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사상 최다 노미네이트, 두 번의 여우주연상과 한 번의 여우조연상 수상. 이 놀라운 기록을 보유한 자는 누구일까? 바로 할리우드 배우 메릴 스트립이다. 1977년 영화 ‘줄리아’로 데뷔한 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60여 작품에 출연한 메릴 스트립은 성별과 연령의 한계를 뛰어넘고 오직 연기력만으로 전쟁터 같은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킨, 그야말로 ‘철의 여인’ 같은 배우다. 우아하면서도 압도적인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스크린 속 캐릭터가 실존 인물이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든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 메릴 스트립의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를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The Devil Wears Prada, 2006)
사회부 기자를 꿈꾸는 '앤드리아'(앤 해서웨이)가 최고의 패션 잡지 '런웨이'에 입사해 까다롭기로 유명한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립)와 함께 일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과거 패션 잡지 ‘보그’ 편집장의 비서로 일했던 작가 로렌 와이스버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에서 메릴 스트립은 냉철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편집장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 호평을 받았으며, 제64회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 뮤지컬·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앤 해서웨이 또한 20대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사회 초년생 연기로 작품의 완성도를 더하며 메릴 스트립과 나이 차를 뛰어넘는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2.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Kramer Vs. Kramer, 1979)
아내와 엄마로서의 삶에 지친 '조안나'(메릴 스트립)가 남편 '테드'(더스틴 호프만)와 아들 '빌리'(저스틴 헨리)를 두고 떠났다 1년 만에 돌아와 양육권 소송을 거는 이야기를 다룬다. 가족의 해체를 소재로 한 고전 영화로, 이혼 가정이 많지 않았던 1970년대에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다. 당시 데뷔한지 약 3년이 넘은 신인배우였던 메릴 스트립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시상식의 전초격인 골든 글로브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고 할리우드 스타로 급부상했다. 이혼 후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역설적으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으며, 더불어 메릴 스트립의 젊은 시절 모습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3. 시크릿 세탁소 (The Laundromat, 2019)
유람선 사고로 남편을 잃은 '앨런'(메릴 스트립)이 터무니없는 보험료에 수상함을 느끼고 보험 회사로 향하며 벌어지는 내용을 그린다. 2016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조세 회피 자료 '파나마 페이퍼스'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영화의 원제인 '세탁소' 또한 옷이 아닌 돈 세탁을 의미한다. 불법적인 자금 세탁을 고발한다는 영화의 메시지를 보다 선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됐으며, 배우들은 작품 안과 밖을 유기적으로 이동해가며 내레이터와 연기자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소화한다. 주인공을 맡은 메릴 스트립 또한 영화 후반부에는 극중 역할에서 벗어나 영향력 있는 배우이자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탈세를 지적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웰다잉을 위해 실버타운에 입주한 7명의 꽃중년이 펼치는 치어리딩 도전기를 그린 영화 ‘치어리딩 클럽’이 오늘 개봉한다.
BBC ‘100인의 여성’에 선정될 정도로 유명한 실버 치어리딩 클럽 ‘폼즈’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다이안 키튼을 중심으로, 연기 경력만 총 300년에 달하는 할리우드 대표 여성 배우가 총출동했다.
공개된 메인 예고편에는 실버 타운에 입주한 중년 여성들이 모여 치어리딩 대회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담겼다. 젊은 시절 꿈을 이루기 위해 치어리딩 퍼포먼스를 연습하지만 몸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시니어들의 고충마저도 유쾌하게 그린다.
실제 치어리딩을 해본 적 없던 중년 배우들은 혹독한 훈련을 통해 모든 장면을 직접 소화하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영화 속 메시지를 몸소 전했다.
중견 배우들의 연기력과 작품성은 물론, 실화의 감동까지 담아 수많은 중장년에게 응원과 희망을 선사할 예정이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발생한 뒤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 게 몇 가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영화관, 공연 등 여가를 책임졌던 문화생활이다. 공연장에서 빵빵한 스피커로 화려한 퍼포먼스를 즐기고 음악을 감상하던 때가 까마득하다. 아쉬운 대로 이어폰을 끼고 넷플릭스에 접속해 본다. 적적한 두 귀를 호강시켜줄 만한 영화 없을까?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안방 1열에서 즐길 수 있는 뮤지컬 영화 세 편을 추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드림걸즈 (Dreamgirls, 2006)
1960년대 미국 디트로이트 출신 흑인 여성 트리오 '디나'(비욘세 놀즈), '에피'(제니퍼 허드슨), '로렐'(애니카 노니 로즈)이 가수의 꿈을 이뤄가는 내용의 영화다. 미국의 전설적인 흑인 여성 R&B 그룹 '슈프림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다. 백인 음악이 음반계를 장악하고 있는 당대의 상황에서 흑인 가수가 주류 음악에 도전장을 내밀고, 이로 인해 벌어지는 세 소녀의 갈등과 화해를 감동적으로 풀어나간다. ‘드림걸즈’(Dreamgirls)를 비롯해 '리슨'(Listen), '원 나잇 온리'(One Night Only) 등 주옥같은 명곡을 비욘세와 제니퍼 허드슨 등 세계적인 디바의 목소리로 감상할 수 있다.
2. 물랑 루즈 (Moulin Rouge, 2001)
1890년 프랑스 파리, 쇼걸 '샤틴'(니콜 키드먼)과 영국의 가난한 시인 '크리스티앙'(이완 맥그리거)의 매혹적인 사랑을 그린 영화다. 파리 몽마르트 언덕에 있는 카바레 '물랑 루즈'의 인기 뮤지컬 가수 샤틴은 신분 상승을 위해 투자자를 찾다 우연히 크리스티앙을 만나고, 그를 부유한 공작으로 착각해 다가간다. 매력적인 샤틴의 모습에 반한 크리스티앙은 물랑루즈의 세계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다. 영화에는 엘튼 존의 '유어 송'(Your Song), 마돈나의 '라이크 어 버진'(Like A Virgin) 등 뮤지컬 요소를 더하는 반가운 팝송들이 연이어 등장하며, 특히 ‘록산느의 탱고’(El Tango De Roxanne)를 배경으로 두 남녀가 탱고를 추는 순간은 작품의 명장면으로 통한다.
3. 레미제라블 (Les Miserables, 2012)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긴 시간 옥살이를 한 뒤 신부의 구원을 받고 새 삶을 살아가는 장발장의 이야기를 담았다. 2012년 국내 개봉 당시 약 6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인기를 끌었고, 제8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8개 부문 후보에 오르고 3개 부문 수상을 하는 등 작품성을 널리 인정받았다. 뮤지컬과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두 유 히어 더 피플 싱'(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비롯해 '원 데이 모어'(One Day More), '아이 드림드 어 드림'(I Dreamed A Dream) 등 레미제라블 특유의 압도적이고 웅장한 넘버가 흘러나와 벅찬 감동을 선사한다. 넷플릭스에서는 레미제라블 25주년 라이브 공연도 함께 볼 수 있다.
어딜 가든 화제가 되는 슈퍼리치는 부지불식간에 일상마저 들키곤 한다. 이때 대중의 시선은 그들의 패션을 단번에 스캔한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 또 어떤 신발을 신고 액세서리는 뭘 착용했는지. 최근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낸 슈퍼리치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애용하는 패션 아이템이 무엇인지 살펴봤다.
◇꼼데가르송
지난 2월 9일 미국 LA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을 포함해 4개 부문을 석권했다. 이날 대중은 투자·배급사인 CJ그룹의 이미경 부회장이 입은 의상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바로 ‘꼼데가르송 빈티지 재킷’이었다.
이 의상에 부착된 밴드 위에는 ‘PARASITE is Cool’(기생충은 쿨하다), ‘I’m Deadly Serious’(나 정말 진지해요), ‘RESPECT’(존경해요) 등 영화 속 명대사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새겨져 있었다. 이 부회장이 직접 넣은 문구들로 세간의 화제가 됐다.
꼼데가르송은 1969년 출시된 일본의 아방가르드 고급 패션 브랜드다. 이 브랜드에 전 세계가 주목한 것은 1981년 파리 컬렉션에서다. 블랙을 기초로 한 비대칭 재단과 미완성인 듯 보이는 바느질, 풀어헤쳐진 원단을 사용한 의상들은 당시 충격을 안겨줬다.
이 부회장이 시상식에서 입은 재킷의 정확한 가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200만 원대로 추정된다. 꼼데가르송의 재킷과 코트는 100만~300만 원대의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한국에 잘 알려진 하트 로고의 플레이 라인 티셔츠는 10만 원대, 카디건은 30만 원대다.
◇에르메스
이만희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신천지교회) 총회장이 명품 넥타이로 주목받았다. 지난 3월 2일 코로나19 확산 사태와 관련, 국민에게 사죄하기 위해 마련한 기자회견장에 ‘에르메스’의 노란색 실크 넥타이를 매고 나온 것. 해당 제품은 약 20만 원에 판매되고 있다. 에르메스는 프랑스의 하이엔드 명품 패션 브랜드다. 루이비통, 샤넬과 함께 3대 명품 브랜드로 통하는데, 그중에서도 최고로 꼽힌다.
하지만 가격대가 상당한 프리미엄 라인은 따로 있다. 대표적으로 ‘버킨백’과 ‘켈리백’이 초고가 제품이다. 버킨백 가격은 2011년 기준으로 1240만 원 정도다. 그레이스 켈리가 들고 다녀서 유명해진 켈리백은 35㎝급 제품이 930만 원 선이다.
이 제품들을 구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예약을 한 뒤 오랜 대기기간을 거쳐야 살 수 있어서다. 버킨백은 현재 2000여 명의 대기자가 있어 3년 후에나 구매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켈리백은 현재 국내 VIP의 예약을 받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롤렉스
지난해 연말,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를 찾은 세계적인 축구 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착용한 시계가 화제였다. 영국 언론 데일리미러의 보도에 따르면, 호날두가 착용한 시계는 스위스 명품 브랜드 ‘롤렉스’의 ‘GMT-마스터 아이스 워치’다.
이 시계의 가격은 38만 파운드(약 5억7400만 원)에 달하는 고가의 한정판 제품이다. 데일리미러는 이날 호날두가 차고 나온 시계도 희귀하지만, 그의 소장품 중 가장 비싼 제품은 아니라고 전했다.
롤렉스는 시대와 분야를 막론하고 성공한 사람들과 유명인의 총애를 받는 대표적인 명품 시계 브랜드로 정확성과 내구성을 최우선 가치로 꼽는다. 엄격한 자체 검증과정을 통해 하루 오차 2초 내외로 정밀 조정된 시계만 출고한다.
롤렉스는 매우 일관적이고 확실한 콘셉트를 갖고 있어 용도와 라이프스타일에 따른 모델 분류가 철저하다. 다른 브랜드들도 용도에 따른 분류를 하지만 롤렉스에 미치지 못한다. 롤렉스 시계가 필드 쓰임새를 극대화한 ‘고급 툴워치’라는 개념으로 설명되는 건 이 때문이다.
온 나라가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시상식(Academy Awards) 작품상과 감독상 등 4개 부문 석권 소식에 떠들썩하다.
뜨거웠던 시상식의 열기만큼이나 시상식장의 면면도 관심이 가는데, 바로 2016년부터 시계 명품 브랜드 롤렉스가 디자인하고 있는 돌비극장 내 그린룸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돌비극장 내 그린룸은 아카데미 시상식 때 시상자와 특별 게스트들이 무대에 오르기 전 머무는 특별한 공간으로 유명하다. 매년 시상식 때마다 다양한 주제로 꾸미고 있다. 올해의 테마는 ‘극지 탐험’이었다.
롤렉스는 올해 그린룸의 디자인을 통해 극 지대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린룸 방문자는 북극 한가운데에 있는 목재 장식의 아늑한 전망대에서 차가운 순백의 설경을 바라보며 얼음 세상을 체험하는 듯한 경험을 했다.
특수 조명이 일출과 일몰 시간의 흐름을 실감 나게 연출할 뿐만 아니라 북극 특유의 햇살과 음영을 느끼게 한다. ‘시간’ 역시 그린룸 디자인의 핵심 콘셉트다. 따라서 극한 환경 탐험에서 필수적인 롤렉스 익스플로러 II가 내부 장식에 중요하게 사용됐다.
이투데이가 2019년 자본시장을 선도한 마켓리더들을 선정했다. 이투데이가 주최하는 ‘올해의 마켓리더 대상’은 건전한 투자문화 정착과 시장 발전을 위해 마켓리더들의 공을 치하하는 시상식이다. 올해 9회째를 맞은 마켓리더 대상은 11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2층 제2대연회실에서 열렸다.
금융감독원장상인 종합대상은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NH투자증권이 차지했다. NH투자증권은 정영채 사장 체제로 바뀐 지난해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WM사업부는 ‘과정가치’ 평가제도를 도입해 고객가치 중심으로 자산관리 비즈니스의 패러다임 변화를 이끌었다는 평가다. 또한 주식자본시장(ECM) 무대에서도 압도적인 성과를 냈다.
정영채 NH투자증권 대표는 수상소감을 통해 “자본시장의 가장 큰 이슈는 불완전 판매인 것 같다”며 “투자금 손실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는 만큼 최고의 상품보다는 고객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들의 라이프사이클에 적합한 상품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한국거래소 이사장상은 △미래에셋대우(고객만족부문) △신한금융투자(금융혁신부문) △한국투자증권(자산관리부문) △대신증권(MTS부문) 등이 수상했다. 금융투자협회장상은 △하나금융투자(대체투자부문) △미래에셋자산운용(연금펀드부문) △KB증권(DCM부문) 등이 영예를 안았다. 이투데이 대표이사상은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해외채권형펀드) △교보증권(고객자산운용부문) △삼성자산운용(해외액티브펀드) 등이 수상했다.
한편 자본시장 내 분야별 전문가로 구성된 마켓리더 대상 심사위원회는 기업별 실적과 사업, 업계의 의견을 다각적으로 검토해 올해 국내 자본시장 발전에 기여한 마켓리더들을 총 11개부문으로 나눠 심사했다.
지난 4일 서울 동작구 대방동 이투데이 사옥에서 열린 심사위원회의에는 김군호(에프앤가이드 대표) 심사위원장을 비롯해 김동회 금융감독원 자본시장감독국장, 라성채 한국거래소 유가시장본부 본부장보, 이창화 금융투자협회 상무,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이 참석했다.
45년 연기 내공에 빛나는 배우 글렌 클로즈 주연의 영화 ‘더 와이프’가 중년 여성 관객의 지지 속에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더 와이프’ 관객층은 CGV 성별 예매 분포도에서 여성 관객이 70.3%이며, 그중 50대가 25.8%를 차지했다(3월 11일 오전 CGV 홈페이지 기준). 현재 예매율 1위인 ‘캡틴마블’(7.4%), 2위인 ‘항거-유관순 이야기’(9.8%)의 50대 관객 비율과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다.
‘더 와이프’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스타작가와 남편의 성공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며 살았던 아내의 숨겨진 진실을 그린다. 할리우드 대표 배우 글렌 클로즈가 아내 ‘조안’ 역을 맡아 섬세한 내면 연기를 통해 극에 긴장감을 불어 넣는다. 명연기와 탄탄한 스토리로 사랑받는 ‘더 와이프’의 관전 포인트를 살펴보자.
# 관전 포인트 하나, 비밀스러운 부부의 관계
영화는 사랑과 결혼을 주제로 내밀한 비밀이 얽힌 스토리로 주목받은 베스트셀러 ‘더 와이프’가 원작이다. 원작의 흥미진진한 전개는 이어가되, 부부의 아들을 자존심에 상처 입은 작가로 설정하며 인물 간의 관계에서 오는 감정에 몰입도를 더하는 등 각색을 통해 극적 긴장감을 한층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관전 포인트 둘, 글렌 클로즈의 압도적 연기
글렌 클로즈의 인생 역작이라 불릴 만큼 ‘더 와이프’ 속 그녀의 연기는 단연 돋보인다. 언제나 우아하고 침착한 모습으로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현명하게 진두지휘하는 아내 ‘조안’을 연기했다. 특히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노벨문학상 시상식에서 클로즈업된 조안의 표정은 복잡 미묘한 감정을 일으키며 객석의 분위기까지 진두지휘한다.
# 관전 포인트 셋, 아내로 살아온 한 여인의 삶
평생을 한 남자의 아내이자 그림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조안에 공감을 표하는 중장년 여성 관객이 많았다. ‘더 와이프’의 각색을 담당한 제인 앤더슨은 “부부 사이에 비밀은 있을까? 아내가 결혼 생활을 위해 타협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남자는 아내를 존경하고 사랑할까? 등에 대해 영화를 본 관객들이 이야기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제 관객들의 반응을 살펴봐도 “얼마나 많은 여성이 남성에게 가려지고 지워졌을까”, “마지막까지 남편을 존중하는 그녀의 결정이 대단하다” 등 한 여자로서 조안의 삶에 감정이입하고 이해하는 반응이다.
“앵커, 명예 졸업합니다. 고맙습니다.”
8년 전 마지막 뉴스를 전하던 날, 유영미(柳英美·57) 아나운서의 마무리 멘트에는 후련함, 시원함 그리고 섭섭함이 담겨 있었다. 그녀 나이 오십. 여성 앵커로서 최장기, 최고령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젊고 아름다운 시절에 뉴스 인생을 마감했다. 강단 있는 목소리로 SBS 여성 앵커의 표본이던 유영미 아나운서. 한동안 안 보이나 싶더니 작년 말 ‘2018 아나운서 대상’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냈다. TV 시청자 눈을 떠나 라디오 청취자들과 만나고 있었단다. 그것도 빨간 오픈카(?) 타고 ‘마음은 언제나 청춘’을 외치면서 말이다.
시니어와 소통한 보람을 인정받다
“놀랐어요. 내가 벌써 공로상을 받을 나이가 됐나 하고요. 저희 프로그램은 시니어에게 도움이 되고자 1991년 SBS가 창사하면서 시작한 최장수 프로그램입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벽 청취자들을 위한 방송이었죠. 다른 선배님께서 3년 정도 하시다 제가 바통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했는데 이런 큰 상도 받네요.”
작년 말, 2018 아나운서 대상 시상식에서 유영미 SBS 아나운서의 이름이 불렸다. 시니어 세대를 위한 SBS 러브FM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을 25년간 진행해온 공로였다. 오랜 시간 프로그램을 이끌어온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유영미 아나운서는 DJ는 물론 2010년부터 PD도 겸하고 있기에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2015년에는 한국방송대상에서 사회공익 라디오 부문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SBS 간판 아나운서로 뉴스를 비롯해 다양한 교양 프로그램을 진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던 30대 초반에 만난 ‘마음은 언제나 청춘’. “유영미 선배의 목소리가 너무 따뜻해서 라디오와 잘 어울린다”는 담당 PD의 사탕발림(?)에 못 이기는 척 승낙한 방송이 인생 역작이 됐다.
“처음에는 부모님이나 선배 세대를 생각하면서 방송했어요. 청취자와 서서히 녹아들고 세월이 지나고 보니 저도 어느새 시니어 대열에 합류했네요. 그동안 잘 걸어왔어요.”
매일 새벽 5시. 그 누구도 듣지 않을 것 같지만 유영미 아나운서는 멀리서 묵묵히 라디오를 켜는 시니어의 관심과 사랑을 깊이 감지한다. 진행을 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2000년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사회복지 대학원에서 노인학을 공부했다. 2010년에는 시니어 프로그램 DJ 경험담을 엮어 ‘두 번째 청춘’도 발간했다. SBS로 채널을 돌리면 ‘또 유영미’ 소리가 나오던 때에 말이다.
금기를 깨고 얻은 타이틀 ‘최초’
유영미 아나운서는 시청자로서 봐왔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파스텔 톤 정장에 정돈된 머리 스타일의 그녀가 밝은 갈색 머리에 꽃무늬 로브룩으로 나타났다. 예능의 끼가 느껴진다 말하니 투정 섞인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재미난 것을 왜 안 했는지 몰라. 늙기 전에 진작할걸. 옛날에는 뉴스 앵커 이미지 때문에 예능을 할 수 없었어요. 이제는 좀 자유롭게 저를 표출하고 싶어요.”
1986년 울산MBC에서 방송생활을 시작해 SBS 공채 1기로 들어와 현재까지 활동하는 최고령 여성 아나운서. ‘여성 아나운서로서 최초’ 타이틀은 왜 이리도 많은지, 33년 여성 방송인으로서의 삶은 마치 ‘가시밭길 몸소 닦아 새길 만드신 신여성 일대기’와도 같았다.
“여성 아나운서는 일을 오래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어요. 저는 살짝 그런 시절을 비껴갔는데 결혼한 여자가 회사에 있기 힘든 시절이었죠. 그런데 저는 결혼과 함께 SBS에 입사했습니다.”
결혼을 앞둔 와중에 SBS 공채 1기 채용 공고가 났다. 결혼을 미룰 수도, 응시를 안 할 수도 없었다. 채용 공고가 언제 또 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당시 저희 팀장님이 ‘SBS를 오래도록 빛내고 기여할 아나운서인데 결혼이 뭐가 그리 문제냐’며 윗선의 날선 시선을 잠재워주셨어요. 덕분에 결혼과 신혼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동기들보다 두 주 늦게 출근했습니다. 임신 9개월까지 뉴스 앵커석에도 앉아 있었고요. 두 달 출산휴가 마치고 앵커석으로 돌아온 여자 아나운서는 제가 최초였어요.”
여자 아나운서가 출산을 하고 다시 뉴스를 맡은 전례가 당시에는 없었다. 내가 잘해야 후배들이 이 길을 따라올 거라 믿었다.
“임신했을 때 뉴스 하지 말라고 했으면 여성운동했을 거예요. 빡빡한 세상이었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선배들이 있었어요. ‘능력 있고 일 잘하는데 결혼하고 애기 낳는 게 무슨 상관이냐, 뉴스 앵커가 뉴스만 잘하면 되지’ 하면서 응원해줬어요. 선배의 역할은 좋은 선례를 남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공채 1기이다 보니 여자 아나운서 선배가 없어요. 그래서 뭘 해도 늘 최초가 된 거죠. 요즘 세대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들을 그때는 싸워서 얻어야 했어요.”
건물 내 흡연이 만연하던 1990년대 말에는 뜻있는 여성 사우들과 함께 ‘꽃을 든 금연 운동’도 전개했다. 사무실에서 금연하는 사람에게 꽃을 주고 박수도 쳐주는 운동이었다. 요즘 건물 밖에서 담배 피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시절 생각이 절로 난다고 말했다.
피겨 중계, 웃고 울다 남은 생채기
유영미 아나운서를 만나니 스포츠 중계 관련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그녀 이름은 뉴스 앵커와 교양 프로그램 진행자, 라디오 PD 겸 DJ로 회자되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스포츠 중계를 한 여성 아나운서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개·폐막식과 피겨스케이팅,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을 중계했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이 열리기 전, 김연아 선수와 일본의 아사다 마오 선수가 세계 주니어 무대에서 주목받으면서 피겨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일던 때였다. 피겨스케이팅 중계를 준비하지 않은 타 방송사에 SBS 유영미 아나운서의 중계가 송출됐다. 이후 SBS는 국제빙상연맹(ISU) 독점 중계권에 이어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중계도 독점하면서 동계스포츠 중계에 모든 것을 걸었다. 유영미 아나운서 또한 2000년부터 피겨 중계를 준비하고 있었으니 이변이 없는 한 김연아 선수의 ‘007 본드걸’ 중계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가혹하게도 이변은 일어났고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중계석 마이크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녀는 방송 인생에서 가장 아픈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녹화 중계였는데 제가 ‘한 선수가 성장하기 위해서 많은 지도자의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하던 중에 김연아 선수를 위해했던 코치가 지나갔답니다. 그 사람을 지칭해 한 말도 아니었는데 난리가 난 거예요. SBS 스포츠 인터넷 사이트가 마비될 정도로 공포 그 자체였어요.”
중계를 녹화할 당시 수많은 스태프가 함께 있었지만 원망의 대상은 유영미 아나운서의 몫이었다.
“제가 마이크를 던졌어요. 조직을 위한 결단이었죠. 그저 침묵이 약이었습니다.”
한참 후 담당 팀장이 스포츠 중계를 권했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스스로를 위로할 시간이 필요했다.
“제가 매화랑 동백꽃을 좋아하는데 꽃이 질 때 뚝 하고 떨어져 내려요. 그땐 나 스스로를 부러뜨려야 했어요. 그저 회사만 생각했습니다. 고통스러웠어요. 안티팬 글을 보고 나면 방송 절대 못해요. 그래도 동계올림픽 최초 여성 캐스터라는 타이틀은 되게 좋았어요. 그런 일들이 있었네요. 아나운서 33년 동안 일이 많았네.(웃음)”
힘들 때 달려와 안긴 곳은 라디오
그러고 나서 힘든 마음을 내려놓은 곳이 시니어 청취자를 만날 수 있는 라디오 부스 안이었다. 스포츠 중계석에서 떨어진 동백꽃은 라디오로 되돌아와 다시 예쁘게 자라났다. 마음속 얘기도 꺼낼 수 있고 제작까지 하니 한결 자유로웠다.
“힐링도 하고 자존감도 높아졌어요. 청취자들이랑 늙는 얘기 진짜 많이 해요. 오십견 온 얘기도 하고,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한쪽 손으로 방송한 얘기도 하고요. 남들은 25년 한결같이 어떻게 했냐고 하지만 저는 매일매일이 새로웠어요. 제 방송을 듣는 분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면 좋겠어요. 행복하게 사는 방법도 공유하고요.”
앞으로의 꿈이 뭐냐고 물었다. 대답 참 간단했다. SBS 최초로 정년퇴임하는 여성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초라한 성적표일지는 모르겠지만 위대한 여정의 마침표를 찍고 싶단다.
“유영미였습니다. 사랑합니다.”
또 다른 내일을 기약하는 그녀의 마무리 멘트다. 맞다! 방송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국민배우 김수미(70)를 모르는 대중이 있을까?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그 이름이 예명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지킬 수(守), 아름다울 미(美). 사람의 도리를 지키고 늙을 때까지 아름답게 살자는 결심으로 직접 지은 이름이란다(본명은 영옥). 그 이름에 반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노라 자부하는 김수미는 최근 ‘한국의 맛을 지키는[守味]’ 문화 전도사 역할까지 해내고 있다. “전 세계에 한국 음식을 알리고 싶다”는 그녀의 원대한 포부는 40여 년 전 어머니를 향한 짙은 그리움에서 시작됐다.
‘2018 제8회 대한민국 한류대상’ 시상식. ‘수미네 반찬’(tvN)을 통해 우리네 어머니의 손맛을 전수 중인 김수미는 한식 문화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 공을 인정받아 ‘특별 공로대상’을 수상했다. 방송을 본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수미네 반찬’은 근래 넘쳐나는 먹방, 쿡방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모던한 아일랜드 주방이 아닌 툇마루와 가마솥이 돋보이는 세트장은 김수미가 어린 시절 살던 시골집을 재현한 것. 게다가 제자로 등장하는 베테랑 셰프들이 눈대중 손대중으로 요리하는 그녀의 레시피를 허둥지둥 따라하는 묘한 광경이 펼쳐진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색다른 재미를 주고, 그 근저에 깔린 ‘엄마의 마음’은 가슴 찡한 감동을 선사하며 남녀노소 불문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을 줄 예상 못했어요. ‘아, 진정성을 갖고 하는 건 역시 되는구나’ 싶더라고요. 몇 스푼, 몇 그램 정확한 것보다도 집에서 하는 방식 그대로 보여주려 해요. 워낙 거침없이 해대니까 카메라가 앵글을 못 잡아 당황할 때가 많지.(웃음) 처음엔 장동민 씨가 ‘선생님 레시피가 있으시냐?’라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너희 할머니, 어머니는 저울질해가며 음식하셨니? 요리자격증 있어서 자식들 밥해줬니?’라고 했죠. 그냥 엄마가 딸한테 음식 가르치듯 알려주고 싶었어요. 싱거우면 소금 넣고, 짜면 물 붓고 하면 되지. 경험이 쌓이면 손맛은 다 생기게 돼 있어요.”
‘깍두기에 쪽파를 많이 넣으면 김치가 금세 물러진다’, ‘아귀찜할 때 아귀는 사나흘 꾸덕꾸덕 말린 것을 써야 한다’ 등 김수미는 자신이 툭툭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수십 년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음식의 지혜라고 말했다. 또 글로 써서 남기는 레시피보다는 어머니들의 기(氣)와 영혼을 물려주고 싶은 게 그녀의 오랜 바람이자 목표다.
엄니, 왜 그 맛이 안 날까요?
베테랑 셰프들도 인정하는 김수미의 수준급 요리 실력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정작 어머니에게 직접 요리를 배워본 적은 한 번도 없단다. 그 옛날 어머니가 해주셨던 음식들을 떠올리며 최대한 그 맛에 가까워지려 하다 보니 솜씨가 좋아졌다고.
“열일곱 어린 나이에 엄마가 돌아가신 탓에 요리는 못 배웠죠. 아마 내가 마흔까지 살아계셨다면 음식 안 했을지 몰라요. 할 필요가 없었겠지. 근데 결혼하고 임신을 했는데 엄마가 해준 풀치조림이 생각나는 거야. 그거 한 입만 먹으면 입덧이 싹 가실 것 같은데, 다시는 먹을 수가 없잖아요. 그 뒤로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기억을 더듬어 음식을 해보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수백 번 만들었던 엄마의 풀치조림. 그때마다 그립고 그리운 우리 엄니….”
음식을 하면 할수록 손맛도 늘고, 허기도 채울 수 있었지만, 그리움은 더욱 짙어졌다. 아무리 해도 전에 먹던 그 맛이 나지 않으니 헛헛할 수밖에 없다고.
“요즘처럼 추울 때 엄마는 김치콩나물밥을 해주시곤 했죠. 가난한 살림에 푸성귀도 없으니 엄마 나름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한 끼였을 거예요. 지금은 그 소박한 김치콩나물밥에 소고기까지 넣어 먹는 호사를 누리는데도 엄마가 해주시던 것만 못하네요. 가마솥에 지은 김치콩나물밥에 엄니표 양념간장 쓱쓱 비벼 먹던 그 추운 겨울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김수미는 줄곧 자신의 음식은 ‘엄마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이라 표현했다. 때문에 편의점 도시락으로 식사를 하는 젊은이나 인스턴트로 아이들 끼니를 해결하는 주부들이 늘어나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냉동, 반조리 식품 먹고 자란 아이가 성인이 됐을 때, 어떤 음식으로 엄마를 추억할까 싶어요. 두부 한 모를 썰더라도 엄마의 손길이 닿으면 그 음식에 온기가 더해지고 영혼이 담기는 거거든요. 그렇게 정성스러운 음식을 먹으면 마음이 온순해지고, 순간 행복을 느낄 수 있죠. 나이 먹어서도 마찬가지예요. 난 예전에 행복은 어디 다락이나 보자기에 싸서 놓은 줄로만 알았어요. 근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에 숟가락 푹 담그면서 밥 먹는 거.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이 있는 삶. 그게 바로 행복이지.”
“훌륭한 음식은 영혼을 감동시킨다”고 말하는 김수미에게 ‘소울푸드(soul food)’는 무엇인지 물었다. 단박에 ‘된장찌개’라고 대답한다. 구십까지 살아도 된장찌개와 총각김치만 있으면 다른 반찬 필요 없다는 그녀. 본인 입맛은 소탈하지만, 맛있는 반찬 소개하려 아낌없이 재료를 쓴 것이 뜻하지 않게 오해를 사기도 했다.
“방송 1회 때 고사리보리굴비조림을 했어요. 당시 재료비로 따지면 제주산 고사리라 5만 원은 넘게 줘야 사고, 보리굴비도 10만 원은 했을 거예요. 그걸 보고 한 시청자가 댓글을 달았더라고요. ‘김수미 씨는 돈 잘 버니까 비싼 재료도 막 쓰는 거 아니냐’라고요. 생각해보니까 누가 집에서 한 끼 반찬에 15만 원씩 주고 먹겠나 싶은 거죠. 그 댓글이 참 귀하게 다가왔어요. 그래서 요즘엔 진미채, 감자볶음처럼 1만 원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반찬으로 준비해요. 앞으로도 ‘수미네 반찬’에서는 비싼 재료 안 쓸 생각입니다.”
끝이 아닌 마지막 인사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 ‘나는 가끔 도망가 버리고 싶다’, ‘미안하다 사랑해서’, ‘그해 봄 나는 중이 되고 싶었다’, ‘너를 보면 살고 싶다’. 제목만 봐도 글쓴이의 심정을 알 것 같은 이 책들의 저자는 바로 김수미. 국문학도를 꿈꿨지만 대학 진학을 못한 아쉬움을 독서와 글쓰기로 달래며 살았다. 에세이와 소설, 레시피북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그동안 내놓은 책만 10여 권. 그리고 최근 마지막 에세이 ‘안녕히 계세요’를 집필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지막’이라니. 그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칠십이 넘었는데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내가 워낙 준비성이 철저하거든. 준비할 수 있을 때 준비하자, 주변 분들에게 여유 있게 인사 남기고 가자는 마음으로 ‘안녕히 계세요’를 쓰기 시작했죠. 마지막 에세이라고 했지만, 책 내고 한 5년, 10년 더 살면 어때요. 그럼 더 좋은 거지. 걱정 마세요 여러분, 저 당장 안 죽어요!(웃음)”
이번 책에는 어린 시절부터 살면서 겪은 충격적인 사건들까지 모두 담아낼 계획이란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난 뒤의 삶은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조용필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이 가사가 참 좋아요. 내가 위대한 사람 같으면 괜찮은데, 나는 너무 하찮기 때문에 꼭 흔적을 남기고 싶어요. 시골에서 올라와 이만큼 고생했는데, 그 흔적조차 안 남기면 내 한이 풀릴 것 같지 않아. 그래서 자꾸 뭐든 흔적을 남기려 해요. 앞으로는 그 흔적 중 하나가 ‘수미네 반찬’이 되지 않을까요? 이 프로그램은 애당초 계약 조건을 ‘선생님(김수미)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렇게 해서 사인했어요. 내가 죽기 전까지 ‘수미네 반찬’은 계속할 거예요.”
올림픽 폐막식을 앞두고 치러지는 마지막 경기인 마라톤은 ‘올림픽의 꽃’이라고도 불린다. 42.195km를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리다 보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질주도 끝이 난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2시간 13분 23초의 기록으로 결승 테이프를 끊은 마라톤 금메달의 주인공, 황영조(黃永祚·49)를 만났다.
가난해서 달려야 했던 소년
42.195km를 2시간 15분 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가정하면 이는 100m 달리기를 422번, 그것도 한 번도 쉬지 않고 매번 18초의 기록으로 들어와야 가능한 일이다. 상상만 해도 숨이 차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런 힘든 종목인 마라톤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뛰고 싶어서 뛴 게 아니라 뛸 수밖에 없었다고 운을 뗐다.
“돈 없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이 달리기예요. 특별한 장소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나가서 뛰면 그만이죠. 저에게 마라톤은 가난했던 시절 유일하게 돈을 받으면서 할 수 있었던 운동이었어요.”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그는 학교 월사금도 제때 내지 못할 만큼 어려운 집안에서 자랐다. 준비물을 마련하지 못해 항상 야단을 맞았던 미술시간은 그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돈이 없어 못 사온 건데 그게 무슨 죄가 된다고 벌을 서야 하는가.
“교통비도 없었기 때문에 제 두 다리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어요. 학교에 가려면 초등학생 땐 왕복 6km를 걸어야 했고, 중학생 땐 어머니가 어렵게 사주신 중고 자전거를 타고 24km를 달려야 했죠. 운동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생활 자체가 운동이었던 거죠.”
매일 가파른 언덕과 비탈길을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체력이 좋아졌고 중학생 때 이를 눈여겨본 운동부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처음 그가 선택한 종목은 육상이 아닌 사이클이었다. 하지만 장비가 워낙 비쌌고 돈이 많이 드는 종목이라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기엔 무리였다.
“옛날엔 돈 없으면 고등학교도 못 갔어요. 근데 강릉에 위치한 명륜고등학교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졸업도 시켜줄 테니 육상부에 들어오라고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거죠. 돈 안 들이고 졸업하면 효도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바로 종목을 바꿨죠. 처음엔 1500m, 5000m 중장거리 선수로 데뷔했는데 늦은 나이에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배들을 가볍게 제쳤어요. 제가 뛰고 있는 구간엔 같이 안 있으려고 할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었죠.(웃음)”
1991년 페이스메이커로 출전한 동아마라톤대회에서 3위를 기록했다. 얼떨결에 그의 마라톤 데뷔전이 된 셈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같은 해에 열린 셰필드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마라톤 금메달, 1992년 벳푸-오이타 마라톤대회에선 한국 선수 최초로 마의
2시간 10분 벽을 깨고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이 기세를 몰아 1992년엔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최연소 선수로 참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가 올림픽의 피날레를 장식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금메달은 신이 정해주는 메달”이라고 말한다.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잖아요. 마라톤도 아무리 열심히 뛴다 해도 경기가 끝날 때까진 결과를 알 수 없는 종목이죠. 그래서 저는 대회에 나갈 때마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보단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죽을힘을 다해 뛰자고 마음먹었어요.”
혜성같이 나타난 마라톤 영웅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코스는 현재까지 올림픽 사상 가장 어려웠던 난코스로 꼽힌다. 코스를 살펴보면 우선 항구도시 마타로에서 출발해 25km 지점부터 시작되는 오르막길을 지나 그라시아 거리, 카탈루냐 광장을 통과한다. 그러다 38km 부근에 도착하면 그 유명한 ‘몬주익 언덕’이 모습을 드러낸다. 해발 213m의 몬주익 언덕에 오르면 바르셀로나 시내는 물론 넓게 펼쳐진 지중해를 볼 수 있다. 26년 전 이 아름다운 무대에서 치열한 레이스가 펼쳐졌다.
“마라톤 최악의 조건이 덥고, 습하고, 경사가 많은 코스인데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코스가 기가 막히게 모든 악조건을 다 갖추고 있더라고요. 기온은 30℃를 웃돌았고 바다를 낀 도시답게 엄청나게 습했어요. 이런 날씨에 몬주익 언덕을 뛰어 올라가야 했으니 사전 답사 때 보고 아이고야! 했죠.”
바르셀로나 시내는 선수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리고 오후 6시, 경기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에 맞춰 선수들이 뛰기 시작했다.
“출발선을 떠나는 순간 주사위는 던져진 거예요. 죽이 될 수도 밥이 될 수도 있는 거죠. 솔직히 속으론 ‘어느 세월에 다 가냐’ 하는데 한편으론 더 이상 힘든 훈련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후련해지기도 해요. 이때부턴 정말 미친 척 뛰기만 하는 거예요. 머릿속도 다 비워야 해요. 이런저런 생각하면 뛸 수가 없거든요.”
30km를 지나자 선두권 그룹에서 뒤처지는 선수들이 생겨났다. 황영조와 속도를 잘 맞춰오던 김완기 선수도 페이스를 잃으면서 본격적으로 황영조,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됐다. 황영조가 앞으로 치고 나간다 싶으면 모리시타가 뒤를 바짝 쫓았고, 모리시타가 앞서나간다 싶으면 황영조가 냉큼 따라잡았다. 그렇게 서로를 떨어뜨리고 잡기를 반복했다.
“마라톤이라는 게 그냥 뛰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엄청난 전략싸움이거든요. 속도 조절을 잘하면서 체력을 비축하고 상대가 방심할 때 그 힘을 폭발시켜서 나가야지 거리를 벌릴 수 있어요. 결승지점을 2km 남겨뒀을 때 모리시타가 속도를 줄이더라고요. 아마 스타디움에서 승부를 볼 생각이었나봐요. 이때다 싶었죠. 이때 간격을 더 벌려두지 않으면 금방 따라올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죽을힘을 다해서 뛰었어요. 모리시타가 아차 싶었을 거예요.”
메인 스타디움에 황영조가 모습을 보이자 스타디움은 함성으로 가득 찼다. 그의 옆에 모리시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황영조가 마지막 코너를 돌더니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결승선을 향해 뛰어 들어왔다. 그러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원래 옆에 사람이 있으면 숨소리가 다 들리거든요. 마지막 코너를 도는데 뭔가 나만 뛰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뒤를 돌아본 거죠. 아, 내가 금메달이구나 싶었죠. 결승선을 밟는 순간 이제 안 뛰어도 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웃음)”
우연의 일치인지 황영조가 금메달을 딴 8월 9일은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날짜와 같았다. 56년 만이었다. 황영조는 스타디움에서 지켜보고 있던 손기정 선수를 찾아가 금메달을 그의 목에 걸어줬다. 당시 외신도 이들의 모습에 주목했다.
“손기정 선생님이 식민지 시절 일장기를 달고 시상식에 올라선 역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큰 아픔이잖아요. 근데 외국인들은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죠. 선생님의 한을 풀어드린 것 같아 행복했어요.”
선수에서 감독의 길로
황영조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딴 마라톤 금메달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이후 2000년부터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선수단 감독을 맡으며 그의 뒤를 이을 선수를 양성하고 있다.
“요즘 친구들을 보면 간절함이 없어 보여요.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금방 포기해버리니깐 제자리걸음이 될 수밖에 없죠. 훈련할 때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해요. 그 힘든 순간만 견디고 넘기면 정말로 더 큰 무대를 바라볼 수 있거든요.”
유독 뜨거웠던 8월의 태양을 피해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선수단은 강원도 대관령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그나마 더위가 식은 오후 6시에 훈련을 시작했지만 2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선수들의 유니폼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들을 따라가며 “포기하지 마! 바짝 붙어야 해!” 힘껏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간혹가다 가쁜 숨을 몰아쉴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는 둥 심장이 요동칠 때 희열을 느낀다는 둥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정말 죽어라 뛰어보지 않아서 하는 소리예요. 마라톤이 재미있는 운동은 아니에요.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이 늘 요구되는 외롭고 힘든 자신과의 싸움이죠. 이런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마라톤에서 앞으로 손기정, 황영조, 이봉주 말고도 언급할 수 있는 선수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게 제가 ‘마라토너’로서 가지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