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할 것 없이 제 이야기 하고 싶어 야단인 세상이다. 들어보면 제각기 대단한 구석도 있고, 웃음 나는 구절도 있으며, 눈물 훔치게 하는 구간도 있다. 그러나 그 재미난 이야기 들어줄 사람 없이 혼자 떠들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성화 관악FM DJ는 ‘듣는’ 아나운서다. 누구보다 말할 기회가 많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듣는 일이 우선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믿고 듣는, 현역 최장수 아나운서로 자리매김했는지도 모른다. 잘 듣는 사람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세상이지 않은가.
이성화 DJ는 1959년 부산 MBC에서 아나운서 생활을 시작한 상업방송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다. 이후 서울 MBC, RSB 라디오 서울(동양방송의 전신), TBC 동양방송까지 다양한 방송국의 개국 아나운서로 자리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현재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인 KBS 제2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 초대 DJ를 1964년부터 1972년까지 8년 동안 맡기도 했다.
아나운서, 현대사 한복판에 서다
1959년부터 1980년까지, 그가 아나운서로 한창 이름 날리던 때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사건이 많던 시기였다. 부산 MBC 아나운서로 일하던 때였다. 그는 우연히 들어선 다방 창가에 앉아 있는 엄순영 씨를 발견했다. 시선을 사로잡는 미모에 감탄한 이성화 아나운서는 엄 씨를 미스코리아 경남 대회에 출전시키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그를 설득해 심사 3일 전에 아슬아슬하게 후보 등록을 마쳤는데, 부산 미스코리아에 선발되면서 엄 씨는 미스코리아 본선에 진출할 자격까지 얻었다.
당시 한국일보사에서 실시했던 미스코리아 본선 대회는 경복궁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대회 전날 엄 씨와 함께 서울에 올라온 그는 당시 김지태 서울 MBC 사장의 자택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침 사모님이 그를 깨우며 하는 말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미스 리, 쿠데타가 일어났대요’ 하시는데,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멍한 채로 대문을 열었더니 집 앞으로 탱크가 지나가지 뭐예요.” 그때가 1961년 5월 16일 아침이었다. 2년 차 사회 초년생이 5·16 군사정변의 순간을 직접 목도한 것이다. 그는 이외에도 아나운서 자리에 앉아 3·15 부정선거, 4·19혁명 등 굵직한 사건을 보도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정치인부터 유명 가수, 배우 등 명사를 만날 일이 많았다. 만났던 당시에는 몰랐으나 후에 역사적 인물이 된 경우도 있다. 그가 부회장을 맡았던 여류방송인클럽이 한 군부대를 위문차 방문한 일이 있었다. “안내받으며 사단 내부를 둘러보고 사단장을 비롯한 장성들과 기념 촬영을 했죠. 굉장히 대접받으며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에는 꿈에도 몰랐죠. 나란히 서서 사진 찍었던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역사적 인물이 될 거라고는 말예요.” 그는 지금도 김재규와 함께 있는 사진을 보면 권력이 다 무엇이고,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생각한다.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와 배짱
인생무상, 덧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전성기는 빛나기 마련이다. 그는 업계 안팎으로 일찍이 능력을 인정받은 1세대 커리어우먼이었다. 재치 있고 순발력이 좋다고 소문 난 덕분에 당시 생방송 스케줄이 잡힌 PD들에게는 섭외 1순위 아나운서였다. 게다가 당시 발간되던 잡지 ‘아리랑’에서 진행한 아나운서 인기 순위 조사에서 당당히 1위를 거머쥐기도 했다.
“동양방송에서 ‘가로수를 누비며’를 진행하던 시절이었어요. 요즘처럼 방송에서 노골적으로 남녀 간의 문제, 부부간의 문제를 다루는 일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요. 택시 기사와 전화 연결을 할 때 제가 ‘기사님 밤늦게 운전하고 들어가도 부인께서 식사 정성껏 챙겨주시면 덕분에 기운 나시죠? 그러면 기사님도 부인께 친절을 베풀어야지요’ 하면 바로 알아듣고 상대편에서 ‘그럼요. 다음 날 아침상에 달걀프라이가 올라온답니다’ 하고 대답하거든요. 듣는 사람들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지요.”
그의 인기에는 뛰어난 순발력과 더불어 듣기 좋은 음성이 한몫 단단히 했다. 연극 연출가 오사량은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라며 그의 목소리를 극찬했다. 목을 써야 하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평생 목 관리를 모르고 살았으니 천직이나 다름없다.
이성화 DJ의 방송 인생을 논할 때는 당찬 성격을 빼놓을 수 없다. 부산 MBC의 방송요원 모집 공고를 보고 응시했다가 덜컥 합격해 방송 인생이 시작된 것, 예상 못한 순간에 순발력을 발하는 기지도 그의 당찬 성격에서 비롯됐다.
전국체육대회가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리던 시절, 육영수 여사가 직접 방문한 일이 있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전국체육대회 중계방송의 진행석에서 방송 준비를 하던 그는 마이크를 쥐고 대뜸 육 여사가 앉은 단상으로 올랐다. 단상 밑을 지키고 서 있던 경호원 둘이 막아섰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동양라디오에서 나왔는데 잠깐 인터뷰만 할게요’ 하고서 그 둘이 망설이는 틈을 타 단상에 올라섰어요. 올라가는 동안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한 다음 육영수 여사한테 ‘안녕하십니까. 이따 방송 시작하거든 날씨가 어떤지만 여쭤볼게요. 오늘 날씨가 좋지요? 하고 물으면 ‘네’ 하는 대답이랑 선수들 잘 뛰라는 말씀만 해주세요’ 그랬어요. 돌이켜 생각해도 보통 배짱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결국 그는 계획에 없던 영부인의 인터뷰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쾌지나 청춘에서 제2의 청춘을 열다
이후 1980년 신군부의 주도로 언론통폐합이 이뤄지면서 당시 몸담고 있던 TBC 방송이 문을 닫았다. 이때 그의 활약상에도 일시정지 버튼이 눌렸다. 밖에서 그만 일하고 가정으로 돌아오라는 남편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후 방송에 대한 욕심, 재능, 외부의 인정을 모두 던져두고 30년을 주부로 살았던 그는 9년 전 뜻하지 않게 아쉬움을 풀 기회를 얻었다. TBC 방송국 막내 PD였던 동료의 소개를 받아 비영리 라디오 방송국 관악FM에서 라디오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서울 관악구에 사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회화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맡았다.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고 발음이 정확해 한국어 선생님으로 발탁된 것이다. 그러나 반응이 좋지 못했고, 방송을 맡은 그 역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에 제작진과 함께 고민한 끝에 폐지됐던 ‘쾌지나 청춘’ 방송을 되살리는 카드를 선택했고, 그는 현재 9년째 ‘쾌지나 청춘’의 월요일 DJ를 맡고 있다.
‘쾌지나 청춘’은 국내 최초 어르신 방송단이 만드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간 오전 6시에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쾌지나 청춘’은 고정 코너 ‘생활의 지혜’, ‘생활 건강’과 요일마다 다른 여섯 가지 단독 코너로 이뤄진다. 이성화 DJ와 함께하는 월요일에는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인터뷰 코너가 진행된다. 코너의 아이템 기획부터 게스트 섭외, 인물에 대한 사전 취재와 원고 작성은 모두 그의 몫이다. 녹음을 진행해보고 더 끌어낼 이야깃거리가 있다고 판단하면 회차를 늘려 추가 녹음을 진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획 및 진행자만으로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완성할 수 없다. 관악FM 내의 오랜 파트너인 김우신 PD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이다. 베테랑 DJ로서 방송이 어떻게 제작되는지 알기에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며 방송 제작에 힘써준 그가 고맙기만 하다. “지금까지 기획진행 이성화, 기술편집 김우신 프로듀서였습니다.” 매 방송마다 빠짐없이 넣는 멘트만큼이나 그를 향한 애정이 빼곡하다.
한창때는 하루에 10시간도 방송했던 베테랑 방송인에게, 30년이란 기나긴 공백기를 뛰어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청취자에게 신청곡을 주문받으면 막내 작가가 서고로 뛰어올라가 CD를 찾는 동안 즉흥에서 멘트를 지어내던 시절과는 사뭇 딴판이지만, 라디오 DJ 일은 그에게 여전히 즐겁기만 한 분야다. 그는 매 방송이 끝난 뒤 직접 준비한 원고를 일일이 개인 블로그에 올리곤 한다. 젊을 때부터 습관처럼 하던 기록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방송과 게스트를 홍보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여성·드라마, 그가 전할 새로운 이야기
평생을 진행자로 살았지만 다른 분야에 도전하는 꿈도 꾼다. 이를테면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상하고 제작하는 일 말이다. 만약 PD가 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는 중장년 여성들을 조명하는 프로그램 ‘라떼’를 만들고 싶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아내로만 살아오며 나이 들어버린 이들의 세월을 조명하고픈 욕심 때문이다.
“여성들이 남모르게 겪은 고통과 고난 같은 사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요. 가부장 사회의 제도와 법률에서 가장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던 사람들이거든요.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었는데 각자의 가정에 자양분으로 쓰이고 만 거예요. 그래서 유능한 여자들이 가슴에 응어리가 많아요.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할 곳도 없으니 친구들이랑 만날 때나 털어놓고 말죠. 그런 얘기를 자주 듣는데 정말 가슴이 아파요.”
그만 해도 그랬다. 일에 욕심이 있고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남편의 반대를 거스르지 못해 끝내 집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았다. 은행에 입사할 때 결혼하면 그만두겠다는 각서를 써야 했고, 여자가 남편과 아이를 두고 바깥일을 하면 손가락질하던 시절이었다. 당대 여성들에게 선망받는 방송인이었던 그도 방송을 마치면 아내이자 엄마로서 일할 줄만 알았지 자기 계발에 시간 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주부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아나운서로서 아무런 활약도 하지 못한 채 흘려보낸 30년의 시간이 그에게 아쉬움으로 남았다.
아쉬운 만큼 그는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지금에 열중하다 보니 새로운 목표도 계속해서 생겨난다. 그는 80대에 들어서면서 드라마 공부를 시작했다. 예전부터 드라마 대본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야 도전할 여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촬영 현장에서 어엿한 스토리텔러로 활약하고픈 열정이 샘솟아 4년 전에는 전문 학원까지 등록해 수업도 들었다.
“쾌지나 청춘 기획하고 진행하랴, 집에 가면 블로그 글도 올리랴. 게다가 남편 밥도 챙겨줘야 해요. 쉴 새 없이 바쁜데도 드라마가 너무 쓰고 싶어서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면서 대본을 썼어요. 드라마라는 게 제각기 다른 갈래의 사람들이 한데 얽혀 진행되는 이야기잖아요. 저도 그렇게 멋진 예술의 한 줄기로 끼고 싶은 거죠.”
‘옛날 사람’인 그는 그가 실제로 보고 들은 ‘옛날이야기’를 50분짜리 대본 한 편에 풀어냈다. 요즘 사람들의 AI, 우주 공간 같은 요즘 이야기 말고 욕심쟁이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명예를 탐하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담았다고 했다. 그 대본으로 당장 드라마를 제작할 수 없고, 촬영 현장에서 스토리텔러로 활동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지금은 아는 것이 없지만, 그는 꾸준히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다. 처음 아나운서 일을 시작했던 그 당찬 성격과 배짱을 무기로 내세우면서.
1세대 아나운서인 그는 아나운서가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친화력을 꼽았다. 친화력이 있으려면 배려와 친절은 기본으로 갖춰야 한다. 처음 보는 상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파악하며, 이를 이끌어내는 능력까지. 아나운서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이 친화력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관악FM에서만 400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을 만났다. 400개의 이야기를 듣고 400개의 아름다움을 뽑아낼 줄 아는 그는 친화력 그 자체나 다름없다. 이야기가 익숙하거든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 좋고, 몰랐던 세월의 이야기라면 새로워 좋다. 들을 줄 아는 아나운서, 한결같은 그의 인생이 아름답다.
●Exhibition
◇살바도르 달리 : Imagination and Reality
일정 4월 3일까지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디자인 전시관
20세기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스페인 초현실주의 대가인 살바도르 달리(1904~1989)의 국내 최초 대규모 회고전이 이달 20일까지 열린다. 달리의 유화 및 삽화, 대형 설치작품, 영화와 애니메이션, 사진 등의 걸작 140여 점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레플리카(복제품)가 아닌 ‘진짜 원화 작품’ 전시다.
전시는 아홉 개 섹션으로 나눴으며, 달리의 유년 시절부터 전 세계의 주목받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기까지의 시기별 작품 특성을 조명했다. 또한 달리와 영향을 주고받았던 인물과 개인적인 순간들도 함께 소개한다. ‘예술이 인생을 지배해야 한다’는 달리의 신념을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달리의 부모는 그를 ‘죽은 형의 환생’으로 여겼다. 온전히 자신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달리는 정신분열 증상을 겪었고 괴짜가 됐다. 진짜 그를 봐준 사람은 아내 갈라뿐이었다. 달리는 평생 그녀만을 사랑했다. “나의 어머니, 아버지, 피카소, 심지어 돈보다도 갈라를 더 사랑한다”고 말할 정도. 달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갈라와 관련된 작품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는 달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기억의 지속’은 없다. 그 아쉬움은 ‘다가오는 밤의 그림자’(1931), ‘시간의 속도’(1931), ‘무제 : 맑은 날씨의 지속’(1932) 등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 4.4
일정 3월 27일까지 장소 부산시립미술관
방탄소년단(BTS) 리더 RM이 최근 관람해 화제를 모은 전시다. 프랑스 현대미술 거장 크리스티앙 볼탕스키(1944~2021)는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리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그는 홀로코스트 또는 쇼아(Shoah)의 작가, 죽음의 작가라 불린다. 볼탕스키는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직접 경험하진 않았지만, 사진과 설치미술, 사운드, 조명 등으로 집단의 역사와 기억, 애도와 추모 등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평생 ‘죽음’을 주제로 다뤄온 작가는 전시 제목 ‘4.4’도 직접 지었다. 그가 태어난 해인 ‘1944년’을 뜻하는 동시에 인생을 4단계로 나눌 때 ‘생의 마지막 단계’를 뜻하기도 한다.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공들인 이 전시가 그의 예술 여정의 마침표가 됐다.
●Book
◇뇌과학자의 엄마, 치매에 걸리다(온조 아야코·지호)
일본의 뇌과학자 온조 아야코의 어머니는 예순다섯의 이른 나이에 알츠하이머성 치매 진단을 받는다. 10년 넘는 시간 동안 뇌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온 딸에게는 더욱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고 죄책감마저 든다.
이에 저자는 치매로 고통받는 이들과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점점 모든 것을 잃어가는 엄마를 2년 반에 걸쳐 관찰했다. 매일의 사건, 기분, 감정 전부를 기록했다. 특히 ‘기억을 잃으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닌 걸까’, ‘치매에 걸리면 사람다움을 잃는가’와 같은 의문에 두려움을 느끼며 치열하게 파고들었다.
저자는 치매란 어떤 뇌질환이고, 망상·배회·공격성 등 정신행동 증상은 왜 나타나는지 뇌과학과 심리학 등 다양한 연구 논문을 근거로 풀어냈다. 그리고 문제 예방법으로 ‘기억 메워주기’, ‘산책하기’와 같이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사소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을 택했다. 저자는 엄마가 요리할 때 기억을 상기시켜 성공적으로 마치도록 도왔고, 아버지는 아내와 산책을 했다. 이는 엄마의 병을 낫게 하진 못했지만 얼굴에 미소를 되찾게 했다. 더불어 엄마는 소파에 앉아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났다.
알츠하이머병 환자는 기억은 잃어가지만 감정이 남아 있다. 저자는 책을 통해 치매에 걸렸어도 결국 감정이 건재한 이상 사람다움을 유지할 수 있고 여전히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태리 아파트먼트(마시모 그라멜리니·시월이일)
현재로부터 60년 후인 2080년 12월이 배경인 소설이다. 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 코로나 팬데믹에 대해 들려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는 미래에서 보면 현 상황도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위로를 독자에게 건넨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박영서·들녘)
저자는 ‘조선은 복지 국가’였다고 주장하며 조선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본다. 백성을 구휼하려는 통치자의 의지는 ‘단 한 명의 백성도 굶어 죽지 않게 하라’는 목표로 축약된다. 저자는 조선 복지 정책의 핵심을 사람에 대한 존중과 사랑, 즉 인(仁)이라고 분석한다.
◇용감한 구르메의 미식 라이브러리(알렉상드르 스테른·윌북)
1978년생 파리지앵인 작가 알렉상드르 스테른은 미식가로서 세계를 돌며 희귀한 맛을 찾아 대중에게 알려왔다. 이 책은 세계 5대륙 155개국에서 골라 모은 700가지 맛을 정리한 것이다. 한국 음식은 김치·홍어·소주·번데기·호떡·팥빙수 등을 추천했다.
●Stage
◇또! 오해영
일정 3월 9일 ~ 5월 29일
장소 서경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스콘1관
연출한은결
출연 손호영, 장동우, 재윤, 레이나, 양서윤, 길하은, 허순미 등
2020년 초연된 뮤지컬 ‘또! 오해영’이 돌아온다. 이 뮤지컬은 2016년 방영된 에릭·서현진 주연 동명의 tvN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다. 오해영이라는 동명이인의 두 여자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도경의 오해에서 시작된 로맨스를 그린다.
특히 뮤지컬 ‘또! 오해영’은 두 오해영이 가진 결핍을 채워주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성장 스토리로 재구성, 응원이 필요했던 이들에게 큰 힘이 되는 힐링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또한 벤의 ‘꿈처럼’, 정승환의 ‘너였다면’ 등 기존 원작의 OST는 물론 신곡을 추가해 드라마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이번 공연에서는 ‘박도경’ 역에 초연에 이어 손호영이 참여하며, 새롭게 장동우, 재윤(SF9)이 합류한다. 박도경은 외모도 능력도 완벽하지만 까칠한 성격에 예민함까지 가진 남자다. 마음이 가는 일은 절대 멈추지 않는 씩씩한 보통 여자 ‘오해영’ 역에는 레이나, 양서윤, 길하은이 함께한다.
◇잃어버린 얼굴 1895
일정 3월 5일 ~ 3월 20일
장소 서울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연출 이지나
출연 차지연, 하은서, 김용한, 최인형, 이동규, 윤태호, 이혜수 등
뮤지컬 ‘잃어버린 얼굴 1895’는 단 한 장의 사진도 남기지 않은 명성황후의 미스터리한 삶에 픽션을 더해 재탄생한 작품이다. 기존 작품과 달리 명성황후가 여성으로서 느낀 아픔과 슬픔, 인간으로서 가진 고민과 욕망에 집중해 그의 삶을 그려낸다.
더불어 연극, 음악, 무용이 혼합된 서울예술단만의 독창적 장르인 창작가무극의 정수를 맛볼 수 있으며, 2013년 초연 이후 다섯 번째 시즌을 맞았다. 명성황후 역에 배우 차지연이 다시 돌아오며, 새로운 황후로 서울예술단 단원 하은서가 합류해 기대감을 높였다.
◇리지
일정 3월 24일 ~ 6월 12일
장소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연출 김태형
출연 전성민, 유리아, 이소정, 김려원, 여은, 제이민, 김수연, 연정 등
여성 4인조 록 뮤지컬 ‘리지’가 초연 2년 만에 돌아온다. 미국의 미제 사건 ‘리지 보든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1892년 성공한 장의사 앤드류 보든과 그의 부인 에비가 집 안에서 잔인하게 도끼로 살해되면서 둘째 딸 리지가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재판을 통해 숨겨진 비밀과 진실이 드러난다. 초연 당시 지루할 틈 없는 전개와 6인조 라이브 밴드의 파워풀한 록 기반 넘버, 여성 캐릭터들 간의 연대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이번에는 우주소녀 연정이 리지의 친구 앨리스 역을 맡아 뮤지컬에 첫 도전해 기대를 모은다.
‘트로트의 황제’ 설운도(64)의 노래에는 특별함이 있다. 그의 노래에는 추억이 녹아 있고(사랑의 트위스트), 아픈 이별의 기억이 떠오른다.(보랏빛 엽서) 힘든 순간 위로가 되어주기도 했다.(다함께 차차차) 설운도가 대한민국 국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지 벌써 40년이다. 그 스스로도 “오랜 시간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 않냐”고 말할 정도로 가수로서 자부심이 있다. 그렇다고 권위적이거나 까탈스럽지 않다. 오히려 누구보다 젊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있고, 시대를 읽는 눈을 갖고 있다. 40년의 역사는 결코 그냥 써지지 않았다.
설운도는 ‘트로트계의 싱어송라이터’로 통한다. 그는 노래도 잘 부르지만 작곡 실력도 뛰어나다. 설운도의 히트곡 ‘쌈바의 여인’, ‘보랏빛 엽서’, ‘사랑이 이런 건가요’ 등은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더불어 ‘사랑의 트위스트’, ‘여자 여자 여자’는 설운도가 작곡하고 아내 이수진이 작사한 곡들이다. 영화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의 현실판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에는 설운도가 임영웅에게 선물한 노래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가 대박 나기도 했다.
이처럼 시대를 풍미하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진정한 가수, 설운도. 그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타고난 DNA로 가수가 됐지만, 꾸준한 노력 없이는 오늘날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국회의원들을 보면 2선, 3선 계속하잖아요. 그러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나요. 우리도 똑같아요. 노력하지 않고 히트곡이 없으면 안 되죠. 그래서 지금도 한해 한해 열심히 사는 거죠. 노래 연습도 열심히 하고, 음악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작곡도 계속하죠. 제가 트로트 가수 작곡가 중 현대적인 감각의 노래를 많이 만들잖아요. 저는 현재 어떤 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지 연구를 굉장히 많이 해요.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 보니 한 곡 만드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죠. 저한테 곡 받으려고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이 와요. 뚝딱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오는 사람들한테 내가 가진 작은 능력으로 도와주고 싶죠.”
가수가 될 운명
설운도에게 가수는 ‘운명’이었다. 6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설운도(본명 이영춘)는 유독 어머니를 빼닮았다. 얼굴, 성격, 그리고 노래 실력까지. 설운도의 어머니는 치과의사 아버지 밑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시청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노래자랑에 나갔는데 단번에 MBC 전속 가수로 발탁됐다. 그 정도로 노래 실력이 뛰어났지만, 집안의 반대로 꿈을 접어야만 했다.
설운도의 어머니는 가수가 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됐다. 꿈을 이루지 못하면 더욱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이에 그녀는 자신을 닮아 노래를 잘 부르는 설운도가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이뤄주기를 바랐다.
“어머니는 노래를 정말 잘 부르셨어요.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면 눈물이 주르륵 흘렀어요. 당신의 못다 이룬 꿈이 가수였기 때문에 앉으나 서나 ‘너라도 내 꿈을 이뤄다오’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귓전에 맴돌았어요. 저에게 가수가 되는 것은 과제였고, 결과적으로 효도했죠. 문화관광부 주최로 수여하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이 있어요. 1995년에 어머니께서 그걸 받으셨는데 정말 많이 우셨어요. ‘엄마의 한을 풀어줘서 정말 고맙고 기쁘다’고 하셨죠.”
설운도는 부산에서 알아주는 금수저 출신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기울어졌고 어머니도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울산의 한 회사 구내식당을 운영했다. 설운도는 어머니를 보러 울산에 갔다가 울산 MBC 주최 노래자랑에 출연하게 됐다. 그때 불과 열여섯 살이었던 설운도. 놀라운 노래 실력으로 울산 대표로 뽑혀 서울 MBC에서 진행하는 전국 노래자랑까지 진출했다. 당시 그는 금메달을 네 개 받았고,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저는 늘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요. 어머니는 제가 꿈도 이뤄드리고, 잘되는 모습을 보시고 돌아가셨잖아요.(2016년 별세) 그런데 아버지는 제가 열일곱 살 때 돌아가셨으니까…. 제가 서울 MBC에 갔다가 금메달을 하나씩 들고 돌아오면, 아버지께서 동네에 자랑하고 다니시던 모습이 생각나요. 아버님이 살아 계셨으면 제가 잘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게 늘 가슴이 아파요.”
가수로서의 재능을 확인한 설운도는 이후 부산의 극장 쇼, 라이브 클럽을 전전하며 무명 가수로 활동했다. 부산에서도 인기가 많고 돈을 잘 벌었기 때문에 굳이 서울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때 군 복무를 마친 그에게 숙자매의 매니저 안태섭 씨가 찾아왔다. 안 씨의 권유로 설운도는 1982년 KBS ‘신인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 격인 프로그램이다.
설운도는 5주 연속 우승하며 가요계에 정식 데뷔했고, 이듬해 ‘잃어버린 30년’을 발표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특히 이 곡은 ‘남북 이산가족 찾기’ TV 방영 당시 메인 곡으로 선정됐고, 설운도의 구슬픈 목소리는 많은 이들을 눈물짓게 했다. 뜨거운 관심 속에 설운도는 그해 KBS ‘10대 가수상’을 수상했다.
“열여섯 살 때부터 극장 쇼부터 지방 업소를 다니고, 고생을 많이 했죠. 그래서 공부를 제대로 못 했어요. 졸업도 못 하고 중퇴하고 그랬죠. 특히 제가 서울로 올라왔을 때는 어머니께서 하시던 사업이 망해서 정말 어려웠어요. 저도 자리 잡은 게 아니라 도와주지 못했죠. 그러는 바람에 엄마하고 형제자매들이 다 흩어졌어요. ‘잃어버린 30년’이 히트치면서 다시 만났죠.”
2세로 이어진 가수 DNA
마침내 오랜 무명 생활을 청산하고 주목받은 설운도. 그러나 그의 가수 인생은 쉽게 가는 법이 없었다. 1984년 회사에 문제가 생겨 문을 닫게 된 것. 설운도는 당시에 대해 “졸지에 홀로서기를 하는데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더라. 10대 가수에서 밑바닥으로 떨어졌다”고 회상했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그는 이를 감당하지 못했고 일본으로 도피했다. 그는 3~4년 일본에서 엔카 공연을 했다.
그리고 돌아온 설운도는 1991년 ‘다함께 차차차’를 발표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MBC ‘10대 가수상’을 2년 연속 받으며 트로트 4대 천왕으로 급부상했다. 듣기만 해도 힘이 나는 ‘다함께 차차차’는 현재도 국민 송으로 통한다. 더불어 그해 겹경사가 터졌다. 설운도는 이수진과 결혼했고, 이듬해 설운도 작곡·이수진 작사 ‘여자 여자 여자’가 탄생했다.
설운도와 이수진의 결혼은 당시 큰 화제였다. 이수진은 1980년대 ‘빨간 앵두’, ‘자유부인’ 등에 출연한 영화배우였다. 연예인 커플, 특히 가수와 배우 커플은 흔치 않았기 에 두 사람은 더욱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수진은 결혼 후 설운도의 노래를 작사했고, 현재는 의상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설운도의 무대 위 화려한 의상들은 그녀가 만든 것이다. 설운도의 의상들이 유독 멋스러운 이유는 아내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아내와는 파티 장소에서 만났는데, 옆자리에 앉았어요. 외모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더라고요. 말을 붙였는데 고향이 부산 쪽인 양산이라는 거예요. 더욱 호감이 갔죠. 사실 제가 숫기가 없는데 이 여자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아내가 노래를 좋아한다고 앨범 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유명한 작곡가라며 곡을 주겠다고 거짓말로 아내를 꾀었어요. 사실 아내 노래 실력은 형편없었는데, 당시 누가 아내를 가수로 키우려고 바람 잡았던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아내와 데이트를 했는데 큰아들이 바로 생겨버린 거예요. 이 여자를 만나라는 하늘의 뜻이구나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동거하다가 애 낳고 결혼했어요.”
설운도는 아내 이수진에게 ‘강원도 포수’라는 별명을 지어줬다고 밝혔다. “강원도는 워낙 숲이 우거져서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온다. 우리 아내는 돈을 벌어다 주면 돈이 밖으로 안 나온다. 그만큼 알뜰하다는 소리다. 덕분에 애들도 잘 컸고 내조를 잘 해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했다. 둘 다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자기주장이 강해 부부 싸움을 많이 했다고. 설운도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장남 이승현은 1990년에 태어났고, 이듬해 둘째 아들 이승민이 태어났다. 막내딸 이승아는 1996년생이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가수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첫째 아들 이승현은 루민이라는 예명으로 가수로 활동 중이다. 그는 아이돌 그룹 포커즈, 엠파이어로 활동했고, 최근에는 솔로로 신곡을 발표했다. 딸 이승아는 가수 지망생으로 KBS 2TV ‘트롯 전국체전’에 출연한 바 있다. 설운도는 이승아의 근황에 대해 “가수는 물론 연예계 생각을 접었다”고 강조했다.
“솔직히 저는 엄마, 아빠가 연예계에 있었지만, 아이들은 다른 길을 가길 바랐어요. 애들이 워낙 하고 싶어 하니 막지는 못하지만, 노래로 경쟁 사회에서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고 봐요. 제가 어디 나가서 ‘우리 아들입니다’ 소개하는 그런 것을 못 해요. 우리 딸도 오디션에 나왔는데, 제가 심사위원인데도 내 딸 나온다고 아무한테도 말 안 해서 떨어졌잖아요. 아무리 딸이라도 실력이 안 되면 떨어져야죠.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노력하고 실력도 향상돼요. 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고기 잡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이 좋죠.”
다시, 트로트 전성기
2020년 TV조선 ‘미스터트롯’으로 트로트 열풍이 이어지면서 설운도는 제2의 전성기를 썼다. 지난해 ‘미스터트롯’ 우승자 임영웅 효과로 설운도의 노래 세 곡이 동시에 히트를 쳤다. 설운도는 이를 두고 “기적 같은 일”이라고 표현하면서 “영웅이와 나는 묘한 조합이다. 둘의 시너지가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짚었다.
먼저 임영웅이 ‘미스터트롯’에서 ‘보랏빛 엽서’를 불러 설운도는 23년 만에 역주행 신화를 썼다. 또한 2019년 나온 설운도의 노래 ‘사랑이 이런 건가요’도 임영웅이 부르며 재조명됐다. 이에 설운도는 임영웅에게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를 작곡해 선물해줬다.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 뮤직비디오는 조회 수 5000만 뷰 돌파를 앞두고 있다. 트로트 역사상 유례없는 인기다.
“‘보랏빛 엽서’가 히트하면서 나도 동반 성장하게 된 거죠. 영웅이한테 고맙잖아요. 그래서 곡 선물을 해주고 싶었는데,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가 영웅이한테 가게 된 거죠. 많은 국민들이 노래를 좋아해주셔서 작곡가로서 기쁘고 뿌듯해요. 요즘 사랑이 메말랐잖아요. 사랑의 전도사 같은 노래예요. 삭막한 세상에 모두가 이해하고 용서하고 배려하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어요. 후배 영웅이 덕을 많이 봤으니까 늘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걔가 속이 깊어서 고마움을 알고 항상 감사해하는 친구예요.”
설운도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히트곡을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사랑이 이런 건가요’를 꼽은 것. 그는 “젊은이들이 트로트를 좋아하게 만든 노래다. 펑키한 리듬이라 트로트 느낌도 안 나고, 이 노래에 자부심이 있다”고 설명했다. 설운도는 트로트가 중장년층의 전유물이 아닌 젊은 세대에도 통하는 음악이 된 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트로트가 재조명받은 이유로 신선해졌다, 맑아졌다, 수준이 높아졌다, 트로트 하는 친구들이 젊고 다양한 연령층의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등을 꼽을 수 있어요. 예전에는 트로트는 부모들이나 듣고 옛날 사람이 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트로트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죠.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고 우리의 노래구나라고 사람들이 인식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트로트를 좀 더 신선하고 수준 높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설운도는 이처럼 젊은 세대와 통합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앞날을 선도해가야 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는 미래 유망 사업인 NFT에도 관심이 아주 많다. NFT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대체 불가 토큰을 말한다. 설운도는 ‘잃어버린 30년’ LP를 등록해 NFT 기부 챌린지에 참여했다.
“NFT로 기부 챌린지 말고 조만간 새로운 도전을 할 예정이에요. NFT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재산이에요. 죽더라도 나는 그 가상공간에 살아 있게 되죠. 가상공간이라는 것이 예전에는 우주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오던 것이었지만 앞으로는 현실이 되고,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닌 세상이 온 거죠. NFT는 부가가치가 높기 때문에 지금 해야 해요. 나중에 가서 하면 늦죠.”
설운도는 “트로트는 나의 모든 것”이라면서 파란만장한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산 밤업소를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좌절도 맛봤기 때문에 현재의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힘든 순간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노력을 배로 했기 때문에 기회가 찾아왔고 영광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생각한다. 설운도가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는 ‘K-트로트’다. 한국의 정서가 담긴 트로트가 전 세계에서 통하길 바라는 대부의 마음이다.
“저는 트로트라는 장르를 고집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트로트 가수로 남을 거예요. 트로트 가수로 무대에서 노래하다 죽어야죠. 힘들었던 역경을 지나오면서 지금의 제가 탄생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마음속에 항상 희망과 꿈,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바라는 ‘K-트로트’라는 개념은 전 세계인이 트로트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K-트로트’ 문을 누가 열지는 모르겠어요. 누군가는 그 문을 열어야 하고, 그다음에는 모두가 주력해야겠죠. 세계 문화를 주도해가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만들어가자는 거죠.”
119만 평의 대지에 웅장한 건물, 그리고 바람에 펄럭이는 815개의 태극기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절로 뭉클해진다. 1919년 3월 1일 그날의 함성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다. 103주년 3·1절을 앞두고 천안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한시준(68) 독립기념관 관장을 만나 우리 역사에서 독립운동이 중요한 이유와 의의를 들어봤다.
지난해 제12대 독립기념관 관장에 취임한 한시준 관장은 평생을 ‘독립운동’을 연구한 역사학자다. 그는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인하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특히 1988년부터 2019년까지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한편, 한국광복군, 대한민국임시정부, 한중 공동 항일운동 등을 연구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한시준 관장은 “제 전공이 독립운동사여서 독립기념관이 만들어질 때부터 교육, 강의도 하고 자문을 하기도 했다. 2006년부터 2년 동안은 독립기념관 내에 있는 한국독립연구소 연구소장을 맡았다”며 독립기념관과의 특별한 인연을 얘기했다.
더욱이 그는 기존의 관습을 깨고 선출된 의미 있는 독립기념관 관장이다. 한시준 관장은 “독립기념관이 건립되고 대대로 관장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이 아닌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학자가 관장을 맡은 건 제가 처음이다”라고 밝혔다.
이는 그만큼 한시준 관장이 독립운동 전문가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벌써 1년을 보낸 그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리고 앞으로 독립기념관을 어떻게 이끌고 싶을까.
“밖에서 볼 때와 관장으로 안에서 보는 게 다르더라고요. 독립기념관을 이렇게 크게 지어놓고, 국민뿐만 아니라 정부도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른다는 점이 매우 안타까워요. 독립기념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념관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기념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1900년대 20세기 전반기에 제국주의가 만연했고 많은 약소국들이 식민지가 됐죠. 식민지가 된 나라들은 독립운동을 했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거의 다 독립했어요. 그런데 독립한 나라들 중에 우리나라처럼 독립기념관을 엄청난 규모로 지어놓고 독립운동 역사를 공부하고 교육하는 나라는 없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독립기념관이 세계적인 기념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나라가 1945년에 해방했잖아요. 우리가 독립운동을 해서 나라를 되찾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미국이 일본하고 싸워서 이겨 어부지리로 해방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우리가 일본과 싸워서 나라를 되찾았다는 것을 알려야겠다는 생각도 크죠.”
독립운동의 중요성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 일제 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독립하기 위해 민족운동을 벌인 것을 독립운동이라고 한다. 특히 1919년에는 한국 독립운동 역사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게 된다.
한시준 관장은 독립운동이 우리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유에 대해 “한민족의 역사를 반만년이라고 하지 않나. 우리는 오랫동안 다른 민족한테 나라를 빼앗겨본 적이 없다. 그런데 1910년 처음으로 일본에 나라를 뺏겼고, 다시 되찾아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된 것이다. 우리 민족을 다시 살아나게 한 것이 바로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한시준 관장은 3·1운동에 대해 “대한민국의 어머니”라고 표현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일제의 폭압적 지배에 맞서 일어난 비폭력 만세 시위운동이다. 전국을 넘어 해외 방방곡곡에서 태극기를 든 사람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3·1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는 유관순 열사가 꼽힌다.
한시준 관장은 3·1운동에서 3·1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부분에 주목했다. 독립선언서에는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한 관장은 “이 핵심 문장은 대한민국이 건립되는 계기가 됐다”며 “3·1절과 대한민국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짚었다.
이후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됐다. 3월 1일에 독립국을 선언했기 때문에 국가 ‘대한민국’이 세워진 것. 그러나 이날을 대한민국 건국일로 보는 것이 맞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대한민국 건국일을 보는 시선은 두 가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4월 11일이라는 입장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을 건국일로 봐야 한다는 의견으로 갈린다. 한시준 관장은 “역사적 사실로 보면 1919년 4월 11일이 맞다.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날이다”라고 강조했다.
사실 그동안 암묵적으로 대한민국은 1919년 4월 11일에 세워졌다고 봤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보고 2008년 광복절에 ‘건국 60주년’ 행사를 열면서 잡음이 불거졌다. 이에 한시준 관장은 칼럼과 강연 등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뿌리”라며 1919년 4월 11일을 건국일로 인정받았다. 문 대통령은 2019년을 ‘건국 100주년’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건국일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고 확실하게 공식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다.
“1919년에 대한민국이 세워지면서 우리나라 역사는 확 바뀌었어요. 단군 때부터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국가의 주인은 군주였죠. 그때는 국민이라고 하지 않고 백성이라고 했어요. 백성은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죠. 지금은 국민이 주권을 갖고 있고, 권리도 갖고 있어요. 우리 반만년 역사에서 주권을 처음으로 행사하게 됐으니 그때 국가가 세워진 것이 맞는 거죠.”
한시준 관장은 현재도 역사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그는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역사가 어떻게 연계되는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한 관장은 “1945년 해방 후를 현대사라고 한다. 보통 그때 우리 역사가 새롭게 출발했다고 생각하지만, 독립운동에서 계속 이어진 것이다. 독립운동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해방 시기에도 살고, 그 이후에도 살면서 계속 연결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임시의정원’이라고 국회도 만들었어요. 국군도 이미 독립운동 시기에 독립군, 광복군이 있었죠. 지금 대한민국 정부도, 국군도, 국회도… 한국의 현대사는 1945년 해방되고 시작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 시기의 역사적 경험이 그대로 이어진 거예요.”
독립기념관, 전 세계에 알릴 것
독립기념관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를 기리고 후세를 위한 산 역사의 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관련 사료와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민족 기념관이다. 1982년 건립이 추진됐고, 1987년 8월 15일 개관했다. 한시준 관장은 “국민들이 성금을 내서 부지를 마련하고 건물을 지었고, 관련 자료도 많이 기증해주셨다”면서 국민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독립기념관의 한 해 관람객 수는 약 180만 명이라고 한다. 지난해는 코로나19의 여파로 114만 명에 그쳤다. 한시준 관장은 “그러나 관람객 중에 외국인의 비율은 1%도 안 된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전시가 흥미롭지 않기 때문에 거의 오지 않는 것”이라고 문제점을 짚었다.
이에 따라 관장으로서 그의 목표는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고, 독립기념관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이다. 한시준 관장은 앞으로 2년 내에 ‘연합국(미국·중국·영국)과 함께한 독립운동’ 전시관 만들기를 추진하고 있다. 1000평의 대규모 전시가 될 전망이다.
독립기념관에서는 지난해 8월 ‘한중 공동 항전 특별전’을 열었고, 올해는 한미 수교 140주년을 맞아 ‘한미 공동 항전 특별전’을 개최한다. 한시준 관장은 “1945년에 광복군이 미국 OSS라는 정보기구에서 훈련을 받고 작전을 수행한 바 있다. 보통 6·25 때 한미 동맹이 맺어진 줄 알지만 이미 오래전 맺어졌다”고 설명하며, 이를 들은 미군 장교도 놀랐던 일화를 소개했다. 이렇게 특별전을 통해 자료를 풍부하게 수집해 최종적으로는 ‘연합국’ 전시를 열 계획이다.
“독립운동가들은 우리 혼자 힘으로는 일본을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1910년에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해서 차지했는데, 한반도로 만족하지 않을 것을 알았죠. 일본이 중국, 러시아, 미국과도 충돌할 것을 예상했고, 일본이 그 나라들과 싸울 때 함께 전쟁한다는 전략을 세웠어요. 실제로 그분들이 예견했던 대로 일본은 중국을 침략했고, 1941년에는 미국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으며, 아시아를 차지하면서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도 침략했죠. 그래서 일본은 중국, 미국, 영국과 전쟁을 했어요. 우리는 그때 같이 연합해서 일본과 싸웠습니다. 우리나라가 연합국과 독립운동을 같이 해서 나라를 되찾은 것이죠. 그 전시를 보면 우리나라가 독립을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쟁취했다는 것을 알게 되겠죠.”
이처럼 독립운동가들은 전략가였다. 한시준 관장은 많은 독립운동가 중에서 조소앙 선생(1887~1958)의 업적을 특히 높게 평가했다. 더욱이 한 관장과 조소앙 선생은 특별한 인연이 있다.
20대 시절 한시준 관장은 사학과 학생이긴 했지만 사실 역사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군대를 가면서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군대에서 한 관장은 조소앙 선생의 조카를 만났는데, 그가 집에 있는 조소앙 선생의 책들을 갖다줬다고. 한시준 관장은 그 책들을 읽으면서 역사에 관심이 생겼다. 특히 독립운동을 전문적으로 파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현재에 이르렀다.
“조소앙 선생은 독립하면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지 생각한 분이에요. 특히 선생은 삼균(三均)주의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했어요. 자본주의 국가도, 공산주의 국가도 각각 장단점이 있잖아요. 그래서 선생은 자본주의가 가진 장점, 공산주의가 갖고 있는 장점을 모은 국가를 만든다는 논리를 세웠고, 그게 삼균주의예요. 인류 사회에서 누구도 세우지 못한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 한 사람이죠.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고 안중근 의사, 청산리 전투 등도 모두 훌륭하지만 저는 우리나라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했던 조소앙 선생이 참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박상돈 천안시장은 독립기념관에 ‘K-컬처 전시관’ 건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시준 관장은 이에 대해 “독립기념관과 대한민국의 역사를 세계에 알릴 기회가 될 수도 있다”면서 긍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특히 그는 “백범 김구 선생도 문화 국가를 세워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했다. 독립기념관의 취지와도 맞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여 눈길을 끌었다.
돌이켜보니 그렇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현재의 대한민국이 있었을까. 그때의 나라를 되찾으려는 간절한 움직임이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으로 이어졌다는 생각도 든다. 한시준 관장은 ‘불가능에 도전하여 가능을 창조한 독립정신’이라고 말한다. 그 독립정신이 바로 대한민국 모든 역사의 출발점이었다.
“여기 독립기념관에 오면 엄청난 정신, 기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독립운동 정신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거예요. 독립운동을 한마디로 비유할 때 달걀로 바위 치기라고 하잖아요. 우리는 달걀이고 일본은 바위죠. 달걀로 바위 못 깨잖아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과 협력하는 길로 갔잖아요. 독립운동가들이라고 달걀로 바위를 깰 수 있다고 생각했겠어요?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낸 것이 독립정신이죠.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갖고 독립기념관에 오면 독립정신,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정신을 받을 수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으로 많이 많이 오세요.”
은퇴 후 패션 회사 인턴으로 재취업한 70대 노인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인턴’. 이는 비단 해외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정부의 노인 일자리 사업 중에 ‘시니어 인턴십’이 있으며,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다. 시니어 인턴십 사업이 무엇인지 짚어보고, 실제로 시니어 인턴십을 거쳐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시니어의 이야기도 담아봤다.
시니어 인턴십은 보건복지부 주관 한국노인인력개발원과 기업이 함께 만드는 노인 일자리 사업의 일환이다. 만 60세 이상의 시니어에게 기업 내 인턴으로 일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직업 능력 강화와 재취업 기회를 촉진하는 사업으로, 2011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정부는 시니어 인턴십으로 구직자를 채용하는 기업에 인건비를 지원해준다. 인턴 지원금, 채용 지원금, 장기 취업유지 지원금이 있다. 먼저 인턴 지원금은 시니어 인턴십 참여 기업에 월 급여의 50%를 3개월 동안 지원하는 것을 말한다. 참여자 1인당 최고 월 37만 원이 지원된다. 또한 참여 기업이 인턴 종료 후 계속고용 계약(6개월 이상)을 체결한 경우, 채용 지원금으로 3개월 동안 최고 월 37만 원을 추가 지원받을 수 있다. 최대 총 222만 원의 인건비를 지원받는 셈이다.
장기 취업유지 지원금은 인턴십 사업으로 18개월 이상 고용한 뒤, 6개월 이상 계속고용 계약을 체결한 경우 총 90만 원의 장기 취업유지 지원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즉 시니어 인턴십은 노인과 기업 모두 윈윈 할 수 있는 일자리 사업이다. 노인은 실제 기업에서 일하면서 다른 일자리에 비해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고, 참여 기업은 구인난 해소, 인건비 절감, 고령 친화 기업 이미지 제고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점점 확대되는 시니어 인턴십
시니어 인턴십 참여 인원은 2011년 3643명으로 시작해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였다. 2019년에는 7349명, 2020년에는 1만 5547명으로 배로 뛰었다. 1만 명 대를 넘어선 것은 처음이다. 참여 기업 수는 4350개로 전년도 대비 참여 기업이 1862개 증가했다.
이 중 중도 포기하지 않고 시니어 인턴십 참여를 완료한 노인은 1만 4943명이며, 계속고용 노인은 1만 4389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2020년 시니어 인턴십 계속고용률은 무려 96.3%에 달한다.
또한 참여자 평균 연령은 65세로 나타났다. 참여 노인 1인당 월평균 소득도 매해 높아지고 있다. 2013년에는 월평균 소득이 81만 3079원이었는데, 2020년에는 최고치인 193만 7079원을 기록했다. 전년과 비교해도 약 15만 원 증가했다.
사업 유형으로 보면 단순 노무직인 일반형 참여자가 89.5%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사업시설 관리 및 사업 지원 서비스업이 3800명으로 가장 많았다. 또한 출판·영상·방송통신 및 정보서비스업이 61.5세로 평균 연령이 가장 낮았고, 건설업이 68.5세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정부는 올해 시니어 인턴십 사업을 더욱 확대한다. 앞서 말한 대로 2022년 노인 일자리 사업의 규모는 84만 5000명이다. 이 중 취업형(시니어 인턴십, 취업알선형) 노인 일자리 사업은 전년 대비 1만 4000개 증가한 12만 7000개다.
사업을 전담할 수행기관도 확충한다. 2022년 수행기관은 서울 25개를 포함해 전국 248개로 250여 개에 이른다. 2021년도 수행기관은 213개였다. 수행기관은 노인과 기업을 매칭해주는 역할을 하며, 노인에게 취업 관련 교육도 진행한다.
시니어 인턴십 어떻게 참여할까?
그렇다면 시니어 인턴십 사업 참여 방법은 무엇일까. 먼저 참여 가능한 기업은 만 60세 이상인 자를 고용할 의사가 있는 4대 보험 가입 사업장 중 근로자 보호 규정을 준수하는 기업이다. 다만 성직자, 종교종사원, 요양보호사 및 간병인 등 해당 직종 종사자 및 자영업자, 파견직 및 건설 일용 근로 형태는 사업 신청에서 제외된다.
시니어 인턴십 참여를 원하는 노인은 만 60세 이상이면 누구든지 신청 가능하다. 인턴십 신청을 한 후 한국노인인력개발원 및 수행기관의 소양 교육을 이수하면 자격을 갖게 된다. 이후 구인처에서 서류와 면접으로 심사를 진행하며, 이를 통과하면 채용된다.
근무 시간은 회사와 지원자가 논의해서 정할 수 있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경우는 파트타임형, 풀타임형을 나눠놓았다. 파트타임형 기업에는 사회적경제, 소상공인 지원, 지역 기반형이 속하며, 노인은 주 2~3회, 월 최대 57시간 활동한다. 풀타임형에는 중소기업, 그린·디지털 회사가 속하며, 주 5일 근무하고 4대 보험에도 가입된다. 보통 시니어들은 일의 능률과 관련해 파트타임형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니어 인턴십을 하기 위해서는 통상적으로 세 가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첫 번째, 서류 전형과 면접을 통과해야 한다. 회사에 대한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해야 하고, 자신의 역량이 회사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어필하는 것이 중요하다.
두 번째, 3개월의 인턴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 한다. 소위 말하는 ‘라떼는 말이야’ 식의 꼰대 정신을 내려놓아야 한다. 나이와 경력이 많다고 으스대거나 일을 대충 하면 안 되고, 조직원들과 융합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세 번째, 궁극적으로 채용 제의까지 이끌어내야 한다. 참여자의 최종 목표는 결국 취업이라는 생각을 갖고 회사가 자신을 뽑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바늘구멍보다 어렵다는 은퇴 후 재취업을 시니어 인턴십 제도로 성공해보자. “경험은 절대 늙지 않는다. 경험은 결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라는 영화 ‘인턴’의 명대사를 기억하면서.
■시니어 인턴십, 현장의 목소리를 듣다
◇시니어 인턴십, 저 같은 젊은 대표에게 필요해
- 홍원희 플레이시드스쿨 대표
사회적 기업 플레이시드스쿨(Playseed School)의 자문위원 이강호(65) 씨는 시니어 인턴십 과정을 거쳐 정직원이 됐다. 대표 홍원희(33) 씨와는 아빠와 딸뻘이다. 두 사람은 시니어 인턴십 사업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플레이시드스쿨은 놀이와 활동으로 성숙한 민주 시민을 양성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대표적으로 보드게임을 통해 민주주의, 통일, 사회적 경제, 세계 시민 교육 등을 하고 있다. 2017년 사단법인 회사로 시작해 2018년 11월에 예비 사회적 기업이 됐다. 20대를 NGO 활동을 하며 보낸 홍 대표는 경영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에 자문 역할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껴 2019년 시니어 인턴십 참여를 신청했다.
홍원희 대표는 이강호 씨의 이력을 보고 그가 단번에 마음에 들었다. 이 씨는 유엔(UN) 산하 아동구호기관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의 1994년 공채 1기다. 그는 25년간 기금 모금 마케팅 업무를 맡았다. 홍 대표는 이강호 씨가 비영리 법인을 잘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간절한 마음으로 이강호 씨 ‘모셔오기’에 성공했다.
이강호 씨는 2019년 6월 플레이시드스쿨의 인턴이 됐고, 2020년 1월 정직원이 됐다. 홍원희 대표의 혜안은 적중했다. 이 씨가 오고 사업 자문을 해주면서 매출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더불어 지난해 플레이시드스쿨은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됐다. 홍원희 대표는 이강호 씨 덕분에 힘든 순간을 버틸 수 있었다면서 고마움을 표했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기에 사회적 기업이 되니 두려움이 컸어요. 이제 숫자로 평가되고, 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줘야 하잖아요. 그때 선생님께서 ‘버티는 게 이기는 거다’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지난 3년을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더니 정확한 수치들이 보이더라고요. 내실을 다지고 역량을 강화한 거죠.”
홍 대표는 시니어 인턴십 사업이 더욱 널리 알려져서 다른 기업들도 자신처럼 도움을 받길 바랐다. 다만, 회사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 사업을 악용하는 사례는 근절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니어 인턴십 지원자분들을 보면 고스펙이거나 경력 많은 분들이 많아요. 정말 선생님 같은 분을 필요로 하는 기업이 많을 거예요. 그런데 그분들한테 제대로 된 업무를 주지 못한다는 사례 발표들이 있어요. 그것은 회사도 불편하고 선생님들한테도 잘못된 예우라고 생각해요. 대표의 확고한 의지를 본다든지, 선정 기업에 대한 기준이 높아졌으면 좋겠어요.”
◇시니어 인턴의 노하우는 큰 힘, 꼰대 짓은 금지!
- 이강호 플레이시드스쿨 자문위원
이강호 씨는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서울 50+ 인턴십’ 사업의 일환인 ‘사회적경제(SE) 펠로우십’을 통해 플레이시드스쿨과 인연을 맺었다. ‘사회적경제(SE) 펠로우십’은 50+ 세대와 사회적경제 기업(사회적기업, 협동조합, 소셜 벤처)을 연결해준다.
2015년부터 사회적 기업에 관심을 가진 이 씨는 인턴십을 하고자 10개 회사와 면접을 봤다. 그중에 4개 회사가 마음에 들었지만, ‘미션’과 ‘비전’을 혼동하는 모습에 고심했다. 그때 마침 플레이시드스쿨의 러브콜을 받고 최종 선택했다. 이강호 씨는 후회가 없다며 “대표와 같이 서로 존중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점이 제일 좋다”고 말했다.
2019년 이강호 씨가 인턴을 시작할 당시 플레이시드스쿨은 정리되지 않은 채 주먹구구식으로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씨는 회사를 이해하는 데만 3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는 “보드게임이 뭔지도 몰랐고, 기업이라고는 하는데 수익이 안 나니 정체성이 애매모호했다”고 털어놓았다.
플레이시드스쿨의 경영, 마케팅, 홍보의 자문위원이 된 이강호 씨가 처음으로 한 일은 ‘미션과 비전 바로 세우기’였다. 또한 그는 “밑지는 장사를 할 필요는 없다”고 조언하며 사업군을 정리했고, 회사 소개 책자도 새로 만들었다. “유니세프에서 했던 일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플레이시드스쿨은 ‘사회’가 붙어 있지만 기업이니까 이익을 창출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저의 목표죠. 인턴십이 끝나고 정직원 의사를 물을 때 ‘모르겠다’고 했는데 대표님이 와달라고 하더라고요. 대신 제가 조건을 걸었어요. 앞으로 3년 뒤에도 남지 않는 장사를 하면 나는 나가겠다, 그리고 회사 문 닫고 다른 일을 하라고 했죠. 다행히도 회사 사정이 점점 좋아지고 있고, 내년 정도면 자리를 잡을 것 같아요.”
이 씨는 시니어 인턴십의 유일한 단점으로 “놀 시간이 부족하다”고 외쳤다. 근무는 3일이지만 집에서도 계속 사업이나 아이디어 생각을 해야 하고, 개인적으로 그는 사진 동호회 활동도 하고 운동도 하기 때문에 늘 바쁘다.
마지막으로 이강호 씨는 시니어들에게 “집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서 무엇이든지 해보라”고 조언했다. 그는 “하고 싶었는데 못 했던 것을 시도하라는 거다. 그게 뭔지 모르겠다면 책도 읽고, 언어도 배우고, 운동도 하다 보면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중 하나로 재취업이 목표라면 시니어 인턴십은 좋은 방법이라고 전했다.
“시니어 인턴십은 모든 분들에게 좋을 것 같아요. 직장생활 오래한 분들, 사업한 분들 모두요. 노하우,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은 사회적 기업, 스타트업에 큰 힘이 되거든요. ‘명절 때 먼저 전화해라’, ‘지나가는 길에 거래처가 있다면 들러라’ 같은 것도 사소한 일이지만 하나의 노하우죠. 이때까지 건강하게 살아 있다면 젊은 사람보다 나은 점이 뭐라도 있지 않겠어요? 꼰대 짓만 안 하면 돼요! ‘라떼는 말이야’만 안 하면 우리는 배울 게 많은 사람들이죠.”
홀로서기는 인간이 사는 동안 꼭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다. 마치 나비가 되기 위해 애벌레가 번데기의 변태 과정을 거치는 것과 유사하다. 가장 안정적인 홀로서기는 오랜 기간 개체의 성장을 기반으로 이뤄지는데, 예를 들면 아이는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20년 가까이 준비한다. 부모의 품 안에서 경험을 쌓고, 신체적·심리적·사회적으로 자신을 확장시켜 결국 부모로부터 독립을 이뤄낸다. 그러나 노년기의 홀로서기는 좀 다르다. 체력과 건강을 잃고, 퇴직 후 직업과 수입원을 잃거나, 언젠가는 배우자·친구들을 떠나보낸다. 노년의 홀로서기는 ‘성장’이 아닌 갑작스런 ‘상실’을 기반으로 하기에 액티브 시니어라는 역동적인 단어를 붙인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움을 지우기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는 흔히 노년기의 홀로서기를 준비할 때 자신의 마음속에 바라는 ‘결과’를 먼저 떠올린다. 경제적으로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고, 신체적 건강을 통해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하며, 주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 등을 말이다. 이를 위해 재정적으로 철저하게 은퇴 설계도 하고, 자신에게 맞는 취미 생활도 찾으며, 여러 질병이 보장되는 보험도 마련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런 것들을 철저히 준비했다 하더라도 마음은 여전히 괴롭고, 자식들 문제, 돈 문제, 주위 사람들과의 갈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오히려 건강에 더욱 집착하고, 경제적으로 부족한 자신을 한탄하거나 질투에 휩싸여 결핍을 경험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제2의 인생을 찾아가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내면의 상실과 결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런 괴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는 우리가 노년의 홀로서기에 앞서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와 동일한 문제다. 잭 니콜슨 주연의 영화 ‘어바웃 슈미트’의 주인공도 바로 이런 상황을 맞닥뜨린다.
평생을 몸담았던 보험회사에서 66세에 정년퇴직을 맞이한 슈미트. 아내는 이제 주름 가득한 할머니가 되어 사사건건 자신을 간섭하고, 딸과의 관계는 냉랭하다. 하루에 77센트를 후원하는 탄자니아 꼬마 엔두구에게 편지 보내는 것 이외에는 일상의 공허함을 느끼던 슈미트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아내의 죽음과 이후 알게 된 그녀의 외도를 맞닥뜨린다. 설상가상 딸은 물침대 외판원인 ‘놈팡이 같은 녀석’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아내도, 딸도, 친구도, 직장도 어느 날 갑자기 모두 사라져버린 슈미트는 마지막 남은 희망인 딸의 결혼식을 방해하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다. 좌충우돌 부딪치는 그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결국 딸은 놈팡이와 행복하게 결혼식을 올린다. 그동안 당연한 듯 슈미트의 삶에 자리 잡고 있던 결과물들이 은퇴 이후 노년기의 문 앞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렸다. 어쩔 수 없이 결혼식 축사 후 화장실에서 홀로 터뜨리는 그의 울음은 그렇기에 더욱 애잔하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되돌릴 수 없는 노년의 상실이라는 단단한 벽 앞에 무릎 꿇고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눈물에는 좌절과 고통, 깊은 외로움만 담겨 있지 않다. 만약 이런 것들만 남았다면, 그는 축사는커녕 결혼식을 박차고 나가 딸의 비극적인 미래를 냉소적으로 곱씹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동안 살아왔던 슈미트의 방식대로 말이다. 그러나 그는 울고 있었다. 이는 자신의 삶에서 노년의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요, 그렇기에 자신을 위한 애도의 눈물이기도 하다. 비록 스스로를 실패자라 생각하지만, 그는 상실에 대한 애도 과정을 거쳤기에 이제 홀로서기를 할 준비를 마쳤다. 그 증거로 슈미트는 엔두구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난 무엇을 달라지게 한 거지? 나 때문에 이 세상이 무엇이 더 좋아진 거지?”
슈미트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노년의 홀로서기는 상실을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하기 전에, 나이 듦에 따라 잃게 되는 것들을 ‘어떻게’ 떠나보낼지에 대한 애도(Breavement)에서 시작된다는 걸 알게 된다. 상실로 시작되는 노년기를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통합(Ego Integrity)을 이뤄내지 못하면 현상 유지도 아닌 절망(Despair)이 일어나는 시기라 설명했다. 그가 이야기한 통합이란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생에 그래야만 했던 것들,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일이나 실수했던 것들을 받아들이고 수용, 통합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 잘 살아냈다는 느낌으로 다시 새로운 출발점에 서는 기회를 얻게 된다.
노년의 홀로서기는 과거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물론 자기중심적으로 살거나 고독한 삶이었다면 슈미트처럼 좀 더 시행착오를 겪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년의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나 마땅히 이 통과의례를 거치는 동안 떠나보내야 할 것들의 의미를 되새기며, 새로 맞이할 것들에 대한 채비를 할 것이다. 노년기가 삶의 종점이 아닌 또 다른 제2의 인생을 위한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과정임을 이해한다면, 상실의 고통을 겸허히 견뎌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이는 사춘기에서 경험하는 혼란과 방황처럼 또 다른 의미의 ‘늦깎이 성장통’인 셈이다. 이제 슈미트처럼 좌충우돌 부딪쳐갈 당신에게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제2의 인생을 살고 싶은 시니어들을 위해 유망 직업을 소개한다. 취업 시장에서 기업들이 가장 많이 찾는 국가기술자격증은 지게차운전기능사로 나타났다. 이에 많은 시니어들이 은퇴 후 지게차운전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2020년 우리나라 50세 이상 남성들이 가장 많이 딴 국가기술자격증은 지게차운전기능사였다. 1만 616명이 취득한 것으로 집계됐다. 지게차는 다른 중장비에 비해 장비 조작이 비교적 쉽고, 운전기능사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으면 취업이 용이하기 때문에 활용도가 높다.
더욱이 올해부터 지게차운전기능사는 과정 평가형으로도 자격을 취득할 수 있어 관심이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원래 지게차운전기능사 자격증은 시험으로 취득하는 검정형이었다.
과정 평가형 국가기술자격은 실무 중심 교육·훈련 과정을 이수한 후 평가를 거쳐 합격 기준을 충족한 사람에게 국가기술자격을 부여하는 제도다. 산업현장에서 지게차운전기능사에 대한 수요도 점점 늘어나고 있고, 실무 능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같이 자격 취득 방법도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지게차는 소형 지게차와 일반 지게차로 구분할 수 있고 취득 과정도 다르다. 3톤 미만 소형 지게차는 별도 시험 없이 이론 6시간, 실기 6시간 등 총 12시간의 교육 과정을 수료하면 국토교통부에서 발행하는 소형 지게차 면허 취득이 가능하고, 조종이 가능하다.
반면에 일반 지게차는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시행하는 지게차운전기능사 자격증을 필요로 한다. 지게차운전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소형 지게차뿐 아니라 3톤 이상 지게차도 운전할 수 있다.
지게차운전기능사 자격증 취득 방법
기존의 검정형 자격증 시험은 필기·실기시험으로 구성돼 있다. 필기와 실기 모두 100점 만점에 60점 이상만 받으면 합격할 수 있다. 필기시험 난이도는 일반적인 자동차 운전면허시험으로 생각하면 큰코다치기 쉽다. 필기시험 합격률이 50% 정도밖에 안 되므로 공부는 필수다.
특히 신중년들은 공부를 오랜만에 하고, 글씨도 잘 보이지 않기에 학습이 어렵다는 호소가 줄을 잇는다. 때문에 젊은 층보다 공부를 배로 열심히 해야 한다.
다행히 2020년 1월부로 출제 문제가 이론 중심에서 실무 중심으로 개편됐다. 국가직무능력표준(NCS)을 기반으로 지게차 주행, 화물 적재, 운반, 하역, 안전 관리에 대한 문제가 출제된다.
실기시험은 4분 이내에 정해진 코스를 주행하며 화물 적재, 운반, 하차 등을 해야 한다. 실기시험의 포인트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짧은 시간 안에 정해진 작업을 완료해야 하기 때문에 지게차를 여러 번 운전해보며 잔 실수와 긴장감을 줄이는 것이 좋다.
지게차운전기능사 시험은 상시 검정 시행 종목으로 상세한 시험 일정 정보는 큐넷(Q-net)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큐넷은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운영하며, 국가 자격시험 원서 접수, 합격자 발표, 시험 일정 등을 제공하는 웹사이트다.
다양하게 취업 가능해
지게차운전기능사를 요구하는 기업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주로 각종 건설업체 및 제조업체에서 수요가 높다. 그뿐 아니라 물품을 상하차해야 하는 배송 및 운송, 항만업체에서도 지게차 운전면허를 소지한 전문 인력을 필요로 한다.
더불어 알아야 할 것은 기업은 지게차 운전뿐 아니라 다른 업무도 병행 가능한 사람을 원한다는 것이다. 이에 지게차운전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목표 기업이 요구하는 역량을 개발할 것을 추천한다.
현직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신입의 나이 장벽은 허물어지고 있다. 20~30대 젊은 층도,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한 50대도 많아지고 있다. 나이가 어리거나 많다고 배척하는 분위기도 아니다. 다만 3년 정도 일을 해야 업계에서 경력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현장에서 70대 고령자도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지게차운전기능사로 경력을 쌓으면 개인 사업자로 전환해 일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국비 지원 중장년 교육 활짝
사회적으로 퇴직 후 지게차운전기능사 자격증을 따려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정부도 40~60대를 위한 지게차 운전 양성 교육을 확대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인천항만공사(IPA)와 한국폴리텍대학, 경기도 생활기술학교가 인기 있다.
이들 세 곳에서는 전액 국비로 전문 교육이 이뤄지며, 자격증 취득에 이어 취업이 이뤄지도록 지원해준다. 단점은 1년에 한 번 교육을 실시하며, 보통 15~20명으로 교육생을 소규모로 모집한다는 점이다. 지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교육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시간적 여유가 없고 빠른 취득을 원한다면 중장비 전문 교육 학원을 찾아 교육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국민내일배움카드가 있으면 국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많다. 이밖에 각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일자리지원센터에서 관련 교육을 실시하는 경우가 있으니 거주지를 고려해 자신에게 꼭 맞는 방법을 찾아보자.
지게차 운전 교육기관
인천항만공사(IPA)
인천항만공사(IPA)와 노사발전재단이 공동으로 ‘중장년 생애경력설계 및 지게차 운전원 인력 양성과정’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2020년 1기, 2021년 2기 교육이 진행됐다. 중장년층의 항만 물류 기능인력 양성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 목적이다. 교육은 2주간 지게차 이론 및 70시간 실습, 생애 설계 교육 6시간 등 자격증 취득과 중장년의 새로운 경력 설계에 특화된 내용으로 구성됐다.
실제 제1기 교육생 13명은 전원 지게차운전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그중 6명은 일자리 연계를 통해 물류업체 취업에 성공했다
한국폴리텍대학
한국폴리텍대학 남인천캠퍼스에서는 제2의 직업으로 새 출발을 원하는 40~60대 구직자들을 대상으로 무료 교육 및 취업 지원을 4개월 과정으로 해준다. 자동차과 안에 지게차 운전 교육 과정이 있고, 지난해 18명이 자격증을 취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산캠퍼스에서는 연령에 상관없이 실업자를 대상으로 전기지게차 교육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경기도 생활기술학교
경기도 생활기술학교는 경기도 지원으로 경기과학기술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사업이다. 경기도 생활기술학교는 5060세대를 위해 자동차진단평가 전문가 과정과 지게차운전기능사 교육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교육은 주말에 진행돼 현재 일을 하고 있지만 은퇴 후를 준비하는 이들도 자격 취득 및 취업 연계가 가능하다.
지게차운전기능사 과정은 2021년 개설됐는데 20명 정원 모집에 43명이 접수해 2.2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지게차운전기능사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새삼 입증됐다.
◇“지게차 운전 자격증, 활용도 높아”
경기도 생활기술학교 지게차 교육 과정 1기 수료생 최명종(53) 씨
최명종 씨는 앞서 얘기한 경기도 생활기술학교 지게차운전기능사 교육 과정 1기 수료생이다. 그는 무역 회사에서 15년 동안 근무했는데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그 영향을 받아 실업자가 됐다. 회사의 총책임자였던 그는 현장 근무도 했기 때문에 지게차 자격증 취득이 이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20대 후반, 30대 초반에는 예전 직장에서 지게차 운전을 했었어요. 그때는 자격증이 없어도 운전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안전사고 때문에 자격증이 필수가 됐잖아요.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다른 공부를 하는 와중에 아내가 이런 교육도 있다고 알려줘서 관심이 많았던 터라 수업을 듣게 됐어요.”
교육은 지난해 5월부터 8월까지 3개월간 주말 동안 이뤄졌다. 그사이 최명종 씨는 7월에 새로운 회사에 취직했고, 지게차운전기능사 자격증 취득 공부를 계속해 약 한 달 만에 자격증을 취득했다.
최 씨는 “필기시험은 교육을 들은 것이 많은 도움이 됐고, 실기시험은 과거에 지게차를 탔던 경험 덕분인지 어렵지 않았다”고 후기를 전했다. 그는 현재도 일을 할 때 지게차를 타면서 자격증을 잘 활용하고 있다.
또한 최명종 씨는 하반기 실시된 2기 교육에는 보조 강사로 함께했다. 뿌듯함을 느끼는 한편, 교육생들이 느끼는 어려움을 체감할 수 있었다.
“실기 실습을 할 때 보니깐 여성분들도 계셨는데 긴장하고 겁을 먹는 분이 많았어요. 시험 시간이 4분으로 제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코스도 잘 지켜야 하고 선도 밟으면 안 되잖아요. 운전면허시험과 같다고 보면 되는데 지게차 운전사로 활동하는 분들도 면허 코스를 어려워하시더라고요.”
이와 함께 최 씨는 많이 개선됐지만, 교육 장소가 협소하고 지게차가 2대밖에 없어 연습을 충분히 하기 어려운 환경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최명종 씨는 지게차운전기능사 자격증은 도움이 되는 부분이 많다면서 취득할 것을 추천했다. 그는 장점으로 “재취업이 쉽지 않은데, 자격증이 있으면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특히 3톤 이상 중장비 운전은 필수인 시대가 됐다”고 꼽았다.
반면 단점으로는 “꼬집어서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지게차라는 한 카테고리로 직업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중장비 자체를 원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여러 자격증을 취득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자신과 같은 신중년에게 자격증이 좋은 이유에 대해 “일에도 활용되고, 남자들의 로망이라는 귀농·귀촌 생활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면서 “저는 자격증을 꼭 활용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과정이 좋았고, 자기 성취감이 컸다”고 강조했다.
제2의 인생을 살고 싶은 시니어들을 위해 유망 직업을 소개한다. 1월호에서는 반려동물 수제 간식 전문가에 대해 다뤘다. 반려견 천만 시대. 반려견과 관련된 직업이 늘어나고 있다. 그 가운데 애견 간식을 만드는 반려동물 수제 간식 전문가가 있다. 펫푸드 요리사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살림을 오래 한 여성 시니어라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일할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떤 직업인지 자세히 알아봤다. 현직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봤다.
반려동물을 가족 구성원으로 생각하는 펫팸족(Pet과 Family의 합성어)이 전체 인구의 4분의 1인 시대다. ‘가족’이기 때문에, 반려인들은 반려동물에게 좋은 것만 해주고 싶다. 그러다 보니 펫푸드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이제 펫푸드는 단순히 식사용이 아닌 헬스 케어를 위해 필요해지고 있다. 과거 사료, 통조림 위주였던 것과 달리, 현재는 건강식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애호박, 토마토, 당근, 고구마 등의 재료를 넣어 영양소를 고루 갖춘 수제 간식은 건강한 먹거리로 통한다. 방부제, 합성 감미료, 색소 등 어떠한 첨가물도 안 들어가는 것을 선호한다.
요즘 인기를 끄는 반려동물 수제 간식을 보면 펫푸드가 맞나 싶게 예쁘고 다양하다. 닭고기·오리고기·연어 등의 저키(육포)를 비롯한 건조식, 황태 오리고기 말이, 고구마 닭가슴살 말이 등의 자연식이 있다. 또한 쿠키, 과자, 빵도 있고 피자, 치킨, 케이크 모양으로 재밌게 만들기도 한다.
이와 같은 건강하고 맛있는 수제 간식을 만드는 사람을 ‘반려동물 수제 간식 전문가’라고 부른다. 반려동물 수제 간식 전문가는 2020년 서울시 여성능력개발원이 선정한 여성 유망 직종 20개 안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음식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주부 경력이 있으면 더욱 쉽게 할 수 있다. 특히 주부 경력 30년 이상인 50~60대 여성 시니어에게 맞춤형 직업이다. 자식, 손주에게 건강하고 맛있는 요리를 해주던 경력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것.
여기에 반려동물을 키운 이력이 있다면 일에 적응하기 쉽다. 반려동물 수제 간식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반려동물이 섭취 가능한 재료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더불어 반려동물의 필수 영양소도 잘 알고 있어야 균형 잡힌 애견 간식을 만들 수 있다. 즉 요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조리 능력 등의 자질이 필요하다. 미적·색채 감각을 지니고 있다면 더욱 이점으로 작용한다.
반려동물 수제 간식 전문가에 대해 알아보거나 배우고 싶다면, 교육을 들을 수 있는 창구는 많다. 한국펫영양협회에서는 반려동물 수제 간식 전문가, 반려동물 베이커리 전문가, 펫푸드 지도사 1·2급 과정 교육을 진행한다. 교육을 수강한 후 협회에서 발행하는 민간 자격증 취득도 가능하다.
평생교육원에서도 수업을 들을 수 있다. 현재 충북대학교, 서원대학교, 동의대학교 등에서 관련 교육이 진행 중이다. 보통 15주 과정으로 진행되며, 이론 및 베이커리, 자연식, 건조간식 과정이 포함돼 있다. 이밖에도 지자체에서 교육을 진행할 때가 있으니 잘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한 예로 창원여성새로일하기센터에서는 지난 12월에 4주에 걸쳐 반려동물 수제 간식 만들기 교육을 했다.
시니어를 위한 일자리도 점점 확대되고 있다. 2018년 문을 연 반려동물 수제 간식 전문점 ‘장수하개’는 강남학원·강남대학교와 용인기흥노인복지관이 운영하는 곳이다. 노인 일자리 사업으로, 반려동물 수제 간식 제조 전문 교육 과정을 수료한 15명 내외의 어르신들이 직접 제조한 수제 간식을 판매한다. 소· 닭·오리고기부터 캥거루 갈비, 메추리 등 특이한 재료를 이용한 건조식품이 주요 판매 상품이다.
소셜 벤처 기업 ‘개로만족’도 빼놓을 수 없다. 2019년 보건복지부 노인 일자리 사업에 선정된 회사로, 60세 이상의 셰프들을 기용해 노인 문제 해소에도 앞장서고 있다. 한아름 대표는 모교 한국외대가 위치한 동대문시니어클럽과 파트너십을 체결해 할머니 셰프들을 소개받았다. 2022년부터는 노인 일자리 사업을 성북50플러스센터 등과 함께 시범 운영한다.
◇ ‘개로만족’ 김복순 셰프 “손끝 야무진 60대에게 추천해요”
개로만족은 처음 다섯 명의 셰프 할머니로 출발했다. 앞서 말한 대로 동대문시니어클럽에서 소개받은 시니어들이다. 그중에 김복순(64) 씨가 있다. 베이비부머를 대표하는 1958년생이다. 그녀는 위생 책임자 셰프를 맡았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김복순 씨는 인생을 즐겁게 살았다. 남편과 함께 동대문에서 의류 사업을 30년 넘게 했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노래 교실을 다녔는데 코로나19로 못 가게 되면서 삶이 무료해졌다. 이에 일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동대문시니어클럽을 찾았다.
여러 일자리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개로만족을 선택했다. 당시 지원 조건은 ‘60세 이상, 펫푸드 요리사를 꿈꾸며 열정 있는 건강한 어르신’으로 단순했다. 김복순 씨는 “강아지를 20년 동안 키워봤고, 재밌을 것 같았다”고 선택 이유를 밝혔다. 그녀가 개를 키울 당시에는 수제 간식이 일반화됐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펫푸드 요리사라는 직업은 생소했다.
“저는 1년 넘게 일했고 이제 근무 기간이 끝났어요. 2020년 10월부터 일했는데 12월에 코로나19 때문에 중단됐어요. 그리고 1월은 원래 방학이라고 쉬는 기간이었고, 2월부터 12월까지 일했죠. 일주일에 두 번, 36시간 일하고 32만 5000원을 벌었어요. 일하면서 사람들 만나는 것도 좋고, 30만 원이 적은 돈 같아도 매달 들어오니 좋더라고요. 제가 월급쟁이가 아니었으니 월급을 처음 받아보잖아요. 월급날이 기다려지고 재밌었어요.”
직무 교육은 셰프가 된 이후 이뤄졌다. 한아름 대표가 친절하게 레시피를 알려줬고, 할머니 셰프들은 요리하면서 점점 손에 익히는 과정을 거쳤다. 김복순 씨는 “저희가 나이가 있다 보니 한두 번 배워서는 모른다. 처음에 애를 많이 먹었다. 칠판에 레시피가 적혀 있는데 글씨가 잘 안 보이니까 사진으로 찍어 크게 확대해서 보고는 했다. 지금도 레시피 그대로 요리한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반대로 연륜이 장점이 되기도 했다. 할머니 셰프들의 나이는 60~70대. 주부 경력 또한 40~50년이다. 주부로서의 내공이 일하면서 곳곳에서 발휘됐다. 예를 들면 고구마를 어떻게 쪄야 더 맛있을지, 색이 예쁘게 구현될지 알고 있었고, 불이나 물 조절을 기가 막히게 했다. 그리고 좋은 재료에 맛을 더하기 위해 반죽할 때도, 빚을 때도 정성을 기울였다.
“처음에 간식을 만들 때는 우리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를 떠올렸어요. 정성 들여 만들었는데 얼마나 맛있을까 하고요. 처음에 무지개우유껌을 보고 얼마나 놀랐다고요. 어떻게 이렇게 예쁘냐 했죠. 간식이 그렇게 예쁘게 만들어지면 저도 기분이 매우 좋더라고요. 그리고 홈페이지에 좋은 후기들이 올라오면 대표님이 보여주시는데 뿌듯하고 보람을 느꼈어요.”
김복순 씨는 누구나 펫푸드 요리사가 될 수 있다면서 시니어들에게 추천했다. 특히 “나와 동년배인 60대 초중반이 하기에 좋은 일 같다. 주부 경력이 있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고구마, 호박을 자르고 찌는 것은 주부에게 너무 쉽지 않나”면서 “손끝이 야무진 사람들에게 특히 추천한다. 강아지를 좋아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개로만족은 어떤 회사?
강아지들을 위해 형형색색 예쁜 간식을 만드는 셰프들. 평균 나이는 68세다. 소셜 벤처 기업 ‘개로만족’은 ‘개(犬)와 노인(老) 모두를 만족시킨다’는 뜻을 지녔다. 반면에 회사 대표 한아름 씨는 24세의 젊은이다. 할머니 손에서 자란 한 대표는 손주를 생각하는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을 잘 알고 있었고, 애견 간식 사업과 연결시켰다. 그렇게 할머니가 손수 만드는 애견 간식 회사가 탄생했다. 개로만족의 시그니처는 우리나라 전통 간식인 한과 모양의 간식이다. 더욱이 모든 재료가 국산으로 최고만을 엄선했다. 거기에 할머니들의 손맛까지 더해졌으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개로만족은 고품격 애견 간식을 만드는 사회적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Exhibition
◇ 파올로 살바도르 개인전 : 새벽의 백일몽
일정 1월 29일까지 장소 일우스페이스
국제 미술계에서 부상하고 있는 젊은 작가, 파올로 살바도르(Paolo Salvador, 31)의 개인전 ‘새벽의 백일몽’(Ensueos en el amanecer)은 국내에서 열린 첫 개인전이다.
파올로 살바도르는 페루 출신 작가다. 그는 잉카 제국의 모태였던 케추아(Quechua) 부족의 후예로, 역사적 자부심이 강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강력한 모국주의 정서는 그의 예술에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됐다.
살바도르의 작품에는 인간인지 동물인지 모호한 생명체가 자주 등장한다. 고대 페루의 종교에서 사람과 동물은 동등한 존재이며, 페루 신화에도 사람과 신성한 동물이 상생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살바도르의 작품에서도 사람과 동물은 주종 관계가 아니라, 머나먼 미지의 여행을 떠나는 동반자로 표현된다. 살바도르는 급격히 변모하는 글로벌 환경 속에서도 페루의 토착성,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페루의 고대 신화와 설화에서 이미지를 끌어오되, 개인의 경험과 현대 사회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화풍을 창안했다. 서구 르네상스와 표현주의 같은 미술사를 수용하면서도 페루 전통문화와 결합하는 조형 언어를 천착했다. 고립, 고독, 몽상을 주제로 삼으면서 느슨한 붓 터치와 청과 적의 자극적인 색채를 통해 우화적인 서사를 만들어냈다.
◇ 알렉스 카츠 개인전 : Flowers 꽃
일정 2월 5일까지 장소 타데우스 로팍 서울
미국 출신 작가 알렉스 카츠(94)는 ‘세계 10대 화가’이자 ‘현대 초상회화 거장’으로 통한다. 이번 전시는 카츠의 작품 중에서도 꽃을 주제로 한 회화들을 특별히 조명한다. 이 꽃 시리즈는 이전에 소개된 적 없었던 작품들이다. 팬데믹이 시작되고 그린 것이기 때문.
카츠는 “나는 (이 시리즈를 통해) 팬데믹에 지친 세상을 어느 정도 격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한 이번 전시는 자연을 배경으로 한 초상화까지 아우르며, 한 장르의 작품만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아시아에서의 첫 번째 전시로 의의를 더한다.
●Book
◇ 인생을 바꾸는 100세 달력(이제경·일상이상)
100세 시대다. 이는 80세까지 일해야 하는 시대라는 뜻이기도 하다. 과거와 같이 20년 공부해 직장에서 30년 일하고 은퇴하는 ‘3단계 인생’(교육-일-은퇴)으로는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 이에 이제경 100세경영연구원 원장은 책을 통해 ‘골드 인생2.0’을 제시한다.
‘골드 인생2.0’은 건강한 체력과 정신으로 노후에도 스스로 경제활동이나 취미를 즐기면서, 자신과 가족의 행복뿐만 아니라 지역과 글로벌 사회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개인의 사회책임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먼저, 이제경 원장은 80세까지 일하기 위해서는 ‘4차 산업혁명 등으로 평생직장이 사라지므로 세 번은 은퇴하고 다시 도전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는 비전문가에서 전문가로 변신하는 첫 번째 은퇴하기, 전문가에서 사업가로 대변혁하는 두 번째 은퇴하기, 사업가에서 사회봉사자의 길을 걷는 세 번째 은퇴하기를 추천한다.
비전문가에서 전문가로 변신해 근로소득 외에 업무 관련 기타소득도 얻고, 전문가에서 사업가로 대변혁해 사업소득 외에 금융과 부동산 등 자산소득도 얻고, 사업가에서 사회봉사자로 거듭나 사회가치 소득과 자산소득까지 얻으면 나뿐만 아니라 증손자까지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저자는 자신과 여러 부자들이 실천하고 있는 금융·부동산·미술품 투자 노하우, 합법적으로 세금 줄이는 방법 등도 소개했다. 또한 자신의 기대여명을 측정하고 ‘건강수명 늘리기’, ‘정신건강 챙기기’ 등 100세까지 건강하게 사는 법, 가정과 사회에서 행복한 인간관계 만드는 방법도 담았다.
◇덴마크에서 날아온 엽서(표재명·드림디자인)
키에르케고르 철학의 국내 최고 권위자인 고(故) 표재명 교수. 그는 1978년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 연구교수로 1년간 현지에 머물면서 아름다운 이미지의 엽서를 한국의 가족들에게 보냈다. 가족들이 그 엽서들을 모아 펴낸 책으로, 아버지의 마음이 담겼다.
◇라디오 탐심(김형호·틈새책방)
강원도에서 방송기자로 일하는 저자는 30대 초반부터 라디오를 수집하고 연구했다. 책에는 라디오와 관련된 에피소드 27가지가 담겼다. 라디오가 탄생과 성장, 전성기와 쇠퇴기를 거치는 동안 인간, 사회와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하고 어떤 유산을 남겼는지 얘기한다.
◇이까짓, 탈모 : 노 프라블럼 (대멀(김준석)·봄름)
천만 탈모 시대. 탈모는 이제 청년과 중년의 연결고리가 됐다. 15년 차 대머리 영화배우이자, 탈모인 대나무숲 채널 ‘대멀’의 주인장인 저자. 그는 탈모 고충부터 웃픈 가발 경험담 등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담아내 탈모인들에게 정보와 희망을 전달한다.
●Stage
◇엑스칼리버
일정 1월 29일 ~ 3월 13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연출 권은아
출연 김준수, 김성규, 이지훈, 에녹, 강태을, 신영숙, 장은아, 민영기, 손준호, 김소향, 케이 등
국내 대형 창작 뮤지컬 ‘엑스칼리버’가 서울에서 단 6주간 앙코르 공연을 펼친다. 아더 역 김준수, 랜슬럿 역 이지훈, 에녹, 강태을, 모르가나 역 신영숙, 장은아, 멀린 역 민영기, 손준호, 기네비어 역 최서연, 울프스탄 역 이상준, 엑터 역 이종문, 홍경수가 다시 한번 무대를 빛낸다. 여기에 아더 역 김성규와 기네비어 역 김소향, 러블리즈 출신 케이가 새롭게 합류해 기대를 더한다. ‘엑스칼리버’는 고대 영국을 지켜낸 신화 속 영웅 아더왕의 전설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평범한 소년 ‘아더’가 성인이 되고 왕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과 싸우는 이야기를 그렸다. 영웅이 아닌 평범한 인간인 아더가 고난과 역경을 헤쳐가는 과정은 관객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엑스칼리버’는 뮤지컬 ‘모차르트!’, ‘엘리자벳’, ‘웃는 남자’, ‘마타하리’ 등 수많은 흥행작을 탄생시킨 EMK의 제작 노하우가 집약된 세 번째 오리지널 뮤지컬로 2019년 월드프리미어로 초연됐다.
◇라스트 세션
일정 1월 7일 ~ 3월 6일
장소 대학로 티오엠
연출 오경택
출연 신구, 오영수, 이상윤, 전박찬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배우 오영수의 차기작으로 화제를 모은 연극이다. 오영수는 신구와 함께 프로이트 역에 더블 캐스팅됐다. 이상윤과 전박찬은 루이스 역을 맡아 연기한다.
정신분석의 대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나니아 연대기’ 작가이자 영문학자인 C. S. 루이스가 직접 만나 논쟁을 벌인다는 상상에 기반한 2인극이다. 극은 영국이 독일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한 1939년 9월 3일을 배경으로 한다. 프로이트와 루이스는 신에 대한 물음에서 나아가 삶의 의미와 죽음, 인간의 욕망과 고통에 대해 한 치의 양보 없이 치열하면서도 재치 있는 논변을 쏟아낸다.
◇그때도 오늘
일정 1월 8일~2월 20일
장소 서경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스콘2관
연출 민준호
출연 이희준, 김설진, 이시언, 차용학, 오의식, 박은석 등
연극 ‘그때도 오늘’은 네 가지 장소와 네 가지 시간을 가지고 총 여덟 명의 배역이 등장하는 에피소드 형식의 공연이다. 1920년대 광복 전의 모습, 1940년대 제주도, 1980년대 부산, 2020년대 최전방 등 총 네 가지 배경이 나온다. ‘그때’를 지금 ‘현재’로 여기며, 각자의 눈에 비친 미래를 확신하는 인물들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다.
오의식, 박은석, 김설진은 2020년대의 은규, 1980년대의 주호, 1940년대의 사섭, 1920년대의 윤재 역의 남자1 배역을 맡는다. 이희준, 이시언, 차용학은 2020년대의 문석, 1980년대의 해동, 1940년대의 윤삼, 1920년대의 용진 역의 남자2 배역을 연기한다.
사실 흔쾌히 하고 싶은 인터뷰는 아니었다 고백하고 시작해야겠다. 익명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신분 확인이나 팩트 체크가 어려울 수 있고, 독자의 신뢰를 얻기도 힘들다. 게다가 상대는 작가. 전문적인 글쓰기를 하는 상대는 실력을 겨루는 느낌까지 들어 신경이 쓰인다. 그럼에도 그를 모시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가 연구해온 부자가 되는 방법이 궁금해서다. 카메라 앞이 아닌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부자들이 고백한 돈 버는 비밀 말이다.
명칭에서 느껴지듯 유령작가, 즉 고스트라이터(Ghostwriter)는 흔한 직업이 아니다. 정치적 영향력이나 정치후원금 등의 이유로 출판기념회가 필요한 정치인의 회고록이나 연예인, 스포츠 스타의 성공담, 기업공개를 앞둔 기업가의 자서전 등의 출판물을 집필하는 이름 없는 작가를 말한다. 출판사의 기획의도나 의뢰인의 목적에 맞게 대신 글을 써주고, 본인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는 대필 작가이기 때문에 고스트라이터라 불린다.
출판업계의 이름난 구원투수
이 유령작가에 대해서는 당연히 인터뷰 후 그가 어떤 인물인지 확인해야 했다. 사진 속 가면을 쓴 그의 모습이 다소 우스꽝스러울 수 있겠지만, 사실 그는 꽤 번듯한, 막 중년이 된 사내다.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의 팀장으로 활동 중이며, 출판계에서는 꽤 이름난 작가로 본인 이름으로 낸 자기계발서도 10권이 넘는다.
그가 고스트라이터가 된 것도 출판사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괴팍한 부자 의뢰인의 등쌀에 못 이겨 다른 작가들이 연이어 쓰러졌을 때 편집자가 그를 찾았고, 단시간 내에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놓은 것이 계기가 됐다. 글솜씨와 친화력, 빠른 일처리 등의 장점이 그를 곤란할 때마다 찾는 업계의 대표적인 ‘구원투수’로 만들었다. 의뢰인의 성향이나 과거의 행적을 확인하기 위해 습관을 따라 하거나 등장하는 장소를 찾아가는 고집스러움은 그를 롱런하게 했다.
그를 만나게 된 계기는 최근 출간한 한 권의 책이다. ‘히든 리치’란 제목 그대로 숨겨진 부자들을 만나 부를 형성한 과정과 현재 자산의 정도에 대해 노골적으로 물어본 책이다. 그는 과거 유령작가로 활동하면서 작성한 집필 노트를 오랜만에 들여다보다 이 책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모든 직장인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겠지만, 저 역시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돈은 이 세계에서 가정을 지키고 생존할 수 있는 수단인데, 직장에서의 소득은 충분한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하니까요.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손에 쥔 것은 많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방법이 있을지, 어떻게 시드머니를 준비할지 고민하던 중 본가에서 대필 작업할 때의 노트를 발견했고, 일반인들이 따라 할 수 있게 내용을 엮어봐야겠다고 생각했죠.”
단지 과거의 노트를 요약해 끄적인 책은 아니다. 과거 대필해주었던 책 속 주인공이나 그 과정에서 인연을 맺은 이들을 다시 찾아 노크했다. 그러고는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현재 자산은 얼마입니까”, “처음 시작할 때 수중에 얼마가 있었습니까”, “어떻게 자산가가 될 수 있었습니까”이다. 물론 모든 이들이 정성껏 대답해주진 않았다.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그중에서 성심껏 취재에 응해준 24명의 이야기를 자산 형성의 유형별로 구분해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그는 책에서 부자의 유형을 일단 아끼고 보는 ‘고전형’, 위험을 무릅쓴 ‘전투형’, 자신의 전문 분야를 기반으로 한 ‘안전형’, 천재에 가까운 ‘변칙형’, 물려받은 자산을 늘린 ‘보수형’, 감을 갈고 닦아 수단으로 삼은 ‘천리안형’으로 분류해 설명했다.
뻔하지만 따라 하기 힘든 비결
그는 이 책을 부자가 되고 싶은 대중을 위한 일종의 자기계발서라고 이야기했는데, 읽어본 소감을 더하자면 부자가 된 사람들의 세밀한 사례집에 가깝다. 그들의 자산 형성 과정이 가감 없이 솔직하게 나온다. 더 매력적인 것은 다양한 부자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자산의 규모로 보면 상대적으로 수수한(?) 백억대 부자에서부터 수천억대 자산가의 이야기도 다룬다. 직업이나 자산 형성 과정도 다양하다. 그 과정에서 느낀 공통점은 바로 ‘돈에 대한 욕망’이었다. 모두 남에게 쉽게 지지 않을 만한 욕망의 소유자로 느껴졌다. 작가도 동의했다.
“책 속에 등장한 한 분이 이런 질문을 던졌어요. 얼마면 무릎을 꿇을 수 있냐? 1만 원? 10만 원? 쉽게 대답하지 못했죠. 그랬더니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나라면 1원에도 꿇는다. 돈이 생기는 일인데 무릎 꿇는 것이 무슨 대수냐며 말이죠. 그럼 절을 한다면 얼마를 주겠냐고 되묻기도 했어요. 저울질 따위는 필요 없죠. 다만 작은 돈과 큰돈이 있을 뿐이죠. 돈에 대한 욕망을 바탕에 둔 실용적 사고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기기 힘들어요. 아마 그 과정에서 비리나 부정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겠죠.”
아끼고, 발품 팔고, 돈을 놀게 놔두지 않고, 가치를 찾아내는 것은 사실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돈 버는 기본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덕목은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부자가 되는 비결은 이 기본기를 알고 모르고의 차이가 아니라고 작가는 설명했다.
“사실 책 속 부자들의 자산 모으는 방법은 누구나 알 만한 내용이에요. 하지만 부자들은 그 뻔한 방법 중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 실천했다는 점이 다르죠. 실제로 만나보면 같은 정보를 접하더라도 그것을 대하는 민감성이나 실천력의 차이가 매우 커요. 저는 이 책을 통해서 평범한 사람들도 ‘나도 도전해야겠다, 나도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욕구가 생기길 바랐어요.”
빚투 그리고 재테크
작가는 복권이나 코인에 매달리는 청춘들에게도 조언을 전했다. 최근 경제지를 중심으로 MZ세대라 불리는 20~30대들이 직장을 통한 자산 형성을 기대하지 않고, 코인이나 주식에 매달리는 ‘빚투 열풍’을 지적하는 기사들이 연이어 보도되고 있다. 20대의 복권 구입 비용은 코로나 이전보다 300% 넘게 증가했단다. 그러나 실제 부자들을 만나보면 월급쟁이 부자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사회가 계층화되고 고착화되었다는 분석이 많죠. 사다리가 치워져 젊은 세대가 계급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있고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를 길이 잘 안 알려져 있을 뿐이에요. 블록체인, 메타버스 같은 첨단 기술의 발전은 젊은 직장인들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어요. 사실 이런 첨단 분야는 전통적인 부자들이 접근하기 힘들죠. 정보를 가지고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 유리할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 일반인은 호재가 있을 때 삼성전자에 투자하지만 기술과 공정, 소재를 이해하는 사람은 관련주에 투자해 더 큰 이익을 얻기 마련이죠. 마치 용의 머리는 작게 움직이지만 꼬리는 크게 휘청이는 것과 같아요. 기술의 맥락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죠. 이런 능력은 회사 생활에 전념하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죠. 또 그들이 근무하는 판교나 가산디지털단지에서 어떤 회사가 망해 나가고, 빈자리에 어떤 회사가 들어오는지, 주변의 동향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투자의 소재가 될 수 있어요. 옛날처럼 큰 시드머니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최근의 투자 트렌드이기도 하고요. 갈수록 기회도 많아지리라 생각해요.”
제2의 인생을 꿈꾸는 ‘마음만은 청년’인 시니어들에게도 기회는 열려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의 책을 자세히 보면 직업상담사나 창업 컨설턴트들이 하는 이야기와 맥락이 닿는다.
“은퇴 후 평생 직업이었던 분야를 접고 새로운 분야를 찾아 도전하시는 분이 많잖아요. 하지만 성공 확률은 대단히 낮죠. 부자가 되는 방법도 비슷해요. 본인이 직장 다닐 때 잘 알던 해박한 분야에서 더 공부하고, 성과를 낼 수 있는 업무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노력이 더 유리해요.”
흔히 몇 차례 소심한 시도가 실패하는 경험을 하면 재테크 무용론자가 되기 십상인데, 이 책에는 재테크를 통해 부자가 된 여러 사례가 등장한다. 각종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재테크의 전형 같은 부자도 등장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부자가 목표는 아니더라도 재테크는 하는 것이 맞다”고 이야기한다.
“큰돈을 벌지 않더라도 재테크는 누구나 해야 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부는 팽창하고 있고, 세상 사람들은 조금씩 부자가 되고 있어요. 모두 다 움직이고 있는데, 나 혼자만 멈춰진 일상을 유지한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조금씩 가난해지고 있다는 뜻이 돼요. 사회가 부유해지는 것에 맞춰 재테크를 통해 나의 재산을 조금씩 늘려야 소득수준을 유지할 수 있어요. 재테크는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일이 된 셈이죠. 과거에는 가만히 있어도 시간의 흐름만으로 연공서열에 따라 월급이 오르고 집값이 올랐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관심을 갖고 흐름에 맞춰 함께 달려줘야 해요.”
뒷조사까지… 부자들의 ‘면접’
각 분야의 성공한 명사들을 취재하다 보면 첫 만남은 ‘테스트’로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본인을 상대하는 기자의 능력이나 이해도가 어느 수준인지 궁금해한다. 일종의 면접이다. 작가는 “부자들 중 대부분이 그런 테스트를 즐기고, 상대가 대필 작가라면 그 강도는 훨씬 세진다”고 말했다.
“간단히 훑어보거나 몇 마디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테스트’가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심한 경우도 흔해요. 감당 못 할 만한 행동을 던지고 반응을 보는 경우도 있어요. 약속 시간에 늦는다거나, 들어주기 힘든 부탁을 하는 식이죠. ‘이거 하면 얼마 버냐’며 묻기도 하고. 또 말없이 빤히 쳐다보는 경우도 있고, 일부러 단답형으로 인터뷰에 응하는 부자도 있었죠. 제 뒷조사를 몰래 한 분도 있었어요.”
그 까다로운 면접들을 어떻게 통과했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간단했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뿐 다른 비결은 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저 비굴해 보이지 않게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만난 부자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작가는 간단히 유형화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드라마 속 부자와 같은 스테레오 타입은 오히려 만나기 힘들다고 그는 설명한다.
“최근에는 젊은 부자들이 많아져서, TV 속 회장님 같은 분은 그리 많지 않아요. 자린고비 같은 타입이 있는 반면, 설렁설렁 있는 대로 벌고 쓰고 하는 사람도 있죠. 애써 공통점을 찾자면 본인들이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는 점이에요. 가장 인상 깊었던 분은 가족을 위해 애쓰셨던 분이에요. 흔히 부자가 되면 가족이나 친척들과 등을 진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아요. 가난한 부모에 가정사가 행복하지 않은 분이었는데, 부자가 된 뒤 가족에게 베풀면서 사시더라고요. 흔히 알고 있는 부자의 이미지와는 반대되는 분이셨죠.”
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작가는 부자가 되었을까?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이라면 어떤 길을 가고자 할까?
“아직 부자가 되진 않았죠. 많은 이들과의 교류 속에서 배우려 노력하고 있어요. 자신의 비법이나 투자 방법 등을 서슴없이 알려주는 분도 많아요. 부자들은 자기 비법을 숨긴다는 것도 옛말이죠. 그렇다고 당장 부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요. 회사원 신분에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도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책의 구분법으로 설명하자면, 지금은 ‘고전형’과 ‘안전형’의 방식을 따르는 정도입니다. 제가 잘 아는 분야를 바탕으로 기회를 엿보는 중입니다. 다만 부자들과 함께하면서 저 스스로를 그들과 동일시하거나 혹은 부정적으로 변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어요. 곁에 있다 보면 그들에 대한 대접을 저에 대한 것으로 착각하기 쉽거든요. 그저 삶의 좋은 자극이 될 수 있게 유지해나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