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게임
명예퇴직을 하고
오십 넘어 항해사가 된
내 첫 항차의 항해는
갑작스런 출항 통보부터 심상찮았다
출항 후 이내 접어든 좁은 수로에서 세찬 조류에 밀려
세 시간 넘게 좌초의 문턱을 넘나들다가
가까스로 빠져 나와 만난 오후 한 시의 하늘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검은 구름 떼가 오래 잠들었던 신전의 주술이 깨어나듯
항로의 앞 쪽에서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라
사방을 암회색 절벽처럼 막아 놓고
뒤늦게 피어오르는 또 다른 구름은
통곡의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염원의 메모지처럼 보였다
초속 30미터의 바람은 연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고
물결은 수 미터의 깊고 가파른 협곡을 이루어
낄낄거리며 온 몸으로 부딪혀 왔다
뿌리가 없는 것은 죄다 흔들거렸다
배도 사람도 뿌리가 없기는 마찬가지
옆으로 기울며 높이 솟구쳤다가 급강하하듯 떨어지는 배 안에서
거친 사내들도 두려웠던 것일까
선실에 널브러진 사내도
브릿지에서 키를 잡고 안간힘을 쓰는 사내도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흔들리며 떠밀리며 기우뚱거리는 시간 위에서
그저 방향만 잡을 수 있는 생존속력을 겨우겨우 맞추어 가는
선령 34년의 낡은 엔진이 꺼질세라 노심초사 하며 가는 길을
포세이돈의 분노를 닮은 태풍은
나흘하고도 하루 반나절을 더 따라 다녔고
우리는 그 놈을 악마라 불렀다
엿새 째 되던 날
비로소 악마는 슬그머니 우리의 목숨 줄을 풀어 주었다
우리의 항로를 따라오던 악마의 발걸음은 한낱 유희였는지
일곱 째 날의 고단한 항해에서 비로소 햇빛을 보았다
바다에서도 악마는 게임을 하는가 보다
2. 친구
북위 01도 22분, 동경 172도 56분
태평양 한복판 적도 부근 타라와섬 근처에서
전재작업 한다고 조업선과 배를 붙이다가
조업선 선장으로 있는 친구를 만났다
이거 몇 년 만이고? 묻는
뭐하다가 바다에 나왔노? 묻는
친구 놈은 폭삭 늙어 있었다
나이 오십 넘어 명퇴하고 배 타러 나왔다는 대답 앞에
하긴 우리 나이에 이 짓 아니면 할 게 별로 없지
증권사 댕기던 놈도 배 타러 오고
방송사 댕기던 놈도 배 타러 오는
요지경 세상이네 하며 껄껄 웃는다
친구의 삼십 년 뱃놈 생활은
치통과 통풍과 관절염과 허리디스크로 찾아와
불편한 몸짓 속에 눅눅하게 녹아 있었다
함께 저녁을 먹고 포도주를 머그잔에 담아 마시며
건너 온 세월의 흔적을 더듬는 녀석의 눈빛이 몽롱했다
외국 놈들 속에서 저 혼자 한국인이라고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중에 밥 챙겨 먹는 일이 제일 힘들다고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이 너무 그립다고 너스레를 떨다가
자식놈들은 다 키웠냐고 묻는다
큰 놈은 출가 시켰고 작은 놈은 대학 졸업 앞두고 있다는 말에
지 놈은 자식이 셋이라고
아직도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줄줄이 사탕이라고
앞으로 십 년은 더 배를 타야 허리가 펴지겠다고
하지만 고기씨가 말라서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는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그저 침묵으로 안주를 삼을 뿐
그래도 어딘가에 희망이 있겠지 뭐
혼잣말처럼 건네는 어색한 위로
오십 고개 넘어서도 여전히 희망이라 허허 웃는
친구의 웃음소리가 칼날처럼 가슴에 박혀 드는 것은
누군가의 남편으로, 아버지로
여전히 살아 내야 할 시간들이 아득하기 때문이었을까?
전재작업을 끝내고
배를 떼고 다시 수평선 쪽으로 멀어져 가며 흔들던 친구의 손이
고향언덕 늙은 나무의 옹이가 박힌 마른가지를 닮아 있음에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솟아올랐다
3. 모천회귀
비릿한 바람이 오래전 기억 속 저편과 이편의 경계를 훑는다
생활은
마젤란해협 동쪽 어디쯤 지친 항해의 고달픔에 대하여, 혹은
누구나 가슴 깊숙이 벼려놓고 있을 날카로운 송곳니 같은 것에 대하여
자욱한 비안개 속에서 속내를 토해내는 열대우림의 나무들 몸짓처럼
사소한 변명들을 더듬고 있다
돌아간다는 것은 언제 풀릴지 모를 고르디우스의 매듭
쉰에서 예순으로 가는 세월의 길목마다
수구초심의 갈망은
봉인된 첫사랑의 흔적처럼
불 꺼진 가로등처럼 숨죽이고 서 있고
한때 애태웠던 사람들이 떠난 자리엔 낯선 얼굴들로 가득하였다
한 오라기 추억의 실타래도 풀어내지 못하는 지상의 불빛들은
굳은 관절처럼 뻣뻣한 가슴으로
물길을 더듬어 돌아가는 자의 내밀한 기쁨을 알지 못하리
이젠 좀 더 유연해야 하리
탁한 해류의 거친 숨결도 맨몸으로 받아내고
심해의 침묵도 은빛 비늘 속에 감출 줄 알아야 하리
옆줄을 따라 몸 깊이 각인된 오래전 산천의 지형도 위엔
지금도 나무들 온몸을 불태우며 만산홍엽의 꽃을 피우고 있을까
언제나 순응하던 해류의 손을 떨치며
푸른 역린(逆鱗)을 꼿꼿이 세울 때
수천 길 해저의 뜨거운 온기를 퍼올려
혈관마다 힘찬 맥박으로 뛰놀게 하는 아름다운 결별
고단했던 한 시절을 향하여 손을 흔들게 하는
내 풍성한 영혼의 자양분이여
낯선 새 길을 열며 가는 이 길은
날마다 소스라쳐 깨는 얕은 잠 위에서 저물고
고단한 지느러미의 궤적을 따라
천산 협곡을 넘어가는
내 아버지 걸어가신 천년 유형의 붉은 길.
* 전재 작업 : 어선과 운반선이 접선하여 어선의 어창에서 운반선 어창으로 어획물을 옮기는 작업.
•수상소감 - 우수상 시 이석재
“늘 삶의 향기가 은은하게 스며 있는 글 쓰고파”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이라 얼떨떨하네요.
50대 초반에 명퇴를 하고난 후 새로운 인생설계를 하고 도전하는 일에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항해사로서의 새출발, 청각장애로 인한 좌절,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과 시행착오, 현재의 직업에 이르기까지 도전과 실패. 그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에는 나이가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장벽 앞에서 낙심될 때도 있었고, 그런 환경을 극복하고 현재를 살고 있는 나 자신에게 잘하고 있다는 격려를 하고 싶었습니다.
글은 별다른 취미를 가질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낙서를 하는 버릇에서 시작하여 여러 작가분들의 책을 읽고 습작하고 하는 노력을 10년쯤 했던 것 같습니다.
내 삶의 흔적을 언젠가는 책 한 권으로 남기겠다는 생각이 꾸준히 글을 쓰는데 동기부여가 되었네요.
늘 삶의 향기가 은은하게 스며있는 글을 쓰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늘 힘을 주는 사람에게 고마움과 사랑을 전합니다.
길을 잃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길을 잃었습니다. 사업이 무너지니 가정도 파탄되고 종교생활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알던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자격지심(自激之心)인지 저의 현재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에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방황하며 현실을 도피했습니다. 일부러 서울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타지(他地)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중국까지 도망치듯 오게 되었습니다.
흔히 인생을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합니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매번 선택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3대 선택을 결혼, 직업, 종교라고 하는데, 나이 50세에 이 모든 것들의 기반이 한순간에 붕괴된 것입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어떤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지나온 저의 50년을 곰곰이 반추해보았습니다.
나의 1차 꿈
저는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1·4후퇴 때 월남해온 이산가족입니다. 남한에 친척이 없었고 저의 어머님을 중매로 만났지만 가정에 정(情)을 못 붙이시고 한평생을 유랑하듯 밖으로만 떠도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홀로 저희 3남매를 키웠습니다.
어머님의 고생을 익히 보고 자란 저는, 빨리 커서 돈 벌어 어머님께 집 한 채 사드리는 것이 1차 목표였습니다. 대학 갈 때쯤 우연히 저의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제 나이보다도 주소지 이전 횟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만큼 더 싼 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대학 시절엔 저를 특별히 아끼시는 교수님께서 제게 미국에서의 7년간 석·박사 유학 코스를 권하며,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대학의 교수가 되라고 기회를 주셨는데, 저는 거절했습니다.
제게는 현재의 대학생도 과분하며, 저는 제가 교수되는 것보다,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님을 편히 모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는 “사람이 돈을 쫓으면 추해진다. 돈이 너를 쫓아오도록 해야지” 하시며 저를 훈계하셨지만, 그때 저는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군(軍) 입대할때도 경제생활을 고려해 장교를 선택했고,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1년 반 만에 대형 증권사로 이직(移職)을 합니다. 거기서 3년 만에 드디어 꿈을 이룹니다. 드디어 어머님께 집을 사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제 나이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이후 증권사에서 저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합니다.
고민이 시작되다
그리고 이어 제가 서른한 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에 아들 이름을 지으며 저는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처럼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며, 가족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일까? 그 이상의 인생은 없는 걸까? 나중에 크면 아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금강산(金剛山)’. 저의 성이 김(金)이니, 김강산이나 금강산이나 한자(漢字)의 표기는 같았습니다. 제가 그때는 교회도 열심히 다닐 때였기에, ‘역사의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열어주실 때, 제 아들 녀석을 ‘금강산 찾아가는’ 통일의 도구로 써주십사 하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비록 제 가족밖에 모르는 인생이지만, 제 아들만큼은 그 이상의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의 산물이었습니다.
한편 증권사 시절은 가히 저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최연소 영업추진부장, 지점장, 연수원장, 홍보실장, 강남본부장(11개 지점 총괄), KBS 라디오 증권방송 등 종횡무진(縱橫無盡)했고, 급여도 억대 연봉이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연봉 1억 원이면 거의 상위 1% 수준이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위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왠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가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고, 가시적 1차 목표가 사라진 인생은 조금씩 허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IMF 때 저는 증권사 신촌지점장이었는데, 문득 제가 하는 일에 회의(懷疑)가 생겼습니다. ‘조국 대한민국은 현재 달러가 없어서 국가부도 사태인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 혼란 속에서도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좀 더 벌게 해주는 역할 정도가 아닌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본질적인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증권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을 때, 저를 아끼셨던 사장님께서 제게 물었습니다. “지금 잘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사표를 내는가?” 그때에 저는 ‘재미가 없어서요’라고 답한 기억이 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 말에 사장님께서는 씨익 웃으시며 “사표는 유보할 테니, 유급으로 한두 달 푹 쉬고 충전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처리해주셨지만, 저는 결국 사표를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헤드헌터(Head Hunter)사의 유혹
증권사 퇴직 얼마 전부터 강남의 유명 헤드헌터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소수의 전문가를 특별 채용하고자 할 때는 공개채용을 하지 않고, 헤드헌터사가 보유한 분야별 전문 인력 풀에서 추천을 받곤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쪽 추천 리스트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나 봅니다. 기분 나쁘지 않았고 신기했습니다.
첫 번째 제안은 외국계 증권사의 홍보팀장이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우선은 IMF 시기에 외국 회사라는 게 싫었고, 저의 공식적인 답변은 그쪽 역할이 지금보다 작고, 연봉도 저의 현재 수준이 더 높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2개월 후 다시 제안이 왔습니다. 이번엔 역할도 크고 연봉도 맞춰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우리금융그룹 홍보실장이었습니다.
일단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우리금융은 IMF 때 공적자금을 받은 5개 은행을 통합하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금융지주회사인데, 빨리 회생하여 주가를 높여야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벗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면접이라도 보아달라는 헤드헌터사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여, 면접을 보고 결국 입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가서 만나보니, 하나은행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셨던 윤병철 회장님께서 우리금융그룹 초대회장으로 오셨고, 이후에 금융감독원장이 되신 전광우 부회장님이 제 직속 상관이셨습니다. 두 분 모두 능력도 탁월하시고 인품도 훌륭하셨습니다. 특별히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 믿어주셔서 가까이서 많은 일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무여건은 녹녹지 않았습니다. 산하의 은행들은 지주회사를 마치 점령군처럼 인식하여 노조를 중심으로 사사건건 반발했고,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아, 매일 밤 언론사를 찾아가 부정적인 기사를 막아내는 것이 저의 주된 업무가 되었습니다.
또다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고, 저는 결국 1년 만에 최종 사직을 합니다. 저의 사표에 대한 답신으로 윤병철 회장님이 써주신 덕담 가득한 친필 서한(書翰)에, 저는 한 번 더 감동하며 고별인사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엿보다
총 18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말 미련 없이 정리하고 나서는, 직장인 시절에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들에 관심을 갖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첫째는 각종 동문회 참가였고, 둘째는 강사 활동이었습니다.
동문 모임으로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동창회와 ROTC 총동기회가 있었는데, 나름 열심히 하다 보니, ROTC 21기 총동기회장으로 전국을 누볐고, 당시 ROTC 중앙회장이셨던 5기 차인태(전 MBC 아나운서) 회장님과도 좋은 신뢰를 쌓았습니다.
이어 회사 다닐 때부터 간간이 요청이 있었던 몇몇 대기업에서의 강의 요청을 이제는 편하게 다닐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삼성그룹, 효성그룹, 푸르덴셜생명 등에 리더십, 프레젠테이션, 커뮤니케이션, 네고시에이션(협상기술) 등을 주제로 4~8시간까지 강의를 진행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푸르덴셜생명으로부터 한 가지 큰 제안을 받게 됩니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한국 메이크어위시(Make A Wish) 재단’의 초대 사무총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겐 생소한 분야였지만, 자원봉사자 선발 및 교육, 소원행사 감동연출 및 홍보, 그리고 기업으로부터 후원금 조달업무 등을 총괄하는 역할이어서, 저를 적임자로 평가한 것 같았습니다. 저에 대한 기대도 감사하고 좋은 일이어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한국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사단법인 인허가 설립부터 총 2년여를 봉사했는데, 미국재단으로부터 매뉴얼 교육을 받고, 소아암병원으로부터 소원 대상자를 추천을 받아, 최선을 다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수십 건의 소원성취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때에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약값이나 치료비를 지원하지 왜 소원성취인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 단 한 번의 소원은 무얼까? 인간에게 진정한 소원이란?’ 이런 물음을 통해 사회봉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고, 이런 생각은 후일 중국에 와서도 나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새로운 큰 도전, 그리고 실패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깊이 생각한 것은, 돈 이상으로 의미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한류문화 관광사업’ 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상품화하는 것은 제가 잘할 줄 아는 분야였고, 둘째, IMF를 겪고 보니 국가적으로 달러 버는 일이 중요했는데, 이 일이 바로 그쪽 분야의 일이었고, 셋째는 우리나라 환율이 오르니, 이른바 인바운드(inbound, 한국 입국) 관광사업에 경쟁력이 높아졌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맞춰서 일을 시작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여기저기 세상을 엿보다가 좀 늦어져서 2004년에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오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국적 감동을 추가로 전하며, 1인당 100불씩 더 쓰게 하자는 내부 경영목표를 세우고, 독창적 한류문화 전시 및 상품개발 사업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 지하 1층에 약 1000㎡ 규모로 ‘한류스타 홍보관’을 제법 호화롭게 개장했습니다. 전시관 조성에만 총 9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한류 붐이 있었고, 국제선 제2청사는 도쿄 하네다공항을 직행하는 항공편이 매일 16편이 있었습니다. 김포공항의 한국공항공사는 물론, 문화관광부, 한국관광공사 등의 기대와 관심을 한껏 받으며 사업을 자신감 있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공동으로 지분투자를 약속했던 일본 도쿄의 파트너 관광사업자가 약속을 어기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개장 6개월 후부터 갑자기 일본의 한류 붐이 식으면서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한류 페스티벌 행사에도 참가하고, 말레이시아와 중국 등에도 직접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중국은 그때 처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수익 다변화를 위해 국내 이벤트 기획사로도 사업영역을 넓혔습니다. 당시 오세훈 시장 시절에 서울시 장애인 예술제도 연출했고, 노인협회 주관의 세계노인문화예술제를 8개국을 초청하여 속초와 설악산에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포천 양귀비 꽃 축제, 대기업 행사 등을 수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황과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장 4년 만에 전시시설을 김포공항에 기부체납하면서 사업장의 문을 닫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채청산을 위해 모든 개인 재산 정리를 했고, 가정도 파탄을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뜻만 좋았지 저 자신이 자신감을 넘어 너무 교만했고, 위기대응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고, 모두가 저의 부덕한 탓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계시기에
졸지에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반기는 곳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밤에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쁜 생각도 참 많이 했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님이 슬퍼하실 얼굴이 떠올라서 참고 참았습니다.
어머님은 당시에 큰아들이 고생한다고 제가 사드린 집을 처분하여 제게 마지막 힘을 보태주셨는데, 저는 그 기대마저도 부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입니다. 저 때문에 졸지에 어머님마저도 다시 사실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몇 해 전부터 어머님은 몸이 많이 상하셔서 거의 거동을 못하시는 상태셨습니다. 한약방에서는 맥박도 약하고 보약도 효험이 없다고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업이 망하고 가정파탄마저 겪게 되자, 어머님은 기적처럼 아픈 몸을 털고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이유는, 갈 곳 없는 저의 끼니를 챙기시고 저의 옷을 세탁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녕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을 저는 그때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원인도 모른 채 제가 밤새 심한 복통으로 끙끙 나뒹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두 손으로 저의 아픈 배를 계속 문지르시며, 당신은 평소 불교 신자셨는데 제가 믿는 하나님을 외치시며 ‘우리 큰아들을 제발 살려달라’고 밤새 우셨습니다. 너무도 아프고 길었던 그날 밤, 어머님의 그 뜨거운 눈물과 안타까운 외침 소리를 저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중국으로 떠나오다
그런 어머님을 뒤로하고 저는 중국행을 선택합니다. 당시 중국과는 비록 지지부진했지만, 고구려의 420여 년간 수도였던 집안시(集安市) 정부 관료들과 제가 고구려축제를 협의하던 중이었던 바,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아니 그것을 핑계로 한국을 도망치듯 떠납니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무인도(無人島)를 찾는 마음이란 표현이 더 솔직할 겁니다.
집안시의 고구려 프로젝트는 3개월 뒤 결국 무산됩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이 중국에서 고구려를 거론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습니다. 집안시 정부 책임자도 처음에는 그 정도로 민감한 문제인 줄을 미처 몰랐던 것 같았습니다.
집안시 프로젝트는 무산되었지만 저는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목적도 없이 그저 좀 더 중국에 머물기로 하고 지인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단동시(丹東市)였습니다.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 땅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으며, 북한 대외무역의 약 80%가 단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단동은 한마디로 우리말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단동에는 중국 조선족이 1만 5000명, 북한 사람이 1만 명, 북한에서 태어난 중국 화교(華僑)가 1만 명, 요동대학교 한국·조선(북한)어과 학생들이 1000여 명, 그리고 한국인이 총 2000명 정도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대북사업 관계자이거나 선교사였습니다.
누구를 만날 일도 없고 아무 일과도 없는 저는, 매일 새벽 혹한의 추위에도 저를 채찍질하듯 하염없이 압록강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새벽 교회당을 찾아 무릎 꿇고 홀로 숨죽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강 건너 불 꺼진 북한의 신의주 땅을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살아남아 버티기’의 중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그렇게 한두 달을 보내다 보니, 점점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도 저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다녀와서 쓴 책의 제목이었던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생각났습니다. 한인교회를 통해 한국 사람들을 접하고 단동한인회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시간이 많으니 한인회 봉사를 제의받아, 당시 막 설립한 단동한국문화원의 부원장직(원장은 한인회장이 겸직)과 한인회 사무국의 사무총장으로 무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단동한인사회는 대부분 1992년 한중수교 직후와 1997년 IMF 전후로 중국에 건너오신 소상공인 분들이 많았던 바, 아마도 저와 같은 대기업 출신의 사회 경험자가 드물어, 오자마자 졸지에 감투를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봉사의 길에 들어서다
뜻밖에 할 일이 생긴 저는, 대기업에서의 기획력과 이벤트 기획사 대표로서의 경험을 되살려 많은 일들을 추진했습니다.
우선 요동대학교 한국·조선어과를 찾아서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와 글쓰기 대회, 그리고 합동 문화공연을 매년 추진했습니다. 재외동포재단에는 기획서를 보내 한인회관 건축지원금을 50% 받고 나머지는 현지 모금하여 3층짜리 아담한 단동한인회관을 건립했습니다.
한편, 장기체류 단동 한인들의 대부분이 현지인과 결혼한 다문화가족들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지원체제가 없어, 문화원 내에 다문화가족 복지센터를 만들고, 당시 단동을 방문한 국회 통일외교안보위의 박선영 국회의원님과 심양총영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문화가족 합동결혼식과 단체 한국 신혼여행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족학교에 가보니, 70% 이상 대부분 학생들은 부모가 한국에 돈 벌러 가서 없는 결손 가정이거나 조부모 위탁상태였고, 소학교를 졸업해도 별도 우리말도 잘 못하고 중국어도 잘 못하는 언어수준에다, 문화예술 방면 재능교육 발견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건강해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꾸지 못하는 조선족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문화원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말 교육과정을 시작했고, 해마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여 수상자들에게 한국문화체험여행을 제공했습니다. 제가 단동에 머문 4년 동안 총 140여 명의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여행비용은 경기문화재단과 한국 지인들의 개인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족 학생들의 예술적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나아가 그들 스스로가 무언가를 꿈꾸게 하기 위해, 제가 예술단장이 되어 직접 학교에 가서 학생 67명을 선발하여 ‘압록강 청소년예술단’을 공식 발족하였습니다.
그 뒤 8개월간의 훈련 후에 5성급 호텔에서 1000여 명의 학교관계자과 학부모들을 모시고 ‘내 마음의 북두칠성’이라는 제목의 예술단 창단공연을 성공리에 추진하였습니다. 대부분 첫 무대를 경험하는 것이라 감동은 컸고, 학교를 향한 후원금도 쏟아졌고, 부모님들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심양으로 진출하다
이런 저의 활동들이 인근 지역에도 소문이 났던 모양입니다. 심양총영사관에서는 당시 조백상 총영사님의 파격적 배려로 저를 총영사관의 경제문화행사 기획자 겸 사회자로 발탁해서 일을 맡겼습니다.
마침 한중수교 20주년도 겹쳐서, 각 도시마다 한중우호의 밤 행사가 있었고, 중국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27개 대학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 및 K-Pop 경연대회’, 그리고 한국 국경절(개천절) 기념 총영사관 한복패션쇼 등의 행사를 연출했습니다.
그러면서 항일유적연구소장과 동북3성 한국인연합회 사무총장을 맡게 되어 동북3성 최대도시인 심양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심양은 단동의 10배 규모로, 외곽까지 도농(都農)인구 합계가 총 2000만 명인 대도시입니다.
중국 동북3성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은, 전 세계 한민족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중국에 있고, 중국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동북3성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물론 조선족들도 우리의 항일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항일유적지 찾기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항일유적연구소였습니다.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항일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연구소장으로서 연구원을 모집하고, 안중근 13일간의 이동경로와 거사일정을 뒤따라가 보기도 했고, 윤동주의 생가,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 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많은 항일열사들의 발자취도 찾아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런 중 우리나라 3대 독립선언 중 하나이자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의 내용과 의미를 분석, 발굴하여, 심양총영사관과 국가보훈처의 협조 아래 저희 항일유적연구소가 주관하여, 중국 현지 최초로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개최하였습니다. 저의 가장 큰 보람 중 하나인 이 행사는, 민주평통 선양협의회의 주관으로 지금도 8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하다
대도시 심양에 와서 저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제가 잡다하게 벌여놓은 문화예술 봉사활동과 조선족학교 지원, 그리고 항일역사연구와 유적지 방문활동 등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시스템과 공간 확보의 필요성이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 추진합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은 심양의 코리아타운 지역인 서탑가 인근에 약 2000㎡ 규모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2014년 7월 19일 설립하였습니다. 자체적으로 130여 석 규모의 강당을 갖게 된 문화원은 많은 교육활동과 문화예술 공연행사를 연출합니다. 그중에 최고의 대박상품은 ‘실버대학’입니다.
제1기 실버대학은 2014년 가을에 약 15주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50세 중반부터 80세 전후의 조선족 어르신들 93명이 첫 신입생으로 입학했습니다. 노래교실, 역사문화특강, 10년 젊어지기 미용특강, 핸드폰 사용법, 기본생활영어, 도전 골든벨, 그리고 졸업여행에 이어 사각모와 졸업가운 입고 졸업식하기 등의 행사에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실버대학은 제가 문화원장으로 재임한 약 3년 반 동안 총 4회가 이어졌습니다.
한편, 실버대학은 제가 특별한 의미로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한국에 두고 온 저의 어머님을 생각하며 만든 행사입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어머님의 집에 가면 마음으로는 늘 눈물겹게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세대 장남들이 그러했듯이 다정다감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무뚝뚝한 아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어머님과 재미있게 놀아드리고도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죄송스러움과 한(恨)을 실버대학을 통해서 조선족 어머님들께 재롱도 부리며 조금이나마 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요? 실버대학 어머님들의 공통된 감사인사 표현은 “우리 아들도 못 해준 호강을 실버대학에서 받았네요, 너무 행복합니다!”였습니다. 저도 응답합니다. “아닙니다. 행복하시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밖에도 한중교류문화원에서는 항일사진전, 어린이 K-Pop대회, 한국가수 김광석 가요제, 중국가수 등려군 가요제, 장예모 감독 영화제, 한국영화제, 조선족학교 돕기 프로젝트, 청춘콘서트, 사물놀이 강습, 한국 만화도서관 개관, 한중친선 배구대회와 탁구대회 등의 행사를 연출하였습니다.
동주학당, 동북에 물들다
그렇게 3년 반의 초대원장 자리를 마치고, 조선족에게 한중교류문화원 2대 원장을 물려주었습니다. 경영의사결정 과정에서 오해와 어려움도 있었고, 제가 너무 강하게 한국 문화를 중국 조선족들에게 전파한다는 정치적 오해가 깊어져서, 부득불한 조치였습니다.
대신에 저는 조선족 지식인들과 함께 윤동주의 이름을 딴 ‘동주학당(東柱學堂)’이란 모임을 만들고, ‘한중 문화융합연구소’라는 개인연구소를 차린 후, 다시 독립하여 조선족들을 향한 집중 봉사활동을 재개합니다.
동주학당은 민족시인 윤동주를 한민족 디아스포라(Diaspora)의 대표인물로 생각하여 ‘한민족 디아스포라 사랑방’을 추구하는 가운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을 표방했습니다.
우선 심양에서 ‘윤동주 100주년 기념 시낭송음악회’를 연출했고, ‘동주학당, 대련에 물들다’, ‘동주학당, 치치하얼에 물들다’, ‘동주학당, 영구에 물들다’ 등 동북3성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또한 심양 남부 소가툰 지역에 ‘윤동주 문화원’을 건립하여 실버대학도 성황리에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거의 최북단으로, 3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는 흑룡강성 치치하얼에도 ‘치치하얼시 조선족문화원’ 설립을 지원하고, 제가 명예원장을 맡아, ‘치치하얼시 조선족 아리랑 예술제’ 및 대동제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어 거기서도 같은 마음으로 실버대학을 진행했는데, 제가 중국에서 총 6번째로 진행하게 된 ‘치치하얼 조선족 실버문화대학’은 무려 1200km 거리(심양-치치하얼)를 3개월간 매주 고속열차로 달려가서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의 크기는, 자신의 재물과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것에 비례한다는 말을 저는 온전히 믿습니다. 치치하얼이 제겐 그런 곳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족 동포 분들이 제겐 그랬습니다.
한중 갈등에 아파하다
그렇게 해서 어느 새 10여 년이 흘렀고, 50세에 길을 잃고 도망치듯 중국에 왔는데, 뜻밖에 어쩌다 길이 되어버린 조선족 대상 봉사활동을 하다, 어언 환갑을 지나 올해 63세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 제가 제법 많은 일들이 성취되었음을 자랑하듯 나열했는데, 그러나 돌이켜보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어렵고 힘든 문제들은 지금도 계속 발생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한중관계가 어려워지면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숨이 막힐 만큼 생존에 위협을 느낍니다. 평소에도 역사문제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부딪치며 민감해서 매우 조심해야 했지만, 설상가상 사드 사태 등 정치적으로 꼬이면 한국인은 택시 탑승을 거절당할 만큼 배척됩니다. 지금도 한중관계가 소원해지면 겁부터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동주학당이 야심차게 윤동주문화원을 설립했으나, 윤동주의 국적문제가 불거지면서 설립 1년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고, 개인적으로는 문화간첩으로 오해받아 특정 지역에 출입이 막힌 적도 있었습니다.
살펴보면, 중국인들은 조건 없는 봉사를 믿지 않습니다. 조선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숨겨진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문화는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침투 등 정치적인 오해로 몰면, 어느 친구도 나서서 저를 변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중국이고 그게 조선족의 입장임을, 너무 아프고 안타깝지만 이제는 이해하고 인정합니다.
한편, 한때는 한국 정부도 저를 오해해서, 제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인 압록강 지역을 자주 오고가니까, 인천공항에 입국할 때마다 혹시 친북간첩이 아닐까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한국과 중국이 모두 저를 의심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외교를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고 말합니다. 안보는 미국이요, 경제는 중국이라는 뜻입니다. 양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 외교만큼, 재중 한국교민들의 마음도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서로 신뢰하고 미래지향적으로 협조하는 훈훈한 한중관계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조선족 전성시대’가 온다
제가 중국에서 만나본 조선족들은 현재 중국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아울러 한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어디 가도 비주류요,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에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편입되어, 그동안 중국인으로 산 세월이 미처 70년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중국의 주류인 한족들과의 융화가 문화 차이로 쉽지만은 않고, 마찬가지로 모국인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차별받는 비주류요, 이방인입니다.
현재 조선족 부모와 자녀들은 매우 고민합니다. 중국에서는 점차 조선족에 대한 우대조치가 사라지고, 얼마 전 조선족학교를 향해 앞으로 조선말이 아닌 중국어로 교육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조선어로 시험 보아 다소 유리했는데, 앞으로는 대학시험도 중국어로 쳐야 합니다.
그러자 조선족 유치원과 학교에는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빨리 중국 한족학교로 옮겨가야 그나마 중국 학생들을 따라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족 학생들이 한족 학생들과 경쟁에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거의 없습니다.
얼마 전 조선족 대학생연합회 대표들과 대화했는데, 그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커피숍이나 식당을 꾸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 외에는 별다른 기회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조선족들에게 저는 이제 곧 ‘조선족의 전성시대’가 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입니다. 이는 굳이 정치적 통일이 아니더라도, 상호간 화해협력을 기반으로 북한이 경제적으로 개방하는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때가 되면 조선족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 이를 잘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외칩니다. “조선족은 어디 가나 비주류요 이방인이 아니라, 향후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모두가 필요로 하는 핵심인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미리 점지(點指)하고 100년 전부터 중국 땅에 선발대로 보낸, 최고의 일꾼들입니다.” 저는 이런 점들을 우리 조선족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주려 합니다.
저의 그런 주장의 근거는 세계적인 투자자 짐 로저스의 분석에 기초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제 인생 이모작의 꿈도 거기서 같이 출발합니다.
20년 전부터 중국의 획기적 성장을 예견했던 짐 로저스는, 이제 일본의 시대는 끝이 났고, 앞으로는 북한의 개방을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북한의 개방은 분명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미래에 가장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저도 이 주장에 100% 공감하며 진실로 기대하며 설렙니다.
‘조선족 희망전도사’의 꿈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가끔은 강의를 할 기회가 생깁니다. 대부분은 조선족단체 모임이고, 한국국제학교 학생들에게도 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빠지지 않고 제가 설파(說破)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족이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의 실무주역이 되자!’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독일 통일 이후의 상황에 주목합니다. 1989년 서독과 동독이 통일할 때 양국의 경제력 차이는 8:1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32년간 동독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서독과 동독은 아직 2:1 이상의 격차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과 북한은 3년 전 기준으로 경제력 차이가 무려 44:1입니다. 이 격차를 해소하자면 적어도 향후 50년 이상의 투자와 인적교류가 무조건 필요합니다. 그때에 필요한 실무인력으로 조선족보다 더 경쟁력 있는 집단은 없다고 저는 감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문을 열면, 서울 청년들이 평양 청년들과 별 갈등 없이 일할 수 있을까요? 저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당장에 한국인과 조선족도 문화인식 차이가 작지 않은데, 남북한 간에는 불가피하게 갈등해소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한국의 자본주의도 충분히 알고,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에도 잘 적응하고 있는 조선족만의 실무역할 영역이, 다가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차별적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분명히 생겨날 것이라 저는 판단합니다.
앞으로 적어도 50년 동안은 조선족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러하니 조선족이라면, 기본적으로 우리말은 무조건 똑똑히 배워두고, 능력이 되면 한국의 기술이나 장점을 잘 공부해두라는 조언을 조선족 청년과 부모들에게 진심을 다해 전해줍니다.
그렇게 강의하며 말하고 다니다 보니, 일부 조선족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조선족 희망전도사’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별명이 참으로 과분하지만 제 마음에도 흡족하게 스며듭니다. 더 노력해서 진짜 ‘조선족 희망전도사’로 살아보자는 꿈도 생겨났습니다.
대륙에서 길을 묻다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 민족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 ‘길’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아마도 나이 50에 직업과 가정과 신앙의 동반 몰락을 경험하면서 도망치듯 중국으로 넘어온 때의 제 심정과 조금은 닮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차려, 작고 소박하지만 같은 민족으로서의 안타까움과 애정을 담아, 혹시라도 저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에, 특별히 조선족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달려갔던 중국에서의 지난 10여 년을 정리해봅니다.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 선생이 청년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말했던,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비로소 길이 되었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처음엔 미처 길인 줄 몰랐는데 저도 어찌어찌 십여 년을 지나고 보니, 이젠 나름 하나의 길처럼 느껴집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했던 한심한 존재가, 어쩌다 타국 땅에서 문화 봉사를 통한 희망전도사로 모질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30~40대의 젊고 풍요로울 때 그렇게도 갈구했으나 찾지 못했던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어리석게도 60을 훌쩍 넘어 늙고 가난해지면서 비로소 조금씩 깨닫고 배워갑니다.
그동안 중국에 와서 개인적으로 절망하며 힘들었을 때, 제게 특별한 위로가 되어준 시(詩)가 있습니다. 정호승(鄭浩承) 시인의 ‘봄 길’입니다.
봄 길
-정 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김영식이 있다’
이제 고백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 길’은, 제가 대륙에 와서 길을 묻다가 십 수년 만에 찾아내어 저 스스로에게 답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저는 시의 마지막 구절 뒤에 한 줄을 더 보태어, ‘김영식이 있다’를 다짐처럼 홀로 외치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는 분들에게 지난날 저의 절망도 작은 위로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깜깜한 절망 속에서 위로를 받았듯, 많은 분들이 그랬으면 좋겠고, 앞으로 살면서 서로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봄 길’의 내용처럼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늘이 허락하셔서, 제게도 ‘인생의 이모작’이 가능하다면, 우선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무한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중국 땅에서 한 핏줄 동포를 향한 희망전도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아가 더 축복해주신다면, 30여 년 전 제가 아들 이름을 ‘금강산(金剛山)’이라 지었던 그 기도의 응답까지 받아서, 북녘의 아버지 고향 땅에 달려가 입 맞추고, 거기 그분들을 뜨겁게 보듬다, 그곳에서 그분들과 함께 묻히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마지막 소망이 너무 큰 욕심일까요?
•수상소감 - 대상 미니자서전 김영식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 세상에 알리겠다”
•대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수상 소감은?
저는 7살 어릴 적 시골에서, 코 흘리게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너무너무 좋아서,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1학년을 마치는 날, 담임선생님께서는 제 이름을 호명하시며 뜻밖에 1등 우등상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태어나 받은 ‘첫 상(賞)’이었습니다.
우등상 상품은 공책 한 권과 연필 두 자루였습니다. 그걸 들고 낮은 언덕의 신작로 길을 뛰어 어머니께로 달려갈 때, 저는 얼마나 가슴이 뛰며 기뻤는지 모릅니다.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로부터 어언 56년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상(賞)’일지도 모르는 이번 상이 저에게는 그때만큼이나 기쁩니다. 그때만큼이나 설렙니다.
저에게 이렇게 설레고 행복한 순간을 선물로 주신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의 주최한 브라보와 신한은행의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번에 제가 쓴, 미니 자서전 는, 어쩌면 교만했던 인생의 부끄러운 고백이고, 뻔뻔한 반성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특별히 큰 상을 주신 뜻은, 아마도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저 나름 생각해 봅니다.
하나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인생 이모작’에 도전하라는 따뜻한 격려로 느껴집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대만큼 열심히 새로운 길에 도전하며 살겠습니다.
또 하나 이번 상은, 제 글쓰기에 대해 숙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보태라는 명령입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늘 정직하고 공감과 위로를 주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다시 한 번, 큰 상을 주신 브라보와 신한은행에 감사드리며, 끝으로, 조국 대한민국의 조속한 코로나 승리를 기도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응모 배경이나 동기는?
저는 현재 중국 심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지난해 설 명절을 지내고 중국에 온 후,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말에는 운동 중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어, 중국에서 수술을 받고 3개월을 치료한 후 현재는 재활 중입니다.
한국의 가족도 한국의 소식도 모두 그립습니다. 한국뉴스를 검색하다가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발견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50+’라는 표현에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가 사업에 실패하고 도망치듯 중국에 온 것이, 바로 50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향살이 어언 13년이 흘러, 갑자기 코로나로 멈춘 일상 속에서 지나온 저의 인생을 되돌아 반추해보는, 귀한 시간을 가져 보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좋은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시니어 공모전을 통해 ‘인생 이모작’도 새로이 꿈꾸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기왕에 제가 쓴 글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며 더 잘 읽히면 좋겠다는 차원에서의 노력은, 제가 많이 부족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소 저의 글은 딱딱하고 설명형입니다. 재미없는 제 성격과 꼭 닮았습니다. 게다가 글쓰기로 처음 상을 탄 것이 대학 때 논문공모대회였고, 대기업에서 기획담당자였기에 더더욱 저의 글은, 사사로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래서 재미와 감동이 ‘1’도 없는 필법(筆法)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지난 10여 년간, 중국에 와서 여러 종류의 한글 잡지를 만들고 배포했는데, 주된 독자층이었던 중국조선족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우리말 어휘력이 30% 수준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글은 그저 수준 높고(?)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로 유명한 미국작가 훼밍웨이가 어느 회고문에서 자신의 독자로부터 받은 편지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전쟁 파병(아마도 한국전쟁) 중인 미군병사가 자신의 소설을 읽고 나서, 어려운 단어가 없어 ‘사전(辭典)찾기 ’없이도 100% 공감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는 감사편지였습니다.
저 역시, 쉽고도 감동적인 글, 그리고 오래 간직하고픈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준 멘토나 동기부여 이유가 있다면?
직접적인 멘토는 아니지만, 제가 특별히 닮고 싶은 작가가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한국의 유명한 시인 류시화이고, 또 한 분은 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미국의 루스 베네딕트 교수입니다.
시인 류시화는 개인적으로 저와 고등학교 동기동창입니다. 본명은 안재찬이며, 대광고등학교 30회로, 고교 2,3학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했습니다. 경희대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된 그는, 인도 여행을 다녀와서 쓴 수필집 및 시집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도 깨달음을 줍니다. 저도 글을 쓴다면 그런 면을 배우며 닮고 싶습니다.
다음은 미국의 여성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교수인데, 제가 단동에서 항일유적연구소장을 할 때, 그분의 저서 을 읽었습니다. 2차 대전 전쟁을 종료하기 직전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 분석한 책으로,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인들에게 일본과 일본인 분석에 관한 제 1의 필독서입니다.
같은 패망국인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왜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가에 나름의 분석이 명쾌합니다. 일본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쓴 글이라는 점도 놀랍고, 냉철한 대안 제시가 전후(戰後) 미국과 일본의 관계설정에 기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대단히 유효합니다.
일본에 대해 비판만하고 흥분만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나는 중국인에게 대한민국에 대해 얼마만큼 설명할 수 있는가, 또는 한국에 와서는 중국에 대하여, 그리고 제가 중시하는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 나는 얼마만큼 본질을 명쾌하게 공부했는가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게 하는 책입니다. 중국판 같은 글에도 도전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얼마 전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영화 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70년 전 조선인의 미국 이민사를 소재로 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제 주변의 중국조선족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100년 전후로 대륙에 이주해 왔고, 영화 미나리 이상의 휴먼 스토리가 얼마든지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향후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 것도, 이번 상(賞)을 통하여 저에게 주신, 귀한 소명 중 하나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있지만, 딱 한사람만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저의 여동생 ‘김경희’를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교만한 실패와 방황, 그리고 대륙에서 길을 묻는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적으로는 부끄럽게도 맏아들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어머님께 제가 한 때는 자랑이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걱정을 끼치는 아들로 살고 있는데, 그 빈자리를 저의 여동생이 말없이 채워주고 있습니다.
여동생 김경희는 제 인생에서 가장 미안하고 가장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번에 받은 저의 수상이, 제 여동생에게도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식시장에서 뛰어드는 여성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해 여성 투자자는 388만 명으로, 2019년과 비교해 61% 늘었다. 같은 기간 남성 투자자 증가율인 41%를 크게 웃돈다.
조선일보가 취재한 대형 증권사 프라이빗뱅커(PB) 박모 씨는 “요즘처럼 미래 성장주가 득세인 시기에는 주식을 머리가 아니라 심장으로 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런 분위기에서는 40~50대 여성 투자자들이 주식을 제일 잘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성 시니어들은 주식 매매를 결정할 때 주변에서 소개받은 종목을 선호한다. 이때 재무적인 요인보다는 사업 모델이나 미래 성장성에 동의해서 투자하기 때문에 장기투자를 선호하는데, 이게 오히려 효과적으로 작용한다는 설명이다.
증권업계는 특히 강남·서초·송파 등 강남 3구에 사는 40~50대 여성 투자자들의 활약에 주목하고 있다.
삼성증권이 최근 3개월 동안 40~50대 강남권 여성들이 매수한 종목을 분석한 결과 1위는 삼성전자, 2위는 카카오였다. 3~10위까지는 HMM, 네이버, SK이노베이션, 현대차, 두산중공업, 진원생명과학, 삼성바이오로직스, 신풍제약 순이었다. 대부분이 동종업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종목들이다.
그런데 주식 투자를 고려하고 있는 40~50대 여성 시니어들이 강남 여성들의 투자 종목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따라 해도 되는 걸까? 최근 코스피가 한창 상승하다가 미국 연방준비위원회가 테이퍼링 신호를 보내 증시가 떨어지고 있어 섣부른 주식 투자가 화를 불러올까 걱정도 된다.
결론은 ‘우량주에 투자하면 괜찮을 수 있다’다. 우량 회사는 부침이 있긴 하지만 장기적으로 좋은 실적을 거두는 편이다. 따라서 우량주는 주식을 적립식으로 조금씩 사서 모으는 방법이 합리적이다. 주가가 떨어지더라도 배당을 받으면서 기다리면 장기적으로 우상향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를 예로 들면 10년 전인 2011년 8월 삼성전자 1주 가격은 1만4880원이었다. 23일 기준 삼성전자 1주 가격이 7만3600임을 고려하면 10년 만에 네 배 이상 오른 셈이다.
증권사 PB로 일하다가 현재 구독자 47만을 가진 유튜버가 된 박곰희(본명 박동호)는 최근 한 유튜브 영상에서 “기업은 똑똑한 사람들이 있는 지능의 인격체이니 안정적인 기업이라면 기업을 믿고 투자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위기로 증시가 좋지 않을 때의 투자 방법에 대해서 “반드시 위기는 오기 마련”이라며 시장의 움직임에 크게 구애받지 말고 장기투자를 권했다. 또 “적립식으로 주식을 나눠서 사다 보면 평균 단가는 기업의 주가가 되고, 해당 기업의 주식 가격이 올랐을 때는 꽤 많은 주식을 보유하게 된다”고 말했다.
주식에 도전하고 싶어도 자녀 양육과 집안일로 주식공부에 시간을 내기 힘든 4050 여성들이 많다. 전문가들은 이럴 때는 장기투자를 전제로 삼성전자, 카카오, 네이버처럼 시장에서 신뢰가 높은 믿을 만한 주식에 투자하기를 추천한다.
투자의 기본 원칙은 간단하게 위험과 변동성을 줄이는 것이다. 시장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긴 호흡으로 어떤 종목을 꾸준히 사들이는 것은 변동성을 줄이는 방법 중 하나다. 전문가들은 주변에서 대박을 쳤다는 드문 소식에 현혹돼 무리하게 투자하지 말고 원칙에 따라 투자를 이어간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증시가 연일 하락세를 기록하면서 지난해부터 이어진 이른바 '빚투'에 주의보가 발령됐다. 최근 주가가 급락하면서 반대매매 규모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빚을 많이 낸 개인투자자들은 빚은 빚대로 진 채, 반대매매로 투자에서는 손해를 보는 이중고를 겪을 우려가 있다. 최근 50세 이상에서 주식 투자 참여가 늘고 있어 시니어들의 주의가 필요해 보인다.
반대매매는 개인이 증권사에 자금을 빌려 주식을 산 후 기한 내에 갚지 못하면 증권사가 강제로 팔아버리는 조치다. 반대매매는 장 시작과 함께 하한가로 처분되므로 대부분 투자자에게 손해다.
21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19일 기준 반대매매 규모는 421억 원으로, 2007년 4월 24일 426억 원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올해 가장 많았던 1월 14일 387억 원도 뛰어넘었다.
지난 13일 반대매매 금액이 300억 원대로 증가해 336억 원을 기록했다. 17일에는 318억 원으로 소폭 줄었으나 18일 370억 원으로 치솟은 데 이어 400억 원대로 뛰어올랐다.
최근 4거래일 동안 반대매매 규모는 1447억 원, 하루 평균 315억 원에 달한다. 이는 올해 1월부터 하루 평균 반대매매 규모인 210억 원의 1.5배 수준이다.
반대매매 규모가 늘어난 것은 최근 주가가 크게 떨어지면서 개인투자자들이 빌린 돈을 갚지 못한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문제는 주가 하락에도 빚을 내 주식에 투자하는 신용융자 잔고도 크게 늘어나면서, 주가가 계속 하락하면 투자자 손실이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예탁결제원이 발표한 ‘2020년 상장법인 개인 보유금액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50대 주식 소유자는 50대 198만 명, 60대 117만 2000명, 70세 이상 61만1000명이었다.
주식 소유자 수가 가장 많은 연령대는 40대였지만 주식 보유금액은 50대가 약 212조 원으로 가장 많았다. 그만큼 시니어들도 주식 투자에 관심이 많다는 뜻이다.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시니어들은 퇴직연금 등이 있어 비교적 빚을 덜 내겠지만 빚투를 고려하더라도 증시가 좋지 않으므로 빚을 내서 투자하는 빚투는 삼가는 게 좋다.
은퇴한 시니어 부부는 고민이 깊다. 은퇴 이후 시간은 많아졌지만, 지갑 사정은 빠듯하다. 자녀가 분가하고 남겨진 부부에게는 노후를 위한 자산 계획이 필요하다. 실제로 부부가 함께 하면 수익과 세제 혜택이 늘어나고, 안정적인 재무 설계가 가능하다. 부부가 함께 하는 노후 준비 플랜으로 ‘연금’과 ‘ISA’에 대해 살펴본다.
100세 시대의 은퇴는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은퇴 이후 경제적 뒷받침이 없으면 생활이 힘들다. 보험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은퇴 시점까지 모은 재산은 최저 생계비로 쓰지 않는 한 70대 초중반이면 고갈된다. 보험개발원이 발표한 ‘2020 KIDI 은퇴 리포트’에 따르면 은퇴 전 가구 평균 소득은 6255만 원에 달했지만, 은퇴 후엔 58% 감소한 2708만 원이었다.
실제로 은퇴자 3명 중 2명은 노후 자금이 부족하다. KB경영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노후 생활에 필요한 자금은 월평균 226만 원이지만, 은퇴자들이 현재 보유 중인 준비자금은 월평균 110만 원에 불과했다. 실제로 은퇴 후 부부 중 1명 이상이 경제활동을 하는 가구는 84.8%에 달했다. 보험개발원 관계자는 “경제적 부담 때문에 노후에도 일하는 경우가 많다. 여유로운 노후를 위해서 다양한 노후 소득원천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반면 약 8%에 불과하지만, 노후 자산이 충분한 금퇴족도 있다. 이러한 금퇴족의 특징 중 하나는 일찍부터 연금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100년 행복연구센터 설문에 따르면 금퇴족의 46.3%는 40대부터 연금을 활용했다고 답했다. 그들 중 62.7%는 앞으로 국민연금 수령액을 고려해서 자산관리를 계획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100년 행복연구센터 관계자는 “금퇴족은 일반적인 은퇴자에 비해 노후 자산을 미리 준비해 부담이 덜하지만, 투자 수단이 많은 만큼 지속적인 자산 관리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으로 맞벌이
은퇴를 앞둔 시니어 부부는 노후 준비 때문에 걱정이 앞선다. 젊은 시절 부모님이 물려줄 재산을 믿고 돈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은 일을 하고 있어서 괜찮지만, 은퇴 이후엔 막막하다. 출가한 자녀들의 용돈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돈 걱정 없는 안정된 노후를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금퇴족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안정적인 은퇴 설계의 기본은 바로 ‘연금’이다. 연금은 크게 공적 연금과 사적 연금으로 나뉜다. 공적 연금의 대표적인 예는 국민연금이며, 공무원연금과 같은 직역연금도 여기에 포함된다. 퇴직연금과 더불어 개인연금인 연금저축은 사적 연금이다.
국민연금은 소득이 있을 때 일정액의 보험료를 납부하고, 노령·장애·사망 등과 같은 일정한 사유로 인해 소득이 줄었거나 없을 때 연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물가상승률을 반영하기 때문에 물가가 오르면 수령액도 오른다. 지난 10년 동안 18% 이상 금액이 늘어났다. 또한 사망 전까지 수령할 수 있고, 사망하면 가족에게 이전된다.
국민연금은 500만 시대를 열었다.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국민연금 수급자는 559만 명이며, 2019년 대비 42만5000명이 증가한 숫자다. 이 중 부부 모두 노령연금을 받는 수급자는 42만7467쌍으로 2019년과 비교해 20.3% 증가했다. NH투자증권 관계자는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면서 연금 맞벌이도 증가하고 있으며, 외벌이 가구도 임의가입을 통해서 연금 맞벌이를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전업주부도 임의가입을 하면 맞벌이 부부의 70~75%에 달하는 연금 수입을 얻을 수 있다. ‘임의가입’은 18세 이상 60세 이전의 의무가입 대상자가 아닌 자가 본인의 선택에 따라 가입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월마다 9만 원을 10년 동안 납부하면 약 18만 원을 노령연금으로 받을 수 있다. 이외에 추후 납부를 통해서 과거에 납부하지 않은 기간의 연금을 납부하고 가입 기간을 늘리는 방법도 있다.
NH투자증권 관계자는 “동일한 납입 금액으로 연금수령액을 늘리려면 납입 금액보다 가입 기간을 늘려야 한다. 추후 납부 등을 통해 납입 기간의 공백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다.
IRP와 연금저축
국가가 보장하는 제도가 국민연금이라면 퇴직연금은 회사가 보장하는 연금제도다. 회사 퇴직급여 재원을 외부 금융기관에 적립해두고 가입자가 퇴직할 때 일시금 또는 연금으로 지급한다. 퇴직연금제도는 확정급여(DB)형, 확정기여(DC)형, 개인형(IRP)으로 분류된다. DB형과 DC형은 회사에서 가입하고, IRP는 개인이 가입한다. 다만 DB형은 기업에서 자금을 운용하고, DC형은 개인이 운용한다.
현재 퇴직연금 시장은 꾸준히 성장 중이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퇴직연금 총적립금은 2019년보다 15.5% 증가한 255조5000억 원이며, 이는 5년 전과 비교해 2.5배 늘어난 수치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기업의 퇴직연금 신규 도입과 경과 연수에 따른 부담금 납입이 늘어났고, 세제 혜택으로 인해 퇴직연금 시장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연금저축과 IRP를 활용하면 세액공제가 가능하다. 연말정산 때문에 붓는 상품으로 알려진 연금저축은 최대 400만 원까지 세액공제가 가능하며, IRP는 700만 원까지 가능하다. 두 상품을 합산하면 최대 700만 원까지 세액공제가 가능하다. 한시적으로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 동안 50대 이상 연금계좌 가입자의 세액공제 대상 금액이 200만 원 정도 늘어난다. 따라서 최대 900만 원까지 세액공제가 가능하다. 다만 총급여가 1억2000만 원(종합소득 1억 원)보다 많은 고소득자에게는 이런 혜택이 없다.
특히 은퇴를 앞둔 노부부라면 저축 여력과 세액공제 한도를 비교해야 한다. 둘 다 세액공제율은 같다. 근로소득만 있는 경우 총급여액이 5500만 원 미만이면 16.5%를 세금으로 환급받고, 그 이상이면 13.2%를 환급받는다. 연금저축과 IRP를 합쳐 연금계좌에 한해 저축할 수 있는 돈은 최대 1800만 원이다. 만약 부부의 저축 여력이 세액공제 한도에 못 미친다면 세액공제율이 높은 사람의 공제 한도부터 채워야 한다.
예를 들어 배우자의 소득은 1억 원이고 본인의 소득은 4000만 원이라 가정했을 때, 1000만 원 정도를 연금계좌에 저축해보자. 이때 본인이 700만 원을 저축하고, 배우자가 300만 원을 저축하면 세액공제 효과가 크다. 세액공제율에 따라 본인은 16.5%를 공제받고, 배우자는 13.2%를 공제받기 때문이다. 미래에셋증권 관계자는 “세액공제란 납부한 세금을 돌려받는 것이기 때문에 납부한 세금이 적다면 돌려받을 세금도 적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세제 혜택은 ISA
올해 투자 시장의 블루칩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ISA’다. ISA는 만능통장이라 불리며 예금, 펀드, ETF 등 다양한 금융상품을 한 계좌에 모아 투자할 수 있는 상품이다. 과거엔 단점이 많아서 주목받지 못했다. 올해 2월부터 주식 투자까지 가능한 중개형이 등장하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실제로 중개형 ISA의 경우 2월 기준 62억 원이던 납입금이 5월엔 9000억 원까지 불어났다. 지진선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중개형은 직접 투자가 가능해서 투자를 통해 자산을 축적하려는 분들에게 인기가 많은 상품이다”라고 말했다.
ISA의 가장 큰 장점은 세제 혜택이다. ISA는 순이익 200만 원까지는 비과세며, 가입 유형에 따라서도 비과세 혜택이 주어진다. 가입 유형별로 최대 400만 원까지 비과세다. 초과하는 소득은 9.9%의 저율로 분리과세한다. 특히 저율 분리과세는 금융소득 종합과세 대상인 사람에게 상당히 좋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세제 혜택이 큰 만큼 노후 자산 준비를 위한 재테크로 ISA를 고려하는 것도 좋다”라고 말했다.
조건이 완화되고 가입 대상의 범위가 대폭 넓어졌다. 완화된 조건에 따르면 19세 이상이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어서 소득이 없는 시니어 부부도 투자할 수 있다. 의무납입 기간이 3년으로 줄어들어 가입 부담이 줄었고, 전년도 남겨둔 미납분에 대한 이월 납입도 가능해졌다.
한편 ISA 만기 자금을 연금계좌로 전환하면 노후 준비금을 더 확보할 수 있다. 연금 전환금의 10%(최대 300만 원)까지 세액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ISA 해지 시점까지 세금 납부를 연기하는 과세이연이 가능하다. 지 연구원은 “연금계좌의 최대 한도는 1800만 원밖에 안 되지만, ISA는 별개의 상품이라 한도에 상관없이 추가로 연금계좌의 금액을 늘리고자 하는 분들에게 좋다”라고 말했다.
왕년 전성기에 누렸던 최고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 이상우 한국추리작가협회 이사장의 과거 그때의 시간을 되돌려본 그 시절, 우리 때는 이것까지도 해봤어. 나도 그랬어, 그랬지!! 공감을 불러일으킬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보는 마당입니다.
“태어나 하고 싶은 건 다 해봤다. 여한이 없다.” 80 평생을 산 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상우(84)가 그중 한 사람이다. 한국추리작가협회 이사장, 한국증권신문 회장인 그는 우리나라 스포츠신문의 산 역사로 창간하는 것마다 족족 대박을 터뜨려 ‘스포츠신문 업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다. 또한 50년간 역사 및 추리소설을 무려 400권이나 내고, 지금도 일주일에 7개 매체에 기고하는 왕성한 필력의 작가다. 에두를 것 없이 범상치 않은 그의 인생 속으로 직진해보자.
신문사 사장 된 신문팔이 소년 가장
“저와 신문의 인연은 대학 2학년 때인 1958년, 영남일보 견습기자에서 시작됩니다. 1964년 대구일보 최연소 편집부장에 이어 2년 후 한국일보사로 옮겨 또다시 최연소 편집국장(31세)이 되면서 한국일보사가 발행하던 ‘일간스포츠’를 만나게 됩니다.”
이상우는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경향신문 등을 섭렵하며 사장, 회장, 창업자 등 국내 최장수 언론인으로 자리매김했다. 패션 전문 프랑스 잡지 ‘엘르’의 한국 지사 대표로,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추계예술대학의 교수로, ‘세종대왕 이도’를 비롯, 추리소설 ‘악녀 두 번 살다’로만 50만 부가 팔린 잘나가는 소설가로 승승장구했다. 한글 가로쓰기체 신문(스포츠서울이 효시), 활판을 없앤 전산화 신문(소년한국일보가 최초) 시대도 그에 의해 열렸다.
1938년 경남 산청 출신으로 6남매 중 다섯째인 그의 10대는 전쟁 후의 피폐로 얼룩졌다. 6.25전쟁 때 전사한 형에 이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단칸방에는 자리보전한 할머니와 6명의 가족들. 며칠을 꼬박 굶고 어머니와 밥을 구걸하러 다녔지만 몇 숟가락 얻지도 못하던 때였다. 부친이 살아 계실 때도 구두닦이와 신문팔이로 가족의 생계를 도와야 했다.
이 무렵의 ‘웃픈’ 에피소드가 있다. 단칸방 주인집 남자가 영남일보 윤전기 기사였는데 퇴근할 때 신문을 10부 정도 몰래 빼와서는 돈을 나눠 갖자며 그더러 팔아오라고 했다. 다 못 팔 때도 있고, 비가 와서 신문이 젖을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신문 값을 그에게 물어내게 했다. 갑질 아닌 갑질로 횡포를 부리던 그 남자를 영남일보 기자가 되고 나서 윤전실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뒤가 켕겼는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긴 후였다.
“양공주 구두를 닦을 때가 제일 좋았죠. 뾰족구두인데다 면적이 적어서 구두약도 덜 들고 팁도 후했으니까요. 신문은 제가 잘 못 팔았어요. 배급소 앞에서 제 또래 소년들이 줄을 서 있다가 신문이 나오기 무섭게 받아가지고는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야 했지요. 번화가에 먼저 도착해야 한 장이라도 더 파니까요. 근데 저는 신문 연재소설을 읽고 나서야 팔았으니 늘 꼴찌였죠. 김대중 대통령도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그가 영어 학원을 다녔는데, 당시 자칭 국보 양주동 선생이 가르쳤다. 학원비가 있을 턱이 있나. 등록증을 재주껏 위조했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인식처럼 배움 도둑질도 같은 맥락으로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양주동 선생은 훗날 한국일보 초청 좌담회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구두통에 교복을 쑤셔 넣고 다녔다. “아버지가 학교를 못 다니게 해서 중학생이 된 걸 숨겨야 했지요. 임종 머리맡에서 처음 말씀드리자 ‘하는 수 없는 일이지’ 하며 체념하셨어요. 그때부터 떳떳이 교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지식인으로 좌우익의 사상을 넘나들다 결국 목숨을 잃게 된 그의 형으로 인해 ‘머리에 먹물이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선친의 한 맺힌 신조였다. 실의에 빠져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더 이상 그의 앞길에 장애가 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가난이 발목을 잡았다.
“고등학교 원서 접수 마감일이었어요. 진학을 포기한 제게 교장 선생님이 무조건 원서를 넣으라고 채근하셨지요. 마감 1시간을 남겨놓고 어디 갈 데가 있어야죠. 길 건너에 대구상고가 있어서 거기다 넣었죠. 뜬금없는 상업고등학교 이력이 그래서 생긴 겁니다. 대학은 영남대 전신인 청구대를 나왔고, 전공은 국문학입니다. 당시 대학신문사 기자를 하면서 생계와 학비를 동시에 해결했지요.”
필화 사건 옥살이, 추리작가 변신 기회로
소설가 이상우는 1961년 대구일보에 ‘신 임꺽정 전’ 연재를 시작으로 지속적인 문단 활동을 이어오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0매를 쓴 적도 있을 만큼 다작하는 작가다. 서울신문 편집부장으로 24시간이 부족하던 때에도 7개 신문사에 소설을 썼다. 연재가 여러 개다 보니 엇갈려 보내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하필 추리작가가 된 계기는 뭘까.
“대구일보 시절 제가 단 기사 제목이 5.16 쿠데타 세력의 보안법에 걸렸어요. 그때 화폐개혁이 있었는데 바뀐 화폐정책이 지방 말단까지 원활히 유통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방지대’라는 제목을 붙였더니 그게 꼬투리가 잡힌 거죠. ‘이방지대라니, 대한민국에 이방이 있다니, 김일성 나라가 있다는 뜻이냐?’며 억지를 부리면서 사형 구형까지 들먹였어요.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40일 동안 살인, 강도 등 잡범들과 한 방에 구금되어 있었지요. 3평 방에 21명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때는 7월 말, 얼마나 더웠던지 내 땀, 네 땀이 뒤섞일 지경이었죠. 제가 신문기자라는 걸 알고는 사형수였던 감방 두목이 재미난 이야기를 하라는 거예요. 2인자 지위를 보장해주겠다면서. 신참인 제가 서열 2위가 되면서 변기통 옆에서 안 자기, 동료 수감자의 부채질 받기, 담배 먼저 빨기 등의 특혜가 주어졌지요. 주로 흉악범들이다 보니 탐정, 범죄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예요. 날이면 날마다 머리를 쥐어짜다 보니 출감 후엔 어느덧 추리소설 작가가 되어 있더라고요. 그때 100개 스토리를 창작했으니 작가의 토양이 수감 중에 빚어진 거죠.”
데카메론과 천일야화가 따로 없었다. 서울신문 시절, 바이엘약품사의 광고 모델이 되어 매스컴을 주름잡기도 했는데, 그 또한 추리소설 작가였기에 발탁될 수 있었다. 작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골을 싸매다 바이엘사의 진통제를 먹고는 머릿속이 맑아져 글이 술술 풀린다는 콘셉트였으니. 당시 바이엘사는 각 나라마다 추리소설 작가를 광고 모델로 기용했는데 한국에서는 김성종을 제치고 이상우가 뽑힌 것이다.
스포츠신문 미다스의 손, 대박의 비결은?
“일간스포츠는 고우영의 만화삼국지, 김성종의 추리소설 연재 등으로 판매 부수를 올렸지요. 스포츠서울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글 가로쓰기가 판매에 주효했어요. 한겨레신문이 최초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그 공로로 2019년 한글날에 대통령 포상을 받았으니 제가 시작한 게 맞는 거죠. 가로쓰기 한글 신문이 나오자 젊은 세대가 열광했지요. 창간 첫날 90만 부가 팔리는 쾌거를 이뤘어요.”
그는 이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1985년, 스포츠서울을 만들 때 말이다. “전두환 때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다른 신문과 달리 그 소식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스포츠 특성상 순간 포착을 위해 기존 1, 2명에 불과하던 사진기자를 15명까지 투입하여 읽는 신문에서 ‘보는 신문’으로 탈바꿈시켰죠. 컬러 지면으로 혁신을 이룬 것도 짜릿했습니다.”
컬러화 작업은 스포츠신문의 효시인 일본에서 배워갔을 정도였다. 1999년 국민일보로 영입된 후 만든 ‘스포츠투데이’는 창간 6개월 만에 고지를 탈환했다. 스포츠신문 5개 중에서 4개를 창간하거나 운영하면서 족족 대박을 터트렸다.
“IMF 직후라 실업자가 쏟아져 나올 때였죠. 스포츠투데이에 구직 정보를 총망라해 실었습니다. 좁고 긴 판형으로 바꾸고 제본을 시도한 것도 매출과 직결되었지요. 창간 기념으로 현대자동차 100대가 걸린 퀴즈를 100일간 냈습니다. 매일 자동차 한 대가 경품으로 나가니 신문이 팔릴 수밖에요.”
이어 2000년 ‘파이낸셜뉴스’를 창간한 후 다음 행보는 2001년 경향신문. 이번에는 사주가 되기로 하고 140억 원의 자본금과 250명의 임직원과 함께 경향미디어그룹을 꾸리고 회장직에 앉았다. 그의 나이 60세 때였다. 스포츠 기사를 포함한 종합일간지 ‘굿데이신문’이 탄생했다. 창간 기념으로 비행기를 경품으로 걸고 ‘대물’, ’쩐의 전쟁‘ 등 연재만화의 인기로 예의 순탄한 경영이 이어졌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고르바초프가 찾아와 모스크바에도 스포츠신문을 만들어달라고 제안했을 정도니. 그러나 악재의 그림자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스며들었다.
“2004년 무렵 무가지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신문이 안 팔리는 거예요. 우리도 무가지로 돌리고 광고비로 운영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가판 보증금 50억 원을 돌려줄 방법이 없었던 거죠. 제가 만드는 신문은 무조건 팔린다는 인식 덕에 전국의 신문 가판대와 계약이 되어 있었는데 무가지 때문에 신문이 안 팔리니, 그 돈을 물어주고 나서야 무가지로 변신을 해도 할 거 아닙니까. 그때부터 광고도 안 들어오고 자금난에 봉착했던 거지요. 얼마 안 가 무가지는 인터넷 신문에 밀려 역시 쓴맛을 보게 되었지요.”
자본금 문제로 4년간 재판을 끌면서 법정 구속될 위기까지 간 후 무죄로 풀려났지만 300억 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잃었다. 70이 가까운 나이였다.
스물한 살 연하 아내 아침상 차리며 화가를 꿈꾸는 홈즈 아빠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서울신문이 철퇴를 맞자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설암을 앓던 아내의 간호를 위해 안방을 중환자실로 꾸몄다. 대형 병원 설비와 환자 침상을 집 안에 들이고 10년간 아내를 간병했다.
“먹지도 못하고 말도 할 수 없어서 필담을 주고받았는데 잠깐 외출할 때면 두려움에 젖은 애절한 눈빛으로 내 허리춤을 붙들곤 했지요. 그 사람 보내고 63세이던 2002년에 재혼했는데 제가 차린 신문사가 1년 만에 망했으니 저는 지금 아내 덕에 먹고삽니다.”
평생 4시간 수면을 고수해온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아내의 아침상을 차리고 애완견과 산책한 후 글을 쓴다. 스물한 살 연하인 그의 아내 권경희는 심리상담가이자 추리소설 작가다. 서로는 추리소설 응모전 심사위원과 당선자로 만났다. 애완견의 이름은 홈즈. 추리소설 작가 부부답게 ‘셜록 홈스’에서 따왔다. 하고 싶은 거 다 했다면서도 한 가지를 더 이루고 싶단다. 어릴 때 꿈인 화가가 되는 것이라고. 신문 발행인으로, 소설가로, 대학교수로, 화가로, 그는 일생이 참 좋은 시절이다.
상반기 국세수입이 지난해보다 50조 원 가까이 늘어났다. 부동산 가격 폭등과 주식 시장 활황, 법인세 증가 등이 반영된 결과다. 지난해 납부 유예했던 세금이 걷힌 데 따른 기저 효과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반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에 따른 불확실성이 점점 더 커지는 모습이다. 상반기 나라살림 적자는 80조 원이지만 지난해와 비교하면 적자 폭이 개선됐다.
10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월간 재정동향 8월호’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세수입은 181조7000억 원으로 지난해보다 48조8억 원 증가했다.
올해 상반기 진도율은 64.3%로 지난해 상반기와 비교해 17.1%포인트 높았다. 진도율은 1년간 걷어야 할 세금 중 실제 걷힌 세금 비율이다. 세금을 다 걷지는 못했지만 지난해보다는 개선된 셈이다.
세목별로 보면 법인세가 10조4000억 원 늘어 39조7000억 원, 부가가치세가 5조1000억 원 늘어 36조1000억 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어진 경기 회복세 영향이다.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시장 호조로 양도소득세와 증권거래세도 7조3000억 원, 2조2000억 원 늘었다.
다만 기재부는 지난해 세정 지원에 따른 기저효과인 13조3000억 원을 빼면 상반기 국세는 1년 전보다 35조5000억 원 증가한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정부는 지난해 코로나19에 대응해 상반기에 내야 할 세금을 하반기로 유예하거나 올해로 미뤄서(이월) 납부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지난해 걷을 세금이 준 대신 올해 세금이 늘었다.
세수 호황이 하반기에도 계속될 지는 미지수다. 정부는 “바른 경기 회복과 자산시장 호조로 국세 수입이 늘어나며 총수입 개선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며 “하지만 코로나 재확산에 따라 하반기 세입 여건의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종합소득세와 법인세가 대부분 상반기에 신고되고 납부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하반기 국세수입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세외수입은 16조4000억 원이었다. 한국은행 잉여금과 늘어난 담함기업 과징금으로 인해 1년 새 3조2000억 원 늘었다. 사회 보장성 기금의 자산운용 수익이 늘면서 기금수입 역시 20조5000억 원 늘었다. 상반기 기금수입은 100조4000억 원이다.
국세수입과 세외수입, 기금수입을 합한 상반기 총수입은 298조6000억 원으로 지난해 상반기와 비교해 72조6000억 원 증가했다.
상반기 적자는 지난해보다 줄었다. 상반기 통합재정수지 적자는 47조2000억 원이었다. 지난해 상반기와 비교해 적자 폭이 42조8000억 원 줄었다.
통합재정수지에서 4대 보장성 기금을 빼 정부의 실질 재정상태를 보여주는 관리재정수지는 79조7000억 원 적자였다. 이 역시 지난해보다 30조8000억 원 줄어든 규모다. 올해 6월 기준 국가채무 잔액은 898조1000억 원이다.
퇴직연금은 국민연금, 개인연금과 함께 100세 시대 노후안전장치 중 하나다. 퇴직연금 유형 중 확정급여형(DB)는 퇴직급여를 미리 정하고 회사에서 이를 지급하기 때문에 가입자 개인은 특별히 할 일이 없다. 하지만 확정기여형(DC)은 가입자가 직접 적립금을 운용해 투자하기 때문에 관리와 책임이 가입자에게 있다.
최근 DC형 가입자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해 발표한 ‘2019년 퇴직연금통계 결과’에 따르면 2019년 퇴직연금 가입자 중 DC형 가입자 비율은 48.9%로 절반에 가까웠다. DB형 가입자는 2018년 50%에서 1.7%포인트 감소해 48.3%였고, DC형 가입자는 47%에서 2.0%포인트 늘었다. 2019년을 기점으로 DC형 가입자가 DB형 가입자 수를 추월했다. 2019년 기준 퇴직연금 가입자 수는 약 637만 명이고, 이 중 DC형 가입자가 311만 명 정도를 차지한다.
이처럼 퇴직연금 가입자와 적립금이 늘고 있다. 하지만 가입자들의 DC형 퇴직연금에 대한 이해와 운용지식이 현저하게 떨어져 수익률은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많은 DC형 가입자들이 적립금을 수익률이 낮은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방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20년도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현광 통계’에 따르면 DC형 가입자는 적립금의 83.3%를 원리금보장형상품에 투자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연금 공단이 지난해 5월 말 기준으로 적립금의 51%를 위험자산에 투자하고 있는 것과 상반된다.
미래에셋 투자와연금센터는 ‘2021 대한민국 직장인 연금이해력 측정과 분석’에서 직장인들의 연금이해력을 측정했다. 해당 보고서에서 설문으로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DC형 가입자들은 퇴직연금 운용 규정에 대한 지식이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DC형 퇴직연금의 위험자산 투자한도, 투자가능 상품 관련 문항 정답률이 각각 17.3%, 28.1%로 매우 저조했다.
DC형 가입자들이 퇴직연금으로 투자할 때 일부 상품을 제외하면 적립금의 70%를 위험자산에 투자할 수 있다.
예금 위주로 자산을 운용하는 시니어들이라면 퇴직연금으로 투자에 나서기가 어렵고 두려울 수 있다. 투자를 해보려고 해도 지식이 적은 상태에서 투자를 잘못해 노후자금을 탕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투자 자체를 꺼리게 된다. 별도로 투자만 할 수 있는 여유자금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다.
별도로 투자 연습을 하기 어려운 시니어에게 유용한 도구가 있다. 바로 투자 시뮬레이션이다. 재무설계 관련 학회인 한국FP학회에서 최근 논문을 통해 ‘투자 시뮬레이션이 DC형 퇴직연금 가입자의 퇴직연금 관리 역량을 길러줄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해당 연구에서는 2006년부터 2019년까지의 국내외 주식·채권 시장의 주요 지표를 활용해 시뮬레이션을 진행했다. 투자 시뮬레이션을 경험한 응답자 중 자체 질문지를 통해 시뮬레이션 결과를 제대로 이해한 231명과 투자 시뮬레이션을 경험하지 않은 응답자 237명을 포함해 468명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 투자 시뮬레이션을 경험한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퇴직연금 적립금을 더 잘 이해하고 관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퇴직연금 가입자 본인이 가장 쉽게 투자 시뮬레이션을 해볼 수 있는 방법은 증권사에서 제공하는 모의투자 프로그램 이용이다. 모의투자는 거의 모든 증권사가 제공하고 있어,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다. 증권사 홈페이지에 접속해 모의투자를 신청하고 아이디를 만들면 모의투자가 가능해진다. 공인인증서 없이 신청할 수 있어 실제 증권계좌를 만드는 것보다 간단하다.
모의투자에서 적용되는 수수료와 제세금은 보통 실제 투자보다 높게 적용한다. 그러다보니 종목 선택부터 매수·매도까지 꼼꼼하게 관찰하는 습관을 들일 수 있다. 다만 모의투자와 실제투자 사이에는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은 알고 있어야 한다. 100만 원을 실제로 투자하면 해당 금액에 거래에 반영되지만 모의투자에서는 거래에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노후가 빈곤해질 수도 있고 풍요로워질 수도 있다. 퇴직연금을 잘 운용하기 위해선 퇴직연금과 금융자산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투자 시뮬레이션을 통해 시니어들이 퇴직연금 수익률을 조금이라도 더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재산이 48억7900만 원으로 밝혀졌다. 보궐선거 후보 등록 때보다 10억5186만 원 줄어든 금액이다. 비슷한 시기에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으로 기용된 이철희 수석은 재산이 1년 새 5억여 원 늘었다.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는 지난 4월 1일부터 5월 1일까지 승진·임용·퇴직한 전·현직 고위공직자 105명의 재산 등록사항을 30일 관보에 게재했다.
오 시장은 본인과 배우자 공동명의의 서울 강남구 대치동 연립주택 24억6500만 원, 본인 명의의 서울 광진구 아파트 전세보증금 11억5000만 원, 배우자 명의의 경기 고양시 임야 3곳 1억3400만 원 등 부동산으로 37억7000만 원을 신고했다.
본인과 배우자 예금은 19억8658만 원, 증권은 14억3263만 원을 신고했다. 오 시장이 신고한 채무액은 23억8000만 원으로, 본인의 사인간 채무 3억8000만 원과 배우자의 사인간 채무 5억 원, 금융기관 채무 2억 원, 본인과 배우자의 대치동 연립주택 임대보증금 13억 원을 합친 금액이다.
한편 오 시장은 선거 이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선거비용 26억 원을 돌려받았다. 이번 신고내역은 선거비를 보전받기 전으로, 이후 오 시장의 재산은 다시 늘어날 전망이다. 앞서 오 시장이 지난 3월 보궐선거 후보 등록 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한 재산은 59억3086만 원이었다.
이철희 수석 재산은 1년 새 5억여 원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수석의 재산 총액은 16억9543만 원으로 국회의원 시절 신고액보다 5억1284만 원 늘었다. 본인과 배우자 공동명의로 된 서울 목동 아파트(9억9800만 원)가 1억7800만 원 올랐고, 예금 총액은 2억2357만 원 불어난 5억6971만 원이다. 예금 변동 사유는 급여 저축으로, 본인이 1억2370만 원, 배우자는 9000만 원, 장남은 3300만 원 늘고, 차남은 2300만 원 줄었다. 배우자와 자녀들의 주식 총액도 1억1372만 원 증가했다.
이 수석과 함께 임명된 기모란 청와대 방역기획관의 재산은 26억2927만 원이다. 본인과 배우자 공동명의의 대전 둔산동 아파트 3억7000만 원, 배우자가 물려받은 경남과 세종의 대지 4억여 원, 배우자 소유의 경남 양산 단독주택 1404만 원과 세종시 상가 2억2576만 원 등 부동산이 17억2980만 원이다. 예금은 본인과 배우자, 다른 가족까지 포함해 4억7959만 원이다.
4월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박형준 부산시장은 3월 후보 등록 당시보다 1800만 원 늘어난 42억3800만 원을 신고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경북 포항시 북구 일대 배우자 명의의 토지 21억6398만 원과 본인 명의의 서울 마포구 아파트 11억4100만 원 등 42억3258만 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이번에 가장 많은 재산을 신고한 고위공직자는 73억3600만 원을 신고한 이응세 전 한국한의약진흥원 원장이다. 송다영 전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장은 69억8300만 원, 서정협 전 서울시 행정부시장은 65억 원으로 뒤를 이었다. 이번에 공개 대상이며 현직 공직자 중에는 박종승 방위사업청 국방과학연구소장이 가장 많은 62억3500만 원을 신고했다.
이전까지 미술품 수집은 수집가의 고급 취미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이른바 ‘아트테크’(Art-tech)라 불리며 재테크 수단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이건희 컬렉션 공개 이후 미술품 물납제에 대한 찬반 논쟁이 뜨겁다.
최근 미술품 수집의 문법이 바뀌고 있다. 취미의 목적도 있지만, 투자 수단으로 미술품을 수집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아트바젤과 글로벌 금융기업 UBS가 발표한 ‘아트마켓 2021’ 리포트에 따르면, 세계 미술품 수집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코로나19 이후 미술품 컬렉션에 관심이 많다고 응답한 이가 66%에 달했다. 또한 43%가 자산 포트폴리오 다각화를 위해 미술품에 투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코로나19 이후 미술 시장은 어려워졌지만 온라인 매출은 증가했다. ‘아트마켓 2021’에 따르면 2020년 글로벌 미술 시장의 매출은 2019년과 비교해 22% 감소했지만, 온라인 매출은 두 배나 증가했다. 실제로 아트페어의 62%는 웹으로 갤러리 작품을 볼 수 있는 온라인 뷰잉룸이나 디지털 버전을 제공했다. 미술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이후 온라인 매출이 늘었지만, 전통적인 컬렉터 중에서는 여전히 작품을 직접 보고 구매를 결정하는 분이 많다”라고 말했다.
수익률과 세제 혜택
은퇴를 앞둔 김미술 씨는 평소 예술에 관심이 커서 전시회에 자주 다니는 편이었다. 수십억 원에 달하는 미술품을 소유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가격이 오를 가능성이 있는 작품이라면 자녀들에게 물려줄 상속재산으로 좋을 것 같다. 하지만 퇴직금과 저축한 돈을 모아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 소액으로 미술품에 투자하는 방법은 없을까?
위의 경우처럼 아트테크 입문자라면 공동구매를 추천한다. 공동구매를 하면 소액으로 미술품에 투자할 수 있다. 온라인 공동구매 플랫폼을 이용하면 단돈 1만 원으로도 고가의 미술품에 투자할 수 있다. 간접투자인 리츠와 유사하다. 크라운드 펀딩을 통해 미술품을 구매하는 것이다. 미술품의 가치가 올랐을 때 매각 후 시세차익을 보유한 지분의 비율대로 나눠 갖는다.
수익률도 나쁘지 않다. 공동구매 플랫폼을 통해 매각된 김환기의 ‘산월’은 한 달 만에 22%의 수익률을 올리기도 했다. 미술품 공동구매 플랫폼 ‘아트앤가이드’는 2021년 6월 기준 평균 19.9%의 수익률을 올렸다. 아트앤가이드 관계자는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 무조건 높은 수익률을 올리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특정 시기나 특정 이미지에 대한 선호가 수익률에 영향을 미친다”라고 말했다.
아트테크의 장점은 세금 부담이 적다. 부동산의 경우 취득세, 재산세, 종부세 등 내야 하는 세금이 많은데, 미술품은 양도세만 내면 된다. 현행 세법에 따르면 사업자가 아니라면 미술품 거래로 얻은 소득은 기타소득으로 간주하며, 지방소득세를 포함해 22%를 세금으로 낸다. 다만 양도가액이 6000만 원 미만의 작품이거나 국내 생존 작가의 작품은 비과세다. 세율 계산 시 양도 금액에서 필요경비를 제외한 금액에 세금을 부과한다. 필요경비는 통상 양도 금액의 80~90%로 결정된다. 1억 원 이하나 10년 이상 보유하면 90%까지 인정받는다. 예를 들어 10년간 보유한 작품을 1억 원에 양도했을 때 판매 금액의 2.2%인 220만 원을 양도소득세로 내면 된다.
위의 방법대로 산 미술품을 상속하면 세금이 어떻게 부과될까? 미술품 상속분은 별도의 공제 없이 상속세과세표준에 그대로 반영돼 세율이 매겨진다. 상속세율에는 10~50%의 5단계 초과 누진세율이 적용된다. 상속세법 시행령에 따르면 미술품의 상속, 혹은 증여 평가 금액은 2인 이상의 전문가가 감정한 가액의 평균 가격으로 산정한다. NH투자증권 관계자는 “미술품은 향후에 값어치가 오를 가능성이 커서 미리 증여하면 재산 이전 효과가 발생한다”라고 말했다.
이건희 컬렉션 공개 이후 상속세 물납제 찬반 논쟁이 뜨겁다. 한국화랑협회 등 관련 단체는 지난 3월 대국민 건의문을 통해 문화재 해외 유출을 막고 물납제를 통한 국가적 문화유산 보존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물납제를 통해 운영 중인 피카소미술관이 대표적인 사례다. 반면 물납은 상속세 회피 수단으로 쓰일 수 있고 국고 손실을 일으킨다는 의견도 있다. 비슷한 예로 비상장 주식의 물납이 조세 회피 수단으로 지적되면서 현재는 상속세에서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경실련 관계자는 “미술품 물납제의 취지는 공감하지만, 상속세 회피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기 위한 입법적 보완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