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은 내 생애 최고의 살인 더위였다. 실제 데이터는 아닐지 몰라도 기억과 느낌으론 그랬다. 그 온도의 높이 보다 그 지독한 더위가 낮 뿐 아니라 열대야로 보름 이상 이어짐이 몹시 참기 힘들었다. 그런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일 뉴스에서 전기요금 폭탄이 중요 이슈까지 다뤄지니 에어컨도 마음 놓고 켜기가 두려웠다.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으로서는 가히 지옥을 맛 본 여름이었다.
이런 올 여름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곳. 요금폭탄 걱정 없이 시원함을 만끽하며 보낼 수 있었던 곳. 바로 나만의 아지트 우리 동네 도서관이다.
자전거 타고 가는 길도 예술
서둘러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냉커피를 타서 보온병에 담고 간편한 과일을 약간 준비해 집을 나선다. 우리 집에서 도서관 까지는 자전거로 10 여분 거리. 아파트 단지를 벋어나자마자 시에서 조성한 ‘시민의 강’ 이라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자전거로 달리게 된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강이라기보다는 시냇물에 가까운 길이지만 제법 자연미도 있고 예쁘다. 물길 따라 나무, 풀, 꽃들이 계절을 느끼게 해주어 평소 저녁 산책을 다니는 길이기도 하다. 그 길 끝에 나만의 아지트 도서관이 있다. 가는 길 중간 중간에 간이 도서관과 벤치도 있다. 날씨만 좋다면 도서관 까지 가지 않고 자전거를 세우고 그 벤치에 앉아서 책을 볼 때도 있다. 봄. 가을에는 그 벤치가 나의 아지트로 도서관을 대신하곤 한다. 필자는 이 길을 자전거로 달려 도서관에 갈 때마다 부천시민으로 지방세를 꼬박꼬박 내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가 않고 뿌듯하다. 그 길을 달려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면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창가 자리가 있다. 통유리로 되어 있고 작은 파스텔 칼라 의자가 놓여 있다. 그 자리에 앉으면 창을 통해 공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무더위도 맹추위도 돈 워리, 주말에도 늦저녁에도 오케이, 비가 오면 땡큐
올 여름처럼 살인적인 더위에 가져간 냉커피가 생각이 안날 정도로 에어컨이 말 그대로 빵빵하게 나오고, 와이파이도 팡팡 터지고, 만화책부터 전문서적까지 원하는 책 마음껏 볼 수 있는 곳. 과연 이곳 보다 더 좋은 아지트가 또 있을까? 필자는 이번 여름 거의 매일 도서관에 출근 하다 시피 했다. 그리고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책을 보며 지냈다.
그렇다고 이곳이 어디 더위만 피할 뿐이겠는가? 한 겨울 추위에는 냉커피를 따뜻한 커피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이 고마운 나의 아지트가 평일 금요일 만 빼고 주말에도 문이 열려 있다. 평일엔 저녁 10시까지 이용이 가능하다. 비가 오면 오히려 더 이곳을 찾는다. 통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준비해간 커피를 마시다 보면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북카페가 된다. 북카페에 음악을 빠질쏘냐? 음악은 핸드폰에 이어폰을 꽂고 들으면 간단히 해결된다. 와이파이가 되니 데이터 사용료 걱정 없이 음원사이트에서 분위기에 맞는 나만의 음악을 찾아서 들으면 뭐 하나 빠짐없는 북카페 완성이다. 실내가 지루할 때 즈음 잠깐 밖으로 나가보자. 문 열고 나가 몇 발자국만 가면 자그마한 인공폭포와 근사한 정자도 있다. 날씨가 너무 덥거나 춥지만 않다면 간단히 준비해간 과일이나 간식을 먹으면서 소풍 기분을 내면 잠시 쉴 수도 있다. 안팎 모두 완벽한 나만의 아지트 이다.
인생 100세 장수시대가 됐다. 어언 70년을 거의 살았고 앞으로 살아야 할 날도 30년은 족히 남았다. 즐거웠던 추억은 인생의 등불로 삼았고 아팠던 기억은 좋은 가르침으로 남았다.
◇학생회장 후보로 인생의 희열
새 학기가 시작하는 봄을 맞아 필자 아파트와 가까운 초·중·고등학교에서는 학생회장선거가 진행되었다. 아침마다 교문에서 붉게, 푸르게, 노랗게 만든 피켓을 들고 성인보다 더 열심히 선거 운동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총등학생 시절 총학생회장 선거가 생각났다. 학생 수가 적고 선생님과 교실이 부족해 몇 개 학년이 한 교실에서 합동수업을 가끔 했던 지금은 아예 없어져 버린 시골의 조그만 초등학교 이야기다.
학생들은 학급장은 물론이요 총학생회장도 선거로 뽑는다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선거를 해 본 일도 없었고 선생님이 임명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4학년이 되자 담임선생님이 급장선거를 시행했다. 산간벽지에서는 놀라운 변화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4.19혁명이 났던 해였다. 그런데 더 신기했던 건 필자가 급장에 뽑힌 것이다.
얼마 후 총학생회장선거가 실시되었다. 그간 6학년 중에서 임명하던 학생회장도 전교생이 직선하도록 바뀌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4·5·6학년에서 한 명씩 후보를 내도록 했다. 필자는 4학년 대표로 학생회장 후보자가 됐다. 합동연설을 하고, 각 교실을 돌면서 선거운동했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리고 선거운동이 끝난 후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큰 칠판에 바를 정자를 그려가면서 진지하게 개표가 진행했다. 모두가 한 표 나올 때마다 목이 터지도록 함성을 질렀다. 6학년 선배가 당선됐다. 만약 그 선배가 낙선하였으면 어떡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다행한 일이었다.
문제는 다음에서 발생하였다. 5학년 형을 누르고 2등이 된 것이었다. 2등이 확정되는 순간 가슴에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무언가 뜨거운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양말도 없이 맨발로 고무신을 신고 집으로 돌아오는 자갈길이 비단길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전교생이 모여 투표지 한 장마다 이름을 연호하던 개표장의 함성이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했다.
다음 날 학교가 내 집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선생님들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칭찬해주셨다. 거의 처음 느껴보는 환대에 가슴이 벅찼다.
멀리만 느껴졌던 교무실을 즐겁게 찾는 찾아가기 시작하였다. 교무실 한쪽에 있는 ‘미니 도서실’을 열심히 찾는 학동이 됐다. 비록 수십 권에 불과하나 교과서가 아닌 ‘책’을 부지런히 읽기 시작했다.
그때 만난 ‘장발장’·‘삼총사’·‘모세의 기적’ 등은 훗날 탐독했던 다른 책보다 오래 기억에 남았고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줍음을 많이 탔던 ‘시골소년’은 읍으로, 대도시로, 그리고 서울로 진학해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하면서 힘차게 성장했다. 그 밑거름은 첫 ‘희열’이었다.
◇인생을 바꿀 뻔했던 증기기관차
필자는 50년 전 고교 입시를 치렀다. 당시 중학교부터 전 과목에 대한 시험을 시행하던 시절이었다. 인생이 확 바뀔 수도 있었던 중요한 순간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다행히 대도시 소재 고등학교에 어렵게 합격했다. 시골 동네에서 몇 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하는 영광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되지 않았다. 입학등록금 준비도 문제였으나 한 번도 가보지 않는 대도시로 등록하러 가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등록 마감은 다음 날 정오까지 주어졌고 추가등록은 인정되지 않았다.
필자는 결행이 잦은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서 기차를 선택했다. 우리 마을 종점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는 버스는 정상적으로 운행해야 5시간 걸려서 광주에 도착하던 때였다. 그리고 비포장 자갈 도로에는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오면 버스가 다닐 수 없었다. 당시는 특히 겨울철이어서 더 그래 보였다.
전날 오후 3시간 넘게 걸어 나와서 읍내 기차역 앞 여관에서 자고 마감시각에 늦지 않으려고 새벽 5시 첫차를 탔다. 8시 광주에 도착하는 통학차였다. 문제는 엉뚱하게도 ‘기차’에서 터졌다.
칙칙폭폭 석탄 연기를 내뿜으며 힘차게 달리던 증기기관차가 화순에서 광주로 가는 너릿재 중간 오르막길에서 숨이 막히는 듯 멈춰 서고 말았다. 시커먼 열차는 제동이 잘 안 되는지 삑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속절없이 뒤로 내달렸다. ‘정오 마감시각’ 맞추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화순역까지 밀려 내려온 기차는 한 시간 넘게 물과 석탄을 보충해 증기를 생산한 후 고개를 힘겹게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 숨이 차고 말았다. 후진과 에너지 보충이 반복됐다. 마감 시각을 놓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당시에는 다른 수단을 찾을 수 없었다.
두 번이나 숨이 막혔던 열차는 운행 예정 시각을 3시간 더 넘기고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냅다 은행으로 뛰었다. 운명을 가를 뻔했던 순간이었다.
“운 좋은 학생이구나!” 잠시 후 접수창구를 닫으면서 격려해주었던 은행원 누나의 그 한 마디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때부터 ‘시간의 중요성’을 제일로 삼았다. 다른 것은 채우거나 보완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한 번 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회에 진출하여서도 약속시각에 늦지 않도록 노력했다. 모든 업무는 기한 전에 마감하고 여유를 가지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사회 은퇴 후 자원봉사와 교육 수강, 강의, 친구 모임에 세계 최고 수준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그 편리함도 알았다. 나이 들어서 운전하는 부담도 덜어야겠다는 생각에 승용차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아들 가족과 ‘승용차 나눠 사용하기’도 하고 있다. 키는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주차 스티커는 양쪽에서 발부받아 이용에 불편이 없도록 했다. 평일에는 아들 가족이 출ㆍ퇴근에 전용하고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에만 내가 사용한다.
◇첫 입학식 60년 전과 후
[새 학기를 맞아 환갑 띠동갑 쌍둥이 손주와 외손자의 입학식이 열렸다. 60년 전 초등학교 입학식이 연상됐다.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친구 잘 사귀면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랐다.
오전에 쌍둥이 손녀와 손자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열렸다. 바로 집과 가까운 학교이지만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잔뜩 호기심을 드러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움에 대한 관심은 같은가 보다.
어머님의 손을 잡고 한참 걸어가서 참가했던 초등학교 입학식이 생각났다. 입학 전 몇 년 동안 할아버지가 만든 필사본으로 천자문을 공부하고 시조를 읊었다. 아버지에게 한글을, 어머니에게 산수를 익혔다. 그러나 ‘신학문’을 배우러 처음 가는 학교가 매우 궁금하여 밤잠을 설쳤다.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도 조용해졌다. 옛 입학식 때 교장의 ‘훈화’가 떠올랐다. 당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뭔가 보통 사람과 다른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였다. 라디오 소리도 들어본 일이 없던 그 시절, 풍금 반주 애국가를 처음 듣고 가슴이 뭉클했던 것도 기억났다.
책을 처음 받았고 어머니는 공책과 연필을 사줬다. 글씨와 그림이 함께 인쇄된 새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잉크에 흠뻑 밴 책의 냄새가 정말 좋았다. 그때부터 책을 좋아하는 학생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이 기억에 오래 남고 인생에 영향을 가장 많이 주었다. 요즘 아이들은 이미 좋은 책을 읽었기에 학교에서 받은 책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 않을 터이다. 입학 전 예쁜 책가방과 필기구도 선물로 이미 챙겼는데 이것도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학교 재학 시절 제일 좋아했던 것은 장난감으로 재미있는 놀이하기였다. 그러나 손주들은 뛰어노는 것보다 체육관, 학원을 찾아 나설 것이다.
한국전쟁 후 지금의 최빈국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 처음 본 공책과 연필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잘 깎이지 않는 연필을 날을 갈아가면서 조심조심 깎아주었던 아버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공책은 한 번 쓰기도 어려울 정도로 잘 찢어졌다. 딱딱한 연필심에 침을 발라서 공책이 파이지 않도록 글씨를 살살 그려야 하였다. 연필심 흑연으로 입술은 시커멓게 물이 들곤 하였다.
오후에는 외손자가 유치원에 입학하였다. 어린이집을 마치고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대비하는 중이다. 손재주가 좋은 이 녀석은 종이접기 작품을 필자 손에 쥐여주면서 ‘입학선물’이라며 재롱을 부렸다.
담임선생의 당부와 학교생활 안내가 있었다. 새겨듣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였다. 교실과 선생이 부족하여 합반수업을 하였던 옛날이 생각났다. 아무튼 좋은 환경에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랐다.
아들 가족은 아주 가깝게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들 가족을 대신하여 쌍둥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의 등교를 도왔다. 올 첫 학년은 육아 휴직한 며느리가 직접 보살피고 있다.
퇴근이 늦은 딸 가족을 위하여 외손자의 어린이집 하교도 가끔 도왔다. 앞으로도 즐거운 마음으로 손주들의 등하교를 보살필 예정이다.
아이들의 입학식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기념사진에 예쁜 모습을 담고 교문을 나섰다. 먼 훗날 아이들의 추억에 할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 상상의 나래를 폈다.
건강한 가정이 모여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이런 공동체가 모여 국가의 초석이 된다. 하지만 가정 해체가 심심찮게 일어나면서 아동학대, 노인 소외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허물어지는 가정 해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바로 효(孝)라고 말한다. 이번 호에서는 효를 실천하는 3인이 한자리에 모여 이 시대의 효의 진정성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 무크지 을 창간하는 권혁승 백교문학회장(이하 권혁승 회장)
△ 효경영의 리더 상훈유통 이현옥 회장(이하 이현옥 회장)
△ 교육을 통해 효 문화를 정착시키는 최종수 한국효문화센터 이사장(이하 최종수 이사장)
장소 이투데이 6층 회의실
Q.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전통적 가치 ‘효.’ 요즘 효를 얘기하려면 저마다 답답하다고 한탄합니다. 무엇 때문에 시니어들이 분노하는 걸까요?
△ 이현옥 회장: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에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모든 행동의 근본이죠. 부모가 없었다면 자식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섰더라도 이는 모두 부모의 은덕이죠. 부모 모시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바쁘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찾아뵙는 것은 소홀히 하고 전화 한 번 하는 정도로 생색내는 자식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죽는 날까지 자식 잘 되기를 바라고 좋은 소식 있기를 고대하며 밤낮으로 자식 걱정을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죠.
△ 최종수 이사장: 자식들의 마음가짐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교육이 우선돼야 해요. 옛 서당에서는 과 을 기본으로 어려서부터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을 가르쳤어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자 직분에 충실하게 하는 밑바탕에는 효가 자리 잡고 있었지요.
이런 이유로 초·중·고교에서 효와 예절, 질서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학식을 갖추는 것보다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지요.
이러한 일들을 시작하게 된 게 주위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우리 매일 같은 것만 할 게 아니고, 인성과 효에 대한 공감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한번 해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 권혁승 회장: 우리나라 효 사상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고, 한국의 가족주의도 전부 없어져 가고 있어요. 이러한 현상을 두고 ‘가정 파괴’라는 말들을 씁니다. 이는 곧 가정의 예절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가정의 예절이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하는데, 요즘은 어버이날이나 부모 생신날이라 해서 선물하나 사서 주는데 그건 효가 아니죠. 효 사상이라는 것은 한국인의 정신문화라는 것이고, 물질의 교류나 거래는 아니죠. 부모자식 간에 아파트 사주고 비싼 선물 사주고, 물론 그것도 효도의 한 방법 일수 있지만, 한국의 기본 사상이자 문화 사상은 아니라고 봅니다.효의 출발점을 가정의 예절에 두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부터 아이들을 교육해야 해요. 요즘은 어린이 교육이 잘못돼 개인주의나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졌지만, 한국 효 사상이 무너져가는 위기 상황이라고 느끼니 씁쓸하죠. 그러한 문제로 우리(3인)가 모인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웃음).
Q. 지금 효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천되고 있나요?
△ 권혁승 회장: 요즘 대다수 부모는 자식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죠. 효를 바라지도, 하지도 않는 게 현 상황인거죠. 그래도 지금 우리가 하는 효 운동을 계속 꾸준히 전개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각 시·구 문화원에서 부모에 대한 시 낭송회를 1년에 한 번씩 한다든지, 강의를 한다든지 말입니다. 이렇게 효에 대한 교류를 해야 효심이 생기는 것이죠. 젊은이들에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날마다 반성을 해나가는 것이 효예요. 아이들이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 “다녀 왔습니다” 인사를 하는 것이 기본인데 휙 갔다가 말없이 돌아오죠. 젊은 엄마들도 다 어릴 적 해본 것으로 신경을 못 써서 그렇지 아이들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효심’. 그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봤어요. 대한민국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옵니다. 첫 번째, ‘효성스러운 마음’. 두 번째, ‘효심은 엄하게 키운 자식일수록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법이다’ 그러니 부모가 애를 잘 키워야 하죠. 적당히 키우면 효도가 안 돼요. 불효라는 것은 아이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 부모자식 간 주고받는 것이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를 실천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왔어요.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의 물신주의는 가정의 안녕과 질서의 근원인 효를 경시하므로 해체되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어린이나 젊은이 할 것 없이 절대가치와 기준이 상실되어가고 있는 현실이죠.
자식을 물질적으로 키우면 그게 효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권 회장 말씀대로 엄하게 키우고 가정에 모범을 보여야 하죠.
Q. 지난해 12월 ‘효도계약’을 지키지 않은 아들에게 증여한 부동산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 판결을 놓고 가족모임에서 효도계약서를 쓰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 권혁승 회장: (부모자식 간 효도계약서 등의 문제에 대해서)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한국인은 효에 대해 우리 전통문화, 민족문화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개중에는 부모자식 간 효도 계약서를 쓴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몇몇 사건을 미디어에서 너무 부풀리는데, 그런 것을 줄여야 해요. 부모자식 간 화합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불화가 있다면 잘못되는 것이죠. 아이들이 자랄 때 가정 예절이나 인성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식이 잘못했든 부모가 잘못 가르쳤든 소통이라는 것은 쌍방이에요.
△ 최종수 이사장: 효도계약서를 쓰고 하는 효는 결코 효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계약을 하는 것도 문제, 그것을 퍼뜨리는 언론도 문제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효가 아니고 효가 될 수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두 분(권혁승, 이현옥)도 그렇지만 자신의 모든 열정과 재산을 털어 효 문화를 전파하는 훌륭한 분들이 계시는데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는가 생각이 들어요.
지방자치단체 강령에도 효에 대한 지침 등이 있지만, 지나친 복지로 효가 묻히고 퇴색하고 있어요. 노인, 장애인 복지 등을 위한 비용이 당연히 들겠지만, 그중 일부를 효를 위한 예산으로 책정해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효를 통해 그런 노인과 장애인 등을 돌볼 수 있도록 말이죠.
Q. 효에 관한 교육과 정책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는데요.
△ 권혁승 회장: 예를 들어 우리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시 낭송회를 한다고 하면 그들도 그 며칠 동안은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효가 뭔가 선물만 주는 게 아니라 기본을 익히는 교육을 해야 해요. 이런 말이 적절할지는 모르지만 각 지역마다 문화원이 있어요. 대개 문화 강좌를 한다든가 음악, 미술, 무용 등을 가르치는데 효 문화에 대해서도 강의하면 안 될까 싶어요. 문화원마다 책정된 예산들을 다 그런 예술 강좌에만 써야 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의 독자들의 나이대를 보면 나라 망하고, 6·25사변 나고 배고프고 살기 어려워서 그런 걸 찾을 수 없는 시대였다 할지 몰라도, 그 와중에도 뜻있는 사람들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요. 좋은 효자·효부 정말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었다는 생각 말고 기본적인 교육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 이현옥 회장: ‘효’를 바탕으로 회사를 경영하다 보니 직원들도 만족해하고, 사고도 발생하지 않아요.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는 직원들에게 홍천 대명콘도와 양양 솔비치콘도 숙박을 지원해 줍니다. 1년에 상·하반기 2번 가능하고, 시댁이나 처갓집 식구들도 함께 갈 수 있게 하는데 주로 직원들이 장인·장모를 모시고 가는 편입니다.
‘너희들이 부모에게 잘함으로써 우리 직장도 건전하게 발전이 되는 거다’라고 자주 말합니다. 매년 5월에는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전 직원이 가족을 데리고 세종시에 있는 효림원(효 마을)을 방문해 효심을 나누고 효 문화행사를 진행하죠.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서는 무엇을 바꾸어야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효 문화예술 교류 차원에서 학교에 전문 강사가 방문해 효 강의 등을 하는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만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어머니들의 생각이 좀 바뀌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효에 대해 토론회를 한다고 하면 관심도 없고, 다른 학원에 가라고 하는 등 꽁무니를 빼기 때문이죠. 학생들을 모집하면 3분의 1 정도만 자발적으로 오고, 3분의 1은 학교에서 하라니까 억지로 온 것이고, 또 3분의 1은 참여는 하지만 구실만 있으면 학원에 가거나 빠지려고 해요. 그런 경우에 학생도 학생이지만 어머니들이 적극적으로 인성이나 효, 예절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인성이 기본이 된 다음에 학력을 쌓아야지 기본도 안 되고 학력만 쌓으니 아이들이 머리만 커지는 것이죠.
효라는 것은 평생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인데, 유가(儒家)에서 배울 때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모시기를 잘 해야 한다고 하는데, 종교가 달라 많은 부분에 갈등이 생겨나고 있어요. 그런 효가 필요 없다고 하는 단체도 생기고, 내가 효를 안 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는 몰라도, 효는 우리나라 정서나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난해부터 인성교육진흥법을 시행하여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단체가 갈팡질팡하고 있어요. 인성과 예절 교육은 효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 문화, 이런 운동은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운동도 아니고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어떠한 소명감에 의해서 하는 것이지 이해타산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기브’만 하는 거죠.
요즘 부모는 자식의 효도를 바라지도 않고, 자식도 안 하는 상황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효는 어디 내다 팔래야 팔 수 없는 한국인의 아주 기본적인 사상이자 문화 사상으로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니까요. 2018년에 동계 올림픽을 하는데 외국인들이 많이 왔을 때 ‘한국은 효의 나라다’라는 게 선전되면 얼마나 좋겠어요(모두 웃음).
△ 이현옥 회장: 생전이나 사후에도 예에 벗어남이 없어야 합니다. 즉, 살아 계실 때도 예를 지켜야 하나 돌아가신 후에도 예를 지켜야 합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자(慈)라면 자식의 부모 사랑은 효(孝)라고 합니다. 부모는 진 땅을 걸어가도 자식은 마른 땅을 걸어가기 바라는 게 부모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바쳐 희생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인프라 구축이 우선시되려면.
△ 최종수 이사장: 정부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먼저 조성돼야 합니다. 내가 과천문화원장을 8년 정도 하고, 전국문화원 회장을 4년 동안 했어요. 그러면서 체계적으로 구축하여 효 문화를 선도하려는 효 문화센터를 만들려고도 했죠. 그러나 주변에서 ‘왜 저렇게 판을 벌이나’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어요. 그러니 그런 것을 하려고 해도 먼저 주변의 인식과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돼요.
△ 권혁승 회장: 국내 효 문화를 바로잡고 육성, 창달해야 하지만 아울러서 교양을 갖출 수 있어야 해요. 효는 한국 고유의 문화예요. 이 문화가 옛날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게 아니죠. 물론 서양에서도 방식이 다를 뿐 효도를 잘 하죠. 영국의 역사 철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책에 ‘인류문화 발전을 위해 한국이 크게 기여한 게 있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족제도와 효 사상이다’라고 썼어요. 그는 이러한 효 사상을 전 세계에 번지도록 해 모든 세계인이 가족을 사랑하는 정신이 퍼졌으면 좋겠다는 뜻을 설파했고요. 소설가 톨스토이도 “불효하는 사람은 벗으로 삼지 말라”고 했어요. 미국연방준비제도 의장을 지낸 버냉키(Bernanke)도 미국 프리스턴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제 여러분은 졸업을 하니 매주 한 번씩 부모님에게 전화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생일에 선물을 사주고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1주일에 몇 번씩 전화 걸어 안부를 여쭙는 것이 한국 효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점이 전 세계에 한국인이 어깨 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고, 자부심이라 할 수 있어요.
한국의 효 사상을 세계에 널리 알려서 모든 세계인들이 한국의 효 사상을 본받고 한국하면 ‘아! 효의 나라’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더 나아가서는 효 문화를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록한다든가, 널리 번지도록 힘써야 해요.
△ 이현옥 회장: 이런 분위기를 조성해서 좋은 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여 정부와 언론이 주목하고, 효에 대한 인식이 관철됐으면 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에 대한 좌담회는 한국 언론사, 매체 사상 처음 있는 일 아닐까요? 아마 단군 이래 최초일 것 같아요. 오늘로 끝내지 말고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웃음)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 최종수 이사장: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타고난 소질과 능력을 개발해 나의 길을 찾고 이웃과 사회를 위한 사랑과 봉사가 바로 ‘효’라는 것이죠. 이를 위해 시대에 맞는 효 문화의 창출이 바로 인성 교육의 출발점이라고 보고 한국효문화센터를 2011년 시작했어요.
한국효문화센터는 효에 관련된 교육과 행사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첫걸음을 시작으로 하는 인성 교육과 밝고 건강한 사회 구현이 목표예요.
예술단체장들이 효 문화사업을 하면서 학술회의도 하고, 학생들을 모아 토론한 내용들을 토대로 효 문화를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단초를 발견했어요. 요즘 고등학생들은 입시에 시달리지만, 그중에서도 고전 등을 훤히 꿰뚫는 학생들이 꽤 있어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지만, 마냥 그럴 것이 아니라 헌혈도 하고 기증도 해서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의견도 나왔죠. 그러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시대에 효 문화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해줬어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들의 수준에 맞는 효 문화사업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글짓기, 그림 그리기 대회도 하고, 매년 토론회도 열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 있어요. 국내 최대 규모의 ‘효’를 주제로 한 문화축제로 1회성 행사로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지만 그만큼이라도 확실히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상을 받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만나보면 그때만이라도 가족끼리 효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모를 생각한다고 하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 문화라는 건 다들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는 게 어려워요.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특히 5형제 중 셋째인 나를 많이 아끼셨고 사랑을 주셨죠. 공직생활 중에도, 사업을 할 때도 어머니가 편찮으시면 달려가 돌봐드리는 등 장남 역할을 했어요. 고향 마을에 1981년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면서 선산을 세종시 조치원으로 이전해 효림원을 조성했어요. 어머니는 그 안에 있는 농가주택에서 4개월 동안 고생하시다 90세에 돌아가셨고, 5일장을 치렀어요. 매년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 내려갔고 거기 가서도 돌아가신 어머니와 대화도 나누고 3년 탈상을 했는데 마을 회장이나 이장이 그 모습을 눈여겨봤나 봐요. 그러다 매년 추모식을 하면서 마을 사람 100명을 초대해 아이들에게 선물도 주고, 면장 추천을 받은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500만원씩 장학금도 수여하는 행사를 진행했죠. 사실 3년만 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막상 해마다 해온 것을 그만두기는 어려웠어요. 나로서는 자식의 도리로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소문이 나자 군에서 우리 마을을 성균관장에게 추천해 각지에서 몰려와 선전을 해주고, 포상도 받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1만원, 5000원씩 자발적으로 980만원을 모아서 선산 공원 입구에 효비를 들여놓았어요. 마을이 효의 고장이니까 “마을 입구에 ‘효림원’이라고 세워 놨어요. 그때 어머니가 옥색 한복을 입고 꿈에 선명히 나타나시더니 ‘마을에서 이렇게 효비도 세워주고 행사도 열어줬는데, 너도 고마운 뜻을 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작은 유통업을 하던 나는 영농조합 농장을 하나 인수했어요. 그곳에서 생산하는 오이, 토마토, 배 등 농산물을 국가유공자 요양원이나 보훈병원, 군부대 등 10여 기관에 기증하고 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지역의 소득 증대도 되고, 고용창출도 되니 농민들이 굉장히 좋아합니다.
△ 권혁승 회장: 7년째 백교문학상 효친문학상 작품을 전국적으로 공모하는데, 글과 시 속에 효 사상, 효심 또는 모정이 깃들어져 있는 작품을 심사 기준으로 삼아 상을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사친과 관계없는 글은 입선이 안 되죠. 자식들은 부모가 그렇게 사랑을 줘도 사랑인 줄 몰라요. 일상에서 공기를 마시듯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강릉 시골 마을에다가 사모정 정자를 지었어요. 마을의 쉼터가 되라고. ‘사모정’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해서, 한쪽에는 도예 조각 하는 교수님의 작품도 세워 놨죠. 정자를 강릉시에 기증했는데 하고 나니까 주변에서 그 정자만 가지고 효 사상이 함양되겠느냐 해서 ‘사친문학상’을 만들라 하더라고요. 그걸 만들어 전국적으로 등단한 문인을 대상으로 작품공모를 하고 있어요. 거기다 이 사상을 전 세계에 알려야 되겠다는 의미를 담아 이라는 책을 만들었어요. 국내 200여 도서관에 비치했고, 영어판을 제작해 65개국 130개 도서관에도 전달했어요. 유엔, 세계은행에도 책이 있어요. 대통령, 교육부장관, 문화부장관 등에게도 돌리고,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보냈는데 잘 전달이 됐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작년에 사모정이 있는 공원이 너무 좁다고 해서 확장공사를 1년간 했어요. 높이가 3m인 고석에 ‘효 사상 세계화의 발원지 효향 강릉’이라 쓰고 밑에 영어로도 써놓았어요. 그 옆의 돌에도 효에 대한 글을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새겼어요. 오는 9월에 도 창간할 예정입니다.
이재준(아호 송유재)
초정(艸丁) 김상옥(1920~2004) 시조시인과의 인연은 198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처녀시집인 을 구하기가 어려워 혹여 선생께선 몇 부 갖고 계실 듯해서 어렵게 전화로 여쭈니, 당신께서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복사한 것만 갖고 있다며, 꼭 구했으면 하셨다.
1947년 ‘수향서헌’에서 1000부 한정판으로 발간한 이 책은 한지 바탕에 편집, 문선, 조판, 장정, 인쇄, 제본까지 저자 혼자 손수 한 출판 역사상 유일한 책이라 그 가치는 상당하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봉선화’ ‘청자부’ ‘백자부’ 같은 빼어난 시조들은 그 가치를 더욱 높인다.
서울은 물론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전국의 서점가를 발로 뛰어 다니며 수소문하였다. 몇 달 후 진주와 대전의 고서점에서 과 동시집 을 구해 우편으로 보내 드렸다. 선생의 시조를 읽으며 어휘와 음률에 대해 전화로 여쭈면 늘 반가워하시며 작품의 제작 동기와 발표 과정 등을 자상히 알려 주는, 길고 긴 시조강의(?)를 듣곤 하였다.
옥수동에서 압구정동, 그리고 이태원동으로 주소를 옮기셔도 통화는 이어졌고, 아내 아이들과 함께 찾아오라고 하셨으나 왠지 문인으로 등단한 후에나 뵙는다는 치기로, 그리하지 못했다. 2001년에야 이태원동 청화아파트로 찾아뵈었다.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 생활을 하고 계셨는데 한낮부터 설핏 가을 해가 기울 때까지 문학, 고서화에서 시작된 말씀은 조선백자 예찬으로 장강을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서재 곳곳에 놓인 문방사우며 책들도 일일이 꺼내어 살펴보게 하셨다. 탁자에 놓인 벼루에 먹을 갈아 드리니, 준비해 가져간 책에 붓으로 서명을 하고 관지까지 해 주셨다. 선생이 지으신 책 중에 두 권을 빼고는 다 수집해서 소장하게 되었다. 그 후로 세 번 정도 찾아뵈었는데, “바쁠 터인데 이리 자주 오지 마라.” 단호하셔서 어렵기도 하고 문하(門下)가 아니라서 그리하시나 야속하기도 하였다. 그 어름에 합죽선(合竹扇)에 ‘성덕대왕 신종 명(銘)’을 전서(篆書)체로 써주셨고 구작(舊作)인 ‘벽도도(碧桃圖)’의 합죽선도 함께 주셨다.
千年碧桃如大斗 천 년 만에 열린다는 푸른 복숭아 큰 말같이 커서
仙人摘之以釀酒 신선이 이를 갖고 술을 빚어
一食可得千萬壽 한 번 마시면 천 년 만 년 산다네
庚戌春夜 於洌上 白瓷丹硏之室主人 艸丁 塗人掃毫 경술년(1970) 봄 밤, 한강 상류 ‘백자와 단계벼루가 있는 집’ 초정 그리는 사람이 붓을 쓸다.
중국의 시를 빌려 그림을 그리고 화제(畵題)를 썼다. 신선이 먹는다는 벽도 세 개와 무성한 푸른 잎사귀를 그리되 화제가 합죽선 끝을 따라 전서와 행서(行書)로 어우러져 가히 문인화의 정수를 느끼게 한다. 부채고리에는 은으로 된 팔각의 선추(扇錘)가 끈에 매달려 있었는데, 펴서 부칠 때 바람 따라 흔들리는 그 운치가 그만이었다.
이 인연이 합죽선을 수집하는 계기가 되어 한때는 여러 문사(文士)나 서화가의 글, 그림을 합죽선에 받아 100여 점을 갖고 있었으나, 은사님이나 선·후배 동호인에게 선물하고 30여 점만 남았다. 선추는 옥이나 은, 호박, 나무로 깎은 장신구들을 사북이라 부르는 합죽선 손잡이 고리에 매다는 것인데 침통이나 나침반 향갑 등 다양하지만 희귀해서 구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기록들에 의하면 쥘부채라고도 부르는 합죽선은 고려 때부터 실용되어 중국인들이 무척 부러워했다고 한다. 일본이나 중국도 합죽선을 만들기는 했지만 대나무의 부챗살이 40~50개나 되게 만든 180도로 펼쳐지는 합죽선은 우리나라 고유의 산물이다. 조선조에는 전주와 안동에 부채를 만드는 ‘선자청(扇子廳)’을 설치, 부채를 진상하게 하였다. 그곳에서 좋은 대나무와 질기고 우수한 한지의 생산에 근거했을 것이다.
합죽선을 만드는 스물네 공정은 까다롭고 세심해서 수백 번 장인의 손길이 공력을 들여 보름이 걸려야 한 자루가 완성된다. 단오 때가 되면 임금이 합죽선에 경구(警句)를 써서 신하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백옥 같은 백선에 좋은 글귀나 그림을 그려, 손에 들고 다니며 수시로 펴서 마음을 다잡기도 하고, 지인들에게 마음의 뜻을 전하는 격조 높은 선물이었다.
국악의 소리꾼들은 꼭 합죽선을 들고 창을 한다. 격정적인 장면에선 접은 부채를 손에 탁탁 치기도 하고 부채를 180도 확 펴기도 한다. 이 소도구 하나만으로 아취가 있다. 한량(閑良)들의 춤사위는 이 합죽선이 더해져 완성도를 높인다. 반원의 합죽선이 허공을 가르며 추파를 일으킨다.
녹음 짙푸른 한여름, 정자에 앉아 선추 흔들며 시조 한가락 유장하게 뽑으면 가히 선인의 정취가 아니겠는가.
명실공히 현대 수채화의 제일인자라 칭하는 강연균(1940~ ) 화백의 그림들은 늘 사실적인 것에 기저를 둔다. 멀리 있는 것, 허구적인 것, 환상적인 것은 그의 그림에는 없다. 태어나서 자란 남도의 가난한 이웃들의 고단한 삶과 스산하고 보잘것없는 자연 풍광을 탁월한 스케치로 표현했다.
그가 수채화에 전념하게 된 것은 궁핍한 생활 속에서 비싼 유화 물감을 살 수 없는 아픔에 연유 되었다. ‘그가 겪어온 슬픔과 번민과 분노가 맑은 빛깔로 응결되어 있다. 그리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흐르고 있다. 우리 인간의 삶의 원초적인 아픔, 근원적인 아름다움까지 철저하게 파악하려 한다.’고 1981년 봄호에서 평하기도 하였다.
1982년 누드 수채화만의 전시 작품이 모두 판매되는 등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수채화에 스며든 진실성을 모두가 아끼고 사랑한다. 백자 제기에 놓인 석류나, 눈 내린 좁은 비탈길, 광주리를 이고 초라한 굴뚝 옆을 지나는 아낙, 소녀의 비감어린 눈빛 등의 수채화를 수집하고 있던 중 인사동 경매에서 이 합죽선에 그린 ‘우시장(牛市場)’을 낙찰 받았다.
팔러 나온 소 서너 마리가 서거나 앉거나 한 사이로 함지박을 인 아낙이 지나고 촌로들이 소 값을 흥정하고 있으나 긴장감은 없다. 참외 수레 옆에는 팔려는 촌부나 강아지 두 마리도 졸고 있는 한가로운 여름, 시골 장터 한 모퉁이가 부챗살 따라 펼쳐져 있다. 전주의 부채 장인이 만든 이 큰 합죽선에 쌍어문(雙魚紋)의 대추나무 선추를 매달아 보았다.
향리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하였다. 이미 그 세월도 50년이 넘었다. 몇 해 전 이러구러 소원하였던 옛 친구에게 ‘심월상조(心月相照)’라 서예가가 써 준 합죽선을 보냈다. 작은 은방울 선추를 매달아서...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으나 마음속엔 서로 달이 비춘다는 고승(高僧)의 고상한 경지를 빌려보고 싶어서였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5월의 마지막 주말에 친구와 월미공원을 가자고 약속을 했는데, 막상 동인천역에서 만난 후에 생각이 바뀌었다. 이왕지사 발걸음을 하였으니 동인천에서 시작하여 자유공원, 차이나타운, 그리고 월미공원으로 이어지는 추억의 오솔길을 함께 걸어보자고 의기투합하고 도보순례를 시작하였다.
동인천역전은 50여 년 전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어보인다. 50여년이라고 하면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뀌고도 남을 세월인데 막상 그곳은 세월의 무게가 살짝 비켜간 것처럼 올드한 모습에 왠지 모를 정겨움과 친근감이 느껴졌다.
역에서 출발하여 자유공원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이면도로에는 철물점, 전기 및 전자제품 상점 등이 다닥다닥 접해 있었고 그 옆으로 인현동 호프집 화재사건 희생자 추모탑이 나타났다. 참으로 끔찍했던 그 사건도 이미 우리들의 머릿속에서는 지워버린지 오래되었으니 인간의 뇌의 저장능력에 한계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1999년 10월의 마지막 날에 인현동 5층 건물 2층에 있던 40여평 규모의 호프집에서 불이나 순식간에 3층 당구장까지 솟아오르면서 52여명의 희생자가 났는데, 그 중에서도 학교 가을축제후에 뒤풀이 하던 학생들이 많이 희생되었던 안타까운 사고였다. 잠시 희생자 추모탑에서 머물다가 발길을 옮겼다. 제물포 고등학교를 끼고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길가의 주택 담장에는 무르익어가는 장미가 탐스럽게 피어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인천에 머물렀던 필자는 옛 생각에 젖어 친구와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면서 오르는데 추억의 홍예문이 불쑥 나타났다. 청소년 시절에 잠시 이 곳을 지나다니면서 신문배달을 하든 고단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인천 홍예문(虹霓門)은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으로 높이 약 13m, 폭 약 7m의 화강암 석축을 쌓고 터널처럼 만든 석문(石門)이다. 일제강점 초기인 1908년도에 일본공병대가 만들어 혈문(穴門)이라고 불렸다.
당시 인천중앙동과 관동 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수가 급격히 늘자 만석동 방면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이 홍예문을 뚫었다고 한다. 광복 70년이 지난 아직도 일제의 흔적들이 이렇듯 곳곳에 남아있다. 우리에겐 아픈 기억이지만 절대 잊지는 말아야겠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뜨거운 햇살을 피할 수 있어 쾌적했다. 특히 곳곳의 나무그늘 정자에는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장기나 바둑을 두기도 하였고 그들 옆에서는 할머니들이 그룹을 지어 음식을 드시면서 이야기장단에 빠졌다. 참으로 평화로워 보인다.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이 눈에 들어왔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자 인천지역의 학도들은 의용대를 조직, 강화하여 치안유지에 힘쓰던 중 승전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남녀대원 3,000여명은 각각 현역으로 자원입대하여 조국에 젊음을 바쳤다.
드디어 자유공원 정상에 오르니 거대한 동상 하나가 불쑥 눈에 들어온다. 한 손에는 쌍안경을 들고 인천상륙작전 지역이었던 월미도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었다. 자유공원의 상징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단체로 가끔 한번씩 와 보았던 추억의 그 장소에는 옅은 분홍색 장미와 노란색의 탐스러운 장미꽃이 활짝 피어 잘 가꾸어져 있었다. 훌쩍 지나가버린 50여년의 세월이 무상하다.
태평양전쟁 미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을 공격하였으며 결국 1945년 8월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점령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6·25전쟁 때는 UN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였다. 우리나라와는 역사적으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엮여 있다. 하지만 중공군과 전면전을 두고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 해임되었고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혹, 그 때 내친김에 만주를 폭격했다면? 지금의 우리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통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2005년 9월11일에는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 55주년을 나흘 앞둔 11일 인천 자유공원 일대에서 맥아더 장군 동상의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와 동상 사수를 주장하는 단체의 대규모 동시 집회가 동시에 개최되었는데, 이때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 회원들이 폭력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로 인해 시위대와 경찰 모두 부상자가 속출하고 공원 일대는 난장판이 됐다.
결국 동상은 존치되었고 지금은 평화롭게 월미도를 응시하고 있는 예의 그 모습으로 역사의 현장에 남아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직은 뿌연 황사가 시야를 가려 월미도가 흐릿한 안개 속에 떠있는 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차이나 타운 으로 발길을 옳겼다.
이재준(아호 송유재)
北風吹雪打簾波 북풍이 눈보라를 몰아 발을 치는데
永夜無眠正若何 긴 밤에 잠 못 드는 그 마음 어떠할까.
塚上他年人不到 내 죽으면 무덤을 찾는 사람 없으리니
可憐今世一枝花 가여워라 이 세상의 한 가지 꽃이여.
조선조 평양기생 소홍(小紅)이 지은 것으로 전해 오는 한시(漢詩)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새긴 김상유(1926~2002)의 판화 한 장이 가슴을 울린다.
한겨울 밤, 눈보라가 닥쳐와 사립문은 절로 벌어지고, 뜰 앞 버드나무, 단풍나무 위에도 눈이 얼어붙었다. 초당 뒤편 소나무 잎은 어느새 얼음 별송이로 반짝이고, 아득한 산자락은 눈이 내려 마치 이승의 피안(彼岸) 넘어 고적(孤寂)한 저승의 정경이다. 방 안으로 단아한 기녀(妓女) 소홍의 모습이 안쓰럽다. 이 긴 긴 밤을 어이하리.
판화가이자 서양화가인 김상유는 평남 안주에서 태어나 평양고보 재학 중 미술반에서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 월남하여 연세대에 입학, 철학을 전공하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중도에 하차, 인천의 중학교에서 영어와 미술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 무렵 미국과 일본의 미술책을 탐독하며 미술가의 꿈을 키웠다.
특히 판화에 매료되어 동판화(銅版畵) 연구에 매진했는데, 동판에 밑그림을 새기고 그걸 찍어낼 프레스기가 없어 국수틀을 개조해 사용했다고 한다. 1963년 그의 ‘동판화전’이 우리나라 동판화의 시금석이 되었다.
1970년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국제 판화비엔날레’에 출품한 동판화 작품 ‘NO EXIT’가 대상을 차지하며 판화가의 길로 정진하였다. 세 장의 판화 연작 형태로, 사방이 깜깜한 먹빛 가운데 사각의 좁은 공간에 사람이 혼자 누워있다. 두 번째 사람의 형체는 조금 부스러지더니 세 번째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사라진다. 1970년대 혼돈사회의 암울함을 형상화한 작가의 절규였다고 생각한다.
판화의 기법에는 목판화, 석판화, 동판화, 실크스크린 등이 있는데 나무에 새기거나 스크린에 밀어내는 것과 달리 동판화는 동판 위 밑그림을 따라 흔적을 내고 염산으로 부식시켜야 하는 위험하고 까다로운 공정이 있다.
김상유도 시력이 낮아져서 1970년대 중반부터 목판화로 화업을 바꾸게 되는데 이 작품 ‘소홍절구(小紅絶句)’는 그즈음 동판에 새긴 것 중 걸작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동판에 그라운드(산에 안 녹는 용제)를 입히고 송곳 같은 도구로 밑그림을 그린 후 염산 등으로 판을 부식, 선을 살려 잉크를 발라 찍어내는 에칭(etching) 기법이지만, 목판에 새긴 듯 칼 맛이 엿보여서 더욱 매력적이다.
판화는 여러 장을 찍어낸다는 복제성 때문에 수집가들에게 외면당했고 작품 값도 대개는 한 점에 비싸봐야 50만원을 넘지 못해 판화가들은 겸업을 하지 않고는 곤궁함을 벗어날 수 없었다. 김상유도 1980년대 이후로 목판화와 함께 유화를 그리게 되는데 그 세계가 가히 탈속(脫俗)의 경지에 이르니 수집가들에게는 호재가 되었다.
그의 회화 속에는 어쩌면 자화상 같은 한복차림의 선비(혹은 도인)가 가부좌 자세로 정자에 홀로 앉아 물을 바라보거나 바람을 쐬며 한아(閒雅)의 정취에 젖어 있다. 티끌세상을 벗어나려는 작가의 고독한 몸부림일 것이다. 2002년 이 작가가 운명하기 직전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김상유 1960~1999 전작전’은 한 고독한 예술가에 대한 존경의 헌정이었다.
동판화 작가하면 바로 떠오르는 또 한 분이 황규백(1932~ )이다. 이 작가는 동판화 중에도 아주 정치(精緻)한 메조틴트(Mezzotint) 기법으로 판화를 찍어낸다. 이탈리아어 mezza tinta(중간 색조)에서 유래되었다는 이 기법은 동판 표면에 수많은 구멍을 뚫고 판화를 찍으면 구멍 속에 있던 잉크가 나와 번지면서 색면을 이루어 부드러운 명암을 잘 나타낸다.
에칭처럼 판을 부식시키지 않으나, 일일이 구멍을 뚫고 메우고 하는 작업이 길 뿐 아니라 다색일 경우 밑그림의 구도나 색상에 맞추려면 작은 동판일지라도 온종일 세심한 사전 작업을 해야 한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1954~1967년 ‘신조형’, ‘신상회’ 그룹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1968년 프랑스로 건너가 ‘SW 헤이터의 아틀리에 17’이라는 판화제작소에서 판화 공부를 했다. 1970년에는 뉴욕으로 옮겨서 1990년까지 메조틴트 판화를 집중적으로 찍었다. 2000년에는 영구 귀국하여 판화뿐 아니라 회화작업도 하여 유화작품만의 전시로도 큰 호평을 받았다. 그의 판화는 대부분 20cm x 30cm 이내의 작은 화면이지만, 오랜 명상과 사색으로 짜인 구도의 조밀함, 깊고 우아한 색상이 감탄을 자아낸다. 잔디밭 위에 놓인 손수건이나 팽이, 실패, 부러진 성냥개비, 조약돌 하나, 날아가는 기러기의 물빛 날개 등 어쩌면 오랜 외국생활 동안 고향이 연상되는 하잘것없는 소품들 모두가 밀도 높은 화면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이 판화 ‘Rose’는 몇 해 전 경매회사에서 시행한 5월의 경매에서 120만원에 낙찰 받은 작품이다. 판화는 50만원 전후에 낙찰되는 게 보통이었는데, 이 작품은 경쟁자가 하도 많아서 그렇게 올라갔다.
잔잔한 잔디 위로 푸르른 달빛 가득 내린 들판에, 여섯 그루의 향나무 같은 침엽수가 늘어섰다. 하늘 위로 부푼 상현달이 안개를 뿜으며 떠 있다. 바로 그 아래 잔디 위로 여느 풀꽃 하나 없이, 다만 장미 줄기 하나가 달 가까이 치솟아 올연하다. 잎 그물도 선명하고 빨간 꽃 한 송이는 달에 빛바래 핑크의 요염을 뽐내고 있다. 달과 장미의 사랑의 밀어가 시작되었다. 잔디와 잇닿은 풀밭과 숲의 경계가 달그림자와 안개에 몽롱하게 묻히고, 하늘빛마저 옅은 구름 사이 푸릇한 휘장을 신비롭게 드리워 야릇한 여름밤은 무르익고 있다. 수묵화의 물감이 종이에 스미어 번지듯 동판의 수많은 미세구멍에서 흘러나온 물감이 침엽수 가지와 그 떨기를 흔들리게 하고 있다.
서양화에 스푸마토(sfumato)라는 기법이 있는데, 이 말은 이탈리아어 스푸마레(sfumare, 연기처럼 사라진다)에서 유래되었다. 회화에서 사물의 경계가 희미하게 그려지고, 그 희미함이 선명함을 만들어 내는데, 황규백 판화에서 그 환상적 기법을 보게 된다.
달이 이울고 새벽이 오면 오롯이 이슬 머금고, 그러나 다시 밤을 기다릴 장미의 설렘이 꽃이 지는 그 순간까지 이어질 여운을 즐길 수 있으니.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여름이면 시원한 대나무 그늘이 생각난다. 대나무는 그 성질이 굳고 곧아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좋아했다. 그런데, 이 대나무를 가리켜 ‘차군(此君)’, 즉 ‘이 군자(君子)’라고 해서 우리나라의 경우, 뒤에 대나무 숲이 있는 정자에 차군정(此君亭) 또는 차군헌(此君軒)등 당호(堂號)를 붙여놓고 있다.
그러면 ‘차군(此君)’이란 용어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중국 동진(東晉) 시대,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왕희지(王羲之)란 인물이 등장한다. 왕희지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모두 5명으로, 현지(玄之) 응지(凝之) 휘지(徽之) 조지(操之) 헌지(獻之)가 그들인데 그중 5남인 왕휘지(王徽之)가 특히나 대나무를 좋아했다. 워낙 특이한 성격이었던 그와 대나무에 대한 일화가 ‘진서(晉書)’에 전해지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오(吳) 땅에 한 사대부가 좋은 대나무를 가꾼다는 말을 듣고, 휘지가 이를 보러 갔다. 도착해서 죽림 아래 가마에 앉아 감상을 하며 시를 읊조리고 있으니, 주인이 마당을 쓸다가 들어와 앉기를 권했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주인이 나중에 출타함에 문을 걸어 잠그니, 비로소 탄식을 하고 자리를 떴다.’
그의 또 다른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 번은 남이 비워둔 집에 임시로 기거하고 있었는데, 집 주위에 대나무를 심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집도 아닌데 왜 심느냐 묻자 대답하길, “하루라도 이 군자[此君]를 보지 않고 어찌 견딘단 말인가!”[何可一日無此君邪] 하였다.)’
이 고사는 매우 유명해서, 훗날 대나무를 지칭하는 용어인 ‘차군’이란 단어가 여기서 탄생하였다. 마지막으로, ‘차군’이란 용어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소동파의 시 ‘어잠승녹균헌(於潛僧綠筠軒)’을 소개한다.
可使食無肉(가사식무육)
식사에 고기가 없을 수는 있어도
不可居無竹(불가거무죽)
사는 곳에 대나무는 없을 수 없네.
無肉令人瘦(무육영인수)
고기 없으면 사람을 야위게 하지만
無竹令人俗(무죽영인속)
대나무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오.
人瘦尙可肥(인수상가비)
사람이 야위면 살찌울 수 있으나
士俗不可醫(사속불가의)
선비가 속되면 고칠 수 없는 법이라오.
傍人笑此言(방인소차언)
옆 사람 이 말을 듣고 비웃으면서
似高還似癡(사고환사치)
고상한 것 같으나 실은 어리석도다. (대나무도 앞에 두고 고기도 실컷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임)
若對此君仍大嚼(약대차군잉대작)
그러나 대나무 앞에 두고 고기 실컷 먹는다면
世間那有揚州鶴(세간나유양주학)
세상에 어찌 양주학(揚州鶴)이란 말 있었겠는가?
이 시를 해설하자면, 옛날에 손님들이 서로 노닐면서 각자 자신의 소원을 말했는데, 어떤 자는 양주자사(揚州刺史)가 되기를 원하고, 어떤 자는 재물이 많기를 원하고, 또 어떤 자는 신선이 되어 학(鶴)을 타고 하늘에 오르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그중 어떤 자가 말하기를 “나는 허리에 십만 관(貫)의 돈을 차고, 학을 타고서, 양주의 하늘을 오르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니 ‘양주학’이란 말은, 양주자사라는 관직과 십만 관의 돈과, 학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신선이 되겠다는 욕망을 모두 가지려는 것으로, 실현 불가능한 욕심을 나타낸다.
뉴욕 주립대(빙햄튼) 경제학 박사, 보아스 투자자문 대표이사,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장 등 역임.
여름이면 시원한 대나무 그늘이 생각난다. 대나무는 그 성질이 굳고 곧아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좋아했다. 그런데, 이 대나무를 가리켜 ‘차군(此君)’, 즉 ‘이 군자(君子)’라고 해서 우리나라의 경우, 뒤에 대나무 숲이 있는 정자에 차군정(此君亭) 또는 차군헌(此君軒)등 당호(堂號)를 붙여놓고 있다.
그러면 ‘차군(此君)’이란 용어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중국 동진(東晉) 시대,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왕희지(王羲之)란 인물이 등장한다. 왕희지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모두 5명으로, 현지(玄之) 응지(凝之) 휘지(徽之) 조지(操之) 헌지(獻之)가 그들인데 그중 5남인 왕휘지(王徽之)가 특히나 대나무를 좋아했다. 워낙 특이한 성격이었던 그와 대나무에 대한 일화가 ‘진서(晉書)’에 전해지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오(吳) 땅에 한 사대부가 좋은 대나무를 가꾼다는 말을 듣고, 휘지가 이를 보러 갔다. 도착해서 죽림 아래 가마에 앉아 감상을 하며 시를 읊조리고 있으니, 주인이 마당을 쓸다가 들어와 앉기를 권했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주인이 나중에 출타함에 문을 걸어 잠그니, 비로소 탄식을 하고 자리를 떴다.’
그의 또 다른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 번은 남이 비워둔 집에 임시로 기거하고 있었는데, 집 주위에 대나무를 심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집도 아닌데 왜 심느냐 묻자 대답하길, “하루라도 이 군자[此君]를 보지 않고 어찌 견딘단 말인가!”[何可一日無此君邪] 하였다.)’
이 고사는 매우 유명해서, 훗날 대나무를 지칭하는 용어인 ‘차군’이란 단어가 여기서 탄생하였다. 마지막으로, ‘차군’이란 용어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소동파의 시 ‘어잠승녹균헌(於潛僧綠筠軒)’을 소개한다.
可使食無肉(가사식무육)
식사에 고기가 없을 수는 있어도
不可居無竹(불가거무죽)
사는 곳에 대나무는 없을 수 없네.
無肉令人瘦(무육영인수)
고기 없으면 사람을 야위게 하지만
無竹令人俗(무죽영인속)
대나무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오.
人瘦尙可肥(인수상가비)
사람이 야위면 살찌울 수 있으나
士俗不可醫(사속불가의)
선비가 속되면 고칠 수 없는 법이라오.
傍人笑此言(방인소차언)
옆 사람 이 말을 듣고 비웃으면서
似高還似癡(사고환사치)
고상한 것 같으나 실은 어리석도다. (대나무도 앞에 두고 고기도 실컷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임)
若對此君仍大嚼(약대차군잉대작)
그러나 대나무 앞에 두고 고기 실컷 먹는다면
世間那有揚州鶴(세간나유양주학)
세상에 어찌 양주학(揚州鶴)이란 말 있었겠는가?
이 시를 해설하자면, 옛날에 손님들이 서로 노닐면서 각자 자신의 소원을 말했는데, 어떤 자는 양주자사(揚州刺史)가 되기를 원하고, 어떤 자는 재물이 많기를 원하고, 또 어떤 자는 신선이 되어 학(鶴)을 타고 하늘에 오르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그중 어떤 자가 말하기를 “나는 허리에 십만 관(貫)의 돈을 차고, 학을 타고서, 양주의 하늘을 오르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니 ‘양주학’이란 말은, 양주자사라는 관직과 십만 관의 돈과, 학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신선이 되겠다는 욕망을 모두 가지려는 것으로, 실현 불가능한 욕심을 나타낸다.
여자는 등 뒤에서 두 손을 나의 양 어깨에 얹었다. 뭉친 어깨를 풀어주는 안마 포즈. 어깨를 몇 번 주무르더니… 어럽쇼, 흐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게 우는 소리인 줄 몰랐다. 어떤 여자가 안마를 하려다 말고 흐느끼겠는가. 그것도 처음 만난 여자가 등 뒤에서 말이다. 기분이 좀 ‘야시꾸리’해지는 사이에 흐느낌은 굵은 눈물방울이 되어 (뒤늦게 동석했던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긴데) 그녀는 눈물범벅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언제나처럼) 이미 꽐라(술에 만취한 상태를 이르는 말) 상태였으므로 사태를 파악할 힘이 없었지만 기분은 한껏 ‘야시꾸리’해졌다.
글·사진 윤동혁 PD
인사동 골목 중에서도 가장 으슥한 곳에 자리 잡은 한정식 술집에서 그 여자는 우리 방에 들어왔다. 마담 언니의 친구라고 했다. 그녀의 안마로 지병을 고친 사람도 있다고 마담이 말했다. 혈관에 피를 잘 통하게 해주고 있노라면 안마 받고 있는 사람의 전 생애가 보인다고 했다.
지금도 길 가다가 빨간 깃발, 흰 깃발이 기다란 대나무에 매달려 있는 걸 보면 똥개나 참새처럼 조급해지는 내가 아닌가. 아니 나의 추억이 엑스레이에 비친 내장처럼 훤히 보인다는데, 그냥 고맙고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어깨를 맡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매우 서럽게, 격렬하게 울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불쌍한 인간이 다 있느냐. 어떻게 이런 슬픔의 덩어리들을 가슴 가득 품고 살아가느냐.” 그녀는 대충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불쌍하다고? 슬픔의 덩어리? 다른 사람의 엑스레이하고 바뀌었나. 혹시 슬픈 일들이 많았는데 워낙 인생의 깊이에 관해서는 멍청한지라 슬렁슬렁 흘리며 살아왔던 것일까.
나는 애써서 나의 지난날들 중에 정말 슬픈 요소들이 있었는지 치약 짜듯 과거를 저 밑에서부터 짜내기 시작했다. 음... 그러고 보니 그 여자가 울 만큼은 아니더라도 가슴 아린 일들이 줄줄이 엮이는 것이었다.
목포 유달산 기슭에서 나는 정자, 난자의 도킹에 성공했으나 엄마 뱃속에 들어 있는 상태로 주거지가 이동되었다. 절반은 목포에서, 나머지 절반은 제주에서 기다리다가 세상에 나왔다. 이른바 나의 사주에 낙인으로 찍혀 있는 ‘천고역마(天孤驛馬)’의 시작이다. 형을 형이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그 누구처럼 나는 제주도를 나의 고향이라고 말하지 못 한다. 다섯 살 때 제주도를 떠났다. 아무것도 모르고 (산 게 아니라) 살아졌지만 나의 몸에는 제주 4·3사건의 피비린내와 언제 징집될지 모르는 아버지의 불안, 그리고 고부(시어머니-며느리) 전쟁의 파편들이 무수히 박혀 버린 모양이다.
단지 다섯 해를 살고 태어난 곳을 떠났는데 당시에는 대양이나 다름없는 두 바다를 건넜다. 제주에서 부산까지 하루 종일 흔들리고 가서 하루인가 이틀 쉬고 또 배를 탔다. 포항까지 가서 바다가 잔잔하기를 기다려 세 번째 배를 타고 총 닷새 만에 도착한 곳이 울릉도.
그때도,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울릉도엔 ‘바퀴’가 없었다. 자동차는 물론이고 리어카나 자전거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징어는 많았다. 그러나 모두 팔 물건이어서 감시가 심했다. 집집마다 오징어를 쌓아둔 채 군대 천막 같은 것으로 덮어놓고 육지에서 값이 오르기를 기다렸다. 학교 앞 구멍가게에는 커다란 유리병 속에 ‘눈깔사탕’이 가득 들어 있었지만 우리들이 먹을 수 있는 간식은 오직 오징어, 그중에서도 다리밖에 없었다. 스무 마리를 한 축으로 정확히 묶어놓았기 때문에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한 마리를 통째로 훔친다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였다.
다리를 한 개씩 뽑아 먹었는데 영민한 부모들은 산만큼 쌓아놓은 오징어 다발들 속에서 단 한 개의 다리가 사라진 오징어를 귀신처럼 찾아냈다. 그 아이는 그날 죽는 날이었다. “육지에 나가서 제값 못 받는다”고, “이 오징어 잘 팔려야 느이 형 포항으로 학교 보낼 수 있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거나 매를 맞거나 했다.
그런데 오징어 다리는 우리 몸에 흔적을 남겼다. 그러면 부모들은 오징어 다발을 낱낱이 조사하지 않고도 ‘흠, 이 녀석이 또 훔쳐 먹었구나’ 하고 금방 알아차렸다. 바로 부스럼인데 오징어만 먹으면 팔뚝에 둥근 원이 몇 개씩 그려지는 부스럼병을 우리 모두 갖고 있었다. 울릉도에 살면서 오징어를 다리 말고 몸통까지 먹는 게 우리들의 꿈이었다.
우산국민학교에 들어가 2학년에 올라갔을 때, 무선전신국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는 강릉으로 발령 받았다. 두 번째로 포항 땅을 밟았는데 이때부터 컬처 쇼크(문화충격)가 생기기 시작했다. 수많은 ‘바퀴’들을 만났고 바퀴 수만큼 나는 어지러웠다. 게다가 합승이라고 쓴 차를 ‘합승’이라고 읽어야 할지 ‘승합’이라고 읽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러나 ‘바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강릉국민학교 2학년 몇 반에 전입한 나는 첫날부터 스스로 맴을 돌아야 하는 바퀴가 되어야 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이 그때 이미 있었다. 전쟁고아들이 반마다 몇 명씩 있었고 그들은 나로 인하여 색다른 기쁨을 얻었다.
“야, 너 일어나서 책 읽어!”
쉬는 시간에 그들은 나에게 책을 읽으라고 했다. 잘 아시다시피 제주도에서나 울릉도에서나 일어나서 책을 읽을 때는 표준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표준어로 읽으면 나를 괴롭혔다. 머리를 쥐어박고 발로 정강이를 걷어찼다.
“울릉도 말로 읽으란 말이다. 갱상도 말로.”
나는 맞는 것이 무섭고 싫었지만 그 보다는 억울했다. 그러나 억울함은 가슴 깊은 곳으로 쑤셔 넣고서 이 불합리하고도 불편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면 좋을까 궁리했다.
당시 강릉은 전 지역에서 사람들이 공을 찬다고 할 만큼 축구 붐이었다. 어린아이들도 골목에서 공을 찼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 점심시간 할 것 없이 열정적으로 축구를 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도 점심을 굶어가면서 (고아원에서 도시락을 안 싸주니까) 공놀이를 했는데 밥도 굶는 녀석들이 변변한 축구공을 가졌을 리 만무했다.
아버지 주머니에서 돈을 꽤 훔쳤다. ‘정식’ 축구공을 사서 영웅들에게 주었다. 그날 그리고 며칠간은 내가 감히 센터포워드를 맡아서 영웅들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볐다. 단 며칠에 불과했지만 나는 이런 행복을 위해서라면 또 돈을 훔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부 전쟁은 이제 파편이 튀는 단계를 지나 집이 불타는 수준에 이르렀다.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에 낀 아버지는 어느 편도 들지 않고서 매일 술을 마시고 통금 사이렌과 함께 집에 들어오셨다. 그러던 와중에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여자(나는 그 여자가 우리 엄마보다 더 좋았다)까지 나타나자 어머니는 짐을 싸서 친정 식구들이 많이 사는 전라남도 송정리로 이사해 버렸고, 그 짐 보따리 속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첫 번째 땅 송정리. 그곳에서 나는 토끼를 키웠다. 열심히 전라도 말을 익혀서 금방 네이티브 발음이 되었기 때문에 매를 맞거나 하지는 않았다. 토끼는 새끼를 자주, 많이 나아서 금방 시장에 내다팔았다. 그 돈으로 필통이며 연필을 샀다. 여름엔 토끼풀을 뜯다가 괜스레 지나가는 뱀을 낫으로 찍어 죽이고, 보리가 한창 영글 땐 보리밭 속을 파고들어가 보리피리도 불었다. 가장 좋았던, 평화로웠던 그 세월은 단 1년 만에 끝나고 인천 송도로 이사 갔다. 아버지가 그리로 발령받았기 때문이었는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바보천치’여서 ‘와이로(뇌물)’를 먹이면 될 것을 이리저리 떠다니며 돈을 모으기는커녕 생고생을 시킨다고 눈에 날을 세웠다.
1962년께 송도는 그냥 황무지 갯벌뿐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인가 뭔가를 열심히 외우며 갯벌에 나가 조개를 주웠다. 뒷동산엔 야생 부추(그땐 전부 야생이었지 뭐)가 풀처럼 자라고 있어서 부추조갯국을 끓여먹을 수 있었다. 우리 마을엔 낡은 권투 장갑이 두 짝 있었고 어른들이 심심하면 우리들을 풀밭 링에 올려서 ‘싸움질’을 시켰는데 그때 눈에서 불이 번쩍 튀는 경험을 많이 했다.
6학년은 인천 시내 학교(인천에서는 변두리)로 옮겨 공부를 좀 하다가 일류 중학교라고 하는 데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학교와 학교를 떠돌아다니는 긴 여정은 끝이 났다. 같은 운동장을 사용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6년이나 다녔으니 인천이 내 고향이 되고 말았다. 그 중학교를 졸업하고 역시 명문이라고 하는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나는 외갓집에 가서 놀고 오겠다고 말하고 호남선 완행열차를 탔다. 느린 뱀처럼 밤새 꿈틀꿈틀 기어간 기차가 송정리역에다 나를 내려놓았다. 역에서 외삼촌 집까지 걸어갈 때 여명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사단은 이때 났다.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앉아 있는데 둘째 외사촌 누나가 감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내며 방으로 들어섰다. 나는 화살을 이마에 맞았다. 그 화살은 나를 사랑의 지옥으로 떨어뜨렸다. 이제껏 방황하던 나의 영혼이 전심전력하여 한 여인(?)을 사랑하게 만들었으니 슬프도다, 어찌하여 외사촌 누나를… 누가 듣기만 해도 해괴하고 망측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냥 마셨다. 막걸리, 소주 안 가리고 마셨다. “이런 미친놈이 있나.” 엄마가 도마 위에 내 손을 올려놓고 식칼로 내리치려 할 때도 얼른 손을 빼서 달아났고 또 마셨다. 예비고사 1기생인 나는 시험 보기 1주일 전에 ‘생누룩’ 막걸리 석 되를 마시고 한겨울 논바닥에서 잤다. 그리고 (오로지 막걸리 원 없이 마시려는 욕망 하나로) 고려대에 들어가서 마시고 또 마셨다.
‘마셔도 사내답게 막걸리만 마신다’라고 막걸리 찬가를 불렀지만 나는 마셔도 빚을 내서 마셨고, 전날 실수로 얼굴이 화끈거리면 그 창피를 덮기 위해 또 마셨다.
대충 여기까지 추억의 치약을 짜고 나니까 또 술발이 당기는구나. 그런데 그 여자는 나의 이런 생의 이력을 보고서도 눈물이 솟구쳤다는 말인가. 나는 단 한 번도 이념을 위해서 또는 노동자, 빈민을 위해서 나의 시간을 내거나 술잔을 든 적이 없다. 그냥 소소한 개인사, 남자들의 자잘한 일상사에 온몸 바쳐 술을 마셨을 뿐이다.
그러니 나의 어깨를 만지며 등 뒤에서 흐느꼈던 여인이여. 그대가 맥을 잘못 짚었던 게 틀림없소. 아니면 내가 꽐라 상태에서 헛것을 보았거나.
△ 윤동혁(尹東赫) PD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한국일보 MBC, SBS 등을 거쳐 강원도와 경기도 땅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집도 절도 없으므로) 프리랜서PD로 일하고 있다. 로 방송대상 최우수 작품상을 받는 등 한국방송대상을 3회 수상했다. 라는 책을 펴내는 등 집필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경로우대증’을 받는 내년 1월을 계기로 ‘나홀로 방송국’을 열 계획이다.
톨스토이의 어록 중에 “불효하는 사람과는 친구를 삼지 말라”는 말이 있다. 공자도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효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부모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효에 관한 정서는 동·서양이 같다. 그렇다면 어쩌면 효야말로 전 세계 사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연결고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원로 언론인 권혁승(權赫昇·83) 백교문학회 회장은 그 발상의 원대한 가능성에 주목했다. 효 문화의 세계적 전파를 위해, 평창 동계 올림픽이 다가옴에 따라 더욱 분주해지고 있는 그의 발걸음 속에 담긴 효의 가치를 추적해 본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한국의 효 사상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한국의 유교 문화는 중국의 유교 문화를 더욱 발전시켜서 중국의 학계에서조차도 유교 문화 연구를 위해 우리나라에 와서 조사를 하게끔 만들었을 정도다. 그 유교 사상에서 비롯된 효 사상 또한 한국에서 특히나 강렬하게 발현되었다.
‘그렇다면 한류로 대변되는 케이팝이나 김치로 대변되는 식문화처럼, 효도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으로서 널리 전파될 수 있다.’
권혁승 전 서울경제신문 사장, 그리고 현 백교문학회 회장은 그러한 생각에 강력한 추진력을 달아 효 사상의 세계 전파를 위해 야심찬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사다.
어머니를 기리는 사모정 공원을 만들다
어머니를 향한 권 회장의 그리움과 감사의 표현은 어언 6년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릉 출신인 그는 고향인 경포동 지변 저수지 아래 핸다리마을에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는 공원을 조성한다. 이름하여 ‘사모정(思母亭)’ 공원. 이곳은 권 회장이 사유지에 사비를 들여 만든 것으로, 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사라진 그의 생가에 대한 향수를 되살리고 한국 전통 문화의 근간인 효의 가치를 되새기기 위해 세워졌다. 안에는 정자를 비롯해 3개의 시비(詩碑)와 강릉 출신 예술인 신봉승 시인, 권순형 도예가의 작품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냥 보통의 정자가 아니라 제대로 잘 만들어진 전통 문화재에 진배없는 정자를 짓고 싶었습니다. 문화재 관리국장을 지낸 김진무 씨와 2년 여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전라북도 임실에서 제가 원하던 정자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정자의 제작자를 만나 제작에 들어갔죠.”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을 들여 만들어진 사모정 공원은 자연스럽게 효에 대한 권 회장의 의지를 느낄 수 있게 만든다. 그는 준공식 날 이 공원을 동네 마을 사람들의 휴식 공간뿐만 아니라 강릉에 오는 사람이라면 어머니의 정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고 한 목적을 위해서 기꺼이 강릉시에 기증했다.
사친문학의 본산, 백교문학회의 시작
그런데 사모정 공원을 만들어 부모님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고 나니 그에게 문인들의 의견이 쏟아졌다. 지역 규모의 공원을 만들어 어머니의 뜻을 기리는 것도 좋으나, 보다 큰 범주의 의미가 있는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목소리들이었다. 문인들에게서 나온 발상인 만큼 문학상을 활용하는 방법이 추천됐다. 그리하여 백교문학회가 설립되었다. 백교(白橋)는 ‘하얀 다리’라는 의미로 그의 고향인 ‘핸다리’가 바로 백교의 강릉 사투리다. 권 회장은 이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다.
“백교문학상은 우리나라에 사친문학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만들게 됐습니다.”
사친(思親)은 부모를 생각한다는 의미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선조 때 문신 겸 시인인 박인로가 ‘사친’이라는 제목으로 시조를 지어 문집 에 실은 바가 있다. 그러한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백교문학상의 후보로 오를 글은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 시와 수필만이 가능하다. 철저하게 부모님에 대한 마음을 어떻게 그려내는가에만 초점을 맞추기에, 권 회장 말마따나 사친문학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도 크게 이상할 게 없다.
2010년 제정된 백교문학상은 2014년에 5회째를 맞이했다. 제5회 백교문학상 시 부문의 수상자는 ‘항아리’를 쓴 정재돈 작가. 수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백교문학상이 강원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국 단위로 운용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어머니는 줄곧 항아리처럼
둥글고 잘 발효된 가정을 만드시길 원하셨다.
갓 빚은 항아리에 가정의 안위를 담그시고
오랜 기간 모정의 효소로
자식들을 맛깔나게 숙성시키셨다.
행여나 음지에서 부식되지는 않을까
뚜껑 열어 햇살이 드는 곳에 말리셨고
우설(雨雪)의 세례엔 포근한 품으로 감싸 안으며
남몰래 스미는 한기를 떠안으셨다. (하략)
한국의 효 사상이 세계의 효 사상이 되어야
최근 권 회장의 행보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좀 더 큰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최명희 강릉 시장이 어느 잡지에 수필을 쓴 걸 읽게 됐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우리가 추구하는 길, 효 사상의 정서와 일치하는 내용이었어요. 신사임당과 그의 아들 율곡 이이의 고향이 바로 강릉 오죽헌이란 것을 설명하면서 강원도의 효 사상을 2018평창 동계올림픽 때 보다 널리 알리자, 그렇게 하여 강원도를 국제적인 효의 중심 도시로 만들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걸 읽고 제가 해야 할 게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권 회장은 최근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효 사상이 날로 꺼져가고 있음을 개탄했다. 그 잃어가는 효심을 적극적으로 함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책으로 한국의 효 사상을 세계화하여 인본주의적 가치를 세워 한국의 문화 영토를 확장하는 시도를 해보자, 그러면 2018년 동계올림픽이 끝나도 무형문화유산으로서 남을 것 아니겠습니까?”
권 회장은 세계적 인류학자인 아놀드 토인비가 “한국이 인류 문화에 기여한 것은 효 사상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한 말에서 힘을 얻었다.
“효의 기본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적인 힘은 사랑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둘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효가 전세계 도서관에 꽂힌다
권 회장은 문학계, 언론계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에게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글을 청탁했다. 예상보다 험난했던, 제작 시간이 무려 3년 이상 소요된 장기 프로젝트였다. 작가들로부터 원고, 프로필, 사진을 받고, 원고 교정 교열을 하고 감수도 받고 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야말로 책의 목적답게 정성을 다해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이 만들어졌다.
책에는 박목월 시인의 시 ‘어머니의 눈물’을 비롯해 홍일식 전 고려대학교 총장, 김진선 전 강원도 지사, 최명희 강릉시장, 이희종 강원일보 사장 등 사회 각계지도층 저명인사 문인 63명의 작품 71편이 실렸다. 영문판으로도 만들어진 이 책은 국내 국립·대학도서관 190곳과 해외 60개국 국립·대학도서관 110곳에 기증됐다. 2018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방문할 80개국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114명에게도 이 책을 줄 예정이다.
어머니, 신의 다른 이름
2남 2녀의 차남인 권 회장은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죽기는커녕 더욱 생생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연숙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어머니는 1900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권 회장이 한국일보 편집국장이던 20여 년 전,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 가면 그래요, 대관령만 넘어서면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사모정에 가면 가만히 앉아서 시를 읽어보게 되고….”
권 회장은 어머니에 대한 정의를 간단하게, ‘어머니는 신’이라고 표현했다.
“서양 사람들은 죽을 때 ‘오 마이 갓’ 하고 죽잖아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엄마야’ 하고 죽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어머니가 신과 같은 거죠.”
어머니를 신과 같이 여긴다는 것, 권 회장이 품고 있는 효 사상이 일종의 신앙이자 율법과 같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던 부분이다. 권 회장의 말에서 사모정 공원의 시비들 중 신봉승이 쓴 시 ‘어머니’의 한 구절이 보였다.
촛불이 심지를 태우듯
어둠을 밝혀 주시고
손 시린 겨울밤은 화로가 되시네.
아름다워라
형극의 가시만 골라서 지은
거친 옷, 새 옷처럼 입으시고
환하게 웃으시던
어머니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