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마음을 빈곤하게 만드는 요인은 상실이다. 가정과 사회에서 역할을 잃은 노인은 약해진다. 가까운 이의 죽음, 자녀와의 단절로 입은 상처를 쉽사리 치유하지 못한다. 건강을 잃을까 염려하고, 죽음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에 허무감을 느낀다. 상실을 앓는 시대, 노인을 진정 빈곤하게 하는 것은 텅 빈 잔고가 아닐지도 모른다.
故 오근재 전 홍익대 교수는 책 ‘퇴적 공간’에서 건강한 신체와 지적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 해도 노동시장에서 퇴출되면 한순간에 노인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고 설명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력을 내다 팔 수 없는 노인은 사회에서 ‘쓸모없는’ 취급을 받고 있다. 더 이상 사회와 가정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노인은 갈 곳을 잃는다. 교류할 이를 찾기 위해 매일 탑골공원에 출근도장을 찍지만 해소가 쉽지 않다.
농촌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정석철 노인심리상담사는 “고령화가 극심해지는 농촌에서는 특히나 외로움을 느끼는 노인이 많다”고 귀띔했다. 마을 사람 열 명 중 아홉 명은 노인이고, 60대가 ‘젊은 네가 마을을 위해서 힘써달라’는 부탁과 함께 청년회장이나 이장직을 맡는 실정이다. 그가 직접 방문해 상담하는 가정 중에는 일자리 찾아 도시로 떠난 자식들이 코로나19다 뭐다 바쁘다며 핑계를 대곤 연락조차 뜸한 집이 많다.
거동이 불편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고, 사회적 교류가 감소하는 시기. 노인의 텅 빈 마음에는 불안감 혹은 우울감이 쉽게 들어찬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도 아무 이상이 없는데 두통이나 소화불량 등을 호소한다. 치매가 아닌데도 기억력이나 집중력이 크게 저하되는 모습을 보인다. ‘가성치매’라 불리는 노인 우울증의 발현이다.
임현국 가톨릭대 여의도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어르신들이 소화가 안 되거나 변비가 생기는 등 이유 없이 몸에 크고 작은 이상 증상이 생겨 병원을 찾는데, 알고 보면 우울증 때문에 나타난 증상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 감정을 억제하는 데 익숙해지지만, 우울증으로 생기는 감정까지 억제하면서 몸에서 이상 증상이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질병을 일으키는 원리와 유사하다.
노인 우울증, 빠른 대처 필요해
노인 우울증의 무서운 점은 노인 스스로를 옥죄어올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이현숙 국립공주대학교 보건행정학과 교수팀이 한국노년학회지에 기고한 논문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은 우울증 같은 정신적 문제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가족 구성원과의 갈등, 재정적 문제, 육체적 질병이 그 뒤를 이었다. 60대 이상의 경우 신체적·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거나, 경제적·심리적 불안정 상태에 있고 가족 및 사회로부터 고립된 노인일수록 극단적 선택을 시도할 위험이 높았다. 그러므로 적절한 대처는 빠를수록 좋다.
노년기 마음 빈곤을 대할 때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하지 않는 자세다. 치부로 여겨 숨기거나, ‘늙으면 다 우울하지’ 하며 노화의 당연한 결과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수의 연구 결과가 노인 우울증을 제때 치료해야 노년기 삶의 질이 향상되며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신의학과 전문의를 찾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사회적 고립으로 고독한 노인들에게는 사람들과의 지속적인 교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회와 섞일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하다. 세대 불문 교류할 수 있는 주거지가 필요하다. 집 밖으로 노인이 나갈 수 없다면 사회복지사가 찾아 나서야 한다. 돌고 돌아 다시 노인 일자리, 부동산과 노인 복지 서비스다. 상실의 시대, 올겨울이 노인에게 더 혹독하지 않도록 심도 있는 고민을 해야 할 때다.
어릴 적 주입식 교육의 힘은 아주 세다. 우리 모두가 흔히들 아는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말고도 그 시절엔 각 지역의 특색이나 지역명은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지 않았나 싶다. 그중에 영주도 있었다. 영주라 하면 무조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부석사 무량수전이 따라붙었다. 강산이 무수히 바뀌고 세상은 달라졌어도 부석사 무량수전의 고장, 경북 영주다.
또는 영주 사과일까. 선비의 고장답게 사찰이나 서원은 당연하다. 추억의 풍경이 곳곳에 남겨져 있어 도심과 골목길에서 가슴 뭉클한 그리움도 솟는다. 그리고 무섬마을을 지키며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둘러보면 어디서든 수백 년 혹은 수십 년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영주 여행은 옛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해도 괜찮을 듯하다.
물 위에 뜬 섬, 무섬마을의 외나무다리
영주의 내성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너른 모래톱, 그 위로 S라인의 곡선이 길게 이어진 무섬마을 외나무다리의 풍경이 무심하다.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고 해서 무섬마을이다. 물 수(水), 섬 도(島). 수도리의 물섬이 무섬이 되었고,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가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준다. 외나무다리 저편으로 수도교라는 콘크리트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300년 넘도록 무섬마을과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이 다리였다.
홍수라도 나면 다리는 강물에 잠겼고 휩쓸려 내려가, 그럴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다리를 다시 놓곤 했다.
폭 20~30cm, 높이 60cm, 총길이 150m. 폭이 좁아 걸을 때면 아슬아슬해서 장대에 의지하기도 했다. 한 사람만 걸을 수 있는 폭이어서 예전에는 건너편에서 오는 사람이 보이면 지레 모래톱에 앉아 기다렸다고 한다. 지금은 외나무다리 중간의 몇 군데에 마주 오는 이를 피할 수 있는 ‘비껴다리’가 놓여 있다. 걷다가 어질하거나 자칫 기우뚱하다가는 물에 빠질 듯한 두려움도 생긴다. 다리 위를 걷는 발끝만 보며 걷다가 강의 물결에 취하면 낭패다. 그래서 강 건너를 잇는 이 다리는 그 옛날엔 시집올 때 가마 한 번 타고, 죽어서야 상여 타고 한 번 지나간다는 애환이 서려 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물돌이 마을, 무섬의 느린 시간 속에 잠겨 모래톱에 주저앉아 저편을 바라보면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랫빛…’ 이 노래가 절로 입안에 맴돈다.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운 외나무다리는 이제 영화나 드라마, TV 예능과 CF 등의 촬영지로 알려지고 있다.
잠시 숨을 고르며, 무섬마을
“십 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 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에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 시인 조지훈은 서울로 유학을 떠나면서 무섬에 남겨둔 아내와의 이별을 ‘별리’(別離)라는 시에 담았다. 조지훈 시인의 처가로 알려진 김뢰진 가옥은 마을 첫머리쯤에 있었다.
무섬의 집들은 새롭게 조성된 한옥마을과는 달리 늘 그 자리에 있던 풍경이다. 한때 100여 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50여 가구만 사는 작은 마을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무섬마을은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다. 우리나라에서 일곱 번째라고 한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선정되었다. 만죽재(晩竹齋), 해우당(海愚堂)을 비롯해 지정문화재가 10곳이고, 100년 넘는 고택도 그대로 남아 있다. 울 밑에 선 봉숭아도, 풀숲 가득한 곳에 피어난 들꽃들도 물씬한 그리움을 소환한다. 수백 년 켜켜이 쌓인 깊은 역사가 그대로 전해지는 옛집들이 고스란히 무섬마을이었다.
마을이 어찌 이리도 조용할까. 발소리조차 민망하다. 걷다가 호박이 매달린 담장을 향해 셔터를 누르니, 마당에서 일하시던 어르신이 “그게 뭐 볼 게 있기나 한가. 쓸데 있으면 그 호박 따가”란다. 그래도 되는지 싶어서 괜찮다고 하니 직접 두 개나 따주셔서 황송한 마음에 보물처럼 잘 모시고 왔다.
영주라 하면 부석사
유홍준 교수는 자연과 건축이 제자리를 지키며 조화를 이루는 최고의 문화유산 부석사는 그 어떤 표현으로도 나타내지 못한다고, 오직 한마디 위대한 건축이라고 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조선 땅 최고의 명상로’라 칭송한 부석사 당간지주 인근 은행나무 산책로는 여전하고, 그 길 위에서 홀로 명상에 잠겨볼 만하다.
천년고찰 부석사의 하이라이트 무량수전.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중 하나다.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그 앞으로 펼쳐진 백두대간 능선의 풍광에 넋을 잃어보는 것도 부석사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온통 경사진 경내를 돌기엔 다리가 뻐근하고 숨찰 때도 있다. 하지만 영주까지 와서 어찌 유구한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는 목조건물 부석사에 들지 않을 수가 있을까.
마음 내려놓고, 소수서원과 선비촌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공인된 사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인정받았던 곳이다. 조선 중종 때 주세붕이 세운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당시 향교나 서원은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해당되는 교육기관이다. 향교는 국립인 반면 서원은 사립학교라 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한 소수서원의 역사와 향기가 물씬하다.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때맞추어 선비 복장으로 글을 읽는 이들의 소리도 들을 수 있고, 하얀 고무신이 가지런한 그 뜰에 앉아 가만히 옛 선비들의 기운을 전해 받을 수도 있다. 선비교를 따라 너른 뜰을 지나면 선비촌으로 접어든다. 옛 선비정신과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고래등 같은 양반님네 고택의 안마당과 대청마루, 담 너머로 철 따라 피어나는 꽃들과 배롱나무, 그리고 강학 시설과 저잣거리도 조성되어 있어 옛 선비마을의 풍취가 가득하다.
오래된 골목길을 걷다, 근대역사문화거리
현대 일상에서 찬찬히 되돌아보기 좋은 곳으로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가 있다. 영주 원도심에 가면 근대 생활 모습과 건축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근대 산업 시기의 양곡가공업을 짐작해볼 만한 풍국정미소, 문을 밀고 들어가니 여전히 동네 주민의 머리를 깎고 계시던 80년 전통의 영광이발소, 몇 걸음 건너편에 고딕 건축양식의 영주 제일교회가 붙어 있고, 근대 시기의 주거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영주동 근대 한옥은 주변으로 풀밭이 무성하다.
또한 관사마을은 역사문화의 공간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에 영주-안동 간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고 철도 역무원들의 관사가 지어지면서 형성된 마을이 바로 이곳이다. 그래서 불리게 된 관사골은 반세기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칠이 벗겨지고 낡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일식 목조 관사 주택의 전형인 5호와 7호 관사를 볼 수 있었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니 집주인이 수리를 하는 중이다. 예전에는 집 안에 욕실과 화장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신기해하던 집이었지만, 근대 건축이라고 지정만 되면 뭐하냐 넋두리 한다. 낡고 헐어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수리를 할 수밖에 없다는데 곤란한 점이 많은 모양이다. 도시생활사적 가치가 크다지만 변화에 따른 관사골 주민들의 환경과 지속 가능한 삶의 여건도 염두에 둘 일인 듯하다. 그럼에도 낡은 지붕과 담벼락, 포도가 주렁주렁 달리던 안마당의 텃밭에서 정 깊은 추억이 솟는다. 관사골 저편 언덕 위로 부용공원이 내려다보고 있다. 흑백 필름 같은 풍경 속에서도 현재와 이어지는 스토리텔링은 계속된다.
섬이니까 늘 감싸주는 바다가 있다. 마을마다 바람막이처럼 산이 든든하다. 너른 평야는 풍요한 사계절을 보여준다. 긴 역사를 품은 유적과 숨 쉬는 자연의 강화 섬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거길 걷기만 해도 이름이 붙는 여행길이 반기는 곳, 강화 나들길이다.
강화나들길은 20개 코스가 있다. 여행자들을 위한 각 코스별 특색이 담긴 도보여행 길을 걷는 맛은 가히 중독이다. 무엇 하나 지루할 틈 없다. 코스마다 오랜 시간이 담긴 자연 속으로 사람이 걸어간다. 지형상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던 돈대와 유구한 역사 이야기, 고인돌이나 옛 건축물, 갯벌 위로 저어새가 나는 생태 이야기, 들녘의 바람길 따라 해가 지는 포구마을까지 이 땅의 멋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걸을 수 있는 도보여행 길이 펼쳐진다.
가을이다. 이번에는 강화나들길 16코스인 서해황금들녘길이다. 가을 길이라면 누렇게 곡식이 익어가고 갈대숲이 일렁이고 온 누리에 뿌려지는 가을 햇살과 기왕이면 시원한 바닷바람까지 불어주는 곳을 떠올려 본다. 그런 곳이 있을까 싶지만 이곳 서해황금들녘길이 가을 길로 딱 맞춤 코스다. 걸으며 강화 스탬프 투어를 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course16. 서해황금들녘길 -창후리 선착장- 망월돈대- 계룡 돈대- 용두레 마을- 황청 저수지- 망양 돈대- 외포 여객터미널 - 거리 13.5km / 소요시간 대략 4시간 / 난이도: 하
가을 하늘 아래 청정자연, 창후리 포구의 힐링
창후리 포구 가까이 갈수록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갯내음이 반긴다. 예전엔 강화의 교동섬을 가려면 이곳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이제는 2014년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왕래가 편리해졌지만, 창후리 앞바다가 삶의 터전이던 주민들에겐 뱃길이 끊겨 상권의 하락으로 이어진 것이다. 인적이 뜸해진 창후리 작은 포구엔 가을을 맞아 가게마다 갓 잡아 쏟아낸 생새우가 산더미였고 소금에 버무리는 풍경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다. 반쯤 물이 빠진 한적한 앞바다에서는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의 뒷모습만으로도 여유롭다.
황금빛 너른 들 따라 망월돈대와 계룡 돈대
가을 들녘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는 길이 눈앞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다. 넓디넓은 강화 들판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망월돈대와 계룡 돈대가 자리 잡았는데 그 길 끄트머리에 망월돈대가 있다. 하점면의 망월돈대는 드넓은 망월 평야 속에 놓여있어서 찾아가는 길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사실 망월 평야는 애초엔 바다였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 천도가 이루어졌고 갑작스러운 이주로 늘어난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바다를 메우기 시작했다. 망월 평야 역시 간척을 한 땅이다.
황금들녘을 마음껏 누리며 지나다 보면 가끔씩 도보여행자들이 좀머 씨처럼 묵묵히 걷는 걸 본다. 어쩌다 그 사이로 라이딩족들이 휙휙 지나가기도 한다. 논 옆으로 드문드문 정미소나 미곡창고와 같은 커다란 건물이 들녘의 풍경으로 한 몫 한다. 아예 들판에서 바로 탈곡을 하고 도정을 하느라 분주히 기계가 돌아가는 걸 볼 수도 있다. 강화의 너른 들판에서 밥맛 좋기로 이름난 강화 섬쌀이 이렇게 생산되는 것이었다.
망월돈대는 들판의 둑 옆으로 자리 잡았다. 대부분의 돈대가 약간의 높이가 있는 해안가의 언덕쯤에 놓인 것과는 달리 갯가 낮은 지역에 설치되었다. 외적이 수로를 타고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방비책이다.
가을에 망월돈대에 가면 강화의 가을을 모두 맛볼 수 있다. 들판은 물론이고 천혜의 갯벌이 어찌나 고스란한지. 그 갯벌 위로 꽃처럼 자라난 염생식물이 붉게 퍼져있다. 갈대와 가을꽃으로 뒤덮인 한적한 그 제방으론 도보 여행자들이 서너 명 걸어오는 게 보인다. 돈대 좌우로 만리장성이라 불리는 둑은 강화 나들길 16코스인 창후리 선착장과 황청리 용두레 마을로 이어진다.
멀지 않은 곳의 계룡 돈대도 들녘에 위치해 있다. 계룡 돈대는 망월 평야의 독립된 고지 위에 있어서 전망이 좋다. 현재 강화도에는 53개소의 돈대가 남아있는데 계룡 돈대는 조선 숙종 때 설치된 구조물이다. 돈대 위에 서면 양쪽으로 바다와 평야가 동시에 눈에 들어오는 조망이다. 바다에서 작업하는 어민의 모습과 갯벌 위 군락지를 이루어 피어난 붉게 물든 칠면초, 서해의 가을 풍경이 잔잔하고 평화롭다. 이곳에서 조금 전 망월돈대에서 만났던 일행들을 또 만났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인사는 즐겁다. 황금 들녘은 끝없고 길가에 지천으로 피어난 갈대와 들꽃은 반짝이는 가을볕에 더없이 예쁘다.
호젓한 마을에 잠기다, 용두레마을과 황청 저수지
할아버지들의 구수한 전승민요 용두레질 노랫가락이 들녘으로 퍼지고 예부터 맑은 물이 흘러 큰 인물이 난다는 용두레 마을, 주변으로 석모도와 서해가 보인다. 마을에서 보는 노을이 일품인 마을이다. 들판의 농로엔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몇 마리 학이 이삭을 쪼고 있다.
곧 이어지는 내가면의 황청 저수지는 낚시터로 조성되어 짜릿한 손맛을 즐기는 강태공들을 위한 좌대가 즐비하다. 깊은 산과 노송들로 아늑한 저수지 제방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을과 들판이 고즈넉하다.
언덕 위 숲 속 망양 돈대와 외포항의 갯내음
이제 강화나들길 16코스 서해황금들녘의 막바지다. 외포항을 내려다보는 곳에 세워진 망양 돈대는 고려 삼별초와 인연이 깊다. 역사적으로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를 예속화하려는 몽고의 정책과 종속적 위치로 특권을 유지하려던 일파들에게 항거한 병사들의 항쟁이다. 결국 진도로 떠나가는 것은 쫓겨가는 길이었고 거기서 다시 제주로 떠나면서 항쟁의 불꽃은 꺼져만 갔다. 그렇게 삼별초가 떠났던 외포항에 400년이 넘어서 들어선 돈대가 망양 돈대다.
망양 돈대 오르는 길에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라고 새겨진 삼별초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뒤에는 비석을 세운 취지가 새겨져 있다. 그 옆으로 제주와 진도를 상징하는 돌하르방과 진돗개 조형물이 우뚝하다. 진도군이 삼별초 호국 항몽의 역사를 바탕으로 자매결연을 맺고 진도군민이 진돗개상을 기증했다.
유허비 뒤편 경사진 언덕길을 올라가면 정사각형에 가까운 널찍한 망양 돈대가 숲에 둘러싸여 있다. 이제 외침의 불안 따윈 없지만 역사적 의의를 알게 하는 돈대와 강화나들길의 의미를 이렇게라도 되새겨 본다. 그 옛날 삼별초가 출항했던 물 빠진 앞바다에 갈매기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돈대 저편 외포항 바닷가 마을엔 오늘을 살고 있는 여행자들이 오간다. 선선한 가을을 맞아 해산물과 젓갈을 찾는 이들로 외포리 수산물 직판장이 분주한 모습이다.
새소리 바람 소리를 들으며 들녘을 걷고 살아있는 갯벌을 곁에 둔 생태마을을 지났다. 가끔씩 바다와 논둑 사이 풀숲에 앉아 몸과 마음을 열고 자연과 소통을 하던 한나절, 강화의 자연이 나를 보듬어주고 역사가 말을 건네 오던 시간들. 오롯하게 강화를 만끽할 수 있는 하루다. 창후리 여객터미널부터 외포 여객터미널에 이르는 비순환형 강화나들길 16코스 서해황금들녘길의 종료 스탬프를 찍는다.
별은 어둠 속에서 더 또렷하다. 광공해가 없는 맑은 대기여야 선명하다. 그러기에 도심에서 반짝이는 별을 보기는 쉽지 않다. 첨단의 문명이 별 보기를 더 어렵게 만든 셈이다. 별 볼 일 없는 세상이란 말, 따지고 보면 초고도 현대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팍팍해진 세상에서 별 볼 일을 찾아 떠나보는 일, 해볼 만하다.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과 태백시 경계의 함백산. 서울에서 밤 10시에 출발하면 새벽 2시 무렵에 도착한다. 산 정상 가까이 자동차로 접근할 수 있어서 야간 산행의 난이도는 어렵지 않게 적응된다. 하지만 일부 걸어서 올라가는 산길은 경사가 가파르다. 숨차게 1572m 정상에 오르니 한낮의 날씨는 간데없이 뚝 떨어진 기온에 한기가 온몸을 휩싼다.
별이 빛나는 밤에
발아래로 굽어보는 세상, 멀리 낭떠러지 같은 산 아래로 가끔씩 밤길을 달리는 자동차 궤적이 빛을 낸다. 산꼭대기 봉수대 아래의 고사목 앞에서 바라보는 산의 웅장함. 숲 내음과 눈앞에 펼쳐진 산세에 놀라고, 흐르는 은하수를 보며 전율할 수밖에 없는 밤 풍경이다. 함백산은 하늘과 가까이 맞닿은 곳에서 별을 관찰할 수 있다. 이윽고 별이 지고 나면 산등성이 사이로 멋지게 밝아오는 여명을 맞을 수 있는 산이다.
완벽한 어둠 속에 서서 바라보는 밤하늘. 하늘이 이렇게나 넓었던가. 이 우주 안에서 작아진 자신의 모습을 단박에 확인한다. 쏟아질 듯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검푸른 하늘에서 별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고도가 높은 산 정상에서 육안으로 올려다보는 별, 비로소 우주와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이젠 신화 속의 별자리를 찾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별 궤적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붙잡고 조급해하거나 연연하지도 않는다. 머리 위로 별을 가득 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주 어린 시절 여름이었나. 저녁을 먹은 뒤 마당에 자리를 펴고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아득한 기억이 있다. 그때 어린 눈에 들어오던 또렷한 별들이 선명히 기억난다. 어릴 적 집 앞마당에서 올려다보았던 별을 어른이 되어 이렇게 멀리 달려 나와 밤하늘의 보석을 대하듯 감탄하면서 마주한다. 밤바람이 차서 미리 준비한 두꺼운 겨울 패딩에 털장갑을 끼고도 몸이 떨리는 산중의 밤이다. 추위 속에서도 스스로 들떠서 행복하다.
어느 순간 서서히 어둠이 걷히는 게 느껴진다. 여명의 신비로움에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건 당연하다. 운해 위로 불그스레 조금씩 떠오르는 일출이 물들이는 세상, 저 아래로 굽어보는 능선 사이사이 스며드는 운해, 온 산하에 여명이 번지는 뭉클한 순간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가히 선계의 풍광이다.
바람을 맞으며 밤을 보낸 눈앞의 고사목은 얼마나 무수한 일출을 마주했을까. 빳빳하게 선 채로 생명의 힘을 그대로 전한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더니 저 나무는 지금 어느 세월쯤에 있는 걸까.
천상의 화원 만항재
폐부 가득 새벽 찬 공기를 담고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뿌듯하다. 하룻밤의 꿈이었던가. 추위 속에 떨면서 밤을 새우며 바라본 은하수와 별, 세찬 밤바람도, 운해와 여명도, 함백산의 능선도, 아름다운 일출도, 대자연의 선물이다. 선물을 가슴 가득 안고 내려온 함백산의 새벽길. 밤새워 별을 보고 차 안에서 꾸벅꾸벅 쪽잠을 잘지언정 내내 잊지 못할 밤마실이다.
함백산의 만항재는 조선 초기 고향을 떠나 산속 깊은 곳에 터전을 잡은 옛 고려인들이 고향에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원했다는 ‘망향’에서 유래한 어원을 지닌 고갯길이다.
이 지역은 강원도 정선, 고한, 영월, 산동읍과 태백시를 잇는 지점이다. 우리나라의 포장도로가 놓인 길 중에서 자동차로 달릴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다(1330m). 그래서 드라이브의 재미와 함께 깊은 자연 속의 풍성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만항재는 천상의 화원으로 알려져 있듯이 울창한 산림이 자연스럽게 우거져 있다. 매해 우리나라 최대의 야생화 축제가 열릴 정도로 야생화 천국이다. 산상의 꽃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자연의 기운을 듬뿍 얻는다. 희귀한 야생화와 풀꽃들이 지천이다. 특히 호랑나비, 산제비나비 등 예쁘고 다양한 나비가 많아 어디서나 나비의 날갯짓을 본다. 때 묻지 않은 빽빽한 숲 그늘에 파묻히는 기쁨을 마음껏 누린다. 원 없는 ‘숲멍’의 시간이다. 넉넉한 마음으로 편히 한나절 쉬어가도 좋을 청정 자연이다.
숨 쉬는 다리, 영월군 주천리 섶다리
산으로 둘러싸인 맑은 물이 흐르는 마을에 추수가 끝나는 늦가을이면 매년 다리가 놓이곤 한다. 여름에 물이 불어나 떠내려갈 때까지 사용되는 다리. 영월군 주천리 판운면에 가면 건너보고 싶은 섶다리가 있다. 강을 사이에 둔 밤뒤마을과 건너편 미다리마을의 왕래를 이어주는 정겨운 전통 다리다.
통나무로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참나무와 소나무 가지를 얹어 진흙으로 만들었다. 섶다리 위로 발걸음을 옮기면 약간의 흔들거림과 탄력적인 푹신함이 전해진다. 요즘 곳곳에 유행처럼 만들어지고 있는 출렁다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옛 맛의 신비한 감흥이다. 잔잔한 주천강을 건너 섶다리를 향해 앉아 느긋한 한낮, 잠깐이나마 아날로그 감성에 빠져보는 시간이다. 마을 옆으로는 한낮의 햇살이 쏟아지는 밭고랑 사이마다 농작물들이 여물어간다.
예전의 산천을 그대로 간직한 시골 마을에서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유유자적한 기분, 세상 부러울 게 없다. 몸의 감각을 되찾고 편안하게 마음 정리할 만한 곳이 바로 여기구나 싶다. 은은하고 따사로운 볕에 빛나는 시골 풍경이 아스라하다. 돌아오는 길에 섶다리에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이상한 바위들의 모임, 요선암도 그냥 지나치면 섭섭한 곳이다.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 요선암 앞에 서면 마치 공룡 시대에 온 듯 신비롭다.
하루나 이틀쯤 깊은 자연 속으로 들어가 보는 일. 살면서 가끔은 자라고 싶은 대로 자라는 야생 식물들의 풍경에 취하고 산꼭대기의 운무에 마음을 빼앗겨볼 만하다. 하루 이틀로 도시의 때가 벗겨질 리 없지만, 물질과 소유욕에 잠식당한 현실에서 잠깐 떨어져 나올 수 있는 기회다. 속세를 떠난 듯 일상을 잊어보는 시간, 자연의 따뜻한 본성을 만나고 오면 새록새록 가슴을 두드리며 알려준다. 이 땅의 깊숙한 곳으로 찾아가는 일은 이토록 근사하다는 걸.
간밤에 내린 비로 배롱나무꽃이 많이 떨어졌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꽃을 보기란 참 애매하다고는 하나 배롱나무는 가을의 문턱을 넘었어도 붉은 꽃을 보여준다. 요즘 하는 말로 핫핑크 색감이다. 땡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어나기 시작해서 가을까지 피고 지는 식물, 강한 생명력으로 더위에 지친 이들에게 화려한 꽃 호강을 선사한다. 배롱나무꽃을 보려거든 서천이다. 서천의 해안도로를 달리면 배롱나무꽃 길이 우리를 맞아주고 전통 건축과 어우러진 꽃 무리가 운치를 더한다.
빗소리는 주룩주룩 빈 당에 가득한데 / 낮 꿈을 막 깨고 나서 붓을 바삐 찾노니 / 마음이 맑아 절로 사사로운 뜻 없는지라 / 더위 한 번 식혀준 은혜 하늘에 감사하네.
고려 삼은 중 한 분인 목은(牧隱) 이색 선생의 시를 찾아보았다. 충남 서천의 문헌서원은 목은 이색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은 곳이다. 기록에 따르면 창건 연대는 1594년이고 당시 이름은 효정사였다. 그 후 정유재란으로 소진되었으나 이전하여 광해군 때 문헌(文獻)이라 사액받았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고종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졌으나 뜻있는 유림들이 복설하였고, 문헌서원 역사마을 조성사업에 따라 현재에 이르렀다.
배롱나무꽃과 함께하는 서원의 품격
서천 솔바람길을 따라 이색 선생 동상이 보이는 정원이 평온하다. 서원의 홍살문을 넘으면 연지 위 경현루의 반영이 잔잔히 흔들린다. 예스러움이 은은한 연못은 배우 박보검이나 유아인이 드라마와 영화를 촬영하던 곳이기도 하다.
널찍한 잔디밭을 걸어 외삼문인 진수문과 정면의 진수당에 들면 양쪽으로 유생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 잡고 있다. 문헌서원(文獻書院)이라는 현판은 진수당 마루 안쪽으로 걸려 있어 들여다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뒤편 돌계단으로 오르면 떡하니 장판각이 중심 잡듯 위치한다.
담장 따라 효정사, 교육관, 영모재, 그 길 안으로 목은 선생의 영정을 보관하는 영당(影堂)을 따로 앉혀 아늑하다. 이색의 선비 정신과 성리학, 그리고 풍류가 깃든 기린산 중턱의 묘소를 바라보며 세월을 거슬러 보는 시간이다. 산수 좋은 수려한 자연 속을 산책하다 보면 옛 어른의 멋과 정취, 정신과 자연관의 교감에 빠진다.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힐링 여행지다. 숲이 감싼 산줄기 뒤편으로 선비의 기개를 닮은 듯 쭉쭉 뻗어 울창한 소나무가 든든하다.
바로 영당 뒤편 노거수 두 그루에서 해마다 여름이면 배롱나무꽃을 풍성하게 피워 올린다. 전통 건축의 지붕 위로 진분홍 배롱나무꽃 무리가 몽글몽글하다. 지난밤의 비바람으로 이미 많은 꽃이 떨어졌지만 배롱나무의 강한 생명력은 계속 이어진다. 아무리 꽃이 붉어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대단한 권력 또한 1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부귀라는 꽃말의 배롱나무꽃은 7~9월까지 계속 꽃을 피워서 백일홍 나무라고도 불린다. 무려 석 달 열흘 동안 피어나니 비바람에 꽃을 좀 떨구었기로서니 그저 슬플 일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지지대에 의지한 채 노구를 딛고 서서 해마다 꽃을 피워내는 문헌서원의 배롱나무를 본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충분하다.
문헌서원 옆 전통 한옥 숙소
이렇게 고즈넉한 곳에 짐을 풀고 하루나 이틀쯤 쉬며 돌아보는 소도시 여행은 휴식이 된다. 하룻밤 묵어갈 숙소로 문헌서원 전통호텔이 서원 입구에 있다. 정부와 서천군의 전통역사마을 조성사업계획에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지은 우리나라 고유의 한옥마을 형태다. 나무를 이용한 서까래와 온돌, 돌을 이용한 기단, 문풍지가 정겨운 두 겹 곁문을 열면 친환경자연 속에 스미듯 지은 옛 가옥의 따스함이 다가온다. 안온하게 스며든 햇살을 받으며 툇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거나 가만히 쉴 수 있는 시간은 가히 ‘득템’이다.
한옥 스테이를 할 경우 미리 예약하면 식사도 가능하다. 문헌 전통 밥상은 모두 지역 제철 농수산물을 사용해 만든 신토불이 건강식이다. 상쾌한 새벽 산책 후 한옥 마당을 내다보며 받는 소박하고 정갈한 아침 밥상은 추천할 만하다.
한산 모시와 소곡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산 모시 짜기. 전통의 맥을 잇고자 서천에서는 모시풀을 처음 발견한 건지산 기슭에 한산모시관을 개관했다. 모시관 담장 아래 푸릇하게 자라고 있는 모시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전시관에서 모시의 모든 것을 관람한 후, 모시 체험과 중요무형문화재 전통직조기능 보유자의 시연 공방도 볼 수 있다. 모시 짜는 여인상이 있는 정원 아래 너른 마당에서는 여행자들이 투호 던지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옛날 백제 유민이 나라를 잃고 한을 달래기 위해 빚어 마신 백제 궁중 술이라고 전하는 한산 소곡주. 보통 추수가 끝난 가을에 빚어서 100일 동안 땅에 묻는다. 술이 독해서 며느리가 젓가락으로 찍어 맛보면 취해서 일어나지 못하고 앉아서 엉금엉금 긴다는 일화는 물론, 조선 시대에 과거 보러 가던 선비가 한산에서 쉬다가 술맛에 눌러앉아 과거 시험장에 가지 못했다 하여 앉은뱅이 술이라고도 전해 내려오는 소곡주다. 취해도 좋을 가을이다.
솔바람 숲 맥문동과 서해 갯벌
다시 꽃구경, 서천의 장항 쪽으로 달리다 보면 장항 송림 산림욕장이 나타난다. 방풍림만으로도 압도한다. 수령 50년 이상 된 해송이 하늘을 가려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여름이 끝날 무렵이면 해송 아래 온통 보랏빛 맥문동 물결이다. 이곳에 오토캠핑장이 있어서 공기 밀도 걱정 없이 휴식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유롭다.
해솔밭 산책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기벌포 장항 스카이워크 전망대가 바다 위로 우뚝하다. 15m 높은 상공에서 시원한 바닷바람 맞으며 상쾌한 시간 속에 서는 것은 멋진 일이다. 이곳 이름이 기벌포 해전 전망대인데 백제의 마지막 해전지였다. 발아래로 해송림이 있고 눈앞에는 서천 바다 갯벌이 있다. 멀리 서해 근대산업의 중흥을 이끈 장항제련소도 보인다.
레트로 장항 골목 여행과 서천 맛집
옛날 기찻길을 지나 장항 골목 여행의 묘미도 쏠쏠하다. 편하게 레트로 흐름대로 놀거나 시대극처럼 양산 예쁘게 쓰고 느린 감성으로 즐기는 여행도 어울릴 듯한 곳이다.
장항에 맛집들이 즐비한 6080 음식 골목 맛나로(路). 특히 홍어탕과 아귀찜이나 탕으로 유명한 식당이 몇 군데 있으니 그중에서 끌리는 곳으로 들어가면 바로 맛집이다. 탕에 향긋한 미나리가 푸짐하다. 식사 후 맛나로 옆 골목을 걷노라면 레트로 분위기가 솔솔 난다. 라테 위에 달고나 듬뿍 얹은 달고나 라테를 먹을 수 있는 명물 카페도 빠뜨릴 수 없다. 때에 따라 체험도 가능하다. 지역의 젊은 청년들이 지역사회 살리기를 위한 건강한 일꾼 역할을 자처했다.
서해 바다를 바라보며 즐길 수 있는 전통 횟집 또한 장항 부근에 많다. 매일 공급되는 제철 해산물을 이용해 고급스러운 코스 요리를 합리적인 가격에 맛볼 수 있다. 소박한 물회 한 상으로도 바닷가 식사를 만끽할 수 있다. 이제 홍원항 전어가 제철이다.
니스에 머물면서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 중에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모나코와 칸이 있다. 버스나 지하철로 한 시간 이내면 모두 가능한 거리여서 누구나 당연히 여행 코스에 넣지 않을 수 없다. 꼭 니스가 아니어도 근교의 생폴드방스나 에즈빌리지에서도 연결되는 교통편이 있으니까 알뜰한 여행으로 즐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니스 일주일 살기가 끝나간다.
◇모나코(Monaco)
모나코에 대해서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밖에 아는 게 없다고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부터 그레이스켈리의 모나코에 간다는 기분이다. 모나코행 버스 타는 곳에 기다리는 줄이 의외로 길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30분쯤 달린 버스 차창 밖으로 도시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마치 서울에서 시외버스 타고 가까운 수도권 도시 어드메쯤 온 듯하다. 니스 역에서 기차를 타도 30분 남짓 가까우니 잠깐 교외 나들이 나온 듯하다. 그러나 관광 국가답게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움과 넘치는 볼거리가 금방 압도한다.
여긴 미국의 영화배우에서 모나코의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의 모나코다. 모나코는 국경선 길이 4.4㎞, 면적 1.95㎢., 로마 바티칸시티(0.44㎢)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 소국이다. 1297년 1월 8일에 독립한 나라로 프랑스 남동부 끝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있다.
버스에서 내리면 몬테카를로가 가깝다고 했지만 일단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몬테카를로...”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환하게 웃는 얼굴로 “저쪽으로~”라고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킨다. 이들의 당연한 손짓이 이 작은 나라의 주 수입원이 국제 중계무역과 카지노 산업이라더니 이렇게 체감시킨다. 몬테카를로로 가는 길에 있는 열대 정원 Jardin Exotique에는 주민인듯한 사람들이 산책하거나 벤치에 앉아 휴식 중인 모습이다. 몇 걸음쯤 더 걸어가니 오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카지노 몬테카를로(Casino De Monte-Carlo)가 보인다. 그 옆의 노천카페엔 모나코를 즐기는 모습의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게 뭐라고 무수한 저들은 이곳에 모여드는 걸까.
도박을 하는 건축물이라고 하기엔 고풍스럽고 우아하다. 파리의 오페라 극장을 설계했던 샤를 가르니에가 설계한 덕분에 고급 사교장 느낌이다. 카지노 앞에는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고급 자동차 전시장처럼 번쩍거리는 차들이 잔뜩 주차되어 있다. 이곳 카지노에서 나오는 수익금은 모두 국가의 재정이 되고 중요한 관광산업으로 관리된다. 세계적인 부호들이 오가는 곳이다 보니 럭셔리하고 화려함이 더해진다. 아이러니한 점은 모나코 국왕에 의해 모나코 국민들의 도박 행위는 금지되어 있다. 또한 병역과 세금이 없는 나라다. 그래서 세금을 피해 이주해온 부자들 덕분에 유난한 사치스러움을 어디서든 볼 수 있다.
시내 전체가 관광지화되어있어서 지나가는 누구나 여행자 같아 보인다. 휴양도시인 모나코의 풍족한 삶을 보여주듯 카지노 주변엔 일반 가게처럼 쇼핑센터나 명품샵이 즐비하다. 유명 브랜드의 스포츠카가 내 옆을 계속 지나간다. 어쩐지 도박장 귀빈들의 거리로 특화된 양 요란하다. 볼거리 놀거리를 위해 만들어진 듯한 풍경이다.
우리가 태어나 세상을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또는 아프거나 뿌듯해하며 기쁘고 성내고 노력하며 산다. 그런데 그런 당연한 일상을 모르는 사람들의 놀이터에 온 느낌이다. 그런 곳을 대충 챙겨 입은 여행자의 모습으로 심드렁하게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다. 느슨하게 온 몸의 긴장을 풀고 그렇게 어슬렁거리는 맛을 즐긴다.
모나코 사람들을 먹여 살려주는 카지노였기에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 나라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 Grace Kelly뿐이다. 모나코의 유일무일한 브랜드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의 왕자 레니에 3세와 결혼하여 영화 같은 인생을 살았던 그녀다. 전설의 허리우드 여신에서 모나코의 왕비가 된 것이다. 모나코의 상징이기도 했던 그녀의 나라에 와 있다.
구시가지 언덕에 위치한 그녀가 살았던 화려한 모나코 궁전을 바라보며 살짝 가슴이 뛰기도 했다. 어릴 적 TV 명화극장에서 자주 보았던 그녀의 영화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려졌기 때문이다. 해안가의 거리에도 바닷가 미풍에도 그녀의 삶이 녹아있을 것만 같았다. 절벽의 절경에 잘 앉혀져 있는 이쁜 집들, 에흐귤르 항구에 가득하게 정박해 있는 고급 요트, 궁전과 대성당이 있는 구시가지를 지나 해양박물관도 볼거리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모나코 빌리지의 골목까지 걸어볼 수 있다면 아쉬울 게 없다. 해안가로 나와 눈앞에 펼쳐지는 도박꾼들의 화려한 요트로 가득 찬 항구를 멍하니 구경하다 보면 하나둘씩 가로등이 켜지고 지중해 저편으로 서서히 노을이 찾아온다. 어릴 적 알았던 영화배우의 나라에서 확인하듯 내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잠깐 머물다 온 ‘그레이스 켈리의 나라’ 모나코였다.
◇칸(Cannes)
일주일 동안 머물며 여유롭게 지내던 니스를 떠나는 시간이 오후 네 시다. 느슨하게 반나절 시간을 칸에서 보내고 출발하기로 했다. Nice Ville에서 Ter기차를 타고 열 정거장쯤 지나면 Cannes 기차역에 30분 만에 도착한다. 호기심과 신기함과 설렘으로 보내기 딱 좋은 30분이다. 기차 2층 칸에서 보이는 외곽의 풍경이 마치 서울을 벗어난 지하철 1호선 같다. 아침햇살이 쏟아지는 칸느역에 오가는 사람들. 긴장감이라곤 일 그램도 안 느껴지는 모습들. 여행 중엔 이런 모습을 부러워할 틈 없이 바로 전염되듯 나 역시 빠르게 긴장감 풀고 무장해제~.
지중해에서 가장 화려한 휴양도시 CANNES. 남국의 화려한 꽃과 달콤 새콤 향의 과일들이 길거리로 나오고 사람들은 어디든 마음대로 걷거나 주저앉거나 세상 편함 그 자체다. 칸느 영화제가 열리는 팔레 데 페스티벌이란 건물이 앞에 있다. 매년 5월이면 영화 축제가 열리는 곳, 세계 3대 영화제라 불리는 칸느,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 중의 하나인 Cannes 국제영화제는 우리에겐 이미 익숙하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배우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레드카펫을 밟고 들어가는 길엔 공사가 한창이다. 전도연이 영화 '밀양'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곳을 그렇게 쓰윽 한번 보며 지나간다. 올해는 박찬욱 감독이 감독상을 송강호 배우가 남우주연상도 탔다. 영화 배경 속을 걷듯 칸의 햇살 속을 걷는다. 세계적인 영화인들의 숨결을 느껴보는 시간 또한 즐겁다. 종려나무들이 즐비한 해안가에서 느긋하게 놀아보라. 해피바이러스는 이런 것이란 걸 알게 된다.
해안가로 나가보면 햇살 쏟아지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수많은 고급 휴양 요트들이 줄지어 있다. 지중해에서 가장 럭셔리하다더니 요트의 화려함이 아찔하다. 쏟아지는 태양, 짙푸른 바다가 마냥 눈부시다. 어딜 보아도 여유가 뚝뚝 떨어지는 풍경이다. 도무지 다른 세상이다. 이 도시는 사실 영국과 이탈리아를 오고 가던 유럽 사람들이 별장들을 세우고 요트들로 항구를 오고 가며 휴양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곳 역시 호텔과 카지노가 많아서 프라이빗한 휴가를 즐기거나 돈 많은 도박꾼들을 기다리는 곳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길거리 노천카페는 이미 테이블 세팅을 마쳤다. 칸느 역 주변으로 앙티브 거리(Rue d’Antibes)는 내가 보아도 알만한 명품 브랜드들이 줄줄이 있다.
프랑스 남부의 지중해 도시 칸. 도시 전체에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살에 몸을 내맡기고 카푸치노 한 잔 마신다. 지중해를 향해 앉아 그 햇살 한 번 원 없이 받아본다. 환한 태양 아래서 마음껏 누리던 사람들이 기억될 칸(Cannes)이다.
O₂, 산소, 원자 번호 8, 화학 산소족에 속하는 비금속 원소, 공기의 주성분이면서 맛과 빛깔과 냄새가 없는 물질. 호흡과 동식물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기체라는 사전적 의미의 산소. 강원도 홍천에 산소길이 있다. O₂길. 마스크 때문에 마음껏 숨 쉴 수 없어 미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수타사 산소길이 떠올랐다.‘그래 이번에는 산소길이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다.
홍천의 수타사 산소길은 1~4코스로 총 4개 코스가 있다. 수타사 산소길을 걷는다고 하면 대부분 1코스를 말하는데, 수타사 주차장에 주차하면서부터 걷기가 시작된다. 인근에 오토캠핑장까지 있어 주말 여행지로도 손색없다. 공작산 생태숲 산소길 코스는 3.8km로 ‘공작산 생태숲 교육관-수타사-공작산 생태숲-귀소(출렁다리)-용담- 공작산 생태숲 교육관’이다. 걷기에 따라 1~2시간 정도 걸리지만, 수타사 경내를 천천히 돌아보고 숲길을 걷다가 쉬다가 느긋하게 숲멍도 한다면 3시간도 금방이다. 참 여유롭게 돌아보는 산소길 트레킹이다.
눈을 들어보니 해발 887m의 공작산이 날개를 펼친 듯 에워쌌다. 깊은 골짜기 위로 봉우리들이 겹겹이 솟은 모습이 공작새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 공작산은 우리나라 100대 명산 중 하나다. 그 산 아래 수타사 가는 길이 반기듯 쭉 뻗어 있다. 산소길 초입에 천년 고찰 수타사의 품격을 거친다는 것, 시작부터 차분히 숨 고르기를 시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수타사는 신라 성덕왕 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창건 당시에는 우적산 일월사(日月寺)였다가 공작산으로 옮기면서 수타사(水墮寺)로, 다시 새 한자인 수타사(壽陀寺)로 바뀌었다. 수타사 옆의 용담에 매년 승려들이 빠져 익사하는 사고가 잦아 목숨 ‘수’(壽)로 바꾸었다고 한다. 예스러움이 물씬 전해지는 절의 분위기가 꾸밈없이 단아하다. 옛 모습을 품고 있는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에서도 위엄을 보여준다. 한나절 푹 퍼질러 앉아 목탁 소리 들으며 쉬면 좋을 깊은 산속 절이다.
수타사를 나오면 바로 공작산 생태숲이다. 생태숲 자리는 예전 수타사에서 경작하던 논이었는데, 이제는 동식물의 서식 환경을 보호하고 다양한 생태체험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생태연못 탐방로로 온통 연잎으로 뒤덮인 연밭이다. 그 사이로 놓인 부드러운 곡선의 데크 위를 걷는 이들의 풍경이 그림 같다.
산소길은 대부분 흙길이다. 숲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깊은 숲속이다. 오래된 홍우당 부도가 숲길 옆으로 자연스럽게 나란하다. 부도는 부처나 승려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 탑이다. 그 길을 지나면 정말 빽빽한 숲속이다. 폭도 좁아서 나란히 걷기보다는 홀로 걷기 좋으니 숲을 자연스럽게 즐기면 된다. 막상 숲에 들어서면 마치 밀림에 온 듯 오래된 숲속 풍경에 놀란다. 얼기설기 나무줄기가 양쪽으로 서로 얽혀 고개를 숙여 지나가야 하고, 빼곡한 나무 사이로 하늘이 빼꼼히 보이는 것 또한 깊은 산중에 파묻혔음이 느껴진다. 걷기 좋은 완만한 오솔길이 계속 이어진다. 어느 순간 새와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자연 속에 내가 있다. 짙은 풀 냄새가 나를 둘러싸고, 비로소 마음껏 숨을 쉴 수 있다. 초록이 가장 초록다운 숲이다. 싱그러움이 가슴속 가득 찬다. 역시 산소길이다.
수타사의 산소길은 인근 마을 사람들이 오가던 길이었다고 한다. 홍천 읍내로 장 보러 가던 길이었다. 그 길을 걷다가 쉬어 가라고 쉼터가 있지만 힘들 것 없으니 그냥 계속 천천히 걷게 된다. 신봉마을을 반환점 삼아 돌며 시골 마을의 평온함도 얻는다. 수타사 계곡이 흐르는 출렁다리 소 구간에서 물소리 들으며 멍하니 쉬면 된다. ‘’은 소나 말 등의 가축에게 먹이를 주는 여물통인 구유를 뜻하는 강원도 방언이다. 계곡이 마치 구유처럼 생겼다 해서 소라 불린다.
나무가 바람에 사사삭 흔들리는 나즈막한 소리, 계곡의 물소리, 새소리, 숲 내음, 흙 내음, 초록의 색감만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다. 한참을 걸었어도 가뿐하다. 후텁지근하고 끈적이던 더위도 잊었다. 숲이 깊어 햇빛도 저만치에 있다. 산소길에선 다만 마음껏 숨 쉬고 청량한 산속의 운치를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초록을 실컷 눈에 담았다. 천천히 한숨 돌리며 용담에 다다르니 계곡 쪽으로 다가가지 못하도록 줄을 이어놓았다. 바위와 물의 깊이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예부터 용이 승천했다는 용담은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 넣어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메워져 평범한 소(沼)의 모습이다.
운동화를 툭툭 털며 산소길을 내려가다 옆길로 고개를 돌려보니 산림치유쉼터의 숲속에서는 동네 어르신들이 그야말로 신선놀음 중이시다. 하늘 높이 치솟은 나무 숲속에 쉼터와 명상 공간이 마련되어 시원하고 건강하게 여름을 나는 모습이다. 어딜 보아도 산소 뿜뿜. 보는 사람 마음도 시원하다.
홍천의 자랑,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홍천을 다녀보면 무궁화 꽃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마을길에서도 볼 수 있지만 무궁화공원, 무궁화테마파크, 무궁화수목원, 체험관 등 온통 무궁화 꽃 도시다. 이는 홍천군이 우리나라 무궁화 메카로 선정되어 무궁화의 위상을 널리 알리고자 조성됐기 때문이다. 무궁화 명소인 홍천의 무궁화수목원을 찾았을 때는 꽃이 한두 송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무궁화수목원은 국내 최초로 무궁화를 테마로 조성한 공립수목원으로, 독립운동가 남궁억 선생의 무궁화 사랑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각 테마별로 남궁억 광장, 무궁화 조형물, 품종원, 미로원과 16개의 주재원을 비롯한 숲속 산책로, 숲속 도서관 등 즐길거리가 마련돼 있다. 특히 무궁화가 한창 피어나는 8월에는 ‘나라꽃 무궁화 홍천 축제’가 열려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무엇보다 수목원 입구에 길게 이어지는 280m 산책로 끄트머리에 위치한 무궁화(Rose of Sharon)의 집이 연출하는 풍경이 시선을 끈다. Rose of Sharon. 서양 사람들은 무궁화를 이렇게 부른다. 샤론의 장미는 성스럽고 선택받은 곳에서 피는 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나라꽃이 우리 민족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희망의 빛이 되기를 소망했다는 설명이다.
무궁화의 집을 둘러싼 푸른 들판엔 코스모스가 자라고 있었다. 무궁화와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난 들판의 풍경은 홍천의 핫플레이스 예약이다. 현재 야간 경관 조명으로 은하수 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 연출되어, 데이트 커플들이 찾아오는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오르는 곳이다.
홍총떡과 올챙이국수
홍천의 맛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저렴하면서 맛도 좋은 서민 음식 홍천메밀총떡(홍총떡)은 시장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다. 홍천의 메밀로 만든 반죽을 얇게 부쳐서 준비한 소를 넣고 드르르 만 홍총떡은 홍천의 대표 향토음식이다. 구수하고 개운한 김치나 무채 양념의 순한맛과 매운맛, 강원도 제철 나물이나 시래기를 넣은 나물맛으로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홍천중앙시장에 가면 총대를 닮아 총떡이라는 홍총떡과 메밀전, 올챙이국수 등을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다. 또 한 군데, 전직 청와대 셰프가 운영한다는 음식점에서 명태회막국수와 낙지만두도 먹어볼 만하다.
홍천 여행
수타사 산소길 : 강원도 홍천군 영귀미면 덕치리 5-3
교통 : 수도권 기준 자동차로 약 두 시간. 대중교통-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홍천종합버스터미널까지 약 한 시간 반 소요
홍총떡 : 홍천중앙시장 및 홍천 각 관광단지에서 판매. 홍천 오일장 1, 6일. 장날 아니어도 홍총떡은 영업 중
남프랑스 니스에서 일주일 살기
어느덧 니스에서 일주일 살기도 중반을 넘어간다. 니스에서 10km 남짓 떨어져 있는 자그마한 중세마을 에즈 빌리지를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날이다. 아침부터 하늘이 유난히 눈부시게 새파랗다. 니스의 숙소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 역시 짙푸르다. 어쩐지 하루의 예감이 좋다. 작은 손가방에 머플러와 500리터 물 한 병 담아서 호텔을 나섰다.
바닷가에는 반바지 차림으로 조깅하는 사람들이 내 옆을 휙휙 지나간다. 모래밭으로 내려가 아침 햇볕을 정면으로 맞아들이면 남부의 여행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다. 선탠하거나 알콩달콩 연애 중인 이들 옆을 지나가며 나도 너그럽게 행복해진다. 이곳에 일주일 머물면서 니스의 해변을 즐기는 일은 이렇게 틈틈이 해야 한다. 그게 새벽이든 한낮이든 밤바다이든 언제든 바라볼 수 있고 다가갈 수 있어서 어찌나 뿌듯한지.
니스에서 버스로 여행하기
니스에서 에즈행 버스를 타기 위해서 먼저 트램으로 여섯 정거장을 가야 한다. 여섯 정거장 거리의 트램 안은 벌써 사람들로 꽉 차서 꼼짝달싹 못하고 서 있다가 Vauban역에서 내렸다. 그런데다가 에즈 빌리지행 112 버스는 떠날 시간이 되어 이미 시동을 걸고 있었고 빈자리가 없다. 서서 가야 한다. 참고로 니스 가리발디 광장에서 82번 버스도 있다. 버스비는 편도 1.5 유로 정도. 물론 기차편도 가능하지만 불편함이 커서 대부분 여행자들은 에즈행 버스를 이용한다.
버스 여행 중 삼사십 분을 서서 가는 건 버스 창가에 앉아 편하게 지중해 풍경을 보는 즐거움 하나를 놓칠 수 있다. 하지만 지중해의 차창 밖은 어디서 바라보아도 언제나 무한 아름다움이다. 해안가를 즐기려면 버스의 오른편에 앉는 게 좋다. 아침부터 짙푸른 하늘과 바다를 멋지게 보여주더니 잠깐 이렇게 다리품을 팔라고 한다.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선채 버스 차창 밖으로 에즈의 산비탈과 지중해의 풍광을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에즈 빌리지(Eze Village)에 도착했을 때는 온 산하가 투명한 햇살의 빛 내림으로 환했다.
니스 근교의 선인장 마을 에즈빌리지
눈앞에 교회의 시계탑이 있는 건물이 보인다. 여행길에 시계탑을 만나면 대부분 그곳이 목적지 인양, 마치 이정표 삼아 시계탑을 향해 걷는다. 어차피 느슨하게 보낼 셈인 하루다. 먼저 거길 오르지 않고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며 아랫동네를 즐겨본다. 골목마다 햇볕이 뿌려져 있고 몇 마리의 잘생긴 개가 왔다 갔다 한다. 마을조차 한가롭고 헐렁하게 여유만만이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에 평화로움이 번진다. 언덕 돌담에 걸터앉아 사람 구경도 하고 할 일 없이 두리번거리며 마음껏 여유 부리며 가벼운 마음을 얻는다.
아껴두었던 걸 꺼내먹듯 이젠 비탈진 에즈 빌리지 언덕으로 올라간다. ‘사실 중세마을이 다 비슷하지 뭐’ 하면서 별스럽지 않다는 생각으로 처음엔 무심히 걸었다. 비좁은 골목마다 콕콕 박혀있는 작은 상점들이나 갤러리, 교회 건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걸을 수 있다. 직접 만지면서 느낄 수 있는 시간여행 시작이다. 손바닥의 감촉으로 거슬러 가보는 중세기 마을이다.
중세기의 언덕에서 만난 지중해, 그리고 니체
동굴과도 같은 조붓한 골목을 이리저리 걷다 보면 길을 잃을 수도 있는 해발 427m의 작은 성벽 마을, 그 모습대로 독수리 둥지라는 별명도 있다. 에즈는 13세기 로마의 침략을 피해 산꼭대기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마을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흑사병이 한창이던 14세기에 이곳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이때부터 지금껏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중세마을로 자리 잡고 있다.
계단을 오르는 중에 예쁜 공방이나 기념품점이 줄지어 이어지고 테라스가 매력적인 갤러리가 자꾸만 튀어나온다. 남프랑스의 따스하고 환한 햇살과 꽃들로 어우러진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소소한 행복이 넘친다. 느릿느릿 에즈 빌리지의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걸으며 만나는 가시를 뻗치고 있는 다양한 선인장과 여신의 조형물들이 이 마을의 수호신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을 정원에 뿌리내리고 오랜 시간 동안 저렇게 지중해를 지키고 있구나 하는...
13세기 지중해 높은 절벽 위에 만들어진 작은 요새 마을 에즈 빌리지. 수백 가지의 선인장이 독특하게 가꾸어진 길을 걸어 400m 높이에 위치한 열대 정원에 서면 바람결이 확 다르다. 해변 마을에서 에즈 빌리지까지는 니체의 오솔길이 있다. 니체가 사랑했던 연인 루 살로메에게 실연당하고 찾아온 니스와 에즈 빌리지에 머물며 가장 왕성한 저술 활동을 했다고 한다. 14세기에 지어진 문이 마을 입구에서 맞는다. 그 길을 걸으며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구상했다는 철학자를 떠올려 본다. 걸으면서 사유하기를 좋아했던 니체의 자연을 마주하는 비탈진 산책로를 두리번거리며 산책하듯 걷는 성벽 마을의 시간여행이다.
사방을 빙 돌며 파노라마 전경을 바라보느라 가슴이 벅차다. 가슴이 뻥 뚫린다. 좁은 골목의 올라오며 느꼈던 신비로움과는 달리 탁 트인 해방감으로 시원하다. 절벽 아래 붉은 지붕의 마을이 해안선의 아름다운 결을 따라 평화롭다. 발아래 지중해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눈앞에 펼쳐놓은 건 누구일까. 내가 본 지중해 풍경 중에서 최고다.
지중해 마을 정원의 기억
니스에서 모나코 가는 길목에 위치한 보석처럼 매력적인 마을, 놓쳤으면 후회했을 뻔했다. 아랫마을로 내려와 노천카페에 앉아 토르티야 샌드위치로 때우는 늦은 점심도 충분히 즐겁다. 오래된 중세 마을에 부는 가을바람 속에서 한나절이 그렇게 가고 있었다.
내게 에즈 빌리지는 여행길에 잠깐 들러 보는 곳이었다. 아니 누구에게나 작은 마을일뿐이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자꾸만 머무르려는 발걸음이 되어 느릿느릿 길게도 놀았다. 돌아와서도 종종 생각나는 걸 보면 나와 잘 맞는 곳인 듯하다.
에즈 여행은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계절이어야 한다. 푸른 지중해를 멀리서 바라보기 위해서 다시 한번 들러보고 싶은 마을, 에즈 빌리지(Eze Village)다. 지중해와 이토록 아름답게 어우러진 선인장 마을의 정원, 그 옛날 이곳엔 누가 살았을까. 그곳은 누구의 정원이었을까.
소로리 볍씨와 생명문화도시
생명문화도시 청주라고 말한다. 지역마다 일컫는 상징적 수식어가 있듯 이곳은 명칭마다 생명이 함께하는 걸 본다. 청주시 청정자연의 푸르름을 뜻하는 ‘생이’와 미래창조의 빛을 머금고 있는 ‘명이’가 결합된 캐릭터로 생명과 창조의 도시 청주를 상징한다. 이렇듯 청주에서 생명을 주제로 한 콘텐츠를 쉽게 볼 수 있는 건 당연하다. 공원도 생명누리공원이고, 정자는 생명정이다. 생명과학단지는 바이오 산업 전문으로 첨단의료 복합단지다. 가을이면 청원생명축제가 열린다. 생명과 연결된 것 중에 당연히 먹는 것이 빠질 수 없다. 청원 생명쌀은 전국 최초로 15년 연속 한국표준협회로부터 인정받은 고품질 쌀이다. 이제 대한항공 기내식 밥으로도 공급되어 전 세계인이 맛볼 수 있게 되었다는 최근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밥은 한국인의 일상과 아주 밀접하다. 인사나 만남의 경우에도 꼭 밥이 등장한다. 밥은 먹었니, 밥 한번 먹자… 이런 밥. 밥 이전 벼농사의 기원이 중국이 아닌 한국일 거라는 주장 관련 근거가 청주 소로리에서 발견됐다. 2003년 청주 소로리에서 발견된 볍씨가 국제적 검증 끝에 거의 1만 50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고, 고고학자 콜린 렌프류도 쌀의 기원을 한국으로 수정했다고 전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출토된 충북 옥산의 소로리는 명실공히 세계 최고 농경문화 중심지로 떠올랐다. 국토 중심지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충북 청주는 생명문화의 고장으로 입지를 굳혔다.
부근의 오창읍엔 쌀의 일생과 역사를 알려주는 단아한 한옥의 벼전시체험관과 미래지농촌테마공원이 있다. 이곳에 소로리의 유적인 볍씨가 소개되어 눈여겨볼 만하다. 옛날 옛적 벼농사를 지었던 우리 땅에서 출토된 소로리 볍씨 59알로 한반도 고대국가의 형성을 이해할 수 있다니, 우리가 매일 먹는 밥, 알고 먹는다면 밥맛이 다를 터.
올 초에 세상을 떠난 이 시대의 문화 지성이라 일컫는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청주를 사랑하고 응원했다고 한다. 생전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소로리 볍씨가 출토된 것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와 함께 청주가 세계적인 생명문화도시라는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 말했다. 더불어 친환경 두꺼비 생태공원과 가로수길, 초정 약수 등의 문화 원형을 분석하며 가치 발굴에 관심을 보였다. 또한 청주의 한 무덤에서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젓가락이 출토되었는데, 쌀과 젓가락은 생명문화의 원형이라며 지구촌 유일의 생명문화도시 청주에서 젓가락 페스티벌을 열도록 제안도 했다. 청주를 향한 깊은 애정으로 그는 청주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간 김에 오창호수공원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예전에는 청주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한참 가야 했던 오창이었다. 이젠 길이 달라졌고 교통수단도 좋아져서 드라이브 삼아 자동차로 20분 정도 휘익 달리면 된다. 핫한 카페나 맛집은 물론, 자연친화적 생태놀이터와 등산로가 건강한 시간을 제공한다. 자연 속에서 마음껏 하루를 누릴 만한 문화휴식공원이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 호수가 있다. 내가 갔을 때는 저수지 준설공사로 물을 모두 뺀 상태였지만, 물을 가득 채워 호수에서 뿜어내는 분수가 솟아오르면 가슴 후련한 풍경이 펼쳐진다. 그 옛날 문전옥답에 물 대주던 방죽이 지금은 멋진 호수가 되어 현대인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휴식처로 변모했다.
세종대왕이 가끔 쉬던 곳에 나도 간다, 초정행궁
또 한 군데 들러볼 곳으로 초정행궁이 있다. 청주나 오창에서 20분 정도 거리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야기 끝에 늘 초정약수의 눈병 치료가 따라 나오곤 한다. 바로 그곳 초정이다. 과거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행차하여 머물며 한글 창제를 마무리했던 역사적 사실을 기초해서 조성되었다. 옛 임금의 행궁이나 이전 대통령들의 전용 휴양지(청남대)로 청주를 택했던 걸 보면 사색과 휴식의 환경에 적당한 도시였구나 싶다.
초정 행궁마을은 도심에서 뚝 떨어져 아늑하다. 조선시대 옛 거리를 걷듯 한옥마을을 느릿하게 거닐다가 투호를 던지거나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에 참여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독서당에서 책을 읽다 전통찻집에서 보약처럼 진한 대추차 한잔 마시는 것도 좋은 시간이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물론 초정리에 갔으니 세계 3대 광천수로 탄산과 칼슘, 풍부한 미네랄을 함유한 초정약수를 느껴볼 일. 한동안 코로나19의 여파로 중단되었던 초정원탕 행각에서는 야외 족욕체험장이 개방 운영되고 있다. 땅속 깊은 화강암층에서 퐁퐁 솟아나는 광천수로 이색 체험까지 알차게 챙겨보자. 한옥 스테이는 예약 필수다.
역사와 현재가 공존하는 조용한 공감
청주는 그동안 진입로의 가로수길이나 도심을 둘러싼 상당산성과 중심부를 흐르는 무심천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육거리 전통시장은 더 말할 게 없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면서도 빠뜨리면 섭섭할 중앙공원도 청주의 역사 속 중심이다. 뭘 모르는 사람들은 청주 중앙공원이 이제는 탑골공원처럼 되어버렸다고 하지만, 괜히 중앙공원(中央公園)이 아니다. 전국 각 지역마다 하나씩 있음직한 중앙공원은 그 지역을 대표한다. 이름 그대로 센트럴파크다. 한쪽 코너에는 시민극장이 있었다. 청주 극단인들의 연극도 올리던 곳이었다. 유형문화재인 목조 2층의 누각과 구석구석 유적들은 제각각 옛이야기들을 품었다. 무엇보다 천년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는 전설을 지닌 채 계절마다 압도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중앙공원 골목으로 들어서면 지금은 쫄쫄 호떡이 유명하지만 그 이전엔 할머니의 빈대떡이 유명했다. 그 옆으로 50년이 훌쩍 넘은 공원당 우동은 특히 청주를 떠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장소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 약속 장소로 정하기 좋은 곳.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공원당에서 만나자’고 할 수 있는 점포다. 도시가 사람을 품어주는 맛이 있고 따뜻하다. 이젠 어딜 가나 나타나는 거대한 관광 콘텐츠, 덕후들의 핫플이나 힙하다는 맛집 풍경 인증샷은 지겹다. 어느 여행지를 말할 때 ‘노잼’이나 ‘핵잼’ 타령으로 섣부르게 구분 짓는 이들의 기준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그 골목을 나와 바로 보이는 용두사지 철당간. 시내 중심에 우뚝 서 있지만 늘 그 자리에 있으니 다들 무심한 듯 지나간다. 고려시대의 귀중한 문화유적이라 여행자들이 찾아와 올려다보곤 한다. 바로 앞으로 청주극장과 현대극장이 기역자로 거의 붙어 있었다. 학생들의 단체 영화 관람이 있는 날은 그 앞이 교복 입은 학생들로 바글거렸다. 지금은 영플라자 뭐 그런 것들이 새 옷 입은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언제부턴가 성안길이 된 본정통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핫한 거리다. 입구부터 시네마 거리다. 청주가 의외로 영화관이 많았고 유명 연예인이나 문화예술인을 다수 배출했다는 사실, 또한 수많은 드라마나 영화가 촬영된 곳이란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울에서 가깝고 역사와 현재가 고루 존재하는 특이한 장소가 꽤 있다는 것. ‘제빵왕 김탁구’의 수암골은 이미 성지가 된 지 오래고, ‘태양의 후예’, ‘덕혜옹주’, ‘은교’, ‘베테랑’, ‘국가대표’, ‘프리즌’…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다.
청주를 떠나기 전 국립현대미술관을 들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갈 때마다 들르지만 이번엔 시간이 늦었다. 그렇지만 미술관 앞마당에 서는 것만으로도 가슴 저릿하다. 오래전 담배공장이었던 곳이 문화예술공간으로 변신한 근대문화유산 동부창고,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눈앞에서 조금씩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미술관 광장에서 바라보는 코끝 찡한 저녁노을, 운이 좋았다.
파리에서의 1박 2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애초에 생미쎌의 소르본느 주변에서 어슬렁 놀다가 미술관 한 군데 돌아보는 걸로 여유롭게 일정을 잡았기에 쫓기는 기분 없이 잘 보낸 1박 2일이었다. 틈새 여행으로 아쉬움 없다.
오를리 공항에서 탄 작은 비행기는 새하얀 구름 속 푸르디푸른 하늘 구경에 잠깐 정신 팔린 사이에 금방 니스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창밖의 하늘과 구름은 어찌나 푸르고 새하얗던지 반짝거리는 니스의 푸른 바다와 콤비를 이룬다. 온통 코발트블루의 세상을 보며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건 니스만의 블루다. 지중해의 니스 블루라고.
지중해의 니스 블루
사실 니스는 여행지로 생각지도 않았던 곳이었다. 때로는 이렇게 예상치도 않은 여행지를 다녀볼 수도 있다는 게 기분을 달뜨게도 한다. 공항 건너편의 버스정류장에는 칸느와 모나코행 버스가 늘 대기하고 있다. 또 한쪽엔 니스 역 방향의 98번 버스가 서 있다. 우리는 니스 해변 쪽으로 가는 99번 버스로 지중해가 펼쳐지는 숙소 앞에서 내렸다. 환한 햇살이 맞이할 것 같았던 니스는 비가 내린 후의 한기가 엄습했지만 다음 날부터는 니스의 햇빛 좋은 날씨가 날마다 이어졌다.
끝을 알 수 없는 코발트블루의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해변가의 전망 좋은 방. 호텔 방에 앉아 광활한 지중해의 풍경을 마음껏 볼 수 있도록 위치 좋은 곳의 전망 값을 더 지급했다. 발코니에 앉아 새벽을 바라보고 찬란한 햇빛을 눈부시게 볼 수 있었다. 아름답게 휘어진 니스의 해안선에 내리는 노을을 향해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며 짜릿했다.
니스에서는 모든 것을 털어내고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맨발로 몽돌을 밟으며 걷는 해변엔 여행객들의 거리낌 없는 일광욕 자세가 민망할 것도 없이 금방 적응된다. 느릿한 트램을 타고 거리를 지나거나 메세나 광장에 나가보아도 무표정하거나 심각한 얼굴은 보기 어렵다. 경직된 근육 없이 자유를 가득 품은 몸짓이었고 더없이 편안한 표정들이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도 모두 친절했다. 적대감 따윈 하나 없이 무장 해제된 표정들. 구시가지의 고풍스러운 골목을 걷다가 나와서 길 가던 노신사에게 지도를 들고 길을 물었더니 들고 있던 서류가방을 아예 다리 사이에 내려놓고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낸다. 그리고 내 지도에 동서남북을 그리며 상세히 설명을 한다. 그냥 "조~오기로 돌아서 가면~"이라고만 해주어도 좋으련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기분이 든다.
노천카페마다 의자에 팔걸이를 하고 느긋하게 앉아 지중해를 즐기고 니스를 즐기는 모습들이다. 그렇게 바다를 바라보거나 와인과 지중해의 해산물 샐러드를 앞에 놓고 그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런 모습이 여행자에게 전해지고 덩달아 행복감 충전이다. 하루쯤 지나면서 긴장감이라곤 일 그램도 없는 나를 발견한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어찌나 부드러운지. 니스(Nice)는 나이스(Nice)다.
가끔 가십 기사로 프랑스 배우나 허리우드 스타들이 니스에서 휴양 중인 파파라치 사진들을 기억한다. 따스한 햇살로 반기는 곳 니스는 누구라도 마음 놓고 쉴 수 있게 하는 도시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바다와 알프스 산맥을 모두 품은 세계적인 휴양도시답게 여유와 풍요함이 흘러넘친다.
니스가 좋은 이유
니스는 프랑스 남부의 항만 도시로 프랑스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있다. 모나코와 칸느가 옆동네이고 이태리 국경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래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당일코스로 하루씩 칸과 모나코를 다녀올 수 있다. 현재 니스는 프랑스령이지만 역사적으로 이태리와 영토분쟁이 있었고 한때는 이태리 령이기도 했다. 그래서 니스지방 사람들의 이름 중엔 이태리식 이름이 많고 풍습이나 음식도 이태리풍이 많다. 무엇보다도 신선한 지중해의 식재료로 요리한 해산물 요리가 풍성하면서도 가격도 부담 없는 편이다. 숙소 또한 비싸진 않지만 찾는 이들이 많아 성수기엔 예약에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이곳은 평균 기온이 15℃이고 연중 고르게 온난한 날씨다. 여름엔 덥고 건조한 편이긴 하지만 대체로 전형적인 지중해 도시로 시기와 상관없이 사계절 니스를 즐길 수있는 기후다. 내가 갔을 때는 시월인데도 해변가엔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풍경이 일상처럼 자연스럽다.
야자수 나무 사이로 다정히 손잡은 연인이 서 있고 바다를 향한 벤치에 어깨를 감싼 부부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자전거를 탄 젊음이 쌩쌩 지나가고 잘 생긴 개를 끌고 걸어가는 모습이 여유롭다. 이처럼 여유자적한 풍경 속에 내가 있다.
지끈지끈한 일상의 피로나 두통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가벼워지는 듯했다. 마음껏 늦잠을 잘 수도 있고 거리를 지나가다 아무데나 들어가서 홍합이 가득 뒤덮인 지중해의 해산물 파스타를 먹는다. 골목길이든 대로든 해변가든 마음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긴다. 몇 걸음 걷다가 야자수 가로수길 어드메쯤에 아무렇게나 털썩 앉아 지중해의 반짝거림을 언제까지나 멍하니 바라볼 수 있다니. 며칠 후면 다시 별스럽지 않은 내 일상으로 돌아간다 해도 괜찮다. 얼마든지 괜찮다.
남프랑스 맛의 기억
물론 남프랑스의 맛이란 제목으론 당치도 않다. 여행 중에 그곳의 맛을 골고루 맛본 것도 아니고 좋은 것을 찾아다니며 먹은 것도 아니다. 그나마 먹는데 정신 팔려 사진으로 남길 생각을 못해서 찍히지 못하곤 했다. 어쩌다 먹고 어쩌다 찍힌 별스럽지 않은 사진 몇 컷 일뿐이다.
니스의 메인스트릿을 지나 골목길 포장마차처럼 생긴 레스토랑 Temple Bar. 가족단위의 손님이거나 연인들이 가득 차서 바글바글했던 저녁시간. 파스타도, 홍합요리도, 감자튀김도 푸짐 푸짐했다. 이런 인심 대환영이다. 맛있다. 그런데 국물이 간이 좀 세다. 조금만 덜 짰으면 좋으련만, 하긴 괜한 트집이다. 그 분위기 속에선 이렇게 잊지 못할 또 다른 맛을 낸다는 사실이다.
니스의 호텔 조식은 메뉴가 다양했다. 그 중에서 자그마하고 대충 만든 듯하지만 부드러운 크레페가 따끈따끈 금방 구워져 나와 그 맛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크레페(Cr^epes)의 생김새는 동그란 금빛 형태로 밝은 날 떠오른 태양을 상징한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이 춥고 어두운 겨울이 끝나고 따뜻하고 밝은 봄을 맞을 때 먹는 빵이었다는데 이제는 우리의 호떡처럼 길거리 어디서든 사 먹을 수 있으니 그 의미를 떠올릴 틈이 없다.
그리고 어딜 가나 빨강과 보라, 그리고 노랑과 초록으로 선명한 색감이 빛나는 지중해의 채소와 과일들이 가게마다 넘쳐났다. 사진 한 장만으로도 그 시간들이 내게 우르르 몰려온다. 맛의 기억이 여행의 기억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