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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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되기 싫다가 연결되고 싶다가
알아주기 싫다가 알아주고 싶다가
전화하기 싫다가 전화하고 싶다가
이해하기 싫다가 이해하고 싶다가
안아주기 싫다가 안아주고 싶다가
글 올리기 싫다가 글 올리고 싶다가
몇 해 전 제가 SNS에 올렸던 글로, 마음 미장공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까? 확실합니까?
암요, 당연하죠.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관심받기 위해 사는 사람입니까?
예, 맞습니다.
외로움과 관종 사이 : 시선의 감옥
“세상에는 큰 관종과 작은 관종, 그리고 자신은 아니라고 우기는 관종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관종 중의 관종입니다.”
스스로를 ‘관종’이라 고백한 제게 어떤 분은 자신을 ‘관종인 듯, 관종 아닌, 관종 같은 관종’이라고 유행가 가사에 빗대어 말하기도 합니다. ‘관심종자’(關心種字)라는 말을 줄여서 흔히 ‘관종’이라고 말합니다. 남들에게 주목받고 싶어 하는 정도가 지나쳐서 병적인 상태에 이른 사람을 부르는 이 말이 처음에는 비하나 조롱을 의도했다면, 요즘에는 누구나 내면에 갖고 있는 당연하고 정상적인 욕구나 욕망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서로 관종이라고 놀리거나 흔쾌히 관종임을 인정하며 웃음바다를 만드는 장면을 많이 보셨을 겁니다.
머리를 자르거나, 평소에 안 입던 치마를 입거나, 염색을 하거나, 또는 인터넷에 글을 새로 올리거나, 프로필 사진을 바꾸거나 할 때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어떤 마음일까요? 유튜브나 페이스북 같은 인터넷 공간에서 나보다 늦게 시작한 사람들이 친구 수도 훨씬 많고, 좋아요 같은 공감 숫자가 몇 배, 몇 십 배 많을 때 우리는 절망합니다. 부러움을 넘어 질투심이 샘솟고, 자신을 탓하고 자학하면서 지독한 외로움에 빠집니다.
외로워서, 연결되고 싶어서, 관계를 맺으려고 시작한 그런 행위가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고 위축시킵니다. 관심을 받고, 공감을 얻고, 위로와 인정을 받으려고 시도한 일에서 정작 우리 자신을 소외시키고, 살아 있는 유령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아닐까요. 타인이라는 ‘시선(視線)의 감옥’에서 우리는 언제쯤 탈출할 수 있을까요? 누구를 위해서 뭔가를 바꾸고, 새로 꾸미고, 주저리주저리 자기 담벼락이든, 남의 공간이든, 심지어 뉴스 기사 댓글로라도 답을 달면서 도대체 왜 이러고 살까요?
외로움은 디폴트다!
바로 외로움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두 미치도록 외로운 탓입니다.
사랑과 관심에 목마른 우리는 외로움을 디폴트(Default)로 살아갑니다. ‘채무 불이행’을 뜻하는 경제용어가 아니라, 여기서는 컴퓨터 사용할 때 시스템이 자동으로 적용하는 미리 정해진 값이나 조건을 말합니다. 인간인 이상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외로울 수밖에 없기에 외로움은 디폴트요, 미리 정해진 운명 같은 상수(常數)라 하겠습니다.
몇 해 전 국민적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유명 연기자가 세상을 등졌는데, 그가 생전에 남긴 인터뷰에서 연예인으로 살아온 지난 20여 년 동안 단 하루도 외롭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외로움의 끝은 세상과 영원히 이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기와 명예, 사랑을 받았던 사람도 이 넓은 세상에 내 편이 한 사람도 없다고 느낄 때 외로움에 질식되고 맙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모임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다고 느낄 때 실제로 우리 뇌에서 통증을 느끼는 부분이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내 영혼과 육신을 갉아먹는 외로움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외로움을 대하는 법
수선화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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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라고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 정호승 ‘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98) 중에서
시인 정호승이 노래한 수선화의 외로움은 뭘까 생각해봅니다. 그 수선화가 우리 인간일 테니까요.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자기 모습에 반해 사랑에 빠져버린 나르시스가 결국 물속에 몸을 던지고 그 뒤 피어난 꽃이 수선화입니다. 외로움을 잘 견디는 방법은 외로움을 뛰어넘어 극복하는 것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외로움에 골몰하다가 접한 이 시에서 저는 퍼뜩 이런 생각이 스칩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현대 인류는 나르시스로 상징되는 자기애(自己愛, Narcissism)가 결핍되었기에 외로움으로 고통받는 것은 아닐까요. 정신분석학 용어인 자기애는 크게 병적인 인격 장애와 건강한 나르시시즘으로 구분됩니다. 외로움 처방전으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히 건강한 자기애를 말합니다. 이것은 ‘고독’이란 말과 긴밀한 관계를 갖습니다.
외로움과 고독은 다른가요?
우리는 어렸을 때 특히 사춘기에 인생에 대해 심오한 뭔가를 깨달은 양, 멋을 부리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너 뭐하고 있어?” 이렇게 동무가 물을라치면 한껏 어깨에 힘을 주고 “짜식, 나 고독을 씹고 있지” 이렇게 대답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독일 철학자이자 신학자 폴 틸리히는 혼자 있음을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혼자 있는 고통이 외로움(Loneliness)이라면, 스스로 택한 혼자됨의 즐거움이 고독(Solitude)이라고 합니다. 외로움은 상실에서 비롯되기에 필연적으로 빈 가슴이 됩니다. 친구나 연인, 팬, 지지자 등 잃어버린 무언가가 채워지지 않고 비어 있는 상태입니다. 특히 내가 타인을 필요로 하는데도 거절당하거나 무시당한 소외가 외로움이라면, 고독은 타인과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홀로 두는 주체적이고 긍정적인 감정입니다. 내가 원해서 확보한 시간을 내 의지로 채우는 즐거움이 고독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상태인지, 즉 ‘자발적’인지 아닌지가 외로움과 고독을 결정적으로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결국 (외로움을) 피할 수 없으면 (고독으로) 즐겨야겠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내가 행복하기 위해 말입니다.
법정 스님이 ‘홀로 사는 즐거움’에서 역설한 것도 외로움보다는 고독에 주목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태어날 때, 세상을 뜰 때 본질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는 존재가 사람이지만, 그러면서도 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게 바로 우리지만 홀로 있을 때 진리에 더 가까워질 수 있으며, 자기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고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름다운 시, 그림, 음악 같은 예술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처절한 외로움을 고독으로 바꾼 데서 비롯되지 않을까요. 괴테가 말한 것처럼요. “영감을 받는 것은 오로지 고독 속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외로움과 고독을 사전적으로 정의하자면 사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철학적·심리학적·실존적으로 구분될 뿐입니다. 앞의 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안고 살아야 하는 외로움,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외로움을 고독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기만의 방법이 떠오를 거라 믿습니다.
자발적 고독은 나에 대한 사랑
바야흐로 혼술, 혼밥, 혼영(혼자 영화 보기) 등 뭐든 혼자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되면서 우리 인류는 더욱더 혼자 먹고, 혼자 마시고, 혼자 놀고, 혼자 여행하는 ‘호모 얼로니우스’(Homo Aloneus, 외로운 인간)가 되어갑니다. 이제 외로움을 넘어 스스로 존재가 환하게 빛나는 ‘홀로움’, 참다운 고독을 맞이할 때입니다. 타인에게 휘둘리는 ‘시선의 감옥’에 갇혀 있는 외로운 나를 구원해야 합니다. 허공에 부딪혀 흩어지는 자조 섞인 독백 대신 ‘내면의 나’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어보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방치하고 무심했던 ‘진짜 나’에게 말을 걸어보십시오. 많이 기다렸다고, 어서 오라고, 그때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앞으로도 너를 지켜보며 사랑할 거라고 얘기해줄 것입니다. 내 삶의 노예로 끌려가는 게 아니라 주인으로 당당히 우뚝 서기 위해서 말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연습, 같이 하실까요?
외로움에 발 벗고 나선 영국과 일본
2018년 영국 정부는 한발 앞서 외로움에 대처하기 위해 고독부(Ministry for Loneliness, 엄밀히는 외로움부)를 만들고, 다양한 캠페인과 가이드라인을 두어 민관이 협력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 일본은 2021년 고독·고립 담당 장관을 임명하고 국가적 과제로 삼아 대응한다고 합니다. 외로움과 소외, 고립은 우울이나 무기력 같은 감정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을 해치는 극단적 상황으로 나아가기 쉽습니다. 특히 전 세계가 코로나 상황에서 자살률이 상승하고, 이로 인한 손실과 상처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현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루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과 같은 막대한 신체적 손상을 가져올 뿐 아니라 정서적 유대와 인간관계가 훼손되고, 외로움과 고립감이 만성화되면 결근이나 생산성 저하 등 경제 전반에도 막중한 피해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고독, 외로움은 연령과 성별을 뛰어넘는 인간 고유의 심리 상태라지만 경제적·신체적 환경이 곤란할수록, 특히 갑작스런 퇴직이나 은퇴를 맞은 중장년 세대일수록, 사별이나 이혼 등 가족 관계가 단절되거나 상실될수록 그 영향은 심각할 수 있습니다. 소외와 단절과 고립으로 인한 소통 부재는 외로움을 증폭시키는 촉매가 되기 쉽습니다. 코로나 대유행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수불가결한 상황이 되면서 외로움에 대처하는 일은 단지 개인이 해결해야 할 수준에서 사회와 국가가 긴급하게 대응해야 할 과제로 부상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긴긴 집콕의 멀미를 끝내버리고 싶다. 그렇다고 훌쩍 나서기에는 제약이 여전하다. 이제는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멀리 떠나 이 모든 현실이 몽땅 잊힌 옛 일이었으면 좋겠다. 가끔씩 비행기가 날아가는 하늘을 보며 슬슬 봄 타고 싶어진다. 춥고 답답하기만 했던 겨울도, 코로나의 답답한 상황도 잠깐 잊고 오늘은 유럽의 도시 속으로 들어가 보는 랜선 여행이다.
가끔씩 헷갈린다. 여기가 어디였더라? 고개 들어 올려다보거나 눈이 돌아가게 번쩍거리는 첨단의 빌딩, 도시의 골목들이 생경하지 않다. 자본주의 냄새가 곳곳에서 풍긴다. 하지만 오가는 사람들도 거리감이 느껴질 만큼 낯설지 않다. 지하철역도 적당히 수수하고 낡거나 더러는 지저분하다. 날씨조차 서울의 그것을 옮겨놓은 듯 익숙하다. 오히려 이전에 가 보았던 독일의 다른 도시에서는 내 나름의 유럽적인 느낌이 있었다. 거리에서나 사람들이나 날씨 느낌도 이게 유럽이구나 했었다. 혹시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선입견이 있었던 건가. 번화한 도시 베를린이 이렇게 친근할 수가 있어서 편안하다.
드레스덴에서 프릭스 버스로 두 시간 달려서 베를린 동물원 앞에서 내렸을 때도 잠깐 근교 도시로 이동해 온 듯했다. 숙소로 가는 길 주변이 번화했는데도 그저 동네 사람들이 오가듯 유난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기대와 다를 때는 분명 또 다른 것이 나타나 채운다. 이번엔 어떤 것에 내 마음에 꽂힐지 모를 일. 언제 어디서든 실망하거나 기대감이 줄어드는 여행일까 봐 걱정할 일은 없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다가온 현재에 집중하면 일상의 걱정이나 후회에서 해방된다는 말을 믿는다.
한낮, 베를린의 반듯한 빌딩 꼭대기에선 벤츠 자동차 로고가 반짝이며 돌아가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는 무턱대고 나섰다가도 아, 여기 들어가 볼까 해볼 수 있다. 조금 과장해서 건물 안에 들어서면 미술관이고 박물관이다. 혹은 무슨 기념관이거나 추모관이다. 마음먹지 않아도 도시 곳곳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전쟁의 피해자와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건축물이나 설치물들이 흔하다 못해 길바닥에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은 그 모든 이들을 추모하고 기억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인 듯하다.
브란덴부르크 남단 숲 쪽 방향의 추모공원, 홀로코스트 메모리얼(Holocaust Memorial).
도심 한가운데 제각각의 크기와 높낮이가 다른 네모난 사각기둥이 가득 차 있는 동네가 있다. 유대인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추모하는 각기 다른 높이의 2711개의 콘크리트 비석이다.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이 2차 세계대전 종전 69주년인 2005년에 만들어졌다. 줄지어 선 돌비석의 그림자들이 그분들의 영혼인양 비석 사이마다 추모객들을 마중 나온 듯 짙게 패턴을 이룬다.
시간여행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다. 무릎 아래로 나지막한 높이부터 사람을 푹 파묻히게 하는 비석의 숲으로 들어갈수록 덜컥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당시 포로수용소 가스실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유대인들의 막막하고 절망스러운 심정을 애도하기 위한 깊이라고 한다. 잔혹하고 광기 어린 시대의 역사 속에서 살다가 사라져 간 희생자들의 존엄에 함부로 만지기도 기댈 수도 없는 마음이다. 고립된 듯 미로와도 같은 구조물 사이에 파묻혀 보니 그저 절로 묵념이 나온다.
아픔이나 치부를 이렇게 번화한 베를린 시내 중심의 밝은 햇볕 아래 대놓고 드러내 놓은 모습이다. 그 나무 아래서, 널찍한 비석 위에서 자유롭게 앉아 그들을 떠올리고 추모하는 모습이 우리와 사뭇 다르다. 입구의 낮은 비석들은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이곳에 앉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설계자의 의도였다고 한다.
끔찍한 상처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서울 어느 동네에 세워진다면 우리 주민들은 어떤 반응은 보일까. 아랑곳하지 않고 소중한 생명을 추모하는 것이 이곳 사람들에겐 하등‘문제없음’이다. 오히려 과거사 사죄의 마음이 담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기념물을 세워야 한다는 시민운동이 있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헬무트 콜 총리가 통독 후 이곳 베를린 도심의 땅을 확보했고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하는 홀로코스트(Holocaust).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이탈리아 화학자 프리모 레비, 그는 10개월간의 생지옥에서 생환했다. 수용소에서 살아 나와 틈틈이 글을 쓰고 증언 문학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말했다. "이것은 일어난 일이고 또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증언해야 할 핵심이다." 그렇게 과거의 참혹했던 트라우마를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그가 42년이 지난 67세에 돌연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모든 이들을 위한 독일의 추모 시설이나 추모비는 다양하다. 독일 시민들의 추모 마음도 남다르다. 내가 갔던 쿠담 거리의 카이저 빌헬름 교회 계단에는 지금도 추모의 생화가 드문드문 놓여있었다. 1895년 독일의 첫 번째 황제 빌헬름 1세를 기리기 위해 건축된 교회였지만 1943년 공습으로 처참하게 파괴되어 철거의 의견이 분분했었다. 하지만 전쟁의 참상을 알린다는 차원으로 있는 그대로 보존하기로 한 것이다.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일본의 적반하장의 행태와는 확연히 다르다. 자유분방한 일상의 그들에게 과거사를 중요하게 여기고 기억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꽤 인상적이다. 누군가 "베를린은 기억의 도시"라고 말한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거듭되는 사과와 남아있는 문제 해결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을 뉴스에서 종종 보아왔다. 그리고 기억하는 것, 우리에겐 이것조차 결코 쉬운 일이 아닌 현실이다. 무조건 발뺌만 하는 바로 옆 이웃나라의 의식 수준과 확연히 비교되는 모습을 이곳에 와서 본다.
이런 것을 둘러보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엄습하는 긴장감이 있다. 무수한 비석의 홀로코스트 어딘가에 역사 속의 혼령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보기엔 그들이 살아가는 주변의 이런 흔적들을 보며 굳이 숙연하거나 경건한 모습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것, 다만 그것이 희망인 듯하다. 나치 학살자의 사진에 적혀있던 '구원의 비밀은 기억에 있다'는 말처럼.
그 도시를 무심히 걷다 보면 그들의 자유분방한 라이프스타일이 확 느껴진다. 그 모습 속에 역사를 대하는 그들만의 일상이 있었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광장의 혼령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게 대수롭지 않은 사람들이 나처럼 무심히 걸어간다.
훌쩍 나서보니 평소에 잊고 살던 것들을 이렇게 들춰내 준다. 한 번 더 꼼꼼히 들여다보고 공부할 기회가 생긴다. 또 다른 관심을 증폭시키고 호기심을 확장시키는 것, 생각지도 않고 살던 것들이 넌지시 다가와 편식이 심한 내 사고력의 균형을 추슬러 준다. 가끔씩 떠난 천차만별의 여행 중에 이렇듯 한 번씩 생각의 기회가 생긴다. 다행이다. 혹시 식상할지도 모를 이야기를 떠들었지만.
요즘 서로의 존엄성을 해치거나 인간의 품격을 훼손하는 크고 작은 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런 세태 속에서 더욱이 ‘어른다움’이 무엇인지 돌이켜보게 됩니다. 아버지가 부재(不在)한 세상, 존경할 어른이 실종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정말 안녕하십니까?
‘꼰대’와 ‘깐부’
오래전 특정 세대에서만 통했던 은어이자 속어 두 가지가 우리 삶에 어느 날 불쑥 끼어들었습니다. 그 첫 주자가 ‘꼰대’라면 최근 들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는 유행어가 바로 ‘깐부’입니다. ‘꼰대’라는 말은 아버지나 학교 선생님처럼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켜 어린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였습니다. 요즘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강요하거나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해서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설교를 늘어놓는 일명 ‘꼰대질’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속어로 쓰입니다. 꼰대가 주는 어감과 부정적 의미 탓에 너나 할 것 없이 기성세대라면 꼰대로 불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도 내가 과연 꼰대일까, 밖에 나가면 나를 꼰대로 보지는 않을까 자문하고 젊은이들 눈치를 보기까지 하니까요. 이를 반영하듯 2020년 MBC에서 ‘꼰대인턴’이라는 드라마를 선보였습니다. “나 때는 그러지 않았어”,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타령 덕에 드라마 주제가(OST) ‘꼰대라떼’가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제발 그만 그만 그만해
오늘도 시작되는 꼰대라떼
(중략)
뻔뻔하게 뻔하게 반복되는
하루가 지나간다
왕년에 내가 말하신다면
오늘도 시작이구나
니까짓 게 뭘 알아 궁금하시면
라떼를 한잔 드세요
라떼라떼라떼라떼 라떼는 말이야
라떼라떼라떼라떼 라떼는 말이야
아침부터 시작되는 꼰대라떼
적나라한 노랫말처럼 온갖 진부하고 부정적인 수식어가 어울리는 늙은 사람, 나이만 많이 먹은 선생질만 일삼는 사람이 ‘꼰대’라면, 그 반대편에 ‘깐부’가 있습니다. 꼰대 소리 듣기 싫다면 진정한 내 편, 내 맘을 알아주는 ‘찐친’, 깐부가 되고 싶다면 함께하실까요.
어른이 없고 아버지가 부재하다고 세상 탓을 하기 전에 찬찬히 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전 세계 언론에서 극찬과 호평 일색인 ‘오징어 게임’이란 드라마 시리즈에 등장한 ‘오일남’(오영수 분)이란 배역이었습니다. 9개 에피소드 가운데 가장 좋은 평가와 감동을 안긴 편이 바로 ‘깐부’라고 합니다. 극 중 ‘오일남’이 ‘깐부’가 뭔지 알려줍니다. 지는 즉시 게임에서 탈락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목숨을 내줄 구슬치기에서 짝꿍이 된 두 사람-오일남과 성기훈(이정재 분).
“우리 깐부부터 맺어야지. 구슬이랑 딱지랑 같이 쓰는 친구.”
어린 시절 놀이 자산의 전부였던 형형색색 구슬과 크기도 두께도 모양도 달랐던 딱지를 함께 쓰고 관리하던 제일 친한 친구를 일컫는 남자아이들의 은어가 ‘깐부’입니다.
“기억 안 나? 우리 손가락 걸고 깐부 맺은 거. 깐부끼리는 네 거, 내 거가 없는 거야.”
그가 맡은 역할보다는 대사가 주는 울림이 국경을 넘어 세계적 신드롬이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 승리와 패배라는 갈림길에서 결정적 순간 ‘내 편’이 되어주는 어릴 적 놀이 속 ‘깐부’라는 말이 이렇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게임의 설계자이자 호스트인 ‘오일남’이라는 극 중 인물보다 오히려 저는 그를 연기한 ‘오영수’라는 배우에 더 눈길이 갔습니다.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들려주고 보여준 그의 이야기가 우리가 바라 마지않던 어른의 모습이 아닐까요. 어릴 때부터 하던 평행봉으로 체력을 유지하며 200편 넘는 연극 무대에 오른 배우 오영수. 60년 가까이 평행봉이야말로 일생의 동반자가 되었다는 그는 이사할 동네에 평행봉이 있는지가 우선순위라고 말합니다.
“가장 인간적인 사람에게도 사악함이 있고, 단지 그 차이가 얼마냐일 뿐이지. 드라마 속 인물과 저는 비슷합니다.”
수백 편 극 속에서 수백 가지 인물을 연기해온 그에게 인간처럼 복잡다양하고 다중다층적인 역할이 있을까 싶습니다. 선함과 악함, 추함과 아름다움을 버무린 인간 군상을 무대에 올리다 보니 인간을 이해하는 폭과 깊이가 남다른 데서 나온 말로 여겨집니다.
언제 가장 행복하냐는 질문에 “가족끼리 같이 앉아 식사하면서 아이는 아이대로 자기 이야기하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자기 이야기해가면서 그렇게 사는 가정이 가장 행복한 게 아닐까 해요, 얼마 안 되는 식구지만 같이”라고 답하는 그에게서 한 끼 밥을 같이 나누는 일상의 소중함을 엿보게 됩니다. 때문에 그가 가진 염려라면 그저 가족과 문제 없이 잘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말에서도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오로지 1등만 기억하는 우리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는 이들에게, 2등은 패자가 아니라 3등한테 이긴 승자가 아니냐고 되물으며 우리는 모두가 승자라고 얘기하는 오영수. 진정한 승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애쓰면서 내공을 가지고 어떤 경지에 이르려 하는 사람이라고 자신과 세상에 위로를 건넵니다.
아무것도 되지 못한 이에게
제 인생 드라마 순위를 바꾼 JTBC의 ‘인간실격’. 여기서 주인공 아버지 이창숙(박인환 분)이란 인물이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는 또 하나의 어른입니다. 알츠하이머 초기로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하나뿐인 딸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 폐지를 주우며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살아내는 아버지. 세상에 대한 미움도 원망도 남기지 않고 딱 선물 같은 때론 기적 같은 사람. 아버지 없는 세상에선 단 하루도 살아보지 못한, 그렇지만 어리지 않은 마흔이 다 된 딸 부정(전도연 분)은 죽기로 결심하고 버스정류장에 앉아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호소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저는 아버지보다 더 가난하게 살 것 같아요. 길에서 고생하며 키워준 아버지 생각하며 열심히 노력하려 했는데,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버지, 나는 아무것도 못 됐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것도 못 됐어요. 결국 아무것도 못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너무 외로워요, 아버지!”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람들에게 좌절과 상처, 배신을 겪으며 울부짖던 주인공 부정은 자살 카페에서도, 아버지가 살던 오피스텔 옥상에서도 결국 죽지 못합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마음을 읽어주는, 조심스레 다가오는 한 사람에게 닫히고 다친 마음을 꺼내 보이고 온기를 채우면서 아버지한테 다시 편지를 씁니다. 아버지를 안고, 아버지 마음을 품으면서 비로소 살기로 결심합니다. 살아내기로 마음먹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 나는 이제야 아버지가 제게 세상에 태어나 무엇이 되는지보다 무엇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이미 눈으로 몸으로 삶으로 얘기해왔었다는 걸 아주 조금씩 천천히 깨달아가고 있어요.”
아버지 마음속에 법도, 문학도, 철학도 다 들어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습니다. 누가 가르쳐준 적도, 배운 적도 없는 아버지한테 차곡차곡 쌓여 있던 삶의 지혜와 내공은 시집이 됩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시집입니다. 수많은 생각 가운데 아끼며 꺼내는 아버지 말이, 고르고 고른 몇 개 말이 시가 되어 나온다는 걸 깨달은 딸은 편안히 작별인사를 나누고 아버지를 보내드립니다.
왜 마음 미장공인가?
어른의 자격을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이자 아니 사실 처음부터 떠오른 인물은 다름 아닌 제 아버지입니다.
박성옥 선생이 제 아버지입니다. 젊었을 땐 경북 왜관 등지를 누비며 숱한 병자를 치료해주셨지요. 면허가 없는 탓에 어머니 김초자 여사를 만나 저를 낳은 뒤론 의업을 접고 미장일을 배우셨습니다. 어머니는 의사 가운에 반해서 결혼하셨는데 새하얀 가운 대신 흙떡이 되곤 하는 작업복만 연신 빨아대셨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어린 저는 아버지 일하시는 데 따라다니거나 종종 새참을 갖다드렸습니다. 거친 사면 벽을 아버지 흙손으로 매끄럽게 만드는 마술을 보며 감탄을 연발했습니다.
“울 아버지 정말 멋지다!”
봄에서 가을까지 공사가 한창이던 때라 분주하시던 아버지는 겨울이면 온돌방 틈새로 이산화탄소 샐까 봐 연탄보일러 수리하며 또 생계를 꾸려가셨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과학자요 만능 ‘맥가이버’셨지요.
그런 아버지 마음 따라가려 저도 배운 재주 모아서 마음치유, 분노조절, 감정관리 강의하면서 낯선 분들 마음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미장일을 부끄러워하셨지만 저는 그때도 지금도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보고 있어도 그립고 애달픈 못난 딸내미입니다.
아버지한테 배운 붓글씨로 글씨깨나 쓰는 재주를 가진 저는 용돈봉투 드릴 때 짧은 손 편지를 쓰곤 했는데 아버지 역시 제 아이들, 당신 손주에게 용돈봉투마다 손 편지를 써주십니다.
“위대한 사람보다 참된 사람이 되어라. 잘 커줘서 기쁘다. 할아버지가.” “우리 ○○이도 안아보니 품 밖에 나는 구나. 부모 말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이제는 그 두 아들이 성인이 되어 취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나는 젊을 때 체면 따지다가 좋은 기회도 놓치고 잘 살지 못했던 것 같다. 너희 애들은 그런 것 따지지 말고 밥 벌어먹고 일했으면 좋겠다.”
취업 앞둔 아니 취업이 절벽인 손주들한테는 차마 말 못 하시고 저희 부부한테 넋두리처럼 해주신 울 아버지 말씀이 귓전에 자꾸 울립니다. 아, 울 아버지!
최근에는 ‘젊은 꼰대’, ‘역꼰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꼰대는 이제 더 이상 나이를 기준으로 불리는 호칭이 아니라 삶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 마음가짐에서 대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른다운 어른, 닮고 싶은 사람, 함께 얘기하고 싶은 사람, 나아가서는 늘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 그런 어른이 우리 서로에게 되어주면 어떨까요. 그런 사람 없다고 투덜대고 원망만 할 게 아니라 내가 먼저 인사하고, 웃어주고, 귀 기울여주는 새 맘, 새 삶, 새해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살면서 크든 작든 혜택을 무척 많이 받아왔습니다. 하늘, 햇볕, 바람, 비 같은 천지가 베푼 은혜뿐 아니라 부모님과 선생님, 세상 사람들한테 신세를 지고 사는 게 우리 인생인데, 이제는 돌려주고 좋은 것은 남겨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배우 오영수가 방송에서 했던 얘기처럼 말입니다.
“산속에 꽃이 피어 있으면, 젊었을 적엔 그 꽃을 꺾어왔다면 이 나이쯤 되면 그냥 그대로 놓고 오죠. 그리고 다시 가서 보죠. 뭐 그게 인생이죠. 그냥 있는 그 자체로 놔두는 것. 그게 쉽지가 않죠.”
이주호는 느리고 부드럽다. 맑고 고요하다. 푸근하고 꾸밈없다. 그의 진솔함과 진득함에는 포크계 거장의 이미지보다 웅숭깊은 우물에서 노래를 길어 올리는 구도자의 모습이 어려 있다. 이성보다 직관으로, 분석보다 느낌으로, 머리보다 가슴으로 우리의 영원한 테마이자 구원인 사랑과 행복을 노래한다. 인생 전체를 사랑바라기, 행복바라기로 영위해온 해바라기 이주호, 그의 참 좋은 시절은 그때고, 지금이고, 앞으로다.
영혼으로
그에게 언어는 마지못해 빌려온 연장 같다. 한 가지를 가지고 이것저것 때우듯 쓰는 것 같은데도 충만한 감성 덕에 자연스럽고 멋스럽다. 가령 그가 말하는 ‘동반자’는 아내를 의미하기도 하고 기타를 뜻하기도 한다.
“내 인생의 소중한 동반자인 기타라는 친구는 처음 만남에서부터 그렇게 소리가 좋을 수 없는 거라.” 이런 식이다. 그런가 하면 코로나를 ‘그 친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친구가 지난 몇 년간 우리와 함께하면서 모두를 힘들게 했지. 이제는 그 친구도 떠날 때가 된 것 같은데….” 이렇게 말이다.
언어는 이분법의 도구다. 너와 내가 다르고, 다름이 틀림이 되고, 그로 인해 상처 주고 상처받는 데는 언어만 한 비수가 없다. 말로, 글로 받은 생채기를 싸안고 보듬는 것,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만이 이분법의 경계를 지울 수 있다. 내 안에 너를, 네 안의 나를 볼 수 있게 하는 영혼과 마음의 대화인 셈이다. 그 사랑을 선율에 앉히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내고, 나약함을 강함으로 바꾸는 그의 노래는 언어적 이분법을 해체한 자리에 사랑을 흘려보낸다. 어언 50주년을 맞는 이주호 노래 인생의 주 테마는 그렇게 사랑인 것이다.
그는 1956년, 10남매의 일곱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사업가 아버지와 성악가 어머니 사이에서 다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며 평탄하게 성장했다. 너나없이 궁핍한 시절이었지만 경제적 어려움도 심적 고생도 이주호만큼은 빗겨갔다. 노래처럼 인생이 술술 풀려나갔다고 할까. 그에게 노래는 인생과 같은 말이니 노래하는 인생 그 자체로 행복했다.
“아버지는 명보당이라고 보석 다루는 일을 하시면서 삼성물산 초기에 이병철 아저씨한테 돈을 대주던 전주였어요. 운수업도 하셨고요. 어머니와 이모들은 성악을 전공하셨지만 십대 때의 저는 음악적 재능이 표출되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지요. 그냥 취미로 한 게 전부였죠. 형제들도 음악 하는 사람은 없고요. 그랬는데 어느 날 음악이 제게 왔어요. 온몸과 온 마음에 세례를 받았다고 할까요? 저절로 곡이 떠오르고 가사가 써졌어요. 왜 그런지는 저도 몰라요. 영혼이 노래로 채워지는 느낌이었던 거죠.” 이 또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저 천부적 재능이 주어졌다고 할 수밖에.
그는 곡을 만들 때 감성의 원형인 자연에서 가장 많은 영감을 얻는다. 자연의 곡선을 따라 선율이 흐른다. 해바라기가 해바라기인 것도 의도함 없이, 인연 따라 무위로 다가온 결과다. “당시 명동가톨릭회관에서 젊은이들이 음악 모임을 하곤 했는데, 그때 방 이름이 들국화, 코스모스, 장미, 해바라기 등이었어요. 제가 주로 이용한 곳이 해바라기룸이라 수녀님이 그룹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그대로 따른 거죠.”
인연으로
아는 사람은 알지만 해바라기는 원래 혼성 4인조 그룹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주호, 이정선, 한영애, 김영미 이렇게. 1977년의 일이고, 첫 앨범이 그때 나왔다. 그러다 이정선이 입대하고, 이광조가 그 자리를 메웠다. 같은 해 두 번째 앨범이 나왔다. 이후 김영미의 해외 유학으로 4인조 해바라기는 해체를 맞게 된다. 이주호는 군 입대로, 이광조, 한영애는 솔로로 나섰다. 제대 후 이주호 또한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으로 솔로 데뷔를 한다.
1982년 유익종과 듀엣 해바라기를 만들었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해바라기가 이때 탄생한다. 그러다 유익종이 떠나가고 이광준이 옆지기가 되었다. ‘모두가 사랑이에요’가 부상하기 시작하던 때였고, 이어 ‘이젠 사랑할 수 있어요’, ‘어서 말을 해’ 등이 주목받았다. 3집에서는 다시 유익종과 함께하며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 ‘내 마음의 보석상자’가 히트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심명기, ‘자전거 탄 풍경’의 송봉주가 그의 옆을 지켰고, 강성운과는 1999년 이래 10년간 호흡을 맞췄다.
왜 그렇게 자주 파트너를 바꾸냐는 의아한 시선도 있었지만 그는 바람이 오고 가는 것처럼 인연 따라 일어난 일이라 여긴다. 의도적으로 누구를 지목하여 함께하자거나 계획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오가는 인연에 대해 담담할 수 있었던 것. 함께 노래하고 싶어 만났고 떠날 때가 되어 떠나갔다. 그러다 바람처럼 또 휘감겨올 때 그 인연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와 함께 가장 오래 노래한 강성운은 해바라기의 ‘찐팬’으로 고등학교 때 ‘해보라지’라는 팀을 만들어 고교 축제 무대에 섰다. 애오라지 해바라기 노래만 부르던 그가 해바라기의 정식 일원이 되어 언감생심 이주호 옆자리를 꿰찼을 땐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고.
최근에는 건반을 맡는 아들 이상 씨가 합류하면서 밴드 해바라기가 탄생했다. 이상은 2000년 그룹 유.피.에스(U.P.S)로 데뷔했다. 래퍼 도끼 등과 그룹 레이원으로도 활동했고, 2005년부터 솔로로 전향해 1집 앨범 ‘올 어바웃 다 러브’(All About Da Love)를 냈다. 미국인 외할아버지를 둔 혼혈 3세로 두드러지게 출중한 외모와 타고난 재능 덕에 모델로도 활동했다. 아버지 이주호와는 위례신도시 아파트 아래 위층에 살면서 음악인 이전에 자연인으로 부자의 정 또한 돈독하다.
“아버지는 조용한 분이세요. 항상 뒤에서 묵묵히 후원해주시죠. 음악이 아닌 다른 삶을 생각해보신 적이 없었듯이 저 또한 음악 외의 길을 간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제 음악을 하면서 해바라기 밴드로도 활동하는 ‘따로 또 같이’의 시간이 행복합니다.”
사랑으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만든 곡은 약 1000곡, 그 가운데 이주호가 가장 마음에 품고 싶은 노래는 1989년에 만든 ‘사랑으로’다.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는 국민 애창곡 ‘사랑으로’의 배경에는 사연이 있다. 노래를 만들 때는 곡과 가사가 동시에 떠오를 때가 있는가 하면, 곡이 먼저 진행될 때도 있고 노랫말부터 완성될 때도 있다. ‘사랑으로’는 곡을 만들어놓고 2년이나 흘렀지만 어찌된 게 가사를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때라 국민의 정서적 화합을 이룰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풍요 속의 빈곤이란 말처럼 당시 대한민국은 국제적 주목과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며 한껏 들떠 있었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잃어버린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는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우연히 신문 기사를 접한다. 김포공항 부근 환경미화원 가정의 네 자매가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궁핍한 생활을 비관하여 농약 자살을 기도했는데, 그중 세 살 막내가 생명을 잃었다는 내용이었다. 여섯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수입은 고작 월 25만 원, 올림픽을 치를 정도의 경제력을 지닌 나라에서 라면값도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팠던 이주호는 눈물을 글썽인 채 그 자리에서 바로 가사를 써 내려갔다. 받아 적는 손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울림 가득한 노랫말이 쏟아졌고, 두 볼과 가슴에는 눈물이 타고 내렸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이 다시 떠오르네 /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주리라
‘사랑으로’가 알려지면서 막내딸을 잃은 환경미화원 가족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고,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기뻤다. 힘든 사람들을 위해 낮고 어두운 곳에서 노래로 위로와 행복을 나누고자 했던 그의 소망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사랑으로’는 중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실렸다. 공감대의 동심원은 국내의 문턱을 넘어 세계로 번져나가, 2001년 키예프 국립오케스트라와 ‘For the Peace’ 음반을 녹음하고, 세계 3대 테너 중 한 명인 호세 카레라스는 세계 명곡 음반 ‘Around the world’에 자신이 직접 부른 ‘사랑으로’를 수록했다. 만국어인 사랑이 ‘사랑으로’ 노래가 되어 국제가요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행복으로
내 인생은 행복했다고 주저 없이 말하는 그에게도 원초적 아픔은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끝을 만나야 하잖아요. 생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난과 시련이 우리 모두를 슬프고 아프게 하지요. 아무리 찬란했던 인생도 늦가을 나뭇잎처럼 어느 순간에는 다 놓고 떠나야 하니까요. 바람 같고 낙엽 같은 인생, 그런 것들로 인해 가슴 아파하고 혼자 슬피 울기도 하고. 나만 이런가, 다른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원초적 막다름을 마주하나 살펴보려고 시장을 한 바퀴 휙 돌기도 하고. 일부러 이것저것, 여기저기 부딪혀보면서 답을 찾으려고 하지요. 그렇게 얻은 내 사유와 정서를 타인들과 공유하고, 내가 하는 고민과 번민을 딴사람도 할 거라고 믿기에 그런 것들을 노랫말에 녹이는 거지요.”
그는 1993년 유럽 순회공연 때 스위스 바젤에서 만든 곡 ‘해지는 강변’(11집에 수록)을 떠올렸다. 각자 아름다운 추억이 되살아날 거라고 하면서. 지난 8월, 스위스 바젤의 한 비영리단체를 통해 안락사로 생을 마감한 64세 한국인 폐암 말기 환자를 배웅하고 온 필자에게 위로차 들려준 곡이기도 하다.
해지는 강변에 홀로이 찾아와 물빛에 비치는 금빛 햇살은 / 조약돌 세는 내게 지나간 시간에 아름다웠던 얼굴들을 보이네/ 언젠가 때가 되면 이 강변에서 오랜 시간 지나간 후라도 서로가 서로를 찾아보자 했지/아름다웠던 기억들이 보이네/ 그 후론 우리는 나름대로 길을 갔었지/ 물살이 지우는 그 사람들의 얼굴은 어느덧 세월의 골이 새겨있어 아무도 모를 우리의 시간들
“저의 온 존재가 노래를 통해 사랑했고 사랑받았습니다. 저는 지난달 가수 인생 처음으로 제가 만든 노래가 아닌 남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후배의 곡이죠. 원래는 제게 편곡을 부탁하러 온 건데 나중에 제가 꼭 좀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간청하는 거예요. 받아들였습니다. 이 또한 해보지 않았던 경험이자 새로운 행복일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가사가 마음에 들었어요.”
버티고 버텨온 내 삶의 끝에서 당신 만나 너무나도 행복했어요/ 그리움을 참고 밤하늘을 보면 당신 얼굴이 보여요/ 이렇게 사랑한 내 마음, 당신을 잊어야만 하는데/ 때로는 우는 얼굴, 우는 버릇, 눈물 버릇 언제나 받아주던 당신이기에/ 가라고 가라고 하진 마세요/ 지금은 갈 곳이 없어요, 조금만 있으면 떠날 테니까/ 서둘지 말아요, 이미 끝난 사랑 서둘지 마세요
”올 한 해도 그리움과 함께, 코로나와 함께 지냈네요. 어렵고 힘든 시기를 소망 꺾지 않고 헤쳐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고생하신 모든 분들, 제가 만든 노래로 위로를 받으셨으면 좋겠고, 나보다 못한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고 그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우리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언제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서로 기도하고 붙잡아주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올해 끝자락에 신곡을 발표했습니다. 그중 ‘가을이면 오시려나’의 노랫말 중에 ‘겨우내 얼었던 가슴들은 서로를 위로하는데’라는 구절이 있어요. 서로 보듬고 위로하고 내 아픔이 네 아픔이고, 네 고통이 내 고통이라는 걸 서로 알아주는 것, 그런 게 공감이자 행복이 아닐까요? 이만큼 살아보니 행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브라보 마이 러브]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30년 만에 그를 만났다. 나는 새내기, 그는 대학 3학년이었으니. 이렇다 할 로맨스는 없었다. 손 정도는 잡았을 테지만 입맞춤을 해본 기억은 없다. 하기야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해본 적도 없고, 헤어지기 전 어느 가을 춘천에 한 번 같이 간 게 전부다. 이 말도 우습다. 만난 적이 있어야 헤어질 거 아닌가. 끌어모아 봤댔자 주머니 속 동전 몇 푼처럼 그와 함께한 기억도 추억도 궁색하기만 할 뿐.
그럼에도 나는 그를 대상으로 ‘만약에’ 게임을 해볼 때가 있다. 만약에 그와 사귐을 이어갔더라면, 그래서 만약에 둘이 맺어졌더라면, 만약에 그와 함께 황혼을 맞았더라면…. 밋밋하나마 평범한 결혼생활을 했을 것이며, 그랬다면 지금 나는 이혼녀가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근거 없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섬세한 꽃봉오리를 터치할 때처럼 여린 여심을 건드릴 줄 아는 남자는 아니었기에 한창 감수성 예민한 시기엔 매력적인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소위 ‘나쁜 남자’와 대칭점에 서 있는 전형적인 ‘착한 남자’였다. 착한 여자, 착한 남자의 치명적인 결함은 조미료가 전혀 가미되지 않은 영양식처럼 매력이 없다는 것이니. 더구나 그는 대화거리 없는 공대생이었으니.
2013년, 이른바 황혼이혼과 함께 호주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내 나이는 딱 50세. 그는 52세가 되었을 테지. 그해 11월 말경, 대학 후배로부터 크리스마스와 송구영신 모임에 참석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전공이 달라 잘 아는 후배는 아니었지만, 어느 모임이든 활달하고 적극적인 사람이 소위 총대를 메게 마련인지라 그 후배의 역할도 그랬던 것이다. 게다가 본인 소유의 장소까지 있다니 날짜만 정해지면 되는 일이라 모두들 ‘알았다, 가겠다’란 응답을 했으리라.
우리 모임은 서울의 같은 지역, 같은 이름의 Y고교와 Y여고를 나온 사람 중에서 남자는 S대, 여자는 E여대 출신으로 구성된 모임이다. 그래서 이름도 ‘Y써클’이었다. 듣기에 따라 자발적이며 노골적인 짝짓기 모임으로 인식될 수도 있지만(아닌 게 아니라 몇 쌍이 부부의 연으로 맺어졌고 지금까지 아들, 딸 낳고 잘살고 있다), 그건 지금 시각이고 시국 논쟁과 독서 토론 등 설익으면 설익은 대로 우리는 나름 진지했고 또한 그 나이 그대로 풋풋했다. 그러던 것이 세월 따라, 인연 따라 만남은 지지부진해졌고, 그날 연말 모임에 나온 멤버들이 가장 활발히 활동하던 기수라 할 수 있겠다.
오랜만의 해후라 서먹하기는 다들 마찬가지였겠지만 나는 이혼을 한 데다 외국 생활의 이물감까지 겹쳐 어색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와 호기심에 마음이 들떴다. 먼저 도착한 나는 어둑한 실내에 적응이 되어 잠시 후 입구로 들어서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중키에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몸피, 머리도 벗어지지 않았고, 배도 나오지 않은 그, 젊었을 때 그대로 웃는 인상의 그는 30년이 아닌, 3년도 아닌, 3개월 만에, 아니 고작 3일 만에 만난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한두 번밖에 입지 않고 옷장에 걸어둔 옷처럼 시간의 고운 먼지만 앉은 사람 같아 보였다. 순한 성품대로, 좋은 머리대로, 얽힘 없는 폭신한 실뭉치처럼 인생이 순탄하게 풀려나가면 저런 모습일까.
그럼 나는? 대학 졸업 후 미팅으로 만난 남편과 1년을 사귀는 동안 고양이 발톱처럼 얌전히 감추고 있던 폭력성이 결혼 일주일 만에 정체를 드러냈다.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사태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아이가 들어섰고, 결혼 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이민길에 올랐다. 홍수에 떠밀리듯 주변 상황이 급박히 돌아가는 와중에 남편의 폭력은 일상이 되어갔다. 그렇게 내가 롤러코스터에 올라 비명을 지르고 있는 동안 그는 유유자적 회전목마를 타고 있었던가 싶었다.
우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의례적인 안부를 물었다. 모임의 남녀 선후배들도 우리 관계를 알고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썸 정도를 탄 것인데, 둘이 뜨거운 사이였고 그와 헤어진 후 내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해괴한 소문까지 났었다. 그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렸을 때 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사실이 아닐 땐 따따부따 따지기보다 그저 웃어넘기는 버릇 그대로.
물론 그런 입방아에 오를 만한 ‘혐의’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시 나는 20대 특유의 실존적 번민에 휩싸여 나는 누구이며 왜 사는지 등 근원적 물음의 답을 찾아 열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가 간이역처럼 나타났고, 지독한 정체성 상실의 시절을 통과하며 그와의 만남이 그렇게 와전되었던 것이다.
돌아가며 간단히 각자의 근황을 말한 뒤엔 얕은 물웅덩이처럼 이리 움푹, 저리 움푹 대화의 웅덩이를 만들며 20여 명이 앉은 자리의 연을 따라 시간을 보냈고, 분위기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자정 무렵까지 이어졌다. 귀갓길에 나섰을 땐 얼음 박힌 것 같진 않았지만 12월 중순의 찬 공기가 오싹 끼쳐오며 와인 한잔의 취기마저 몰아냈다. 집 방향에 따라 그 자리에서, 혹은 길을 건너서, 아예 한두 블록 멀찍이 떨어져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택시를 잡아 타고 꼬리등을 인사처럼 깜박이며 제각기 사라져갔다.
공교롭게도 그와 나의 방향은 같았기에 그가 함께 택시를 타자고 했고, 어쩌다 보니 그와 나, 둘만 끝까지 택시를 잡지 못한 채 덩그러니 길 한가운데 남게 되었다. 묘한 느낌이 든 것은 아마 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흘러가는 시추에이션이라니!
마침내 빈 택시 한 대가 우리 앞에 섰고, 그가 안으로 먼저 들어가고 내가 나중에 탔다. 크리스마스를 열흘 남짓 남겨두고 연인인 듯, 연인 아닌 연인 같은 남녀가 30년 만에 해후를 한 후, 조붓한 공간에서 그것도 몸이 닿을락 말락 서로가 서로를 옆에 두고 앉아 있다. 지나친 상투성만 뺀다면 로맨틱한 설정이 아닌가. 더구나 택시 운전사는 오늘 만남의 의미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우리 시대의 발라드로 분위기를 잡아주고 있으니.
그런데 정작 그와 나는 어쩌다 우연히 합석한 사람들처럼, “그간 잘 지냈니?” “네… 잘 지내셨어요?” “응, 나야 뭐. 고생 많았겠구나. 잘 살아야 한다. 내가 도울 일이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그럼 잘 가라.” 우리 동네 큰길가에 나를 내려놓기 전 20여 분간 이런 의례적인 말만 나누었을 뿐이다. 그게 다였다. 그게 다가 아니면? 가정을 가진 그와 이제 와서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그와 나는 두 번 더 만났다. 역시 같은 모임을 통해서였다. 이후 모임의 발동이 꺼져 버렸고 더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면 8년 전 그날의 모임이 떠오른다. 롤러코스터에 오르지 않고 그와 회전목마를 탔더라면 스릴과 재미는 없었겠지만 이따금 마주 웃으며 생의 무난한 동반이 되지 않았을까. 그가 내 사람이 될 이유가 딱히 없었듯이 되지 못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그러나 내가 과연 그 따분하고 ‘안전빵’인 회전목마에 기꺼이 올랐을까. 그때의 나는 회전목마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지 않았나. 평생을 함께 돌고 있을 그의 ‘회전목마 아내’는 어떤 사람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신섭(83) 씨는 젊은 시절 약품을 옮기는 자전거 배달원으로 시작해 30대에 수십 개 회사를 운영하는 CEO로 발돋움했다. 뜻하지 않은 시련으로 몇 번의 좌절을 겪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재기했다. 은퇴 후 현재는 시니어 모델로 활동 중이다. 그를 만나 7전 8기의 여정과 더불어 포기하지 않는 삶의 가치와 의미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두산 등 대기업에서 본부장 및 대표이사를 두루 역임하고, 업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며 가는 곳마다 경영인으로 승승장구했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CEO, 지자체장과 같은 리더를 대상으로 리더십 및 동기 부여에 대해 강연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팬데믹이 닥쳤고, 그것은 하나의 기회이자 또 다른 전환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 됐다.
“1년의 반은 해외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했는데, 팬데믹 때문에 출국이 요원해졌어요. 처음엔 좀 갑갑했지만, 나중엔 방전한 것을 채우라고 준 기회로 여겼죠. 바빠서 못 읽었던 책들도 읽고, 구상했던 책을 출간하기 위해 틈틈이 글도 썼어요. 건강을 위해 사이클도 다시 시작했는데, 우연히 한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시니어 모델 공고를 봤어요. 밑져봐야 본전이라 생각하고, 그때부터 모델 아카데미에 다니기 시작했죠.”
젊은 시절 주위에서 모델을 해보라는 권유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형편이 어렵고 먹고사는 게 바빠서 차마 도전하지 못했던 모델의 꿈이 인생 후반전에 그렇게 찾아왔다.
“그간의 커리어와 다른 길이었지만 정말 열심히 했어요. 모델 아카데미 1등 출석을 한 번도 놓친 적 없을 만큼 열정을 다해서 임했죠. 모델 도전은 처음이라 서툰 게 많았고 힘들기도 했어요. 청년 시절에 운동을 꽤 많이 했던 터라 몸으로 하는 건 자신 있었는데, 모델 동작을 익히는 게 쉽지 않았어요.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도 다시금 이렇게 설렘을 맛볼 수 있어서, 새로운 삶을 사는 기분이었죠.”
첫 무대와 캐스팅
지난 5월 패션모델 선발대회 ‘2020 더룩오브더이어 클래식’(THE LOOK OF THE YEAR CLASSIC)에 시니어 모델로 처음 참여했다. 첫 무대에 선 기분은 어땠을까?
“오랜 세월 강연자로 무대에 섰기 때문에 첫 무대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참가자에 비해 덜했어요. 오히려 연습할 때가 더 힘들었지요. 워킹은 굉장히 근사해 보이지만, 직접 해보니 신체적으론 다소 불편한 걸음이에요. 숙달하려면 적어도 만 번 정도는 연습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더군요. 타고난 끼나 재능은 부족했기에 노력을 많이 했어요. 동작 하나라도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연습했어요. 다행히 본무대는 긴장하지 않고 무사히 마쳤는데, 운 좋게도 포토제닉상을 받았어요.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고, 모델로 나아가는 데 용기를 불어넣어준 상이에요”
한편 포토제닉상은 또 다른 기회로 이어지는 교두보가 됐다. 바로 전속모델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캐스팅을 제안한 알렉스 강 EMA 대표는 “모델에 대한 간절한 의지가 눈망울에서부터 느껴졌다. 7전 8기의 삶에서 마주친 시련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다시금 재기한 끈기와 인내의 여정이 시니어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고, 내면의 미를 가진 모델로서의 가능성을 보았다”라고 말했다.
자전거에서 고급 승용차로
모델 이전의 그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교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하지만 사업가였던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그는 자전거 핸들을 잡았다.
“당시 교사 봉급으론 동생들 뒷바라지하기에 턱없이 부족했죠. 사업가로 자수성가해서 집안을 일으키고 싶었어요. 차근차근 시작하기 위해 서울의 약국에 약품을 배달하는 자전거 배달원으로 살았어요. 후발주자였던 탓에 도심의 약국으로는 물건을 납품할 수 없었고, 서울의 변두리로 많이 다녔죠. 지금이야 길이 워낙 좋지만, 그 당시엔 정말로 길이 험했어요. 약품 상자를 가득 싣고 무악재 고개 같은 곳을 넘어 다니는 건 상상 이상의 중노동이었죠.”
그는 고구마 하나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부지기수였지만, 영어사전을 곁에 두고 늘 단어를 외웠다. 몇 달 지나자 고정 거래처도 생겼고, 짬이 날 때마다 영어 단어를 외운 덕분에 웬만한 도매상보다 약품을 더 해박하게 알 정도였다. 특유의 수완을 발휘해 차 한 대 분량의 물건을 대형 제약회사로부터 받아 일주일 안에 판 것이 도매상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
“처음 도매상을 할 때는 화물차를 임대해서 전국으로 다녔어요. 배달량이 많아진 이후로는 아예 화물차를 샀어요. 그것을 발판 삼아 나중엔 운수회사를 차렸죠. 운수회사와 더불어 주유소와 가스충전소도 운영했어요. 그렇게 건설, 중장비 등 관련 있는 사업체를 하나둘씩 늘려서, 30대 초반에 재벌 소리 들을 정도로 경영인으로 성공했죠. 20대 시절 기필코 10년 안에 자전거 대신 고급 승용차를 운전하겠다는 꿈을 세웠는데, 6년 만에 그 꿈을 이뤘어요.”
자살미수와 판매왕
그것도 잠시, 그가 자수성가로 쌓은 부와 명예는 한순간에 먼지처럼 전부 사라졌다. 그때 그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당시 제가 마약을 한다는 등의 음모성 투서부터 시작해 각종 루머와 더불어 세무사찰이 진행됐어요. 물론 모두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사업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 결과적으로 회사를 도산해야 했어요. 정말 하늘이 무너진 기분이었죠. 피땀과 눈물로 이룬 성취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면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만, 그때는 그 구멍조차 생각할 여력이 없었어요. 삶을 포기하려고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어요. 물론 가족이나 친척에 의해 미수로 그쳤지만요. 제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이었죠.”
당시 아내의 권유로 3년 반 정도를 기도원에서 지내면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스스로에 대한 실망 등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버리고,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을 버릴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몸이 불편한 장애인을 돌보는 것이 제 주요한 일과였는데, 봉사하면서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꿈을 품었어요. 힘들다고 삶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보람차게 살기 위한 워밍업을 그때 한 거죠. 술과 담배, 골프 같은 유흥도 그때 끊었고, 지금까지 안 하고 있어요.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결연한 의지이자 맹세였거든요. 그곳에서의 시간은 재기의 큰 밑거름이 됐어요.”
기도원에서 나와 미국 브리태니커 한국지사 외판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질은 고급 승용차 한 대 가격과 맞먹었다. 경영인 출신을 우대한다는 공고만 보고 지원했는데 바로 합격했다.
“외판원 이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어요.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었거든요. 아이들은 뿔뿔이 남의 하숙집에서 살고, 아내는 아프고, 가족이 한 집에 모이려면 돈을 벌어야 했죠. 그때 체면과 자존심을 다 내려놓았어요. 첫 고객은 회장 시절 운전기사였어요. 가서 무릎 꿇고 사달라고 부탁했죠. 저의 간절함을 보고 흔쾌히 사주더군요. 하지만 파는 일이 마냥 쉽지는 않았어요. CEO를 하는 친구들을 찾아갔는데 회사 앞에서 잡상인 취급받고 쫓겨나기도 했어요. 마지못해 산 친구에게는 다음 날 육필로 쓴 전보를 보냈어요. 정말 미안하고, 앞으로 성공하면 이 빚을 제대로 갚겠노라고. 우여곡절이 참 많았죠.”
그는 “노크를 하고 들어간 방에서 팔지 못하면 시신으로 나오겠다”라는 심정으로 그 일에 임했다. 받을 수 있는 수수료가 매출액의 16%에 불과했지만, 그는 첫 달 월급으로 단칸방을 얻을 만큼 성과를 올렸다. 덕분에 뿔뿔이 흩어졌던 식구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됐다. 그의 절박함과 진심을 눈여겨본 고객들은 그에게 다른 고객들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덕분에 그는 54개국에서 판매 성적 1위라는 기록을 세웠고, 외판원 시절 글로벌 판매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비우는 삶
판매왕 이후 동아프라임, 한미약품, 일양약품 등 유수의 기업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경영인으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너무 혹사한 탓일까? 원인 모를 고열로 병원에 40일간 입원하며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기적같이 살아서 돌아온 후 택시 기사로 한동안 살았죠. 그 이후 삶이 더욱 소중해졌어요. 스스로 몸과 마음을 돌보면서 작게나마 선한 영향력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었어요. 당시 IMF 시절이라 스카우트 제의도 뜸했고, 서울에서 오랫동안 살아 지리에 밝았어요. 내비게이션도 없을 때였지만 서울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손님들과 좋은 얘기를 많이 나눴죠. 기사를 하면서 손님들로부터 좋은 기운을 얻은 덕분에 다시 재기할 수 있었고요.”
택시 기사, 외판원 등 자존심과 체면을 내려놓는 선택을 했을 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내와 가족의 묵묵한 응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은 우리 가족을 만난 것이에요. 사모님 소리 듣던 사람이 외판원, 택시 기사 아내로 변했는데도 한 번도 만류한 적이 없어요. 묵묵한 내조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택시 기사나 외판원을 할 때 자식들이 저를 창피해하지 않았어요. 그게 제일 고맙고 미안해요. 형편이 어려워서 아내가 면사포를 쓰지 못한 채 시집을 왔는데 올해 아내 생일날 자식들 덕분에 리마인드 웨딩을 할 수 있었어요. 애들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KO를 당하고 다시 일어나 경기에 임하는 권투선수처럼 고비마다 난관을 헤치고 나아갔다. 이러한 삶으로부터 그는 무엇을 배웠을까?
“시련은 위장된 축복일지도 몰라요. 뜨는 해는 언젠가 지는 법이에요. 해가 진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잖아요. 해가 사라지면 별이 가득한 밤을 볼 수 있죠. 그래서 낙심하지 않는 자세가 중요해요. 건강한 사람에게도 마음의 고통이 있듯이, 알게 모르게 누구나 아픔과 상처가 있죠. 시련 속에 있을 때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요. 자신을 믿고 조금씩이라도 정진하는 자세.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 그게 필요해요. 걸림돌이 디딤돌이 되면 더 멀리 가요.”
끝으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시니어에게 조언과 더불어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부둣가에 묶어만 두면 배는 영원히 출항하지 못해요.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실천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삶이라는 항해에서 출항하지 않는 배로부터는 배울 수 있는 게 적어요. 출항을 시작했으면 목표를 세우고 끝까지 완수해야죠. 인생 2막의 목표는 비우는 삶이에요. 옷이나 책도 다 정리해서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했어요. 산문집과 마케팅 서적을 출간할 예정인데, 이 책의 수익도 다 기부하려고요.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간소하게 살고 싶어요. 모델이란 꿈을 이뤘지만, 명예에 목을 매고 싶지는 않아요. 무대에 선 그 순간을 즐기는 모델이 되고 싶어요.”
잠시나마 엿본 그의 삶은 마라토너를 닮았다. 그에게 시련은 마라톤의 사점(死點)과 같았다. 마라톤에서는 극한 고통이 따르는 사점을 넘어야 완주가 가능하다. 그는 시련을 극복하면서 자신만의 레이스를 완주했고, 더 나은 단계로 조금씩 나아갔다. 그것은 1등을 하겠다는 조바심이 아니라 완주를 목표로 한 간절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양의 유명한 철학자는 인간은 방황하는 한 노력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방향성 없는 방황은 애매한 재능만큼 괴롭다. 시련 속에서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자신을 믿고, 남들이 비웃을지언정 자신만의 방향성을 잃지 않은 덕분이었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는 힘은 자신의 소신을 잃지 않는 뚝심과 한 발짝이라도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다. 새로운 삶의 출발선에 놓인 그가 새로운 레이스를 멋지게 완주하기를 응원하며 마친다.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83.3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보다 2년 이상 긴 것으로 나타났다. 외래 이용과 입원일 수도 OECD 평균보다 많고 길지만 의사와 간호사 수는 적고, 병상과 의료장비는 많았다.
보건복지부는 OECD가 발간한 ‘보건 통계 2021’을 주요 지표별로 나눠 우리나라와 각 국가의 수준·현황을 분석해 20일 발표했다. 해당 통계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기대 수명은 2019년 기준 83.3년으로 OECD 평균인 81.0년보다 2.3년 길었다. 성별로 보면 남자는 80.3년, 여자는 86.3년으로, OECD 평균보다 각각 2년, 2.7년 길었다.
반면 자살사망률은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았다. 2018년 기준 우리나라 자살사망률은 인구 10만 명당 24.7명으로 OECD 평균인 11.0명의 2배가 넘었다.
건강 위험 요인을 살펴보면 2019년 기준 15세 이상 인구 중 매일 담배를 피우는 사람 비율이 16.4%로 OECD 평균 16.4%와 같았다. 순수 알코올 기준으로 측정한 15세 이상 인구 1인당 주류 소비량은 연간 8.3L(리터)로 OECD 평균 8.8L보다 적었다. ‘과체중과 비만’인 15세 이상 국민은 33.7%로 일본 27.2%에 이어 둘째로 적었다. 다만 과체중과 비만 인구 비율은 2009년 30.5%에서 2014년 30.8%, 2019년 33.7%로 증가 추세다.
한국은 OECD 국가들과 비교해 임상의사와 간호인력(간호사·간호조무사) 같은 의료인력 규모가 적은 편이다. 우리나라에서 환자를 직접 진료하는 임상의사(한의사 포함)는 인구 1000명당 2.5명으로 OECD 평균 3.6명보다 적었다. 우리보다 의사가 적은 곳은 폴란드(2.4명)와 멕시코(2.4명)뿐이었다. 간호사는 인구 1000명당 4.2명으로 OECD 평균 7.9명의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크게 부족한 상황이다.
의료인력은 부족하지만 우리나라 국민 1명이 받은 외래 진료 횟수는 연간 17.2회로 OECD 국가 중 가장 많았다. OECD 평균 6.8회와 비교하면 2.5배 수준이다. 적은 수의 의료 인력이 많은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입원 환자 1인당 평균 재원 일수도 18.0일로 일본 27.3일 다음으로 길었다.
의료 인프라 등 물적 자원은 OECD 국가 평균에 비해 많았다. 병상 수는 인구 1000명당 12.4개로 일본 12.8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고, OECD 평균 4.4개의 약 3배에 달했다. 인구 100만 명당 자기공명영상(MRI) 보유 대수는 32.0대, 컴퓨터단층촬영기(CT 스캐너)는 39.6대로 모두 OECD 평균MRI 18.1대·CT 28.4대를 크게 웃돌았다. CT 이용은 248.8건으로 OECD 평균 154.8건보다 많았고, 최근 10년간 CT이용은 연평균 10%씩 증가하는 추세다.
한편 장기요양과 관련해서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 1000명당 ‘요양병원 병상과 장기요양시설 침상 수 합’은 60.4개로 집계됐다. OECD 평균은 45.7개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 중 장기요양 수급자 비율은 2009년 3.2%, 2014년 7.0%, 2019년 9.6%로 증가 추세를 보였다. 최근 10년간 장기요양 수급자 비율의 연평균 증가율은 12%다. 급속한 고령화에 따른 장기요양 수급자 증가에 따라 GDP에서 장기요양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2009년 0.4%에서 2019년 1.1%로 증가했다.
노형준 보건복지부 정책통계담당관은 “OECD 건강 통계는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 보건의료의 현 수준을 평가하고 의료서비스 질 향상을 위한 정책 기초자료로 의미가 있다”며 “앞으로도 국제비교 가능한 보건의료 통계의 지속적인 생산과 활용을 위해 OECD와 협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무임승차 제도로 인한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지하철 무임승차 연령을 70세로 상향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서울연구원은 14일 '지하철 무임승차제도, 지속가능성 확보하려면 운영손실 정부지원·운영기준 변경 검토 필요'라는 보고서를 발간하며, 노인 연령을 만 65세에서 만 70세로 올리면 지하철 무임승차 손실 비용을 최대 34% 줄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다르면 서울교통공사가 무임승차 제도로 2040년까지 누적 손실이 최대 12조 원이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수도권 지하철의 최대 화두는 무임승차 제도다.
무임승차 제도는 1980년 70세 노인으로 시작해 현재 65세 이상 노인과 장애인, 국가유공자 등을 대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인구 고령화로 2021년 전체 인구의 16%가 65세 이상 노인이다. 이대로 간다면 2047년까지 37%로 증가해 지금보다 21% 포인트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서울교통공사 영업손실은 2019년 기준 5324억 원인데, 이 중 무임수송비용이 3709억 원으로 70%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노인 무임승차는 이동권 보장과 더불어 경제·여가·복지·관광 활동 증가 효과도 갖고 있다. 자살자 감소, 우울증 예방, 교통사고 의료비 절감, 기초생활 수급 예산 지원 등을 합치면 절감액이 연간 3650억 원으로 나타났다.
서울연구원은 장래 노인 연령 증가율과 통행 가능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분석한 결과 노인 연령을 70세로 올릴 경우 연간 무임손실 비용을 25~34% 수준으로 절감할 수 있다고 추산했다. 다만 연구원은 "연령 상향은 지자체가 자발적으로 하기에 한계가 있어 범정부 차원에서 먼저 결정해야 한다"고 내다봤다.
연구원 측은 "무임승차 제도는 다양한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직·간접적인 편익이 발생하고 있어 단지 교통으로 한정 짓기는 무리가 있다"면서도 "무임승차 제도를 유지하려면 연령 70세 상향, 시간대별 탄력 운영, 정부 지원 등 다각적 모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갱년기는 흔히 여성 문제로 치부된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 중년 남성 사이에서 우울증이 급증하며,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갱년기는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며, 중년 남성의 경우 우울증을 방치하다가 병을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어 더욱 유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보건복지부와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은 자살예방에 대한 통합적 정보를 제공하는 ‘2021 자살예방백서’를 5일 발간했다. 이 백서는 2019년 자살현황 및 우리나라 자해·자살 시도 현황과 OECD 회원국 자살 통계를 담았다.
2019년 우리나라 자살률은 연령대가 높을수록 증가해 80세 이상(67.4명)이 가장 높았다. 하지만 자살사망자 수는 50대가 2837명으로 가장 많았다. 성별로는 남자가 70.5%로 여자 29.5%보다 2배 이상 높았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2017년 기준 10만 명 당 23.0명으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았고, OECD 평균인 11.2명보다 2.1배 높았다.
남자들의 자살률이 여자보다 두 배 이상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50대 중년 남성의 우울증을 꼽는다. 중년 남성 우울증은 2008년 이후 꾸준히 증가했다. 2017년 발표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50대 남성 우울증 환자는 2008년 이후 2016년까지 꾸준히 증가했고, 연간 우울증으로 진료받은 남성 환자 중 50~60대 환자가 전체에서 34%를 차지했다.
중년 남성 우울증, 원인은?
남성 갱년기는 40대 이후부터 서서히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떨어지면서 주로 50~65세쯤 여러 징후를 보이며 나타난다. 이때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 분비가 함께 감소하면서 우울증이 유발된다.
이러한 신체적 요인과 더불어 환경 요인도 중년 남성의 우울감을 심화시킨다. 중년 남성은 은퇴를 전후로, 노후 대책 우려와 가족 부양 부담이 겹치는 등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심리적 압박을 크게 느낀다. 이것이 우울증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실제로 2015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50대 남성은 걱정거리를 묻는 질문에 노후생활과 자녀교육, 일자리 등을 많이 꼽았다. 자신의 일자리 유지와 노후생활을 장담하지 못하는 가운데 높은 주거비, 자녀교육과 부모부양 등을 우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들이 취업난으로 갈수록 독립이 늦어지는 20대와 30대를 부양하는 부모 세대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느끼는 압박감은 앞으로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예방과 치료 방안은?
1. 직업을 가져라
순천향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의 연구에 따르면 직업이 있는 50세 이상 중·장년층은 주부 또는 실직자보다 우울할 확률이 48%~65%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적절한 직업 활동 같은 ‘활동적인 노화(active ageing)’ 과정을 거치면 우울증으로 인한 질병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다.
2. 사람들과 교류하라
전문가들은 직업이 없더라도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얼마든지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이정석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정신의학과 교수는 “혼자 있는 것은 우울증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며 “우울증을 극복하려면 사람들과 교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니던 직장에서 은퇴하고 정기적인 활동이 없을 경우 사회적 고립이 심화되고 우울증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억지로라도 친목활동, 가족모임 등을 자주 가지면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 좋다.
3. 신체를 움직이는 취미활동을 하라
어떤 종류건 본인이 하고 싶은 취미활동을 찾아야 한다. 특히 신체를 움직이는 활동을 동반한 취미를 가질 경우, 떨어지는 체력도 향상시키고 기분 전환도 꾀할 수 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동호회를 만들어 취미활동을 하면 더 좋다. 그동안 똑같이 유지하고 반복하던 일상과 생활습관에 변화를 줘, 건강한 생활리듬을 되찾을 수 있다.
이러한 개인의 노력 뿐 아니라 중년의 우울증을 줄이기 위한 사회적인 제도도 필요하다. 50세 이상 시니어들이 기존의 직업 활동을 지속하거나 새로운 사회활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다양한 사회·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허휴정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남성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어려워하기 때문에 자신과 주변 사람들도 모르는 사이에 증상이 악화될 수 있다”며 “혼자 견디려고 하기보다 가능하다면 가까운 사람과 솔직하게 나누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매우 무겁게 다가온다. 특히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할 때는 유가족에게도 더욱 고통스러움을 남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잦아들지 않고 있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사실상 바이러스만큼 긴급하게 대책을 세워야 할 문제로 ‘노인 자살’을 꼽는다.
특히 우리나라 노인 자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우리나라 노인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46.6명으로 OECD 37개국 중 1위다.
노인 자살, 원인은?
노인은 질병 만성화로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생기면서 우울감과 무력감을 겪는다. 이러다 보면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위기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경찰청 변사자료 자살 통계에 따르면 61세 이상의 자살 동기는 육체적 질병 문제가 41.6%로 가장 높았다. 정신과 문제가 29.4%로 뒤를 이었다. 생활고는 11.9%, 가정 문제는 6.9%였다.
육체적 질병 문제로 인한 자살 비율은 무려 절반에 가까운 수치를 나타냈다.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육체적 질병으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가 많아지는 셈이다.
노인들이 보내는 경고 신호는?
지난해 보건복지부와 중앙심리부검센터가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자살 사망자 566명의 유족 683명을 심층 면담한 ‘심리 부검’을 진행했다.
심리 부검은 유족의 진술이나 관련 기록을 분석해 자살 사망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까지 어떤 패턴을 보였는지 살펴보고 자살 원인을 추정하는 과정이다. 전국 정신건강복지센터나 경찰 등을 통해 심리 부검 의뢰를 접수했거나 면담을 신청한 유족을 대상으로 한 조사다.
결과를 살펴보면 자살자 566명 중 529명인 93.5%는 사망 전 주변에 언어·행동·정서적 경고 신호를 보냈다. 죄책감이나 무력감 같은 감정 변화와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많이 자는 식의 변화를 보였다.
노인들은 연령에 따라 조금씩 경고 신호가 달랐다. 50~64세는 갑자기 식사량 변화로 급격한 체중 변화가 나타났고, 65세 이상은 아끼던 물건을 주변에 나눠줬다.
사망 3개월 이내 더 심해지는 경고 신호, 주변의 관심이 중요
이러한 경고 신호는 대부분 사망 3개월 이내, 사망 시점에 가까워졌을 때 빈도가 잦아졌다. 자살 사망자 10명 중 9명인 91.2%는 사망 3개월 전에 주변을 정리했다. 사망 1주 전에 이러한 경고 신호를 보낸 경우도 절반에 가까운 47.8%였다. 하지만 이런 경고 신호가 나타났는데도 119명인 22.5%만이 주변에서 인지했다. 또 35.2%는 사망 전 이미 한 차례 이상 자살을 시도했다.
노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까지 이르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예방이 가장 중요하다. 신체적으로 약한 노인들은 한 번의 자살 시도로도 사망에 이르는 사례가 많아 더 주의해야 한다. 정부가 나서서 촘촘한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해당 노인과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같은 주변의 관심이 더 필요하다.
삶이 고독했다고 그 죽음마저 고독해서는 안 된다. 생의 마지막인 죽음이 외롭거나 고통스럽기보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잘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노인들이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존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와 나라, 이런 기본을 탄탄하게 갖추는 것이 경제력을 높이는 것보다 우선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