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중에 우리는 가끔 사내대장부라는 말을 사용한다. 대장부란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대장부란 큰 대(大), 어른 장(丈), 사내 부(夫)자로 써서 큰 어른의 남자라는 말로 참으로 남자다운 남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천하의 큰 뜻을 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시속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며, 뜻을 이룬 후에도 교만하지 않고, 뜻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비굴하지 않은 사람이다.
대장부라면 모름지기 천하의 가장 넓은 곳에 살며, 천하의 가장 바른 지위에 서서, 천하의 가장 큰 도를 행하여야 하오. 그리하여 뜻을 이루면 백성과 더불어 말미암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하여, 부하고 귀하여도 능히 음란하지 않고, 가난하고 천하여도 능히 지조를 잃지 않으며, 위엄과 힘을 가지고도 능히 굽힐 수 없는, 그런 사람이야말로 대장부가 아니겠소?”
어느 날 도울 선생의 스크린 강좌 '고구려'에 대한 강의를 듣는 기회가 있었다. 동북아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갖게 되어 필을 들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후 축소된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된 것이다.
통상 역사서가 앞의 나라를 기술하다보니 그 이전의 역사를 폄하시켜 기록하는 경향이 있다. 그에 따라 신라시대 이전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 삼국유사나, 조선시대 고려의 역사를 쓴 기록, 일제 강점기에 쓰인 조선의 역사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외의 역사 일본의 '서기' 중국의 과거 역사서등을 보면 그 실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고구려, 발해, 고려를 이어 오늘 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동북아 지역의 주인공이자 대장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 수나라와 당나라는 왜 그다지도 애타게 고구려를 공격하였던가?
중국은 동북아의 고구려가 존재하는 한 천하통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당시 아시아권의 패권은 과거 중국과 고구려가 양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죽음을 무릅쓰고 천하통일을 기하려고 애를 썼던 것이고 우리나라는 중국과 당당하게 대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 옛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이런 생각을 포기하면서 국토가 쭈그러들고 대장부의 기개가 꺾인 것 같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이제 과거 동북아 지역의 맹주로서 중국과 함께 대등하게 경쟁하던 대장부의 기개를 회복하기 위해 모두 힘을 뭉쳐야 할 시점에 이른 것 같다. 하루빨리 통일을 하고 잃어버린 우리의 영토를 찾아 조상대대로 이어온 홍익인간의 이념을 실현하는 국가로 거듭 태어나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역사를 바로 배워 정확한 국가적 목표를 확립하여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 인류공영의 대의를 실현시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민족은 역사적으로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거나 단합이 필요할 때는 뭉쳐서 이를 이루는 좋은 유전인자를 보유하고 있다. 그 사례로 가까이는 6.25 사변을 극복했고, 일본으로 부터 독립을 쟁취했는가 하면 임진왜란을 진압하고 2002년 월드컵에서는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통한 나라가 아니었던가?
일본과 같은 나라는 백제국의 후예로서 우리와 경쟁상대가 아닌 우리의 주변 국가에 지니지 않으니 과거 고구려 사람들이 지녔던 대장부의 기백을 이어받아 옛 국토를 수복하여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국민으로 거듭 태어나야 할 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 내우외환의 위기에 봉착한 국난을 타개하여 세계적인 국가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는 단합과 총화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최근 중국의 사드배치에 대한 압력으로 수입규제 조짐 등에 대한 것을 방관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서사군도 분쟁 시 보여준 베트남처럼 당당하게 중국과 맞서야 할 것이다. 그래야 중국도 우리나라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당당하게 대장부의 기상으로 분연히 대처해야 하는 시국인 것 같다. 우리는 뭉치면 흥하고 분열하면 망하는 역사적인 사실을 반추해서 좌우대립이 아닌 통합의 길로 도약의 전기를 마련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삼국시대 한반도와 만주에 살고 있던, 오늘날 ‘한국인’이라고 부르는 우리 선조들 간에 말이 통했을까?
언어의 진화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오늘날 어린아이들이 하는 말을 어른들이 못 알아듣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천년 넘게 고립되어 진화되어 온 제주도 방언을 본토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건 당연하다. 산이나 강으로 나눠진 채 교류가 없이 지나온 삼국시대 선조들 간의 말이 다를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삼국시대는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다. 삼국 간에는 물론이고 말갈, 부여, 낙랑, 마한, 진한, 변한, 가야, 왜 등 주변 국가들과도 끊임없이 접촉하고 충돌하면서 일면 국제정치의 냉혹함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 시기였다.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언어이다. 같은 말을 쓰고 서로 간에 말이 통하면 ‘우리라는 감정(we-feeling)’을 느끼게 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야만인’은 우선 그리스 말을 쓰지 않아 말이 통하지 않는 이어인(異語人)을 말한다.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의 고유한 지식과 역사, 세계관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정체성의 출발점이며 문화적 보편성으로, 나아가 오늘날 관점에서 ‘민족’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삼국 간에는 사신이 수시로 교환되었다. 과연 이들이 ‘한국어’의 초기 단계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말’을 사용했을까, 그리고 ‘글’은 중국의 ‘한자’만으로 교신했을까? 필자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원시적인 방법이지만 에 나타난 기록들로부터 유추해 보았다.
자세히 읽어보면 는 삼국 간의 접촉을 기술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 우선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표현은 파사 이사금 26년,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고구려 동천왕 22년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었다’ 등이다. 이 사례들은 이들이 어떤 ‘말’이나 ‘글’로 의사소통을 했는지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표현들은 어떤가? 내물왕 18년 ‘백제왕이 글을 보내 말하기를[百濟王移書曰]’, ‘우리 왕이 ‘대답해 말하기를[答曰]’, 눌지왕 34년 ‘고구려 사자가 와서 말로 통고하기를[使來告曰]’, 고구려 장수왕 12년 신라의 사신을 ‘왕이 특별히 두텁게 위로했다.[王勞慰之特厚]’, 백제 개로왕 21년 고구려 승려 도림이 ‘문 앞에서 고하기를[詣王門告曰]’, ‘왕을 모시고 앉아 조용히 말하기를[從容曰]’ 등은 표현 방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보면 삼국 간에 어느 정도 의사표현이 자유스러웠을 것이라 짐작된다. ‘열전’ 제1 ‘김유신’ 편에는 김춘추가 연개소문에게 백제를 치자고 청한 데 대해 고구려가 거부하는 대화가 나온다. 이후 옥에 갇힌 김춘추가 고구려왕이 총애하는 선도해(先道解)에게 뇌물을 주고 두 사람은 토끼와 거북의 설화를 주제로 ‘농담을 나눈다’ 그리고 ‘석방되어 신라 국경을 넘으면서 고구려 호송인에게 그들을 속였음’을 말한다.
고구려는 개로왕을 잡아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 곧 죄목을 헤아린 다음’ 죽였다. 백제 항복 당시 신라 태자 김법민(金法民, 후일 문무왕)이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夫餘隆)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꾸짖는다’. ‘열전’, ‘김인문’ 편에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보장왕이 잡히자 ‘인문이 고구려왕을 당의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 앞에 꿇어앉히고 그의 죄를 헤아려 꾸짖었다. 고구려왕이 두 번 절을 하자 영국공이 그에게 답례했다’. 김인문은 보장왕에게 직접 말을 했으며 영국공은 보장왕이 절을 하자 몸짓으로 답례했다는 것이다. 그 외 백제 무왕(武王)인 서동(薯童)과 신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 ‘기이’ 제2) 등, 말이 통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부분이 많다.
삼국 간 언어의 차이는 오늘날 서로 다른 방언 정도인 듯하며 이를 극복하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오늘날 언어에 관한 간단한 이론 한 가지를 덧붙여 보자. 에 관한 연구로 알려진 앨버트 메라비언은 3V 이론을 제시한다. 얼굴을 마주보는 대화에서 상대방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 언어의 의미(verbal 혹은 words)가 7%, 말의 억양(vocal 혹은 tone of voice)이 33%, 표정(visual/ facial, body language)이 55%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하는 말의 ‘언어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표정이나 몸짓을 ‘보고’ 혹은 말의 억양을 ‘느끼고’ 상대방이 전하려는 메시지의 ‘의미’를 ‘인지하고’ 받아들인다. 남녀가 싸울 때 여자가 “I hate you(난 네가 싫어!)”라고 해도 남자는 오히려 섹시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최근 국어학자들은 34~37권에서 삼국의 지리가 한자로 기록된 것을 거꾸로 유추하여 당시의 우리말을 찾으려고 한다. 우리글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원래의 지명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 많은데 언어학적 연구를 통해서 그 기원을 추적하면 삼국은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중국 고대 진(秦)에서 수-당 시대 중국어의 변천과 우리말의 변천을 통해 우리말의 원형을 찾아가는 작업인데, 설명이 전문적이어서 필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예를 들어 44권에 나오는 ‘居柒夫 或云 荒宗(거칠부 혹운 황종)’은 ‘거칠 황’ ‘부와 종은 우두머리’라는 걸 이해하면 ‘거칠부라고 발음하고 (혹은) 이것은 황종으로 쓰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세국어에서 ‘거칠’은 ‘거츨’로 발음된다. 그러면 그 이전인 삼국시대에는 이를 어떻게 발음했는지, 또 ‘거칠’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삼국이 비슷하게 사용했는지 등은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 단서는 중국 ‘24서’ 중 하나인 , ‘동이열전’, ‘신라’ 편에 나온다. ‘신라는 문자가 없고 나무를 조각하여 편지를 했다. 말은 백제인을 기다려 통했다’는 구절이다. 중국인들이 신라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중국과 교류가 잦은 백제인이 통역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백제인과 신라인 간에는 서로 말이 통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이번 호부터 우리의 역사로 돌아가자. 한국사에서 ‘최대의 위기’를 꼽는다면 어떤 사건일까? 한 국가의 역사에서 ‘최대의 위기’란 일반적으로 국가멸망을 말하겠지만 보다 높은 차원인 민족말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의 역사에는 고대로부터 고구려의 수-당 전쟁, 몽고의 고려침공과 지배, 임진왜란, 한일 강제합방, 6·25전쟁 등등... 많다.
결론부터 말하면 필자는 신라의 당에 대한 항쟁을 꼽는다. 1950년대에 중학생이었던 70대 중반 이상은 이 시대의 이야기로 국어교과서에서 유치진(柳致眞) 극본 ‘원술랑’을 읽었을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국가가 멸망하거나 외세에 종속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한민족 자체는 말살되지 않았다. 국가를 멸망케 한 일본의 강제합방이 100~200년 지속되었다면 민족말살로 이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123년 간(1795~1918) 국가가 없었던 폴란드도 “국가는 사라졌지만 민족은 영원하다”고 말했다. 일단 민족적 정체성이 형성되면 완전 동화나 민족말살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민족’이라는 개념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만주와 한반도에 산재했던 국가들을 ‘지리적’ 인접성을 기준으로 중국 정사(正史)에서 ‘조선’이라는 항목에 기록하고 있다. 이들 간에는 언어, 풍습에서 유사성이 있었던 것 같다. 중국 남조 양(梁, 502~557)의 역사서인 ‘양서(梁書)’에는 신라인과 중국인 간의 대화에 대해 ‘(중국과 교류가 잦은) 백제인을 기다려 통했다.’고 하니 백제와 신라 간에는 말이 통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언어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동일 민족이라는 관념은 당시 존재하지 않는다. 통일신라 이후 같은 민족, 한민족이라는 관념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신라의 대당항쟁 시기는 일반적으로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676년까지 8년으로 잡는다. 그러나 당의 병탄 야욕과 신라의 저항은 660년 백제 멸망 직후 시작되니 16년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신라는 당시 세계 최대 강국이며 중국사를 통틀어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당을 상대로 때로는 전쟁으로 강력하게 맞서며, 때로는 외교술로 굽히면서 갈등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하여 오늘날 남북한 휴전선과 유사한 선에서 ‘한민족’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당시의 기록들을 읽어보면 우리가 성당(盛唐)시기 중국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으로나 군사전략 면에서 성숙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당연히 신라의 대당항쟁은 손쉽게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은 백제 멸망 후 곧 바로 백제인들과 신라를 반목시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으로 신라를 견제했다. 백제 멸망 2개월 후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곧 이어 당에 포로로 끌려간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을 귀국시켜 웅진도독으로 임명, 신라와 동등한 자격으로 맹약을 맺게 하는 등 갈등을 부추긴다.
신라는 668년 고구려 멸망 후에도 당이 대동강 이남을 신라에게 넘겨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삼국을 모두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내자 드디어 행동에 나서게 된다. 당이 서쪽에서 토번(吐蕃)과의 전쟁에서 패한 기회를 이용하여 670년 3월 압록강을 넘어 당군에 선제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군이 당군을 직접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신라에 귀순한 고구려 유민 부대가 당에 소속된 말갈군을 공격한 것이다. 말갈은 과거 고구려에 부속된 민족이니 고구려의 응징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당군이 직접 나서자 곧 물러나서 ‘지켰다.’ 당군과의 직접 대결은 회피한 것이다. 정치적 수단으로 군사적 갈등을 이용할 때는 낮은 단계부터 갈등을 고조시킨다(escalate). 갈등을 하나의 연속선상에 놓고 볼 때 중간단계가 많을수록 대화와 타협의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당을 상대로 한 교전도 대규모 전투보다는 분쟁을 ‘국지화’시켜 실리를 취하면서 이를 기정사실화하는 전략을 택한다. 동시에 여전히 우호적인 관계를 원하고 있으며 백제라는 ‘악당’이 당과 신라를 이간질한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당에 전달한다. 반면 고구려 왕족 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 고구려 유민을 포섭한다. 주적을 단일화시키면서 부차적인 적[副敵]과 연합하는 전형적인 통일전선 전략인 것이다. 이같이 다양한 신라의 전략에 대해 당은 분노한다. 그러나 고구려 옛 영역인 요동이나 돌궐과의 서북 변경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라 문제는 적절한 선에서 타협해야 했다. 정치적으로는 서신을 통해 신라의 ‘배반’을 책망하고 문무왕을 ‘파면’한 뒤 동생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으로 봉한다. 조공관계에서 왕의 파면은 최고의 징벌이라 할 수 있다.
군사적으로는 672년 중반 석문(石門, 황해도 서흥 혹은 경기도 화성군)에서 신라군을 격파하여 신라 전체를 공황상태에 빠트린다. 이후 전투에서 양측은 일진일퇴하며 항쟁 후반기에는 신라가 소규모 전투에서 ‘18차례’ 승리하지만 약자의 승리는 인적·물적 자원을 고갈시킬 뿐이었다. 당 역시 서북 지역과 만주에서 군사령부 격인 ‘안동도호부’를 매년 이동할 정도로 정세가 불안하자 신라의 ‘사죄사절’을 맞아 문무왕을 ‘용서’하는 선에서 분쟁을 매듭짓는다.
신라는 최대 목표는 아닐지라도 ‘고구려 남쪽 국경’인 임진강 유역을 포함한 영역을 확보함으로써 당의 위협을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했다. 당으로서도 이 선에서 신라의 북진이 저지된다면, 당에 대한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간주했을 것이다. 어느 일방의 완전한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인 것이다. 60년이 지나 문무왕의 손자인 성덕왕 35년(736)에 이르러 당이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을 신라에 넘겨준다. 신라의 북진은 또 다른 변수인 발해의 등장에 기인한 것이다.
신라의 대당항쟁은 삼국통일 이후 ‘한민족’의 정체성을 구체화되려는 여정의 출발점에서 부딪친 시련이었던 것이다.
>> 구대열 (具?列)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봄이다. 봄은 ‘볼 게 많아서’ 봄이라고 한다. 여기서 봄맞이 맛보기 퀴즈 하나 내겠다.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은 어디일까?’ 정답은 바로 북한산이다. 기네스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북한산은 수도권 어디에서도 접근이 용이한 교통환경과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연평균 탐방객이 865만명(2009년 기준)에 이르고 있다.
북한산은 기록적인 탐방객에 힘입어 인기는 압도적인 반면, 북한산성 및 북한산 내 문화재의 역사적 가치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돼 왔던 것이 현실이다. 현재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남한산성과 한양도성과 유사한 규모와 성격을 갖춘 관방유적임에도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북한산성(사적 제162호)에 대한 세계유산적 가치와 문화유산적 가치를 재정립하기 위해 노력들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 ‘산 속 도성(都城)’…삼국시대부터 정치ㆍ군사적 요충지
북한산 문화유적 중 가장 대표적인 북한산성은 숙종 37년(1711년)에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거친 산성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유사시를 대비해 마련한 ‘산 속 도성(都城)’이다. 북한산의 백운봉, 만경봉, 용암봉, 보현봉, 문수봉, 나월봉, 증취봉, 의상봉, 원효봉 등을 연결해 쌓은 산성으로 규모는 길이 12.7km이며 내부 면적은 여의도의 2배 이상인 6.2㎢(약 188만 평)에 달한다. 행정구역상 성 내부 전체와 성벽의 절반 이상이 경기도 고양시에 속한다.
성벽에는 주 출입시설로 대문 6곳, 보조출입시설로 암문 8곳, 수문 2곳, 병사들이 머무는 초소인 성랑 143곳 등이 있었다. 성 내부 시설로는 임금이 머무는 행궁, 주둔 부대가 머무는 군영 3곳,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 8곳, 승군이 주둔하던 승영사찰 13곳, 군사지휘소인 장대 3곳 등이 있었다.
성벽은 지형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면서 쌓았는데 계곡부는 온전히 높이 쌓았고 지형이 가파른 곳은1/2 혹은 1/4만 쌓거나 아예 여장만 올린 곳도 있으며 봉우리 부분은 성벽을 쌓지 않았다.
성곽시설 중에 시구문이 있는 점, 여장을 한 개의 화강암으로 만든 점, 포루를 설치하지 않은 점,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이중성으로 축성한 점 등은 다른 산성과 구별되는 북한산성만의 특징이다.
특히, 북한산성은 18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가 반영된 독특한 방어시설로 조선시대에 도성과 방어용 산성을 갖춘 전통적인 도성방어체계의 완성을 보여주는 유일한 예로 축성 이후 원형을 유지하고 축성과정에 대한 상세한 기록 등이 남아 있어 그 가치가 매우 높다.
■ 북한산을 지키고 가꾸는 사람들의 모임인 ‘북지모’ 출범
이 같이 다양한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지니고 있는 북한산성을 지키기 위해 시민들이 발 벗고 나섰다.
경기문화재연구원(원장 조유전) 북한산성문화사업팀은 지난 3월 28일 오후 4시 북한산성 교육정보센터에서 북한산을 지키고 가꾸는 사람들의 모임인 ‘북지모’ 출범식을 개최했다.
‘북지모’는 북한산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모임으로 지난 1년여 넘게 300여 명의 회원을 모집, 지난 2월 28일 예비 모임을 갖고 이날 단체명과 회칙을 확정해 정식 출범했다. 이날 북한산 백운대를 4천번 등정한 하정우 어르신과의 특별한 시간도 마련됐다.
‘북지모’는 흔한 등산 모임들과는 달리 북한산의 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북한산성 등 북한산 내 100여 곳의 문화유산을 알리고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 아름답게 가꾸는 일들을 해 나갈 예정이다.
북지모는 올해부터 ▲북한산성 내 문화유산 학습 및 탐방 ▲인문학 아카데미 운영 ▲‘북한산성 사람들’과의 대화 등의 활동을 적극 전개해 나갈 예정이다.
4월 모임에서는 ‘북한산성내 각자를 따라서’라는 탐방 주제로 수구명 각자, 칠유암·비석거리·괘궁암·금위영·대동문 각자 등을 찾아보는 현장교육을 실시할 예정이다.
북지모는 북한산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 가능하며 참여신청은 블로그(http://blog.naver.com/buksamo) 또는 전화(031-968-5325~9)로 문의하면 된다.
김성태 북한산성문화사업팀장은 “경기도, 고양시, 경기문화재단은 북한산성을 가꾸고 알리기 위해 북한산성문화사업팀을 신설하고 북한산성의 조사, 연구, 정비, 복원, 활용 등의 사업을 추진해왔다”며 “이번 북지모 출범은 그야말로 산을 좋아하는 산악인과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북한산성의 참 모습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귀한 자리”라고 평가했다.
북한산 백운대 4천번 등정한 두산(斗山) 하정우(82) 어르신 “북한산은 정겨운 말벗이자 부모님의 품속 같은 곳”
‘1만 시간의 법칙(The 10,000-Hours Rule)’으로 설명되는 어르신이 있다. 어떤 분야에서든 최고 전문가로 인정받으려면 1만 시간은 쏟아부어야 한다는 이론으로 성공한 이들은 모두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3시간 이상 10년을 투자하며 쉼 없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북한산의 정상 백운대(白雲臺·836.5m)를 무려 4000번 등정한 두산(斗山) 하정우(82, 일산) 어르신은 한마디로 정리하면 ‘산에서 산, 산 같은 사람’이다.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어르신은 1953년 고시행정과(제4회)에 합격해 공직에 입문해 20대 후반에 군수를 지냈다. 30대엔 부산직할시국장, 민주공화당 정책위전문위원, 무임소장관실 관리관을, 40대엔 국회전문위원으로 활동하다 50대엔 한국증권거래소 수석부사장, 아세아투자자문(주)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요즘말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이 화려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나름 안정적인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인생살이엔 나름의 굴곡과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
어르신은 서른 아홉살부터 산을 타기 시작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그냥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오른 산은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했다고 한다. 어르신은 국내 150개 산을 등정하고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말레이시아 키나마루 등 세계 각지로 트레킹을 다녔다. 올해로 등산경력만 43년. 15년 전부터는 북한산 매력에 푹빠져 백운대만 4천번을 등정했다.
“나 보고 사람들이 ‘취미도 별나다’라고 하지만 북한산은 무기력한 삶을 활기 넘치게 바꿔 준 가장 정겨운 발벗이자, 참 스승이며 영혼의 쉼터입니다. 내 힘의 원천이자 건강을 지켜주는 주치의이기도 하고 포근한 부모님의 품만같고 시골의 옛동산같은 곳입니다.”
어르신은 요즘도 일주일에 3~4일은 새벽마다 북한산에 오른다. 여전히 젊은이 못지 않은 등산실력을 자랑하며 백운대까지 1시간 30분에서 40분 정도면 정상에 도착한다.
“그냥 산이 좋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산을 찾아 신중하게 산을 오르다 보면 성취와 자신감을 얻게 돼 타성에 빠지지 않고 삶이 무의미한 일상으로 전락하지 않게 됐죠. 이 나이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건 다 산 덕분입니다. 산이 곧 신앙입니다.”
하정우 어르신은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산에 오르면서, 산을 닮고 싶다 했다.
“나는 산이 좋고 산을 닮고 싶다. 언제고 말 없고 베풀기만 하고 꾸밈과 욕심이 없고 포용해 주고 높으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넉넉하고 우뚝한 그 덕성을 한없이 기리면서 산의 한 조각이 되고 산의 모든 것을 닮고 싶다.”
어르신은 그간의 등산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북한산성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는데 일조하는데 앞장설 계획이다.
글ㆍ사진| 경기일보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