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문화공간 취재를 다니면서 한 번쯤은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와 가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8월호의 문화공간을 성수동 카페거리로 선정하면서 이곳과 인연이 깊다는 분과 함께했다. 최근에 등단한 신인 수필가이자 전 아쿠아리움 부사장 손웅익 동년기자다. 화학냄새 진동하던 공장지대에서 카페거리로 탈바꿈한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 카페거리. 멋진 남자와 함께한 커피 향 가득한 거리 데이트에는 옛 추억도 함께 있었다.
성수동 거리를 걷다
성수동이 일반인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수제화 장인들의 구두를 판매하는 성수수제화타운(SSST)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한 2011년부터다. 지하철과 버스 등 광고판을 통해 성수동이 어떤 곳인가를 인식했다. 사실 우리나라의 제화산업은 1950~1960년대 서울역 근처 염천교(서울시 중구 의주로 2가)에서 시작했다. 1970~1980년대 일명 ‘싸롱화’ 전성기였던 명동시대를 거쳐 1990년대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싸롱화 수요가 줄면서 서울 안에서 비교적 땅값이 낮았던 성수동으로 구두 관련 공장들이 이동했다. 그리고 버려졌던 옛 공장과 창고가 새로운 문화 공간과 카페로 단장을 하면서 사람들이 모이고 향기를 나누는, 문화예술이 흐르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서울의 두물머리, 성수동 옛이야기
한양대 건축과 77학번 출신인 손웅익씨에게 성수동은 각별하다. 한양대 시절 화양동과 성수동을 지나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발전상을 보며 살았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줄곧 공장지대였던 성수동. 이곳에는 건축과 시절 학내 모임인 공간연구회가 있었기 때문에 자주 방문했다.
“바로 위 선배 학번에 부자가 많아서 아파트에 전세 얻어서 작업실로 썼어요. 지금은 없어졌어요. 그런데 건축작업보다는 선배들이 카드게임하시면 라면 끓이고 그랬던 거 같아요(웃음).”
그리고 성수동이 한강 본류와 중랑천이 합쳐지는 양주의 두물머리 같은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성수동은 성수대교와 영동대교 사이 지역과 건대, 세종대, 한양대 지역을 감싸고 있다. 한강 개발 이전에는 장마철 이 지역의 둑이 범람하느냐 마느냐가 최대 관심사였다.
“둑이 터지기 직전에 비가 그치곤 했지만 거기 문제가 뭐냐면 중랑천 변에 판자촌이 있었는데 제가 어렸을 때 거기서 살았어요. 집들이 마치 해변에다가 지어놓은 것 같았어요. 비가 오면 집들이 해변에 있는 것처럼 잠겼었죠. 집이 떠내려가면 하룻밤에 집을 한 채씩 지었어요. 블록을 쌓고 서까래는 허접한 나무를 쓰고 기름종이를 붙이고 말이죠. 조세희의 에 나오는 집이 바로 그런 집들입니다. 제가 당시 산 증인입니다.”
비가 많이 오면 비가 온 만큼 집이 떠내려갔다. 그러면 전기도 없던 시절 횃불을 들고 밤새 집을 지어야 했는데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중랑천 상류인 의정부 지역에서 돼지, 닭과 함께 오물이 쓸려 내려오기도 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방에 누워서 밖을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보여요. 블록 사이사이 구멍이 뚫려 있었거든요. 그러면 겨울에는 얼마나 또 추웠겠어요. 그런 세월이었습니다.”
■‘모두의 거리’란 이름의 성수동 수제화 거리 인터넷 사이트는 구두거리와 관련한 정보를 비롯해 맛집과 카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seongsushoes.modoo.at
■청계천과 피맛골에 대한 추억이 있으신 독자여러분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습니다.
이메일로 신청 부탁드립니다. bravo@etoday.co.kr
매달 시니어의 제2인생과 직결된 새로운 직업을 소개해온 이 코너가 2017년 정유년(丁酉年)을 맞이해 새해 각오와 어울릴 만한 주제를 준비했다. 바로 특정한 직업이 아닌 ‘창업’이다. 취미활동이나 공부를 통해 익숙해진 일 혹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회사를 세우는 것. 창업은 시니어에게는 거창한 일로 여겨지지만, 벤처나 스타트업이 뜨고 있는 요즘 사회에선 어렵지만도 않다. 또 시니어의 창업을 돕기 위한 관련 기관의 도움도 쏠쏠하다. 새해 계획을 이미 세워놨다면 ‘창업’이라는 꿈을 하나 더 집어넣어보면 어떨까?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올해 사업 활동 결과는 이상이며, 내년 사업 계획을 보고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스크린의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응시하는 사람은 말쑥한 정장 차림도, 대기업 임원도 아니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 여성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니어의 모습.
지난해 12월 7일 도심권50플러스센터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가 진행하는 인큐베이팅 지원사업에 참여한 단체들이 지난 1년간 사업 결과를 평가하고 다음 해 활동을 소개하는 자리. 현장에선 센터에 의해 ‘보육’되고 있는 스타트업 기업 10개 업체의 대표자들이 모여 성과를 자축했다.
비록 프레젠테이션이 서툴러도, 아직 대표라는 직함이 쑥스러워도, 한 회사를 설립해 성장시키고 있다는 보람 때문인지 이들의 표정은 밝아보였다. 이들은 어떻게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을까.
창업은 ‘소자본’ 1억원 내외로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2017년 한국경제 7대 이슈’ 보고서에서 60대 이상의 연령층에서 경제활동인구 증가가 취업자 증가보다 커 고용 여건이 악화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그만큼 시니어들의 취업활동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취업활동이 어렵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대안 중 하나는 ‘창업’. 그러나 막상 사업을 시작하려 해도 종목 선정이나 자금 마련, 동료나 직원 확보, 판로 개척 등 막막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시니어들은 어떻게 창업을 추진할 수 있을까?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는 최근 은퇴 후 창업 시 망하지 않는 5가지 원칙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소자본으로 창업하기 ▲365일 묶여 있는 창업 피하기 ▲가족의 지지 확보하기 ▲잘 알고, 좋아하는 일 선택하기 ▲사업가 마인드로 무장하기 등이다.
소자본 창업을 추천하는 이유는 상당수의 시니어들이 창업할 때 은퇴 자금을 한꺼번에 투자해놓고 사업이 안 되면 곤란을 겪기 때문이다. 또 잘 알지 못하거나 가족의 도움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다면 그 사업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창업 금액은 1억원 내외가 적당하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창업진흥원의 시니어 창업기술센터 프로그램을 활용하자
창업을 원하는 시니어들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장치들이 정부기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기관 중 하나는 창업진흥원. 만약 어떤 ‘아이템’을 갖고 사업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창업진흥원을 노크해보라. 창업진흥원에서는 각 지역 23개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를 운영하면서 시니어의 창업을 돕고 있다. 또 별도의 시니어 기술창업스쿨을 통해 창업에 필요한 기술교육도 제공하고 있다.
창업진흥원 지식서비스창업부 이경희 대리는 창업진흥원의 활동을 이렇게 설명한다.
“창업진흥원에서 기술창업, 즉 기술을 바탕으로 한 창업을 지원하는 이유는 시니어의 창업에 가장 적합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시니어들은 창업에 올인할 경우 사회적 약자가 되기 쉽고,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은 창업은 폐업률이 높습니다. 때문에 창업에 필요한 지식과 준비 과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기술교육을 지원해 안정적인 창업활동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창업진흥원은 지난해까지 진행했던 시니어 기술창업스쿨을 올해부터는 각 지역의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로 이관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다.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는 교육뿐만 아니라 설립된 회사들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입주공간지원 사업, 창업자금지원, 마케팅활동지원 등 다양한 도움을 주고 있다. 기업이 설립되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지원받을 수 있는 셈이다. 또 시니어에 국한된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창업진흥원의 창업지원 교육이나 프로그램들은 연령 제한이 없기 때문에 창업 전 꼼꼼하게 살펴보고 도움을 받으면 좋다.
모임과 함께 사업 계획 다듬은 뒤 출발해도 늦지 않아
하고 싶은 사업은 있는데 누군가의 힘을 빌리고 싶다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바로 서울50플러스재단 산하 각 지역의 50플러스센터에서 운영하고 있는 커뮤니티와 인큐베이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도심권50플러스센터가 대표적인 사례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의 정현주 대리는 현재 센터를 통해 성장하고 있는 회사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센터에서는 2016년 현재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통해 10개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사업계획 심사와 인터뷰를 통해 10개 업체를 선정해 사무공간을 제공하고, 각 분야 전문가들의 멘토링을 통해 사업이 다듬어질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또 지자체나 다른 기관과의 연계가 필요하다면 저희가 다리 역할을 하고, 사업 내용에 따라 센터가 직접 돕기도 합니다.”
센터에서 지원 기업을 선정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은 일반 창업지원 기관과는 다소 다르다. 기업 활동을 통한 이윤이나 생존을 위한 기존 기업 혹은 청년창업 기업과의 경쟁에 그 초점이 맞게 되면 취지와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거나, 사회 참여적 조직, 협동조합, NPO(비영리 민간단체)를 지향하는 곳을 우선시한다. 물론 사업성이 있어야 함은 기본이다.
이 때문에 상당수 기업들은 전 단계로 센터 내 커뮤니티를 선택한다. 동호회 활동과 비슷한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사업 계획을 보완하고 아이디어를 덧붙이는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다. 또 센터 내 활동을 통해 인력을 확보하기도 한다.
실제로 현재 인큐베이팅에 참여하고 있는 기업 중 일부는 이미 협동조합을 갖췄거나, 사단법인의 형태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 참여 기업 중 한 곳인 주식회사 리스타트의 경우 창업투자회사를 통해 자금 투자를 약속받기도 했다. 준비하고 있는 기업의 일자리와 은퇴 후 구직자들을 맞춰주는 서비스가 좋은 평가를 받은 덕분이다.
| 전국 시니어 창업 기술센터 |
서울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로 232 서울테크노파크 1203호(02-944-6038), 서울특별시 마포구 매봉산로 18 마포창업복지관 601호(070-7727-4101),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 211 성북벤처창업지원센터 B104(02-941-7257) | 경기 경기 의정부시 경의로 114 영빈빌딩 4층(031-828-8877), 경기 수원시 영통구 광교로 107 창업보육동 B2(031-259-6692), 경기 성남시 분당구 야탑로 205번길 26, 213호, 214호(031-707-5962) | 부산 부산광역시 남구 신선로 365 행정관 302호(051-629-7971) | 울산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곡천동문길 20-22(052-277-1996),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진순환도로 1138(HRC빌딩8층)(052-219-8632) | 대구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수로 64, 1층(053-784-8261),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로 128, 1층(053-643-7994),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서대로 675, 복지관 3층(053-589-7932) | 경북 경북 칠곡군 왜관읍 공단로 1길, 2층(054-973-9605) | 인천 인천광역시 남동구 인주대로 506-1 서울외과 4층(032-567-5051) | 광주 광주시 동구 금남로 238 무등빌딩 10층(062-236-3262) | 경남 경남 양산시 주남로 288 영산 테크노폴리스 산학협력관 3314호(055-380-9577), 경남 진주시 동진로 33 경남과학기술대학교 8동 3층(055-751-3610) | 강원 강원 춘천시 동면 장학길 48 한림성심대학교 산학관 1층(033-240-9833) | 충북 충북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377-3 서원대학교 글로벌관 B203호(043-217-1311), 충북 청주시 상당구 교서로 8-2, 3층(070-4814-6515) | 전북 전북 전주시 덕진구 기린대로 945-6 소상공인희망센터 희망관 1층(063-717-1322), 전북 익산시 인북로 187, 1층(063-841-7480) | 전남 전남 목포시 석현로46 목포문화산업지원센터 1층(061-280-7492)
경력 35년 이상의 신인 밴드가 데뷔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 같지만 어찌 됐든 사실이다. 이 경력 넘치는 밴드는 컨트리음악의 한 장르인 블루그래스(Bluegrass) 음악 밴드인 ‘실버그래스’. 나 와 같은 이름난 경연은 아니지만, 당당히 오디션을 통해 경쟁을 물리치고 정식 데뷔를 할 기회를 잡았다. 이 실버그래스의 다섯 멤버인 김구(金口·60), 김원섭(金元燮·60), 이웅일(李雄逸·60), 임영란(林永蘭·55), 장광천(張光天·56) 시니어 뮤지션을 만나봤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노년반격(老年反擊)’. 시니어 입장에선 좀 언짢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다소 발칙하기도 한, 아니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픈 의욕을 불러일으킬 것 같은 이름의 행사가 얼마 전 열렸다. 노년반격은 아마추어 시니어 음악인을 발굴해 육성하기 위한 행사로, 전국 55세 이상의 시니어를 대상으로 진행됐다. 서울 우리마포복지관과 글로벌 제약사 한국에자이가 공동 주최하고 신노년연합과 한국음악발전소,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가 공동 후원했는데, 1차 사전 심사를 거쳐 7팀이 2차 오디션에 올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렇게 발탁돼 데뷔의 기회를 얻은 두 팀 중 한 팀이 바로 실버그래스다. 실버그래스의 데뷔곡 ‘첫 번째 가출’의 녹음 현장에서 이들을 만났다.
낯설지만 친숙한 블루그래스
이들이 사랑하는 블루그래스 음악은 18세기 무렵 미국 애팔래치아에 정착한 영국 이주민들의 전통음악이 토대가 됐다고 알려져 있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 등에서 온 발라드나 무곡을 기반으로 현악단의 음악과 북미 민속음악이 결합되며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다. 명칭은 빌 먼로가 이끌었던 밴드 ‘빌 먼로 앤드 히즈 블루 그래스 보이즈(Bill Monroe & His Blue Grass Boys)’에서 유래했으며 이들이 활동한 1950년대 후반부터 생겨났다고 한다. 대부분 곡이 피들(바이올린의 일종), 벤조, 만돌린, 어쿠스틱 기타, 더블베이스 등으로 구성된 밴드에 의해 연주된다.
실버그래스 역시 이런 블루그래스 밴드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멤버 중 김구씨가 만돌린을, 김원섭씨는 콘트라베이스, 이웅일씨와 장광천씨는 어쿠스틱 기타, 임영란씨는 벤조를 담당한다. 다른 블루그래스 밴드와 마찬가지로 모든 멤버가 악기 연주와 노래에 참여한다.
한국인에게 블루그래스란 음악은 단어부터 생소하지만, 일단 대표적인 한두 곡을 들어보면 어떤 음악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노래 중 하나는 1976년 조영남에 의해 발표된 ‘내고향 충청도’다. 올리비아 뉴튼존이 발표한 ‘Banks Of The Ohio’를 번안한 이 곡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가사 내용이나 멜로디 구성 등으로 인해 전형적인 블루그래스로 평가받는다. 이 곡 이외에도 다양한 블루그래스 음악이 번안되어 1970년대 이후 한국인들에게 사랑받아왔다.
동호회 덕분에 의기투합
하지만 한국에서 정식으로 블루그래스란 음악의 저변이 확대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동호인들은 1981년 의정부 장호원 캠프장에서 ‘한국 블루그래스 협회’를 창립한 것을 ‘역사적 사건’으로 꼽는다. 이때 실버그래스의 멤버이자 오랜 친구 사이이기도 한 이웅일, 김구씨도 그 현장에 있었다.
실버그래스는 2006년 개설된 포털사이트 ‘다음’ 카페 ‘한국 블루그래스 음악 클럽(cafe.daum.net/KBMA)’의 회원들로 구성됐다. 물론 이들 중 상당수는 그때 의정부 모임의 출신들이기도 하다.
사실 실버그래스의 노년반격 출전 계기는 이랬다. 오디션 공고를 본 클럽 운영자가 참가 제한자격인 만 55세 이상인 회원 중 적당한 멤버들에게 추천을 한 것. 그렇게 의기투합하여 준비 없이 경연에 나서게 됐다.
이웅일씨는 그래도 큰 문제는 없었다고 했다.
“사실 대부분 멤버가 클럽 설립 초창기 때부터 함께한 멤버이기도 하고, 여러 무대위에서 함께 즉석 공연을 많이 했던 사이라 화음을 맞추는 데는 문제없었습니다. 또 워낙에 블루그래스 음악이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특징이 있기도 하고요. 덕분에 오디션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연주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웅일씨는 1970년대 말 라디오 방송에서 블루그래스 음악을 접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음악을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벤조를 배우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고.
“그 후 일 때문에 사우디에 1년간 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곳에선 외국으로 송금하는 것이 자유롭더라고요. 그래서 국내에선 구하지 못했던 블루그래스 악보들을 영국이나 호주의 서점을 통해서 사 모았어요. 그렇게 확보한 악보들을 동호인들과 공유하기도 했고요. 아마 국내 보급된 악보 중 상당수는 저를 통한 것일 겁니다.(웃음)”
인력개발 분야 연구원인 이웅일씨의 ‘절친’ 김구씨는 20대 후반부터 귀금속 관련 일을 해 온 사업가. 실버그래스 안에서는 만돌린을 담당하고 있다.
“만돌린을 시작하게 된 것은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해서였어요.(웃음) 아무래도 기타나 벤조보다 인기가 없었거든요. 가볍기도 하고, 독특한 음색 때문에 지금은 매력에 빠져 있습니다. 만돌린은 배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악기지만, 바이올린과 유사한 음역의 소리가 마음을 치유해 주는 힘이 있는 것이 특징이지요.”
김구씨는 서울 약수동 자신의 매장 인근에 지하 연습실을 만들어놓고, 음악연습뿐만 아니라 지역 어르신들을 초대해 봉사활동 차원에서 무료로 기타와 우쿨렐레 강습을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각기 다른 악기마다의 매력이 원동력
김원섭씨 역시 ‘이 바닥’에서 꽤 오랜 이력의 소유자다. 블루그래스 클럽에는 음악적 뿌리가 같은 요들음악을 하다 전향한 이들이 많은데, 김원섭씨 역시 그런 사례다. 대학 시절 ‘한국 바젤 요들 클럽’을 통해 음악을 시작해, 지금까지 식지 않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자랑하는 블루그래스 애호가 중 한 명이다.
사실 노년반격에는 솔로로 지원해 최종 예선까지 올랐다가 콘트라베이스가 부족한 실버그래스에 합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합류하게 됐다.
“콘트라베이스를 시작한 건 10년 정도 됐는데, 각각의 다른 악기들 소리를 감싸안으며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 매력이죠. 음악은 어깨너머로 배우는 것보다는 정식으로 익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대학생에게 레슨을 받았고, 노래에도 관심이 많아 성악을 개인지도 받기도 했습니다. 음악은 자기관리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해줘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나갈 겁니다.”
실버그래스의 홍일점인 임영란씨는 얼마 전까지 숙명여자대학원에서 음악치료를 가르쳤던 음악 전문가. 그 역시 요들을 거쳐 블루그래스를 즐기게 되었는데, 특히 벤조 특유의 음색에 빠져 본격적으로 악기 연주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피아노와 기타는 조금씩 다룰 줄 알았지만,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벤조가 처음이었어요. 처음 시작할 땐 음악이 아닌 소음에 가족들의 볼멘소리도 있었지만, 50대 여성이 겪는 변화를 음악으로 극복할 테니 감수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그때부터는 잘 협조해 주더라고요. 딸은 클래식 기타 전공자이고 남편도 취미로 악기를 연주하고 있으니 어렵지 않았습니다.”
훤칠한 체형에 카우보이모자가 인상적인 장광천씨는 현재 부천에서 활동 중인 교회 전도사다.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한 강좌에 참석했던 것이 음악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당시 강단에 서 있던 이는 1970년대 유명했던 블루그래스 마니아인 요들 전도사 김흥철씨. 그때만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음악을 하게 될지는 몰랐다고 했다.
“블루그래스 가스펠을 부르며 교회 내에서 활동을 계속했었죠. 군부대 방문이나 봉사활동 등 한 해에 70~80회 정도 공연도 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의 뿌리는 대부분 이 블루그래스 음악에서 왔다고 추측돼요. 실제로 미국에는 블루그래스 찬송 음반도 많고요. 그래서 저도 블루그래스 가스펠 앨범을 준비 중이고, 곧 선보일 예정입니다.”
시니어들의 ‘희망’ 됐으면
물론 이들의 활동은 오디션 입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지난달 27일에 그들의 데뷔곡 ‘첫 번째 가출’이 공개됐다. 전형적인 블루그래스 곡의 형태를 띠는 이 노래는 노년반격의 프로듀서인 가수 이한철이 작곡했고, 작사는 멤버 중 김원섭씨의 가사 초안을 뼈대로 다른 멤버들이 살을 붙였다.
가사 내용은 시니어들의 어린 시절 추억을 그대로 담고 있다. 강냉이 장수를 보고 사달라고 조르다 부모님께 혼이 나 가출을 한 주인공이 결국 아버지에게 ‘아프지 않은’ 매를 맞는다는 내용이다. 멤버들은 노래를 작사하는 과정이 서로의 추억담을 꺼내놓는 작업 같지 않은 작업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30년 넘게 각자의 음악을 해 온 이들이지만, 정식 데뷔는 처음인지라 모든 과정이 새롭고 떨릴 수밖에 없다.
실버그래스 멤버들은 “노년반격을 통해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어 기쁘고 설렙니다. 어릴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우리의 노래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시니어에게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통해 블루그래스 음악이 보급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우리를 통해 많은 시니어들이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실버그래스 밴드 구성은 즉흥적인 면이 있었지만, 앞으로 오랜 기간 활동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관객들 앞에 많이 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라며, “나이가 많아도 두려움을 가질 필요 없고, 우리도 늦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습니다”라고 전했다.
이들은 5월부터 노년반격을 통해 함께 합격한 부산 출신의 시니어 그룹 ‘바야흐로’와 함께 콘서트를 갖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의사와 환자, 생명을 걸고 맡기는 관계, 둘 사이에 맺어지는 깊은 신뢰감을 라뽀(rapport)라고 말한다.당신의 의사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아내 신정아(申貞娥·44) 씨의 간을 이식받아 새 삶을 얻은 이경훈(李敬薰·48) 씨와 그를 살린 분당서울대병원 한호성(韓虎聲·56), 최영록(崔榮綠·40) 교수가 그들만의 따뜻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감사합니다. 저는 너무나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착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서, 그리고 여기 좋은 교수님들과 함께해서 전 복 받았죠. 제가 새 삶을 얻은 것은 모두의 사랑 덕분입니다.”
이경훈씨에게서는 남다른 긍정적 에너지가 느껴졌다. 이씨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은 따뜻했고, 부부를 바라보는 교수들은 흐뭇한 미소로 화답했다. 아내의 간을 이식받은 남편, 이 부부의 새로운 삶에 동행하는 의료진은 한가족과 다름없어 보였다.
어느 날 찾아온 통증, 그리고…
이경훈씨는 2011년 11월 신정아씨와 화촉을 올렸다. 마흔 넘어 결혼했지만, 그렇기에 남들보다 즐겁고 소중한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이씨는 아내에게 무슨 일이든 다 해주고 싶은 남편이었다. 결혼 후에는 더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과로가 쌓이다보니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다. 결혼 2년이 지난 시점부터 위가 쓰린 날이 많아졌다. 동네 병원에서 위궤양을 판정받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선선하게 가을바람이 불던 일요일로 기억됩니다. 말로 못 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어요. 결국 119를 불렀고 응급실에 실려갔습니다. 위궤양은 약 처방을 받으며 조금씩 호전되는 양상을 보였지만, 평소 앓던 B형 간염 증세가 악화되면서 간성혼수(肝性昏睡)가 생겼더라고요. 그때부터 응급실에 가야 하는 날이 많아졌어요.”
병원을 오가는 동안 그는 점점 지쳐갔다. 지난해 7월에는 응급실에 두 번이나 실려 가야 했다. 그 이후, 다니는 병원을 포천에 있는 종합병원에서 의정부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옮겼다. 정밀검사결과는 간암이었다. 다행히 색전술은 받았으나 간기능 저하로 인해 간이식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당시 그 대학병원에서는 간이식 수술을 할 만한 의료진이 없었다.
“처음에는 위궤양 판정을 받았으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간암이라고 하니까 마음이 무너지더라고요. 간이식을 받아야 한다니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아내를 위해서 간이식을 받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때만 해도 아내의 간을 받을지는 몰랐었죠.”
이씨는 주변사람들에게 수소문해 간이식 명의로 알려진 한호성 교수 이야기를 들었다. 직접 한 교수의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최종 목적지를 분당서울대병원으로 생각하고 2014년 가을 한 교수를 처음 만난다. 지난 3월 드디어 간이식 수술을 받았다. 아내의 사랑과 의료진의 헌신에 힘입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현재 이씨는 빠른 속도로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통상 간이식 환자들은 면역억제제를 장기복용해야 하기 때문에 부작용 등 어려운 부분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열심히 극복하고 있다. 의료진의 말을 잠시 빌리면, 수술 후 3개월이 지난 시점이지만 관리가 되고 있어 약도 줄이고 있고 이상 징후를 보이는 검사결과도 없다. 아마도 아내와 의료진에게 받은 사랑 덕택이 아닐까? 다만,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하는 과정동안 직장을 잃게 돼 경제적인 부분이 어려운 상태다. 그런데도 그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문제를 뛰어넘으리라 다짐한다. 그에게 지금은 건강을 회복하는 기간이면서도, 가장으로서 다시 뛸 준비를 하고 있는 중요한 시기다.
엄마에게 신장, 남편에게 간을 준 여자
신정아씨는 가족을 위해 두 번 장기 기증을 했다. 어머니에게는 신장을, 남편에게는 간을 떼어준 특별한 사람이다. 신씨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고혈압과 갑상선 질환을 앓다가 유행성출혈열의 합병증으로 신장 기능부전이 생겨 신장이식 수술이 필요하게 됐다. 신씨는 어머니를 위해 신장을 기증키로 했다. 이식 수술 후 어머니와 신씨 모두 건강하게 지냈다. 이씨와 결혼도 하고 행복이 무르익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께 신장을 떼어준 지 8년이 지났을 때, 남편이 간이식을 받아야 살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제가 남들과 다른 건지, 이상한 건지 모르겠는데요. 간을 떼어주는 일, 그걸로 고민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신장이식을 했기 때문에 간이식도 가능할지 궁금했어요. 결국 적합판정을 받게 됐고, 남편을 위해 간을 떼어주는 일은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신씨는 남편도, 의료진도 만류했지만 간을 떼어주고 싶다고 확고하게 말했다. 가능성이 있다면,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게 그녀의 특기였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다시 깨 볶는 소리가 들리는 가정으로 당당히 복귀했다.
현재 신씨는 퇴원 후 건강관리를 받으며 음식 조절과 가벼운 운동을 통해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두 번이나 장기기증을 했지만, 남편의 사랑에 기운을 내고 있다. 그녀에게 장기기증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두 번의 장기 이식 수술을 경험하며 확고한 신념이 자리 잡게 되었어요. 장기이식은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니 생명을 살리는 일에 많은 사람이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는 겁니다.”
참 따뜻하고 믿음직한 의료진
부부는 한목소리로 말했다. “참 따뜻한 선생님들이에요. 친절하다는 부분이요. 겉으로만 그러는지 진짜로 생각을 해주는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잖아요. 이 선생님들은 ‘환자를 진심으로 살리고 싶다’는 마음을 몸소 보여주고 있죠. 그래서 참 감사합니다. 우린 많은 병원을 다녀봤기 때문에 잘 알아요.(웃음)”
특히 이씨는 수술 전후 상황이 아주 편했다고 회상한다. “자상하게 대해주시고 잘 될 거라고, 아내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니까. 긴장되고 떨리기도 할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수술 후에도 그냥 숙면한 것처럼 일어났죠. 중환자실에 있어도 되는 건지 미안할 정도였다니까요. 수술도 수술이지만 심적으로 편안하게 해주시니까. 두려움도 사라졌죠.”
전문의 3명의 긴박한 협동작전
2015년 3월, 부부의 간이식 수술은 분당서울대병원 암센터 간이식팀 한호성 교수(암·뇌신경진료부원장)와 조재영, 최영록 교수가 맡았다. 이들 3명은 팀을 이뤄 수술을 진행했다. 보다 신속하고 정교하게 수술을 하기 위해서였다. 기증자 수술팀, 수혜자 수술팀으로 나눠 각각 진행하고 다시 협력하는 방식이다. 10시간이나 걸린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최영록 교수에게 당시 가장 고민했던 부분과 남은 과제가 뭔지 물어봤다.
“이식 수술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기증자의 안전입니다. 이미 신씨는 어머니께 신장이식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죠. 부부는 우리들을 믿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수월하게 수술을 할 수 있었죠. 다행히 부부 모두 빠르게 회복하고 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사실 흔치 않은 상황인 만큼 특별한 수술이었어요. 앞으로도 부부가 더욱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치료에 최선을 다하는 게 남은 과제입니다.”
의사는 항상 환자 중심으로 산다
또 다른 이야기지만, 메르스 공포가 한창이던 6월 20일 분당서울대병원에서는 잠정 의심환자에 대한 간이식 수술이 진행됐다. 사실 의료계에서 다들 쉬쉬했던 환자였다.
그런데 위험을 무릅쓰고 수술을 집도한 한호성 교수는 이른바 ‘노력하는 명의’로 통하고 있다. 부부의 이야기에서도 그렇듯 한 교수의 삶은 환자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가 생각하는 의사로서의 신념을 듣고 싶었다.
“학생들에게 항상 책보다 환자를 먼저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의사로서 살고 있는 중요한 가치이기도 합니다. ‘어느 책에 제시된 것처럼 이 정도면 포기하는 게 옳다’라는 판단 대신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환자의 안녕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잘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의사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교수에게 좋은 환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봤다.
“본인의 의사를 믿어주세요. 그리고 잘 따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외과의로서 말씀드리자면, 작은 수술이나 큰 수술이나 합병증을 조심하셔야 되는데요. 합병증으로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만큼 수술 후 관리가 중요합니다. 의사와의 관계가 깊을수록 그 관리가 더 수월해집니다.”
“또 하루 멀어져간다. 머물러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잊혀져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중략)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보내 온 것도 아닌데….”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다. 그러나 예순 즈음에 이 노래는 다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직장의 퇴직을 준비하며, 자식들이 결혼하며 하나 둘씩 떠나간다. 이 순간 만감이 교차한다. 어떤 이는 씁쓸한 기분이 들 것이고, 어떤 이는 새로운 인연과의 조우에 설레기도 할 것이다. 예순을 즈음한 이들에게 물어봤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과 나를 기쁘게 하는 것에 대해.
◇ 파안대소 – 나를 웃게 할 때
△ 김수년 (56ㆍ경기 구리시) - 자녀의 취업
아침에 멋진 양복을 입고, 정갈하게 머리를 다듬고, 코끝을 자극하는 향수를 뿌리고 출근을 하는 아들을 볼 때마다 매우 자랑스럽다. ‘아들 키우기 위해 열심히 살았던 보람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바로 저 때다. 누구보다 멋지고 바르게 자라준 자식도 자랑스럽다. 그리고 내 말을 믿고 잘 따라와 줘서 고맙다. 요즘은 아버지께 맛있는 것 사준다고 전화가 오면 머쓱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온다.
△ 장성자 (60ㆍ서울 중랑구) - 손주들의 재롱
요즘은 진짜 손주들 재롱 보는 맛에 산다. 사내놈들 둘만 키우느라 딸 키우는 재미를 몰랐는데, 손녀 둘을 키우면서 그 재미가 무엇인지 알아가고 있다. 사내놈들 키워보니 애교도 없고, 반응도 없어 즐거움을 몰랐다. 두 손녀가 할머니 재미있게 해준다고 애교도 피우고, 땡깡도 피우는 모습이 너무나도 귀엽다. 내가 아닌 며느리만 찾을 때 얄밉다가도 마트에서 손녀들 옷, 장난감 코너를 기웃거리는 나를 보고 있으면 웃기기도 하다. 그런데 뭐 어떡하나. 그 아이들만 보면 웃음이 나고 자꾸만 보고 싶은 것을.
△ 진순자 (57ㆍ경기 남양주시) - 댄스의 즐거움
25년 동안 식당을 운영했다. 아침 일찍 출근해 저녁 늦게 들어가니 휘트니스 클럽가서 운동하는 것 밖에 취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은퇴를 하고, 내 시간을 많이 갖게 되면서 새로운 것이 하고 싶어졌다. 그 중에 하나가 스포츠 댄스를 배우는 것이었는데, 예상했던 것처럼 정말 신난다. 일주일에 두 번 동네주민자치센터에서 열리는 스포츠 댄스 시간이 기다려진다. 강사를 따라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드니 스트레스도 확 사라지는 느낌이다. 남편도 처음에는 이 나이에 무슨 춤이냐며 만류했지만, 이제는 즐기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응원해준다. 이제는 댄스복을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사는 것도 하나의 낙이 됐다.
△ 양병환 (58ㆍ경기 남양주시) - 첫 수확의 기쁨
3년 전 귀농을 했다. 처음에는 농사가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정말 큰 오산이었다. 첫 해는 거의 수확물이 나오지 않아 고심을 많이 했다. 역시 농사도 살아있는 생물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보니 그만큼 공이 많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농사에 대해 더욱 많이 공부했고, 더 많이 땀을 흘렸다. 마침내 지난 해 9월, 첫 결실을 얻었다.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성취감과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첫 작물을 판매 할 때는 ‘내 새끼’를 보내는 심정으로 아쉽기까지 했다.
△ 김택현 (64ㆍ경기 의정부시) - 친구들과의 술 한잔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즐거운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격식없이, 허심탄회하게 즐기는 친구들과의 술자리다. 젊은 시절과 현재의 술자리 화제도 많이 바뀌었다. 이제 와서 처음 생각해 보는 것인데, 젊은 시절 술자리에서 했던 이야기들과 지금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변한 것 같아서 감회가 새롭기도 하다. 젊은 시절 여자 이야기, 자식 이야기를 하던 친구들이 이제는 골프 이야기, 자식 이야기, 어디론가 떠날 여행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세월이 많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우정이다. 시간은 흘러도 사람은 흘러가지 않는다.
실버타운은 자연스럽게 기존의 공동체와 별개의 공간으로 인식되게끔 만드는 면이 있다. 즉 게토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시니어 입장에서는 자기 돈을 갖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간다는 의미가 있지만 사회 공동체적인 면에서 봤을 때 이러한 고립화가 긍정적으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또한 앞서 설명된 것처럼 그렇게 ‘자신들만의 세상’이 구축된 결과, 안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까지 도출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민간 주도의 실버타운 개념에 보다 사회공동체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고령화 선진국인 독일의 경우를 보면 건설사가 아닌 사회복지법인이 운영주체가 되는 실버타운이 운영되고 있으며 덕분에 재무적으로나 서비스적으로 안정적인 양상을 보였다.
우재룡 서울은퇴자협동조합장은 ‘새로운 개념의 실버타운’을 제시하고 있다.
실버타운이라는 가시화된 공간이 아닌, 특정지역에서의 노인 인구 비중이 자연스럽게 상승하면 그 안에 비영리단체를 중심으로 은퇴 공동체를 형성하여 시니어들로 하여금 자신의 집에서 비상전화, 이동 지원 같은 돌봄 서비스를 받게끔 하자는 것이다. 또한 이 방법을 통해 청년층이 시니어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일자리도 해결할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자연발생적 실버타운 구축이 대안이다
우 조합장의 얘기는 특정지역의 노인 인구 비중이 20~30를 넘으면 비영리단체가 정부와 협력하여 사무실을 두고 ‘자연발생적 실버타운(NORC:NaturalOccurring Retirement Community)’를 구성해 비상전화나 이동지원 등의 돌봄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민간 주도하에 한 달 수수료 3만원 정도의 저렴한 가격을 받고 지속적으로 케어를 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입주자들의 건강 안부체크를 하거나, 백화점을 간다든지, 병원을 간다든지 체크해서 신속한 의료 및 생활 서비스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요즘은 유럽이나 미국 같은 경우 ‘내가 살던 곳에서 격리되지 않고 살자’(AgingIn Place)라는 식으로 개념이 바뀌었다. 젊은이들과 소통하면서 도와주고 멘토하면서 같이 엉켜서 살아가는 참여형 모델이 유행하고 있다.
의정부 실버타운을 운영하는 간부는 “좋은 실버타운이 최첨단 시설이나 대형 럭셔리 호텔급의 하드웨어이기 보다 보람 있는 공동체 생활이 가능하도록 하는 소프트웨어를 중시해야 한다” 며 “개인별 상황 ·취향 ·재정에 맞는 맞춤형 실버타운이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