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1994년 1월, 현대건설 이사였던 최동수(崔東秀·77)씨가 사직서를 내밀자 고(故) 박재면 회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삼성이나 롯데에 가려고 그만두는 거냐?”는 물음에 “기타를 만들겠다”고 대답하자 더욱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현대건설은 국내 건설업계 1위 업체였고, 잘 나가는 건축담당 이사였던 최씨의 갑작스러운 은퇴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최씨의 선택은 하루아침에 결정된 것이 아니다. 기타를 만들고자 한 것은 학창시절부터 고이 간직해온 그의 꿈이었고, 20여 년에 걸친 아내와의 약속이었다.
아내와 애인(?)을 위한 선택 ‘은퇴’
최동수씨가 아내인 수필가 허숭실(필명)씨와 연애하던 시절의 일이다. 덕수궁 후원을 걷던 최씨는 허씨에게 엉뚱한 고백을 했다. “당신과 데이트하느라 내 애인을 돌보지 않았더니 그녀가 병들었소. 오늘 당신에게 그 애인을 소개해 주리다.” 허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의 애인을 만나러 가자고 했다.
그러자 최씨는 들고 있던 기타를 무릎 위에 척 올려놓고는 “기타가 바로 내 애인”이라고 털어놨다. 그가 말한 애인이 사람이 아닌 기타라는 사실에 그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마음이 복잡하기만 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허씨 앞에서 최씨는 “그동안 데이트 자금을 마련하느라 애인을 전당포에 맡겨두었더니 습기가 차 피부가 트고 몸도 틀어져 속상하다”며 기타를 쓰다듬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허씨는 ‘풋내기 예술가’를 발견한 듯 반가움에 가슴이 뛰었고, 그날의 감동이 결국 그녀를 ‘기타 만드는 남자의 아내’로 만들었다.
최씨의 기타 사랑은 고등학생 시절 읽은 한 소설을 통해 시작됐다. 지금은 책 제목도 가물가물한 일본 소설이지만, 당시 전쟁터에서 다리 불구가 된 주인공이 창녀가 된 아내의 집 근처 전봇대 아래에서 기타 연주를 하는 장면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이후 기타에 매료돼 아버지를 졸라 기타를 하나 샀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결국 직접 취향에 맞는 기타를 손수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다. 마땅한 재료가 없어 집안의 오동나무 장롱 서랍을 뜯어가며 기타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결혼해서 얼마 동안은 틈틈이 기타를 만들었다. 하지만 건축설계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밤낮으로 기타 만들기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을 본 아내는 견디다 못해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아이들 교육을 다 마치고 난 뒤에 기타를 만들면 그때는 전폭적으로 지지하겠어요.” 아내의 말에 그는 본업에 충실하기로 마음먹고 1975년 현대건설에 입사한다. 입사 후, 18년을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등 타국에서 지내며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밥벌이에 몰두했다. 그러던 어느 날, 1993년 그가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던 때, 아내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외로움도 암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그는 조기 은퇴를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은 인생은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다 가겠다고 다짐하던 최씨에게 한 가지 꿈이 피어올랐다.
“사표를 내기 전 아내에게 ‘나 기타 만들까?’라고 물어봤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계산기를 가져와 탁탁 두드리더니 ‘앞으로 삼시 세끼 먹는 데는 문제없겠네요. 인생 1막은 아이들을 위해 물질에 투자했으니, 2막은 당신의 정신적 자유에 투자하도록 해요’라며 흔쾌히 제 결정을 받아들이더군요. 20년 전, 아이들을 키우고 나면 기타를 만들어도 좋다고 했던 그 약속을 지킨 거죠.”
그렇게 그는 아내와의 여생을 위해, 그리고 애인과의 재회를 위해 은퇴를 결심했다.
‘소리가 나는 작은 집’을 건축하다
기타 제작을 결심한 그는 그동안 지내던 서울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경기도 고양시 일산으로 이사했다. 31년간의 건축가 경험을 살려, 마당이 딸린 집을 직접 지었다. 아늑한 그의 집은 ‘행운의 열쇠’ 모양을 따서 설계한 1층을 지나면, 기타 제작 공간인 지하실 ‘목운(木韻: 나무에서 소리가 난다는 뜻) 공방’이 나온다. 최씨의 꿈과 애정이 깃든 이곳에서는 1년에 단 2대의 기타만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 딸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기타를 만들고, 시집보내는 마음으로 기타를 파는 그다. 이 때문에 최씨는 기타를 파는 게 아니라 “백마 탄 기사에게 시집보낸다”라고 말한다. 딸을 키우는 심정으로 정성을 다하는 그이지만, 아무래도 기타를 만드는 데는 숙련된 솜씨가 뒷받침돼야 할 터. 기타 제작을 위한 그의 노력도 대단했다.
“은퇴한 첫해에는 미국 힐즈버그(Healdsburg)에 있는 아메리칸 기타스쿨에 입학했어요. 이듬해에는 스페인 코르도바(Cordoba)의 기타페스티벌에서 마에스트로 호세 로마니요스(Jose Romanillos)에게 제작 마스터 클래스를 지도받았죠. 두 과정 모두 한국인으로는 처음이라고 해요. 현재는 미국 현악기 제작가 협회(GAL: Guild of American Luthiers)의 유일한 한국인 회원이기도 하고요.”
기타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18년간의 해외생활은 그의 꿈을 실현하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해외 근무라는 이점을 활용해 외국의 공방과 자재상들을 찾아다니며 제작에 필요한 공구를 수집한 것. 그렇게 오랜 시간 기타를 만들기 위해 준비해온 만큼 그는 욕심을 내거나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시계는 꼬박꼬박 기타를 위한 시간으로 쉼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집 지하실의 기타 공방으로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한다. 야근도 마다치 않는다.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드는 기타는 1년에 2대 남짓이다. 기타 제작 과정은 단번에 결과물을 내기보다는 완성까지 꼼꼼한 설계와 인내가 바탕이 돼야 하는 건축일과 닮은 점이 있었다.
“기타는 ‘소리가 나는 작은 집’과 같아요. 제 인생 전반전을 장식한 싱가포르 선텍 시티(Suntec City), 카타르 국립대학 건물, 이라크 북부역사 등을 짓는 것처럼 기타를 만드는 일도 미학적 판단과 설계가 필요한 종합 예술이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최동수표 악기’
오랜 꿈, 아내의 내조를 밑천 삼아 시작한 기타 제작은 꾸준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처음에는 친구나 동료 등 지인에게 주기 위해 만들었는데, 근래에는 서정실, 변보경, 배장흠 등 유명 기타리스트에게 기타를 헌정했다. 대개 유명 기타리스트의 경우 독일이나 프랑스 등 해외 장인이 만든 것을 사용하는데, 그런 이들이 그가 만든 기타를 쓴다는 것은 이미 실력이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섰음을 증명한 것이다. 그의 기타는 보통 1대당 1000만원 가량이다. 예상한 가격보다 비싼 값을 받을 때도 많지만, 그가 공짜로 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기타를 주는 것은 결코 공짜 거래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떻게 돈으로 그 가치를 표현하겠어요? 대부분 손님이 알아서 가격을 정해서 지급하죠. 조금 손해 보는 경우가 있을지 몰라도, 결코 손해가 아니랍니다. 내가 공짜로 기타를 주면 어떤 이는 나에게 훌륭한 그림을 주기도 하고, 좋은 책을 보내기도 하니까요. 악기는 파는 게 아니라 인연을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해요. 악기는 내 딸인데, 내 딸을 데려갔으면 그도 사위처럼 내 자식이 되는 거지요.”
그는 팔기 위해 만드는 것은 단순히 ‘기타’라 하겠지만,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한 단 하나의 ‘악기’를 만들고 있다고 설명한다. 판매나 주문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의 기타를 하나둘씩 실물로 탄생시키는 최씨다.
온도와 습도가 적당한 봄철이면 기타를 만들기 적합하다. 이 시기에 결의 방향과 울림이 좋은 나무를 골라 온도를 맞춘 작업실에 한 달가량 둔다. 그다음 색을 입히는데, 그는 붓 대신 천으로 만든 솜방망이로 문질러 칠하는 방식을 고수한다. 한 번 칠할 때마다 100~150번을 문지르고, 이 과정을 100번 정도 반복해야 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서너 달이 걸리기 때문에, 기타 한 대를 만들고 나면 3~5kg씩 체중이 줄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에도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작업은 튜닝이다. 아무리 독특하고 멋진 기타라도 그 감탄은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기타도 악기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리다. 나무마다 고유한 진동이 있는데, 이를 조화롭게 맞추기 위해 일일이 손으로 나무 두께를 가늠해 조율한다. 기타의 모양이 나오면 제대로 된 소리를 얻기 위해 대전의 음향 전문가에게 보내 진동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다시 튜닝을 한다. 튜닝은 한 달이 걸리기도 하고 반년이 걸리기도 하는데 하다가 안 되면 다시 뜯어서 처음부터 만들어야 한다.
“기타리스트 배장흠씨의 기타도 앞판을 세 번, 뒤판을 두 번 바꿔가며 튜닝을 마친 작품이에요. 그는 기타가 만족스러웠는지 고맙게도 그 이후에 제가 만든 기타를 두 대 더 구입했죠. 2014년 7월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공연 무대에서도 제가 만든 기타로 연주했어요. 딸을 시집보낸 입장에서는 참 뿌듯하고 기분 좋은 일이죠.”
요즘 그는 리라(lyre: 고대에 사용한 발현악기) 모양의 기타 제작에 몰입하고 있다. 원래는 일흔넷까지만 기타를 만들려고 했지만, 여전히 46번째 기타 만들기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는 그동안의 기타와의 인연을 모아 만든 책 (가제)를 준비하고 있다. 기타를 통해 천상의 소리를 선사하고, 책을 통해 기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게 목표다.
“어언 나이가 차서 손을 거둘 날이 가까워져 오잖아요. 그전에 꿈속에서 상상만 하던 리라 기타와 같은 작품을 몇 가지 만들어 보고 싶어요. 또, 책이 출간되어 많은 분이 제 이야기를 읽어준다면 기타 제작 생애의 목표의 반은 성취한 셈이죠.”
와 를 통해 일본의 순박한 매력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던 저자(조경자)가 20여 년의 국내 여행담을 으로 엮었다. 사진은 를 통해 찰떡궁합을 선보였던 황승희가 맡았다. 여행 병에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행에 심취한 그들이 기꺼이 꺼내놓은 은밀한 여행지, 보고 또 봐도 대단한 명불허전 여행지, 앞으로 뜰 여행지 등이 알찬 정보와 근사한 사진으로 맛깔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그곳, 밥과 잠, 그리고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슬로 트래블’에는 울릉도와 정선, 하동, 통영, 경주, 해남, 강진, 부산, 청산도 등을 한층 더 매력적으로 여행하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만 풍경을 내어준다는 곰배령 야생화 트레킹, ‘한국관광지 100선’에서 1위로 꼽힌 문경새재 옛길 걷기, 차를 버리고 동해 바다를 품고 걸어야 제맛인 영덕 블루로드 등 그곳에 닿기만 해도 마음이 푸릇푸릇해지는 힐링 스폿도 함께 확인해 볼 수 있다. 오랜 시간 음식잡지 기자로 일하며 ‘지방 출장 전문 기자’란 별명을 갖고 있었던 저자가 현지인들의 귀띔으로 찾아낸 단골 식당 리스트와 숙소도 ‘밥과 잠’에서 아낌없이 공개했다. 애국의 달 6월, 인위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담아낸 우리 땅의 정직한 풍경들을 보면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겨 보는 것도 좋겠다.
김산환 저·꿈의지도
2010년 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던 책의 개정판이다. 캠핑여행의 달인으로 불리는 저자가 강원도 인제에서 해남 땅끝을 거쳐 제주도까지, 그리고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와 알래스카, 미 서부, 캐나다 로키 등 세계의 여행지에서 20여 년간 캠핑여행을 하면서 느꼈던 감동을 잔잔하게 풀어낸 에세이다.
이선재, 이연재, 최영원, 이영건 저·한국여성문예원
수필가이며 사업가인 아버지 이영건, 어머니 최영원, 미국에서 학업을 하는 두 딸 이선재·이연재, 이렇게 한 가족이 15일 동안 미국을 횡단하면서 행복과 가족이라는 주제로 사진을 담고 정리한 여행도서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미국 LA를 시작으로 뉴욕에 도착하기까지 자연과 도시 그리고 화목한 가족들의 모습을 담았다.
이화득 저·자동차 여행
지리 전문가이자 여행 마니아로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여행한 저자가 가족, 연인과 함께한 자동차 여행 경험들을 모아 엮어냈다. 저자는 1991년 펴낸 국내 첫 자동차여행서 에 이어 에서도 유럽 자동차 여행자들과 주고받은 최신 정보와 실속 있는 노하우를 아낌없이 소개한다.
김혜남 저·갤리온
30년간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15년간 파킨슨병을 앓으며 깨달은 저자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자는 2001년 마흔세 살의 나이에 파킨슨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정신과 의사로 할 일이 많은 나이였다.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마음도 잠시, 침대를 박차고 나온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아서인지 사는 게 재미있다”며 끊임없이 꿈꾸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즐기며 재미있게 살고 있다.
이정미 저·라온북
‘현모양처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자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에서 아이와 남편만 바라보는 ‘경단녀(경력단절녀)’가 된 저자의 스토리를 담았다. 경단녀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낀 저자는 끊임없는 학습과 자기계발을 통해 새로운 직업을 얻고, 제2의 인생을 당당하게 살고 있다. 대한민국 에서 아줌마로, 경단녀로 고민하는 이들에게 남편과 아이들에게 자랑스런 엄마로 행복한 나를 완성하기 위한 방법들을 제시한다.
한유석 저·달
양조장의 맏딸로 태어났지만 술을 못하는 어머니는 애주가 남편과 결혼하여 술을 잘 마시는 딸(저자)을 낳았다. 책에는 소주, 맥주, 막걸리, 탁주, 위스키, 칵테일, 와인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처음처럼, 화요, 삿포로맥주, 금정산성 막걸리와 같이 비교적 친숙한 술과 히타치노 네스트, 필스너우르켈 등의 다양한 세계맥주, 클론 5, 부르고뉴 알리고떼 등 생소한 와인까지. 그야말로 주종을 가리지 않는다.
※봄이 되면 만개한 꽃구경을 하고, 저녁이 되면 남한강 강물 위에 떠 있는 달빛을 보며 사색에 잠긴다. 가을이 되면 남한강변에 시장을 열어 사람들과 소통하고, 반상회를 열어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한다. 경기도 양평의 미래마을이다. 자신이 정한 이름 ‘감사하우스’의 안남섭(61)씨가 사는 법이다. 외로움에 사무칠 줄 알았던 그의 전원생활. 이제는 더불어 사는 전원생활이라 인생이 즐겁다. 10년의 독일 주재원 생활을 청산하고, 17년 전에 시작된 그의 행복한 전원생활에 대해 들어본다.
서울에서 남한강을 따라 액셀을 밟는다. 회색의 높은 빌딩은 사라지고 시야가 탁 트일 때 즈음 상쾌한 바람을 맞은 자동차 창문도 하얗게 변한다. 서울에서 전투태세로 무장돼 있던 몸과 마음도 이곳 경기도 양평에 이르자 이내 무장해제되는 기분이다.
양평의 두물머리를 지나 청국장의 구수한 향이 풍기는 음식점들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간다. 그 길의 초입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아낙네를 보니 미래마을은 그 길에서 꽤나 멀리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예상을 깨고 언덕 하나를 넘자 이국적인 풍경의 마을이 나타났다. 안데르센 하우스, 대박이네, 라일락집, 감사하우스 등 집집마다 붙어 있는 집 이름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햇빛에 반사해 금빛을 발산하는 남한강, 깔끔하게 정비된 조경과 전원주택이 조화를 이룬 마을. 미래 마을이다.
지금이야 유럽의 한 마을에 온 것과 같이 이국적인 정취를 뽐내는 곳이지만, 안씨가 이곳에 터를 잡았던 17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한 시골마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집을 짓고, 꽃을 심고 마을에 공을 들이기 시작하자 점점 전원마을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꽃과 사람 그리고 자연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화 마을이 됐다. 안씨의 삶의 질과 행복도도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전원생활을 택한 이유
34세에 시작한 독일 주재원 생활. 10년간 이어진 그 생활 속에서 여권에 찍힌 국가의 도장만 해도 수십 개가 넘는다. 세계 74개국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삶의 콘텐츠를 경험한 안씨는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이라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면 이웃과 단절된 도시 생활이 아닌 함께하는 전원생활을 하기로 한 것이다. 다양한 삶과 문화를 경험한 덕분인지 꽃이 많은 마을의 풍경과 주택의 모습은 유난히 외국의 어떤 모습들과 닮아 있었다.
“유럽이 아름다운 이유는 꽃이었다고 생각해요.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꽃이 많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마을을 네덜란드의 한 마을처럼 만들고 싶었어요. 마을 사람들과 즐거움을 공유하고 싶었거든요. 뿐만 아니에요. 뭔가 자연친화적인 집을 만들기 위해 새집을 모티브로 집을 지었어요. 자연은 손대지 않고, 경사지에 집을 지어 붕 떠 있는 집을 만들었어요.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고, 자연과 인간이 만나도록 말입니다.”
안씨가 전원생활을 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자는 것이었다. 도시 생활, 직장 생활에 젖어 자신을 돌아볼 수 없게 돼 무엇을 하고 싶은지 까맣게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바쁜 일상에 쫓겨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으니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맞는지, 삶에서 정말 행복한 일인 것인지 몰랐던 것이다. 즉, 내 삶이 아닌 남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안씨는 나홀로 사색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온전히 자신의 마음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곳 말이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저는 사회가 요구하는 경쟁과 소유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 속에서 성취를 이뤄냈는데도 행복하지 않은 겁니다. 남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전원생활을 하면서 사색하고, 실천해보고, 제 마음에 집중하니 행복한 삶을 위한 길이 보이더군요.”
◇아내를 위한 카푸치노와 전원생활의 맛
매일 아침 안씨는 아내 이화경(60)씨에게 손수 만든 카푸치노를 대접(?)한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항상 주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또 주위에서 그것들을 채우는 날들이 늘어나면 자동적으로 행복해진다는 것. 그래서 아내를 위한 카푸치노는 그에게 소소하지만 중요한 일상이 됐다. 누가 커피 한 잔의 여유라 했던가? 카푸치노로 하나 된 부부의 대화는 여유롭지만 그 무엇보다 진지하고, 미래지향적이다.
그들의 전원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이웃이다. 이 부부의 전원생활에서 이웃은 그들의 행복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다. 그들이 더욱 이웃에게 투자하고, 공을 들이는 이유다. 그렇다고 이웃이 무엇을 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웃이 주는 행복은 거창하지 않고 꽤나 소박하다. 함께하는 것. 이야기하는 것. 삶을 공유하는 것. 그것이 전부다. 1년에 4번 열리는 반상회를 통해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하거나, 포트락(Potluck: 각자 음식을 조금씩 가져와 나눠 먹는 것)파티를 열어 일상을 충만하게 하는 것 말이다. 이곳 미래마을에서는 품앗이도 하나의 일상이다. 산귀래 문학상 시상을 하는 수필가 박수주씨의 행사를 도와주면, 박씨는 안씨 아내가 운영하는 가게에 직접 심은 꽃을 대주기도 한다.
마을 한 곳에 모여 한 달에 두 번 차 모임을 갖는 화정다락회도 벌써 10년이나 됐다. 대한민국 다도의 원로격인 신운학 선생의 다실 화심정은 차도를 배우려는 미래마을 이웃들로 북새통이다.
가을 남한강변은 끼와 재능 발산의 장이다. 문호리 리버 마켓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피자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팔도의 사람들을 만나 소통하면서 웃음꽃을 만개시키는 것. 그 구수하고 사람 냄새나는 전원생활의 맛에 17년째 중독되고 있는 안씨 부부다. 안씨는 이제 이웃을 빼 놓고는 양평 생활을 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저번에는 옆집에서 급하게 전화가 오는 거예요. 아저씨가 쓰러졌다면서 말이죠. 자식들은 멀리 있고 도움을 청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곳이 저희 집이라고 하더군요. 이제는 정말 이웃이 사촌인 이웃사촌이 된 것이죠.”
◇전원생활을 꿈꾸는 이에게
안씨는 전원생활을 통해 정신적인 것과 대인관계의 부분에서 자신이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한순간에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좋은 것을 얻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전원생활 신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웃에 대한 투자는 성공적인 전원생활의 필수 조건이라고 말한다.
“아마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외로움일 거예요. 저 또한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이곳에는 집집마다 담이 낮다보니 사소한 것부터 나누고, 얘기하고, 상의하니까 외로움이 점점 사라지게 됐어요. 사소한 것부터 주변과 나누니, 그 행복이 고스란히 저에게 돌아오더라고요.”
전원생활을 꿈꾼다면 가장 먼저 홀로되기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외로움’이라는 근심을 피하려 하지 말고 맞서라는 뜻이다.
안씨는 자신이 전원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즐거운 홀로서기 방법에 대해서 설명했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때 즐겁게 지내기 위한 사색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아내에게 카푸치노 타주기도 그 일환이었다. 사색의 시간을 통해 하고 싶은 것을 바로 실행하는 것. 그것이 홀로서면서 행복해지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남이 무엇을 해주기 전에 제가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생각해야 돼요. 남을 통해 행복해지는 것 보단 홀로 생각하며 행복해지는 것이죠. 사람이라는 게 주면 바로 오는 게 있잖아요. 물질적인 것이든 안 그렇든 말이에요. 제가 하고 싶은 일 중 ‘사랑에 붕 뜬 장학회’라고 해서 주위에 해외로 가는 아이들에게 100달러씩 장학금을 줬는데요. 이것이 꽤 보람 있더라고요. 이 돈을 쓸 때 제 생각하면서 고맙게 느끼겠죠. 그 마음이면 충분해요.”
◇‘후두염’엔 ‘감기주사’
안씨는 미래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후두염을 앓고 있었다고 했다. 아! 여기서 후두염은 후두에 염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안씨가 말하는 ‘후두염’은 후회, 두려움, 염려를 줄인 것이다. 하루가 바쁘고, 돈에 쫓기다 보니 엄습하는 ‘후두염’에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는 것. 그는 전원생활을 통한 ‘감기주사’처방이 ‘후두염’을 다스리는 특효약이라고 말했다. 감사할 줄 알고, 기뻐할 줄 알고, 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안씨가 말하는 감기주사다.
“여기에서 평정심을 찾으니 여유가 생기면서 제 마음을 다스릴 방법이 보이더군요. 그것이 전원생활이 준 선물인 거죠.”
“이번 주 빅이슈 코리아 있습니다. 표지로 스타 OOO가 나왔어요.”
강남이나 홍대, 종로 등 지하철 역 앞에서 ‘빅이슈’를 들고 큰소리로 판매나 구독을 유치하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노숙인들의 자활을 돕기 위해 4년 째 만들어지고 있는 이 잡지가 적지 않은 노숙인들의 삶을 바꾸고 있다고 한다.
MBC 뉴스 보도에 따르면 “예순살 강명렬씨가 2012년부터 서울 신촌에서 잡지 ‘빅이슈 코리아’를 팔면 판매가격 5천 원의 절반이 강씨의 몫이 되는데 이렇게 모은 돈과 주변의 지원을 더해 작년 5월 임대주택을 얻었다. 택시 기사를 하다 건강을 잃고, 거리에서 떠돈지 7년만에 마련한 보금자리”라고 전했다.
강명렬 씨는 “격주로 발행되는 잡지 '빅이슈 코리아'는 대중문화 소식을 주로 다루는데, 연예인, 사진작가, 수필가 등 3백여 명의 이웃들이 재능기부형태로 제작을 돕는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지난 2010년 7월 5일에 창간됐다. 강씨를 비롯해 총 50여명의 국내 노숙인들이 전국 거리에서 ‘빅이슈’를 판매하고 있다.
빅이슈 코리아는 4년 전 시작할 때 한 달 1천부 정도던 판매부수가 지금은 약 2만 부. 현재 서울과 대전 전철역 중심으로 40여 곳에서 판매되고 있다.
그동안 덕분에 40명의 노숙인이 임대주택을 얻었고 취업에 성공해 자립해나간 '빅이슈' 판매원도 17명이라고 한다.
前 '빅이슈' 판매원이었던 조성권 씨는 “저에게 있어 빅이슈는 디딤돌 역할을 해줬던 거죠.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고 지금은 요리사가 되어 세상 밖으로 나와 적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상에 사연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먄은 포기하지 않고 자활의 의지를 보여주는 이들이 있어 유명스타들이 표지 기부도 기꺼이 한다는 것.
지난 4월 1일자 빅이슈 코리아 표지에 MBC ‘무한도전’ 멤버들과 보리 작가가 함께 했던 사진 작품이 실렸다.
빅이슈는 1991년 영국에서 창간된 대중문화잡지다. 노숙인에게만 판매 권한을 주는 독특한 잡지로 더 유명하다. 영국에서만 5500명이 빅이슈를 판매하며 자립에 성공했고 현재 영국,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일본, 대만, 한국 등 세계 10개국에서 발행되며 노숙인들의 자립을 돕고 있다. 데이비드 베컴, 버락 오바마, 레이디 가가 등 유명인들이 재능기부 형태로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처음 빅판이 되면 잡지 10권을 무료로 받게 된다. 이를 판매한 수익으로 다시 잡지를 재구매해 2주 이상 꾸준히 판매하면 정식 빅판이 된다. 정식 빅판이 되면 한 달간 고시원비를 지원받을 수 있고, 이를 기반으로 자립하게 하는 것이 빅이슈의 창립 목적이다.
이들 빅판에게는 10가지 행동수칙이 있다. 술을 마시고 빅이슈를 판매하지 않을 것, 흡연 중 빅이슈를 판매하지 않을 것, 하루 수익의 50%는 저축할 것 등이다.
잡지구입이 일종에 사회 참여 및 사회공헌이 될수 있다는 의미로 재평가 해보게 된다.
글ㆍ사진| 블로거 느꽃지기
“별난 할머니와 별난 쌍둥이”
제목 한번 잘 지었다 싶다. 평범하지 않고 톡톡 튀는 생각으로 다방면에 의욕 넘치는 별난 할머니와 기상천외한 행동으로 모두를 깜짝깜짝 놀라게 했던 별난 장난꾸러기 쌍둥이가 엮어가는 일상은 얼마나 유별날까? 표지만 보아도 뭔가 둘이 의기투합하여 한바탕 일을 벌일 것 같은 귀여운 쌍둥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그 별난 쌍둥이를 유일하게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무서운 호랑이 외할아버지도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씩 보는 아빠 엄마도 아니고, 가끔 놀러 오는 이모들과 외삼촌이나 사촌 누나들도 아니고, 쌍둥이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는 한층 더 별난 외할머니였으니. 책을 읽다 보면 할머니와 쌍둥이들의 팽팽한 맞대결이 눈에 선하여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글자·숫자·자연과학·도덕 공부, 습관, 장난감, 성품, 약속 등등 쌍둥이를 키우는 별난 교육 방법을 하나하나 짚어가다 보면 정말 감탄하게 된다. 옛날 어른들의 지혜와 산교육이 녹아난 할머니 표 교육법은 요즘 젊은 엄마들이 꼭 배워두어야 할 지침이 된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것. 쌍둥이들은 자유롭게 맘껏 뛰어놀고 더불어 생각하고 많은 걸 공유하며 보통 아이들보다 더욱더 감성이 풍부해졌고, 더욱 폭넓은 경험을 많이 했다.
오늘날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넘쳐나며 심각하게 느끼게 되는 육아 문제. 50~60대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생활 일선에 나선 딸이나 며느리를 대신하여 손주들을 대신 기르며 잃어버린 아이 양육 감각 때문에 새삼스레 좌충우돌하며 힘겨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 책의 저자 별난 할머니는 그런 분들에게 당신이 12년간 손주들을 기르며 쌓아온 육아 노하우를 알려준다. 또한, 갓 결혼한 젊은 풋내기 엄마들에게도 요즘 점점 늘고 있는 쌍둥이들을 어떻게 심성 곱고 치우침 없이 골고루 사랑 베풀며 현명하게 잘 기를 수 있는지 당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이런저런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책 속에는 쌍둥이 손주들이 잠들 적에 들려주었다는 할머니가 지은 여러 편의 동화도 실려있다. 쌍둥이들은 밤마다 할머니께서 도란도란 들려주시는 이야기 속에 빨려들어 거짓말처럼 어김없이 꿈나라로 갔다는데. 할머니가 지은 동화는 한때 MBC 어린이 프로그램 뽀뽀뽀에 방송된 적도 있다고 한다.
별난 할머니의 별난 교육법에 따라 별난 쌍둥이들은 곧고 바르게 잘 자라 주었고, 어느새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다. 별난 할머니는 쌍둥이를 떠나보내고 칠순 가까운 나이에 컴퓨터를 배워 평생교육원에서 당신 하시고 싶은 수필을 공부하고 등단하여 수필가가 되셨다. 수필집 와 쌍둥이 육아일기 를 내고 앞으로는 슬하의 7명의 손자손녀들을 데리고 2001년부터 열렸던 작은 백일장에서 손주들이 쓴 글과 그림을 엮어j서 문집을 내실 꿈을 갖고 계신다.
출처| 느티나무와 꽃사과(http://blog.naver.com/kwwoolim)
아버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시대에 ‘친구 같은 아버지’가 바람직한 아버지상으로 회자되곤 한다. 놀아주는 것은 초등학교나 길게 잡아 중학교까지인데 아버지가 놀아주고 안 놀아주고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자녀교육을 위해 수많은 동서고금의 사례를 접하면서 아버지와 잘 놀아서 성공했다는 사람은 별로 만나보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마음일 거다. 아버지가 사랑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고 자녀들이 생각한다면 그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 아버지상이지만 조지훈(본명 동탁, 1920~1968) 시인의 사례는 지금도 아버지 역할을 하는 데 교훈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조지훈은 3남1녀를 두었는데 자녀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길을 밝혀준 멘토로 ‘아버지’를 꼽았다. “진정 어린 살가운 추억과 통속적 재미, 재산은 남겨 주시진 못하셨지만 그 대신 고상한 정신을 듬뿍 선물로 주신 아버지, 글과 말과 행동의 삼위일체로 ‘혼이 깃든 가르침’을 주신 아버지, 당신은 우리들의 거울이란 걸 늘 염두에 두고 사셨던 아버지….”
장남 조광렬의 말처럼 아버지 조지훈은 자녀들이 늘 자신의 얼굴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존재였다. 조광렬은 건축가로 활동하다 60살에 이르러 그가 결코 가지 않겠다던 ‘문인’의 길에 들어서 미국에 거주하며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다. 외교부 차관으로 재직 중인 차남 조태열도 외교관의 길을 가는데 언제나 등대와 같은 존재가 되어 주었다고 한다.
조지훈은 요즘 말하는 ‘친구 같은 아빠’는 결코 아니었다. “자녀들에게 어린이 날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날 작은 선물을 주신 적도 없다.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간 적도 없고 캠핑조차 가 본 적이 없다. 졸업식에 와서 한 번도 축하해 주신 적도 없다. ‘이제 너도 세상에 나가야 하니 이 돈으로 양복이나 한 벌 해 입어라’ 하시며 선뜻 돈을 건네 주신 적도 없다”고 장남 조광렬은 ‘나의 아버지 조지훈’이란 책에서 말한다.
그러나 조지훈은 자녀들에게 강렬한 모습을 각인시켜 주었다. 집에 돌아오면 늘 한복을 입고 단정한 모습으로 서재에 앉아 책을 읽었다. 자녀들은 한결같이 아버지의 이 모습을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이게 어쩌면 가장 위대한 유산이 아닐까.
멘토는 물질적인 부를 물려주는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인 양식을 들려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아버지가 자녀의 멘토가 되려면 조지훈처럼 잔소리보다 집에서 책 읽는 모습만큼은 보여주어야 한다. 또 자신의 ‘글’을 남긴다면 자녀들은 ‘아버지의 글’을 등대 삼아 인생의 길을 열어 나갈 것이다. 거창하게 책이 아니더라도 매일 일기를 쓰거나 다이어리에 메모라도 남긴다면 그 또한 훗날 자녀에게 훌륭한 양식이 될 수 있을 게다. 자신의 삶과 가족 사랑이 담긴 ‘아버지의 글’은 정신적 양식이 되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등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