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시집 해설을 가장 많이 한다고 알려진 유성호(柳成浩·56) 한양대학교 교수가 첫 산문집 ‘단정한 기억’을 출간했다. 규준이 정해진 딱딱한 논문과 평론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운 글을 쓰며 모처럼 그는 ‘자연인 유성호’가 간직한 섭렵과 경험의 기억들을 가지런히 펼쳐보였다.
유 교수는 최근 한 칼럼을 통해 “‘산문’은 진솔한 고백을 통한 자기 확인을 욕망하면서, 특정 토픽에 대해 독자와 소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런 그가 이번 산문집을 펴내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오래된 글까지 모았더니 하나의 범주로 묶긴 어렵더군요. 삶의 이력처럼 복잡한 장르의 글들을 정리하며 목표로 삼은 건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어느 시기에 내가 어떤 경험과 생각을 했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어요. 또, 살면서 저를 위해 애써준 분들이 쉽게 볼 만한 책을 선물하자는 거였죠. 그동안 평론 전문 서적을 더러 냈는데, 일반인에게 쉽게 읽히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서 이번 책은 평론가나 연구자보다는 어린 시절의 친구와 동창에게 많이 보냈어요. 저야 책 받는 게 익숙한 직업이지만, 그들에겐 책 선물이 귀하고 감동스러웠던 모양이에요. 잘 봤다며 선물도 보내오고, 몇 권 사서 주변에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더라고요. 앞으로는 무게를 덜고 소통 친화적인 글을 더 써보고 싶습니다.”
그리움의 깊이로 완성되는 추억
산문집을 엮으며 과거를 음미하는 과정 속에서 유 교수는 지난날 곳곳에 남긴 삶의 흔적들과 마주하곤 했다. 그는 책에서 이러한 인생의 기억과 추억을 ‘물방울의 흔적’에 빗대 이야기했다. 요약하자면, 물방울이 머물다 날아간 ‘마른 흔적’은 그 물방울이 존재했다는 증거인 동시에, 지금은 그 물방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물증과 같다는 것이다.
“시간을 사이에 두고 물방울의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증명하는 실체가 마른 흔적인 셈이죠. 우리의 삶도 이와 같아요. 한때 존재했던 것들에 대한 소중한 ‘기억’과, 이제는 그것이 사라지거나 소멸했다는 ‘실감’ 사이에서 살아가니까요. 그런 점에서 ‘추억’은 물방울 그 자체가 아니라 ‘물방울의 흔적’이라 할 수 있죠.”
유 교수는 추억이 꼭 과거지향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윤동주의 ‘자화상’ 마지막 문장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에서, 이때의 추억은 지난날을 감싸 안으면서, 그러나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 단계 넘어서겠다는 성장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추억이란, 기억되는 그 순간의 온기로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꿈꾸는 기억’과 같다고 표현했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 가사에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실제 늙어가는 첫사랑을 만난다면 어떨까요? 반가움과 동시에 상실감도 들 겁니다. 추억은 그리움의 깊이로 완성되는 거니까요. 그것을 현실화하려는 욕망이 앞서면 추억에서 ‘꿈’이 빠져나가고, 현재의 물리적 어색함만이 남게 됩니다. 오히려 꿈꾸는 기억으로 머물 때보다 더 왜소하고 허약한 추억이 될지도 모르죠. 그리움은 그 대상을 획득하는 것이 아닌, 그리워하는 마음과 행위 자체에서 빛을 발하고, 그것이 생을 아름답게 한다고 생각해요.”
이에 반해 나이가 들수록 과거에 매몰돼 현실에 울분을 갖고, 젊은 세대를 부정하는 등의 행위는 경험적 한계에 갇힌 결과라고 해석했다.
“흔히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는 식의 경험적 우월성을 내세우는 분들이 있죠. 그런데 젊어본 적 있다고 뭔가를 더 많이 아는 건 아녜요. 가령 어딘가를 직접 여행한 사람보다 가지 않고 책만 본 사람이 그곳을 더 잘 알기도 하잖아요. 실제 가본 사람은 경험적 한계에 갇히기도 하기 때문이죠. 이렇듯 젊은이는 늙어보지는 않았지만 늙음을 상상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막상 늙어서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재구성하는 데 그치죠. 이 역시 긍정적인 부분을 내세우게 되고요. 옛날에도 말 안 듣는 학생은 많았는데, 마치 요즘 아이들만 유난하다고 지적하는 것처럼요. 그러니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나 때는 말이야’ 등의 언행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름다운 역설적 기억, 청춘
물론 누군가의 과거 속엔 실제로 열정 넘치고 아름다웠던 시절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를 ‘청춘’이라 부른다. 유 교수는 ‘청춘’이란 오히려 청춘을 지나버린 사람들의 생에서 발견되는 흔적, 즉 역설적 기억과도 같다고 일컬었다.
“청춘은 젊은 시절 의식 속에 존재하는 현재적 생의 조건이 아닌, 뒤늦게 발견하는 기억의 형식이라 볼 수 있죠. 저 역시 지나고 떠올려보건대, 온전히 대학 4년이 제 인생의 청춘이었던 것 같아요. 미정형이던 육신과 정신이 그때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 이전과 이후 전혀 다른 생각을 갖게 됐고, 당시를 기점으로 생(生)이 갈라졌으니까요. 지금은 그때의 연장선에 있다는 생각을 해요. 책도 대학 시절의 것이 많은데, 그때 읽은 것이 진짜 책이고, 요즘 읽는 것들은 플러스알파라고 봐요. 말하자면 별책부록 같은 거죠.”
별책부록에 자주 비유하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여생’(餘生)이다. 유 교수는 책에서 ‘향원익청’(香遠益淸, 향이 멀리 퍼질수록 더 맑아진다)을 언급하며 “자기 경험에 갇힌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열린 향기를 전하는 노경(老境)의 모습이 간절한 때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여생’이 아닌, 소통과 공감의 능력으로 새롭게 태어난 ‘후반 인생’을 살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대부분 남은 생을 버티는 식이 아닌,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며 존경받는 어른으로의 후반생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고, 꿈에 그린 노후를 포기한 채 사는 이도 적지 않다. 유 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의지로 자신의 말년을 위엄 있게 지켜나가길 바랐다.
“존경받는 어른이 되긴 참 어렵죠. 그러나 그토록 힘든 만큼, 오히려 더 되어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나요? ‘어차피 내가 죽으면 알 게 뭐야’ 하며 무신경하게 사는 이도 있겠죠. 그러나 죽음으로부터 살아나는 기억도 있어요. 저도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셨는데, 부재함으로써 진정 존재하는 것들이 생기더군요. 사랑하는 사람, 나와 가치관을 나눈 이들에겐 내가 세상을 떠나고부터 시작되는 기억들이 존재해요. 아무리 내 삶이라도 그 기억의 용량까지 줄일 순 없잖아요. 가치 있다고 여긴 일들을 변함없이 지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모습을 남기는 것이 삶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단편소설 ‘어떤 갠 날’로 등단한 후 집필 활동과 더불어 수십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겨온 부희령(夫希玲·55) 작가. 최근 그녀는 소설과 번역서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를 모아 첫 산문집 ‘무정에세이’를 펴냈다. “소설이 그림이라면 에세이는 사진과 같다”고 비유하는 부 작가의 글은 민낯처럼 기교는 없지만, 그 밋밋함이 주는 위안이 퍽 살갑게 느껴졌다.
부 작가의 다정한 미소와는 대조되는 책 제목이었다. 까만 어둠으로 덮인 표지를 들춰 담담하게 쓰인 문장들을 읽어낸 한 독자의 평이 인상적이다. “일반 에세이처럼 긍정적 교훈을 주는 내용은 별로 없지만 읽는 내내 난롯불을 쬐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무정한 마음 붙들고, 참으로 유정해서, 무정한 세상을 건너간다.” 그들이 말한 ‘긍정 없이 따뜻한’, ‘유정해서 무정한’ 등 다소 모호했던 표현은 책을 읽은 뒤 제법 수긍이 갔다.
“현대 사회는 정념이 들끓고 있죠. 때론 그런 정념이, 유정함이 누군가를 소외하고 차별한다고 생각해요. 한 사람을 사랑하면 다른 이는 사랑하지 않고, 특정 단체를 좋아하면 그 밖의 공동체는 배척하듯, 내가 어떤 감정을 갖는 일 외엔 무정하게 굴게 마련이죠. 평등이나 박애 등을 실현하려면, 어쩌면 그 사회가 무덤덤해져야 하지 않을까 해요. 치우침 없는 보편적인 사랑과 관심은 편애를 만들지 않을 테니까요. 이때의 사랑은 존중하는 마음이겠죠.”
부 작가는 내면의 자신에서 출발해 바깥의 공동체까지 나아가는 과정을 글쓰기의 길이라 일컬었다. 지난한 그 길에서 역시 독자를 향한 존중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그녀다.
“자기 상황에 맞는 글에는 공감하지만, 그렇지 않은 글에선 소외를 느끼곤 하죠. 또 책은 작가의 일방적 소통이기 때문에 자칫 독자를 끊임없이 가르치려 들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배제되지 않게 글을 쓰려 했어요. 가령 ‘그런 사람이 돼야 해’라고 하는 대신 ‘나는 그런 사람을 좋아해’라거나, 내 처지를 통해 ‘그런 사람이 아닌 이런 사람도 충분히 자족하며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무외시를 실천하며 얻는 행복
자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외연을 넓히고자 했기에 책에는 일상의 경험과 사색이 주를 이룬다. 평범한 공간 속 마주하는 낯선 인연들을 향한 작가의 시선에서 무정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그녀는 책에서 ‘무외시(無畏施)’를 언급했는데, 이는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베풂을 뜻한다. 타인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미소 한 번이 곧 무외시를 실천하는 길이라고. 아울러 내가 베푼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베푸는 것이 가장 큰 보시(布施, 널리 베풂)라 칭했다. 부 작가는 이렇듯 보답을 바라지 않고, 보답할 부담 없이 이뤄지는 선행이야말로 온 세상을 향해 이뤄지는 보시라고 말한다.
“몇 년 전 안나푸르나 트레킹 중에 높은 고개를 넘기 위해 작은 비행기를 탔어요. 근데 그 비행기가 일 년에 일곱 번은 추락한다는 거예요. 불현듯 내 목숨은 저 조종사 손에 달렸다 여기니, 평소 버스나 지하철 등에서도 알게 모르게 내 삶을 타인에게 의탁하며 살아왔다는 걸 깨닫게 되더라고요. 한편으론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뜻밖의 도움을 받기도 하죠. 그물망처럼 복잡한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끼치는 유기적 존재라는 사실이 와 닿았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개인적인 경험이 떠올랐다. 며칠 전 길을 지나던 아이가 떨어뜨린 허리띠를 주워준 일, 그다음 날 지하철에 두고 내린 휴대폰을 한 승객 덕분에 찾은 일. 마치 앞선 선행의 보답처럼 느끼기도 했지만, 실상 주고받는 이가 맞물리지 않는 오묘한 사이클이었다. 부 작가는 “도움을 준 이에게 은혜를 갚긴 어렵다”면서 “그런 엇갈림이 더 재미있다”고 말했다.
“누군가를 도울 때 그 상대보다 내가 더 힘을 얻는 경우가 많아요.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했을 때, 뭔가 1등 한 것처럼 자신을 훌륭하게 여기고 격려해주면 좋겠어요. 별거 아닌 일로 뿌듯해하긴 좀 그렇지 않냐 하겠지만, 때론 그런 유치함도 필요하다고 봐요. 저도 그냥 촌스러운 사람이 되겠다, 유치해지겠다고 방향을 바꾸니 자신감도 생기고 꽤 행복해지더라고요.”
달콤한 긍정은 기만이다
중년 이후 그녀는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며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표면적으로 여겨온 사회 문제를 체감하면서, 공적인 자아와 공동체를 위한 일에도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칼럼을 통해 사회를 들여다보며 개인이 공동체로부터 받는 영향이 상당하다는 걸 느꼈어요. 어쩌면 개인의 삶이란 없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론 그렇게 자아가 확장되면서 긍정적인 부분도 생기더군요. 자기 탓을 하지 않게 된 거죠. 내가 실수하고 형편없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바라보면 꼭 내 잘못도 아니고 나만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되니까요. 나아가 타인의 삶은 어떤가, 나는 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고요.”
그녀는 작가답게 글로써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길 바랐다. ‘무정에세이’ 역시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썼지만 혹자는 “글이 너무 건조하다”며 “좀 더 다독다독해야 위안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단다. 그러나 부 작가는 “그것은 기만”이라고 일축했다.
“요즘 출간되는 수필집이나 자기계발서에는 긍정의 말이 넘쳐요. 그런데 세상에 내 의지대로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아요. 긍정적으로 열심히 하면 된다고 높이 띄웠다가 현실에서 내팽개쳐졌을 때, 그 아픔이 더 크리라 생각해요. 달콤한 말은 사탕처럼 잠깐의 위안일 뿐입니다. 결국 스스로 견뎌낼 힘을 찾아야죠.”
일시적 힐링과 위로는 결코 삶의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보단 자기 안의 불행과 고통을 마주하고 세상에 비춰볼 때, 또 그런 사회를 무정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진정한 위안을 얻는다고 조언했다.
“어른이란 비바람 치는 들판을 혼자 걸어가야 하는 존재잖아요. 슬픔이나 괴로움을 삶의 디폴트(default, 기본값)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스스로 이겨낼 힘은 나오지 않아요. 또 자기 안에만 머무는 우울은 축축하고 잘 마르지 않죠. 밖으로 끄집어내 말려줘야 합니다. 주변을 보면 가엽지 않은 사람이 없잖아요. 나만 괴로운 건 아니라는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통을 안고 산다는 걸 알기에 우리는 위안을 얻기도 하죠. 저 또한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 똑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훌륭해져야 하는가?’ 등에 대해 글로 이야기하고 위안을 나누고 싶습니다.”
(권)정생 형, 이렇게 이름을 부르니 사무치는 그리움이 온몸으로 밀려옵니다. 그리고 윤동주가 자주 쓰던 부끄러움이라는 어휘도 호출됩니다. 부끄럽다는 것은 치기 어린 나의 문학청년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문학청년의 객기만 있었지 형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형은 천방지축인 나와 우리 패거리들을 너그러이 대하셨지요. 그때는 형이 그냥 맘씨 좋은 동네 형인 줄만 알았습니다. 돌이켜보니 5월이면 형이 가신 지 12주기가 되네요. 형은 살아서 하느님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셨으니 지금은 하느님 곁에 계시겠지요. 형을 처음 만난 것이 20대 초반이었는데 저도 지금은 머리가 허연 할배가 되었습니다. 문학청년 시절 육사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다는 이유로 대학생 신분으로 안동문학회 막내 회원이 되었습니다. 문화회관 다방에서 모임이 있어서 기다리는데 검정 고무신에 밀짚모자를 쓴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다방의 깔끔한 장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지요. 돌이켜보니 형은 평생 그런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작가나 시인이라면 예술가의 풍모가 있어야 한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는데 형은 들에서 일하다가 잠시 장 보러 나온 사람 같았습니다. 현란한 말솜씨도 없고 작가다운 면이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동네 형이었습니다. 게다가 시골 교회에 종지기로 있다고 하니 실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외양으로만 사람을 보는 덜떨어진 자가 바로 저였습니다. 살아 계실 때는 부끄러워서 이런 고백도 차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씁니다.
첫 동화집 ‘강아지 똥’의 출판기념회가 시내 큰 교회에서 열렸습니다. 우리 패거리는 낮술에 취해서 교회에 갔습니다. 문학을 한다는 것이 무슨 대단한 특권이나 되는 것처럼 기행을 일삼던 시절이었습니다. 축가를 부르는 순서에 우리 패거리 가운데 군에서 갓 제대한 친구가 자청해서 앞으로 나가 군에서 배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입술만은 돼도 가슴만은 안 돼요.” 이런 민망스런 가사가 있는 노래였습니다. 형은 그런 우리에게 이렇다저렇다 말 한마디 없었습니다.
안동을 떠난 뒤 오래 형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형을 다시 알게 된 것은 ‘녹색평론’에서 나온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을 읽고 나서였습니다. 담담하게 군더더기 없이 전개되는 문장을 읽으며 성자라는 어휘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임하여 행하는, 이웃과 타자에 대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 뒤로 ‘강아지 똥’, ‘몽실 언니’, ‘한티재 하늘’ 등의 동화를 읽으며 나는 형이 지구상에서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지어준 방 한 칸 부엌 한 칸 오두막에 김 서방이란 이름의 강아지와 사실 때 오두막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소면 한 줌 삶아 그릇에 담고 까만 간장 한 종지 내놓고 “밥 먹시더” 하시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밥 한 그릇 같이하고 싶었습니다. 형은 집에 먹을 게 있는데 왜 식당에 가느냐면서 그냥 집에서 먹자고 했습니다. 나는 “식당에 안 가면 식당 하는 사람은 뭐 먹고 사니껴?”라고 협박을 했고 마지못해 따라나선 형과 근처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은 적이 있지요.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 화를 내신 적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늘 취해 사는 병호 형이 오두막에 찾아가서 밤새 술을 마시고 술이 떨어지면 술도 마시지 않는 형을 보고 술 사오라고 못살게 굴었다지요. 밤새 한숨도 못 주무신 형이 한마디하신 것이 지인들 사이에 전설처럼 남아 있습니다. “귀신은 병호 안 잡아가고 뭐하노?”
그때까지 나는 형이 가난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형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은 갑자기 하늘로 가신 뒤였습니다. 적지 않은 인세가 들어왔지만 모두 필요한 곳에 기부하고 자신은 겨우 의식주만 해결하신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장 일을 할 때라서 상주 노릇을 한 것은 형도 아실 것입니다. 장례식에서 유언장을 읽을 때 각 지역에서 먼길 마다하지 않고 오신 손님들이 모두 울었습니다.
“죽거든 화장해서 빌뱅이 언덕에 뿌려 달라. 앞으로 나올 인세는 어린이들을 위해 써 달라.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젊은 시절에 병을 얻어 결혼하지 않고 병과 더불어 사신 것을 알았기에 우리들의 슬픔이 더 컸습니다.
장례식 준비로 모인 우리들은 유언대로 할지 무덤을 만들지에 대해 오랜 논의를 하다가 유언을 어기기로 했습니다. 사시던 집도 교육용으로 남겨두고 집 뒤 빌뱅이 언덕에 소박한 무덤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다른 유언은 모두 지켰지만 형의 정신을 길이 남기기 위해 그리했으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장례 후에 형의 방을 정리하던 윤환이 10억 원이 든 보통예금 통장을 찾았습니다. 통장을 들고 농협에 가서 왜 보통예금으로 했느냐고 따지자 농협 직원이 형이 그리하라고 해서 그리했다고 했습니다. 이자로 돈을 늘리는 것이 죄악이라고 여긴 형의 뜻을 알고 다시 숙연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가까이 있는 이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가장 멀리 있는 원수까지를 사랑하라는 불가사의한 사랑의 폭을 말씀하셨습니다. 형도 그러합니다.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하셨지요. 그래서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았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아프지 마시고 새 옷도 사 입으시고 연애도 하시기 바랍니다.
권서각 시인
197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으로 ‘눈물반응’, ‘쥐뿔의 노래’, 산문집으로 ‘그르이 우에니껴?’, 논저로 ‘이육사 문학과 저항정신’ 등이 있다. 본명 권석창. 환갑 이후에 쥐뿔도 모른다는 의미로 서각(鼠角)이라는 필명을 쓰고 있다.
50년 전쯤 편지를 주고받았던 짧은 인연에 기대어 그대에게 다시 편지를 씁니다. 그 사이 어떻게 지내셨나요? 벌써 반세기 전의 일이 되어서 그대나 저나 서로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이가 되고 말았지만 밤잠을 설치며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편지를 이어가던 까까머리 시절의 기억은 아직 저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답니다.
그때의 청소년들은 참 답답한 오리무중의 한 시절을 보냈던 것 같아요. 10대 중·후반을 지칭하던 ‘하이틴’이란 말은 붕붕 하늘을 향해 치솟던 꿈 많은 시절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온갖 금기와 규제를 짊어진 수행자의 시기라고 해야 할 정도로 힘겨웠지요.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중고생 남녀가 어깨를 나란히 해 걸어가는 것만으로 비행 청소년 취급을 받던 때이니까요. 설마 그럴 리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겠지만 정말 그랬답니다. 그러니 소년 소녀가 정답게 손을 잡고 걸어간다든지 분식집에 마주 앉아 김밥이라도 나누어 먹고 있다면 교외단속반 선생님에 의해 단속 대상이 되기 십상이었지요.
그렇다고 출구가 완전히 없었던 건 아니었어요. 울며 겨자 먹기로, 달리 보면 낭만과 품위를 갖춘 방식으로, 우리 세대 소년 소녀들에게는 펜팔이라는 서신을 통한 교제가 있었으니까요. 아, 맞아! 하고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맞장구를 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그대와 나도 그렇게 잠시 인연이 닿았던 것이겠지요. 1970년대 초입의 어느 시점, 그 즈음에는 학생들을 위한 각종 매체가 많았습니다. 잡지와 신문들, 저는 그 시절을 풍미하던 학생 잡지 뒷면에 실린 펜팔난에서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의 여학생이 올려놓은 주소를 발견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쓸 마음을 먹었습니다. 취미는 사색, 음악감상, 낙서 등, 들뜬 마음으로 밤을 꼬박 지새우며 미지의 소녀에게 첫 편지를 씁니다. 우선 자신의 소개부터 해야 했지요. 사는 곳과 학교, 취미와 장기, 장래 희망 같은 것 등등. 그렇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편지지 절반쯤 써내려가다가 구겨버리고, 또 한 바닥 가까이 쓴 자기소개가 마뜩찮아 또 구겨버립니다. 이 주소로 편지를 쓸 또래 학생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이 정도 편지로는 답장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될 게 뻔합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의 하이틴들은 사방 높게 둘러쳐진 담장 안의 어린 토끼들이어서 이렇게라도 뜀뛰기를 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편지로 소통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한 번으로 편지가 끝난 적도 있고 또 어떤 친구는 한참을 이어가며 소소한 고민거리를 털어놓는 사이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편지로만 소통하는 것이니 과장과 허풍과 엄살도 심했을 테고 진도가 잘 나가면 가장 멋지게 나온 사진 한 장씩 교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왜 그런 철없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저를 나무라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러면서 새삼스럽게 편지를 쓰는 저를 탓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다 늙어 자식들 알면 민망스럽다고 손을 내저으실지도 모르겠군요. 저도 그렇긴 해요. 환갑을 넘긴 제가 까까머리 중학생 때 이야기를 하려니 부끄럽기는 해요. 그러나 온갖 망상으로 힘들긴 했지만 그 시절이 아름답게 추억되는 건 어쩔 수 없나봐요.
요즘은 손전화 문자 발송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는 일상이 되었지만 편지는 여간해서 써볼 엄두가 나지 않는 구습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그건 초등학생만 되어도 갖게 되는 편리한 손전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소통해야 하는 오늘의 변화된 생활 방식 때문이기도 할 거예요. 아이들의 경우 예전에야 집과 학교를 오가는 것이 정해진 동선이고 기껏해야 학교 운동장이나 마을 공터에서 잠시 뛰노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지금은 방과 후 몇 군데 과외 학원을 거치며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야 하니 어른들 못지않은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제가 어렸을 때는 그런 교감이 이루어지는 기회가 흔치 않았어요. 그럴 만한 사회적 환경도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던 시절이었지요. 콩나물시루 같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학교 교실은 만원이었고 이렇다 할 문화생활도 누리지 못하던 때여서 여유로운 문화적 혜택이나 친교가 이루어질 기회가 적었던 시절이었어요. 텔레비전도 동네에서 잘사는 친구 집 마루에 엉거주춤 앉아 눈동냥하듯 봐야 했는데 그때마다 안방에서 비스듬히 누워 과자를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던 또래와 너무나 먼 격차를 느끼기도 했지요.
그에 비하면 미지의 친구와 주고받던 필담은 참으로 낭만적인 교감이었어요. 그래서였을까요. 저는 중학생 무렵부터 편지로 친구를 사귀는 걸 좋아했어요. 이른바 펜팔이라는 것이었지요. 그 디딤돌을 마련해준 건 여러 형태로 발간되던 청소년 잡지와 신문의 펜팔난이었어요. 자신의 취미와 나이, 주소 같은 걸 밝히면 편지로 맺어지는 친구가 생기던 시절 이야기예요.
그 시절의 학생 잡지는 말미에 독자문예란을 마련해 시와 산문들을 실어주었는데 제 글도 가끔 거기에 올라갔고 그 바람에 전국에 있는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어요. 제 문장 수련은 그 시절 편지쓰기로 다 이루어진 것 같아요. 편지를 주고받으며 삶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던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해요.
저의 열대여섯 살은 그렇게 편지를 쓰며 성장했어요. 편지란 긴한 용무가 있어 작정하고 쓰는 경우도 있지만 불현듯 낙서처럼 끼적인 것에 진심을 살짝 얹어 쓰는 경우도 있는 것이겠지요. 어른들은 그걸 편지질이라고 면박을 주곤 했는데, 아마 쓸데없는 해작질 정도로 여겼던 것 같아요. 해외 펜팔은 글로벌한 친구 사귀기와 영어 학습의 한 수단으로 장려되었지만 또래끼리의 이성 펜팔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던 것 같아요. 하지만 편지로만 소통하는 그 방식이 또래끼리의 고민과 현실 저 너머의 꿈을 이야기하는 데 적절한 방식이었던 것도 같아요.
편지로 우정을 나누던 그리운 벗들, 이제 우리 나이가 예순을 넘기기는 했지만 그 시절의 낭만과 사랑을 담아 누군가에게 고운 꽃편지 한 통 띄워보내면 어떨까요.
최영철(崔泳喆) 시인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으로 ‘말라간다 날아간다 흩어진다’, ‘돌돌’, ‘금정산을 보냈다’, ‘찔러본다’, ‘호루라기’, ‘그림자 호수’ 등이 있고 육필시선집 ‘엉겅퀴’, 성장소설 ‘어중씨 이야기’, 산문집 ‘변방의 즐거움’이 있다. 백석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최계락문학상 등 수상.
선생님, 연일 계속되는 폭염에 그동안 강녕하신지요? 무엇 하나 순조로울 것 없는 세상에 날씨마저 이러하니 주위의 장삼이사의 삶들이 무척이나 걱정됩니다. 언젠가 읽은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에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의 고통을 주시할 때 우상을 침묵케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어려울 때마다 이 말을 주문처럼 외며 저는 정치가 통계수치로 제시하는 장밋빛 희망 같은 건 결코 믿지 않고 스스로를 살아왔습니다.
이건 선생님께서 저에게 가르치신 삶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1985년인가 그때 서신에 선생님께선 “삶의 분한(憤恨)을 다 터뜨린다고 해서 문제가 하나라도 해결되는 것이 있던가요? 때론 침묵이 필요합니다”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저는 여기서의 ‘침묵’을 카뮈의 ‘자기의 고통을 주시하는 것’으로 재해석해서 힘들 때도 가능한 한 비명을 지르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한데 두서없이 무슨 서신 이야기냐 하실 것 같아서 3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선연한 그때의 기억을 되짚어보려고 합니다. 저는 올 초 ‘문학사상’에 발표한 ‘내 가난의 고귀한 목록엔 장미의 열정도 있다’는 시에서 “전교 일등 아들을 차마 공장으로 보낸 한과/그 탓에 평생을 룸펜이 되어버린 분노가 있었다!”는 구절을 쓴 적이 있습니다. ‘나이 60에 돌아본 지난 59년이 잘못이었다’는 뜻의 오십구비(五十九非)라는 말이 장자 ‘잡편’에 나오던데, 환갑이 되어서 돌아보니 어쩌면 위의 졸시 두 구절에 제 인생의 코가 꿰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 그때 저는 너무 힘든 시절을 겪고 있었습니다. 제 등단작품 중 하나인 ‘동구밖집 열두 식구’는 저의 가족사로 땅 한 뙈기 없이 죽세공 일로만 호구지책을 삼던 그때에, 삼부자가 임란 의병으로 전사한 제봉 고경명의 12세손이 당신이라는 것을 되뇌던 아버지의 주사(酒邪)가 지금의 폭염처럼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공부에서 중동무이당한 채 세상과 삶에 대한 분노로 10여 일간 서울, 부산 등지로 고단(孤單)의 행로에 몸을 맡겼었습니다.
그나마 유일하게 놓지 않았던 소설가의 꿈 때문에 손엔 늘 책이 잡혀 있었던 그 즈음, 방위 복무를 마치고 부산에서 양장점 수선가게를 하던 여동생 집에서 잠시 기거하던 1984년이었습니다. 할 일이 없어 서면의 ‘영광도서’에 들락거리던 중 우연히 시집 두 권을 보게 되어, 이를 계기로 일주일 만에 20여 편의 시를 써서 무모하게 ‘실천문학’에 보냈습니다. 한데 그중 7편이 실천문학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실려 소위 등단이라는 것을 하였는데, 저를 포함한 14명의 농민, 노동자, 운동권 사람 등의 투박한 시들을 묶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시 발표를 등단이라고 생각지도 않고 다시 소설을 쓰고 있던 차, 당시 ‘창작과비평’의 주간이었던 선생님께서 창비 앤솔로지에 게재할 시 5편을 청탁해주셔서 본격적으로 시를 독학하기 시작했으나 청탁에 응한 시는 게재되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시적 재능을 보았기에 선생님께서 청탁하신 걸로 스스로 해석해서 저는 1985년부터 한 번에 20~30편의 시를 대학노트에 써서 선생님께 무턱대고 보냈습니다.
아무 물정도 모르던 저는 오로지 공부에 대한 일념 하나로 원고노트를 보냈었는데 선생님께선 이를 무시하지 않고 원고지 한두 장에 꼭 독후감을 써서 보내주셨습니다. 그중 서두에 밝힌 평생 저의 삶의 철학이 된 말씀을 백석의 ‘주막(酒幕)’이라는 시와 함께 써서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제 시가 분노와 한풀이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시는 긴장과 절제의 미학이다”라는 말씀도 해주셨는데 이는 제 시가 쓸데없이 무슨 뱀의 다리처럼 길어졌기 때문이었겠지요. 읽으신 시에 ○표나 ×표 혹은 Δ표 등으로 표를 해주고 그중 ○표의 시들은 몇몇 잡지에 발표도 해주시길 2년 여, 저는 마침내 농촌·농민 얘기를 쓴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라는 첫 시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객지를 떠돌다 선생님께 시를 배우며 마음을 잡고 고향에 내려와 소작(小作) 일도 하던 중이었습니다.
이런 선생님과의 인연을 몇 군데 약간씩 밝히기도 했습니다. 한데 이렇게 정식으로 편지를 드리게 된 것은 저는 ‘독학자’이기에 그 어떤 스승도 없으나 그래도 제가 오늘날까지 나름의 인생을 살아왔다는 자부심의 근거에 선생님의 가르침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시집 8권, 산문집 3권 그리고 문학상도 네댓 번 탔으니 이는 시인으로서의 덤이지요.
만약 그때 선생님께서 제 원고노트를 외면하셨다면 어쨌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씩 해봅니다. 사람들은 이런 가정이 부질없다고 하겠지만 저에게는 그만큼 삶의 허기와 동시에 삶의 과잉으로 모든 신(神)들과도 전쟁을 치르던 시절이었기에, 그때 선생님의 짤막한 서신들은 저에겐 시원지(始原地)의 단물 같은 것임에 분명했습니다.
선생님, 저에게 있어 가난과 병고며 불우는 여전히 개선될 여지가 없어 이런 것들에는 이제 무심하기도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외아들의 난치병 때문에 크게 실망한 저는 10여 년 전부터 다시 고향 집에 처박혀버렸습니다. 고향집에 우거하며 텃밭에 상추며 고추를 심고 불교도 배우고 좌선도 해보지만 큰 효과는 거두지 못합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당뇨망막증 때문에 예전처럼 책을 많이 못 읽는다는 것과 ‘대표시’ 한 편은 남겨야겠다는 욕심이 날로 커져간다는 사실입니다. 요새만큼 저의 ‘천학비재(淺學菲才)’를 절감할 때가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 선생님께서 중앙일보 아침 시란에 “고재종의 시는 때론 수일하고 때론 속악하다. 속악하다 함은 명품주의(名品主義) 탓이다”라는 정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데 그 명품주의는 저의 무학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지만 지금도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한 시집 자서에 밝힌 대로 오월 바람에 잎새가 한 번 발랑 뒤집히는 순간만큼을 포착한, 그야말로 신운(神韻)이 스치는 시를 받아 적어야할 텐데 말입니다.
한데 인간사는 여전히 고단합니다. 시골에 있으니 생사가 너무 분명해 보이고,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가 아니라 실제 등이 활처럼 휘어버린 호호백발들이 유모차로 고샅길을 밀고 다니는 모습을 매일 보며 저는 여전히 ‘민중파’임을 절감합니다. 그 노인들의 이름이라도 시로 불러주는 것으로, 지금껏 선생님께 약주 한잔 대접해드리지 못한 저의 미급과 부덕을 대신하려 합니다. 하루하루 행복하시길 빕니다.
고재종(高在鍾) 시인
1984년 실천문학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로 등단.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 역임.
시집으로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새벽 들’,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과 육필시선집 ‘방죽가에서 느릿느릿’이 있고, 시론집으로 ‘주옥시편’과 산문집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 등이 있음.
충주 땅 변두리 후미진 동네에 사는 너를 찾아간 것은 들판에 황금빛 물결이 일기 시작하는 어느 해 가을이었지. 논에는 벼농사, 밭에는 주로 사과 농사를 짓는 마을. 사과 과수원에는 누런 잎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나뭇가지마다 매달린 사과들은 태양의 후예들인 양 붉은 빛깔로 여물어가고 있었어. 모처럼 찾아온 나를 위해 너는 한 과수원으로 데려가 사과 한 상자를 사서 선물이라며 안겨준 뒤, 손수 차를 몰아 마을 변두리에 있는 큰 저수지 부근으로 데려갔지.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늘 혼자 가서 머물다 오곤 한다는 너만의 성소(聖所)로!
네가 말한 성소는 저수지를 둘러싼 울창한 숲속 무덤 몇 기가 있는 아늑한 장소였어. 한낮인데도 도래솔 몇 그루가 무덤 둘레를 감싸고 있어 자연스레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적요한 품에 들자 성소라는 네 말이 실감으로 다가왔지.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명상에 들기에 안성맞춤인 곳.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 내면으로 잠수할 수 있는 곳. 우리는 마른 잔디 위에 앉아, 깊고 푸른 저수지 물결을 내려다보며 한가로움을 즐겼고, 잠시 눈을 감고 명상에 들기도 했지.
그렇게 너를 만나고 온 후 보름쯤 지났을까. 후배를 통해 너의 갑작스런 부고를 들었지. 청천벽력이었어! 우리는 이제 쉰 살을 막 넘은 나이였고 정신적, 영적으로 토실토실 여물어가는 때였지. 평생을 목회자로 살아온 너는 자발적 가난을 택해 남들이 가려 하지 않는 시골 오지로 스며들어, 노인들이 대부분인 교우들을 지극정성으로 섬기고 살았어. 예수의 거룩한 종지(宗旨)를 따라 살려는 이들은 점차 줄어들고, 천민자본의 코뚜레에 코가 꿴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세상을 직시하며 너는 마지막까지 올곧게 살려고 몸부림쳤지.
네가 세상을 떠난 뒤에, 매스컴에서는 너의 아름다운 삶을 기리는 보도가 줄을 이었지. 죽기 1년 전에 네가 작성해놓은 유서도 공개됐어. 그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유서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너의 갑작스런 죽음을 더욱 안타까워했지. 그때 네가 남긴 유서의 일부야.
나는 오늘까지 주변인으로 살게 된 것을 감사하고/모아 놓은 재산 하나 없는 것을 감사하고/목회를 하면서 호의호식하지 않으면서도 모자라지 않게/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이 땅에서 다른 무슨 배경 하나 없이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고/앞으로도 더 얻을 것도 없고 더 누릴 것도 없다는 것에/또한 감사하노라.//사람들의 탐욕은 하늘 높은 줄 모르며 치솟고/사람들의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내달리며/세상의 마음은 흉흉하기 그지없는 때에/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음에 참으로 감사하노라.
이쯤에서 내가 너를 만나게 된 사연을 잠깐 얘기해볼까 해. 우리가 만난 건 강릉 땅에서였지. 서울에서 ‘기독교사상’이란 잡지 일을 하던 나는 필화사건이 터져 회사에서 쫓겨났지. 나는 부득이 홍천 땅으로 가서 잠시 목회를 하다가 네가 사는 강릉의 해변가에 있는 농촌 교회로 부임했어. 너는 강릉 시내에서 아주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었고, 민주화운동을 위해서도 헌신하고 있었지.
그렇게 사회운동에 열정을 쏟으면서도 여린 감성을 지닌 너는 시를 사랑하는 문학도였고, 어린 시절 조부에게 한문을 배운 터라 동양 경전에도 해박했어. 서로의 공통된 관심이 우리를 가깝게 했고, 우린 자주 붙어 다녔지. 주위에선 그렇게 붙어 다니는 우리를 보고 놀리곤 했어. “전생수는 고진하의 보디가드 같다”고. 나는 60kg이 채 나가지 않는 홀쭉이였고, 너는 내 몸무게의 두 배나 되는 뚱보였으니까. 물론 남들의 그런 놀림도 너는 개의치 않았어.
우리는 그렇게 친했지만, 어쩌다 객지에서 만나 여관 같은 데서 함께 잠을 자게 될 때는 좀 힘들었어. “내가 코를 좀 심하게 고니까 너 먼저 자!”라고 늘 말하곤 했지만, 내가 잠을 청하려 애쓰다 보면 너는 항상 먼저 잠에 떨어져 천장이 들썩거릴 정도로 심하게 코를 골았으니까. 그렇게 잠을 설치고 난 어느 날 아침에 국밥을 먹으며 너는 병든 후배가 입원하고 있었던 병상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함께 킬킬대며 웃었지. 후배가 입원한 병원에서 불편한 쪽잠을 자고 나오는데, 같은 병실에 있던 이들이 이렇게 쑥덕거리더라는 거야. “코 고는 소리가 어찌 큰지 시골 경운기 가는 소리 같았어!” 너무 미안한 너는 병실을 나오며 이렇게 대꾸했다고 했어. “죄송합니다. 시끄러운 경운기는 이만 물러갑니다!”
하여간 그렇게 네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나는 시골로 솔가해 잡초를 키우며 살고 있어. 너 역시 목회생활을 마치고 자유로워지면 네 고향에 돌아가 소나 몇 마리 기르며 살고 싶다고 했지. 그처럼 소박한 바람을 왜 하느님은 들어주지 않고 일찍 데려가셨는지? 네가 살던 충주 땅 부근을 지날 때나 촉촉이 비가 내려 문득 네가 그리워질 때면 원망을 담은 이런 물음을 하늘에 던져보기도 하지. 그리고 네가 남겨둔 시 몇 구절을 혼자 읊조리며 위로를 받아.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도/본디 제 맘이 아닌/우주의 움직임//사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낙담하지 말라/그대 속에 그대보다 더 큰 숨이/물결치고 있나니/그 숨결 속에 그대 삶을 묻으라.
나뭇잎 한 잎 떨어지는 것도 ‘우주의 움직임’이라는 겸허한 네 통찰 앞에서 나는 절로 옷깃을 여미게 돼. 그리고 작은 우리 속에 ‘더 큰 숨이 물결’친다는 너의 시구를 보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넌 이미 우주의 비의(秘意)를 깨친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곤 해.
네가 이승에 있을 적에 가끔씩 꽃엽서를 주고받곤 했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네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쓸 줄은 몰랐어. 그래도 너의 이름에 기대어 편지 몇 줄을 쓰면서 꽃보다 향기롭게 살았던 너의 삶을 조금이나마 드러내고 싶었어. 물론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네가 사랑했던 불우한 이 땅의 민초들, 저 산과 들의 이름 없는 풀꽃들이 네 아름다운 삶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지만 말이야.
고진하(高鎭河) 시인·목사
강원 영월생.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얼음수도원’, ‘거룩한 낭비’, ‘명랑의 둘레’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시 읽어주는 예수’, ‘잡초치유밥상’, ‘조금 불편하지만 제법 행복합니다’가 있다. 영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수상. 현재 한살림교회 목사.
몇 해 전 소설 을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개인적으로 소설가 김훈을 좋아한다. 사물의 본질을 캐 들어가는 생각의 집요함에 몸서리가 나지만 그의 언어는 절제되고 담백하여 울림이 크다. 때로 그의 언어가 고답적이고 사변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산문집 을 읽으며 그 생각이 바뀌었다. 본질적으로 그의 언어는 머리가 아닌 몸의 언어다. 그가 ‘길’에 천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 은 감독(황동혁)의 영화라기보다 작가 김훈의 영화다. 이미 원작을 통해 빽빽이 작가가 세워 놓은 말의 숲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아니 감독은 애초에 그 삼엄한 언어의 포위망을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영화가 전쟁을 배경으로 함에도 창과 칼보다 언어가 주 무기가 된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매우 한국적인 ‘말의 전쟁’이 탄생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십 년 전 정묘년에 호란을 겪었으면서도 명나라를 향한 명분론에 사로잡힌 조정은 아무 대비도 없이 또 한 번의 호란을 맞이한다. 정보는 어두웠고, 군대는 허약했으며, 국가 시스템은 흐트러졌다. 지난번처럼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계획은 공신들의 이기적 작태와 정보 누설로 막혀 부득이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버틸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한겨울 추위와 허기로 가득 찬 47일간의 기록이다.
영화는 소설처럼 장으로 나뉘어 다큐멘터리처럼 진행된다. 영화 초반 김상헌이 성으로 함께 들어가자는 말을 듣지 않은 뱃사공을 죽이고 나중 그의 손녀 나루가 성에 들어오면서 작은 스토리가 만들어지나 영화의 큰 줄기는 척화파 김상헌(김윤석)과 주화파 최명길(이병헌)의 말싸움으로 구성된다. 미래를 모르니 판단할 근거도 없고 결론도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식량이 떨어져 간다는 냉혹한 현실뿐이다.
영화의 또 다른 축은 영의정 김류로 대표되는 이기적이고 권위적인 기득권층과 대장장이 서날쇠(고수)로 대표되는 민초의 대비다. 자신의 실패를 부하에게 뒤집어씌워 죽이는 김류의 비겁한 행위와 자신의 의무도 아니면서 김상헌의 부탁으로 적지로 뛰어드는 서날쇠의 행동은 비록 상투적이기는 하나 낡고 썩은 권력의 위선을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를 극대화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영화의 백미는 김훈의 현란한 내공이 발휘된 김상헌과 최명길의 언어 대결이다. 둘의 논리는 한 치의 빈틈이 없어 우열을 가릴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둘 모두 ‘길’을 말한다는 점이다. 죽음을 각오하여 열리는 진정한 삶의 길도 있고, 비루하지만 삶으로써 얻어지는 내일의 길도 있다. 그리하여 김상헌은 자결로써 죽음을 얻었고, 최명길은 항복이라는 치욕을 통해 삶을 얻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오늘의 현실을 떠올리며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오늘날 우리 정치가 보여주는 지리멸렬함과 해묵은 명분 싸움의 뿌리가 이리도 길고 깊다는 것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 때문이었다. 당시는 정보가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다 해도 모든 정보를 손바닥 보듯 하는 지금도 여전히 전근대적인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며 역사 위에 잠자는 기분이 들어 모골이 송연했다.
영화가 사실과 다른 장면이 하나 있다. 영화에서는 김상헌이 자결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사실 그는 죽지 않고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82세까지 장수했다. 오늘에는 지탄의 대상인 그의 명분론은 조선 사회를 지배하는 키워드로 그의 후손들이 승승장구하는 바탕이 된다. 그로부터 시작된 안동김씨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주역이 되며 망국의 씨앗이 되었다는 아이러니가 씁쓸하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최학 소설가께서 故김용덕 교수님께 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김 교수님.
참으로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을 흘려보내면서, 더러 예전 초등학교 시절의 방학숙제를 떠올리듯 가끔 교수님을 생각하긴 했지만 ‘인사’는 엄두조차 내질 못했습니다. 그곳에서 잘 계시겠지요? 이런 치렛말은 모두 생략하겠습니다. 교수님은 이미 ‘그곳’, ‘계시다’ 등등의 언어들과도 전혀 무관하실 테니 말입니다. 따라서 제 인사는 단지 저 혼자의 회억이고, 제 자신에게 들려주는 독백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1980년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그 전해, 한국일보사가 우리나라 사상 초유인 1000만원의 원고료를 내걸고 장편소설을 공모한 일이 있었지요. 대상은 기성작가와 신인을 망라하는 것이었습니다. 1973년 모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발을 들여놓고 있던 저는 그 몇 년 사이 작품 발표의 지면조차 제대로 얻지 못한 채 낙백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지요. 그런 때에 광고를 보곤 결심을 했습니다. 좋다, 다시 공개 경쟁에 나서보자. 무명 신인작가의 설움을 씻을 호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시 서울의 한 조그만 잡지사에 근무하고 있던 저는 동료 직원들의 양해를 얻어 반년 넘게 소설쓰기에 매달렸습니다. 신촌의 와우아파트라고 아시죠? 어느 날 한 동(棟)이 와르르 무너져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파트. 제가 그 아파트의 단칸방 하나를 얻어 살고 있었습니다. 돌이 갓 지난 딸애가 엉금엉금 제게로 기어오면 발로 아이를 밀어내면서 원고 칸을 메워나갔지요. 그렇게 완성한 작품이 홍경래의 난을 소재로 한 장편 역사소설 이었습니다.
운 좋게 그 소설이 당선되었습니다. 신문 한 면 가득히 심사평, 당선소감, 인터뷰 등 저에 관한 기사가 실린 다음 날부터 세상이 달라지더군요. 작품을 들고 가도 거들떠보지 않던 문학지 편집자들이 먼저 연락을 해서 작품을 달라지 않나, 미리 장편 출판을 계약하자면서 출판사 사장들이 번갈아 찾아오질 않나(교수님 생전에는 문자메시지 같은 것도 없어서 모르시겠지만, 요즘은 이런 문장 뒤에는 꼭 ‘ㅎㅎ’ 혹은 ‘ㅋㅋ’ 같은 이상한 부호를 붙인답니다. 옛사람들이 쓰던 ‘가가(呵呵)’와 흡사합니다).
아무튼 저는 그 덕에 화곡동에 마흔두 평짜리 단독주택을 마련했으며 전업작가의 길로 나선다고 출판사도 때려치웠습니다.
매일 이 신문에 연재되고 있던 그 해, 교수님으로부터 뜻밖의 엽서를 받았습니다. 좋은 역사소설거리가 있어서 작가에게 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교수님의 존함은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저는 놀라움과 반가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화신백화점 옆에 있던 ‘종로다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교수님을 뵈었습니다. 단아한 모습에 말씀도 적으셨지요. 뒤늦게 셈해보건대, 그때 교수님은 쉰을 갓 넘긴 연세였고 저는 겨우 서른에 올라선 철부지였습니다. 온전히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그때 주신 말씀의 대강은, 여러 해 동안 ‘기축옥사(己丑獄事)’에 관한 연구를 해봤는데 연구를 할수록 여기에 숨겨진 이야기가 많음을 알게 되었다,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이 이야기를 논문으로는 생동감 있게 독자에게 전할 수가 없다, 누군가 역사에 관심 있는 작가가 이를 소설로 형상화해주면 좋겠다, 그러면서 관련 저술이 든 노란 봉투를 제게 넘겨주셨지요. ‘역사가는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없지만, 작가는 위대한 역사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인용하시며 저를 부추겨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날 선선히 제가 그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것도, 저 또한 이전부터 이 사건에 소설가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589년 전주에서 정여립이 반란을 꾀한다는 고변이 있었고 이로써 수백 명이 희생을 당한 옥사의 실상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 송익필 등의 음모론을 실증적으로 제기한 최초의 현대 역사가가 바로 교수님임은 누구도 부인치 못합니다.
서경덕, 이황, 기대승, 이이, 조식 같은 선학(先學)은 물론 정철, 유성룡, 이발, 김성일, 이산해, 김장생, 조헌, 허엽, 허봉, 김우옹, 성혼 등 조선 중기의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죄 이 사건에 관련돼 있었기에 이를 소설화하는 일은 곧 우리 역사소설의 한 정점을 긋는 일이며 그 작업은 지난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저는 당시에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여 교수님께 약속을 드리고서도 저는 쉬 작업에 들 준비를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딴짓거리를 하며 세월을 허비하는 중에도 그 약속은 무슨 채무인 양 제 심중에 남아 무게를 더해갔던 것도 사실입니다. 10년이 더 지나서였습니다. 홀연 교수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뒤늦게 사실을 안 저는 장례에도 참석치 못한 죄스러움에 한동안 몸을 떨었습니다. 돌아가시기 두 해 전쯤이었던가요? 교수님은 또 한 번 제게 서신을 주셨지요. 대전에 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잘 지내느냐? 그런 안부의 글이었지만 저는 마치 질책하시는 것만 같아 답장조차 드리지 못했습니다.
15년 전쯤 됩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여겨 방학을 맞아 안동 지례마을에 들어갔습니다. 산골 한옥 뒷방에 들앉아 한 주일 꼬박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500여 장을 만들었는데 다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한 달 후, 읽어보곤 주저 없이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2005년 교환교수로 중국 남경에 가 있는 동안은 전초작업이라 여기며 화담 서경덕에 관한 장편소설 한 편을 완성했습니다.
교수님, 종로다방에서 만났던 그 새파란 작가가 어느새 교수님보다 더 긴 세월을 대학 교단에 있다가 재작년 정년을 맞았습니다. 그러곤 소설을 쓰겠다고 충청도 연산 산골에 임시 거처도 하나 마련했습니다. 첫해를 어영부영 보낸 뒤, 올봄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지난 주말 1300장을 넘겼습니다. 2500장은 돼야 마무리가 될 듯합니다. 일단 이야기를 주재하는 동안은 퇴계, 율곡 같은 이도 사료를 근거로 제 의도껏 주물러볼 요량입니다. 제가 이미 율곡 죽은 나이보다 17년을 더 살고 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1584년에서 1589년, 이 과거 5년의 시간에 몰입돼 있는 요즘의 나날이 제겐 경이입니다. 제 거처에서 5분만 걸어 나가면 김장생이 걸었던 길을 만나고, 차로 10분만 나가면 정여립이 머물렀던 절간 마당에 섭니다. 아, 그래서 누군가가 저로 하여금 이맘때 이곳에 있게 했구나 싶은 생각마저 들 때가 많습니다. 명랑하게 들려오는 매미소리, 새소리도 제겐 16세기 말의 것이 됩니다.
성패는 뒷전으로 돌리겠습니다. 내년 봄날, 상하 두 권짜리 소설책을 존경하는 김용덕 교수님 묘소에 놓을 수 있다면, 종로다방에서 드렸던 제 약속을 지키는 것이 된다고 여기겠습니다.
최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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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경북 경산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 졸업.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 등단.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 당선. 1981년~현재 우송대 교수. 고려대문인회 회장 역임. 현재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 회장. 저서로 창작집 ·, 장편소설 ·, 산문집 ·· 등.
장석주(張錫周·62) 시인의 트위터 자기 소개란에는 ‘산책자 겸 문장노동자’라고 쓰여 있다. 그는 현재 자신의 삶을 가장 잘 드러내는 두 단어라고 이야기한다. 장 시인의 하루는 매일 걷고, 읽고, 쓰고, 단순하지만 풍요로운 사색으로 채워진다. 산문집 은 그런 그의 일상에 온유한 자극을 준 책이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매일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신간을 살펴본다는 그는 1년에 주문하는 책만 1000권에 달하는 독서광이다. 포털사이트에 그의 이름으로 된 책을 검색하면 100여 권이 나올 정도로 집필 작업도 충실히 하고 있다. ‘문장노동자’라는 별명이 꼭 들어맞는다. 그런 그가 추천한 도서 에는 영미 작가들의 아름다운 산문 32편이 담겨 있다.
“최근 읽은 산문집인데 자연이나 인생에 대한 성찰이 잘 녹아 있어요.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의 글들인데, 훨씬 여유가 느껴지고 글맛이 깊더라고요. 이런 책이 두루 많이 읽히면 좋겠다는 생각에 추천하게 됐죠. 저도 천천히 음미하면서 다시 읽고 있어요.”
길어진 중년, 적당한 긴장감이 필요하다
여러 주제의 산문 중에서도 그는 알도 레오폴드의 ‘산처럼 생각하기’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소나무의 죽음’ 등 자연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글이 인상 깊다고 했다. 평소 자연을 바라보는 풍부한 시선을 따뜻하고 지적인 언어로 표현해온 장 시인다웠다.
“인간의 평안과 안위 때문에 자연이 훼손되고 있잖아요. 그런 데서 오는 생태계 불균형이 결국 고스란히 우리에게 오게 될 텐데, 인간은 너무나 무관심하죠. 글에도 늑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제가 1960년대 서울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늑대 울음소리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런데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돼버렸잖아요. 책을 읽고 그런 문제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중년 이후 꽃, 나무 등 자연에 관심을 두는 이가 많다. 그는 “자연이 눈에 들어온다는 것은 나이 들었다는 증거”라며 “생존 경쟁에서 물러나 삶에 여유가 생긴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이 책에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다소 느슨해지는 중년의 삶을 묘사한 ‘오버롤스 작업복’이라는 글이 나온다. 소작농들이 입는 작업복인 오버롤스 세 벌을 각각 초기 중년, 중년, 후기 중년 단계로 설명했는데, 장 시인은 비유가 아주 탁월하다며 감탄했다.
“예전에는 30대 후반만 돼도 중년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마흔이 훌쩍 넘어도 중년이라는 생각을 잘 안 해요. 수명이 늘어났기 때문인데, 그래서 중·장년기가 상대적으로 더 길어졌죠. 그런 중년의 삶을 세 단계로 나눠 옷에 빗대 설명했는데 정말 참신하더라고요. 새 옷은 솔기도 살아있고 옷감도 견고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단추도 헐거워지고 천도 닳아서 얇아지죠. 처음에는 깨끗하지만 빳빳해서 불편했던 작업복이 삶의 흔적대로 때가 묻기도 하고 해지기도 하면서 내 몸에 점점 익숙하고 편안해져요. 그런 은유가 중년의 삶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우리의 인생도 세월이 더해질수록 오버롤스처럼 부드럽고 느슨해지니까요.”
저자 제임스 에이지는 후기 중년 오버롤스를 ‘여전히 제구실을 완전히 해내며 최고로 편안한 단계’라고 설명했다. 장 시인은 나이가 들며 누리는 편안함은 양면성을 지닌다고 말했다.
“삶이 여유로워졌다는 면에서는 좋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태롭고 의욕이 떨어지기도 하죠. 꿈이나 생의 약동에서 멀어지는데 그러다 보면 아무렇게나 막 살아버릴 수 있거든요. 그러면 삶의 질이나 자기존중감도 떨어지죠. 중년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가장 활동적으로 살아야 할 시기이거든요. 뭔가를 이뤄낼 수 있는 나이에 느슨해지고 희미해지면 안 되죠. 적당한 긴장감을 느끼고 삶을 탄력적으로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길어진 중년의 삶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생각해요.”
책 읽기는 뇌의 유산소 운동
그는 삶의 탄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즉 자기성찰을 하라는 말인데, 이를 실천하고 도울 방법으로 ‘책 읽기’와 ‘미니멀라이프’를 제시했다.
“책 읽기는 뇌의 유산소 운동과 같아요. 뇌에도 근육이 있는데, 책을 읽지 않으면 뇌의 유연성이 떨어지죠. 시집과 철학책은 뇌에 좋은 자극을 주고,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줘요. 인간에게는 세 가지 기억이 있어요. 절차기억, 학습기억, 신념기억. 절차기억은 아기가 엄마 젖을 빠는 것과 같은 선천적인 기억이고, 학습기억은 책 읽기나 경험을 통해 얻는 것, 신념기억은 정치나 종교적인 기억을 뜻해요. 그런데 책을 읽지 않으면 학습기억이 줄고 그 자리를 신념기억이 차지하거든요. 그러면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융통성이 없어지죠. 그렇기 때문에 나이 들수록 책을 읽고 학습기억을 키워 균형을 맞춰야 해요. 그래야 다른 세대와 원활히 소통할 수 있습니다.”
책은 많이 읽는 것이 삶에 이롭지만, 그 외의 것들은 최대한 적게, 단순하게 하는 것이 현상의 본질을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최소한의 것으로 최대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고 있다는 그는 적게 소유할수록 크게 생각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너무 많은 것들이 복잡하게 쌓여 있으면 그 물건의 진가가 잘 안 보여요. 겉으로는 풍족해 보일지라도 그 하나하나의 가치는 희석돼버리고 말죠. 불필요한 요소들을 걷어내고 꼭 필요한 것만 남겼을 때, 가진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어요. 물건뿐만 아니라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욕심이나 사심을 비워냈을 때 본인의 가치를 발견하고,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죠.”
비울수록 충만해지는 행복을 경험하고 싶지만, 막상 물건이든 마음이든 비워내려고 하면 쉽지 않다. 수긍이 가는 말들이지만 결국은 실천이 문제다.
“버리는 삶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아요. 무언가를 많이 가지고 있어야 안심하고, 움켜쥐려는 성향이 강하거든요. 옷장을 열면 옷이 가득한데도 입을 옷이 없다고 하죠. 몇 년째 입지 않은 옷들이 걸려 있으니까요. 그러면 버리거나 누구에게 주거나 해야 하는데, ‘언젠가는 입을 거야’라는 생각에 그대로 걸어두죠. 하지만 그 ‘언젠가’는 오지 않을 확률이 높아요. 특히 나이 들어서 갖는 그런 욕망을 노욕이라고 하는데 남들이 볼 때 굉장히 추합니다. 불편하고 쉽지 않겠지만 실천적 결단이 필요하죠. 우리는 단호해질 필요가 있어요.”
삶의 단순화에 대한 장 시인의 시각은 그의 산문집 에 잘 나타나 있다. 모든 군더더기를 없애고 최소화하려 하지만, 독서와 산책만큼은 충분히 즐긴다. 글을 쓰는 게 그의 일이기에 육체보다는 정신적 노동에 과부하가 걸리곤 한다. 그럴 때 산책을 하면 어지럽혀져 있던 생각을 정리하고 비울 수 있기 때문에 정신적 피로를 푸는 데는 효과만점이라고.
“걷다 보면 사유가 깊어지고 자기성찰에 몰입할 수 있어요. 잡념은 사라지고 내면의 기쁨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죠. 물론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요. 무엇보다 걷는 동안 내가 살아 있다는 행복을 오롯이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가보지 않은 길이 더 아름답다.’ 라는 말을 ‘로버트 프로스트’라는 시인이 했다.
박완서 작가님의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 라는 산문집도 있다.
두 갈래 길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 갔다면 그 다른 쪽 길은 어땠을까 궁금하고 그쪽으로 가 볼 걸 후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선택의 연속으로 인생을 살아나간다. 때로는 선택을 잘못할 수도 있고 어쩌면 잘한 선택이라고 미소를 지을 수도 있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커서 무엇이 될까 상상을 많이 한다.
그러나 어떤 다른 일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하거나 다른 쪽으로 가야만 했었을 때 가지 않았던 길을 그리워하게 된다.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는 의미는 못 가봤기 때문에 아쉽고 후회된다는 뜻과 못가 본 길이기에 더 아름답게 생각될 수 있다는 뜻일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인터넷에 어느 외국계 은행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목소리 봉사에 지원해 보라는 배너광고가 눈에 띄었다.
순간 필자의 어렸을 때 꿈이었던 성우가 생각나고 한번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 낭독 발표나 책 읽는 것은 도맡아 했었고 어릴 때는 영화 한 편을 보고는 동네 또래들을 모아놓고 그 내용을 이야기했는데 정말 영화를 직접 본 것처럼 재미있다고 열광적인 반응을 받았던 적 있는 만큼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았었다,
그러나 살면서 더 재미있는 일에 몰두해서인지 어릴 때의 꿈을 실현할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다른 것보다 목소리 연기만큼은 자신 있을 것 같아 신청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동안 또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신문에서 그 기사를 읽었다. 목소리 재능 기부자 100명을 모집하는데 전국에서 2만 명이 신청했다고 한다.
현직 성우들 앞에서 한 사람당 1~2분 정도의 대본을 읽으며 목소리 연기를 하는 시간을 주었단다.
지원자는 각양각색의 사연을 가진 분들로 ‘가족 중에 시각장애인이 있어서,’ 또는 ‘장애인을 돕고 싶어서,’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라며 따로 보수를 주는 것도 아닌 순수 봉사인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지원해 왔다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용 오디오 북을 위한 목소리 기부. 필자가 신청했다 해도 선정이 됐을지 아닐지는 모르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오디션이 만만치 않은 어려운 시험이었던 것 같다.
시험관인 성우들은 아무리 애절한 사연을 가지고 지원했다 해도 그런 것보다는 음성과 발음 그리고 표현력을 우선으로 보았다니 필자가 합격하기에는 어려웠을 듯하다.
그래도 한번 용기를 내어 지원해 볼걸. 후회가 된다.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이다.100명 모집하는데 2만 명이 왔다니 19,900명이 떨어진 셈인데, 이 일로 유명해지는 것도 아니고 보수가 있는 것도 아닌 자원봉사에 뜻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데 이 사회의 따뜻함이 느껴지고 마음이 훈훈하다.
다음에 혹시 이런 기회가 있다면 떨어질지언정 늦지 않게 지원을 꼭 해 보아야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