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이란 우리가 자주 착각하는 것처럼 멍에가 아니라 사방으로 열린 활공장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지향에 있다. 오체투지처럼 궁구하는 삶이 있으며, 경주마처럼 각축하는 삶이 있고, 바람의 사주를 받아 가뿐히 떠도는 삶이 있다. 연극인 최영환(49)은 아마도 바람과 동맹을 맺은 계열에 속할 것이다. 그는 한결 자유로운 삶을 원해 귀촌했다.
누군들 자유로운 삶을 갈구하지 않으랴. 단 한 번 주어진 생을 가급적 자유롭게 쓰고 가고자 하는 갈망. 이는 거의 가당찮은 꿈일망정 고달픈 일상을 견디게 하는 힘과 탄력을 가져다준다. 인생이란 근본적으로 고(苦)라지. 그러나 고통 속에 나뒹굴 때라야 비로소 자유로운 지평을 절박하게 찾아 나서는 게 사람이다. 최영환이 그랬다. 요컨대 그는 삶을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자유롭다고 믿었던 그간의 삶에 섞인 혼선에 몹시 식상했던 것 같다. ‘괴로운 자각’이라 할 만한 격렬한 회의가 우레처럼 그의 머리를 쳤던 모양이다.
그는 서울에 살며 연극판에서 땀 흘려 뛰었다. 극단 ‘죽죽’에 소속, 연기활동을 해왔다. 일찍이 열일곱 나이 때 연극에 입문했던 그는 1991년, ‘부산연극제’ 최연소 신인연기상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배우로 나섰다. 이후 서울의 대학로를 근거로 삼아 20여 년간 연극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대차게 덤벼들어 긴 세월 비지땀을 쏟은 만큼의 결과가 돌아오지 않는 이상한 현실을 발견하고 남몰래 울상을 지었던 것 같다. ‘나, 연극배우 맞아? 이건 뭐 이룬 게 없질 않은가?’ 그는 아마도 그렇게 독백했을 게다. 그간 수없이 무대에 서서 대사를 읊조렸겠지만, 오직 자신에게만 들려준 그 독백의 톤은 연극이 아니라서 한결 절절했을 것이며, 번뇌의 산물이었기에 그 맛은 유감스럽게도 소태처럼 쓰디썼을 테지.
“배우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느낌이었어요. 날마다 대학로에서 살다시피 하며 연극활동을 해왔고, 딴에는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사실은 점점 퇴행하고 있다는 회의가 몰려들었던 거죠. 딱히 스케줄 없는 날이 늘어났고, 그저 술이나 마시게 되고. 야, 이건 참 무의미한 생활이구나, 타성에 젖어 휩쓸려가고 있구나, 그런 자각으로 괴로웠지요. 연기자다운 활동의 미비와 열악한 생계 상황, 이중고가 있었던 겁니다.”
그는 새로운 생활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황급히 활로를 찾아야 했다. 궁리 끝에 찾은 대안이 시골살이였다. 그즈음 마침 일단의 대학로 연극인들이 단양군의 농촌으로 귀농을 했다. 최영환도 거기에 합류했다. 적적하고 적막한 농촌에 연극판을 펼쳐 고독한 시골 사람들의 삶을 어기영차 북돋우고, 손수 농사까지 지어 생계를 해결함으로써 연극과 농사가 융합된 새로운 문화 공동체의 모델을 본때 있게 구축하겠다는 취지를 표방한 동아리였다. 독특한 패기에 찬 이 공동체에 동참한 최영환은 서울의 집과 단양을 오가며 지냈다. 즉 절반쯤 귀농한 상태로 3년여를 살아왔다. 그러다 성향이라는 게 맞질 않아 동아리를 탈퇴했단다. 그리곤 팍팍한 서울생활을 아예 싹 청산, 처자를 대동하고 단양군 영춘면 면 소재지로 본격적인 귀촌을 했다.
달랑 3000만 원 들고 귀촌
이후 2년이 흐른 현재, 그는 찻집을 운영하며 낯선 객지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용을 쓰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건 언제 어디서건 자유로운 영혼. 해서, 사방팔방으로 자신을 개방하고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들을 척척 받아들이기 위해 그간의 반백년 인생에서 쌓은 모든 재능을 쏟아 붓고 있다. 이번 여로의 종착만큼은 근사한 것이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게 귀촌생활이다. 또 그러나 최영환 역시 만만치 않은 인간이 보유할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을 터인즉, 이 사람이 펼쳐 보이는 귀촌생활의 양상이란 어쩌면 연극보다 흥미진진할지도.
“이곳에 내려온 지 불과 2년이 지났지만 5년 이상이 지난 것처럼 친숙함을 느낍니다.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 결과죠. 서울은 머릿속에서 거의 지워졌어요. 전화통화량을 가만히 따져봤더니 서울 지인들과는 10%, 이곳 주민들과는 90%. 어느 사이에 그렇게 변해 있더라고요.”
“별안간 대학로를 떠난 당신을 두고서 지인들이 아쉬워하지 않았어요? 연극 동네 특유의 동지 의식이라는 게 있을 텐데.”
“웬 귀촌? 그러면서 다들 놀라는 눈치이던걸요. 아예 인생 포기한 걸로 알더라고요.(웃음) 사실, 연극인들의 이탈은 흔합니다. 대략 60% 정도가 중도에 분야를 바꿔 빠져나가죠. 경제문제 등 여러모로 한계 상황에 봉착해서.”
“연극배우란 배고픈 직업이라고 알려졌죠. 유능한 데다 열정마저 겸비한 인재들이 결국 견디지 못하고 다른 길을 찾아가는 건 참 섭섭한 현실이에요.”
“이름난 배우들에겐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저 같은 사람에겐 난감하기 마련이죠. 대리운전 기사를 하는 식으로 생활비를 벌며 버텼으나, 뭔가 확실한 타개책이 아니면 더 가혹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렇다면 시골에 가서 소박한 생활을 하자, 그런 작정을 했던 겁니다.”
혼자 살 때엔 그럭저럭 지냈더란다. 혼밥과 혼술도 홀가분한 자유의 증빙으로 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40대 중반, 좀 늦은 나이의 결혼으로 아이까지 얻은 뒤론 사정이 급박해졌다. 아자아자! 시골에서 나를 맘껏 풀어놓고 생활의 야전 속으로 들어가자! 그는 그리 자신과 담판을 짓고 귀촌했던 것이다.
연극이야 버릴 수 없는 동행. 미련 이상의 관습으로 삶에 이미 들러붙은 것이라서 이삿짐에 실려 함께 시골에 내려왔다. 연극 행위가 없는 삶은 식물인간처럼 절망적일 지경은 아닐지라도 좌우간 탁 놔버릴 수 없는 애착이 이미 깊었기에, 그는 귀촌의 나날을 연극을 위해서도 사용하기로 했다. 다시 말해, 어엿이 먹고 살 수 있는 생활 방편을 찾고, 덩달아 연극활동에도 새로운 피를 수혈하자는 것. 최영환의 귀촌 청사진엔 그 두 가지 목표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 오자마자 이웃들에게 제가 어떤 사람인가를, 무얼 하기 위해 귀촌했는가를 기탄없이 밝혔지요. 연극단체를 만들어 주민들과 함께 공연을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모두들 귀를 기울이더군요. 물론, 호의적인 반응만 있는 건 아니었어요. 아하, 그 무슨 극단을 만들어 지원금이나 빼먹으려는 속셈 아니여? 그런 의심에 찬 소문들이 돌기도 했으니까.”
“낯선 사람 하나가 시골에 등장한다는 건 시골이라는 무대 위에 배우 하나가 올라선 것과 같은 효과를 낳게 마련이죠. 모두가 그의 동태를 예의주시 감상하게 되니까. 감상 평론도 중구난방으로 무성하고요.”
“통과 의례라는 게 있게 마련이죠. 면 소재지 상가 거리 복판에 찻집을 차리자 주변 상인들이 긴장하는 분위기도 완연했어요. 그렇잖아도 가뜩이나 영세한 상가에 경쟁자 하나가 출현했다고 본 거죠.”
“다양한 자영업 중에 찻집을 선택한 건, 그게 가장 유망하다 판단해서?”
“아내가 바리스타예요. 커피집이 적격이라 봤어요. 소자본으로 오픈할 수 있는 업종이기도 했고요. 저희는 달랑 3000만 원을 가지고 귀촌했는데, 가게를 차리고 셋집 주택을 얻는 데 다 썼지요. 찻집 운영으로 연 1500만 원 정도의 매상을 올립니다. 월세 나가지, 겨울 비수기엔 힘들지,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았지만 차차 호전될 거라 봐요.”
찻집엔 ‘꽃피는 커피’라는 상호가 걸려 있다. 아담하고 소박해서 정겹다. 가게 좌우로는 식당, 옷집, 식육점, 주점, 빵집 등속이 있고, 맞은편엔 하나로마트가 있다. 상업이 성행할 리 없는 고즈넉한 시골이지만 그나마 요지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더라도 세 식구의 믿을 만한 호구지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해서, 최영환 부부는 찻집일 외에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치운다. 가게는 한 사람이 지키면 되기에 나머지 한 사람은 일거리가 생기면 쪼르르 달려간다. 의외로 일거리가 많은 게 시골이란다. 주로 막노동이지만 최영환은 가리지 않고 일을 찾아 전전해왔다. 아로니아 가공공장에 단기 취업을 하기도 했다. 아내는 인근 사찰에서 총무 일도 봤다. 생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야만 한다. 그보다 더 절박한 진실이 달리 어디에 있겠는가.
첫발 내딛은 ‘청춘극단’
면 소재지의 하오 풍경은 나른하다. 부스스 마른 볏짚처럼 광택 없는 거리. 별 목적 없어 보이는 한가한 걸음새로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저녁 반찬거리를 사기 위해 마트를 드나드는 몇몇 아낙네들. 수족관처럼 조용한 정경이지만 스피커로 외쳐대는 물오징어 판매 차량이 등장하자 별안간 사람들이 북적이며 몰려든다. 최영환도 덩달아 바빠진다. 아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일을 참을 수 없어서다. 2년여 사이에 발휘한 사교성 덕분에 이미 그는 이 동네 사람 다 됐다.
“제가 서울에서보다 더 바쁘게 삽니다. 이웃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며 사는 것이죠. 청년회나 탁구동호회 등 소소한 모임들에 참여하고 있으며 감투를 쓰기도 했어요. 시골의 배타성이나 텃세에 대해 많이 듣고 내려왔지만 여기는 다르더라고요. 상당히 개방적이고 우호적이에요.”
“원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 이건 귀촌 성공 필살기 1칙이라 할 만하죠.”
“제가 원래 가만히 있질 못하는 스타일입니다.(웃음) 체육대회나 축제에서 사회를 보기도 하고 마이클 잭슨 춤을 신나게 추기도 했어요. 이웃과 어울려 살지 않고선 무슨 재미가 있을까? 극단을 꾸려 키워나가기 위해서도 주민 속으로 파고드는 일이 필요해요. 부지런히 눈도장 찍으며 살아왔어요.”
“서울의 연극단체들도 흔히 가시밭길을 걸어요. 도발적인 투지가 아니고선 시골 극단을 착상조차 하기 어려울 것 아니겠어요? 현재 어떤 연극활동을 하고 있죠?”
“겨우 첫발을 내딛은 단계입니다. 천천히 가되 충실히 기반을 다지고자 해요. 참여 인력은 이 지역 사람들로 영입할 생각이고, 우선은 제가 연기와 연출 등 모든 걸 도맡아 해나갈 참입니다. 구상과 포부는 크지만 재정 문제 등 하나하나 해결해나갈 과제들이 산적해 있어요. 극단 이름은 ‘청춘극장’입니다. 올여름엔 낭독공연물 ‘절대사절’을 선보였지요.”
“단원은 몇 명이나 되죠?”
“저를 포함, 세 명입니다. 당분간은 2인극 정도 공연할 수 있는 상황이에요. 단원 중 한 명은 제 아내이지요. 연극에 대한 아내의 열정이 은근히 대단해요. 작은 동네이지만 열심히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을 거라 굳게 믿으며 함께 노력하고 있지요. 일단은 생활 안정이 화급한 과제이지만, 부부가 공히 추구하는 가치 있는 일과 목표를 가지고 산다는 게 즐겁습니다.”
최영환은 대학로 극장에서 아내 이동순을 만났다. ‘관객모독’이라는 작품에 출연 중 관객으로 찾아온 이동순과 눈이 맞았던 것. 연극 애호가였던 이동순은 ‘관객모독’을 자그마치 100여 회나 관람했더란다. 그 바람에 극단 단원들의 환대를 받았는데, 유독 최영환에게 필이 꽂혔던 거다. 부부 사이엔 어여쁜 유치원생 딸 하나가 있다. 아내의 나이는 올해 33세로 최영환보다 열여섯 살 연하. 남녀의 가슴에 연정이 돋으면 술 취하듯 흥겨운 황홀이 밀려드는 법이니 그걸 사랑이라 한다. 여기엔 경계나 모순이 없어 나이 차 따위는 무의미하다. 세상을 보는 촉에선 세대 차가 있겠지만.
“아내가 워낙 긍정적인 스타일이라서 매사 공감대가 넓은 편입니다. 다소 이견이 있어도 합리적이다 싶으면 곧바로 긍정하지요. 어! 그래? 해보지 뭐! 이게 우리 부부가 살아가는 방식이에요. 뭐든 두려움 없이 해보자는 것, 하다하다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는 것, 그런 낙관을 공유하며 사는 겁니다.”
오랫동안 스타 등극을 소망하며 연극배우로 진력했던 사람.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흥흥거리며 살아왔으나, 이제야 세상 무서운 걸 알겠노라’고 술회하는 남자. 그, 최영환은 여전한 물적 부실 앞에 서 있으나 훌훌 벗어던져야 할 껍질은 이미 벗어던졌다.
◇ 최영환이 주는 귀촌 Tip ◇
•이민보다 더 힘든 게 귀촌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목적 설정부터 정확하게 하자. 막연한 낭만이나 도피적 망상에 의한 귀촌은 절대 금물이다.
•경관을 기준 삼아 귀촌 지역을 선택하는 건 위험하다. 충분한 사전답사와 원주민 접촉을 통해 지역의 인심과 풍토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소읍이나 면 소재지에서의 자영업은 그리 이상적이지 않다. 친척이나 동창 등 인맥 중심으로 고객이 형성되는 게 시골의 자영업이기 때문이다.
•원주민과의 융화를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누군가 무거운 짐을 들고 갈 때 같이 거들어줄 수 있는 정도의 심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요즘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막상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하면 너무 멀게 느껴진다. 4차 산업혁명의 주창자 클라우스 슈밥은 자신의 책 에서 4차 산업혁명을 ‘3차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바이오산업, 물리학 등 3개 분야의 융합된 기술들이 경제체제와 사회구조를 급격히 변화시키는 기술혁명’이라고 정의하였다. 당장 이 말만 들어서는 무슨 얘기인지 와닿는 사람이 그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먼 얘기가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은 당장 우리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 얘가 최근 사회적 논란이 된 카카오의 카풀 사업 진출이다. 카카오는 4차 산업혁명의 총아인 ICT기술을 활용한 카풀 앱을 통해 출퇴근 시간 택시를 구하지 못하는 직장인들의 어려움을 해소해주는 택시 보완재 역할을 할 것이라 주장한다. 반면 택시업계에서는 카카오 카풀이 기존 택시업 종사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택시 대체재라며 반발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발전은 분명 생산성과 효율성을 제고하여 인간의 여러 수고로움을 크게 덜어줄 것이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의 발전이 장밋빛 미래인가는 좀 더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다. 카카오의 카풀 사업 건처럼 이전 수많은 사람들이 담당하던 업무를 인공지능(AI), 로봇 등이 수행하게 되어 더 이상 많은 인력이 필요하지 않게 되고 있다. 따라서 단순 직무 종사 근로자의 경우 자신들의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의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인력수요 전망’에 따르면 지난 2월 기준 청년실업률은 9.8%이며, 청년 체감실업률은 22.8%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2030년까지 172만여 명의 고용변화가 예상된다고 한다.
4차 산업혁명은 기술의 발달에 따른 편의를 주겠지만 동시에 가뜩이나 고용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나라에 고통을 가중시킬 위험이 있다. 이러한 대전환에 대비하여 우리 사회 전 분야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적자본을 육성하기 위한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정부와 교육·훈련기관에서도 교육제도 개편 및 재교육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을 드라이빙할 수 있는 고숙련 인력의 수요는 오히려 확대될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은 고숙련 인력 육성 지원을 통해 4차 산업혁명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먼저, 미래 유망 분야인 로봇, 바이오화학 등 신사업 분야의 자격 종목을 적극 발굴하고 있다. 오는 12월부터 3D프린터운용기능사 등 5개 종목을 대상으로 수시검정 시험을 시행할 예정이며, 내년 1월에는 로봇기구개발기사, 바이오화학제품제조산업기사 등 12개 종목을 신설하여 시행을 앞두고 있다.
또한, 2016년 7월 개발이 완료된 국가직무능력표준(NCS) 기반 과정평가형 자격을 도입하여 국가기술자격의 현장성을 강화하고 있다. 올해 5년차를 맞는 과정평가형 자격은 특성화고, 전문대학, 폴리텍 등 직업훈련교육기관에서 교육훈련을 이수하고 내·외부평가를 거쳐 자격을 취득하는 제도이다. 올해 부산권역에서는 56개 기관 39개 종목 3092명이 교육훈련에 참여하고 있으며 매년 참여자 수가 확대되고 있다.
시대의 변혁기에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불안한 사람들은 안정적인 것만 찾는다. 최근 시니어들은 공인중개사에 열중하여 공인중개사 시험에는 전국 33만 명이 응시했다고 한다. 청년층은 공무원에 몰두하여 공무원 시험은 기본 경쟁률이 100대 1을 넘는다. 그러나 이런 편중 현상이 국가적으로 과연 옳다고 여길 수 있을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앞서 말했듯 4차 산업혁명은 단순 직무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공인중개사와 공무원의 역할 또한 4차 산업혁명의 흐름에서 어떻게 변화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할 부분이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쓰게 된지는 아직 10년이 채 안 됐지만 이미 스마트폰은 우리 생활의 많은 것을 바꿔버리지 않았는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했다. 4차 산업혁명의 고도화는 분명 우리에게 위기이자 기회이다.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기 위해 기존의 것에 안주하기보다는 新국가기술자격을 통해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올해 주목해야 할 사회 현상 중 하나는 은퇴 세대의 폭발이다. 우리 사회에서 베이비붐 세대는 한국 전쟁이 끝난 이후 1955년생부터 정부의 출산억제정책이 본격화한 1963년까지 9년간 태어난 이들이다. 정부의 인구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들의 숫자는 약 711만 명으로 전체 인구수의 14.3%에 달한다. 이들이 한꺼번에 은퇴자 인력시장으로 몰리면서 평생 겪었던 경쟁 속으로 다시 뛰어들게 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니어에게 제2, 제3의 직업을 찾는 것 역시 시급한 과제가 됐다. 새롭게 떠오른 무술년 새해 우리는 새로운 직업을 위해 어떤 분야를 주목해야 할까.
‘세대융합창업’ 안 되면 함께하라
최근 정부가 내놓은 창업지원정책의 핵심을 요약하면 ‘세대융합창업’으로 귀결된다. 세대융합창업은 경험이나 자본력은 있지만 창업의 핵심인 아이디어가 부족하고 첨단기술에 취약한 시니어와 새로운 기술 분야에 능숙하고 여러 가지 영감이나 발상은 많지만 맨몸뿐인 청년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시너지를 얻는 창업 형태를 의미한다.
정부 입장에선 은퇴한 시니어의 일자리를 만드는 데 한계가 있고, 창업으로 몰고 가기엔 창업 성공률이 높지 않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막을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중소기업청이 2003년부터 2009년까지의 자료를 조사한 결과 종업원 5인 미만의 영세사업 창업의 생존율은 6년 차에 32%까지 떨어졌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세대융합창업.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젊은 창업자들에게 마케팅이나 재무관리 등 취약 부문에 대한 은퇴자들의 멘토링이 이미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이를 위한 정부의 태도는 적극적이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지난해 11월 중·장년과 청년의 매칭창업을 지원하는 세대융합창업 캠퍼스를 전국 6개 권역에 신설했다. 이를 통해 선정된 창업 팀에게는 총사업비의 70% 이내에서 최대 1억 원까지 마케팅 등의 사업비와 창업 공간이 무상 제공된다.
경험자들은 젊은 세대를 수평적 파트너로 받아들이는 것이 창업 성공률에 많은 영향을 준다고 조언한다. 지난 12월 리스타트 콘퍼런스에서 발표한 인코어드테크놀로지스 최종웅 대표는 “글로벌 스타트업을 시작하면서 공동 창업한 젊은 파트너의 조력이 컸다”며 “구성원을 선택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라고 강조했다.
성장동력 여전한 ‘4차 산업혁명’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한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분야는 올해도 여전한 인기를 누릴 것으로 보인다. 특히 3D 프린터나 드론의 경우 올 한 해 대중화를 통해 폭발적 성장세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4차산업 분야는 주요 기술을 중심으로 성장하다 보니 시니어들에게 다소 어려운 것이 사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직접 기술개발에 참여하지 않아도, 본인이 평생 해온 분야를 바탕으로 대중화한 솔루션을 이용한다면 4차산업 분야에서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패션디자인이나 봉제업에 종사하던 은퇴자가 3D 프린터를 통해 액세서리를 만들거나, 은퇴 건설업자가 드론으로 건축물 균열 검사 등을 하는 식이다.
공유경제 역시 마찬가지. 부동산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시간적 여유가 필요한 공유 경제는 시니어에게 안성맞춤인 분야다. 숙박 공유 대표 기업 에어비앤비 조재은 팀장은 “기존 숙박공유에 참여하는 시니어 호스트의 증가는 지속되고 있는 상태”라 설명하면서 “가이드의 경험과 생활을 공유하는 ‘트립’ 서비스에도 그 특성상 시니어 가이드의 참여가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령화 사회 위한 ‘건강과 음식’
고령화와 관련한 건강, 음식에 관한 시장은 고령화 시대에 가장 유망한 분야 중 하나다. 고령자를 위한 건강음식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틈새를 공략할 여지는 충분하다.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슬로푸드에 대한 요구와 기능성 식품의 대중화도 이에 한몫하고 있다.
실제로 액티브 시니어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이러한 경향이 잘 타나난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한국리서치와 2016년 액티브 시니어 707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액티브 시니어들은 비싸더라도 유기농·친환경 제품을 사 먹고(26.9%), 몸에 안 좋은 음식은 먹지 않으며(39.0%), 음식 성분을 따지며 가려 먹는다(42.3%)고 답했다. 비싸더라도 분위기 있는 음식점을 선호한다는 응답률도 31.3%나 됐다.
특히 유가공이나 농산물의 가공제품 상품화는 ‘귀촌’에 맞물려 은퇴자들의 블루오션으로 손꼽힌다. 수원시 창업지원센터 최봉욱 센터장은 “올해 시니어들에게 유망한 분야는 4차산업과 함께 건강이나 바이오 관련 분야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고령화로 인한 사회 변화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인식이 바뀌면 시장이 열린다 ‘웰다잉’
우리 사회의 죽음에 관한 인식도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수동적으로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이후 벌어질 일들을 미리 준비하는 분위기가 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달 시범사업이 끝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관련한 부분. 일반인은 관여하기 어려운 의료 부분에까지 고인의 의지가 반영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죽음학 혹은 죽음준비학의 대중화 역시 우리 사회의 ‘죽음 준비’를 시기적으로 앞당기고 방식도 다양화하는 초석이 됐다.
웰다잉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소비시장을 만들어냈다. 수의나 봉안당의 사전 준비와 같은 전통적인 분야 외에 엔딩노트 작성, 유품 정리, 디지털 유산의 상속과 관리, 애완동물 신탁과 같은 새로운 서비스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으로 손꼽히는 노령화 속도에 비해, 국내 웰다잉 관련 시장의 다양성이나 규모는 아직 부족한 형편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국내 웰다잉 관련 산업이 종활(終活)로 대표되는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 성장 잠재력이 풍부하다고 전망한다.
인구절벽 속 귀촌, ‘6차산업’ 노려라
귀농과 귀산촌, 귀어촌을 포함한 귀촌은 ‘편의점·커피숍·통닭집 창업’만큼이나 시니어에게 노후를 보내는 가장 흔한 선택지 중 하나였다. 새로운 직업을 찾기보다는 휴양이나 도피의 개념이 컸기 때문에 여러 부작용이 나타났다.
가장 큰 문제는 귀촌 지역 원주민들과의 갈등. 전문가들은 지역 주민들에게 귀촌인은 조력자나 협력자이기보다는 ‘투자 여력 충분한 동일 업종의 경쟁자’로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라고 진단한다. 마을 일이나 지역 산업에 보탬이 되지 못하면,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으로 자리 잡게 돼 귀촌 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워진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귀촌을 할 때는 지역 특산품이나 관광자원을 바탕으로 상품화를 진행하는 ‘6차산업’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지역 산림조합중앙회 관계자는 “6차산업은 농작물을 경작하는 1차산업과 이를 가공하는 2차산업, 서비스업이 중심이 되는 3차산업을 결합한 형태의 산업을 의미한다”면서 “지역민들에게 귀촌인이 환영받기 위해서는 그들의 어려운 점을 해결하고, 사업화할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또 일각에서는 인구절벽으로 고민하고 있는 지자체를 귀촌 지역으로 노리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한다. 인구절벽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자체의 경우 작목반이나 어촌계 가입비 무료, 거주지 지원 등 여러 혜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택시운전사를 선망하던 시대가 있었다. 차량의 증가를 운전자가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던 시절. 그때만 해도 운전면허증은 우월함의 상징이었다. 미래에도 그런 시대가 올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바로 최근 유행하는 드론 얘기다. 이제 드론은 사람을 나르고, 농기계로 쓰고, 짐을 배달하고, 군사용으로도 쓰인다. 현재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드론을 보면 자동차 문화가 시작되던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자동차도 처음 나왔을 땐 지금의 용도를 상상하지 못했다. 드론도 그렇다.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이런 급격한 성장은 시니어에게 어떤 기회를 제공할까.
드론을 정확히 정의하면 무선전파로 조종할 수 있는 무인항공기를 뜻한다. 드론 하면 떠올리게 되는, 프로펠러가 여러 개 달린 형태의 비행체 외에 정찰이나 지상목표물 공격 등 다양한 임무를 맡고 있는 군용 무인비행기도 드론에 속한다. 우리가 드론이라고 생각하는 비행체는 항공안전법상 무인비행장치에 속하는 무인멀티콥터다. 프로펠러가 여러 개 달려 멀티콥터라고 부르는데 장비에 따라 대개 4~6개의 프로펠러가 작동한다.
드론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계기는 역시 기술 발전 때문이다. 과거 드론 형태의 원격조정 비행체는 제 몸 하나 띄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늘로 날아올라도 조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원격조정 헬리콥터는 동호인 사이에서도 난이도가 최고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조종이 어렵다. 그러다 약 5년 전부터 드론이 일반인에게 보급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카메라를 거뜬히 싣고 날아올랐고, 방송용 헬리콥터에 사람이 타고 촬영한 것보다 떨림 없는 안정된 화면을 제공했다. 적재할 수 있는 무게도 늘고, 조종이 쉬워지면서 드론의 용도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방제 조종사 성수기에 연소득 올려
대표적인 드론 관련 직종은 역시 영상이나 사진 촬영 분야와 연관이 있다. 이미 드론을 활용한 항공촬영 업체가 여러 곳 성업 중이다. 일반 방송촬영뿐만 아니라 기업 홍보용 영상, 지도제작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쓰인다.
또 다른 유망 직종 분야는 농업. 그중에서도 드론을 활용한 농약 살포가 최근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농업용 드론 시장은 세계적으로도 급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에서는 드론 조종사의 평균 연봉이 약 1억원에 이른다는 발표도 있었다. 상용 드론 시장의 세계 최강국으로 불리는 중국은 넓은 농토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일본은 농촌의 고령화에 대응하기 위해 드론 도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국내에서도 방제용 드론의 도입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15년부터 농약살포용 드론을 ‘무인항공방제기’로 분류해 정부융자지원 대상 농기계로 등록시키고 있다. 아직은 중국산 업체가 시장을 선점하고 있지만 국산 업체들도 하나둘 뛰어들고 있다.
업계에선 드론을 이용한 수요가 늘면서 “3개월 일하면 1년 쉬어도 된다”는 말까지 나온다. 능숙한 드론 조종사는 월 소득이 300만~500만원 선으로 알려져 있다. 농약 살포시기가 정해져 있고, 아직은 공급보다 수요가 많다. 일부 지자체에선 공동구매 형식으로 지역 농민을 대신해 드론 방제업체와 일괄 계약하기도 한다. 산업용 드론은 12kg이 넘으면 자격증 소지자만 운용이 가능하다. 농가에서 정부 융자를 통해 드론을 구매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운용하려면 자격증을 따야 하는 등 쉽지 않다.
농약 살포에 드론 활용이 선호되는 데에는 시간 절약뿐만 아니라 그 효과도 한몫하기 때문이다. 농민 5~6명이 하루 종일 살포해야 하는 면적을 드론은 한 시간이면 방제한다. 게다가 사람이 뿌리는 방식은 농약이 비처럼 떨어져 농작물의 윗면만 도포가 되지만, 드론으로 방제할 경우 강한 바람으로 와류가 발생해 농약이 앞뒷면에 골고루 묻는다. 면적당 농약 사용량도 줄일 수 있어 토양 관리에도 유리하다.
국내에서 대표적 드론 개발 기업으로 알려진 바이로봇의 홍세화 이사는 “방제용 드론은 아직 모든 조정을 사람의 손으로 해야 하는 수준이지만, 현재 개발 중인 제품은 방제 지역의 위치나 면적을 사전에 입력하면 자동으로 농약이 살포되고, 살포된 양까지 빅데이터로 기록해서 농작물의 생육까지 관리할 수 있는 수준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바이로봇에선 완구용 드론 생산뿐만 아니라 어린이 대상의 드론 코딩 교육도 하고 있는데, 드론의 위치, 고도, 동선, 비행시간 등을 프로그래밍해서 드론 동작을 제어하는 것이다. 이런 코딩 방식이 산업용 드론에 적용되기 시작하면 방제 등 드론을 응용한 각종 작업이 간편해진다.
이 밖에도 드론은 사람 손이 미치지 못하는 여러 분야에 쓰인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은 드론 조종자를 미래 유망 직업으로, 한국고용정보원은 5년 내 부상할 새로운 직업으로 선정했을 정도. 군이나 경찰, 소방 등 공공기관에서 드론 운용 전문가 수요는 꾸준히 늘 것으로 예상된다. 수색이나 정찰, 구조 작업에 드론이 쓰이고 원자력 발전소 같은 주요 건축물 점검이나 교통 상황 분석 등에도 활용된다.
자격증 취득 비용은 300만원 선
기본적으로 완구나 경량 드론은 비행 가능 지역이라면 누구든 날릴 수 있다. 그러나 12kg이상의 무게가 나가는 드론은 초경량 비행장치 비행자격증명 중 무인회전익비행장치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14세 이상의 운전면허나 운전면허 취득이 가능한 수준의 신체검사증명이 있는 사람이면 지원할 수 있다. 또 국토교통부와 교통안전공단이 지정한 기관에서 20시간 이상 비행 경력을 쌓아야 한다. 파일럿의 숙련도를 인증받은 비행시간으로 구분하는 것과 비슷하다. 비행시간을 쌓기 위한 비행은 교관 입회 하에 휴일과 날씨가 안 좋은 날을 제외한 날 중 낮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단기간에 획득하기는 어렵다. 비교적 시간 여유가 많은 시니어가 자격증 취득에 유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격증 취득은 학과시험을 본 후 항공이론 구술과 실제 비행시험을 거쳐야 한다. 자격 취득을 위한 지정 교육기관은 항공교육훈련포털(www.kaa.atims.kr)을 통해 찾을 수 있다. 조종자격 취득 희망자는 포털을 통해 국내 모든 전문교육기관의 교육과정이나 교육기관에서 이수한 교육이력 및 증빙자료, 자격증명 취득 방법 등의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올해 자격을 획득한 인원은 지난 2월까지 총 1536명. 그간 전문교육기관이 부족해 배출 인원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국토교통부는 “각종 규제혁신, 조종교관 요건완화, 교육기관 설립지원 등을 통해 전문교육기관이 확대돼 지난해 교육수용 가능인원 994명에서 두 배가량인 1700명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수강생이 부담해야 할 교육비는 기관마다 다르지만 국가자격증 과정은 약 300만원 내외다.
시니어 취미로도 안성맞춤
전문가들은 드론이 시니어에게 알맞은 분야 중 하나라고 강조한다. 직업이 아닌 취미로 즐길 수도 있고, 또 맘만 먹으면 충분히 수익 사업으로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의미다. 한국드론교육협회 이재윤 대구시협회장은 “시니어들이 드론을 배우고 나면 집중력도 늘고 손주나 다른 가족에게 아직 늙지 않았음을 자랑하는 계기로도 삼는다”며 “드론 조종이 산책이나 운동을 유도하고, 치매예방 등 교육 외적인 효과도 있어 노인대학 등에서 학과개설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드론은 잘 알려진 촬영이나 방제뿐만 아니라 드론의 유지 보수, 강사 등 다양한 직업 창출 효과가 기대되고 있으며, 조종교관자격 취득이나 숙련도를 확보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니어에게 유리하다”고 말했다.
부산인적자원개발원과 함께 시니어드론기술창업스쿨을 운영했던 동의대학교 임환섭 교수도 “모집과정에서부터 시니어가 상당히 높은 관심을 보였고 결과도 성공적이었다”며 “드론과 관련한 창업에 성공한 분과 수료생들의 취업 소식을 접했는데, 보람과 함께 지속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밝혔다.
또 방제업계 관계자들은 만약 귀촌을 고려하고 있다면 지역 주민들의 인심을 얻는 수단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고 귀띔한다. 귀촌의 성공은 지역 주민들과 어떻게 관계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드론 방제 기술이 있다면, 연고가 없거나 마을발전기금을 내놓지 않아도 환영받는 존재가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아이디어 닥터, 트렌드 몬스터, 강연여행가, 브랜드 전문가…. 이장우 브랜드 마케팅 그룹 회장(62)의 여러 별칭이다.
이 별칭들엔 이장우 회장의 개인 브랜드 혁신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현재 전통제조업에서 IT 스타트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종의 기업 7곳에서 고정·비고정의 급여를 받는다. 1년에 최소한 5~6회는 미래 유망 트렌드를 찾아보고자 해외 아이디어 탐방 여행을 가 브랜드의 촉과 감을 갈고 온다. 삶 자체가 ‘살아 있는 브랜드’로 부단한 자기 혁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을 햇빛이 투명한 어느 멋진 날,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화려한 컬러의 통 좁은 바지에 선글라스, 중절모는 물론 반지와 팔찌 등 액세서리 일습을 갖춘 그는 말 그대로 꽃중년 그 자체였다.
인터뷰 다음 날, 그는 인도로 3주간 홀로 명상연수를 떠날 예정이라며 한껏 부풀어 있었다.
보통 사람은 한 곳에서 월급을 받는 것도 좌불안석입니다. 무려 일곱 군데에서 급여를 받으신다니 부럽습니다(웃음). 퇴직 후 급여가 오히려 더 많아졌겠습니다.
“돈의 재미를 넘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이 날 필요로 한다는 의미이니까요. 현재 다섯 군데가 고정급여이고 두 군데는 비고정급여인데 늘었다가 줄었다가 합니다(웃음). 솔직히 퇴직을 앞두고 걱정을 많이 했어요. 최고경영자들이 퇴직 즈음해선 쪼잔한 상념이 많아지거든요. 부러진 날개 신세에서 영웅담을 생각한다는 것은 뻥이에요. 하다못해 국민연금, 4대보험 문제는 어떻게 하나, 별 게 다 걱정이 됐어요.”
퇴직 후 바로 이장우 브랜드 컨설팅 그룹을 만드셨지요. 직원 한 명을 둔 미니 지식기업을 창직(創職)하셨습니다. 퇴직 후, 현직 때 마지막 연봉의 두세 배를 번다고 들었습니다. 성공 비결이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실정과 저의 현실을 냉정하게 본 것입니다. 조직 브랜드와 개인 브랜드를 헷갈리지 않은 것이지요. 퇴직 후 회사를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조직을 키우기보다 개인으로서 나, 이장우를 키우는 게 효과적이란 생각을 했어요. 규모의 경제에서 제가 대기업, 다국적 컨설팅 그룹과 경쟁하려 한다면 백전백패입니다. 그런 기업들의 CEO와 경쟁한다면 승부수를 던질 만하지요. 개인 브랜드로 승부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퇴직 후 공황을 겪는 것은 조직 브랜드와 개인 브랜드를 헷갈려서입니다.”
퇴직 CEO들이 과거의 성공 스토리에 머물러 인생 2막 설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더군요.
“강의, 컨설팅 모두 부단한 콘텐츠 개발 싸움입니다. 대중의 열광, 과거의 영광 모두 거품이고 잠깐이에요. 길어야 1~2년 가기도 힘들고 곧 고갈되지요. 강의는 말이 아니라 콘텐츠로 하는 것입니다. 말 못해도 콘텐츠 있으면 오래 갈 수 있어요. 콘텐츠 없이 말만 잘하면 금방 바닥이 나게 돼 있지요. 멀리 보고 깊이 보려면 끊임없는 공부를 해야지요. 저는 책 공부보다 여행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 차원에선 스몰데이터, 감(感)이 브랜드 차별성이에요. ○○에서 들었다, 읽었다는 개인의 스몰데이터가 기업의 빅데이터를 이기기 힘들어요. ‘내가 직접 해봤다, 가봤다, 느껴봤다’를 이야기해야 먹히지요. 경쟁력은 기능이 아니라 나만의 느낌에서 옵니다.”
브랜드 전문가, 아이디어 닥터, 그리고 강연여행가로 별칭이 계속 진화하고 다각화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브랜드 연구는 제 평생의 업으로 한 일입니다. 여행은 콘텐츠 개발을 위해 하다 보니 어쩌다 본업이 돼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여행인문학 강의를 좋아하더라고요. 트렌드의 발상지, 원산지를 직접 방문해보자는 데서 출발했는데요. 요즘은 여행인문학으로 관심이 확장됐어요. 저는 관심의 촉, 미래의 촉이 느껴지면 배울 만한 곳이 어디에 있나 찾아봐 세계 어디든 직접 가보려고 합니다. 가령 2009년 도쿄 책방을 갔을 때의 일인데요. 트위터에 관한 책이 한 코너를 다 차지하고 있더군요. SNS가 뜨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미국 뉴저지 스테이트대학으로 공부하러 갔어요. 동양의 중년 남자가 그 먼 곳으로 한겨울에 SNS 공부를 하러 왔다니 학교에서 놀라더군요(웃음). 공부는 선(先)투자이자 선(善)투자예요. 공부하면서 계발하고, 계발하면서 공부해야지요.”
일반인이 ‘트위터’의 ‘트’란 말에도 익숙하지 않을 때 조기유학(?)을 한 덕분에 그는 SNS 브랜딩 홍보 분야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또한 현재 페이스북 팔로워 6만 명. 카카오스토리 5만 명, 인스타그램 1만 명의 팬을 확보하는 기틀이 되었다.
그의 ‘본산지, 원산지 찾아 아이디어 탐방 삼만리’는 SNS에서 그치지 않았다. 프랑스 치즈학교, 미국 포틀랜드 커피 바리스타스쿨, 영국 수제맥주 학교, 이탈리아 전통 베네치아 파스타 학교 등 관심 분야도, 아이디어 탐방 지역도 무궁무진하다. 전국 방방곡곡, 아니 세계 도처를 누비며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보고, 손으로 익혔다. 말 그대로 ‘왔노라 보았노라 배웠노라’였다. 그곳에서 벌어지고 부딪치는 소소한 사고와 우연한 사건들. 그것이 경험이 되고 이야기가 되고, 느낌이 되어 그만의 브랜드로 승화된다.
제가 소심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비용이 먼저 걱정되는걸요. 항공비, 체재비, 게다가 연수비용까지 만만찮을 것 같습니다.
“저는 버는 것의 20%는 자기계발에 투자한다는 주의입니다. 되도록 스폰서를 잡지 않고 제 돈으로 가는 게 원칙입니다. 후원을 받으면 여행 순서를 깨뜨리고 구속이 되거든요.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커피를 공부하는 데 2000만~3000만원 정도 들었어요. 결과적으로 강연, 컨설팅 요청이 들어와 투자한 것의 10배 정도는 뽑게 되더군요.”
그는 처음인 일을 나만의 것으로 차별화하면 브랜드가 된다고 말했다. 가령 커피 바리스타 강의를 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대중을 상대로 커피와 맥주를 전문적으로 강의하는 브랜드 전문가는 흔치 않다.
흔히 “관광이 아닌 현지 체험, 풍경이 아닌 사람을 만나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 회장님처럼 여행을 즐기면서 아이디어 탐방 기회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여행은 필연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연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일단 떠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보세요. 너무 목적, 목적 하며 따지지 마세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틀에 갇히기 쉽습니다. 기회는 인과관계 밖에서 터져 나옵니다. 많이 가야 합니다. 삶은 가고 싶은 목적지를 갖는 것입니다. 여행은 꿈입니다. 꿈을 가져야 여행을 가게 되고, 여행을 가야 자꾸 꿈을 키울 수 있지요.”
이장우 회장은 “여행은 꿈이고 도전”이라며 “목적을 갖고 가지만, 가서 새로운 목적과 도전을 얻는 우연, 세렌디피티가 더 크다”고 말했다. 그는 “목적지를 정하면 온갖 정보를 검색, 6개월 전부터 치밀한 계획을 짜지만, 막상 가서는 널널하게 현지에서 자유여행을 즐긴다”고. 사전 계획 때는 채우고, 막상 가서는 비운다. 말하자면 서양식 사고의 과학적 플래닝과 동양적 사고의 인문학적 여백의 결합형이다. 이번에 가는 인도행은 이름하여 소울 트립(soul trip). 트렌드의 촉을 읽으면 정통 원산지를 찾아 도전하고, 스토리를 만들고,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다듬어 전달하고 퍼뜨린다. 그것이 바로 브랜딩 아니겠는가.
외국어가 가능하다는 점도 세계 도처 어디든 도전하시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포함해 6개 국어를 하시지요. 최근에는 힌두어, 라틴어까지 공부하신다고요.
“새로운 언어를 하나 더 배운다는 것은 머리가 하나 더 생기는 일입니다. 언어를 한다는 것은 사고를 한다는 것이거든요. 여행한 곳을 더하면 새로운 마음의 눈이 하나 더 생기고요. 외국어 공부는 자기를 다른 세상으로 집어넣는 일종의 유체이탈 행위입니다. 리얼하지요. 비유하자면 번역이 사진 속 풍경이라면, 원어는 풍경 그 자체라고나 할까요. 아무리 인공지능 즉시 통번역 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외국어 공부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리얼한 것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니까요. 그것은 단지 속도가 아니라 느낌의 문제예요. 앞으로 세상은 지식이 아니라 필(feel)의 경쟁시대가 될 거예요. 지식과 상식은 보편화돼 검색하면 나오니까요. 느낌 있는 사람만이 살아남아요. 새로운 아이디어 탐방을 멈추지 않는 이유입니다.”
요즘 문제되는 것은 세대 간 소통입니다. 기업 자문을 하실 때 신세대 직원들과 같이 일을 하셔야 할 텐데요. 그들이 어려워해 소통이 어렵진 않던가요.
“제가 얼마나 신세대랑 잘 노는데요(웃음). 저는 나이듦을 장점으로 활용해요. 바깥바람 막아주지, 아이디어 아낌없이 공유하지, 성과 올려주지, 이들의 입장에선 ‘성과와 실력은 향상시켜주면서 경쟁하지 않아도 되고, 일은 쉽게 풀어가면서 어려운 책임은 상대가 가져가고’ 당연히 좋을 수밖에요. 신세대가 저처럼 나이 든 멘토와 일하는 장점이지요.”
그는 세대 간 불통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매력 자원이라는 무기의 문제라고 진단하면서 “신세대가 기성세대와 소통을 안 하는 것은 어렵거나 겁먹어서가 아니다. 기성세대를 무시해서다. 기성세대에게 배울 게, 물어볼 게, 아쉬울 게, 부러울 게 없다고 생각해서다. 기성세대가 신세대와 소통하려면 호통이나 비위 맞추기는 불필요하다. 그보다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본인은 재미와 의미를 갖고 일하지 않으면서 ‘나처럼 돼보라, 해보라’고 하면 누가 따르겠냐는 반문이다.
평생 재미와 의미로 점철된 흥미진진한 삶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에서의 ‘그늘’이 궁금합니다.
“웬걸요. 제가 콤플렉스 투성이인걸요. 콤플렉스가 힘이 되니, 인생은 알 수 없어요. 단점이 강점이 되고, 엎치락뒤치락이에요. 집은 가난했고, 머리는 나빠 구구단도 못 외울 정도였어요. 다행인 것은 지식이 들어가기 힘든 대신 나가기도 힘들더군요. 외우는 데 오래 걸렸지만, 한 번 외우면 잘 안 잊어버렸어요. 그게 외국어 공부의 동력이 되었지요. 또 집이 가난해 구멍가게를 했고, 상고에 진학해야 했지요. 어렸을 때부터 물건 팔고 장사를 하다 보니 세일즈에 일찍 눈을 뜨게 됐어요. 머리 좋은 사람이 끝까지 하는 사람을 못 이겨요. 제 삶의 모토가 ‘긴 호흡으로 살자’입니다.”
이장우 회장과의 인터뷰를 떠올리며 원고를 한 자 한 자 치고 있었다. 마침 그의 블로그에 인도에서 쓴 따끈따끈한 새 포스트가 올라왔다. 아쉬탕가 요가의 요람인 인도 마이소르의 한 수도원에서 올린 사진과 글이었다. 검은색 뿔테 안경에 주황색 승려복을 걸친 모습이 얼핏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를 연상시켰다.
“요가와 명상을 배운다는 사실이
설레었고, 그 느낌은 참 편안하고 좋았다.
영혼이 춤추는 세상을 찾아가는 새로운
배움의 여정임에 틀림없다.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현대인들에게
명상과 요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by 이장우
어느 날 문득 그가 명상과 요가 브랜드 전도사로 새롭게 나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연여행가 뒤에 붙을 그의 새로운 브랜드 네임이 문득 궁금해진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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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아산시 광덕산 자락으로 귀촌한 이웅기(66)씨는 시골을 홍보한다. ‘도시에 사는 시니어여, 시골로 가시라!’ 삭막한 회색 건물 숲에서 탈출하라는 얘기. 시골 자연 속에서 인생 후반을 흡족하게 누리라는 전갈. 도시라고 매력이 없으랴. 건강한 삶이 도시에선들 불가하랴. 그렇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씨의 생각은 다르다. 도시보다 수준 높은 게 시골의 여건이란다.
이웅기씨는 죽 도시에서 살았다. 도시에서 남들보다 밀리거나 뒤진 게 없었다. 그는 천안시에 있는 선문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였다. 누릴 거 대충 다 누렸을 게다. 응분의 실력으로 도회의 풍속을 기민하게 섭렵했을 게다. 그러나 미련 없이 시골행 열차를 탔다. 행선지를 바꾼 여행자처럼 인생행로를 변경했다.
“은퇴 이후에도 흔히들 은퇴하지 않은 것처럼 부대끼며 삽니다. 도시에선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기 어렵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왜 굳이 답답하게 서울에 눌러 살까. 서울의 그 비싼 아파트를 팔아치우면 얼마든지 시골에 근사한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을. 집 짓고도 여윳돈이 남아도는 것을. 귀촌처럼 안전한 노후대책이 드물다는 생각이에요.”
시골에 구미가 당기면 과감하게 털고 내려오라는 얘기다. 자연을 애호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라면 귀촌이 자연스럽다는 판단이다. 이웅기씨의 귀촌에 각별한 결단은 필요치 않았다. 시골살이는 오랜 꿈이었기에. 마음은 진즉 앞장서 산골에 가 있었기에. 아내(안경희씨·62) 역시 귀촌 지망생이었기에. 사직을 하고, 아파트를 팔고, 주변인들과 쾌히 작별인사를 하고, 일사천리로 일을 추진했다. 아하, 땅을 사는 과정엔 지체와 곡절이 있었더란다.
살터를 찾는 일은 시장에서 두부를 사는 일과 달라 신중을 기해야 하는 법. 기다렸다는 듯 맨발로 달려 나와 품에 안기는 땅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 한동안 전국을 누볐다. 그는 풍수에 일가견이 있다. 그의 눈은 매섭게 보고 깐깐하게 따지는 눈이다. 발품을 판 만큼 일쑤 눈에 드는 게 있었다. 그러나 계약 단계에서 땅을 거둬들이거나 값을 올려 포기해야 했다지. 인연은 뜻밖에도 천안 인근, 수려한 산촌에서 맺어졌다. 소풍 삼아 찾아간 산골 물가에서였다. 물가의 밝은 둔덕, 초승달 모양새의 땅덩이 1000평을, 그는 쾌재를 부르며 사들였다. 거기에 서둘러 집을 짓고 벽송재(碧松齋)라 당호를 붙였다. 푸른 솔숲에 에둘린 집이구나.
풍광을 보는 눈들은 엇비슷한 모양이다. 산수의 미모를 기차게 추구하는 이들이 이 골짝에 일찌감치 입장했다. 원주민보다 외지인 숫자가 많다. 삼삼한 터 여기저기에 멀끔한 전원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펜션도 많으니 휴가철엔 꽤나 버글거릴 게다. 덩달아 땅값도 뛰었다지. 산촌치고는 화려한(?) 현주소! 그래도 대자연이 압도해 시간조차 나른히 흐르는 것만 같다. 적막으로 채워진 공간은 고즈넉해 참신하다. 사방에서 일어서는 멧부리에선 우뚝한 맛이 난다. 골짜기는 깊숙한 멋을 풍긴다. 지겨운 세속의 난리블루스를 잊기에 족하다.
시골 살더라도 일은 놓지 말아야지
이씨의 집 곳곳엔 장항아리들이 즐비하다. 왜? 그는 된장을 담가 판다. 간장, 고추장, 청국장도 품목으로 삼았다. 산중에서 그저 노닐거나 빈둥거리기란 그의 적성에 맞질 않다. 일이 그의 본분사! 또는 일에서 낙을 찾고, 일로 만족을 구가하는 게 그의 본분사! 그는 날마다 고속도로처럼 분주한 눈치다. 된장 사업은 성업 중이고.
“시골에 살더라도 일을 가지는 게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야 생동하니까. 우두커니 먼 산만 바라보며 세월을 흘려버릴 순 없는 일 아니겠어요? 70세까진 뭐든 직업 활동을 하자는 작심으로 일을 찾았어요. 된장 사업이 적격이라 본 건 아내의 손맛을 믿어서였죠. 이게 무모한 판단일 수 있었지만 귀촌 초기에 즉시 일에 뛰어들었고, 열심히 매달렸고, 덕분에 썩 괜찮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비결이 뭐죠?”
“운도 따랐겠지만, 최상의 전통 장류를 생산하겠다는 초심을 견지했어요. 이 산골의 자연 환경, 즉 깨끗한 공기, 맑은 물, 풍부한 일조량도 장류 숙성에 호조건입니다. 순수한 천일염과 죽염을 재료로 장을 만든다는 점도 특장이에요. 방부제, 발효억제제, 조미료 등을 철저히 배제, 최상품 장류 생산에 주력했어요.”
“귀촌을 해 장을 담가 파는 사람들이 드물진 않죠. 시골에 살며 택할 수 있는 일거리 중에 비교적 유망한 업종일까요?”
“장 담그는 사람들의 80% 정도는 실패합니다. 세상의 일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소수만 성취한다는 것. 부지가 넓어야 하고, 공장 지어야 하고, 항아리 가격 비싸고, 초기 투자부터 부담되는 분야이지요. 그러나 유망한 측면도 있어요. 가령, 초중고 급식 재료로 안전한 전통 장류를 채택하는 추세가 확산될 텐데요, 고품질 장류를 만드는 사람들에겐 두세 배의 매출 확대를 꾀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장류가 아니더라도, 여하튼, 시골에서 오히려 더 나은 일, 더 좋은 찬스를 찾을 수도 있다는 건 분명해요.”
귀촌한 지 어언 10년. 이웅기씨는 이제 노련한 시골생활자. 소일거리 삼아 시작한 된장 사업의 규모는 점진적으로 증가했다. 연간 매출은 2억 원. 내년부터는 아산시에 소재한 모든 중고교에 된장을 공급한다. 그렇게 되면 매출은 두세 배 는다. 그는 지자체가 운영하는 귀촌귀농인 대상의 각종 지원 사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장류 관련 지원 사업 공모에 응모, 1억 원의 자금을 지원받은 바 있다. 그걸 밑천 삼아 사업을 전개했던 것.
소소하게 시작한 일이 사업화되면서부터 그는 엄청 바빠졌다. 도시에서 우리는 흔히 숨 막히게 바삐 돌아가는 일상에 탄식을 한다. 이씨는 그게 싫어서 귀촌을 했다. 그러나 시골에 와서도 다람쥐처럼 부산히 움직인다. 그러나 그는 기껍다. 삶에 자연이 붙어 있기 때문이겠지. 현실 도피처로 낭만적인 시골생활을 꿈꾸는 사람이 있지만, 어딜 가더라도, 시골에 살더라도, 삶의 끔찍한 증상은 따개비처럼 들러붙는다. 꾸역꾸역, 고독이나 권태가 밀려든다. 어쩌나? 이씨는 내 마음 안에, 내 몸 안에 자연을 담는 게 상책이라 본다. 그는 자연의학에 관한 한 전문가를 자처한다.
마음을 좋게 쓰는 게 좋은 삶
“귀촌 이후 저의 만족, 저의 행복의 대부분은 자연과 함께하는 데에서 비롯하고 있어요. 몸과 마음으로 자연이 들어오고, 그런 와중에서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것, 이게 행복이라 봐요. 그렇게 되면, 비로소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게 됩니다.”
“병이 나기 전까진 몸을 기계처럼 부리는 게 사람이죠. 아무거나 맛있는 음식이면 뱃속에 잔뜩 집어넣죠. 자연의학의 요체는 뭐죠?”
“몸이 원하는 걸 알아채는 거. 바로 그겁니다. 건강하지 않고선 행복이고 성공이고 다 소용없어요. 건강하긴 위해선 몸이 원하는 걸 섭취해야 해요. 일례로, 입에서 쉰내가 나면 신 음식을, 단내가 나면 단 음식을 먹어줘야 해요. 그 무엇보다 사람의 병은 마음에서 온다는 걸 알아야겠지요. 건강 문제는 결국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예요.”
“뭐든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모르는 바보는 없겠죠. 그러나 마음은 날뛰는 망둥이를 닮았어요.”
“예컨대, 아파트 위층에서 애들이 뛰는 소리에 분개해 살인까지 하는 경우가 있더군요. 마음을 잘 써 위층 애들이 내 손자라고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노력을 해야죠. 마음을 좋은 쪽으로 쓰는 게 좋은 삶의 길이니까.”
“천사라 부를 수밖에 없는 젊은 사람이 중병에 걸려 사경에 처하기도 해요. 신기하게도 다 죽어가던 사람이 산골에서 풀을 주로 뜯어먹고 건강을 회복하기도 하죠.”
“의학적,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현대의학이 못 고치는 병도 자연의학은 고칩니다. 자연식을 통해 기적적 회생을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공기 좋은 산골에서 오염되지 않은 산야초를 먹게 되면 건강이 좋아질 수밖에 없어요. 몸 아픈 사람들에겐 귀촌귀농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놈들은 명물이다. 힘이 세다. 산야초 또는 잡초 말이다. 잡초는 그 강한 생명력으로 사람에게 이치를 가르친다. 뛰어난 약성으로 사람을 돕는다. 보잘것없는 잡초야말로 미래 식량의 대안이라 보는 관점도 있다.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실은 보잘 것 많은 잡초. 잡초 밟기를 극구 삼가는 사람이 있다. 남의 얼굴을 구둣발로 밟고 지나는 건 결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잡초를 극진히 대접하긴 사실 힘들다. 그러나 자연 안에서 모든 생명들은 동등하고 존엄하다는 인식은 갸륵하다. 귀촌 생활은 자연과 생태에 관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와의 조우이기도 하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관을 활짝 열 수 있다면 쓸쓸한 삶을 더 잘 견딜 수 있겠지.
아름다운 건 자연만이 아니다. 여자도 아름답다. 아내도 아름다운 존재다.
“대부분의 아내들은 귀촌이나 귀농을 싫어합니다. 불편이 많아서죠. 제 아내는 흔쾌히 동의했어요. 딱히 서로 정서가 비슷해서는 아니고, 묵묵히 남편을 따라준 거죠.”
“혹시 독재를 일삼는 남편? 마초?(웃음)”
“제가 여성 예찬론잡니다. 남자는 하염없이 나약한 동물이지만 여자는 강해요. 정글에서도 암컷들이 훨씬 강해요. 여자들에겐 별다른 단점이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남자보다 여러모로 나아요. 지구력, 지속력, 생명력 등등에서 더 우월하니까. 아내를 통해 그걸 실감해요. 수굿하고 진득한 이 사람은 평생 불만이라는 걸 내비치질 않았어요. 아, 팁 하나! 귀촌은 반드시 아내와 대동해야 합니다. 남편이 먼저 내려와 자리를 잡은 뒤 합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간 필경엔 실패할 확률이 높아요. 시골생활엔 여자가 할 몫이 너무도 많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것! 특히나 원주민들과의 융화엔 안식구의 역할이 절대적이지요.”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부부가 서둘러 된장 작업장으로 들어간다. 교수에서 장류업체 사장으로 변신한 이씨의 어깻죽지에 의기양양이 비친다. 상상력이란 창작의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귀촌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력이 창의를 가져오고, 마침내 만족할 만한 일거리를 찾아내게 한다. 전에 해보지 않았던 일에의 도전은 어쩜 최상의 회춘 전략!
늙음 뒤엔 결국 병과 죽음이 대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건 하나의 애환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살아갈 길은 있다는 뉴스는 비 오듯 쏟아진다. 비곗살처럼 둔하게 누적되는 나이테에 서린, 쓸모 있는 경험과 요령을 살려 잘 부릴 경우, 회춘과 안락을 구가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문제는 삶의 후반전, 그 인생 2막을 열어 내딛는 발걸음의 방향에 달려 있다.
이 풍진 세상의 사이즈는 간장종지 같은 게 아니고 바다처럼 크넓다. 타성과 습성에 안주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전혀 새로운 삶의 파노라마 속으로 족히 여행하거나 방랑할 수 있으며, 그럴 때라야 세월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부질없이 낭비하는 결례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대전에서 학원을 경영하며 분주하게 살았던 진연순(57)씨 부부는 귀촌으로 인생 2막의 첫발을 내딛었다. 충북 옥천군 군북면의 시골마을이다.
진씨네 집을 들어서며 받은 첫인상은 매우 준수하고 청결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너른 살림채와 푸르른 농장 그 어느 구석 한 곳에서도 먼지나 잡풀을 찾아보기 힘들다. 난장판에 가깝도록 사물들을 널브러뜨린 채 살아가는 나에게는 거의 충격적인 풍경이다. 비지땀을 흘려 밤낮없이 근로를 하고, 청소를 하고, 미화작업을 하고서야 직성이 풀리게 되어 있는 성향의 부부가 사는 집임을 단박에 알게 한다. 사실 이 부부는 바지런하기가 헤집어놓은 개미굴 속의 병정개미와도 같다. 근면과 성실로 지상에 태어난 자의 사명을 다하길 습관처럼 거듭해 도시에서의 학원사업을 번듯하게 꾸려왔다. 그러다가 6년 전에 다 정리하고 후다닥 시골에 입장했다. 시골의 무엇이 이 부부를 호명했을까? 진연순씨에게 묻자 돌아오는 답이 이렇다.
“남편이나 저나, 나이 들면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오래전부터 있었어요. 도시와는 달리 시골에선 스트레스나 피로를 덜 느끼고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죠. 그래서 10여 년 전에 남편의 고향인 이곳에 농토를 구입해 주말농장으로 활용했어요. 서둘러 귀촌하는 대신 미리미리 준비를 했던 거예요. 저희 슬하엔 남매가 있는데요, 이 녀석들이 커 독립을 한 시점에서,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년 전에 비로소 이곳으로 완전한 이주를 했어요. 시골 정착이 비교적 순조로웠던 건 그렇게 나름의 준비기간이 있었기 때문이죠.”
“수강생이 수백 명에 달했다죠? 멀쩡하게 잘 운영되던 학원을 정리하기 아깝진 않았어요?”
“사실 결혼하면서부터 부부가 함께 공들여 키워온 입시학원이라 애착도 있었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여러모로 힘에 부치더라고요. 제가 전공인 수학을 강의하며 운영했는데요, 아이들은 나이 든 아줌마 강사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입시철이면 피를 말리는 긴장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두통으로 늘 시달렸죠. 귀촌을 하고 나서는 그런 게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어요.”
“저는 말이죠, 수학여행은 좋아했지만 수학은 참 싫었어요(웃음). 인생을 과목에 비유한다면, 수학 선생님이었던 당신의 인생은 어떤 과목을 닮았다고 보시죠?”
“흠. 도덕? 제가 원래 어떤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도덕적인 성격이에요. 모범생이라고 할까? 덕분에 큰 굴곡 없이 순탄하게 살아왔어요. 자유분방이라는 걸 용납하기 힘들었고요. 그런데 시골에 와서는 제가 천연염색에 푹 빠져 삽니다. 염색이라는 게 공예의 한 분야이고, 이른바 ‘끼’라는 게 요구된다는 걸 자주 실감하는데요, 그러고 보면 저에게도 뭔가 숨은 끼가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해요(웃음).”
“남편은 아로니아 농장을 운영하고, 아내는 천연염색을 하고, 매우 이상적인 배합으로 보여요. 처음부터 그러자는 발상을 했을까?”
“아녜요. 제가 일찍부터 천연염색에 취미가 있긴 했지만, 그게 직업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남편의 농사 역시 처음엔 깨끗한 먹거리를 길러 식구들 건강이나 챙기는 정도의 소소한 수준에 불과했죠. 그런데 일이 커졌습니다.”
천연염색은 색채의 향연을 즐기는 일
취미는 삶에 재미와 흥미를 보태준다. 권태롭거나 지겨운 일상에 생기를 부여한다. 지나친 탐닉으로 허영과 낭비의 골짜기로 빠질 수도 있는 게 취미생활이다. 진연순씨의 취미는 썩 근사한 방향으로 비약했다. 대전에 살 때부터 틈틈이 천연염색 공부를 해왔던 그녀는 시골에 살며 한결 더 진도를 냈다. 재미가 있어서였다. 그게 하나의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는 효과를 자아낼 줄은 자신조차 미처 몰랐다지. 취미로 사귀었던 천연염색이 어느덧 직업으로 진화한 거다. 미리 예상하지 못했던 이 기꺼운 변동! 이제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인생을 만족스러운 쪽으로 끌고 가는 행운아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귀촌 초기에 저는 골방 하나를 놀이터 삼아 혼자 천연염색이나 즐기며 지냈어요. 당시엔 사실 시골생활이 외롭고 힘들었거든요. 그걸 견디게 해준 게 염색이었어요. 남편은 이 마을이 고향입니다. 낙향한 셈이죠. 마을의 많은 주민들이 남편의 친척이나 친지, 선후배들이에요. 그들을 만나 술도 마시고, 농사일도 거들고, 수많은 단체에도 가입하고. 아무튼 남편은 밖으로만 나돌았어요. 저는 외톨이처럼 그저 집에 틀어박혀 염색작업에 간신히 마음을 붙이고 지냈어요. 그러면서 서서히 실력이랄까, 솜씨랄까, 그런 게 늘었던 것 같아요. 자신감이 붙으면서 염색작업 내용을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제 블로그를 본 한 학교에서 학생들의 염색 체험학습 의뢰를 해왔습니다. 그게 직업화의 신호탄이었죠.”
“단기간에 널리 알려지고, 순조롭게 자리 잡힌 건가요? 천연염색을 직업으로 삼아 체험장을 운영하는 귀농인들이 가끔 있지만 시원치 않다고들 해요.”
“제가 운이 좋은 걸까요? 빠르게 자리가 잡혔어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학교와 청소년 단체, 가족, 성인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수강을 해요. 시설도 점차적으로 늘렸어요. 실내외 교육장은 물론, 전래놀이 체험장, 잔디구장, 염료식물 재배장 같은 걸 구비했죠.”
“천연염색의 매력은 뭐죠?”
“순수하게 자연에서 얻어온 식물 재료들로 색채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는 거죠. 자연물에서 갖가지 신비한 색들이 나온다는 게 마음을 사로잡아요. 나뭇잎에서는 그냥 연둣빛만 나올 것 같지만 노란색이나 빨간색도 나옵니다. 쪽풀에서는 가슴 시린 파란색이 나와요. 마치 마법처럼 신기해요. 매염제를 사용하면 더 다양한 색상을 만들어낼 수 있고요. 염색으로 수입까지 발생한다는 점도 매력!”
“금상첨화?”
“일거양득!(웃음)”
‘라온뜰 농촌문화체험농장’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진씨 부부의 거처에 말이다. 진씨가 천연염색으로 자신의 취향과 희망을 일구듯이, 남편 박용규(59)씨는 아로니아 농장에 심혈을 기울인다. 귀촌 즉시 사업이라는 걸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단다. 이왕 시골에 살 거라면 유유자적까지는 아니라도 골치 아픈 속세의 일에서 해방돼 취미나 삼삼하게 즐기며 휘적휘적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흥청흥청 주야로 신바람 나게 노니는 일에도 대찬 내공이 필요하거니와, 부부의 적성 자체가 ‘놀자’ 과(科)가 아니라서 무위(無爲)란 그들의 소관사항이 아니었으렷다.
귀촌생활을 발랄하게 영위하는 비결
부부는 도시에서처럼 자연스럽게 다시 일로 뛰어들었다. 아내는 천연염색을 또 하나의 배필처럼 감미롭게 맞이했고, 남편은 몸에도 좋고 벌이에도 유망하다는 아로니아 재배에 열애하듯 뜨겁게 뛰어들었다. 말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라는 남편 백씨는, 근로를 숭상하고 농사를 애호하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하는데, 그는 전쟁을 연상시키는 농업 사업 특유의 경쟁에서 낙오될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타고난 근면으로 안착에 이르렀다.
“남편의 농사엔 실패가 많았어요. 시행착오를 거듭했어요. 천마를 심었다가 실패했고, 왕벚나무를 심었다가 타산을 맞추기는커녕 포클레인으로 다 뽑아냈고요, 검정콩도 심어봤지만 본전도 건지지 못했어요. 이후 옥천군 농업기술센터의 지원을 받은 아로니아 재배로 비로소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던 겁니다.”
“한때 블루베리의 채산성이 좋았지만 너도나도 덤벼드는 통에 과잉 생산이 돼 이젠 폐업하는 농가가 속출한다고 해요. 아로니아의 수익성은 아직 안정적일까?”
“아로니아도 이미 과잉 생산에다 수입산까지 마구 들어오면서 위기에 직면했어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차별화된 고품질 상품을 생산해 단골 소비자를 확보해야만 해요. 남편이 생산하는 아로니아는 친환경 무농약 인증과 ‘GAP(우수농산물관리제도) 인증’을 받았어요. 덕분에 순항하고 있어요. 블로그와 홈페이지를 통해 전량을 직거래로 판매하고 있고요.”
“시골살이를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농사를 권장할 생각은 있나요?”
“농사란 참 힘들어요. 아아, 너무 힘들었어요. 처음엔 풀인지 모종인지 구분조차 못해 다 뽑아냈어요. 지금은 남편이 농사를 전담하지만, 남편 역시 고생이 많아요. 초심자라면 시행착오를 각오해야 해요. 남들 말만 듣고 작물을 선택하는 건 필패의 비결이고요. 처음 몇 해의 부진을 감당하려면 자금력이 있어야 해요. 이건 매우 중요합니다. 염색의 경우에도 노동과 시간과 수고가 필요해요.”
“귀촌을 후회하진 않았어요? 도시도 매력적인 삶터인데 공연한 일탈을 했다는 의기소침이 없지 않았을 것 같다는….”
“후회할 정도로 바보스런 선택을 하진 않아야죠. 가장 힘든 건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었어요. 남편은 빨리 적응했지만, 저는 너무도 더뎠어요. 혼자 집에 박혀 염색만 했으니까. 이웃들이 불편해하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자칫 왕따 당할 상황이었죠. 그래서 태도를 바꿨어요. 마을 아줌마와 할머니들에게 염색을 가르쳐드렸고, 염색한 손수건을 선물했어요. 때론 식사 대접도 했고요. 이후 서로 흐뭇한 관계를 유지하게 됐어요.”
어린애는 볼수록 예쁜 짓을 하지만, 나이를 푸지게 먹어가면서는 미운 짓만 골라 하기 십상이다. 황혼의 광야에 서서, 마음 문고리를 안으로 닫아걸고 나 잘난 멋에만 안주하고서도 귀촌생활을 발랄하게 영위할 비결은 거의 없다. 자리이타(自利利他)라,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아마도 그게 길이겠지.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사진은 죽음의 흔적과 같다고 한다. 사진을 찍던 그 순간은 돌아오지 않고, 다시 그대로 찍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과거를 사진으로 찍는 이가 있다. 전도유망한 과학자에서 어엿한 사진작가로 전향한 김경수(金炅秀·53)씨다. 한때 현미경을 통해 신약(新藥)을 연구하던 그는 이제 뷰파인더를 통해 자신을 탐구하고 있다. 지난 세월의 파편들을 고스란히 담아낸 사진들은 곧 그의 자화상이다.
1990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26세 나이로 최연소 이학박사 학위를 딴 그는 한국화학연구원의 촉망받는 연구원이 된다. 이후 ㈜카이로제닉스와 ㈜셀트리온화학연구소 대표이사로 활약하며 ‘21세기의 뛰어난 과학자 2000인’, ‘21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성’, ‘21세기 가장 위대한 천재 500인’ 등 세계 인명사전에 20여 차례 등재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과학자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그는 49세라는 이른 나이에 직장과의 안녕을 고한다.
“갑자기 은퇴를 결심한 건 아니에요. 몇 년 전부터 서서히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겠다’ 마음먹고 연구원에서 나와 벤처기업을 운영했는데, 온갖 흥망성쇠를 겪으며 심신이 많이 상했어요. 과도한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렸고, 위(胃)에 문제가 생겨 건강이 악화됐죠. 일을 그만둬야 하는데, 퇴직하면 뭘 해야 할지가 고민되더라고요. 그동안 과학자로 23년을 살았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은 30년도 더 남았으니 말이죠.”
어린 시절 그림은 곧잘 그렸지만, 글 쓰는 데는 영 소질이 없던 그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기획안도 작성하고 칼럼도 쓰며 붓보다 펜을 잡는 일이 많아졌다. ‘글을 써볼까?’ 하는 생각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2012년에 에 투고한 시가 당선돼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러나 막상 전격적으로 하려니 피를 토해내는 듯한 정신적 고통이 느껴졌다.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고 퇴직한 거잖아요. 근데 아, 이건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싶었죠. 그러다 사진을 시작했는데 글을 쓰는 것보다는 재미있더라고요. 단국대 사진예술아카데미를 다니며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했죠.”
2013년 그는 만 50세를 5개월 남겨두고 회사생활을 정리한다. 남들보다 이르게 퇴직한 뒤 일상의 어려움은 없었을까? 또 그의 바람대로 스트레스는 없는지 궁금했다.
“퇴직하고 공허해하는 사람이 많죠. 그건 출근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목표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현재의 삶이 여유롭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쉬는 것은 아니거든요. 작품에 대해 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고민하니까요. 즐거운 고민이죠. 나름 스트레스도 받아요. 그러나 과거의 스트레스가 몸에 해로운 것이었다면, 지금의 스트레스는 삶에 탄력을 주고 의미를 주는 활력소 같은 거죠.”
어릴 적 반짝이던 꿈 ‘별이 빛나는 밤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그에게 슬며시 동심이 피어올랐다. 한때는 그도 밤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소년이었다. 시간이 흘러 소년은 과학을 전공하는 청년이 됐고, 반짝이는 별의 빛깔을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을 만큼 영리해졌다. 아쉽게도 어릴 적 느꼈던 별에 대한 환상과 신비는 그렇게 잊혀졌다. 그리고 30여 년 뒤, 중년이 되고 문득 다시 그 별이 보고 싶어졌단다.
“첫 개인 사진전 제목이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2015)’이었는데 어릴 적 밤하늘의 별, 그러니까 유년기의 꿈을 재현한 작품들이었어요. 진짜 밤하늘의 별을 찍은 게 아니라, 그 옛날 환상을 가지고 바라보던 별을 물방울과 빛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거죠. 투명한 유리판에 물방울을 만들고 빛을 입혀 사진을 찍으면 반짝이는 별이 담기거든요. 정말 어려운 작업이었죠. 다시 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못할 것 같아요. 힘들긴 했지만, 그만큼 다른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하는 저만의 방법으로 작품을 탄생시켰다는 자부심이 커요.”
아름다운 꽃송이에 번지는 별빛들이 어릴 적 꿈처럼 반짝이는 그의 첫 전시 작품들은 전문가와 관람객들에게 호평을 얻었다. 독특한 표현 기법도 눈길을 끌었지만, 과학자 출신 신진 사진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이 감탄을 자아냈다.
“사진을 시작할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했어요. 2013년부터 그룹 사진전에 참여했는데, 좋은 평가를 들으니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또 인정해주는 사람이 많으니 재미있어졌죠. 그렇게 본격적인 사진작가의 길로 전향하게 됐어요. 잘 모르는 사람은 ‘은퇴하고 좋은 취미활동 한다’고 하지만, 나는 ‘사진작가’라고 딱 잘라 말해요. 제2인생의 직업이 된 거죠. 은퇴하고 등산 많이들 하는데, 등산이 제2직업이 될 수는 없잖아요. 수입이 많지는 않더라도 평생 직업으로 삼을 만한 일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내면의 자화상 ‘꼭두각시’
과학자로, 기업가로, 그리고 사진작가로 무엇을 하든 빠르게 좋은 성과를 거두는 그의 삶이 탄탄대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김 작가의 속사정은 달랐다. 모든 것이 절정으로 무르익던 40대, 수차례 천당과 지옥을 오갔을 정도로 절망과 실패로 얼룩진 나날을 보냈던 그다.
“제 이력만 보면 모르겠지만, 사실 그렇게 순탄하게 살지는 못했어요. 직접 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수익에 연연하게 되고, 경기가 안 좋으면 빚을 지고, 그러다 회사가 숨넘어가는 지경에 이르면 정말 악몽 같은 날들을 보내야 했죠.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려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차린 회사인데도 자금 때문에 연구도 제대로 못하고 결국 인간관계도 틀어지더라고요.”
김 작가는 당시의 아픔과 시련을 위로하며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로 했다. 지난 전시에서 별을 표현했지만 진짜 별을 찍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자신이 아닌 피노키오 마리오네트를 통해 감정을 이입했다.
“카이스트에서 박사학위 받고 마치 내가 세상의 주인공인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살았는데, 현실에 무너지고 상처받으면서 ‘나는 사회라는 쳇바퀴 속에 갇힌 꼭두각시에 불과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두 번째 전시 ‘꼭두각시(Marionette·2017)’는 그런 슬픔과 절망을 담았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모습을 표현한 거죠.”
아무런 표정이 없고, 생명력도 없는 목각 꼭두각시에 그는 ‘빛’을 이용해 감정을 불어넣었다. 라이트 페인팅(light painting) 작업인데, 푸른빛에서 느껴지는 색의 감정, 붉은빛에서 나타나는 색의 온도 등으로 꼭두각시에 감정을 입힌 것이다.
“그냥 꼭두각시만 찍어서는 그런 감동을 줄 수가 없잖아요. 하나의 꼭두각시라도 빛에 따라 다 감정이 달라 보여요. 무언가를 추구하는 모습, 우울한 표정, 위축된 감정 등 새로운 이미지와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거죠.”
삶의 경험이 예술이 되다
빛을 이용하다 보니 그는 주로 어두운 곳에서 작업을 한다. 컴컴한 방 안, 조명과 카메라, 그리고 자신을 마주한 피사체와의 고요한 시간 속에 조바심이 나기도 하고 기대감에 들뜨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찍힌 작품들이 세상의 빛을 보았을 때, 몇몇 사람들은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의 작품이 사진이 아닌 애니메이션이나 컴퓨터그래픽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 작가의 작품은 몽환적이고 이색적인 색감이 두드러져 마치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에 대해 그는 실제로 보이지 않는 것을 찍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무대를 세팅하고 암실에서 카메라 셔터를 열고 빛을 칠하고 셔터를 닫으면 내가 했던 행위예술적 작업이 모여 한 장의 사진으로 담겨요. 분명 사진으로 나오지만 그 비주얼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죠. ‘별이 빛나는 밤’의 별도 실제로는 안 보여요. 촬영했을 때 물방울에 반사된 빛이 결과물로 나오는 거죠. 결국엔 내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것들을 만드는 거예요. 마치 연주하는 것처럼.”
김 작가는 아무리 멋있고 좋은 곳이라도 풍경사진은 찍지 않는다. 누구나 가서 찍을 수 있을 뿐더러, 이미 그보다 더 잘 찍어낼 전문가들이 많기 때문이다. 평범한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것에 열정을 보이는 그에겐 과학자로 살아왔던 인생철학이 담겨 있었다.
“화학 분야를 연구하다 보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건 내 삶의 논리와도 같고요. 남들이 하는 것은 하지 않아요. 사진도 누구나 찍는 건 안 찍어요. 나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작품을 만들죠. 취미 수준을 넘어 예술을 하려면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과학과 예술이 관통하는 부분이 있죠.”
과학자로서의 경험은 그만의 독특한 작품세계 속에도 숨어 있었다. 물방울로 별을 표현하는 작업에서도 표면을 동그랗게 만들거나, 크기를 크게 만드는 등 화학적 원리를 이용한 방법들이 쓰였다고 한다. 남들에게는 어렵지만, 화학을 전공한 그에게는 별것 아닌 소소한 과정이라고. 그는 자신처럼 지난 경험을 무기로 활동하는 중장년 예술가들의 저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요즘 은퇴하고 평생교육원이나 기관을 통해 글, 그림, 사진 등을 공부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젊어서는 돈벌이가 되지 않아 직업으로 삼지 못하다가, 나이 들고 생계의 고충에서 벗어나 예술활동을 하는 거죠. 그중에 잘하는 분들의 작품을 보면, 지난 경험들이 다 녹아 있어요. 문학이든 예술이든 진정성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그동안 축적해놓은 자기 이야기와 감정을 풀어놓으니 엄청난 무기가 되는 거죠.”
‘아바타’, ‘나는 나무로 살고 싶다’
과거 어린 시절의 꿈, 그리고 청년기와 중년기의 좌절을 담은 두 번의 전시를 마친 그는 이제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을 준비하고 있다. 세 번째 전시는 ‘아바타’, 네 번째 전시는 ‘나는 나무로 살고 싶다’라고 이미 제목도 지었고, 작가노트도 작성했다고 한다. 보통 작가들은 작업을 마친 후에 작업노트를 쓰는데, 벌써 마쳤다고 하는 것을 보니 그만큼 뚜렷한 작품세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아바타’는 장년기의 소회를, ‘나는 나무로 살고 싶다’는 미래에 대한 삶의 고민을 담을 예정이에요. 제 작품들을 보면 비주얼은 특별하지만, 스토리는 소소한 제 삶을 이야기하잖아요. 그 덕분에 주제가 명확해 작품노트도 일찍 쓸 수 있었고요. 이제 어떤 방법으로 표현할지가 관건이에요. 한 가지 고민이 있다면, 지금 작업실을 따로 두지 않고 집에서 작업을 하는데, 작품 스케일이 점점 커지다 보니 불편한 점이 있어요. 아직은 제 작품을 알고 사가는 분들이 많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나아질 거라 생각해요. 그런 부분도 기분 좋은 스트레스라 여기고 현명하게 잘 헤쳐나가야죠.”
199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백인 경찰의 흑인 폭행으로 시작된 흑백 갈등이 엉뚱하게도 코리아타운으로 불똥이 튀었다. LA폭동이었다. 미국 매스컴들의 편파보도는 살림 잘하고 있던 한 한국 아줌마를 ‘욱’하게 만들었다.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그녀는 그 길로 정치판으로 뛰어든다. 이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주인공은 미셸 박 스틸(62). 미주 한인 커뮤니티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여성 정치인이자, 현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슈퍼바이저 위원장이다. 그녀를 미국 현지, 산타에나 오렌지카운티 청사에서 만났다.
카운티 슈퍼바이저(County Supervisor). 우리에겐 무척 생소하니 단어 정리부터 해보자. 카운티는 미국 주 정부의 하부 행정 구역으로 캘리포니아 주(州) 오렌지카운티 안에는 총 34개의 시(市)가 포함되어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세 번째, 미국 전체에서는 여섯 번째로 크다. 인구 320만 명에 한해 예산만 6조원에 이르는 오렌지카운티는 한국의 광역시와 비슷한 규모의 자치단체다.
카운티는 각 지역구에서 선출된 5명의 슈퍼바이저(슈퍼바이저 위원회)가 이끌어 가는데 박 위원장은 2014년 선거에서 한인 최초의 슈퍼바이저로 당선됐다. 지난 1월에는 만장일치로 위원장에 선출, 그녀는 명실상부 오렌지카운티의 행정 수장이다.
“한국뿐 아니라 이곳 한인분들도 낯설어했어요. 당선되고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슈퍼바이저가 뭐하는 자리냐는 거였으니까요. 그만큼 한인 정치인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죠. 저는 한마디로 오렌지카운티의 모든 살림을 맡아서 합니다. 법을 만들고 집행도 하지요. 소방국, 경찰국, 보건국 관리는 물론 교육, 사회복지, 심지어 쓰레기를 수거·처리하는 일까지 모두요.”
얼마나 바쁘냐는 질문에 다이어리를 살핀다. 존웨인공항의 리모델링과 국제선 비행기의 공항 사용료 문제, 야생 코요테의 사체 처리 법안, 등·하교시간 교통 체증에 대한 주민 항의, 노숙자 샤워와 숙박시설 허가…. 박 위원장의 수첩을 꽉 메우고 있는 현안들이다. 오늘 잡힌 미팅만 4개. 자잘한 방문 약속까지 소화하려면 오늘도 칼퇴근은 어렵겠다며 웃는다. 그녀의 기분 좋은 미소 뒤로 성조기가 아닌 태극기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가 정치인이 된 이유
한국 이름 박은주. 그녀의 고향은 서울 성북동이다. 어린 시절 뛰놀던 학교 운동장이며 창경원(現 창경궁)에 놀러갔던 일, 경복궁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추억이 그녀의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일본 한국교육문화원으로 발령이 나면서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동경여자대학교 영문학과 1학년이던 1975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페퍼다인대학(Pepper dine University)에서 경영학을 전공할 때만 해도 박 위원장의 꿈은 현모양처였다. 예쁜 앞치마를 입고 쿠키를 구우며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고. 1981년 테니스 동호회에서 만난 전도유망한 청년 변호사 션 스틸과 결혼해 예쁜 두 딸도 얻었다. 그렇게 현모양처의 꿈을 이루는 듯했지만 그녀의 길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LA에서 홀로 옷가게를 운영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 국세청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어요. 세금을 속였다며 정말 어마어마한 벌금을 부과했더라고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어요. 어머니는 한국과 일본에서 교편을 잡았던 분이세요. 평생 정직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사셨던 분이 탈세라니… 너무나 억울했지만 아무도 우리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때 처음으로 소수계가 당하는 부당함과 설움을 알게 됐어요. 거기에 불을 지핀 것이 4·29 폭동이었고요.”
LA 4·29 폭동은 박 위원장에게 ‘행동하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는다’는 신념과 자신이 ‘한국인’임을 각인시켜준 사건이었다. 1992년 4월 29일 흑인 로드니 킹을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무죄 선고를 받자 흥분한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공권력은 부유한 백인들이 살고 있는 비벌리힐스를 보호하기에 바빴고 결국 폭도들에게 한인 타운으로 가는 길을 내준 꼴이 되었다. 맨손으로 일군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한인들은 직접 총을 들었고 미국 매스컴들은 앞다투어 한·흑 갈등으로 몰고 갔다.
닷새간 이어진 방화와 약탈로 2300여 한인 업소가 피해를 입었고 피해액만 5억달러에 이르렀다. 돈 벌기 위해 너무 앞만 보고 달렸다는 각성의 목소리도 나왔지만 그 대가치고는 너무나 참혹했다. 한인 타운은 그야말로 잿더미로 변했다.
“한마디로 미디어의 횡포였어요. 뉴스, TV 쇼에서 잘못된 내용을 말하고 있는데 누구 하나 정정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뭔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어요. 정치인 친구들이 많았던 남편에게 부당함을 쏟아냈고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말했어요. 정말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았어요. 남들 앞에 나서기를 지독히도 싫어하던 제가 말이죠.”
1993년 LA시장에 출마한 리처든 리오든 선거캠프 자원봉사를 시작으로 그녀는 미국 정치판으로 뛰어들었다. 안 하면 안 했지 적당히 하는 꼴은 못 보는 한국 아줌마의 힘은 어디서나 단연 돋보였다.
시장에 당선된 리오든 시장은 그녀를 LA소방국 커미셔너로 전격 발탁했고 이후 LA공항, LA아동복지국 커미셔너를 역임했다. 커미셔너는 해당 분야의 정책자문 역할을 하면서 시의 전반적인 행정에 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직책이다.
박 위원장은 이어 1999년 한미공화당협회 회장, 2001년 부시 행정부에서는 아시아태평양 자문위원을 거치며 차근차근 정치 이력을 쌓게 된다.
한인 커뮤니티가 사랑하는 선거의 여왕
사실 박 위원장이야말로 ‘선거의 여왕’이라 불릴 만한 전력의 소유자다. 24년 정치인생에서 세 번의 선거에 출마, 모두 승리했다. 특히 2006년 당시 ‘듣보잡’ 후보에 가까웠던 그녀가 도전한 ‘캘리포니아 조세형평국 위원’은 캘리포니아 조세 정책을 총괄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그녀는 이 선거에서 정치 거목이었던 상대 후보를 꺾고 60.5%라는 득표율로 압승했다. 한국 커뮤니티는 물론 그녀가 속한 공화당 내부에서도 놀란 결과였다. 목소리까지 가냘퍼 보이는 그녀의 이런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박 위원장은 서슴없이 ‘한국인의 DNA’ 덕분이라고 말한다.
“처음 출마선언을 하고 후보 인준을 받기 위해 연설을 한 날이었어요. 얼마나 무서웠던지 연설을 마치고 나와서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결국 울음이 터졌죠. 옆에 앉은 분이 걱정이 되어 남편에게 전화를 하더라고요. 전화를 끊고 아무 말이 없길래 남편이 뭐라고 하더냐 물었더니 그냥 놔두라고 했대요. 금방 다시 씩씩해질 거라고. 미셸은 한국 여자라고요(웃음)!”
박 위원장은 2010년 재선에서도 거뜬히 승리하면서 8년간 조세형평국 위원으로 재직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녀의 이름 앞에는 ‘가주 내 한인 최고위 선출직 공직자’,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공화당원’ 등의 수식어가 붙게 된다.
미셸 박 스틸의 러닝메이트는 바로 한인 커뮤니티다. 그녀는 한인 커뮤니티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며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것은 모두 한인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선거는 선거자금이 당락을 결정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미국 정치인들에게는 선거자금 캠페인, 모금행사 등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기부금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인들에게는 이것이 낯설기만 하다. 또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유권자 등록이나 투표는 늘 딴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아쉬운 이야기이지만 한인 유권자 등록률과 투표율은 아시안 커뮤니티에서 늘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셸 박 스틸이 출마하는 선거는 유독 한인들의 투표율이 높다. 박 위원장이 슈퍼바이저로 당선된 지난 2014년 선거에서 오렌지카운티의 한인 유권자 투표율은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미셸 박 스틸만큼은 밀어줘야 한다는 분위기다. 이렇다 보니 미주 한인사회의 오랜 숙원인 연방하원에 입성할 인물로 박 위원장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박 위원장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시정에서는 한인 커뮤니티를 어떻게든 메인스트림으로 끌고 들어오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카운티에 공식적으로 미주 한인의 날을 만드는가 하면, 한인 단체가 벌이는 행사를 카운티가 공식 후원함으로써 힘을 실어주고 있다.
조세형평국 시절에는 정부 공식 홈페이지에 한글로 된 안내문을 올리기도 했다. 부당한 세금이 청구된 납세자가 있다면 자신에게 연락하라, 혐의가 입증되기 전에는 무혐의로 믿고 끝까지 보호하겠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그녀 어머니가 당했던 억울함을 한인들에게 다시는 없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강철 벽처럼 느껴지는 주 정부 홈페이지에 한글로 된 안내물이라니… 어찌 한인들이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연한 일이에요. 메인스트림 안에서 한인을 대변하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으니까요. 임기 동안 하나라도 더 정착시켜놓으려 합니다. 제가 이 자리를 떠나더라도 카운티 차원에서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요. 그만큼 어깨가 무겁기도 하지만 보람도 있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으려 해요. 내가 왜 이 자리에 오려 했는가를 생각하죠. 정치인은 유권자의 선택으로 살아남는 사람들이에요. 유권자가 내려가라 하면 내려가야죠. 다행히 아직까지는 저를 많이 사랑해주고 계세요(웃음).”
박 위원장은 내년 그녀의 네 번째 선거를 치러야 한다. 슈퍼바이저 재임에 도전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시 선거자금을 모으는 일이다. 이제 곧 후보들 간의 모금 현황부터 비교하며 당락 가능성을 점치는 언론들의 보도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다시 전쟁이다.
남편, 그리고 엄마
박 위원장의 정치인생에 없어선 안 될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남편 션 스틸 변호사(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와 어머니 정옥희 여사(2011년 작고)다. 박 위원장이 정치를 시작하면서 함께 살기 시작한 세 사람에게는 소소한 추억들이 많다. LA 문단에서 수필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정옥희 여사의 수필집 곳곳에는 딸과 사위 이야기가 있다. 특히 사위 스틸 변호사에 대한 묘사에는 애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람. 우리나라 함경도 사람처럼 일하며 처자 권속을 확실히 지키는 사람. 내가 여행이라도 가는 날이면 손에 돈과 정을 같이 쥐어줄 줄 아는 사람이 우리 사위다. 집에 돌아오면 조용한 집 안을 장터같이 활기차게 만들고 장모의 김치볶음밥과 순두부찌개가 최고라고 치켜세우는 사위는 가정을 지키는 것이 생애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정옥희 수필집 모음 중에서)
결혼 36년 차의 남편은 박 위원장에게 늘 휴식 같은 존재다. 캘리포니아 공화당협회 의장까지 지냈지만 정치적 조언보다는 시정에 지친 아내를 살피는 일이 우선이다. 타고난 유머감각으로 박 위원장을 늘 웃게 만들어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지난해 큰딸 채안(29)이 결혼하면서 박 위원장은 사위를 봤다. 그래서인지 돌아가신 ‘엄마 생각’(박 위원장은 꼭 엄마라고 불렀다)이 더 잦아졌다고.
“참 강하고 현명하셨던 거 같아요. 그때는 엄마로서 이민자로서 살기가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던 시절이었는데 말이에요. 처음 일본에 가서 말도 못하고 친구가 없는 저를 보고 엄마는 늘 웃으라고 했어요. 내가 웃기만 하니 아이들이 ‘아호(바보)’라고 하더군요. 엄마는 그래도 계속 웃으라고 했어요. 정치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미셸은 잘 웃어서 좋다는 말이에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라면 뭐라고 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엄마가 딸을 위해 내어놓는 솔루션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박 위원장은 자신이 엄마를 추억하듯, 훗날 딸들이 자신을 그렇게 추억해주기를 원한다. 그녀의 뒤를 이어 한인 커뮤니티를 대표할 차세대 정치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삶에 덕이 되고 싶고, 길을 먼저 가는 선배로서 그들이 올 길을 조금은 편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정치적 야망이요? 그렇게 거창한 표현은 안 어울리고요. 정치인으로서 잃고 싶지 않은 것은 있어요. 민심과의 소통, 발로 뛰는 열정 그리고 정직이요. 어디까지 가든 소통과 열정, 정직 없이 가게 될까봐 겁이 납니다. 연방하원… 가야죠. 제가 아닌 누구라도 가야 합니다. 제가 갈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갈 것이고 혹 나보다 더 좋은 후보가 나타난다면 저는 미련 없이 그를 밀 것입니다.”
인터뷰 말미, 그녀가 고향 성북동의 안부를 묻는다. 두어 차례 한국 지자체의 초청을 받아 남편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지만 정작 추억 어린 곳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서울 시내 곳곳이 너무 많이 바뀌었지만 성북동은 아직 옛 정취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하니 아이처럼 반가워한다. 남편과 함께 꼭 가볼 거라고 코를 찡긋거리며 웃는 그녀.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으며, 열정적이고, 그대로의 자신을 내어 보이는 미셸 박 스틸은 아름다웠다.
매서운 추위에 잎사귀들은 메말랐어도 마음은 따뜻하게 감성은 촉촉하게 보내고 싶다면 미술관 나들이를 추천한다. 전시에 따라 매력이 달라지는 게 미술관이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전시물 외에도 즐길거리, 볼거리가 풍성하다. 눈 오는 날 방문한다면 미술관 통유리로 바라보는 풍경이 또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될 것이다.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도심 속 열린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MMCA) 서울관은 문화·예술인들이 사랑하는 거리 ‘삼청로’에서 만날 수 있다. 과거 국군기무사령부가 사용하던 공간에 터를 잡아 2013년 11월 개관했다. 조선시대에는 소격서, 종친부, 규장각, 사간원 등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과천관, 덕수궁관에 이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세 번째로 문을 연 서울관은 ‘도심 속 열린 미술관’이라는 콘셉트로 갤러리 공간 외에도 다양한 시설을 갖춘 복합예술문화센터로 발돋움하고 있다. 8개의 전시실을 비롯해 멀티프로젝트홀, 미디어랩, 디지털 도서관, 교육동, 세미나실 등을 운영한다. 한 번 방문하면 전시뿐만 아니라 영화, 공연, 교육 등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는 게 매력이다. 카페테리아, 푸드코트, 북카페, 아트존 등 다양한 편의시설도 이용할 수 있어 오랜 시간 머물러도 부담이 없고, 지루할 틈도 없다.
크게 전시동과 교육동으로 나뉘는데, 미술을 보고 느끼는 것에서 배우고 체험하는 기회까지 골고루 만끽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전시동 지하 1층에는 서울박스와 전시마당을 중심으로 6개의 전시실과 멀티프로젝트홀, MMCA 필름앤비디오·미디어아트월 등이 마련돼 있다. ‘멀티프로젝트홀’은 퍼포먼스, 다원예술, 전시, 교육 등 여러 장르가 융·복합되는 현대미술의 예술적 표현이 가능한 공간이다. ‘MMCA 필름앤비디오’에서는 총 120여 석 규모로 예술영화와 실험영화를 비롯한 국제영화제 개최 작품들을 상영한다.
오감이 즐거운 복합예술문화센터
미술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아트존(Art Zone)은 전시동 1층 570㎡ 규모로 3개의 존 5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구역(갤러리1)에서는 국내 작가와 그들의 작품, 특히 공예 분야의 유망 작가들 작품을 지속해서 전시한다. 제2구역(갤러리2·3)에서는 미술관에서 개발하는 문화상품과 도록, 디자인 아이디어 제품을, 제3구역(갤러리4·5)에서는 섬유·패션 상품 및 국내외 미술 전문서적 등을 전시하고 판매한다. 전시와 연계한 작가들의 실험적인 문화상품을 소개해 누구나 편하게 관람하고 구매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미술 서적에 관심이 있다면 ‘디지털 도서관(2층)’에 들러보자. 미술관이 소장한 다양한 미술 분야 출판물, 단행본, 잡지 등 8000여 권을 열람할 수 있다. 도서관을 비롯한 대부분의 공간은 통유리로 돼 있어 인근에 마주하고 있는 경복궁, 삼청동 등 미술관 외부 전경 등을 훤히 보여준다. ‘친환경 미술관’이라는 취지에 맞게 자연채광을 전시 및 내부 조명에 활용하기 때문에 유독 햇살이 잘 들어 따뜻하고 환하다. 특히 야외 전시물인 ‘연역적 오브제(김수자, 2016)’가 한가운데 놓인 잔디밭 인근 통유리에 알록달록 무지갯빛 스펙트럼이 쏟아져 몽환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3층 교육동에서는 디지털아카이브와 멤버십라운지를 운영한다. 멤버십라운지는 국립현대미술관 특별회원(연간 10만원으로 가입 가능)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활용된다.
내부 전시실을 돌아다니다 보면 종종 야외로 향하는 문을 발견하는데, 그럴 땐 잠시 바깥 공기를 쐬고 오는 것도 좋겠다. 건물 사이를 가로지르는 오르막길을 걸으면 너른 잔디밭에 자리 잡고 있는 종친부(宗親府)를 만나게 된다. 종친부는 조선시대 역대 제왕의 어보와 어진을 보관하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했던 관청으로 미술관이 개관하던 당시 이전·복원한 것이다. 종친부가 있는 곳에 서서 미술관을 바라보면 저 멀리 경복궁 돌담길과 인왕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리 전통문화와 현대 예술의 조화가 오묘하게 어우러지는 풍경을 담을 수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30 이용시간 월·화·목·금·일 (10:00~18:00), 수·토(10:00~21:00) ✽야간개장(18:00~21:00 무료관람) 관람요금 통합입장권 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