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지 아니한가. 무표정하지도 소란하게 호탕하지도 않은, 빙그레 웃는 남도의 섬. 섬은 그렇게 여행자를 맞는다. 뭍과 다르게 섬을 달리다 보면 바다가 있고, 조금 더 달리면 물 빠진 뻘이 나타나고, 저 건너편으로는 또 다른 작은 섬이 오도카니 물속에 잠겨 있다. 바닷바람에 실려오는 비릿한 갯내음이 벌써부터 가슴을 뛰게 한다.
해신(海神) 장보고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하는 섬, 완도. 통일신라시대 이 땅의 해상로를 통해 국제무역을 주도했던 장보고의 이야기는 드라마 ‘해신’이 아니어도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역사 이야기다. 이 섬에서 장보고 찾기는 도무지 어려울 게 없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른바 ‘장며들기’에 빠져드는 곳이 완도다.
장보고 해상무역의 흔적들, 완도 청해진 유적지
장보고의 활동 근거지 청해진 유적지가 있는 장도를 가려면 완도 동쪽의 장좌리 앞바다로 가야 한다. 한때는 마을에서 하루 두 차례의 썰물 때만 걸어 들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장도 목교가 놓여 있어서 출입이 자유롭다. 특히 바다에 물이 빠졌을 때 갯벌에 나타나는 ‘목책’은 중요한 역사적 흔적이다.
목책은 청해진 방비를 위해 굵은 통나무를 섬 둘레에 박아놓은 것으로, 지금도 1000여 개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무심히 바닥을 들여다보면 잘 알 수 없는데, 찾기 쉽게 깃발을 꽂아놓은 친절함. 물 빠진 갯벌에선 살아서 꿈틀거리는 갯고동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부디 오염되지 않은 천연의 땅으로 오래오래 유지되기를.
청해진 유적지 쪽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6m 깊이의 우물을 지나게 된다. 바닷속 지하수를 길어 올려 청해진 군단의 식수원으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쪽으로 올라가면 청해진 터였던 곳의 전진기지와 초소 역할을 했던 모습도 남아 있어서 그 시절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이 지역에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는 신라, 일본, 당나라 3국의 해상무역권을 장악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적한 분위기의 바다 풍경과 역사적 사실에 다가가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무엇보다도 자연 속의 완도를 피부로 느낀다.
장보고 대사의 해상 활동과 일대기, 장보고기념관
청해진 옛 터에 해상왕 장보고의 일대기를 전시와 영상으로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기념관이 설립돼 바다를 향한 모습이 고즈넉하다. 상설전시관과 중앙홀 전시관이 있어 장보고 대사의 흔적을 만날 수 있으며, 체험형 입체 관람 시스템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역사적인 현장이나 유적지, 기록물 전시장을 ‘아이들과 함께 가보면 좋은 곳’이라고 소개하는 걸 자주 보게 된다. 남녀노소 누구라도 보고 배우고 즐길 이 모든 것들이 그저 ‘교육적’이어서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좋은 곳이라고만 하니 이 말이 당키나 한가.
죽청리 쪽으로 가면 장보고 동상이 우뚝 서 있는 장보고 어린이놀이공원이 있다. 장보고라는 역사적 테마로 감성과 호기심을 유발하는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거대한 동상 아래로 장보고의 유년기부터 활동기의 기록이 전시된 전시관이 있으니 꼼꼼히 살펴보는 것도 뜻깊다. 완도는 장보고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는 묘미를 빠뜨릴 수 없는 곳이다.
완도의 랜드마크, 완도타워
당일 여행에는 완도타워가 더욱 필요하다. 높은 타워에 올라 완도를 한꺼번에 바라볼 수 있으니, 이럴 땐 슬기로운 여행법이다. 완만한 속도의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노라면 양옆의 산책로와 다도해 일출공원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
높이 오를수록 완도의 면면이 속속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앞바다에 보이는 동그랗고 예쁜 섬은 천연기념물 28호인 ‘주도’로 상록수림이 빽빽하다. 녹음이 싱그러운 숲과 선명한 빛깔의 꽃들, 바다를 둘러싼 완도를 바라보면서 타워에 다다른다.
타워까지 이르는 길목에 자리한 중앙광장의 장미터널이 환영하듯 화사하다. 산책하는 걸음으로 언덕배기를 오르면서 고개를 돌려보면 야트막한 완도 시내의 풍경이 아기자기하다. 이어서 가슴이 탁 트이는 전망대. 360도 파노라마로 구성되어 한 바퀴 돌면 완도의 풍경을 한눈에 다 담을 수 있다. 크고 작은 섬과 다리들, 멀리 영암의 월출산, 전복 양식장, 봉수대가 눈앞에 있다. 야간에는 환상적인 조명 레이저쇼가 진행되고, 날씨에 따라 제주도가 보인다는 높이다.
타워 주변엔 현장 수업 중인 아이들이 재잘대며 선생님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땀 뻘뻘 흘리며 아이들을 인솔하면서 완도 역사를 가르치는 젊은 선생님의 열정에 몇 번씩 바라보게 된다. 선생님도 멋지고 아이들도 그저 예쁘다.
여름 한낮, 덥다. 완도에서 맛볼 수 있는 비파주스가 있다. 연한 주황색의 비파는 아열대 과일로 완도의 특산물이다. ‘비파나무 한 그루 있으면 아픈 사람이 없다’라는 옛말이 있듯이 건강에 좋은 과일이라고 한다. 살구 비슷한 모양에 복숭아와 감의 중간인 듯 부드러운 맛이다. 짚라인 탑승장 옆의 완도타워 매점에서 얼음 가득 넣고 만든 비파주스 한 잔으로 시원하게 갈증을 날리고~.
깊은 숲의 기운, 완도수목원
전남 유일의 난대림 수목원이다. 수목원이 다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주변을 둘러싼 산을 포함해서 상왕봉 아래 조성된 수목원이 어마어마한 규모인 걸 비로소 알고 놀랄 수밖에. 2000ha의 광활한 면적. 거의 축구장 2000개 넓이라고 하니 입이 떡 벌어진다. 동식물과 상록활엽수로는 세계 최대 집단 자생지다.
완도수목원은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공존상’을 수상한 숲이기도 하다. 산책 삼아 걷기 좋은 깨끔길은 ‘동네 앞의 나지막한 산’이라는 전라도 사투리다. 푸르름으로 울창해서 피톤치드 속에 갇힌 듯하다. 빼어난 풍치의 수목원 안에는 산림전시관, 열대·아열대 온실, 동백숲, 관찰로, 수생식물원, 전망대, 야영장, 농구장 등이 갖추어져 있어서 돌아보기만 해도 시간이 한참 걸린다.
난대림 산길을 몇 군데 걸으며 둘러보고 산림전시관을 돌아보았는데, 당일 나들이다 보니 아주 조금 맛만 본 셈이다. 엄청난 넓이, 한나절로는 어림없다. 하루나 이틀쯤 피톤치드 가득한 숲의 기운을 받으며 느릿하게 ‘숲멍’도 하면서 푹 쉬는 여유를 갖는다면 실로 멋진 힐링이 될 듯하다.
완도의 맛, 전복거리
섬을 떠나기 전 들렀다 가야 할 곳이 있다. 완도 하면 무엇보다 전복 아니던가. 바다의 산삼이라고 불릴 정도로 맛과 영양의 최고 식품. 전복거리를 걸으며 수산물과 건어물을 구경하다 구입하기도 하고, 수협 수산시장의 살아 있는 삶의 현장도 느끼는 시간이다. 김이나 전복 등 수산물을 현장에서 구입한 후 가족이 있는 집으로 즉시 택배송을 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코로나19의 여파인지 거리도 한산하고 수산물시장도 북적이지 않았다. 어서 빨리 소란스럽고 붐비는 파시를 이룬다면 좋으련만.
때가 되면 기분 좋게 허기를 채워야 한다. 완도에선 당연히 신선한 생선구이 밥상이다. 푸짐하게 생선을 구워와 직원이 두툼한 살점까지 발라주고 간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생선의 신선도가 확실히 다르다. 된장에 해초류를 넣고 끓인 갯국의 시원한 맛도 독특하다. 또한 전복 특산지 완도답게 전복 하나가 통째로 고스란히 들어간 전복빵이 있다. 장보고빵이라고도 한다.
빙그레 웃는 섬 완도의 푸른 여름
빙그레 웃는 섬답게 걷다 보면 빙그레식당, 빙그레공원, 빙그레마트, 빙그레… 이런 상호들이 흔하다. 절로 빙그레 미소 짓게 하는 섬. 당일로 가볍게 다녀왔지만, 여유 있게 며칠 정도 완도의 푸르고 느린 풍경 속에서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 지낼 수 있다면 더없이 충만한 휴식이 될 것이다. 하루 코스로도 버겁지 않았던 스마일의 섬 완도. 그 섬은 지금 푸름에 잔뜩 물들어 있다.
이젠 섬도 당일치기다
전국이 일일생활권이라는 말은 이제 구닥다리 옛말처럼 들릴 만도 하다. 그런데도 섬 여행은 좀 예외가 아닐까 생각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단 하루쯤이라도 뚝 떨어진 섬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면 망설일 이유 없다. 한반도 남서쪽 끝자락에서 빙그레 웃음 짓고 있는 청정한 섬, 완도. 당일 도전도 어렵지 않다.
KTX가 바쁜 현대인의 시간을 단축시켜준 것이 여행뿐일까 싶지만, 어쨌든 우리에게 여유 있는 시간을 제공했고 어디든 훌쩍 나서볼 수 있게 해주었다. 용산역에서 이른 아침 KTX 첫차를 타면 광주역(편의에 따라 목포나 나주역도 가능)에 두 시간 남짓이면 도착한다. 이어서 버스나 각자의 기동성을 이용해 완도로 곧장 이동하면 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현상으로 행동반경이 좁아졌다. 하지만 덕분에 덜 알려진 이 땅의 자연을 찾는 기회를 얻었다. 유서 깊은 지역이거나 핫 스팟이라고 해서 우르르 찾아가는 곳이 아닌 홀로 조용히 의미 있게 찾아가는 여행지인 셈이다. 비대면을 강조하는 현실에 제격이다. 관심조차 없던 곳이 ‘이렇게 좋았네’라고 비로소 깨닫기도 하고, 좋았다고 생각한 기준도 바뀌는 뉴노멀 시대이기도 하다.
잠깐씩 일상을 환기시키는 짧은 여행은 삶에 활기를 더해 주는 휴식으로 보답한다.코로나19는 멀리 가지 않고도 자연을 충분히 즐기며 행복감을 얻을 수 있는 하루를 더욱 소중하게 만든다. 산책이나 외출과는 사뭇 다르고, 새롭게 만나는 풍경은 비대면으로 답답했던 일상을 따뜻한 평화로움으로 가득 채운다.
진천 초평호(저수지)에 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유만만하게 시간을 보내는 낚시꾼들이다. 좌대에 앉아 낚싯줄을 드리우고 초집중 상태에 있는 모습과 멍하니 찌를 바라보며 세상 편한 자세를 취하는 대조적인 두 모습은 바삐 지나가던 나그네의 발걸음조차 멈추게 만든다. ‘이렇게나 평온한 모습이라니…….'
초평호는 주변 지역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진천 최대의 저수지다. 다른 낚시터보다 손꼽히는 담수량으로 깨끗한 호수와 자연이 잘 보존돼 있어 휴식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곳이다. 자연과 한껏 어우러짐에 봄이면 벚꽃으로 가득 찬 꽃섬으로 변신한다. 그래서일까. 낚시 명소인 초평호가 수변 풍경과 걷기 좋은 숲길로 더 알려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으로 둘러싸인 저수지 위로 떠 있는 좌대들이 알록달록 다양한 색으로 마치 수상리조트처럼 화려하다. 좌대가 자그마치 160개가 넘는다고 하니 무심코 본 초평호가 얼마나 넓은지 가늠케 한다. 가끔씩 토종 붕어를 만날 수 있다는 정보가 낚시 애호가들을 이곳으로 안내하고 있다.
요즘 좌대는 작은 가전제품들까지 대부분 구비하고 있을 정도로 편리해 물 위의 펜션이라고 부를 만하다. 편안한 수상 가옥에서 물고기를 낚다가 TV도 보고 낮잠도 잔다. 한밤에는 물 위에 뜨는 달빛을 바라보고, 별을 올려다본다. 이렇게 넋을 잃고 바라보는 새벽 풍경이 가져다 주는 행복을 감히 누가 짐작이나 해볼 수 있을까.
낚시는 명상하는 이들의 레크리에이션이라고 하니 떠날 때도 아니 온 듯 깔끔하게 치우고 가는 예의도 잊지 않을 터. 맑은 공기 속에서 심신을 쉬었으면 현지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떠나는 일은 자연을 향한 당연한 이치다. 연간 3만 명이 넘는 낚시인들이 찾는 초평호는 그들의 '낚멍'으로 온 산하가 입을 다문 듯 조용하다.
호수를 벗어나 붕어마을을 거쳐 근처의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는 시간도 즐겁다. 걸어가기엔 꼬불꼬불하고 경사가 높아 숨이 차, 자동차로 가는 게 편하다. 커브길이 좁기 때문에 초보운전은 잠깐씩 아찔할 수도 있다. 호수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두타산에 오르면 호수가 둘러싸고 있는 독특한 지형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반도 지형 전망 공원'이다.
한반도 지형은 자연이 만든 걸작품이다.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이렇게 다른 대상을 떠올리는 지형을 잘도 찾아낸다. 진천 초평호에서 만나는 한반도 지형은 S자 굴곡으로 승천하는 청룡을 품은 한반도라고 한다. 한반도의 남쪽 부분이 더 강조된 지형으로 보인다.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시야에 들어오는 한반도가 온통 뿌옇다. 북한 쪽은 더욱 짙은 안개로 마치 이산가족들의 그리움처럼 아득한 풍경이다. 전망대 꼭대기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무념무상으로 잠깐 넋을 잃어 본들 어떠랴.
전망대 꼭대기에 오르면 마음껏 초평호를 눈에 담고 가슴에 담을 수 있다. 호수 위로 작은 집들과 점점이 둥둥 떠 있는 낚시 좌대 색감이 자연 속에서 예쁘게 어우러진다. 바라보기만 해도 여유와 한가로움을 느끼게 한다. 때로 순간 먼 이국의 어딘가로 데려다 주기도 한다.
한반도 지형을 봤다면 귀갓길에 올라도 괜찮다. 하지만 시간이 급하지 않다면 초평호와 이어진 초롱길을 따라 걸어봐야 후회가 남지 않는다. 천년의 시간을 보내고도 지금까지도 견고한 농다리를 지나칠 수는 없지 않는가. 무수한 장마에도 유실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이 돌다리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도 선정된 명소다.
다듬어지지 않은 넙적한 자연석을 겹겹이 겹쳐 쌓아 다리를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큰 홍수가 나도 끄떡하지 않는 놀라운 내구성을 자랑한다. 다리 가운데에는 사람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도록 반반한 돌들이 길게 이어져 있다. 오가는 사람들이 있을 땐 옆으로 기다렸다가 건널 수 있도록 틈틈이 폭을 넓힌 배려까지 담아놓았다.
농다리를 건너 초롱길과 하늘 다리, 수변에 현대 모비스가 조성한 미르숲의 야외음악당으로 올라 본다. 호수를 앞에 두고 음악당이 있고 건너편으로 하늘 다리가 물 위에 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하늘과 산과 호수만으로 이뤄진 세상에 서 있는 기분이다. 음악당 옆으로 이어진 초롱길은 모두가 싱그럽고 초롱초롱하다. 호수를 둘러싼 초록의 자연을 바라보며 조용히 초록 숲으로 파묻힌다.
계속 가다보면 수국이 탐스럽게 피어난 김유신 장군 탄생지와 태실을 지난다. 이팝나무가 입구에서 새하얗게 반긴다. 화랑무예와 태권도의 성지, 호국보훈의 마음을 한 번쯤 엄숙하게 짚어보게 하는 진천군 도당공원의 충혼탑을 거치며 생거진천의 산천을 느껴보는 시간이다.
떠나기 전에 산속의 예쁜 정원인 듯 아름다운 사찰 보탑사의 꽃구경을 하고 돌아가야 제 맛이다. 사찰 구석구석을 꽃으로 가득 채워, 자연 속에서 또 다른 자연을 누리기 딱 좋은 곳이다. 여름이 시작된 보탑사 입구에는 작약이 고적한 절 마당을 화사하게 만든다.
절 마당엔 기도하러 온 사람과 꽃 속에서 차분하게 산책하는 사람들이 조용히 오간다. 사찰인 듯 사찰이 아닌 듯 편안한 동네에 마실 온 듯 돌아보며 사람들은 말한다. '무슨 절이 이리도 이쁜 가요.'
너무 '멀리'란 말에만 맞추느라 떠나기를 미루지 않았는지. '낯선' 곳에만 매달려 이 땅의 친숙한 풀냄새와 흙냄새에 무심하지는 않았던가 생각해 볼 일이다. 견뎌야 할 일 이유가 많은 나날들 속에서 하루쯤 아무 부채감 없이 지내보면 어떨까. 몸과 마음이 뒤숭숭한 시절에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아침 일찍 만나 하루를 함께한 진천의 산하가 채워 준 감성은 내일의 활력을 기약한다. 차분한 추억 쌓기는 덤이다.
숨 고르기가 필요할 때다. 막연하게 이 시절이 지나가기만 기다리고 있기에는 투명한 햇빛이 너무 눈부시다. 팍팍한 일상에 느낌이 있는 시간이 언제였나. 마음을 채우고 자신을 살펴주는 일을 잠깐 잊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 지도 중심부에 자리 잡은 교육의 도시 청주, 수도권은 물론이고 전국 어디서든 교통과 지리적 접근성이 좋아 하루쯤 후딱 달려가 볼 수 있는 예쁘고 단아한 도시, 무심한 듯 알찬 쉼과 여유로움이 가능하다.
도시지만 시끌벅적하지 않아서 좋다. 한가한 한낮이라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귀하게 시간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 과천, 덕수궁, 청주 이렇게 네 곳에 있다. 한때 연초제조창이었던 넓은 부지를 2018년 12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으로 오픈했다. 예전의 담배공장이 그 모습을 뒤로하고 이렇게나 멋진 미술관으로 탈바꿈하다니 놀라울 수밖에. 국내 최초의 수장형 미술관이다.
총 5개 층으로 구성된 전시관을 보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주말엔 현장에서 수시 입장도 가능하지만 인원 제한이 있다. 그렇지만 여기선 기다리는 시간도 즐거움이다. 모던한 미술관 앞의 넓은 잔디광장을 거닐거나, 벤치에 앉아 바람과 햇살의 평온함을 누리는 것도 이곳에서는 특별하다.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미술관은 재미있는 곳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미술관 옆으로 이어진 건물에 핫한 초대형 베이커리 카페가 있어서 잔디광장을 내다보며 느긋하게 맛있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다.
소통하는 수장고,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미술관은 5층 기획전시실, 4층 특별 수장고(미술은행 소장품), 3층 개방 수장고 및 라키비움, 보존처리실, 2층 보이는 수장고 및 관람객 쉼터, 1층 로비 및 수장고, 프로젝트 영상, 아트존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미술관의 소장품을 보관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인 수장고, 그곳에 관람객이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도록 공개하여 ‘개방’과 ‘소통’을 위한 ‘열린’ 미술관을 지향한다. 덕분에 백남준, 이중섭, 배병우, 김세중, 니키 드 생팔 등 뛰어난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엄청난 예술 작품들의 위용에 압도되어 처음에는 마구 흥분된다. 미술관을 충분히 둘러보고 나면 상상력을 자극받고 알 수 없는 위로와 풍성함으로 뿌듯해진다. 평일 한낮에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도심에 이렇듯 품격 있는 미술관을 품고 있는 청주 시민들이 부러워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입장료가 무려 무료다.)
미술관 바로 옆으로 나가면 1960~70년대 한국 산업화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옛 청주 연초제조창의 담뱃잎 보관 창고였던 7개 동이 시민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탄생한 동부창고다. 그 시절 청주와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졌던 청주의 대표적 산업체였다. 이제는 보존 가치가 높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시민들에게 열려 있는 문화 공간이다. 그 뒤편의 미로처럼 경사진 골목으로 올라가면 드라마 촬영지로 SNS에서 유명세를 치렀던 청주의 마지막 달동네 벽화마을 수암골이다.
그들과 함께한 역사, 무심천과 상당산성
청주를 감싸고 있는 상당산성으로 가는 길에 도심을 동서로 구분하는 예쁜 물길 무심천에서 문득 브레이크를 밟는다. ‘마음을 비운다’는 뜻의 무심천은 봄이면 벚꽃이 눈부시고, 시민들의 산책로이자 휴식처이기도 하다. 언젠가 이곳 출신인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속에서 청주 무심천을 건너는 풍경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청주를 품고 있는 상당산성 앞에 서면 길게 이어지는 성벽과 함께 계절의 푸르름에 가슴이 뻥 뚫린다. 백제 시대 방어 시설로 처음 축성되어 조선 시대에 개축된 상당산성은 면적 12.6ha, 둘레 4,400m, 높이 4.7m, 사적 제212호다.
산성마다 나름의 역사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이 길은 과거 영호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었다고 한다. 역시 드라마 ‘태왕사신기’가 자연스러웠던 풍경이다. 그 견고한 성벽길을 걸어보자. 완만한 4km 순환형 둘레길이어서 아이를 데리고 천천히 걸어도 좋고, 가벼운 트레킹 코스로도 더할 나위 없다. 이 길을 걸으며 만날 수 있는 다양한 풍경이 청주를 알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분명 도심 속의 산길인데도 확실히 도심을 벗어났다는 기분이 든다. 걷기에 따라 1~2시간 정도 길이다. 지난 4월엔 이달의 추천길로 선정되었다.
자연 속으로, 운보의 집
이제 나들이하듯 가까운 근교로 잠깐 나가본다. 청주 시내에서 자동차로 20분 정도 거리에 ‘운보의 집’이 있다. 동양화가 운보 김기창 화백은 어릴 적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각을 상실했지만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화가로서의 역량을 나타냈다. 특히 아내 박래현 화가와의 러브스토리는 전설적이다.
운보의 집이 위치한 청원구 내수읍은 김기창 화백 어머님의 고향이다. 마음의 고향 같은 이곳에 정착하여 노후를 보냈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작품 활동에 전념했던 곳이다. 전통 한옥으로 안채와 행랑채, 비단잉어가 노니는 연못에 정자와 돌담이 운치 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미국 대사관 건물이었던 곳이기도 하다.
아내 우향 박래현 화가의 작품이 함께 전시된 산 아래 운보미술관은 규모가 제법 크다. 미술관을 둘러싼 야외 정원의 조각 작품이나 수석은 자연 속에서 품격을 더한다. 멋스러운 문화예술 공간이다. 부부인 듯 점잖은 커플이 뒷짐 지고 작품에 몰두하는 모습을 본다. 두 분의 뒷모습이 여유롭고 아름답다. 그들을 앞지르기 조심스러워 그림 앞에서 한참씩 걸음을 멈추곤 했다. 비로소 주변을 바라보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예술가의 작품에서 따뜻한 위로를 선물받는 기분이다.
100년 전의 옛 청주역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청주에 청주역이 있었다. 청주시청 부근의 옛 청주역이 ‘옛 청주역사공원’으로 복원된 것이다. 도심 속의 일반적인 공원이 아닌 철도공원이다. 기차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설렘이 생긴다. 교육도시 청주답게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기차역으로 달려오는 풍경이 와락 연상된다.
아담한 역사(驛舍)가 자그마한 옛날 국민학교를 연상케 한다. 민트 색감의 창틀이 옛 느낌을 더한다. 주변 풍경마저 옛 건물들로 즐비하다. 문이 닫힌 시간에 들렀기에 청주의 역사와 과거의 모습이 전시된 내부는 보지 못했지만 옛 청주역의 바깥 풍경만으로도 시간여행을 한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역 광장에 서니 추억의 흑백 필름이 휙휙 지나간다. 어쩐지 가슴 뭉클하는 순간이다.
고품격의 전시, 청주고인쇄박물관
문화도시 청주다. 예향(藝鄕)이라 할 만큼 문화자원이 풍부하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많다. 또한 20년 넘도록 비엔날레를 개최하고 있다. 숲으로 둘러싸인 고인쇄박물관을 빠뜨릴 수 없다. 1377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을 간행한 고장이다.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78년이나 앞섰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기억해야 할 긍지다.
청주고인쇄박물관, 흥덕사지, 금속활자 전수교육관을 순서대로 돌아보면 된다. 본관의 1, 2, 3관과 쉼터, 홍보영상실. 귀중한 소장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위대한 역사의 순간을 느껴볼 수 있다. 금속활자부터 목활자까지 변천사와 ‘직지심체요절’이 지니는 깊은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고려 공민왕 시절에 세워진 직지의 요람인 흥덕사, 인쇄 문화의 이해를 높이는 금속활자 전수교육관이 함께 있어서 차례대로 둘러보며 직지의 위상을 비로소 깨닫는 시간은 소중하다.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아직도 둘러볼 곳이 많은 청주다. 미호천변의 성곽 정북동 토성은 요즘 일몰 때 멋진 실루엣을 찍기 위해 사진가들이 찾아든다. 템플스테이와 석가모니 진신사리로 유명한 사찰 용화사, 역대 대통령들의 여름 휴가지이자 대청호반의 산책로 청남대, 로하스 해피로드 대청호 오백리길,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 마무리와 안질 치료를 위해 머물렀다는 초정행궁(椒井行宮), 청주 역사의 산증인 성안길, 청주만의 맛집 삼겹살거리, 사람 냄새 물씬한 전통시장 육거리시장, 점점 핫해지는 감성 가득한 운리단길… 곳곳이 감성 넘치는 핫 스폿이다.
잠깐 두리번거리면 보물찾기처럼 다가갈 곳이 나타났다. 시종일관 흥미롭고 은근히 끌렸다. 마음도 말랑해지고 행복지수도 높아진다. 기댈 곳 없어 혼자 우두커니 서성일 때 어쩌다 하루쯤 떠났다가 결핍을 채우고 흐뭇하게 돌아올 수 있다. 이곳 청주 출신 도종환 시인이 그의 시 ‘동행’에서 말했듯 ‘먼 길 가다 만난 나무처럼 / 지친 몸 기대게 해줄 푸른 그늘 있다면’ 그럴 때 떠올려보는 곳, 맑은 고을 청주.
햇볕마저 좋다. 다음 주쯤 강화도에 한번 다녀올 참이었다. 고려산의 진달래가 온 산을 물들일 때다. 어느 곳이든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세상이지만, 불현듯 그 산하에 다가가고 싶을 땐 어쩔 수 없다. 강화도는 섬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땅이다.선사시대 고인돌 유적이 남아 있을 만큼 오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곳. 뿐만 아니라 이제는 곳곳에 새롭게 생겨나는 공간의 매력까지 더해지는 중이다.
물이 빠져나간 진득한 갯벌 위로 갈매기 떼가 날갯짓하는 외포항은 한적하다. 바람을 맞으며 포구 앞에서 갯골의 물길을 따라 바라보는 외포리의 생업 현장은 담담한 듯 조용하다. 수산물 직판장은 한가로웠지만 짭조름한 젓갈 냄새가 자연스럽게 풍겨난다. 한가로운 섬에 드니 이렇듯 편안하다. 가끔씩 지나가는 자동차 앞자리엔 바람 쐬러 나온 듯한 부부의 나란한 모습이 간간이 눈에 들어온다. 이 섬에서 얻는 휴식과 평온함의 풍경이다.
강화의 들길을 천천히 달리다 보면 진지나 요새를 만나고, 크고 작은 돈대가 나타난다. 외포항에서 5분쯤 달리면 나타나는 삼암돈대는 석모도를 마주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건너편으로 석모대교가 가로질러 있는 모습이 봄꽃 나무 사이로 보인다.
개화기 역사의 소용돌이가 스며 있는 강화 54돈대 중 하나다. 지금은 그 시절의 모습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지만 4구의 포좌가 해안을 향해 열려 있는 모습을 보니 슬그머니 진지해진다. 인적 없는 자그마한 돈대 안은 적막하기까지 하다. 원형으로 축조된 돈대의 발아래로 바다가 유유하다. 바람에 날리며 떨어지는 봄꽃이 눈부시다. 무기를 보관하던 작은 창고인 듯한 입구엔 냉이꽃이 가득 피어났다.
여유롭게 바다를 내려다보고 석모대교 위로 오가는 자동차들의 꼬리를 따라가는 시선 끝에 또 다른 장소를 떠올렸다. 내비게이션을 확인해보니 멀지 않다. 정보를 통해 진작에 알고 있던 동네 책방이다. 다음 주에 가볼까 생각 중이었는데 이참에 가면 어떨지 잠깐 생각했다. 미리 연락도 해놓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찾아간다. 가끔은 사람의 만남도, 무심코 맞닥뜨린 여행지의 순간도 이럴 때 오히려 더 기억에 오래 남지 않았던가.
책방과 공방의 조화
호수처럼 너른 저수지 옆을 지나고 시골길이 깊어진다. 몇 개의 굽은 고갯길을 거치고 한적한 들판을 달린다. 이렇게 산골마을이지만 사실 강화읍에서는 자동차로 10분 정도 거리다. 길 건너편으로 산 아래 조용히 앉혀진 연꽃마을의 우공책방이 보인다.
금속공예와 목공예 작가인 ‘공방장님’과 시인이신 ‘책방장님’이 그곳에 있었다. 차분하고 담백한 인상의 작가 부부. 색감이 고운 차 한잔 내어주신 책방장님은 일정이 있어서 곧바로 외출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의 결례로 조심스러웠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친절한 배려를 보여주신 공방장 김찬욱 작가님께 고마울 따름이다.
“원래 글을 쓰니까, 그리고 책이 많으니까 그 책을 누구라도 보는 데 쓰고, 사람이 안 와도 책 갖다놓고 책방이라는 타이틀을 놓으면 재미있겠다 싶었죠. 사실 책을 사기 위해 오는 동네 사람은 드물죠. 대부분 어르신들이고, 요즘은 농번기라 논에 물 대기 바쁜 농사철이기도 하고요. 강화의 지인들이 오고, 지나가다 신기하다고 들어오기도 합니다. 가끔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옵니다.”
책꽂이에는 아주 오래된 귀한 책들도 제법 많다. 절판된 책이나 오래전 책을 꼭 사겠다는 분도 있다고 한다. 8000권 넘는 책이 아래층과 위층으로 보기 좋게 가득가득 꽂혀 있다. 알음알음 동네 책방을 아끼는 분들이 책 주문을 하고, 우공책방의 독특함을 찾아서 먼 길을 오는 이들이 있어서 공감과 소통이 이어진다.
머릿속으로 그려오던 것을 나만의 북큐레이션으로 실천하는 것,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독자와 호흡하며 산골 책방을 지켜나가는 모습이 담백하다. 각자의 커리어대로 하던 일도 유지하고 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현재는 멈추었지만 지역사회와 연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입구에 나무와 환경에 관한 책이 배치되어 있다.
“이곳엔 공방이 있으니까 나무도 있고 식물에 관한 책이 많죠. 책방장도 나무나 자연에 관한 책을 많이 선택하고 또 다양한 시집도 북큐레이션을 하죠. 자연에 관한 책, 시집은 특별히 주문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책을 가지러 와서 얼굴도 보고 차도 마시고 합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판을 깔고 의미 있게 보내는 시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스치듯 말한다. 어쩐지 울림을 준다. 바이러스가 사라질 날이 언제일지.
고요한 힐링, 북스테이
또 하나, 이 책방의 멋과 맛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북스테이가 있다. 전망 좋은 책방 2층에 책 여행자들이 편히 쉬었다 갈 수 있는 정갈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 무엇보다도 조식과 석식이 제공되는데 어느 셰프의 상차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손맛 깊은 맛깔스런 밥상이다.
“음식 만드는 것은… 제가 자취를 오래 했거든요. 그러기도 하고 음식을 제대로 맛나게 만들어 먹고 싶은 생각이 항상 있었죠. 그래서 궁금하면 어머니께 여쭤보곤 했어요. 식당을 40년 하셨고 못 만드시는 음식이 없었지요. 같은 재료인데도 내가 만들어 먹을 때는 왜 엄마의 그 맛이 안 나는지 늘 궁금했어요. 북엇국은 왜 엄마처럼 뽀얗게 안 올라올까 전화로 물어보면 기름에 한 번 볶아서 끓여야 한다. 또 순서가 어찌되었느냐, 시래깃국도 양념 넣고 잘 주물러서 넣어야 맛있다 말씀해주셨지요.”
우공책방의 북스테이에서는 엄마의 손맛을 그대로 이어받은 밥상을 받을 수 있다. 산골 동네엔 밥을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점이 없어서 제공한 식사였다. 그러다 보니 의외로 우공책방 북스테이의 푸짐한 고등어시래기찜이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힐링의 북스테이뿐만 아니라 우공책방에서는 목공예 작품을 만들어내는 체험도 가능하다. 작가의 예술적 감성이 스며든 작품을 배워볼 기회다. 책방과 공방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에서 따뜻한 나무의 질감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순하게 아날로그 정서가 발동되고 마음이 풍성해지는 여행 감성을 일깨운다.
자연, 나무, 목공예, 예술, 우공이산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주문받은 작품을 계속 다듬고 있었다. 깊은 손맛처럼 진심이 느껴지는 공방장님의 묵묵한 인상이 책방 이름 우공이라는 글자와 일치하는 느낌이다. 그런 내적 진중함이 만들어내는 목공 작품들이 책방 코너에 진열되어 있다.
햇볕이 쏟아져 내리는 산 아래 책방 마당, 데크를 지나 한편에 자리 잡은 공방장님의 작업장은 와우~ 신세계다. 나무와 금속을 다루는 갖가지 기계 장비들과 공구들이 빼곡하다. 작품을 만들어내는 이들에게 잘 갖추어진 작업장은 뿌듯함이다. 우와~ 하며 놀랄 수밖에. 참죽나무로 만들어낸 책갈피부터 우리에게 친근한 빵도마도 만들어내는 곳, 절로 목공 작업이 확 당긴다.
책방지기의 묵직한 내공으로 배려받은 잠깐의 시간, 그 진중함으로 산과 바다라도 옮길 수 있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모습이 그려진다. 더디 가더라도 내가 주체가 되어 하고 싶은 일 속에 있는 것, 그 시간을 의미 있게 쓰려는 것이 또렷이 보일 때 부럽다.
일어서는데 김찬욱 작가님이 한마디 던진다.
“적석사도 들러야죠? 3분입니다.”
고려산 기슭의 가파른 언덕 위 사찰 적석사에서 내려다본 청정한 연꽃마을, 그곳에 우공책방이 있다.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연촌길 77-10(고천리 217-10) / 고려산 낙조대 적석사 가는 길목
“새벽이나 늦은 밤에 방이 찬가 따뜻한가 항상 점검하고 요 밑에 손을 넣어보고 차면 항상 따뜻하게 몸소 불을 때드리되 이런 일은 종들을 시키지 않도록 해라. 그 수고로움도 잠깐 연기 쏘이는 일에 지나지 않지만, 네 어머니는 무엇보다 더 기분이 좋을 것인데, 너희들도 이런 일을 즐거이 하지 않느냐?”
조선 후기 대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천리 먼 길 유배지로 떠나 살면서 지아비로서의 애틋함과 가족을 향해 노심초사하던 내면을 담은 편지는 지금 읽어도 절절하다. 당시 유배지 강진에서 남양주 마재마을까지 한없이 느릿한 방식으로 아들을 향한 끊임없는 부성을 전했다. 지금처럼 이메일이나 스마트폰, SNS 등으로 빠르게 마음이 전송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 방법이었을 텐데.
경기도 남양주는 다산 정약용의 고향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후에 18년의 유배 생활에서 돌아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다산을 생각하면 다산초당이 있는 유배지 전라도 강진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의 고장으로 알려진 남양주는 팔당 호숫가에 위치한 다산의 생가와 다산유적지가 있어서 인문 여행지로 의미 있다. 그리고 주변에 북한강과 남한강의 두 물줄기가 부드럽게 합쳐져 만나는 곳, 두물머리의 수려한 풍광이 곧잘 그곳으로 발걸음을 이끈다.
결국은 만나는 인연, 두물머리
새벽길은 언제나 상쾌하다. 남양주로 향하는 길에 들러보는 두물머리의 새벽. 두물머리는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양수리 남한강에서 합류한다. 그렇게 되기까지 중간에 여러 경로의 길을 돌고 돌지만 결국은 하나가 되는 인연이다. 어떻게든 서로 만나게 되는 자연의 순리처럼 강줄기가 만들어낸 새벽 풍경은 신비롭다.
어스름한 두물머리의 새벽 공기는 쾌청. 이른 아침에 피어나는 물안개 속에서 400년 나이 먹은 느티나무가 두물머리의 파수꾼처럼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날씨에 따라 멋진 일출을 보지 못하면 어떠랴. 강 건너 산을 감싼 물안개 사이로 뱀섬이 아련하며 가슴이 저릿저릿하다. 그 너머로 유려한 곡선으로 겹겹의 능선이 아스라하다. 빳빳한 자세로 돛을 세운 황포돛배가 오롯하다. 어슴푸레한 여명의 안개 범벅 속에 파묻혔던 시간을 가끔씩 떠올리는 기억의 공간으로 만들어두는 일, 짜릿하다.
두물머리의 새벽 의식은 길지 않다. 이윽고 서늘함이 가신 물길 따라 산책하다 보면 주변에 전망 좋은 브런치 카페도 있어서 여유롭게 쉬어볼 만도 하다. 일상에 브레이크가 걸려버린 요즘, 새벽길 달려와 반길 두물머리가 있다니. 머잖아 연꽃의 운치를 보여줄 차례다.
인문 여행지 남양주 마재마을
자동차로 15분 정도 더 달리면 남양주의 다산 생가가 금방 나타난다. 소박한 듯 기품이 느껴지는 생가 뒤편에는 다산 묘소가 있다. 정쟁에 휘말려 강진 유배 생활을 했지만 다산은 이곳에서 났고, 생을 마감한 곳도 여기다. 남양주의 아들이다. 다산의 5대조부터 자리 잡고 살았던 땅이다.
다산유적지에는 다산기념관, 다산문화관, 실학박물관, 거중기, 다산 문화의 거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주변으로 다산생태공원과 남양주 8경이 둘러 있고, 자연 속으로 북한강 자전거길이 이어져 있다. 산과 강으로 어우러진 다산 생가를 중심으로 슬로시티 남양주의 팔당 다산길을 라이딩 행렬이 시원하게 휙휙 지나간다. 팍팍한 일상을 벗어나고픈 언택트 여행자들이 넉넉히 위안을 얻는다.
또한 손 타지 않은 자연 마을답게 북한강을 앞에 두고 남양주 유기농테마파크가 조성돼 있어 들러볼 만하다. 우리의 24절기에 따른 농사와 의식주 문화를 알 수 있는 생활의 면면이 전시되어 있다.
문 밖으로는 야외 공연장과 동물 체험장, 체험실, 카페테리아 등이 갖추어져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이나 연인들로 가득하다. 당연히 슬로시티 남양주의 농작물 체험 농장이 많다. 그중에 딸기농장에 가면 유기농 딸기를 직접 따서 다양한 요리 체험을 할 수 있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에 들기 전 앞마당엔 수원성 축조 과정에 쓰였던 당시 실제 크기의 거중기를 만나게 된다. 실학정신의 실천을 엿볼 수 있는 역작이다. 여유당은 정갈한 한옥이다.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는 노자(老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관료로서 나라의 부패를 꾸짖던 검소함이 담긴 여유당이다. 고택의 구석구석을 살피다 보면 다산이 유배 시절 가족들과 떨어져 살았던 세월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고 500권이 넘는 저서를 남긴 석학이지만, 아버지나 지아비로서의 간곡한 면모를 알 수 있는 기록도 제법 남겼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1801년 전라도 땅 강진으로 유배될 당시 다산의 나이가 40세였다. 아비로 인해 벼슬길에도 오를 수 없는 자식들을 위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간절하고 세세하게 편지로 소통했다.
부모 곁에 두고 가르칠 수 없어 노심초사하는 아비의 마음이 느껴진다. 친구 사귀는 법, 글을 읽고 쓰고 생각하는 방법, 정보의 중요성, 밭을 가꾸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 인간관계, 술맛을 아는 것, 잘못을 꾸짖거나 칭찬하기, 부모를 위한 생각 등을 세밀하게 전한다. 정약용은 당대 대학자이기도 했지만 자상하고 정이 넘치면서도 깐깐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아직도 효를 강조하고 자식 걱정에 노심초사한다고 누군가는 ‘꼰대’라 말할 법도 한 세상이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의 말씀은 200년이 지났어도 지당하기 그지없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받아들이는 것이라 하니 이해와 해석은 각자의 몫일 뿐.
다산의 저서 ‘유배지에서 보내는 편지’는 어린이용으로도 출간되어 있으니 부모의 마음을 전하는 독서로도 좋을 듯하다. 아이들이 어릴 적 읽었던 책이어서 오래전 기억이 난다. 200여 년 전의 내용이지만 시공을 넘어서 부모 자식 간의 소통 능력은 이 책으로도 충분하다 하겠다.
“몸져누운 아내가 해진 치마를 보내왔다. 천 리의 먼 곳에서 본마음을 담았구려. 오랜 세월에 붉은빛 이미 바랬으니 늘그막에 서러운 생각만 일어나네. 재단하여 작은 서첩을 만들어서는 아들 경계해주는 글귀나 써보았네. 바라노니 어버이 마음 제대로 헤아려서 평생토록 가슴속에 새겨두거라.”
유배 시절 아내 홍 씨가 보낸 빛이 바랜 다홍치마 여섯 폭을 받아 들고 그리움에 슬퍼하며 치마를 잘라 두 아들을 위한 서첩을 만들어 보낸 것이 ‘하피첩’이다.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철학과 인생의 지침을 담은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혼인을 하는 외동딸에게는 남은 치마폭에 ‘매조도’를 그려서 보냈다.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이런 선물을 받아 든 자식들의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멀리서나마 지아비에게 사랑을 전하는 부인 홍 씨의 마음도 헤아려보게 된다.
이 땅의 대석학, 다산
생가 옆에 자리한 다산기념관과 다산문화관은 다산의 삶과 사상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곳이다. 다산기념관에는 다산의 친필 서한 간찰(簡札), 산수도 등과 대표적 경세서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사본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실물 4분의 1과 2분의 1 크기의 거중기와 녹로가 눈길을 끈다.
200년 전 조선의 위대한 학자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다산문화관, 그리고 맞은편의 실학박물관은 2개 층으로 전시실과 북 라운지가 있다. 천천히 빠져 들어가는 시간이다.
실학박물관 옆의 돌계단을 오르면 다산정원이 푸르게 펼쳐진다. 평화로운 정원을 거닐며 역사 속 대석학의 인간적 고뇌와 철학을 마음에 담는다. 빠르게 변해버린 현대의 가족 간에 부모와 자식으로서 꼭 짚어볼 만한 메시지를 전한다. 200년이 훌쩍 넘은 지금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마당에 와서 비로소 알아가는 그분의 인간미와 지적(知的) 서사, 과연 그분이 꿈꾸던 세상이 되었는지.
남양주 마재마을을 다녀와서 오래전 책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을 들췄다. 남도답사 1번지로 꼽았던 전남 강진을 초반에 소개할 때 다산의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어서였다. 유홍준 교수는 그분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다산 정약용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무던히 고심했다. 사실 나 또한 이 시대 대부분의 지식인처럼 다산 정약용을 존경하고 사모한다. 만약 단군 갑자 이래 이 땅의 가장 존경받을 인물을 꼽는 한국갤럽의 사회조사가 있다면 ‘학삐리’ 사회에서는 그분이 단연코 1등을 차지할 것이다.”
마재마을에서 만난 조선 최고의 대학자 다산 정약용, 계절의 푸릇함과 함께 느닷없는 배움의 욕구가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코로나19 때문에 푸르러가는 시절을 놓칠 뻔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747번 길 11(마재마을)
3학년 2반 수업은 현재진행형
덕포진교육박물관 1층의 난로 옆에 앉아서 이인숙 선생님을 기다리며 남편이신 김동선 관장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적함이 적당히 어울리는 박물관 외부와는 달리 전시관 내부는 아주 오래전 아이들의 이야깃거리가 와글거리는 듯하다.
“박물관이 조용하지요. 코로나19 이전엔 동창회 모임이나 학생들이 단체로 많이 왔는데 요즘은 모든 게 뜸해요.”
덕포진교육박물관은 이인숙 선생님의 교직 생활 마지막 담임 반이었던 3학년 2반 교실이 있는 1층 인성교육관, 일제강점기부터의 교육과정 관련 사료가 전시된 2층, 3층의 농경문화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전의 방대한 교육 자료들이 새록새록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감성 문화공간이다.
“우린 부부 교사였지요. 어느 날부터인지 아내가 자꾸 눈이 침침하다고 해요. 그래서 병원을 갔다가 시력이 아주 많이 나빠진 걸 알았어요. 한 6년 정도 병원을 계속 다니다가 더 이상 회복 불능… 의사가 그만 와도 된다고 해요. 그래서 빨리 사표를 내게 했어요. 시력을 잃고 평생 천직이었던 일을 그만두는데 그 좌절감에 난리가 났지. 그 기분을 이해하죠. 그래서 살고 있던 대치동 아파트를 팔고 이 박물관을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마지막 담임 반이었던 3학년 2반 교실도 재현해서 지금도 아내의 수업은 진행 중인 듯 그렇게 살고 있어요.”
그녀의 풍금 소리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전시관 입구를 향해 이인숙 선생님이 들어오고 있었다. 슬로 모션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동시에 들려오는 콧노래가 봄바람처럼 부드럽다.
“반가워요. 여긴 처음인가?” 하이톤 목소리가 힘차다. 오래전에 놀러 온 적이 있는데 선생님께서 풍금 치며 ‘오빠 생각’을 들려주었다고 했더니 “그럼 노래 먼저 불러줄까?” 하면서 풍금 앞에 앉아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를 시작으로 “솔솔 부는 봄바람 쌓인 눈 녹이고 잔디밭에 새싹이 파릇파릇 나고요 시냇물은 졸졸졸 노래하며 흐른다~”를 불러주신다.
3학년 2반 교실에 퍼지는 풍금 소리가 마법처럼 금방 추억 속으로 데려간다. 그러고는 “전에 들었다던 ‘오빠 생각’도 불러줄게요” 하면서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늪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실 제~♪” 순식간에 기분이 경쾌해졌다. 그리고 따뜻하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함께 있을 때 새로움이 보인다
마주 앉은 이인숙 선생님의 가꾸지 않은 머리에 희끗희끗 흰머리가 보인다. 어느덧 70대 중반을 넘겼다.
박물관을 둘러보니 이전과 다름없이 여전한 듯, 그런데 잘 살펴보면 좀 바뀐 듯도 합니다.
“바뀌어야지.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고 생각해요. 그대로인 것만 좋은 것은 아니잖아. 그대로이면 고리타분해져요. 디지털과 섞어놔야 추억의 새로운 면도 보이거든.”
요즘은 영국에서 박물관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아들이 덕포진교육박물관 일을 함께 한다. 젊은 세대인 아들 덕분에 새롭게 바뀌는 부분이 있다고 덧붙였다.
“동심이라는 추억이 늘 기억을 자극합니다. 그래서 기억력도 더 좋아져요. 살다 보면 오래된 것들을 소홀하게 생각하는데 이것들을 디딤돌로 삼아 가꾸어진 것에 나는 자부심을 갖습니다. 요즘은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것을 좋아하지만 현재의 디지털 밑거름이 아날로그입니다. 고생 없는 성공을 사상누각이라고 하듯 어르신들의 역사는 오늘의 든든한 밑거름입니다. 뿌리를 단단하게 해야 튼튼한 나무로 키울 수 있어요. 이 박물관에 저장된 모든 것이 지금까지의 내 삶이고 행복한 추억입니다.”
인정하기와 경청
그렇다면 시니어들과 젊은 세대의 간격을 잘 유지하기 위해 경계해야 할 일이나 어떤 해법이 있을까요.
“난 어르신이나 실버란 말보다는 선배라는 말이 좋아요. 노인대학보다는 선배대학이 어떨지 생각합니다. 인생에서 선배와 후배잖아요. ‘라테는…’으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젊은 그들을 인정해야 해요. 도움을 주고 싶다면 짧고 임팩트 있게 전해야겠지요.
특히 시니어들에겐 경청이 중요해요. 독불장군처럼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들에겐 치매나 우울증도 빨리 온다는군요. 성경에도 있잖아요. 귀 있는 자 들을지어다.”
긍정의 힘은 아주 세다
어려움이 많은 요즘입니다. 흔들림 없이 현재를 잘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조언한다면.
“이런 말이 있어요. ‘행운은 지각은 하되 결석은 하지 않는다.’ 언제든 온다는 말이죠. 무엇을 이루려면 연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연습, 연습, 죽도록 연습입니다. 죽도록 연습해도 죽지는 않아요. 하하. 그리하여 자신감을 갖는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현실 탓, 환경 탓 하기 전에 너 자신을 바꾸어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일상에서 염두에 두는 가치나 마음가짐이 있을까요.
“간단하죠. 내겐 긍정의 힘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 살림집에 화장실이 없고 문 밖에 있어요. 밤중에 화장실에 가려면 다시 양말을 신고 주섬주섬 옷을 잔뜩 입고 머플러로 얼굴을 감싸고 걸어 나와야 해요. 귀찮다고 생각 않고 운동하러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앞을 못 보니까 캄캄한 밤이어도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노래하면서 나옵니다. 하하하. 내 불편을 배우자나 자식이 대신할 수 없어요. 모든 것은 나 자신의 일입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어려움을 넘어선 힘이 있을 것 같습니다.
“눈이 안 보이니까 한탄스러웠지만 빠르게 긍정적으로 바뀌려고 노력했습니다. 말로만으로는 될 리 없어요. 방법을 찾았죠. 좋은 말 외우기입니다. 가장 최고는 노래죠. 내가 생각할 때 대부분의 노랫말은 가장 맞는 말입니다. 노래가 암흑기의 내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뀌게 했지요.”
그러면서 갑자기 “노래 한번 해볼까” 하더니 벌떡 일어나서 “사랑의 노래 들려온다, 옛날을 말하는가 기쁜 우리 젊은 날~” 토셀리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이어서 패티김의 “사랑이란 두 글자는 외롭고 흐뭇하고~”, 가곡 그네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까지 부르신다. 타고난 출중한 노래 실력이었다. 당당하고 거침이 없다. 그뿐 아니라 이야기하는 도중에 틈틈이 들려준 노래가 10곡이 넘었다.
여전히 목소리에 힘이 있고 맑은 소프라노여서 들으면서 즐거운 기운을 얻는다. 매사 자신감 넘치고 씩씩하다. 노래와 함께 즐기는 것이 시 외우기라고 말한다. ‘나만의 두뇌 스포츠’라면서 150편의 시를 외우고 있다니 놀랍다. 그러면서 윤동주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을 줄줄이 읊는다.
나 자신을 가르치면서 산다
이처럼 시종일관 긍정적이고 기운찬 시간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남도 사랑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을 위해 시도 외우고 노래도 하고, 운동 삼아 박물관 3층을 오르내려요. 그러다 보면 주변도 보입니다. 내 앞가림만 하려고 하지 말고 소외된 사람을 찾아보고 마음을 나누다 보면 이게 내 행복이다 생각되고 마음이 열리죠. 시니어라면 그러다가 하고 싶은 일자리가 생길 수도 있고요. 무심히 시간을 보내는 셀프 킬링이 아닌 셀프 힐링이 된다는 거죠.”
이화여대 초등교육과를 졸업하고 교직 22년, 시력을 잃고 교직을 떠났다.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고, 지금도 찾아오는 관람객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그렇지만 외부에 기대할 만한 세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운명은 내가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산다.
그래서 자신만의 멘털 스포츠라는 생각으로 하루에 한 번씩 좋은 일 하고, 10번 웃고, 100자 쓰고, 1000자 읽고, 10000보 걷기를 지키려 노력하지만, 앞이 안 보이는 여건상 쉽지 않다.
“하루 100자 쓰기는 어느 노래든 1절 가사를 꼭꼭 눌러 쓰면 얼추 100자 됩니다. ‘비 내리는 호남선’ 몇 줄 가사 쓰기 쉽잖아요. 나 그게 하고 싶어요. 또 요즘엔 없으면 불편한 스마트폰과 운전면허… 이 두 가지, 내가 그게 없어요.”
유쾌하다가 간간이 쓸쓸할 때도 있다.
선생님께 박물관은 시간 여행이나 마음 나누기 말고도 또 어떤 의미일까요.
“내 마음의 보물입니다. 질 바이든 여사가 백악관에 들어가서도 교직을 유지하잖아요. ‘남을 가르치는 것은 나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다’라면서요. 덕포진교육박물관의 3학년 2반 교실이 있어서 지금도 나 자신을 가르치고 깨우치며 살게 합니다.”
예고도 없이 찾아든 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상이 멈춘 듯 움츠러들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성을 찾아 떠나고 싶을 때다. 여전히 여행은 자유롭지 않다. 그럼에도 갑갑한 일상에 갇혀 있는 자신을 가끔씩 끄집어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물결이 비단처럼 고운 바닷가
삼척을 대표하는 항구 정라진(汀羅津)은 말 그대로 비단처럼 잔잔하다. 그 수면 위로 비치는 바닷가 마을이 고요하다. 한때는 동해안 최대 항구이기도 했던 삼척항이다. 지금은 그 시절의 모습은 사라지고 소박한 어촌 마을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강원도 지도에서 가장 아랫녘에 위치한 삼척, 한때는 동해를 대표하는 무역항이었다. 최고의 호황기였던 1970~80년대 수많은 어선이 항구로 몰려들었고, 노가리와 대구, 정어리, 오징어가 풍년이었다. 그 무렵의 삼척항은 몰려든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우리네 어머니와 할머니는 밤새 잡아온 오징어 손질에 바빴고, 햇볕 좋은 나릿골 마을은 온통 오징어 건조장이었다.
그뿐 아니라 태백산지의 지하자원 덕에 시멘트 공장과 석탄을 원료로 하는 화력발전소까지 들어서서 돈이 넘쳐나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도 있었다. 시멘트 공장은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은 옛 영화가 사라진 소박한 풍경이다. 그럼에도 향수 어린 친근한 이름 정라항(汀羅港)은 여전히 어민들에게 소중한 삶의 터전이다.
정라항은 삼척시에서 2km 정도 거리에 있다. 마을과 가까이 맞닿아 있어 바다를 바라보면서 비릿한 갯내음과 더불어 곰치국이나 싱싱한 활어회를 즐길 수 있다. 그런데 막상 그 거리에 들어서니 조용하다. 가끔씩 통통배의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리고, 어선의 깃발이 바람에 살랑대는 모습이 보일 뿐이다. 활기찬 항구의 소란함이 다시 찾아오길 고대한다.
조용한 항구를 뒤로하고 입구의 말랑이슈퍼를 지나 나릿골 마을에 들어서면 시간이 멈춘 듯 한적하다. 그 길로 좁다랗게 비탈진 골목이 미로처럼 쭉 이어진다. 경사가 어찌나 가파른지 눈비 내릴 때는 어떻게 다닐까 걱정될 정도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는 나릿골은 예전엔 층층이 골은 낮지만 물이 풍부해서 습기를 받은 나리꽃이 지천으로 피어났다고 한다. 지금은 나릿골에서 볼 수 없는 꽃이지만,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나리꽃처럼 정감 어린 감성 마을로 변모하는 중이다.
지나가는 담벼락에 듬성듬성 벽화가 그려져 있어 심심치 않다. 몇 년 전부터 정라항 주변 나릿골을 ‘오감이 피어나고 웃음이 번지며 걷고 싶은’ 감성 마을로 조성해 언덕 마을에 표정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동해안 여행자들의 한 달 살기 등을 지원하기 위해 빈집 6채를 사들여 게스트 하우스로 리모델링했다고 한다. 그 골목길을 따라 가파른 언덕을 숨차게 오르면 그 끝에 무엇이 있을까.
나릿골의 작은 집 4채
나릿골의 작은 집 4채를 삼척시로부터 지원받아 교육관 1동, 전시관 및 체험관 2동, 외부 작가가 거주할 작가의 집 1동으로 리모델링한 미술관이 언덕 끝에 기다리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유휴시설 활용사업 일환으로 탄생한 문화 공간이다.
나릿골의 좁다란 골목길 걷기도 여행의 색다른 재미지만, 미술관을 편히 가려면 산등성이까지 자동차로 갈 수도 있다. 차량 통행이 어려울 만큼 비좁았던 길이 도시재생사업으로 조금 넓어졌다. 걷기가 용이하지 않을 경우엔 택시나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으니 누구나 가파른 그 언덕 끝까지 오를 수 있다.
골목을 돌고 돌아 오르는 길에는 잘 가꾸어진 작은 카페와 아기자기한 시설들이 소소하게 자리한다. 하지만 정상에 올라오면 작은 공원이 있을 뿐 주변 공터는 한산하고 깔끔하다. 요즘 많이 알려진 다른 벽화 마을처럼 예쁘거나 특이한 카페, 또는 포토존 같은 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원하건대 더 이상 부대시설을 늘리지 말고 지금의 단순함을 유지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전망대에 서서 바라보는 바다, 가슴이 뻥 뚫린다. 하늘과 바다와 바람 속에서 머릿속이 청량해진다. 저 멀리로 정라항의 잔잔한 물결이 비단처럼 살랑거린다. 소박한 도시 삼척과 시멘트 공장을 감싸 안은 봉황산의 능선이 부드럽다. 마을 전체가 미술관처럼 보인다. 산언덕 드문드문 알록달록한 색감의 지붕들 사이로 그들의 애잔한 삶이 엿보이고, 텃밭에는 보송보송 파꽃이 피어났다.
미술관은 조붓한 골목길을 따라 몇 걸음 더 내려가야 한다. 길 옆으로 다닥다닥 붙어서 뉘 집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바닷가 산동네, 그 올망졸망함이 문득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군데군데 빈집들이 보인다. 마실을 간 것일까. 나릿골을 두고 먼 곳으로 떠났을까.
바닷가 마을 사람들의 문화예술 활동을 위한 ‘정라항 그리go 작은 미술관’. 나릿골의 감성과 바닷가 마을이 만들어낸 멋진 소통의 공간. 1전시관과 2전시관은 하얀 담장을 두고 몇 걸음 떨어져 있으며, 앞면이 모두 투명한 창으로 되어 있어 바다와 마주한다. 그리고 전시 작가가 머물 수 있는 작가의 집이 전시장 아래쪽에 위치한다. 신선한 물빛 감성을 가득 채우는 시간이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더 멋질 것 같은 곳.
바이러스를 피해 방구석만 지키기에는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겨울이었다. 정라진 항구 마을의 정취를 느끼며 향수 어린 그 시절의 그리움에 잠깐 젖어보는 것도 괜찮다. 해풍에 오징어가 말라가는 자연 속의 건강한 풍경으로 수분을 채우고 위로받는 하루, 기꺼이 만들어볼 일이다. 바닷길과 감성 마을 골목을 천천히 올라 다다른 작은 미술관에서 버석하던 일상에 감성을 채우고 에너지를 얻는다.
어디쯤엔가 와 있을 봄, 삼척항 호젓한 산등성이에 올라 바라보는 비단 물결 반짝이는 바다,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하루다.
주변 볼거리
여행 중에 잠시 휴식을 주는 곳, 죽서루
동해가 아우르는 지역에서 유일하게 강을 끼고 있는 죽서루(竹西樓). 시간 여행하듯 삼척 읍성 성곽로를 따라가다 보면 나타난다. 누각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삼척시 서편으로 오십천(五十川)이 절벽 아래 흐른다. 관동팔경 중에서도 제1경으로 꼽히는 죽서루는 삼척 시내에 있어서 삼척 주변을 여행 중이라면 잠시 들러 쉬어가기 딱 좋다. 죽서루는 송강 정철의 가사에 나오는 터이기도 하다.
평온한 마음의 휴식, 성내동 성당
삼척의 성내동 성당은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천주교 발전사에 의미 있는 곳이다. 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 건축물을 감상할 수 있으며,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한 진 야고보 신부의 순교 기념비와 기념 건물을 볼 수 있다. 종교적 신념을 지키다 공산군에게 피살된 진 야고보 신부의 족적을 천천히 따라가 보자. 성전을 한 바퀴 돌면서 조용히 묵상의 시간을 가지고 성당 주변 풍경에 잠겨보는 것도 특별하다.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 도경리역
삼척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에 도경리역이 있다. 거리상으로는 가깝지만 그곳에 가려면 꼬불꼬불한 산길을 달려야 한다. 예전엔 아주 깊은 산골이었을 듯싶다. 삼척시와 동해시의 경계에 위치하는데 두 도시는 이웃 마을처럼 아주 가깝다. 1939년에 지어진 도경리역은 현재 영동선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랜 역사(驛舍)로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98호다. 일제강점기에 자원수탈의 도구로 역사나 터널을 만들었는데 이 역도 그중 하나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괜찮다. 이제 신종 코로나 팬데믹은 일상 속에서 즐겨볼 수 있는 여행으로 돌파구를 찾는다. 일상 속 여행. 홀로이 걸어서 다녀오기, 또는 자전거나 자동차로 한두 시간 내에 돌아올 수 있는 일종의 근교 여행, 마이크로 투어리즘이 대세인 요즘이다. 마이크로 투어라는 산뜻한 형태로 가뿐하게 즐길 수 있으니 나서는 기분도 가볍다.
이제 3월이다. 3.1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막상 천안의 독립기념관도 함께 떠올려 보지만 선뜻 나서지 못한다. 늘 그래 왔다. 언제든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거리가 멀다고 핑계 댔고 도로가 막힌다는 이유도 있었고 볼거리가 더 많은 곳이 있다 해서 밀려나기도 했었다.
독일 베를린 여행 중에 브란덴부르크 남단의 숲 쪽 방향의 추모공원 홀로코스트에 들른 적이 있다.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고 자신들의 역사적 과오를 드러내며 오늘을 사는 그들의 자세가 신뢰를 갖게 했다. 그래서 독일의 현재가 있음을 느끼게 했던 곳이었다. 역사 왜곡에 안간힘을 다하는 일본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렇게 역사를 잊지 않고 개방하여 널리 알리는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Holocaust Memorial)까지 가보았으면서 가끔씩 이렇게 눈앞의 것을 무심히 지나치곤 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역사적 사실과 그 정신을 가끔씩이라도 기려볼 일이었다.
독립기념관은 천안의 목천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서울과 수도권을 기준으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만 달리면 김포에도 독립운동기념관이 있어서 가까이서 쉽게 그 의미를 돌아볼 수 있다. 물론 규모는 많이 다르다. 그뿐 아니다. 독립만세를 불렀던 천안의 아우내 장터와 같은 김포 오라니 장터에 만세운동의 현장이 있다. 경서 지방의 대표적인 장터였던 김포 양촌리의 오라니 장터와 월곶면 군하리 장터에서 3.1 만세운동을 조직적으로 벌였다는 사실도 새롭다.
시절 탓인지 독립운동기념관은 한적하다. 전시장 입구에서 맞아주는 멋진 영상의 선명한 태극기가 반갑다. 부모님과 함께 온 어린이와 전시실을 묵묵히 오가는 어르신이 눈에 들어온다. 만세운동을 재현한 미니어처와 캐릭터들이 첨단의 세상에 사는 이들에게 지루함을 덜어준다.
독립운동기념관 건물은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획전시실, 사료열람실, 영상실, 로비, 상설전시실로 구성되었다. 잊고 살았던 시간을 재조명해 볼 기회다. 2층의 청소년 문화의 집이나 북카페 등은 코로나의 현실로 지금은 열리지 않지만 1층의 전시실만으로도 볼거리가 쏠쏠하다.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3.1 운동 이야기는 물론이고, 김포지역에서의 3.1 만세운동과 항일의병활동, 그 배경과 특징, 발발 과정을 음성이 포함된 영상과 함께 자세하게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김포는 독립운동가와 항일의병들이 유난히 많았다. 그리고 김포 전 지역에서 주민들의 3.1 만세운동이 전개될 만큼 큰 규모로 투쟁했던 유서 깊은 고장이기도 하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약 2천만 명이었는데 3.1 독립운동 참여 인원이 2백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일제의 총칼 앞에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댔던 순박했던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비폭력 저항의 모습에 가슴 뭉클해진다.
이 모든 역사의 흔적들이 성실히 모아졌다. 당시 일본군들의 야만적이고도 처참한 만행을 볼 수 있고 독립군들의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장을 한 바퀴만 돌아도 당시의 독립을 향한 열망이 전해진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멋지게 조성해 놓은 기념관이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음을 모르고 지냈다니 이런 무심함이 어디 이뿐일까만.
독립의 함성이 느껴지는 전시물을 감상하다 보면 나라를 구하기 위한 그분들의 아픈 과거가 눈앞에 생생히 그려진다. 특히 1910년 안중근 의사가 32세 나이로 뤼순감옥에서 사형집행을 앞두고 받은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글 앞에서는 심장이 멈추는 듯하다.
“나라를 위한 죽음이라면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벌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글이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서신이 될 것이다. 여기 너의 수의를 보내니 이 옷을 입고 잘 가거라. 이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서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서서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고 있겠지만 이런 기념관 관람만으로도 잊고 지냈던 시간을 되짚어 만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덕분에 저절로 호국과 애국의 DNA를 되살려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기획전시실은 매 주기마다 다양한 주제로 기획전시를 열고 있다. 3.1 만세운동의 태극기 물결을 떠올리게 하는 전시장이다. 독립의 역사를 쉽게 이해하며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결집력을 보여준 태극기의 다양함이 펼쳐진다.
‘역사가 담긴 태극기’ 전의 기획전시실이었다. 태극기의 상징성과 태극문양의 의미, 독립운동의 간절함을 담은 김구 서명문 태극기와 태극기 목판 등 저마다의 의미가 담긴 태극기들, 역사와 용도가 다양한 태극기의 면면을 알아가는 게 새롭고 흥미롭다. 한 점 한 점 아프고 묵직한 의미를 담은 태극기들과의 조우가 독립을 향한 당시 우리 국민들의 3.1 운동 정신을 절절히 전한다.
기념관 주변 언덕 위로 조성된 공원이 다시 찾은 평화로움을 대신하는 듯하다. 산책하듯 걸으며 3.1 운동 기념비와 위령탑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쳐 나라를 지키려고 항거했던 이들을 비로소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기념관은 소박하지만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 속에 슬프고 안타까운 사연들이 가득하다.
기념관 가까이에 있는 오라니 장터에서는 해마다 가을이면 축제가 열린다. 그 날의 함성을 떠올리며 3.1 만세운동 퍼레이드를 하고 다채로운 행사를 한다. 그렇게 3.1 운동 100년의 기억을 되살린다. 살면서 가끔씩 잊고 지냈던 것을 모두 함께 되짚어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김포의 독립운동기념관과 주변으로는 산성이나 돈대, 다양한 갤러리와 문화시설이 포진해 있다. 봄 햇살이 따사로워지면 소풍삼아 찾아볼만 하다. 조용한 하루나들이 코스로, 역사여행으로 의미 있음을 알아차렸다면 가볍게 나서보아도 좋을 듯. 한나절이면 된다.
주변 볼거리
김포 아트빌리지 아트센터 & 김포 인삼쌀맥주 갤러리
백제 고대국가의 시원(始原)으로 추측하는 김포 모담산 운양동 자락에 위치한 김포 아트빌리지, 그곳에 수준 높은 전시를 볼 수 있는 아트센터가 있다. 쾌적하고 모던한 현대식 예술공간에서 감상하는 예술가들의 작품 전시 공간이 고퀄리티다. 훌쩍 떠나온 하루 외출에서 품격 있는 시간 획득이다.
아트센터 앞의 너른 야외 공간과 전통놀이체험마당, 주변의 전통한옥 숙박시설, 맛집 등 누구나 언제라도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용요금 무료, 주차무료.
품질 좋은 쌀과 인삼의 특산지인 김포, 김포의 6년근 인삼과 김포쌀로 빚은 인삼쌀맥주와 인삼 전시장도 둘러볼만하다.
세월의 속도가 부쩍 빠르다. 도무지 따라잡기 어려울 만치 세상이 뒤바뀌고 있다. 때론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변화에 비틀거리기도 한다. 충북 괴산의 칠성마을 입구 수령 200년쯤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는 이런 시간 속에서도 묵묵히 지켜온 세월만큼 든든하다. 그리고 느티나무와 함께 수호신처럼 그 자리를 지켜온 시골마을의 어르신이 있다.
청인약방(淸仁藥房)
신종철 어르신이 62년 동안 지켜온 약방이다. 푸른색 양철지붕 집 앞으로 다가가면서 마치 오래된 드라마의 한 장면과도 같은 풍경에 빠져든다. 추억의 흑백영화처럼 세월의 더께로 가득한 주변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유적이 예스러움을 더해준다.
약방 문 손잡이 옆에 종이가 붙어 있다. “점심시간, 1시까지 옵니다.” 정확히 1시에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셨다. 자전거에서 내리면서 "추운데 어서 들어와요. 아이고, 즘심 먹고 오느라 사람을 기다리게 했네" 하고 문을 열며 불쑥 찾아온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신다.
"내가 여기서 약방을 62년 했는데 이 약방과 주변 땅을 군(郡)에 기부했어. 내 몸도 해부 실습용으로 충북대 의대에 기증했고. 그래서 지금은 약도 별로 없어. 가끔 동네 사람들이 급히 소화제나 두통약을 사러 오면 주고. 이젠 이렇게 청인약방이 궁금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 살아온 얘기나 하고 이 마을이나 지역에 대해 말해주는 게 내가 하는 일이지. 저짝에 땅이 조금 있는데 숲 공원을 만들고 있어. 그것도 기증할 거여. 누구라도 쉬어가면 좋잖어."
다 털어내고도 흐뭇해 보이는 인생이다. 노후에 그러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렇지만 삶의 터전이었던 청인약방은 물론이고 우리네 삶의 변천사가 담긴 시간의 가치를 보존하고 싶었단다. 평생을 이곳에서 무탈하게 살아왔고, 약방은 곧 칠성면의 기록이자 격동의 근대사 일부이니 은퇴 후 모든 이들과 함께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1932년 괴산의 칠성마을에서 태어났으니 올해 88세, 곧 구순이다. 청인약방은 62년 전인 1958년에 이 자리에서 문을 열었다. 어릴 적부터 머리가 좋아 중학교 시험을 봤을 때 군 전체에서 2등을 할 정도로 똘똘했지만 밥 먹고 살기도 어려운 시절에 등록금 5000원이 있을 리 없었다. 마침 잘사는 친척이 빌려줬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장례비용이 되어버렸다.
“결국 중학교를 못 갔지, 그대로 있을 수 없었어. 서울에 고향 사람이 하는 치과가 있었는데 거기 가서 일을 배워 치기공사가 되었지. 이[齒]도 만들고 치료도 하고 온갖 일을 다 하면서 공부를 해서 숭문중학교에 갔어. 그런데 학교를 한참 다니는데 6․25전쟁이 터져 다시 사흘 밤낮을 걸어 고향인 괴산으로 내려왔어. 그때 서울에서 치과를 하던 이가 청주로 내려와 본동 치과를 열고는 나더러 또 일을 해 달라는 거야. 그래서 열심히 일해 의대에 꼭 가보자 했는데 그 치과 의사 부인이 계를 깨트리고 떠나는 바람에 내 돈을 다 잃었지. 그 뒤 다시 인천에 있는 치과에서 일하게 되었어. 신포동 32번지였는데 사람들이 늘 북적여 그만큼 일도 많이 배웠지. 그런데 동생이 군대를 가는 바람에 부모님 모실 사람이 없어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야 했어. 일해서 먹고살려면 내가 배운 걸 활용해야 하는데 시골마을에 병원이 있을 리 없잖어. 그때 문득 청주의 병원에 있을 때 충북 약종상협회장이 약 허가증 만들어준다고 했는데 의대 가려고 마다했던 게 생각나서 찾아갔지. 그분에게 허가증을 받아 1958년 이 자리에 약점(藥店)을 연 거야.”
청인약점, 청인약포, 청인약방
약방 이름 앞에 넣은 청인(淸仁)이라는 글자에는, 약방을 차리기까지 청주와 인천에서 배우고 익히도록 도움을 준 분들의 은혜를 생각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허름한 듯 소박하지만 이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평생을 나누고 베풀며 살았다. 의사도 약도 귀하던 시절, 청인약방 주인의 사명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밤낮없이 약을 내어준 어르신은 더러는 십 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환자를 찾아가 아픔을 치료해준 이 고장 모든 사람들의 주치의였다. 그뿐 아니라 지역의 큰어른으로서 마을에 크고 작은 일이 생기면 주민들을 위해 나섰고, 글을 모르는 이가 상을 당했을 때는 수백 장의 부고장도 대신 써줬다. 가난한 이들 보증을 섰다가 떠안은 빚도 수억이었지만 열심히 갚았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결혼식 주례도 섰다. 그렇게 조건 없이 베푼 삶 덕에 자손들도 남부러울 것 없이 잘 살고 있다.
청인약방은 수령이 200년은 넘어 보이는 집 앞의 느티나무와 함께 이 마을의 터줏대감이다. 나무 그늘 아래 평상은 일 년 내내 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된다. 이웃 주민은 웃으며 말한다.
"이곳은 동네 사랑방이었죠. 어릴 적 내 덧니 빼주시느라 고생하셨는데 기억하시려나 모르겠네요, 하하. 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의지하는 어른이십니다."
반질거리는 좁은 마루 둘레에 전시된 약들은 약업의 변천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당시의 톱스타 ‘남정임’이 모델이었던 제약광고 포스터가 입구에 붙어 있다. '아름다워지는 약'. 이처럼 꾸밈없이 순수한 카피라니. 정갈하게 정리된 선반의 모든 약들은 시간을 정지시킨 듯했다.
방문을 여니 방 안이 마치 흑백필름 속 박물관 같다. 낡음이 곧 푸근함으로 다가온다. 사는 집이 가까이에 따로 있어 "불을 안 땠더니 춥다"면서 작은 난로를 켜 손을 쬐라며 밀어준다. 한쪽 벽에 '申宗澈'이라는 이름이 박힌 약사 가운이 걸려 있다. 그리고 오래된 책과 약국 초기부터 써온 일기와 외상장부, 누런 갱지에 꼭꼭 눌러쓴 생생한 기록들. 돋보기안경과 흑백 사진 몇 장, 농한기에 동네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했을 화투도 방 귀퉁이에 놓여 있다. 60년이 넘은 트랜지스터라디오는 아직도 방송 내용이 또렷하게 들린다.
‘늙은이가 되면’이라는 제목이 붙은, 맞은편 벽에 붙어 있는 글에 시선이 머문다.
늙은이가 되면 설치지 말고/ 미운 소리 우는 소리 헐뜯는 소리/ 그리고 군소릴랑 하지도 말고 조심조심 일러주고/ 알고도 모르는 척 어수룩하소/ 그렇게 사는 것이 평안하다오// 이기려 하지 마소 져주시구려/ 한 걸음 물러서서 양보하는 것/ 지혜롭게 살아가는 비결이라오.
일어나서 나오려는데 마침 할머니께서 유모차에 의지해 약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신다. 약방 문 앞에 두 분의 자전거와 유모차가 가지런히 놓인다. 어르신은 얼른 할머니 손을 다정히 잡으며 "우리 안사람이야, 우리 같이 찍을까?" 하며 카메라 앞에 서서 웃으신다. 아름다운 부부, 아름다운 인생, 더없이 잘 살아오신 삶을 바라본다.
"다음에 오면 밥 사줄게. 때맞추어 와" 하며 손을 흔드신다. 비타민 음료 건네받으며 송구했는데 다음엔 군것질 보따리 잔뜩 들고 가서 끊이지 않던 이야기보따리 다시 풀어 달라고 할 참이다.
낯선 여행지에서 마치 숨어 있듯 조용히 자리 잡은 동네 책방을 발견하면 설렌다. 서점은 어디에나 있지만 동네 책방은 그렇지 않다. 어디에나 없어서 특별하다. 언제부터인가 여행 중에 들러볼 코스로 동네 책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여 거리의 당진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낡은 이층집이 포근하게 안고 있는 책방 ‘오래된 미래’를 만났다.
당진의 면천읍성은 ‘성안마을’로 불린다. 마을 입구로 들어가면 저 길목들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산책이 시작되면서 드는 생각은 ‘이 마을엔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가 있는 게 분명해’였다.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옛 마을을 그리워하며 찾아온 듯하다. 이용원이라는 간판을 단 이발소, 상호의 글자가 반쯤 떨어져나간 중국집, 전파상, 세탁소 등이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다. 인적 드문 조용한 그 길을 따라 옛 면천초등학교의 천 년 넘은 은행나무 앞으로 걸어가다 보면 낡은 이층집이 눈에 들어온다. 동네 책방 ‘오래된 미래’다.
동네 책방의 꿈을 열다
문을 열고 들어가 두리번거리며 책장을 넘겨보기도 하고 한참을 서서 책을 읽어도 주인은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다. 아, 도중에 “어서 오세요”라고 눈인사를 했던가. 하던 일이 끝나가는 것 같아 다가가 말을 걸었더니 선한 웃음으로 맞는다. 책방 주인 지은숙 대표다.
그녀가 이 집을 처음 본 것은 아주 오래전이었다고 한다. 당진에 살면서 면천읍으로 가끔씩 놀러갔는데 그때마다 운명처럼 자꾸만 이 집이 눈에 들어오곤 했다.
“10여 년 전에 이 건물을 처음 봤어요. 면천에 놀러 가면 우연히 지나가다가도 늘 이 집이 제 눈에 확 띄었어요. 독특한 외양이었죠. ‘저 집에 책방을 차리면 참 좋겠다’ 했지만 쉽사리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찜하고 있었죠.”
‘자전거포’였던 이 집은 한동안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수년간 빈집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지 대표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예쁘다 예쁘다” 하며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관심만 갖고 있다가 어느 날 시기적으로 맞아서 사들이게 되었다. 지은 지 60년이 넘은 낡은 집이었다. 손볼 데가 하도 많아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골조는 그대로 살린 채 몇 달 동안 남편이 고치고 다듬었다. 그리고 드디어 동네 책방 ‘오래된 미래’를 만들어냈다.
책방 이름 ‘오래된 미래’는 환경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쓴 책 제목에서 따왔다. 인도 북부에 위치한 라다크 사람들이 그 지역의 땅과 유대관계를 맺고 서로 협력 공생을 모색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지 대표는 책방을 열면서 면천이라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공유의 가치를 염두에 둔 듯하다. 참 많이 고민했던 책방 이름이 정해지고 나니 의도에 맞게 착착 일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지인들의 시선은 달랐다. 책방이 있는 면천읍성이 유적지라 개발도 제한되고 어르신들만 사는 곳인데 왜 하필 그런 동네에 책방을 내느냐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았다며 그녀는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시니어들이 뭔가를 시작하면 제2의 인생 ‘무엇’이라고들 하잖아요. 저 역시도 처음엔 책방을 차린다는 말을 섣불리 꺼내지 못했어요. 다들 걱정을 했으니까요. ‘돈 버는 일’을 해야지 다 늦은 나이에 무슨 ‘하고 싶은 일’을 하냐면서요. 더구나 여기서 책이 팔리겠냐고 했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 책방 주인을 꿈꾸기도 한다. 지 대표도 책을 무척이나 좋아한 국문학도 출신. 한때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활할 때 책방 주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5~6년 동안 작은 책방 투어도 많이 다녔다. 아침에 일어나면 책방을 검색하고 새로운 책방이 어디에 있나 들여다보는 일이 다반사였다.
“간절히 원하면 마음을 담아보세요”
“꼭 해보고 싶으면 해봐야 알지 ‘이럴 거야, 저럴 거야’ 미루어 짐작만 하면 결과를 알 수 없잖아요. 뭐든 마음이 간절하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간절함이 용기를 갖게 하더라고요.”
예쁜 카페나 책방 여는 걸 꿈꾸면서 잘할 수 있을까 겁부터 났지만 그래도 꿈만 꾸지 말고 저질러봐야 진짜 그 과정을 아는 것이라고 지 대표는 경험자로서 말한다.
“‘내가 책방을 열면 손해 보는 게 뭐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죠. 크게 타격이 되지 않는다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큰 수익을 생각하지 않았기에 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요. 그렇지만 타격이 크다면 바로 멈춰야죠. 시니어 세대들이 버티거나 고집부리는 건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상황에 따라선 포기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방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컸기에 결정을 못 내리고 망설이던 어느 날 꿈을 포기하게 될까봐 엉엉 울어버린 적도 있어요. 현실 속으로 들어가면 이런저런 상처도 받겠지만 내 마음을 담아 한다면 극복이 되지 않을까요?”
진솔하고 내밀한 이야기가 그녀의 과정을 짐작케 해줬다.
사람들은 묻는다. “책방 해서 돈 많이 벌어요?”라고. 지은숙 대표는 사실 수익을 찬찬히 따져보면 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얻는다고 말한다. 정말 책만 사러 오는 사람이 뭐 그리 많겠냐고 반문하며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이 더 큰 기쁨이라고 했다.
‘동네’라는 지역사회에서 만나 함께 수업을 하고 뭔가를 같이 꾸려가는 것, 그런 게 너무 새롭고 에너지가 생기고 힘이 난단다. 예쁜 소품이나 달력을 하나 만들어 와서 책방 공간에 놓아주는 소소한 마음들이 그녀에게 행복감을 가져다준다면서 진달래꽃이 그려진 지도를 가리킨다. 이야기가 있는 면천 마을에 오신 분들이 읍성이나 책방만 쓰윽 보고 가는 것이 안타까워 좋은 사람들과 마을지도를 만들어 면의 지원을 받아 배포했는데 그 결과물이 뿌듯하단다. ‘오래된 미래’는 어느덧 책만 파는 동네 책방이 아니라 지역문화의 가치까지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지 대표는 그 어엿한 입장을 무척 기꺼워한다.
“우리 동네를 사랑해요”
지은숙 대표는 ‘오래된 미래’가 일반 책방의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문화의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어 다행스럽고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시내 도서관 프로그램을 이곳에서 만들어 배달 강좌도 한다. 재능을 가진 분들이 주거지에서 가까운 책방을 통해 동네 주민들에게 강의를 하고, 작가와 함께 북 토크도 열고, 바느질·면천 역사 수업·독서모임·영화보기 등도 진행했다. 특히 책 만들기 수업을 통해 각자 책을 만들고 나름의 출판 기념도 하기에 이르렀다. 단지 책방으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소통의 공간이 된 것이다.
‘오래된 미래’는 시골 마을의 책방이지만 책이 제법 많다. 책방지기의 책 욕심 때문이다. 처음에 책방을 연다고 하니까 다들 북 카페도 함께 내라는 조언을 많이 했다. 그러나 지 대표는 책을 우선순위에 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곳이 도서관은 아니므로 책을 읽으며 차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괜찮다 싶어 최소한의 음료를 준비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오래된 미래’의 모든 책은 제가 선택했습니다. 사람 마음이 비슷해서인지 반품하는 책들이 거의 없어요. 잘 모르는 책은 딱 한 권만 주문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책은 쌓아놓고 팝니다. 저는 일상적인 책들을 좋아해요. 특히 3~5권 정도 낸 작은 출판사의 책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는데 내용들이 너무 좋아요. 때로는 손님들이 이 책 괜찮다며 알려주기도 해요. 제가 다 알 수는 없으니 그런 말씀 해주시면 고맙죠.”
둘러보니 어쩐지 주인을 많이 닮은 것 같은 책방이다. 책방지기로서 애착이 가는 코너도 있을 듯싶었다.
“어른들의 이야기책이 있는 코너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얘기가 들어 있는 책은 다 구해서 갖다놓고 싶어요. 그림책 코너도 있는데 엄마들이 아이들이랑 오면 아이 책만 고르는 게 늘 마음에 걸려요. 엄마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책을 편안히 골라 읽으면 좋겠어요.”
이층으로 올라가 보니 “이 편안한 공간을 그대에게 허하노라” 하는 것 같아 고마운 느낌이 확 든다. 한쪽 옆으로는 책으로 벽면을 가득 채운 방이 열려 있다. 배 깔고 엎드려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방이다. 천장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공간에는 둥근 탁자와 긴 테이블이 놓여 있다. 차 한 잔 하면서 담소를 나누거나 조용히 앉아 책 읽기 딱 좋아 보인다. 햇살 잘 드는 창 너머로 보이는 옛 면천초등학교와 면천 관아의 문루였던 풍락루(豊樂樓)가 고즈넉했다.
옆으로 이어진 옥상으로 나가면 면천 마을을 전망할 수 있다. 내려다보니 마을 사람들이 사는 다소곳한 가정집들이 보인다. 깨끗하게 빤 빨래가 빨랫줄에 나란히 걸려 가을볕에 뽀송뽀송 마르고 있었다. 마당 끝에는 북 스테이로 활용하는 방도 하나 있는데, 이 방을 이용하려면 자격이 있어야 한다. 면천에 머물면서 마을을 즐기고 책방을 이용해 쉼을 얻고자 하는 여자여야 한다. 식사 제공은 없는 단출한 조건이다. 그렇지만 아침이면 자기도 모르게 누룽지를 끓여다준다면서 지 대표는 또 하하하 웃는다.
동네 책방이 주는 또 다른 가치 ‘나눔’
그러고 보니 ‘오래된 미래’에는 오래된 책을 따로 구비해놓은 공간도 있다. 책방을 하다 보니 옛날 책들도 정겹고 애틋해 한쪽에 코너를 만들었단다.
“책의 가치는 읽는 사람이 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렇게 변한 책들도 데리고 살기로 했어요.”
이뿐만이 아니다. 책방 입구 벽면에는 세 칸의 ‘나눔 책장’이 있다. 여기에 놓인 책들은 팔지 않는다. 누구라도 마음껏 가져다 읽으면 된다. 간혹 자신이 다 읽은 책을 기증하고 싶거나 누군가에게 읽히고 싶어 가져오면 경우에 따라 헌책 값을 계산해주기도 한다. 책방이라는 공간을 초월해 나눔의 의미를 공유하는 좋은 아이디어다.
요즘 동네 책방이 많이 생기기도 하고 또 사라지기도 한다. 무슨 이유일까 궁금했다.
“책방을 시작하는 이들의 계층 분포도가 의외로 넓어요. 젊은이들도 있고 퇴사한 중년이나 시니어들도 있지요. 그런데 젊은 분들은 대부분 임대를 얻어서 하다 보니 현실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돼요. 시니어들은 저처럼 수년씩 고민해서 결정하거나, 또 사는 집에 딸린 공간을 이용하는 분이 많아요. 아무래도 젊은이들보다 임대료 부담에서 좀 더 자유롭죠. 그래서 오래가는 게 아닐까 싶네요.”
면천이라는 오래된 마을이 주는 고즈넉함, 그 분위기 속에 ‘오래된 미래’는 아주 잘 어우러져 있다. 지낼수록 점점 더 애착이 간다는 책방지기의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동네 책방이 주는 가치가 충만한 시골 마을의 가만가만한 가을 한나절이 따스했다. 문은 연 지 아직 2년 남짓밖에 안 되어 서툴렀던 부분도 있었다. 그걸 조금씩 보완하면서 지금처럼 성장하고 싶은 게 그녀의 바람이란다. 지 대표는 밝게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그렇지만 책방을 하고 싶었던 오랜 꿈이 이루어져 지금 너무 행복하고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