하였다. 1955년 제작된 영화 ‘나의 청춘 마리안느’에서 따온 마리안느 카페를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평창동에서 시작된 카페가, 대학로로 옮겨와 시인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음악과 커피 와인 향 속에서 예술을 토론하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성악가, 대중가수, 국악인들은 주저 없이 절창을 부르고 있다. 그의 문체는 회화적이고 환상적 리얼리즘이라 평가 받는다. 그의 그림 속에는 시혼(詩魂)의 알레고리가 녹아 있다.
마리안느를 드나들며 몇 점의 그림을 수집하던 중, 2008년 인사동 전시회에서 ‘말과 소년’ 드로잉을 구입하였다. 파스텔로 단숨에 그린 원숙한 드로잉이다. 늠름한 말이 실내 어느 공간에 들어와 있고, 소년이 말을 다독이고 있다. 한 여인이 옆에 앉아 있다.
이제하는 ‘도시에서 태어나야 하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 혹은 그 긴장하는 접점으로 말[馬]을 실내로 끌어들인 야생의 한 이미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제하 그림 속의 말은 자연과 야성의 모티브가 된다. 자연을 거스를 수 없으나 쉽게 동화되지도 못하는 인간들의 고뇌와 갈등을 오묘한 색상으로 표출하고 있다.
1998년에는 김영태, 이제하 2인 드로잉전이 열려 한자리에서 개성 강한 두 예술인의 세계를 감상할 수 있었다.
송나라 문장가 소동파는 당나라 대시인 왕유의 시를 보고 시중유화(詩中有畵)요, 화중유시(畵中有詩)라 하였다. 김영태, 이제하 두 예술인의 문장 속에는 격조 높은 그림이 보이고, 그림 속에서는 시와 음악이 흐른다. 이들의 고양(高揚)된 예술세계는 우리의 혼탁한 일상을 정화시킨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1996년 로 제27회 동인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이순원(李舜源 · 57).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던 그였다. 아버지로 인해 겪은 유년시절의 상처와 어머니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죄송스러웠지만 그럴수록 전화 한 통 드리는 게 더 어려웠다. 무거운 마음으로 지내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좀 다녀가라는 것. 아버지의 얼굴을 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에 그는 조금 천천히 다가갈 길을 택했다. 아들 상우와 함께.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대관령 꼭대기에서 아버지 집까지는 50리(약 20km). 차로 가면 30분이 안 걸리지만, 걸어서 가자면 네다섯 시간은 걸어야 하는 거리다. 그 길을 초등학교 6학년인 큰아들 상우와 걸어서 가기로 한 것이다. 아내와 둘째 아들이 차를 타고 가서 먼저 아버지를 달래 드리는 동안 그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가고자 했다.
“아이와 길을 걷다 보니 집에서는 하지 못했던 다양한 대화가 오갔어요. 식탁이나 소파에 앉아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하는 대화보다 훨씬 풍부하고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죠. 내가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듯 아들도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거고, 내가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듯 아버지도 내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 거 아녜요. 오랜 대화를 하다 보니 아들의 생각도 아버지의 마음도 이해가 되더라고요.”
덕분에 그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단 하루였지만 훌쩍 성장한 아들의 모습에 가슴이 뿌듯하기도 했다. 그날의 경험을 쓴 소설이 바로 이다. 그는 많은 아버지들이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 자신이 느낀 감정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책을 권한다.
“대부분의 가정이 엄마와는 대화가 되는데, 아버지와는 필요한 말만 하잖아요. 어떤 문제가 생겨야 이야기를 하는데 그마저도 남편들은 아내에게 미루게 되고요. 대화도 훈련이거든요. 자주 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서먹하고 어려울 수 있겠죠. 그럴 때는 대관령 옛길처럼 함께 오래 걷는 길을 가보세요. 걱정은 말고요. 일단 길 위에 서면 대화는 자연히 이루어지니까요.”
길 위에서 배우는 인생의 희로애락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썼지만, 순서는 새롭게 짰다. 대관령 굽이의 길이에 따라 긴 굽이에는 긴 대화를, 짧은 굽이에는 짧은 대화를 풀었다. 그는 길고 짧은 굽이가 모여 긴 대관령 옛길이 이어지듯 우리네 삶도 이런저런 일들이 모여 인생을 이룬다고 했다.
“책을 보면 아들이 한 굽이를 걷다가 ‘이 굽이는 짧다’며 좋아하죠. 거리는 정해져 있는데 이번 굽이가 짧다고 해서 걸어야 할 게 줄어드는 것은 아니잖아요. 짧은 굽이가 있으면 긴 굽이가 있게 마련이죠. 험한 길이 있으면 편한 길도 있고요. 인생의 희로애락처럼 말예요. 또 어떤 굽이를 갈 때는 아이가 뛰어서 가보자고 하죠. 그렇게 두 굽이를 달리다가 결국 발이 미끄러져 다쳤잖아요. 먼 길을 가야 하는데 고작 두 굽이를 빨리 왔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죠. 인생도 그래요. 빨리 이루고 싶은 욕심에 조급해하기보다는 멀리 보고 꾸준히 걸어가야 해요. 상우도 그런 경험을 통해 인생의 굴곡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을 거예요.”
상우가 대관령 옛길에서 인생의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그에게도 무언의 가르침을 준 길이 있다. 중학생 시절 등굣길에 있던 오솔길이다. 핑계를 대고 학교를 가지 않으려던 때였는데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가방을 들고 먼저 오솔길을 향했다. 길 양옆으로 무성하게 자란 풀에는 주렁주렁 이슬이 맺혀 있었는데, 어머니는 아들의 옷이 젖기라도 할까 봐 말없이 이슬방울을 툭툭 털어내며 앞장서 걸어가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느낀 어머니의 사랑은 그의 인생에 큰 교훈과 원동력이 되었다. 아들 상우에게는 ‘엄마 책상’이 그런 가르침을 주었다. 책에서 아들이 “나는 엄마가 엄마 책상을 가지고 있는 게 참 좋아요”라며 “친구들 집에 가도 엄마 책상이 없는 집이 더 많아요. 아뇨, 거의 다 없는 것 같아요”라고 하는데, 그런 현실이 늘 안타까운 그다.
“여자는 결혼하면서 장롱, 냉장고, 세탁기 등 많은 것을 준비해요. 그런데 정작 책상은 생각을 안 하죠. 식탁이나 화장대에 앉아 책을 볼 수도 있겠지만 책상이라는 것은 자아의 성역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누구에게나 책상은 중요하죠. 어질러진 책상이라도 아이들이 책상에 앉아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자라는 것이 정서적으로도 좋고, 산교육이 되죠. 아내가 일본어를 독학하겠다고 한 적이 있어요. 그런 도전도 책상이 있으니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아내가 꿈을 키울 수 있도록 남편이 아내에게 액세서리가 아닌 예쁜 책상을 선물해준다면 좋겠어요.”
책에 나온 아이, 그 이후
책이 나온 지도 19년이 흘러, 올해 32세인 상우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만큼 유명했던 소설인지라 상우의 별명은 예나 지금이나 ‘책에 나온 아이’다. 가정의 달이면 상우와 인터뷰하자는 요청이 있었지만, 아이의 정서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까 염려한 그는 동반 인터뷰는 거절해왔다. 어른이 된 상우도 그때 아버지의 결정에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아들은 그때 통제를 잘해주었다며, 어리지만 세상사에 대해 아버지와 대화를 나눴다는 것을 좋게 기억하죠. 그 이후로는 상우랑 대관령을 걸어보지는 못했어요. 대신 평상시에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죠. 나중에 군대를 제대한 둘째 아들이랑 그 길을 걸었는데, 감회가 새로웠어요. 자녀가 어른이 되면 차곡차곡 가방에 짐 싸주듯이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더 폭넓고 인문학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더라고요. 그런 순간을 기다리기도 했죠. 아직은 내 품에 있을 때 다시 그 길을 아이들과 걸을 수 있다면 참 좋겠어요. 아들도 언젠가는 자기 아들과 그 길을 걸을 날이 오겠죠?”
1. 배우자에게: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이것은 그냥 걷기에 대해 안내하는 책이 아니다. 우리가 자연과 함께 사색하며 가슴 뿌듯한 기쁨을 안고 걷는 걸음걸이에 대한 철학과 인문학이 담겨 있다. 책도 읽고 아파트 단지 한 바퀴라도 배우자와 함께 자연을 벗 삼아 걷는 것은 어떨까.
2. 자녀에게:
얘들아, 그 어떤 책보다 재미있는 책이 좋지. 삼국지는 재미있으면서도 세상에 대해 또 수많은 사람의 유형에 대해 얘기하는 책이란다. 읽다 보면 사람들이 왜 이 책을 다섯 번도 읽고 열 번도 읽는지 알게 되지.
3. 친구에게: 칼 세이건
여보게, 이 책은 참 오래전에 나온 책이야. 요즘 우리가 사는 모습
참 각박하지. 하늘 한번 바라볼 틈도 없지. 그럴 때 이 책을 펼쳐보시게. 지금 자네가 고민하는 것, 그 고민을 말끔하게 해소해 주지는 못해도 그게 우리 가슴안의 참 작은 일이라는 걸 깨닫게 하지. 나이 들수록 이 세상만 보지 말고 우주를 쳐다보자고.
그룹사운드 ‘겨울나무’가 있다. 아니, 있었다. 어림 40년 전이다. 밴드를 그룹사운드로, 보컬을 싱어로, 기타리스트를 기타맨으로, 콘서트를 리사이틀로 부르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4인조 그룹을 결성했다. 나는 기타를 치며 싱어로 활동했다. 비틀스는 당시에도 전설이 되어 있었고, ‘딥퍼플’과 ‘시시알’, ‘박스탑스’, ‘산타나’ 등이 빚어낸 선율이 지구촌을 뒤덮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1974년 겨울 고향인 작은 읍내에서 처음 공연을 했다. 그러나 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세상에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만들어낸 선율은 누군가의 가슴에 아직 남아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럼 영화 ‘즐거운 인생’의 줄거리보다 훨씬 오래된 이야기를 펼쳐보겠다.
어깨너머로 배운 ‘슬픈 악기’ 기타
어릴 적, 기타는 슬픈 악기였다. 어른들은 기타로 뽕짝조의 옛노래를 뜯었다. 나도 기타를 배우고 싶었다. 어깨너머로 보고 있다가 음 자리를 짚어 흉내를 내자 마을의 (다리가 아파 늘 휠체어를 타고 다니던) 아픈 형이 한번 배워보라 했다. 주법도 익히지 않고 바로 ‘생일 없는 소년’과 ‘애수의 소야곡’을 따라서 쳤다. 디마이너(Dm)의 슬픈 곡들이었다. 국민학교 졸업 무렵에 몇 곡을 익혔다.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기타를 튕기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내 기타 실력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이내 알았다. 팝송 열풍이 불어왔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기타 소리를 들으니 기타는 더 이상 슬픈 악기가 아니었다. 특히 전자기타에서 뿜어 나오는 다양한 음색은 나를 다른 세계로 끌고 갔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로는 기타를 치지 않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다시 기타를 쥐었다. 잊고 있던 기타를 다시 껴안게 된 연유가 있었다. 문학의 밤이 열린 어느 가을날이었다. 저마다 한껏 말[言]에 멋을 부린 시를 낭송했다. 계속 듣다 보니 지루했다. 1부가 끝나고 초청손님으로 한 남학생이 나오더니 들고 온 기타를 튕기며 글렌 캠벨의 ‘타임’을 불렀다. 모두 ‘타임’ 속으로 우아하게 빨려 들어갔다. 문학은 개뿔이었다. 한순간에 팝송이 장내를 압도했다. 나는 순간 다시 기타 치며 노래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곧바로 기타교습소에 등록했다. 비로소 디마이너(Dm)의 ‘슬픈 기타’에서 벗어나 다양한 리듬과 코드를 익혔다. 3개월 정도 학원에서 배운 뒤에는 홀로 음악책을 뒤적이며 노래를 찾았다. 나는 작곡하며 노래도 하는 싱어송라이터를 꿈꿨다.
4인조 그룹사운드 탄생의 전말
대학 입시에 예상대로 낙방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책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사는 게 시시해 보였다. 그때 집에서 튕겼던 기타소리가 울 밖으로 넘어갔고, 자연 음악 친구가 생겼다. 우리는 자주 만나 기타를 치며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친구는 드럼도 잘 두드렸다. 어느 날 친구가 (혹 내가 먼저 말했는지도 모르지만) 그룹사운드를 해보자고 했다. 서로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여름 끝자락에서 또 한 명의 음악 친구가 나타났다. 그는 읍내 고등학교 밴드부 출신으로 채보(採譜) 능력이 출중했다. 레코드 음반에서 나오는 노래를 오선지에 그대로 옮겨 우리 앞에 내밀었다. 우리는 비틀스처럼 멤버를 기타(퍼스트, 세컨드)와 베이스, 드럼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상상 속에서 살았다. 장발 단속에 걸릴지라도 머리를 결사적으로 기르고, 공연 막판에는 ‘딥퍼플’처럼 드럼과 기타를 부숴버리자며 낄낄댔다. 그룹사운드 이름은 ‘겨울나무’로 정했다. 그러면서 겨울에만 나타나 공연을 하고 홀연 사라지는 신비의 그룹이 되자고 했다. 또 삭풍이 부는 벌판에서도 봄꿈을 장만하는 겨울나무처럼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자고 했다.
첫 공연은 연말쯤 하기로 했다. 꿈은 부풀어 올랐지만 현실은 막막했다. 우선 퍼스트를 맡을 만한 기타맨이 있어야 했다. 나는 싱어였으니 당연히 세컨드 기타를 치며 노래해야 했다. 또 퍼스트를 감당하기에는 내 실력이 턱없이 부족함을 알고 있었다. 퍼스트 기타는 아무나 맡을 수 없었다. 간주 또는 후주에 애드리브(즉흥연주)를 구사할 수 있어야 했다.
우리는 기타맨을 널리 구했다. 하지만 기타도 귀한 시절이었으니 기타맨이 나타날 리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 희소식을 전했다.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는 기타맨이 고향에 내려와 어슬렁거린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늘이 내려준 인물이었다. 우리는 기타맨을 찾아 나섰다. 그의 집은 멀었다. 전주에서 버스로 한 시간쯤 가야 했다. 들녘에 우람하게 정미소가 서 있었고, 기타맨은 그 집 아들이었다. 우리 얘기를 들은 그는 기타는 만지지만 무대에 설 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의 형이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한 것이지 자신은 아니라고 했다. 그 겸손이 더 맘에 들었고, 그가 기타맨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 집에서 한 밤을 자며 밤새 설득했다. 그렇게 퍼스트 기타맨을 얻었다. 4인조 그룹사운드가 결성되었다.
1974년 12월 첫 리사이틀
하지만 사람은 있는데 연주할 악기가 없었다. 자신의 악기는 자신이 구해야 했다. 기타맨은 형 것을 빌려 쓰기로 했지만 나는 전자기타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만그만한 살림에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전자기타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전자기타를 찾아 읍내를 뒤졌지만 헛수고였다. 공연 날짜는 다가오지만 정작 악기가 없으니 가슴이 타들어갔다. 누가 전자기타를 빌려준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달려갔을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전자기타를 집에 ‘모셔놓고 있는’ 선배가 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선배의 집은 읍내에서 20리쯤 떨어져 있었다. 초겨울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을 지나 묻고 물어서 그 집을 찾아갔다. 선배는 집에 없었다. 대뜸 이 집에 기타가 있느냐고 물었다. 선배의 아버지는 날 한참 노려보더니 외양간을 가리켰다. 외양간을 살피니 정말 전자기타가 있었다.
그러나 목이 부러진 채 소 여물통 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마도 일은 하지 않고 기타나 튕기는 자식이 꼴 보기 싫어 아버지가 부숴 버렸을 것이다. 갈 때는 몰랐는데 읍내로 돌아오는 길이 무지 멀었다. 들녘에서는 삭풍이 불어왔다. 그리고 하늘에서 눈이 왔다. 눈물이 났다.
1974년 성탄절 즈음에 우리는 읍내 우체국 앞 예식장을 빌려 공연을 했다. 예식장 입구에 현수막을 걸었다. ‘그룹사운드 겨울나무 리사이틀’이 펄럭였다. 하지만 무대 위는 초라했다. 전자기타를 구하지 못한 나는 통기타를 멨고, 역시 베이스기타를 구하지 못한 친구는 색소폰을 들고 무대에 섰다. 나는 통기타로 코드를 짚으며 ‘Have ever seen the rain’, ‘Beautiful brown eyes’,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등 10여 곡을 불렀다. 전자음에 맞춰 미친 듯이 노래하고 싶었는데, 그날 공연은 너무도 촌스러웠다. 베이스가 없으니 고음이 공중으로 떠다니고 음악은 거칠고 소란스러웠다. 그래도 그룹사운드 공연을 처음 본 읍내 젊은이들은 곡이 끝날 때마다 환호했다. 처음으로 하객 아닌 관객을 맞아들인 예식장 주인아저씨도 박수를 쳤다. 그렇게 7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첫 공연을 마쳤다.
나는 전기 대학 시험을 치르지 않고 후기 대학에 응시했다. 나만 아니라 첫 번째 음악 친구도 후기 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서울, 그는 이리(익산)에서 대학에 다녔다. 그리고 이듬해 우리는 다시 모여 연습을 했다. ‘겨울나무’가 되었다. 공연장소로 읍내 극장을 빌렸다. 원래 멤버에 색소폰과 클라리넷이 추가되었다. 겨울나무 공연 소식은 별 볼일 없는 읍내의 심심한 겨울철에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요즘 말로 ‘빅 이벤트’였다. 연습 장소로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었다. 서로 포스터를 붙이고 공연 티켓을 팔겠다고 나섰다. 젊은 사람들이 한데 모이니 별별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함께 포스터를 붙이겠다고 나간 남녀 한 쌍은 훗날 열애 끝에 결혼을 했다. 그러자 여러 말들이 나왔다.
“포스터를 역 앞에 붙이랬더니 으슥한 하천에는 왜 갔을까. 포스터는 안 붙이고 서로 입술만 붙였고만.”
그해 ‘겨울나무 리사이틀’은 극장 좌석이 거의 찰 정도로 관객들이 많았다. 서울에서 빌려온 악기와 장비는 제법 섬세하고 육중했다. 우리는 열심히 연주하고 노래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무수한 얘깃거리가 많지만 당시 일은 이쯤에서 줄인다. 그 후 겨울나무 공연은 멤버가 바뀌면서 여러 해 동안 이어졌다.
‘겨울나무’ 싱어로서의 자존심
군대에 가고 취직을 하며 우리는 흩어졌다. 그러나 겨울이면 겨울나무가 됐던 그 시절을 어찌 잊을 것인가. 어쩌다 멤버들이 만나면 음악 얘기로 술자리가 길어졌다.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유료 공연을 해본 적이 없고 또 음반을 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음악적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우리가 계속 음악을 했으면 오늘날 조용필이나 전인권은 없었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서로의 음악성을 치켜세워주며 언젠가는 꼭 제대로 공연을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겨울나무를 세상에 알리자고 다짐했다. 헤어지면서는 꼭 이런 말을 했다.
“겨울나무 리사이틀 한번 해야지. 각자 집에서 연습하자고. 그날을 위해서.”
그러나 모진 세월은 우리를 떼어 놓았다. 다들 바쁘게 살았다. 그런데 우리는 뜻밖에, 어쩌면 극적으로 지난해 다시 모였다. 지금도 왕성하게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후배(겨울나무 2기 출신)가 자신들의 동호회 공연에 우리를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2014년 10월 ‘비바앙상블 콘서트’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후배의 지하 연습실에 모였다. 기타맨(김홍선)만은 전주에서 올라오지 못했다. 주유소를 운영하는 녀석은 정말 가고 싶지만 마누라가 ‘허락’하지 않아 합류가 어렵다고 했다. 약속하면 늘 늦는 또 한 녀석은 연습 날만은 총알처럼 달려왔다. 우리는 술을 한 잔 걸치고 연습을 시작했다. 베이스 소리가 가슴을 쳤다. 그 옛날 광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 아래에서 무엇인가 복받쳐 올라왔다.
‘노래들은 그대로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흘러왔구나.’
이곡 저곡을 연습하다 사랑과 평화의 ‘어머님의 자장가’와 전인권이 부른 ‘사랑한 후에’ 두 곡을 부르기로 했다. ‘사랑한 후에’는 음이 높았다. 원곡대로 씨마이너(Cm)로 부르면 높은 음이 (‘라’ 음보다 반음 높은) Bb까지 올라갔다. 멤버들이 무리라며 키를 내리자고 했지만 내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반(半)음에 목숨 거는 것이 싱어 아닌가. 세월이 흘렀어도, 세상이 변했어도 나는 겨울나무의 싱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음이 나왔다.
40년 만에, 환갑에 올라선 무대
마침내 공연 날이 밝았다. 나는 아내가 골라준 선글라스를 끼고, 소주 한 병 하고도 넉 잔을 마시고 무대에 올랐다. 술은 두려움을 쫓고 고음을 지르는 데 도움을 줬다. 그렇다고 너무 마시면 아예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과거에는 소주 한 병이면 적당했지만 요즘 소주는 도수가 약해서 반 병쯤 더 마셔야 했다. ‘사랑한 후에’는 첫 음을 제대로 질러야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멤버들 모두 잔뜩 긴장한 채 나를 봤다. 나는 씩 한번 웃어주고 내질렀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 편에~’
우리는 해냈다. 600여 명의 관객들이 환호를 보내주었다. 그 속에는 아내도 있었다. 그렇게 별렀던 겨울나무 공연을 실로 40년 만에, 그리고 환갑에야 할 수 있었다. 그럼 겨울나무 멤버를 소개하겠다. 드럼 은희문(익산LED산업단지개발 대표), 건반 김동원(BCP경영기술컨설팅연구소 대표), 알토색소폰 노희천(비바색소폰앙상블 단장), 그리고 싱어 김택근이다. 베이스는 따로 초빙한 정종호 씨가 맡았다. 그리고 우리가 살던 고향은, 아니 우리 그룹사운드의 활동 무대는 정읍시 신태인읍이었다. 한때 4만 명에 육박하던 고향 신태인은 속절없이 쇠락하여 이제 인구가 만 명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겨울나무가 되고 싶다. 그리고 초청공연이 아닌 우리만의 리사이틀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꼭 공연 말미에 기타와 드럼을 부수고 싶다. 우리는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그룹사운드 ‘겨울나무’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있다.
△김택근(金澤根) 언론인·시인
언론인 김택근 필자는 1954년에 태어나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에서 자랐고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3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경향신문 문화부장, 종합편집장, 경향닷컴 사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2010년 출간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의 대표 집필자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
산문집 , 동화집 등이 있다.
간신히 연락이 닿아 원고를 청탁했더니 “나는 컴퓨터도 안 하고 육필로 쓰잖여. 글씨도 못 알아볼 건데 그냥 됐시유. 내가 보니께 나랑 안 맞는 것 같유. 그 책하고는. 난 부족한 사람인디. 글 못 쓰니께 다른 선상 알아봐유. 난 하루도 술 없이는 못 사는구먼그려.” 구수한 충청도 말씨에 그대로 외로움이 묻어났다. 그렇게 사양하던 작가 김성동은 고색창연한 200자 원고지(金聖東이라고 인쇄돼 있다)를 노끈으로 묶은 글을 우편으로 보내왔다.
“문학은 삶과 우주의 본질을 통찰하려는 인간의 몸부림이지”라는 그의 육성을 다시 듣고 싶어졌다. 아카시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때 막걸리 받아 큰 슬픔을 안고 사는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
총소리였다. 총소리는 잇달아서 들려왔다. 사타구니에 꼬랑지를 말아들인 삽살개가 마룻장 밑으로 숨어들었고, 삼키면서 길게 끄는 동네 개들 울음소리만이 높이 떠서 흩어지고 있었다. 불에 덴 것처럼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고, 아낙이 속적삼을 헤쳐 아이에게 젖꼭지를 물렸다. 등꼬부리 노파가 두 팔로 일곱 살짜리 계집아이를 끌어안았고 공포에 질린 눈길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던 식구들 눈길이 사방으로 돌려졌다.
*해설피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1950년 첫 때. 조선 나이로 네 살이었으니, 이 누리에 벌레몸을 받아 태어난 지 꼭 2년 8개월 되던 때였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 중생에게 맨 처음 떠오르는 그림은 네 살 적부터인데, 총소리이다.
맨 처음 떠오르는 그림이 총소리라는 것이 얄망궂다. 꼭 무슨 팔자소관인 것만 같아 눈앞이 부우옇게 흐려오니, 운명인가. 전정(前定)된 명운(命運) 말이다. 저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 같은 것. 그것으로부터 이 중생 살매는 비롯되었으니까. 아직 이빨도 다 솟지 않은 네 살짜리 어린 것 넋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던 그 총소리 말이다.
아버지는 원초적 그리움의 대상
총소리를 듣던 때가 여름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이 중생은 영 입을 열지 않는 것이어서 벙어리인 줄 알고 큰 걱정들을 하시는 판이었는데, 느닷없이 입을 열더라는 것이다. 마당에 깐 멍석에 둘러앉아 식구들이 막 저녁상을 받는데, 멍석 가장자리를 기어 다니던 아이가 한밭[대전]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세 차례나 부르짖더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조선정판사 사건’이라는 미 군정과 그 사냥개들이 쳐놓은 덫에 치여 절망적 ‘피고회의’나 하던 리관술(李觀述)·송언필(宋彦弼) 선생 같은 선배 독립운동가들이며 인민 계관시인 유진오(兪鎭五)선생, 그리고 10월항쟁·여순항쟁·4·3항쟁을 비롯한 지리산·태백산·일월산 같은 재산인민유격대 *싸울아비들과 함께 총하지혼(銃下之魂)이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정(而丁)선생[朴憲永]의 비선(秘線)으로 대전·충남 지역 조직장인 아버지가 대전형무소로 끌려가셨던 것은 당신 나이 서른두 살 때인 1948년 늦가을이었다. 리승만이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운 뒤였다. 평양행과 지리산 입성을 놓고 손톱여물을 썰던 끝에 얼굴도 못 본 자식놈 손이라도 잡아보려고 들렀던 고향집에서 당신을 맞이한 것은 벌써 몇 달째 그물을 치고 있던 서청(서북청년단) 출신 서울시경 특별경찰대였던 것이다.
뒷동산으로 피란 갔던 그때 이야기를 썼던 것이 『그해 여름』이라는 단편소설이다. 군사깡패들한테 잡지를 폐간당하고 나서 무크지로 박아냈던 에 실렸던 것이니, 꼭 30년 전이다. 그 소설이 어떤 유명한 친왜작가 이름을 딴 문학상에 후보작으로 올랐으나 심사위원 모두 입을 다물었다고 하니, ‘반미소설’이라는 것이었다. 조치원·대전 방어선이 무너지며 금강방어선으로 뒷걸음질하던 북미합중국 병대가 보령·청양 경계인 화성장터에서 양키병정·토인병정 구경나온 아녀자 여남은 명을 죽였던 참이야기를 바탕삼은 소설이었던 것이다.
딴 이야기인데- 요즈음 이른바 문학상이라는 것이 400개가 넘는다고 한다. 등단해서 십년만 되면 적어도 서너 개씩 문학상을 목에 걸고 흰목 잦히는 작가들이다. 작가를 장삿속으로 써먹으려는 속셈을 보고 어떤 문학상을 거부했던 것이 1983년이었다. 물론 소설 됨됨이가 모자라서 그런 것이겠지만 이른바 등단 40년임에도 무슨 창작기금과 절집동네에서 주는 무슨 상 말고는 하나도 받아보지 못한 중생이므로, 더구나 눈에 밟히는 『그해 여름』이다.
아버지를 목 놓아 부른 다음부터 떠오르는 것은 배고픔이다. 할아버지는 손님이 오면 꼭 아비 없는 손자를 사랑방 명색으로 불러 “이 으른께 절허구 뵙거라.” 그리고 식구들은 쫄쫄 굶는데도 꼭 진지대접을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들여놓는 손님 진짓상을 보며 이 중생은 눈을 꼭 감았다.
주칠이 벗기어져 희뜩희뜩한 개다리소반에는 보리가 조금 섞이고 검정콩이 박힌 옥 같은 쌀밥과 췻국 한 대접, 그리고 김치와 호박무침에 간장과 고추장 보시기가 놓여 있었다. 재게 오르내리는 수저를 바라보던 이 중생은 미주알을 눌러 막고 있던 두 발꿈치에 힘을 주어야만 하였으니, 거시침이 흐르면서 그만 힘도 내음도 없는 물방귀가 비어져 나왔던 것이다. 서른 날에 아홉 끼밖에 못 먹는 *애옥살이일망정 손이 오면 꼭 진지대접을 하고 먼 길 온 과객한테는 *사슬돈푼이나마 노잣닢까지 쥐어주는 할아버지가 계시는 우리 집은 가난도 비단가난이었다.
나의 소설은 어머니를 위로해 주기 위한 수단이었다
*살그미 눈을 떠보니 밥주발은 반 넘어 주욱 밑으로 내려가 있었고, 얼른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 목예반에 숭늉대접을 받쳐든 어머니가 들어오셨고, 아흐. 저이가 숙냉이로 입가심을 하고 나서 남겨진 밥은 내 차지가 되는 겨. 그만 상을 내가라는 할아버지 말씀이 떨어지기만을 목젖이 녹아들게 기다리고 있는데, 얼라? 숭늉 한 모금을 마시고 난 그 늙은 과객사람은 숭늉을 밥그릇에 부어버리는 것이었고, 으아앙! 꼴깍 소리가 나게 생침만 삼키고 있던 이 중생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소설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써보았던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였으니, 업(業)이었던가. 배고픔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외로움이었고, 외로움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리움이었다. 그리움 때문이었지만 백지에 먹물이 찍힌 것이라면 콩나물을 싸온 신문지 쪼가리까지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백자 원고지로 쉰 장쯤 될 소설을 써보았던 것은 온전히 끔찍한 고문후유증의 우울증으로 괴로워하시는 어머니를 위로해주기 위해서였다.
“슬프구먼그려. 겁나게 슬프다니께.”
“온 삭신 사대육신 팔만사천마디가 죄 자귀루 죅여놓은 조긧대갈 같다”고 네 방구석을 맴돌면서도 자식이 지었다는 소설을 낭독으로 들으며 엷은 살푸슴(미소)을 보여주시던 기억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떠오르는데, 주인공이 서울로 가는 장면에서 그 소설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으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서울을 그려볼 재주가 없었던 때문이었다. 문학에서 말하는바 리얼리즘이 뭐고 모더니즘이 뭔지 알 리 없는 때였으나, 그렇게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은 것이 아니고는 땅띔도 못 하는 것은 그때부터 이미 비롯된 것이었다. 이른바 소설이라는 것은 상상 곧 *수꿈 꾸는 이야기지만, 그러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역설의 변증법을 알았다고나 할까. 그때에 어머니한테 들었던 말이다.
“얘기든 노래든 그저 모름지기 슬퍼야 혀. 그게 진짠 겨.”
칠순 다 된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림
망팔(望八)이 다 되어가는 오늘까지 잊히지 않는 그림이 있다. 이 많이 모자라는 하늘 밑에 벌레를 소설가로 만들어준 말이기도 하니, 운명인가. 할아버지 손에 잡혀 쫓기듯 고향을 떠나온 날 열두 살짜리 그 어린아이는 아버지가 잠시 갇혀 있었다는 경찰서 구경을 나섰다가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매던 끝에 이사 간 집으로 갔는데, 철 이른 가죽잠바를 걸치고 완강한 어깨에 눈매가 사나운 사내가 할아버지를 잡고 일장 훈시를 하던 것이었다. 왜 이곳으로 이사를 왔느냐고 꼬치꼬치 캐묻다가 누가 찾아오는지 한 달에 한 번씩 대전경찰서 대공과에 신고를 하라는 것이었다. 송판쪼가리로 해 단 대문명색 앞까지 배웅 나간 어린아이를 훑어보며 사내는 말하였다.
“붉은 씨앗이로군.”
두 손을 모아 앞으로 잡고 깊숙하게 허리를 숙이며 소년은 이렇게 말하였다.
“안녕히 가셔유우우.”
어둑어둑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축댓돌 밑 아랫집에서는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친 듯이 타오르는 황덕불빛을 뚫고 무당 사설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허어이이. 리로 리런나. 로리런나. 라리런나. 로런나. 리런나. 어허어이이. 두 발 가진 즘생에 살생부정이로구나. 총 맞은 원혼이요 칼 맞은 원혼이요. 몽둥이 맞은 원혼이요. 포탄 맞은 원혼이요. 신실히 적적히 물리쳐 줍소사. 시위들 하소사. 원통히 죽고 서럽게 죽은 중음신들아. 어서 속히 이승으로 나가서 만인적선하고 돌아오너라.”
다음은 4월 17일 뼈잿골에서 읽을 님들을 기리는 글이다.
뼈잿골의 제망혼문(祭亡魂文)
조선공산당 창건 90주년인 단제개천(檀帝開天) 환기(桓紀) 9285년 4월 17일을 맞아 불초(不肖) 김 아무개와 그 동무(同務)들은 삼가 쓴술 한 잔과 몇 점 보잘 것 없는 제물(祭物)로 눈물의 골짜기에 누워 계신 님들 혼령(魂靈) 앞에 엎드려 슬피 고하나이다.
아, 님들이시어. 님들 떠나신 지 어즈버 65년이 되었으나 못난 뒷자손들은 여태도 그 체백(體魄)조차 건져드리지 못하고 있음이니, 그야말로 비단할아버지에 거적자손이올습니다.
아, 님들은 아주 돌아가시렵니까. 저희들은 상기도 님들이 돌아가셨다고 믿어지지 않으니, 아마도 슬픔이 지나쳐 미쳐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세월을 떠올리면 어찌 차마 말을 다하겠나이까.
아, 님들을 생각하니 가슴은 떨리고 손끝은 흔들려서 차마 붓을 놀릴 수 없어 1950년 7월 27일치 기사를 읽어보겠나이다.
(......)
大田市에서도 7月 三,四일 경부터 련 五일간 尾軍의 지휘아래 人民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周知하는 바와 같이 大田刑務所에는 濟州道麗水順天太白山事件 등의 우수한 祖國 아들딸들이 收監되어 있었다. 이들을 비롯한 七천여명의 人民들을 野獸들은 뒤로 결박하여 명태같이 트럭에 눞혀놓고 최고 一日 八十臺까지 동원하여 대덕군 사(산)내면 랑울(월)리로 운반하여 가소린을 퍼붓고 불질러 방공호로 몰아넣어 참살하였다.
(......)
(*인용된 신문기사는 맞춤법, 띄어쓰기, 종지부 없는 것, 한자 노출 등 그때대로임)
아, 서럽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동무들과 힘을 모아 님들이 이루고자 하셨던 그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힘을 다할 것이오니, 너무 걱정을 마옵소서. 이 중생이 사바에 있는 만큼 님들은 너무 슬퍼하지 마옵소서.
아, 인생이 상수(上壽)를 누리는 이는 백년을 살 수 있다지만 그 나머지는 흔히 팔구십세를 넘지 못하는데 이 중생 나이 망팔이 다 되었으니, 인간에 있을 세월이 또 얼마나 되오리까. 아, *고루살이 세상을 위하여 짓는 밥이 채 뜸도 들지 않았는데 한 세상은 살같이 가고, 천지(天地)도 그 끝이 있다는데 산천은 말이 없습니다.
가마귀는 끊어진 솔언덕에 울고 묵은 풀은 우거졌는데, 쓸쓸한 산자락에 엎드려 한소리 통곡을 하니, *푸나무도 함께 슬퍼합니다. 와서 흠향(歆饗)하소서.
*해설피: 해가 질 때 빛이 약해진 꼴, *싸울아비: 전사(戰士)
*애옥살이: 가난한 살림살이
*사슬돈푼: 싸거나 꿰지 않은 흩어진 엽전, 얼마 안 되는 작은 돈
*살그미: ‘살그머니’의 준말로 그루박을 때 쓰던 말. 살그니, 살그래
*수꿈: 낮에 깨어서 꾸는 꿈이라는 죄수들의 은어로 상상을 이르는 말
*고루살이: 고조선 이전부터 우리 겨레가 추구했던 ‘평등세상’. ‘공동체’는 기독교 세상에서 나온 서구 개념임.
*푸나무: 초목(草木)
김성동(金聖東) 소설가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1965~1976년 승려생활. 1975년부터 창작생활. 창작집 『彼岸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붉은 단추』, 장편소설 『길』 『만다라』 『길』 『국수(國手)』 『꿈』, 산문집 『염불처럼 서러워서』 『외로워야 한다』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등.
그날 동네 꼬맹이들은 죄 동구 밖 팽나무 숲 그늘에 모였다. 스무 명은 족히 될 성싶었다. 읍에서 나왔다는 아저씨 둘이 아이들을 줄지어 앉혔다. 자 자, 꼬맹이들은 앞쪽에 앉고 큰 놈들은 뒤쪽에 앉아, 알았지? 이 더운 날 흰 와이셔츠에 양복저고리까지 걸친 걸 보면 아저씨들은 분명 읍내의 큰 교회에서 나온 이들이 분명했다.
글 최학 소설가 / 우송대 교수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그 더운 여름날 팽나무 숲의 기억
전에도 이런 일은 여러 번 있었다. 앞으로 열심히 교회에 나오라는 아저씨들 따라 찬송가 몇 구절을 부르고 나면 공책과 연필, 운 좋으면 초콜릿까지 얻어 걸릴 수 있었다.
땅바닥에 퍼질고 앉은 아이들이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아저씨들을 보고 있는 사이 한 아저씨가 먼저 왜 이리 덥지? 하면서 천천히 양복저고리를 벗었다. 그 순간 아이들은 모두 제 눈을 의심했다. 그리곤 신음소리도 내지 못한 채 얼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아저씨의 어깨를 한 바퀴 두르고 겨드랑이 아래로 내려온 건 벨트. 가죽 벨트에 달린 권총집이며 거기 삐죽이 고개를 내민 빛나는 권총 손잡이까지 똑똑히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뒤이어 다른 아저씨도 저고리를 벗었는데 그도 마찬가지였다. 권총이었다! 만화나 영화에서만 봤던 권총의 실물을 내 동네에서 우리 눈으로 똑똑히 볼 줄은 아무도 상상치 못했다.
“미군 열차에 돌멩이 던진 놈, 누구야?”
두 아저씨가 우리들 앞에 굳건히 다리를 벌리고 섰다. 좀 전 같이 웃음 띤 얼굴이 아니었다. 노여움을 가득 묻힌 낯빛, 무서운 눈초리... 금방이라도 빵빵, 우리를 향해 총을 쏠 것만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움켜쥔 채 바르르 몸을 떨었다. 요란한 매미소리도 귓전에 들리지 않았다.
한 아저씨가 우리를 향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는 경찰서에서 나온 아저씨들이다. 우리가 왜 너희를 여기 불러 모았는지 알겠지?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모조리 경찰서로 끌고 갈 것이다. 알겠어? 응, 그저께 저녁 여기 동네 앞을 통과하는 미군 열차에 돌멩이 집어 던진 놈, 누구야? 돌 던진 놈 있지, 어느 놈이야?”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옆 자리 경렬이가 바르르 몸을 떨었고 내 앞의 용수가 흠칫 놀라며 어깨를 곧추세웠다. 쟁쟁한 적막이 흐르는 사이 다른 아저씨가 말했다.
“허, 요놈들 봐라. 말을 않겠다 이거지?”
그가 가볍게 오른손을 옮겨 제 권총집을 쓰다듬는 순간이었다.
“얘가 그랬어요! 얘가 돌 던졌어요!”
누군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뒤쪽이었다. 아이들의 눈이 그쪽으로 쏠렸다. 등하교 때마다 곧잘 우리에게 제 책보자기를 떠맡기던 민호였다. 그가 온몸을 떨면서 제 옆의 경수를 가리켰다. “넌 안 그랬니? 너도 했잖아! 얘, 얘도 돌 던졌어요. 나만 아니에요!” 튕기듯 일어난 경수는 민호뿐만 아니라 제 앞뒤 애들까지 한꺼번에 짚었다. 그게 신호였다. 스무 명의 아이들이 저마다 발광하듯 제 동무들을 고발하기. 마침내 내 단짝 경렬이 나보다 먼저 나를 가리켰고 나 또한 약간이라도 늦으면 죽을세라 앞의 용수를 지적했다. 그리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으며 이내 팽나무 숲은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묻혔다.
‘기브 미 쪼꼬레또!’를 외치며 자란 세대
내 어린 시절을 보낸 그 산골 마을 앞에는 경부선 철길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는데 해질 무렵이면 미군들을 잔뜩 태운 군용열차가 마을 앞을 통과했다. 열차가 오기 전부터 철둑 이편저편에 서 있던 마을 아이들은 열차가 다가오기 무섭게 두 팔을 흔들어대며 ‘기브 미 쪼꼬레또!’를 외쳐댔다. 그러다보면 실제로 열차에서 초콜릿이며 오렌지가 던져지기 일쑤였고 때로는 뚜껑을 따지 않은 C레이션이 통째로 얻어 걸리는 횡재를 할 때도 있었다.
그 무렵 난생 처음 본 일회용 종이컵, 플라스틱 스푼 등에 대한 놀라움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열차를 탄 미군들의 숫자며 그들이 던져주는 ‘물건’의 양이 눈이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동네 아이들은 예사로 기차를 향해 팔을 쭉 뻗으며 감자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미군들 또한 감자로 응수해 오자 급기야 돌멩이를 던지는 지경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형사들이 돌아간 뒤, 아이들은 누구 하나 동무를 찾는 법 없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이후 골목을 달음박질하는 아이들의 소리조차 한 달 넘게 사라졌다.
아이들보다 닭이 더 많았던 교실
많은 또래의 아이들이 통학 열차를 타고 대구를 내왕하며 중학교를 다녔지만 나는 폐광이 있는 산 아래의 농림학교에 다녔다. 비인가 중학 과정의 이 학교의 교실엔 아이들 숫자보다 닭들이 더 많았다.
아이들은 영어 수학을 공부하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고추 모종내기, 깻잎 따기, 염소 키우기, 하천 부지 개간에 동원됐으며 따로 닭들을 책임진 나는 틈날 때마다 사료를 주고 닭똥을 치웠으며 자전거 뒷자리에 계란을 싣고 자갈 많은 신작로를 달렸다. 볕 좋은 날이면 유치환 시집이며 봔 루운의 같은 책을 들고는 닭들을 피해 폐광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일제 때 코발트를 캐냈다는 이곳엔 고대의 성전 같은 건조물들이 군데군데 서 있었고 그 아래에 끝도 깊이도 알 수 없는 캄캄한 갱들이 미로처럼 뻗어 있었다. 더러 애들과 함께 관솔불을 켜서 갱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인체의 해골이며 뼈다귀들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 보도연맹 사람들을 집단으로 학살한 현장이었다는 사실은 훨씬 뒤 내가 고향을 떠난 뒤에 알았다.
명색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그때도 나는 여전히 배가 고팠고 입을 것이 마땅찮았으며 앞날은 암담하기만 했다. 양은그릇에 담긴 흰 쌀밥을 간장에 비벼 먹는 꿈을 꾼 날에도 나는 계란을 싣고 읍내에 갔으며 구판장에 그것을 넘긴 뒤에는 또 하릴없이 4학년 때 짝꿍이었던 수리조합장 딸이 살고 있는 기와집 근처를 몇 바퀴 돌다가 호롱불 켜진 대밭 아래 초가로 돌아와야 했다. 시간 맞춰 역으로 가면 통학열차에서 내리는 교복 입은 그 아이를 먼 데서라도 지켜볼 수 있었지만 내겐 그럴 용기도 없었다.
무작정 상경해 고생 끝 대학 입학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 합격증을 쥔 뒤 나는 무작정 서울로 가는 밤 열차를 탔다. 그리고 그날 내 옆자리에 앉았던 못된 아줌마를 지금도 잊지 않는다. 점심 저녁을 건너 뛴 아이가 혼자 꼬르륵 소리를 내며 옆에 앉아 있는데도 그녀는 삶은 계란 네 개를 차례차례 혼자 다 먹었다! 다음 날 아침 용산역에 내린 나는 멀리 인왕산만 바라보며 독립문까지 타박타박 걸어 형님의 셋방을 찾아 들었다.
형들 덕에 서울의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생애의 행운이었다. 간신히 교복을 걸치고 책가방을 들고 학교를 다녔지만 아직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질 처지는 아니었다. 공부와 무관하게 대학 진학을 할 만한 집안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더러 글을 쓰기도 했지만 문학을 해보겠다는 뜻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등록금 적은 국립대학 역사학과를 지망했다가 보기 좋게 떨어지곤 낭인 생활을 했다. 입시학원에 가는 대신 2본 동시상영의 싸구려 영화관을 전전했으며 노모의 성화에 못 이겨 두 차례 공무원 시험을 보기도 했다. 다음해 간신히 대학에 적을 올려놓고는 가정교사, 무허가 학원 선생 등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대학은 학기 중에도 수시로 교문을 닫았기에 출석일수를 걱정할 일은 드물었다.
간혹 선배들에게 끌려가서 통일, 노동, 매판자본 등등의 얘기를 듣기도 했지만 내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그런 거창한 담론들이 내 귀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지하 유인물을 펴낸 주모자로 오인 받아 성북경찰서 취조실에서 하룻밤을 자는 때에는 까닭 없이 그 어린 날 팽나무 숲의 광경이 생생히 살아났다. 더 이상 형사들이며 권총조차 무섭지 아니한데 수치심이 온몸을 감싸왔다. 갈래머리를 한 뽀얀 피부의 조합장 딸아이가 보고 싶었다. 마흔넷에 청상이 되어서도 아들 아홉을 홀로 키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그해 가을, 종로 3가의 한 찻집에서 그 여자아이를 만났다. 그런데 딴 애들 몰래 지우개를 쥐어주던 그녀의 손길 하나까지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녀는 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대학 강단 떠난 후 소설에 새삼 감사
몹시 소설이란 걸 쓰고 싶었던 것이 그 즈음이었던 듯싶다. 정한숙 선생 담당의 ‘소설창작실습’의 과제를 닷새 만에 완성했다. 바닷가 결핵환자 요양소가 이야기의 주 무대로 돼 있지만 거기엔 내 고향의 코발트 광산은 물론 동구 밖 팽나무 숲과 조합장 딸아이까지 다 들어가 있었다. 생전 처음 단편소설의 분량을 채운 그 소설이 그해 겨울 한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작이 돼 버리고 말았다.
올해가 내 정년이다. 8월 말일자로 나는 34년간 몸담았던 대학의 교단을 떠나는 것이다. 친구들 대부분이 50대 초 중반에 직장을 떠난 것에 비하면 나는 ‘참 길게도 해먹은’ 셈이다. 쥐뿔의 학위도 없는 내가 일찌감치 대학 강단에 설 수 있었던 것도 다 문학 덕이었다. 스무 해 넘게 문학 강의만 해 오던 내가 정년 10년을 남겨 놓고는 중국을 비롯한 외국 학생들만을 상대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수업했으며 그 인연으로 중국 백주(배갈)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갖게 되었다. 백주 관련 책을 내고 바깥으로 백주 강의를 다닌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난해에는 두 나라 관계 인사들과 함께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를 만들기도 했다. 뒤늦은 나이이기는 하지만 내가 이렇듯 중국을 새롭게 만난 것도 내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가 된다.
퇴직 후에도 나는 서울 집에만 머물지 않기로 마음을 먹는다. 계룡산 줄기 끝에 앉은 농가 한 채를 빌려 일주일에 사나흘을 거기서 지내기로 한다. 텃밭을 가꾸고 소설을 쓰고 또 좀 더 깊이 중국을 공부하면서 내 여생을 보내고자 한다.
부끄럽고 고단했던 내 어린 날의 시간들이 내 인생의 남은 세월에서도 각성과 용기의 원천이 돼 줄 것으로 믿고 있다.
최 학
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 졸업.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 등단.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 당선. 1981년~현재 우송대 교수. 고려대문인회 회장 역임. 현재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 회장. / 저서: 창작집 ‘식구들의 세월’ ‘손님’ 등. 장편소설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 산문집 ‘시가 있는 간이역’, ‘배갈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 ‘니하오 난징’ 등.
권대웅(52) 시인은 어느 날 머리 위에 뜬 달을 오래도록 바라보다 왈칵 눈물이 났다. 초승달, 반달, 보름달로 차고 기울면서 달은 이 세상 존재의 비밀을 알려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둡고 힘들고 슬픈 밤에 달만은 길을 잃은 마음에 등불이 되고 소망이 되어준다 여겼다.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마음속 어둠과 내일의 불안까지도 환하게 비춰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시인은 휘황찬란한 도시의 인공 빛들에 밀려 희미해지는 달빛이 안타까웠다. 사람들이 포악해지고 우리 삶이 팍팍해진 것이 왠지 달빛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으로 보였다.
시인은 그때부터 달의 이야기를 담아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고, 이를 페이스북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사람들은 달 그림과 어우러진 이 시들을 '달시(詩)'라 불렀다.
많은 사람이 달시를 좋아했다. 팍팍하고 건조한 일상에 촉촉한 감정의 울림을 준다 했다. 잊고 있던 그리운 이들이 떠올라 눈물이 난다 했다. 문득문득 고개를 들어 달을 찾아보게 됐다 했다.
'페친'(페이스북 친구)들의 달시에 대한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졌다. 영국에 사는 페친이자 한국교포인 레이첼 박 씨는 달시를 영어로 번역해 올렸다. 영어를 쓰는 사람들에게도 달시를 알리고 싶어서란다. 번역가 백선희 씨는 불어로 번역해 페이스북에 올렸다.
신간 '당신이 사는 달'(김영사on 펴냄)은 시인이 달시가 전하는 위로를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서 내놓은 책이다. 책에는 '달시' 스물세 편과 시에 미처 담지 못했던 말들을 담은 산문이 실려 달빛 같은 잔잔한 위로를 건넨다.
"달은 참 좋은 에너지다. 언제나 따뜻하고 밝고 환하고 둥글다. 그런 달의 기운을 받고 또 나누고 싶었다. 선물하고 싶었다. 조금 외롭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당신의 달을."('작가의 말' 중에서)
여기에 시인이 이국의 여행에서 촬영한 다양한 사진들도 곁들여져 정서의 깊이를 더했다.
달을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차오르고 마음이 진정되는 것처럼 이 책 역시 그렇다. 삶의 거울이 되고 위로가 되는 달의 정서를 똑 닮은 책이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비가 어디서 무엇과 부딪히는가에 따라 그 소리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양철지붕 위에 떨어지는 소리, 처마 밑 깡통에 떨어지는 소리, 비닐우산에 떨어지는 소리, 창문에 떨어지는 소리, 나무의 어깨 위에 떨어지는 소리, 호수 위에 떨어지며 둥글게 퍼져 나가는 소리…. 사람도, 사랑도 그렇다. 지금 어디서 누구와 만나는가에 따라 그 소리가 달라진다. 깊은 소리, 가벼운 소리, 행복한 소리, 시끄러운 소리, 슬픈 소리, 아름다운 소리…. 당신은 지금 어디서 누구와 만나 무슨 소리를 내고 있는지…."(178~179쪽)
한편, 시인은 이 책 출간을 기념해 다음 달 4~6일 서울 인사동 시작갤러리에서 '달동네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기부 시화전'을 열고 손 글씨로 쓰고 그림을 그려넣은 시화들을 전시, 판매한다. 수익금 전액은 달동네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