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를 상징하는 ‘오빠’들이 있다. 그런데 남진이라는 이름 두 글자가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울림은 수많은 ‘오빠’들 중에서도 독보적이다. 일찍이 나훈아와 함께 라이벌 구도를 만들며 전설적인 남진 시대를 만든 그가 70이 넘어 펼치는 요즘 공연을 보라. 여전히 무대 위를 날아다닌다. 과거와 다를 바 없이 변치 않는 에너지와 무대를 휘어잡는 여유, 특유의 인간적인 매너는 그를 영원한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다. 더없이 남진다운 유쾌함과 호탕함이 어우러진 인터뷰에서 남진을 느껴보자.
“50년 넘게 부른 노래는 제 인생의 전부죠. 때론 하기 싫을 때도 있었고 슬럼프도 있었지만…. 지금은 내가 ‘노래’고, 노래가 ‘나’이구나 싶어요. 노래는 그냥 자기를 표현하는 거예요. 그걸 안 느낄 수가 없죠.”
그렇게 말해도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가수, 남진과의 대화는 펄펄 끓는 에너지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노래 장르를 설명하며 각 장르의 박자와 멜로디를 구성지게 재현해내는 그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넘실대는 흥이 느껴졌다.
“‘님과 함께’가 트로트라고요? 전혀 아니에요. 그런데 옛 가수들을 무조건 트로트 가수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에요.”
사실 남진은 한국 대중가요사에서 독특한 존재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 가요계의 주류인 트로트의 기조와는 다른 결을 추구해온 가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애초에 가요가 아니라 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음악을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기억에서 음악에 대한 가장 강렬했던 첫 경험은 중학교 3학년 때 들은 닐 세다카의 ‘Oh! Carol’이었다. 그 노래에 충격을 받고 그는 폴 앵카, 엘비스 프레슬리 등 스탠더드 팝과 로큰롤의 세계로 들어간다. 남진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세련미는 거기서부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저는 가요의 ‘가’ 자도 몰랐던 사람이에요. 어릴 때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노래는 팝을 좋아했지만 가수가 되기 위해선 가요를 해야 했죠. 솔직히 그때는 옛날 노래들이 촌스럽다는 느낌밖에 안 들었고 나와 안 맞더라고요.”
나이 들며 배우는 옛 노래의 역사와 혼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세월이 지나고 나니 ‘아 이게 우리 노래구나’ 하며 깨닫게 되는 것이 많다. 그 맛을 느끼고 배우고 싶어서 그는 요즘 남인수, 현인, 백년설 등의 노래를 들으며 공부하고 있다. 나이가 70이 넘어서도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그 꾸준한 학구열 덕분이 아닐까 싶다. 문득 그의 요즘 노래가 풍성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나이 들수록 더 깊은 울림을 주고 묵은지 맛 같은 풍미를 느끼게 해주는 노래로 사랑받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전쟁도 치렀던 그 역사와 혼이 옛 노래에 다 담겨 있어요. 요즘은 그때처럼 애절하고 한이 서린 노래가 없어요. 젊은 사람들이 부르는 트로트에 깊은 감동이 있나요? 물론 기술적으로는 훌륭하죠. 다만 옛날 사람들과 같은 경험이 없으니….”
새롭게 깨달은 선배들의 업적은 그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해줬다. 그는 제2회 남인수가요제에 참석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남인수 선생 고향이 진주인데 가보니 어디를 봐도 그의 이름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작년에 가요제도 했잖아요, 근데 왜 이름이 없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분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 노래를 불러서 없앴다는 거예요. 속으로 ‘우리나라 큰일 났다’ 싶었죠. 그 사람이 무슨 죄가 있어요? 나라가 잘못한 거지. 어떻게 사람을, 한 시대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를 이렇게까지 매도할 수 있나 싶어서 그다음부터는 안 갔어요.”
엄격한 아버지, 여성의 힘을 알려준 어머니
남진에게는 일곱 살짜리, 다섯 살짜리 손자가 있다. 손녀를 원하는데 마음대로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세 딸과는 자주 얘기를 하지만 아들과는 그렇게 살갑게 지내는 게 잘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그 이유가 자신이 아버지를 닮아서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그의 아버지는 목포일보의 발행인이자 제5대 국회의원을 지낸 고 김문옥 씨. 호남에서 가장 큰 정미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말씀이 적고 보수적인, ‘그 시대 아버지’였다.
“딸 여섯을 낳고 쉰하나에 절 낳으셨어요. 얼마나 귀했겠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엄하셨어요. 평생 머리 한 번 안 쓰다듬어줬고 엉덩이도 안 두들기셨죠. 나는 아들에게는 안 그래야지 했는데 결국 아버지랑 똑같네요.(웃음)”
많고 많은 직업 중 왜 하필 ‘풍각쟁이’냐며 만류하셨던 아버지. 그런 엄격한 아버지가 어려워 그는 어머니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자랐다. 어머니 장기순 씨는 그 시절에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일본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던 흔치 않은 여성이었다.
“어머니의 사랑과 교육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가장 큰 힘이었어요. 보통 분이 아니셨어요. 그리고 여성의 힘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주셨어요.”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들
아버지 몰래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해 배우의 꿈을 키우다 우연히 친구들과 노래하며 놀다 캐스팅이 돼 1965년 1집 앨범 ‘서울 플레이보이’를 발매하며 데뷔했다.
부유한 집안, 이른 성공, 지속적인 인기, 귀공자 이미지 등으로 남진이 어려움 없이 순탄하게 산 걸로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의외로 거친 순간들이 가득하다. 심지어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도 여러 번 있었다.
“아마 제가 싸우다 칼 맞은 몇 안 되는 대한민국 연예인일 거예요. 그때 대동맥을 5mm 비껴 지나갔는데 0.1mm만 칼이 틀어졌어도 죽었다고 하더군요. 서른아홉 살 때였어요.”
그러고 보니 그는 해병대에 입대해 베트남전에 파병되기도 했다. 전쟁터는 죽음이 일상인 공간이다. 그곳에서도 당연히 죽을 고비를 꽤 넘겼다.
“베트남전에 파병됐을 때 바로 앞에서 폭탄이 터지기도 했죠. 총알이 아슬아슬하게 지나간 적도 있고. 그때가 스물서너 살, 이십대 초반이었어요. 겁 없을 때니까 해병대에 자원해서 갔던 거죠.”
당시 베트남전 파병은 원래 특수병과가 아니면 1년 이상 못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무슨 호기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여단장에게 기간을 더 연장해 달라 하고 만 2년을 그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게 의문이야. 여단장이 ‘야, 이놈아 딴 놈들은 하루라도 빨리 보내 달라고 하는데 너는 왜 안 가려고 그래?’ 하더군요. 이십대면 여자도 보고 싶고 날아다닐 때인데 그런 생각 막아주고 거기서 머무르게 해서 제대하면 바로 활동하게 한 어떤 존재가 있는 것 같은데… 지금도 의문이야. 지금 그렇게 하라면 절대 못할 거 같아.(웃음) 아마 하느님이 가수로 성공하라고 인도한 거 같아요. 감사하죠.”
수많은 인연이 만들어준 남진 시대
남진은 운명적인 인연을 믿는다. 그래서 감사하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우선 팬들. 그들이 없었으면 나도 없었죠.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TBC의 ‘쇼쇼쇼’를 연출한 황정태 PD, MBC의 전우중 PD가 있죠. 사실상 그분들이 저를 예뻐해주셔서 최고의 스타가 됐고 남진 시대를 만들 수 있었어요. 노래 못하면 연습하다 ‘야, 똥가수 나와!’ 하고 대놓고 소리를 지를 정도로 성질은 좀 거친 분이셨지만.(웃음)”
그를 21세기의 현역으로 만든 히트곡 ‘둥지’의 탄생도 드라마틱하다. 전두환 집권 시기에 제재를 받아 방송 출연도 못하고 고향에 내려가서 지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가수가 운명이었던 그는 노래가 하고 싶어 3년 동안 곡을 모으고 연습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앨범 녹음을 끝내고 발매를 앞둔 시점이었다. 어느 날 지방에 갔다 오니 사무실에 데모곡이 담긴 카세트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틀어서 노래를 듣는데 소름이 쫙 돋는 거야. 편곡하는 사람 빨리 오라고 해서 편곡했죠. 그리고 녹음을 하려는데 배일호가 내가 녹음하고 싶은 날에 녹음실을 빌린 상태더라고. 그래도 무조건 가보자 해서 갔죠. 그러고는 배일호에게 ‘내가 급하게 해야 할 녹음이 있는데 이삼십 분만 빌려 달라’고 부탁해서 겨우 녹음했죠.”
대박을 터뜨린 남진의 뚝심
3년 동안 준비한 노래를 뒤로 미루고 순식간에 녹음된 ‘둥지’를 타이틀곡으로 한 앨범이 나왔다. 마침 라디오에 지인들이 있어서 신곡 나왔으니 신경 좀 써 달라고 부탁도 했다. 그런데 한 6개월 지난 후에 라디오 부장이 ‘둥지’가 아닌 다른 곡으로 타이틀곡을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의사를 물어왔다.
“이게 반응이 전혀 없으니까, 같은 앨범 안에 실린 다른 노래가 홍보에 더 낫겠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사실 ‘둥지’는 일반 트로트곡이 아니야. 재즈지. 난 그게 좋아서 한 거거든. 그때 바꿨으면 ‘둥지’는 끝이었죠. 하지만 ‘이 음악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그냥 이걸로 하겠다’ 해서 그대로 밀고 갔어요.”
남진의 뚝심은 통했다. 1년 정도 지나자 사람들이 슬슬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내 대박이 터졌다. 그 후로 ‘둥지’는 20년째 남진의 전성기를 만들어준 노래가 됐다.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영이고, 그런 영을 주는 게 신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더 멋진 영을 달라고 기도하죠.”
남진의 인생을 돌아보니 그가 신앙을 말하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요즘 다시 흥이 나는 참이다. 마음에 드는 곡을 만나는 게 쉽지 않은데, 이번에 나온 신곡 ‘남자다잉’이 그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로큰롤에 기반해 만들어진 이 노래는 듣자마자 ‘남진은 역시 남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야말로 남진다운 에너지로 채워져 있기에 그의 만족감이 얼마나 큰지 저절로 이해가 간다.
노래의 본질로 회귀 중
“요즘은 과다한 치장을 빼려고 연습하고 있어요. 묵은 때를 벗겨내는 연습인데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정신에서 때가 떨어져나가야 소리에서도 때가 벗겨져요. 마음이 와야 소리가 되는 법이니까. 그런데 50년 동안 쌓인 걸 털어낸다는 게 쉽지 않아요.”
50여 년에 걸친 가수생활, 남진은 지금 ‘본질로의 집중’이라는 화두에 몰두해 있다. 그가 요즘 가사에 신경 쓰는 이유도 그러한 본질로의 추구와도 관련 있어 보였다. 요즘은 노래방 시대인 만큼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아야 사람들이 그 노래를 부른다는 그의 진단은 예리했다.
“진솔하게 부르고 싶어요. 그런데 나이가 있으니까 노래 한 곡 부를 때마다 죽겠어.(웃음) 열심히 운동해야지.(웃음) 건강관리는 수영으로 하고 있어요. 제가 목포 놈이잖아요. 수영은 일곱 살 때부터 했죠.”
어렸을 때부터 맞은 바닷바람은 그의 폐를 단련시켜줬다. 노래는 호흡으로 하는 것이기에, 그의 단련된 몸은 아직도 여전한 ‘남진다움’을 유지시켜주는 비결이기도 하다.
“감성은 생각이고 소리는 폐로 합니다. 폐가 안 좋으면 힘 조절이 안 돼요. 그래서 우리는 소리 들으면 그 가수가 어떤 상태인지 딱 알아요.”
그는 건강에 있어 중요한 게 마음이라고 말한다.
“나이를 먹으면 마음을 놓아야 하는데 반대가 돼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서운한 게 많아지고…. 그럴 때마다 자신이 싫어져요.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거예요.”
영원한 오빠, 역사를 만들다
현재 고흥에서는 남진기념관이 만들어지고 있다. 비용은 남진이 마련해서 짓는다. 박병종 전 고흥군수와의 인연으로 성사된 이 작업은 내년에 마무리되어 상반기 중에 문을 열 예정이다. 남진이라는 가수가 가요사에 남긴 업적을 생각하면 기념관이 만들어지는 건 이상하기는커녕 늦은 감마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에게 붙는 부담스러운 칭호들에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노래에 왕이 어딨어요? 왕은 군림하는 건데, 노래는 다 다른 거잖아요. 예를 들어 내가 나훈아 씨 노래를 부르라면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그 감정을 그만큼 내겠냐고요. 못 내. 최백호 씨나 송창식 씨 노래도 애창하는데, 흉내를 내는 거지. 십 분의 일이나 비슷하면 다행인 거예요.”
그 얘기를 들으며 남진 또한 누구와 비교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봤다. 불가능하다. 그만큼 남진 역시 우리 가요사가 만들어낸 독보적인 존재 아니던가.
“무슨 왕이니 황제니, 방송 나가서 사회자나 작가가 나를 그렇게 칭하는 말들을 들으면 불러서 얘기해요. ‘난 딱 한마디야. 가요계의 영원한 오빠. 오빠의 원조. 그거면 끝이야.’ 삶이 힘들어도 끝까지 살아남아야 남자다잉~~~~.(웃음)”
지금은 흔히 쓰이는 말인 ‘섹시 디바’.
그 말에 어울리는 가수로 민해경(본명 백미경·56)을 꼽으면 수긍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대는 인형처럼 웃고 있지만’, ‘보고 싶은 얼굴’,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 ‘사랑은 이제 그만’, ‘미니스커트’ 등의 히트곡은 민해경 특유의 이국적인 인상과 더불어 한국 대중가요계의 이단아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독보적인 섹시함과 고혹적인 보이스, 시원한 가창력 등은 한국 가요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그녀만의 독특한 탤런트였다. 최근 소극장에서 열린 ‘대학로 릴레이 콘서트’를 통해 관객들과 특별한 시간을 함께한 그녀를 만났다.
민해경이라는 가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인상들이 있다. 열정, 섹시한 눈빛, 파격, 허스키한 목소리, 카리스마 등등…. 그 인상들을 공통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민해경은 쎄다’. 그런데 과연 무대 뒤의 그녀 또한 정말로 그토록 ‘쎈’ 사람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사람마다 사람을 보는 시선은 다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어떤 연예인이든 TV 화면을 통해 보이는 게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보여드릴 순 없으니 느끼는 대로 그대로 생각하는 것도 고마운 일이긴 해요. 하지만 사람의 진심은 언젠가는 통하리라 믿거든요.”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 가수 민해경
올해가 데뷔 40주년. 민해경은 지난 시간을 ‘만만치 않았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녀는 과거에 메여 사는 사람이 아니다. 과거나 추억에 집착하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다. 과거가 있어 자신이 있는 것이 맞지만 현재에 더 많이 집중하고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는 미래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뭔가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춰 사는 삶을 거부한다. 그 이유는 그녀가 이미 그런 삶을 너무나도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살면서 굉장히 중요한 게 마음의 평화잖아요. 돈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불행한 것도 아니고요. 내가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삶이 힘들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 행복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노래를 하든 안 하든 예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평화로워요. 돈이 없어도 평화로운 사람들이 있듯이. 생계 때문에 노래를 해야 했고 너무 어렸을 때부터 치열하게 살아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최선을 다해 견뎌온 삶이잖아요.”
말하자면 그녀에게 있어 과거와 미래는 현재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철저한 현재형 인간이다.
남편과 딸이 있어 너무 행복하다
민해경에 대해 대중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는 그녀가 실제로는 현재형 인간이라는 데서 깨져버린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차가운 도시 여자 같고 자유로울 것 같은 이미지이지만, 정작 그녀는 저녁 여덟 시 반에 잠들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또한 집 밖으로는 거의 나가지 않는다. 집에서의 삶을 철저하게 즐기는 소위 ‘집순이’다. 궁금해서 물어봤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할 일이 그렇게 많냐고.
“많죠. 일단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보고 하루 동안 뭘 해야 할지를 생각해요. TV는 거의 안 보고 대신 영화를 많이 보죠. 이런 패턴이 앞으로도 변할 것 같지는 않아요.”
거의 집 안에서만 지내며 가족만을 기다리는 생활. 외롭지 않을까?
“전 외로움을 잘 못 느껴요. 혼자 있어도 집안일 하느라 너무 바빠요. 완전 잘 놀아요. 사람들이 그런 저를 보면 이상하다고 하는데 혼자 있는 게 너무 좋아요. 집에 들어올 사람만 잘 들어오면 되고요. 바로 남편이랑 딸이죠.(웃음) 그 외에는 제가 사람에게 원래 관심이 없어요. 일하는 아주머니가 ‘사모님처럼 자기에 관한 일 빼고 모든 일에 관심 없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말할 정도니까요. 그런데 내가 관심 가진다고 그 사람이 잘되는 것도 아니고, 나도 바쁘고. 그렇다 보니 다른 사람 얘기나 뒷담화를 싫어해요. 좀 무심하죠.”
집에서 혼자 놀기를 즐기는 원조 디바라니, 상상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 밖의 삶을 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어색하거나 꾸며진 티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자신에게로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고 은근한 매력이었다.
‘독함’이 아닌 ‘일관성’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힘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사실 그녀는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서 이전의 민해경 같지 않다는 말을 곧잘 듣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솔직히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충실히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스스로를 열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닌 것 같아요. 저 자신은 과거와 똑같은데 과거에는 주변에서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한 부분이 있었죠. 제가 표현할 수 있는 시간도 없었고.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제가 사람들과 좀 더 소통을 하고 있고 그런 저를 사람들이 알아주게 된 거라고 봐요.”
그동안 사람들은 민해경에 대해 단절된 모습만 보고 말하곤 했다. 그녀의 진짜 모습을 가족은 알았다. 그래서 남편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아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쎄고 건방지고 교류 없고…. 제가 많이 들은 얘기들이에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여자, 지지 않는 사람. 그런 것들이 제 내면에 있긴 하겠죠. 그게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테고요.”
진정 하고 싶은 꿈은 뒤로 하고 내키지 않는 노래로 가정을 지켜야 했던 삶. 그러면서 기복이 심할 수밖에 없는 연예계에서 정상에 올라 10여 년 동안 거듭 그 자리를 지켜냈다. 언뜻 생각만 해도 쉽지 않은 일, 그게 가능하려면 기본적으로 어떤 종류의 ‘독함’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받는 오해들은 그 독함을 위한 일관성에서 비롯된 바가 아닐까 싶었다.
“그럴 수도 있어요. 그걸 이기적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데 개의치 않아요. 제 욕을 해도 제게 들리지만 않게 하면 돼요.(웃음)”
노래는 곧 나 자신
지난 3월 민해경은 새로운 도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극장 공연을 치렀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져서 쉽지는 않았던 공연 준비였다. 그러나 그녀는 베테랑이었다.
“어렸을 때는 잘 안 되는 게 있으면 화도 내고 짜증도 내고 그랬어요. 그러나 지금은 안 되는 상황을 빨리 접고 다른 대안을 찾는 게 내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거의 하루 만에 제가 연출을 다 했죠. 아무래도 대중가수가 히트곡만 들려주는 것은 흔한 레퍼토리죠.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어요. 관객들은 민해경이란 가수가 보여줄 수 있는 멋이나 맛, 카리스마에 대한 기대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어린 시절까지 아우르는 자신의 인생을 무대에서 풀어내는 것이었다. 가수는 무대로 말한다고 했던가. 그녀의 인생 이야기에 관객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저는 그대로 꾸밈없이 절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짧은 시간에 다는 보여줄 수 없지만. 사람들이 많이 울고 감동받았다고 말씀을 주셨어요. 저 여자가 쎄 보여도 그렇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구나 느끼신 거겠죠. 무대에서는 그게 다 보인대요.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사람들이 좋아해서 고마웠어요.”
다소 빤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지점에서 그녀에게 노래란 어떤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많이 들은 질문이에요. 돈이다, 생명이다 얘기 많이 하잖아요. 얼마 전에 생각해봤는데, ‘노래는 나와 같구나. 그래서 그 노래를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노래는 곧 저예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숙성된 느낌으로 부르게 돼요. 한 번 부를 때보다는 열 번, 열 번 부를 때보다는 백 번 부를 때가 점점 나와 같아지는 느낌이죠.”
위로가 되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점점 자신과 노래가 하나가 된다고 말하는 민해경이 지금 가수로서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 궁금했다.
“저는 본분이 가수여서 계속 머릿속에 있을 거 같아요. 그런데 ‘이것을 해야지, 그걸 해야지’ 하지는 않아요. 그런 시기는 지났으니까요. 무언가를 해보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주어졌을 때 그걸 잃지 않고 잘 유지하고 싶은 거죠. 그게 베테랑이라고 봐요.”
그녀는 최근 신곡 ‘We Love You’를 발표했다. ‘바람 바람 바람’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이후 녹색지대의 앨범을 제작한, 성공한 프로듀서이자 가수인 김범룡이 작곡한 노래다.
“처음 노래는 원래 작곡가 본인이 부르려고 했던 남자 노래였어요. 그런데 제가 받아서 잘 풀어나가게 됐죠. 순수하게 제가 선택해서 가사를 만든 노래인데, 제 마음이 이 노래의 가사와 같아요. 비유법도 은유법도 없는 순수한 가사로 누구에게나 위로가 되는 노래로 만들고 싶었죠.”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사람은 남편이라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 여느 평범한 여자처럼 그녀도 남편을 만난 것을 정말 잘한 일로 꼽았고 딸을 낳아 키운 것이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했다.
“결혼은 항상 마지막 관문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볼 때 너무 감사해요. 지금 결혼한 지 22년이 됐는데, 그 전에는 여유가 없기 때문에 뒤돌아볼 수 없었던 것을 결혼 후에 조금씩 알게 됐어요. 그리고 자식을 키우는 일 또한 돈을 주고 할 수 없는 경험이죠.”
열정, 화려함, 사랑… 장미 같은 그녀
삶에 더없이 만족하는 사람. 민해경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만족 못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가수로서의 삶이다. 수십 년을 최고의 가수로 살았던 사람이 가수가 어렵다는 말은 일견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무대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무대의 엄중함을 알고 있었다.
“남편이 힘들게 생각하지 말고 즐기라고 하는데, 안 돼요. 그래서 힘든 거죠. 무대는 서면 설수록 어려워요. 지금 더 많이 느껴요. 옛날엔 못 느꼈죠. 완벽한 무대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지금은 안 그래요. 하면 할수록 어려워서 즐기지 못하는 거 같아요. 물론 막상 무대에 서면 괜찮지만 서기 전까지의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죠.”
그것은 그녀가 가수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을 잊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무대를 즐기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 어쩌면 그녀가 더욱 진화하는 모습을 좀 더 오래도록 확인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으로 무대를 즐기게 된 가수로서의 민해경이 미래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대 모습은 장미’, 민해경의 노래처럼 역시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그대 모습은 장미 같았다.
작곡자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지담이 신곡인 ‘우리 다시 만나면(If We Ever Meet Again)’을 8일 공개했다.
지담의 이번 노래는 얼마 전 4주년을 지냈던 세월호 희생자와 그들의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 진 곡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먼 곳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이들이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꿈꾸며 살아갈 힘을 갖는다는 내용이다. 연주에는 피아니스트 박세윤이 참여해 음악적 완성도를 높였다.
지담은 “이별의 아픔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회복을 바라는 마음을 노래에 담았다”고 밝혔다.
지담은 버클리 음대 영화음악 작곡과를 졸업하고 작사‧작곡과 함께 프로듀싱, 공연 연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음악적 재능을 과시하며 활동하고 있으며, 지난해 6월 보컬그룹 빅마마의 이지영이 참여한 첫 싱글 ‘기억한다’를 발표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건강 캠페인 ‘브라보 체조’의 음악감독을 맡은 바 있다.
TV조선 프로그램 ‘강적들’에서 나와 같이 방송했던 이준석이 독립야구연맹 총재로 취임하던 날 행사장에서 가수 장혜진과 마주쳤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전광석화처럼 “조만간 인터뷰합시다!” 하고 대시했다. MBC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를 보며 그녀의 노래에 심취했던 한량 이봉규가 동물적으로 반응했던 것. 우물쭈물하는 장혜진을 보더니 내 옆에 있던 김성경 아나운서가 “인터뷰 해, 언니~ 나도 했어!”라고 거들어주는 바람에 운 좋게 다시 만났다.
장혜진은 인터뷰하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노래에만 빠져 있을 뿐 모르는 사람과는 말 섞기를 불편해하고 어색해하는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점을 금세 간파했다. 인터뷰하는 동안 한량 이봉규 특유의 느물느물 전법으로 그녀를 밀어붙였다면 인터뷰는 무미건조(無味乾燥)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평소와 다르게 공손한 자세로 노래에 관한 얘기부터 꺼냈다. 다행히 대화가 술술 풀렸다.
장혜진은 겉으로는 야리야리하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아주 강한 자기 철학을 가진,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형 인물이다. 첫 모습을 봤을 때 상당히 까칠할 것 같고 깍쟁이처럼 보였는데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허당’이면서 따뜻한 여인의 성정이 느껴졌다. 한마디로 말하면 종잡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캐릭터가 중첩되는 여인이었다. 그런 성격이 오늘날의 장혜진을 대가수로 만든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완벽하게 감정을 이입해 관객에게 전달하는 그녀에게 다중적인 성격이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MBC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서 장혜진이 열창했던 곡 ‘술이야’를 들었을 때 한량 이봉규가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녀가 매일 술에 젖어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랑을 갈구하는 순정파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사의 마지막 소절 “정말 영영 이제 우리 둘은 남이야 저물어가는 오늘도 난 술이야~”를 들을 때마다 1년에 360일 술을 마시는 주당 이봉규는 영락없이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장혜진의 주량은 맥주 한 잔이란다.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술도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이 ‘술이야’를 부르면서 그런 표정과 목소리를 내뿜을 수 있나?”라고 따져 물었더니, “그만큼 힘들고 괴로워서 술에 맨날 젖어서 산다고 감정 이입했다”고 말하면서 몰입이 안 되면 노래가 잘 안 된다고 말했다. 술은 체질적으로 안 맞아 마실 줄 모르지만 술에 취한 사람의 감정처럼 몰입할 수는 있다는 장혜진의 설명이 알듯 모를 듯했다.
체조 선수가 가수가 된 사연
그녀의 이력이 의외로 다채로웠다. 그녀는 대학교에서 기계체조와 리듬체조를 전공했다. 원래는 체조 선수였지만 부상을 당해 선수생활을 접고, MBC 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때 유명 가수들의 백코러스를 담당했는데 좀 더 멋진 모습을 연출하고 싶어서 부단한 노력을 했다. 당시 이수만이 경영하던 종로3가의 ‘SM 카페’에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차 한 잔 시켜놓고 해외 유명 가수들의 뮤직 비디오를 분석했다. 동작 하나하나, 의상, 조명, 창법 등을 면밀하게 관찰하느라 온종일 뮤직 카페에 있어도 즐거웠다. 본인이 직접 동대문시장에서 옷감을 구입해서 의상디자인까지 하면서 “어떡하면 여성 코러스로서 가장 섹시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에 몰두했다. 그때부터 천생 가수의 기질이 나타났던 셈이다.
그 시절 그녀의 오랜 친구였던 강승호가 그룹 ‘소방차’의 막내 매니저로 일할 때 방송국에서 예능 PD에게 발로 차이고 꾸지람을 듣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던 장혜진은 강승호에게 “이렇게 막내 매니저로 살지 말고, 네가 제작자로 나서라. 일단 내가 너의 가수가 돼줄 테니 그다음부터는 나를 발판 삼아 인기 있는 가수들을 많이 키워내라!”고 조언했다. 그 말을 들은 강승호는 일주일 만에 아시아레코드에서 계약을 따내고 신곡을 들고 장혜진을 찾아와 녹음하자고 들이댔다. 이 앨범에 바로 1991년 장혜진을 가요계에 데뷔시킨 ‘꿈속에선 언제나’라는 타이틀곡이 들어 있다. 그녀의 조언대로 강승호는 장혜진을 1호 가수로 내세워 엔터테인먼트 기획사 운영을 시작해 김종서, 박상민, 박완규, 캔 등의 실력파 가수들을 발굴하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강승호가 한술 더 떠 장혜진에게 결혼하자며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강승호의 집념에 그녀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고 결국 두 사람은 결혼했다. 남편 강승호는 전형적인 0형 혈액형 성격으로 다혈질이고 저돌적이다. 장혜진을 데뷔시킬 때도 그랬고 결혼을 승낙받을 때도 성격이 그대로 나타났다. 결혼을 망설이던 장혜진은 어느 날 갑자기 “결혼에 대한 환상 같은 거 갖지 말고 친구처럼 이 사람과 살아봐도 괜찮겠다. 남자 뭐 별거 있어?”라는 마음이 들더라는 것. 앨범 작업을 같이 하다 보니 편해지기도 해서 28세 때 강승호의 끈질긴 청혼을 받아들이고 면사포를 썼다.
권태기, 갱년기 그런 거 잘 모른다
인터뷰 시간이 조금 흐르면서 장혜진도 이봉규를 경계하는 마음이 슬쩍 느슨해진 듯 보였다. 그 틈을 타 “결혼생활 26년이 되었으면 그동안 권태기도 많았겠다. 그리고 나이도 갱년기를 겪을 시기니까 힘들 때도 있을 것 같다”고 찔러봤다. 그녀는 담담하게 “권태기나 갱년기 그런 거 잘 모르겠다. 예민한 성격이 아니고, 바쁘게 살아서 그런가?” 하고 반문한다. 내친김에 “부부싸움하면 누가 이기나?” 하고 물고 늘어졌다. “남편이 이긴다. 나는 눈물부터 나와서… 울면 지는 것”이라고 곧바로 받아치는 것으로 봐서 이들 부부관계의 권력 서열이 대충 짐작됐다. 결혼생활 만족도를 점수로 물었더니 “80점”이라고 답한다. 곧바로 가수생활 만족도를 물었더니 “100점이 넘는다”고 대답하면서 표정이 확 바뀐다. 만족도가 높은 이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직업으로 삼아 평생 노래와 함께 살고 있음을 행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장혜진의 해석, 천생 가수임에 틀림없다.
사실 이봉규도 평소에 가수가 최고 직업이라고 생각해왔고 “다시 태어나면 가수가 되고 싶다”는 말을 방송에서도 여러 차례 한 바 있다. 빤한 답변이 예상되지만 똑같은 질문을 장혜진에게 했더니 “다시 태어나면 야성적인 목소리를 가진 남자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한다. 록 밴드를 좋아하는데 특히 마이클 볼튼이나 레드 제플린처럼 야생의 목소리를 선호해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는 것. 그래서일까? 장혜진의 목소리에서도 뭔가 끈적끈적하고 야생성이 느껴진다.
1996년 이후 성대결절로 공백기를 거치면서 고음을 자제하고 중저음 위주의 창법을 쓰고 있지만 그녀가 야생의 목소리를 좋아해 그쪽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장혜진은 어릴 적부터 노래를 잘한 타고난 가수이기도 하지만 무시무시한 노력파다. 하루 종일 노래만 생각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팝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건너가 실용음악과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버클리음대에서 3년간 공부했다. 그녀는 또 자신이 고집하는 장르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장르의 가수들과 함께 앨범 작업을 하는 등 가수로서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평소 장혜진의 음악을 생각하면 파격적이라 할 만큼의 도전이었다.
그녀가 대학 시절 기계체조와 리듬체조를 전공했기에 “노래 부르면서 ‘봉춤’ 같은 것을 시도하면 어떨까?” 하고 다소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을 해봤더니 장혜진은 의외로 반기면서 “핑크가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리본으로 공연을 했는데 참 부러웠다”고 본인도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럴 만한 곡을 못 만나서 자신의 전공을 노래에 살릴 수 없었다는 것. 체조 전공자로서 단련된 신체 덕분일까. 장혜진은 암벽등반을 즐긴다. 밧줄을 타고 내려올 때 하늘을 나는 느낌을 받는다니 놀랍다.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까지 보인다.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으로 인해 종잡을 수 없는 여러 캐릭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녀의 꿈은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서는 것. 노래에 대한 그녀의 열정과 삶의 철학을 엿본 한량 이봉규는 육십 평생을 돌아본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장혜진과 인터뷰하는 동안 많이 배웠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좋아하는 직업에 감사해하며 몸과 마음을 다해 몰입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쳐본다. 땡큐! 장혜진!
10년이 넘은 노래 교실이 최근 시들해졌다. 회원들은 그대로이다. 모두 10년 넘은 고참들인 것이다. 나이도 60대 전, 후반이다. 그런데 배울만한 노래가 없다는 것이다. 최근의 노래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이돌 노래 위주라서 나이 든 사람들이 따라 부르기 어렵다. 빠른 랩이 등장하는 노래도 많다. 굳이 하려면 따라 할 수는 있겠지만, 나이에 어울리지도 않을 뿐 더러 정서에도 안 맞는 것이다.
노래 교실 회원들이 좋아하는 노래들은 발라드 곡들이다. 신승훈, 이승철, 이은미, 김범수, 박강성, 김광석, 부활 노래들이 가장 인기가 높다. 템포도 적당하고 정서에도 잘 맞는다. 그런데 요즘은 발라드 곡이나 발라드를 부르는 가수들이 많지 않다. 아이돌 곡 위주이다 보니 활동 무대가 줄어든 것이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 드라마 OST들이다. 스토리가 있고 배경음악으로 쓰이다 보니 노래가 잔잔하다.
그러다 보니 최근 몇 년 동안은 옛날 대중가요를 주로 복습해서 배웠다. 새로 배우는 노래에 비해 호기심이나 신선감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보통 한 주에 신곡 한두 개를 배우는데 복습 곡이다 보니 여러 곡을 할 수 있어 진도는 빠른 편이다.
한국 대중가요의 한 축은 트로트 곡들인데 대부분 노래가 비슷하다. 노래교실 회원들도 트로트를 배우기는 하지만 한 두 번 따라 부르면 외워질 정도로 곡조가 비슷하다. ‘안동역 앞에서’, ‘무조건’ 같은 트로트는 그래도 워낙 인기가 높아 국민가요 대우를 받는다.
노래 교실 강사가 개인 적인 일로 몇 주간 자리를 비웠다. 그 사이에 40대 다른 강사들이 자리를 메웠다. 그런데 노래가 완전히 딴 판이었다 최신곡인데 도무지 정서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하트 하트’라는 노래가 있다. 조은새 노래인데 후렴구가 중독성이 있다. “콩닥콩닥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정말 정말 이러다가 미칠 것 같아요. 오늘밤 그대 살랑살랑 내게로 오세요. 내 마음 다 드릴게요. 하트 하트 하트 핫 나에게만 사랑을 주세요.... 그대 오 오늘밤은 가지 마요” 남녀의 사랑 얘기이다. ‘하트 하트 하트 핫’에서는 율동까지 하란다. 이 노래를 부르면 옆 테이블에서 술 몇 병이 공짜로 건네져 온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냥 넘어 갔다.
‘따르릉’이라는 노래가 있다. 개그맨 김영철이 부른 노래이다 ‘따르릉’은 전화 벨 소리란다. 가사 중에는 “ 이런 놈 저런 놈 다 만나놓고 내 탓을 하지마”, 후렴구로 “오빠야 오빠 오빠야 네 오빠야”가 역시 중독성 있다. 단순히 가사를 읊으면 되는 노래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장난기 있게 불러야 한다.
노래 교실 회원 중에는 교장 선생님들이 몇 명 있다. 새로 온 강사는 신나는 노래인데 너무 경직되게 노래 부른다며 어깨도 들먹이며 몸을 흔들라는 것이다. 드디어 폭발했다. “도저히 못하겠어요!”라는 반발이 나왔다. 더 이상 외부 강사는 사양하겠다, 또는 노래 교실을 그만 두겠다는 사람들이 나왔다.
서정주시인은 말했다.
자신을 키워준 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나를 키워준 것은 8할이 그리움이었다.
열네살 여름.
태양이 이글대는 아스팔트 포도 위에 부서지던 것은 “레이 찰스”의
‘I can't stop loving you’였고 내 가슴 또한 부서지고 있었다.
사랑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단테가 베아뜨리체를 피렌체의 한 다리 위에서 만난 것은 그의 나이 아홉 살 때였다.
그 후 단테는 평생 동안 그녀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되는데 그의 작품 ‘신곡’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됐다.
야학교의 B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내 나이 열네 살 때였고 이후 그것은 지워버릴 수 없는 화인이 되어 버렸다.
세월이 갈수록 숨이 막히도록 좋아할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분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이후로 어떤 사람도 내 마음을 그 선생님 같이 뿌리째 흔들어놓지는 못했다.
그것은 하얀 도화지 위에 뿌려진 첫 번 째 물감이므로.
나보다 일곱 살이 위인 B선생님은 전체적으로 약간 마르신듯한 호리호리한 체격에 눈매가 깊숙했으며 얼굴형은 군살이 붙지 않고 단아한 모습이어서 마치 그리이스 조각 같은 분이었다.
또한 키가 크신 B선생님은 걸음걸이가 ‘사뿐사뿐’하셨다.
장로님의 맏 아드님이며 독실한 크리스챤인 선생님은 어느 모로나 깍듯한 모범생의 면모를 보이셔서 나쁜 행동 옳지 않은 말은 전혀 하지 않으실 분 같았다.
아니 나쁜 면으로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하실 분 같았다.
한마디로 그 당시 내 눈에 비친 그분은 완벽한 이상형의 남성상이었다. 우리에게 ‘모짜르트의 자장가’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의 진지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잘못하면 몇 번이라도 되풀이해서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의 열성. 그것은 제자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리라.
음악을 깊이 사랑하셨으며 노래를 썩 잘 부르셨던 선생님이 좋아하시던 노래는 ‘고향의 폐가’ ‘너와 나의 시간’ 등이다.
우리에게 과학을 가르쳐 주셨던 B선생님이 방학숙제로 모터 만들기를 내주셨을 때, 다른 애들은 만들 엄두도 못 내었지만 나는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재료를 수집하였기에 무사히 모터를 만들 수 있었고 그것을 보신 B선생님의 칭찬을 들으니 그동안 만드느라고 힘들었던 기억은 말끔히 사라지고 가슴이 금 새 기쁨으로 가득해졌었다.
서둔교회를 다니던 B선생님이 그곳에서 성가대를 지휘하실 때 뵙게 되면 너무도 멋지게 보여서 마치 ‘꿈속의 왕자님’ 같았다. 그 진지한 눈빛에, 날렵한 몸짓이라니.
그렇지만 다른 애들은 춤을 추는 것 같다고 ‘킥킥’댔고 나는 그 애들이 너무도 미웠다.
그 애들 중에는 내 초등학교 때부터의 단짝 친구 정재화도 있었는데 그때만큼은 그 애마저도 미웠다
어느 해 방학동안에는 내가 버릇없이 엽서에다 소식을 담아드렸는데(졸필이라서 편지지에 많은 글씨를 쓰기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선생님은 곧바로 답장을 편지로 해 주셨다.
그때 선생님은 ‘고사리 같은 너의 손으로 쓴 편지 잘 받아 보았다’라고 쓰셨는데 의아스러운 것은 아무리 내 손을 앞으로 제쳐보고 뒤로 뒤집어봐도 고사리 같이 작은 손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엽서를 사용했는데 선생님은 편지로 보내 주신 것이 못내 죄스러우면서도 선생님의 성실성에 머리가 조아려졌다.
이 일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덕목 중 성실성에 후한 점수를 매기는 내게 선생님이 결정적으로 좋아지는 계기가 됐다.
그냥 흠모하였다.
멀리서라도 그분의 모습만 뵙게 되면 반가움에 가슴이 뛰고 너무 좋아서 숨이 막혀왔다. 친구들은 그 선생님이 오신다는 거를 내 모습을 보고 알았다. 친구들과 놀던 중에도 B선생님 모습만 보였다하면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이 빨개졌기에. 내 초등학교 동기동창생의 언니가 그 선생님과 데이트 중이라는 말을 듣고는 성실하고도 선한 그 언니가 이유도 없이 미웠다. 선생님이 배구를 하려고 상의를 벗어서 내게 맡기셨을 때는 어찌나 소중하던지 조심스럽게 안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구겨지면 안 되니까.
B선생님이 야학교를 떠나실 때는 내 가슴이 온통 ‘휑’하니 뚫려 버린 듯한 허전함과 세상을 모두 잃어버린 듯한 망실감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깊은 슬픔에 빠져버렸다.
나의 기쁜 맘 그대에게
바치려 하는 이 한 노래를
들으소서 그대를 위해 지은 노래
............................
쇼팽의 연습곡에 가사를 붙인 '이별의 노래’인데 B선생님이 우리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쳐주고 떠나신 곡이다. 내 나이 16세때 일이었고 그후 십여년이 넘어서도 나는 어디서라도 그 연습곡만 들으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이별의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았던 것이다.
야학을 졸업한지 2, 3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그날 버스에서 B선생님을 뵌 나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랐다. 선생님은 ROTC마크가 새겨진 서울대학교 교복차림이었다. 너무 좋아서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던 나는 선생님께 조용히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저…… 할 말이 있는 데요’
사무치게 그리웠던 선생님의 깊숙한 눈이 나를 응시하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는 이렇게 물으셨다
‘그래....... 뭔데?’
그리고는 나를 따라 내리셨다.
비가 온 뒤의 연습림은 온통 청신한 초록빛이었다.
갈참나무의 여린 새순은 연초록으로 빛났고 오솔길의 기다란 풀잎에는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 내리고 있었다.
흰 구름이 이따금씩 흐르고 있는 파아란 하늘을 쳐다보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궁금해 하시는 선생님 안색을 살피다 나는 어렵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 저…’
‘있잖아요 ………’
‘저기요……만 몇 번 하다가 그만 꿈이 깨어버렸다.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어요’ 꼭 한마디 하고 싶었는데 끝내는 그걸 못 해보고 꿈에서 깬 나는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스스로를 질책했다.
‘이 바보야 생시에 고백을 못하면 꿈에서라도 해야지’
세익스피어가 말했다.
‘짝사랑처럼 고독한 것은 없다’고
모파상의 단편 ‘사과나무 아래서’와 ‘의자 고치는 여인’에 나오는 가련한 두 여주인공들을 나와 동일시하여 자신이 너무 비참한 신분임을 뼈저리게 느끼곤 했다.
사랑이란 익모초 달인 물을 삼키는 것이다.
그리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도 하지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추억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
청마 유치환시인의 ‘그리움’과 시인 조병화님의 ‘추억’을 몇 번이고 되뇌이며 아픈 가슴을 홀로 달래었다.
좁디좁은 야학교운동장을 천천히 몇 바퀴씩 거닐며.
또 유치환님의 '바위’를 좋아한 이유는 ‘차라리 애증의 갈등을 느낄 수 없는 바위가 되었으면'하는 내 심정을 너무도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서였다.
선생님께 무언가 마음의 선물을 꼭 드리고 싶었던 나는 며칠간을 골똘히 생각해 본 결과 일기장이 가장 적당할 것 같았다.
있는 돈을 다 긁어모아 봤다.
시내의 큰 문방구점을 몇 곳을 전전하여 간신히 마음에 드는 것을 살 수 있었다.
일기장 뒷장에다 ‘난이 드리옵니다’ 라는 짤막한 글을 적는 데도 워낙 졸필이기에 연습장에다 몇 십번을 연습해서야 겨우 적을 수가 있었다. 포장지도 제일 예쁜 것으로 골라서 포장을 했으며 리본으로 꽃모양을 만들어서 붙인 후 서둔 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고 계신 선생님을 찾아갔다.
교회의 뾰족탑도 전나무 위에도 온통 은세계였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캐롤 송을 열심히 지도하고 계신 선생님의 모습을 뵌 나는 눈이 20cm이상 쌓여 있는 교회 창문 밖에서 언 발을 구르며 무려 2시간 이상을 기다렸다.
나의 뜻밖의 등장에 의아해 하시는 선생님께 ‘선생님 이거요’ 모기소리로 말하며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순간 깊숙한 눈매에 진지한 표정의 선생님은 다소 당황해 하시다가는 '고맙다' 웃으며 받으셨다.
다시 한번 내게 따뜻한 미소를 보낸 후 발길을 돌리시던 선생님이었다. 춥고 힘든 줄도 모르고 기다리던 그 시간이 행복했고 선물을 전해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 가슴은 온통 기쁨으로 출렁거렸으며 발이 땅에 닿나 싶었다.
엄마의 결혼생활을 어려서부터 쭉 지켜봤던 나는 근본적으로 결혼에 대해서 회의감 내지는 환멸감을 가지고 있었다.
B선생님을 남몰래 혼자 애 태우며 10년 이상의 세월을 외곬수로 흠모했으면서도 내 스스로가 ‘결혼’이라는 단어와는 결부시키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다는 것 자체가 불결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스물두세살 때 선생님이 결혼하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 가슴이 아팠던 나는 결혼식장에는 차마 가 보지도 못하고서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았다.
눈물이 강물이 되도록 울고 또 울었다.
장선생님이나 진선생님 등 다른 선생님들의 결혼식에는 다 참석을 해서 축하를 해 드렸으면서.
‘선생님, 난이 여기 있는데 어디로 가시옵니까’
그날 일기장에는 이렇게 쓰여졌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어느 누구의 것인들 소중하지 않으랴.
누가 감히 걸인부부의 사랑이, 사랑을 위하여 왕관을 포기한 윈저공의 사랑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거짓 없는 사랑은 위대하다.
내 짝사랑이 운명적으로 비극인 것은, 나는 그분을 결혼 대상자로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서부터 끝까지 단지 동경의 대상이었고, 언제나 먼 하늘의 별님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이 막상 다른 여자와 결혼했을 때는 천지가 무너진 듯한 절망감으로 목을 놓아 울었으니 이 무슨 모순된 행동이었던가. 그분을 연모하던 내가 무엇보다도 괴로웠던 것은 그분이 내 진심을 하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내 순정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고 고결한 것인데도 도덕적으로 전혀 흠이 없는 그분은 선생님으로서의 가슴은 따뜻했지만 여자인 나를 대하는 눈길은 차갑기만 했기에 나는 늘 거기에 상처를 받고는 못 견디게 괴로워했다.
나 스스로에게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며 스칼렛이 자기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모든 허물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레트한테는 북풍 같이 차갑고 상처만 주면서 이미 다른 여자의 남편인 애쉴리만 생각하는 것을 너무도 안타까워했다는 점이다. ‘저 여자는 왜 저렇게도 멍청한가’
그러한 내가 현실 속에서는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미 결혼을 해 버린 B선생님만을 가슴에 담아 두고 연모하느라고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내게서 떠나 보냈다는 사실이다.
야학 시절 친구들은 개성이 너무 강하고 고집불통이며 지독한 외곬수인 나를 스칼렛이라고 했었다. 스칼렛과 성격상 이미지가 흡사하다고. B선생님은 나의 애쉴리였다.
2017년도 저물어가는 12월 10일. 마포아트센터에서 우연히 정미조 콘서트를 관람 할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브라보마이라이프 동년기자 몇 명에게 특별히 연말보너스 처럼 돌아온 선물이었다. 오래된 서재에서 먼지를 털어내고 꺼내 든 책 한 권, 책장을 넘기다 책갈피처럼 끼워진 빛바랜 네잎클로버나 꽃잎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빛바랜 책갈피에 우러나오는 은은한 향기처럼 정미조는 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콘서트는 정미조가 1년 반 만에 발표하는 새 앨범을 기념하는 무대다. 그는 45년의 긴 세월 동안 가수에서 화가로, 다시 가수로 돌아오는 드라마틱한 여정을 걸어왔다. 정미조는 작년, 37년 만에 가요계에 극적으로 복귀하며 많은 화제를 만들었다. 컴백 앨범은 언론과 평단으로부터 “청취의 환희” “결코 세월이나 명성에 빚지지 않은 앨범” 등의 절찬을 받았다.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사랑의 계절’ 등 주옥같은 히트 곡을 줄줄이 쏟아냈다. 1972년 한국 가요사에 불멸(不滅)로 남은 ‘개여울’을 발표하고 일약 스타덤에 오른 후, 돌연 가요계 은퇴를 선언한 1979년까지 7년간은 정미조를 위한 시간이었다. 그의 ‘마이 웨이’는 아직 진행 중이다.
이번 공연엔 12살 ‘제주 소년’ 오연준이 특별 게스트로 출연했다. 오연준은 정미조의 새 앨범에 수록된 ‘바람의 이야기’를 함께 불렀다. 그리고 오연준 소년 단독으로 크리마스 캐럴을 불러 많은 갈채와 사랑을 받았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면서 네 명이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18시 공연이라 저녁을 먹지 않고 관람했기에 '오삼불고기'를 시켜 뒤풀이 삼아 막걸리잔을 돌렸다. 건조한 공연장으로 컬컬했던 목을 추기면서 공연에 관한 뒷담화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지나간 세월만큼 원숙하면서도 열정적으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최고의 히트작으로 꼽혔던 ‘개여울’은 김소월 시에 곡을 입혀 부른 노래로 유명하다. 개여울은 어떤 여울일까? 누군가 궁금해 했다. 개여울은 명사로써 개울에 물이 얕거나 폭이 좁아서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리 깊지는 않지만 물살이 빠른 곳으로 개울의 여울목이란 뜻이기도 하다. 노래 가사 중에 ‘가도’는 ‘가기는 가도’의 줄인 말로 개여울가에 앉아 여울져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연인인 그가 간다는 허전함을 애써 마음 쓰지 않으려는 애틋한 마음과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어린시절 여울에서 돌수제비를 날리던 기억도 어렴풋 떠오른다.
한창 잘 나가던 시절, 음악을 접고 갑자기 파리로 미술 유학을 떠난 정미조의 삶이
과연 성공적이고 좋았던 삶이었을까? 하는 논제를 가지고 서로의 생각을 들어보는 시간도 가졌다. 의견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꽤나 의미 있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 세상 살아가면서 ‘우물을 판다’ 의미도 중요하겠지만, 음악 말고도 자신이 좋아하던 일을 선택한다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학을 떠나 새로운 배움을 통해 다시 돌아와 대학에서 당당하게 미술을 가르치는 교수로 자리매김한 삶이 칭찬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는 고희[古稀] 가까운 나이에 잊고(?) 지내왔던 음악계로 컴백했다. 작년에는 신곡 귀로(歸路)를 발표하면서 앨범도 내고, 이렇듯 콘서트를 통해서 음악적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끊임없이 과시하는 모습이야말로 경이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귀로(歸路)의 노랫말과 영상은 정미조의 해석처럼 ‘담벼락에 기대 울던 작은 아이’ 같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 울컥한다는 의미에 공감이 간다.
중년의 세월을 묵묵히 이고 가는 우리가 그를 보면서 용기를 북돋을 수 있어 의미가 깊었다. 홀짝홀짝 막걸리 네 병을 해치우고 밥 두 공기를 볶아서 마무리 하면서 겨울 밤의 우리들만의 파티는 끝났다. 밖으로 나오니 찬바람만 휭 하니 몰려와 취기를 건드린다.
“어린 꿈이 놀던 들판을 지나 아지랑이 피던 동산을 넘어 나 그리운 곳으로 돌아가네~”…
정미조를 처음 만난 것은 군복무시절이었다. TV커녕 라디오조차 제대로 듣기 어려웠던 그 시절, 편지교제 중이던 지금의 아내가 ‘국군의 방송’에 희망가요를 신청하였다. 그때 방송에 갓 데뷔한 정미조의 감미로운 노래가 나왔다고 기억한다. 방송에서 나와 신청자의 이름을 부르고 노래가 나오자 부대원들의 함성으로 생활관이 발칵 뒤집혔다.
음치인 필자는 너무나 소란스러워 무슨 노래였는지 기억을 못한다. 부대원들과 박수치면서 즐거워했던 일만 생각났다. 아내도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정미조가 동갑내기 동갑내기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더욱 그를 정겹게 느꼈다. 그의 은퇴를 아쉽게 생각하고 속절없이 세월만 흘렀다.
그는 어느 날 홀연히 프랑스로 미술유학 가서 박사가 되고 미술교수가 되었다. 헌데 37년 만에 ‘젊은 날의 영혼’으로 정미조가 돌아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반세기 가까운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12월 10일 마포아트센터는 바깥 차가운 날씨를 아랑곳하지 않고 열기로 가득 찼다. 포스터에 눈길이 멈췄다. 세월은 피할 수 없다.
공연이 시작되자 자리를 가득 메운 관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그때 그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 아내도 무척 궁금한 눈치다. 정미조의 얼굴은 처음 본다. 데뷔곡 ‘개여울’이 가슴을 울렸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첫사랑, 휘파람을 부세요’ 등 귀에 익은 노래가 이어졌다. 새 앨범에 수록한 신곡도 발표하였다. 작사, 작고도 하였다. 청아한 목소리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음악의 열정은 젊은 날과 똑 같았다. 그는 결코 녹록치 않았던 프랑스 유학 생활을 털어놓았다. 인간의 땀 냄새가 짙게 베였을 터이다. 가수 은퇴 후 37년이 지난 후에도 복귀를 간절히 바랐던 지인들, 가수 복귀의 조력자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관중은 중, 장년층이 대부분이었다. 반세기 가까운 옛날을 되새기고 싶은 세대들이다. ‘격조 높은 공연’은 두 시간에 걸쳐 차분하게 진행 되었다. 아내와 함께 듣고 싶었던 노래는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매번 열심히 박수를 치던 아내도 못내 아쉬움을 달랬다.
어렸을 적 TV에서 본 사람이 맞나 싶다. 기억 속 그는 리듬을 타는 정도의 율동과 함께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노래를 불렀다. 옆집 오빠면 딱 좋을 것 같았던 그가 오십이 넘어 대중 앞에 다시 나타났다. 중후한 매력을 내심 기대했지만 흥폭발은 기본이고 재치 넘치는 입담을 막기가 어려울 정도다. 1980년대 중반 ‘볼리비아發 염소 창법’으로 아이돌 인기를 구가했던 가수 임병수(林炳秀·57)를 만났다. 보다 더한 실제 상황 정글생활 달인 이야기도 있으니 기대하시라!
시대를 대표하던 아이콘, 다시 돌아오다
1980년대 중반 ‘아이스크림 사랑’, ‘사랑이란 말은 너무너무 흔해’ 등으로 소녀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가수 임병수. 그는 요즘 말로 강제 소환됐다는 표현으로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잊혔던 그의 노래가 톱스타의 입을 타고 방송 전파를 탄 것. 제2의 전성기로 갈 기회가 찾아왔다.
“참 그게 운명인 것 같아요. (SBS)에서 배우 김수현씨가 제 노래 ‘약속’을 불렀어요. 그리고 (tvN)에서는 덕선이(혜리 분)와 동룡이(이동휘 분)가 ‘아이스크림 사랑’을 불렀어요. 이게 뭐지? 제 노래와 이름이 다시 나오니까요. 그때쯤 제 새 노래가 나오면 괜찮겠다고 생각은 했죠.”
밝은 웃음으로 마주한 임병수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임병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신선하고 특별했다. 타고난 음색에 볼리비아 교포 출신이라는 이국적 색채를 덧입히니 궁금증을 넘어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말 그대로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임병수가 딱 아이돌 스타였다.
“확 뜰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했죠. 가수 될 거라는 생각도, 되고 싶지도 않았어요. 깜짝 놀랐어요. 내가 노래를 좋아하고 큰 무대에 한 번 서면 좋겠다. 그렇게 막연한 꿈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왔어요. 무명가수들한테 항상 미안한 이야기지만 저는 얼떨결에 가수가 된 거예요.”
아버지, 막내아들을 가수로 만들다
임병수가 아메리카 대륙을 떠나 고국에서 가수가 된 데에는 아버지의 강력한 추진력이 뒤따랐다.
“우리 아버지의 행복이 제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는 거였어요. 사람들이 ‘막내, 노래 잘하네요’라고 하면 아주 좋아하시고요. 저도 음악을 좋아했어요. 고등학교 축제 때 공연했던 뮤지컬 에서 주인공을 맡기도 했었거든요. 아버지는 그냥 제가 TV에 나오고 사람들이 손뼉 쳐주는 것까지만 생각하시고 한국으로 저를 보내신 것 같아요.”
뉴욕에서 대학 생활을 하고 있던 임병수에게 아버지는 LA에 사는 지인이 조만간 한국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 사람과 함께 한국으로 가서 가수가 되라는 것이 아버지의 권유였다. 임병수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날아갔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던가.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들어왔고 임병수는 한 시대를 제대로 풍미한 가수가 됐다. 대단한 의지라기보다는 운명처럼 빨려 들어갔다. 딱 3년, 임병수의 쇼 타임. 조금은 짧았지만 말이다. 화려한 시간도 잠시. 대중 앞에 서는 시간이 줄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빠르게 변했다.
“84년, 85년, 86년에 제일 반짝거렸던 거죠. 그러니까 1집, 2집, 3집. ‘약속’, ‘아이스크림 사랑’, ‘난 어지러워요’로 활동했어요. 바쁘고 스케줄도 너무 많았는데 3년이 애매하게 그냥 지나갔어요.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은 했죠. 연말 시상식을 보다가 문득 ‘내가 저기 있어야 하는데…’ 살짝 그런 생각도 했어요. 괴로웠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어요. 약간의 혼란스러움 정도였어요.”
그래도 스스로 질문을 던지곤 했다. 내가 계속 노래를 해야 하나? 그만둘까?
“내 기타랑 모든 카세트테이프, 레코드판 등등 음악이랑 관계되는 모든 것을 태우고 지나간 거 다 잊어버리자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작 태워본 적은 없어요. 상상만 해봤죠(웃음).”
혹 생각처럼 모든 것을 태웠더라면 다시 사 모으기에 바빴을 거라고. 시대의 아이콘으로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인기 스타였지만 마음을 추스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단다.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다 인기가 떨어지면 순간 우울증에 걸리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연예인들이 있잖아요.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굉장히 편안하게 상황을 받아들인 것 같아요. 물론 몇 년은 이게 뭐지 했지만 죽을 만큼 괴롭지는 않았어요.”
눈에 띄는 활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꾸준하게 음반을 발표했고 본업인 가수로서의 삶과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사이 결혼도 했고, 장성한 딸이 있으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다양한 일을 접하며 살았다고. 지난 7월에는 ‘이름’이라는 신곡을 발표해 활발하게 팬들과 만나고 있다.
“10년 만에 신곡을 냈어요. 나름대로 많이 뛰어다니고 있어요. 트로트의 색깔이 있는 노래예요. 그런데 정통 트로트는 제가 아무리 불러도 그 맛이 안 나요. 트로트 같기는 한데 ‘어, 임병수가 부르니까 그냥 발라든데?’ 그런 분위기가 되는 것 같아요.”
나이와 인기를 좇아서 색깔을 바꾼 것 아니냐는 말들이 들리지만, 임병수의 생각은 다르다.
“10명보다는 100명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도 괜찮은 거 같아요. 진짜 나만의 색깔로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부를 기회가 생기는 거잖아요. 신곡도 부르고 제 히트곡도 부르려고요. 그리고 저는 또 라틴 음악으로 메들리도 준비해놓았습니다. 아무래도 그쪽 노래는 제가 부르는 게 훨씬 나을 거니까요(웃음).”
불모지 볼리비아를 개척하다
문득 이야기하다 보니 하고많은 나라 중에 왜 볼리비아로 이민을 갔는지 궁금해졌다. 외국을 나가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 볼리비아에서 날아온 청년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외국에서 왔다고 하니 부자려니 지레짐작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부모님이 모두 황해도 분들이셨어요. 우리 아버지 생각에 대한민국은 좁으니까 좀 넓은 나라로 가자,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에 이민 신청을 했는데 볼리비아에서 먼저 연락이 왔대요. 그때는 볼리비아가 한국보다 더 잘살았어요. 제가 다섯 살이던 1965년도에 볼리비아로 떠났습니다. 부모님과 7남 3녀, 12명의 가족이 모두요.”
한국에서 떠날 때만 해도 부모님이 목욕탕과 생선 냉동 창고를 운영해 집안은 넉넉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북 출신으로 전쟁을 겪은 부모님이 전쟁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은 생각을 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떠난 임병수의 집안은 한국에서 볼리비아로 간 첫 이민 가족. 우리 교포들 사이에서는 조상으로 불린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볼리비아로 이민을 가면 임병수의 집으로 인사를 하러 가기도 한다.
“전쟁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모험을 좋아하셨어요. 말 한마디도 못하는 상태로 볼리비아에 가셨는데 그때 아버지가 쉰다섯이셨어요. 당시 500달러 정도를 가지고 가셨답니다.”
이민 떠난 그곳은 말 그대로 정글이었다
아버지를 따라간 볼리비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정글만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 가족은 산속으로 들어가 제재소를 했어요. 카라나비라는 지역이었어요. 한 5~6년은 산에서 살았어요. 화장실도 없고, 신발도 없었어요. 집도 그냥 원두막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벽도 없었고요. 뱀도 지나가고 개미도 지나가고 각종 생명체가 주변을 지나다녔어요. 내가 다섯 살 때부터 살았는데 열 살 무렵까지 있었어요.”
맨발로 다니는 게 익숙했던 어린 시절. 한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어린 임병수에게 선물로 신발을 안겼지만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잘사는 교포 출신일 줄만 알았는데 타잔의 삶을 살았다고 고백했다.
“타잔한테 신발 한 번 줘봐요.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신발을 신고 나가도 학교에서는 벗고 돌아다니다가 집에 들어올 때쯤 다시 신고 집으로 들어갔어요. 혼날까봐요. 지금도 불편해요(웃음).”
(SBS)이 우스워 보이지 않냐며 넌지시 물었다.
“웃기죠(웃음). 냇가에 다이너마이트 하나 던져 터뜨려서 물고기는 그냥 건져 올리기만 하면 됐어요. 새도 잡아서 불에다 구워 먹고요. 에이, 저는 5년 동안 정글에서 살았잖아요. 가끔 이야기할 때마다 사람들이 저를 신기한 듯 바라봐요. 방송은 아무리 힘들어 보여도 주위에 카메라 있고 사람들도 있고 일단 조명도 있잖아요.”
정글 삶에 대한 얘기는 끝이 없었다. 키가 큰 아보카도 나무를 타고 올라가 열매를 따먹던 일, 뱀이 몸 주위를 지나간 사건, 개미 밥으로 개구리를 던져준 일 등 상상할 수 없는 정글 이야기가 무용담처럼 펼쳐졌다. 이야기할 때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지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몸으로 표현하면서 이해를 도왔다.
“하여튼 좋았어요. 아쉬운 게 있다면 그때 너무 어렸다는 거죠. 우리 형들은 재밌었다고 해요. 즐긴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힘들어도 재밌었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알아요? 사람이 사람 만나는 거요. 밤에 산길 가고 있는데 빨간 불빛이 보여요. 얼마나 무서워요. 담배 피우면서 일(?) 보고 있는 거예요.”
혹시나 에서 섭외가 온다면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가면 본능적으로 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못할 것도 같아요. 그때는 벌레 같은 거 손으로 막 잡고 그랬는데 이제는 무섭거든요(웃음).”
프로레슬링 선수들 의상실을 열다
5년이 흘러 12명의 대가족은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로 떠났다. 볼리비아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스포츠는 바로 프로레슬링. 이곳에서 임병수의 가족은 레슬링 선수의 옷을 만드는 의상실을 열었다.
“볼리비아에서는 레슬링 선수들이 니트 옷감으로 된 선수복을 입어요. 우리 누나들이 옷을 잘 만든다는 소문이 나서 선수들이 옷을 맞추러 많이 왔어요.”
정글에서 내려와 도시로 이주했으나 고단한 삶은 계속됐다.
“이런 거 보면 누나들 울겠다. 왜냐면 누나들이 고생 많이 했거든요. 그러다가 의상실이 잘되니까 아버지가 여덟째 형을 독일로 보내서 섬유 기계를 사오라고 하셨어요. 섬유 관련 사업에 필요한 것인데 볼리비아에 처음으로 들어온 기계였어요.”
정글을 벗어났지만, 여전히 화장실은 없었고 방도 작아서 잠을 잘 때면 식구들이 몸을 바짝 붙이고 칼잠을 자야 했다. 누나들은 재단이 끝나면 탁상 위에 요를 깔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가족들이 매달려 열심히 사업을 일궜다. 가업이 생긴 것이다. 임병수의 집에서 만들어진 원단은 인접 국가인 아르헨티나, 칠레로 팔려나갔다.
“볼리비아에서 얼마나 놀랐겠어요. 한국 사람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마침 그러다 볼리비아에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국가적인 제압도 있고 탄압받는 느낌? 경제 사정이 안 좋아지니까 외국 사람들을 반기지 않게 됐죠. 지금은 가업은 다 접고 각자 다른 나라에서 다른 일 하고 살아요. 저만 지금 한국에 있고요. 큰형님 세 분은 돌아가셨습니다.”
형님과 누나들은 가끔 보고 싶은 정도다. 이젠 가족이 다 떨어져 살기 때문에 다 같이 모이는 일은 더 기대하지 않는다.
“오래전에 부모님 금혼식 때 10형제들이 모두 모였어요.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사진을 찍는 데 한 시간 걸렸다니까요. 사진을 찍으려 하면 한 명이 화장실 가고, 화장실에서 돌아오면 누가 또 잠깐 넥타이를 고쳐 매고 그래서요.”
어렸을 때 정글에서 살았던 추억 때문일까? 기회가 되면 볼리비아 나무를 수입해 사업을 해보고 싶은데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대신 조카가 추진하고 있는 커피 사업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저는 되게 밝게 보이잖아요. 나쁜 것은 옆으로 밀어놓고 좋은 생각만 하려고 해요. 내가 여기 혼자 있어도 잘 버텨온 힘이에요. 이런저런 고민이 있어도 결국은 늘 음악 생각뿐이에요. 10곡, 15곡 발표할 필요 없잖아요. 한 곡 내고 노래 부르고 다시 또 만들면 되죠. 음악은 계속할 거니까요.”
그의 노래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평생이 나그네 인생이다. 예전에 수줍었던 모습에 힘이 들어가고 더 밝아진 이유는 마음 깊이 숨겨놓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노래를 향한 열정 때문이다.
제목만 말해도 그 시대의 풍경이 떠오르는 노래들이 있다.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당신은 어디 있나요’ 등등 발표될 때마다 가요 차트를 점령하며 시대의 유행가로 자리매김한 그 노래들. 특유의 여린 목소리로 그 시절의 애절한 감성을 노래했던 양수경(52)이 무려 27년 만에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긴 세월을 넘어 그대로 도착한 듯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녀는 여전히 꿈을 꾸는 소녀와 삶의 부침을 겪고 거듭난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을 함께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철두철미한 가수였다. 그녀가 인생 2막을 열면서 발견한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가수 양수경의 귀환은 요즘 한창 일어나고 있는 ‘8090’ 가수들의 복귀 붐 속에서도 특별한 느낌을 준다. 작년부터 여러 음악 방송 프로그램에서 무대를 가진 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단독 콘서트를 27년 만에 연 것이다.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었음이 짐작된다.
후회 없이 할 수 있는 일, 답은 노래였다
“준비하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몇 번이나 들었어요. 추억 속에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이들 엄마이기에 나만 생각할 수는 없었어요. 사업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어요. ‘내가 잘하는 일이 뭘까’, ‘눈감는 날까지 후회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를 무지 많이 고민했죠. 답은 노래였어요.”
양수경은 공연을 앞두고 2014년 일기를 봤다. 공연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써놓은 자신의 글이었다. 그 막연했던 희망이 3년 정도 지나 이제야 이뤄진 셈이다. 그러나 막상 그런 무대가 찾아오니 갈등과 두려움이 올라왔다.
‘이번만 하고 다시는 못하는 것 아닌가, 무대에 섰는데 노래가 잘못 나오지 않을까, 차라리 안 보여주면 망신이라도 안 당할 텐데….’
공연 끝나고 다음 날 아침까지 잠 못 자
“요즘 공연 시장도 안 좋지, 음반업계도 안 좋지. 내 나이에 뭔가 시작한다는 것도 두려웠고. 공연 날 표가 백몇 석이 비었다는 얘기를 듣고 무대를 올라갔어요. 그런데 막상 올라가 보니, 객석이 꽉 차 있었어요.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어요. 그리고 노래를 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했는데… 모르겠어. 시작했는데 끝나 있었어요.”
성공이었다. 공연 직전까지 떠올렸던 모든 어둠과 고통을 날려버릴 정도의 성공. 공연 전날 불안감에 잠을 못 잤던 양수경은 공연이 끝나고 정반대의 이유로 그다음 날 아침 여덟 시까지 잠을 못 잤다. 공연을 본 사람들에게서 들은 “다시 또 오고 싶어요”라는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울고 웃는 게 상상을 초월했죠. 우리 밴드는 최고의 세션이에요. 최고의 가수들과 해외 공연을 다 해본 사람들이라서 무대에서 설렐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친구들이 나처럼 잠이 안 온다면서 전화를 했어요. ‘누나, 이상해. 아직도 안 가셔. 모르겠어. 어떤 힘인지 모르겠는데 아직은 설레’라고.”
세상의 무수한 따스함과 마주하다
양수경은 이번 공연을 기획하고 추진하면서 자신을 도와주는 따뜻한 사람들을 무수히 만났다. 그 만남들은 그녀로 하여금 지난 시간을 후회하게 만드는 계기도 됐다.
“옛날에는 제가 말을 잘 안 했어요. 그게 너무 후회스러웠어요. 좀 어렸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말하고 사귀면 그게 추억으로 남는 건데 그걸 못한 거죠. 어렸을 때는 너무 가난해서 똑바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너무 포장했어요. 지금은 내가 풀어놓으니까, 많은 걸 내려놓고 나니까 세상이 따뜻해요. 전보다 가진 것도 없고, 모든 걸 다 잃은 줄 알았는데 여기 이렇게 따뜻한 분들이 계셨어요.”
그녀가 세상의 따뜻함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과정은 슬픔과 인고의 세월이기도 했다.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 인간 양수경은 내비게이션 아니면 어디에도 갈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자꾸 ‘수호천사’들이 나타나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뜻밖에 누군가가 나타나 나에게 손을 내밀어줄 거라곤 생각 못해봤어요. 단절된 삶, 이슬에 젖어 산 세월이 참 길었지. 해 뜨는 것도 싫고 해 지는 것도 싫었던 때가. 너무나 많은 배신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녀는 사람을 볼 때 눈을 본다고 말했다. 눈은 숨길 수 없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자신에게도 해당되었다. 그녀는 힘든 시간에 ‘제 마음에 분한 게 없게 해주세요, 내 눈에 사악한 게 없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 소원 덕분일까, 그녀의 눈은 30여 년 전처럼 여전히 해맑았다.
“아직도 아픈데, 그 아픔이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날 보고 울고 웃고 용기를 얻으면 좋겠어요.”
내년 데뷔 30주년 공연도 하고 싶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서 고통을 보지 않고 힘을 얻으면 좋겠다는 말은 철저한 대중가수로서의 양수경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제2의 인생 또한 첫 번째 인생처럼 가수로서 다시 문을 연 셈이다. 컴백 공연 전에는 조관우의 ‘늪’, 김범수의 ‘약속’을 만든 베테랑 작곡가 하광훈과 손잡고 신곡 ‘애련’을 발표했다. 그것은 과거에만 함몰되지 않는 ‘현역’ 가수로서의 양수경을 증명해주는 의지처럼 보였다.
“지금 리메이크 앨범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런데 참 돈이 많이 들어가더라(웃음). 과거에는 음반을 내면 많은 수입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음반이 안 나가요. 그래도 우리 또래 사람들은 CD를 가끔씩 사는데 젊은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죠. 우리의 낭만은 산업에 묻혔어요. 음반이나 예술 하시는 분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시대를 따라가다 보니까 앨범 한 장을 만들면서 생기는 추억이나 낭만이란 게 묻혀서 없어졌어요. 그래도 난 앨범을 만들 거예요.”
그러고 보니 그동안 양수경이 소화한 장르는 굉장히 넓다. 트로트, 발라드, 댄스, 탱고 등등. 자연스럽게 그녀가 어떤 가수가 되길 원하는지 궁금해졌다.
“저는 대중가수예요. 그럼 대중이 좋아할 쉽고 편한 노래를 부르면 되죠. 노래는 안 되면 언제든지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내가 노력이라는 걸 잊지 않는 가수면 좋겠고 확실한 내 색깔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전 분명 이선희, 현미 언니와도 다르니까요.”
비굴하게 살지 말자는 다짐
인터뷰를 하면서 양수경은 그 소녀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직업적으로 완고하고 고집이 센, 흡사 장인에 가까운 의식이 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타고난 성정일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굴곡진 삶을 이겨내고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만들었던 힘일지도 모른다.
“가수를 딴따라라고 부르는 게 싫었어요. 그런 시선들이 좋지 않았고, 나라도 똑바로 살아야겠다 싶었죠. 연예인은 우리가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계속 쳐다보는 직업이에요. 그럼 많은 걸 포기해야 해요. 외로운 것도 받아들여야 하고요.”
어렸을 때부터 연예계에 몸을 담아야 했기에 체득해야 했던 그 완고함을 도와줬던 것은 책이었다.
“어렸을 때는 책을 많이 읽었죠. 맨 연애소설만 읽었지(웃음). 특히 시드니 셀던 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사람들은 그 소설에서 연애를 읽지만 잘 읽어보면 가난한 여자가 상류사회로 진출하면서 변화되는 모습이 나와요. 전 그 여자의 성공 과정에 대한 내용을 계속 읽었어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인문학 서적만 찾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시드니 셀던 소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도 발견했고, 과학, 경제,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도 읽었어요.”
소설에서 인생을 배웠다는 신선한 관점. 그렇다면 그녀가 삶을 살면서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비굴하게는 살지 말자. 누군가 내 눈동자를 봤을 때 무엇을 감추려 하거나 비굴하게 보이지는 말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나이 아름다움은 눈빛에서 나오는 것
양수경은 화가 날 때면 하늘을 보며 웃는다고 말했다. ‘예쁘게 살기도 힘든데’라는 말이 그녀의 반문이었다. 예쁘게 살고 싶다는 희망은 그녀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다. 그녀는 여자로서 당당하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예쁘게 사는 것 또한 당당한 여성으로서의 삶의 일부였다.
“우리 나이의 아름다움은 눈빛에서 나와요. 그러니 잘 때도 웃으면서 자야 해요. 그건 돈으로도 할 수 없고 시술로도 안 되는 부분이죠.”
그녀는 여성의 삶에서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딱 잘라 대답했다.
“아, 그건 없어. 내가 신데렐라가 돼야 해요.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만큼 되어야 하는 거예요. 연애? 예전에는 연예인이라서 다 막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어요. 하지만 지금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타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내 스스로 일어나고 싶은 거죠.”
그녀가 여유가 없다고 말한 이유, 바로 내년이 데뷔 3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른 생각들보다 다음 공연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게 더 급해 보였다.
“이번 콘서트가 끝나고 다른 가수들의 공연을 본 뒤에 ‘난 아직 좋아할 때가 아니다. 다음 공연을 어떻게 할지 그걸 짜야 한다’ 했어요. 3년 전에 생각한 걸 이제야 한 거잖아요. 그래서 공연 다음 날 바로 다음 공연 기획을 짰어요. 물론 아무리 계획을 세워봤자 우리 뜻대로 되는 건 없죠. 꿈과 희망을 가질 수는 있는데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진 않아요. 그래서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세상이 예뻤으면 좋겠어요”
최근에 양수경은 예능 프로그램인 에 출연했다. 방송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답은 지극히 ‘가수 양수경’다웠다.
“방송? 불러줘야 나가죠. 그런데 방송 욕심보다는 공연 욕심이 더 커요. 그렇다고 방송국에서 절 안 부르는 건 아니에요(웃음). 부르긴 불러요. 하지만 난 대중가수예요. 대중들을 위해 쇼를 하는 가수이고 싶어요.”
가수로서의 삶 외에도 양수경에게는 또 다른 삶에 대한 꿈이 있다.
“혼자 사는 여자들, 싱글맘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여유가 생긴다면 그런 삶을 살고 싶은 거죠.”
양수경 본인은 몰랐을지라도, 그녀를 그리워하는 팬들은 항상 있었다. 그들에게는 남편과 사별하고 세 아이의 엄마로서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이 고마운 선물 같았을 것이다. 힘겹게 먼 길을 돌아 자신의 자리로 다시 도착한 그녀는 그 시절 그때처럼 여전히 꿈꾸는 소녀 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꿈을 꾸면서 살고 싶었어요. 지금도 꿈을 꿔요. 밝고 맑은 세상에서 그렇게 예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