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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삶에도 ‘확장된 매뉴얼’이 필요할까?
- 서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보물 같은 곳이 많다. 지하철 2개 노선이 지나고 시외버스정류장까지 몰려 있어 정신이 없는 사당역에서 가까운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이 바로 그런 곳 중 하나다. 이곳에서 ‘확장된 매뉴얼’ 전(2018년 12월 11일~2019년 2월 17일)이 열리고 있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적벽돌 건물의 미술관은 들어설 때부터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번 전시회의 흥미로운 제목을 설명하기 전 현대미술의 경향부터 살펴봐야겠다. 최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놀랄 만한 일이 발생했다. 예상 낙찰가 한화 1000만 원 정도였던 작품 ‘에드먼드 드 벨라미(Edmond De Belamy)’가 5억 원에 육박하는 금액에 낙찰된 것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을 인공지능(AI)이 그렸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파리에 사는 3명의 청년이 개발한 인공지능 화가 ‘오비어스(Obvious)’가 14~20세기에 그려진 초상화 1만5000점의 데이터를 학습한 뒤 그린 초상화다. 이 작품을 보면 프랑스 미술평론가 니콜라 브리오가 그의 책 ‘포스트 프로덕션(Post Production)’에서 언급한 “현대 예술은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고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것으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이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확장된 매뉴얼’ 전은 이러한 현대 예술의 흐름에 영향을 받아 이미 만들어져 있는 작품을 변화 발전시켜 확장한 새로운 창작물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회의 독특한 제목은 그 의미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대상 작품은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으로 현재 화단에서 독보적인 길을 걷고 있는 젊은 여류작가 4명의 것이다. 먼저 감상할 작품은 정소영(1979) 작가의 ‘잉크 드롭(Ink Drop 2007)’, ‘물질’, ‘라이트 콜렉터(Light collector)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술 공부를 한 뒤 2007년 귀국한 작가는 우주 공간에 관심이 많다. 또한 그 사이에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현상의 유동성을 표현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주 공간의 수많은 존재는 생성·발전·소멸한다는 것을 상기하고 있다. 2층 전시실에서는 강서경(1977) 작가의 ‘검은 유랑’과 ‘정(井)을 만날 수 있다. 이 작가의 특징은 ‘사각형’과 ‘쌓기’다. 동양화를 전공한 강 작가는 사각형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고 표현하기도 한다. 2018년 세계적인 아트페어인 스위스 아트바젤에서 ‘발루아즈 예술상’을 받았다. 맞은편 전시실에는 이은우(1982) 작가의 ‘3, 5, 8, 9mm/W R B Y G NO NR NP NG (2008)’, ‘붉은 줄무늬(2016)’, ‘오뚝이(2018)’가 있다. 이 작가는 물건과 작품의 차이에 대해 관람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물건이든 작품이든 그 안에 사회를 담고 공들이는 과정은 차이가 없다는 걸 주장하고 있는 듯 보인다. 또한 관람객이 작품을 일상의 물건처럼 편하게 대하길 바라는 마음도 엿보인다. 마지막으로 김민애(1981) 작가의 ‘화이트 큐브를 위한 구조물(2012)’, ‘네 모서리(2018)’, ‘바퀴로 움직이는 조각(2018)’, ‘자립조각(2018)’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작가의 자화상이자 사회 현상에 대한 풀이다. 주어진 환경과 시스템의 영향으로 개인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벽에 못을 박지도 못하고 창문의 빛도 막지 않은 채 작품을 전시한다. 그래서 새로운 구조물을 세우거나 나무나 신주 등으로 작품 고정 방법을 바꾸다 보니 작품까지 저절로 변화 발전해 확장된 매뉴얼이 됐다. 이번 전시회는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을 하도록 해준다. 스마트폰이 두뇌의 확장이듯 개인이 갖고 있는 재능과 장점을 확장한다면 우리 인생의 의미도 더 폭넓어지지 않을까?
- 2019-01-30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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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괴산 산골에 사는 김종웅·방성녀 씨 부부
- 겨울 칼바람이 맵차게 몰아치는 산골이다. 마을의 품은 널찍해 헌칠한 맛을 풍긴다. 산비탈 따라 층층이 들어선 주택들. 집집마다 시원하게 탁 트인 조망을 자랑할 게다. 가구 수는 50여 호. 90%가 귀촌이나 귀농을 한 가구다. 햐, 귀촌 귀농 바람은 바야흐로 거센 조류를 닮아간다. 마을 이장은 김종웅(76) 씨. 그는 이 마을에 입장한 1호 귀농인이다. 김 씨의 이주 이후, 그의 소개나 추천에 이끌려 이곳으로 덩달아 귀촌한 지인들도 많다고. 귀농 이전, 김종웅 씨는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특별할 것도 모자랄 것도 없이 무난하게.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서울을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더 이상 서울에서 살다간 목숨을 보존하기 어렵겠는걸!” 그런 투의 독백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절절하게 치올라 목으로 터져 나오는 걸 깨닫고서였다. 몽둥이를 높이 쳐든 빚쟁이들에게 주야로 쫓겨서가 아니었다. 위험한 사상을 유포하거나 발칙한 범죄를 자행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선량한 소시민의 노릇을 다하며 살아왔노라 자부하는 인물이다. 사적으로 원한을 사거나 공공의 적으로 몰릴 행장 따위를 눈곱만치라도 지은 바가 없었기에. 그렇다면 뭣 땜에? 단순하고도 절박한 이유 하나가 있었다. 몸이 자지러지는 적색경보를 울렸던 것. 심혈관질환을 가지고 있었던 김 씨는 어느 날 졸도를 해 응급실 신세를 졌더란다. 뇌졸중이었다지. 다행히 위기를 잘 넘기긴 했으나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쯤에서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면 하나밖에 없는 명줄을 졸지에 놓칠 수도 있는 상황임을 직시하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던 것 같다. “옳다구나, 시골로 가자!” 여러 밤을 잠 못 이루고 눈을 끔벅이며 심오한 연구를 하다 어느 아침에 내린 결론이 그랬다. 얘기를 들어볼까. “아이쿠, 이러다가 나 죽겠구나, 칠십도 안 된 나이에 그럴 순 없지, 설령 죽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산골에서 죽자, 과수 농사를 지어 좋아하는 과일이나 실컷 따먹다가 죽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어요. 그런데 말이죠, 시골에 살다 보니 건강이 엄청 좋아지더라고. 그 무엇보다 서울에서 받고 살았던 스트레스라는 게 사라진 덕분이라 봐요. 맑은 공기와 깨끗한 먹거리도 도움이 됐겠죠. 귀농으로 얻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건강 회복은 가장 크게 얻은 선물입니다.” 사람의 몸뚱이는 내남없이 조만간 땅에 묻혀 한 줌 풋거름으로 돌아간다. 그러하니 숨이 붙어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남은 시간을 선용해야 한다. 김 씨는 산골을 요번 인생 최후의 근사한 정처로 점찍은 뒤 미련 없이 서울생활을 청산했다. 미련이 남을 만큼 화려하거나 열광할 만한 서울생활도 아니었다. 근면과 성실을 인생의 교사로 여기고 오로지 바지런히 일하고 또 일했을 뿐이다. 그로써 처자를 어엿하게 건사하고, 아울러 건전한 세상과 명랑 사회 건설에 암암리에 이바지했던, 그지없이 평범하고 떳떳한 서울살이였다. 일 중독이 행복한 에고이스트 김 씨는 오랫동안 전파상을 운영했다. 전파상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부터 자동차 정비일을 했다. 그의 별명은 맥가이버. 드라이버 하나면 뭐든 뚝딱 뜯어 고치고 헤집어 살려낸다. “누가 뭐래도 난 유능한 전자 기술자야!” 그런 자부심으로 자신의 직분에 충성과 충실을 다했던 모양이다. 도대체가 방황이나 일탈은 물론, 시련과 굴곡이 없는 인생이었다는 거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신비할 지경이지만, 운명의 신은 보디가드처럼 그를 각별히 수호해 이 살벌한 세상의 파랑을 사뿐히 건널 수 있도록 도운 것 같다. 그런 김 씨에게 귀농이란 어쩌면 생애 최초이자 최후의 도전이거나 반전일 게다. 그는 아내 방성녀(71) 여사에게 ‘고지식한 남정네’라는 소리를 넌덜머리나도록 숱하게 들으며 살아왔다. 그러고 보면, 조용하고 점잖은, 좀 딱딱한 이 남자의 돌연한 산골 이주란 ‘남산 위의 저 소나무’가 도봉산으로 이사 간 것만큼이나 신기하고 기발한 행보라 할 수밖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난제를 기어이 풀어야만 할 특유의 사정이 그만큼 절박했겠지. ‘건강 회복’이라는 미션 말이다. “전파상이 호경기일 땐 수입도 짭짤했어요. 하루에 쌀 두세 가마에 해당하는 수입을 올렸으니까. 그것참, 그 당시 재테크에 눈떴다면 꽤나 재미를 봤을 테지만, 그런 재주, 도통 없었기에 그저 저축이나 부지런히 했어요. 서울을 뜨려고 자산을 정리해 보니 7억 정도의 자금력이 되더라고. 이것의 절반가량을 귀농 비용으로 썼어요. 농토 구입과 집짓기에 필요한 자금으로.” “귀농하신 지 9년이 지났죠? 일흔 나이를 목전에 두고서 농사를 택하셨어요. 그게 무모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최대치로 몸을 쓰는 게 농사라서. 게다가 건강에도 적신호가 왔는데.” “제가 천성적으로 일을 좋아해요.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 어느 날 제가 조용히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직 일이 좋아 일에 사는 사람이더라고요. 서울에서도 열심히 일했지만, 서울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골에선 더욱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게 되더라고요. 농사는 제게 적격이거든요. 게다가 과일을 좋아해 과수원을 하고 있으니 일석이조라 할까.” “오직 일을 좋아한다는 말씀, 얼른 곧이들리질 않아요.(웃음) 일보다 더 즐거운 것들이 많은 게 인생이지 않나요?” “집사람이 저를 두고 말하길, 너무나도 부지런한 사람, 불쌍할 정도로 일만 아는 남자, 놀아본 적이 없어 노는 방법 자체를 모르는 남자라 합니다. 그러나 어쩌나? 저는 일에서 성취감을 느껴요. 아마도 일종의 일 중독자이겠으나 저는 그게 만족스러워요.” “과수원의 수익성은 어때요?” “지금은 사과농사를 하지만 몇몇 작목을 두루 경험해봤어요. 매번 신통치 않더라고. 농사 기술 자체가 서툴기도 했지만 판로가 늘 문제였어요. 현재는 사이버 판매망을 구축해 그럭저럭 무난하게 굴러갑니다. 부부 두 사람의 인건비 정도 건지는 수준이지만 이마저도 행운이지 않겠어요? 이 늙은 나이에 일하고 싶은 만큼 실컷 일할 수 있다는 건 농사가 주는 최상의 즐거움이고요.” 사람이 너무 한가하면 수상한 생각이 몰려든다. 그러나 오직 일벌레로만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는 동물이다. 휴식과 놀이도 일종의 생필품이지 않겠는가. 저 명랑하고도 흥겨운 옛날 유행가가 외쳐대듯이, 우리는 틈틈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구현해야 하는 것이며, 늙어서도 짬짬이 잘 놀아야만 한다. 카를 마르크스가 얘기했듯이, 단지 노동에만 매몰된 인간은 짐승보다 불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 씨는 일을 숭상하기를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아니한 채 살아왔다. 마르크스가 아니라 마르크스 할아버지가 왕림해 뭐라 고상한 조언을 해도 자신의 소신을 수정할 용의가 전혀 없는 인물이다. 서울에서도 그랬듯이, 지지구재재구 귀여운 새들이 종일 노래를 하는 목가적인 전원에 내려와서도 그는 자신에게 일의 대가(大家)라는 임명장을 수여하고서 쾌재를 부른 것 같다. 이렇게 자신의 몸을 오직 자신의 일을 위해 고용한 사람의 집 안팎은 먼지 한 점 없이 청결하다. 농장일을 마쳤더라도 밤늦게까지 외등을 밝혀 마당을 쓸고 닦고 다듬어야 직성이 풀려 비로소 발 뻗고 편한 잠을 자는 사람! 일테면 하늘이 와지끈 무너진다는 특급 뉴스가 들려온다 하더라도 오늘 할 일은 기어이 오늘 당장 완수하는 사람! 그의 아내 방성녀 여사의 증언이 그렇다. 아내는, 이런 일벌레 남편과 사는 일이 때로 끔찍하지 않을까? 숨 막히지 않을까? 이쯤에서 잠깐 방 여사님의 얘기를 들어보자. “한마디로 일에 미친 양반이에요. 죽기 전엔 못 고칠 버릇이라 봐요. 귀농할 땐 이제 좀 즐기며 부부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자 했지만, 이미 몸에 밴 습성이 안 바뀝디다. 한잔합시다, 하면 안 해! 놀러갑시다, 하면 싫어! 개미처럼 일하고 다람쥐처럼 굴레 속에서 빙빙 도는 인생이지요. 건전하고 씩씩한 남편이지만 일 중독을 행복으로 여기는 에고이스트예요. 무엇으로 어떻게 이 양반을 뜯어말릴꼬? 남편으로서도 일이 오직 즐거울 리 있으랴, 하는 생각에 새삼 연민을 느끼기도 해요. 언젠간 저 양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가득 맺히더라고요. 아, 당신, 힘들어하는구나, 덧없이 흐르는 노년을 아쉬워하는구나. 둘이서 껴안고 함께 엉엉 울었어요. 그러면 뭐하나? 이튿날이면 다시 일벌레로 돌아가는걸.(웃음)” 한 달 생활비는 50만 원 일의 대가 김종웅 씨의 일 종목은 농장일과 가사에 그치지 않는다. 귀농 이후 뒤늦게 독학한 컴퓨터 실력을 바탕으로 괴산군청 사이버 기자로 맹활약을 해왔다. 충북 도지사가 임명한 충북 귀농 홍보대사로도 활동한다. 게다가 마을 이장까지 맡아 동분서주! 76세 노인이 후루룩 손쉽게 해치울 수 있는 일들은 아니니 가히 장관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노구에다 청년의 정신을 이식하는 방법을 일찌감치 터득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귀촌·귀농인들은 흔히 동네 이장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만 정착이 빠르다고 널리 알려졌다. 이장을 마을의 절대 권력자로 보는 눈들도 있지 않던가. 하나, 김 씨의 생각은 다르다. “이장의 횡포나 전횡을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제 경험으로는 그게 다 옛날 얘기예요. 요즘 이장들은 엄청 심한 시집살이를 합니다. 마을 심부름꾼일 따름이에요. 업무도 너무 많아요. 공무원 일의 절반쯤은 도맡아 하니까. 활동비 20만 원이 나오지만, 무척 힘이 들고 내 시간 빼앗기고, 봉사정신이 아니고선 감당하기 쉽지 않을 거라.” “봉사정신으로 일한다 하더라도 고충이 많겠죠?” “전엔 원주민과 귀촌·귀농인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잦았어요. 그걸 중재하고 화해시키는 일, 그게 이장 몫이라 여기고 나름 애썼어요. 지금은 원주민 비율이 확 줄어 텃세 같은 걸 부릴 세력 자체가 거의 사라졌지만.” “아마도 이 마을에 전무후무한 일꾼 이장이 납셨다고 정평이 났을 듯.” “깐깐한 이장이기도 해요. 시골사람들은 흔히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태우는데요, 전 그걸 가만히 두고 보질 못하겠더라고. 속으로 꾹꾹 누르고 참노라면 스트레스 받으니까.” “한 달 생활비는 얼마나 쓰시죠?” “도시에서보다 지출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게 귀농의 장점입니다. 우리 부부는 한 달 평균 50만 원쯤 쓰며 살아요. 그 이상 지출할 때도 있지만, 남아도는 달도 많았어요.” “앗! 겨우 50만 원?” “돈 들어갈 게 없습디다. 먹거리는 거의 자급자족을 해요. 술, 담배 안 하지, 외식 안 하지, 불가피한 외출 외엔 틀어박혀 일만 하지, 뭐 돈 들게 있을까나. 약간의 부식비, 공과금, 차량 유류비 정도만 해결하면 되니까. 애당초 집사람이랑 50만 원으로 살자 다짐하고 귀농했는데 자연스럽게 실행되더라고.” 눈치 빠른 독자라면 뒤에 이어진 김 씨의 언설을 이미 미루어 짐작하리라. 돈보다 귀한 가치, 돈 주고 살 수 없는 만족과 행복의 요소에 관한 견고한 철학의 표명이 있었으니, 그건 일에 관한 예찬이 아니면 달리 무엇일 수 있으랴.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 질문을 거창하게 해보았다. 열심히 사시는 당신에게 남모를 회한이 있다면 그건 뭐냐고. 한참을 생각하다 들려준 답은 뜻밖에도 정감에 찬 것이었다. “허무하게 늙어가는 아내를 농장에 내놓아 얼굴을 그을리게 만든 것. 그 하나예요.” 김종웅 씨가 들려주는 귀농 준비 Tip •비빌 만한 언덕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게 현명하다. 인척이든 지인이든 연고가 있을 경우엔 적응이 빠르고 외로움을 덜 수 있으니까. •시골에서 만족할 만한 소득을 올리기는 어렵다. 어느 정도의 자금력은 필수다. •원만한 처세를 하지 않을 경우 원주민들에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다분히 보수적인 시골 풍토를 이해, 충돌만큼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 2019-01-0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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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웰다잉’과 가족의 ‘웰빙’을 위한 ‘상속’ 추천도서
- 제대로 상속을 준비한다는 건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 즉 웰다잉과도 밀접하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남은 가족의 삶에 힘이 되고 밑거름이 되는 소중한 행위다. 상속에 관한 지식을 채우고 지혜를 일깨워줄 도서들을 소개한다. 상속·증여 A to Z, 2018 신간 1) 2018 아버지는 몰랐던 상속분쟁 (최세영 외 공저, 삼일인포마인) 상속분쟁을 피하기 위한 과정, 상속세를 합법적으로 줄여나가는 방법, 신탁과 보험을 이용해 의도대로 재산승계를 이루는 노하우 등을 담았다. 일반적으로 기피하는 ‘죽음’을 삶의 연속으로 받아들이고, 유종의 미 차원에서 ‘상속’을 이야기한다. 남은 자녀들을 위한 아버지의 마지막 배려로서 재산을 남기는 방법을 사례로 풀어간다. 주요 목차 △똑같이 나눠준 재산, 과연 정답일까? △치매가 두려울 때, 나의 현명한 선택은? △아들에게 바로 증여하지 마라! 며느리가 나설 때다! △증여세 부담 없이 자녀의 창업자금 마련할 수 있다 2) 재산, 자식에게 절대로 물려주지 마라 (노영희 저, 둥구나무) 제목은 말 그대로 자녀에게 재산을 주지 말라는 뜻이 아닌, 어떻게 잘 물려줄 것인지 고민하고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반어적으로 드러낸 표현이다. 저자는 “진정 자식의 행복한 미래를 생각한다면 상속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너무 늦지 않게, 정신이 멀쩡할 때, 가족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는 마음으로 상속에 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주요 목차 △재산상속, 이렇게 황당한 케이스도 있나? △새로운 선택 ‘상속보다 기부를’ △물려준 재산 되찾기 △5070세대가 꼭 알아둬야 할 상속증여의 기술 3) 2018 기업경영과 증여·상속 (김창영 저, 영화조세통람) 증여세 관련 기본사항과 상속에 대한 민법 규정을 포함한 상속세 기본사항을 순차적으로 풀어냈다. 거래유형별로 증여문제를 상세하게 구분해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증여세 과세특례 부분은 별도로 구성했다. 상속이 개시된 이후의 주요 절차, 업무처리기관, 신고 시 필요서류 등 실무사항을 알려주며, 활용도 높은 상속세 및 증여세의 절세전략을 소개한다. 주요 목차 △거래유형에 따른 증여의 이해 △가업승계 증여세 과세특례 △공과금, 장례비, 채무액을 빠짐없이 챙겨라! △상속 개시 후 절세방법은 이렇다! 사례로 풀어본 상속·증여 1) 상속전쟁 (구상수 외 공저, 길벗) 남편이 생전에 내연녀에게 준 재산에 대한 상속세 고지를 본처가 내야 하는 황당한 경우, 친어머니처럼 모시며 지극정성으로 병수발까지 한 새어머니의 재산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경우 등 황당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상속 관련 사례들을 담았다. 책을 읽고 나면 상속법은 때론 야속하지만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요 목차 △분쟁을 피하라! 올바른 유언의 방법 △엇갈린 부부, 억울한 자식… 상속에서 일어나는 뜻밖의 스캔들 △남다른 스케일, 기업&가업 상속 2) 최신 사례로 꼼꼼히 설명한 상속 증여 (홍원표 저, 인벤션) 최대한 절세하면서 재산을 남겨줄 수 있는 안전한 길을 제시한다. 아울러 법에 저촉되는 방법을 선택했을 때 감수해야 할 위험성도 함께 지적한다. ‘Q&A 코너’를 마련해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 일반인이 굳이 알 필요 없는 어려운 상속 이론은 덜어내고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사례 중심으로 쉽게 설명한다. 주요 목차 △상속vs증여vs양도 무엇이 유리할까? △개인 기업을 미리 물려주고 싶다면 법인전환 후 승계하라 △보험은 정말 상속세를 절세할 수 있을까? 3) 세금은 아끼고 분쟁은 예방하는 상속의 기술 (전오영 외 공저, 매일경제신문사) 실생활에서 부딪히는 상속 분쟁을 어떻게 준비하고 해결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췄다. 상속 전문 세무사들이 제시하는 상속 가이드라인과 상속세 기본 계산 구조, 상속공제, 세액공제, 올바른 납부방법 등을 통해 상속세를 아끼는 방법을 소개한다. 상속 이후 상속인들이 상속 재산을 운용할 때 발생하는 세금을 최소화하는 방법까지 담았다. 주요 목차 △그래도 챙겨주고 싶은 자식, 더 주는 방법은 무엇일까? △모든 재산을 주는데 부모 노후를 책임지지 않을까 걱정된다면? 상속, ‘돈’이 전부는 아니다 1) 한 권으로 끝내는 상속의 모든 것 (서건석 저, 라온북)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상속의 다른 측면, 돈이 아닌 인생의 지혜와 가족정신을 물려주는 과정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는 가족이 돈에 대한 경제관념을 공유하고, 함께 봉사·기부 등을 하면서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자녀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말한다. 부모 세대의 정신적 유산을 잘 상속하는 법을 통해 3대가 부유해지는 상속 전략을 상세하게 안내한다. 주요 목차 △3대가 부유해지는 철학과 가치관 상속 △위대한 상속을 위해 당신이 오늘부터 시작할 것 △나의 상속 계획을 가족과 공유하라: 상속노트 2) ‘최고의 유산’ 상속받기 (짐 스토벌 저, 예지) 세계적인 대부호 레드는 유언장을 통해 그의 손자에게 일생일대의 프로젝트 ‘최고의 유산’을 상속한다. 손자는 매달 1개씩 12개의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데, 이는 레드가 유산상속을 빌미로 돈보다 소중한 삶의 가치를 일깨워주고자 한 것이다. 손자는 ‘최고의 유산’을 거머쥐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과제를 수행하지만, 결국 12가지 인생의 지혜를 터득해나간다. 주요 목차 △‘일’이란 유산 △‘고난’이란 유산 △‘나눔’이란 유산 △‘하루’란 유산 3) 유대인의 상속 이야기 (랍비 조셉 텔루슈킨 저, 북스넛) 유대인이 상속받아온 정신적 유산 40가지를 정리했다. 그들의 유산에 담긴 지혜와 번영에 관한 조언부터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까지 아우른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교육을 받고,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삶을 살다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지켜야 할 유대의 전통과 관습을 담았다. 말미에는 유대인들이 상속받는 특별한 7권의 도서를 소개한다. 주요 목차 △자녀를 현명하게 사랑하라 △보화보다 지혜를 물려주어라 △유대인이 물려받은 책들
- 2018-10-2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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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엄마 나라인데…” 생모 찾기 위해 한국 찾은 존 고 조이 씨
- “오늘은 먼 곳에서 특별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멀리 미국 유타주에서 오신 존 고 조이(John Ko Joy) 씨입니다. 이 분은 한국 전쟁 중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56년 만에 한국에 오셨습니다. 힘찬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6월 3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 신수교회 주일 예배시간. 트럼펫을 든 한 남자가 성가대와 함께 나와 협연했다. 듬직한 체구에 웃음 밴 얼굴의 조이 씨. 그는 어머니를 찾기 위해 입양 이후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미스터 조이, 인터뷰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으니 “기쁜 마음으로 응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성사시키지 않으면 평생 할 수 없는 인터뷰였다. 이별을 직감한 조이의 선택 조이 씨의 어머니는 16세 어린 나이에 조이를 출산했다. 미숙아로 태어난 조이는 잔병치레가 많았지만 미군이던 생부 덕에 미군 야전병원에서 진료 혜택을 받으며 치료받았다고 했다. 조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생부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소식이 곧 끊겼다. 생각지 못한 임신과 어려운 가정 형편. 조이를 한국에서 키울 수 없다고 판단한 생모는 아들을 해외로 입양 보내기로 한다. 그렇게 조이 씨는 부산에서 일본 도쿄를 거쳐 하와이를 지나 미국 본토로 갔다. 어린 나이에도 험난한 사회에서 안 굶고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고 했다. 차라리 모국에서 버림받아 미국행 위그선에 탑승한 것이 노아의 방주에 승선한 행운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고 밥을 굶고 있을 가족이 걱정됐다고 회상했다. “‘플라잉 타이거’라는 비행기 모양의 ‘위그선’을 타고 떠났습니다. 미국으로 가는 일주일 동안 햄버거와 오트밀 수프만 먹었습니다. 그동안 먹었던 된장찌개와 김치가 갑자기 그립기도 했죠. 아니 김치를 찢어 숟가락에 올려주던 엄마가 그리웠습니다. 굶어도 엄마 옆에 있는 것이 좋았다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위그선에는 500명 정도의 영·유아가 베이비 박스에 담겨 배 3층까지 정렬돼 있었다. 얼굴 부분은 열려있었고 가슴 부분에는 양부모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있었다고 했다. 마치 “과수원에서 과일을 포장하여 출하하는 모습이었다”고 그 당시를 회고했다. 위그선 안에서는 수십 명의 간호사가 아기를 돌봤다. 입양이 생모와 영원한 이별임을 직감했던 조이 씨는 훗날 혈연을 찾 는데 도움될까 싶어 이름을 아버지의 성 ‘존’, 어머니의 성 ‘고’ 그리고 자기 이름 ‘조이’를 사용했다고도 덧붙였다. 인생의 친구 트럼펫을 만나다 조이 씨는 미국 유타주에 사는 좋은 양부모를 만났다. 1953년생으로 조이 씨가 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1958년 12월 19일. 조이 씨의 입양일인 동시에 새로운 생일날이 됐다. 처음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자기가 잘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잘 못 했는지를 몰라 모든 일에 자신이 없어 했다. “시간이 갈수록 내성적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던 중 9살 되던 해에 평생을 같이할 동반자를 만났습니다. 슬프기 전에 먼저 다가와 울어주고 기쁜 일 있으면 가장 기뻐해 주는 트럼펫이었죠.” [IMG::CENTER]유타주의 한 음악대학에 진학해 재즈 트럼펫을 전공한 조이씨는 LA와 휴스턴, 텍사스를 돌아다니며 음악활동을 했다고. 예배 도중 성가대와 피아노 반주자와 예행연습 없이 연주한 영화 미션의 주제곡 ‘가브리엘 오보에’는 실제 연주보다 더 아름다웠다. 음악을 전공했지만 그의 현재 직업은 버스 운전기사다. 미국 LA에 살면서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여러 명의 음악인과 협연을 하며 음악 봉사를 한다. 한국 교회에서의 협연도 미국 교회에서의 인연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미국 생활 초반 영어를 할 줄 모르던 조이 씨지만 이제는 한국말을 모르는 미국 사람으로 성장했다. 필리핀 출신의 부인과 슬하에 자녀 3명이 있었으나 암으로 사별했다고. 그리고 3년 전 지금의 중국인 부인을 만나 여생을 함께하고 있다. 그리운 어머니의 나라 대한민국 인터뷰는 예정된 시간보다 많이 지났다. 마지막 질문을 했다. 일곱 살 어린아이를 국가가 보호하지 못하고 입양 보낸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조이 씨는 대답했다. 불평이나 원망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너무 어려서 그런 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웃음) 한국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아와서 엄마의 나라를 살갑게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말이죠. 그래도 한국은 내 어머니의 나라입니다.” 인터뷰 도중 ‘어머니의 나라’라는 말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어머니를 만날 희망으로 모국을 찾았지만 만남은 뒤로 미뤄야 했다. 한국 방문한 두 주 동안 입양되기 전까지 살던 의정부 집과 보육원, 어머니의 이름은 알아냈지만 말이다. 다음을 기약하며 어머니를 찾기 위해 DNA 신고를 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기회가 된다면 눈물의 모자 상봉 장면을 내 카메라에 꼭 담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에 응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누구도 관심 두지 않는 이야기에 관심 둬 줘서 고맙다”고 했다. 차마 부끄러워 감추고 싶은 이야기까지 다 털어놓은 인터뷰가 끝날 무렵 친절함과 화기애애함이 담긴 미소와 함께 눈가에는 눈물 가득 고였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악수하는 손은 서로가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
- 2018-10-11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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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면의 움직임을 직시하는 예술가 김영희
- 압도적인 무대 장악력으로 고유한 예술세계를 구축해온 김영희(金映希·61)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 교수.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 작품들은 존재의 자각 내지는 삶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제시해왔다. 1980년대 ‘나의 대답’, ‘어디만치 왔니’ 등으로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던 무대 뒤에는 늘 ‘독보적인 존재감’, ‘강력한 아우라’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단순히 ‘독특함’이라 치부하기엔 내면 깊숙이 파고드는 무언가가 있었고, 젊은 예술가의 패기인 줄로만 알았던 도전은 예순을 넘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30년 전 그의 창작이 오늘의 춤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김영희 교수가 이끄는 ‘김영희무트댄스’는 ‘관객이 존재하는 예술’을 위해 매년 정기공연을 열어 대중과 만나고 있다. 오랜 기간 탄탄하게 내공을 다져온 작품들이지만, 이에 안주하지 않고 한층 더 발전시키며 매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올해에는 2005년 발표작 ‘마음을 멈추고’와 30주년을 맞이하는 ‘어디만치 왔니’가 무대에 올랐다. 이번 공연은 오로지 예술감독으로서 분하며 직접 춤을 추지는 않았지만, 이미 무대는 그가 내뿜는 아우라로 팽팽했다. 막이 오르자 반세기 넘게 흐트러짐 없는 내면의 호흡을 다져온 한 예술가의 초상이 그려졌다. 김영희가 없는 무대에도 김영희는 여실히 존재했다. 공연이 끝난 뒤 관객들은 박수와 환호로 화답하며 작품의 짙은 여운을 달랬다. 그리고 그 무대를 지켜본 또 한 사람, 김 교수의 소감은 어땠을까? “‘어디만치 왔니’는 1988년 초연 이후에 100회 넘게 재공연해왔어요. 그동안 조명도 더 다양해지고 여러 변화를 줬기 때문에 이전보다 발전된 부분은 있겠죠. 그러나 어떤 공연이든 마찬가지로, 모든 면에서 만족할 수는 없더라고요.” 끊임없는 노력을 더해온 무대에도 여전히 갈증을 느끼는 그의 대답에서 한 작품이 30년 동안 늘 새로움을 선사해온 까닭을 들을 수 있었다. 인생의 반을 함께한 ‘어디만치 왔니’는 김 교수에게도 각별한 레퍼토리다. 작품을 발표한 해에 88서울올림픽 폐막식 공동 안무지도위원 활동에 이어,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아트 페스티벌 한국 참가작품 안무지도위원을 맡아 ‘어디만치 왔니’가 한국 대표작으로 선정되는 등 국내외를 넘나들며 찬사를 받았다. “1980년대 말, 창무회가 한국창작대표단체임에도 불구하고 무용계에서 ‘모든 작품이 식상하다, 똑같다’는 평을 듣고 있을 때 ‘어디만치 왔니’가 만들어졌죠. 무대를 선보이고 안무가들 사이에서는 욕을 많이 먹었어요. 반면 평론가들에게는 ‘당시대의 파격’이라는 호평과 함께 크게 인정받았죠. 여러모로 저에겐 잊을 수 없는 작품입니다.” 마음을 멈추고, 어디만치 왔니 일시적인 자극에 그치는 ‘파격’과 예술가의 깊은 사색이 더해진 ‘파격’은 차원이 다르다. 김 교수의 모든 작품이 그러하지만, ‘어디만치 왔니’는 특히나 그의 내면적 자아탐구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잘 드러난다. 죽어서 한 줌의 흙이 되는 인간의 운명을 제의 형식으로 부각해내며, 삶과 죽음 등 인간의 실존적 물음을 춤의 미학으로 승화시켰다. 춤이 탄생했을 무렵, 30대 초반의 그가 이토록 깊은 내면의 성찰을 창작으로 표현해냈다는 점이 놀라웠다. “당시 ‘1988년 한국국제무용제전’에서 ‘제의(祭儀)’라는 주제로 안무해야 했어요. 그래서 죽음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어린 시절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항상 우리 자매들에게 제사에 참여하도록 하셨던 게 떠올랐죠. 그러면서 죽음과 제(祭)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었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내가 살아온 날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죽음은 바로 내 삶의 시작이다’라고 생각하며 안무를 구상했어요. 당시 23세에 무용계에 입문해 30대가 된 나의 현재, 지금 어디까지 왔나를 바라보게 한 작품이기도 했죠.” 자기만의 사유에 그치지 않고, 관객과 정서적 교감을 이뤄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이 주는 감동은 묵직하다. 이번 공연에 올린 ‘마음을 멈추고’ 역시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달한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초연 당시 독특한 구성을 시도하며 신비성은 물론, 관객과의 공감대를 형성해 독자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그는 이번 무대를 꾸리며 “당신의 삶은 무엇을 기다리는지. 인간이 삶을 단순한 기다림으로 정의할 때, 그 기다림 속에서 나타나는 자기 삶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고 설명했다. 이에 김 교수가 젊은 시절 기다렸던 ‘삶의 무언가’는 무엇이었는지, 현재는 달라지지 않았는지 물어봤다. “항상 현재 시점에서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바라보면서 살고 있어요. 30, 40, 50대를 거치면서도 내 미래에 대해 모르고 살았잖아요. 지금도 여전히 나의 길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죠. 때문에 과거와 다른 기다림을 마주한다기보다는 늘 현재의 시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현실에 충실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와 호흡하는 무트의 숨결 김 교수가 추구하는 모든 춤의 근간에는 그만의 호흡법이 있다. 실제 그가 김영희무트댄스 창단에 앞서 2년에 걸쳐 호흡법에 집중해 저술했을 정도로 중요시하는 부분이다. 때문에 제자들에게 춤을 전수하는 과정에서도 외형적인 테크닉뿐만 아니라 이러한 호흡을 기본으로 한 내면 훈련까지 도모하고 있다. “호흡법은 육체적 훈련과 동시에 정신적 훈련이 가능하기 때문에 늘 기본에 두고 가르칩니다. 또 안무 동작 외의 방법으로 작품의 메시지를 표현하도록 지도하고 있어요. 군무의 경우엔 무용수끼리 통할 수 있는 정신적 교감을 중요시 여기는 편이죠.” 직접 무대에 서는 대신 후배들에게 기회를 내어준 이번 공연. 리허설 현장에서도 그가 눈여겨본 것은 무용수들의 동선이나 춤사위만이 아니었다. 특히 ‘어디만치 왔니’ 무대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톱밥을 흩날리는 장면에서 손끝에서 새어져 나오는 톱밥의 양까지 놓치지 않았다. 리허설 당시 “톱밥을 많이 모아라. 뿌리는 동작만이 아니라 흘러내릴 때도 양이 많아야 한다”라는 지적에 ‘톱밥’은 무대를 돋보이게 하는 소재 그 이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톱밥은 흙과 땅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죽어 입관할 때 우리는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 이에게 흙을 뿌리죠. 그것을 모티브로 흙이 흘려 내리는 장면을 생각했어요. ‘마음을 멈추고’에서는 밀가루를 소재로 사용했는데,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표현하려 했죠. 우리는 사는 동안 벌어지는 좋지 않은 사건들로 인해 마음의 흐름을 멈추는 일이 생기잖아요. 그 느낌을 무대에서 왼쪽은 솔로를 배치해 멈춤을 보여주고, 오른쪽은 군무로 구성해 흐르는 마음을 표현했어요. 즉, 이때 밀가루는 흐르는 마음을 의미해요. 마음을 멈추고, 가슴 아픈 일들을 스스로 하나하나씩 풀어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이렇듯 창작자의 설명을 듣고 나면 작품에 한층 더 깊이 다가갈 수 있다. ‘춤의 언어’가 주는 메시지는 때론 입으로 내뱉는 언어보다 강렬하게 느껴진다. 덕분에 언어가 다른 나라에서도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이며, 춤이다. 특히 ‘어디만치 왔니’는 미국 스미스소니언 뮤지엄에서도 재촬영을 요구하며 큰 관심을 보였다. 일본, 헝가리, 이집트 등 16개 국가를 오가며 공연 프로그램 북을 촘촘하게 채우고도 부족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해온 김 교수. 2013년 발표작 ‘지금 여기’를 통해 “멈춤은 뒤처지는 것이 아닌 더 오래 걸어가기 위한 준비”라는 메시지를 전한 바 있기에, 바쁜 일상 속 ‘쉼’은 어떻게 마련해왔을지 궁금했다. “딱히 멈춤의 시간을 갖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작품을 하고 나면 1년이 끝난 느낌이 들거든요. 무언가 해놓았다는 만족에서 나도 모르게 또다시 다음 공연을 준비하곤 하죠. 작품을 위해 쉬거나 특별히 뭔가 하는 것은 없지만 결국 무대를 통해 잠재적으로 쌓여 있던 것들이 표출되는 듯해요.” 관객이 존재하는 예술을 위한 소명 해마다 무대에 작품을 올리는 김 교수에게 ‘잘 쉬고 있느냐’는 질문은 애초에 무의미했을는지도 모르겠다. 쉴 틈 없이 작업에 몰두하는 그의 행보에는 남다른 사명이 깃들어 있다. 88서울올림픽,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비롯해 멕시코 세르반티노 페스티벌 국내 단독 초청 공연, 외교통상부 후원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초청 공연 등 한국창작춤의 미학을 세계에 알리는 중추적인 역할을 해온 김 교수. 많은 것을 보여줬고, 많은 것을 이뤘음에도 그는 아직 과제가 남아 있다고 말한다. “예술의 대중화가 목표입니다. 많은 사람이 한국춤 하면 단순히 장구춤이나 부채춤 등을 떠올리는데, 그 외에도 다양한 예술작품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우리 무용계도 영화처럼 관객이 공연을 보고 정신적 교감을 나누고, 마음을 순화하는 시간을 보냈으면 해요. 물론 가능성이 있다고 자부하고요. 지금까지 한국창작춤의 세계화를 위해 힘써온 것처럼, 대중화를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으려 합니다.” 막상 무용을 보러 가려 해도 막막해하는 이가 많은 편. 김 교수에게 중장년 관객이 공감할 만한 작품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내 안의 내가’를 권하고 싶어요. 공연 때 중장년층 관객의 호응이 좋았죠. 내면 깊숙한 곳의 자신을 발견하고, 삶을 초월하는 경험에서 존재의 삶, 죽음을 내면화하는 자기 안으로의 여행을 그린 작품이에요. 내 안에 겹겹이 쌓인 자아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기는 과정을 춤으로 형상화했습니다. 거대하고 몽환적인 무대로 끊임없이 기어 나오는 무용수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끝없이 뒤로 물러나가는 무용수들의 극적 대칭이 특징이죠. 공연을 마치고도 관객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남겨진 무대를 보고 있었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끝으로 10년 후의 삶은 어떻게 그리고 있을지, 다른 것에 도전해보고 싶지는 않은지 물었다.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존재를 드러내고자 했던 그의 무대처럼, 간명한 대답이 돌아왔다. “10년 후에도 무용에 몸담고 있을 거예요. 무용 외에는 생각해본 적도 없고, 생각해봐도 없습니다.”
- 2018-08-13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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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수련은 현재진행형"
- 영화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 등에서 브루스 리(Bruse Lee, 이소룡)가 선보인 절권도는 그야말로 획기적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를 제압하는 절권도의 매력에 푹 빠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김종학(50) 관장이다. 올해로 40여 년째, 인생의 반 이상을 무술과 함께했지만, 그는 아직 배우고 싶은 무술이 너무나도 많단다. 푹푹 찌는 한여름날 김종학 관장을 만나기 위해 양재동에 위치한 이소룡절권도 한국총본관을 찾아 나섰다. 몇 개의 골목길을 지나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래도 ‘도장은 시원하겠지’ 하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 큰 기대였을까, 도착한 도장에는 작은 선풍기 한 대만 탈탈거리며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에어컨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도장에선 한 번도 에어컨을 틀어본 적이 없다는 김종학 관장. 전기세가 무서워서도 아니고 더위를 못 느껴서도 아니다. 운동하는 공간에선 마음껏 땀을 흘리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한다.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도 하고 복싱도 할 만큼 운동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때 한창 무술영화가 유행이었는데 우연히 영화 ‘취권’을 보게 됐죠. 공중을 날아다니고 상대를 한 방에 제압하는데… 너무 멋있더라고요. 그렇게 무술에 빠져서 시작한 게 우슈였어요.” 누구나 한 번쯤은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적을 무찌르는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우슈 수련을 이어가던 그는 어느 날 돌연 대만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진 거라곤 비행기 표와 한 장의 명함뿐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무모해 보일 수 있는 선택이었지만 그는 “대만으로 떠난 건 힘든 시절의 나에게는 한 줄기의 빛이자 유일한 돌파구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세상에 대한 환멸을 느꼈어요.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 와중에 힘들어하던 몇몇 친구들이 나쁜 길로 빠지는 걸 보면서 제 정신줄을 잡아줄 무엇인가가 절실히 필요했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뭘까, 뭘 하면 행복할까?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결론은 운동이더라고요. 때마침 지인이 대만에 있는 분이라며 찾아가 보라고 명함을 한 장 주셨죠. 그길로 바로 대만으로 떠났어요.” 그의 마음을 끈 건 다름 아닌 절권도였다. 브루스 리가 창시한 무술인 절권도는 그가 실제로 배웠던 무술 중에서 실용적이라고 생각한 동작만 따로 모아 발전시킨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절권도는 미완성의 무술로 전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브루스 리가 죽기 전 그가 보여줬던 동작만 절권도라고 말할 수 있다고 정의해요. 근데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요. 그가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는 더 많은 무술을 배워서 절권도의 기술을 확장했을 거예요. 때문에 브루스 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절권도를 한다고 했을 때 ‘그게 절권도가 맞다, 아니다’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거죠.” 김종학 관장은 우슈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의 전통 무예인 실랏(Silat), 필리핀의 전통 무술인 칼리(Kali) 등 다양한 무술을 훈련 중이다. 브루스 리가 배웠던 무술을 할 줄 알아야 그가 절권도를 만들고자 했던 진정한 뜻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무술의 매력을 묻는 말에 그는 무술을 음식에 비유했다. “음식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잖아요. 무술도 마찬가지예요. 태권도, 우슈, 합기도 등 아주 많죠. 우리가 김치찌개를 좋아한다고 김치찌개만 먹고 살 수 없는 것처럼 저에게 한 가지 무술만 하고 살아라? 그렇게는 안 되겠더라고요.(웃음) 음식 맛이 다 다르듯이 무술에도 각기 다른 멋이 있고, 그 나라의 문화가 깃들어 있어요. 이런 걸 이해하면서 배우는 게 큰 재미죠.” 절권도를 향한 열정 “테드 웡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세계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그의 도장으로 찾아왔어요. 저도 그중에 한 명이었는데 전 운 좋은 놈이었죠. 그의 눈에 띄었으니까요.” 대만에서 돌아온 그는 브루스 리의 마지막 제자로 알려진 테드 웡(Ted Wong)을 찾아 홍콩으로 떠났다. 무작정 비행기 표를 사서 떠난 그의 모습에서 일찍 눈치 챘어야 했다. 그는 독한 남자였다. 테드 웡의 수업 첫날, 허리 디스크가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숨긴 채 수업에 임했다. 테드 웡도 그 절실함을 알아봤는지 김 관장을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했다. “사부가 개인적으로 누굴 초대한다는 게 매우 드문 일인데 절 데려오라고 하니 다른 제자가 질투가 났나봐요. 씩씩거리면서 ‘웡 사부가 너 오래’ 이러더니 따라오라고 하더라고요. 엄청난 영광이었죠.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테드 웡에게 말을 걸었어요. 그때 처음 한 질문이 “두유 노우 김치?”였어요.(웃음)” 한국인이 외국인을 만났을 때 피해야 할 세 가지 질문이 ‘두유 노우 김치?, 두유 노우 지성팍?, 두유 노우 강남스타일?’이거늘….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질문은 효과가 있었다. 테드 웡은 김치를 잘 안다고, 이웃이 한국인이라 먹어본 적도 있다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분위기가 좋은 틈을 타 김 관장이 테드 웡을 한국으로 초대하겠다고 말했다. “테드 웡 사부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OK!’ 하더라고요. 덕분에 2008년에 그를 모시고 한국에서 세미나를 개최할 수 있었죠.” 이후에도 김 관장은 테드 웡의 집에서 개인수련을 하는 등 인연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지난 2010년, 테드 웡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불과 며칠 전 김 관장과 통화할 때만 해도 ‘새로운 세미나를 준비 중이라 바쁘다’던 그였기에 그의 사망 소식은 김 관장에게 뜻하지 않은 이별이었다. “수련도 수련이지만 이상하게 그의 오래된 차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엄청 가파른 언덕이 하나 있었는데 웡 사부는 항상 그 언덕을 올라가기 전에 차에게 ‘준비됐나?’라고 말하곤 했거든요. 마치 나이 든 자기 자신한테 물어보듯이요. 그 질문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지금은 그의 오래된 차도, 웡 사부도 볼 수 없게 되었네요.” 테드 웡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김 관장의 맨땅에 헤딩하기는 계속됐다. 그는 브루스 리가 생전에 절권도를 가르칠 수 있는 사범 자격을 준 3인 중 한 명인 댄 이노산토(Dan Inosanto)를 찾아 LA로 향했다. 댄이 스톡턴으로 가면 스톡턴으로, 댈라스로 가면 댈라스로 그야말로 그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쫓아가서 수업을 들었다. 문득 이렇게까지 하면서 절권도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솔직히 말해서 절권도가 궁금하면 유튜브나 비디오를 통해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어요. 하지만 유튜브가 나의 사부가 될 순 없잖아요. 저에겐 절권도 ‘동작’이 중요한 게 아니라 브루스 리에게 절권도를 배운 사람들의 생각과 철학이 중요했어요. 그래서 전 직접 사람을 만나서 배우는 데에 의미를 둔 거죠.” 내 몸은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 갑자기 김 관장이 모형 칼을 손에 쥐더니 피해보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칼에 맞았다. 실제 상황이라면 죽었거나 응급실에 실려 갔을 것이다. 이번엔 반대로 칼을 쥐어주더니 자신을 찔러보라고 했다. 칼을 휘두르는 동시에 칼을 뺏겼다. “사람들이 스스로 방어할 생각도 안 하면서 약자라고 말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최소한 자기를 보호할 방법은 알았으면 좋겠어요.” 김 관장은 스스로 보호할 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공격을 당했을 때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최근엔 호신술 수업을 무료로 진행하고 있다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는 무술 하는 김종학”이라고 답했다. “마치 등산 같은 거죠. 한 산에 오르면 거기 머무르지 않고 다른 산도 가보는 것처럼, 이 무술, 저 무술 다 해보고 싶어요.”
- 2018-08-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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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나는 잊지 말아요’ 하윤재 영화감독
- ‘앞으로 10년만 엄마의 상태가 지금처럼 유지되도록 도와주세요.’ 2007년 겨울 엄마의 치매 판정이 내려진 날, 하윤재(河侖材·47) 감독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당시 일흔이 넘은 노모에게 10년은 막연히 긴 시간이라 여겼다. 그러나 만 10년이 지난 현재, 절망으로 휩싸였던 그날의 기억이 무색하리만큼 모녀는 여전히 인생의 희로애락을 나누며 알콩달콩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 감독은 엄마와 딸의 애틋한 일상을 추억하면서도 같은 처지의 치매 가족에게 작은 위안이 되길 바라며 에세이 ‘엄마, 나는 잊지 말아요’를 펴냈다. 엄마의 기억이 사라지는 순으로 구성한 책이지만,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모정은 결코 기억과 비례하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 나는 잊지 말아요’라는 책 제목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직접 제목을 지은 하윤재 감독은 “엄마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손을 놓는다는 의미다”라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다섯 남매 중 막내인 하 감독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남다르다. 막내딸이 먹고 싶은 거라면 달나라에 가서라도 구해올 엄마인데, 언제부턴가 음식이 하기 싫다며 의아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반찬 투정을 하며 졸라 겨우 엄마의 요리를 맛보게 된 순간, 하 감독은 간이 맞지 않은 음식과 함께 두려운 기운을 한가득 머금었다.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무료 건강검진”이라 거짓말까지 하며 병원에 모시고 가면서도 내심 단순한 노화 현상이길 바랐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치매’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하 감독의 예민한 성격 덕분에 아주 초기 단계에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 그러나 당시에는 ‘치매’라는 말에 온 정신이 쏠려 절망감만 앞섰다. “우선 치매에 대해 알아야겠더라고요.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너무 많은 정보가 뒤섞여 있었는데, 결론은 하나였어요. ‘사람마다, 집안마다 다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엄마를 보살필 수 없잖아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며 공부도 하고, 나중에는 요양보호사 자격증까지 따게 됐죠. 대부분 치매 관련 책에는 환자를 어떻게 위로하고 보살펴야 하는지 잘 쓰여 있어요. 그러나 치매 부모를 바라보는 자식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어떻게 위로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글은 찾기 힘들더라고요.” 엄마의 치매가 가져온 선물 처음 치매 진단을 받고, 점차 뚜렷한 증상이 나타나긴 했지만 평범한 일상을 지내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하 감독은 치매가 진행되는 속도를 살피다가 한 4~5년 정도 됐을 때 어머니에게 당신의 상태를 알려야겠다고 판단했다. 막상 시기가 되었지만 오히려 사실을 알고 나면 그 충격으로 후폭풍이 클 것만 같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9년 차에 접어들었고,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힘든 고백을 결심하며 말로만 하기보다는 그동안 잘 지내준 엄마에 대한 보답으로 작은 선물을 준비하고 싶었다. 엄마의 사진으로 만든 앨범과 용돈을 함께 드리며 치매라는 단어를 조심스레 끄집어냈다. “저희 친할머니, 외할머니께서도 치매를 앓으셨는데 엄마는 두 분을 보살피면서 치매를 굉장히 두려워하셨어요. 그런 엄마가 자신이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면 절망감에 빠지실까봐 걱정스러웠죠. 누군가는 어차피 잊어버릴 텐데 말하면 어떠냐고 하지만, 가끔 멀쩡하실 때 보면 기억이 돌아오기도 하고, 당신의 인생도 생각하곤 하거든요. 다행히 치매라는 사실을 아시고도 염려스러운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어쩌다 모든 걸 다 기억해낼 때 제게 ‘그동안 나를 지켜줘서 정말 고맙다’라는 말씀을 하세요. 엄마도 자신의 상태를 느끼고, 제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다 인식하고 계신 거죠.” 하 감독은 머리로는 기억 못할지라도 마음으로 나눈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때문에 매 순간 소홀하지 않고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리려 촉각을 곤두세우는 그다. 어머니를 향한 깊은 관심은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까지 따스하게 변화시켰다. “엄마의 치매가 아니었다면 굉장히 오만한 삶을 살았을 것 같아요. 잘나가는 또래 친구들이랑 백화점에 명품 보러 다니고 소위 상류층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삶의 만족도가 굉장히 낮았겠죠. 예전에 환자들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때론 병이 감사하다’라고 하는 게 전혀 와 닿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 말이 이해돼요. 얼마 전에는 공중화장실을 갔다가, 쓰레기통에 휴지를 던졌는데 안 들어갔어요. 예전의 나였다면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계시니 알아서 치우겠지 하고 휙 나갔을 텐데, 그날은 내가 버린 휴지랑 옆에 떨어진 것까지 다 주워서 넣고 나왔어요. 어떻게 보면 아주 작은 일이지만, 제겐 상징적인 변화라고 생각해요.” 잊히지 않는 엄마의 얼굴 하 감독은 단편영화 ‘봄날의 약속’으로 제33회 프랑스 클레르몽 페랑 단편영화제 국제경쟁 부문,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 단편 쇼케이스 등에 초청되었고 청룡영화상, 필름 카라반 단편영화제 등에 진출했다. 1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깊은 여운과 묵직한 감동을 선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삶’을 모티브로 한 시나리오의 힘이었다. 한편으로 보면 이 역시 어머니가 딸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았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을 담은 딸의 영화를 보고는 하 감독에게 “그래서 네가 뭘 했다는 건데?”라고 물었다. 무심한 듯한 어머니의 질문은 평소 막내딸을 향한 염려에서 비롯됐다. “엄마는 제가 언니들처럼 선생님이 되거나 월급 받는 직장에 다니시길 바라셨어요. ‘봄날의 약속’이 나오기 전까지는 영화 기획PD 일을 했는데,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느냐고 자주 물으셨죠. 카메라를 들고 영화를 찍는다거나, 연기를 한다거나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답답해했어요. 직접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한 이유는 엄마에게 ‘이거 다 내가 만든 거야’라고 속 시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어요. 그 뒤로는 뭘 하느냐고 잘 묻지 않으셔요. 최근에는 장편영화 시나리오가 영화진흥위원회 제작진흥사업에 채택돼서 촬영할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장하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이런저런 설명은 안 하셨지만, 그 한마디에도 막연히 내 딸이 원하는 바를 이뤘다고 인지하시는 것 같아 뿌듯했어요.” 준비 중인 차기작은 어머니에 대한 내용이 아니지만, 나중에라도 어머니와의 일상 중 시나리오에 쓰고 싶은 에피소드가 있는지 궁금했다. 하 감독은 어떠한 일화보다도 잊히지 않는 한 장면이 있다고 말했다. “자식은 부모에게 잘한 것보다는 못한 게 가슴에 남잖아요. 매일 밤 자기 전 기도를 하는데 그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요. 학창 시절 일인데, 전에 살던 방배동에 아주 가파른 언덕길이 있거든요. 하루는 엄마가 경동시장에 갔다가 찜통이랑 장바구니를 이고 그 언덕을 내려오고 계셨어요. 마침 언덕 아랫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엄마가 저를 보고는 반가워하며 부르셨죠. 아마 짐이 무거워서 그러셨을 텐데, 봤으면서도 모른 척 지나가고 말았어요. 그때 엄마의 얼굴이 정확하게 각인돼서 기도할 때마다 생각나요. 아무리 남들이 효녀라고 잘한다고 해도 그날 일이 자꾸만 채찍질하듯 떠올라서 죄스러운 마음이 커요.” 다음 생엔 엄마의 딸이 아닌 엄마로 어머니의 치매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간다는 하 감독은 소중한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한 채 헤어지는 상황이 가장 두렵다고 했다. 물론 소중한 사람들에는 어머니가 가장 중심에 있다. 언제 맞이할지 모르는 상황을 떠올리며 그는 마지막 인사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고마웠어요”라는 과거형 인사나 “사랑합니다”라는 현재형 인사는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지막 인사이지만, 또 다른 시작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그가 찾은 인사말은 “다음 세상에서 또 만나자”였다. 하 감독은 언젠가 그 말을 해야 할 때쯤이면 어머니가 자기 의지대로 인사를 못하시리라는 생각에 미리 인사를 해두기로 했다. “엄마가 컨디션 좋은 날 미리 인사드렸어요. ‘엄마, 우리는 참 좋은 인연인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 다음 세상에서도 다시 꼭 만나자’라고 했는데, 엄마가 ‘만나지 말자’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야 꼭 만나고 싶지만 지금도 네게 짐이 되는데 싫다. 다음에는 좋은 부모 만나서 편히 살아라’ 하시는데, 순간 눈물이 확 쏟아지더라고요. 그동안 제게 해주신 게 얼마나 많은데, 어째서 당신이 짐이라고만 생각하시는지….” 그런 어머니의 반응은 하 감독의 바람을 더욱 간절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인사처럼 다음 생에 어머니를 만난다면 어떤 인연으로 마주하고 싶은지 궁금했다. 그는 단박에 “엄마의 자식이 아닌, 엄마의 엄마로 태어나고 싶다”고 대답했다. 평생 자식을 위해 헌신하신 어머니처럼 그 역시 많은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일 터였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해드리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일까? “엄마가 내 딸이 됐을 때 꼭 이야기해주고 싶은 건 ‘연애를 많이 해봐라’예요. 그 시절엔 거의 그랬지만, 연애도 제대로 못 해보고 결혼해서 맏며느리라 평생 고생만 하셨거든요. 엄마가 다시 태어나면 대학도 다니고, 예쁘게 화장도 하고, 해외여행도 가고, 운전도 하고, 편한 아파트에도 살아보면 좋겠어요. 그동안 나는 엄마 덕분에 그런 걸 다 누리고 살았잖아요. 다음 생에 가능하다면 엄마 덕분에 제가 경험한 모든 것을 다 해드리고 싶어요.”
- 2018-02-0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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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종일 KDI 교수, 평생 동안 세상과 대결하다
- “안식년인데 안식을 못하고 있어요. 일이 많아서(웃음).” 주빌리은행장이자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인 유종일(柳鍾一·59) 교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근황을 얘기했다. 그러나 그 인간미 넘치는 모습은 한국사의 거친 부침 속에서 단련된 표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경제민주화 개념을 적극적으로 현실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오피니언 리더로서 지금의 시대정신에 누구보다도 가까이 닿아 있는 인물이다. 자존감 높은 유 교수의 상식적인 세상에서의 깨달음을 들여다봤다. “학교 다닐 때 굉장히 많이 맞았어요. 덤볐으니까.”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반골이다. 그것도 철저하게 확신에 찬 합리적 반골이다. “천성적으로 정의감이 과도했죠(웃음).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공부를 잘해서 특권층에 속했거든. 그러나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노골적인 차별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어요. 공부 못하고 가난한 학생은 사람 취급을 못 받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선생님들과 많이 싸웠지.” 아직 유교사상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던 시절, 스승의 그림자를 밟는 것도 안 되었던 세상에서 그는 스승과 대거리를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신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단 한 사람의 멘토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오만이라기보다는 삶의 흐름 속에서 체득한 겸손에 가까운 의미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배울 게 있습니다. 다만 내가 어리석고 오만해서 잘 배우지 못할 뿐이죠.” 천성적으로 정의감이 넘쳤던 사람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 중 중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 있다. “굉장히 정의로운 분이었어요. 칼같이 단정하게 하고 다녔죠. 얼핏 내비치는 걸 보면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심도 있었고. 그리고 아주 무섭기로 소문났었습니다. 굉장히 엄격해서 누가 촌지라도 건네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셨죠.” 그가 중학교 2학년 때는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학교에서 갑자기 ‘10월 유신’이라고 써진 리본을 가슴에 달고 오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당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재야인사들의 강연을 듣고 다녔던 유 교수는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 지시를 무시했다. 그랬더니 담임선생님은 그를 매우 심하게 체벌했다. 아마 시대에 대한 분노를 다소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한 게 아닐까, 그는 담임선생님의 마음을 그렇게 짐작한다. 그 짐작을 증명해주듯, 담임선생님은 이후에 그에게 함석헌이 쓴 를 선물했다. 운동권의 필독서였던 이 책과 함께 유 교수는 차차 유신시대의 금서들과 접하게 된다.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던 책은 리영희의 와 황석영의 였어요. 그리고 을 정기적으로 구독했죠.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했는데, 이런 책들을 접하다 보니 이 사회의 모순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이과 공부를 한다는 게 사치처럼 느껴졌죠.” 그는 학교에서는 이과 공부를 하고 대학 시험은 문과로 봤다. 학원도 다니지 않고 과외도 받지 않고 서울대학교 사회 계열에 입학한 그는 2학년 때 경제학과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담당하는 형사가 따로 있었다 서울대 경제학과라는, 한국 사회에서 최고의 경제 엘리트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유종일 교수는 기득권에 안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의 대학 생활은 학생운동과 수사기관을 들락거리는 일상으로 채워지게 된다. “제일교회에서 전태일 열사의 남동생과 청계피복노조 노동자들과 함께 단식농성을 했고, 서울대 사회학과 심포지엄 사건으로 경찰서에 잡혀간 적도 있었고. 긴급조치 9호 위반 마지막 사건의 주동자로 구속된 적도 있었죠. 나를 담당하는 형사가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 이때 그가 잊지 못하는 또 한 명의 인물인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등장한다. 유종일처럼 철저한 운동권 학생의 지도교수는 당국의 감시와 압박을 받았으므로 현실적으로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새내기 교수였던 정 전 총리는 선배 교수들에게 골치 아픈 관리 대상으로 낙인찍힌 유 교수를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 전 총리는 유 교수를 타박하지 않았다. “정운찬 선생님께서 제게 ‘네가 말하는 것에 백 퍼센트 동의한다’고 말씀하셨죠. ‘학교에서 뭐라고 하건 지도교수로서 널 통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도 하셨고요. 그러나 대신 한 가지만 자신의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바로 학점관리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언제 도움이 될지 모르니 시험 때 한 이틀만이라도 신경을 쓰라는 게 정 전 총리의 주문이었다. 유 교수는 그렇게까지 자신을 배려해주는데 그 조언을 안 따를 수가 없었다. 비록 강의실에는 개강할 때 한 번, 종강할 때 한 번 들어가는 수준이었지만 시험 때가 되면 점수를 받기 위해 신경 써서 준비를 하곤 했다. 그리고 그러한 정 전 총리의 혜안은 유 교수가 하버드대학을 가게 되는 발판이 됐다. 운동권 문제아, 하버드대학 장학생 되다 ‘민주화운동’ 때문에 제적을 두 번이나 당하고 군대도 다녀오느라 나이가 훌쩍 들어버린 그는 좀 더 깊이 있게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느 날 지도교수였던 정운찬 전 총리에게 자문을 했다. 그러자 정 전 총리는 하버드대학을 가라고 권유했다. 하버드대학은 학풍이 자유로우니 유 교수의 기질과 잘 맞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토플과 GRE가 뭔지도 몰랐던 유 교수는 이 무모한 도전에 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도전에 성공하면서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박사과정 장학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장학생은 내가 공부를 잘해서 된 게 아니고 ‘니드 블라인드 정책(Need-blind policy)’이라는 하버드대학 입학사정 정책 덕분에 가능했던 겁니다. 이 정책은 우리도 본받아야 할 정책인데, 입학사정을 할 때 학생의 경제적 여건은 일절 고려하지 않고 능력과 잠재력만 보고 뽑은 후에, 경제적으로 지원이 필요하면 장학금을 주고 필요가 없으면 안 주는 것입니다.” 물론 하버드대학에 들어가서도 반골 기질은 전혀 죽지 않았다. 그는 보스턴의 한인 민주화운동 단체와 접촉해 일원으로 활동했고 하버드대학을 떠나기 전에는 학교 안에서 ‘광주항쟁 10주년 기념행사’를 기획해 치르기도 했다. 이후 미국 노트르담대학 조교수가 되어 미국 사회에서 교수로서 살아가게 된다. 용기와 신념 그리고 확고한 가치관 미국 사회에서 경제학 교수라는 직함을 갖고 주류사회의 일원으로서 평온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그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교수로서의 삶이 안온한 자신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들이 소수인종으로서 미국 사회에서 받을 차별이 걱정돼서였다. 하버드대학 경제학 박사인 유 교수를 찾는 러브콜은 많았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수석 제의를 받았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던 시기에는 경제 공약을 총괄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때 신자유주의 정책을 반대하고 재벌 개혁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만족할 만한 액션이 취해지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때는 한미 FTA를 반대했으며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화되자 반발하며 정부와 각을 세웠다. 이 완고한 경제학 교수는 냉혹한 정치세계의 격랑 속에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해야 했다. “지금도 그러고 살잖아요(웃음). 옛날보다야 너그러워졌지만, 천성이 그렇기 때문에.” 확실히 과거보다야 너그러워졌다. 그가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스님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2004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고 여러 가지로 실망했던 때였어요. 그때 안식년을 받아 북경대학에서 강의하고 가을 학기는 미국에서 강의하게 되었죠. 그런데 미국을 가야 하는데 담배가 안 끊어지는 거예요. 미국 가서 처마 밑에서 담배 필 일을 생각하니 한심하더군요. 그런데 우연히 어떤 스님을 만나면 백 퍼센트 담배를 끊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겁니다. 산속 암자에서 혼자 수행하는 스님이었는데 수소문해서 만날 수 있었죠.” 폐부를 찌른 한마디, 인생을 바꾸다 스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앉자마자 스님은 유종일 교수에게 “인생에서 원하는 게 뭡니까?”라고 물었다. 아무리 유 교수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눌리고 싶지 않았던 유 교수는 “스님, 초면에 질문을 세게 하십니다” 하며 잠시 여백을 두고 싶었다. 그러나 스님은 그를 쳐다보면서 “시시껄렁한 얘기 말고 진짜 원하는 걸 말하라”며 강압적으로 물어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도망갈 수 없더라고. 꾸밀 수도 없고. 그래서 대답했죠.” “세상 한 번 뒤집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 교수는 자신의 행동을 직설적인 답변으로 응수했다. 그러자 스님이 말했다. “인생을 왜 그리 어리석게 사십니까.” 유 교수는 그 말이 이해가 안 되어 무슨 의미냐고 물어봤다. “인생은 진지하게 살아야 하는데 당신은 치열하게 산다. 개혁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지 머리 갖다 박고 깨지면 되느냐.” 유 교수는 스님의 말이 자신의 폐부를 찔렀다고 말했다. 그런 문답이 오간 후 스님은 기 치료를 해줬고 유 교수는 그 후 담배를 완전히 끊게 됐다. 희한한 일의 연속이었다. “가장 놀랐던 것은 하룻밤을 새고 그다음 날 아침에 밥을 해먹자고 한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그 전날 점심에 식사를 하고 오후 세 시쯤에 물 한 모금 마신 이후로는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그런데 스님이 그 말을 할 때까지 전혀 공복을 못 느꼈습니다. 신기한 만남이었죠. 그 스님은 티베트로 가셨다고 소식만 들었습니다.” 신우암은 몸을 존중하라는 시그널 “스님이 해준 말씀 중 ‘숨을 들이마실 때 지혜를 생각하고 내쉴 때 자비를 생각하라. 들어오는 모든 것은 지혜, 나가는 것은 자비여야 한다’는 말은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실천하고 있습니다. 워낙에 제가 지혜롭지 못하고 자비롭지 못한 사람이라(웃음). 스님이 제 지난 삶을 알아본 거죠. 그렇다고 지난 삶이 가치 없다고 여기진 않습니다. 제가 중심을 잡도록 만들어준 말이죠.” 변화가 시작됐다. 과거처럼 ‘이건 아니야’ 싶으면 무조건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가려가면서 싸워야 함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좋은 쪽으로만 오지 않고 나쁜 쪽으로도 왔다. 낙천주의자이자 긍정의 화신과도 같았던 그가 신우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암에 안 걸린다 여기고 살았죠. 속에 쌓아놓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CT 촬영을 하고 나서 예후가 좋지 않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신우암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내용을 찾아보니까 곧 죽겠더라고.”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 멋있게 맞이하자’ 2015년 1월 신우암 판정을 받았을 때 유종일 교수가 한 생각은 ‘사람은 어차피 다 죽는다. 나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훨씬 일찍 죽음이 찾아온 건데 여기서 당당하게 멋있게 죽음을 맞이해야겠다. 두려워하거나 너무 억울해 하거나 소심한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겠다’였다.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더라고요. 원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나름대로 이 정도면 잘살았다, 잘 정리하고 가면 되겠다 싶었죠.” 죽음에 대해서도 긍정적이었던 유 교수의 그런 기질이 운명을 바꾼 걸까? 수술 후 회복하는 중 삶을 돌아보고 죽음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됐다. 삶의 질이 아닌 죽음의 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가 수술하고 처음으로 한 일은 유서와 장기기증,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의 서약이었다. 죽음 앞에 바짝 다가갔던 경험은 그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그는 2년 반이 지난 지금 건강은 회복했지만 그때 얻은 깨달음을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이 기회에 정책 제안을 하나 할게요.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사람에게 건강보험료를 할인해야 한다고 봐요. 이는 의료비 절약에 굉장히 도움이 될 겁니다. 환자에게는 무의미한 연명이고, 그렇다고 주변 사람이 치료를 끊으라고 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죠. 그래서 본인이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스스로 미리 해놔야 하는데, 사실 닥치기 전에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런데 보험료를 깎아준다고 하면 많은 관심이 생기겠죠. 사전의료의향서는 환자에게도 사회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얻은 삶의 평온 삶의 수라장을 거쳐 암 투병을 겪고도 여전히 일복 많은 유종일 교수에게선 긴 사이클을 거치고 나온 사람 특유의 편안함이 있었다. “원로학자들 중에서 김경동 선생님 등은 연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여전히 건강하시죠. ‘어떻게 그렇게 유지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드리니 ‘욕심을 버렸기 때문이다’라고 대답들을 하셨어요. 젊었을 때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 못했죠. 이제 좀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불교의 가르침 중 핵심적인 것이기도 하고요.”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과거에 비해 편안해진 것은 내려놓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유 교수의 얼굴은 굉장히 밝았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말은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 해도 과도하게 집착하면 굴레가 됩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감수성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기자도 유종일이라는 ‘자존감 강한’ 남자가 좋아졌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사과할 줄 알고 부끄러움을 아는 오피니언 리더가 절실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 2017-08-11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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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감님은 언제쯤 드러내놓고 주책을 부릴까
- “망고, 어디서 났게?” 동생은 망고를 깎으면서 대단한 비밀이라도 들려주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도를 알기 어려운 질문이어서 잠시 머뭇거리니까 동생이 그새를 못 참고 말을 이어갔다. “요즘 우리 시어머니가 이상해.” 그 말에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동생의 시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참 좋다. 그 솜씨를 동네 노인정에서 발휘하니 점심 먹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으쓱해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게다가 나이가 들었어도 무너지지 않은 얼굴선 덕분에 70세가 넘은 할머니치고는 예쁘장한 외모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당신이 노인정에서 인기가 많다는 걸 자랑 삼아 얘기하기도 한단다. 그러던 어느 날 초인종이 울려 나가보니 대문 앞에 계란 한 판이 놓여 있더란다. 사람은 없고 계란만 덩그맣게 있길래 의아해하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마당까지 쫓아 나와서 한마디 하셨단다. “노인정 영감이 놓고 갔나?” 그래놓고 당황한 기색으로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으셔서 “들어오시라 해서 차라도 한잔 대접하시지 그러셨어요” 했더니 “에이, 나이 들어서 주책이야” 하며 뛰어 들어가시더란다. 언제부터인지 시어머니가 아침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노인정으로 달려갔는데, 멜론이나 망고 등 시어머니가 평소에 돈 주고 사지 않을 과일들이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며 동생은 깔깔 웃었다. 모두들 나이 들어가면서 꺼리고 외면하는 것들이 있다. 나잇값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봐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을 감추기에 급급하다. 잘못했다가는 ‘나이 들어 주책이야’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얼굴에 주름이 파이고 육체의 기능이 쇠락해도 감정은 여전히 살아 있다. 사랑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라 느낌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청춘은 갔어도 가슴 뛰는 인생의 봄날을 여전히 기대하는 것 아닌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라는 소설을 통해 90세 노인에게 찾아온 첫사랑을 이야기한다. 평생을 창녀들과 함께 보내면서 이 세상에 순정한 여자는 없다고 생각하는 독신이자 신문사 칼럼니스트 사비오. 그는 90세 생일에 자기 자신에게 아름다운 밤을 선사하기 위해 선택한 14세 소녀에게 빠진다. 사랑의 열병은 그에게 낭만주의 문학작품을 들추게 하고, 연애편지 형식의 칼럼을 쓰도록 만든다.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시적 방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던 그가 사랑 때문에 죽는 일은 가능한 일일 뿐 아니라 자신도 사랑 때문에 죽어가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 고통의 달콤함을 무엇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다. 위대한 첫사랑이다. 90세 노인에게 찾아온 첫사랑을 주책없는 늙은이의 추태로만 볼 것인가? 아니다. 그 사랑은 죽음과 멀지 않은 노인에게 찾아온 마지막 열정이자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순정한 고백이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외로움과 고독에 익숙해진다는 의미다. 함께 산책하고 함께 여행하면서 맛있는 음식 먹고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축복이다. 동생은 시어머니와 영감님이 언제쯤 드러내놓고 주책을 부릴까 그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 2017-07-0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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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낙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 “지인들이 부르면 불원천리, 산 넘고 물 건너 달려가요”
- 미술을 애호하는 의사? 의료활동을 가끔 하는 미술 전문가? 이성낙 가천의과대 명예총장(79)을 지칭할 때 헷갈리는 이름표다. 베체트병 최고의 권위자인 그는 가천의과대 총장 퇴임 이후 일흔의 나이에 미술사 공부를 본격 시작했다. 의학 박사이자 미술사학 박사로서 그는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내는 한편, 다양한 매체에 문화 관련 칼럼을 기고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젠 문화인으로서의 명성과 활동이 의료인의 경력을 압도할 정도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인터뷰를 약속한 날, 그는 최근 한 달여 유럽 미술관 전시회를 혼자 순례하고 왔다며 문화의 향취에 젖은 표정이 역력했다. 사진 촬영을 생각지 못하고 평상복(?) 차림으로 와 어쩌냐고 걱정을 했지만 중절모에 세련된 비즈니스 캐주얼, 적당히 손때 묻은 가죽가방을 멘 차림은 단아한 문화인 그 자체였다. 퇴임 후 미술사 공부를 시작,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취미로 즐기셔도 될 텐데 굳이(?) 박사학위에 도전하신 이유가 있었나요? “한국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 연구, 이것은 한국에서 저 말고는 할 수 없는 분야란 절박감과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간 모은 자료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모두 쓰레기가 된다. 내가 책임지고 반듯한 논문으로 남겨야 국내외로 인용될 것 아닌가’라는 사명감에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2008년 총장직을 사임하고, 사석에서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 관련 자료가 많은데 어떻게 넘겨줄지 고민 중’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때 좌중에 있던 유홍준, 이태호 교수가 ‘대학원에 들어와 연구’를 하라는 조언을 하더군요. 그 말이 제가 평소에 갖고 있던 사명감을 부추겼다고나 할까요.” 그가 피부과 교수로서 초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4년 뮌헨의과대학 졸업 종강강의 ‘예술작품에 나타난 피부병’을 듣고부터다. 당시 청년 의사 이성낙은 ‘예술을 의학적 시각에서도 접근할 수 있겠구나’ 하고 비로소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이후 유럽 미술관을 다니며 자료 수집을 하고 틈틈이 공부도 해왔다. 그 열매가 50여 년 만에 맺어진 셈이다. 피부병변을 통해 밝힌 한국 초상화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우리 선비문화의 정직성입니다. 죽기 전 영정에 해당하는 초상화들을 보면 중국, 일본과는 큰 차이가 있는데 바로 정직성입니다. 자료를 본격 수집하기 전엔 우리나라 초상화에는 피부병이 나타나 있지 않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관찰해보니 우리나라 초상화의 83%에서 피부병이 확인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단지 17%만이 정상적인 피부란 이야기인데요. 예컨대 서예가 추사 김정희 선생님은 살짝 곰보였습니다. 이는 전기 등엔 안 나오는 사실이지요. 초상화들을 보면 곰보 자국, 여드름 자국, 다모증 등 실물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시의 초상화는 수염을 그리지 않았지요. 다시 말해 그리는 사람이나 초상화를 요청한 사람이나 담담하게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고 그리게 한 것이지요. 피사체가 장바닥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의 상위층 양반 그룹이라 지시를 통해 그리지 말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담담하게 다 드러내 그리도록 한 것이지요. 조선 선비정신의 진수를 보는 것 같아 희열을 느꼈습니다.” 일흔의 나이에 전혀 다른 분야, 늦깎이 공부에 도전하셨습니다. 취미로 하셨다 해도 녹록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대학원생이나 교수진이 부담스러워하진 않던가요? “퇴직하고, 2009년에 명지대에서 미술사 석·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지요. 공부도 힘들고, 주위의 눈길도 신경 쓰이긴 했지요. 또 뭘 읽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그렇다고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는 한 번 읽었다면 지금은 두세 번 반복해 읽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지요(하하). 입학 전부터 전직(前職) 명함의 권위에 기대지 않겠다고, 그런 뒷소리를 듣지 않겠다고 단단히 각오했어요. 내 전직이 무엇인지 다 아는데, 불성실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했답니다. 설렁설렁 한다고 할까봐 강의 15분 전에 출석하고, 강의가 끝나면 맨 마지막에 나오는 등 성실한 학생으로서의 책임을 다했습니다. 100퍼센트 출석은 물론이고요. 무엇보다 큰 기쁨은 강의를 통해 그간의 부분적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구슬이 한 줄로 꿰어지는 기쁨에 비유할 수 있어요. 늘 가르치던 입장에서 배우는 입장으로 돌아가 젊은 30대들과 동료가 된 재미도 적지 않았습니다.” 아주대 의대 학장과 가천의과대 총장으로 지내던 시절, 예술·인문·문화학을 정규 강좌로 개설해놓고 의학도들에게 의무적으로 듣도록 하셨습니다. 인문학을 이처럼 앞장서 강조해온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인문학은 공감학입니다.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고 성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요. 공연, 전시회, 책을 보며 우린 사람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돌아보고 경계하게 됩니다. 영국에선 유명 연극배우에게 ‘Sir’라는 칭호를 줍니다. 정치가, 기업인보다 높이 평가하는 거지요. 배우는 황제, 살인자, 거지 등 인간의 다양한 삶을 펼쳐 보이며 다양한 인격을 구현해냅니다. 또 문학 서적을 읽으며 그 안에서 비겁한 사람도 보고, 정의로운 사람도 보고, 용감한 사람도 봅니다. 그들의 갈등을 제3자의 눈으로 보며 경계하고 배울 것이 무엇인지 의식을 갖게 하는 것, 그것 때문에 예술과 인문학이 중요하지요.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 의료인에게도 특히 필요한 학문입니다.” 실제로 총장님 삶에서 인문학과 예술이 문제해결의 마스터키로 작용한 적이 있는지요? “(하하) 네, 제가 독일 유학을 갔을 때입니다. 1950년대 말이니 한국인 유학생이 흔치 않을 때였지요. 기숙사 룸메이트가 저를 노골적으로 무시했습니다. 늦은 가을 기숙사로 들어가는데 룸메이트가 베토벤의 을 듣고 있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베토벤!’ 하고 탄성을 질렀지요. 그날 그 말을 들은 친구와 밤새도록 베토벤 얘기를 했어요. 그 전까지는 한 달 동안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사이였는데 말이죠. 문화 예술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공감한 덕분이지요.” 인문학은 세대, 국가, 민족을 넘어 소통과 공감의 가교로 자리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진정한 교육은 잘난 사람, 있는 사람이 아니라 못난 사람, 없는 사람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명문대 진학률을 평가의 잣대로 삼는 현행 입시체제는 잘못됐다, 사람의 아픔에 연민을 느끼고,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인문학적 교육 인식이 필요하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흔히 십년지기(十年知己)라는 말도 있듯이 십 년 이상 알고 지낸 사이를 오래된 인연이라 표현합니다. 총장님을 안 지 저도 십 년 이상 됐는데요. 뵈면 ‘70년지기’ 유치원 친구들과 서로 이름을 부르며 친하게 지내시는 모습이 참 정겹습니다. 인연을 오래 유지하시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살아보니 사람에게 복 중의 최고 복은 인복(人福)이더군요. 돌이켜보면 친구, 학교 은사 등 제 주위엔 늘 인간적으로 훌륭하신 분이 많았습니다. 천운이라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분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떨리고 행복해져요. 이들과의 귀한 인연을 돌이켜보니 공통점은 지속성입니다. 인간관계를 오래 유지하려면 지속적으로 가꿔나가야 합니다. ‘이 사람이 유용하다, 아니다’라는 계산에서 탈피해 순수하게요.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용건이 없어도 안부를 묻고 꾸준히 관심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나의 우정 유지 방법입니다.” 그는 마르부르크대 의예과에 들어가 처음 만난 독일 친구와 아직까지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전화를 하고 2014년 박사학위를 받을 때는 부부가 함께 한국까지 일부러 와서 축하를 해주었다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에는 신록의 연둣빛에 감탄해 “문득 네가 생각났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진을 보내니 바로 “어디에서든 우리에겐 봄소식이 들려온다”고 답장이 왔단다. 삶의 진정한 행복은 큰 행운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과의 소소한 일상 나눔에 있다는 고백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며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에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른들은 신세대에게 자신들의 풍부한 경험을 나눠주고 싶어 합니다. 신세대는 ‘꼰대의 잔소리’로 거부감부터 표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총장님의 세대 간 소통의 지혜는 어떤 것인지요? “한마디로 역지사지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입장을 바꿔 미리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되도록 가르치려 들지 않아요. 지나가는 말처럼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지요.” 이외에도 이 총장이 잘 쓰는 세대 간 소통 방법은 시사 현안을 갖고 그때그때 간단한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그는 미술을 전공하는 손녀와도 현안에 관한 미니토론을 카톡으로 소소하게 나누곤 한다. 얼마 전 마네의 그림 를 패러디한 을 국회의원회관에 전시한 것이 문제됐을 때도 “예술에 있어서 역지사지란 무엇인가, 예술가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등을 생각해보면 좋겠구나” 하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간단히 코멘트를 해주며 손녀와 대화를 했다. 일방적인 주입보다는 사고의 확장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도하는 식의 대화 방식이다. 자제, 제자분들에게 평소 강조하시는 인생의 가치는 무엇인지요. “첫째도 둘째도 정직입니다. 제가 의미하는 정직은 자기관리를 솔선수범해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퇴직할 때 ‘대과(大過) 없이 마쳤다’란 말을 관용어처럼 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혼탁한 현실에서 막상 이를 실천하려면 쉽지 않습니다. 부정이 만연한 사회에서 대과 없이 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소극적으로 들리지만 적극적 행동강령이에요. 운도 정직에서 비롯되고, 불운도 정직하지 못한 데서 온 것입니다. 예전에 선현들은 무첨(無添), 즉 선조에게 죄를 더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하셨어요. 욕되게 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고리타분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살수록 진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조, 가족, 자식 앞에 부끄럽지 않고, 그들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당당한 삶을 사는 것, 그것 이상이 있을까요. 담담해야 당당할 수 있고 욕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의 아들이 회사에 갓 입사했을 때 제일 먼저 강조한 것도 돈에 대한 정직이었다. 그것의 구체적 행동강령으로 ‘현금을 수금할 때 당일 보고, 당일 입금’을 실행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이 총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혹시라도 먼저 입사했다고 친구들에게 밥 살 일 있으면 쩨쩨하게 굴지 말고 아버지 이름 대고 밥 사라’고 자신의 단골식당을 아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일일이 인사시켰다고. 마지막으로 현역 프리랜서로서 ‘인생의 브라보’를 외칠 수 있는 조언을 들려주시겠습니까? “호기심과 활력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꾸 힘들다, 어렵다, 귀찮다 생각하면 도태되고 배제돼요. 행동반경이 좁아지면 사고반경, 사람반경도 좁아집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저는 지인들이 부르면 불원천리, 산 넘고 물 건너 달려가고요. 지하철에선 되도록 자리를 양보받지 않아요.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서 있으면 오히려 균형력 강화에 좋습니다. 휴대폰은 신제품 출시 소식이 나오면 즉시 바꾸는 얼리어답터입니다. 지금 편한 것에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해요.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힙니다. 이런저런 핑계 대지 말고 새로운 공부, 도구, 환경에 도전하세요.”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7-04-28 1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