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은 한때 손꼽히는 노인의 집합소였다. 지금도 전 같지는 않지만, 여전히 많은 노인이 모여들고 있는 곳이다. 이 종로 일대에 나오는 많은 시니어는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지인들에게서 가끔 종로에 가면 만 원으로 하루를 즐길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먼저 이발을 하고 시간에 따라서 영화를 보든지 점심을 먹든지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대로 한번 따라 해보려고 탑골공원에 가 보았다.
탑골공원과 종로2가 파출소 사이 거리 입구에서 낙원상가까지는 200m 남짓 되는데, 이 골목길에만 이발소가 8개나 된다. 살펴보니 이발소마다 보통 의자가 3~4개가 있는데 모두 손님이 앉아 있다. 근처에서 구두를 닦는 분에게 이발을 제일 잘하는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그 중 규모가 큰 집을 알려준다.
이발소에 들어가 보니 사장을 포함하여 이발사가 5명이나 되고 모두 손님을 맡아 이발이나 염색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만 6명. 이발비는 4000원이고, 염색비는 종류에 따라 5000~1만5000원이다.
이발소를 나와 영화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낙원상가 4층 예전 허리우드극장은 서울미래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인데 이 자리에 실버영화관으로 부르는 두 개의 상영관이 있다. 하나는 실버극장, 또 하나는 낭만극장으로 두 곳 모두 1년 내내 동서양의 옛날 영화를 한 달에 7~9편 상영한다. 실버영화관은 2009년에 개관을 했으며 개관 6년만인 2015년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한다.
실버극장은 일본영화 ‘오하루의 일생’ 그리고 낭만극장은 톨스토이 원작 부활을 영화화한 미국영화 ‘부활’을 상영 중이다. ‘부활’ 영화표를 2000원 주고 샀다. 55세 이상은 2000원이고 청소년 5000원, 대학생과 일반은 7000원인데 55세 이상 어르신과 동반하면 2000원이다. 극장 좌석은 300여 석으로 관객은 50여 명쯤인데 거의 다 나이가 꽤 드신 분들이다.
점심을 먹기 위해 영화관 주변과 탑골공원 옆 골목길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린다. 이 일대에는 순댓국, 우거지탕 등을 내놓는 식당이 몇 군데 있는데 대부분 가격은 4000원 내외며 자리는 시니어 손님으로 거의 다 찼다. 영화관 들어가기 전 어느 식당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걸 봤었는데 2시가 넘은 지금도 몇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조금 기다리다 들어가 보니 홀이 좁고 테이블도 많지 않았다. 한꺼번에 많은 손님이 들어올 수 없어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설렁탕을 주문해서 먹었는데 여느 맛집에 절대 뒤지지 않는 맛이다.
영화 한 편 보고 점심 먹는데 3시간 반쯤 걸렸으니 이발까지 했으면 4시간 반 정도는 걸렸을 것이다. 영화비 2000원, 밥값 4000원 그리고 이발비 4000원 모두 만 원으로 하루를 보낸 셈이다. 가히 만 원의 행복이라고 할만하다.
실버영화관은 서울시와 일부 기업체의 후원으로 운영한다고 한다. 아마 후원 없이 입장료 2000원 만으로는 운영이 쉽지 않을 것이다. 시니어들이 2000원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은 서울에는 낙원상가의 실버극장과 낭만극장을 비롯하여 서대문의 청춘극장, 서초구의 명작극장 등이 있고 안산의 명화극장, 천안의 낭만극장 등이 있다. 다른 도시에서도 지자체에서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지역의 시니어들이 손쉬운 영화 관람으로 동년배들의 소통과 문화향유의 기회를 얻게 되어 만 원의 행복 아니 그 이하로도 행복한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봄이 왔다. 농부들이 바빠지는 농사철이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도 농사를 짓는 곳이 있다. 도시텃밭에서 상자를 이용한 농사다. 대부분 건물의 옥상이나 아파트 베란다 같은 곳에서 관상용으로 취미 삼아 농사를 짓는다. 아파트 건축 후 남은 자투리 텃밭도 있다. 텃밭을 개인이 관리하고 농사짓는 것은 정서면에서도 좋다. 다만 지자체에서 ‘도시농부’ 또는 ‘자투리 텃밭’이라는 이름을 달고 개발하여 지역주민에게 한 평이나 두 평정도의 아주 작은 농토를 분양하고 관리를 해 주는 것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지자체 도시텃밭은 주민들에게 인기가 좋아 경쟁이 심하다. 도시민들이 여가를 이용해 직접 농사를 지어보게 함으로써 여가선용도 되고 건강도 도모하면서 가족끼리 농사짓는 기쁨도 맛보라는 의미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자투리땅이라도 농사는 농사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낭만에 젖어 아무나 덤벼들기는 어렵다.
농사를 지으려면 농토는 기본이고 씨앗이나 모종이 있어야 한다. 농작물이 잘 자라게 하기위해 퇴비도 듬뿍 넣어야 하고 비료도 필요하다. 친환경 농사를 위해 농약을 치지 않으려면 수시로 손으로 벌레를 한 마리 한 마리 잡아야 한다. 삽이나 괭이, 호미, 등 농기구도 필요하다. 가물 때는 물도 줘야 하고 장마 때는 배수로에도 신경 써야 한다. 잡초도 없애주고 농작물이 넘어지지 않게 버팀목도 세워줘야 한다. 또, 농사는 시기가 있으니 영농일지를 써가면서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 때문에 농사를 지어보지 않은 사람에겐 어렵다. 농군학교에 다녔어도 농사 전문가로부터 지도와 도움을 받아야 한다.
다행이도 이런 관리와 지원, 지도를 지자체에서 해주고 있다. 대부분 비슷하겠지만 어느 지자체에서 자투리 텃밭 분양공고를 봤는데, 6㎥에 2만 원을 받고 씨앗과 퇴비를 주겠다고 한다. 삽이나 괭이 등 농기구도 빌려준다. 단 호미는 각자 사라고 한다. 지자체에서 농토를 갈아엎어서 구획을 정리해주고 각종 지원을 해준다. 담당 부서가 있고 이 일을 맡아서 하는 담당 공무원이 있다. 겨우 2만 원을 받으며 이런 지원을 해주는 것은 손해 장사다. 지자체의 손해에는 다른 사람이 낸 세금이 들어가서 형평을 맞춘다.
귀농하는 농부들의 첫 번째 애로사항이 농사를 지어도 팔 곳이 없다는 것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 중 시골의 일가친척으로부터 농산물을 사 달라는 전화를 받아보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직접 지은 농산물을 팔지 못해 애타하는데 도시농부를 만든다는 낭만으로 지자체가 세금을 쏟아 붓는 도시텃밭은 재고해야 마땅하다.
대기업이 참기름 들기름까지 짜서 파니까 재래시장 상인들이 해 먹을 것이 없다고 한다. 예전에는 큰 동네마다 수동식 국수 기계를 갖춘 국수 공장이 있었고 아이스케이크 공장, 정미소도 있었다. 이제는 산업화와 경영 효율화에 밀려 다 없어졌다. 시골의 면 소재지에 가 봐도 지역민을 위해 생산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겨우 미장원, 이발소나 일용잡화를 파는 구멍가게만 있을 뿐이다. 5일마다 열리는 재래시장은 지역의 축제장이었지만 대형마트에 밀려 거의 사라졌다. 농촌에도 피와 같이 돈이 돌게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농촌의 농산물을 도시에서 소비해 주지 않으면 팔 곳이 없다. 지자체에서 관리해주고 그저 세금만 잡아먹는 도시텃밭이라면 그만 문을 닫아야 하지 않을까? 고추, 상추, 가지는 시장에 가서 1000~2000원만 주면 한보따리 살 수 있다. 입술이 없으면 잇몸이 시린 법이다. 농촌이 죽으면 도시도 죽는다. 지자체에서 도시 텃밭자리에 꽃동산을 만들고 도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꽃을 가꾸게 하면 좋겠다. 대형마트를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경제 논리에 반해서 하루정도 문을 닫는 날을 만든 것이 본보기다.
참 다행이다. 60살부터 국민연금을 매달 꼬박꼬박 받을 수 있어서 말이다. 연금수령액은 실생활에 충분하지 않아도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직장이나 일거리가 있어 일정한 소득이 발생하면 그 범위 안에서 쓰고 확실한 장래 수익이 예정되어 있으면 앞당겨 써도 무리가 되지 않는다. 새로운 수익이 없거나 적을 때, 저축하여 둔 돈에서 쓴다면 그 쓰임새를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생각 없이 쓰다 보면 후회를 할 수밖에 없다. 살아오면서 종종 경험한 일이다.
근래에 ‘Downsizing’이란 말이 많이 회자한다. 기업체를 비롯한 조직에서나 인생 2막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소득이 줄어든 상황에 맞게 쓰임새를 줄여야 함을 이른다. 돈을 벌지 못하거나 수입이 줄어든다면 맞춰 생활해야 한다. 모아둔 돈을 쓰기만 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닥이 나기에 십상이다. 금리가 바닥인 요즘엔 더더욱 그렇다. 우리 속담에 “곶감 빼 먹듯 하다”란 말이 있다. 달콤하여 한둘 먹다 보면 앙상한 꼬지만 남게 된다. 소득이 없거나 적은 경우엔 수입 범위 안에서 쓰는 지혜가 필요하다. 너무 옹색할 필요는 없어도 분수에 맞지 않은 지출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방법의 하나가 절약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방법을 실천하는 일이다.
필자는 그런 일의 하나로 이발을 아주 저렴하게 할 수 있는 곳을 이용한다. 고향 청학동 마을 어르신들이 상투를 틀고 지내는 것처럼 이발하지 않고 길게 기르는 방법도 있겠다. 그렇게 사는 분들을 주변에서 보기도 하여 그런 방법으로 머리를 관리해볼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해보았지만, 사회활동을 많이 하는 필자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평소처럼 손질하기로 했다. 일반 이발소를 다니다 안사람의 권유로 미장원을 이용해왔다. 지난해 봄부터 머리 깎는 장소를 바꿨다.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에 있는 이발관이다. 이 근처엔 이발관이 눈에 띄게 많다.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 지역임을 참작해선지 3,500원을 받다 지난 연말에 4,000원으로 올렸다. 머리를 감으면 500원이 추가된다. 그래도 싼 편이다. 이발 솜씨도 양호하다. 이발사는 중.장년층으로 가위질에 빈틈이 없고 손님들이 대부분 만족해한다. 머리를 깎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필자는 이 근처에서 모임을 하는 기회가 많아 이곳에 들릴 때 시간을 내어 머리를 깎게 되기에 시간과 이발료를 절약한다.
한가로운 시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지하철 우대로 교통비를 들이지 않고 찾을 수 있는 지역이다. 시니어들이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실버극장을 비롯한 볼거리, 값싸면서 질도 괜찮은 먹거리도 있어 나이 든 분들이 많이 모여든다. 소득에 맞게 지출하려는 시니어 경제생활의 일면을 본다. 은퇴하고 난 직후는 과거의 생활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과거의 생활 방식에서 현실에 맞는 자세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질이 떨어지지 않으면서 절약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찾는 것도 은퇴 후 지혜로운 경제생활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아스라이 손 흔들며 사라졌던 대형 가수가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와 198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던 가수, 바로 김연자(金蓮子·58)다. 오랜 시간 일본에서 ‘엔카(えんか)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그녀. 한국으로 돌아와 조용히 활동하는가 싶더니 8년 만에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트로트도 엔카도 아닌 강렬한 사운드의 댄스음악 이른바 EDM으로 말이다. 세대를 뛰어넘어 젊은이들의 마음까지 단숨에 사로잡은 김연자와의 만남. 수은등 불빛 아래를 지나 찬란한 인생을 다시금 맞이한 그녀는 이렇게 외친다. 아모르파티(Amor Fati!)!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김연자는 몰라도 ‘아모르파티’는 안다
가수 김연자가 부른 ‘아모르파티’의 인기는 대단하다. 좋아하는 연령대도 어린이에서부터 시니어 세대까지 다양하다. TV는 말할 것도 없고 거리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아모르파티’가 흘러나온다. 한 번 들으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전자악기 리듬에 몸을 맡기다가 결국에는 가사의 매력에 더 빠져버리고 마는 노래가 ‘아모르파티’다.
“이 곡을 쓴 작곡가 윤일상씨가 어떤 음악을 만들고 싶냐고 묻더라고요. 지금까지 내가 굴곡진 인생을 살았지만 이 모든 것이 앞으로 다가올 내 인생을 위해서 있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후회하지 않고 앞만 보고 살겠다는 ‘인생 찬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죠. 그렇게 탄생한 곡이 ‘아모르파티’입니다. 가사는 ‘철이와 미애’의 신철씨가 써줬어요. 아모르파티란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라 하더군요.”
‘아모르파티’는 2013년 발표곡이다. 윤일상씨는 이 노래가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놓아야 할 대박곡이라고 예견했지만 지금과 같이 폭발적이지 않았다. 노래가 빠르다 보니 따라 부르기 힘들어 중년 팬들에게 어려운 곡이었다. 4년이란 시간이 흘러 이 곡의 매력 포인트를 찾아낸 이들은 중년 팬이 아닌 10대 팬들. 올해 TV의 한 음악 프로그램을 방청한 10대들이 김연자가 부르는 ‘아모르파티’를 듣고 SNS에 퍼트린 것. 신나고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찾아내 그들의 문화로 김연자와 ‘아모르파티’를 끌어당긴 것이다. 음악 순위 역주행 신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어제 무주 구천동에서 노래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는데 학생들이 ‘꺅! 언니!’ 하고 난리가 났어요. 저인 줄 몰랐는데 시선이 저를 향하고 있더라고요. 어머니들이 환호해 주시는 건 있었어도 이런 기분 처음이죠.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거든요. 근데 어쩜 그렇게 꺅 하고 소리를 잘 내요(웃음)? 육십을 바라보는 나한테 언니래요. 근데 너무 좋더라고요. 새로운 행복감에 젖어 있어요.”
국보급 가수 한류 열풍 초석을 다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김연자의 인기는 톱스타란 말로 부족했다. TV만 틀면 안 나오는 곳이 없었다. 가요 프로그램이며 합동 공연이며 대미는 늘 김연자 차지.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간드러지면서도 폭발적인 목소리는 국보급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홀연히 사라졌다. 너무 갑작스러운 행보. 대스타가 한순간에 떠나는 일이 있었던가.
“사라진 게 아니에요. 시댁이 일본이었고, 속으로 늘 그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때 우리나라에서 계속 일이 잘되니까 갈 기회를 놓치고 있었던 거죠. 마침 무슨 사정인지 당시 매니저가 일본에 가도 된다고 했어요. 이때다 싶어 얼른 간 거죠. 그런데 그때가 일본에 처음 간 것은 아니었어요.”
이발소를 하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가요계에 데뷔한 김연자는 일본 음반회사 오디션을 통해 일본에 진출할 기회를 얻었다. 그때 나이가 열여덟이었다.
“제가 운이 좋은지 주위 사람들 도움으로 좋은 기획사에 들어갔어요. 월급이 꽤 괜찮았던 곳입니다. 25만엔을 벌면 집으로 20만엔을 보냈어요. 엔화 가치가 높을 때라 그런지 한국에 갈 때마다 집이 바뀌더라고요.”
김포공항으로 가족이 마중 나오지 않으면 집을 찾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 일본 생활을 접고 들어갔을 때는 작은 연립주택을 장만했다. 일본에서 보낸 돈을 어머니께서 열심히 모아주신 덕이다.
“3년 동안의 일본 생활이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제 인생에는 많은 도움이 됐어요. 실패의 원인을 생각해봤는데 일본을 갈 때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더라고요. 진짜 몸만 갔죠. 일본에 다시 가려면 일본에 대해서 알아야겠다 싶어서 일본어와 일본 문화, 한문 등을 따로 공부했어요. 스물아홉 살에 다시 갔을 때는 마음이 참 편했어요.”
한류의 원조, 20년 생활의 막을 열다
서울올림픽 찬가였던 ‘아침의 나라에서’를 일본어로 번안해 부르며 자연스럽게 일본 음악계에 진출했다. 각종 공연이며 TV며 행사며 한국에서는 대형 가수였지만 신인의 자세로 매사 임했다. 언어의 장벽도 내려앉았다. 일본인들도 감탄하면서 그녀의 노력에 박수를 보냈고 응원해줬다.
“다 내려놓고 마음만은 스타라는 생각으로 갔어요. 캠페인에도 나가고요, 일본 신인들하고 똑같이 했죠.”
유독 공연 무대가 많은 일본에서는 노래 가사를 완벽하게 외우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엔카 가수이지만 탱고, 블루스, 발라드 등 다양한 노래를 배우고 관객 앞에서 선보이는 것이 일상이었다. 무대에서 최소 20곡은 소화해야 하는 강행군. 한국어도 아니고 일본어로 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솔직히 어려운 일이었다.
“매년 가을에 3400석 규모의 NHK홀에서 콘서트를 했어요. 공연을 위해서 여름에는 계속 노래 연습을 했어요. 가끔 쉴 때는 집 앞 공원으로 반려견들을 데리고 나가 산책하면서 노래 가사도 외우고 그랬어요. 사람들이 없으면 노래 연습을 하느라 중얼중얼… 그때 당시 저희 집에 많을 때는 반려견이 다섯 마리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저를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했겠어요(웃음). 일본에서의 여름은 그렇게 보냈습니다.”
나도 뮤지컬 배우였다!
일본에서의 다양한 활동 이야기를 하다 보니 뮤지컬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자연스럽게 김연자의 뮤지컬 도전기로 이어졌다.
“니나가와 유키오(1935~2016)라는 유명한 연출가가 계셨는데 제 목소리가 좋다고 불러주셨어요. 라는 작품에서 집시 역할을 맡았어요. 연기 진짜 어렵더라고요. 노래는 5절까지 이어져도 하나도 안 잊어버리는데 대사는 맨날 까먹는 거예요(웃음).”
역시 김연자의 이름에 걸맞게 개런티도 주연배우 다음으로 많이 받았다고. 그런데 개런티로 받은 돈을 의상비로 다 써버렸다는 톱스타 김연자.
“사실 말이 좋아 주인공 다음이지 뮤지컬 한 달 하고 받은 개런티가 제가 노래 하루 불러서 받는 개런티에도 못 미쳤어요. 원래 의상팀에서 의상을 다 준비해주기는 했는데 너무 값싸 보이는 거예요. 역할이 집시이지만 밍크도 가짜고, 자존심이 너무 상했어요. 그래서 선생님께 제 옷으로 다 하겠다고 허락받고 따로 준비했어요. 그랬더니 개런티가 그렇게 없어지더군요(웃음).”
동경과 오사카에서 공연하는 동안 동생들도 공연을 관람하러 왔다고.
“나 같지가 않았나봐요. 저는 노래 부를 때 외에는 저 같지가 않아요. 다른 거 하면 작아 보이고 불안해 보이고요. 아, 연기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때 알았죠.”
단 한 번의 배우 체험 뒤 연기 분야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일본에서 한국 가수 그리고 한국 사람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김연자가 일본으로 무대를 옮겼을 때는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이었다. 문화·정치적으로 냉랭하던 시절을 버티고 이겨내 엔카 여왕의 자리에 앉은 김연자. 결코 쉬운 일도 아니었고 모두에게 허락된 일도 아니었다. 처음보다 마음이 편했다지만 한국인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은 물론이고 숱한 편견과 맞서야 했다.
“제가 그냥 보통 가수였다면 진작 문제 일으키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거예요.”
한창 일본에서 활동할 때 일이 힘들면 여권을 들고 길을 나서기도 했다는 충격 발언.
“한국에 가려고 공항으로 갈 택시를 잡는 거죠(웃음). 그런데 살던 동네가 시내와 너무 떨어져서 택시가 안 오는 거예요. 그러면 택시 기다리다 생각을 하는 거죠. 가수 김연자에 대한 것은 참겠는데 ‘한국 가수’ 김연자가 뭘 잘못했다는 기사는 견디기 힘들더라고요. 내가 한국으로 가버리면 이런저런 매스컴에서 ‘한국 가수’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떠들어댈 것이 뻔하잖아요. 한국 사람으로서 어떤 부정적인 말 한마디도 듣기 싫었어요.”
길에 서서 망설였던 적이 몇 번인지 모른다 했다. 그때마다 다음 날 신문에 올라갈 지독한 기사 제목이 떠올랐다. ‘한국 가수 김연자가 스케줄 펑크 내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 우리나라를 힘들게 하면 안 되겠지. 그러고는 마음 다잡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내 감정을 억누른 것 같아요. 그렇게 20년을 일본에서 생활했어요.”
아버지 때문에 한국행을 결심하다
“우리 아버지는 말이 안 통했어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련하게 말끝이 잦아든다. 광주에서 이발소를 하시던 아버지에게 노래 잘 부르는 딸은 그저 자랑이었다. 아버지의 “야! 너 서울 가서 가수 돼!” 한마디에 무대에 올라갔다가 아직도 그 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아버지 때문에 가수가 된 거죠. 감사하죠. 가수 될 운명을 알아보시고 어린 시절에 빨리 뭔가를 겪게 해주셨죠. 한국 복귀도 아버지 때문이었고요.”
8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지만 가족들은 바쁜 김연자에게 이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돌아가시고 열흘이 지난 다음에 엄마가 전화를 하셨어요. 스케줄이 있는지 물으셔서 없다고 했더니 그제야 아버지가 떠났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날 일본의 작은 고깃집에 앉아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아버지도 공연 보러 일본에 많이 오셨었죠.”
아버지가 타계한 후 한국으로 돌아온 김연자는 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오가며 활동 중이다. 그사이 재일교포 남편과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하고 헤어졌다. 김연자가 일본에서 거액의 돈을 벌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남겨진 재산은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매니저 겸 밴드 단장이던 전 남편을 평생 동반자로 생각했기에 쓰지 않았던 계약서가 문제였다. 일본에서는 계약서를 쓰지 않은 김연자를 오히려 더 이상하게 생각했다. 일본 팬들과 연예 관계자들을 마주하면서 사정을 얘기했고 조금씩 김연자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전 남편과 지낸 세월이 아깝지 않은지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거액은 숫자일 뿐이죠. 제 눈에 현금이 오가는 것도 아니고요. 사실 제가 후회를 별로 안 해요. 이 순간이 제일 중요해요. 지금이 이 순간이 있어야 내일도 있잖아요. 난 항상 그렇게 살기 때문에. 어떨 때는 좋은 기억이건 나쁜 기억이건 다 잊어버려요(웃음). 단념도 빠르고 꿈도 빨리 꾸고. 그런 거 없어요. 그리고 저는 부자는 아니지만 하루 삼시 세끼 잘 챙겨먹고 사니까 괜찮아요. 나름 부동산도 있고 집도 있어요.”
어렸을 때 많이 의지했던 전 남편에 대해 그녀는 남은 감정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고마운 마음을 내보였다.
“솔직히 저나 전 남편이나 0에서 시작했죠. 오랜 시간 정신적으로 의지했어요. 일본 연예계에 대해서도 그 사람이 전부 알려줬어요. 서로 상부상조한 거죠 뭐.”
미국에 셰어가 있다면 한국에는 김연자!
“어머니가 오래전 저에 관한 점을 보셨다는데 제가 일흔까지 노래를 부른대요.”
처음에 그 얘기를 우습게 들었는데 이제 슬슬 현실이 돼가는 느낌이 밀려온다고. 하고 싶은 공연만 하고 여유롭게 사는 것을 꿈꿨는데 젊은 가수들하고 똑같이 뛰고 있어 자기 모습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좋다.
김연자와 인터뷰를 마치고 미국 가수 셰어(Cher)가 떠올랐다. 1960년대까지 포크 가수로 활약하던 셰어. 한참을 배우로 지내더니 1999년 ‘빌리브(Believe)’란 음악을 선보이며 전 세계를 전자 음악 열풍에 빠뜨렸다. 올해 71세인 셰어는 지난 5월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빌보드 아이콘 어워드를 수상했다.
김연자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성인 팬을 상대로 노래 부르다 어느 날 갑자기 세대를 뛰어넘어 EDM 열풍에 불을 지폈다. 71세의 셰어 언니도 망사옷 입고 무대를 누비고 있으니 한국 ‘EDM 대모’, ‘연자방아’로 거듭난 70세 김연자의 무대도 기대한다.
‘안동 역에서’라는 노래를 폭발적으로 히트시킨 가수 진성이 최근 노래 부른 ‘보릿고개’를 들으면 가난했던 옛날기억이 떠오른다. 보릿고개란 예전에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의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아서 농가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던 말로서 음력 3, 4월에 해당한다.
요즘 아이들에게 쌀이 없어서 밥을 굶은 시절이 있었다고 말하면 쌀이 없으면 라면 끓여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보릿고개 시절을 통 모르는 아이들에게 보릿고개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진성의 보릿고개라는 노래가 애창가요로 사랑받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보릿고개의 전설을 어렴풋이나마 아는 사람이 많이 있다. 내가 겪은 6.25이야기처럼 내가 겪은 보릿고개 이야기를 토해내어 우리조상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기록으로 남겨서 후세들이 똑 같은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필자는 보릿고개를 몸으로 직접 겪었고 눈으로 참상을 봤고 더 참혹한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먼저 진성이라는 가수가 부른 보릿고개라는 노래의 가사를 들어보자.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시린 보릿고개 길
주린 배 잡고 물 한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에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흉년에 콩죽 한 그릇하고 논 서마지기를 바꾼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배고픔은 참기 힘들다. 부잣집에서 초봄에 쌀 한가마니를 장리쌀로 빌리면 가을에 추수하면 한가마니 반을 갚아야한다. 이자로 치면 10개월에 50%인 셈이다. 과히 살인적이다. 장리쌀을 먹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덜익은 보리를 먹어야 한다. 보리가 덜 여물면 껍질을 벗기는 방아를 찧을 수가 없다. 보리이삭을 낫으로 잘라서 가마솥에서 덖으면 익으면서 딱딱해진다. 이를 대충 껍질만 벗겨서 밥을 한다. 이 밥을 삼킬 때 목이 뜨끔뜨끔 할 정도로 보리가시가 목을 찔러댄다. 물로 배를 채운다는 말이 있는데 소금이라도 먹어야 물이 삼켜지지 그냥 물만으로는 배를 채울 수가 없다.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먹었다고 하는데 무었을 먹었을까? 산나물이나 쑥을 많이 채취해서 먹는다. 나물 자체만으로는 반찬이나 되지 요기는 될 수 없다. 밀가루나 하다못해 보릿가루라도 있어야 버무려 쪄서 식사대용으로 한다. 뿌리로는 칡뿌리에서 녹말을 내어 먹었다. 아이들이 칡뿌리를 학교에까지 들고 와서 먹었다. 목피라고하면 나무껍질인데 대표적인 것이 소나무 속껍질이다. 이것은 워낙 딱딱해서 그냥 먹을 수는 없다. 먹으면 죽는다는 양잿물을 넣고 삶으면 부드럽게 풀어진다. 이를 물에 담가 양잿물 독성을 빼고 먹었다. 거의 섬유질로 구성된 음식을 먹으니 변 보기가 어렵다. 위장의 기능이나 배변 힘이 약한 노인들은 죽을 맛이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보릿고개를 넘은 사람은 다행이지만 배고픔을 참지 못해 장리쌀에 손을 대면 자식을 남의 집 머슴으로 보내거나 농토를 팔아야 했다. 불어나는 이자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농토를 헐값에 파는 것이 그나마 살길이다. 자기의 농토가 줄어들면 다음해는 더 고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논 한마지기 사려고 하지 말고 입하나 덜라고 했다. 새 중에서 제일 큰새가 먹새라고 먹을 입인 식구를 줄이는 것이 필요했다. 딸은 남의 집 식모로 공장으로 보내고 아들은 머슴으로 이발소나 관공서 사환으로 취직했다.
어렸을 적에는 가난은 개인이 게으르거나 부모를 잘못만난 탓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가난하게 사는 이유의 대부분은 지배계급의 착취가 바탕에 있다. 장리쌀의 횡포도 그렇거니와 남의 농토를 경작하면 가을에 추수해서 절반씩 나눈다. 하지만 나쁜 지주는 미리절반의 수확을 정해놓고 흉년이 들어 수확이 형편없는데도 약속된 절반을 가져가버린다. 불공정계약이지만 소작인은 힘이 없으니 대항할 수가 없다. 이를 잘 아는 위정자들이 가난한 소작농을 보호하기는커녕 지주와 한 통속이 되어 착취자의 편에 섰다.
지금의 세상은 카이스트 이병태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부모세대보다 훨씬 공정하고 살기 좋은 세상임에는 틀림없다. 지금의 세상이 살기어렵다고 헬 조선이라고 말하는 젊은이들은 우리 부모세대의 보릿고개 이야기를 들어 볼 필요가 있다. 지금은 열심히만 살면 배고픔에서는 해방된다. 대통령께서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먹고사는 걱정이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참혹한 보릿고개는 이제는 없는 세상이다. 보릿고개라는 단어도 우리세대를 끝으로 모두의 기억에서 잊어지기를 희망한다.
서울 지하철 1호선 대방역 근처 좁은 골목 끝, 작은 이발소 하나가 있다. 이발소 딱 하나 말고는 그저 사람 사는 오래된 집들이다. 간판도 떼버리고 없는 이 안은 늘 손님으로 가득 차 있다. 후미지고 주위에 상점 하나 없는 이곳을 어떻게 알고들 찾아갈까. 전철이 오가는 바로 옆, 노래 후렴구마냥 ‘달그락, 철컥’ 전철 지나는 소리가 잊을 만하면 들린다. 이발소에 들어선다. 그 순간, 어린 시절 아빠 따라 들어갔던 옛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10년 단골은 기본
요즘 동네 이발소를 본 적이 있던가. 대형 미용실이 생겨나더니 상남자의 성지와도 같던 이발소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젠 필요가 없어 간판도 떼버렸다는 이곳은 ‘역전이용소’. 굳이 간판이 있을 이유가 없다. 그냥 봐도 ‘역전 이발소’이니 말이다. 앉아 있는 손님마다 물어보면 이발소와 10년 넘는 우정을 과시한다. 이 동네 남자들만 이용하는 곳이 아니다. 손님들이 사는 곳도 다양하다. 멀리서는 충남 예산에서도 오는 손님이 있다. 37년 단골손님을 자처하는 정우석(89)씨는 경기도 의왕시에서 왔다.
“여기에 다닌 지 30년이 넘었어요. 공화당이 망할 때부터 오기 시작했지. 내가 공화당에 있었거든. 오늘은 을지로에서 설렁탕 먹고 소주 한잔 하고 와서 힘들어 죽겠어. 여기 오면 반드시 이거(믹스커피) 한 잔 먹어. 이게 딱 낙이여.”
정우석씨는 고등학교 친구를 따라 처음 이곳을 방문했다. 친구들과 모여 이발소를 이용했는데 지금 혼자 남아 백발 머리를 다듬는다.
“고등학교 동창 중에 치과의사가 있었는데 죽은 지가 오래됐어. 아마 7~8년은 된 것 같아. 친구가 여기를 다니더라고. 그래서 한번 와봤는데 잘해주데. 한 번 두 번 왔는데 언제든 잘해줘. 그러니 30년 넘게 올 수밖에. 염색 안 한 지는 10년 됐어. 내가 한 40년 가까이 염색을 했어. 30대 후반부터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거든. 그런데 눈도 좀 안 좋아서 안 했어. 젊어 보이는 거 말짱 헛거예요.”
이발소를 나가는 정우석씨에게 “예뻐지셨다”고 말을 건넸더니 “나이 90까지 살면서 예쁘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면서 웃는다.
“이발하고 나면 여기 사장이 모자는 들고 가라고 하는데, 난 모자 쓰는 게 좋아요.”
15년째 그때 그 가격
권오복(81)씨는 한 달에 한 번 꼭 이곳에 와서 머리를 자르고 염색을 한다. 친절하고 무엇보다 머리를 잘자른다. 가격도 저렴해서 다닌 지 10년 됐다.
“머리 자르고 염색하면 9000원입니다. 머리를 잘하시고 가격도 싸고 손님이 많아. 여기 오면 두세 시간은 기다려야 해요.”
이정학(62)씨도 역시 10년 넘은 단골. 아내가 말하길 지금까지 머리를 자르면서 최고로 잘 자르는 곳이라고 말해준다고.
“마지막 마무리가 정말 깔끔해요. 한번 맛 들리면 다른 곳에 못 가요. 올 때마다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걸려요. 전화 예약하고 오면 순번이 조금 빠르기는 해요. 여기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나서 좋아요. 사실 세면기도 완전 옛날 거였는데 몇 년 전에 새로 바꿨어요. 뜨거운 물도 잘 나오고요.”
죽음, 대화의 흔한 주제가 되다
“이 자리에서 처음 이발 기술을 익혔습니다.”
50년 된 이 역전이용소의 주인인 임근묵(59)씨. 25년 전 원래 이곳 주인이었던 고모부로부터 이발소를 인수했다.
“제가 공부를 잘 못해서 고등학교 떨어지고 충남 공주 집에서 빈둥거릴 때였어요. 야간학교에라도 들어가라며 고모부가 저를 서울로 불렀어요. 제가 공부 머리는 아니라서 시골집으로 도망갔죠. 그런데 또 잡으러 오시고요.”
처음에는 이발기술을 안 배우고 2년 동안 공장에 다녔다. 잠은 지금 이발소 바닥에서 직원들과 같이 자며 생활했다.
“공장은 일요일에 놀지만 이발소는 바쁘잖아요. 그러니까 일요일에 일손이 부족하니까 손님 머리 감겨주는 방법을 배운 거예요. 몇 년 뒤 공장이 망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명절에 이발소가 바쁘다면서 고모부가 자꾸 저를 서울로 오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어요. 나 스무 살 때. 그때부터 마음먹고 이발을 배웠어요. 5년 머리 감기고, 면도 배우고 정말 하나씩 밟아서 올라갔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서 제가 일한 지도 40년이나 됐네요.”
이곳에서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 이유인즉은 손님 대부분이 70을 훌쩍 넘은 시니어이기 때문이다. 1년이면 단골손님 스무 명은 세상과 인연을 다해 더 이상 얼굴을 볼 수 없다.
“오늘 오전에 의왕에서 아흔두 살 된 단골손님이 왔어요. 대방역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20분이나 걸렸다 하시더라고요. 젊은 사람 걸음으로 5분이면 되는 거리죠. 다리가 무겁다고, 이제 그만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거동 못하는 손님들을 위해 가끔 머리를 잘라주러 집으로 병원으로 간다는 임근묵씨. 취재 당일도 못 오는 손님의 머리를 자르러 여의도에 가야 한다며 시계를 몇 번이고 쳐다봤다.
“아파서 못 오시는 분이 계셔요. 제가 가요. 병원에도 가고요. 연세들이 많으시니까 매년 달라요. 몸이 힘들어 못 나가니 집에 좀 와달라고 하십니다. 그러다 돌아가시고 그래요.”
혹시 이 지역이 재개발된다면 이발소를 그만둘 생각이라면서도 불편해진 분들을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고. 이발을 배우는 사람은 거의 없고, 손님들은 점점 나이 들어가는 상황. 그래서 임근묵씨는 옛날 방식의 정통 이발을 해온 대한민국 마지막 이발사를 꿈꾼다.
“저를 찾으시는 분들이 있잖아요. 제가 없으면 불편해할 분들이 있으니까요.”
직장이나 일거리가 있어 일정한 소득이 발생하면 그 범위 안에서 쓰고 확실한 장래 수익이 예정되어 있으면 앞당겨 써도 무리가 되지 않는다. 새로운 수익이 없거나 적을 때, 저축하여 둔 돈에서 쓴다면 그 쓰임새를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생각 없이 쓰다 보면 후회를 할 수밖에 없다. 살아오면서 종종 경험한 일이다. 분수에 맞게 절약하는 일이 시니어 경제생활의 지혜다.
근래에 “Downsizing”이란 말이 많이 회자한다. 기업체를 비롯한 조직에서나 인생 2막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소득이 줄어든 상황에 맞게 쓰임새를 줄여야 함을 이른다. 돈을 벌지 못하거나 수입이 줄어든다면 맞춰 생활해야 한다. 모아둔 돈을 쓰기만 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닥이 나기에 십상이다. 금리가 바닥인 요즘엔 더더욱 그렇다. 우리 속담에 “곶감 빼 먹듯 하다”란 말이 있다. 달콤하여 한둘 먹다 보면 앙상한 꼬지만 남게 된다. 소득이 없거나 적은 경우엔 수입 범위 안에서 쓰는 지혜가 필요하다. 너무 옹색할 필요는 없어도 분수에 맞지 않은 지출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방법의 하나가 절약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방법을 실천하는 일이다.
필자는 그런 일의 하나로 이발을 아주 저렴하게 할 수 있는 곳을 이용한다. 고향 청학동 마을 어르신들이 상투를 틀고 지내는 것처럼 이발하지 않고 길게 기르는 방법도 있겠다. 그렇게 사는 분들을 주변에서 보기도 하여 그런 방법으로 머리를 관리해볼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해보았지만, 사회활동을 많이 하는 필자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평소처럼 손질하기로 했다. 일반 이발소를 다니다 안사람의 권유로 미장원을 이용해왔다. 지난해 여름부터 머리 깎는 장소를 바꿨다.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에 있는 이발관이다. 이 근처엔 이발관이 눈에 띄게 많다.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 지역임을 참작해선지 3,500원을 받는다. 이발 솜씨도 양호하다. 이발사는 중.장년층으로 가위질에 빈틈이 없고 손님들이 대부분 만족해한다. 5천 원짜리 지폐를 내고 거스름 1천 원을 봉사료로 주기도 한다. 머리를 깎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필자는 이 근처에서 모임을 하는 기회가 많아 이곳에 들릴 때 시간을 내어 머리를 깎게 되기에 시간과 이발료를 절약한다. 종전에는 동네 미장원을 주로 이용하였고 1만원에서 12,000원을 주었다. 지금은 3,500원으로 해결하기에 1회에 8천 원 정도를 아끼는 셈이다.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들고 나가면 이발을 하고 명화 한 편(인근에 있는 실버극장 입장료 2천 원)을 보고 시래기 해장국(2천 원)에 막걸리 한 병을 즐길 수 있다. 이발은 3개월에 4회 정도 하게 되므로 1년이면 128,000원이 절약된다. 절대 금액으로는 크지 않지만, 못 먹어 굶주리는 난민촌의 아이 한두 명의 허기를 달랠 수 있는 금액이다.
한가로운 시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지하철 우대로 교통비를 들이지 않고 찾을 수 있는 지역이다. 시니어들이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실버극장을 비롯한 볼거리, 값싸면서 질도 괜찮은 먹거리도 있어 나이 든 분들이 많이 모여든다. 필자가 다니는 이발관은 늘 손님이 대기하고 있다. 보통 하루에 300명 정도가 다녀간다고 필자의 머리를 손질한 이발사가 귀띔한다. 소득에 맞게 지출하려는 시니어 경제생활의 일면을 본다. 은퇴하고 난 직후는 과거의 생활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과거의 생활 방식에서 현실에 맞는 자세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질이 떨어지지 않으면서 절약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찾는 것도 은퇴 후 지혜로운 경제생활이다.
노인의 나이기준이 65세다. 유엔이 정했다고 하지만 왜 하필 65세인가?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1815~1898)가 독일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국민들을 노동현장으로 내몰면서 지금 열심히 일하면 65세 이후부터는 국가가 연금으로 놀고먹도록 해주겠다고 설득한 나이가 노년의 기준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강력한 부국강병정책을 써서 1871년 독일 통일을 완성한 사람이다. 노인이 되면 국가가 책임진다면 구미가 당기는 말이지만 그 당시 독일의 평균수명이 40대라고 하니 비스마르크 입장에서는 책임지지 못할 거짓말을 했다고 믿기도 어렵다. 아니 지킬 수 있는 약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수명100세 시대에 아무리 젊어 열심히 노력했다고 해도 35년을 국가가 국민 전부를 책임져주기는 어렵다.
법이 정하는 노인의 나이가 되면 노인복지 차원에서 혜택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공도사'라는 별명이 있는 지하철 무임승차다. 어르신 교통카드를 발급받아 전국의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특별히 마련된 경로석에 앉을 권리가 있다. 서울처럼 지하철 노선이 잘 발달된 지역에서는 교통비 걱정에서 거의 해방된다. 이 카드를 활용하여 노인들의 지하철 택배 직업이 생겨나기도 하고 전철을 타고 춘천에서 막국수도 먹고 온양에서 온천욕도 즐기는데 들어가는 교통비가 없다.
다음으로 국공립의 능원, 고궁박물관이 무료입장이 가능하고 영화관에서도 활인요금이 적용 된다. 항공요금도 20%나 활인이 되고 이발소나 목욕탕에서 자율적으로 활인해 주는 곳이 있다. 추석이나 설날 등 특별한 날에 경로행사의 음식을 대접 받기도 하고 효행 음식점에서 할인된 가격의 음식을 먹을 수도 있다.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점도 많다. 대표적으로 취업에서 대부분 배제되어 강제로 정년퇴직을 당해야 한다. 심지어 아파트 경비나 청소부도 개인면접이라는 좁은 구멍을 통과하면서 건강하다는 것이 보증되어야 취업이 가능하다.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국가나 지방단체에서 지원하는 무료 교육이나 재취업, 창업 교육에 대부분 참가자격이 박탈된다. 공공 근로에 있어서도 체력이나 인지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나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기가 어렵다. 듣기 좋은 말로 ‘시간부자’라고 하지만 지루한 날의 연속이다.
노인은 늙은 사람이다. 65세의 노인의 나이가 되면 신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오는가? 실제로 직접 겪어보니 65세가 되었다고 하여 하루아침에 몸의 변화가 확 일어나는 것은 없다. 사람의 노화가 완만하게 하향곡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수평을 유지하다가 계단식으로 주춤주춤 진행된다. 즉 어제와 오늘은 같지만 3년 전과 오늘은 다르다는 느낌은 분명하다. 스스로 건강관리를 잘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건강차이는 늙어갈수록 갭이 점점 더 벌어지는데 최고의 건강관리는 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친구들이나 주위의 노인들을 보면 일이 있는 사람은 노화의 속도가 느리지만 모든 역할에서 배제되어 할 일 없이 공원을 산책하듯 배회하는 노인의 노화의 속도는 급속도로 빨라진다. 노인에게도 감당할 일거리를 주는 것이 직접적으로 건강보험공단의 재정을 튼튼히 한다. 건강해서 일을 하고 싶어 하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노인에게도 65세 노인이라는 딱지를 붙여 경로석으로 모시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노인의 일감을 개발하여 개인으로는 소득을 창출토록 하여 소비대열에 서게 하고 국가적으로는 놀고먹는 사람을 줄여서 생산성을 높이는 대열에 건강한 노인을 편입시켜야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처럼 노년의 기준 65세 그냥 기준에 불과하다.
고속도로 휴게소나 산업체의 대형 식당에는 자외선 소독기를 갖추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물 컵을 소독한다. 이발소나 목욕탕 같은 곳에는 소형의 자외선 소독기를 갖고서 머리빗을 넣기도 하고 가위나 이발 기계 등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물품을 소독한다. 자외선의 소독기능에 대해 잘 모르고 사용하는 사람이 많다.
태양에서 나오는 빛을 전자파라고 하는데 이 전자파 중 사람이 눈으로 인식하는 파장을 가시광선(可視光線)이라 하여 380~760nm의 파장을 갖고 있다. 이 가시광선을 프리즘을 통해 분석해보면 무지개 색깔인 7가지 색 즉 빨주노초파남보의 색이 된다. 파장에 따라 색이 다르다는 의미다.
3파장 형광등은 3파장 형광물질인 적, 녹, 청의 세 가지 발광 색 성분으로 이뤄져 있다. 빨간색(赤色) 760nm를 넘어서는 파장을 적외선(赤外線)이라 하며 열을 내기 때문에 일명 열선(熱線)이라 하며 이것을 이용한 것이 원(遠)적외선 사우나다.
380nm보다 파장이 낮은 쪽을 자외선(紫外線)이라 하는데 살균의 효과가 있다. 자외선의 파장 중 가장 살균력이 뛰어난 253.7nm 파장이 많이 나오는 자외선램프(uv-c lamp)를 사용하여 살균한다. 자외선램프는 이 파장이 가장 중심에 다량으로 불쑥 올라와 많이 발산되지만 소량의 다른 파장도 들어있다. 가시광선 범위의 빛이 발산되지 않으면 우리는 빛을 느낄 수 없다. 동남아 지역을 여행할 때 길거리에서 날고기를 파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금방 음식이 상할 것 같지만 강한 자외선 영향으로 음식이 쉬 상하지는 않는다.
자외선 살균기를 제대로 알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외선의 성질을 알아야 한다. 자외선은 투과력이 약하다. 자외선 빛이 직접 닿지 않는 곳은 살균이 되지 않는다. 컵을 거꾸로 두어 컵 내부에 자외선이 직접 투사되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다. 일부 음식점에서 물이 빠지게 컵을 엎어서 자외선 소독기 내부에 두는 경우가 있는데 자외선의 파장은 컵을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에 컵 안에는 아무런 살균 효과가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약품 살균이 아니므로 소독의 지속성이 없다. 자외선 살균 후 또다시 오염될 수 있다는 거다. 살균했으니까 살균 효과가 지속하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자외선 살균의 장점은 약품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인체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열처리가 아니므로 물질의 변형을 불러오지 않는다. 하지만 자외선 살균은 빛이 직접 닿은 부분만 살균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잊지 말자. 자외선이 닿지 않는 곳은 살균이 되지 않는 사실을 말이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 동네의원에서 수액 주사를 맞았던 환자들에게 C형 간염이 집단 발병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숫자만 67명입니다. 주사기를 돌려쓴 것이 결정적 원인입니다. 원장과 원장부인도 감염됐고, 원장은 거동이 불편한 뇌병변장애인이란 소식도 들려옵니다. 면허갱신 등 의사 재교육 필요성이 대두되고 미필적 고의에 대한 형사처벌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원장에 대한 정신감정도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혹은 인격장애 수준의 문제가 있지 않고서야 이런 비상식적인 의료행위를 수년 동안 버젓이 자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건이 다수의 선량한 동네의원에 대한 불신으로 확산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당한 환자 입장에선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격입니다. 알다시피 C형 간염은 죽을 수 있는 병입니다. 치료제가 있다 하나 완치가 쉽지 않고 만성 간염과 간 병변, 간암으로 악화합니다.
불행한 소식은 갈수록 환자가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C형 간염 신규환자가 2002년 1927명에서 2010년 5630명으로 급증하고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B형 간염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2012년을 기점으로 C형 간염이 앞지르고 있습니다. 주목할만한 것은 지역적 편차입니다. 2015년 국립암센터 국제암대학원 기모란 교수팀이 건강보험공단 유병률 자료를 분석한 결과 전국적으로 광역단체로는 부산, 기초단체로는 전남 진도가 가장 높았습니다. 전국 평균보다 부산은 2배, 진도는 5배나 높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해마다 수천 명씩 누군가 몹시 황당하고 억울한 과정을 통해 C형 간염에 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핵심고리는 단연 혈액입니다. C형 간염은 술잔이나 키스, 가벼운 성생활 등 일상적 접촉으론 거의 옮기지 않습니다. 타액이나 정액보다 혈액을 통해 주로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로든 다른 사람의 혈액이 나의 혈액과 섞이는 상황이 가장 위험합니다. 이것은 에이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는지 사례별로 알아봅니다.
주사기 주사기는 그냥 한 번 찔리기만 해도 걸릴 수 있습니다. 감염자를 찌른 주사기에 의료인이 사고로 찔린 경우 대략 1~3%에서 감염됩니다. 중요한 것은 바이러스의 양입니다. 감염자의 혈액이 많이 들어갈수록 확률이 증가합니다. 단순히 바늘에 찔리는 것이 아니라 이번 사건처럼 수액을 통해 역류한 피가 섞여 들어갈 경우 확률이 수십 배로 늘어날 수 있습니다. 이번 경우는 예외지만 주사기는 대부분 병원 밖에서의 사용이 문제입니다. 마약 등 약물 중독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 부산에서 C형 간염 환자가 많은 것도 국제 항구란 지역의 특성상 마약 사용자 비율이 높은 것으로 해석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사기는 일회용을 써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한때 B형 간염 환자가 국민병이라 불릴 정도로 창궐했던 이유도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을 대상으로 전염병 단체 접종을 하던 과정에서 지금처럼 일회용이 아닌 주사기로 수백 명을 찔렀던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침과 문신 침을 맞거나 피어싱 혹은 문신을 새길 때 반드시 바늘 등 시술 도구가 제대로 소독된 것이지 확인해야 합니다. 까다롭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말입니다. 이것은 환자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부분 일회용을 쓰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다른 사람을 찔렀던 도구를 나에게 찌르려 하는 경우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전남 진도에서 C형 간염이 전국 평균 5배나 많았다는 사실은 이들 도서 지역을 중심으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허술하게 침과 문신 시술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 해석합니다. 문신의 경우 도구만 소독해선 안 됩니다. 바르는 문신용 염색약에 바이러스가 묻어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바늘이나 침 등 도구를 일회용이나 소독된 것으로 사용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염색약도 일회용으로 조금씩 덜어서 사용하는 게 옳습니다. 이 부분은 보건당국이 좀 더 철저하게 감독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면도 이발소에서 면도를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대부분 안전합니다. 그런데 간혹 실수로 피부에 생채기가 날 수도 있습니다. 이때가 아주 위험합니다. 피부에 스며든 혈액이 면도날에 묻게 되는데 만일 이를 제대로 소독하지 않고 다음 손님에게 면도하다 또 생채기가 나면 감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달아 실수로 생채기를 낸다는 게 확률적으로 드물지만 얼마든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느 경우든 이발소의 면도기도 다른 손님에게 사용하기 전 철저하게 소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접촉 일상적 성접촉은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미국 질병예방통제센터는 배우자 중 한 명이 C형 간염이라도 다른 배우자가 콘돔을 써야 한다고 권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접촉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얌전한 성접촉은 괜찮습니다. 에이즈와 달리 정액이나 질액으로 옮길 확률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형적이지 않은, 그리고 다소 격렬한 성접촉 시 성기 점막의 상처를 통해 혈액이 묻어나올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실제 캐나다 보건성의 조사결과 20년 이상 부부생활을 할 경우 2.5%의 확률로 배우자에게 감염되는 것으로 밝혀진 바 있습니다. 가능하면 콘돔을 착용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섹스 파트너가 많다거나 항문성교 등 비전형적 성행위를 즐기는 경우 감염 확률이 급증합니다. 이 경우 콘돔 착용은 필수입니다. 특히 여성이 생리 중인 경우 성접촉은 하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해 안전합니다.
칫솔과 손톱깎이 감염자가 사용하는 칫솔과 손톱깎이를 같이 사용하면 안됩니다. 특히 잇몸 질환으로 구강 출혈이 있는 경우라면 칫솔로 인한 감염 확률이 급증합니다. 손톱깎이의 경우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손톱을 깎는 과정에서 생긴 피부의 상처를 통해 소량의 혈액이 묻어날 수 있습니다. C형 간염의 잠복기는 6주에서 9주로 보고 있습니다. 대개 C형 간염은 초기 증상이 없어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에게 피로와 입맛 떨어짐, 구역과 구토, 근육통과 미열, 소변 색깔이 진해지거나 피부와 눈이 노랗게 변하는 황달이 생긴다면 바로 병원에 가서 혈액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C형 간염 진단이 내려지면 나에게 6주에서 9주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따져보기 바랍니다.
증세가 늦게 나타나 진단이 뒤늦게 내려질 수도 있으므로 수개월 전까지 기억을 더듬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것이 주사기가 되었건 침이나 문신이 되었건 어떤 경로를 통해 나에게 다른 사람의 혈액이 섞여 들어왔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적절한 배상 등 개인적 억울함을 풀 수 있고 무자격이든 비양심이든 지금도 어느 곳에선가 C형 간염을 확산시키는 주범들을 색출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