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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기수를 죽인 ‘살인사건’
- '전기수'가 어찌나 재미나게 이야기를 풀어내었던지, 주인공이 죽자 이야기에 빠져들었던 청중의 한사람이 분을 참지 못해 그만, 이야기꾼을 내려쳤다는 사건이 정조 14년 8월 10일 「정조실록」에도 전한다. 어느날, 전기수가 청중들 앞에서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전기수 주위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모두들 전기수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갑자기 살인 사건이 터진 것이다. 전기수 이야기에 푸욱 빠져 있던 청중 한 명이 나쁜 주인공을 응징한다며, 들고 있던 낫으로 전기수를 죽인 것이다. 책 읽는 솜씨가 얼마나 뛰어나면 청중이 현실과 책 속 이야기를 혼동해 그만,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살인을 저질렀을까? 죽은 사람은 전기수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업복 이였다. 다음은 소설가 정명섭씨가 그의 책에서 소개한 이업복에 관한 내용이다. ‘이업복은 전기수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조선시대 생활사를 보여주는 책에서도 이미 소개가 되었고, '별순검'이라는 인기 드라마의 일화에도 등장했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서얼인 그의 본래 직업은 청지기였다. 청지기는 노비는 아니었지만 결국 주인의 수발을 드는 미천한 존재다. 그런데,그는 사람들의 귀에 쏙쏙 들어오는 낭랑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풍부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언제부터 본격적인 전기수로 나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양반집 부녀자들을 비롯한 한양의 부호들이 다투어 그를 초청해서 얘기를 들었다는 것을 보면 전기수로 나선 직후부터 큰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감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토해내면 듣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거나 미친 듯이 웃었다고 하니, 아마 그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지 않았나 싶다.’(소설가 정명섭의 저서 중에서) 아마도 이업복은 이야기꾼으로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 이였나 보다. 필자는 어릴 때 할머니와 한집에서 살았는데, 큰아버지는 저녁때쯤엔 할머니에게 드릴 간식을 사가지고 오셔서는, 사씨남정기, 옥루몽, 이춘풍전, 장화홍련전, 춘향전등 셀 수 없이 다양한 책들을 날마다 읽어 드리고는 가셨다. 필자의 할머니는 이야기책도 좋아하시고, 또, 우리들에게 옛날이야기도 실감나게 잘 해 주셨는데, 지금 생각하니 큰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책을 재미있게 읽어 드렸던 것은, 바로 그 시대의 전기수의 영향이 컸었나 보다.
- 2016-08-29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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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6월의 함성’이 일궈낸 오늘의 역사 -역사학자 이이화
- 역사학자 문강 이이화(文岡 李離和·79). 그의 아버지이자 주역의 대가인 야산 이달(也山 李達: 1889~1958) 선생이 지어준 독특한 이름과 호에는 빛난다[離]는 뜻과 글 봉우리[文岡]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야산 선생은 다섯 아들과 딸에게 8괘 중 부모를 뜻하는 ‘건’과 ‘곤’을 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선견지명일까? 문강 선생은 역사 통서 를 집필해 높은 평가를 받았음은 물론이고 한국사의 대중화를 위해 한 줄기 빛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그가 겪은 대한민국 역사 중 가장 잊지 못할 사건은 1987년 6월에 일어났다. 거리는 마스크를 쓴 시위대와 전투경찰, 짱돌과 최루탄, ‘호헌 철폐, 독재 타도’가 적힌 피켓과 닭장차가 맞서며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다. 6월 항쟁이다. 당시 50세였던 문강은 하루도 쉬지 않고 눈물과 함성으로 젖은 현장에 나가 민족 헌법 쟁취를 외치며 정보를 수집하고 다녔다. 그는 를 보며 그날의 역사 속 그날을 떠올려본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6월 항쟁이 일어나기 전해 2월, 이이화 선생(현 역사문제연구소 이사)과 서중석 교수(현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는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이것을 대중화한다’를 목표로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 집중적인 집단 연구에 열성을 다하던 그들에게 6월 항쟁은 가장 생생하고도 의미 있는 사건으로 남았다. 수많은 이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이 정치적 상황과 무지로 인해 훼손되어가는 것이 안타깝다는 문강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 교수는 우리 국민이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2005년 를 출간했다. 문강은 그가 집필하는 동안 응원을 아끼지 않았고, 초판본(2005)에 추천사를 쓰는 등 적극 격려했다. “해방 이후부터 6월 항쟁까지 사진, 만평, 우표, 지도 등을 곁들여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했어요. 책이 나오자마자 읽어보고, 이건 정말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했죠. 현대사에 관한 책을 쓰려면 영어 원서도 보고 해야 하는데, 나는 한자는 능통하지만, 영어는 한계가 있거든요. 이런 책을 써서 대중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늘 했는데, 서중석씨가 한다 해서 정말 기뻤어요.”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절규로 가득했던 6월의 거리 문강은 자신의 책에서 주로 다뤘던 고대사나 삼국시대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우리 현실에 가장 가까운 현대사를 알아야 현재의 어려움에 대처하는 판단력이 생긴다고 역설한다. 특히 6월 항쟁과 같은 민주운동은 자신의 이야기이자, 누군가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이며 결국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 “지금도 6월 항쟁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뿌듯해요. 매일 시위 현장에 나갔어요. 지나가던 버스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 사람들의 함성, 진동하는 최루탄 냄새까지 생생하게 떠오르죠. 우리 국민 스스로 민주 헌법을 쟁취하고 민주주의 절차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사건이라 생각해요.”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역사문제 연구 자료를 발표하거나 강의하는 곳에는 수백 명의 사람이 모였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는 문강은 과거에 비해 그런 열기가 부쩍 줄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 시절을 겪은 중·장년도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사건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니 아이들은 더 모를 수밖에요. 인터넷상에 퍼지는 그릇된 정보나 얕은 지식만 가지고 시위나 데모 등 민주운동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여기기도 하죠. 역사를 정확히 알고 그 배경을 이해해야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도 나름의 근거에 의한 판단을 할 수 있는데 말이에요.” 완결 10년, 그리고 다시 10년 이이화 선생 하면 를 빼놓을 수 없다. 1994년부터 10년간 22권으로 펴낸, 그야말로 인생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책이 완결되고 약 10년이 흐른 2015년, 그는 개정판을 냈다. 처음 완성하는 데만 10년, 그리고 다시 펴내는 데만 10년이 걸린 셈이다. 여전히 독수리타법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그가 오랜 시간을 투자해가며 개정판을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 책을 낼 때는 우리 민족사·민중사·생활사 등을 어느 한쪽에 편협하지 않고 두루두루 종합적으로 쓰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완성하고 난 뒤에 새로운 사건들이 일어났죠. 동북공정이나, 일본 위안부 문제 등 더 이야기해야 할 것들이 생겼어요. 우리 아이들도 볼 책인데 그런 내용이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가 한국통사를 쓰고자 결심하고 아들에게 컴퓨터를 배워 1권을 낸 지도 2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그가 느꼈을 변화가 궁금했다. “현대에 들어오니 민주운동은 다 사라지고, 오히려 민주운동을 하는 사람은 경제발전에 방해되는 인물로 취급하더라고요. 젊은이들은 ‘종북좌파’니, ‘빨갱이’니 하는 말을 개념 없이 쓰고요. 민주의식이 결여되다 보니 배려나 나눔의 정신도 사라졌죠. 오늘날 이만큼 살만하면 남을 배려할 줄도 알고, 인권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한데 더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요.” 문강은 그런 의식을 지닌 부모세대의 영향이 자식세대에 뻗치는 것을 우려한다. “요즘 부모들을 보면 영어, 수학 공부는 시키면서 정작 인성교육은 소홀히 하는 것 같아요. 아이를 인간답게 키우기보다는 잘난 사람으로만 만들려 하죠. 자기 자식만 해를 입지 않으면 된다는 이기심에 공동체 생활에서 지켜야 할 교통질서나 예의범절은 뒷전이고요. 예전에는 안 그랬거든요. 남을 생각하고 민족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시위도 활발할 수 있었죠.” 그는 어른세대가 아이들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것과 더불어 나누고 베푸며 살길 바란다고 말했다. “6월 항쟁 때 상인들은 거리의 학생들에게 김밥이나 사이다 같은 것을 아낌없이 주었어요. 요즘처럼 자기 이익만 생각한다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었겠죠. 나는 한국전쟁 유족이나 독립투사 후손을 만나면서 내 개인 소득에 비해 돈을 많이 썼어요. 나야 세 끼 밥 잘 먹고 있고, 병도 없고, 어디 투자하는 것도 아니니 삶의 여유가 그런 쪽으로 흐른 셈이죠. 그게 나눔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해외 재벌들을 보세요. 사회에 다 내놓잖아요. 그런 걸 보면 우리 사회는 나눔의 문화가 부족하다고 느껴요.” 어린이 도서관 인기쟁이 ‘역사 할아버지’ 그가 역사의 대중화를 위해 그동안 낸 책만 100여 권이다. 개정판이나 공동 저서 등을 포함하면 200여 권에 달한다고 한다. 그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어린이를 위한 역사책이다. 문강은 “역사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쉽고 친근하게 역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그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표현하려고 애쓰는데 쉽게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아는 게 많아도 어린이 책을 쓰는 데는 지장이 생긴다는 것을 느꼈어요. 보여줄 것만 보여주면 되는데, 자꾸 내가 아는 걸 다 드러내려고 하니까 그게 참 어려워요.” 책을 쓰는 것 외에 그가 꾸준히 하는 일 중 하나는 독자와의 만남이다. 요즘도 그가 사는 파주 헤이리 근처 도서관에서 어린이 독자를 만나고 있다고. 문강은 어린이 팬 사이에서 ‘역사 할아버지’로 통한다며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얼마 전에도 춘천에 있는 마을도서관에 다녀왔는데 그때 온 부모와 아이들이 인터넷으로 편지도 주고 참 즐거웠어요. 최근 인터넷에 한 군인이 를 10권째 읽었다며 소감을 썼더라고요. 자신이 나중에 사회생활을 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다면서요. 역사 공부가 다른 게 아니에요. 과거에는 이랬는데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 그런 상상력을 키우고,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는 과정이죠. 그런 독자를 만날 때면 내가 그동안 헛짓을 한 건 아니라는 생각에 보람을 느껴요.”
- 2016-06-0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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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간] '버려진 공간을 재발견하다' ②
- 배다리 생활사 박물관을 나와 오른쪽으로 열 걸음쯤 걸어가면 ‘요일가게 다 괜찮아’가 있다. 2014년 12월 문을 연 이곳은 요일마다 주인이 바뀐다고 해서 요일가게가 됐다. 뭐든 해도 다 괜찮기에 ‘多 괜찮아’라는 이름도 덧붙였다. 지난 2월에는 월요일 영화 관람, 수요일 기타교실, 토요일 ‘달 셰프’의 레스토랑이 상시 운영됐고 타로, 네일아트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요일가게를 통해 손님을 맞았다. 요일가게 한쪽 벽면은 ‘숍인 숍’으로 꾸며져 있다. 도자기, 나무 공예품, 인형, 아동복, 반려동물 용품, 액세서리, 책 등이 전시돼 있다. 이 전시품들을 각 요일가게 주인들이 팔면 수익금 10%를 나눠 가지기 때문에 요일가게 주인들 또한 숍인 숍 물건들을 조금이나마 잘 관리하고 팔기 위해 노력한다고. 월세 5만원을 내고 들어오는 이곳 요일가게 주인들은 수익을 목적으로 이 공간을 사용하지 않는다. 주기적 만남을 위한 모임 장소 혹은 문화운동으로써 요일가게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공간이다. 수요일 기타 모임의 경우 장소를 물색하다 수요일 가게의 주인이 됐다. 토요일에 문을 여는 ‘달 셰프 레스토랑’은 전업주부를 선언한 박영달 셰프의 주부생활 해방공간(?). 친구나 친척, 예약한 손님들에 한해서만 재료를 준비해 고급 요리를 판매한다. 매일 다양한 모습과 이유 있는 변신이 요일가게에 있다. 요일가게는 1956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이 건물 역시 조흥상회 건물처럼 사람들이 찾지 않던 낡고 오래된 창고였다. 내부에는 2층으로 된 구조물이 넘어질 듯 위태하게 서 있었고 쓰레기 또한 어마어마했다. 어두컴컴한 창고 안, 창 사이로 작은 빛이 들어오자 천장 멀리 붓으로 써내려간 상량문이 발견됐다. 건물 건축 연도도 상량문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버려질 뻔했던 공간이 대변신하게 된 계기를 준 것. 지저분하고 오래됐지만, 과거에는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튼튼하게 지은 건물이었다. 때마침 인천문화재단의 지역거점화지원사업 프로그램에 선정돼 사람들이 모이는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요일가게 운영자는 1년 동안 운영을 잘해보겠다던 목적은 달성했다고 한다. 이제 또 어떤 방식으로 1년을 꾸려나갈지 고민 중이란다. 3월부터 다시 문을 여는 요일가게는 이전과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운영될 계획이다. 사람들이 많이 찾고 좋아하는 요일 가게는 하루 이상 가게를 열게 해줄 계획. 뭐든 다 괜찮은 곳이니까 언제든지 다양한 모습과 형태로 바뀔 수 있는 곳이 바로 요일가게다. 차가운 바람 가고 따뜻한 봄기운이 느껴지는 3월, 예스러움 가득한 배다리 생활사 전시관과 요일가게 다 괜찮아로 발길을 옮겨보라.
- 2016-03-30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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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간] '버려진 공간을 재발견하다' ①
- 오랜 집주인이 버리고 떠난 적산가옥(敵産家屋) 조흥상회. “쓰레기더미니 버려 달라” 했던 집안 물건에는 우리네 살아온 흔적이 짙게 남아 있었다. 월세 15만원에 내놓아도 외면받던 옛날식 창고는 요일마다 주인이 바뀌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공간이 됐다. 인천 배다리(인천시 동구 금곡동의 옛 지명) 배다리 생활사 전시관과 요일가게 다 괜찮아(이하 요일가게)는 이렇게 우연한 발견으로부터 시작했다. 시간을 거슬러 동인천 끝자락에 다다르면 잊고 지냈던 시절의 우리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1990년대 이전까지 인천 배다리의 마루지(랜드 마크)였던 조흥상회 건물은 부자 삼대를 넘기지 못하고 경매에 넘어갔다. 비밀스럽던 부잣집 대문이 열리는 순간. 눈앞에는 쓰레기 더미가 가득했다. 쓰레기 치우는 데만 두 달 넘게 걸렸다. 집안을 청소하고 묵은 때를 벗겨내고 나니 옛 부잣집 티라도 내는 듯 조흥상회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집 여인네들이 손수 지은 한복과 배냇저고리, 수만 번은 사용했을 것 같은 끝이 닳은 밥주걱, 속이 가득 찬 전지분유와 미제 주스, 양주, 분쇄기 등 근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수백 점의 물품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찾아낸 물건을 모아서 2014년 3월, 배다리 안내소로 사용하고 있는 조흥상회 건물 2층에 배다리 생활사 전시관을 열고 관람객을 맞기 시작했다. 배다리 생활사 전시관은 ‘1인칭 박물관’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곳이다. ‘1인칭 박물관’이란 나(1인칭)와 가까운 사람의 것, 혹은 멀지 않은 과거 물건들을 나름의 이야기를 담아 전시하는 것이다. 교과서에서는 찾을 수 없으나 반드시 그곳에서만 보고 들을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다. 배다리 생활사 전시관의 전시품들은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조금씩 바뀐다. 아직도 꺼내놓지 않은 물건들이 집안 곳곳에 숨어 있다. 하지만 전시를 서두르지 않는다. 오랜 시간 사람의 손길을 기다려온 만큼 찬찬히 제 빛깔을 찾으면 이야기와 함께 관객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 2016-03-22 1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