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큰형 집에서 분가하기 전인 1956년 봄빛이 찬란한 4월 말에 필자는 태어났다. 찻길도, 전기도 없는 북한강 변 오지 강 마을이였다. 넉넉하지 않은 강촌의 아이는 끼니를 걱정할 정도의 궁핍과 결핍을 껴안고 살아야만 했다.
예닐곱 먹었을 때부터는 부모님이 논밭에 일 나가면 동생들 등에 업고 소 풀 뜯겨 먹이려 풀밭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드디어 초등학교에 다니게 됐는데 툭하면 조퇴나 결석을 했다. 4명의 동생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는 십오 리(약 5.89㎞) 거리였는데 학교에 갈 때는 산길을 따라 고개 넘어 달렸다. 중학교는 북한강 건너 면 소재지로 통학하는 바람에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강폭 수백m의 강을 건너야 했다. 이 때문에 자연스레 팔뚝엔 근육이 쑥쑥 붙었다. 고등학교는 40리 밖이어서 학교 근처에서 자취했다. 당시 필자는 주말마다 반찬통을 메고 오고 갔기에 다리가 튼실해졌다.
어릴 적 가난 때문에 할 수 없이 한 고역 덕분에 필자 체력은 완전 최고이었다. 중학교 입학시험 체력검사 때는 턱걸이를 15회(만점 8회)를 했고, 각종 모임 때 팔씨름 내기하면 거의 이겼다. 군대에서도 개인 전투력 평가에서 거의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 학창시절
1963년 3월 나이 8세 때 소청조각 몇 겹 접은 코 수건 가슴에 달고 큰집 사촌 누나를 따라 시오리 밖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한글도 깨치지 못한 채였을 것이다. 그래도 부지런히 동네 누나, 형들 쫓아 산 고갯길을 넘나들었었다.
이렇게 힘든 통학 길이고 한글도 미리 배우지 못했지만 필자는 공부를 제법 잘했다. 간직하고 있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생활통지표’를 보면 지금도 흐뭇한 혼자 웃음이 솟나 오곤 한다. 담임선생이 보호자에게 보낸 말이 “아들 잘 두셨습니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입니다” 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착실하고, 말 잘 듣고, 온순한 어린이였다. 그래서 공부든, 학교생활이든 모범 그 자체였다. 아버지, 어머니가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우등상장과 반장 임명장, 각종 표창장과 상장을 간직하고 있다가 필자에게 준 걸 보면 부모도 필자를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 같다.
산길로 초등학교에 다니던 필자는 고학년이 되어서는 가끔 노 젓는 배를 타고 학교를 오가기도 했다. 꽁보리밥 도시락에 무장아찌가 주된 반찬이었던 관계로 지금도 아욱국과 무장아찌는 싫어한다. 5학년 때는 6학년 상급생들과 같이 서울,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처음으로 검정운동화 일명 ‘스파이크’를 신어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가진 사진 중에 가장 어린 시절의 사진이다.
69년 3월 입학시험과 체력장을 거쳐 북한강 건너 면 소재지 중학교로 진학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동네 형한테서 물려받은 거였으나 자기 책가방을 처음 갖게 되었고 책 보자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네에서 대여섯 명이 한배를 타고 강을 건넌 뒤 5km를 더 걸어서 통학해야만 했다. 중3 때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는 몇몇 친구들은 선생으로부터 ‘완전정복’ 시리즈 참고서로 과외를 받는 모습이 무척 부럽기도 했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려 하니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부모님이 망설여 입학원서에 도장을 찍어주질 않았다. 울며 조르고 다짐을 하여 또 다른 면 소재지에 있는 40리 밖의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72년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1학년 1학기는 일단 먼 친척 집에 하숙했다. 한 달에 쌀 네 말을 주면서 어려운 공부를 이어갔다. 공업고등학교이다 보니 실습 조교와 학교 잡일꾼 일을 하면 학비를 절감할 수 있는 장학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1학년 2학기부터 학교 기숙사로 들어가 일명 ‘전공생’으로 남들의 1/3 정도 학비로 부모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 했었다. 지금까지의 필자의 생애 가운데 두 번째로 힘들었던 시기가 아닌가 한다.
◇ 청년기(20대)
75년 2월 고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고 스스로 대학에 진학해 보려고 서울의 조그만 독서실에 사환으로 들어가 청소와 관리를 해가며 공부했다. 독학으로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입학 예비고사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그리고는 경기 성남시 상대원동 서울왕복 시내버스 종점에 화로 드럼통을 놓고 군고구마 장사를 시작했다. 도시생활을 이어가며 먹고 살기가 만만치 않았다. 76년 3월 26일 군대나 빨리 다녀올 생각으로 수원병무청에 들렀다. 그런데 수원병무청 민원실 창구가 가니 가타부타 설명도 없디 “대한민국 1등 부대이니 입대해라”고 하는 장교가 있었다. 그래서 지원서 쓰고 1차 체력검사를 받은 뒤 서울 청량리역에서 군용열차를 탔다. 그런데 열차가 도착한 곳은 설악산 줄기 어느 골짜기였다. 바로 그 부대는 휴가, 외출, 면회 없는 특수부대였다. 이곳에서 33개월여 박박 기어야 했다. 생애 가장 힘든 시기였다. 6월 말 한여름과 12월 말 한 겨울에 수행했던 천리 행군 다섯 번, 공수낙하 훈련 및 점프, 야간침투 훈련 및 은신 잠복 등을 부대 모토인 ‘음지에서 싸워 이기고 양지에서 영광을 누리자’는 신념 아래 힘들게 이겨 내야 했다. 78년 1월 고향의 친구로부터 드디어 우리 동네에 전깃불이 들어 왔다는 편지소식을 들었다.
79년 1월 전역하여 집에 돌아와 보니 청평댐 수문 보강 공사로 강물이 완전히 빠지고 강바닥이 다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수력발전소 댐으로서 최초의 완전방류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해 3월초 둘째 남동생 고등학교 입학 짐 보따리를 들고 친척 집에 하숙을 시키러 들렸다가 신문에서 한전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다. 학교 때 교재 및 참고서와 일반상식 책을 구입하여 준비한 결과 운 좋게 합격하였다. 7월에 신입사원반 교육에 입소하여 한국전력공사 직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동생들은 계속 돌봐야 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중학교 3학년이었던 두 여동생을 첫 발령지인 강원 춘천시로 전학시켜 돌봤다. 그리고 둘이 결혼하여 출가할 때까지 데리고 있었다. 주말이면 청평 고향 집에 들러 부모님 농사일도 도와 드려야 했다.
그런데 83년 8월 15일 아버지가 갑자기 병이 생겨서 춘천시의 내과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서울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그래서 서울로 이송시켰다. 그런데 서울 병원에서 물어보니 큰 병이었다. 할 수 없이 어머니가 이틀에 한 번꼴로 서울로 오르내리며 병약해지는 아버지를 돌보아 드려야 했다.
그러다가 9월 29일 아버지는 병마에 쓰러지신 지 45일 만에 갑작스레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49세의 젊은 나이에 어머니와 우리 5남매를 남겨 두고 먼저 하세(下世) 한 것이다. 세상이 다 꽉 막히는 암담함 속에 무겁고 커다란 짐을 지어야 했다. 그때 내 나이 28세였다.
◇ 중년기(30~40대)
당시 중. 고등학생이던 두 여동생과 19평 주공아파트에서 어려운 살림을 이어갔다. 회사 직원의 소개로 서울에 있는 회사 내 여직원을 소개받아 데이트하다가, 1986년 10월 나이 서른한 살에 그 당시 관습으로는 늦장가를 갔다. 순하고 착한 아내를 맞아, 오 남매 고향 집의 홀어머니를 중심으로 오순도순 살아보려고 애썼다.
공부를 외면하고 초등학교만 졸업한 후 제멋대로 살아가던 남동생이 40세가 되도록 결혼을 못 한 채 고향 집으로 귀향을 해왔다. 주위의 소개로 중국 재중동포 아가씨를 제수씨로 맞아들였다. 그러다 3년도 채 안 되어 제수씨가 못 살겠다고 이혼 소송을 하게 되었고 1997년 3월 법원의 판정으로 이혼 절차를 거치게 된다. 동생이 객지에서 제멋대로 살며 돌보지 않은 몸 건강이 점점 나빠지면서 간경화가 악화하여 그해 7월에 사망하게 된다.
87년 8월엔 필자의 아들이 태어났고, 2년 후엔 딸이 태어나 우리 집은 네 식구가 됐다. 그 후 홍천으로 양구로 전근 다니며 36년 8개월 한전에서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 갱년기(50대)
55세 때 갑작스러운 가슴의 통증을 느껴 종합병원 심장내과를 찾았다가 ‘협심증’ 진단을 받고 두 군데의 관상동맥에 스텐트 시술을 받아야만 했다. 선천적으로 잇몸 건강이 원래 안 좋은데 50대를 넘으면서 급격히 나빠진 치아 때문에 음식 섭취가 불편하여, 장기간에 걸쳐 9대의 치아에 대하여 임플란트시술을 하게 되어 커다란 경제적 지출도 발생하였다.
2014년부터 춘천 소재 대학의 평생교육과정의 시 문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2016년 2월 방송통신대 졸업 직후 공부를 심도 있게 하고자 서울디지털대학 문예창작과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쉬지 않고 공부하며 살아가려는 생각이다. 육체는 늙어 가면 많이 약해지고 쓸모없게 퇴화하겠지만 정신적인 노쇠는 그런대로 유지하며 이어갈 수 있다고 본다.
◇ 미래 (60세~ )
모든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인 성장, 성숙, 노화의 단계를 거쳐 일생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런데 노화가 시작되면 개인과 주위의 사회구성원들과의 끊임없는 상호 관계가 중요해진다.
필자가 태어나서 지금까지는 부모님과 오 남매와 큼직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도움 주며 화목하고 다정하게 잘 살아왔다. 자식 둘은 결혼시켜 가정을 꾸리도록 만들어 주었고, 같은 도시 내에서 가깝게 살면서 자주 오가는 것 또한 행운이 아닐까 한다. 돌아오는 10월엔 손자가 태어나고 할아버지가 될 거란다.
지금은 다니던 직장의 정년퇴직으로 말미암은 경제적 소득의 감소로, 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특히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건강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제는 필자와 아내의 건강관리와 유지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고향의 노모도 더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흔히 환자가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는 것을 ‘의료쇼핑’이라고 표현한다. 의사를 믿지 않고 쇼핑하듯 병원을 골라 진료를 받는다는 부정적 뉘앙스의 표현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자. 치료를 받아도 낫질 않아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해야 한다면 환자는 어떤 마음이 들까. 가톨릭관동대 국제성모병원에서 만난 정순숙(丁順淑·69)씨가 그랬다. 무려 9년이나 떠돌아 다녔다. 채동식(蔡東植·41)교수를 만나기 전까지.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정순숙씨는 평범한 우리내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 볼 수 있는 중년 여성이다. 식품 유통사업을 하던 남편은 6년 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두 딸은 결혼을 했고, 직장인인 아들과 인천 원당동에서 지내고 있다.
정순숙씨가 오른쪽 무릎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쯤의 일이다. 서울 녹번동에 살 때였다. 처음엔 그러다 낫겠지 했지만 통증이 영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특별히 거친 운동을 한 기억도 없고, 무릎에 무리를 줄 만한 생활도 아니었다. 특별히 무릎을 다칠 만한 사고도 없었다.
9년 동안 병원 3곳 전전…통증은 여전
약국에서 파스를 사다 붙여도 허사였다. 그러다 동네 정형외과를 찾았다. 퇴행성관절염이라 했다.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이것저것 해봤지만 통증은 여전했다. 양의학으론 낫지 않는가 싶어 이번에 찾은 곳은 한의원이었다. 침도 맞고 한의사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그래도 역시 성과는 없었다. 무릎 통증은 여전히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는데 다리 모양이 O 자형이라서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땐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죠. 여기저기 다 다녀봤는데도 낫질 않으니. 그래서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용하다는 강남의 정형외과였어요. 유명한 대학병원 교수님이 강남에 병원을 차렸다고 해서 찾아갔죠. 다행히 그곳에선 차도가 있었어요. 고통이 완전히 가시진 않았지만 생활에 큰 불편이 없을 정도는 됐죠.”
물론 의사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따랐다. 체중이 관절에 부담을 주지 않게 운동을 하라 해서, 동네 구민회관에서 수중에어로빅과 요가도 열심히 했다. 그렇게 열심히 8년을 다녔다. 집에서 강남까지는 적잖이 먼 거리였지만 무릎을 낫게 해준다는 믿음이 그녀의 다리를 가볍게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마 작년 봄에 꽃놀이 간다고 무리하게 등산을 한 것 때문에 사달이 난 것 같아요. 그래도 6년간은 꾸준히 복용한 약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는데. 작년 6월쯤부터 다시 무릎이 쑤시고 붓기 시작하더라고요. 절뚝거리며 제대로 걷지도 못했어요. 다니던 병원에선 큰 문제 아니라고 하고. 그렇게 괴로워하던 차에 성당 수녀님께서 가톨릭관동대 국제성모병원을 추천해 주셨어요. 호스피스 봉사를 위해 다니시는데 좋은 병원이라고.”
O 자형 다리 관절염 피하기 어려워
채동식 교수는 정순숙씨를 전형적인 ‘의료쇼핑’ 환자의 모습으로 기억했다.
“이 병원에 오시기 전까지 많은 환자들이 여러 병원을 거치는 과정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서너 군데 병원에서 진단도 받으시고, 질환을 앓은지도 5년에서 10년 정도 돼서 오시죠. 그런 환자들은 이미 학습이 되어 있어 의학용어도 잘 이해하실 정도예요. 정순숙씨도 그런 전형적인 환자였습니다. 이런 환자일수록 가슴에 쌓인 것이 많아 저도 환자분에게 설명을 상세히 해드리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당시 정순숙씨는 퇴행성관절염의 마지막 단계, 즉 연골이 다 닳고, 연골판도 없고, 뼈와 뼈가 맞닿아 뼈까지 마모된 상태였다. 골세포가 죽어 그 자리에 구멍이 생겨 뼈가 약해지는 상태가 됐다. 보통 무릎이 아파지면 통증에 익숙해지고, 여기에 진통제 치료 등이 더해지면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이 견딜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면 선택하는 것은 인공관절치환술, 즉 흔히 얘기하는 무릎인공관절수술이다.
퇴행생관절염은 진행 상황에 따라 크게 4단계로 나뉘는데 1, 2단계는 연골이 정상이거나 다소 균열이 생긴 상태, 3단계는 연골이 파괴되어 관절 간격이 좁아진 상태, 4단계는 큰 뼈돌기가 생기면서 뼈가 마모되는 상태를 말한다.
“수술은 좋은 치료법이긴 하지만, 수술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특히 65세 이하의 환자들에겐 문제가 됩니다. 인공관절수술 환자의 20%가 수술한 지 15년 이후 재수술하게 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65세 이전에 수술을 하면 교체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가급적 65세 전후로 맞추려 하는 것이지요. 게다가 요즘 시니어들은 워낙 활동적이어서 최대한 본인 관절을 사용하는 기간을 연장하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순숙씨같이 O 자형 다리로 인한 퇴행성관절염은 근위경골 절골술이란 수술을 하기도 하는데, O 자형 다리를 인위적으로 반듯하게 펴주는 수술이다. 다리가 휘어 무릎의 안쪽 관절에만 부하가 걸리는 것을, 수술을 통해 안쪽과 바깥쪽 관절 모두에 균등하게 부하가 걸리도록 변화를 주는 것이다.
운동량 줄면 관절염 더 악화
일반적으로 퇴행성관절염의 원인으로는 체중이나 운동 등으로 인한 기계적 마모와 노화로 인해 손상된 연골이 재생되지 않아서, 또는 무릎의 염증이 연골 세포를 파괴하는 것 등이 꼽힌다, 특히 노화와 함께 하체의 근력이 떨어지면 무릎의 안정성이 떨어지고, 이런 불안정한 운동이 연골 손상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채동식 교수는 외상 등으로 인해 무릎에 충격이 가해지면 꼭 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볼 것을 권했다. 특히 시니어일수록 말이다.
“정순숙씨처럼 다리가 O 자형인 분들은 퇴행성관절염을 거의 피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최근에는 수술(근위경골 절골술)을 통해 교정이 가능해졌지만, 그 전까지는 딱히 방법이 없었어요. 대신 무릎 안정성을 키워주는 운동, 무릎에 부하를 주지 않으면서 근력을 강화하는 비체중부하운동을 통해 인공관절치환술 시기를 늦추는 것뿐이었습니다.”
최근에 퇴행성관절염의 치료방법 중 하나로 주목받는 것이 줄기세포 기술을 이용한 연골재생술이다. 아직은 치료비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액이고, 치료제도 제한적이다. 하지만 원래의 연골과 똑같은 조직의 초자연골을 재생해냄으로써 환자의 관절을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의학계의 기대를 받고 있다.
“퇴행성관절엄은 한 번 발생하면 환자의 활동량을 줄이고, 활동량이 줄면 근육량도 줄어요. 근육량이 줄어들면 대사량이 줄어서 인체 내 면역염증 반응도 약해지죠. 그러면 퇴행성관절염이 악화되는 악순환이 계속돼요. 그러다 수술을 미루기까지 하면 시기를 놓쳐 방 밖으로 나오는 것도 힘들게 되는 것이죠. 반대로 치료를 통해 운동량을 늘리면 면역기능이 강화되어 노화를 억제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비체중부하운동을 하며 비타민D 생성을 위해 하루 30분 이상 햇볕을 쬐는 것도 잊지 마시라고 당부드리고 싶어요.”
수술 후 양반다리도 가능해져
정순숙씨가 채동식 교수를 만나고 수술을 결정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병원에 대해 대신 알아봐 준 아들도 병원과 교수님을 마음에 들어 했고, 상담을 통해 신뢰할 수 있겠다는 믿음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5년 10월 26일 오른쪽 무릎은 튼튼한 인공관절로 교체됐다.
“수술을 막 하고 나서는 고통이 엄청났어요. 누워만 있고 싶은데 수술하고 나서 바로 무릎 꺽기 재활을 해야 한다고 해서, 지팡이를 짚고 움직이려 애썼죠. 매일 수술한 무릎이 열나고 붓기를 반복해서 힘들기도 했고, 물리치료를 위해 아픈 무릎을 움직여야 해서 3개월 동안은 정말 괴로웠어요.”
인공관절이 몸에 적응하고, 몸이 인공관절에 익숙해지기 위한 노력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처음엔 무릎운동을 위해 고안된 기계에 몸을 맡기기도 했고, 동네 재활의학과에서 물리치료를 받아야 했다. 조금 익숙해지고 나서는 집에서 병원에서 알려준 대로 이런저런 운동을 스스로 하고 있다고 했다.
“집에서 가구를 잡고 앉았다 일어났다, 누워서 다리를 굽혔다, 폈다를 얼마나 했는지 몰라요. 그 고생을 하고 나니까 이제는 동네 산책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게 됐어요. 아파트 단지나 동네 주변을 한두 시간 걷는 것도 이젠 거뜬해요. 신기한 것 중 하나가 수술 전에는 아파서 할 수 없었던 ‘양반다리’가 된다는 것이에요. 보통은 수술하고 나면 안 된다던데. 교수님이 수술을 잘 해주신 덕분인가 봐요.(웃음)”
실제로 서양 환자들에 비해 동양 환자들의 무릎 인공관절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양반다리’다. 인공관절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좌식문화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정씨의 경우 수술도 매우 잘됐고, 재활에도 적극적이었던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물론 ‘양반다리’는 무릎에 좋은 자세는 아니므로 피해야 한다.
건강한 두 다리로 여행 다니고 싶어
이제 간신히 수술한 다리에 대한 적응을 했지만, 정순숙씨는 또 한 번의 수술을 앞두고 있다. 수술하지 않은 왼쪽 무릎이다. 계획대로라면 오는 추석연휴 직후에 수술대에 오를 예정이다. 그 고생을 하고 나서 또 수술이라니 맘이 약해지지 않을까 했더니 각오가 대단하다.
“아이를 셋 낳은 엄마로서 수술보다 출산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해요. 그 정도로 아픈 수술이에요 무릎 수술은. 그래도 다시 수술을 하고 싶은 마음엔 변함이 없어요. 그만큼 수술 후 달라진 무릎 상태가 무척 만족스러워요. 두 다리가 이렇게 건강해진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두 다리가 건강을 되찾으면 무얼 가장 먼저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여행이라고 했다. 아들이 보내줘야 갈 수 있는 여행이라, 어디 한 곳 가고 싶은 여행지를 속 시원히 답하지 못했다. 비행기 멀미가 심한 탓에 외국도 무리다. 그래도 씩씩하게 들과 산을 걸을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지 않을까.
이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정순숙씨의 마음 한구석이 계속 편치 않은 것은 역시 아들 때문이다.
“전부 다 아들 덕분이에요. 수술 전에는 치아가 말썽이어서 임플란트로 아들을 힘들게 했는데, 이제는 양쪽 무릎까지 수술해야 하니 말이에요. 게다가 집에서도 이제 집안 청소는 아들 몫이 됐어요. 제가 불편한 탓이죠. 수술 후에 침대가 편하다고 아들 덕분에 환갑이 넘어 처음으로 침대생활을 시작했어요. 처음엔 붕 뜬 기분이더라고요. 이젠 침대가 아니면 잠이 안 오는 체질로 바뀌었어요.(웃음)”
인터뷰 내내 중간 중간 아들 얘기가 나올 때면 정씨의 눈빛은 달라졌다. 고마움에 그리고 미안함이 그녀의 눈을 촉촉하게 만든 것이리라.
그녀는 비슷한 처지의 다른 환자들에게 전할 말을 부탁하자 손사래부터 쳤다. 의사도 아닌데 해줄 말이 무엇이 있겠냐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마디 당부의 말을 했다.
“자기 몸은 자기가 관리해야 해요. 관리하지 않고 방치했다가 가족의 짐이 되면 안 되니까요. 병을 예방하거나, 가진 병을 빨리 낫기 위해서라도 몸 관리에 신경 써주셨으면 해요.”
치과에 6개월 만에 정기 검진을 받으러 갔다. 스케일링을 중심으로 일반적인 점검을 받았지만, 잇몸 전문의는 따로 있으므로 다시 내원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잇몸전문의라는 의사에게 임플란트 한지 꼭 일 년이 지났으므로 임플란트 경과도 보고 잇몸도 검진 받아보라는 것이었다. 사실 별 불편함이 없어서 굳이 다시 갈 필요는 없었지만, 가보기로 했다. 일종의 협업 영업인 셈이다. 과연 임플란트가 잘 자리 잡고 있다며 잘 관리하라는 얘기만 듣고 끝났다. 잇몸 상태도 좋아서 풍치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했다.
간 김에 임플란트에 관한 질문을 해 봤다. 임플란트는 자연치아처럼 충치로 부식될 염려가 없으니 그냥 놔둬도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임플란트 자체는 그렇지만 잇몸은 일단 탈이 나기 시작하면 자연치아보다 진행이 빠르므로 관리가 역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반 칫솔은 물론 치간 칫솔과 치실도 사용해서 잇몸과 임플란트 사이를 청결하게 유지하라는 것이다. 어금니 칫솔이라고 끝이 뾰족한 칫솔도 사용하라고 했다.
임플란트 한 쪽 끝에 사랑니가 아직 있다. 임플란트를 하면서 더 이상 소용없는 이가 되었으니 뽑는 것이 좋다고 했었다. 그러나 이 사랑니가 없었다면 필자는 40대에 틀니를 하는 신세가 될 뻔 했었다. 지인 중에 치과의사가 2명이나 있었으나 사랑니는 나중에 문제를 일으키니 볼 것도 없이 빨리 뽑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는 사랑니가 잇몸 속에 비교적 깊게 자리 잡고는 있었지만 미련이 생겼다. 뿌리가 튼튼하고 상태가 좋아 문제도 아직 안 일으켰는데 뽑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과연 이 사랑니 덕분에 롱브리지 크라운을 할 수 있었다. 어금니 두 개나 빠진 것을 사랑니가 축이 되어 브리지를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50대를 잘 넘기고 60대 중반이 되어서까지 잘 썼다. 그 당시에는 임플란트가 대중화 되어 있지 않아 꼼짝없이 틀니를 할 판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일이다. 어금니 하나가 없으면 브리지를 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금니가 두 개나 없으니 브리지 할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 보존치아 전공인 치과원장을 만나 사랑니에 브리지를 걸었던 것이다. 10년 만에 브리지가 수명이 다 되어 이제 임플란트를 하고 나니 정말 사랑니의 역할이 없어졌다. 원장은 사랑니와 맞물리는 윗 치아가 없으므로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간 틀니 신세를 면하게 한 지대한 공로가 있으므로 그냥 놔두자고 했더니 사랑니의 존재가 이롭지 않거나 필요 없으면 놔둘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뽑는 방향으로 권했다. 필자 생각은 그대로 놔두자는 것으로 결정했다. 오히려 다시 크라운을 씌우거나 코팅을 해서라도 수명을 연장하자고 했으나 그런 전례도 없으며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며 말렸다.
보통 사랑니는 사람에 따라 다르나 4개까지 날 수 있다는데, 필자는 왼쪽 어금니 옆에 제3의 어금니로 하나만 났다. 보통 18세 정도면 영구치가 다 나오는데, 사랑니는 그 후에 19세부터 30세까지도 난다고 한다. 필자의 경우는 어렸을 때 어금니를 발치하고 나서 턱뼈와 어금니 틈이 생기면서 그쪽만 사랑니가 나온 것 같다. 그래서 인지 사랑니의 상태가 눕거나 매복되어 있지 않고 어느 정도 노출이 되면서 정식 어금니처럼 나온 것이다. 나중에 긴요할 때 쓰라고 여분으로 나왔는데 정말 긴요하게 잘 썼다.
사랑니가 날 때 고통이 따랐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사랑니라고 붙여진 이유가 첫사랑처럼 아프다 하여 사랑니라고 불렀다는 설과, 사랑을 할 시기에 나온다고 하여 그렇게 붙였다는 설이 있다. 서양에서는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시기에 나온다 하여 ‘지혜의 이(Wisdom Tooth)'라고 한단다. 사랑니가 날 때의 고통의 시기는 지났고 사랑과 지혜의 좋은 뜻만 남았으므로 필자가 사랑니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덕분에 사랑이 다시 찾아오고 지혜가 쌓이면서 지혜의 덕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사랑니 덕분인지도 모른다.
아마 대부분의 시니어들이 가장 거부감을 느끼는 단어 중 하나는 ‘틀니’일 것이다. 틀니가 노화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틀니는 마치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인공지능이 사람과의 바둑대결에서 승리하는 요즘 세상에 모형같은 이빨을 넣었다 뺐다 한다니. 그러나 아직도 틀니는 그 존재 이유를 꾸준히 증명하고 있고, 치과에서 고유한 치료방법으로 사랑받고 있다. 왜 그런지 이든치과의원 윤득영 원장을 통해 알아보자.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틀니를 사전적 의미로 정의하면, 의치를 만드는 방식 중 무치악 환자를 위한 완전 틀니를 이야기한다. 즉 위쪽 혹은 아래쪽 치아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치아의 기능을 대신하기 위해 일종의 가짜 이빨을 말굽 모양의 틀처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총의치’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는 치아가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사용하는 것을 틀니라고 생각하지만, 치아가 부분적으로 상실된 경우 이를 대신하는 의치도 ‘부분 틀니’라고 부른다.
물론 모든 치아가 다 상실되었을 때 치료하는 방법이 틀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치과에서는 임플란트를 활용한 치료 방법이 활발하다.
틀니의 가장 큰 장점은 저렴한 비용
틀니가 아직까지 치과에서 애용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비용이다.
임플란트 한 개의 시술 비용이 100만~150만원 수준인 것에 비해, 틀니는 윗니나 아랫니 한쪽 면 전체를 치료하는 데 150만원 내외밖에 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저렴하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치과 보철 치료가 국민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것에 반해, 틀니 치료는 보험 적용이 가능하다. 올해 7월부터는 보험 적용 연령이 70세에서 65세로 낮춰진다. 보험 적용을 받을 경우 환자가 부담해야 되는 비용은 동네 치과의원을 기준으로 55만~65만원 수준이다.
사용 불편해도 고통 적고, 치료기간 짧아
틀니가 갖는 또 하나의 장점 중 하나는 치료 기간이 짧고, 특별한 고통 없이 시술이 간단하다는 점이다. 윤득영 원장은 그 장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치아가 없는 무치악 상태에서 틀니 치료는 잇몸 모양의 본을 떠 틀니를 제작한 후, 음식을 씹는 운동인 저작(咀嚼)이 제대로 되는지만 확인하면 될 정도로 간단합니다. 일반적으로 환자들이 공포를 갖는 치과 치료는 치아를 깎는 고통이나,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끄러운 소음이 원인인데, 틀니 치료는 그 과정이 없어 고령의 환자들이 어렵지 않게 치료 받을 수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환자들에게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도 장점. 고령 시니어들의 경우 당뇨병이나 고혈압 등 만성질환을 앓는 경우가 많은데, 임플란트 시술은 이런 질환이 심한 경우엔 아예 시도조차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에 반해 틀니는 심한 장애가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치료가 가능하다.
치료 기간이 짧다는 것도 장점. 치과에서 잇몸 모양의 본을 뜨면 보철을 제작하는 치과기공사에게 제작을 의뢰한다. 치과기공사들이 틀니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기간은 대략 7~10일 정도다. 일반적으로 5개월 내외가 소요되는 임플란트 시술에 비해 훨씬 짧다.
시니어들의 틀니에 대한 의구심 중 하나는 외모에 관한 부분이다. 틀니를 착용하면 상대가 알아볼 정도로 표가 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 윤 원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한다.
“최근에는 재질 등 여러 가지 기술들이 발전하면서 자연치아와 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있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특히 무치악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돼 잇몸 속 뼈가 내려 앉아 있는 경우에는 틀니가 잇몸을 가려주기 때문에 임플란트보다 보기에 좋을 수 있습니다.”
경제적 부담 없다면 임플란트 틀니 선호
임플란트가 보급되기 몇 년 전까지는 치아가 없는 환자에게 선택권이란 없었다. 무조건 틀니를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임플란트가 보급되면서 흔히 이야기하는 ‘임플란트 틀니’가 또 다른 선택지로 떠올랐다.
임플란트 틀니가 기존 틀니와 다른 점은 일반적인 보철이나 자연치아와 마찬가지로 의치를 반영구적으로 고정해 준다는 데 있다고 윤 원장은 설명했다. 틀니에 대해 흔히 갖는 공포, 즉 대화 중이나 일상 생활 중에 갑자기 치아가 튀어나오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환자의 입안 상태에 따라 달라지지만, 윗니는 임플란트 4개, 아랫니는 임플란트 2개로도 고정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임플란트를 사용해 고정시키면 입천장을 덮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미식거리는 부작용도 피할 수 있고, 이물감도 적습니다. 저작능력도 틀니보다 더 낫고요. 틀니는 오래 사용하게 되면 잇몸에 부하를 주기 때문에 잇몸과 잇몸뼈가 가라앉는 현상이 발생하기 쉬운데, 임플란트 틀니는 그런 부작용이 적어 장기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것도 장점입니다.”
물론 틀니에 비해 상대적인 단점도 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치료 과정에 고통이 따르고, 임플란트가 뼛속에서 아물어 굳어질 때까지 2~5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랫니보다 윗니가 2배 가량의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가장 큰 부담은 비용이다. 임플란트 틀니(총의치)는 건강보험 적용 대상이 아니다. 보험 재정상 치아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선 틀니를 사용하라는 정부의 방침 때문이다. 치아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임플란트 시술을 받는 경우, 평생 2개까지 보험 적용이 가능하다. 임플란트 역시 오는 7월부터 보험 적용 연령이 70세에서 65세로 낮춰진다.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치과에서 치료를 받으면 틀니 비용에 임플란트 비용을 더한 가격이 치료 비용이 된다. 틀니 비용 150만원에 임플란트 비용을 개당 100만원 전후로 부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임플란트 식립이 4개 필요한 윗니 임플란트 틀니는 임플란트 비용 400만원에 틀니비용 150만원을 더한 550만원 전후의 비용이 나온다. 때문에 비교적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환자들이 임플란트 틀니를 선호하는 편이다.
>> 윤득영(尹得榮) 이든치과의원 원장
원광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카톨릭대학교 구강외과 석사 수료.
대한치과보철학회, 대한구강악안면임플란트학회 정회원
나이가 들면 반드시 찾아오는 신체의 변화 중 하나는 노안(老眼)이다. 노시안(老視眼)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증상을 중국에서는 노화안(老花眼)으로 부르기도 한다. 될 화(化)자를 사용하지 않고, 꽃 화(花)자를 쓰는 이유는 이 증상이 인간이 가장 성숙하고, 지혜가 꽃 필 때 찾아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노안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일지는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원가에서 활발한 활동 중인 신촌연세안과의원의 최영주(崔泳珠·52) 원장과 GS안과의원 김무연(金武然·46) 원장을 통해 노안을 알아본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안과의사들의 모임인 대한안과학회는 최근 흥미로운 의견을 내놨다. 안과 관련 질환 중 일부 명칭이 최근 상황과 맞지 않거나 환자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워 변경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중 가장 먼저 지목된 것이 바로 ‘노안’이다.
대한안과학회가 노안을 지목한 이유는 현대사회에서 노안을 더 이상 시니어만의 증상으로 보기 어려워졌다는 것이 이유다. 눈을 많이 사용하는 현대인의 생활습관 때문에 30~40대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증상이 돼 ‘노안’이라는 명칭은 어울리지 않게 됐다. 이렇듯 노안이 더 이상 노화를 상징하지 않더라도, 노안은 피할 수 있는 신체의 자연스러운 변화다.
수정체 조절 모양체 근력저하가 원인
기본적으로 노안은 어떤 병이고 왜 생길까? 이에 대해 김무연 원장은 조금 다르게 노안을 이해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노안은 넓게 보면 나이가 들어 생기는 안과 관련 질환을 통틀어 생각하면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모양체 근육의 힘이 떨어져서, 아주 가까운 물체를 보기 위한 수정체 조절이 어려워져 발생하는 원시가 흔히 생각하는 노안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발생하는 백내장이나 황반변성과 같은 질환도 노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젊은 연령에서도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중년안’이라는 명칭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어 근력이 떨어져 발생하는 만큼 예방은 쉽지 않다. 최영주 원장은 수축과 반복운동을 통해 모양체의 근력을 강화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론 쉽지 않다고 말한다.
“운동선수처럼 모양체 근육의 근력을 강화할 수 있다면 모양체 근력 저하로 인한 노안이 오는 시기를 늦출 수 있겠습니다만 쉽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특별한 눈 질환 없으면 ‘안경’을
노안의 치료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돋보기’다. 안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노안의 대표적 아이콘으로 중년이라면 가장 피하고 싶은 물건이지만, 노안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대처 방법이기도 하다. 최영주 원장은 눈에 특별한 질환이 없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안경’이라고 이야기한다.
“최근 개원가를 중심으로 노안 치료를 위한 다양한 수술법이 시술됩니다만, 기본적으로 눈에 문제가 없는 정시(正視) 상태에서 노안이 왔다면 수술을 권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근시이거나, 백내장 질환이 있는 경우에는 질환을 치료하기 위한 수술 과정에서 노안치료를 함께 할 수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수술을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흔히 하는 얘기로 그 수술에 대해 평가하려면 의사도 그 수술을 받았는지 확인해 보라고 하잖아요? 저는 시력을 위해 라섹 수술은 받았지만, 가까운 곳을 볼 땐 돋보기를 낍니다.(웃음) 물론 안경이 싫어 수술을 고집하는 환자들도 많고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지만, 돋보기보다 선명해지는 수술은 없고, 부작용이 따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수술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면 크게 3가지 방법이 거론된다. 백내장 치료를 위한 인공수정체 삽입술을 시행하면서 노안을 치료하는 방법과 근시 치료를 위한 라식을 진행하면서 노안 치료까지 고려하는 방법, 그리고 최근 개발되어 국내에서도 선보이고 있는 인레이 삽입술이다.
백내장 수술은 비교적 간단
보통 사람이라면 눈에 인공수정체를 삽입한다고 겁부터 나기 마련이 아닐까. 이에 대해 김무연 원장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백내장 치료를 위한 인공수정체의 사용은 1948년에 시작된 오래된 시술입니다. 그만큼 안전성이 확립된 수술이기도 하고요. 우리나라에서 치과와 한의원을 포함한 모든 의료기관 중 가장 많이 시술되는 수술이 백내장 수술입니다. 인공수정체라는 명칭이 환자들을 겁먹게 하기도 하지만, 마취는 안약 몇 방울로 끝나고, 수술시간은 15분도 안 되는 간단한 수술이니 안심해도 좋습니다. 최근에는 노안 치료를 위해 다초점 인공수정체의 사용도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백내장 수술에서 사용되는 인공수정체는 단초점과 다초점으로 나뉜다. 단초점 인공수정체는 초점 조절 능력이 없는 단점이 있지만, 다초점 인공수정체는 가까운 곳과 먼 곳이 모두 다 보이는 장점을 갖고 있다. 수술에 대한 개인부담 비용도 크게 차이가 나는데, 단초점 인공수정체는 한쪽 눈 기준 30만원 수준인 데 반해, 다초점 인공수정체는 한쪽 눈 기준 200만~400만원 정도다.
그러나 다초점 인공수정체 삽입은 가격 말고도 또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고 최영주 원장은 경고한다.
“아마 국내에 백내장 수술을 시술하는 의사 중 다초점 인공수정체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의사들도 꽤 될 거예요. 기본적으로 다초점 인공수정체는 가까운 거리에서 먼 곳까지 동시에 보이는 구조이기 때문에 빛 번짐이 생긴다거나 초점이 이중, 삼중으로 맺혀 보이는 등의 부작용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초점 인공수정체의 선명도가 100점이라면, 다초점 인공수정체는 심한 경우 80점까지 떨어지기도 합니다.”
좌·우 초점 다르게 맞추는 방식도
평소 근시나 원시가 있는 환자가 노안이 생긴 경우에 라식으로 시력과 노안을 한번에 해결하는 방법은 일반인들이 쉽게 상상하는 것과 다소 다르다. 이 경우 양쪽을 다르게 조절하는 것이 핵심이다. 김무연 원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노안을 고려한 라식수술은 왼쪽과 오른쪽의 역할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라식 수술 장비에서 소프트웨어로 수술을 계획할 때 한 쪽은 가까운 곳을 중점적으로, 다른 쪽은 먼 곳이 잘 보이도록 정해놓는 방식입니다. 라식 경험이 있으신 분도 가능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물론 라식이 만능은 아니다. 각막 상태에 따라 수술 가능 여부가 달라지고, 좌·우안의 시력차이가 생기기 때문에 적응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입체감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특히 원시의 경우 근시에 비해 그 효과가 덜할 수도 있다.
최근 시력교정수술을 주력으로 하는 안과들 사이에서 노안 치료의 새로운 방식으로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인레이 삽입술’이다. 인레이 삽입술은 각막에 인공물을 삽입해 노안을 개선하는 방법인데 일부 안과에서는 ‘노안 임플란트’라고 홍보하기도 한다. 최근 많이 사용되는 방식은 흔히 ‘캄라(KAMRA) 인레이’라고 불리는 카메라 인레이 방식과 ‘물방울(Raindrop) 인레이’로 대표되는 하이드로겔 인레이가 있다.
새로 등장한 ‘노안 임플란트’
캄라 인레이는 레이저를 이용해 근시, 난시, 원시 정도만큼 시력을 교정한 뒤 직경 3.8mm의 작은 링을 각막 내에 삽입해 노안 시력을 개선하는 수술이다. 이 작은 링 안에는 아주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는데, 마치 핀홀카메라처럼 이를 통해 가까운 곳이 잘 보이게 된다.
물방울 인레이는 방식이 다소 다르다. 마치 자동차 사이드 미러에 사각을 없애기 위해 작은 볼록거울을 붙이는 것처럼, 아주 작은 볼록렌즈를 각막에 삽입하는 방식이다. 가까운 곳을 보기 위해서는 수정체가 볼록해져야 하는데, 모양체 근력 저하로 볼록한 모양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함이다.
이 두 가지 방식에 대해서는 아직 오랜 기간 테스트된 결과는 나와 있지 않다. 지난해 발간된 대한안과학회 학회지에는 이 두 가지 타입에 대해 서울아산병원과 서울삼성병원 연구팀의 라는 제목의 논문이 실렸다. 결론에서 연구팀은 물방울 인레이가 환자들의 만족도가 상대적으로 높았지만, 연구 표본이 되는 환자 수가 적고, 두 방식 모두 나안 시력은 비슷하게 나와 결론 내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발표했다.
일부 보수적인 안과에서는 사용에 적극 나서지 않고 두고 보자는 의견도 나온다. 실제로 인레이 삽입술은 실시할 수 있는 조건도 까다로워 적용 가능한 환자가 많지 않은 편이다.
좋은 안과 제대로 선택하는 방법은?
최근 안과분야에서는 시력교정 수술만 중점적으로 하는 안과들이 늘면서 일부에서는 ‘라식 공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가 됐다. 또 수술 과정에서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좋은 안과, 착한 안과를 선택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최영주 원장은 “어려운 질문”이라면서 몇 가지 조언을 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공부를 많이 하는 의사, 다른 의사와 의견 교환을 많이 하는 의사가 좋습니다. 이 부분에선 아무래도 병원에 의사가 둘 이상인 병원이 유리한 편입니다. 내부적으로 진료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니까요. 또 시력교정 수술뿐만 아니라 일반진료도 하는 의사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수술 적합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질환에 대해서도 익숙해져 있어야 안전합니다. 또 병원에서 수련을 통해 경험을 많이 쌓은 의사가 아무래도 바로 개원을 한 의사보다는 나으리라 생각됩니다. 일반 환자들 입장에선 이러한 부분을 판단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좋은 안과를 찾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그날따라 신촌 길을 걷고 싶었다. 봄바람이 불던 첫날.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걷던 길 멀리서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다다른 곳은 신촌 홍익문고 앞 피아노. 많은 젊은이가 멈춰 서서 익숙한 선율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피아노 앞에는 갈색 모자에 목도리를 단단히 두른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그렇게 밤길 위의 피아니스트 장요한(張요한·62)씨를 만났다.
차 한잔 함께 하실래요?
그의 연주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가가 다짜고짜 물었다. 봄이라지만 밤은 겨울이었다. 차라도 한잔 하면서 얘기가 하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젊은이들의 장소에 나와 피아노를 치는지 묻고 싶어졌다.
“그저 취미로 피아노를 칩니다. 일과를 마치고 피아노 칠 수 있는 곳을 찾아옵니다. 오늘은 날씨가 좀 풀린 거 같아서 신촌에 나왔는데 사람들이 피아노 연주를 들어주니까 좋았습니다.”
겨울 동안 장요한씨는 신촌이 아닌 여의도 IFC몰 CGV영화관 안에 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는 20분이고 30분이고 피아노를 쳤다. 그가 피아노를 치는 날이면 영화관 측에서 관객(?)들이 앉을 테이블과 의자를 마련해 주었다.
“수줍음이 많은데 어렸을 때부터 남들 앞에서 연주를 좀 해서 그런 지 거리에서 피아노를 치는 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신촌에는 오늘 정말 오랜만에 나온 겁니다.”
장요한씨가 최근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건 작년 3월 인사동에 설치된 ‘달려라 피아노’를 알고부터다. ‘달려라 피아노’는 연주되지 않거나 거실, 공공시설에 방치된 중고 피아노를 기증받아 화가들이 새롭게 디자인한 뒤, 지역 공공장소에 설치하는 프로젝트다. 2008년 영국 버밍엄에서 시작해 한국에는 신촌 홍익문고 앞, 인사동, 선유도 공원, 어린이 대공원, 동대문 DDP 등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번지고 있다.
장요한씨는 인사동과 신촌, 여의도를 오가며 매일 연주를 했다. 피아노 칠 때는 모르지만 연주가 끝나고 나면 몸이 아주 힘들었다.
“쉬고 운동도 해야 하는데 퇴근만 하면 자꾸 발걸음이 피아노 있는 쪽으로 향하더라고요. 가끔은 왜 내가 아프면서까지 피아노를 치고 고생할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박수가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원동력이자 중독의 요인이라고 말했다. 피아노를 치고 난 뒤 쉬어야 하는데 박수를 받으면 연주를 끊을 수 없다. 몸이 좀 힘들어도 그가 연주하는 이유다.
피아노는 배운 적이 없다? 천재 아니십니까?
그는 단 한 번도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다. 어렸을 때 집에 있는 풍금을 접한 것이 피아노를 치는 계기가 됐다.
“1974년 어느 날, 커피숍에서 누군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봤는데 그게 너무 멋있었어요. 원래는 기타를 배우려고 했다가 때려치우고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면 항상 음악과 함께한 세월이다. 중·고등학교 악대부원으로 활동할 때는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악대부 유니폼을 입고 안동 시내 시가행진을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취미활동도, 특별활동도 늘 음악을 선택했습니다.”
학교 음악선생님이 음대에 가라더군요.”
고등학교 때는 고향인 안동에서 대구로 유학을 가 큰누님 집에서 살았다. 등교하기 전 피아노를 30분정도 치고 갔다. 전공자도 아닌 고등학생이 참으로 대단한 열정이 아니었나 싶다. 작곡가 출신이던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을 대신해 수업 시간에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는 장요한씨. 그런 그에게 음악선생님은 음대에 갈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장요한씨는 음악은 그냥 취미로 여긴다며 음악선생님의 추천을 거절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음대를 준비했던 것도 아니고……. 그때 당시에 음악선생님이 대구시립 교향악단 지휘자였거든요. 음대에 가라고 했는데 저는 1년 더 공부해서 치과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피아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피아노를 쳤다. 손님이 없는 레스토랑이나 피아노가 있던 대구교대 안에 들어가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를 전공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약간의 후회가 남아 있는 듯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음악에 상당히 소질은 있었어요. 부모님이 제 재능을 알아보고 잘 키워줬으면 어땠을까요? 지방이 아니라 서울에 살면서 음악을 더 접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과거의 이루지 못한 꿈이 미련으로 남아 장요한씨를 길 위의 피아니스트로 만든 게 아닐까.
“그래도 대학 다닐 때 학교 그룹사운드에서 키보드를 연주했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조용한 음악이 좋지만 저도 나름 20대 때는 록 음악이 좋았습니다.”
그는 경북대 의대 그룹사운드 ‘메디컬 사운드’ 2기 출신이다. 본과에 올라가기 전까지 활동하다 후배들에게 물려주는데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전통의 그룹사운드다.
낮에는 치과의사 장요한의 삶을 삽니다
장요한씨의 본업은 치과의사다.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1기로 졸업한 뒤 35년을 치과의사로 살고 있다. 최근 1년 사이 피아노를 치는 삶에 심취한 듯 보이지만 하얀 가운을 입는 순간 영락없는 의사 선생님으로 돌변한다.
“피아노만 치고 치과 진료에 관심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최대한 정직한 진료로 꼼꼼하게 환자를 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 병원에는 과잉 진료를 피하는 방법도 적어두었습니다. 은퇴하는 날까지 양심적인 치과의사로 일하고 싶습니다.”
장요한씨는 마음을 비우고 일반 환자만 치료하고 있다. 임플란트 시술도 안 한다. 엑스레이 찍기, 스케일링도 장요한씨 스스로 한다.
“속은 편합니다. 수익이 별로 없는 게 문제지만, 돈에 대해 신경을 별로 안 써도 됩니다. 내 월급 누가 주는 거도 아니고 진료가 끝나면 저는 피아노 치러 나갑니다.”
치과의사를 하는 35년 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그만큼 치과의사로서 열심히 살았다고 말한다.
“제 나이는 이제 은퇴할 나이잖아요. 하루에 받을 만큼만 예약한 환자들을 봐줍니다. 환자를 볼 수 있을 만큼만 봐서 에너지가 축적이 된 건지. 그래서 아마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장요한씨는 피아노라도 안 쳤으면 서울서 살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 힐링 되는 연주 선물하고파
“저는 레퍼토리가 아주 많습니다. 그냥 놔두면 2~3시간 칠 수도 있어요.”
장요한씨는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비롯해 영화 OST , , , 등 피아노로 치기 편하고 인기 좋은 음악들을 고른다.
“힐링이 되는 음악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제가 치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 보면 따뜻한 음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 연주가 편하고 좋다며 다가와 말해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장요한 씨는 좋은 연주를 위해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단다.
“어떤 팝송이 치고 싶다고 생각하면 원곡을 계속 열심히 듣습니다. 듣다 보면 내가 따라 할 수 있고 딱 듣기 좋은 부분들이 들립니다.”
영어 어휘력을 늘리듯이 그렇게 차근차근 손에 건반의 느낌을 익힌다고 했다. 피아노를 치다 잘 넘어가지 않고 자꾸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잘 풀릴 때까지 연습한다.
“반복해서 하나하나 치다 보면 되더라고요.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던 악보도 치다 보니 됐습니다.”
장요한씨는 은퇴 후 의료 시설이 취약한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서울에는 사람들도 많고 또 치료해 줄 의사도 많다고 느낀다.
“치아 미백도 하고 다른 여러 가지 하면서 돈을 번다는데 저는 그런 거하고 멀어요. 고향으로 가고 싶은데 가족들이 서울이 더 좋다고 해서 고민입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 속에서 피아노 치는 게 그리울 거 같아 걱정이다. “내일은 뭐 하실 건가?”라는 질문에 “날씨가 추워진다고 하니 여의도에 가서 피아노를 칠 생각입니다”라고 말하는 장요한씨. 1년 넘게 그의 일상으로 자리 잡은 피아노 연주를 위해 그는 친구를 만나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자제한다. 봄이 되면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피아노를 칠 생각이라는 장요한씨. 오늘 혹시 시간이 된다면 여의도 IFC몰로 가보기를 권한다. 산뜻한 표정의 치과의사, 아니 밤의 피아니스트 장요한씨를 만날 수 있다.
모든 병은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 원인은 심각한 사고나 사소한 해프닝일 수도 있고, 최근의 일이거나 또는 꽤 오래전 벌어진 사건이 단초가 되기도 한다. 부산에서 만난 옥기찬(玉基燦·55)씨와 그를 치료한 부산대학교치과병원의 허중보(許仲普·40) 교수의 이야기는 조금 특별했다. 이제 중년의 삶을 시작하는 환자를 위해 다른 치료법을 선택한 의사의 이야기는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치아가 아플 때에는 모든 생활이 문제였습니다. 직장이나 사회생활에까지 영향이 있었고, 여러 어려움 때문에 아내까지 힘들어했었습니다. 그중 가장 문제는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 삶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으니까요.”
부산대학교치과병원의 교정에서 만난 옥기찬씨는 치아로 인한 문제가 한창일 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부산의 한 제지공장에서 근무하는 옥기찬씨는 평소에 등산과 낚시를 즐기는 활동가 타입의 중년으로, 잔병치레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그렇게 건강했던 그가 치아에 문제를 겪게 된 것은 과거의 어느 날, 갑작스레 찾아온 불의의 사고 때문. 1988년 당시 28세의 건장한 청년이었던 그는, 친구와 함께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평소와 다름없이 오토바이로 귀가를 하던 중이었다. 국도 위를 달리던 그는 이면도로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승용차를 발견하게 되고, 차량을 피하기 위해 핸들을 급작스럽게 틀어야 했다.
“어쩔 수 없었죠. 오토바이를 탄 상태로 자동차에 덤빌 순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겨우 피하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저도, 친구도, 오토바이도 논바닥 위에 있었습니다. 입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고요. 그래도 다른 곳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걸로 위안을 삼아야 했습니다.”
아직은 얼지 않았던 부드러운 논의 흙이 그를 받쳐주는 안전망 역할을 해 심각한 사고는 간신히 면했다. 그래도 옥씨는 그 사고로 윗니의 대부분을 잃어야 했고, 겨우 남아 있는 3개 치아로 윗니 8개를 모두 지지하는 적지 않은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당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삶은 정상으로 돌아온 듯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고 부위의 고통은 조금씩 넓고, 깊어져 갔다. 여느 부산 사나이들처럼 그 역시 사소한 고통에는 의연하려 했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다. 옆에 남아 있던 치아들도 세월의 흐름 때문에 썩고 뽑히면서, 어금니가 해야 할 일들을 앞니가 대신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붓고 피가 나는 것은 기본이었죠. 먹고사는 문제가 이렇게 힘든 것인지 몰랐습니다. 김치 같은 건 제대로 씹지 못해서 아내가 일일이 잘게 잘라주거나, 찌개로 푹 끓여야 먹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밥도 많이 먹어야 반 공기가 못 되었죠. 체중도 빠져서 63~64㎏ 정도밖에 안 되었고, 제대로 먹질 못하니 늘 기운이 없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기운이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니 자연스럽게 자신감도 사라져갔습니다.”
다른 많은 환자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도 참다 참다 치과를 찾았다. 동네 치과에서 어느 정도 치료를 받으면 되겠거니 생각했지만, 그들이 내놓은 해답은 의외였다.
“치과에서 치료가 어렵겠다고 하더라고요. 뼈가 별로 없다고. 그래서 좀 더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야겠다 싶어, 두 군데를 더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대답은 같았습니다. 큰 병원에 가보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부산대학교치과병원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때서야 심각한 상황을 깨닫게 된 옥기찬씨는 고민 끝에 병원을 찾았다고 한다. 적지 않은 돈이 들 것이 분명하고, 많은 시간도 필요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임플란트를 하게 된다면 치료 후까지 계속 아플 것이라는 직장 동료들의 경험담도 그를 겁먹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어렵게 부산대학교치과병원을 찾은 것이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의 일이다. 남들은 연말이다 크리스마스다 들떠 있는 모습들뿐이었지만, 그의 눈에 그런 것들이 보일 리 만무했다.
처음 찾아온 옥씨의 모습을 허중보 교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고 했다. 단단하고 건강해 보이는 신체와 달리 입 주위만 나이가 몇 년은 더 먹은 듯한 모습이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처음에 환자 상태를 봤을 때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앞니의 브리지로 연결된 의치는 흔들려 수명을 다한 상태였습니다. 기둥 역할을 했던 3개 치아 모두 뽑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그때 가장 큰 고민은 보통의 치료를 하면 윗니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틀니에 의지해 살아야 하는 환자의 심정이었습니다. 틀니를 사용한다는 것은 노년이 됐다거나 혹은 젊음을 잃었다고 여겨 자포자기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니까요.”
실제로 그를 찾아오는 많은 환자들이 남는 치아 하나 없이 틀니를 해야 한다고 하면, 마치 암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슬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특히 갱년기에 접어든 중년 여성들은 남편에게까지 숨기고픈 여자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 되기도 한다고.
그래서 허 교수는 조금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부분틀니를 제거하고, 이를 받치고 있는 치아를 모두 뽑은 그날,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임플란트로 고정하는 임시 치아를 장착하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이를 뽑고 임플란트를 심으려면 대체로 2개월 정도를 이가 없이 지내야 하는데, 치아가 없이 지낼 순 없기 때문에 임시로 만든 틀니를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이 임시 틀니라는 것은 제대로 고정되지 않아 빠지기 일쑤이고, 상대와 대화하는 도중 달가닥거리기라도 하면 환자를 무척 난감하게 만드는 물건이기 때문에, 허 교수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허 교수는 어렵고 복잡하지만 씹는 기능까지 할 수 있는 고정된 임시 치아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의학적으로 설명하면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컴퓨터로 임플란트 8개가 심어질 자리와 각도, 깊이까지 모두 결정한 다음 그에 따라 장착될 임시 치아까지 모두 만들어 놓고 수술했습니다. 강도를 확보하기 위해 골이식도 해야 했고요. 수술 후 바로 임시 치아가 떨어지거나 움직이지 않도록 해서 부드러운 음식 정도는 바로 씹을 수 있게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3번에 나누어, 6개월 정도 걸려야 치료할 수 있는 것을 한 번의 수술로 해결하는 것이라 꽤 까다로웠습니다.”
자칫 간과할 수 있는 치아가 입안에서 자리를 잡고 안정화되는 기간과 잘 씹힐 수 있도록 조정되는 정도까지 모두 계산에 넣어야 했기 때문에 허 교수에게도 신중을 기하게 되는 사례였다고 설명했다.
올해 2월 25일, 수술을 끝낸 날 이후 옥기찬씨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수술이 끝나고 4시간이 지난 후부터 식사를 시작했어요. 처음엔 다들 그런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더라고요. 큼직한 김치를 마음껏 먹고 고기도, 야채도 실컷 씹을 수 있으니까 세상이 정말 달라져 보이더라고요.”
치료 이후 옥씨의 달라진 인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바로 주말 농장이다. 그는 올 여름부터 주말농장을 찾아 이런저런 농작물들을 심기 시작했다. 상추며 고추, 당근, 고구마, 케일 등 죄다 아삭아삭 씹을 거리뿐이다.
“이제 아내도 두 아들 것과 다르지 않게 식사를 준비하게 되고, 식사량도 늘었습니다. 실제로 체중도 5㎏ 정도 불었고요. 얼마 전에 갔던 친구의 딸 결혼식에선 얼굴이 밝아졌다며 놀라는 친구들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삶이 변하니 자연스레 치과치료 홍보대사가 됐다.
임플란트는 무조건 아픈 것이라며 겁줬던 직장 동료들에게 제대로 치과치료를 받아보라며 되레 큰소리친 적도 있고, 주변에 아픈 치아 때문에 고생하는 이들이 있으면, 겁먹지 말고 병원부터 찾으라며 이런 저런 조언을 해 줄 정도가 됐다고.
과거의 옥씨와 마찬가지로 치료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을 또 다른 환자를 향해 허중보 교수는 이렇게 조언한다.
“다른 질병도 마찬가지겠지만, 치과치료 역시 시기가 매우 중요합니다. 치아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을 악몽에도 비유할 만큼 두려워하면서, 남아 있는 치아가 견디지 못할 때까지 방치하는 것은 모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기대수명도 훨씬 길어지는 만큼 관리나 조기치료가 무척이나 중요하니 너무 겁내지 말고 치과를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임플란트를 심을 때 가장 걱정인 것이 무엇일까?
보통은 고통과 긴 치료기간을 떠올린다. 쇠 나사를 뼈에 박는 과정이므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고, 그 나사가 뼈와 붙는 시간도 빨라야 3개월 이상 소요된다.
하지만 정말 절망스러울 때는 입 안의 상태가 너무 나빠 임플란트를 할 수 없다는 진단이 내려질 때다. 이 경우 더 불편한 진료방법을 선택하거나 아예 이가 없는 상태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얼마 전 이와 관련한 희망적인 소식이 하나 나왔다. 미래창조과학부의 8대 건강 R&D 추진과제의 하나인 ‘노인맞춤형 차세대 바이오 임플란트 기술개발 과제’의 일환으로 개발하고 있는 시니어 맞춤형 임플란트의 시제품이 완성되었다는 것. 이 기술을 개발한 회사가 ‘나이벡’이다.
사실 정종평 대표는 코스닥 상장회사의, 그것도 바이오 관련주의 대표종목 회사의 대표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의 학장과 대한치주과학회 회장을 역임한 이미 치과 분야에서 잘 알려진 임상가이자 학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회사도 엄밀히 말하면 임플란트 제조사는 아니다. 나이벡은 정종평 대표가 이미 1990년대 말부터 연구해온 단백질 합성기술을 여러 바이오 공학에 활용해 제품화하는 회사로, 피부 재생이나 뼈의 빠른 형성 기술을 활용한 제품들이 대표적이다.
나이벡이 내놓은 시니어 맞춤형 임플란트는 이런 골형성 기술과 관련이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환자가 잇몸 뼈를 잃은 경우에 지금까지는 사람이나 동물의 뼈를 활용한 재료를 쌓아 뼈가 자라기만을 기다렸지만, 이 기술을 활용하면 뼈의 생성이 촉진돼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환자가 많아진다는 것이 정 대표의 설명이다.
정 대표는 “정부가 이 기술에 큰 관심을 갖고 있어, 2017년에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할 수 있는 단계까지 마무리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은 개를 대상으로 실험할 정도까지 와 있기 때문에 예정대로 환자들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동안은 임플란트 금속 표면에 물질을 바르는 수준의 기술이 공개됐지만, 우리는 임플란트 재료나 골형성 유도물질이 다른 형태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놓은 상태입니다”라고 밝혔다.
나이벡은 치과 분야뿐만 아니라 화장품부터 골다공증 치료제까지 다양한 분야의 제품을 내놓고 있는데, 이에 대해 정 대표는 “갖고 있는 원천기술이 활용될 수 있는 분야를 고민하고, 우리의 기술을 활용하고자 하는 기업들의 제안이 늘어나면서 스펙트럼이 넓어지게 됐습니다. 우리는 연구개발 중심의 회사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술이 보다 큰 세계적인 기업으로 이전되어 대량 생산되게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라고 밝혔다.
치과에 중장년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지난 4월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14년에 치과를 방문한 55세 이상 환자 수는 2010년에 비해 47%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부터는 노인틀니가, 지난해부터는 임플란트 건강보험 적용이 시작된 데다, 치아 건강을 찾고자 하는 환자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에 치과들도 달라지고 있다.
“어머니, 다음 주 월요일에 오셔야 하는데요, 너무 일찍 오시면 힘드시니까 아침에 ‘별이 되어 빛나리’ 보시잖아요? 그 드라마 보시고 나서 천천히 나오세요.”
신당동의 한 치과에서 고령의 환자를 진료한 치과위생사가 다음 진료 약속을 잡기 위해 하는 말이 이채롭다. 약속 시간을 잡을 때 형식적인 숫자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좀 더 쉽고 잘 기억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화를 준 것이다.
한양여자대학교 치위생과 황윤숙 교수는 “의료기관과 환자 사이에서 정보 전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소통입니다. 각 세대나 연령층은 그들에게 맞는 고유한 언어방식이 존재하는데, 이 부분을 맞춰 가족과 같은 공감을 얻어내야 효과적인 건강관리가 가능합니다”라고 설명한다.
요즘은 치과도 환자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기실에 소파 대신 온돌의자를 비치한다거나, 테이블에 돋보기를 준비하는 등의 작은 배려는 이제 기본이 됐다.
이런 변화는 동네 치과의원들만의 것이 아니다. 대형 대학병원들도 마찬가지인데,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의 경우 시니어 진료실을 따로 운영하면서 연령에 따른 특화된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고,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은 노인구강진료실을 만들어 운영할 계획을 추진 중에 있다.
이런 변화는 학술 분야도 마찬가지여서 노인의 구강건강이나 효과적인 치료법을 연구하기 위한 치과의사들의 모임도 활발하다. 2004년 설립된 대한노년치의학회가 그 대표적인 단체로, 치과에서 노인 환자들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활동도 활발해지고 있다.
학회 김경선 부회장은 “예전에는 나이 든 치과의사 모임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분위기가 확 달라졌습니다. 젊은 치과의사들도 중장년층 환자들을 좀 더 잘 치료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학구열이 높아지고 있고, 학회 내부적으로도 치료법뿐만 아니라 시니어 구강관리 전문가 과정 도입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의료용 기기나 구강용품 등도 중장년의 치료와 관리를 위해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의치를 위한 임플란트도 바이오 신기술을 이용한 노인맞춤형 임플란트 출시를 눈앞에 두고 있고, 입냄새의 심한 정도를 숫자로 보여주는 측정 장비도 이미 시중에 선보여, 일부 치과에선 사용 중에 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자일리톨 껌 역시 의치에 잘 붙지 않고 단단해 씹는 운동도 겸할 수 있는 제품까지 등장했다.
또 최근에는 미래 의료시장을 좌우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3D 프린팅’ 기술을 이용한 치과치료 기술이 적극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최근 세미나를 위해 방한한 독일 Envisiontec社의 도미닉 크루거 연구원은 “새로 개발되는 기술이 병원에 적용되면 치료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돼, 오랜 치료시간을 힘들어 하는 중장년층에겐 희소식이 될 것입니다. 또한 정밀도도 향상돼 의치의 수명도 향상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평소에 모르던 건강의 소중함은 잃고 나서야 재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치아 건강의 중요성은 누구나 알지만, 많은 경우 소홀히 여겨 뒤늦게 병원을 찾아 후회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고령화에 발맞춰 치아의 질병도 진화한다. 과거의 충치 질환은 시간이 흐르면서 잇몸 질환을 거쳐 치아의 노화 현상으로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과 달리 충치 하나 없어 치과 한 번 안 가봤다며 자부하는 황소웅(黃昭雄·73) 카이스트 명예교수의 입 속을 윤홍철 강남 베스트덴 치과 원장이 시원하게 들여다봤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장소제공 강남베스트덴 치과(bestden.co.kr)
나이를 뛰어넘은 듯한 황소웅 카이스트 명예교수의 건강미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단연 치아다.
“333법칙을 지키는 편입니다. 음식 섭취 후 3분 이내, 하루 세 차례씩, 3분 동안 회전해 닦지요. 그리고 아무래도 70 평생 이렇게 충치 없이 살 수 있는 비결은 매일 아침 아내가 준비해 주는 야채 식사와 우유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살짝 익힌 당근, 사과, 브로콜리, 양배추 가득 한 접시 말이죠.”
황 교수는 건강한 치아를 유지하는 비법을 아내 덕분이라고 요약했다.
“지인들이 제 이를 보고 칭찬과 함께 부럽다며 비결을 물어봅니다. 하지만 일부러 애쓰지는 않았어요.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엄격하게 식단 조절을 하면 스트레스가 생기잖아요. 건강을 지키는 게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즐겁게 잘 살기 위해서 건강을 지키는 거니까요. 하고 싶은 게 생기면 그걸 해야 하고 말입니다.”
올바른 칫솔질과 주기적인 스케일링이 치아 건강의 핵심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황 교수의 치아를 전문가가 들여다보면 어떨까? 윤홍철 강남 베스트덴 치과 원장이 그 역할을 맡았다. 귀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하는 윤 원장의 진단을 받으면서, 황 교수는 충치는 없으나 최근 시린 적이 두어 번 있었다고 말했다.
“시린 이 증상은 잘못된 칫솔질 습관이나 노화 현상에 의해 잇몸이 내려가 치아 뿌리가 노출되거나 치아의 씹는 면이 심하게 마모될 때 생기게 됩니다. 또 잇몸병이 심하거나 치아에 금이 가거나 깨졌을 때도 같은 증상을 보입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칫솔질은 물론이고 주기적으로 스케일링을 해야 합니다.”
윤 원장은 정부에서는 70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연 1회 스케일링에 대해 보험 지원을 하고 있으니 노인들은 스케일링을 해두는 게 좋다고 말한다.
“비전문가 입장에서 교수님의 치아는 아름답습니다. 그렇지만 치과 전문의가 볼 때는 아무래도 다양한 질병들이 보이죠. 황 교수님은 잠잘 때 이를 악물고 자는 편인 것 같습니다. 이를 보면 그 사람의 인생과 질곡이 보이듯이 황 교수님은 평소에도 참고 인내하는 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가슴 언저리에 아픔이 많아 보입니다.”
황 교수의 주치의를 자처한 윤 원장은 환자의 입 속을 통해 인생을 들여다보듯이 말했다.
정직한 삶, 정직한 건강관리법
‘꼿꼿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의 기개, 의지, 태도나 마음가짐 따위가 굳세다’는 뜻이다. 황 교수를 만나는 순간 ‘참 꼿꼿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작은 키와 다부진 몸매, 인터뷰 내내 보여준 모습이 그랬다. 그래서일까. 흐트러짐 하나 없이 바르게 앉아 사람을 마주하는 모습에서 올곧게 지내온 세월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의 건강관리법 역시 곧고 정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황 교수의 삶 자체가 한결같고 곧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 한국일보에서의 정치부 기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약 50년 동안 국가를 생각하고 살면서 그 안에서 보람과 행복을 느꼈기 때문이다. 원래 외교관이 꿈이었던 그는 가난했던 유년시절을 보내며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꿈꿨고 이를 만들기 위해 하는 일에서 진심을 담아왔다.
식습관이 치아 건강의 열쇠
“과거에 교수로 재직할 때는 바쁘다고 운동을 소홀히 하다 보니 당뇨가 생기고 혈압수치가 높아졌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운동시간을 늘리고 하루도 거르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덕분에 당과 혈압수치가 많이 내려왔어요. 약은 먹고 있어요.”
‘열심히 일하다 보면 일하는 재미 속에서 권태를 느낄 수 없다’는 신념으로 하루하루를 바쁘게 지내고 있는 황 교수는 요즘도 대덕에 있는 카이스트, 춘천에 있는 강원대학교로 강의를 다니느라 분주하다. 신체 나이만 보면 60대로 보이는 황 교수는 남다른 도전 정신으로 가득했다.
“저는 무엇이든 도전해보는 성격입니다. 30년간의 기자 생활, 공직자, 교수로 곳곳을 다니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음식을 적극적으로 먹어봤던 편이죠. 어느 나라 음식이든 그 나라의 특수성이 담겨 있잖아요. 때론 거칠기도 하고 삼키기 힘든 경우도 있지만 가리지 않았어요.”
호기심으로 인해 새로운 음식을 만나면 되레 달려드는 쪽이었던 황 교수에게 다행인 것은 차근차근 꼭꼭 씹어 먹는 습관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 덕분인지 별다른 질환이 없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산책을 즐기는 그는 3명의 손녀와 아들, 며느리, 아내와 함께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행복이죠. 특히 세대 간 단절이 심하다지만 우리 손녀들은 집에서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해요. 나중에 큰 자산이 될 겁니다.”
건강은 자연스러움으로부터 온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 늙어가는 그대로의 모습이 좋아 억지로 가꾸거나 꾸미려 하지 않는다는 그는 자신의 건강 비결이 바로 자연스러움에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의 모습이 가장 저다운 모습, 진실한 모습 아니겠어요? 특별한 운동법도 건강식도 없지만 항상 바쁘게 살면서 늙어가는 제 모습을 사랑하는 것, 나이에 연연하며 도전을 꺼리기보단 담담하게 사는 것이 제 건강 비결입니다.”
육체적인 건강 말고도 황 교수가 늘 강조하는 또 다른 건강이 있다. 바로 정신적인 건강과 사회적인 건강이다. 정신적인 건강은 스트레스를 덜 받고 긍정적으로 생활하는 것이며 사회적인 건강은 단절되지 않고 사회활동을 하는 것이다. 육체적·정신적·사회적 건강의 3박자가 잘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진정으로 건강한 삶이라는 것이 황 교수의 철학이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자’는 진리는 말로는 알지만 행동으로 옮기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래서 이 평범한 교훈을 사람들은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것이리라. 황 교수 또한 그러했다. 그리고 그러한 황 교수의 일상적인 노력은 지금, 노년의 건강한 치아와 함께 제2 청춘이 새롭게 피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1. 특수검사실에서 1분간의 구취 측정 후 바로 결과지 확인 가능.
2.치아 우식 활성화 검사를 통해 미생물 유무와 충치발생 가능성을 예측한다.
3. 치아의 뿌리, 잇몸 뼈의 상태, 신경치료 여부와 치아 주위의 구조물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엑스레이 촬영.
4. 가정용 큐레이인 큐스캔으로 세균막의 형광을 찾아내 구강관리 정도를 알 수
있고 잔존하는 세균막을 찾아내 칫솔질로 제거할 수 있다. 올인원바이오가 개발한 큐스캔은 집에서 사용하는 체온계처럼 사용하는 장비로,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초기 충치 의심 부위, 치태, 치석 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5.검사 결과를 보고 전문가 영역에서 윤홍철 원장이 질병을 체크한다.
황소웅 교수 진단 소견
- 침 분비 안 돼 세균번식 쉬워져 노인성 충치 악화
- 오른쪽 어금니 치아 겉 부분이 닳거나 깨지기 쉬운 실금 발견
- 잇몸 건강은 임플란트 수명과 직결되어 정기점검 필요
- 치석 덩어리가 많아 스케일링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