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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mc, 어버이날 맞아 양로원에 1억5000만원 기부
- 365mc 비만클리닉은 서울365mc병원 김하진 대표병원장이 기부금 1억5000만원을 경북 청송에 위치한 양로원인 ‘소망의 집’에 기부했다고 8일 밝혔다. 365mc측은 기부금 전달식을 4월 29일 서울성모병원 대강당에서 진행했다. 기부금 전달식에는 소망의 집을 운영하는 황금련 원장과 소망의 집 사무국장 김병환 목사도 참석했다. 365mc병원·비만클리닉의 공동설립자인 김하진 대표병원장은 “현대사회의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고향의 자리도 좁아지는 것 같다”며 "마음의 고향과 같은 소망의 집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소망의 집은 365mc가 2010년 전달한 기부금 4억원을 기반으로 2011년 10월 건립됐다. 소망의 집은 60세 이상의 노인이 입소할 수 있으며,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는 무료로 입소받고 있다.
- 2017-05-08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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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철훈의 사진 이야기] 깨어나는 실크로드의 나라들
- 가르치는 재미를 몽골국제대학교에 와서 배우고 있다. 학생들과 만나는 강의명은 ‘Liberal arts through Photography-사진으로 만나는 인문학’이다. 국제대학교라 학생들뿐 아니라 교수들도 여러 나라에서 왔기에 모든 행정절차와 강의는 영어로 진행된다. 여러 나라란 몽골을 비롯한 러시아, 중국,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한국, 인도,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영국, 홍콩 등 다양하다. 그래서 우리 학교에는 다른 대학과 다른 독특한 분위기와 문화가 스며 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서로 배운다는 태도이다. 서로 호감을 갖되 존중하고 이해해야 하는 현대 국제사회에서 요구되는 자세이다. 그렇다고 이 지역 정서가 옅어지는 것은 아니다. 몽골이라는 지정학적 특징과 역사에서 우러나는 유목민적인 성격은 언제나 바닥에 녹아 있다. 지난 호에 내보낸 ‘낯선 이국에서 새 시대와 새 세대를 본다’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러한 환경에서 알게 된 시간적인 내용이었다면 이번에는 새 시대에 공간적인 새 지역을 얘기하고 싶다. 4년 전까지만 해도 난 한 번도 몽골에 들어와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다만 사진가로 몽골을 촬영할 일이 여러 번 있었을 뿐이다. 먼저 1990년대 초 세브란스병원에서 몽골에 연세친선병원을 세우는 과정에 우연히 참여하게 되는 행운으로 첫발을 딛게 되었다. 그리고 몽골 대통령으로부터 초청을 받은 한 기업 총수의 국빈 초청 응답 선물로 몽골의 아름다움을 사진첩(Land of Lands Mongolia)으로 만들기 위해 아내와 방문하게 되었다. 그 사진첩은 국가원수의 격에 맞는 의전을 갖추어야 해서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원본 사진으로 만들어진 수제 책이다. 그리고 2005년에는 연세대학교 120주년 기념사업회로부터 ‘희석된 학교의 건학정신을 사진으로 되살려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 부합하는 기획을 준비하다가 세브란스 2회 졸업생인 이태준 열사를 찾게 되었는데 그의 활동무대가 몽골임을 어쩌랴! 그렇게 ‘이태준 선배는 왜 몽골로 갔는가’를 위해 다시 제자들과 몽골을 촬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미국 비정부기구유엔총회라 불리는 인터랙션대회에서 대상을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몽골 양로원에서 촬영한 사진 ‘Such wealth and such freedom’이다. 그리고 사람뿐 아니라 가축의 생명을 귀히 여기는 몽골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낙타의 눈물’ 스틸을 촬영하게 되었으며, 미국 캘리포니아 어바인시 파인 아트 홀과 우리나라 안양시의 알바로 시자 홀에서 연 휴먼다큐 를 준비하기 위해 몽골과 또 인연이 생겼다. 이렇게 되짚어보면 몽골에 대한 인연이 특별히 많게 보이지만, 사실 몽골만 많이 다닌 건 아니다. 따져보면 어느 나란들 그렇게 안 다녔으랴! 사진가라는 직업이 그렇게 세상을 많이 다니는 게 일이다. 몽골이 중앙아시아의 시작 지역이란 얘기를 꺼내기 위한 얘기가 길어졌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나라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나라들이다. 그래서 그동안 나는 몽골보단 ‘스탄’으로 끝나는 실크로드 천산북로로 이어진 중앙아시아 나라들을 몽골만큼이나 많이 다녔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으로 연결되어 유럽과 닿는 아시아의 서쪽 끝 보스포루스 해협이 관통하는 이스탄불까지. 또 다른 길도 다녔다. 천산 아래 중국 시안(西安), 신장 위구르 자치지역 북서쪽 파미르 고원에서 파키스탄으로 넘어가 카라코람 하이웨이, 훈자왕국을 지나 라호르와 이슬라마바드, 그리고 인도 중동 나라들과 만나는 옛 동로마제국 터키에 닿는 길에 만나게 되는 나라들. 그 중앙아시아 나라들을 생각하면 어렸을 때부터 왠지 가슴이 뛰었고 지금도 맥박이 빨라진다. 이 나라들을 꿈꾸고 가까이 보기 위해 난 몽골로 왔다. 대한민국 우리나라에서 보면 이 나라들이 시작되는 곳 중 하나가 몽골인 것이다. 오늘의 몽골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그리고 내몽골의 중국과 맞닿아 있다. 러시아를 부를 때는 시베리아라는 러시아 지역 이름이 난 더 좋다. 거기엔 몽골의 홉스굴 호수와 연결된 바이칼이 있고, 우리와 얼굴과 정서가 많이 닮은 민족들이 살고 있다. 길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관심으로 퍼지며 피어난다. 앞에서 얘기한 중앙아시아 나라들과 우리를 이어줬던 길들이 소위 실크로드란 이름으로 세상에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많고 어떤 길보다 큰 길이었던 실크로드는 근세 서양 문명의 휘황찬란한 빛에 오랫동안 가려졌었다. 근세 대서양과 태평양 길의 번성으로 사람들에게 잊혔다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여기 몽골에선 분명히 보인다. 그 길을 따라 큰 기운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를 떠나 있는 한국 사진가이기에 보이는 것이다. 새 시대는 공간도 시간과 함께 드러난다. 이제 가려졌던 길이 드러나면서 그 공간의 시간도 새롭게 조명될 것이다. 공간의 시간은 역사로 살아난다. 역사는 서로 다른 가치가 만나 각축하는 실질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덮였던 시간이 오랠수록, 드러나는 공간은 경이로울 수밖에 없다. 그 길과 연결된 나라들이 각자의 역사와 함께 깨어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새 세대는 그 일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직까지 너와 나를 가르는 남의 역사에서 이제 우리를 아우르는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려고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혹여 잃어버린 것이 소리에 있나 하고 음악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연극을 하며, 각자 열심이듯 나도 잃은 것이 있나, 있다면 그것을 찾아보려고 여기에서 사진작업 중이다. 실크로드의 나라들이 깨어나듯이 나도 새롭게 깨어나고 있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랙션대회(NGO의 유엔총회)에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 2017-01-2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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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으로 살까? PART2] 시니어타운 부부 “커뮤니티가 건강한 삶을 만들어요”
- 시니어타운 하면 우리가 흔히 갖는 선입견이 있다. 바로 ‘돈이 많이 든다’, ‘나이든 사람들만 있어서 지루하다’는 것이다. 1947년생 윤규성 전 조흥은행 상무와 그의 아내인 1950년생 장진 도자기 작가는 삼성노블카운티에 입주해 살고 있다. 시니어타운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던 이들 부부가 시니어타운으로 들어가 살면서 느낀 감정은 ‘매우 만족한다’였다. 무엇이 이들의 생각을 바꾸게 한 걸까? 금융계에 청춘을 바쳤던 윤규성 전 조흥은행 상무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시니어타운에 대해 무조건 긍정적인 생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그가 시니어타운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하게 된 궁극적 이유는 무엇일까? “집사람 친구가 먼저 와서 좋다, 한번 와보라고 추천했어요. 움직이기 전에 정서적인 면, 생활 반경, 재정상태 확인 등을 했죠. 아내가 좋다는데 못할 게 무어냐 싶어 결정하게 됐어요. 그런 후에 직접 와보니 생각을 바꾸게 만들더군요.” 삼성노블카운티가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자연 속에 있으면서 내부에 스포츠센터, 문화센터 등이 부족함 없이 다 갖춰져 있다는 점이었다. “비로소 삶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거죠. 뭐든 배우고 싶은 걸 맘대로 배울 수 있고 운동도 맘대로 할 수 있고. 이런 곳이 대한민국에 또 있을까 싶어요.” 다양한 친구를 사귀기 좋은 곳 윤규성씨는 인터뷰 내내 굉장히 만족한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그의 호의적인 반응에는 시설적인 면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부분에서의 만족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동안의 만남이 직장 친구, 학교 친구 등 폭이 좁았어요. 여기 오니 다양한 전문직에 종사해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한 분야에서 뚜렷한 획을 그은 사람, 일가를 이뤄 성공한 분, 300억 기부자 등 자기 인생을 열심히 산 사람들이죠. 대학교수, 공직자, 변호사, 기업인 등등. 그렇다 보니 새로운 관계 속에서 대화의 폭이 넓어질 수밖에 없어요.” 봉사활동의 기회도 발견할 수 있었다.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는 꿈이 있는데 여기 오니 그런 기회가 많았어요. 파파합창단이 있는데, 외부 발렌티어가 와서 지도와 지휘를 합니다. 그리고 소년원, 노인대학 등에 위문을 가고 있죠.” 그는 시니어타운에서의 행복한 삶이란 바쁘고 화려한 삶이 아니라 사소한 자유를 맘껏 누리는 조용한 삶이라고 설명했다. 운동, 취미,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들 이들 부부는 서초동에서 10년, 방배동에서 30년을 살았다. 그가 오랫동안 누린 주거문화와 시니어타운의 문화는 전혀 다르다.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생활 속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각종 기반 프로그램과 시설 그리고 기회가 있다는 점이다. “봉사 기회도 많고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 나이를 먹을수록 운동과 취미활동이 매우 중요한데 원하는 만큼 할 수 있어요. 시설과 시간, 여건 모두가 제공되는 셈입니다.” 그는 삼성노블카운티에 입주하면서 골프를 끊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로선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골프를 다 끊고 있다고 해요. 운동한 만큼 효과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죠.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곳으로 이사 온 뒤 배드민턴을 배웠습니다. 외부 전문가들이 가르쳐주고 파트너가 돼주고 있어요.” 윤규성씨는 시니어타운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들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본인이 그러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너무 많다, 양로원이다. 그렇게들 말하죠. 그런데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그 사람들을 보며 나의 10년 후 20년 후를 준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죠. 그래서 저는 60대 후반쯤, 좀 더 젊을 때 입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각자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여유 아내 장진씨는 덜 늙어가도록 꼼꼼하게 관리를 받을 수 있다는 점과 오페라 강좌 등 문화생활이 가능하다는 점을 우선 생각나는 장점으로 들었다. 부부는 아침을 먹고 나면 각자의 생활에 집중한다. 특히 도자기 작가인 장씨는 곤지암 작업실로 가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이곳에서는 부부가 각자 원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시간도 제공되는 것이다. 윤씨의 말이다. “아침식사를 하고 이 사람(장진씨)이 나가면 내가 알아서 점심도 사먹고 극장도 가고 그러면서 지내요. 하루가 자유로워요. 영통역 근처에도 오가고. 이런 자유를 만끽하는 것도 즐거움이죠. 서로의 독립적인 면을 인정하며 살아야죠. 보금자리는 하나여도 각자의 생활을 누리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장씨는 자신이 하고 싶을 때 작품전을 열 생각이라고 밝혔다. 젊었을 때 열심히 살았으므로 이제는 건강을 챙기며 여유롭게 살고 싶은 게 그녀의 목표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함께 운동도 열심히 한다. “아침 6시부터 8시까지는 항상 운동을 합니다. 아내는 필라테스를 해요. 점심을 먹은 후에는 문화 강좌를 듣고 저녁식사 후에는 같이 걸어요. 하루에 세 시간 정도는 기본적으로 운동을 하는 셈이죠.” “이곳으로 부인을 데려온 남편들은 참 착한 사람들이에요” 인터뷰를 하는데 부부의 얼굴이 둘 다 굉장히 밝다. 그들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궁금해졌다. “건강이죠. 그리고 행복은 현실 속에서 자기 마음으로 만들어야지, 여건으로 만들려고 하면 안 돼요. 올라가면 또 언덕이 있을 테니까.” 부부가 서로 의리를 지키며 사는 것은 쉽지 않다.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물었다. 우선 장씨의 대답. “신뢰, 믿음.” 그리고 윤씨의 대답. “난 없어(웃음). 흘러가는 대로 살아요.” 대답처럼, 윤씨의 기질은 꾸미는 것을 싫어해 자연 그대로를 추구하며 사는 듯 보였다. 그는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털어놨다. “아내가 젊었을 때 가족 때문에 빼앗겼던 시간을 더 늦기 전에 되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동안 아이들 챙기는 것은 물론 가족들 수발 다 들며 살았죠. 그만큼 자기완성의 길이 멀어졌어요. 이제 자손들과 헤어지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거예요.” 윤씨의 말에 장씨는 “(시니어타운에) 부인을 데려온 남편들은 참 착한 사람들이에요”라는 말로 맞장구를 쳤다. “더 늦기 전에 빨리 오세요” 시니어타운 추천에 대해 장씨는 윤씨와 비슷한 말을 한다. “실제로 살아보니 들어와서 사는 게 생활비가 더 절약돼요. 그래서 며느리 둘에게 육십 지나면 여기 와서 살라고 추천했죠. 그랬더니 첫째 며느리가 자기가 봐도 그렇게 보인다고 대답하더라고요.” 입주를 고민했을 때와 입주 후의 자식들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다들 좋아해요. 상의해서 오게 된 건 아닌데 걔네들은 마음이 편안해졌겠죠. 부담을 덜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보완했으면 하는 점은 없냐고 물었다. 우선 장씨의 대답. “셔틀버스가 있는데 지금보다 운행을 좀 더 자주 하면 좋겠어요.” 윤씨는 사업적인 부분과 연결시켜 신선한 제안을 했다. “해외 시니어타운과 체인이 이뤄지면 좋겠어요. 태국, 하와이, 일본에 가면 노블카운티와 자매 계약을 맺은 곳이 있어 갈 수 있으면 좋겠고, 그 나라에서도 올 수 있는 그런 연결망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그 나라의 문화센터를 이용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익힐 수도 있겠죠.” 윤씨와 장씨는 시니어타운 입주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오래 망설이지 말라고 한다. “더 늦기 전에 빨리 오세요. 건강할 때 와야 합니다. 건강할 때 와야 여기 있는 서비스들을 마음껏 즐기며 건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서 오면 그 좋은 시설들, 문화 관련 프로그램, 운동센터 등이 무용지물이에요. 이 좋은 시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면 건강해야 합니다.”
- 2017-01-04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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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뉴욕은]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 김영순 화이트웨이브 무용단 단장 겸 예술감독
- 뉴욕 브루클린에서는 지난 9월 29일부터 4일간 큰 춤판이 벌어졌다. 8개국 70개 댄스팀이 참가한 덤보댄스축제다. 이 춤판은 맨해튼 다리 밑, 버려진 공장지대였던 덤보(DUMBO,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 지역을 문화의 중심지로 변신시킨 일등공신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축제를 뉴욕 5대 무용축제로 선정했고, PBS 방송은 올해 뉴욕의 5대 행사로 꼽았다. 이 춤판을 벌여온 주인공은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불리는 김영순 화이트웨이브 무용단 단장(예술감독 겸임). 뉴요커의 자랑인 덤보댄스축제는 김 단장의 집념과 열정 그리고 고난과 눈물의 결정체다. 김영순 단장이 미국으로 건너온 것은 1977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한 후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댄스스쿨로 유학을 온 것이 미국생활의 출발점이었다. 세계 현대무용계의 신데렐라를 꿈꾸며 시작한 유학생활은 고난 그 자체였다. 굳게 마음먹고 준비한 유학이었지만 턱없이 부족한 돈이 문제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선일여자중고등학교에서 무용교사로 재직하면서 월급의 70%를 저축해 모은 유학 자금을 장춘동 국립극장 소극장(현 달오름극장)에서 공연을 하면서 다 써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국내 사상 최연소 단독 현대무용 공연이었고 ‘잔잔한 호수 위로 퍼덕이며 뛰어오르는 은빛 찬란한 물고기’라는 평가도 받았지만 당초 계획에 없었던 공연이었다. 김 단장은 40년 전 그 공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다리던 입학허가를 받고 미국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는데 거부를 당했어요.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을 했기 때문인지, 젊은 여성이 미국에 눌러 살까 우려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앞이 캄캄했어요. 그때 멋진 공연을 해서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면 비자를 받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듣고 공연을 하게 됐어요.” 아니나 다를까 공연을 마치자마자 바로 비자가 나왔다. 그런데 체재비는 고사하고 항공료조차 부족했다. 철도공무원인 아버지 김철주씨의 5남 4녀 중 셋째인 김 단장은 형편이 어려운 부모님께 차마 손을 벌릴 수 없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입양아 두 명을 미국까지 데려다주면 항공료를 지원해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8개월과 11개월 된 두 아이를 양팔에 안고 22시간 넘게 비행을 했다. 침례교회가 운영하는 양로원의 자그마한 방 한 칸을 댄스스쿨에서 알선해줬지만 아침식사를 포함해 주당 25달러인 숙식비와 학비를 감당하기가 벅찼다. 하루 12시간 이상 무용 연습을 하면서도 베이글 하나로 견딜 때가 많았다. 때로는 밤늦게 돌아오다 너무 힘들어 남의 집 계단에 앉아 달을 보고 엉엉 울기도 했다. 김 단장은 그때의 심경을 토로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대부분의 부모님들처럼 딸이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현모양처로 살기를 원하셨지 유학 가는 것을 바라시지 않았어요. 딱 1년만 공부하고 오겠다고 통사정을 해서 허락을 받았어요. 그리고 춤꾼이 되고 싶었으나 집안 어른의 반대로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어머니의 기대까지 짊어지고 있었어요. 김포공항을 떠날 때 외할머니께서는 부적을 한 장 주시면서 엄마의 꿈을 대신해서 이루어달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래서 아무리 어려워도 포기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를 극심한 생활고에서 구해준 것은 루돌프 누레예보 장학금이었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30 대 1의 경쟁을 뚫고 장학생 오디션을 통과한 그는 뉴욕서 열리는 공연이라면 단역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출연했다. 얼굴을 알릴 수 있었고 얼마 안 되는 출연료였지만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1980년, 경쟁률 300 대 1의 오디션을 통과해 뉴욕 10대 명문 무용단인 제니퍼 뮬러 현대무용단 전속 단원으로 발탁되면서 그는 프로페셔널 댄서로 우뚝 서게 됐다. 미국은 물론 유럽, 중남미, 캐나다 등 세계 곳곳으로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검정머리 휘날리며 춤추는 동양의 신비한 무녀’라는 찬사를 받았다. 1년에 9개월간 해외 공연을 하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뉴욕에 머무는 3개월은 트론댄스시어터(Throne Dance Theater) 같은 소규모 무용단에서도 활약을 했다. 겹치기 출연을 해야 할 정도로 이미 명성이 높았다. 당시 한 유명 평론가는 “무대에서 춤추고 있는 많은 댄서들 가운데 눈을 뗄 수 없는 댄서”라고 극찬했다. 1988년, 드디어 그는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한다. 하얀 파도가 세계로 용솟음친다는 의미의 ‘화이트웨이브(White Wave) 김영순 무용단’이다. 하얀 파도는 백의민족을 상징한다. 경쟁이 치열한 뉴욕에서의 무용단 창단은 실력과 명성과 인간관계를 모두 갖추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 단장은 그 해 88서울올림픽 현대무용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국내 팬들에게 현대무용의 진수를 선보이기도 했다. 홍콩에서 단독공연을 할 때는 홍콩스탠더드 신문이 ‘춤추기 위해 태어났다(Born To Do It)’는 제목으로 그의 삶과 춤을 전면에 소개했다. 신문 제목처럼 그는 타고난 춤꾼이었다. 6세 때 인근 무용학교에서 들려오는 장구소리에 이끌려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7세 때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사냥꾼’ 이야기를 춤으로 표현해 호남예술제에서 1등을 차지했다. 무용단 운영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 , 등 60여 가지의 레퍼토리를 선보였을 때 월스트리트저널이 ‘댄스의 영역을 뛰어넘은 새로운 예술세계 창조’라고 논평하는 등 주요 언론들의 호평이 이어졌지만 무용단 운영은 점점 어려워졌다. 소호(SOHO)에 있던 스튜디오를 임대료가 저렴한 이스트 할렘으로 옮겼으나 70평 남짓한 스튜디오 임대료를 제때 내지 못해 이불을 덮어쓰고 울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에는 맨해튼 스튜디오가 상가로 바뀌면서 새 터전을 찾아나서야 했다. 소호에서 밀려난 가난한 예술인들이 몰려든 덤보 지역은 앞이 캄캄했던 그에게 축복의 땅이었다. 기업인 존 라이언(John Ryan)씨가 든든한 후원자로 나타나면서 25만 달러를 지원받아 이스트 강변에 100석짜리 무용 전용극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덤보댄스축제와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미술·패션쇼·음악·필름스크린·댄스 등 5개 예술 분야로 나눠 열리는 덤보아트축제의 이사진과 댄스 부문 기획을 담당했던 친구의 권유로 2001년 제1회 덤보댄스축제의 총감독을 맡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사실 덤보아트축제는 ‘예술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사업이 번창한다’는 부동산개발업체의 경영전략에서 출범한 축제다. 덤보 지역이 번창하자 다른 분야의 축제는 사라지고 댄스축제만 남아 뉴요커의 발길을 끌고 있다. 김 단장은 신예 안무가들이 기량을 마음껏 펼치면서 뉴욕으로 진출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겠다는 신념으로 댄스축제를 지켰다. 그는 여세를 몰아 2004년부터 쿨뉴욕(Cool New York) 댄스축제를, 2006년부터는 웨이브라이징시리즈(Wave Rising Series) 무용축제를 잇따라 개최했다. 뉴욕타임스는 2008년 “다운타운 현대무용계는 김영순 단장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하나도 하기 힘든 페스티벌을 세 개나 하고 있다”며 대서특필했다. 이때부터 그는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축제를 통해 총 2600여 무용단과 1만3500명의 안무가들은 7만여 관객 앞에서 기량을 발휘했다. 창무회 & 김매자, 김윤정 프로젝트댄스, 장유경 무용단, 길섭무용단, 박신애, 정석순, 김정환과 박봄, 박정윤, 최성옥 메타댄스 프로젝트 등 수많은 안무가들이 그들이었다. 그는 현재 뉴욕시가 매년 수여하는 댄스·연기대상(Bessie Award)과 예술지원기금 무용 부문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그의 무용단은 3년 연속 뉴욕시 지원 대상 문화예술단체로 선정되는 등 공로와 능력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마티 마코위츠(Marty Markowitz) 브루클린 구청장은 수년째 덤보댄스축제가 개막되는 날을 ‘화이트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의 날’로 공표하고 있다. 그의 공로는 곤경에 처했을 때 더 빛이 났다. 2012년 허리케인 샌디로 인해 이스트 강이 범람해 극장이 침수 피해를 입자 온라인 성금이 답지했다. 루도 셰퍼(Ludo Scheffer) 드렉셀대학 교수는 상속 재산 중 상당액을 기부했다. 김 단장은 수많은 무대에 올라 많은 박수를 받았지만 2014년 한국계 안무가로는 처음으로 브루클린 음악아카데미(Brooklyn Academy of Music, BAM) 무대에서 새 작품 을 성공리에 공연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뉴욕에는 링컨센터 등 굴지의 공연장이 즐비하지만 공연 대상 선정이 가장 까다로운 BAM이 화이트웨이브무용단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링컨센터의 뉴욕공공도서관은 그의 공연을 촬영해 DVD로 영구 보관하고 있다. 그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꿈은 세상 사람들이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는 멈출 수 없다. 자신의 무용단을 통해 끊임없이 새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국제댄스페스티벌을 잇따라 열어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걸작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화이트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은 요즘 인류 화합을 주제로 한 이라는 대형 작품을 새로 무대에 올리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일부는 이번 덤보댄스축제에서 선보였다. 작품이 완성되면 내년쯤 한국 팬들에게도 소개할 계획이다.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당장 시급한 것은 전용 공연장이다. 덤보 지역도 이제는 예술인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임대료가 뛰어 브루클린 내 다른 지역을 열심히 물색하고 있다. 김 단장은 새 공연장을 임대할 경제적 여력은 없지만 절실하면 이루어진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이제까지 그런 믿음으로 험난한 무용인의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왔고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라는 독보적 위치에 걸맞은 활약을 오늘도 펼쳐나가고 있다.
- 2016-10-3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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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장휴의 Smart Aging] 경험을 디지털로 연결하면 나눔이 된다-디지털 자원봉사
- 글 유장휴 디지털습관경영연구소 소장/ 전략명함 코디네이터 디지털 자원봉사란? 주변을 보면 자원봉사 활동을 열심히 하는 분이 많다. 가까운 지인들만 봐도 복지관, 양로원 혹은 자원봉사 센터에 가서 일손을 돕는다. 자원봉사를 꾸준히 지속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두 번 나가고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좋은 뜻에서 시작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시간이 부족해서, 내가 원하는 활동이 아니라서라는 등 이런저런 핑계거리가 생기고 결국 그만두게 된다. 자원봉사는 거창하게 시작하면 지속하기가 어렵다. 작지만 가볍게 그리고 재능과 어울리는 자원봉사를 시작하는 게 좋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 자원봉사를 생각해 보자. 디지털 자원봉사는 해외에서 프로보노라는 전문가 봉사활동에서 나온 개념이다. 디지털 자원봉사를 하려는 정년을 앞둔 사람에게는 일정 기간 준비시간을 준다. 그리고 기업생활의 경험이나 전문적인 능력을 비영리단체가 처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활용토록 한다. 직접 찾아가서 돕는 게 아닌 컴퓨터나 스마트폰처럼 디지털 장비를 이용하여 궁금한 점을 알려주거나 컴퓨터를 원격으로 제어하고 어려운 도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디지털의 힘을 빌리면, 무쇠팔? “디지털 자원봉사를 하려면 전문성이 있어야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디지털과 사람을 연결하면 나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여행을 오면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여행 중 다쳤거나,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도움을 주고 싶은데 언어가 안 통하면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이럴 때는 주위에 언어가 가능한 사람을 찾는 방법도 있지만 스마트폰으로 번역 봉사를 하는 사람과 연결해주는 방법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bbb코리아라는 NGO단체가 있다. 통역을 도와주는데 특이하게 휴대폰으로 통역을 도와준다. 길에서 만난 외국인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bbb통역이란 어플로 해당 언어를 선택하면 통역을 할 수 있는 자원봉사자와 연결이 된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총 19가지 언어가 있어서 외국인이 도움을 요청하면 당황하지 않고 도와줄 수 있다. 비록 나에게는 없는 통역 능력이지만 연결해 주는 것만으로도 도울 수 있다는 게 디지털의 힘이다. 필요할 때 요청하는 봉사활동 bbb코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는 우리와 같은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공부나 일을 하는 중에 스마트폰으로 도움 요청이 울리면 일을 잠시 그만두고 통역을 도와주는 방식이다. 이렇듯 봉사하는 방식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가도 스마트폰으로 도움을 요청하면 짬을 내서 도와준다. 이와 비슷한 봉사가 있다. 시각장애인을 도와주는 활동이다. 시각장애인들은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이 많지만 그중에서 유독 불편한 상황이 있다고 한다. 우유를 사왔는데 유통기한이 얼마 남았는지 확인하고 싶거나, 약을 먹으려 하는데 약 봉투에 쓰여진 글자를 보고 싶을 때 난감하다고 한다. 이럴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be my eyes’라는 어플이다. 시각장애인이 스마트폰으로 도움을 요청하면 가장 빨리 받을 수 있는 봉사자에게 연결되고 봉사자는 시각장애인과 연결된 스마트폰 화면을 동시에 보면서 말로 설명해 준다. 떨어진 물건을 찾아주기도 하고 어떨 때는 외출할 때 색깔 옷을 골라주기도 한다고 한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원봉사자들의 입소문으로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고 한다. 많은 시간을 내어서 하는 봉사가 아닌 짧지만 요청이 있을 때 도와주는 디지털 방식의 봉사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짧지만 누군가를 도와준 강력한 경험이 다른 봉사활동으로 이어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나눔의 경험을 만들어 보자.
- 2016-06-29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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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ML 칼럼] 어버이께 드린 효도 자식이 갚아준다
- 우리말을 하는 한, 그 우리말에 한자어가 들어 있는 한 말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새기려면 한자의 어원부터 따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자는 사물의 모양을 본떠 그린 상형(象形)을 비롯해 지사(指事) 회의(會意) 형성(形聲) 전주(轉注) 가차(假借) 등 여섯 가지 방법으로 만들어진 문자입니다. 이른바 육서(六書)입니다. 부모를 잘 섬기는 효도를 말할 때 쓰이는 孝라는 글자는 老[늙을 로]와 子[아들 자]를 합쳐서 만든 회의자라고 합니다. 글자 자체에 아들(그러니까 자식)이 부모를 잘 섬긴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효도를 강조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똑같습니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받은 10계명 중 다섯 번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자녀 된 사람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신 계명은 약속이 붙어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이것은 신약성서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공자는 위정(爲政)편에서 제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요즘에 말하는 효는 봉양을 잘하는 것에 불과하다. 개나 말들도 집안에서 봉양을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개나 말들과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 인간의 본성은 아무리 시대가 바뀐다 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던데, 공자의 시대에도 벌써 이렇게 ‘요즘 세태’를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의 효도야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효의 전통이 무너진 지 오래이고 효도를 하려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게 된 세상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효도는커녕 부모를 버리는 걸 넘어 살부 살모의 존속살해 범죄가 비일비재한 현실입니다. 중국 상하이에서는 5월 1일부로 강제적인 ‘효도법’이 발효됐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을 경우 신용등급을 나쁘게 매겨 집을 사거나 도서관을 이용할 때 불이익을 당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부모가 불효자식을 고소할 수 있고 양로원이나 요양원 노인들도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양로원·요양원 측이 장기간 부모를 방기하는 자식들에게 찾아오라고 연락하는 것도 의무화했습니다. 베이징(北京)과 광둥(廣東)성 장쑤(江蘇)성 등은 이미 2013년부터 노인권익보호법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 법은 정기적으로 찾아뵙지 않고 부모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식들을 고소하거나 정부에 중재를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대 국회에 효도법(이른바 ‘불효자 방지법’) 법안 2건이 제출됐다가 국회 폐회와 더불어 자동 폐기됐습니다. 부모를 잘 모시는 자녀에게는 상속세 증여세를 경감해주고, 재산을 증여받은 자식이 부양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언제든 그 재산을 환수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현행 민법 556조는 ‘부모가 자녀에게 재산을 증여하기로 약속한 경우 자녀가 부모에게 범죄행위를 하거나 부양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는 증여를 해제(취소)할 수 있다’고 돼 있습니다. ‘증여를 이미 이행한 때는 증여를 해제(취소)할 수 없다’(민법 558조)는 조건도 달려 있지요. 하지만 사실상 부모가 자녀의 범죄·패륜 행위나 불효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법원이 이미 작성되어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효도계약서 등의 서면 계약을 중시하는 것도 이 같은 현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의된 개정안은 자식이 부모를 학대하거나 부양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는 물론 현저하게 부당한 대우를 할 경우까지 포함해서, 효도계약서 등의 서면에 의하지 않은 증여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미 증여한 재산도 전부 회수할 수 있도록 보완했는데, 사실상 민법 558조를 없애야 한다는 취지인 셈입니다. 또 형법상의 존속폭행죄에서 피해자가 원치 않을 때는 처벌할 수 없도록 규정한 반의사불벌(反意思不罰) 조항을 삭제하자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우리 정서상 부모가 자식들에게 폭행을 당하더라도 처벌을 원하는 경우는 드물어 현행 법은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습니다. 증여 해제권 행사 기간도 현행 6개월에서 ‘해제 원인을 알게 된 날로부터 1년 또는 증여한 날부터 5년’으로 늘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은 부모에 대한 배신이나 배은망덕한 행위가 있을 때 부모가 증여한 재산을 1년 이내에 돌려받을 수 있게 하고 있답니다. 이런 ‘불효자 방지법’은 내년이 대선의 해이므로 노인층의 표를 겨냥한 정치권이 다시 국회에 법안을 제출해 더 활발하게 논의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효도법에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겠느냐, 부작용이 더 커질 수 있다는 거지요. 땅 덩어리가 넓은 중국의 경우 부모를 자주 찾아뵙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가 봅니다. 비행기나 열차 교통비 마련은 둘째 치고, 며칠 이상씩 휴가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고비를 받고 대신 찾아가주는 ‘부모님 방문 서비스’라는 신종 사업이 생겨 성업 중이라고 합니다. 한국인들은 영리하니 새 법이 발효되면 이런 것들보다 한층 더 기발한 ‘효도사업’이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선 영조 때의 효자 정방(鄭枋)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효자가’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전남 담양에 살았던 전우창(全禹昌)의 효행을 읊은 노래입니다. 그 가사 중 “상분도천(嘗糞禱天) 못 다하야/단지용혈(斷指用血) 하는구나”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운명하려 하자 병세를 알아보기 위해 아버지의 대변을 맛보고 하늘에 빌면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드렸다는 내용입니다. 옛 글에 나타난 효행 중 대표적인 것은 혼정신성(昏定晨省), 저녁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엔 문안(問安)을 드리고, 동온하정(冬溫夏凊), 겨울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엔 시원하게 해드리면서 병이 나시면 상분도천, 단지용혈로 간병을 하다가 돌아가시면 삼년시묘(三年侍墓)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그냥 정성에서 우러나고 자발적인 효심으로만 행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보고 배우고 본받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까 孝는 본받는다는 ‘效(효)’이면서 가르친다는 ‘敎(교)’일 수 있습니다. 내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걸 내 자식에게 보여줘야 나도 나중에 그렇게 효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부모가 온 효자가 돼야 자식이 반 효자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실제로 그렇게 잘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이런 글을 쓰기가 어려운 것은 언행이 일치하지 못하면 글에 실속이 없고 거짓과 과장이 섞이기 때문입니다. 겨우 겨우 썼습니다.
- 2016-06-27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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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철훈의 사진 이야기] 사진으로 누군가의 가난을 훔치지 마라
-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참 많은 나라들을 다녔다. 그 장소들을 정리할 일이 생겨 그 동안 다녔던 지역 이름을 적어 내려가다가 이름이 가물가물해 지역 지도로 들어가게 되었다. 내친김에 아예 지도를 펼쳐 연도에 맞춰 촬영지역을 시간 별로 한 점 한 지역 표시하다보니 가히 세계전도가 그려진다. 그런데 대부분 머문 지역은 유명한 큰 도시가 아니라 모두 변방 오지들이다. 그 지역들이 모두 내가 사진가로 빚을 진 곳들이다. 그러고 보니 특히 몽골에 진 빚이 크다. 이번엔 그 빚 얘기?막연한 빚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내가 빚을 진 상대의 얼굴까지 밝혀진 얘기다. “몽골의 가난하고 어려운 모습을 감동적으로 촬영해주십시오.” 몽골에 친선병원을 세우는 이들이 후원금 모집을 위한 사진 촬영을 의뢰해왔다. 내가 받은 촬영의 목적은 뚜렷했다. 내가 촬영한 사진으로 후원자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했다. 현지에 도착한 나는 안내인을 통해 내가 받은 미션에 어울리는 장소를 섭외했다. 몽골의 살림은 어려웠고, 양로원과 아이들은 가난했다. 양로원에서 만난 한 분은 이미 수술로 제거된 다리가 아프다고 호소하는 전쟁 영웅이었다. 또 깡마른 한 늙은 여자 분은 자기가 죽으면 그 몸을 치워야 할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그뿐 아니었다. 도시의 아이들은 몽골의 혹독한 추위에 얼어 죽지 않으려고 겨울 몇 개월 동안 하수도의 온기에 몸을 맡겨야 했다. 나는 도시의 하수도가 합쳐지는 공간에 모여 사는 그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또한 그곳의 아이들에게 자선단체들이 옷과 음식을 주는 사진과 그 아이들을 치료하는 치과의사, 또 양로원의 삶을 촬영했다. 결과를 발표하는 날 나는 주최 측 관계자들과 예비 후원자들 앞에서 사진과 함께 촬영 현장에서 미처 담아낼 수 없었던 작가의 마음을 전달했다. 일상적인 사진전으로는 기대하기 어려울 만한 후원금이 모였다. 그런데 내가 개인적으로 몽골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으로, 가난한 그들의 모습보다 더 가난한 나를 발견했다는 점이다. 한 양로원을 방문했을 때 노인들이 찌그러진 그릇에 담긴 수프만으로 한 끼를 때우는 모습을 만났다. 그런데 그렇게 식사하는 그들의 얼굴엔 당당함이 있었다. 그 까닭을 사진 촬영을 다 마친 후에 알게 되었다. 이번 방문을 위해 양로원에 지원한 주최 측의 식비를 그들이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주최 측 당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를 위해 준비한 기금을 아이들에게 베풀어주세요. 우리는 얼마 살지 못합니다. 그저 살던 대로 살다가 죽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살아갈 우리 아이들은 우리와 달라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아이들을 위해 우리의 식비를 써주세요.” 그렇게 그들은 가난한 한 끼를 선택했고 그들이 양보한 돈은 유치원을 짓는 데 쓰였다. 그들은 가난하지 않았다. 그들의 식탁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몽골의 앞날을 비추는 듯했다. 그 빛만으로도 그들은 넉넉했다. 그 사진을 촬영한 후 나의 시선은 바뀌었다. 함부로 누군가의 가난을 훔쳐선 안 된다는 사실을 그 양로원의 노인들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가난한 모습을 소개하려던 생각을 거두었다. 그들의 당당함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고 싶었다. 그때 촬영한 사진 가운데 한 장으로 나는 ‘NGO의 유엔총회’라 불리는 인터액션총회에서 NGO의 활동을 효과적으로 도왔다는 명목으로 대상을 받았다. 내가 몽골의 가난한 양로원의 노인들에게서 배운 그분들의 고귀한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 공감을 일으킨 증거일 것이다. 정작 대상을 받아야 할 주인공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가난 속에 머물러 있지만, 그들의 가난은 그들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난 가난을 훔치진 않았지만 결국 본의 아니게 수혜자가 되었다. 2006년 5월 미국 워싱톤 디씨 INTERACTION 총회에서 EA부문 대상 수상 연설(InterAction Grand Prize acceptance speech) 중 연관된 부분에 대한 발췌이다. This photograph is simply of an old man filling his stomach, but there is something warm and majestic about this image. There is a reason they have but a single bowl as a meal. The people of the nursing home have cut their own meal budget. They felt that the money should be used, not for the elderly of Mongolia, but for the children, for the future of Mongolia. Old age tires the body and mind and as appetites diminish, it is instinctual to seek softer and tastier food. However, they decided to lean on each other and persevere together. We came to lighten their hunger, but we ended receiving an invaluable gift from them. We learned that people who are helping need to discuss and learn how to effectively help from those who receive the help. 그들은 가난한 한 끼를 선택했고 그들이 양보한 돈은 유치원을 짓는 데 쓰였다. 그들은 가난하지 않았다. 그들의 식탁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몽골의 앞날을 비추는 듯했다. 그 빛만으로도 그들은 넉넉했다. 그 사진을 촬영한 후 나의 시선은 바뀌었다.
- 2015-12-18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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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만의 성공적 데뷔-7人7色] 마술사 데뷔 3년차 안재희(安在熺·75) 씨
- 빨간 재킷에 반짝거리는 마술 모자를 쓴 남성이 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꽃이 만개했다. 움푹 팬 주름도 여실히 드러나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눈 깜짝할 새 손수건을 커다란 스틱으로 바꿔내는 마술을 선보인다. 일흔이 넘은 3년차 새내기 마술사 안재희 씨다. 하루하루가 즐겁고 내일이 설렌다는 이 남자. 청과물 자영업자에서 본격 마술사가 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 데뷔하고 싶었던 때는? 마술사로 데뷔한 지는 3년 됐지만, 배운 것으로 치면 7년차다. 처음에는 생활 마술을 배워 데뷔해 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무대 마술을 배우니 점점 무대에 서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때부터 마술사로 데뷔하기를 꿈꿨다. 데뷔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 마술사는 연습과 노력이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연습이 마술사의 최고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연습을 했다. 아내가 자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다른 방에서 실컷 연습하다 졸리면 자곤 했다. 또한 새로운 것에 겁먹지 말고 도전해야 한다. 나와 같이 공연을 하는 마술사 중에는 어렸을 때 손가락이 잘려 몸이 불편한 사람도 있다. 불편한 몸도 도전에는 방해가 되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과감하게 도전해라. 데뷔하는 과정 중 가장 힘들었던 점 체력적인 것이다. 큰 공연도구들을 움직이거나 이동시킬 때 힘에 부친다. 또 야외 공연할 때 바람이 많이 불면 힘들다. 젊은 시절 복싱으로 체력을 단련했지만 세월은 속일 수 없는 것 같다. 데뷔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 콕 찍어서 무엇을 어디서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런데 공연을 양로원, 요양병원 같은 곳에서 하니 보람을 느꼈다. 이것에 가장 큰 보람을 느끼니 이것을 가장 먼저 하고 싶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데뷔하게 된 자신만의 강점 노력과 끈기다. 주위에서 노력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 마술을 잘하려면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해서 한 것뿐인데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복싱, 수영, 검도 등 운동을 해 와서 그런지 끈기 있게 한 가지 일에 매달리는 것이 몸에 뱄다. 이것이 내가 마술을 잘 할 수 있는 강점이다. 데뷔 전후 달라진 점 이전에 비해 생활의 활력이 생겼다. 청과물 자영업을 할 때만 해도 하루하루 버티는 삶이었다면 지금은 내일이 기대되고 설레는 삶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는 내일 있을 공연만 생각해도 잠이 안 올 정도다. 설레는 일을 찾아라. 새로운 삶이 보일 거다. ‘데뷔를 잘했구나’라고 생각했던 때 공연을 할 때마다 느낀다. 관객들이 내 마술을 보고 즐거워하면 나도 그 관객들을 보고 덩달아 흥이 오른다. 거기에 같이 공연을 하는 연예인들보다 내 마술을 보는 관객들의 호응이 더 클 때 그 기분은 정말 짜릿하다. ◇안재희 Profile 전직 청과물 자영업 경력 30년 나이 75세 데뷔 연차 마술사 데뷔 3년차 꿈 실력을 더 키워서 더 유명한 마술사가 되는 것. 그리고 지금의 행복함이 계속 이어지는 것.
- 2015-06-12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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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기자가 간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읽고 - 최재영 시니어기자
- 글 최재영 시니어기자 불로장생! 그동안 인류는 늙지 않고 오래 사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삶을 꿈꿔왔다. 그 꿈이 고령화 사회라는 현실로 우리 앞에 다가왔지만, 그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오히려 불안하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가보지 않은 미래를 예측하고 이를 참고해 바람직한 미래를 설계해왔다. 이것이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이며, 다가올 고령화 사회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바람직한 미래를 잘 개척한다면 고령화 사회는 축복이 될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고령화 사회는 개인과 사회에 저주가 될 수 있다. 인생 60시대와 인생 100세시대의 생활양식과 문화가 같을 수 없기에 라이프스타일의 전면적 변화가 예측된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 100세를 사는가’에 대한 의문과 관심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좋은 유전인자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 100세를 살 가능성이 가장 높다. 즉 100세인이 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유전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을 이제는 ‘백세까지 간다’고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최근 100세인들에 대한 연구조사에 따르면 스트레스를 덜 받으며, 스스로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방법을 갖는 것이 장수하는 데 가장 유리한 요소로 나타났다. 많은 노인들이 만성질환을 앓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살다가 점차 쇠약기로 접어드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실제 80세 전후로 사망하는 사람들을 보면 의사를 자주 찾아다니고, 여러 가지의 약을 복용하다가, 병원에 입원해 고생을 하다가 일생을 마치곤 한다. 그러나 100세를 사는 사람들은 평소에 특별한 병을 앓지 않고 건강한 일생을 산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온갖 고초와 변화를 겪으며 파국의 세월을 거친 우리 베이비붐 세대의 이야기다. 이 책이 우리 세대에게 주는 메시지는 ‘Let it be(렛 잇 비)’다. 제목 그대로 100번째 생일을 맞은 주인공이 난데없이 양로원 창문을 넘어 사라지는 사건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저자는 말년에 고작(?) 양로원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백세노인이 ‘세상을 향해 난 창문’을 넘어 탈주를 감행하면서 벌어진 각양각색의 이야기들을 유쾌하게 풀어낸다. 주인공은 사건 속에서 만난 이들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주고, 자신 역시 ‘여전히 난 살아 있다’는 것을 몸소 느낀다. 뚜렷한 이유 없이 양로원을 탈출해 목적지가 없는 여행을 시작하게 된 주인공 알란은 공교롭게 돈이 가득 든 가방을 차지하면서 범죄자들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전까지 알란의 인생은 불행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심지어 20대엔 생체실험을 당해 남성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열등한 유전자를 없애고 우성 유전자를 퍼트린다는 생각은 서구열강이 식민지 원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학살을 저지른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아픈 역사의 현장에서 알란이 보여주는 모습은 매우 의미 있다. 남자라면 누구나 가장 중요시하는 것을 잃고 말았다. 누가 봐도 불행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 과정에서 폭탄공장에서 일하게 된 것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여긴다. 그런 그의 삶의 자세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준다. 또한 역사적 인 물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알란의 아버지는 ‘생각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무슨 일인지 알면 정말 어이없어 놀랄 만한)에 온 몸을 바쳐 헌신하다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그런 남편을 잃고 힘든 삶을 이어나가다 결국 숨을 거둔 그의 어머니는 ‘난 어떻게 사느냐’고 묻는 아들에게 이러한 유언을 남겼다. “너희 아버지처럼 생각을 많이 하지 마라. 살다 보면 다 살아지는 거다.” 무척 많이 들어왔던 이야기 아닌가? 한편으로는 허허실실 여기저기 관여하면서 놀라운 업적을 달성한 알란이지만, 그는 정작 자신의 삶은 없었다고 말한다. 세계의 중심에는 알란이 있었지만 알란의중심에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만이 남았던 것이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알란은 정말 어머니의 유언처럼 살았다. 학교도 그만두었고, 자신이 재밌는 일(그는 잊을 만 하면 폭발물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나는 그저 폭탄이 너무 좋았을 뿐이야’라고 하면서)을 하면서 이리저리 사건과 시간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닌다. 절대 벌어질 일을 계획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이 되었다. 산전수전의 스케일도 만만치 않다. 알란은 잘 몰랐겠지만 (그가 이중간첩을 할 때 ‘쓰잘데기 없는 정보’를 날라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자신 주변의 시대상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음) 그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19, 20세기의 사건들에 대부분 관여하고 있었다. 책에서는 알란이 미국과 소련의 이중 스파이로 활약하던 중 미국CIA와 소련의 KGB 요원들이 목숨을 잃는 장면이 그려진다. 중간에서 그저 쓸데없는 정보를 전달해주었을 뿐인데, 알란은 불행한 일에곧잘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순간순간최선을 다하고 인생을 즐길 줄 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죽은 시인의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말한 ‘카르페디엠’을 떠올리게 한다. 늘 술과파티를 즐기는 알란의 모습은 ‘인생은 축제’라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에게는 치열하게만 보이는 삶을 단순하고 자유롭게 산 남자가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것을 해냈고, 큰 업적을 남기게 됐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다. 권력자와 석학이 차지하고 주도했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알란처럼 어떤 특정한 의도 없이 판도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거나 휘말렸던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알란은 돈 가방을 들고 도망(?)치던 도중 아르바이트생 베니를 만나게 된다. 그는 모르는 것이 거의 없는 얕은 잔 지식의 소유자다. 궁금한 것이 너무나도 많고 공부를 하면 또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등 다소 산만한 그의 지식욕은 폭발물에만 집중해서 살아온 알란과 매우 대조적이다. 알란의 아버지와 베니는 주인공의 생활방식을 극적으로 강조하는 동시에, 어떤 방식의 삶이 더 좋은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예를 들어 ‘많이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행복한가?’, ‘미래에 대해 계획을 세우는 것이 미래를 더 풍요롭게 해 주는가?’, ‘고민이나 문제가 닥쳤을 때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가?’ 등이다. 문득, 그동안의 삶이 죽을 만한 고비를 몇 번이고 넘긴, 몇 십 년 동안의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죽일 테면 빨리 죽여, 나 이미 백 살이야’라며 허를 찌르는 말투와 목숨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100세 할아버지는 ‘양로원=감옥’이나 마찬가지였을 터. ‘이제 그만 죽어야지’를 입에 달고 다니던 그가 삶의 연장전을 즐기기로 결심한 순간, 100세 노인 알란의 인생 여정은 ‘너무나 우연적인’ 요소가 많아 반발심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자! 우리의 인생은 당장 몇 분 후도 예측할 수 없지 않은가? 행복한 100세를 위하여!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우리가 ‘불행’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들을 만났을 때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에 대한 고찰을 하게 만든다. 사건사고가 난무하는 현 시대를 사는 나 역시도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도 우리가 살아 있는 게 얼마나 기적인지를 몇 번인가 깨달았다. 새삼스럽게도 ‘지하철 천장이 무너지지 않을까’, ‘열차가 탈선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현재 베이비붐 세대는 인류사적으로는 평균수명 100세를 사는 고령화 첫 세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산업화의 주역이다. 이들이 고령화사회를 맞이하며 창의적인 생애 설계로 지속 가능한 삶의 모델을 만들어 낸다면 한국사회는 큰 무리 없이 건강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감당할 수 없는 블랙홀에 빠지게 될 것이며, 한국 사회는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 가능성이 높다. 시니어 기자 최재영 최재영 시니어 기자의 성격은 불의를 못 보고 나서기를 좋아하며, 사색을 즐기는 편입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는 좋은 음악을 틀고, 사진과 동영상을 보며 환기를 시키고 하루의 일과들을 계획합니다. 통풍이 안 되는 주중동안 힘들었을 그리고 혹시나 물이 부족해 지쳐 있을 식물과 애견, 거북에게 먼저 물과 사료를 주고, 빛이나 통풍 처방이 필요한 아이들은 탄천 나들이를 하기 위해 쪼로록 내놓습니다. 주말 이틀을 지나고 난 월요일 아침엔 손길이 더욱 바빠지는 하루를 맞이하는 IT업에 종사하는 보안전문가입니다. 사람과 사람끼리 친해지듯이 아름답고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가고 싶고 어떻게 관리하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인지 등 부모로서 배워야 할 숙제가 남아 있고 환경·성격이 제각각이듯이 그도 맞추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 2014-11-18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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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실버타운 종합정보서 '실버타운 간 시어머니 양로원 간 친정엄마'
- 전국 모든 실버타운을 심층 분석한 실버타운 종합정보서가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골드북스는 고령화 사회로 노후 준비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현 시점에 발맞춰 ‘실버타운 간 시어머니 양로원 간 친정엄마’(이한세 지음)를 출간했다. 이 책은 100여명 이상의 입주민이 거주할 수 있는 전국의 실버타운 30곳을 직접 방문해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책으로, 각 실버타운의 홍보성 내용은 철저히 재제한 가장 객관적인 내용만을 담아냈다. 비용, 지리적 위치, 식사, 생활서비스, 의료·건강 서비스 등 다양한 기준을 통해 각 실버타운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소개한다. 아울러 인터넷을 통해 알기 어려운 실버타운 안에서의 생활까지 친절하게 설명한다. 호화 호텔을 연상시키는 고가의 도심형 고급 실버타운부터 저렴하면서도 자연과 더불어 편안하고 안락한 노후 생화을 누릴 수 있는 전원형 실버타운까지 다양한 실버타운을 다뤄 ‘실버타운은 소수의 경제적 상위계층만이 갈 수 있는 고급노인 시설’이라는 편견을 깨고 있다. 저자는 “마음에 드는 실버타운에 입주하려면 모든 실버타운의 조건과 입주할 사람의 성향을 꼼꼼하게 따져 봐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가까운 곳을 찾다가는 소위 말하는 양로원에 입주할 수도 있다”며 “일반인이 모든 실버타운을 전부 방문해 상담할 수는 없기에 이러한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1년에 걸쳐 모든 실버타운을 직접 방문해 객관적인 정보만을 실었다. 이 책을 통해 지혜로운 딸과 며느리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 2014-08-25 1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