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40년. 명창 김영임씨가 국악에 몸담은 세월이다. 20년 전부터는 효(孝)를 주제로 한 공연을 펼치며 관객들과 호흡하고 있다. 그동안 자그마치 100만여 관객이 그의 소리를 들으며 울고, 또 울었다. 어머니가 그리워서 울고, 덧없는 인생역정이 떠올라 울고, 자식들이 헤쳐가야 할 인생 험로가 근심스러워 운다. 관객 모두가 자식이자, 부모이기에 더욱 깊이 공감한다. 그렇게 한껏 눈물을 쏟아내면 용솟음치는 카타르시스와 그 뒤로 잔잔히 우러나오는 애뜻함이 있다. 그래서 김영임의 소리는 효를 전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한 예술인이 20년 가까이 한 주제로 콘서트를 했다면 이젠 눈 감고도 레퍼토리를 술술 외울 정도로 익숙해졌을 터.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위기를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경계하듯 김영임씨는 그날그날의 공연이 마지막인 것처럼 혼신의 힘을 쏟아놓는다.
“무대에 설 때마다 오시는 분들에게 감동이나 관객에게 좋은 소리를 들려드려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거든요. 젊을 때에는 부족해도 예쁘게 봐주셨지만, 세월이 가면 갈 수록 더 좋은 소리를 내야 하고 관록이 드러나야 하죠.”
오는 5월10일 수원실내체육관에서 열리는 ‘효 대공연-소리’에서 깊은 감동을 선사하게 될 그녀를 만났다.
-국악인으로 40년을 사셨다. 효 공연은 초연 이후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관객들의 흐름도 보일텐데요.
우리 소리라고 하면 연세가 많은 분만 본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우리 공연은 어린아이부터 100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이 관람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됐어요. 효 이야기를 담은 우리 소리와 연극이 함께 어우러진 공연이에요. 자식은 부모의 은혜를 알게 되고, 부모는 자식을 기르면서 헤쳐온 길을 돌아보게 되죠.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마음가짐도 남다를 것 같습니다.
수원시는 효의 고장이잖아요. 5월이면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는 달이고. 공연의 컨셉과 가장 잘 맞는 거죠. 우리가 항상 부모님에게 잘 해야겠지만, 늘상 마음 뿐인게 우리의 걱정이잖아요. 공연이 가정의 달인 5월에 열리는 만큼 여러분들에게 오랫동안 우리 소리를 지켜온 김영임의 진가를 보여주고 싶어요. 우리는 모두 살아가면서 딸이자 며느리, 어머니, 또는 아들, 사위, 아버지의 삶을 거쳐가게 되는데 공연을 통해 효에 대한 생각과 ‘김영임이란 사람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구나’하는 감동을 주고 싶어요.
-수많은 공연 중 유난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을 텐데요.
세종문화회관에서 일주일 동안 14회의 공연을 소화했던 적이 있어요. 하루에 2회씩 연달아 무대에 올랐으니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였거든요. 그렇게 마라톤 공연을 해도 다시 무대에 설 힘이 나는 이유는 제게 선물같은 감동을 안겨주는 관객들이 있기 때문이죠. 공연마다 제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광경이 한 장면씩은 꼭 있어요.
한번은 어머니를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은 채로 이불을 싸서 휠체어를 태워서 오시는 며느리나 딸이 있었어요. 경희대학교 명예의전당에서는 3일간 공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마지막날에는 비가 엄청나게 왔어요. 더욱이 그곳은 주차장에서 공연장을 오려면 언덕을 올라와야 해서 객석이 많이 빌 것이라고 예상했거든요. 그런데 수많은 자식들이 어머니를 들쳐업고 언덕을 오르는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옆에서는 며느리나 딸들이 우산을 받치고요. 그날도 객석 5천석을 가득 매웠어요. 그런 광경을 보면 제가 먼저 무대 뒤에서 감동을 받죠.
-해외 공연요청도 많이 다니시죠?
네. 1989년 뉴욕 카네기홀 공연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죠. 카네기홀은 모든 아티스트가 서고 싶어하는 꿈의 무대잖아요. 그곳의 3천석을 다 매웠는데, 레드카펫에 리무진에서 한복을 입고 내리는데 여왕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공연이 스케일이 크다보니 외국에서 개인적으로 섭외가 많이 들어와요. 지금은 LA,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준비하고 있어요. 영국 로얄 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한 적도 있는데, 전통의상을 입고 무대에 서니까 파란 눈의 단원들이 바이올린 활대를 흔들고 박수를 치며 환영을 해줬어요. 무채색 계열의 오케스트라 의상과 화려한 색감의 한복이 보여주는 대비는 소름끼치도록 멋있었어요.
-남편 이상해씨도 함께 무대에 오르고 계시는데, 파트너로서의 남편 이야기도 해주시죠.
콘서트 내용은 가족 이야기거든요. 사실 효 공연을 시작하게 된 것도 남편의 아이디어였어요. 남편이 연예인이다보니 관객들이 먼저 원하죠. 제 남편도 어르신들을 위해 무대에 서야겠다고 결심해 한 무대의 주인공이 됐어요. 처음엔 서먹하고 창피했지만 이제는 익숙하죠. 가끔은 나보다 이상해씨가 더 박수를 많이 받아요. 잊지 않고 공연장을 찾아주는 올드팬에게 항상 감사하죠.
최근에는 대중에게 그간 받은 사랑을 어떻게 돌려드려야 하나 하는 고민에 무료 공연을 하고 있어요. 형편 탓에 공연장에 올 수 없는 분들에게 직접 찾아가서 노래를 불러드리기도 해요. 제게 이런 일을 하도록 한 것도 남편이에요. ‘재능으로 솔선수범해야 한다’ ‘돈을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좋은 공연을 해드릴 수 있지 않느냐’하는 동기부여를 계속 주거든요. 저도 이제는 환갑인 만큼 앞으로는 재능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국악인의 길을 가게 된 강렬한 계기가 있을텐데요?
어릴 적부터 라디오를 들으면서 노래를 따라부르고 춤추는 걸 좋아했어요. 그때 좋아했던 가수가 은방울자매, 이미자 등이었죠. 집안에 국악을 즐겨듣는 사람이 없어서 민요는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러다 언니와 함께 여성국악극단의 공연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고 국악에 빠져들었죠. 하지만 부모님은 ‘쟤가 커서 뭐가 되려고…’하고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옛날엔 공부 웬만큼 해서 좋은 남편 만나서 결혼하는 걸 바람직하게 여기는게 어른들의 생각이었거든요.
오빠가 미국에 있었는데, 노래 못하게 미국으로 보내라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였어요. 결국은 큰언니가 수원으로 시집을 가면서 저를 데리고 갔는데, 어느 정도 나이가 되니까 시집 보내려고 문화센터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꽃꽂이도 가르쳐줬거든요. 그런데 그게 하나도 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예요. 노래만 눈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집에서 노래만은 안 되고, 무용을 가르치는 걸로 결론을 냈지만, 무용을 하면서 경기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때가 나이가 어떻게 되셨죠?
19세 때였죠. 제가 무용은 14세부터 했는데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면, 창부타령, 한강수타령 등의 노래가 나오는데 몸에서 소름이 끼치는 거예요. 그때 경기민요 명창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소리로 바꾸게 된 거예요.
노래를 하기까진 수원에 계시던 큰스님이 큰 역할을 하셨죠. 언니네 집에 붙들려가서 가위로 머리카락이 다 잘릴 지경이었는데, 마침 언니가 불교신자였어요. 큰 스님이 집에 오셨을 때 언니가 ‘동생을 어쩌면 좋겠느냐’고 하소연했더니 그 스님이 말하길 ‘동생은 보살님 마음대로 하는 동생이 아니다. 동생이 하고싶은 대로 놔둬야 한다’고 얘기해 준거죠. 그때 언니가 저를 놔준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제가 있게 됐죠.
-한때 가수로서, 연기자로서 활동할 기회도 많았는데 왜 굳이 국악을 고집해오셨나요?
실제 드라마를 했었고, 광고도 출연했어요. 한때에는 가요를 하라는 제의도 있었죠. ‘동백아가씨’를 작곡한 고(故) 백영호 선생님이 ‘제2의 이미자로 키워주겠다’는 제의를 해서 음반을 낸 적도 있지만, 결국 내가 갈 길은 ‘소리’였어요. 소리를 하면 온 몸에 전율이 오고, 잠을 자도 환청이 들리고, 24시간 노래로 시작해서 노래로 끝나는 일상이거든요. 그래서 요즘 문하생들을 보면 ‘너희는 왜 수업이 끝나고 책을 덮으면 거기서 끝나니?’란 말을 자주 해요. 화장실을 가든, 설거지를 하든, 차를 타고 어디를 가든 노래가 입에서 맴돌아도 노래가 될까말까 한데…. 이건 전공자에게 하는 얘기거든요. 아마추어라면 노래 한자락 배우고 나면 끝이지만, 이 노래로 인해 우리 국악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인재들은 달라야 하잖아요.
-김영임씨의 국악은 옛것이 아닌 현대적인 느낌을 연상케 한다는 생각이에요.
제가 가져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국악이라면 반드시 쪽지고 개량한복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무대에서만 완벽하게 보여주고, 찢어진 청바지 입는 것도 좋아해요.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 것도 좋아해요. 다만 노래방에 가는 건 싫어해요. 막힌 공간에서는 노래가 잘 안되거든요.
-개인적 취향의 문제군요.
네. 저는 국악도 과거와 현대를 넘나들 수 있는 양면성을 가져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노래할 수 있는 소양도 키워야 해요. 때로는 무대 분위기에 맞게 노래를 할 줄 알아야 하고 옷도 입을 줄 알아야 해요. 그게 똑같지가 않거든요. 제가 나이 60세여도 꼭 비녀를 찌르고 개량한복을 입을 필요는 없다고 봐요. 저는 청바지도 좋아하고, 래깅스도 입어요. 다만 무대에서는 쪽머리를 짓더라도 제 손으로 하는 법이 없어요. 40년간 사극만 한 전문적인 선생을 모셔와서 완벽하게 기름 발라서 머리를 하죠. 화장도 전문가에게 맡기고요. 그렇게 무대에 올라야 프로페셔널한 공연을 할 수 있죠.
-국악 발전을 위해 여러가지 일들이 선행돼야겠지만 스타도 많이 발굴돼야 한다는 것 같아요.
우선 어린 국악인을 키우는게 시급하단 생각이 들어서 찾아가는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어요. 돈과 관계없이 어린 학생에게 우리 소리를 들려주고 교육시키는 사업이거든요. 또 제가 올해 상반기부터 국악예고를 출강나가고 있어요. 자청해서 나가는 건데 대학교는 8년 정도 출강하다가, 어린이 저학년이 중요하단 생각이라 지금 국악예고도 나가고 있어요. 시흥에 있는 국악예술고등학교. 국립이라서 국립전통예술 고등학교예요. 후진양성을 위해 길을 많이 열어놓고 싶어요.
경기일보 박성훈 기자 pshoon@kyeonggi.com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막내아들 대학 시험 뜬 눈으로 지내던 밤들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큰 딸아이 결혼식 날 흘리던 눈물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 여보 그 눈물을 기억하오.
세월이 흘러감에 흰 머리가 늘어가네. 모두가 떠난다고 여보 내 손을 꼭 잡았소.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커다란 공연장이 기타 하나와 담담한 목소리에 숙연해졌다. 두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는 관객,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심사위원. 지난 해 M.net ‘슈퍼스타K 시즌5’(이하 슈스케5)의 한 참가자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부른 주인공은 김대성 스테파노(60)다. 슈스케5 출연 당시 시니어의 힘을 보여주고 싶다는 당찬 포부로 화제를 불러 모았다. 비록 ‘톱 10’에 들지는 못했지만, 그가 보여준 감동의 무대는 시니어의 힘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를 서울 종로에서 만났다. 이제는 오디션에 참가자가 아닌 아티스트로서 말이다. 기타 하나로 관객들을 사로잡던 방송에서의 모습은 여전했다. 한 회사의 행사장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기타와 목소리 하나로 관객들을 홀렸다. 사실 슈스케5 오디션 당시만 해도 이렇게 까지 화제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패기로 가득한 젊은 참가자들 사이에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더 이상 음악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도전했다.
그의 모습이 전파를 탄 후 많은 이들로부터 부름을 받았지만 슈스케5가 끝난 이후 약 두어달 정도 우울증에 시달렸다. 음악이 있어도 외롭고 쓸쓸한 시기였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현실에서의 무기력함이 그 원인이었다.
“아마 남성 갱년기와 같이 왔던 것 같아요. ‘노래를 얼만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음악이다. 이제는 우울증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는 그다.
“생각을 가다듬었어요. 돈에 연연하지 말기로. ‘모든 이들에게 힘을 주는 싱어송 라이터가 되자’라고 생각하고 활동을 시작하자 점점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몸이 재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끊임없는 공부로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고 한다. 슈스케5를 통해 부족하다고 느꼈던 발성과 기타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 요즘이다.
# 음악에 미쳤던 젊은 날
트로트 가수 출신의 어머니. 스테파노의 어머니도 그가 아티스트의 길을 걷기를 원했다. 스테파노가 중학생 시절 그의 어머니는 기타 강사를 데려와 기타를 가르칠 정도로 그가 음악가가 되기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는 정말 그렇게 음악을 가르치는 어머니들이 흔치 않았는데 어머니도 정말 대단하시죠. 지금은 그런 어머니가 정말 감사합니다.”
중학교는 기타와 함께 고등학교는 밴드에서 그리고 심지어 군대는 군악대에서 음악을 했다. 그는 그 시절의 자신에 대해 “음악에 미쳤던 고삐 풀린 망아지였다”고 표현했다.
그가 입이 닳도록 말하며 하고 싶어 하는 ‘힘이 되는 음악, 힐링이 되는 음악’은 젊은 시절 길거리 버스킹(길거리공연)을 하면서 느낀 보람 때문이었다. 1984년부터 1999년까지 15년 동안 종로와 영등포 등지를 다니며 길거리 공연을 했다. 공연을 통해 백혈병 어린이 돕기, 농아인 보청기 달아주기 운동을 하는 등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음악을 지향해왔다. 그는 음악의 매력을 치유라고 얘기한다.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는 것과 지친 마음을 치유하는 것. 그것이 음악의 매력이죠. 저도 아침에 일어나서 노래 연습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니까요. 듣는 사람도 똑같겠죠. 그래서 힐링이 되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 김광석의 선물
김대성 스테파노가 슈스케5에 도전하게 된 계기는 한 젊은 가수 때문이었다. 그가 도전의 불씨에 부채질을 한 가수는 바로 ‘슈퍼스타K 시즌 4’의 우승자 로이킴(22)이다. 포크 음악으로 음악프로그램을 석권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 한 구석에서 남아있던 젊은 날이 꿈이 꿈틀거렸다고 한다.
막상 오디션 신청을 하고 오디션 장소에 다가서자 불안함이 엄습했다. ‘스펙 좋은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백발이 성성한 내가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내 그런 불안함은 사라졌다. 노래를 부르기 위해 입을 떼자 긴장감이 풀리기 시작했다.
“젊고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 사이에 나이 많은 사람은 저 뿐이더라고요. 그냥 돌아가려던 찰나에 제 차례가 와서 담담하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1차 통과하고 2차와 3차에서 피디와 작가들 그리고 관객들이 우는 모습을 보고 ‘나만의 스토리가 통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심사위원 이하늘과 관객들을 울렸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는 사실 오디션 과정에서 비중을 크게 둔 노래는 아니었다. 2차 오디션이 끝나고 3차 무대 오디션 직전, 3차에서 부를 노래를 선정하기 위해 피디들과 작가들 앞에 섰다. 총 다섯 곡의 노래를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이 때 피디와 작가들이 숨죽인 때가 있었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부를 때였다. 스테파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외에 5곡 정도를 준비했어요. 그 곡들 중에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부르는데 피디와 작가들이 눈물을 보이더라고요. 그 때 ‘3차 오디션에서 이 곡을 불러야겠구나’라고 결심했습니다.”
당시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곡이 이제는 그의 이야기를 만들어 준 대표곡이 됐다. 이제는 아침 노래 연습을 할 때 이 노래를 부르며 회상에 잠긴다는 그. 어찌 보면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는 김광석이 그에게 주는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 예순, 그 전성기의 시작점에서
젊은 시절 딥퍼플(Deep Purple)과 레드제플린(Led Zeppelin)과 같은 헤비메탈 락에 빠져있었던 스테파노. 그를 포크의 세계로 빠지게 한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였다. (사별한 아내와의 이야기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남녀로맨스’ 카테고리에서 소개될 예정이다)
딥퍼플과 레드제플린에 미쳤었던 청년은 밥 말리, 레오나르드 코헨, 로이킴에 빠져있는 중년으로 변했다. 자유로운 현재의 삶이 지난 30년간의 회사 생활보다 훨씬 좋다는 그다. 아침이면 노래연습을 하고, 기타를 들고 작곡을 하는 그의 모습은 이제 영락없는 아티스트다. 한 달에 1곡정도 온라인에 선보일 예정이라는 스테파노는 지금부터 전성기가 시작됐다고 했다. 젊은이들에게 음악에서 나이 개념을 없애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덧붙이면서.
예순의 나이에 가수에 도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도전을 통해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용기를 낸 도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회사에서 퇴직한 후 용기를 냈어요. 음악에 다시 도전하기로. 그리고 꿈을 높게 잡았어요. 젊은 친구들에게 주눅 들지 말자. 그리고 도전하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삶의 새로운 원동력이 생기더라고요. 이제부터가 제 전성기입니다. 음악이 하고 싶은데 경제적인 여건이 어려운 친구들을 위한 센터를 짓는다는 제 목표가 이뤄질 때 까지 전진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취미 삼아 찍은 건데 틈 날 때 한 번 보세요.”
박병원 전국은행연합회 회장이 지난해 6월 기자에게 취미 삼아 촬영한 야생화 사진이 담긴 USB(이동식 저장장치)를 건네며 한 말이다.
반신반의하며 UBS를 열어 본 기자는 5000여 장의 사진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 회장이 우표, LP판, 그림, 꽃, 와인 등을 수집하거나 그 분야에 대한 조예가 상당한 수준이라는 입소문을 들었지만 야생화 사진은 이미 취미 수준을 넘어 전문가 경지에 있었다.
박 회장은 다음달 12~ 25일 갤러리 나우(종로 인사동길 39번지 성지빌딩)에서 ‘꽃이 사랑이다’를 주제로 전시회를 열고 그만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회는 북한 어린이에게 풍진 백신을 보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라 의미가 깊다.
전시 사진은 총 59점으로 박 회장이 강원도 곰배령에서 제주 한라산까지 전국을 돌며 찍은 수십만 컷의 꽃 사진 중 엄선한 작품들이다.
박 회장은 꽃사진을 찍게 된 계기를 “어릴 때부터 꽃과 나무를 좋아해 스스로의 기억을 보관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왔다”고 설명한다.
앞서 그는 지난 2009년 미국 스탠퍼드대학에 머무를 때 여행을 통해 촬영한 사진들은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꽃들’이라며 지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2011년 미국 서부지역에서 촬영한 야생화를 중심으로 첫 번째 전시회를 여는 계기가 됐다.
당시 박 회장이 유진룡 문화부 장관(당시 을지대 부총장)을 만나면서 취미생활이 전시회으로 격상됐다. 유 장관은 “사단법인 봄, 독일 카리타스재단과 함께 북한 어린이들에게 B형 간염백신을 접종할 비용을 조달하는 데 사진을 좀 써도 좋겠냐”고 제의했고, 박 회장이 흔쾌히 수락하면서 전시회로 발전된 것.
박 회장은 “이번 전시회를 통해 북한 어린이들이 전염병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1978년 8월 6일 귀여운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가의 친할머니는 아가를 위해 한땀한땀 정성들여 배냇저고리를 만들었다. 아가의 아버지는 감격스러웠다. 내 분신이 생겼다는 신기함이 그런 기분을 들게 만들기도 했지만, 몸도 성치 않은 어머니가 직접 만든 배냇저고리를 입고 있는 아들의 모습에 가슴 한 구석이 뜨거워졌다. 사내아이의 아버지 정종현(63)씨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몸이 불편하신데도 손자의 배냇저고리를 직접 만들고 계신 어머니께 죄송스럽고 감사했어요. 당시에는 시어머니에게 선물을 받는 일이 흔치 않았는데, 아내가 배냇저고리를 받고 감동 받은 표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때 저도 ‘이 배냇저고리를 대대로 물려 줘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정씨는 배냇저고리를 둘째 아들 왕순(35)씨에게도 물려 입혔다. 정씨는 이 배냇저고리를 가족 행운의 상징이자 부적으로 여긴다. “배냇저고리를 형제가 물려 입으면 우애가 좋다고 알려졌어요. 또 이것을 자식에게 물려주면 부모한테 효도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죠. 대학 수능시험을 볼 때 품에 안으면 좋은 대학에 합격한다는 말도 있어 지금까지 보관해왔습니다”라는 정씨에 말에는 뿌듯함이 묻어있었다.
1980년에 왕순 씨가 태어나고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다. 배냇저고리를 입던 그 갓난아이는 그 사이 동네를 주름잡는 골목대장을 거쳐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됐다. 왕순 씨의 첫째아들 효준(7)군은 배냇저고리를 입는 세 번째 주인공이다. 왕순 씨는 효준 군이 태어나자 신기함에 안고 또 안아 봤다.
“효준이가 태어났을 때 정말 감격스러워서 만져보고 또 만져봤어요. 내 새끼가 태어났다는 신비스러움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아내가 임신 중 일 때 뱃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 배냇저고리를 만든 것도 있었어요. 그래서 할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배냇저고리와 아내가 만든 배냇저고리를 번갈아 입혔습니다.”
왕순 씨의 둘째 아들 시우(5)군에게도 여지없이 증조할머니 정신의 소산이 입혀졌다. 부적 같은 배냇저고리의 정종현씨 3대에 힘이 닿은 덕분인지 이들은 남다른 가족애를 자랑하고 있다. 정씨가 매일 손자들을 유치원과 어린이 집에 출ㆍ퇴원 시켜줄 정도다.
“손자는 나의 분신이에요.”
정씨는 손자가 어떤 의미인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얘기했다. 그는 손자들이 올바른 인성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길 원한다. 그래서 집안의 대소사인 제사나 생일은 빼놓지 않고 손자들을 동행시킨다고 했다.
“어른을 공경하고,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아는 것. 이것이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기초적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효준이와 시우가 그런 사람으로 커줬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할아버지로서 전통 방식과 구학(舊學)을 가르치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배냇저고리는 정씨 3대의 행복의 상징이다. 정씨는 대대손손 물려 입히기 위해 배냇저고리를 주기적으로 빨래해서 보관했다고 했다. “언젠가 손자들도 저 배냇저고리를 당당히 자식들에게 물려 줄 날이 오겠죠”. 정씨는 지금의 이 행복이 후대까지 이어지길 소망하고 있다.
아버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시대에 ‘친구 같은 아버지’가 바람직한 아버지상으로 회자되곤 한다. 놀아주는 것은 초등학교나 길게 잡아 중학교까지인데 아버지가 놀아주고 안 놀아주고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자녀교육을 위해 수많은 동서고금의 사례를 접하면서 아버지와 잘 놀아서 성공했다는 사람은 별로 만나보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마음일 거다. 아버지가 사랑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고 자녀들이 생각한다면 그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 아버지상이지만 조지훈(본명 동탁, 1920~1968) 시인의 사례는 지금도 아버지 역할을 하는 데 교훈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조지훈은 3남1녀를 두었는데 자녀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길을 밝혀준 멘토로 ‘아버지’를 꼽았다. “진정 어린 살가운 추억과 통속적 재미, 재산은 남겨 주시진 못하셨지만 그 대신 고상한 정신을 듬뿍 선물로 주신 아버지, 글과 말과 행동의 삼위일체로 ‘혼이 깃든 가르침’을 주신 아버지, 당신은 우리들의 거울이란 걸 늘 염두에 두고 사셨던 아버지….”
장남 조광렬의 말처럼 아버지 조지훈은 자녀들이 늘 자신의 얼굴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존재였다. 조광렬은 건축가로 활동하다 60살에 이르러 그가 결코 가지 않겠다던 ‘문인’의 길에 들어서 미국에 거주하며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다. 외교부 차관으로 재직 중인 차남 조태열도 외교관의 길을 가는데 언제나 등대와 같은 존재가 되어 주었다고 한다.
조지훈은 요즘 말하는 ‘친구 같은 아빠’는 결코 아니었다. “자녀들에게 어린이 날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날 작은 선물을 주신 적도 없다.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간 적도 없고 캠핑조차 가 본 적이 없다. 졸업식에 와서 한 번도 축하해 주신 적도 없다. ‘이제 너도 세상에 나가야 하니 이 돈으로 양복이나 한 벌 해 입어라’ 하시며 선뜻 돈을 건네 주신 적도 없다”고 장남 조광렬은 ‘나의 아버지 조지훈’이란 책에서 말한다.
그러나 조지훈은 자녀들에게 강렬한 모습을 각인시켜 주었다. 집에 돌아오면 늘 한복을 입고 단정한 모습으로 서재에 앉아 책을 읽었다. 자녀들은 한결같이 아버지의 이 모습을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이게 어쩌면 가장 위대한 유산이 아닐까.
멘토는 물질적인 부를 물려주는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인 양식을 들려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아버지가 자녀의 멘토가 되려면 조지훈처럼 잔소리보다 집에서 책 읽는 모습만큼은 보여주어야 한다. 또 자신의 ‘글’을 남긴다면 자녀들은 ‘아버지의 글’을 등대 삼아 인생의 길을 열어 나갈 것이다. 거창하게 책이 아니더라도 매일 일기를 쓰거나 다이어리에 메모라도 남긴다면 그 또한 훗날 자녀에게 훌륭한 양식이 될 수 있을 게다. 자신의 삶과 가족 사랑이 담긴 ‘아버지의 글’은 정신적 양식이 되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등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