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셋째 주인 지난주 화요일과 토요일, 일주일에 두 편이나 영화를 봤다. 코로나 정국에 일주일에 두 번씩 극장행(?). 아무리 대책 없는 인간이라고 취급을 받아도 어쩔 수 없었다. 한 편의 독립영화는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고 싶었고 또 한 편의 영화로부터는 화면 가득한 초록 영상을 보며 안구를 정화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솟구쳤다.
근데 이게 무슨 우연일까.화요일에 본 영화는 한국 독립영화 ‘비밀의 정원’. 토요일에 본 영화는 외국 판타지물 ‘시크릿 가든’(The Secret Garden)이었다.의도하고 본 것은 아니었는데 보고 나니 우연찮게 두 편의 영화가 제목은 같고 내용은 완전히 다른 영화였다. 먼저 한국 독립영화 ‘비밀의 정원’을 소개한다.
비밀의 정원… 10년 전 그날
스포츠센터 수영 강사로 일하는 정원과 남편 상우는 젊은 부부다. 좁고 낡은 아파트에서 살다 상우의 부모님이 물려주신 역시 낡은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가기 위해 짐 정리에 바쁘다. 포장이사를 할까 반포장 이사를 할까 빠듯한 돈 계산을 하며 이삿짐 싸기에 바쁜 와중에 정원에게 걸려오는 낯선 전화.
정원은 형사로부터 10년 전 사건의 범인이 붙잡혀 새롭게 조서를 써야 하니 경찰서로 와달라는 전화를 받는다. 10년 전 여고생일 때 정원은 늦은 밤 갑자기 아픈 동생을 엄마와 함께 병원으로 데려갔다. 동생을 돌보기 위해 엄마는 병원에 남고 정원은 다음 날 등교를 해야 해서 새벽에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모르는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만다.
당시 DNA를 증거로 채집했던 경찰이 10년이 지나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가까스로 상처를 다독이며 결혼해 남편과 살고 있는 피해자에게 조서를 다시 써야 한다며 무덤덤하게 전화를 해댄 형사. 정원이 전화를 잘 받지 않자 형사는 집까지 찾아온다. 말하고 싶지 않았던 정원의 비밀이 ‘수사기록’이라는 서류로 형사에 의해 남편에게 까발려지는 황당한 상황은 스크린 너머의 관객들까지 당황하게 만든다.
부부의 평화로웠던 결혼생활은 이렇게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소통이 단절된 채 메말라간다. 아니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남편 상우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정원의 위태로운 일상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정원의 상처는 그 나이에 걸맞지 않게 모든 것을 경험한 듯한 관조적인 자세로 마음에, 수영복 슈트를 입을 때마다 언뜻언뜻 비치는 목 뒤의 칼로 베인 듯한 자상의 흔적으로 몸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정원은 서울에 시험을 보러 온 동생을 고향 태안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남편 상우와 함께 밤 운전을 해 고향집에 도착한다. 그리고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과거의 장소들을 찾아간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정원과 자신 때문에 언니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고 자책하며 의기소침하게 지내며 언니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동생 소희는 그곳에서 과거의 상처와 기억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태안 바닷가에서 옅은 미소를 띠며 함께 걷는 이들 부부의 마지막 장면을 지켜보며 그 후는 어떻게 됐을까 나름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함께 상처를 어루만지며 일상으로 돌아왔을까? 아니면 한 번 벌어진 균열이 점점 더 벌어졌을까?
영어 제목 ‘Way Back Home’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족은 깊은 상처를 받고 물 위를 떠도는 듯 부유하는 정원에게 든든한 두 다리가 돼주고 너의 잘못이 아니라며 어깨를 내어주고 토닥여줬을까? 하지만 영화 속에서 정원의 가정은 그리 하지 못했다. 10여 년이라는 시간을 엄마와 동생과 떨어져 서울에서 사는 이모와 이모부와 함께 지내며 이들을 더 가족으로 느끼며 살아왔으니 말이다.
2017년에 발표해 각종 단편영화제 수상을 휩쓴 ‘미열’을 약 3년 만에 장편영화로 제작한 박선주 감독의 작품이다. 연극계에서 튼튼한 연기를 밑바탕으로 드라마 및 영화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유재명(이태원 클라쓰, 장대희 회장 역), 염혜란(동백꽃 필 무렵, 홍자영 변호사 역), 전석호(미생, 하대리 역) 등의 배우들이 신예 감독의 독립영화에 출연해 힘을 보탰다.
코로나19로 영화 개봉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공들여 제작한 신예 감독의 작품이 쇼케이스로만 끝나지 않고 빠른 시간 안에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정보원이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과 짧은 여름방학에 맞춰 시원하게 문화바캉스를 즐기고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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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먹고 알먹고! 올 여름 문화바캉스 즐기고 연말에 소득공제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문화비 소득공제는 한국문화정보원에 등록된 사업자에게 책(잡지제외), 공연 티켓, 박물관 미술관 입장료를 구매 결제할 경우에만 혜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도서 구입 소득공제 인정 범위 ISBN 979, 978로 시작되는 도서(잡지류는 해당되지 않습니다.)와 ECN이 있는 전자책, 중고책(개인 간 거래는 포함되지 않습니다.)이 해당됩니다. 단 도서와 전자책의 대여비, 문구 등과 결합된 도서(MD 기획 제품)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공연비 소득공제 인정 범위 예매, 취소수수료를 포함한 공연티켓 구입비, 공연에 특화된 축제·행사 관람권(단 공연정보가 티켓 등에 표기돼 있고, 공연티켓 형태로 가격이 책정돼 판매될 경우만)이 해당됩니다. 단 기획상품, 개인 간 중고티켓 거래, 주차비 등이 포함된 공연티켓과 회원권의 구매 및 가입비 등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박물관·미술관 입장료 소득공제 인정 범위 관람(1일 교육·체험 프로그램 포함)을 목적으로 한 입장권이 해당됩니다. 단 기념품, 음료 등 박물관·미술관에서 판매하는 상품과 장기 교육 강좌 비용, 주차비 등이 포함된 회원권 가입비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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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2020년은 나의 고교 졸업 50년, 대학 입학 50년이 되는 해다. 고교 졸업 50년 행사와 기념 여행은 코로나의 위험 속에서도 이미 6월에 강행했다. 이보다 앞서 5월에는 대학 동기들이 모교에서 재상봉 행사를 했다. 많이도 달라진 교정을 둘러보며 반세기 전에 맺은 우정을 되새긴 모임은 재미있고 유익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은 탓일까. 고려대 독문과 70학번 동기들은 전북 군산 고창 일대를 도는 노래여행을 추가로 기획했다. 서울, 서천, 부산에서 각각 모인 여덟 명은 7월 25~26일 1박 2일 동안 호쾌(豪快)하게 술 마시고 창쾌(暢快)하게 노래했다. 동기인 전북대 독어교육과의 이신구 명예교수가 2월에 ‘헤세, 토마스 만 그리고 음악’이라는 책을 낸 이후, 단톡방을 중심으로 음악에 대한 관심과 화제가 풍성해졌다. 그래서 ‘한번 신나게 노래 부르며 놀아보기로’ 의기투합을 한 것이다.
늘 친구들을 도와온 캠퍼스 커플 김한옥(사업)-김영숙 부부가 앞장을 서고, 군산의 뮤직 카페 단골인 이신구 교수가 생각을 더해 노래경연 모임은 이내 결성됐다. 모인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목자(目眥, 눈이 가는 길 또는 눈의 방향)가 불량하다고 내가 늘 지청구하는 부산 사내 윤종기(1등 입학자다), 엄처시하(嚴妻侍下)에 사는 음악광 독일 전문가 배종은(그의 부인이 嚴씨다), 경쟁자 없이 동기회의 회장을 오래 맡고 있는 강국회, 서천에서 활동 중인 연극 연출가 고금석 등이다.
우리가 한바탕 푸지게 논 장소는 군산의 은파호수 옆 ‘Music4u’(뮤직포유) 카페. 토요음악회를 200회나 개최한 곳인데, 이 교수는 이곳에서 문학 강연도 해왔다고 한다. 카페 2층의 널따란 음악당에는 ‘4u’를 발음대로 옮긴 ‘抱裕’(포유) 액자가 걸려 있었다. 서로 너그럽게 안는 여유를 가지라는 뜻인가. 나는 서로 끌어안고 노는 抱遊, 이렇게 쓰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왜 그렇지 않던가. 흥이 나서 노래를 하다 보면 어깨를 겯거나 서로 안고 놀게 되지 않던가.
우리는 누가 무슨 노래를 잘 부르는지 이른바 각자의 18번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아내의 노래, 올챙이 멜로디(Unchained Melody), 엽서 한 장, 모란이 피기까지는, 명태, 메리케인부두 그런 노래들. 나는 이 중 ‘명태’(변훈 작곡)를 50년 전 대학 1학년 때 고금석에게서 배웠다.
고금석은 서예에 입문해 이미 입선도 두어 번 한 사람인데, 산곡(山谷)이라는 호를 쓴다. 내가 얻다 대고 중국 송나라의 서예가 황정견(黃庭堅, 1045~1105)과 같은 호를 쓰느냐고 따졌더니 그의 호가 산곡인 줄 몰랐다, 사는 동네 이름이 산너울이라서 그렇게 지은 것뿐이라고 했다. 괘씸하지만 용서해주기로 했다.
하여간 나는 50년 전 산곡에게 내 레퍼토리 ‘메리케인부두’(남일해 노래)를 떠넘기고 ‘명태’를 내 노래로 만들었다. 앞으로 내가 있는 자리에서는 절대로 ‘명태’를 부르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그러나 나는 치사하게 그가 없는 자리에서는 원래 내 노래인 것처럼 두 가지를 다 불렀다. 결국 산곡에게서 노래를 빼앗은 꼴이 돼버렸다.
이번 군산 여행에서 나는 노래를 되돌려준다고 했다. 그리고 50년 전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가 그는 ‘명태’를, 나는 ‘메리케인부두’를 불렀다. 그가 부르는 ‘명태’는 호소력이 컸다. 오래 연극을 해온 목소리의 울림이 좋은 데다 삶의 곡절과 간난신고(艱難辛苦)가 노래에서 우러나왔다. 그에 비하면 내 노래는 흥은 좀 있으나 스스로 들어봐도 그 이상의 무엇이 없다.
웃고 떠들고 노래한 뒤 호텔에 돌아와 산곡과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명태’를 부르며 둘의 가사를 대조해보았다. 내가 그에게서 배웠는데 왜 내 ‘명태’와 그의 ‘명태’는 다를까. 괄호 안이 그의 가사다.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 지어 찬물(큰물)을 호흡하고 길이나(기다란)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며 춤추며 밀려다니다가(뭉치고 펑퍼지고 몰려다니다가) 어떤 어진(착한)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집트(제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는 ‘명태’를 어떻게 부르게 됐는지 잘 모른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서 노래를 배운 뒤 가사를 찾아서 외우고 익혔다. 말하자면 나는 그동안 교과서처럼 살아왔고 산곡은 열정이 닿는 대로, 마음이 이끄는 데로 움직이며 살아온 게 아닌가 싶다. 이번에 노래를 되바꾸자, 도로 ‘명태’를 가져가라고 한 데 대해서도 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렇다고 ‘메리케인부두’가 돌려주기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닌 건 확실하다.
그런데 나는 이 노래를 어떻게 알았던가. 모르겠다. 1965년 무렵 남일해가 부른 노래라는 것만 알 뿐인데 이 기억도 정확한지 자신이 없다. 2절에 “트위스트 춤을 추는 신나는 그 리듬에”라는 가사가 나오는 걸 보면 1960년대인 건 확실하다. 원곡은 그렇지 않겠지만 나는 이 노래를 한껏 늘어지게 타령조로 부르곤 한다.
다음 날은 고창으로 옮겨 선운사, 미당 시문학관, 인촌 김성수 생가 등을 둘러보았다. 비 내려 수량이 풍부해진 선운사 계곡의 물은 검게 보였다. 참나무의 낙엽에 들어 있는 탄닌 성분이 녹아든 탓이라고 한다. 덕분에 수면에 비치는 풍경은 훨씬 더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마지막 일정으로 점심을 먹을 때, 산곡은 노랫가락을 한자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기민요였다. “바람이 물소린가 물소리 바람인가/석벽에 걸린 노송 움츠리고 춤을 추네/백운은 허우적거리며 창천에서 내리더라.” 푸른 하늘에 흰 구름, 그리고 소나무와 바람과 물. 짧은 노래에 한 폭의 그림이 들어 있다. 경기민요의 많은 소절 중에서 가장 시적인 대목이었다.
그렇구나. 산곡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에 가 있고, 그의 노래는 더 풍부해졌구나. 그러니 굳이 ‘명태’를 되찾아갈 필요가 없겠지. 나는 더 이상 그에게 노래를 되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각자 ‘명태’를 깜냥껏 부르고 편한 대로 ‘메리케인부두’를 흥겹게 노래하면 되는 것이었다. 노래가 탄닌이 되어 그와 나, 그리고 우리 모든 벗들의 우정이 수량이 풍부한 냇물처럼 흐르고, 키 크고 잘 자란 나무처럼 여울지면(여울지다=식물의 열매나 꽃, 잎 따위가 몹시 많이 열리다.) 되는 거 아닌가. 노래는 부르는 사람의 것이고, ‘글이 곧 그 사람’이듯 ‘노래도 곧 그 사람’인 것이다.
My Dear 피노키오展, 아무런 정보 없이 가서 봐도 친근한 전시 제목이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말이 진실인 줄 알았던 어린 시절, 그래서 정직함의 중요성을 일찍이 알게 했던 이야기 ‘피노키오의 모험’.
'피노키오'는 1883년 이탈리아 작가 콜로디의 동화로 탄생했고 우리에게는 월트 디즈니가 각색하고 제작한 '피노키오의 모험'이라는 애니메이션으로 더 익숙하다. 착한 목수 제페토 할아버지가 나무를 깎아 만든 피노키오 인형 이야기는 동화나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영화, 연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다뤄지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지금껏 즐거움을 주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가까운 벗처럼 친숙한 캐릭터인 피노키오를 주제로 한 전시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그동안 책이나 영화 등에서 봐왔던 것과는 달리 쉽게 접하지 못했던 관련 희귀 도서나 소품들도 진열되어 있어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크다. 특히 국내외 작가들의 독창적인 해석으로 표현한 피노키오 작품 173점도 전시돼 있다.
환하고 밝은 분위기의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첫 번째 섹션 '서막: 피노키오의 모험'을 관람할 수 있다. 이 섹션의 작가는 카를로 콜로디. 어른 아이 구분 없이 누구나 유명 작가들의 피노키오의 해석을 즐길 수 있도록 구성한 공간이다. 플래시 없이 대부분 촬영도 가능하고 군데군데 쉴 수 있는 곳도 마련되어 있다.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다. 영상이나 나무로 설치된 작품과 소소한 소품 전시가 계속 이어져 지루할 틈이 없다.
저작권 보호 때문에 촬영을 할 수 없었던 로베르토 인노첸티 작품 위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나무토막으로부터 학교에 다닐 즈음의 나이로 만들어진 피노키오는, 유아기를 지나며 성장하는 과정 없이 그렇게 곧바로 세상 속으로 던져졌다." 로베르토 인노첸티는 많은 작가가 피노키오 캐릭터에 집중할 때 피노키오의 역사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작품 속에는 피노키오의 성장 스토리가 녹아들어 있다. 마을이나 마을 사람들, 시대적 풍경이 피노키오의 유년기를 떠올리게 했다. 화풍은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의 소박하고 적막한 골목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앤서니 브라운, 제럴드 맥더멋, 마우리치오 콰렐로 등 세계적인 일러스트레이션 거장들이 그려낸 개성 넘치는 피노키오를 볼 수 있도록 몇 개의 전시관이 이어져 있다. 국내에서는 민경아, 조민서 작가 등이 참여했다. 이들이 독특하고 현대적인 감성으로 우리가 몰랐던 피노키오 이야기를 풀어놓아 시종일관 흥미롭다.
피노키오를 소재로 한 그림과 전시장 곳곳에 설치된 영상 역시 재미있다. 관람객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에서는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완성도 있는 관람을 시도해 눈길을 끈다. 시간 맞춰 도슨트 해설을 들으면 이해도 쉽고 몰랐던 사실까지 알게 된다. 다양한 콘텐츠로 구성된 복합 전시 'My Dear 피노키오展'이다
전시장에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 주부가 유난히 많았다. 피노키오라는 동화적 특성이 한몫했을 것이다. 작가 콜로디는 동화를 쓰면서 "어른들은 즐겁게 해 주기가 너무 어렵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양한 작가들의 동화적 상상력이 발휘된 작품들은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기성세대들에게도 큰 즐거움을 준다.
전시장 입구부터 노랑과 분홍, 파랑 등의 밝고 과감한 색감이 압도한다. 그림동화다운 따스하고 서정적인 느낌 속에 푹 파묻혀 작품을 구경하다 보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낄 것이다.
전시기간: 6월 26일~10월 4일
관람시간: 10시~19시(매표 및 입장 마감 오후 6시) 매주 월요일은 휴관
전시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입장료: 성인 1만5000원, 청소년 1만3000원, 어린이 1만 원
★ 그림자 극장: 토․일요일 11:30 / 13:30 / 16:00 (선착순 20명)
★ 도슨트 해설: 화요일~일요일 11:00 / 13:00 / 15:30 / 17:00
★ 구연동화 : 피노키오의 오리지널 이야기(화요일~금요일 14:30 / 16:30)
'프랑스여자'가 독립영화로서는 드물게 잔잔한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독립영화의 흥행 기준으로 불리는 1만 명 관객을 개봉 일주일 만에 돌파했다. 6월 20일 기준 관객 수가 1만7270명이다. 지난 6월 4일 개봉했으니 하루에 1015명 정도가 이 영화를 관람한 셈이다. 코로나 정국에서 독립영화가 건져 올린 결과라는 점에서 이 숫자의 의미가 눈물겹다.
'사랑의 불시착'에서 귀때기로 활약한 데 이어 '부부의 관계'에서 쉴 새 없이 바람을 피던 회계사로 나와 눈도장을 강하게 찍었던 김영민, 전원일기의 영원한 복실이 김지영의 출연으로 개봉 전 미디어의 주목을 받은 영향도 있을 듯하다.
김희정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영상미는 잔잔하지만 어딘지 미숙한 느낌도 주는데 이 또한 의도된 듯하다. 미숙하지만 순진하고 열정적이고 마치 어린 싹이 살아 숨 쉬는 듯한 영상들이 장점이다. 아마 이 주제를 세련되게 연출하고 영상을 뽑았다면 아련한 느낌이 없어져 가슴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훨씬 작았을 것이다.
'프랑스여자'는 한때 배우를 꿈꿨지만 파리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프랑스인과 결혼해 살고 있는 미라의 한국 나들이 이야기다. 20년 전 배우의 꿈을 안고 공연예술아카데미에서 함께 공부했던 옛 동료들을 만나는 간단한 플롯으로 구성돼 있다.
미라는 파리로 연기공부를 하러 떠났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연기 대신 동시통역대학원을 다니며 프랑스에서 한국 관련 일을 하며 정착한다. 꿈을 위해 떠난 유학이지만 바람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연기를 갈망하며 아카데미를 다녔던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고백한다.
미라는 지금은 연기를 하고 있지 않지만 공연예술아카데미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과 꾸준히 연락하며 지낸다. 이들 동기들은 영화제 참석을 위해 혹은 연출을 위해 파리에 방문하면 꼭 미라에게 연락해 만나면서 관계를 이어나간다.
미라는 동시통역대학원 후배와 바람이 난 남편과 이혼을 하고 한국을 찾는다. 도착하자마자 잘나가는 여성감독으로 카리스마 작렬 중인 영은과 연극 연출자인 성우를 만난다. 이들은 아카데미를 함께 다녔던 동료 중 가장 친했던 사이이기도 하다.
영화는 미라와 영은, 성우, 그리고 2년 전 자살한 해란 등 4명의 과거가 교차되면서 서로 다르게 기억되고 잊힌 사실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의식 속에서 스스로 삭제한 기억들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물어보는 미라는 과거에 갇혀 사는 유형의 인간이다. 꿈을 안고 외국행을 선택했지만 꿈도 생활도 뜻대로 이뤄진 것이 없다.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은 과거의 아름다웠던 시절을 함께했던 이들과 해후하면서 위안받는다. 미라는 이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과거의 어느 순간 속으로 홀로 들어가 시간여행을 한다. 이 기억들은 꿈일까? 아니면 망상일까? 혹은 사실일까? 미라에게서만 조각난 기억의 편린들일까?
영화 속에서는 아무도 미라의 불안정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타국에서 한국인으로 살다가 프랑스인 남편과 이혼을 하고 나서야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그녀. 꿈을 위해 노력했으나 이루지 못했다는 좌절감 때문에 함께 공부한 동료들에 대한 선망을 감추지 않는다. 경계인, 주변인으로 살고 있으나 마음만은 그 누구보다 뜨겁다. 하지만 차분히 스스로를 다스린다.
프랑스 국적의 한국 여자 미라는 스스로 빗장을 걸고 주변인으로 살아가며 스스로를 옥죈다. 해란에 대한 집착은 그녀의 자살이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죄의식이 남아 있어서다. 해란과 성우는 서로 사귀는 사이였지만 성우는 원숙한 누나인 미라에게 계속 구애 중이다.
파리로 떠나기 전 바다를 보기 위해 함께 떠난 여행을 기억하지 못하는 미라와 이를 일깨워주는 성우. 연인도 친구도 아닌 두 사람의 애매한 관계 속에서 홀로 전전긍긍하던 해란은 자해소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해란의 자해 이유는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다. 감정 기복과 변덕이 심한 여배우의 기질로 치부되고 만다. 미라만이 자신과 성우가 키스하는 걸 본 해란이 자해한 것 아닐까 추측해본다. 물론 이런 추측도 미라만의 생각이다. 미라는 확인하고 싶어 하지도, 말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개인적인 너무나 개인적인… 그래서 더 프랑스 영화 같은 작품 '프랑스여자'다. 우리의 기억들은 어떤가. 서로 다르게 기억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서 떠오르는 옛 기억들이 나를 어지럽혔다.
근 반세기가 지나도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되면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다.
가을 잎 찬바람에 흩어져 날리면 캠퍼스 잔디 위엔 또다시 황금 물결
잊을 수 없는 얼굴 얼굴 얼굴 얼굴들 루루루루루 꽃이 지네 루루루루루 가을이 지네
‘날이 갈수록’이다. 이 노래를 부른 기라성 같은 가수는 많은데 정작 작곡·작사자는 잘 모른다. 어떤 이는 ‘몇 미터 앞에 두고’, ‘안돼요 안돼’ 등을 부른 트로트 가수 김상배의 자작곡으로 알고 있다. 가수 김상배가 ‘가요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를 때면 TV 화면 밑으로 ‘작곡·작사·노래 김상배’라는 자막이 뜨기 때문이다.
웃픈 현실이다. 이 노래의 원작자인 김상배 씨가 50여 년 만에 인터뷰에 응했다.
그동안 그가 얼굴 없는 작사·작곡가로 발표한 노래는 70여 곡이나 된다. 공전의 히트곡 ‘날이 갈수록’은 1971년 가을에 만들어졌다. 대학교 2년을 마치고 입대한 김상배 씨가 휴가를 얻어 오랜만에 방문한 교정에서 뒹구는 낙엽을 보며 즉흥적으로 만든 노래다.
이 노래는 신촌 대학가를 중심으로 운동가요처럼 불리다가 마침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영화를 만들고 있던 故 하길종 감독 귀에까지 들어갔다. 영화 주제곡을 찾지 못하고 있던 하 감독은 대학가에서 불리던 이 노래를 듣고 원작자 김상배 씨를 수소문해 만났다.
이후 ‘날이 갈수록’이 ‘바보들의 행진’ 주제곡으로 선정되면서 김상배 씨는 영화 각색에도 참여하고 음반 크레디트에도 작사·작곡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해 기타도 배우고 피아노도 배웠지. 근데 음악을 하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집에 있던 기타며 피아노를 다 때려 부수더라고. 그래서 할 수 없이 대학은 그나마 국문학과로 입학한 거야. 그런데 거기 들어가서 희곡 쓰고 연출한다며 또 난리치고 다녔지.”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를 전공으로 택했지만 그는 몰래 음대 작곡학과 강좌를 들었다. 그리고 이때 한 학기 동안 도강한 ‘작곡에 대한 이해’를 밑천 삼아 틈틈이 노래를 만들었다. 당시 작곡에 대한 강의를 한 교수도 그가 도강한다는 걸 알았다. 처음에는 뭐라 하더니 학기가 끝날 때쯤에는 포기하고 오히려 그의 열정을 칭찬했더란다.
집안의 반대로 그의 음악적 재능은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했지만 음악적 재능 못지않은 문학적 능력만큼은 제대로 발휘했다. 대학생활 내내 희곡 창작에 빠져 지낼 만큼 연극에 미쳐 살았다. 학교 수업 때문이라고 하면 아버지도 더 이상 어찌하지 못했다. 그저 연극에 빠져 사는 아들을 못마땅해하는 것밖에 없었다.
“국문학과를 다니면서 연극반 동아리 활동을 했어. 희곡 쓰고 연출하고… 당시 동아리 후배였던 마광수도 함께 활동했지. 1974년 가을이었어. 내가 ‘어느 애꾸의 죽음’이라는 창작극을 쓰고 무대에 올리기 위해 연습을 한창 하고 있을 때였어. 공연 하루 전날 갑자기 서대문경찰서에서 형사들이 들이닥쳐 연극반 학생들을 끌고 간 거야. 내가 ‘박정희 대통령이 죽을 것이다’ 그런 말을 했다는 거지. 아니 그럼 사람이 안 죽어? 신이야? 그냥 그런 차원에서 말을 한 건데 우리가 무대에 올리기 위해 연습하던 작품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문학적 상상력과 음악적 재능을 뽐내던 청년
1970년대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어떤 비판도 허락되지 않던 시절이다. 동네 저잣거리에서 막걸리 한잔하면서 안주 삼아 통치자에 대해 비판 한마디라도 하면 긴급조치 아래 구속 수감되던 서슬 퍼런 통치의 시대였다.
유명 대학교의 연극 공연 등 주요 행사는 보안과 형사들이 눈을 치켜뜨고 감시를 했다. 희곡 작가였던 김상배 씨도 당연히 사찰 대상이었다. 그때 경찰서에 잡혀간 그는 감금된 상태에서 죽도록 매를 맞으며 회유당했고 그렇게 일주일을 넘긴 뒤 각서를 쓰고 겨우 나왔다. 각서 내용은 딱 두 가지였다. 첫째, 다시는 희곡 나부랭이 같은 글을 쓰지 않겠다. 둘째, 이곳에서 고문받았다는 사실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악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음악과 문학을 아우르는 재능을 갖고 있던 청년 김상배는 그렇게 스스로 가슴속에 대못을 쳤다. 당연히 그 해 연세대학교 연극반 공연은 없었다.
긴급조치까지 내리며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시절, 그 정도의 수난을 당하고 풀려날 수 있었던 건 아버지가 애달프게 뛰어다닌 덕분이었다. 금융권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아버지는 아들을 빼내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부탁을 했단다.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풀려난 지 한참 지나서였다.
청년 김상배의 젊은 시절은 그렇게 시들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집에서 그토록 원하는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직장에 입사했다. 대학 동기였던 정몽헌 씨가 같이 일해보자며 현대그룹에 들어올 것을 권유한 이유도 있었다.
현대그룹에 입사한 그는 조선, 건설 등의 분야에서 현대맨으로 20년을 살았다. 더 이상 미디어에 얼굴을 드러낼 일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못 느꼈다. 그래도 틈틈이 곡을 써서 음반을 내기도 하고 가수들에게도 줬다.
정주영 회장과의 에피소드
현대그룹에서 일할 때 정주영 회장과의 에피소드도 있었다. 어느 날 정 회장이 갑자기 그를 불렀다고 한다. 그가 회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정 회장은 못마땅한 목소리로 “너 요즘 돈이 궁하냐?” 하며 크게 꾸짖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그는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전후사정은 이랬다. 정 회장이 어느 날 한 술집 입구에 ‘날이 갈수록’ 김상배 출연이라는 홍보 플래카드가 크게 걸려 있는 걸 보고는 그를 불러 밤무대에 나가지 말라고 야단을 쳤던 것이다. 그도 깜짝 놀라 술집을 찾아가 “‘날이 갈수록’ 원작자는 나다. 나는 가수 김상배가 아니니 현수막을 내려 달라.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겼다”라고 사정을 하고서야 플래카드를 철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 회장에게 야단을 맞아서가 아니라 현대에서 일할 때는 도무지 틈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가슴속에 불타오르는 창작욕은 어찌할 수 없어 술 한잔 거나하게 걸친 날이면 기타를 붙잡고 코드를 잡으며 간간이 노래를 만들었다.
‘창작’만이 나의 오아시스였다
1978년에 가수 이동원이 부른 ‘가버린 날들’, 1981년 대학가요제에서 단국대학교 밴드 스물하나가 불렀던 ‘스물한 살의 비망록’은 그가 회사생활 틈틈이 작업했던 곡들이다. 특히 스물하나가 불렀던 노래는 대학가요제 입상을 거쳐 가수 이택림도 불렀고, 2003년에는 자전거를 탄 풍경이 리메이크하는 등 가수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의 반대로 소위 딴따라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지만 가끔 곡을 만들어 가수들에게 줬다. 그들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녹음실에서 음반작업을 할 때는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창작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곤 했다.
‘날이 갈수록’이라는 주옥같은 곡을 만든 그가 문화계나 방송계에서 일한 게 아니라 현대그룹에서 샐러리맨의 꽃인 임원자리에까지 앉았다니 약간의 배신감(?)이 든다. 또 그렇게 바쁜 생활을 하면서도 창작의 불꽃은 대단했구나 하는 경외감도 밀려온다.
‘날이 갈수록’은 어떤 과정 속에서 탄생한 걸까?
“이 노래는 내 첫 사랑에 대한 자기고백 같은 노래야. 대학교 2년 다니고 휴학한 후 군대를 갔어. 마음속엔 요즘 말로 썸 탔던 여학생을 품고 있었지. 그런데 휴가를 나와 보니 그 여학생이 다른 남학생과 사귀고 있더라고. 허탈했지. 마침 그때가 가을이었는데 연세대 백양로에 흩어진 낙엽처럼 인생이 그리 허무할 수 없더군. 시간이 지나면 이 풋풋한 첫사랑도 잊힐 테고,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면 일만 하다 인생이 그냥 그렇게 흘러가려나 하는 생각들? 그게 배경이 됐지.”
1995년 현대그룹에서 이사로 퇴직한 후에는 콘텐츠 비즈니스 사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일을 하는 동안 이전만큼 창작에 대한 의욕이 생기질 않았다.
“비즈니스로 접근하니까 더 안 써지는 거야. 안 되겠다 싶어서 일을 접고 창작자로 살겠다고 다짐했어.”
2012년 그는 다시 창작에 매달렸고 신인상 공모전에도 도전했다. 몇 차례의 도전 끝에 2015년 종합예술잡지인 한국문학예술이 공모한 시나리오 부문에 ‘까떼리나’(나비의 꿈)가 당선됐다. 그의 나이 67세 때였다. 그는 당선소감에 “40년 공백을 깨고 태어난 졸작을 뽑아주시어 인생 이모작 등단의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합니다”라고 썼다.
1974년 타의에 의해 발표되지 못했던 ‘어느 애꾸의 죽음’ 이후 절필을 선언하고 40년 만에 다시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끝까지 창작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창작인으로 돌아와 자유로움을 누리고 있다는 김상배 씨. 한때 좌절됐던 꿈을 다시 찾기 위해 72세 나이에 열정을 불태우는 그의 모습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수사가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김상배 씨는 요즘…
김상배 씨는 최근 앨범 녹음을 준비하고 있다.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온 후배들의 재능이 아까워 더 늦기 전에 함께 앨범 작업을 해보려 구슬땀을 흘리는 중이다. 1980년도에 포크 남성듀엣으로 활동했던 ‘나이테’ 멤버 구명회 씨와 박시몬 씨가 그들이다.
‘나이테’는 1980년에 가수 윤형주의 기획으로 앨범을 발표한 뒤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가끔 LP판 수집가들에 의해 두 사람이 소환되기도 하는데 ‘나이테’는 현재 발매 앨범만 등록돼 있고 가수 이름은 없어 이들이 과연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이 40여 년 만에 다시 기타를 들었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거주하다가 몇 년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종적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다.
미국에서도 두 사람은 버지니아 주 근처에서 가까이 거주하며 함께 찬양 사역을 하는 등 피우지 못한 음악의 꿈을 잊지 않았다. 최근 김상배 씨가 작사·작곡한 ‘망각’과 ‘인사동 그림자’ 등의 노래로 앨범 작업을 하고 있다. ‘나이테’ 멤버인 구명회 씨는 개그맨 故 구봉서 씨의 큰아들이다.
구명회 씨 역시 음악적 재능을 아버지 반대로 펼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공통점 때문일까? 김상배 씨와 구명회 씨는 오랜 시간 ‘형 먼저 아우 먼저’를 외치며 각별하게 지낸다. 두 사람이 준비하는 앨범에 올드 팬들의 격려가 필요해 보인다.
나는 눈물이 메마른 줄 알았다. 환갑이 넘어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눈물은 없을 줄 알았다. 이 나이에 섣부른 감성에 젖어 눈물 흘리는 것은 사내대장부가 아니라고 다짐했었다. 여간해선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눈물은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슬픔의 눈물도 아니요, 분노의 눈물도 아니었다. 벅찬 감동의 눈물이었다.
춘향과 이몽룡은 남원 광한루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눈다. 그러다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떠나는 이몽룡과 헤어져 할 때 부르는 ‘이별가’가 애간장을 녹인다. 그 후 새로 부임한 사또의 끈질긴 수청 요구를 거절하고 감옥에 갇히는 춘향은 기약 없는 벌판에 내몰린다. 그러던 어느
날 몽룡은 거지꼴로 춘향이네 집을 찾아오게 된다. 실망한 춘향 어미 월매와 감옥에 갇힌 춘향을 찾는다. 목놓아 우는 춘향과 집안도 망하고 과거도 떨어져 거지꼴로 왔다는 몽룡, 이제 기댈 언덕이 없는 춘향이 이몽룡에게 부탁한다. "낼 처형되려 가거든, 무거운 칼끝이라도 거들어 주고, 죽으면 사체라도 수습하여 화장한 후 둘이 만났던 곳에 뿌려달라"고 애원한다.
다음날 이몽룡은 거지 차림으로 사또 잔치에 참여한다. 시 한 수 지어 올리니 암행어사 출두를 눈치채고 관리들은 도망하기 바쁘다. "암행어사 출두야!" 소리에 청천벽력이 쏟아지고 사또는 그 죗값으로 투옥된다. 춘향을 불러내 ‘어사또인 내 청도 거절할 거냐?’고 춘향의 의지를 떠본다. 춘향이 "어서 죽여달라" 청하니 드디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춘향과 극적 상봉하게 된다.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던 이 순간 그동안 쌓였던 화산이 폭발하듯 벅찬 감동이 치솟는다. 억울하게 당한 약자의 설움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역전 드라마다. "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치며, 희망 없는 거지꼴의 낭군이 어사또로 나타난 기막힌 반전의 힘이다.
사실 고전 중 춘향전만큼 잘 아는 내용도 없다. 어릴 때부터 보고 들어온 게 춘향전이다. 소설로 연극으로, 영화로 뮤지컬로, 심지어 발레나 드라마로 춘향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그러니 사내가 체면 구기게 눈물까지 흘리겠나 다짐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무엇이 이렇게 무장해제를 시키는 걸까? 그것이 창극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공연을 보는 내내 관객은 몰입하게 된다. 배우의 몸짓 숨소리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다. 같은 춘향가 한 대목이라도 누가 부르는가에 따라 제각각의 소리로 표현하는 까닭에 언제 누가 불러도 새롭다. 춘향전이 그 오랜 세월을 사랑받는 까닭이다.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올려진 2020년 '춘향'은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잘 살려냈다. 순종하는 수동적인 춘향이 아니다. 요즘 젊은 여성처럼 당차고 당돌하다. 백년가약을 약속하는 계약서를 존엄한 사또 자제 이몽룡이 보는 앞에서 좍좍 찢어 조각을 낸다. "이까짓 종이 쪼가리가 무슨 약조가 되겠느냐?"고 묻는다. 그러고는 천지신명께 맹세를 드릴 것을 요구한다. 사또와 어사에게도 끝까지 굴하지 않는 지조와 절개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거지 위장을 한 이몽룡이 춘향의 수청 사실을 떠보다 남원 농부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장면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의녀 춘향을 어찌 보는 거냐?"고 달려들어 쫓아 내 버린다. 당시도 그렇지만 오늘날도 춘향은 남원고을의 자랑이고 사랑받는 존재다. 수백 년을 흘렀어도 춘향이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오랜만에 따스한 눈물이 흐르는 감성을 되찾아 감사하다. 각박하고 힘든 세상에 단비 같은 창극 '춘향'이 반갑다.
1989년 초연 이후 30년 넘게 대학로의 스테디셀러 연극으로 사랑받고 있는 ‘늘근도둑이야기’. 대통령 취임 특사로 풀려난 두 늙은 도둑이 노후 대책을 위한 마지막 한탕을 계획하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린다. 부조리한 사회에 유쾌한 돌직구 유머를 날리는 이 작품에 빼놓을 수 없는 터줏대감, 바로 배우 박철민이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 작품에 열성을 다할 수 있었던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2003년부터 18년 동안 작품을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그전부터 극단 ‘차이무’의 공연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당시 이상우 연출가께서 ‘늘근도둑이야기’ 제안하셨죠. 너무 흥분돼서 바로 합류했습니다. 무대 위에서 마음껏 놀 수 있는 캐릭터고, 자유로운 형식인데, 마치 장인이 치수에 딱 맞게 한 땀 한 땀 지어준 옷처럼 잘 맞아요. 그게 아마 현재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 같아요.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고 있는데, 특별히 연극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면요?
특히 관객을 직접 만난다는 부분이 다르죠. 또 무대 위에서는 NG가 없어요. 매번 새롭습니다. 마치 효모가 살아 있는 생맥주 같다고나 할까? 관객들의 눈을 보고 감정을 주고받으면서 그날그날의 공연을 완성하는 겁니다. 관객과 잘 호흡할수록 웃음도, 슬픔도 커지고 깊어지곤 하죠.
오랜 세월 작품에 익숙해진 반면, 혹시 매너리즘을 느낀 적은 없으신지요?
가끔은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심지어 첫 대사를 하면서 ‘언제 끝나나’ 했던 적도 있죠. 그런데 그럴 때마다 저를 잡아준 건 관객들입니다. 뜨거운 관객들의 반응에 덩달아 열정이 끓는 경험을 하면서, 어느새 이 작품으로 우리가 한길을 걷는구나 싶었죠. 정말 눈물 나게 고맙고, 그에 보답하기 위해 꾸준히 체력관리도 하면서 매 공연 담아낼 수 있는 사회 연안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답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점점 역할(덜 늘근도둑)의 나이와 가까워지고 있죠?
몇 년 전 배우들이랑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러다 진짜 캐릭터 나이(극 중 환갑)까지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이제 정말 몇 년 안 남았어요. 체력이 되면 죽을 때까지 하고 싶습니다. 배우로서 자신감이 떨어지고 연기에 한계를 느낄 때면 늘 이 무대에서 에너지를 얻곤 해요.
10여 년 전 이 연극을 본 관객에게 작품을 다시 추천한다면요?
제가 노련해진 만큼 무대 자체도 세월을 거치면서 더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작품이 주는 웃음이나 해학도 훨씬 커졌다는 생각이 들고요. 사실 저희 연극이 끝나고 여운이 긴 편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공연을 통해 꼭 뭔가를 얻어간다기보다는 가슴이 답답하신 분들, 한번 실컷 편하게 웃고 싶은 분들이 보러 오시면 좋겠습니다. 또 긴 세월 동안 우리 연극을 사랑해주시고 찾아와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네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연기와 무대로 찾아뵙겠습니다.
△연극 '늘근도둑이야기'
일정 오픈런 장소 대학로 유니플렉스 3관 연출 박정규 출연 박철민, 태항호, 노진원 등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지게 목발 두드리며 노래 부르고 다니던 1960년대 공주 시골의 청년들 중에 석싱이라는 이가 있었다. 이름이 김석성인데, 어른들은 대충 석싱이라고 불렀다. 기남이도 기냄이라고 부르는 게 충청도 사람들인데 뭐. 내 또래인 석싱이의 동생은 석윤이었지만 서균이가 아니라 성뉸이라고 불렀다.
나보다 8~9세 많은 석싱 씨는 동네 새마을지도자였다. 아니, 그때는 새마을운동이 아니라 4H운동이었지. 4H는 1902년 미국에서 처음 조직된, 두뇌(Head)·마음(Heart)·손(Hand)·건강(Health)의 이념을 지향하는 청소년 단체다. 국내에서는 4H가 지덕노체(知德勞體)로 번역돼 농업구조와 농촌생활 개선을 위해 활동하는 협동조합 형태로 전개됐다.
조합원들이 행사 때마다 부르던 노래는 “씩씩한 흙의 용사 송정4H”로 끝난다. 동네마다 지명만 바꿔 부르던 4H 주제가다. 우리 동네 이름은 되찬이인데, 목숨을 되찾고 장수하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한자로는 전혀 뜻이 다른 송정(松亭)이 돼버렸다.
석싱 씨는 농사든 무슨 일이든 다 잘했다. 지도력도 있고 조직력도 있는 우두머리 청년인 데다 얼굴도 잘생겨 동네 처녀들이 애를 태웠다. 어느 집에선가 열리던 4H회의엔 나 같은 초등학생 조무래기들도 갔는데, 밤마실 나오듯 거기 참석하는 처녀들한테서는 석싱 씨를 의식한 분 냄새와 교태를 쉽게 맡을 수 있었다.
우스운 것은 석싱 씨의 할머니였다. 평소 며느리와 사이가 좋다가도 수틀리면 “연애 걸어 시집온 년”이라고 흉보며 욕했다. 그 당시 남녀 간에 연애를 거는 건 품행이 방정치 못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자기 아들과 연애를 해서 며느리가 됐는데도 그걸 흉을 잡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하여간 동네 처녀들은 석싱 씨와 연애를 걸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어린 내 눈에도 다 보였다.
그런 석싱 씨가 스타일 구긴 일이 한 번 있다. 어느 가을밤에 석싱 씨네 집에서 송정4H 주최 연극 공연이 열렸다. 무대는 마루, 객석은 마당. 동네 사람 다 모인 가운데 화톳불을 피우고 한바탕 판이 잘 벌어졌다. 일제 순사인지 북한 괴뢰군인지가 양민들을 괴롭히는 내용인 건 생각나는데, 연극 제목은 잊어버렸다. 웬일인지 석싱 씨는 주연이 아니라 일제 순사인지 북한 괴뢰군인지 악역을 맡았다. 일제 순사라고 해두자.
한 순사가 숨은 독립군을 찾아내라며 주인공 처녀를 마구 닦달했다. 처녀가 울부짖으면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반항할 때 그 순사의 상급자인 우리의 석싱 씨가 등장했다. 등장이랬자 방 안에서 마루로 나오는 건데, 목총을 든 석싱 씨는 방문을 거세게 열고 대차게 마루로 내려서면서 “에누리 없어 이년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소리를 지를 때 몸의 균형을 잃고 엎어져 사람들이 와 웃어버렸다. 울던 처녀까지 웃었다. 석싱 씨는 바로 멋쩍게 일어났지만 그다음 대사를 까먹어 연극이 영 거시기해졌다.
나는 그때 에누리가 무슨 말인지 몰랐다. 다만 각본에도 없는 말을 석싱 씨가 즉석에서 애드립(물론 이 말은 나중에 안 것)으로 외쳤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확 왔다. 에누리라는 말을 정확하게 안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다. 주로 물건을 깎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었다. 그러나 석싱 씨가 쓴 에누리는 ‘용서하거나 사정을 봐주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에누리는 1) 받을 값보다 더 많이 물건 값을 부르는 일, 또는 그 물건 값, 2) 값을 깎는 일, 3) 실제보다 더 보태거나 깎아서 말하는 일, 이렇게 세 가지 뜻이 있고 네 번째로 석싱 씨의 에누리가 있었다. “일 년 열두 달도 다 사람이 만든 거고 노래도 다 사람이 만든 건데 에누리 없이 사는 사람 있던가?”(박경리 ‘토지’), “토지는 극히 비옥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은 상해와는 딴판으로 순후하여 상점에 에누리가 없고 고객이 물건을 잊고 가면 잘 두었다가 주었다.”(김구 ‘백범일지’) 이런 문장이 예로 제시돼 있다. 그런데 요즘은 에누리가 물건 값을 깎는 의미로만 쓰이는 것 같다.
에누리가 유명해진 건 코미디언 살살이 서영춘(1928~1986)의 ‘시골영감 서울 가는 기차놀이’라는 노래 덕분이다.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라, 차표 파는 아가씨와 실갱이하네.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어? 깎아달라고 졸라대니 원 이런 질색. 기차는 삑 하고 떠나갑니다. 영감님이 깜짝 놀라 돈을 다 내며 깎지 않고 돈 다 낼 테니 나 좀 태워주. 저 열차 좀 붙들어요. 돈 다 낼 테니. 삼등차는 만 원이라 자리가 없어 옆의 칸을 슬쩍 보니 자리가 비었네. 옳다구나 땡이로구나 집어탔더니 삼등차에 이등칸이라 돈을 더 물어….” 이런 내용이다. 가사도 재미있지만 중간 중간의 웃음이 걸판지다.
에누리는 얼핏 일본 말 같지만 우리말이다. 세일이나 할인 이런 말보다 ‘에누리 몇 %’ 식으로 쓰면 참 좋을 것 같다. 값을 부풀리든 깎든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는 없겠지만 값을 더 부르는 에누리를 대놓고 광고하는 상인들은 없겠지.
석싱 씨는 그 뒤 어떻게 됐을까? 농사를 버리고 정든 고향을 떠나 대전인가 어디에선가 노동을 하며 산다는 말까지는 들었지만 그다음은 모르겠다. 하지만 에누리라는 말을 알려준 것 하나만으로도 석싱 씨는 내 삶에 의미가 있는 분이다. 선한 사람이니 어디에서든 부디 건강 평안하고 에누리 없는 복을 받으시기를.
‘오늘 같은 밤’,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 등의 메가 히트곡들로 7080세대에게 깊이 각인된 가수 이광조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자유로운 영혼’이다. 거친 가요계에서 수십 년 동안 매니저와 기획사도 없이 자신이 마음에 드는 공연과 음악활동을 했다. 사정이 그러니 당연히 아무런 홍보도 없이 음반을 냈다. 그런데도 노래가 ‘알아서’ 성공했다는 점은 숙명론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그가 최근 생애 최초로 신성사업단을 자신의 기획사로 삼아 새롭게 가수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무엇이든 거침없이 말하며 자신의 인생에 머뭇거림이 없는 남자, 이광조만의 특별한 삶과 생각을 만나봤다.
자유롭다. 이광조와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것은 자유 그 자체인 사람이라는 인상이었다. 말하자면 진짜 보헤미안이다.
“저는 여태까지 유명한 사람들에게 곡을 받은 적이 별로 없어요. 그 사람들이 별로 유명하지 않을 때 가서 ‘한번 들려줘봐’ 하고 듣고 나선 할 건가 안 할 건가를 결정했죠. 어차피 매니저도 기획사도 없었고. 저는 자유스러운 걸 좋아해서 남에게 묶이는 걸 못해요.”
구애받는 걸 못 참는 자유 영혼
그는 심지어 “지금 노래는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까지 말한다. 바로 옆에 최근 그와 손잡은 기획사 대표 겸 매니저가 있는데도 말이다.
“안 하려고 했는데 홍순호 대표가 ‘안 하면 안 된다’ 해서 한 거죠.(대표 웃음) 어쩔 수 없이 친구 때문에 이렇게 트로트도, 유튜브도 하고요. 저는 실은 아무것도 안 하는 걸 제일 좋아해요. 럭셔리하게는 못 살아도 길거리에서는 살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어떻게든 일을 시키려는 기획사 대표와 산전수전 다 겪은 가수가 티격태격하는 걸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났다. 사실 두 사람은 초등학교, 중학교 선후배 사이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에는 계약서도 없다.
“‘계약하면 안 한다, 그 대신 의리는 지킨다’ 했죠. 10년이면 10년, 20년이면 20년 안 변할 테니까. 지금 돈도 못 버는데도 같이 있잖아요.(대표 웃음) 매니저 없이 일하다가 이런 큰마음을 먹은 이유요? 늙었으니까.(웃음) 아아 농담이고요, 늙었다기보다는 한 인간(홍 대표)을 살려야겠다, 물론 나도 살고요. 그래서 한 거죠.”
부끄럽게 말하는 그가 귀엽다.
독설에는 애정이 있어야 한다
이광조는 한때 가요계에서 독립군으로 불렸다고 한다. PD에게 안 눌리고 혼자서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그였기에 붙은 별명이었다.
“우리 집이 60년대에 차가 두 대나 있을 정도로 잘살던 집이었는데, 중학교 때 폭삭 망했어요. 집에 돈이 없어 학교 공부도 제대로 못했지만 그래도 제 성격 때문인지 초라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그런데 가수들 보면 유명해지면 악착같이 돈을 막 벌어서 자기 집 살리려고 하잖아요. 부모님에게 미안했던 건 제가 떴을 때도 이상한 곳이면 안 가고 제 기준에 하면 안 되는 일이다 싶으면 절대 안 했어요. 매니저를 못 구한 것도 그런 성격 때문이었어요.”
어떤 때는 그에게 독설이 심하다는 비판이 날아오기도 했다. 그는 사실 그랬다고 순순히 인정했다. 참지 못하는 성미 때문이었다. 모 방송 가요 프로그램에 나가서 노래를 듣고 대놓고 독설을 한 적도 있다. ‘노래를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 싶어서였다.
“그런데 말을 안 하는 건 애정이 없다는 거죠. 요즘은 너무 거짓말이 많아요. 못하는데도 아주 잘한다 하고. 예를 들어 제가 활동하던 시절에 노래를 할 때는 목소리에 에코를 안 넣었죠. 그런데 요새는 에코를 다 넣어요. 그렇게 하면 더 잘 부르는 것처럼 들리거든.”
무대는 지금도 떨린다
그에게 할 일 하고 할 말 다 하는 배짱이 두둑한 이유는 어쩌면 그의 가수생활이 흘러가듯 자연스레 도착한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 서울대 미대 출신 가수가 김민기, 현경과 영애, 이정선 등이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 홍익대에는 아무도 없어서 ‘야 너 한번 나가봐’ 하고 미는 바람에 노래를 하게 됐어요. 그리고 1976년에 데뷔했죠. 맨 처음에 가수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고민이 많았어요. 가수 되면 남들이 다 알게 될 텐데, 그래도 노래를 해야 돈을 벌 수 있겠다 싶었죠.”
그때 그는 지구레코드와 전속 계약을 맺고 생애 최초 계약서를 썼다. 그런데 데뷔 앨범은 다 만들어졌는데 레코드 회사가 3개월이 지나도 발표를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노래가 너무 어렵고 대중적이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 그가 받은 계약금은 100만 원이라는 거액. 그러나 그는 성질이 나서 돈을 갖다 주고 계약을 파기했다.
“계약 파기하고 나간다고 하면 승낙을 잘 안 해주잖아요? 사장이 절 불러서 ‘너 다른 데 가려고 하지?’라고 묻는 거예요. 안 보내줄 것 같아서 ‘그게 아니다. 연극을 하려고 그런다’라고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했죠. 사실 내 연극 포스터가 붙어 있던 때였거든. 100만 원을 돌려주기 전에 이불 밑에 깔고 세고 세고 얼마나 또 샜는데…. 그 후 오기가 나서 진짜로 가수활동을 시작했죠.”
그에게 있어 가수생활은 어쩔 수 없이 된 거니까 한 거고, 그러다 보니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러한 계기는 그를 여전히 순수한 가수로서 남게 해주는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무대 뒤에서는 무지하게 떨어요. 그러나 정작 무대에 나가 조명을 받으면 내 안방 같죠. 콘서트 때도 첫 번째 두 번째 곡을 부를 때까지는 속에서 전쟁이 일어나죠. 그러다 점차 노래를 하면서 좋아져요. 내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그렇게 영광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수치스럽지도 않아요. 하지만 ‘내가 이랬습니다’ 하고 드러내기는 싫어요. 누가 나에 대해 물어봐도 ‘그냥 노래하는 가수예요’라고 말하는 정도죠.”
트로트, 싫다?
무념무상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광조의 삶에도 간절함과 절박함이란 단어가 어울릴까? 그는 왜 절박하고 간절한 게 없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나 얘기를 들어보니 그 또한 그리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50대 시절, 삶의 고독이나 고뇌가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이 변화무쌍했어요. 미국에서 지내던 때였죠. 미국은 좋았어요. 여길 왜 왔나 싶어.(웃음) 거기 있을 때는 세상에 그런 한량도 없었어.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서 살았는데 버스를 타면 20분이면 바닷가에 갈 수 있었어요. 음악활동은 전혀 안 했죠. 그냥 바다를 보는 게 전부였어요. 어느 날엔가는 밤에 바닷가에서 린다 론스태드의 ‘Long Long Time’을 듣는데 안개가 마치 뛰어가는 듯하더군요. 노래는 들리고 파도는 치고 있고 삶의 연민이 느껴져서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사실 낮에 가면 개똥밖에 없어.(웃음)”
낮에는 개똥, 밤에는 안개가 깔리는 한적한 바다를 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철저한 보헤미안으로서 십수 년을 미국에서 지내던 그였지만 이제 최첨단 미디어의 도시 서울에 오게 됐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구십이 넘은 어머니에게 매일매일 문안인사 드리는 효자다. 그의 삶이 최근에 바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트로트도 불러봤다는 그에게 요즘 가요계의 ‘대세’인 트로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슬쩍 물어봤다.
“나는 좀 부담스러워요.”
역시 그다운 직선적인 대답이었다. 어쩌면 그 취향은 우리나라 컨템포러리 가요계의 역사에 길이 남을 묵직한 발라드 히트 넘버를 가진 가수로선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겠다.
“우리 트로트는 너무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것 같아요. 그런 것도 필요는 하겠지만… 너무 가볍지만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물론 제 시각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제 생각은 그렇다는 거죠.”
현재진행형 ‘유튜버’는 모험이다
이광조와 요즘 시대의 접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유튜브다. ‘철저한 아날로그 인간일 것 같은 이광조가?’ 싶지만 사실이며, 이광조 TV라는 채널도 갖고 있는 엄연한 ‘유튜버’다. 심지어 그는 웹예능까지 찍었는데, 그 시리즈 제목이 ‘레트로맨’이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그가 격하게 웃으며 비명을 질렀다.
“어우, 말도 안 돼. 그 얘기를 할게요. 나는 그런 걸 ‘너무너무’ 싫어해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하는데, 신경질을 빡 부렸어. 안 해! 그래서 안 하게 됐어요.”
‘레트로맨’에서 이광조는 풍물시장이나 다방, 성수동 등지를 다니며 동네 여행을 하고 VR도 해보면서 신문물 체험 활동을 보여준다. 비슷한 구성으로 큰 인기를 끈 ‘와썹맨’, ‘워크맨’같은 ‘맨’ 시리즈 벤치마킹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손사래를 치지만 유튜브 채널에서 아직 감상 가능한 공식 ‘흑역사’다.
“지금 올리는 영상들은 어쩌면 제 노래를 듣고 싶었던 사람에겐 좋은 걸지도 몰라요. 팝송까지 합하면 200곡이 넘어요. 그걸 일주일에 하나씩 요새 목소리로 다시 녹음해서 올리는 건데, 쉽지는 않아요. 나는 노래하는 거 아니면 안 한다 그랬어요. ‘레트로맨’은 나는 몰라.(웃음)”
참, 인위적인 것을 싫어하는 그답다. 여하튼 욕심 한 스푼, 미련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은 그다.
소년이라는 말, 듣기 좋다
이광조는 요즘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냥 좋단다.
“가끔은 떡볶이를 먹고 싶다, 그러면 떡볶이 찾아 삼만 리야. 그런 게 행복이야. 순간순간 느끼는 행복.”
그는 한 일흔다섯 살까지만 살면 굉장히 잘 살았구나 생각할 거 같다고 말한다. 여든몇 살 돼서 정신 흐트러져 잊어버리는 건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흔다섯 살까지 맑은 정신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자신이 늙은 소년이길 바란다. 맑고 변치 않는 사람으로서.
“조용히 산 게 잘한 일 같아요. 남에게 ‘이거 한 사람이야’라고 말 안 하고 산 거. 그 외에는 잘한 게 별로 없어서.(웃음) 뮤지션으로서 남기고 싶은 게 있냐고요? 없어요.”
그는 철저한 소멸을 꿈꾼다. 음악도 그냥 하게 돼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연스레 충족된 삶으로서 그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지금의 이광조 자신이 된 것이리라.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은 싫고, 먼지도 싫고, 그냥 없어지면 좋겠어요. 입에서 입으로 안 전해지고 그냥 갔으면. 지금 살아 있을 때 얘기 듣는 게 좋지 그다음은 의미가 없는 거 같아요.”
그의 대답을 듣고 입에서 저절로 솔직하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솔직하지 않을 게 없죠. 죽을 때까지 이렇게 갈 거예요. 제가 바뀌길 기대하는 사람들은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