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고성군은 매월 추첨을 통해 1000만 원 상당의 경품을 준다. 울산시와 대구시는 경품으로 건강검진권을 제공한다. 전남은 해남을 방문한 여행객에게 1인당 5만 원 여행상품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이런 혜택은 어떤 사람들이 받을 수 있을까? 이들은 최근 국내 지방자치단체가 내놓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예방 접종자를 위한 혜택이다.
7월부터 59세 이하 시니어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예방 접종을 맞는다. 6월 17일 기준 70세 이상 어르신 80%는 이미 1차 접종을 완료했다.
백신 접종 속도가 빨라지고 백신 효과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정부와 전국 자치단체가 앞다투어 백신 인센티브를 내놓고 있다. 이미 2차 접종까지 마치고 14일이 지난 시니어나 곧 접종을 받게 될 시니어를 위해 다양한 백신 인센티브를 소개한다.
정부
정부는 지난 5월 26일 ‘예방접종 완료자 일상회복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접종자가 가족 모임 인원에서 제외되는 혜택 외에도 공공시설에서 입장료 할인을 받을 수 있다. 두 차례 접종해야 하는 화이자·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1차 접종자도 해당한다. 6월부터 국립공원 생태탐방원 체험프로그램 입장료는 50%, 국립생태원·국립생물자원관 입장료를 30% 할인에, 국립 자연휴양림 입장료는 면제한다. 창덕궁 달빛기행, 경복궁 별빛야행 같은 인기 문화재 관람 프로그램은 접종자를 대상으로 한 특별 회차를 편성할 예정이다.
수도권
세종문화회관은 올해 진행하는 자체 공연과 전시에 대해 관람료를 최대 30%까지 할인한다. 연극 ‘완벽한 타인’ 등 이미 막을 올린 공연부터 연말 ‘송년음악회’까지 자체 공연과 전시를 대상으로 10~30% 할인한다.
서울시가 자체적으로 내놓은 백신 인센티브는 아직 준비 중이다. 지난달 31일 서울시는 “지자체 차원에서 가능한 접종 인센티브 제공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 자치구 의견 수렴 등의 절차를 거쳐 내부적으로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윤보영 서울시 보건의료정책과장은 지난 16일 서울시 코로나19 정례브리핑에서 “(백신 접종자를 상대로) 추가적인 인센티브가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에 할지를 내부적으로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도 용인시는 백신 1차 접종자가 에버랜드를 35%, 캐리비안 베이·한국민속촌를 40% 할인된 가격으로 자유이용권을 구매할 수 있게 한다. 용인자연휴양림은 주차요금을 전액 면제하고, 노상주차장을 제외한 용인시 관내 23개 공영주차장에서도 이용료 20%를 할인한다.
경기도 수원시 소상공인들은 만 60세 이상 백신 접종자에게 음식값과 이용요금을 할인하는 ‘백신 인센티브’ 행사를 준비했다. 코로나19 백신을 접종받은 만 60세 이상 수원시민은 7∼8월 두 달간 음식값과 이용요금을 업소마다 자율적으로 정한 범위 내에서 할인받을 수 있다. 성남·파주·광명·안산시 역시 산하 체육·관광시설과 참여 의사를 밝힌 미용·외식업소 등에서 할인을 하고 있다.
경기도 광명시는 오는 12일부터 만 65세 이상 백신 접종자에게 광명동굴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65세 미만 접종자는 50% 할인된 가격에 입장할 수 있다. 광명시민은 중복할인도 받을 수 있다. 7월부터는 시민회관 기획공연 20% 감면, 기형도 문학관 입장객 기념품 증정, 광명극장 기획공연 우선 예약할 수 있게 할 예정이다.
강원도
강원도는 어르신들의 접종을 독려하기 위해 접종 우수마을을 포상하고, 접종을 완료한 어르신에게 유명 인기 가수의 트로트 콘서트 관람 기회를 준다. 가족단위 접종률을 높이기 위해 일부 해수욕장 코로나19 프리존을 운영하고, KTX 경강선 코로나19 프리존 연계 관광상품 등을 출시한다. 또 코로나19가 종식되면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코킷리스트’) 공유 이벤트 등을 추진하기 위해 시·군 및 코레일과 협의하고 있다.
강원도 강릉시는 오죽헌시립박물관과 강릉통일공원 무료입장을 허용하고, 강릉시립예술단 공연 은 입장권을 50% 할인한다. 강릉시 관계자는 무료 급식, 재가 복지 서비스 대기자 발생 시 백신 접종자를 우선 선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충청도와 대전광역시
대전시는 지난 14일부터 다음 달 31일까지 한시적으로 각종 문화·체육시설 입장료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대전시립미술관과 이응노미술관은 입장료를 받지 않고, 오월드(동물원)와 프로축구 대전하나시티즌 홈경기 입장료 20% 할인받을 수 있다.
충남 서천군은 백신 인센티브용 특별 관광 프로그램을 새로 개발했다. 7월 20일부터 백신 접종을 받은 여행객에게 공짜로 시티투어를 시켜주고, 단체 여행은 인원수에 따라 10~30% 할인한다. 특별 관광 프로그램 중 농촌 관광 프로그램에는 차량을 지원하는 등의 혜택과 관광기념품도 준비돼 있다.
전라도
전라북도에서는 일찌감치 관광객 유치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전북도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전북 투어 패스’를 ‘1+1’ 체제로 특별판매한다. 투어 패스 카드 한 장으로 도내 모든 시·군의 시내버스를 이용하고 주요 관광지에 입장 가능하며, 맛집·숙박·체험시설·주차장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전북 진안군은 진안 군민에게 국민체육센터 입장료 80%와 골프연습장이용료 50%를 각각 할인한다. 전라북도 무주군 반디랜드 곤충박물관과 천문과학관, 부안군 청자 등은 입장료의 절반을 깎아준다. 전라북도 순창군 강천산군립공원과 전라북도 익산시 보석박물관은 아예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이 외에도 순창군은 8명 이상 단체 관광객에게 교통편과 체험·숙박비를 지원한다. 또 올해부터는 8명 이상 단체 관광객 익산역·남원역·광주송정역·순천역·광주공항 등 기차역과 공항까지 ‘힐링투어 버스’를 무료로 제공한다. 전세버스로 방문하는 관광객에게는 버스비 일부도 지원한다. 그 외 올해 처음으로 전주 한옥마을과 순창 강천산을 연계하는 ‘시티투어 버스’ 운영, 4명의 소규모 관광객에게는 1일 체험비 최대 1만 원, 숙박비 1인당 1만 원씩 지원할 예정이다.
전라북도 군산시는 7월부터 소상공인지원과 기간제 근로자 채용 시 접종자에게 가점을 준다. 평생학습관 프로그램 수강료도 할인 또는 면제해준다.
전라남도 여수시는 농기계 임대료를 추가로 할인해주고, 사회복지시설 내 노래교실 운영을 허용한다. 전라남도 해남군은 여행사와 함께 ‘백신 안심여행’ 상품을 개발했다. 7∼8월 동안 1박 2일 이상 해남을 찾는 접종 완료 관광객에게 1인당 5만 원의 특별 인센티브를 지원해, 기존 19~20만 원인 여행상품을 5만 원 할인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다.
경상도와 주변 광역시
울산시의회사회는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마친 울산시민들에게 17일부터 오는 10월 31일까지 5차례 추첨을 통해 135명에게 건강검진권을 제공한다. 경품 참여 병원은 울산대병원, 동강병원, 중앙병원, 울산병원 등 13곳이다. 울산박물관은 오는 24일과 다음 달 1일 두 차례 진행하는 ‘제18회 전통문화 체험교실’에 백신 접종자만을 참여시키기로 했다. 대구시는 백신 접종자에게 ‘건강검진권’ 등 경품을 선물로 지급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국립부산과학관은 지난 8일부터 성인 기준 3000원인 상설전시관 입장료를 받지 않고 있다. 접종 확인서와 신분증을 매표소에 제시하면 무료입장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부산시는 시립박물관·미술관의 무료관람에 이어 영화의 전당·문화회관 등에서도 관람료 할인을 검토하고 있다.
경상북도 경주엑스포대공원은 오는 21일부터 다음 달 30일까지 백신을 접종한 경북도민들에게 공원 입장료를 면제한다. 엑스포대공원 상설공연인 뮤지컬 용화향도 관람료를 20% 할인한다. 공연 ‘인피니티 플라잉’도 오는 21일부터 다음 달 31일까지 백신을 맞은 국민이면 거주지와 상관없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경상남도 고성군은 전체 260개 마을 중 백신 사전예약률이 우수한 마을 10곳에 총 10억 원의 숙원사업비를 지원할 예정이다. 우수마을 경로당에는 사회복지협의회를 통해 100만 원 상당의 물품과 운영비를 지급한다. 또 접종을 마친 군민 중 매월 추첨을 통해 1000만 원 상당의 경품을 준다. 지급 대상과 방법, 형태는 군민 의견을 수렴해 결정할 방침이다.
경상남도 하동군은 옛 경전선 북천역~양보역 레일바이크와 금남면 금오산 짚 와이어 탑승자에게 이용료 50%를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켄싱턴리조트와 비바체 리조트 이용자에게는 이번 달부터 향후 3개월간 숙박료 30%를 깎아준다.
이 외에 불교계가 제공하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할인 혜택도 있다. 6월부터 전국 135개 사찰의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참가비에서 2만 원을 할인한다. 접종자 당사자에 한해 선착순 1만 명에게 혜택이 제공된다.
봄 햇살 포실히 내린 서울 북촌의 한옥마을 계동. 춘정에 겨운 벌 나비 꼬일 계절이지만 옛날 마을 구경하러 돌아다니는 사람들만 부산하다. 옻칠 공예가 나성숙(68)은 골목 안통에 산다. 운치를 돋워 개축한 한옥에. 그는 이곳에 ‘나성숙 옻칠학교’를 열고 수강생을 가르친다. 코로나19로 다들 고전하지만 나성숙의 학교는 수강생들로 붐빈다. 조신하게 방에 틀어박혀 권태를 해치우기에 전통공예만큼 좋은 게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숱하게 찾아와 기능을 배워간다. 미처 그럴 줄 몰랐던 그는 바야흐로 꽃철을 만났다. 그러나 봄을 견디기 어렵단다. “어쩌나? 봄이면 아직도 가슴이 뜨거워 설레더라고!”
옻나무의 진을 발라 공예품을 만드는 옻칠은 까다롭기 그지없는 장르다. 초칠하기, 말리기, 삼베 붙이기, 사포질하기, 다시 칠하고 말리기 등 30여 가지 공정을 거쳐야 완성에 이른다. 나성숙이 옻칠에 매달려 산 세월이 올해로 16년. 짧지 않은 경륜이라 이룬 게 많다. 가구나 그릇을 만드는 데에서 나아가 옻칠화 개인전도 수차례 펼쳤다. ‘웬 구닥다리 옻칠?’ 처음엔 그리 삐딱하게 보는 눈들이 많았다. 그럴수록 차라리 벋나가는 심사로 버텼던 모양이다. 짱짱한 오기 하나면 파란에 밀릴 게 없다. 그는 딴엔 이제 옻칠에 관한 한 대가 행세를 해도 지나칠 게 없다고 자부한다. 언제 어디서건 기가 팍 꺾이는 법이 없는 기질이지만, ‘칠흑 밤처럼 깊고 어두운 옻빛’에 취해 달려온 와중에 대낮처럼 환하게 열린 게 많았던가 보다.
계동엔 항아리 깨뜨릴 듯 목청 큰 사람이 하나 산다. 바로 나성숙이다. 세레나데에는 어울리지 않을 목소리지만 천둥에 필적할 만한 톤이니 명품을 보유한 셈? 화통한 음색의 임자답게 그는 어려서부터 대차게 놀았다.
“원래부터 성격이 괄괄했다. 초딩 시절엔 내가 깡패였다고.(웃음) 공부엔 아무런 관심 없이 애들 휘어잡는 재미에 빠져 지냈다. 그러다 집안 어른이 나의 장점을 죽 열거하며 칭찬을 해주는 바람에 확 변했지. 별안간 공부벌레가 된 거다.”
그는 서울대 미대 출신이다. 경희대 대학원에서 조경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교수를 역임했다. 들입다 공부에 매진하는 재주를 몸에 붙이지 않고선 얻기 어려운 이력이다. 머리도 기차게 잘 돌아갈 테다. 그런데 천성은 분방해 길길이 들솟는 게 있으면 누르지 않고 곧잘 방목처럼 풀어주었다.
“난 단조로운 걸 참지 못한다. 진폭이 큰 인생이야말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대학 다닐 때엔 술과 담배를 즐겼다. 한때 중학교 미술교사로 교단에 섰지만 딱 3일 근무하고 그만뒀다.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자니 너무도 고민스럽더라고. 좋은 교사가 될 자신이 없었던 거다.”
이후 언론사에서 일했지?
“일간신문 기획실에서 한동안 일하다 지방대학 강단에 섰다. 내 청춘이 절정에 달한 시절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열기랄까, 넘치는 에너지로 거침없이 살았다. ‘월화수’엔 얌전한 교수로, ‘목금토’엔 전혀 다른 여자로. ‘야, 이거 내가 두 얼굴의 인간이네?’ 그런 회의가 생기던걸. 그런데 어떤 이가 이러더라. ‘뭘 두 얼굴 가지고 고민이야? 한 열 개쯤은 가져야지!’(웃음)”
하나의 얼굴로 사는 사람이 있겠나? 내숭으로 적당히 포장해 내부의 요지경을 숨길 뿐이다. 당신에겐 그 내숭이라는 게 없는 것 같다.
“나는 실험적이고 발전 지향적인 성향이 다분하다. 게다가 부지런하지. 그래 다양한 경험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곤 했다. 때론 방황에 불과한 편력마저 유쾌했다. 그러나 서른다섯 살 노처녀에 이르자 뭔가 비참한 기분이었다. 몸도 아팠고. 그때 결혼을 결심했지. 어떤 사람이든 나에게 청혼하는 첫 번째 남자와 무조건 결혼하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다.”
세상이라는 전대미문의 정글엔 ‘늑대’들이 들끓는다. 그러나 그는 다급해 쉰밥 더운밥 따지지 않기로 했던 거다. 이 기이한 구제책은 최근에 내가 들은 가장 구슬픈 얘기에 속한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니 고고한 기법이다. 천국엔 결혼이 없다 했다. 잠깐 달달하다가 지지고 볶는 게 결혼생활이지 않던가. 겉과 속이 달라 신비한 퍼포먼스가 부부 관계다. 어차피 그럴 거라면 상대가 누군들 무슨 상관? 통 크게 놀면 큰 걸 얻는다. 게다가 남자라는 복잡한 생물은 저마다 매력이라 할 만한 거 하나쯤은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옻, 방울방울 피처럼 귀한 재료
그의 대범한 ‘노처녀 탈출 작전’은 성공했다. 같은 언론사에 근무했던 두 살 연하 기자와 연을 맺었으니. 그러나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2004년 여름, 중견 언론인이었던 남편이 생을 마감한 것. 날벼락처럼 찾아든 횡액이었다.
“왜 그렇게 훌쩍 서둘러 가버렸는지. 더 사랑해줄걸, 더 품어줄걸, 그런 아쉬움이 길게 남더군. 워낙 과묵해서 말이 없는 남자였다. 아니, 뭐 이런 사람이 있어? 그런 생각, 자주 했거든. 그러나 과묵한 성정으로 매사에 성실했다. 유능한 언론인이었고, 학식이 풍부해 내가 존경했지. 그걸 사랑이라 하나?”
급작스런 사별의 고통을 어떻게 다스렸을까?
“괴롭고 슬프고 막막해 정신 차리기 힘들더군. 술도 많이 마셔댔지만 그게 위안이 되나? 지워지지 않는 남편과의 추억과 회한을 끼적인 에세이들을 책으로 묶어내는 것으로 자위를 했지.”
책 제목은 ‘북어국’이며, 이후 에세이집 ‘유쾌한 반란’과 남편이 생시에 쓴 기사들을 모은 유고집을 펴내기도 했다.
“가장 두려운 건 두 아이를 건사해야 할 가장의 책무가 이제 내게 주어졌다는 거였지. 남편은 섭섭하게도 이 문제에 대해선 대책을 남기지 않고 떠났다.”
한 번뿐인 인생, 이렇게 황당하게 저무나? 그런 회의에 빠질 겨를조차 없는 현실에 그는 압도됐던 것 같다. 막막해 한동안 부질없이 방황했으나 그걸로 불안을 때려눕힐 수는 없는 일. 그는 맥줏집을 차려 대책으로 삼았다. 하지만 신통치 않았다. ‘야야, 영이 맑아야 사람이 모이고 길이 열리는 것이야!’ 지인에게 보기 좋게 한 방 먹기도 했다.
이러구러 그즈음 만난 게 옻칠이다. 시각디자인 전공자라 입문 이후의 진도가 빨랐다. 과녁을 꿰려는 화살처럼 직진으로 달려가 옻칠에 매달렸다. 그러면서 모래 위에 지은 가건물처럼 불안정했던 자신의 내벽을 단단하게 돋울 수 있었으니, 옻칠로 신세계를 열어젖힌 셈이다.
“옻을 직접 채취해보면 안다. 방울방울 피처럼 귀한 재료라는 걸. 심연처럼 깊은 검정빛은 또 얼마나 매력적인가. 미술에 쓰이는 화학적 물감과 달리 이건 완벽한 자연의 선물이다. 깊이 빠져들 수밖에.”
자연산이라면 뭐든 환영하는 사람이 많다.
“요즘 옻칠 공예품 애호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웰빙 트렌드와 어울려서다. 옻이 지닌 방균·방부작용이 건강에 매우 좋은 거다. 아마도 향후 밥그릇 국그릇을 옻칠 제품으로 바꾸는 바람이 불 것으로 본다, 유행처럼.”
전통공예는 아름답고 소중하지만 모더니티까지 구사하지 않고선 대중적 지지를 받기 어려울 것 같다. 장인들은 흔히 전통의 보전과 답습에 그쳐 아쉽다.
“장인들은 전통을 고수하지만 나는 옻칠의 현대화에 주력한다. 집중된 노동력으로 굿 디자인을 구현하는 장인과 달리 옻칠의 자연미 자체를 예술로 끌어올린다. 그래픽 디자인을 적극 도입하며 가급적 미니멀하게, 가급적 자유롭게 소재를 조형한다. 이런 나의 공예를 장인들은 미완성 작품인 양 폄하하지만.”
‘고통은 차라리 꿀단지다’
신명이라 하나? 옻칠 얘기에 취해 톤이 더 높아진다. 그가 신바람을 내기론 주변 사람들에 관한 회고와 인물평에서도 마찬가지. 파란만장까지야 아니겠으나, 상당히 알록달록하고 울퉁불퉁하고 기세등등했던 지난 시절에 맺은 근사한 인연, 희한한 사연들을 양동이로 물 쏟아붓듯이 술회한다. 정치인, 교수, 문인, 화가 등 누구나 알 만한 각계의 인물들과 나눈 긴밀한 사교를 통해 인생을 노닐며 배운 우정이야말로 최상의 자산이라는 투로. 우정이란 쓸쓸한 인생을 부축해주는 관계의 마술. 자랑으로 돌아본들 지나칠 건 없다.
“화가 김점선(작고) 언니를 특히나 잊을 수 없다. ‘성숙아, 나 죽을 거 같아!’ 암과의 투병 막바지에 문병을 갔더니 언니가 그러더군. 뼈만 남은 모습에 울컥했으나 뭔가 엉뚱한 얘기로 웃겨주고 싶었다. ‘언니! 걱정 마. 오징어를 먹으면 나을 수 있어!’ 이건 터무니없는 농담이었으나 곧이곧대로 믿더라. 시장에 달려가 내가 사온 오징어를 입에 물고 열심히 우물거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가 돌아간 뒤 한동안 산소를 수없이 찾아가 그리움을 달랬다.”
시인 뮈세가 말하길, ‘세상에서 유일한 진실은 이성을 잃은 사랑에 있다’고 했다. 독신의 좋은 점은 사랑할 기회가 열려 있다는 데에도 있다. 요상하게도 진실보다 이기적 계산을 앞세우는 세상이지만. 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내게 이런저런 연애가 왜 없었겠나? 학벌 되지, 미모 되지, 내가 여러모로 꽤 갖춘 여자잖아?(웃음) 그런데 남편만 한 남자가 없더라고. 남자라면 셋을 구비해야 한다. 학식, 돈, 인품, 이것이 내가 가진 판단 기준치다.”
돈까지? 돈보다 사랑의 힘으로 살면 되지 않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게 진정한 사랑이다.
“일단 돈 때문에 불편하진 않아야 사랑도 유지될 수 있잖아? 예부터 사람들이 돈의 가치를 중심에 두었던 건 그게 인류에게 필요한 기본이기 때문이겠지. 학벌, 미모, 명예와 마찬가지로 말이야.”
당신이 말한 그 기본이라는 걸 과도하게 추구하면서 세상이 격투기 링으로 변했다.
“물론 사회의 흐름엔 문제가 많다. ‘금수저’로 태어났다고 교만과 위세를 부리는 자들을 보라. 얼마나 가관인가? 좋은 사람들과 유유상종하며 배운 게 많았지만 사실 난 사람을 믿지 않는다. 가령 재벌 부인이 나의 공예 사업을 돕겠다고 하지만 믿지도 않고 속지도 않는다. 거기에 놀아나지 않는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많았나 보다.
“그간 나를 도와준다고 나선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나 상처받은 경우가 많고 많았다. 때로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유혹에 넘어가주기도 했지. 왜? 저 사람의 내면에 세모가 있나, 네모가 있나, 대체 뭐가 있나, 그게 궁금해서였다.(웃음)”
우리가 살면서 크게 오버하는 게 있다. 내가 남에게 준 상처는 까먹은 채 남이 준 상처만 고이 간직하는 게 그렇다.
“그야 그렇지. 그리고 상처에서 오는 고통도 딱히 나쁜 것만은 아니다. 고통은 꿀단지라는 게 내 생각이다. 고통과 함께 성숙하는 게 인간이니까. 이제 나는 몹시 냉철해졌다. 옻칠을 만나고 나선 밑도 끝도 없는 방황을 하진 않는다. 삶의 불안감이야 여전하지만 이 역시 성장의 조짐으로 본다. 군살 없이 단순하게 사는 게 가장 좋다는 것도 깨달았다. 근데 진달래며 개나리는 왜 피어 사람을 환장하게 하는지 몰라!(웃음)”
이라고 피는 것들만 지천이랴. 이 꽃이 피면 저 꽃이 진다. 나는 나이 들면서 지는 꽃에도 마음이 가더라. 잘난 인생보다 순리를 아는 인생이 아름답더라. 그의 한옥을 나설 때 그런 생각, 잠깐 머리를 스쳤다.
초가집 한 채, 물가에 있다. 나무들 우거지고 옥색 냇물 돌돌거리는 산골짝이다. 개울 건너엔 들이 펼쳐져 후련하고, 들판 건너편은 높고 낮은 산들의 파노라마로 청신하다. 초가를 지은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석학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다. 산천경개 수려하고 윤택하니 이 아니 좋을쏘냐? 그는 반색하며 무릎을 탁 쳤을 게다. 세상의 문장을 독하게 섭렵한 내공으로 산수를 가늠하는 눈썰미도 달인 경지에 이르는 게 성리학자다. 햐, 그런데 초가의 몸피가 한 줌 크기다. 왜 이렇게 지었나?
벼슬이면 벼슬, 학문이면 학문, 정경세는 헌걸차 몸담은 분야마다 큰 발자국을 남긴 준재다. 그런 그가 요즘말로 시골 세컨드하우스에 속할 정자를 아주 자그맣게 지었다. 성냥갑 크기의 방 한 칸과 마루 한 칸이 고작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대충 지은 움집이 아니다. 들보와 기둥은 제법 야무지고, 마루 벽엔 쌍으로 창을 달아 통풍과 채광에 지장 없게 했다. 몸 하나 편히 눕히고 비바람을 능히 피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던 거다. 그는 이 초가에 ‘계정’(溪亭)이라 이름을 붙였다. 중앙정치의 꿍꿍이와 아귀다툼에 밀려 한미한 신세가 될 때면 낙향해 이 오두막에 머물렀다.
작고 초라한 계정은 인테리어 하나 없으나 아름답다. 잎이며 꽃이며 군더더기 다 털어내고 본질만으로 존재하는 한 그루 겨울 나목처럼 개결하다. 비우고 또 비웠으니 득도에 가까이 간 정자다.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난 옛사람의 자유로운 정신을 이 집에서 보지 않고 무엇을 더 볼 것인가. 정가의 이전투구에서 패퇴한 사대부들은 흔히 번듯한 원림(園林)을 지어 경영하며 울분을 달랬다. 정경세는 달랐다. 그의 내부는 이미 넓어 보잘것없는 초소형 정자에서도 활달하게 노닐었다. 겨우 나뭇가지 하나를 침상으로 삼아 발톱으로 움켜쥐고 밤을 보내는 산새들의 생태와 유유상종하며 허름한 초가를 우주처럼 크넓게 썼을 게 아닌가.
계정 옆댕이엔 대산루(對山樓)가 있다. 2층짜리 조선 전통한옥을 본 적 있는가? 우리의 옛집은 왜 다들 단층이냐고 섭섭해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라면 2층으로 지어진 대산루를 찾아볼 일이다.
한옥으로선 이례적인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一’자형 1층 위에 정면 2칸, 측면 5칸의 ‘l’자형 2층 누각을 올려 전체적으로는 ‘ㅓ’자형을 이루고 있다. 예사 건축 구성이 아니다. 아마도 당대의 첨단 테크놀로지를 동원했을 테다. 2층 누각에 온돌방을 설치한 데에서도 대단한 창의적 발상으로 지어진 집임이 확인된다. 2층 하부에 벽을 치고 흙을 채워 인공지반을 확보한 뒤 구들과 고래, 아궁이를 설치해 온돌방을 만든 것이다.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을 사각 돌덩이들로 조성한 점도 이채롭다. 왜 그랬는지 딱히 밝혀진 건 없다. 누각 마룻장에 빠끔하게 뚫어둔 구멍 하나도 요상하다. 용변을 보거나 청소를 위한 배출구라는 설이 있으나, 여하튼 익살스럽다. 1층 계단 쪽 회벽엔 ‘工’(공)자 문양들을 또렷하게 새겨 넣었다. 이건 누각의 풍류를 즐기되 공부에도 열을 내라는 뜻? 공부에 미치되 설 미쳐서야 푼수밖에 될 게 없다. 깨달음을 좇는 게 선비들의 공부였으니 산수 간에 앉아서도 궁구(窮究)를 일삼았다.
대산루 자리엔 원래 정경세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학당 건물이 있었다. 그걸 6대 후손 정종로(鄭宗魯, 1738~1816)가 새롭게 지어 대산루라 했다. 정경세 생시의 학당 모습을 볼 수 없어 실로 아쉽다. 그러나 대산루의 형상과 디테일이 매우 기발해 기분을 돋우기엔 부족함이 없다.
계정도 대산루도 고귀하지만, 정경세가 늘 바라보았을 물가 풍경도 내 눈엔 절경이다. 화려하지 않으나 정겹고, 웅장할 거 없으나 섬려하다. 옛사람의 꿈과 상상이 저 산수와 함께 무르익었을 게다. 예학(禮學)의 대가였던 정경세는 ‘섬김’의 도리를 실천, 타자를 가슴속에 들여놓는 일을 본분으로 삼았다. 사설 병원 존애원(存愛院)을 세워 백성들을 무료 진료하기도 했다. 정경세의 말년은 곤궁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랑곳없었다. 적게 먹고 끝내 담백하게 살았다. 가난을 가난으로 느끼지 않았으니 무소유의 본이다. 비범한 한 생애였구나.
답사 Tip
경북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있다. 우복종택(국가민속문화재 제296호) 공터에 주차하고 종택과 계정, 대산루 순으로 답사한다. 종택 들머리엔 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국도를 벗어나 냇물 따라 이어지는 소로로 접어들자 풍경이 환하다. 물은 맑고, 물가 바위는 훤칠하다. 마을 동구, 냇가의 느티나무들은 또 어떻고? 늙었으나 우람하고 당당하다. 느티나무 아래로 흐르는 냇물은 연둣빛으로 순정하다. 경북 영양군 입암면 연당마을이다. 마을의 집들은 검정 기와를 올린 개량한옥 일색이어서 차분하다. 서석지(瑞石池)는 마을 한복판에 있다.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정과 함께 ‘조선의 3대 원림’이라 소문나면서 서석지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엄청 늘어났다.
나직한 대문을 통해 서석지로 들어서자 이제 조선이다. 조선 시대의 건축과 연못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시간을 초월한 공간이다. 보수가 잦았으나 원형을 훼손하진 않았다. 조선 광해군 때의 선비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이 조성했다.
서석지는 이곳의 연못 이름이지만, 담장 내부의 별서 공간을 통틀어 서석지라 부른다. 자연을 바라보는 산림선비들의 눈엔 경계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풍치를 내 것으로 삼았다. 정영방이 그랬다. 그는 서석지를 내원으로, 주변 일대의 산천경개를 외원으로 간주했다. 자연을 무한풍류의 대상으로 관조한 선비들이었으니 하늘의 달과 별빛인들 나의 것이 아닐 리 있으랴. 또 그들에겐 자연이 경전(輕典)이었다. 수신(修身) 교과서였다. 담벼락으로 내·외부를 가를 일이 아니었다.
정영방은 매우 신중한 캐릭터의 소유자? 그는 10여 년에 걸쳐 서석지를 구상했다. 이후 완성까지는 다시 17년이 걸렸다지? 풍수지리에 밝았던 그는 주변 산수의 형국을 면밀히 고려해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었다. 정자의 이름은 경정(敬亭)이다. 경(敬)! ‘섬김’이다. 매사 예를 다해 삼가고 섬기는 게 성리학자의 본분이자 이상이었다. 정영방은 퇴계학파의 문인. 정자를 짓더라도 분수에 넘쳐 도학자의 체통을 스스로 구기는 일을 할 리 없는 인물이었다. 정자보다 서재인 주일재(主一齋)를 먼저 지은 데에서 그의 됨됨이가 읽힌다. 음풍영월을 즐길 정자를 지을지라도 일단 공부부터 해두자! 그런 뜻으로 공부방부터 지었던 게 아닐까.
정영방이 한층 심혈을 기울인 건 연못이다. 터의 대부분을 연못 공간으로 활용했다. 조선의 연못은 네모꼴이 일반적이다. 서석지 역시 네모 모양이다. 괜히 네모가 아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로 본 성리학적 자연관을 적용했다. 연못의 물은 동북쪽 귀퉁이에서 들어와 서남쪽으로 나간다. 이 수로의 방위 역시 조선 연못들이 공통으로 지닌 특징이다. 풍수를 중시했던 옛사람들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물을 역수(逆水)로 봐 배제했던 거다. 이래저래 서석지는 전형적인 조선 연못이다.
그런데 서석지엔 특별한 게 있다. 연못에 있는 90여 개의 크고 작은 돌들이 그렇다. 정영방은 못을 팔 때 나온 이 바윗돌들 일부에 이름을 붙였다. 생김새에 맞춰 물상의 이름을 주기도 했고, 도학의 이상세계를 표현해 명명하기도 했다. 이 명명보다 흥미로운 건 돌들과 못물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미감이다. 정영방은 ‘돌엔 문기(文氣)가 있다’고 했다. ‘숨어 사는 군자를 닮았다’고도 했다. 돌을 동행할 만한 벗으로 삼았던 셈이다.
경정은 규모가 꽤 큰 정자다. 6칸 대청마루에 올라 내려다보는 연못 경관이 압권이다. 연꽃들 소담히 피어오르는 계절엔 아찔하리라. 꽃에 마음을 두고 은거의 고독과 허기를 달랬으리라. 그런데 성리학자의 유토피아를 상징적으로 구현한 게 원림이요 연못이라지만, 오직 은둔을 일삼노라면 삶이 맨송맨송해지니 유토피아고 뭐고 별 의미 없어진다. 허세꾼의 여흥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럼 무엇으로 허기진 마음을 채우나? 정영방에겐 공부가 처방이었다. 서재 주일재에 틀어박히는 날이 많았다. 서재 앞에는 소나무와 대나무 등 고상한 것들을 심어 족집게 레슨 교사로 삼았다. 아예 연꽃이 보이지 않도록 나무들로 못을 가린 건 독공(獨工)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였을 테다.
정영방은 진사시에 붙었으나 한 번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렇다 할 취직한 적 없이 살았다. 조선 양반들이야말로 ‘금수저’의 레전드였으니 요상할 거 없다. 밥벌이 걱정 없이 그저 무욕을 길잡이로 삼아 노닐 것 다 노닐되 공부에도 부끄럽지 않게끔 열을 내는 사람이라면, 그는 인생 최고봉에 오른 게 아닐까. 백수도 이쯤이면 진흙을 딛고 올라온 연꽃에 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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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지가 있는 연당마을은 운치 있는 전통 마을이다. 돌담길 따라 한 바퀴 돌아볼 만하다. 아랫마을엔 정영방의 후손이 지은 양반 가옥 태화고택이 있다. 서석지 들머리에 있는 천변의 바위벼랑 석문(石門)도 빼어나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괜찮다. 이제 신종 코로나 팬데믹은 일상 속에서 즐겨볼 수 있는 여행으로 돌파구를 찾는다. 일상 속 여행. 홀로이 걸어서 다녀오기, 또는 자전거나 자동차로 한두 시간 내에 돌아올 수 있는 일종의 근교 여행, 마이크로 투어리즘이 대세인 요즘이다. 마이크로 투어라는 산뜻한 형태로 가뿐하게 즐길 수 있으니 나서는 기분도 가볍다.
이제 3월이다. 3.1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막상 천안의 독립기념관도 함께 떠올려 보지만 선뜻 나서지 못한다. 늘 그래 왔다. 언제든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거리가 멀다고 핑계 댔고 도로가 막힌다는 이유도 있었고 볼거리가 더 많은 곳이 있다 해서 밀려나기도 했었다.
독일 베를린 여행 중에 브란덴부르크 남단의 숲 쪽 방향의 추모공원 홀로코스트에 들른 적이 있다.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고 자신들의 역사적 과오를 드러내며 오늘을 사는 그들의 자세가 신뢰를 갖게 했다. 그래서 독일의 현재가 있음을 느끼게 했던 곳이었다. 역사 왜곡에 안간힘을 다하는 일본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렇게 역사를 잊지 않고 개방하여 널리 알리는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Holocaust Memorial)까지 가보았으면서 가끔씩 이렇게 눈앞의 것을 무심히 지나치곤 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역사적 사실과 그 정신을 가끔씩이라도 기려볼 일이었다.
독립기념관은 천안의 목천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서울과 수도권을 기준으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만 달리면 김포에도 독립운동기념관이 있어서 가까이서 쉽게 그 의미를 돌아볼 수 있다. 물론 규모는 많이 다르다. 그뿐 아니다. 독립만세를 불렀던 천안의 아우내 장터와 같은 김포 오라니 장터에 만세운동의 현장이 있다. 경서 지방의 대표적인 장터였던 김포 양촌리의 오라니 장터와 월곶면 군하리 장터에서 3.1 만세운동을 조직적으로 벌였다는 사실도 새롭다.
시절 탓인지 독립운동기념관은 한적하다. 전시장 입구에서 맞아주는 멋진 영상의 선명한 태극기가 반갑다. 부모님과 함께 온 어린이와 전시실을 묵묵히 오가는 어르신이 눈에 들어온다. 만세운동을 재현한 미니어처와 캐릭터들이 첨단의 세상에 사는 이들에게 지루함을 덜어준다.
독립운동기념관 건물은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획전시실, 사료열람실, 영상실, 로비, 상설전시실로 구성되었다. 잊고 살았던 시간을 재조명해 볼 기회다. 2층의 청소년 문화의 집이나 북카페 등은 코로나의 현실로 지금은 열리지 않지만 1층의 전시실만으로도 볼거리가 쏠쏠하다.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3.1 운동 이야기는 물론이고, 김포지역에서의 3.1 만세운동과 항일의병활동, 그 배경과 특징, 발발 과정을 음성이 포함된 영상과 함께 자세하게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김포는 독립운동가와 항일의병들이 유난히 많았다. 그리고 김포 전 지역에서 주민들의 3.1 만세운동이 전개될 만큼 큰 규모로 투쟁했던 유서 깊은 고장이기도 하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약 2천만 명이었는데 3.1 독립운동 참여 인원이 2백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일제의 총칼 앞에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댔던 순박했던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비폭력 저항의 모습에 가슴 뭉클해진다.
이 모든 역사의 흔적들이 성실히 모아졌다. 당시 일본군들의 야만적이고도 처참한 만행을 볼 수 있고 독립군들의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장을 한 바퀴만 돌아도 당시의 독립을 향한 열망이 전해진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멋지게 조성해 놓은 기념관이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음을 모르고 지냈다니 이런 무심함이 어디 이뿐일까만.
독립의 함성이 느껴지는 전시물을 감상하다 보면 나라를 구하기 위한 그분들의 아픈 과거가 눈앞에 생생히 그려진다. 특히 1910년 안중근 의사가 32세 나이로 뤼순감옥에서 사형집행을 앞두고 받은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글 앞에서는 심장이 멈추는 듯하다.
“나라를 위한 죽음이라면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벌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글이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서신이 될 것이다. 여기 너의 수의를 보내니 이 옷을 입고 잘 가거라. 이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서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서서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고 있겠지만 이런 기념관 관람만으로도 잊고 지냈던 시간을 되짚어 만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덕분에 저절로 호국과 애국의 DNA를 되살려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기획전시실은 매 주기마다 다양한 주제로 기획전시를 열고 있다. 3.1 만세운동의 태극기 물결을 떠올리게 하는 전시장이다. 독립의 역사를 쉽게 이해하며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결집력을 보여준 태극기의 다양함이 펼쳐진다.
‘역사가 담긴 태극기’ 전의 기획전시실이었다. 태극기의 상징성과 태극문양의 의미, 독립운동의 간절함을 담은 김구 서명문 태극기와 태극기 목판 등 저마다의 의미가 담긴 태극기들, 역사와 용도가 다양한 태극기의 면면을 알아가는 게 새롭고 흥미롭다. 한 점 한 점 아프고 묵직한 의미를 담은 태극기들과의 조우가 독립을 향한 당시 우리 국민들의 3.1 운동 정신을 절절히 전한다.
기념관 주변 언덕 위로 조성된 공원이 다시 찾은 평화로움을 대신하는 듯하다. 산책하듯 걸으며 3.1 운동 기념비와 위령탑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쳐 나라를 지키려고 항거했던 이들을 비로소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기념관은 소박하지만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 속에 슬프고 안타까운 사연들이 가득하다.
기념관 가까이에 있는 오라니 장터에서는 해마다 가을이면 축제가 열린다. 그 날의 함성을 떠올리며 3.1 만세운동 퍼레이드를 하고 다채로운 행사를 한다. 그렇게 3.1 운동 100년의 기억을 되살린다. 살면서 가끔씩 잊고 지냈던 것을 모두 함께 되짚어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김포의 독립운동기념관과 주변으로는 산성이나 돈대, 다양한 갤러리와 문화시설이 포진해 있다. 봄 햇살이 따사로워지면 소풍삼아 찾아볼만 하다. 조용한 하루나들이 코스로, 역사여행으로 의미 있음을 알아차렸다면 가볍게 나서보아도 좋을 듯. 한나절이면 된다.
주변 볼거리
김포 아트빌리지 아트센터 & 김포 인삼쌀맥주 갤러리
백제 고대국가의 시원(始原)으로 추측하는 김포 모담산 운양동 자락에 위치한 김포 아트빌리지, 그곳에 수준 높은 전시를 볼 수 있는 아트센터가 있다. 쾌적하고 모던한 현대식 예술공간에서 감상하는 예술가들의 작품 전시 공간이 고퀄리티다. 훌쩍 떠나온 하루 외출에서 품격 있는 시간 획득이다.
아트센터 앞의 너른 야외 공간과 전통놀이체험마당, 주변의 전통한옥 숙박시설, 맛집 등 누구나 언제라도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용요금 무료, 주차무료.
품질 좋은 쌀과 인삼의 특산지인 김포, 김포의 6년근 인삼과 김포쌀로 빚은 인삼쌀맥주와 인삼 전시장도 둘러볼만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가장 행복한 하루였다. 거리에 노란 은행나무 잎이 수북하게 쌓인 가을 인사동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한국으로 돌아왔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덕수궁 돌담길, 인사동, 삼청동, 남산 가리지 않고 걸어 다녔던 내 젊은 시절의 거리들이 오늘 하루 종일 행복 세포를 일깨우며 알알이 기억을 일깨웠다. 늦은 밤까지 스산한 거리를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따스한 차 한 잔 앞에 놓고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의 ‘재클린의 눈물’(Les Larmes de Jacqueline: Jacqueline’s Tear)을 듣고 있다.
유독 가을이 좋다. 형형색색 화려한 옷을 갈아입은 자연을 보는 순간만큼은 걱정도 괴로움도 모두 사라진다. 그래서 가을만 되면 더 흐느적흐느적 돌아다니고 싶다.
얼마 전 공주에 갔다가 서울로 올라오다 문득 마곡사 표지판을 보는 순간 그곳의 가을을 보고 싶어 운전대를 돌렸다. 지난해 겨울바람 불던 어느 날, 마곡사 대웅전 옆 돌계단 위에 가만히 앉아 바람에 부딪혀 ‘찰랑찰랑’거리던 풍경소리가 갑자기 듣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풍경소리를 듣는 순간 ‘지금 이 순간이 그대로 정지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이 적막함과 평안함도 그대로 말이다. 오래된 사찰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내 취미의 시작은 아마도 산사의 풍경소리에 매혹됐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산사의 풍경소리가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면, 화려한 연등은 의외로 흥을 돋운다. 적막함 속 고요한 산사와 언뜻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고색창연한 기와에 화려한 연등은 안 어울리는 듯 어울리며 품격을 더해준다.
그래서 삶에 지친 이들이 산사에 가면 위안과 평안함을 얻고 그곳에서 잠시 평화를 얻은 후 돌아갈 곳에서의 인연을 생각하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찾은 마곡사는 역시나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품위 있고 격조 있는 마곡사의 가을 사진을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워낙 전통 있는 사찰이라 많이들 알겠지만 마곡사는 백범 김구 선생이 한때 출가해 승려 생활을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6년 일본군 중좌를 살해해 교도소에서 사형수로 복역 중 탈옥하여 1898년 마곡사에서 은신하다 하은당 스님 제자로 출가해 원종이란 법명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백범 김구 선생이 묵었던 전각은 ‘백범당’이라 불리고 있다. 백범당 바로 옆에는 김구 선생이 해방 직후인 1946년, 50여 년 만에 다시 마곡사를 찾아, 독립운동을 함께한 동지들과 기념식수를 한 향나무가 파랗게 자라고 있다.
당시 김구 선생은 마곡사의 대법당인 대광보전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주련은 사찰이나 서원 또는 한옥의 기둥이나 바람벽 등에 장식으로 붙이는 글씨를 말하는데 이 기둥에 시구를 걸었다는 뜻에서 주련이라고 부른다. 불교사, 서예사, 미술사적으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산사에서는 주로 부처님의 말씀이나 고승들의 말씀 등을 적어 걸어놓는다.
마곡사에 가면 대법당 대광보전 주련에서 이 문구를 한번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듯싶다. 김구 선생이 감개무량했다는 주련 문구가 마곡사 표지판에 소개돼 있다.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 (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구나
발걸음 닿는 곳 구석구석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이 땅. 한국의 가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이 지겨운 이, 오늘 당장 노란 은행잎, 빨간 단풍잎을 사각사각 밟아보자. 가을을 품에 가득 안는 것으로도 이렇게 행복한 날, 우리 인생의 앞날에 그 무엇이 무서울까? 무서울 게 없다.
바람이 서늘해지자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건 인지상정인가보다. 지인들과 서울 곰탕 맛집 정보를 공유하다 멀리 나주곰탕 이야기로 흘렀다. 꿀꺽 군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주곰탕, 돼지국밥처럼 향토색 강한 음식은 타지역에서 먹으면 왠지 그 맛이 안 난다. 곰탕 먹으러 나주에 갈 거라는 내 말에 지인들이 숟가락을 얹었다. “나주곰탕 포장 부탁해.” 말은 이래도 그들도 안다. 나주곰탕은 나주에서 먹어야 제맛인 것을.
3味로는 부족한 맛의 고장
나주가 호남 물류 중심지였던 호시절이 있다. 영산강 유역의 비옥한 나주평야와 뱃길 교통이 편리한 영산강을 품은 지리적 여건 덕이었다. 100여 년 전 영산강 나루터에는 특산물과 산해진미가 넘쳐났다. 사람이 몰려드는 만큼 음식문화가 발달했다. 그 문화가 ‘나주 3味’라 불리는 ‘나주곰탕’, ‘영산포 홍어’, ‘구진포 장어’로 이어졌다.
나주곰탕은 우시장에서 나오는 머리 고기와 뼈, 내장 등을 푹 고아낸 장터국밥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예부터 조선시대 관아인 금성관 앞에 큰 장이 섰다는데,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상인과 구경꾼들이 밥에 고깃국을 말아 후루룩 먹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군납용 소고기 통조림 공장에서 나온 소 부산물로 국을 끓인 것이 나주곰탕의 시초라는 설도 있다. 시초가 무엇이든 맛있는 곰탕을 지금 시대에도 맛볼 수 있으니, 식탐 많은 나 같은 여행자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나주 사는 지인이 “나주에 오면 곰탕보다 홍어를 먹어야죠” 하며 홍어 자부심을 드러냈다. 물론이다. 나주 3味에 연탄돼지불고기까지 야무지게 맛볼 생각이었다.
나주 여행의 시작은 곰탕으로
서울에서 아침 일찍 나주행 KTX를 타면 아침 식사로 곰탕을 먹을 수 있다. 나주역에서 구도심의 나주곰탕거리까지는 차로 약 5분 거리다. 많은 곰탕집 중에서 주로 가는 곳이 하얀집, 노안집, 남평할매집이다. 하얀집은 개업한 지 110년이나 되었고, 노안집과 남평할매집은 60년 정도 되었다. 동네 주민에게 최고 맛집을 물어도 똑 부러진 대답을 듣기 어렵다. “어느 집에서 먹어도 맛있어요. 다만, 식당마다 맛이 조금씩 달라요. 서울 사람이 좋아하는 식당이 있고, 나주 사람이 좋아하는 식당이 있어요” 한다. 결국 직접 맛을 보고 비교할 수밖에 없다.
나주곰탕은 설렁탕과 달리 국물 색이 맑다. 나주곰탕과 설렁탕 모두 소뼈와 고기를 푹 고아내는 방식은 같지만, 나주곰탕은 소뼈를 적게 넣고 양지나 사태로 육수를 내기 때문이다. 밥은 말아져 나온다. 밥이 담긴 뚝배기에 가마솥에서 펄펄 끓은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몇 차례 토렴한다. 밥알에 짭조름한 간이 배고, 뚝배기가 뜨끈해지면 살코기, 달걀지단, 대파를 올려 손님상에 낸다.
곰탕 맛은 국물 빛깔처럼 맑고 개운하다. 다진 양념을 풀면 칼칼해진다. 숭덩숭덩 썰어 넣은 고기는 새콤달콤한 초고추장 양념장에 찍어 먹으면 더 맛있다. 곰탕 맛을 북돋는 김치도 중요하다. 숟가락 위에 밥, 고기, 잘 익은 배추김치 또는 깍두기를 올려 먹어야 제대로 먹은 것 같다. 노안집의 배추김치는 감칠맛과 시원한 뒷맛이 일품이다. 사장에게 비결을 물었다. “김치 담글 때 여러 가지를 섞은 잡젓을 넣어요. 봄배추를 싹둑싹둑 썰어서 잘 익힌 김치가 최고 맛있지요. 봄에 또 오세요.”
곰탕 먹고 나주읍성 산책
곰탕거리 일대에는 고려시대 초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호남의 중심지였던 ‘나주목’의 사적지들이 모여 있다. 조선시대 객사이자 나주목의 중심 관청이었던 금성관, 나주 관아의 정문 정수루, 나주목을 다스렸던 목사들의 살림집 목사내아, 고려시대 때 세운 나주향교 등을 걸어서 둘러볼 수 있다. 왜구 방어를 위해 축조한 고려시대 읍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성문과 성곽이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1993년부터 나주읍성 사대문 복원 사업을 추진, 2018년 완공해 나주읍성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최근 나주향교 옆에 ‘39-17마중’이 들어서 구도심에 활기를 더한다. 39-17마중은 카페&와인바, 게스트하우스, 공연장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다. 이곳은 원래 나주 의병장 난파 정석진의 손자 정덕중이 1939년에 어머니를 위해 지은 난파 고택이었다.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이 집을 한 젊은 부부가 매입해 ‘1939년의 근대문화를 2017년에 마중하다’라는 뜻을 지닌 39-17마중을 조성한 것이다. 부부의 눈에는 한·일·양의 건축 양식이 결합한 근대 건축물과 마당의 아름드리 금목서가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고 한다. 영화 세트장 같은 난파 고택은 게스트하우스로, 마당의 큰 창고는 벽면을 통유리로 마감한 카페로 탈바꿈해 손님을 맞는다. 향교 담장이 카페 창가에 앉아 나주산 농산물로 만든 음료를 마시노라면 진짜 나주 여행하는 것 같다.
홍어 튀김 먹을 줄 알아야 홍어 고수
“홍어앳국 드셨나봐요.” 택시기사가 딱 알아본다. 홍어앳국 첫 경험을 이야기하자 “제대로 만든 홍어앳국을 드셨네요. 홍어 숙성도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데 손님이 드신 앳국이 가장 많이 삭힌 등급 같아요. 나주 사람들은 그 정도 삭힌 걸 좋아해요. 앳국에는 4~5월에 나는 여린 보리 순을 넣어야 제맛이 나죠”라며 거든다.
홍어앳국은 홍어 뼈 육수에 된장을 풀고, 삭힌 홍어 내장과 보리 순을 넣어 얼큰하게 끓인다. 홍어 애는 홍어 간이다. 생 홍어 애는 연두부처럼 부드럽고 고소해 기름장에 찍어 먹는다. 삭힌 홍어 애를 넣은 홍어앳국은 암모니아 향이 매우 강하다. 알싸한 냄새에 막혔던 코가 뻥 뚫린다. 처음에는 냄새 때문에 먹기 힘들지만 후각이 조금 마비되면 얼큰하고 구수한 맛이 느껴진다.
삭힌 홍어가 나주의 별미가 된 사연은 이러하다. 고려시대 말 공민왕 때 왜구 침략을 피하고자 흑산도 사람들을 나주 영산포로 이주시킨 적이 있다. 흑산도 사람들이 생선을 잡아 배에 싣고 며칠 동안 나주로 건너오는 사이 생선들이 상하고 말았다. 그런데 상한 생선을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고 맛있는 생선은 홍어뿐이었다고 한다. 그 뒤로 영산포에 정착한 사람들이 홍어를 삭혀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영산포는 곰탕거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영산포 선창가에 40여 개의 홍어 식당과 홍어 판매장이 자리해 있다. 거리에서부터 홍어 삭히는 냄새가 풍긴다. 홍어요리 전문점에서 홍어정식을 주문하면 홍어삼합, 홍어튀김, 홍어무침, 홍어찜, 홍어전 등이 한 상 차려진다. 삭힌 홍어는 열을 가할수록 향이 강해지므로 차가운 음식부터 나온다. 홍어무침, 홍어삼합, 홍어전, 홍어찜, 홍어앳국, 홍어튀김 순으로 먹어야 삭힌 홍어 맛에 차차 적응할 수 있다. 마지막에 등장한 홍어튀김은 홍어 고수라고 자부했던 내게 굴욕감을 안겼다. 한입 먹었을 뿐인데 입천장이 까져 젓가락을 내려놓아야 했다.
사심 가득한 나주 4味 연탄돼지불고기
영산포 선창가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구진포 장어거리가 있다. 1981년 영산강 하굿둑이 생기기 전에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던 곳이라 민물장어가 흔했다. 당시에는 장어 식당 열댓 채가 성업했다. 지금은 다섯 채 정도만 남아 장어거리의 명맥을 유지한다. 구진포 장어 원조집으로 알려진 신흥장어도 이제는 타지역 장어를 사용하지만, 오랜 내력의 깊은 손맛은 여전해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나주 3味에 별미 하나를 추가한다면 송현불고기집의 연탄돼지불고기를 손꼽는다. 외지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오래된 맛집이다. 8년 전 송현불고기집에 처음 갔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길가 허름한 식당 안에 손님이 많아 놀랐고, 주인이 연탄불 앞에 앉아 석쇠 위 삼겹살을 쉴 새 없이 굽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번듯한 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고기 맛이 바뀌었을까봐 걱정했는데, 고기 표면에 기름이 번드르르하고, 달고 짭조름한 맛은 그대로다. 가위로 고기를 직접 잘라 먹어야 하는 번거로움은 맛으로 상쇄하고도 남는다. 싼값에 배불리 한 끼 먹었으니 가성비와 가심비를 다 잡았다.
◇ 이색 명소 & 맛집 ◇
나주목사내아(금학헌) 목사내아는 조선시대 나주목 최고 수장인 목사의 살림집이다. 건물 이름이 금학헌이다. 1825년에 건립된 ‘ㄷ’자형 전통한옥으로서 내아 1동과 행랑채 1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사 의복 무료체험과 한옥 숙박체험을 할 수 있다. 성정을 베푼 목사들의 이름을 딴 온돌방에는 옛집에 걸맞은 전통가구와 침구가 갖춰져 있다. 나주시에서 운영해 숙박료가 저렴한 편이다. 나주시 금성관길 13-8, 09:00~18:00 관람료 무료, 061-332-6565
영산강 황포돛배와 영산포등대 영산강 하굿둑이 생기면서 농수산물을 실어 나르던 황포돛배가 사라졌다가 30여 년 만에 관광용으로 부활했다. 영산포 선착장을 출발해 다시면 회진리 천연염색문화관 앞 풍호나루터까지 약 5km 구간을 왕복 운항한다. 영산포등대는 내륙 하천에 남아 있는 유일한 등대다. 지금은 등대 기능을 상실했지만, 밤마다 불을 밝혀 옛 추억을 되살려준다. 나주시 등대길 80, 10:00~17:00 월요일 휴무, 영산포 선착장 매표소 061-332-1755
전라남도 산림자원연구소와 도래한옥마을 산포수목원으로 더 잘 알려진 이곳에는 명품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있다. 수목원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풍산 홍 씨 집성촌인 도래한옥마을도 둘러볼 만하다.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홍기응 가옥과 홍기헌 가옥, 한국 내셔널트러스트의 시민유산 제4호로 선정된 도래마을옛집 등 조선시대 양반집이 많다. 나주시 산포면 산제리 산23-7, 09:00~17:00 입장료 무료, 061-336-6300
백제고도 부여에는 백제의 찬란한 문화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한편으로는 백제 유적지 말고는 이렇다 할 관광 콘텐츠가 없어 아쉬웠다. 2년 전 규암면 규암리 자온로에 ‘자온길 프로젝트’라는 마을재생사업이 진행 중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그 첫 단추가 독립서점 ‘책방세간’이었다. 호기심을 안고 찾아간 시골 책방은 꽤 신선했다. 지금 그 마을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 다시 가봤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을 재생 프로젝트
부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백마강을 건너 규암리로 향했다. 시내에서 차로 고작 5분 정도 떨어진 마을인데 딴 세상인 듯 고요하다. 규암 나루터 인근 골목에서 ‘책방세간’을 다시 만났다. 2년 전 모습 그대로 있어주어 고마웠다. 시골에서 책방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 책방 주인도 그런 사정을 잘 알 텐데, 이곳에 책방을 연 이유가 궁금했다.
자온길 프로젝트를 총괄 기획하고 진행하는 박경아 씨는 “부여에 제대로 된 서점이 없어요. 규암리에 가장 필요한 문화공간이 책방이라고 생각했어요. 책방세간이 전통문화를 알리고, 책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했다. 그가 시골집에 책방을 차린 사연은 규암리의 전성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규암리는 해방 전후만 해도 200여 가구가 살았던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1930년대 규암장터가 열리면서 규암나루터에 배가 무시로 드나들었다. 마을 거리에는 선술집과 여관이 즐비했다. 극장과 백화점도 있었다. 규암리의 전성기는 1968년 백제교가 놓이면서 막을 내렸다. 육상 교통이 발달하면서 나루터가 제구실을 못하게 됐다. 상권은 부여읍으로 옮겨갔고, 사람들은 마을을 떠났다. 붐비던 장터 국밥집, 부여에 처음 세워진 극장, 양조장 등이 폐허가 되었다. 집주인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빈집도 늘어갔다.
약 20여 년 전 부여전통문화대학교 재학생이었던 박 대표가 규암리의 방치된 근대건축물들을 눈여겨본 것이 자온길 프로젝트의 바탕이 됐다. 자온길 프로젝트는 규암면의 버려진 공간들을 개조해 전통문화 예술마을로 꾸미는 마을재생사업이다. 빈집과 상가들이 차근차근 전통공예 작가의 작업실과 쇼룸, 로컬푸드 레스토랑, 카페, 책방, 한옥 스테이, 북 스테이 등의 문화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구심점이 책방세간이다.
임 씨네 담배 가게가 책방이 된 사연
책방세간은 원래 ‘임 씨네 담배 가게’로 불렸다. 담배와 잡화를 팔던 가게와 살림집이 붙어 있는 건물이었다. 책방으로 개조할 때 외벽과 내부 구조물을 최대한 헐지 않았다. 천장 위에 숨어 있던 서까래와 내벽 속 나무 문을 찾아내 복원했다. 임 씨가 잡화를 팔던 공간은 책방세간의 메인 공간이 되었다. 담배를 팔던 옆 공간에는 책장과 테이블을 두었다. 책장은 사실 담배 진열장이다. 벽면에 은박 벽지를 발라 담배 속지를 표현한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카운터는 지붕을 덮었던 함석판과 담배 가게의 금고로 꾸몄다.
임 씨 가족의 거주 공간은 카페로 개조했다. 벽장이 있는 작은 방에는 동화책과 전통 놀이 도구를 넣어 키즈존을 만들었다. 이 방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데 시골집에서 볼 수 있는 구조다. 구석진 곳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벽장에 숨어 책을 읽는다.
책방세간만의 특징이라면 전통공예가 대중의 일상에 시나브로 스며들길 바라는 책방지기의 마음이 책방 구석구석에 표현돼 있다는 것이다. 공예·디자인 서적의 비중이 높으며, 책과 전통공예품을 함께 배치해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청자 잔에 말차라떼 주세요”
책방세간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전통공예품 숍 ‘편지’가 문을 열었다. 우체국이었다가 전파사로 사용됐던 건물을 고쳐 생활소품, 의류, 생활도자기 전시·판매장으로 사용한다. 도자기 판매장 유리창에 붙은 ‘전파사’ 글자가 그 흔적이다. 삼각 지붕을 얹은 회벽 건물은 단박에 적산가옥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규암리에는 일본이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빼앗기 위해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부여지소가 있었다. 일본인들이 수탈한 쌀을 규암나루터에서 배에 싣고 백마강을 건넜다고 한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편지’를 에워싼 아름드리 밤나무, 보리수나무, 향나무는 싱그럽게 자랐다.
카페 수월옥의 사연도 만만찮다. ‘빼어난 달’이란 뜻을 지닌 수월옥은 술과 음식을 팔던 요정이었다. 한 세대를 건너 카페 수월옥으로 다시 태어났다. 폐가와 다름없던 건물이 부여 핫 플레이스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마을 주민들은 공사를 하다 만 것 같은 건물에 손님들이 많으니 신기해한다. 수월옥은 건물이 두 채인데 한 채는 내벽 콘크리트를 드러내 모던한 분위기를 살렸고, 한 채는 한옥 느낌을 살려 좌식으로 꾸몄다. 분위기는 다르지만, 가구와 소품은 색동무늬 방석, 소반, 골무, 도자기 등의 전통공예품을 사용했다.
수월옥은 차 주문법도 독특하다. 선반에 놓인 청자, 백자, 진사, 분청사기 등의 찻잔을 고를 수 있다. “청자 잔에 말차라떼 주세요” 하고 주문하니 바리스타가 말차라떼 빛깔과 비슷한 청자 잔에 차를 내준다. 꽃봉오리 모양 청자 잔과 말차라떼의 조화가 찰떡궁합이다. 수월옥은 SNS 사진 맛집으로 소문났지만, 사실 차 맛집이었다.
활기를 되찾는 규암리
옛날 국밥집은 ‘웃집’이라는 이름의 독채 숙소가 되었다. 전통공예품 쇼룸과 숙소가 결합한 형태로 꾸며졌다. 한옥스테이 이안당은 일본식 건축 양식을 접목한 100년 된 근대 한옥이다. 옛 자온양조장 건물에 딸린 살림집으로, 이 마을에서 가장 부잣집이었다고 한다. 너른 마당에는 깊은 우물이 있고, 마당에서 양조장 굴뚝이 보인다. 주인이 사용했던 자개장, 경대, 항아리, 도자기 등의 세간살이가 세월을 안은 채 그대로 있다.
오래된 건물은 고쳐 사용하는 것보다 부수고 다시 짓는 게 수월하다고 한다. 박경아 씨에게 도시 재생 방식을 선택한 이유를 물었다.
“옛집을 허물고 똑같이 다시 짓는다고 해도 그 옛집이 아니잖아요. 세월을 재현할 수 있나요. 문화재를 똑같이 만들 수 없듯 옛집도 그런 것 같아요. 비록 문화재적 가치가 낮은 서민들의 근대 가옥이라도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모두 역사이니까요.”
자온로를 산책하며 옛것의 가치와 도시 재생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도시 재생은 죽어가는 건물에 심폐소생술을 실시해 생명을 이어주는 작업이 아닐까. 쇠락했던 규암리가 사람들의 온기로 다시 따듯해지길 기대해본다.
◇ 이색 명소 & 맛집 ◇
궁남지 궁남지(사적 제135호)는 1400여 년 전인 백제 무왕 때 조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다. 연못 둘레에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중앙에 신선이 노니는 산을 형상한 섬을 만들어 왕궁의 정원으로 삼았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궁남지는 무왕의 잉태지였다. 여름에는 연꽃이 가득 핀 풍경이 장관이며, 야간산책 명소로도 유명하다. 연못 중앙의 정자와 다리에 조명을 켜놓는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4시간 개방, 입장료 무료.
부여서고 책방세간 바로 옆에 있는 수공예품 편집숍이다. 책방처럼 여러 나라의 문화와 예술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하여 ‘부여서고’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동남아에서 수입한 라탄소품, 가방, 모자, 의류, 머플러, 도마, 문구, 조명 등의 생활 잡화와 천연염색 소품을 판다. 우리나라 작가가 만든 상품도 있다. 다양하고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충남 부여군 규암면 자온로 84
장원막국수 구드래나루터 근처에 있는 오래된 가게다. 허름한 시골집의 작은 방에 앉아 막국수를 먹노라면 할머니 댁에 놀러온 듯하다. 메뉴는 메밀막국수와 편육 두 가지뿐이다. 메밀막국수 면발은 조금 가늘고 쫄깃하다. 시원한 육수는 새콤달콤한 편이다. 돼지 목삼겹살로 만든 편육에 막국수를 감아 먹어보길 권한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나루터로62번길 20, 11:00~17:00, 메밀막국수 7000원
코로나19의 여파로 세상이 바뀌고 있다. 당연히 여행 풍속도도 달라졌다. 여럿이 다니는 여행은 점차 사라지고 혼자 혹은 둘이 떠나기 좋은 한적한 드라이브 코스가 인기를 얻고 있다. 인적이 드문 곳, 적당한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 곳을 선호하는 추세다. 그렇게 훌쩍 떠나 갑갑했던 마음을 풀어놓고 당일치기로 놀기 딱 좋은 곳이 있다. 바로 강화도다!
강화도령이 살았던 터전, 용흥궁
조선 25대 왕 철종(哲宗)이 강화도령이었던 시절에 지냈던 곳이다.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하는데, 당시 강화도령은 가족이 모반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14세 때 이곳 강화로 유배되었다. 원래는 보잘것없는 초가였으나 훗날 강화도령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 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집을 보수 단장해 용흥궁이라 불렀다. 사람이 살지 않아 좀 휑한 모습이지만 관리는 잘되어 있었다. 150년 된 고택의 안채와 사랑채, 별채, 마루, 작은 정원, 우물, 반질반질한 문고리를 보며 강화도령 이원범으로 살던 철종의 모습이 느껴져 짠했다. 14세부터 19세까지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산으로 땔감을 구하러 가기도 하며 평민으로 살았던 터전이다. 강화도령 이원범, 철종의 이야기가 깃든 용흥궁 담장에는 능소화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용흥궁은 강화 나들길 1코스다. 강화읍 관청리 441-0
한옥의 멋,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용흥궁 담 넘어 건너편 언덕에 전통 한옥으로 지어진 성당의 외양이 독특하다. 얼핏 보면 성당 같지 않고 마치 절처럼 보인다. 바실리카 양식과 동양 불교 사찰 양식을 융합한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마당 한쪽에는 불교를 상징하는 나무 보리수가 100년 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찰의 범종처럼 생긴 종도 보인다. 분명 성당인데 절의 분위기가 더 느껴지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건물이다. 서로 다른 전통문화를 존중하고 함께하는 남다름을 본다.
성당 입구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며 마음을 가다듬어본다. 상사화가 바람에 흔들리는 마당엔 초대 주교 고요한 신부의 비석과 성당 축성 100주년 기념비가 있다. 강화 시내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오는 높은 언덕이다.
댓돌 위에 신발을 벗고 들어서면 목재로 이루어진 깔끔한 실내가 성스러움을 더한다. 동서양의 오묘한 분위기가 잘 조합된 실내다. 열린 창으로 자연의 풍경이 한가득 들어온다. 양 벽면에는 강화성당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진열돼 있다. 밖으로 나가면 뒤편으로 낮은 담장의 사제관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약탈당한 계단 난간 등 건축물의 일부가 복원된 모습도 볼 수 있다. 주변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는 성당이다. 강화읍 관청길 27번길 10
소창길’을 아시나요
용흥궁과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을 나와 내려오다 보면 길가에 서 있는 커다란 굴뚝이 보인다. 1960~70년대에 강화도 산업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심도직물의 흔적이다. 직물 공장은 강화도 경제의 대표적 징표다. 강화도서관 옆으로 이화직물 터가 있고, 아기들 기저귓감으로 많이 쓰였던 친환경 직물 ‘소창’을 만들어내던 유명 직물 업체들이 터를 잡고 있다. 그래서 이 골목에 ‘소창길’ 코스가 새롭게 더해졌다. 강화 중앙시장 B동 3층에 위치한 ‘관광플랫폼’이 스토리워크 길 출발지다. 1960년대의 직물공장 전경과 소창 만드는 과정을 구경하고 체험할 수 있는데 현재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한산하다. 가는 길에는 100년의 세월을 품은 낡은 건물에 자리 잡은 ‘낙원 떡집’이 있다. 순수한 떡 맛을 자랑한다. 질 좋은 강화 쌀에 첨가물은 소금 한 가지밖에 안 넣는다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소박한 식사를 하고 싶으면 읍내 중심에 있는 50년 전통의 ‘강화국수’ 집으로 가면 된다. 강화도에 가면 알싸한 순무김치 맛도 봐야 한다.
※소창길 코스 중앙시장 관광플랫폼에서 출발해 심도직물 굴뚝 - 천주교 인천교구 강화성당 - 이화직물 터 - 금융상사 - 조양방직 - 동광직물 - 남화직물 - 상호직물 - 경도직물 - 소창체험관으로 이어진다. 2시간 정도 소요.
빈티지 감성 카페, 조양방직
과거의 방직 공장을 그대로 살려서 빈티지한 매력을 보여주는 레트로 감성 카페다. 조양방직은 1933년 홍 씨 형제가 민족자본으로 설립한 방직공장으로 한때 엄청난 전성기를 누렸다고 한다. 그 시절의 흔적들이 빈티지한 멋으로 탈바꿈해 핫한 카페가 됐다. 그 옛날 우리의 언니와 누나들이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기계를 돌리던 시절을 상상하도록 자극한다. 강화읍 향나무길 5번길 12
평화로운 궁궐터, 고려궁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해온 우리 민족의 역사가 있는 곳. 고려 왕조가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38년간 머물렀던 궁궐의 터다(사적 제133호). 당시의 궁궐은 1270년 송도로 환도할 때 몽골의 압력으로 모두 허물어졌고 행궁과 장녕전, 만녕전, 외규장각 등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지금은 강화 유수가 업무를 보던 동헌과 유수부의 경력이 업무를 봤던 이방청만 남아 있다. 푸른 잔디가 시원하게 깔린 자연 풍경이 평화롭기만 하다. 강화읍 강화대로 394
조용한 마음의 울림, 교동마을과 향교
느릿느릿 옛 시간을 즐기고 싶다면 시간이 멈춘 듯한 교동마을로 가볼 일이다. 예스럽고 정감 있는 마을을 둘러보다 보면 지치고 복잡했던 마음이 어느새 가라앉는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되면 강화읍에 위치한 강화 향교(고려 전기에 창건)와 우리나라 최초 향교인 교동 향교 방문도 빠뜨릴 수 없다. 강화나들길 1-18코스다. 강화군 교동남로 229-49
해안도로 따라 의미 있는 드라이브 코스, 덕진진
강화도에는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의 5진(鎭)과 광성보, 선두보, 장곶보, 정포보, 인화보, 철곶보, 승천보의 7보(堡)를 합친 강화 12진보(鎭堡)가 있다. 그중 덕진진은 김포 덕포진과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포대였다.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하며 해안도로를 따라 볼 수 있는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전적 시설 풍경은 산책과 드라이브 코스로 의미 있다.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섬에서 즐기는 슬기로운 문화생활 ‘도솔미술관’, ‘해든뮤지엄’, ‘전원미술관’
최근 서울과 같은 대도시를 떠나 작품 전시를 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고즈넉한 강화 땅에서 감상하는 개성 있고 멋진 미술관. 언택트 여행으로 유유자적 멋진 시간을 누려보자.
도솔미술관은 초지진과 가깝고 고즈넉해서 좋은 사람과 조용히 산책할 겸 가보면 좋은 장소다. 강화 들판을 달려 소나무가 예스러움을 더해주는 작은 마을에 다다르면 단정한 한옥 갤러리가 눈에 들어온다. 총 4개의 전시관이 있는 도솔미술관은 야외전시관, 2개 층의 실내 전시장, 별관으로 나뉘어 있다.
뜰안채 야외전시장에서는 사진작가의 아프리카 바오밥나무 작품이 전시돼 있다. 실내로 들어가면 별관을 비롯해 2개 층으로 이루어진 전시장에서 매달 바뀌는 전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장 창가에 걸터앉아 강화 들녘을 유유자적 내다보며 함께 온 사람과 조용조용 대화를 나누는 다정한 풍경이 아름답다. 강화군 길상면 길상로 210번길 52-71
해든뮤지엄은 갤러리로 걸어 들어가는 입구의 긴 경사면에서부터 설레게 된다.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건축물로 2013년 한국건축가협회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건축 베스트7’에 뽑히기도 했다. 실내 사진 촬영이 안 돼 아쉽지만 야외의 조각작품과 설치미술, 그리고 대형 미러가 볼 만하다. 정원의 휴식공간과 잘 어울리는 자연이 아름다운 곳. 강화군 길상면 장흥로 101번길 44
전원미술관은 강화도에서 출생한 한국화가 유광상 씨가 운영하는 갤러리다. 작가의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작품과 일본 유학 시절에 그린 그림 등을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다. 강화군 송해면 솔정리 561
이색적이고 따뜻한 ‘동네 책방’
강화군청 부근엔 볼거리가 많다. 강화성당과 용흥궁, 중앙시장, 궁터, 중앙시장 청년몰, 소창길…. 이곳들을 다 돌아본 뒤 한숨 돌리며 조용히 서점을 들러보는 건 어떨까. 소금빛 서점, 국자와 주걱, 책방 시점 등은 강화도 간 김에 누리는‘소확행’이다.
‘소금빛 서점’ 이 있는 고택 계단을 올라서면 대문 바로 앞 양옆으로 ‘그 여자 그릇 유림상회’와 ‘그 남자 책방 소금빛 서점’이 있다. 그 남자의 안목으로 고른 책들이 진열된 소금빛 서점은, 얼마 전 방영 종료된 SBS 드라마 ‘더킹: 영원의 군주’에서 배우 이민호가 책 읽는 장면을 찍은 장소로 더 알려졌다. 그 여자의 그릇 유림상회는 채색이 독특한 그릇 한 점쯤 갖고 싶게 하는 곳이다. 그 남자, 그 여자의 책과 그릇이 있는 감성 공간이다(서점과 그릇가게 앞의 대문을 열면 100년 고택 대명헌을 만난다. 김구 선생이 한동안 머물렀다는 운치 있는 한옥 숙박업소로 예약제로 운영된다).
강화읍 남문안길 7
‘국자와 주걱’은 한적한 마을의 한옥을 책방으로 꾸민 시골 책방 겸 북 스테이다. “작은 책방. 작고 불편함. 그러나 좋은 책. 따뜻한 밥상. 깨끗한 잠자리. 그리고 많은 정”이라는 책방 소개글이 다정하다. 책만 보러 갔다가 주인장의 푸근한 인심에 다시 찾는 곳이다. 큰 도로에서 마을길로 접어들어 꼬불거리는 좁은 길로 주춤주춤 운전해 들어가면 이 특별한 책방과 만난다. 강화군 양도면 강화남로 428번길 46-27
아름다운 일몰에 반하다, 장화리
강화도의 마지막 코스는 누가 뭐래도 일몰 풍광이 장관인 장화리다. 강화도 남부 해안도로를 따라 펼쳐지는 강화 갯벌과 서해의 해넘이는 여행자들의 관심사다. 이곳에서의 일몰 시간은 아주 짧다. 찰나의 장화리 노을 앞에서 두근두근하면서도 경건한 시간을 맛보며 강화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다.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사람들은 꽃철이 되면 아랫녘으로 떠나고 수목원을 찾지만 나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양천 향교에 간다. 서울시 강서구에 위치한 이곳에 가면 조용한 향교 담장 위로 피어난 능소화를 볼 수 있다. 옛 교육기관에서 꽃과 함께 고즈넉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이다.
도심 속에서 옛 시간과 소통하는 양천 향교는 마을 골목길을 따라 잠깐 걸어 들어가 사찰 홍원사 뒤편으로 가면 있다. 산을 등지고 안정감 있게 들어앉은 모양새다. 향교는 옛 성현들의 덕을 기리고 제를 모시며 지방 향리들을 교육하던 기관이다. 현대적 교육기관이 생겨나면서 대부분 해체되었지만 아직도 전국적으로 230여 개의 향교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유일하게 양천 향교만 남아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조선 태종 연간(서기 1411년경)에 설립된 양천 향교는 옛 선비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도 성인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맞춤형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미디어 시대에 맞는 생활예절 교육과 함께 다양한 소통 창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러나 현재는 코로나19 여파로 휴관 중이다. 그래서 더 조용해진 향교다.
담장을 둘러쌓았던 능소화도 예년에 비해 많이 줄어든 모습이다. 그래도 잊지 않고 피어나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듯 꽃잎을 활짝 열었다. 능소화의 전설 속에는 그 옛날 구중궁궐에 살던 소화라는 궁녀 이야기가 있다. 어여뻤던 소화는 임금의 사랑을 얻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어느 날부터 임금이 자신을 찾지 않자 그리움에 점점 병이 들어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담장 밑을 서성이고 내다보며 오매불망 임금만을 기다리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뜬 소화. 그녀는 “담장 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고 했고 그 영혼이 깃들었는지 소화가 지냈던 처소의 담장을 덮으며 꽃이 주렁주렁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바로 능소화다.
능소화는 오래전 사신들이 중국을 드나들며 가져온 꽃으로 화사한 색상과 모습이 기품 있어 양반꽃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로 사대부 뜰에서만 볼 수 있었고 민가에서는 함부로 심지 못했다. 사람들은 능소화가 다 피고 질 때 미련 없이 꽃송이를 톡 하고 떨어트리는 모습이 마치 소화의 지조를 닮은듯하다고 풀이한다. 능소화의 꽃말은 '영광', '기다림', '명예'다.
예전에는 능소화가 흔치 않았다. 그래서 이맘때면 멀리 경상도까지 내려가 운치 있는 한옥 담장을 뒤덮으며 피어난 능소화를 촬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한강변 산책길에서 굵은 나무 기둥을 칭칭 감으며 피어난 능소화를 볼 수 있고 고속도로변의 높은 벽을 뒤덮으며 피어난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능소화 터널을 이룬 신식풍 조경의 공원도 생겨났다. 어느덧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능소화는 역시 담장을 타고 피는 게 제일 어울린다. 마침 향교 관리인이 굳게 잠긴 문을 잠깐 열어주어 동재와 서재, 그리고 강학 공간이 있는 마당까지 들여다봤다. 향교 옆길로 한 걸음 옮기면 궁산 근린공원으로 이어진다. 울창한 숲길은 여름인데도 서늘하다. 길을 따라 나지막한 산책로를 걷는 즐거움이 있다. 아울러 겸재정선미술관과 궁산땅굴, 구암공원, 허준박물관으로 연결되는 강서 역사문화 둘레길을 알차게 돌아볼 수 있지만 생활 속 거리두기 때문에 실내 관람은 어렵다.
바이러스로 조심스러운 세상이다. 지금은 향교를 속속들이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주변 뜰을 거닐며 유생들의 선비정신과 능소화의 전설을 떠올리는 시간도 제법 괜찮다. 게다가 한적한 분위기가 유유자적 생활 속 거리 두기에 적당하다.
향교를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처럼 생각하기 전에 한 번쯤 옛 성현들의 흔적을 통해 차분한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지.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뜰에서의 담백한 어느 하루, 여름 햇살을 받은 능소화가 향교 담장 위에서 눈부시다.
주소: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234
△ 주변 볼거리
△서울식물원을 비롯해 겸재정선기념관, 구암공원, 허준박물관, 궁산땅굴이 이어져 있다. 향교 입구 부근에 위치한 사찰 홍원사와 전통 방식으로 면을 만들어 국수를 주렁주렁 널어놓은 ‘옛날국수’ 집 구경은 덤이다.
△이타제면소의 잔치국수(5000원)와 굴림만두(4000원)로 맛난 한 끼가 가능한 곳이 근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