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재취업을 하고자 국가기술자격증을 취득하는 중장년층이 늘고 있다. 특히 취미나 관심사를 살려서 직업으로 발전시키기도 하는데,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은 이와 관련 있다고 할 수 있다. ‘2020년 국가기술자격 통계 연보’에 따르면 한식조리기능사는 50대가 가장 많이 취득한 자격증 2위에 올랐다. 특히 여성은 살림 경력으로 요리에 자신 있는 경우가 많아, 50대 여성이 가장 선호하는 자격증 1위를 차지했다.
한식조리기능사는 한국 산업인력공단에서 시행하는 한식조리기능사 시험에 합격해 그 자격을 취득한 자를 말한다. 전문 조리사가 되기 위한 첫걸음인 기능사 등급의 자격증으로 응시 자격에 제한이 없다. 상위 자격증으로 한식조리산업기사와 조리기능장이 있다.
한식조리기능사는 한식 메뉴 계획에 따라 식재료를 선정해 구입하고 검수하며, 구입한 재료를 영양학적으로 저장·관리하는 작업을 한다. 또한 맛과 영양을 고려해 안전하고 위생적으로 음식을 조리하고, 조리 기구와 시설을 관리하며 유지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자격증 취득 후 일반음식점부터 레스토랑(호텔 포함), 학교·회사·병원 등의 집단급식소 등에서 조리사로 일할 수 있다. 다만 전문 레스토랑에서는 전문대학 이상 조리 관련 학과 졸업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중장년층이 취업하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에 따라 중장년층은 보통 집단급식소에서 일하는 편이다.
특히 학교 급식소에서 일하면 퇴근 시간이 빠르고, 방학 기간에 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조리사 자체가 업체 간, 지역 간 이동이 많은 편이고 고용과 임금이 안정적이지는 못한 편이라는 아쉬움도 있다. 경력을 쌓고 조리 전문가로 인정받으면 그때부터 높은 수익과 직업적 안정성을 보장받는다.
결과적으로 한식조리기능사는 돈을 많이 벌겠다는 목적보다는 요리할 때 즐거움을 느끼고 시간을 유연하게 쓰고 싶은 중장년층에게 추천하는 직업이다.
한 번에 필기·실기 합격 드물어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은 보통 취득 과정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만만히 볼 수 없는 자격증이다. 시험 과정이 꽤 까다롭다. 필기와 실기시험을 한 번에 합격하는 수험생이 많지 않다.
먼저 필기시험은 쉬운 편이 맞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2021년 한식조리기능사 필기시험 합격률은 44.9%였다. 약 50%에 가까운 합격률이다. 제한 시간 1시간 동안 사지선다형 60문제를 풀어야 하고, 60점 이상 맞으면 합격이다.
시험 과목은 한식재료관리, 음식조리 및 위생관리다. 문제집 한 권을 사서 2~3주 정도 시간을 투자해 공부하면 무리 없이 합격할 수 있다.
실기시험 합격률은 2021년 기준 34.5%에 불과하다. 시험을 한 번에 통과하는 경우가 적고, 2수, 3수생이 흔하다고 알려졌다. 필기시험의 유효기간인 2년 내에 실기시험 재응시가 가능하다.
실기시험은 한식 메뉴 31개 중 2개가 랜덤으로 출제된다. 약 70분 동안 주어진 재료로 조리해야 한다. 심사관 2명이 요리의 전 과정을 지켜보면서 평가하기 때문에 긴장하기 쉽다.
실기시험은 절대평가제다. 요리 2가지를 각 45점으로 평가하고 위생 상태 평가가 10점으로 총 100점 만점이다. 심사관 2명의 점수가 평균 60점 이상이면 합격이다. 심사관 2명에게 합격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더욱 까다롭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A 심사관은 70점을 줬는데, B 심사관은 40점을 주면 평균 55점이 되어 불합격이다.
실기시험 시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수험생은 조리 도구를 지참해서 시험장에 가야 한다. 그와 관련해 조리도 제대로 못 해보고 실격 처리당해 불합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① 위생복, 위생모, 앞치마, 마스크 중 한 가지라도 착용하지 않은 경우 ② 지정된 수험자 지참 준비물 이외에 조리 기구를 사용한 경우가 있다.
따라서 한식조리기능사 위생 상태 및 안전관리에 관한 세부 기준을 반드시 확인하고, 위생복, 위생모, 앞치마, 마스크와 지참이 허용된 조리 도구만 실기시험장에 갖고 가야 한다. 특히 올해부터는 면보와 행주 색상을 흰색으로 통일했다고 하니 더욱 유의하자.
중장년층을 위한 한식조리기능사 교육 훈련소가 많다. 각 지자체 여성새로일하기센터는 대부분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 취득 과정을 제공한다. 비슷하게는 급식조리사 양성 교육과정을 운영하기도 한다. 급식조리사 양성 교육과정에서도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 취득을 추천한다.
실제로 대구여성인력개발센터는 지난해까지는 급식조리사 양성 교육과정을 진행했으나 올해부터는 한식조리기능사 양성 교육과정을 마련했다. 자격증 취득과 함께 취·창업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실기시험 종목 31가지
한식기초조리실무 재료 썰기
밥·죽·면류 콩나물밥, 비빔밥, 장국죽
탕·찌개류 완자탕, 두부젓국찌개, 생선찌개
조림·볶음·초류 두부조림, 홍합초, 오징어볶음
전·적류 생선전, 육원전, 표고전, 풋고추전,
지짐누름적, 화양적 ,섭산적
구이류 너비아니구이, 제육구이, 북어구이,
생선양념구이, 더덕구이
생채·잡채류 무생채, 도라지생채, 더덕생채, 겨자채, 잡채, 탕평채, 칠절판
회류 육회, 미나리강회
국비 지원 교육과정 많아
중장년을 위한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 고용노동부 산하의 국책 특수 대학 한국폴리텍대학을 꼽을 수 있다. 한국폴리텍대학 강서캠퍼스의 외식조리과에서는 신중년 특화과정 교육을 운영한다. 4개월 과정으로 전액 국비 지원된다.
교수진은 한은주 외식조리학과장을 비롯해 20년 이상의 현장 경험을 쌓은 전문가들이다. 교수진은 현장 적응력을 갖춘 창의적 조리 전문인 양성을 목표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은주 학과장은 “교육과정이 빡빡하다고 느껴 힘들어하는 분들도 꽤 있다. 실전, 현장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집중 교육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은 조리 원리, 한식 조리 실습과 함께 실무 양식 조리 실습, 바리스타 실습, 베이커리 실습, 재취업 컨설팅 등이 이뤄진다. 전현진 교수는 “요즘 한식 트렌드는 재해석, 퓨전이다. 그래서 한식과 함께 바리스타, 베이커리 수업도 하고 있다. 밀키트를 개발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퓨전 요리 교육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상과 달리 교육생의 남녀 성비는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실기시험에서 남성은 요리해본 경험이 적기 때문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반면 여성은 살림을 하며 요리해본 경험이 많은데, 이는 장점이자 단점이다. 시험을 치를 때 공식을 따라야 하는데 몸에 밴 습관, 조리 방법이 튀어나와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더불어 자격증 취득 후 여성은 단체급식소나 어린이집, 남성은 외식업체로 주로 취업이 이뤄진다고 한다. 한은주 학과장은 교육생이 취업 혹은 창업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지만 신중년의 전망은 밝다고 강조했다.
한 학과장은 “요즘은 젊은 사람도 요리 쪽 일에 관심을 많이 갖지만, 워라밸을 중요하게 여겨서 정작 일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일을 시작해도 금방 그만두거나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 업주 입장에서는 코로나19로 경제가 어려운데 고용 리스크까지 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중년은 과거 오랜 시간을 근무한 경험이 있고, 오버타임도 이해해주시는 편이다. 그것을 문화적·관습적으로 체득하고 있다. 그래서 업주분들이 점점 나이 드신 분들을 선호하는 추세다”라고 말했다.
코로나19는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 속도에 불을 붙였다. 비대면 원격·재택 근무가 확대되면서 특정 소속을 갖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시간만큼 하는 ‘긱 이코노미’(Gig Economy) 시대가 됐다. 디지털에 익숙하지 않은 중장년층에게는 쉽지 않은 시대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서비스 업종의 일자리는 줄어든 반면 플랫폼 비즈니스 일자리는 늘었다. 음식 배달, 택배, 가사 서비스, 돌봄 서비스 등의 일자리가 많아진 것. 디지털 플랫폼을 기반으로 ‘긱 이코노미’가 성장하고 있다. 긱 이코노미는 ‘임시로 하는 일’이라는 뜻의 긱(Gig)과 경제(Economy)의 합성어다. 코로나19 확산 이전인 2019년 약 284조 원이었던 긱 이코노미 시장 규모는 2023년 약 521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비정규직의 시대가 온다
긱 이코노미의 확산은 두 개 이상의 직업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N잡러’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앞으로는 비정규직 일자리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에 힘을 실었다. 최근에는 중장년을 대상으로 한 ‘나선:나도 선수’라는 플랫폼도 생겼다. N잡 시대의 정보에서 소외되는 중장년을 위한 재능 거래 플랫폼이다. 오히려 중장년이 N잡러가 되기 적합하다는 것.
은퇴 이후 불안정한 일자리가 중장년층을 취약계층으로 만든다는 지적도 있지만, 오히려 유연한 근무를 원하는 중장년에게 디지털 플랫폼 일자리는 기회일 수 있다. 특히 사회적으로 꼭 필요하지만 민간에서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잘 참여하지 않는 사회 서비스 분야에서 중장년층의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일자리가 많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 설문조사에 따르면 중장년층의 74%는 구직 활동에 가장 관심이 많았으며, 그중에서도 사회공헌형 일자리를 희망하는 비율이 약 50%에 달해 절반을 차지했다. 물론 생계형 일자리를 원하는 중장년층도 있지만(30%), 대부분은 오랜 시간 일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세 번만 일하거나, 하루 세 시간만 일하는 형태의 일자리를 원했다. 숙련도 높은 시니어에게 긱 이코노미가 적합하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 관계자는 “중장년분들이 교육을 듣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지속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원하고, 사회 활동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의지가 있었다”며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들이 단지 수업만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사회 활동을 연계해서 목적에 다다를 수 있도록 일자리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줄어드는 일자리, 늘어나는 디지털 격차
은퇴 이후 사회 활동을 하고자 하는 시니어의 욕구는 무척 높다. 경기연구원에 따르면 60세 이상의 97.6%는 계속 일하기를 원했다. 일하기를 희망하는 나이는 평균 71세까지였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전반적인 일자리가 줄면서 중장년 일자리도 감소하고 있다. 국가에서는 정년 60세 연장법을 만들고, 기업 차원에서도 은퇴 후 재취업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고 있지만, 기술이 필요한 분야에 한정되거나 그 자리가 매우 적은 상황이다. 그렇다 보니 재취업 시장의 경쟁도 치열하다. 은퇴 후 재취업에 도전했다가 여러 차례 실패하는 경험이 쌓이면서 구직을 포기하는 이도 많다.
디지털에 취약한 중장년층에게 비대면 시대는 눈뜬장님으로 살아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지난 2년 동안 무인 매장이 늘고 키오스크를 도입한 가게도 많지만, 서울에 사는 55세 이상 시니어 중 키오스크를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사람은 54%로 절반이 넘는다.
액티브 시니어라고 불리는 베이비부머 세대는 힘들더라도 이런 사회 변화에 적응하고자 하는 의지가 높지만 마음처럼 쉽지는 않다. 디지털 역량을 높이려면 대면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배점태 컨설턴트는 “디지털 교육에 대한 중장년의 관심은 높아졌는데, 코로나19로 대면 교육이 불가능해지면서 답답해하는 분이 많았다”며 “코로나19 이후 온라인 교육에 대한 적응도는 많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화상 대화 등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긱 이코노미가 중장년층에게 적합한 고용 시장이 되려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긱 이코노미가 디지털 플랫폼을 발판 삼아 확산되는 만큼, 중장년층의 디지털 격차를 줄여줘야 한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디지털 교육뿐 아니라 새로운 고용 시장에 적응할 수 있을 정도의 교육도 필요하다. 또 중장년층이 사회 취약계층이 되지 않도록 비정규직 일자리에 대한 사회 안전망도 구축되어야 할 것이다.
“정년퇴직 후 다시 일하고 싶은데 정보를 얻기도 쉽지 않고 받아주는 곳도 많지 않은 게 현실이에요. 고양시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하죠. 면접 본 곳에 꼭 합격했으면 좋겠어요.” (60대 여성 구직자)
지난 14일 경기도 고양시 고양꽃전시장에서 ‘Bravo! 2022 고양시 중장년일자리박람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경기 고양시와 고용노동부가 공동으로 개최한 대규모 중장년일자리박람회로서, 이날 1000여 명의 시민이 참석했다.
중장년의 시민 대부분이 박람회 현장을 찾은 이유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다. 이번 행사는 온·오프라인 동시에 개최됐다. 앞서 고양시는 지난 3일부터 13일까지 박람회 홈페이지에 마련된 ‘온라인 채용관’을 통해 이력서 사전 접수를 진행했다. 미처 접수하지 못한 이들은 현장에서 이력서를 작성했다.
중장년층은 온라인에 취약한 세대이기 때문에 사전접수 인원보다 현장접수 인원이 두 배 정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 관계자는 “사전 접수를 하신 분들은 미리 회사에 대해 파악하고 면접 준비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준비된 느낌이 든다”라고 설명했다.
현장접수를 한 시민들은 “마트에 가다가 안내문을 보고 오게 됐다”, “평소처럼 산책하던 길에 박람회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고 우연히 들르게 됐다. 구직 활동도 하고 다양한 체험도 하게 되어서 좋다” 등 다양한 사연을 전했다.
이날 현장면접 기업은 총 29개사, 이력서 접수대행 기업은 5개사였다. LG이노텍, 쿠팡, 맥도날드 등 대기업도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현장면접은 구인기업 인사담당자와 구직자의 1:1 면접으로 진행됐다. 중장년층이 대상인 박람회인 만큼 채용 직종은 생산직, 물류직이 대부분이었다.
인사담당자는 채용과 관련해 “아무래도 경력이 있거나 관련 기술을 보유한 분을 선호하게 되는 것 같다”라면서 ”지원자분들의 역량이 우수해 선발에 있어 고민이 많이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현장면접관에서는 특정 기업들에 지원자들이 몰리는 경향이 나타났다. 중장년층의 기업 선호 경향과 관련해서 한 관계자는 “아무래도 지원자분들은 급여가 높은 업무를 선호하신다. 스케줄 근무는 주말에도 일할 가능성이 있어서 여성분들이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식품 생산직 근로자를 뽑는 ‘더채움’, ‘뜨레봄’은 지원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무역사무원을 채용하는 주식회사 ‘씨에어허브’의 인기도 뜨거웠다. 한 관계자는 “씨에어허브는 올해 처음 함께한 기업인데, 사무직을 뽑기 때문에 더욱 인기를 끈 것 같다”라고 말했다. 세 회사 모두 2명을 채용한다고 했는데, 지원자는 몇 십 배에 해당했다.
반면 마을버스 운전원, 지게차 운전원 등 해당 분야의 자격증이 있어야 하는 기업은 지원자들의 발길이 적은 편이었다. 안내문에는 경력 무관으로 적시 되어 있지만 실무 경력이 없거나 적성이 맞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에 이 같은 결과가 나타난 것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취업클리닉관에서는 일자리 상담은 물론 이력서 작성 및 면접 기술 등에 관한 컨설팅이 시행됐다. 잡(JOB)학다식관에서는 일자리유관기관에서 진로설정을 위한 직업훈련과 기업지원정책, 생애설계 등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런가 하면, 이번 중장년일자리박람회의 차별점은 현장 면접 50%, 진로 상담 50%로 구성됐다는 점이다. 은퇴 후 제2의 직업을 갖고자 하므로 자신의 적성을 파악하기를 원하는 중장년층을 위해 이 같이 구성됐다.
특히 4차산업의 도래에 따라 미래유망일자리관이 마련됐다. 드론교육지도사, 도시농업관리사, 유튜브 크리에이터, 병원동행매니저 현직자가 참석해 시민들에게 멘토링을 해줬다.
드론교육지도사 현직자로는 위즈윙의 곽승계 대표가 참석했다. 그는 50+센터 등 드론교육지도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중장년층도 채용 수요가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도시농업관리사는 베란다, 텃밭 등에 농작물을 심는 것도 포함되고 모두에게 열려 있는 직업이다. 9종의 국가기술자격증 중 하나를 취득하거나 도시농업전문과정을 이수하면 도시농업관리사로 인정받게 된다. 자격을 갖추는 것도 쉽고, 취미를 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기에 중장년층에게 특히 추천된다.
또한 귀농귀촌귀어관과 창업관에서는 상담과 지원제도에 대해 알려주고 성공 멘토도 이야기를 전했다. 아울러 고양시통합일자리센터의 신중장년 강사양성 프로그램을 수료한 강사스쿨 1기생들의 발표회와 일자리와 관련된 메타버스 체험 등 부대 행사도 참가자의 흥미를 끌었다.
“여자가 어떻게 군대를 갑니까?”
노기에 찬 여학생의 질문에 창구 직원의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 그에게는 그저 운수 나쁜 날이었으리라. 회사의 신입사원 입사원서를 접수하는 날. 당연히 남자들만 지원받고 있는데, 다짜고짜 여자가 찾아오다니. 결국 이날의 항의는 무위로 끝났지만, 그녀는 그 불공정의 억울함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한 평생의 연료가 된다.
이복실 세계여성이사협회 회장은 당시 기업들이 남자 지원자만 받기 위해 내건 조건은 ‘군필’이었다고 설명했다.
“1988년 남녀고용평등법이 시행될 때까지 악습은 계속됐죠. 여성들이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채’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어요. 그나마 결혼하면 퇴직하겠다는 조건이 붙은 서약서를 써야 가능한 일이었죠. 그런 시대였어요.”
무작정 선택한 공무원의 길
때문에 대학을 졸업한 여학생들은 선택할 수 있는 진로가 다양하지 않았다. 금융권이나 교직 정도가 선호되는 직업이었고, 아예 취업을 포기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80학번이었던 이 회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공무원의 길에 도전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마땅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꼭 경제적 능력을 갖고 싶었어요. 우리 어머니들의 삶이 남성에게 종속적이었던 것은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직업은 반드시 있어야 했어요. 하지만 사회 분위기는 여성이 다양한 직업을 선택하기 어려웠죠. 제 전공이 도시행정학이다 보니 선배들이나 동기들이 모두 행정고시 공부를 하는 분위기였어요. 동기가 함께 공부하자고 권해서 자연스레 저도 시작하게 됐죠. 1학년 때 행시에 합격한 3학년 선배를 우러러본 적이 있는데, 자연스레 롤모델로 삼은 것 같아요.”
그녀는 당시 공무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다고 털어놓으며 웃었다. 선배에게 물어보니 ‘기안’을 잘하면 된다는 대답이 돌아와 “그 기안이란 게 뭐냐”고 되물었던 기억도 있다고.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미지의 세계였지만, 느긋한 마음으로 덤벼든 것은 아니다. 선택의 수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 시험에 떨어지면 그토록 원했던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한다는 상황 인식은 그녀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남학생들은 자신감이 넘쳤죠. 따르고 배울 롤모델도 많았고, 떨어지더라도 취직할 곳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절박했어요. 그래서 붙고 나서도 ‘공무원이 되었다’는 성취감보다는 ‘직업을 가졌구나’란 기쁨이 더 컸을 정도니까요.”
기업에 찾아가 부당함을 항의했던 그 여학생은 당당하게 행정고시에 합격한다. 여성으로는 네 번째다.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선구자라는 뜻은 반대로 해석하면 남성들만의 세계에서 경쟁하고 살아남아야 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처음 출발은 문교부(지금의 교육부)였어요. 그곳에서 10년을 일했죠. 당시엔 부처들 중에서도 굉장히 관료적인 분위기가 강한 곳이었어요. 여성 사무관이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어요. 그래서 나의 능력을 알아주는 부처로 가자고 과감한 선택을 했죠. 그래도 다행인 점은 공무원 조직은 기본적으로 능력을 중심으로 평가가 이뤄지는 곳이에요.”
그녀가 선택한 곳은 정무장관 제2실. 제6공화국 출범과 함께 새로 설치된 기관으로 사회 문화에 관한 업무들, 그중에서도 여성과 아동, 청소년, 노인 문제 등과 관련한 정책 건의, 연구 개발 등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이 선택은 이후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여성 정책이라는 큰 사회적 책무와 마주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정무장관실은 10년 후인 1998년 대한민국 여성특별위원회로 개편되었고, 3년 후인 2001년 여성부로 개편된다. 지금의 여성가족부 전신이다.
“제가 느꼈던 여성에 대한 차별을 개선해야겠다는 의욕이 컸죠. 당시만 해도 정시 퇴근은 지켜지지 않는 것이 당연했고, 재택근무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육아휴직이란 단어조차 없었죠. 산후휴가제도가 있었지만 60일에 불과했어요. 보육 시설이나 어린이집은 꿈도 못 꾸고요. 그러다 보니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야 했어요. 다른 사람의 조력 없이는 직장을 다니지 못하는 거죠. 엄마와 직업인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병행하는 것이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니 직장이나 사회 혹은 국가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생각은 유연근무제나 직장 보육시설 지원 등 일·가정 양립 지원제도 개선 등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특히 어린이집의 양적·질적 확대에 대한 정책은 공직 생활의 뿌듯한 성과 중 하나다.
“현직에 있을 때 보육정책국장을 2년 6개월 역임했어요. 여성들이 안심하고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맘 편히 맡길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엄마 입장에선 아이들이 하루 종일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모르잖아요. 또 프로그램이 어린이집마다 제각각이면 그것도 엄마 입장에선 신경 쓰이죠. 그래서 표준보육과정을 만들어 어느 어린이집을 가도 아이들이 같은 보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어요. 또 어린이집의 통합 관리가 가능한 보육행정 전산망도 구축하고요. 보육교사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확충했죠. 제 스스로가 워킹맘으로 살면서 아쉬웠던 부분들을 개선하고 정책화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보람 있었어요.”
여성은 눈에 띄어야 살아
이 회장은 2013년 3월 여성가족부 차관에 오른다. 임명직인 장관을 제외하고, 공무원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커리어에 발을 딛은 것이다. 이후 조윤선 장관이 정무수석으로 옮겨가면서 한 달간 장관직무대행까지 했다.
“차관으로 발탁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죠. 당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면서 여성 관련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뀔 것이라는 기대감은 있었어요. 하지만 차관급 후보에 오를 만한 여성 고위 공무원이 많지 않았던 시기이고, 선발을 하려고 해도 사람이 없다는 말이 이상하지 않았던 시절이니까요. 다행히 각 부처에서 일 잘하는 유능한 여성을 발탁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차관에 오를 수 있었죠.”
남성 중심의 사회, 그것도 폐쇄적인 조직이라고 평가받는 정부 조직 안에서 그녀는 늘 개척자여야 했다. 따르고 배울 만한 롤모델도 없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스스로 판단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늘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던 것 같아요. 승진할 수 있을까, 저런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사무관일 때는 서기관이 될 수 있을까, 그러고 나면 과장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식이었죠. 당시엔 여성이 극소수였고, 우리에겐 기회가 안 주어지는 것이 당연했으니까요. 차관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죠. 그만큼 힘들었던 세월이지만, 열심히 하면 날 알아봐 주는 상사들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 회장이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부당함이나 편견과 맞서 싸우고 있을 후배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태도다. 남들과 같은 방식이나 같은 정도의 노력으로 접근하려고 한다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했다.
“소수자가 인정받으려면 일반 다수자의 2배, 3배의 일을 해야 합니다. 똑같이 일하면 절대 인정 못 받아요.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중요해요. 소수자의 운명 같은 것이죠. 다른 접근 방식으로 일하고, 벌여놓은 일을 반드시 책임지는 식으로 일했어요. 회의 석상에서도 적극적으로 발언했고요. 소수자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아요. 물론 그런 태도와 함께 성과도 인정받아야 하고요. 소수자의 숙명에 맞서 살았죠.”
바뀐 신분도 열정 막지 못해
공직 생활을 마무리한 후 이 회장은 하루도 쉬지 않았다. 남들처럼 느긋하게 여행을 하거나 취미생활에 몰입할 법도 한데, 한가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무원 생활할 때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데 매료된 상태라고 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글쓰기에도 집중해서 다양한 매체에 글을 연재하거나, 그간의 경험을 정리한 저서 ‘나는 죽을 때까지 성장하고 싶다’, ‘여자의 자리 엄마의 자리’ 등을 집필했다. 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부인 정희자 전 서울힐튼호텔 회장의 자서전에도 참여했다. 친분이 있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글솜씨를 인정받아 대필작가가 아닌 공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퇴직을 앞둔 후배들에게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요. 퇴직 후 그 다음 날부터 일하라고 말하죠. 커리어를 중단하지 말고 이전과 똑같이 일하라고 당부합니다. 몇 달 쉬겠다고 생각하면 그것에 익숙해지거든요. 퇴직 후의 인생을 만드는 것은 현직 시절의 삶인 것 같아요. 저의 경우에는 여성 정책에 대한 경험이나 양성평등에 대한 노력 등 당시의 가치관과 철학이 지금의 삶까지 영향을 주고 있어요. 세계여성이사협회도 마찬가지죠.”
세계여성이사협회는 전 세계 60개국 80여 지부에서 8500여 개 기업의 이사로 활동하는 3700여 명의 여성 이사로 구성된 비영리 단체이며, 한국 지부는 2016년 9월에 창립됐다. 창립 당시에는 회원이 40여 명에 불과했다. 동의하는 여성이 적어서가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 이 모임의 가입 조건인 상장기업이나 공기업의 등기이사 등과 같은 요건을 충족하는 여성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당시 기업의 이사회에 여성이 참여하는 국내 비율이 3%가 안 됐어요. 일본도 9% 정도 되고 유럽 국가들은 30~40%나 되는데 우리는 매우 낮았죠. 그래서 우리도 법 개정을 추진했어요. 다양한 법 중에서도 자본시장법을 개정해서 여성의 비율 의무화를 시도했죠.”
그래서 은퇴 후 다시 국회를 찾았다. 사실 이 회장에게 국회는 그리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은 아니다. 국회는 여성 공무원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과장 때는 국정감사 자리에서 다리를 꼬았다는 이유로, 나중에는 옷차림이 화려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수시로 호출당하기도 예사였다. 다행히 그 경험은 법 개정의 돌파구가 됐다.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설득해 상장사 여성 이사 할당제 도입에 관한 법안을 발의할 수 있었다.
“세계 기업들 사이에선 ESG 경영, 즉 지속가능한 경영을 위해 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핵심 요소로 꼽아야 한다는 흐름이 있어요. 여성 이사 할당제는 이 지배구조의 다양성과 연관이 있죠. 글로벌 기업들은 지배구조를 개선하지 않는 기업에는 투자조차 안 해요. 우리 기업들도 변해야 하는 시점이고, 저희의 노력이 우리 기업들의 체질 개선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해요.”
세계여성이사협회의 주도로 개정된 자본시장법은 올 8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자산총액 2조 원이 넘는 기업은 특정 성별로만 이사회를 구성할 수 없게 된다. 즉 최소한 1명 이상의 여성을 임원으로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는 NGO라는 민간인 자격으로 선봉장에 서서 공무원 못지않게 사회를 바꾸는 일에 참여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껴요. 물론 이제 시작이죠. 상장기업 외에 공공기관의 이사회에도 여성이 참여할 수 있도록 확대되면 공공기관 역시 여성 임원을 찾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여성에 대한 제한이 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시너지가 생길 거예요.”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최근에 아내와 재결합을 하게 되었어요.”
“뭐라고요? 그럼 우리 관계는요?”
“우리 관계는 달라질 게 없지요. 내가 아내와 재결합한 건 순전히 인간적인 연민 때문이고, 나는 여전히 경혜 씨를 사랑하니까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아내가 아니라 당신인 거죠.”
“…….”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일말의 안도감은 또 뭔가. 그런 소리를 듣고도 그와의 관계에 매달리고 있는 나는 또 뭔가.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저 태도는 또 뭔가. 가증스럽다 할지, 뻔뻔하다 할지, 나를 두고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냐고 따져야 할지, 머릿속은 아우성을 치지만 말문은 닫힌 채 혼란스러웠다. 사실을 털어놓기까지 번민했을 그를 생각하면 내가 오히려 이해해야 하는 걸까. 아니, 어차피 내가 자기를 못 떠날 걸 알고 속 편하게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심중, 그의 자세가 아니라 그가 헤어졌던 아내와 재결합했다는 사실이다.
이혼 20년 만에 만난 ‘뇌섹남’
그와 사귄 지 5년째,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첫 만남부터 우리는 서로 호감이 갔다. 같은 직장에서 만난 전 남편은 결혼 10년 차 무렵인 30대 중반에 도박에 빠졌다. 우리는 동갑내기 공무원 부부로 미래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다는 점이 그의 생활 태도를 나태하고 해이하게 했던 것 같다. 도박을 끊어보려고 노력을 안 했던 건 아니다. 단도박 모임 등에도 나갔지만 그의 의지는 매번 무너졌다.
도박 중독자 남편과 이혼한 후 혼자 초등학생 남매를 키우면서 몇 번의 스치는 만남이 있었지만, 오십 중반에 가슴 설레는 남자, 맞춤한 나의 인연을 찾았다는 게 보통 행운이 아니라는 건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사랑이 나이와 반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는 만남 자체의 기회도 점점 줄고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그만큼 희박하니, 포기하고 싶어서 포기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포기하게 되는 게 중년 연애 시장의 생리이니. 그런 상황에서 이혼 2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사랑, 고단했던 지난 세월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행복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두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쪼들림이 없었고, 은퇴 후엔 연금이 있으니 경제적 이유로 남자를 선택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만큼 ‘사랑’이 중요한 요소였다. 사랑이 밥 먹여주냐고 하지만, 사랑한다면 상대에게 밥 정도는 먹여줄 수도 있다는 여유조차 품었다. 그랬는데 그는 나보다 모든 면에서 풍요로운 사람이었다.
유복한 집안에 자연계열의 명예교수라는 직업도 직업이지만 클래식 음악에 대한 전문가 수준의 식견과 스포츠, 요리 등 다양한 취미를 가진 점이 나를 더욱 매료시켰다. 지적인 데다 타고난 유머 감각은 수수 털털한 동네 아저씨 같은 그의 겉모습을 완성하는 필수 자질처럼 느껴졌다. 그랬던 것이다. 그의 세련되지 못한 외모조차 그가 가진 장점을 겸손하게 부각시키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내 눈엔. 콩깍지가 씐 거라면 영원히 벗겨지지 않기를! 또한 그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로 허물어지는 것은 순간이라며, 서로 존중하는 관계 유지를 위해 세 살 적은 내게 늘 존댓말을 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이른바 ‘뇌섹남’에 반한 것이다.
졸지에 내연녀로 전락
그는 여러 차례 외국 기업체와 협력 연구를 하면서 국내를 자주 비웠기 때문에 5년을 만나는 동안 평범한 일상보다는 출장을 겸한 외국 여행을 함께 자주 했다. 양보다 질에 치중하는 데이트랄까, 밋밋한 생활을 나누기보다 외국의 낯선 분위기에서 자극적이며 로맨틱한 시간을 보낸 추억이 그를 만나는 내 자부심을 더욱 부추겼다. 우리는 캡슐에 싸인 것마냥 둘만의 시간 속에서 즐겼기 때문에 서로의 신상에 대해 자주 물어보거나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이혼했고, 홀아버지가 계시며 아들이 둘 있는데 아버지를 닮은 영특한 머리로 사회에서 성공적인 위치에 있다는 정도가 다였다.
자신의 이혼 사유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고, 내겐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랬던 그가 불쑥 아내와 재결합했다고 하니 충격일 수밖에.
“그게 언제였나요?”
“한 6개월 전쯤.”
“뭐라고요? 6개월이나 되었으면서 그동안 왜 내게 말하지 않았던 거죠? 그리고 지금 말하는 이유는 뭔가요?”
“경혜 씨한텐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거듭 말하지만 경혜 씨를 사랑하는 내 마음은 전과 같다니까요. 그리고 아내는 서류상 재결합한 거지 함께 살지도 않아요. 아내는 큰아들 집에서 지내기로 했으니까요. 나는 여전히 혼자 살고 있고.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지금 내 아파트에 가서 확인해볼래요?”
적반하장이라더니. 도대체 이 남자는 뭘 믿고 이리 당당한 거야. 내가 그렇게 만만해? 내가 알던 그 사람 맞아?
당당한 그, 궁색한 나
“당신이 아내와 살든 안 살든 그게 문제가 아니예요. 졸지에 내가 당신의 내연녀가 되는 거잖아요. 우리 사랑이 불륜이 되는 거고요.”
“꼭 그렇게 천박한 말을 가져다 우리 사이에 붙여야겠어요? 처음부터 내가 당신을 속인 것도 아니고, 도중에 아내와 서류상 합쳤다고 해서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건가요? 경혜 씨는 그깟 종잇조각 때문에 우리 사랑을 팽개쳐야겠어요? 그 정도로밖에 날 사랑하지 않나요? 거듭 말하지만 아내를 사랑해서 받아들인 게 아니에요. 늙고 병든 아내가 불쌍해서, 그 여자가 아내의 지위를 껍데기로나마 되찾고 싶어 해서 회복시켜준 것뿐이에요. 내 말 못 알아듣겠어요?”
말이 되는 것도 같고 안 되는 것도 같았다. 그에게 말려드는 느낌이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찾아지지 않아 가슴만 답답했다. 아내에게도, 내게도 마치 시혜를 베푸는 듯한 말투는 또 뭔가. 아내에게 귀책 사유가 있었는데 세월 지나 용서해주기로 한 건진 모르지만, 나는 자기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내가 이 일을 안 이상 우리 사이가 전과 같을 수는 없어요. 서류 따라 당신 마음도 결국 변할 거라고요.”
기어이 속내를 들켰다. 그가 우위를 점하도록 스스로 길을 터준 꼴이 아닌가. 계속 만나더라도 약점 있는 쪽은 그이니 내가 큰소리치면서 관계를 이어가도 시원찮을 판에 되레 저자세로 나가다니. 그의 전략도 이런 게 아니었을까. 아내를 두고도 당당하게 연인을 만날 수 있는. 꿩 먹고 알 먹자는.
“정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요. 경혜 씨 좋을 대로 하세요. 기어코 나와 헤어지겠다면 받아들여야지 별수 있나요. 저야 붙들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니까요.”
어라? 공을 이렇게 넘길 줄이야. 이런 말로 나에게 압박을 가해올 줄이야. 살살 몰아가다 결정 골을 넣자는 건가?
“도대체 당신 아내는 어떤 사람이며, 나이가 몇이길래 당신이 그렇게 가여워하는 거죠? 이참에 물어볼게요. 도대체 당신네 부부의 이혼 사유는 뭐였나요?”
본질을 또 빗겨가고 있었다. 그걸 알아 이제 와서 뭘 할 거라고. 나는 분명 허둥대고 있는 것이다.
“아내는 나보다 다섯 살이 많아요. 경혜 씨에 비하면 완전 할머니죠. 죽을병에 걸린 건 아니지만 건강한 편은 아니에요. 이혼 사유요? 내가 말 안 했던가요?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났더랬어요. 연상의 아내가 바람이 나니 많이 당황스럽더라고요. 부부 사이에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죠.”
상당히 의외였다. 아내가 얼마나 잘난 여자길래. 객관적으로 봐도 그보다 더 조건 좋은 남자, 멋진 남자가 흔하지는 않을 텐데, 부부의 일은 부부밖에 모른다더니. 아니, 이 남자의 말이 사실과 다를 수도 있다. 자신에게 귀책 사유가 있었는지 알 게 뭐람. 이혼한 사람 중에 자기 잘못이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솔직히 몇 명이나 되나.
눈 한번 질끈 감아?
“아내가 아니라 당신이 바람 난 게 아니고요?”
심사가 꼬여 있던 내가 이렇게 어깃장을 놓았다.
“뭐라고요? 경혜 씨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나를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않았나요?”
그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불씨가 엉뚱하게 튀고 있었다.
“아니면 아닌 거죠, 뭐.”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실수를 무마하려 드는 나, 그 틈새를 파고드는 그.
“경혜 씨에게 실망했어요. 나를 그런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니, 그럼 경혜 씨에 대한 내 사랑도 의심할 수 있겠군요.”
“누가 그렇대요? 그냥 해본 말이니 불쾌했다면 사과할게요.”
지금 누가 누구에게 사과를 할 상황인가. 왜 점점 내 입지가 궁색해져가는지 당혹스러웠다.
“내 쪽에서 문제를 만들었으니 여하간 미안해요. 하지만 우리 사이에 이상 없는 거지요? 그렇게 받아들여도 되는 거지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래요. 하지만 너무 오래 생각하진 말아요. 거듭 말하지만 아내는 그냥 서류상 복귀이지 내 생활에 끼어들게 하진 않을 거예요. 자식들 엄마 대우로 충분해요. 그래야 애들한테도 떳떳할 것 같고요.”
그는 당장 헤어지자던 나의 처음 기세가 누그러진 것에 적이 안심했는지 긴장을 누그러뜨린 채 응대했다.
그는 시종일관 왜 이리 당당할까. 당당하다 못해 오히려 나를 주눅 들게 하는 이 화법은 뭔가. 나는 자꾸만 졸아들고 있다. 내 나이가 육십이다. 이 남자만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눈 질끈 감고 몰랐던 일로 하고 계속 만나? 아, 어찌해야 하나.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100세 시대에 정년 이후 일할 수 있는 기술 전문직이 점점 우대받고 있다. 특히 미래 전망이 밝은 기술 전문직 중 하나가 바로 전기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전기기능사는 자격 제한이 없어 중장년이 은퇴 후 재취업으로 도전하기 좋은 직업이다. 실제로 2021년 국가기술자격통계연보에 따르면 전기기능사 자격증은 50대 이상 남성이 많이 취득한 국가기술자격증 4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전기기능사는 전기에 필요한 장비 및 공구를 사용해 회전기·정지기·제어장치 또는 빌딩·공장·주택 및 전력시설물의 전선케이블, 전기기계 및 기구를 설치, 보수, 검사, 시험 및 관리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전기기능사는 전기 분야 기술사, 전기기능장, 전기기사, 전기산업기사가 되기 위한 첫 단계이다. 비전공자거나 경력이 없어도 누구나 자격증 시험 응시가 가능하다. 그러나 전기기사나 전기산업기사는 시설 분야의 경력이 없거나 관련 학과를 나오지 않았다면 바로 자격증을 취득할 수 없다.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시설·전기 관련 분야에서 1년 이상 근무해야 전기산업기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전기기사는 전기산업기사 자격증 취득 후 시설·전기 분야에서 1년 이상 근무해야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제2의 직업으로 전기 관련 일을 하고 싶은 중장년들은 먼저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 더불어 아파트 및 빌딩에서는 중장년 전기기능사 채용을 선호하는 분위기로 전망이 밝다.
전기기능사 중장년에 좋은 이유
전기기능사는 실질적으로 현장에서 인정받는 자격증은 아니다. 전기 관련 업계에 처음 발을 디디는 사람이 따는 자격증이라고 할 수 있다. 자격증이 없어도 건축 현장 등 일할 수 있는 곳이 있긴 하지만 전기공사 업체들도 정직원을 뽑을 때는 최소 전기기능사 이상을 요구한다.
즉 전기기능사 자격증은 전기 관련 경력은 없지만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격증이다. 더불어 전기산업기사나 전기기사 응시 자격을 갖추는 기본이 되기 때문에 자격증을 취득하면 정년이 더욱 보장된다.
전기기능사 자격을 갖게 되면 아파트나 빌딩의 전기 안전관리원이나 전기공사 시공업체, 전기기기 생산업체 등 다양한 곳으로 진출이 가능하다. 특히 중장년층은 아파트 시설관리 분야 중 하나인 기전직(기계+전기)으로 많이 진출하는 추세다.
기전직은 보통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격일제로 근무한다. 한 달에 15일 정도 일하는 셈으로, 처음 시작할 때 평균적으로 월 250만 원을 벌 수 있다. 경비 관련 업무와 비교해 노동 강도가 높지 않고 보수가 훨씬 좋은 편이다. 더욱이 주민들의 갑질 문제에서도 보다 자유롭기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일이 적다.
특히 전기안전관리자로 선임되면 70대까지 일할 수 있다. 전기 설비 용량이 1000kW 이상인 건물이나 산업 현장에는 ‘반드시’ 전기안전관리자를 두어야 한다. 이를 선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법적으로 전기기능사는 선임이 될 수 없고, 상위 등급인 전기산업기사부터 가능하다. 그러므로 전기기능사 자격증 취득 후 일을 하면서 공부를 병행해 전기산업기사 자격증을 취득하도록 하자. 또한 주택관리사, 소방시설관리사 자격증도 취득하면 몸값이 더욱 뛰고, 일할 수 있는 선택의 폭 또한 넓어진다.
전기기능사 자격증 취득법
전기기능사 자격증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시행하는 국가공인자격증이다. 시험은 필기와 실기시험으로 나눠져 있다. 필기시험에 합격한 자에 한해 실기시험 응시가 가능하다. 필기와 실기시험 모두 100점 만점에 60점을 넘겨야 하고, 각각 1년에 네 번 시험을 볼 수 있다.
필기시험은 전기이론, 전기기기, 전기설비 세 과목이다. 필기시험 합격률은 평균 30%대로 경력이 없거나 문과 전공자라면 시험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까다로운 수학 계산 문제가 1/3 정도 있기 때문에 어려움을 토로하는 수험생이 많다.
실기시험은 약 5시간 동안 전기설비 작업을 평가한다. 필기시험은 독학으로도 가능하지만, 실기시험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전문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것을 추천한다.
요즘은 자격증 취득에 도전하는 여성, 중장년층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다. 여성들은 배경지식이 없는 경우가 많지만 한번 배우면 잘 따라 하고 합격률이 높다고 한다. 중장년층은 노안 때문에 작업을 해야 하는 부분이 잘 안 보이거나 손이 느리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올바른 학습과 철저한 준비가 더욱 요구된다.
중장년 위한 배움터 활짝
가장 쉽고 보편적으로 자격증을 취득하는 방법은 자격 취득 학원이나 온라인 강의 등 교육기관을 찾는 것이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내일배움카드를 활용하면 저렴하게 자격증 취득이 가능하다.
특히 중장년에게는 고용노동부 산하의 국책 특수대학인 한국폴리텍대학을 추천한다. 남인천캠퍼스에는 신중년특화과정 스마트전기과가 있다. 만 40세 이상의 재취업을 원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며 교육비, 식비, 기숙사비까지 전액 국비로 운영된다. 1년에 두 번, 각각 25명의 신입생을 모집한다.
전공 이론 수업은 물론 실무 양성 교육도 진행한다. 전공 실무인 기초전기에서부터 전기설비, 시퀀스제어 실무 교육을 받으며, 전기기능사 실기시험 준비와 수배전설비 실무 교육도 받을 수 있다.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무료 직업훈련 교육을 실시하는 서울남부기술교육원에도 전기학과가 있다. 전기 관련 자격증뿐만 아니라 승강기기능사, 공사산업기사 자격증도 취득할 수 있다. 실제로 전기학과는 2년 연속 서울남부기술교육원 우수 취업학과로 선정되면서 높은 취업률을 자랑했다.
1인 가구 시대, 노후 주거의 대안으로 ‘공동체주택’이 떠오르고 있다. ‘코리빙’(Co-living)이라고 불리는 공동체주택은 각자의 주거 공간을 갖고 있지만, 공동으로 이용하는 커뮤니티 공간을 설치해 입주자들이 소통하는 새로운 형태의 주택을 말한다. 실제 입주자들은 ‘따로 또 같이’ 살아간다. 공동체주택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자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공동체주택 ‘여백’을 직접 찾아가 봤다. 그곳에서 살고 있는 ‘공동체 주거 전도사’ 김수동 작가와도 이야기를 나눴다.
북한산의 정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공동체주택 여백이 있다. 외관부터 남다른 자태를 뽐내는 여백. 내부 구조는 더욱 독특하다.
여백은 4층짜리 주택 2개 동, 파란 여백과 하얀 여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동에 5세대, 총 10세대 27명이 산다. 세대주는 30대부터 60대까지이며, 그들의 자녀 혹은 부모가 같이 살기 때문에 초등학생부터 9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살고 있다. 집 내부 인테리어도 다 다르다.
파란 여백에는 비교적 연령대가 높은 가족들이 살기로 했고, 그에 따라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하얀 여백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어야 한다. 신발을 벗고 계단을 오르내리니 집이 다 연결되어 있는 기분이 든다.
하얀 여백 4층에는 커뮤니티 공간이 있다. 큰 원형 테이블이 있어 입주자들이 모여 식사를 하거나 티타임을 즐길 수 있다. 컴퓨터는 물론 빔프로젝트도 있어 같이 영화 관람도 가능하다.
코로나19 이전에는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 함께 모여 식사를 했다. 텃밭도 함께 가꾼다. 단체 카톡방이 있어서 매일매일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나눔을 하면서 정을 나눈다.
10세대 중 여백을 가장 열심히 알리는 입주자는 김수동 작가(터무늬제작소 소장, 60)가 아닐까. 그는 파란 여백 2층에 산다. 여백 입주를 결정하기까지 자신의 고민과 함께 공동체주택이 노후의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공동체주택에서 살아가는 법 등을 담은 ‘쫌 앞서가는 가족’이라는 책을 펴낸 바 있다.
“이웃 있는 삶 원했다”
김수동 작가는 90대 노모를 모시고 산다. 그의 집은 3대가 함께 살며, 여백의 최고령자가 사는 집이기도 하다. 여백에 입주하기 전, 김 작가는 어머니와 함께 자신도 나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느꼈다. 이에 노후에는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코하우징에 관심을 갖게 됐다.
김수동 작가는 “정작 문제는 우리 세대라고 생각했다. 어르신들은 우리 세대가 부양하지만, 우리 세대는 자녀들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자녀들에게 부양을 기대하기도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저희 할아버지의 칠순 잔치 때 찍은 사진이 있는데, 직계 자손까지 26명이 모여서 가족사진을 찍었더라고요. 저는 아내하고 딸이 하나 있는데 딸은 언제 결혼할지 모르겠고, 10년이 지나서 가족사진을 찍을 때는 셋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거죠. 게다가 남성이 여성보다 먼저 떠나는 경우가 많은데 아내가 혼자 남을 것 같고, 이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함께 살아보니 장점 많아
이런 고민 끝에 김수동 작가는 2014년 공동체주택 입주자 모집에 참여했다. 나이, 직업, 취향, 종교 등이 모두 다르지만 공동체 주거라는 단 하나의 공통 관심사로 금세 마음이 모였다. 집을 짓는 데는 1년 반의 시간이 걸렸고, 2016년 8월 여백에 입주했다. 입주자 모임에는 7세대가 모였지만, 3세대는 금방 모아 10세대가 채워졌다.
일반적으로 공동체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친할까라는 궁금증이 든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속 이웃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김수동 작가는 “그렇게 가깝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어 “물론 마음이 맞아서 가까이 지내는 이웃들은 있지만, 그냥 좀 편한 이웃 정도 같다. 요즘 시대에 이렇게 마음 편한 이웃이 흔치 않다”고 말했다.
독립된 가족이기 때문에 사생활 노출 문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앞서 말한 대로 한 달에 한 번 식사라든지 물건 나눔 등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이웃 간에 싹튼 정은 남다르다. 고독사 문제에서도 자유롭다.
“우리는 고독사가 불가능한 구조예요. 한번은 혼자 있는 이웃이 너무 아팠을 때, 다른 이웃이 119를 불러서 조치를 해준 적도 있어요. 지금도 코로나19에 확진돼 자가격리 중인 이웃분이 계신데,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보고 반찬도 챙겨주고 그래요. 정말 이웃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죠.”
김수동 작가는 아직도 공동체주택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많은 것도 알고 있고, 꼭 노후 주거의 대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자신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보니 장점이 훨씬 많다고 느껴 추천하는 바다. 집값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큰 장점도 있다. 즉 공동체주택은 나의 주거 공간이 있는 노후, 외롭지 않은 노후를 가능하게 해주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70대, 80대가 됐을 때도 현재 살고 있는 집이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개인마다 주거에 대한 취향과 욕구가 다르지만, 자신이 관계 지향적인 사람이라면 공동체주택을 고려해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공동체주택이 아니더라도 지역사회에서 관계망을 만든다든지 커뮤니티 이웃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거든요. 은퇴 후 10억은 있어야 노후 걱정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하잖아요. 저는 재무적 자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자산도 같이 조화를 이뤄야 노후가 풍성해진다고 생각합니다.”
100세 시대에는 은퇴란 없다는 말이 있다. 은퇴 후 재취업으로 제2의 직업을 가지며 경제활동을 이어가는 중장년층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2021년 5월 경제활동인구조사(고령층 부가조사)에 따르면, 55~79세 고령층이 가장 오래 근무한 일자리를 그만둘 당시 평균연령은 49.3세였던 것으로 조사됐다. 남자는 51.2세, 여자는 47.7세다.
더불어 고령층은 평균적으로 73세까지 일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고령층의 일하는 이유는 ▲‘생활비에 보탬’이 58.7%로 가장 많았고 ▲‘일하는 즐거움·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하고 싶어서’(33.2%) ▲‘무료해서’(3.8%) 등 순이었다.
결과를 보면 실제 평균 은퇴 연령과 희망 연령에는 20년이 넘는 차이가 발생한다. 고령화 사회에 신중년 일자리가 더욱 증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 신중년들의 일자리는 단순 노무직을 떠나 4차 산업시대를 맞아 점점 전문화되어가고 있다. 또한, 신중년 고용과 관련된 정부의 정책들도 함께 짚어봤다.
4차산업과 전문성
2021년 5월 55~79세 고령층 인구는 1476만 6천 명으로 전년동월대비 49만 4천 명(3.5%)이 증가했으며, 15세 이상 인구(4,504만 9천 명)의 32.8%를 차지했다.
고령층의 경제활동참가율은 58.0%로 전년동월대비 0.5%p 상승했고, 고용률은 56.0%로 전년동월대비 0.7%p 상승했다. 55~64세 고용률은 67.1%로 전년동월대비 0.2%p 상승했으며, 65~79세 고용률은 42.4%로 2.0%p 상승했다.
고령층 취업자의 산업별 분포를 보면, 사업‧개인‧공공서비스업이 38.1%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도소매·숙박음식업(17.6%), 농림어업(13.6%) 순으로 높았다.
직업별 분포를 보면, 단순노무종사자(25.6%), 서비스‧판매종사자(22.3%), 기능·기계조작 종사자(22.3%)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앞으로는 전문 기술직이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전문가들이 꼽은 신중년 유망 직업은 보건, 의료, 생명공학, 사회복지 분야 등이다. 특히 데이터 보안, 항공(드론) 관련 직무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4차 산업시대를 맞아 기업이 요구하는 조건이 높아짐에 따라 재취업을 원하는 신중년들도 전문적인 기술과 소양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한다.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 로봇기술, 생명과학이 주도하는 차세대 산업혁명을 말한다.
이제 단순 노동직을 원하면 안 된다는 것. 단순 노동직은 단기 일자리로 끝날 가능성이 많다. 예를 들어 이전처럼 농사만 지을 것이 아니라 스마트팜을 운영하면서 디지털 사회에 맞춰 발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중년 일자리 정책
먼저 신중년의 고용을 위한 정책으로 ‘신중년 적합직무 고용장려금’(이하 ‘적합직무’) 제도가 있다. 2018년부터 시행된 적합직무 사업은 중소·중견기업이 신중년 적합직무에 50세 이상 구직자를 채용하면 1년간 최대 960만 원의 고용장려금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우선지원대상기업(산업별로 상시 사용하는 근로자 수가 일정 기준 이하인 기업) 등 기업들은 장려금을 지원받아 필요한 직무에 적합한 신중년을 채용해 인력난 해소에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단 우선지원대상기업 또는 중견기업은 50세 이상 구직자를 채용하려는 경우 지원받을 수 있다. 우선지원대상기업은 최대 월 80만 원, 중견기업은 최대 월 40만 원까지 지원한다. 지원 기간은 최대 1년으로 승인 후 3개월 단위로 지원금이 지급된다.
노동부는 지난해 디지털·환경 분야의 20개 직무와 인구구조·시장 변화에 따라 구인 수요가 늘어난 장례지도사·애완동물 미용사 등 9개 직무 등 총 29개 적합직무를 추가로 지원대상에 포함하며 신중년의 고용을 장려했다.
이와 함께 장년 근로시간단축 지원금 제도도 있다. 근로시간단축으로 감소된 장년 근로자의 임금 일부를 지원하는 정책이다. 현재 직장에서 18개월 이상 근무한 50세 이상 근로자로서, 주당 근로시간을 32시간 이하로 단축하면서 임금이 줄어든 경우 지원받을 수 있다.
지원 대상이 되면 근로자에게 근로시간 단축 전후 임금 차액의 2분의 1을 최대 2년간 연 1080만 원 한도로 지원한다. 사업주에게는 근로시간 다축 적용 근로자 1인당 최대 2년간 월 30만원의 간접노무비가 지원된다.
정부와 지자체의 신중년을 위한 일자리 지원 센터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4차 산업시대에 발맞춰 전문성을 길러주는 교육도 확대되고 있다. 자신이 사는 지역과 업무 능력을 파악해 자신에게 맞는 지원센터를 찾아보자.
먼저 대표적으로는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가 있다.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는 만 40세 이상의 중장년에게 생애경력설계, 전직, 재취업 등과 관련된 교육을 제공한다. 대표 프로그램으로 신중년 인생 3모작 패키지와 생애경력설계서비스, 전직·재취업 교육프로그램이 있다.
한국폴리텍대학은 중장년이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직업역량을 강화하는 맞춤형 직업훈련을 지원하고 있다. 고령자인재은행은 만 50세 이상 장년 구직자들에게 직업을 소개해주는 곳이다. 현재 44개소가 있다. 이밖에 고용노동부 홈페이지나 자신이 사는 지역의 50+센터나 일자리 센터를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은퇴 후 제2직업이나 창업에 대해 고려해본 사람이라면 ‘사회적기업’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다. 사회적기업은 일반적으로 이윤 극대화가 아닌 특정한 사회 경제적 목표 달성을 최종 목적으로 하는 기업으로 정의 내리지만, 일부에선 손쉬운 창업 루트쯤으로 여기기도 한다. 우리는 어떻게 알아야 하는지, 부천시사회적경제센터의 윤기영(51) 센터장을 만나 들어보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공공기관의 장애인 고용 비율이에요. 2021년 기준으로 3.4%인 고용 비율을 공공기관들도 지키기 어려워해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사회적기업이죠. 사회적기업이 이들을 고용하면 안전망이 갖춰지고, 지역사회 내에 많은 혜택이 직간접적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우리 사회에 산적한 다양한 문제 가운데 정부도 기업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많아요. 최근에 뜨거운 감자가 됐던 RE100과 같은 환경 문제나 재생에너지 등의 거대 담론에서부터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가정 내 돌봄 문제나 유치원 부족, 플라스틱 배출 등 소소한 문제까지 사회적기업이 해결할 수 있어요.”
플랫폼 기업으로의 성장이 열쇠
사회적경제를 이루는 구성원은 사회적기업뿐만이 아니다. 자활기업이나 마을기업, 사회적협동조합도 사회적경제를 구성하는 톱니바퀴들이다.
윤 센터장은 사회적기업이 활성화돼 사회적경제라는 톱니바퀴가 제대로 맞아떨어지려면 규모의 경제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사회적경제라는 개념이 처음 도입되었던 시절에는 사회적기업을 발굴하고 키우는 데 집중했지만, 회사 하나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정작 지역사회의 문제는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혜택을 보는 당사자도 늘지 않는다는 것이 윤 센터장의 설명이다.
“결국 사회적기업의 성장을 저해하는 소상공인 중심의 아이템에서 탈피해 플랫폼 기업으로 나갈 수 있는 전략이 중요해요. 소셜 프랜차이즈 형태로 규모화하고, 다양한 기업들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나눠 공동으로 하나의 브랜드를 키워나가는 식이죠. 사회적경제 테두리 내의 여러 사회적기업이 각자의 장기를 살려 유통이나 마케팅, 영업, 기업 운영 등을 맡는 방식을 이야기합니다.”
사회적경제 핵심 키워드는 ‘연대’
그렇다면 사회적경제센터는 무엇을 하는 기관일까. 윤 센터장은 사회적경제 기업을 발굴 육성해서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시민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중간 다리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설립 초창기에는 포괄적 기능을 담당했어요. 기업을 어떻게 만들고 생태계 안에 진입시킬 것인가부터 시작해, 진입한 기업을 어떻게 영업하고 서비스할 것인가 지원하는 역할까지 맡았어요. 지금은 사회적인 인식 개선에 힘쓰는 비중이 커요. 시장경제와 사회적경제는 어떻게 다른지, 사회적기업은 무엇을 하는지, 이러한 구조가 어떤 효과나 이익을 만들어내는지 알리는 일을 하는 것이죠. 인식이 개선되면 사회적기업의 판로가 열리니까요.”
간단히 설명하면 예전에는 기업을 키우는 전략이었다면, 지금은 파이를 키우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경제 기업뿐만 아니라 연관된 지역사회 내의 자원들을 끌어모아 연대하고 잘사는 구조를 만드는 형태인 셈이다.
“사회적경제라고 이야기하면 어렵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사실 쉽게 설명하기 힘들죠. 사회적경제는 시장경제와 대치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시장경제에 상식과 공정이 반영되어 좀 더 개선된 시장경제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아요.”
윤 센터장은 사회적경제의 핵심 키워드로 ‘연대’를 꼽았다. 경제활동을 통해 발생한 이득이 사주나 특정 계층에 쏠리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돌아가는 구조라는 점에서 다른데, 이를 위해서는 구성원들 간의 원활한 연대가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시장경제 내에서는 기업의 노하우를 함부로 전수할 수 없지만 사회적경제 내에서는 달라요.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옆에 있는 기업과 노하우를 나누고 공유할 수 있어요. 경쟁을 하더라도 연대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경쟁이죠. 각자의 강점을 갖고 있는 여러 기업, 단체가 모여 장점을 살리며 서로를 돕는 것 자체가 경영이 되는 구조예요.”
부천시 사회적경제 고도화되며 발전
부천시사회적경제센터는 2010년 12월 수립됐다. 윤 센터장이 근무하기 시작한 것은 2015년. 그 이후 부천시의 모습, 부천시 내의 사회적경제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윤 센터장은 “기업들이 전문화, 고도화됐다”고 평가했다.
“초창기에는 정말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어요. 기본적으로 생산되는 상품이 거의 없는 지역인 데 반해, 청소년 범죄나 고밀집화 등 사회적 문제는 잔뜩 안고 있었어요. 인구밀집도가 전국 1위였어요. 사회 소외계층에 대한 돌봄이나 청소년 문제 해결에 대한 요구가 커서 초기에는 이 분야에 집중했죠. 대부분의 기업도 그와 관련된 일을 했고요. 현재는 업종이 크게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대신 고도화되고 전문화됐죠. 예를 들어 단순한 돌봄으로 끝나던 것이 지금은 부천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 부천시민의원을 설립해 의료기관을 직접 운영하는 형태로 성장했어요. 덕분에 이곳으로 인력을 파견하거나 필요한 물건을 납품하는 기업들과의 연대도 가능해졌고요. 이런 상호 거래를 통한 연계 기업이 늘면 사회적경제는 더욱 탄탄해집니다. 현재는 관내에서 350여 개 기업이 센터와 연계하고 있어요.”
이러한 연대와 노력 덕분에 부천시 사회적기업들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인근 도시에서도 “부천시 기업들은 연대가 잘된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부천시를 대표할 만한 스타 기업도 등장했다.
현재 부천시를 대표하는 스타 기업은 인력파견 업체 위드플러스시스템과 조명을 제조하는 EOS, 식품 등을 유통하는 행복을나누는사람들 등이 있다. 위드플러스시스템의 경우 직원 3명으로 시작해 현재는 300명가량 소속되어 있다.
윤 센터장은 “사회적기업들이 지원을 받기만 하다 2017년부터는 지역사회에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며 “현재는 사회공헌 실적이 매년 10억 원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많이 망해보게 하는 것이 우리 일"
이번에는 다소 까다로운 부분을 물었다. 중장년 일자리 정책의 핵심인 창업이나 창직을 위한 전가의 보도로 여러 교육기관에서 교육생들에게 ‘사회적기업’ 설립이나 ‘사회적협동조합’ 결성을 종용하는 경우가 많다. 설립의 용이함이나 다양한 지원 혜택도 이유겠지만, 그 이면에는 각 기관의 성과주의를 지적하는 이들도 많다. 이런 사회적기업의 양산이 문제가 되진 않을까? 이런 의문에 대해 윤 센터장은 그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센터가 추구하는 것 중 하나는 창업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걸러내는 일입니다. 사회적경제 내의 창업이 갖는 장점 중 하나는 누구나 한 번쯤 쓰러져보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지원 체계가 있다는 점이에요. 창업 희망자가 인생을 올인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쯤 시험 삼아 창업을 해보고, 직·간접 경험을 체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현재의 지원 체계예요. 대신 막대한 이득을 얻을 만한 지원은 아니죠.”
창업을 준비 중인 중장년들은 대부분 창업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다. 오랜 기간 회사라는 울타리에 머물러 있다가 밖으로 내몰린 이들이 많다. 당연히 성공의 경험도, 교훈 삼을 실패의 기억도 없는 사람들이다. 확신이 부족한 사업 아이템에 인생을 걸 수 없는 것이다.
윤 센터장은 혼자 할 용기나 자본이 없다면 여럿이 함께 도전하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라고 말한다.
“자본을 조금씩 모아서 시도해보면 경험해볼 수 있는 것만으로 가치 있으니까요. 그냥 잃어버려도 괜찮을 정도의 자본이라도 여럿이 뭉치면 해볼 만한 규모가 될 수 있어요. 그렇게 시도해보면 결론이 나죠. 혼자 하는 것이 낫겠다, 혹은 나 혼자선 못 하겠다라는 식으로요. 다양한 창업 형태를 고려해볼 수 있어요.”
그는 1년 동안 3~4번 창업해보고, 망해보고, 다시 스스로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예산을 산정해보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다음 창업의 성공률을 높일 수 있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노하우가 생길 것이라고 조언했다. 또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적 네트워크, 가용 자원 등은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이런 창업에 대해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사회적경제 창업이라고 윤 센터장은 설명했다.
한국의 50대 이상에게 전공투에 대해 묻는다면 영화를 보러 간 극장의 대한뉴스에서 반복된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이 불타는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일부 과격한 학생들이 학교 건물을 점거하여 경찰에 진압되며 화재가 발생했고, 그 때문에 천하의 도쿄대학이 그해 신입생을 받지 못했다는 결론이 따라붙었다. 전공투는 일본 학생운동의 과격화와 몰락의 상징으로 그려졌다. 좌절한 학생들은 과거를 묻어버리고 체제에 투항하여 기업 전사 ‘시마 과장’(課長 島耕作)이 되어 ‘기업 사회 일본’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이 우리가 전공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다. 그러나 이러한 패배와 좌절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강조된 것은 아닌가? 2019년 전공투 운동 50주년을 맞아 시행된 설문조사에 답변한 전공투 참가자들의 85%는 ‘운동에 참가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68%는 ‘현재의 삶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적극적으로 회신을 보내온 집단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모두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1968년부터 1969년까지 일본 대학가에 과격한 학생운동이 등장했다. 수업 거부와 데모를 넘어서 본관을 점거하여 행정 업무를 마비시켰다. 학부 단위의 자치회와 별도로 학부와 분파를 넘어선 연합 조직이 전체 대학 단위로 결성되었다. ‘전공투’는 이러한 연합 조직인 전학공투회의(全學共鬪會議)의 줄임말이다.
이 시기 학생운동의 폭발은 구조적 문제였다. 단카이 세대라고도 불리는 제1차 베이비붐 시기(1947~1950년)에 탄생한 이들이 18세가 되는 1965년부터 고등교육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본래 일본의 고등교육은 도쿄대학을 정점으로 하는 7개의 구 제국대학이라는 엘리트 양성 기관과 그 외의 지방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일본 정부는 후자를 통해 대량 양산 교육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부실한 대학들이 급증하며 사립대학의 등록금 인상, 입학 및 회계 부정, 공립대학의 사립화, 무차별적인 연구비 수주 등의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대학은 학생들의 대화 요구를 거부하거나, 잘못을 인정하고 시정을 약속했다가도 정부의 압력을 받아 약속을 번복하고 기동대를 투입하여 강경 진압을 계속했다. 학생들은 소속 학부와 정파를 넘어 학교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 조직을 만들었고, 1969년 9월 5일에 전국 전공투를 결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지도부가 투옥되고 이후 당파 간의 항쟁이 격화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전공투 운동은 과연 무엇을 남겼는가
1960년대의 안보투쟁이 외부의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운동이었다면 전공투 운동은 대학과 학생, 연구자의 존재 방식을 묻는 ‘대학의 이념과 학문의 주체를 둘러싼 운동’으로 발전해갔다. 대학은 ‘제국주의적 관리에 편입된 교육 공장’에 불과하며, 교수는 ‘관리 질서를 담당하는 권력의 말단 기구’에 불과했다. 결국 이러한 관리의 질서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일률적으로 전공투 세대라고 표현하지만 20대 후반의 대학원생부터 19세의 신입생까지 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다양한 그룹이 있었다. 이미 사상적 자아를 형성하고 직업적 교육도 어느 정도 완수한 대학원생이나 학부의 상급 학년은 운동이 쇠퇴한 후에도 의사나 변호사, 연구자의 길을 걸었다.
전공투를 상징하는 인물, 도쿄대 전공투의 대표이자 전국 전공투 의장으로 선출된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는 도쿄대 투쟁 당시 물리학을 전공한 대학원생이었다. 제도권 학계를 떠난 그는 출옥 후 유명 입시학원의 물리 강사로 30년 넘게 일하면서 자연철학과 과학사 분야의 연구를 계속했다. 학원 교재로 출판한 ‘물리입문’도 유명했지만, 2003년에 집필한 ‘자력과 중력의 발견’은 학술상과 출판 저작상을 휩쓸며 학술적 능력을 입증했다. 그 밖에도 논픽션 작가이자 도쿄 도지사에 당선된 이노세 나오키, 설명이 필요 없는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 유명 프로듀서 테리 이토 등이 있다.
‘속 전공투백서’에 의하면 70대 중반이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설문 응답자의 10%는 700만 엔 이상의 수입이 있으며, 최고 소득자는 3000만 엔이었다. 1000만 엔 이상의 수입도 꽤 있었다. 한편으로는 일본 65세 이상 고령자 세대의 평균 소득인 308만 엔에 훨씬 못 미치는 250만 엔 이하의 수입을 가진 이들이 40% 정도 된다고 한다. 노년의 활동가들 사이에도 생활의 격차는 존재했다.
투쟁이 끝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 의료와 복지, 농업, 장애인, 노동 등의 분야에서 꾸준히 활동한 이들이 많다. 특히 여성의 경우, 여성은 차 심부름이나 하던 당시의 일본 사회에서 전공투 경험은 세상을 보는 시야를 키울 수 있었다고 자부한다. 한편으로 상처도 남았다. 운동을 그만둔 이유로 ‘동료들이 서로 죽이는 내부 폭력’과 ‘취직’이 거의 비슷한 비율이었다. 후회는 하지 않지만 패배감과 상처가 남아 있는 것이다. “합계 37년간 평사원으로 정년을 맞았다. 내부 항쟁으로 중증 장애를 입은 활동가를 만난 일이 있다. 속죄의 마음으로 평생 평사원에 머무르겠다 결심했다. 이전 활동가의 부음을 들을 때마다 속죄의 마음이 강해지며 무언가 종교에 귀의하고 싶은 나이가 되었다”와 같은 회상에는 살아남은 자들의 무게가 느껴진다.
현재의 정치 성향도 명확하다. 아베 정권의 개헌에 대해서는 95% 이상이 반대하며, 선거에는 항상 참여한다는 대답이 77%였다. 지지 정당은 입헌민주당이 52%, 자민당도 8.8%이며, 공산당은 6.8%에 불과했다. 은퇴한 헤이세이 덴노에 대해서는 65.5%가 긍정적 평가였으며, 도쿄올림픽에 대해서는 68.9%가 전혀 평가하지 않았다. 정치 참가 의사를 묻자 과반수가 앞으로 참가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70대 중반이 넘어도 그들의 의욕은 당분간 꺾이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