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에 빨간 글자로 적힌 쉬는 날들이 많으면 사람들이 모두 좋아합니다. 놀 수 있으니까요. 자칫 질식할 것 같았는데 ‘숨통이 트인다’는 사람도 있으니 그 좋음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저는 가끔 정말 누구나 그렇게 좋아할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사사로운 것이긴 합니다만 저는 젊었을 때부터 명절을 포함한 쉬는 날이 두려웠습니다. 현실적으로 잘 감당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돈도, 시간도,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의 긴장도 그랬습니다. 게다가 후유증마저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쳇바퀴 돌듯하는 일상이 오히려 편했습니다.
다시 5월입니다. 5월에는 ‘날’이 많습니다. 모두가 반드시 쉬는 날은 아니어도 마음 쓰게 하는 날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한번 제가 아는 대로 짚어보겠습니다. 1일은 근로자의 날입니다. 음력 4월 8일인 3일은 석가탄신일이고, 5일은 어린이날입니다. 8일은 어버이날, 14일은 입양의 날입니다. 15일은 스승의 날인데 그날이 5월 셋째 월요일이어서 성년의 날과 겹칩니다. 18일은 민주화운동의 날, 다음 날인 19일은 발명의 날, 20일은 세계인의 날, 21일은 부부의 날, 25일은 방재의 날이면서 실종아동의 날이기도 합니다. 30일은 음력 5월 5일이니까 단오절이고, 31일은 바다의 날이자 금연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올해에만 끼어든, 그런데 어느 날보다 중요한 날이 있습니다. 9일인 대통령 선거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유권자의 날인 10일을 앞에서 빠트렸군요.
살면서 자칫 놓치거나 잊기 쉬운 귀한 가치를 ‘날로 정해’ 새삼 간직하려는 노력은 어색한 표현이지만 ‘기특한 문화’라고 일컫고 싶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사람답기를 기하는 모습이 참 대견스럽습니다. 새삼 사람다움의 긍지를 확인하게 해주니까요.
그런데 그렇다 할지라도 5월은 날이 너무 많습니다. 예부터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過猶不及] 했는데 이 또한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한 지혜라 생각하면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 5월은 그 말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5월의 날들은 대체로 봄의 상징성과 이어져 있습니다. 겨울에 수박을 먹으면서도 계절의 흐름을 못내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단순화해보면 ‘어린이로부터 어른에 이르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이 다 날로 정해져 있는 것이 5월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그 여러 날들을 하나하나 떼어 지내기보다 이를 한 다발로 묶어 ‘5월을 한번 5월답게’ 보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연세 지긋한 분들이 이 달을 어떻게 지내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우리는 모두 어른인데 참으로 어른일까?’ 하는 물음을 묻는 달, 그러니까 5월을 ‘어른임을 반추하는 달’로 삼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까닭인즉 분명합니다. 어른이 젊은이보다 많아진 이른바 고령사회가 되었는데도 ‘나이 많은 어른’은 넘쳐도 ‘나이 든’ 어른들은 그리 많지 않아 우리의 가정이, 사회가, 국가가 온통 유치한 모습만을 부끄러움도 없이 다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제가 공부하는 종교학에서는 종교문화의 특징을 기술하면서 이른바 성년식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줄여 말하면 종교란 모름지기 ‘어른 만들기의 문화’라고 해도 좋을 거라고 할 만큼의 비중을 가집니다.
문제는 이른바 ‘어른다움’이란 어떻게 기술될 수 있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교 전통의례인 관례(冠禮)나 계례(笄禮)를 들어 설명해도 좋겠습니다만 두루 성년의례의 보편적인 특성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서술해보겠습니다.
우선 어른은 자기의 정체성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 여러 문화권에서는 그 공동체의 전래 신화를 읊곤 합니다. 어리지 않다는 것은 내가 누군지, 내가 왜 사는지, 내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를 자신 있게 천명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이름과 직업과 누구의 자식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한참 모자랍니다.
다음으로 어른이란 삶이 물 흐르듯 그렇게 졸졸거리는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을 뜻합니다. 곤경, 좌절, 절망 등의 구비들을 한없이 거쳐야 하는 그런 것이 삶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직 어른의 삶의 태도는 아닙니다. 그 모든 부정적인 삶의 정황과 당당하게 직면하면서 마침내 ‘고통에 의미 있다’고 선언할 수 있어야 그가 비로소 유치하지 않은 어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른은 생명의 어버이가 된다는 것과 대체로 함께합니다. 생명을 낳는 존재가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생명의 신비에 대해 언제나 외경의 염(念)을 지니고 사는 사람,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 그가 곧 어른입니다.
만약 어른 됨의 이러한 서술에 우리가 동의할 수 있다면 5월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어린이날이면, 아이들을 즐겁게 하고 좋은 선물을 사주는 것도 좋지만, 아이들을 내가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 ‘어른이 되도록’ 키우고 있는지 아니면 ‘어린이로 머물게’ 키우고 있지는 않은지를 되살펴야 합니다. 스승의 날이면 내가 어떤 스승의 모습으로 학생들에게 어떤 가치를 가르치면서 그들을 어른으로 키우고 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스스로 설 수 있는 어떤 기회도 주지 않으면서 순응만을 강요하지는 않는지, 나 자신의 어른 모습을 단단히 해체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부의 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따로 함께’ 살고 있는지, 아니면 ‘함께의 구실’로 상대방을 자신의 영토 안에 철저하게 예속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의 어른 됨을 분석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그런 자식들로 이루어진 가정은 희망이 없습니다. 편하게, 쉬운 일만 찾아 살다 조금만 어려워도 주저앉고, 그러다 나이를 먹어 아비 어미가 되긴 하지만 아이가 아이를 낳은 ‘아이의 연쇄’만이 이어질 것이 빤한데, 그 가정이 제대로 된 가정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유치함의 지속일 뿐입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없는 시민들로만 우리의 공동체가 이루어질 때, 그 모습이 어떠할지도 그대로 보입니다. 공직에 들어서면 그것을 곧 내 사적 공간의 확장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유치하고 철딱서니 없는 공인들을 보면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공직 아닌 자리가 삶의 자리에서 있기나 한 것인지요. 나이 먹어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래서 어른이 되어 산다는 것은,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해 내 삶의 사적 영역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이를 모르는, 아예 알고 싶지도 않은, 그런 물음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어른들이 이른바 온갖 ‘책임 있는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을 때, 그 공동체의 내일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예견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진정한 문제가 아닐는지요.
5월에는 새삼 ‘어른 부재의 문화’에 대한 감각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네처럼 나이 들 만큼 든 사람들이 조용히 내 안에서부터 이런 감각을 싹트게 하여 내가 있는 자리에서부터 새로운 5월의 색깔이 채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칠인들 어떻습니까?
너무 구태의연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만 5월. 참 싱그러운 달입니다. 날에 맞추어, 누구나 즐겁고 환하게 행복하게, 그리고 유치하지 않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렇게 노력하겠습니다.
인생 후반전에서 만나는 취미활동은 이전의 취미들과는 그 무게감이 다르다. 그저 시간을 때우거나 유희를 통한 만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몸담았던 직장에서 은퇴한 공백을 대신하기 때문. 그래서 상당수의 시니어들은 은퇴 후 갖게 된 취미를 ‘제2직업’처럼 소중히 여긴다. 또 자신과 궁합이 아주 잘 맞는 취미를 찾아낸 은퇴자들은 종종 취미를 ‘두 번째 인생의 반려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동안 가 만난 시니어들은 어떤 취미로 인생의 반전을 이끌었을까?
“옻칠 공방으로 창업해요” 이수매(李秀梅·63)씨
이수매씨가 옻칠과 인연을 맺은 것은 남부기술교육원의 옻칠나전학과를 통해서다. 옛 문화재를 보며 전통공예의 매력에 빠졌다는 이씨는 규방공예를 거쳐 옻칠까지 배우게 됐다. 미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덕에 배우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는 이수매씨는 “외국인들이 사고 싶은 물건을 만들어 한국의 전통공예를 외국에 널리 알리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또 그녀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은 물론 힘들고 어렵지만, 그간 우리가 겪었던 희로애락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직 무언가 배울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고 적극적으로 시도해보면 좋겠어요”라고 당부했다.
“그림으로 외롭게 사는 방법 배웠죠” 윤성호(尹性浩·65)씨
그가 송파의 한 화실의 문을 두드린 것은 2012년. 환갑의 나이에 붓이라곤 평생 제대로 잡아본 적 없었다. 하지만 열정은 욕심을 만들어냈고, 욕심은 많은 연습량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배운 것은 인생이었다.
“그림에 쏟는 시간이 늘면서 성격이 많이 차분해졌어요. 이제 이 나이쯤 되면 외롭게 사는 방법, 슬기롭게 외로울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할 텐데, 전 그 방법이 그림인 셈이죠.”
4년간 화실을 열심히 다니다 보니, 작품 수도 늘고 전시회 참여도 많아졌다. 한국전업미술가협회 회원 가입에 도전해 정식 작가도 됐다.
“붓을 잡고 세 번째 인생 살아요” 하효순(河孝順·67)씨
하효순씨의 그림 사랑은 수집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남편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뉴욕의 갤러리에서 종일 멍하니 그림만 보기를 반복하던 그녀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도통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선물받은 컬러링북에 색칠을 반복하다 직접 그려보겠다는 용기를 갖고 근처 화실을 찾게 됐다고. 그림을 그리면서 겪은 변화를 그녀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지금은 다르게 보여요. 이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꽃잎이 어떻게 나고 지는지. 세상이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유심히 관찰할 수 있게 됐죠.”
“취미로 유년 시절의 꿈 이뤘죠” 윤민용(尹民鎔·80)씨
그가 자랐던 고향 죽산에는 유난히 다양한 모양을 한 돌이 많았다. 유년 시절 어린 마음에 이를 알아내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은퇴 후 고향으로 내려와서야 그 꿈을 이루게 됐다. 안성시에서 문화관광해설사제도를 시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본격적인 교육을 통해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게 된 것. 물론 공부는
쉽지 않았다.
그의 해설은 이제 칠장사(七長寺)에 전해 내려오는 박문수(朴文秀)의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 이야기와 함께 명물이 되었다.
“수영은 이제 삶의 일부죠” 서은희(徐銀姬·58)씨
그녀의 수영 경력은 올해로 25년. 과장해서 표현하면 사반세기다. 결혼 후 생활이 안정적으로 접어들 무렵 동네 체육센터가 문을 열었고 그때부터 수영을 시작해 아직도 쉬지 않고 물살을 가르고 있다. 오랜 기간 수영을 해온 덕에 건강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다. “같은 수영교실의 선배들을 보면 삶의 활력이 느껴져요. 당연히 모두 건강하고요. 회원들과 함께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을 땐 몰랐던 건강과 체력의 소중함을 알게 됐고, 수영이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깨닫게 됐어요.”
“취미 덕분에 교우의 폭 넓어졌죠” 김호영(金好榮·72)씨
평생 교직에서 아이들을 위해 살아온 김호영씨. 그는 교직에서 은퇴하기 직전 심장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두 차례나 받아야 했다. 갑작스런 건강의 이상 증세와 은퇴는 그를 바로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렸다고.
“뭐라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취미를 찾다 어릴 적부터 관심 있었던 기타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문화센터에 교육과정이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시작했습니다.”
과거 학교에서 불타올랐던 교직생활처럼 그의 열정은 다시 불타올랐고, 지금은 문화센터 기타반 반장까지 맡게 됐다. 그가 꼽는 취미로서의 연주가 갖는 최고의 미덕은 봉사활동이다.
“치매센터나 어린이집 같은 곳에서 연주를 통해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인생의 또 다른 보람을 찾게 됐어요.”
“평발 이겨내고 마라톤에 중독됐죠” 김학윤(金學倫·58) 원장
42.195km의 마라톤 완주만 어림잡아 90회 이상. 수영 3.8km, 사이클 180km, 마라톤 풀코스를 하루에 뛰는 철인3종경기 아이언맨 코스는 네 번이나 달렸다. 정형외과 전문의인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한 선배 덕분이다.
“어느 날 의사 등산모임에서 훨씬 나이 많은 선배에게 뒤처지는 거예요. 비결을 물었더니 마라톤이라더군요. 그래서 바로 시작했죠.”
평발인 그에게 고통은 따라다녔지만, 조금씩 참고 극복하는 법을 익혔다. 그러다 마라톤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고, 그의 관심은 마라톤에서 수영, 자전거로 옮겨가며 ‘아이언맨’이 되었다.
요즘 젊은 세대가 가장 관심을 갖는 아이템인 피규어. 그런데 시니어 대부분은 잘 모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그런 선입견을 비웃듯, 기자가 3000여 점의 피규어가 전시된 마니아들의 성지 피규어뮤지엄W를 방문하게 된 것은 한 시니어 독자의 제보 덕분이었다. 그만큼 시니어들의 감식안이 일반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젊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피규어뮤지엄W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피규어와 그리고 피규어에 친숙한 아이들과 함께하며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김동원(金東元·54) 피규어뮤지엄W 관장을 만나 피규어 가치에 대해 그리고 캐릭터 문화에 대한 식견을 물어봤다.
몸은 중년, 마음은 초등학생. 어릴 적 좋아했던 캐릭터 피규어를 모으며 동심에 빠져 사는 오타쿠적 기질의 아재들이 늘고 있다. 구매한 피규어를 개봉하지 않고 박스째로 나란히 차곡차곡 쌓아둘 정도로 피규어를 모으고 즐기는 이들은 자신이 자신에게 선물을 하듯 살뜰히 챙긴다.
“평소 그다지 대화가 없던 부자가 함께 와 캐릭터를 매개로 ‘말문’이 터지는 경우도 있고, 손주 손잡고 온 시니어가 오히려 키덜트족이 돼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피규어를 좀 안다는 분들이 이곳 뮤지엄에 와서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며 저마다 탄성을 터뜨리죠.”
피규어 소장의 즐거움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라고 여기는 김동원 피규어뮤지엄W 관장은 지난 10월 마니아들의 감성을 채워주는 일에 합류했다.
그에게 피규어 마니아들 사이에 부의 상징인 레어 아이템, 즉 희소성 있는 피규어가 있냐고 짓궂게 물었다.
“어지간한 피규어는 다 구경해봤는데 여기 뮤지엄에 와서는 제가 아는 피규어는 빙산의 일각이었어요. 사실 피규어 가격은 크기에 따라, 희소성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건담 시리즈를 진열했더니 사무실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지더라고요. 간혹 사람들이 놀러 와서 호기심을 보이기도 해요. 장난감 하나만으로 사무실 공간이 위트 있고 재미있게 변한 것 같아 좋아요.”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피규어뮤지엄W는 피규어와 토이를 통한 테마파크를 지향하며 만들어진 새로운 개념의 공간이다. 전시공간은 6층의 총 6개 테마로 구분되어 있으며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놀이공간, 카페가 있는 그랜드홀, 직접 피규어를 구입할 수 있는 마니아 숍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장품은 프라모델, 히어로 액션 피규어, 자동차 다이캐스트 등 3000여 점에 달하는 막대한 숫자를 자랑한다. 영화 촬영에 실제 쓰인 자동차 모형, 에 출연한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실제로 입었던 가죽 의상, 리샤오룽 타계 40주년 기념 특별 피규어 등 진귀한 수집품으로 가득하다. ‘감정가 2억원을 호가하는 건담 모형’, ‘순금으로 만들어진 나이트 오브 골드’까지 눈이 호사를 누리는 동안 누군가에게는 아련한 추억, 누군가에게는 보물창고, 누군가에는 꿈과 희망이 되는 곳이다.
피규어뮤지엄W는 예상치 못했던 그 시작처럼 기존 뮤지엄과는 다른 발상과 사고로 사업을 전개할 계획을 갖고 있다. 대중문화적 취향을 가진 영화감독 김동원 감독을 관장으로 기용한 것도 그러한 계획의 일환이다. 김동원 관장은 , , 등의 영화들을 감독한 바 있다.
피규어를 처음 접했을 때 받은 충격
“주변에서는 의아스럽다는 반응이죠. 그런데 사실 저는 방향을 튼 게 아니라 감독으로서 또 하나의 파트너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피규어의 상당수가 미국의 마블, DC코믹스에서 나오는 히어로를 소재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런 피규어들은 전 세계의 마니아들을 대상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감독으로서 김동원 관장이 피규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한국 영화계의 현실과 관련이 있다.
“현재 한국 영화는 수익을 관객으로만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캐릭터 산업을 병행해 나 처럼 관객 동원에 캐릭터 판매가 플러스돼서 거기서 창출할 수 있는 수익이 있다면 영화 산업의 규모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시리즈는 영화 관객을 통한 수익보다 몇백 배 더 많은 저작권 수익을 가져가고 있고 거기서 또 다른 고부가가치들이 창출되는 상황입니다.”
김 관장은 처음 피규어를 접했을 때 개인적으로 굉장히 부러운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도 영화 속 캐릭터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과 기꺼이 돈을 지불하면서 그 피규어를 보며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언맨이 피규어 시리즈로 나오고, 각 피규어들이 노멀 버전, 파이팅 버전 등등으로 다양하게 만들어지는 걸 보면서 우리나라도 이런 걸 갖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 은 1930년대부터 시작됐는데 캐스팅이 바뀌어가면서 영원히 존재하잖아요? 이제 우리도 그런 한국적 캐릭터가 있어야겠다 싶었습니다.”
감독과 관장 그리고 나
김 관장은 피규어뮤지엄W이 문화예술계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색다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놀이와 문화를 함께 담은 박물관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피규어뮤지엄W는 피규어를 테마로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도록 하여 즐거움을 줌으로써 박물관의 개념을 확대시켰다고 봅니다. 문화예술을 종합적으로 보 여주는 박물관인 만큼 전시, 교육뿐만 아니라 캐릭터 발굴과 개발을 넘어 그래픽 노블, 영화 등 콘텐츠를 생산하는 주체로서 새로운 문화를 이끌고 다양한 시도를 할 것입니다.”
그는 감독으로서의 역할과 뮤지엄 관장으로서의 역할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결국 피규어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재현입니다. 기억 속에 있는 걸 다시 만들고 추억 속에 있는 걸 끄집어내는 작업이죠. 저로선 영화감독의 길을 가면서 피규어라는 좋은 재료를 영화에 접목시켜 하나의 콘텐츠로 발전시킬 수 있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피규어가 결합된 한국의 마블 스튜디오를 꿈꾼다
영화와 캐릭터 산업을 보다 밀접하게 연결시켜 확장시키고 싶다는 그의 생각은 한류 관련 콘텐츠 사업의 차원으로까지 넘나들고 있다.
“일부에서는 피규어를 단순히 아이들 장난감, 키덜트만으로 생각하는데 그보다 더 큰 하나의 콘텐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와 예능과 애니메이션을 아울러서 기존의 한류 문화처럼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만들어내는 거죠. 이제는 예능도 처럼 미국에 수출하게 됐습니다. 그런 걸 보면 우리가 어린 시절에 봤던 , , 등도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이미 피규어뮤지엄W에서 과거 심형래 주연의 인기 시리즈물이었던 영화 의 판권을 구매했다는 소식도 있다. 그런데 과거 우리가 가졌던 캐릭터를 현대에 더 발전시켜 만들자는 생각은 왜 아직까지 구체화되지 못했던 걸까?
“한국적 캐릭터가 미약해요. 미국은 오래전부터 슈퍼맨, 배트맨 등의 캐릭터를 만들었고 TV가 활성화되자 TV드라마 시리즈로 만화 원작인 히어로 물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 경험을 가진 이들이 성장해서 이제는 헐리우드에서 정교하게 만든 히어로 물을 만들고 시리즈로 만든 거죠. 그러면서 히어로 물이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원작조차도 남아 있지 않고 판권을 가진 분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그런 것들을 찾아 재조명하면서 디테일하게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런 시도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그걸 한번 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물론 매우 어려운 시도가 될 것입니다.”
캐릭터 산업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고 싶다
김 관장이 토로하는 우리나라 캐릭터 제작 현실의 후진성은 놀이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문화적 현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캐릭터를 소중하게 만들고 소중하게 취급했다면 그토록 많은 것들이 모호하게 방치되어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한국적 캐릭터를 만들어 세계적인 보편성을 갖기 위한 문화적 기반이 만들어지려면 어떤 노력들을 해야 할까. 현장에 있는 김 관장의 의견을 들어봤다.
“흔히들 하는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 ‘문화적인 계기가 있어야 한다’, ‘대기업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들은 기본적인 얘기들이에요. 저희들의 구상이 잘 맞아떨어져서 하나의 시도가 성공을 거두면, 위의 얘기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구자적 역할을 하는 누군가가 책임감을 갖고 돌파하면 된다는 거죠. 피규어뮤지엄W와도 그런 부분에서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겁니다.”
시니어 중에서도 동심이 그립거나 상상의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피규어뮤지엄W는 그런 사람들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시니어들이 손자와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시니어들은 피규어뮤지엄W에서 과거 추억의 캐릭터를, 아이들은 자신이 어른이 됐을 때의 모습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디자인해보고 컬러링해서 완성해보는 ‘피규어아티스트’ 체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프라모델, 석고, 클레이 등 다양한 재료로 피규어를 접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만화가, 캐릭터디자이너, 큐레이터, 피규어아티스트 등 다양한 직업을 체험해볼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활발히 운영 중입니다.”
나이 들면서 깨달은 것들
히어로 물을 제작하고 싶다는 그에게 인생에서 언제가 가장 즐거웠는지, 젊게 늙어가는 비법은 뭐냐고 물어봤다.
“저는 그냥 막 놀 때가 행복했어요(웃음). 작품을 만드는 건 일이죠. 고등학교 때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얘들하고 사고나 치고 다니고… 굳이 재밌었던 시절을 말하라면 그때가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아요. 젊게 늙어가는 비법이요? 비법은 전혀 없고 캐릭터 좋아하고 철없이 살다 보니(웃음) 어렵게 생각 안 해요. 긍정적으로 사는 게 덜 노화되는 비결인 듯해요.”
그는 향후 계획을 중국이나 홍콩 등에 진출할 수 있는 프로젝트들을 구상하는 데 두고 있다. 당장은 피규어뮤지엄W를 태국에 개관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사실 좀 더 진행이 되어야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을 듯해요. 이곳과 같은 규모로 생각하고 있는데 파트너가 중요하겠죠. 그 과정 중에 캐릭터 산업으로서 하는 시도들이 영글어져야겠고요.”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충무로 감독이라는 명함이 주는 인상과는 달리 소박하다는 느낌을 연거푸 받았다. 그는 자신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를 만들다 보면 영화에 제 인생까지 다 담게 됩니다. 그래서 나이에 따라 작품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져요. 30대, 40대 때는 선배님들 인터뷰를 보면서 멋있는 말만 하시네 했어요. 그런데 제가 나이가 들어보니 그때 그분들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알 것 같더라고요. 그게 나이가 드는 것이겠죠. 예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을 잔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제가 그런 말을 하고 있고,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것도 보게 되는 거죠.”
시간은 철없는 사람도 어른으로 만들어준다. 그에게 자신이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는지 물어봤다.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거 아닌가요? 누가 날 기억해주냐가 중요하겠죠. 매순간 열심히 살다 보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요.”
김동원 관장은 피규어뮤지엄W가 얼마 전 판권을 구입한 영화 버전을 기획 중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피규어뮤지엄W의 전시를 볼 수 있도록 전시장 오픈도 계획 중이다. 현재 태국 파타야에 ‘피규어뮤지엄W 파타야점’ 오픈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 청담동(84-9번지)에 위치한 피규어뮤지엄W는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되며, 관람료는 성인 1만5000원, 청소년 1만3500원, 어린이 1만2000원이다.
세월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마는 크리스마스 날이 예전과 다르게 이렇게 조용하게 변할지는 몰랐다. 어릴 적 크리스마스이브는 무조건 교회 가는 날이었다. 교회 가는 목적은 단 하나, 종이봉투 속에 빵과 사탕 몇 개를 담은 선물 봉지를 받고 싶어서다. 그 당시 시골 아이가 크림이 들어 있는 단맛 나는 빵과 알록달록한 사탕과 과자를 얻어먹는다는 것은 횡재라고 부를 만큼 기쁜 일이었다. 제삿날 밤늦게 기다리다 얻어먹던 하얀 쌀밥에 참기름 넣은 나물 무침과 상어고기 한 토막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예전에는 크리스마스 무렵이 되면 온 동네가 시끌벅적했다. 전자제품 A/S센터가 없던 시절이라 골목마다 라디오 고치는 전파사가 있었는데 하루 종일 징글벨 노래가 울려 펴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루돌프 사슴코 노래도 엄청 들었고 창밖을 보라, 실버 벨, 기쁘다 구주 오셨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등 메들리 캐럴송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교회에서는 긴 망토를 입은 세 명의 동방박사가 예수님 탄신을 경배하기 위해 찾아가고 예수님은 구유에서 태어나시는 모습을 주제로 한 연극을 했고 어린이 관객은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필자가 고등학생일 무렵에도 떠들썩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변함이 없었다. 교회 다니는 신도들보다 교회 다니지 않는 친구들이 더 야단이었다. ‘광란의 올나이트’라고 이름 붙이고 밤새 춤추고 노래 부르며 놀았다. 그날만큼은 통행금지도 없었고 교인들의 행렬도 장관이었다. 특히 연인들은 그날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야 하는 날이었다.
필자가 초년 직장인이었던 시절에는 경제 부흥의 여파로 세상이 역동적이고 경기도 좋았다. 크리스마스를 시발점으로 하여 연말연시는 늘 시끌벅적했다. ‘Ma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라는, 즉 크리스마스와 새해 신년인사를 함께 하는 카드를 주고받는 것이 유행이었다. 일 년 내내 소식 한 번 전하지 않고 지내다가도 이때 다양한 카드를 주고받으면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 그림 솜씨가 좋은 학생들은 직접 그린 수제 카드를 길거리에서 팔았다. 그림이나 글귀가 좋은 것은 책상 유리 밑에 끼워두고 오래 보기도 했다.
요즘은 크리스마스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넘어간다. 길거리에서도 캐럴송을 들어본 지 오래다. 캐럴송이 사라진 이유는 저적권법에 걸려 고액의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노랫소리가 듣기 싫은 사람들이 소음공해로 민원을 제기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TV 방송이나 라디오에서도 예전만큼의 캐럴송이나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한 가슴 훈훈한 이야기들을 특별히 소개해주지 않는다.
부처님 오신 날이든 예수님 탄신일이든 정부에서 경축 기념일로 정한 날은 세상이 좋은 쪽으로 조금은 시끌벅적하면 좋겠다. 해당 종교를 안 믿는 사람에게도 공휴일의 혜택은 다 같이 주어지기 때문에 종교 기념일이라고 굳이 색안경을 끼고 반대할 명분도 약하다. 해당 종교를 믿든 안 믿든 기쁜 날로 생각하며 시끌벅적 사람 사는 냄새가 나면 좋겠다.
브라질의 삼바 춤 축제는 열흘이나 이어진다고 한다. 일본에도 지역별로 진행되는 다수의 ‘마츠리’ 축제가 있다. 건강, 사업 번창 등을 기원하는 일종의 종교행사다. 우리나라도 예전부터 농한기가 되면 풍악을 울리고 명절 때는 마을마다 다양한 놀이가 있었다. 이런 자발적인 축제는 이제 다 없어지고 얼토당토않은 관 주도의 행사에 뒷말만 많다. 크리스마스 날만이라도 저작권료나 소음공해민원 걱정 없이 신나는 캐럴송이 온 나라에 울려 퍼지는 좀 시끌벅적한 날이 되면 좋겠다.
글 박원식 소설가
지리산 자락,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산야에 살포시 내려앉은 9월의 소슬한 가을빛. 한낮이지만 핼쑥한 가을볕을 받은 능선도, 숲도, 나무도 덩달아 수척하다. 연신 허리를 틀며 휘어지는 언덕길 양편엔 상점이 즐비하다. 사람들의 발길도 연달아 이어진다. 소설가 박경리(1926~2008)의 대하소설 의 무대이자 드라마 촬영장인 ‘최참판댁’을 관람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다.
언덕 끝자락 외진 곳엔 ‘박경리문학관’이 있다.
‘최참판댁’ 일대엔 들고나는 사람들로 바글거리지만, 바로 옆에 있는 문학관은 찾아드는 이가 드물어 고요하다. 문화보다는 관광을, 문학보다는 눈요기를 포식하는 일로 만족을 구하는 항간의 경향이 여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박경리는 생시에 를 기념하는 공간인 ‘최참판댁’을 조성하는 일을 당최 마뜩치 않아했다. 죄스럽기까지 하다고 토로했다. ‘최참판댁’이 필시 요란한 관광상품으로 쓰일 것을 미리 내다보았으며, 가뜩이나 넘쳐나는 ‘관광지’ 홍수에 또 하나의 관광지를 보태는 게 달갑지 않았으며, 결국은 지리산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라 보았다. 세상과 세태를 읽는 박경리의 냉철한 눈과 광활한 가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경리문학관’은 하동군이 올해 5월 개관했다.
이전에 ‘전통농업문화전시관’으로 쓰였던 한옥 건물을 개조해 문학관을 꾸몄다. 건물의 형용은 덤덤하거나 밋밋해서 슬쩍 섭섭하다. 그러나 내부에선 박경리의 혼이 스멀거린다. 300㎡쯤 되는 공간의 벽면과 진열장에 작가의 개인사와 창작열과 일상을 더듬을 수 있는 갖가지 책자와 초상화, 사진, 영상물 등이 전시되었다. 다분히 정형화된 구색이자 구성이지만, 박경리가 생시에 사용하거나 아꼈던 유물 41점이 흥미롭다. 이 소중한 유물들은 박경리의 딸이자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인 김영주에 의해 무상 대여 받은 것들이다.
박경리의 는 자그마치 25년이라는 긴 집필기간을 통해 5부 16권으로 완간한 걸작이다. 그는 오직 칩거한 채 에 매달린 장구한 시간을 ‘빙벽에 걸린 자유, 주술에 걸린 죄인의 세월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암 수술을 받고 퇴원한 날에도 가슴에 붕대를 감고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썼다. 탁발한 재능의 소유자이기 이전에 그는, 유례가 드문 독종이자 강골이었다. 유리 진열장 안에 놓인, 방울방울 피를 뿜듯이 써내려갔을 육필원고 뭉텅이들이 숙연한 감동을 자아낸다. 글씨체에선 활달한 기운이 생동한다. 늘 곁에 두고 수시로 뒤져 알토란같은 토속어를 건져 올렸을 게 분명한 국어사전은 낡아 너덜거린다. 소설이란 여하튼 모국어와의 내밀하고도 치열한 통정(通情)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유품이다.
특유의 도회적이고 지적인 용모를 한껏 돋보이게 하는 데에 이바지했을 원피스와 재킷, 일상의 실용적인 동향을 짐작하게 하는 싱거 미싱, 안경과 만년필과 가죽장갑, 도자기와 그림부채 같은 유물들이 눈길을 오래 붙잡는다. 박경리의 끽연 습성은 생과 함께 유구하게 지속됐는데, 진열장 안에 덩그마니 놓인 저 아리랑 담배와 재떨이와 라이터를 무시로 애용했던 사람은 지금 우주의 어느 푸른 공간에 거주하는가.
빛바래고 균열이 간 흑백사진 하나에 다시 눈길이 오래 머문다.
박경리의 소녀 적 사진이다. 자못 그윽한 눈매, 고집스레 두툼한 볼, 헌칠한 이마…. 자존감과 내향성이 도드라지는 모습이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그는 진주여고에서 소녀기를 보냈는데 유별난 독서광이었다. 책에 푹 빠져 지냈던 소녀 박경리는 마치 예정된 길로 접어들듯이 문학이라는 꽃길, 혹은 가시밭길로 자연스럽게 걸어들어갔으며, 게걸스러운 독서를 통해 얻은 상상력으로 소설의 산정(山頂)에 올랐다. 많은 소설가들이 실증과 조사를 중시해서 작품을 쓰지만, 박경리는 붙박이 장롱처럼 칩거한 채 매진한 독서를 통한 상상력이라는 폭약을 창작의 화톳불로 삼았다. “내 소설의 밑천은 오로지 상상력이오!” 그는 그리 거듭 말했다. 해외여행이라는 걸 거의 하지 않았던 그는, 놀랍게도 의 배경지인 이곳 하동 악양 땅조차 작품을 완간한 뒤에야 처음으로 밟았다는 게 아닌가.
‘박경리문학관’은 박경리라는 거목을 하나의 풍경과 세계로 새삼 눈여겨 바라보게 하는 재료를 제공한다. 박경리는 자신을 추켜세우는 기념관 명색을 극구 꺼렸다. 그러나 그를 기리고 그리는 사람들에겐 흡족한 선물일 수밖에.
박경리문학관 관람 정보
주소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길 79 관람시간 09:00~18:30
관람요금 성인 2000원 / 청소년·군인 1500원 / 어린이 1000원
※박경리문학관은 하동 최참판댁 안에 있습니다.
한 번 빠져들면 출구 찾기 힘들다는 배우 금보라를 돌직구 시사평론가 이봉규가 만났다. 중년임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는 금보라는 지나간 삶을 돌아보는 여유를 가지며 아름답고 당당한 삶을 열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나 또 많이 달라져 있기도 했다. 그간 몰랐던 그녀의 진짜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 주면서 그녀와 그는 꽤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녀의 자취가 ‘센 언니’처럼 보이겠지만 금보라는 도시락 싸주는 엄마, 현모양처로 살고 있었다.
글 이봉규 시사평론가
최근 MBC 주말드라마 에서 ‘명품연기’를 보여 주고 있는 금보라와의 데이트 약속을 잡고서는 설레었다. 거침없는 그녀가 무슨 말을 쏟아 낼지 궁금해서였다. 나와는 TV조선의 라는 프로그램에서 몇 달간 같이 방송을 한 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 그녀의 캐릭터를 알고 있기에 분명 깜짝 놀랄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금보라는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폭주했다. 특히 분위기가 무르익자 정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더니 눈이 반짝거리면서 폭탄발언을 와장창 쏟아 냈다.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정치인들 미친 거 아닙니까?” 라고 핏대를 세우더니 “우리 집 앞에 사드를 설치하라고 데모라도 하고 싶다”면서 “대한민국 국민이 어떻게 이렇게 안보에 무책임 할 수 있나?”하고 광분한다. 그녀의 평소 성격대로 솔직하고 꾸밈이 없이 민감한 정치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연예인이 예민한 정치적 발언을 하면 자칫 구설수에 올라 상당히 곤란을 겪을 수 있는데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녀 성격에 이봉규가 ‘보수 꼴통’이라서 분위기를 맞추려고 하는 이야기기는 절대 아닐 것이다. “나 금보라야!”라고 금방이라도 소리칠 것 같다.
사람들이 답답해서 할 말이 많아도 토론하기를 꺼리는 세월호에 관해서도 거침이 없다. “세월호 침몰은 부도덕한 기업의 잘못으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인데 왜 대통령을 욕하냐?”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내친김에 정치 이야기를 더 끌고 나갔다. 금보라는 충청남도 당진이 고향이라 같은 충청도 출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대통령 되는 걸 바랄 줄 알고 그에 관해 물었더니, “반기문 절대 안 찍겠다”고 잘라 말한다. 그 이유는 “벌써 자기가 대통령이 된 줄 알고 거품이 잔뜩 들어가 있어서 싫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새누리당에서 이정현 대표가 요즘 괜찮아 보인다고 말한다. 그의 인생 스토리가 드라마와 같아서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어린 나이에 배우로서 안 해 본 역할이 없을 정도로 간접 경험을 많이 해 본 터라 인생스토리가 중요함을 깨달은 것은 아닐까. 필자도 대통령이 될 사람은 인생스토리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표로 연결된다고 믿는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서 그녀의 분석이 날카롭게 꽂힌다. 정치평론가 누구도 아직 확신을 가지고 이정현 대표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고 예언하지 않는데 금보라가 말한 것이다. 정치평론가 보다 오히려 일반 시민들이 잘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냥 마음속에 와 닿는 대로 평가하기에 이심전심으로 통하고 그게 선거 결과로 그대로 반영 될 수 있다는 논리다. 물론 이정현 대표가 지금 상황으로 볼 때 대통령이 될 확률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만약 이정현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아마 대한민국의 유명인사들 중에서는 금보라가 처음 맞추었을 것 같다.
필자가 진행하는 TV조선의 에 게스트로 초대해서 본격 정치토론을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요청하자 그녀는 흔쾌히 응했다. 조만간 금보라가 정치토크에서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개봉박두! 기대해도 좋을 듯!
두 번째 남편, 먼저 자빠뜨린 남자
이혼의 아픔을 겪고 난 후에 지금의 남편과는 정말로 행복해서 “비행기 타고 가다가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금방 “아니지! 지금은 행복하니까 죽으면 아깝지”라고 번복한다. 지금의 남편과는 우연히 만났는데 진짜 괜찮은 사람이라서 “나하고는 안 되겠다”하고 지레 겁먹었다고 털어 놓는다. 그래서 이판사판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 그녀의 털털하고 솔직한 모습에 반해서일까 그와 결혼에 성공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남편과 만난 지 8개월 만에 금보라가 먼저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했단다.
남편 이야기가 나오니까 입에 모터를 달아 놓은 것처럼 자랑을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다. “통통하고 생긴 것도 마음에 들지만 경상도 ‘상남자’에다 배려심이 많다”며 그녀는 한마디로 남편을 존경한다고 한다. 결혼 전에 남편과 데이트 할 때 그녀가 밥값과 술값은 도맡아 냈을 뿐만 아니라 지갑이나 벨트 등 선물 공세를 펼쳤다는 것이다. 다른 여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금보라처럼 예쁘고 대한민국이 다 알아주는 스타인데 금상첨화로 매너까지 좋다면 어느 남자가 반하지 않을까? “나는 늪이거든~”이라고 또 자랑 질이다. 한 번 빠지면 절대로 헤어날 수가 없단다. “인간 금보라를 제대로 알려면 사계절은 지나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녀가 아직도 남편과 아이들 도시락을 직접 싸 준다니 믿기 어렵다. 밤샘 촬영을 하고 지쳐도 도시락은 꼭 자기 손으로 정성스레 싸 준다니 이봉규가 금보라를 아직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자기가 남편보다 뛰어난 것이 없기 때문이란다. “남편에게 잘 해 줘서 내가 없으면 불편하게 만들어 내 소중함을 어필하자는 작전”이라는 것이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같이 방송 할 때가 생각난다. 그녀는 ‘예쁘고 거친 여우’임에 틀림없다.
그런 그녀도 “이혼 후 아이들 문제로 난감했던 적이 있었다”고 털어 놓는다.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어린이날 운동회를 갔는데 ‘아빠와 달리기’ 경기가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재혼 전이라서 아빠가 없었었기에 참가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옆에서 한 학부모가 대신 아빠 역할을 해 주겠다고 했지만 기분이 상해 주최 측에 ‘부모와 달리기’로 바꿔 달라고 항의했다. 결국 그날 엄마와 뛴 사람은 우리 아들뿐이었다”며 당시의 안타까운 사연을 말한다. 금보라는 아들과 열심히 뛰었지만 아빠들과 뛰는 아이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이가 위축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엄마가 못 뛰어서 졌다”고 속상해 했지만 “자기 혼자 아빠 없이 엄마와 뛰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깔끔한 성격은 엄마를 닮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여배우 처지에 아빠와 달리기 경기에 엄마가 뛰게 해달라고 우겨서 참가했으니 그녀도 참 어지간하다.
그녀에게는 지금의 남편이 데리고 온 25세의 딸이 있는데 최근에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명품 신발을 사와 속상했다. 아직 명품을 살 나이는 아니라는 평범한 엄마와 같은 생각이다. “13년 동안 자기 딴에는 정성껏 잘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다”는 고백이다. 소리 지르면서 야단치면 폭발할 것 같아서 카톡으로 차분하게 주의를 줬다고 한다. 그리고는 주말에 반품을 하는지 지켜보고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응징을 할거라며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고.(추후에 반품했다는 메시지가 왔다.) 남편의 금보라에 대한 평가는 “가방끈은 짧아도 똑똑하고 아는 건 많지 않아도 현명한 여자다.” 남편의 평가대로 그녀는 현명하게 장문의 카톡으로 딸을 꾸짖었다. 그 내용을 지면으로 그대로 옮긴다.
어제 일은 내가 수십 번을 생각하고 생각해도 결코 옳지 않은 일이라 잠까지 설치는구나. 나름 딸내미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잘 키웠다고 자부했건만 솔직히 약간은 쇼크라고 할까?
여하튼 속상하고 화도 났다.
어떻게 네 나이에 그런 쇼핑을 할 수 있는지? 아무리 명품 신발이 신고 싶다고 해도 그건 아니라고 본다.
세상 살면서 네 말대로 없는 게 더 많을 수 있지만 그 반대로 넌 다른 네 또래보다 많은 걸 가졌고 넘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설사 네가 돈을 많이 번다 해도 사치와 허영에 들떠서 생각 없이 명품만 쫓는 한심한 여자로밖에 난 생각이 안 들었다.
...(중략)...
아빠와 엄마가 너를 언제까지고 보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 스스로 살아가려면 절제도 배우고 참을 줄 알고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단다. 너의 가치관으로 볼 때 내 지적이 틀린다 할 수도 있겠지만 부모로서 널 위해 하는 말이다. 그래도 네가 옳다면 이것만은 알아 두길 바란다.
명품 신고 입고 든다고 사람이 명품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거. 올바른 삶을 살아갈 때 사람은 비로소 빛난다는 걸.
존경하고 사랑하는 남편이 데리고 온 딸이 내가 낳은 자식보다 더 애틋하고 사랑스러워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그녀의 글 속에 절절히 묻어난다. ‘계모는 이래도 계모고 저래도 계모’라는 내용의 책을 쓰고 싶다는 금보라의 속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기른 정이 낳은 정보다 깊다는 말일 것이다.
지금 인터뷰하고 있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극동빌딩 6층의 ‘M바’대표에게 직원들 빨리 퇴근시키라고 야단치면서도 뒤로는 직원들에게 택시비를 슬며시 건네는 금보라의 마음 씀씀이로 볼 때 딸에 대한 꾸짖음도 끔찍한 사랑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어느 보석이건 나를 빛나게 해 주지 않았다. 오직 남편만이 나를 빛나게 해줬다”고 하니 금보라의 딸에 대한 꾸짖음과 사랑은 정당해 보인다.
“마누라가 천국”이라고 말하는 자신감은 그녀의 일상에 배어 있을 것 같다. 외모만큼 섹시한 금보라의 일상을 염탐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번 추석 연휴는 바로 뒤에 주말이 있고, 그 전 주말과 연휴 사이에 낀 이틀만 휴가를 내면 9일을 쉴 수 있는 황금연휴다. 쉬는 날이 많으면 해외여행을 떠나는 등 장기 일정을 잡기도 하지만, 여름휴가를 길게 다녀왔다면 어쩐지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마냥 집에만 앉아 쉰다면 손주들은 지루해 몸이 근질근질할 테니, 그럴 땐 아이들을 위해 잠시 나들이 삼아 영화를 보러 가거나 전시장 등을 찾아가 보는 것 어떨까? 글 이지혜 jyelee@etoday.co.kr
판타스틱 뮤직 어드벤처
감독과 제작진이 참여한 애니메이션으로 추석 당일 개봉한다. 뮤지션이 되고 싶은 주인공이 아빠의 반대를 무릅쓰고 꿈을 위해 상경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음악을 주제로 한 만큼 신나고 활기 넘치는 영화 삽입곡들이 듣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개봉 9월 14일
감독 애시 브래넌
목소리 출연 J.K. 시몬스, 루크 윌슨,
에디 이자드 등
창덕궁 속 달빛 세계의 문이 열렸다!
우연히 창덕궁 속 환상의 세계인 ‘달빛궁궐’로 들어가게 된 소녀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담았다. 개봉에 앞서 8월 29일 국내 최초로 창덕궁에서 야외 시사회를 가져 화제를 모았다.
개봉 9월 7일
감독 김현주
목소리 출연 김서영, 이하늬, 권율,
김슬기, 신용우 등
동물들 섬에 갇힌 인간의 생존기
시리즈로 잘 알려진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엔웨이브 픽처스의 신작이다. 동물만이 살고 있는 무인도에 갇히게 된 로빈슨 크루소의 생존기를 그렸다. 를 모티브로 귀엽고 개성 넘치는 동물 캐릭터가 등장해 재미를 더한다.
개봉 9월 8일
감독 벤 스타센, 빈센트 케스텔루트
목소리 출연 유리 로웬탈,
데이비드 호워드, 콜린 메츠거 등
위기에 빠진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장난감들이 깨어나며 벌어지는 모험 이야기다. 이미 해외에서는 3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고 뉴욕 국제 어린이 영화 축제 대상을 받은 기대작이다. 국내에서는 컬투(김태균·정찬우)가 더빙을 맡았다.
개봉 9월 8일
감독 후앙 호세 캄파넬라
목소리 출연 니콜라스 홀트,
아리아나 그란데, 케이티 홈즈 등
미술관 속 모래사장에서 발견하는 관찰 놀이
‘관찰놀이터(Seek&Find)’
기술의 발달로 직접적인 소통과 접촉에 소홀해진 시대에 ‘관찰’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새로운 관계 맺기의 방식을 모색하기 위한 전시다. 모래사장을 콘셉트로 꾸민 전시장에서 삽으로 모래를 파내어 숨어 있는 작품 이미지를 발견하는 체험 공간이 마련돼 있다. 아이들과 함께 들을 수 있는 전시 연계 교육 프로그램 ‘관찰과 발견’도 함께 운영한다.
일정 9월 18일까지 장소 블루메 미술관
‘파리도서전’에 간 우리 그림책 130권을 만나다
‘7가지 마음의 모양’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파리 도서전에서 선보인 한국 대표 그림책 130권을 살펴볼 기회다. 기쁨과 즐거움, 노여움과 분노, 슬픔, 두려움, 사랑과 연민, 미움, 욕망 등 7가지 주제로 나뉜 그림책과 그림으로 표현한 마음의 모양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같은 주제의 프랑스 그림책 130권도 함께 전시해 의미를 더했다.
일정 10월 30일까지 장소 현대어린이책미술관
상상 속 자동차를 현실에서 체험하다
‘브릴리언트 키즈 모터쇼’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현대자동차가 함께 어린이들이 상상한 자동차를 실제 자동차보다 작은 크기의 모형으로 제작해 전시했다. 펭귄을 도와 얼음집을 지어주는 이글루 자동차, 조개를 연료로 하는 수중 자동차 등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상상 자동차 그림 공모전을 통해 7300여 점 중 선발한 15개의 작품이다. 전시된 자동차는 어린이들이 직접 타고 체험해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일정 2017년 4월 14일까지 장소 DDP 배움터 4층 디자인놀이터
창의력과 꿈을 키우는 국내 최대 어린이 실내 놀이터
‘텔레몬스터 대모험’
MBC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꾸며진 어린이 실내 놀이터로 1만3072㎡(약 4000평) 규모의 체험전시장이다. TV, 컴퓨터 게임 등에서 벗어나 신체 발달 및 지능 발달 놀이 등 아이들의 건강과 성장에 도움이 되는 놀이 테마존 30여 개가 설치돼 있다. 매일 2~3회 마술, 비눗방울, 풍선 공연이 열리고, 각 체험장에서는 미션을 수행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제공한다.
일정 9월 18일까지 장소 킨텍스 제2 전시장
부산에서 만나는 신비한 동물 여행
‘판타스틱 애니멀’
쉽게 만나 볼 수 없었던 희귀 동물들의 생생한 표본 216점을 전시하고,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체험과 놀이를 통해 동물을 이해하는 ‘사이언스 존’, 흔히 만나는 동물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동물원 존’, 생명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사파리 존’ 등 세 가지 테마관으로 구성된다. 척추동물 해부학모형 체험, 동물 페이퍼토이 제작 등을 즐길 수 있다.
일정 9월 23일까지 장소 벡스코 제1전시장
한국이 출산율을 높이고자 최근 매년 10조 원 이상을 쓰는데도 출산율은 2015년 기준 1,24명으로 1.3명의 벽을 뚫지 못하고 있다. ‘1960년 합계 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자녀수) 6.0명→1990년 1.5명→2013년 1.22명→2015년 1.24명인 것이다. (2015.1.11.통계청‧‧보건복지부 잠정집계)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이대로 가다간 2100년 인구는 지금의 절반인 2,468만으로 줄어들 것이란 예상이다. 심지어 2500년에는 중남미 소국인 바하마 인구수준인 33만 명 수준이 될 것이란 최악의 시나리오를 내놨다. 전문가들은 취업-결혼-첫 출산-둘째 출산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끊어졌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문제가 심각하다.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환경이 안 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남편은 벌고 아내는 아이를 기르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었다. 아니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살면서 자녀를 봐주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벌어 집 장만하기가 요원하다. 둘이 죽자 하고 벌어야 집도 마련할 수 있다. 핵가족 시대가 된 요즘 아이만 덜컥 어른들에게 맡기기도 여의치 않다. 그나마 국공립 어린이집은 경쟁이 치열할 정도다.
아는 지인 중 한 사람이 의대를 나와 고향에 가서 산부인과를 개업하고 고향에 봉사하고자 했다. 그런데 몇 년 만에 접고 올라와야 했다. 아기를 받아본 것이 몇 명 안 된다는 것이다. ‘이래 가지고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라는 그의 말이다. 어느 TV에서는 일부 산부인과는 폐업하고 피부과를 개업하였다며 비싼 산부인과 기계가 먼지가 쌓인 채 덮여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골 마을에 아기가 없다. 노인들만이 마을을 지키는 시골이 늘어난다. 그러다 보니 폐교도 늘어난다. 어린 학생들로 넘쳐나야 할 학교가 전교생 다 합쳐 4명이라는 뉴스를 보며 마음이 아프다. 그 학교도 6학년 두 명이 졸업하면 조만간 문을 닫을 것이라 한다.
출산에 따른 가족계획표어를 살펴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1963년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
1966년 ‘3명의 자녀를 3년 터울로 35세 이전에 단산하자’
1971년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1980년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1986년 ‘하나로 만족합니다. 우리는 외동딸’,
1990년 ‘엄마건강 아기 건강 적게 낳아 밝은 생활’ 등 이었다.
2004년 “아빠! 하나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라는 내용의 가족계획 표어가 선보였고, 2006년 “낳을수록 희망 가득 기를수록 행복 가득”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출산을 장려하는 내용으로 변했다.
2010년대 ‘하나는 외롭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동생입니다.’라는 표어와
‘아들딸 구별 말고 많이 낳아 잘 기르자!’ 하는 표어가 등장했다.
출산장려에 나선 보건 복지부가 전 국민에 출산장려 공모를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자녀는 평생 선물, 자녀끼리 평생 친구." 이 표어가 2014년 7월 제3회 인구의 날에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출산장려 국민표어 공모전에서 우수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물론 표어가 출산장려를 촉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노년인구는 늘어나는데 생산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가분수 형의 인구구조로는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지금이 그 전환점인 것만은 확실하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제 그 몫은 정부에 있다. 여건만 되면 더 낳겠다고 한다. 국가가 그들에게 믿음을 주어야 할 차례다. 국가가 아이들을 키워준다는 믿음이다. 그래야 아이 울음소리가 도심 한가운데서 부터 저 지리산 꼴짜기 마을까지 우렁차게 울려 퍼질 것이다.
인생 100세 장수시대가 됐다. 어언 70년을 거의 살았고 앞으로 살아야 할 날도 30년은 족히 남았다. 즐거웠던 추억은 인생의 등불로 삼았고 아팠던 기억은 좋은 가르침으로 남았다.
◇학생회장 후보로 인생의 희열
새 학기가 시작하는 봄을 맞아 필자 아파트와 가까운 초·중·고등학교에서는 학생회장선거가 진행되었다. 아침마다 교문에서 붉게, 푸르게, 노랗게 만든 피켓을 들고 성인보다 더 열심히 선거 운동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총등학생 시절 총학생회장 선거가 생각났다. 학생 수가 적고 선생님과 교실이 부족해 몇 개 학년이 한 교실에서 합동수업을 가끔 했던 지금은 아예 없어져 버린 시골의 조그만 초등학교 이야기다.
학생들은 학급장은 물론이요 총학생회장도 선거로 뽑는다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선거를 해 본 일도 없었고 선생님이 임명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4학년이 되자 담임선생님이 급장선거를 시행했다. 산간벽지에서는 놀라운 변화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4.19혁명이 났던 해였다. 그런데 더 신기했던 건 필자가 급장에 뽑힌 것이다.
얼마 후 총학생회장선거가 실시되었다. 그간 6학년 중에서 임명하던 학생회장도 전교생이 직선하도록 바뀌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4·5·6학년에서 한 명씩 후보를 내도록 했다. 필자는 4학년 대표로 학생회장 후보자가 됐다. 합동연설을 하고, 각 교실을 돌면서 선거운동했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리고 선거운동이 끝난 후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큰 칠판에 바를 정자를 그려가면서 진지하게 개표가 진행했다. 모두가 한 표 나올 때마다 목이 터지도록 함성을 질렀다. 6학년 선배가 당선됐다. 만약 그 선배가 낙선하였으면 어떡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다행한 일이었다.
문제는 다음에서 발생하였다. 5학년 형을 누르고 2등이 된 것이었다. 2등이 확정되는 순간 가슴에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무언가 뜨거운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양말도 없이 맨발로 고무신을 신고 집으로 돌아오는 자갈길이 비단길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전교생이 모여 투표지 한 장마다 이름을 연호하던 개표장의 함성이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했다.
다음 날 학교가 내 집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선생님들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칭찬해주셨다. 거의 처음 느껴보는 환대에 가슴이 벅찼다.
멀리만 느껴졌던 교무실을 즐겁게 찾는 찾아가기 시작하였다. 교무실 한쪽에 있는 ‘미니 도서실’을 열심히 찾는 학동이 됐다. 비록 수십 권에 불과하나 교과서가 아닌 ‘책’을 부지런히 읽기 시작했다.
그때 만난 ‘장발장’·‘삼총사’·‘모세의 기적’ 등은 훗날 탐독했던 다른 책보다 오래 기억에 남았고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줍음을 많이 탔던 ‘시골소년’은 읍으로, 대도시로, 그리고 서울로 진학해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하면서 힘차게 성장했다. 그 밑거름은 첫 ‘희열’이었다.
◇인생을 바꿀 뻔했던 증기기관차
필자는 50년 전 고교 입시를 치렀다. 당시 중학교부터 전 과목에 대한 시험을 시행하던 시절이었다. 인생이 확 바뀔 수도 있었던 중요한 순간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다행히 대도시 소재 고등학교에 어렵게 합격했다. 시골 동네에서 몇 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하는 영광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되지 않았다. 입학등록금 준비도 문제였으나 한 번도 가보지 않는 대도시로 등록하러 가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등록 마감은 다음 날 정오까지 주어졌고 추가등록은 인정되지 않았다.
필자는 결행이 잦은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서 기차를 선택했다. 우리 마을 종점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는 버스는 정상적으로 운행해야 5시간 걸려서 광주에 도착하던 때였다. 그리고 비포장 자갈 도로에는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오면 버스가 다닐 수 없었다. 당시는 특히 겨울철이어서 더 그래 보였다.
전날 오후 3시간 넘게 걸어 나와서 읍내 기차역 앞 여관에서 자고 마감시각에 늦지 않으려고 새벽 5시 첫차를 탔다. 8시 광주에 도착하는 통학차였다. 문제는 엉뚱하게도 ‘기차’에서 터졌다.
칙칙폭폭 석탄 연기를 내뿜으며 힘차게 달리던 증기기관차가 화순에서 광주로 가는 너릿재 중간 오르막길에서 숨이 막히는 듯 멈춰 서고 말았다. 시커먼 열차는 제동이 잘 안 되는지 삑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속절없이 뒤로 내달렸다. ‘정오 마감시각’ 맞추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화순역까지 밀려 내려온 기차는 한 시간 넘게 물과 석탄을 보충해 증기를 생산한 후 고개를 힘겹게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 숨이 차고 말았다. 후진과 에너지 보충이 반복됐다. 마감 시각을 놓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당시에는 다른 수단을 찾을 수 없었다.
두 번이나 숨이 막혔던 열차는 운행 예정 시각을 3시간 더 넘기고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냅다 은행으로 뛰었다. 운명을 가를 뻔했던 순간이었다.
“운 좋은 학생이구나!” 잠시 후 접수창구를 닫으면서 격려해주었던 은행원 누나의 그 한 마디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때부터 ‘시간의 중요성’을 제일로 삼았다. 다른 것은 채우거나 보완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한 번 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회에 진출하여서도 약속시각에 늦지 않도록 노력했다. 모든 업무는 기한 전에 마감하고 여유를 가지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사회 은퇴 후 자원봉사와 교육 수강, 강의, 친구 모임에 세계 최고 수준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그 편리함도 알았다. 나이 들어서 운전하는 부담도 덜어야겠다는 생각에 승용차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아들 가족과 ‘승용차 나눠 사용하기’도 하고 있다. 키는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주차 스티커는 양쪽에서 발부받아 이용에 불편이 없도록 했다. 평일에는 아들 가족이 출ㆍ퇴근에 전용하고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에만 내가 사용한다.
◇첫 입학식 60년 전과 후
[새 학기를 맞아 환갑 띠동갑 쌍둥이 손주와 외손자의 입학식이 열렸다. 60년 전 초등학교 입학식이 연상됐다.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친구 잘 사귀면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랐다.
오전에 쌍둥이 손녀와 손자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열렸다. 바로 집과 가까운 학교이지만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잔뜩 호기심을 드러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움에 대한 관심은 같은가 보다.
어머님의 손을 잡고 한참 걸어가서 참가했던 초등학교 입학식이 생각났다. 입학 전 몇 년 동안 할아버지가 만든 필사본으로 천자문을 공부하고 시조를 읊었다. 아버지에게 한글을, 어머니에게 산수를 익혔다. 그러나 ‘신학문’을 배우러 처음 가는 학교가 매우 궁금하여 밤잠을 설쳤다.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도 조용해졌다. 옛 입학식 때 교장의 ‘훈화’가 떠올랐다. 당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뭔가 보통 사람과 다른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였다. 라디오 소리도 들어본 일이 없던 그 시절, 풍금 반주 애국가를 처음 듣고 가슴이 뭉클했던 것도 기억났다.
책을 처음 받았고 어머니는 공책과 연필을 사줬다. 글씨와 그림이 함께 인쇄된 새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잉크에 흠뻑 밴 책의 냄새가 정말 좋았다. 그때부터 책을 좋아하는 학생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이 기억에 오래 남고 인생에 영향을 가장 많이 주었다. 요즘 아이들은 이미 좋은 책을 읽었기에 학교에서 받은 책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 않을 터이다. 입학 전 예쁜 책가방과 필기구도 선물로 이미 챙겼는데 이것도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학교 재학 시절 제일 좋아했던 것은 장난감으로 재미있는 놀이하기였다. 그러나 손주들은 뛰어노는 것보다 체육관, 학원을 찾아 나설 것이다.
한국전쟁 후 지금의 최빈국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 처음 본 공책과 연필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잘 깎이지 않는 연필을 날을 갈아가면서 조심조심 깎아주었던 아버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공책은 한 번 쓰기도 어려울 정도로 잘 찢어졌다. 딱딱한 연필심에 침을 발라서 공책이 파이지 않도록 글씨를 살살 그려야 하였다. 연필심 흑연으로 입술은 시커멓게 물이 들곤 하였다.
오후에는 외손자가 유치원에 입학하였다. 어린이집을 마치고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대비하는 중이다. 손재주가 좋은 이 녀석은 종이접기 작품을 필자 손에 쥐여주면서 ‘입학선물’이라며 재롱을 부렸다.
담임선생의 당부와 학교생활 안내가 있었다. 새겨듣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였다. 교실과 선생이 부족하여 합반수업을 하였던 옛날이 생각났다. 아무튼 좋은 환경에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랐다.
아들 가족은 아주 가깝게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들 가족을 대신하여 쌍둥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의 등교를 도왔다. 올 첫 학년은 육아 휴직한 며느리가 직접 보살피고 있다.
퇴근이 늦은 딸 가족을 위하여 외손자의 어린이집 하교도 가끔 도왔다. 앞으로도 즐거운 마음으로 손주들의 등하교를 보살필 예정이다.
아이들의 입학식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기념사진에 예쁜 모습을 담고 교문을 나섰다. 먼 훗날 아이들의 추억에 할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 상상의 나래를 폈다.
건강한 가정이 모여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이런 공동체가 모여 국가의 초석이 된다. 하지만 가정 해체가 심심찮게 일어나면서 아동학대, 노인 소외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허물어지는 가정 해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바로 효(孝)라고 말한다. 이번 호에서는 효를 실천하는 3인이 한자리에 모여 이 시대의 효의 진정성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 무크지 을 창간하는 권혁승 백교문학회장(이하 권혁승 회장)
△ 효경영의 리더 상훈유통 이현옥 회장(이하 이현옥 회장)
△ 교육을 통해 효 문화를 정착시키는 최종수 한국효문화센터 이사장(이하 최종수 이사장)
장소 이투데이 6층 회의실
Q.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전통적 가치 ‘효.’ 요즘 효를 얘기하려면 저마다 답답하다고 한탄합니다. 무엇 때문에 시니어들이 분노하는 걸까요?
△ 이현옥 회장: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에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모든 행동의 근본이죠. 부모가 없었다면 자식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섰더라도 이는 모두 부모의 은덕이죠. 부모 모시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바쁘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찾아뵙는 것은 소홀히 하고 전화 한 번 하는 정도로 생색내는 자식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죽는 날까지 자식 잘 되기를 바라고 좋은 소식 있기를 고대하며 밤낮으로 자식 걱정을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죠.
△ 최종수 이사장: 자식들의 마음가짐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교육이 우선돼야 해요. 옛 서당에서는 과 을 기본으로 어려서부터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을 가르쳤어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자 직분에 충실하게 하는 밑바탕에는 효가 자리 잡고 있었지요.
이런 이유로 초·중·고교에서 효와 예절, 질서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학식을 갖추는 것보다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지요.
이러한 일들을 시작하게 된 게 주위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우리 매일 같은 것만 할 게 아니고, 인성과 효에 대한 공감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한번 해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 권혁승 회장: 우리나라 효 사상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고, 한국의 가족주의도 전부 없어져 가고 있어요. 이러한 현상을 두고 ‘가정 파괴’라는 말들을 씁니다. 이는 곧 가정의 예절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가정의 예절이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하는데, 요즘은 어버이날이나 부모 생신날이라 해서 선물하나 사서 주는데 그건 효가 아니죠. 효 사상이라는 것은 한국인의 정신문화라는 것이고, 물질의 교류나 거래는 아니죠. 부모자식 간에 아파트 사주고 비싼 선물 사주고, 물론 그것도 효도의 한 방법 일수 있지만, 한국의 기본 사상이자 문화 사상은 아니라고 봅니다.효의 출발점을 가정의 예절에 두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부터 아이들을 교육해야 해요. 요즘은 어린이 교육이 잘못돼 개인주의나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졌지만, 한국 효 사상이 무너져가는 위기 상황이라고 느끼니 씁쓸하죠. 그러한 문제로 우리(3인)가 모인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웃음).
Q. 지금 효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천되고 있나요?
△ 권혁승 회장: 요즘 대다수 부모는 자식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죠. 효를 바라지도, 하지도 않는 게 현 상황인거죠. 그래도 지금 우리가 하는 효 운동을 계속 꾸준히 전개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각 시·구 문화원에서 부모에 대한 시 낭송회를 1년에 한 번씩 한다든지, 강의를 한다든지 말입니다. 이렇게 효에 대한 교류를 해야 효심이 생기는 것이죠. 젊은이들에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날마다 반성을 해나가는 것이 효예요. 아이들이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 “다녀 왔습니다” 인사를 하는 것이 기본인데 휙 갔다가 말없이 돌아오죠. 젊은 엄마들도 다 어릴 적 해본 것으로 신경을 못 써서 그렇지 아이들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효심’. 그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봤어요. 대한민국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옵니다. 첫 번째, ‘효성스러운 마음’. 두 번째, ‘효심은 엄하게 키운 자식일수록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법이다’ 그러니 부모가 애를 잘 키워야 하죠. 적당히 키우면 효도가 안 돼요. 불효라는 것은 아이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 부모자식 간 주고받는 것이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를 실천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왔어요.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의 물신주의는 가정의 안녕과 질서의 근원인 효를 경시하므로 해체되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어린이나 젊은이 할 것 없이 절대가치와 기준이 상실되어가고 있는 현실이죠.
자식을 물질적으로 키우면 그게 효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권 회장 말씀대로 엄하게 키우고 가정에 모범을 보여야 하죠.
Q. 지난해 12월 ‘효도계약’을 지키지 않은 아들에게 증여한 부동산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 판결을 놓고 가족모임에서 효도계약서를 쓰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 권혁승 회장: (부모자식 간 효도계약서 등의 문제에 대해서)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한국인은 효에 대해 우리 전통문화, 민족문화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개중에는 부모자식 간 효도 계약서를 쓴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몇몇 사건을 미디어에서 너무 부풀리는데, 그런 것을 줄여야 해요. 부모자식 간 화합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불화가 있다면 잘못되는 것이죠. 아이들이 자랄 때 가정 예절이나 인성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식이 잘못했든 부모가 잘못 가르쳤든 소통이라는 것은 쌍방이에요.
△ 최종수 이사장: 효도계약서를 쓰고 하는 효는 결코 효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계약을 하는 것도 문제, 그것을 퍼뜨리는 언론도 문제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효가 아니고 효가 될 수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두 분(권혁승, 이현옥)도 그렇지만 자신의 모든 열정과 재산을 털어 효 문화를 전파하는 훌륭한 분들이 계시는데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는가 생각이 들어요.
지방자치단체 강령에도 효에 대한 지침 등이 있지만, 지나친 복지로 효가 묻히고 퇴색하고 있어요. 노인, 장애인 복지 등을 위한 비용이 당연히 들겠지만, 그중 일부를 효를 위한 예산으로 책정해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효를 통해 그런 노인과 장애인 등을 돌볼 수 있도록 말이죠.
Q. 효에 관한 교육과 정책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는데요.
△ 권혁승 회장: 예를 들어 우리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시 낭송회를 한다고 하면 그들도 그 며칠 동안은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효가 뭔가 선물만 주는 게 아니라 기본을 익히는 교육을 해야 해요. 이런 말이 적절할지는 모르지만 각 지역마다 문화원이 있어요. 대개 문화 강좌를 한다든가 음악, 미술, 무용 등을 가르치는데 효 문화에 대해서도 강의하면 안 될까 싶어요. 문화원마다 책정된 예산들을 다 그런 예술 강좌에만 써야 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의 독자들의 나이대를 보면 나라 망하고, 6·25사변 나고 배고프고 살기 어려워서 그런 걸 찾을 수 없는 시대였다 할지 몰라도, 그 와중에도 뜻있는 사람들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요. 좋은 효자·효부 정말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었다는 생각 말고 기본적인 교육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 이현옥 회장: ‘효’를 바탕으로 회사를 경영하다 보니 직원들도 만족해하고, 사고도 발생하지 않아요.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는 직원들에게 홍천 대명콘도와 양양 솔비치콘도 숙박을 지원해 줍니다. 1년에 상·하반기 2번 가능하고, 시댁이나 처갓집 식구들도 함께 갈 수 있게 하는데 주로 직원들이 장인·장모를 모시고 가는 편입니다.
‘너희들이 부모에게 잘함으로써 우리 직장도 건전하게 발전이 되는 거다’라고 자주 말합니다. 매년 5월에는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전 직원이 가족을 데리고 세종시에 있는 효림원(효 마을)을 방문해 효심을 나누고 효 문화행사를 진행하죠.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서는 무엇을 바꾸어야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효 문화예술 교류 차원에서 학교에 전문 강사가 방문해 효 강의 등을 하는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만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어머니들의 생각이 좀 바뀌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효에 대해 토론회를 한다고 하면 관심도 없고, 다른 학원에 가라고 하는 등 꽁무니를 빼기 때문이죠. 학생들을 모집하면 3분의 1 정도만 자발적으로 오고, 3분의 1은 학교에서 하라니까 억지로 온 것이고, 또 3분의 1은 참여는 하지만 구실만 있으면 학원에 가거나 빠지려고 해요. 그런 경우에 학생도 학생이지만 어머니들이 적극적으로 인성이나 효, 예절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인성이 기본이 된 다음에 학력을 쌓아야지 기본도 안 되고 학력만 쌓으니 아이들이 머리만 커지는 것이죠.
효라는 것은 평생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인데, 유가(儒家)에서 배울 때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모시기를 잘 해야 한다고 하는데, 종교가 달라 많은 부분에 갈등이 생겨나고 있어요. 그런 효가 필요 없다고 하는 단체도 생기고, 내가 효를 안 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는 몰라도, 효는 우리나라 정서나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난해부터 인성교육진흥법을 시행하여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단체가 갈팡질팡하고 있어요. 인성과 예절 교육은 효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 문화, 이런 운동은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운동도 아니고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어떠한 소명감에 의해서 하는 것이지 이해타산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기브’만 하는 거죠.
요즘 부모는 자식의 효도를 바라지도 않고, 자식도 안 하는 상황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효는 어디 내다 팔래야 팔 수 없는 한국인의 아주 기본적인 사상이자 문화 사상으로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니까요. 2018년에 동계 올림픽을 하는데 외국인들이 많이 왔을 때 ‘한국은 효의 나라다’라는 게 선전되면 얼마나 좋겠어요(모두 웃음).
△ 이현옥 회장: 생전이나 사후에도 예에 벗어남이 없어야 합니다. 즉, 살아 계실 때도 예를 지켜야 하나 돌아가신 후에도 예를 지켜야 합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자(慈)라면 자식의 부모 사랑은 효(孝)라고 합니다. 부모는 진 땅을 걸어가도 자식은 마른 땅을 걸어가기 바라는 게 부모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바쳐 희생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인프라 구축이 우선시되려면.
△ 최종수 이사장: 정부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먼저 조성돼야 합니다. 내가 과천문화원장을 8년 정도 하고, 전국문화원 회장을 4년 동안 했어요. 그러면서 체계적으로 구축하여 효 문화를 선도하려는 효 문화센터를 만들려고도 했죠. 그러나 주변에서 ‘왜 저렇게 판을 벌이나’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어요. 그러니 그런 것을 하려고 해도 먼저 주변의 인식과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돼요.
△ 권혁승 회장: 국내 효 문화를 바로잡고 육성, 창달해야 하지만 아울러서 교양을 갖출 수 있어야 해요. 효는 한국 고유의 문화예요. 이 문화가 옛날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게 아니죠. 물론 서양에서도 방식이 다를 뿐 효도를 잘 하죠. 영국의 역사 철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책에 ‘인류문화 발전을 위해 한국이 크게 기여한 게 있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족제도와 효 사상이다’라고 썼어요. 그는 이러한 효 사상을 전 세계에 번지도록 해 모든 세계인이 가족을 사랑하는 정신이 퍼졌으면 좋겠다는 뜻을 설파했고요. 소설가 톨스토이도 “불효하는 사람은 벗으로 삼지 말라”고 했어요. 미국연방준비제도 의장을 지낸 버냉키(Bernanke)도 미국 프리스턴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제 여러분은 졸업을 하니 매주 한 번씩 부모님에게 전화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생일에 선물을 사주고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1주일에 몇 번씩 전화 걸어 안부를 여쭙는 것이 한국 효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점이 전 세계에 한국인이 어깨 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고, 자부심이라 할 수 있어요.
한국의 효 사상을 세계에 널리 알려서 모든 세계인들이 한국의 효 사상을 본받고 한국하면 ‘아! 효의 나라’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더 나아가서는 효 문화를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록한다든가, 널리 번지도록 힘써야 해요.
△ 이현옥 회장: 이런 분위기를 조성해서 좋은 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여 정부와 언론이 주목하고, 효에 대한 인식이 관철됐으면 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에 대한 좌담회는 한국 언론사, 매체 사상 처음 있는 일 아닐까요? 아마 단군 이래 최초일 것 같아요. 오늘로 끝내지 말고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웃음)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 최종수 이사장: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타고난 소질과 능력을 개발해 나의 길을 찾고 이웃과 사회를 위한 사랑과 봉사가 바로 ‘효’라는 것이죠. 이를 위해 시대에 맞는 효 문화의 창출이 바로 인성 교육의 출발점이라고 보고 한국효문화센터를 2011년 시작했어요.
한국효문화센터는 효에 관련된 교육과 행사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첫걸음을 시작으로 하는 인성 교육과 밝고 건강한 사회 구현이 목표예요.
예술단체장들이 효 문화사업을 하면서 학술회의도 하고, 학생들을 모아 토론한 내용들을 토대로 효 문화를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단초를 발견했어요. 요즘 고등학생들은 입시에 시달리지만, 그중에서도 고전 등을 훤히 꿰뚫는 학생들이 꽤 있어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지만, 마냥 그럴 것이 아니라 헌혈도 하고 기증도 해서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의견도 나왔죠. 그러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시대에 효 문화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해줬어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들의 수준에 맞는 효 문화사업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글짓기, 그림 그리기 대회도 하고, 매년 토론회도 열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 있어요. 국내 최대 규모의 ‘효’를 주제로 한 문화축제로 1회성 행사로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지만 그만큼이라도 확실히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상을 받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만나보면 그때만이라도 가족끼리 효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모를 생각한다고 하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 문화라는 건 다들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는 게 어려워요.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특히 5형제 중 셋째인 나를 많이 아끼셨고 사랑을 주셨죠. 공직생활 중에도, 사업을 할 때도 어머니가 편찮으시면 달려가 돌봐드리는 등 장남 역할을 했어요. 고향 마을에 1981년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면서 선산을 세종시 조치원으로 이전해 효림원을 조성했어요. 어머니는 그 안에 있는 농가주택에서 4개월 동안 고생하시다 90세에 돌아가셨고, 5일장을 치렀어요. 매년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 내려갔고 거기 가서도 돌아가신 어머니와 대화도 나누고 3년 탈상을 했는데 마을 회장이나 이장이 그 모습을 눈여겨봤나 봐요. 그러다 매년 추모식을 하면서 마을 사람 100명을 초대해 아이들에게 선물도 주고, 면장 추천을 받은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500만원씩 장학금도 수여하는 행사를 진행했죠. 사실 3년만 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막상 해마다 해온 것을 그만두기는 어려웠어요. 나로서는 자식의 도리로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소문이 나자 군에서 우리 마을을 성균관장에게 추천해 각지에서 몰려와 선전을 해주고, 포상도 받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1만원, 5000원씩 자발적으로 980만원을 모아서 선산 공원 입구에 효비를 들여놓았어요. 마을이 효의 고장이니까 “마을 입구에 ‘효림원’이라고 세워 놨어요. 그때 어머니가 옥색 한복을 입고 꿈에 선명히 나타나시더니 ‘마을에서 이렇게 효비도 세워주고 행사도 열어줬는데, 너도 고마운 뜻을 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작은 유통업을 하던 나는 영농조합 농장을 하나 인수했어요. 그곳에서 생산하는 오이, 토마토, 배 등 농산물을 국가유공자 요양원이나 보훈병원, 군부대 등 10여 기관에 기증하고 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지역의 소득 증대도 되고, 고용창출도 되니 농민들이 굉장히 좋아합니다.
△ 권혁승 회장: 7년째 백교문학상 효친문학상 작품을 전국적으로 공모하는데, 글과 시 속에 효 사상, 효심 또는 모정이 깃들어져 있는 작품을 심사 기준으로 삼아 상을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사친과 관계없는 글은 입선이 안 되죠. 자식들은 부모가 그렇게 사랑을 줘도 사랑인 줄 몰라요. 일상에서 공기를 마시듯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강릉 시골 마을에다가 사모정 정자를 지었어요. 마을의 쉼터가 되라고. ‘사모정’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해서, 한쪽에는 도예 조각 하는 교수님의 작품도 세워 놨죠. 정자를 강릉시에 기증했는데 하고 나니까 주변에서 그 정자만 가지고 효 사상이 함양되겠느냐 해서 ‘사친문학상’을 만들라 하더라고요. 그걸 만들어 전국적으로 등단한 문인을 대상으로 작품공모를 하고 있어요. 거기다 이 사상을 전 세계에 알려야 되겠다는 의미를 담아 이라는 책을 만들었어요. 국내 200여 도서관에 비치했고, 영어판을 제작해 65개국 130개 도서관에도 전달했어요. 유엔, 세계은행에도 책이 있어요. 대통령, 교육부장관, 문화부장관 등에게도 돌리고,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보냈는데 잘 전달이 됐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작년에 사모정이 있는 공원이 너무 좁다고 해서 확장공사를 1년간 했어요. 높이가 3m인 고석에 ‘효 사상 세계화의 발원지 효향 강릉’이라 쓰고 밑에 영어로도 써놓았어요. 그 옆의 돌에도 효에 대한 글을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새겼어요. 오는 9월에 도 창간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