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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숲길, 회남재를 걷다
- 지리산 중턱 해발 926m 회남재 숲길 10km를 걸었다. 내 고향 청학동 삼성궁을 출발점으로 하동군 악양면 등촌 마을까지. 단풍 소식이 남녘을 향하는 이맘때쯤이면 더욱 고향이 그리워진다. 마을마다 잎 다 떨어진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감이 정겨운 계절이다. 남쪽이지만 높은 지대여서 지금쯤 단풍이 곱게 물들지 않았을까? 고향을 찾는 기쁨과 함께 단풍 구경 기대감으로 들뜨기도 했다. 10월 26일 열린 ‘하동군 지리산 회남재 숲길 걷기 행사’에 참여한 많은 이들과 함께 했다. 청학동 삼성궁 주변에는 아직 단풍이 제 모습을 찾지 못했으나 먼발치로 올려다본 산등성이는 단풍으로 울긋불긋했다. 가을 하늘의 파란색과 보색 되어 산세가 웅장하면서도 또렷이 다가왔다. 머지않아 청학골까지 곱게 물들지 싶다. 이 숲길은 회남(回南)재 정상에 있는 회남정을 중간 지점으로 지리산 중턱을 돌고 오르내리며 하동군 청암면과 악양면을 잇는다. 청학동의 신비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무대, 평사리 최참판 댁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회남정 위로는 지리산의 시루봉과 삼신봉, 아래로는 남해로 뻗은 산줄기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한 폭의 산수화다. 지리산 삼신봉 줄기를 타고 청학동 삼성궁에서 토지 마을 최참판 댁이 있는 악양면 등촌까지 이어진 구불구불한 10km 고갯길이다. 삼성궁에서 회남재 정상까지는 흙길이나 승용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너비다. 산 중턱을 도는 평지를 걷는 듯한 6km 둘레길이다. 중간에 톱밥을 펼쳐놓은 길은 발걸음을 더 편하게 했다. 회남정에서 등촌 마을까지는 승합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4km 포장도로다. 걷기엔 다소 힘든 코스지만 아름드리나무로 둘러쳐진 숲길이어서 힘들지 않게 느껴진다. 세 갈래 코스가 있고 모두 회남재 정상을 중간거점으로 한다. 첫 번째 길은 삼성궁에서 악양면 등촌까지의 편도 10km. 두 번째는 삼성궁에서 청학동 초입에 있는 묵계초등학교까지의 편도 10km. 또 하나의 코스는 삼성궁에서 회남재까지 왕복하는 12km다. 첫 번째 코스를 걸었다. 일행들의 사진 촬영도 맡아 더 많은 걸음을 했다. 걷기뿐만 아니라 고갯길을 도는 짜릿함으로 산악자전거 트래킹 코스로도 유명하단다. '회남재’는 조선의 대표적 선비 남명 조식 선생으로부터 유래했다. 산청군 덕산에 살던 선생은 청암을 거쳐 살기 좋다는 악양을 찾아 나섰다. 두 지역의 경계지점 산등성이에 올라 내려다본 악양골이 너무 깊었고 섬진강 흐르는 모습이 풍수지리학적으로 길한 곳이 아니라 판단하고 그 자리에서 돌아갔다. 남명 선생이 되돌아간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회남재를 갈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서울 등지에서 이용하기 쉬운 길은 대진 고속도로 단성IC에서 나와 지리산 중산리 방향으로 가다가 산청양수발전소 인근에서 삼신봉 터널을 지나면 청학동이다. 또 하나는 남해고속도로 하동IC를 나와 아름다운 길 섬진강 변을 따라가다가 악양면으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진주시와 하동읍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청학동행 버스를 탈 수도 있다.
- 2019-11-0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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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에서 찾은, 사람을 살리는 풀
- 지리산 근처 산골이다. 높은 산봉우리들이 사방에 첩첩하다. 그렇지만 궁벽할 게 없다. 좌청룡 우백호로 어우러진 전면의 산세가 빼어나서다. 우람하면서도 부드럽다. 운무 한자락 눈썹처럼 걸려 그윽하다. 한유창(60) 씨가 이곳으로 귀촌한 건 산야초 때문이다. 지리산 권역에 자생하는 야생초에, 그는 깊은 신뢰를 품고 산다. 한때 그는 죽음과 맞닥뜨렸다. 말기 암 환자였으니까. 단 한 번 주어진 목숨. 그는 그 희귀하고도 소중한 걸 야생초로 살려냈다. “이봐! 그대는 도적이야! 절이 들어설 자리를 훔친 게 아닌가!” 집터를 둘러본 해인사 노스님의 얘기가 그랬더란다. 명당을 선점했다는 뜻이다. 정작 한유창 씨는 굳이 명당을 찾은 바가 없었다. 풍수에 관심조차 없었던 것 같다. 정붙이면 그게 좋은 자리려니, 그뿐이었다. 그저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를 통해 사들인 집터였다. 집이야 어떻든, 그는 겹겹이 늘어선 산야에 사는 자체로 귀촌의 목적을 이룬 걸로 친다. 지리산의 입김을 마시고 자라는 산야초들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 남원시 인월면에 둥지를 튼 건 2015년. 그 이전엔 함양 산골에서 두 해를 살았다. 지리산 천왕봉 곁 산중턱에서였다. 산야에 삶을 두기로 작정하며 과욕은 이미 눌러놓았을 테지. 그래 그 첫 산중살림도 두루두루 원만했단다. 딱 하나, 겨울철 눈 내려 미끄러운 비탈길이 문제였다. 그래 이곳으로 옮겼다. 귀촌 이전엔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뜻한 길로, 혹은 뜻밖의 길로 좌충우돌, 서울이라는 생존의 들판을 격렬하게 뛰었던 모양이다. 암 진단을 받은 건 마흔다섯 살 때였다지. 설마 중증이랴, 대수롭지 않은 복통이라 여기고 병원을 찾았다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삶이란 예상보다 더 잔인한 것. 예고 없이 방문한 불행의 전령이 사람을 폭풍 속으로 내던진다. “왜 이제야 왔냐, 이미 늦었다, 의사의 말이 그랬어요. 절망적인 진단이었죠. 이미 전이가 심해 수술도 의미 없다는 거예요. 남은 생존기간은 3개월 정도라며. 실감나지 않았어요. 마치 남의 일처럼. 병원을 나온 뒤에야 혼란이 엄습하더라고요. 이제 죽을 일만 남았구나, 죽기엔 너무 이르지 않은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고통스러운 생각들이 밀려들었죠.” 죽음이 돌연 현관을 노크할 걸 예감이나 했겠는가.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떠나라는 이주 통고. 그 황당한 쓰나미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의 고독이 극한에 달했겠지. 그러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엔 생존본능이 있다. 어떻게든 살길을 찾게 마련이다. 살기 위해 해볼 건 다 해보는 게 본성이다. 그는 자연요법으로 자신의 몸을 구조하기로 했다. “약초로 살길을 찾기로 했지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죽을 작정을 하고 산에 들어가 풀만 뜯어먹었더니 기적처럼 암이 사라졌다는 식의 소문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싶었지만, 절박한 상황에 몰리자 기대를 갖게 되더군요.”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게 마련이죠. 제 주변에도 병원에서 포기한 중병을 산골에 들어가 고친 사람들이 있어요. 야생초 섭취 외에 자연에서 얻은 마음의 안정도 효과적이었던 같아요.” “한 줄기 희망, 거기에서 나오는 안간힘. 그마저 상실하면 이젠 죽음이겠죠. 산야초로 고칠 수도 있겠다는, 아니 반드시 좋은 끝을 보겠다는 신념을 품었어요.” 결국 산야초가 그를 살렸다. 약초 요법을 극진히 실천한 지 7개월 만에 암세포가 완전히 소멸했다는 병원 판정을 받은 게 아닌가. 의사가 두 손 든 말기 암을 기어이 물리쳤으니 놀랍다. 삶을 견딜 수 있는 건 이런 기적적 이변이 일어나기도 해서다. 몸소 거듭한 산야초 실험 뭐든 하나에 간절히 전념하면 통달한다.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도약한다. 암이라는 사나운 놈을 밀쳐내느라 온갖 약초를 다루는 사이 그의 안목과 요령에 힘이 붙었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유명 약초만이 아니라 이름 없는 풀들조차 약리 작용을 합니다. 제가 실로 많은 무명초에게 신세를 졌어요. 자연스레 산야초의 고귀함에 외경을 갖게 되었고요. 그러면서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에게 이로울 약초를 찾아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도래했다!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암을 완치한 그는 또 하나의 허준이 되겠다는 양 남모를 야심을 품고 약재 개발에 나섰던 것이다. 산야초의 치유력에 관한 확신. 그간의 공부와 체험을 살리면 충분히 독보적인 약재를 개발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이 양자가 그를 추동했던 것 같다. 처음엔 고혈압, 당뇨, 탈모증 등에 탁월한 약초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피부질환에 시달리는 환자들이 많다는 걸 알고 아토피를 정복할 산야초 발굴에 전념했다. 이후 결과물로 나온 게 ‘야초(野草)’다. ‘야초’를 사용해본 환자들은 열광한다. 치유 효과가 명백해서다. 중증 아토피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환자마저 있다. 너무도 슬픈 질환이다. 그럼에도 특별한 약이 없다. 그 와중에 ‘야초’가 위력을 과시하며 등장한 것. 이 기발한 약재는 단숨에 얻어진 게 아니다. 자그마치 7년을 진력해 얻은 성과물이라는 게 아닌가. 그의 거처는 서울이었으나 산야초를 찾아 7년간 전국 오지 산야를 누볐던 거다.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고. “피부질환의 고통은 일단 가려움증에서 옵니다. 가려움증을 잡아줄 풀부터 찾는 게 급선무였죠. 피부병에 좋다고 이미 알려진 산야초부터 갖가지 잡초까지, 하나하나 차례로 효험을 테스트했어요.” “어떤 방식으로?” “일테면, 제가 모기 소굴에 들어가 온몸을 모기에 뜯긴 뒤 채집한 산야초 즙을 발라보는 겁니다. 어느 풀이 가장 탁월한가, 그걸 찾아내기 위해 장기간 연속 실험을 해 드디어 한 가지 약초를 정립하게 되는 거죠. 그다음으로는 피부 염증을 해결할 풀을, 또 그다음엔 피부 재생에 뛰어난 풀을 찾았고요. 7년간의 이런 과정을 거쳐 다섯 가지 산야초를 최종 정선했어요. 그 다섯을 조합한 게 ‘야초’예요.” “검증되지 않은 엉터리 약재를 파는 장사꾼이 수두룩해요. 당신의 ‘야초’도 의심을 사지 않았을까?” “처음엔 코웃음들을 쳤어요. 이미 속아본 환자가 많으니까. 그러나 서서히 인정을 받게 되었지요. 무료로 ‘야초’를 공급받은 중증 환자들이 완치에 이르며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던 겁니다. 환자와 만나기 위해 현재 두 곳의 한의원 한의사들과 협업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치유 사례들은 투명하게 공개되고요.” ‘야초’를 개발하기까지 7년여 동안 그는 굶주렸다. 풀을 뜯어먹으며 배를 채웠단다. 생업이 없는 채로 미치광이처럼 야생초에 빠져 살았던 것. 이 우직하거나 용맹한 사내의 삶은 이제 완연히 변했다. ‘야초’의 성공이 물심양면의 안정을 가져온 거다. 산야를 연구실 삼아 심혈을 기울인 덕분이다. 그 집요한 노력의 결과물에 응분의 관심도 쇄도했다. 국내 유수의 모 제약사로부터 모종의 제안을 받았으며, 유럽이나 중국의 신약 기업들도 관심을 표명해왔다. 그러나 그는 거대 자본과 제휴할 생각이 없다. 언젠가는 악어 같은 자본력에 먹히기 십상이니까. 현재 강진군과 손잡고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외국인 아토피 환자들을 유치할 세계적 수준의 아토피 치료 센터를 건립할 목적으로. 숙원은 아토피 치유센터 건립 한유창 씨의 집은 해발 470m 산기슭에 있다. 사람이 거주하기에 가장 이상적이라는 해발고도다. 모기가 없으며 열대야도 비켜간다. 그가 귀촌한 건 양질의 ‘야초’ 재료를 조달하고, 실험도 계속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암 재발을 예방하기 위한 요양 차원의 귀촌이기도 하니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일찍부터 자연 속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선망이 웃자랐다는 게 아닌가. 정적인 성향의 아내 역시 산골을 동경했다지. 마침내 부부가 오순도순 살 수 있는 기반을 잡은 셈이다.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인상은 야무지지만 알고 보면 순진남인가? 그는 맹지를 속아 사는 식의 땅 사기를 세 번이나 당했다. “군청에 가서 서류 몇 장 확인하면 속을 일이 없다는 걸 몰랐어요. 중개인 말만 믿었던 거죠. 이 집의 터 역시 문제가 많았어요. 묵혀둔 논을 산 건데, 집을 짓기 위해서는 복토 작업이 필요하더라고요. 엄청난 양의 흙을 사다 퍼붓고 성형 작업을 했지요. 땅값보다 훨씬 많은 자금이 들어갔어요.(웃음)” 너른 마당엔 뽐낸 게 없다. 울타리를 두르고 나무를 좀 심었을 뿐이다. 뒤뜰엔 연못을 파 잉어를 넣었다. 그러나 멋부린 태없이 농수용 웅덩이처럼 수수하다. 자연스레 뭐든 내버려두는 게 구미에 맞아서겠지. 그래도 집짓기엔 공을 들였다. “단순하나 견고한 구조, 그게 좋아 노출 콘크리트 집을 지었습니다. 회색 외벽이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고 잘 어울릴 거라 봤고요. 설계부터 제 취향을 반영했지요. 계획한 건축 형태에 차질이 없도록 공사도 직영했어요.” “산중의 외딴집이에요. 일부러 외진 곳을 찾았어요?” “산야초와 동행하는 사람이니 산속에 살아야죠. 그 이유가 아니라도 외딴집의 장점이 많지요. 우선 원주민과의 갈등 소지가 적다는 게 이점입니다.” “대부분의 귀촌인들이 원주민과의 관계 문제를 최대 이슈로 꼽죠.” “불화를 야기하면 배겨날 수 없으니까요. 외딴집에 살 경우엔 주민 접촉 기회가 적어 홀가분한 편입니다. 물론 적당한 교류마저 회피할 일은 아니에요. 시골 사람들은 단순합니다. 쉽게 토라지기도 하지만 금방 정들 수도 있어요. 어쩌다 농사일을 잠깐만 거들어줘도 진심으로 고마워들 해요. 그 역시 귀촌생활의 재미로 삼아야죠.” “자연을 벗삼아 재미와 평온을 맛보고 싶다는 것. 이는 귀촌인들이 공통으로 밝히는 귀촌 동기예요. 자연과의 만남을, 무심히 방치했던 자아를 돌볼 기회로 삼는 거죠.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찾기도 하고요.” “도시에서는 바쁜 일상에 쫓겨 자기변화를 꾀하기 어렵죠. 눈에 보이는 풍경들조차 늘 변화 없는 잿빛이고요. 그에 비해 귀촌생활은 신선합니다. 사계절 따라 확연하게 변모하는 자연이 긍정적 자극을 주니까요. 어딜 가거나 어딜 보거나 항상 변화하는 풍경들. 이런 환경에서 살다 보면 일상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죠. 그러면서 너그러워지고요.” 그는 성경 전체 필사를 세 번이나 했다. 좋은 삶에 대한 간절한 기구(祈求)를 담은 필사였겠지. 나긋하고 싹싹한 언사. 곧잘 번지는 미소. 사람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여유가 서려 있다. 서울에 살 땐 달랐다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때로 통제가 어려웠다. 술 체질이 아니라 들입다 마셔 풀 수도 없었다. 대신에 울화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여과 없이 터뜨렸다. 그러나 암으로 고난을 경험한 데다 귀촌까지 한 뒤엔 변화가 왔다. 마음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생각에도 따뜻한 기운이 채워졌다. 그는 아홉 마리의 개를 기른다. 두 마리는 데려온 유기견이다. 개가 많아 즐거움이 많지만 불편도 많다. 일테면 부부 여행조차 엄두내기 힘들다. 아내는 그게 억울하다. 제발 더 이상은 늘리지 마옵소서! 그렇게 자주 호소하는 것 같다. 아내의 환심을 사려면 오나가나 진돗개처럼 충성해야 한다. 하지만 개 문제에 관한 한 그는 양보할 생각이 거의 없다. 개 역시 사람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고귀한 생명체라는 인식에서다. “원래 개를 무척 좋아했어요. 요즘은 애착이 더 커지는 것 같아요. 암 투병으로 생사 갈림길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느낄 겁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틋함이 커지는 기분을. 제 경우엔 피부질환자들의 처절한 고통마저 일상으로 접하며 살지요. 연민의 감정이 커질 수밖에요. 과거엔 모든 걸 ‘나’ 중심으로 바라봤다면, 이젠 남을 중심에 둡니다.” 그의 숙원은 아토피 치유센터 건립을 차질 없이 진행하는 데에 있다. 머잖아 유기견들을 위한 대규모 치유 시설도 만들 계획이고. ◇ 한유창 씨가 주는 귀촌 Tip ◇ •맘에 드는 땅이라도, 자금력이 넘치더라도, 시세를 너무 상회하는 매물 구입을 자제하자. 두고두고 욕먹을 수 있어서다. 마을 땅값을 올려놓을 경우, 원주민들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농부가 농지를 매입하고 싶어도 비싸져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집 지을 대지 크기는 300평 미만이 적당하다. 그 이상 되면 관리가 어렵다. 특히 풀이 문제다. 비 온 뒤에는 밀림처럼 풀밭이 우거진다. •이왕 시골에 사는 김에 산야초에 관심을 가지라. 이름난 약초만을 찾을 거 없다. 그저 흔한 들풀들의 약성도 탁월하니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9-09-30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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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노(NO-老)족 지리산 종주기
- 45년 전 육군 소위로 임관했던 동기들이 성삼재에서 뭉쳤다. 대부분은 연고지가 서울이었지만 대구와 구미에서도 각각 한 명씩 합류했다. 총 13명의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곧 성삼재를 들머리로 지리산 종주 등반이 시작됐다. 전날, 서울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구례역에 내린 시간은 새벽 3시 15분경. 구례버스터미널에서 성삼재까지는 버스로 올라갔다. 성삼재에 올라서자 세찬 바람이 불었다. 갑자기 한기가 몰려왔다. 그때 대구에서 온 동기가 따끈한 커피와 간식거리를 내놓았다. 칼바람 속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은 그야말로 감동이었다. 성삼재에서 만난 13인의 용사들 노고단(1507m)은 천왕봉, 반야봉과 함께 지리산의 3대 주봉으로 손꼽힌다. 새벽을 깨우는 새소리와 오락가락하는 구름이 동기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가파른 돌계단과 우거진 숲을 헤치며 가다 보니 현역 시절 펼치던 특수작전이 떠올랐다. 장마가 시작되는 한여름에 무모하게 시작한 종주였지만, 모두의 간절한 바람 덕분인지 날씨는 최상이었다. 가끔 햇볕을 가려주는 구름까지 있어 걷기에도 좋았다. 그러나 일행들은 얼마 안 있어 끝없는 오르막과 내리막길에 서서히 지쳐갔다.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는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3박 4일간 먹고 마실 것들로 꽉 채운 배낭 무게가 덜컥 겁이 났다. 다리에 힘이 빠져갈 무렵 13인의 용사들은 삼도봉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해발 1501m의 삼도봉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다. 배낭을 풀고 서너 명씩 편성된 조별로 식사를 준비했다. 우리 조는 ‘핫쿡’이라는 비상식량을 준비해갔다. 군대에서나 먹어봄직한 일종의 전투식량인 셈인데, 발열체에 찬물을 부으면 100℃ 이상의 고온 증기가 발생하면서 물이 뜨거워지고, 가공된 봉지쌀에 이 물을 부으면 밥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사용법을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찬물을 덜컥 쌀에 부어놓고 기다렸다. 한참이 돼도 소식이 없어 들여다보니 그 모양이었다. 마주 보고 웃을 수밖에. 어쨌거나 밥도 아니고 죽도 아닌 점심을 먹고 다시 이동을 했다. 까마득하게 보이는 토끼봉을 넘고 명선봉을 굽이굽이 돌아야만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발바닥이 화끈거리고 어깨는 말 그대로 천근만근이었다. 직업군인 시절에 메고 달리던 배낭의 무게는 이제 버거웠다. 그 이유는 세월 탓이겠지만 마음은 이 여정을 반드시 완수해내리라는 굳은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오후가 되니 점차 하늘이 맑아지고 멀리 보이던 봉우리들이 얼핏얼핏 시야로 들어왔다. 봉우리 사이로 펼쳐진 운해(雲海)는 장관이었다. 첫 번째 숙소, 연하천 대피소 천신만고 끝에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했다.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과 하중을 견디지 못한 발이 화끈거리고 무릎도 아팠지만 대피소에 도착했다는 기쁨이 더 컸다. 부지런히 쌀을 씻어 안치고 합동으로 반찬을 준비했다. 요즘은 참 편리한 세상. 인스턴트 북엇국은 뜨거운 물만 넣으면 맛있는 국으로 변했고 볶은 김치에 참치를 넣어 끓이니 칼칼한 김치찌개가 금세 탄생했다. 각자 가져온 반찬과 먹거리들은 칠첩반상 부럽지 않았다. 단백질 보충하자며 고기까지 굽자 일행들이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다. 연하천 대피소는 최근 리모델링을 해서 그런지 겉모양도 예뻤고 내부도 많이 개선됐다. 여장을 풀고 뻐근한 몸을 뉘었으나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창밖으로 빗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아! 장마가 시작되려나?’ 내일 아침엔 비가 멎어주기를 기도하며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밤새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자 뚝 그쳤다. 지리산 새벽을 깨우는 새소리를 녹음한다고 일찍부터 일어나 설쳐댔다. 아침을 간단히 먹은 뒤 다시 배낭을 멨다. 그런데 무게가 여전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서는 쓰레기를 버릴 수 없다. 먹은 만큼 발생한 쓰레기를 다시 배낭에 넣으니 부피도 거의 그대로다. 걱정했던 몸과 다리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시련 속에서 맞이한 천왕봉 일출 너럭바위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오르면 또 나타나는 봉우리를 돌아가는데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온몸에 식은땀이 나고 어질어질했다. 옆 사람에게 누가 될까봐 말도 못하고 견디며 걸어가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사무총장에게 소화제를 청해 복용했다. 그런데도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행렬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땀이 비 오듯 흘러 잠시 앉아 쉬는데 동기가 소금을 건네며 먹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먹자마자 모든 것을 토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벽소령 대피소를 지나 세석산장까지 가는 길은 험하고 멀었다. 기운이 없어도 무엇 하나 넘길 수 없었다. 한 번 고장 난 속은 모든 음식을 거부했다. 속에서 불이 난 듯 갈증이 일어나 찬물만 들이켰다. 먹은 물까지 다 토해내 기운이 다 떨어져 갈 무렵 드디어 세석산장에 도착했다. 동기들이 점심을 준비해서 먹을 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실내에 들어가 누웠다.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추웠다. ‘아! 지리산 종주는 여기서 끝인가보다’ 했다. “조금이라도 뭘 넘겨야 할 텐데” 하며 걱정하는 동기들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꼭 종주하고 말겠다는 신념과 일행들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수시로 충돌했다. 둘째 날, 배낭 속 물건을 나누어 지겠다는 동기들의 호의를 마다하고 배낭을 다시 멘 뒤 장터목으로 향했다. 장터목에 도착해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한 채 누워 있으니 일행이 북엇국이라도 먹으라며 권했다. 지리산 종주의 마지막 코스인 천왕봉을 올라야 하는 여정이 남아 있어 기운을 차리려면 억지로라도 먹어야 했다. 다음 날 새벽 2시 30분. 여기저기서 부스럭대며 배낭 꾸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일어나 어둠 속에서 배낭을 찾았다. 헤드랜턴을 준비해왔는데, 막상 쓰려고 보니 배터리가 다 방전되어 쓰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할 수 없이 일행의 도움을 받았다. 새벽 산행인데도 가파른 돌계단을 연속으로 올라야 했다. 산을 오르기 전, 동기가 건네준 홍삼진액을 마시고 나니 그런대로 힘이 났다. 깎아지른 절벽을 한 시간 남짓 올랐을까? 드디어 통천문이 보였다. “아, 이제 천왕봉에 다 왔구나” 하고 안내 표지판을 보니 아직 400여 m가 남았다. 희끄무레하게 동이 터오는 산 아래 쪽으로 아련한 불빛이 보였다. 진주시였다. 오락가락하던 구름은 이제 산 중턱으로 밀려나 푹신한 솜이불을 깔았다. 쏟아지는 별빛이 가슴을 뻥 뚫어줬다. 멀리 운해 위로 펼쳐진 하늘 색깔이 변하기 시작했다. 천왕봉으로 몰려오는 바람이 살을 에듯 파고들었다. 준비해간 패딩을 황급히 꺼내 입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동쪽 하늘 운해 위로 붉은 손톱 모양의 해가 살짝 걸쳐지자 모두가 “와!” 하며 탄성을 질렀다. 솟아오르는 해의 모습은 정말 신비로웠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 힘들었던 여정은 눈 녹듯 사라져버리고 감동만 밀려왔다. 장엄하게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고 있자니 “45년 전 동기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힘든 상황 극복하고 여기 서 있게 해줘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가족과 건강하게 열심히 잘 살아준 나 자신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법계사 스님들 천왕봉 일출의 감동을 뒤로하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다리가 아파 진통제까지 복용하면서 올라간 동기는 너무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서서히 원기를 회복해갔다. 로터리 대피소 쪽으로 내려오다 법계사 일주문과 마주했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 자리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1450m)에 위치한 법계사는 544년(신라 진흥왕 5년)에 인도에서 온 고승 연기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면서 창건한 적멸보궁 도량이다. 법계사를 돌아보다 만난 스님 두 분은 뜰에서 열심히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 겨울에나 신을 법한 털신을 신고 있다. “스님, 어찌하여 한여름에 털신을 신고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여기서는 이 신발이 딱 맞습니다. 여름이어도 아침저녁 기온은 초겨울과 비슷하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다 일주문 밑에서 일본인이 지리산과 법계사의 혈맥을 누르려 박아둔 쇠말뚝을 봤다. 이 깊은 곳까지 간교한 음모를 뻗쳤다니… 충격적이었다. 구례에서 출발한 지리산 종주는 천왕봉에서 정점을 찍고 경남 함안군 대산면 중산리에서 막을 내렸다. 3박 4일간의 짧지 않은 여정 속에서 35㎞의 산행을 완주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지치고 힘들 때 옆에서 지켜준 동기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종주였으리라. 변함없는 배려와 우정이 고맙다. 육십 고개를 넘어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도전한 지리산 종주 등반. 내 삶에서 잊히지 않을 이 길은 남아 있는 또 다른 인생 여정에 이정표가 될 것이다.
- 2019-08-06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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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과 에어컨과 냉방병
- 푹푹 찌는 여름에는 바람이 그리워진다. 선풍기 바람, 에어컨 바람, 강바람, 바닷바람, 들바람 등등 바람 종류도 많다. ‘동의보감’이 물을 33가지로 구분했듯 바람도 위치, 세기에 따라 각각 다른 특성을 지닌다. 강바람, 바닷바람은 먼 곳에서 불어오며 몸속 깊은 곳까지 영향을 미친다. 사방이 뚫린 지리산 천왕봉이나 설악산 대청봉에서 바람을 맞으면 오장육부를 씻어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일상의 스트레스로 꽉 막힌 기운도 풀어주는 느낌이다. 그래서 마음이 괴로울 때면 “바람이나 쐬러 가자”는 말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숲속 바람에는 음이온이 있다 숲속에서 맞는 바람은 나무를 통과하며 불어와 산림욕 효과를 낸다. 한여름 숲속에서 바람을 쐬면 시원하고 기분이 좋다. 숲속에 음이온이 많기 때문이다. 건조함은 적셔주고 습기는 제거해준다. 땀이 금세 마르고 시원해지면서 마음의 안정도 되찾는다. 호흡도 깊어진다.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서는 심호흡이 어렵지만 숲속에서는 자연스럽게 깊은 호흡을 하게 된다. 폐가 좋은 공기를 알고 많이 들이마시려 하기 때문이다. 깊은 호흡은 횡격막의 상하 운동을 잘되게 해주고 위장관의 연동운동을 도와 소화력과 식욕을 높여준다. 심호흡을 하려면 큰 나무가 많은 숲, 오래된 나무로 울창한 숲을 찾아가면 좋다. 옛날에는 한여름이 되면 어르신들이 느티나무 그늘에 아래 앉아 무더위를 피했다. 이런 효과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닷바람에는 염분이 포함되어 있다. 이 염분 때문에 바닷가 근처 나무들이 말라죽기도 한다. 염분을 머금은 바닷바람, 즉 해풍을 맞으면 피부는 수분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탱탱해진다. 노폐물은 빠져나간다. 기관지의 가래가 제거되고 폐 기능이 살아난다. 폐 질환 환자들이 바닷가를 휴양지로 많이 찾는 이유다. 바닷가 근처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폐가 좋고 목청도 좋다. 피부는 붉은 편이다. 강한 자외선, 염분을 띤 해풍 때문이다. 너무 급작스럽게 오래 바닷바람을 쐬면 피부가 따끔거리고 심하면 손상된 피부가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조심해야 한다. 에어컨 켠 채 잠들면 냉방병 위험 도시에서는 흙을 보기가 힘들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건물밖에 안 보인다. 숨을 쉬어야 할 땅이 그러지 못해 습기를 머금게 되고 이 습기가 햇볕과 결합하면 온도가 더 높게 느껴진다. 아스팔트가 달궈지면 그 열기로 사물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흙에서는 이런 현상이 안 나타난다. 도시에서는 바람이 불어도 습열이 가득해 시원하지 않다. 게다가 한여름의 열기는 건물 곳곳에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에서 나오는 습열과 섞여 무더운 바람으로 변한다. 습열은 흙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때문에 빠져들어갈 공간을 찾지 못하고 갇혀버린다. 도시의 여름 바람이 습하고 무더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건물 내부는 온통 에어컨 바람이다. 이 바람은 자연의 바람이 아니고 인공적인 바람이라 몸이 긴장한다. 즉 교감신경이 항진되어 눈과 입, 피부가 건조해지고 근육도 긴장해 소화가 잘 안 된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에어컨 켜는 것을 싫어한다. 더위 속에 있는 것보다 에너지 소모가 많아 더 힘들기 때문이다. 에어컨 냉방병으로 한의원을 찾는 사람도 많다. 습이 빠져나가지 못하거나, 기운이 떨어지거나, 찬 기운에 몸이 상할 때 냉방병이 찾아온다. 이럴 때는 대부분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으로 치료한다. 냉방병은 에어컨을 켠 상태에서 깜빡 잠이 들었을 때 잘 걸린다. 또 몸이 땀에 젖어 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에어컨을 켤 때도 감기에 걸리기 쉽다. 여름에는 물을 충분히 마셔줘야 한다. 정수기 물이 아니라 상온의 생수가 좋다. 또 죽염 등 좋은 소금을 충분히 먹어야 냉방병을 예방할 수 있다.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치유학교 ‘그루’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동의보감약선(東醫寶鑑藥膳)’, ‘사람을 살리는 음식 사람을 죽이는 음식’
- 2019-07-30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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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생각 없었던 귀촌이 별나게 즐겁습니다”
- 별별 생각과 궁리를 다하고도 망설이게 되는 게 귀촌이나 귀농이다. 그러나 김석봉(62) 씨는 별생각 없이 시골엘 왔더란다. 무슨 성좌처럼 영롱한 오밤중의 현몽이 그를 이끈 건 아닐 것이다. 그는 매우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거니와, 자나 깨나 귀촌을 숙원으로 여긴 바가 없었으니 하필 후미진 산골로 데려가는 계시를 받았을 리 만무하다. 여하튼, 별 생각 없이 귀촌한 석봉 씨는 별 탈 없이 살아왔다. 별생각이 없었으니 별 볼일도 없었을 성싶지만, 사실은 별 볼일이 벌어졌다. 별별 일이 일어나며 삶이라는 숙제가 술술 풀려나갔다. 지금 석봉 씨는 별나게 즐겁게 산다. “운명이라 해두죠! 하하하!” 귀촌 내력을 묻자 돌아오는 석봉 씨의 쾌활한 답이 그렇다. 운명이라는 게 인간에게 미리 주입돼 있다는 운명론을 단단히 믿어서 하는 말이 아닐 게다. 사람은 때로 참 알 수 없는 상황이나 추세를 운명에 빗대어 적당히 눙치곤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별생각 없이 우연찮게 ‘필’이 꽂혀, 또는 충동의 대리운전에 편승해 산골로 이주했다는 뜻으로 들으면 되겠지. “어느 날, 친구 따라 지리산엘 놀러왔다가 빈집 하나를 보게 됐어요. 아, 마당에 들어서고 보니 너무도 좋더라고요. 2년째 비워둔 시골집이라 꼴이 말이 아니었으나 마음이 그지없이 편해지는 것이었어요. 마치 집이 저를 끌어들인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래서 운명적 만남인가보다, 그런 생각까지 했던 겁니다. 좋아, 이 집에서 살아보자! 그런 결심을 바로 하고 한 달 뒤 이사했습니다. 아내 역시 찬동했기에 걸릴 건 하나 없었어요.” 석봉 씨의 거처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산중턱에 있다. 집 앞으로 펼쳐지는 조망이 기차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 한눈에 쑤욱 들어온다. 거봉(巨峯)을 바라보노라면 뭔가 새삼 거한 꿈이나 참신한 결의가 부푸는 법. 그러나 석봉 씨는 일단 규격화된 도시, 각박한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그 자체로 이미 모든 꿈을 이룬 것과 같은 만족감을 느꼈던 것 모양이다. 귀촌을 계기로 이제 무엇을 새로 시작하겠다거나, 무엇을 하지 않겠다거나, 그런 생각조차 없었다지. 당장 집수리가 화급하기도 했다. 그는 이삿짐을 풀자마자 거처의 환경 보수에 나섰다. 사실 석봉 씨는 ‘환경’에 관한 한 선수다. 젊어 한때 교도관으로 근무했지만, 주로 환경운동가로 분주히 뛰어 중년기를 통과했다. 그의 오랜 거주지였던 진주시의 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을 맡는 등 열렬한 활보를 했다. 전국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지내기도 했다. 이런 그가 돌연 산골로 들어가 처음 한 일이 바로 낡고 헌 옛집의 환경 보수였다. 대대적인 개조가 아니었다. 쓸 만한 기본은 물론, 나무와 흙을 주재료로 지어진 산골집 특유의 소박하고 아담한 본색을 그대로 살린 단장이었다. 그 결과 이젠 시골에서도 흔히 보기 어려운 정갈한 재래식 가옥으로 변신했다. 그게 2007년의 일, 어언 12년이 흘렀다. “하루아침에 느닷없는 이주를 하자 주변 사람들이 놀랐어요. 환경운동을 하던 사람이 별안간 지리산으로 사라졌다며, 별 쓸데없는 오해들을 하기도 했죠.(웃음) 저로서는 새로운 삶의 서막이었어요. 도시에서는 누리지 못한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감성이라는 걸 되찾을 계기였으니까. 환경운동, 그건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 이면엔 부대끼고 시달릴 일이 많았습니다. 업무와 사람들에게 말이죠. 삭막한 감성, 그런 걸 느끼며 힘들었어요.” “감성적인 일상이란 멋진 것이지만, 도시에서나 산골에서나 벌어야만 지속 가능한 생존 조건은 다르지 않겠죠. 생계엔 어떤 대책을 세우셨을까?” “도시생활을 청산하자 4000만 원 정도가 총재산으로 남더라고. 그걸로 이 집을 샀어요. 은행 대출을 끼고서였죠. 한마디로 돈 없이 들어온 겁니다. 그런데도 걱정이 전혀 없었어요. 아이고, 돈은 물론 농사기술 없지, 무슨 자격증 하나 없지, 산골에서 뭘 해서 먹고사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머리 싸매고 그런 걱정부터 했다면 여길 오지 못했을 겁니다.” “좌우간 가서 부닥치고 보자! 그게 대책이었어요?” “느낌이나 용기. 귀농귀촌엔 그런 게 가장 중요하다 생각해요. 그런 게 선행한다면 산골에서 무슨 일을 하든 굶지는 않을 테고요. 아내 역시 경제 문제로 불안해하지 않았어요. 제가 진주에서 환경운동을 하며 박봉으로 겨우 살았어요. 밤엔 아내와 함께 포장마차도 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심하게 애쓰는 삶, 그건 별로 좋지 않다고 봅니다.”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시절 누려 석봉 씨는 세상과 담을 쌓고 지리산 고사리로 살려고 산에 들어온 게 아니다. 백수건달은 더구나 생리에 맞지 않다. 집을 고친 뒤 그는 슬슬 일을 찾았으니 이게 순행(順行)이다. “현재 제가 1800평 규모의 밭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땅은 아니고, 이웃들의 밭을 빌려 쓰죠. 초기엔 200평 정도를 빌려 농사를 지었어요. 농사로 거둔 생산물들로 한과나 김장김치를 만들어 팔기도 했지요. 농사 외 봄엔 산나물을, 여름엔 오디를, 가을엔 야생오미자를, 겨울엔 얼어붙은 채 나무에 매달린 모과를 따러 다니는 게 일이었고요. 그걸 또 가공해서 판매했고요.” 석봉 씨네 동네는 산촌 특유의 납작하고도 포근한 토담집들이 돌담길 따라 이어져 평화롭다. 초록 물감을 흩뿌리는 숲과 능선과 봉우리들이 마을을 휘감아 어디를 봐도 씽씽하다. 이 청명한 산촌에서 석봉 씨는 뜻밖에도 쓴맛을 경험했다. 마을 사업을 주도하다 도중하차한 것. 그는 원주민들의 동참 유도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한계에 봉착했던 것 같다. “아쉽더라고요. 마을 공동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됐더라면 참 자랑스러운 마을이 됐을 텐데 중도에 올 스톱됐으니…. 마을 사업 성사를 위해서는 때로 관과 맞붙어야 합니다. 그러나 연로하신 분 일색인 마을 주민들은 저항이라는 걸 모릅니다. 사업으로 마을 공동이익이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아예 자기 생각이나 주장 자체를 드러내질 않아요. 과거의 권력자였던 관리들을 아직도 두려워하는 거죠.” “지리산 산간마을이라는 특성 때문이지 않을까요? 육이오를 처절하게 겪은 트라우마에서 기인하는 소극적 태도…. 빨치산 토벌대로 참전했던 저의 부친은 아직도 지리산 근처조차 가기를 싫어합니다.” “바로 그겁니다. 낮엔 국방군이, 밤엔 빨치산이 마을을 쥐락펴락했던 세월을 살았으니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을꼬. 손가락질 한 번에 죽고 사는 세상이었으니 말이죠. 충분히 이해할 만한 기질적 형성이라 봐요. 사실 주민들의 심성은 순박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남에게 신세를 지면 기어이 갚아요. 그게 그들의 오랜 삶의 관습이에요.” 구제받을 길 없는 중생마저 관음보살처럼 살뜰히 보살핀다는 지리산의 슬하라고 하지만, 삶은 이모저모 고역스러워 번뇌를 고이 털어버리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석봉 씨에겐 시름이 없다. 그렇다는 건, 그렇게 보인다는 얘기다.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평온한 시절을 누린다는 게 아닌가. 상추씨처럼 흙에 살짝 묻혀 사는 그는, 가족과 함께 담백한 푸성귀 식사를 하는 즐거움을 나날의 꿈이 아롱진 수채화로 여기는 기색이다. 평소의 버릇인 따뜻한 시(詩) 쓰기로, 저 드높은 천왕봉이 소리소문없이 열강하는 겸양의 도리를 가다듬기도 하겠지. 민박 손님이 며느리 된 사연 고리키 왈, 일이 즐거우면 낙원이고, 일이 의무이면 지옥이라지? 석봉 씨는 일이 즐거워 낙원에 사나? 그렇다. 그는 일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투의 표정을 짓기를 삼가질 않는다. “제가 참으로 좋은 일을 선택했어요!” 그는 그리 당당하고 유쾌하게 토로한다. 대체 무슨 일을 선택했기에 그러나? 민박이다. 민박을 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재미와 만족을 구가하게 되었다는 거다. 들어보자. “저희 집이 자그만하지만, 본래 모습을 유지해 손질한 덕에 나름 시골집다운 토속적 운치를 되살린 것 같아요. 어느 날 하루를 묵어간 지인이 그러더라고. 저 사랑채가 너무도 근사하다, 시골집에 향수를 가진 이들이 환호할 것 같다, 민박을 한번 해보라! 그 귀띔에 민박을 시작했어요.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죠.” “살림에 크게 보탬이 됐다는 점에서?” “물론 가계에 도움이 됐죠. 운이 좋았던 게 뭐냐면, 어느 날 우리 집 앞으로 별안간 ‘지리산둘레길’이 났다는 건데요, 이게 호재로 작용했어요. 상상하지 못한 행운이었죠. 별안간 손님들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민박을 하는 진정한 즐거움은 수익성에 있는 건 아닙니다.” “사실 취향에 맞지 않을 경우, 민박도 고달프긴 마찬가지겠죠. 대체 진정한 즐거움이란 뭐죠?” “제가 환경운동을 하던 도시에서의 나날들은 업무와 타인들, 이 양자 사이에서 냉정한 처신을 해야만 했어요. 감성이나 정감이 끼어들 틈새가 전혀 없는 건조한 관계의 연속이었어요. 그런데 민박 손님과의 관계는 전혀 달라요. 함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온갖 하고 싶은 얘기들을 나누다 보면 ‘타인’이라는 감각이 사라집니다. 가족적인 유대감이 형성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 단골이 되고, 수시로 안부를 전하고, 진심을 나누게 되고, 그렇게 좋은 관계를 지속하게 되더라고요. 이게 제 즐거움과 만족의 원천입니다.” 쌍방향 여행이랄까. 손님은 석봉 씨의 내부로 여행을 하고, 석봉 씨는 손님의 생각 속으로 여행을 한다. 그는 이 공정하고도 허심탄회한 관계에 쾌재를 부른다. 도시에서 그가 자주 목말라했던 인간관계의 따뜻한 생태계를 민박으로 구현하는 기쁨을 누려서다. 그는 딱 부러지는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그런 그의 내면에 웅크린 의외의 사교적 성향이 푸드덕 날갯짓을 해 관계의 신세계로 인도했을 수도 있겠다. 민박이 불러들인 선연(善緣) 혹은 선물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석봉 씨는 민박 손님으로 가끔 찾아들던 한 아가씨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참하고 곱살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는 결국 이 젊은이를 며느리로 맞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 아들놈이 현재 지리산 환경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합니다. 저 참신한 처녀를 이 녀석에게 소개했는데요, 처음엔 서로 심드렁하더니 어인 영문인지 기특하게도 결혼에 이르렀어요.(웃음) 현재 며느리는 우리 집 아래편에 아담한 카페를 차려 둘레길 탐방객들을 맞이합니다. 손녀도 이미 봤고요.” “3대가 한동네에 사는 게 불편하진 않으세요? 젊은이들이란 때로 발칙한 도발을 하는 법인데 말이죠.” “‘저는요, 시골이 너무도 좋아요!’ 며느리의 말이 그렇습니다. 불편도 단점도 전혀 없어요. 아이들에게 제가 가끔 잔소리는 하죠. 과욕을 부린다고 돈이 벌리는 거 아니다. 찡그리며 살아봤자 일이 풀리는 거 아니다. 이 애비가 그랬듯이 바르게, 옳게 살아다오. 나쁜 일을 보고서는 참지 마라. 그렇게.” “그런데 말이죠. 농사하랴, 민박 손님들 맞이하랴, 선생의 일상이 너무 바쁜 거 아네요? 산중의 낙은 한가하게 노니는 데에도 있지 않나?”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즐기는 것에 무슨 결함이 있을까.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쓰고, 사랑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 그게 자유롭게 사는 길이며 좋은 삶이라 생각합니다.” 석봉 씨의 집, 꽃그늘 나무그늘이 푸르다. 이 푸른 공기 속에서 별다른 불안이나 허기가 없이 산다면 인생도 소풍처럼 가뿐할 테지. 세상의 광기와 탐욕이 침범하지 못할 것이고. 한 무리의 민박 손님들이 들이닥친다. 오늘도 신났다, 석봉 씨. 김석봉 씨가 주는 귀촌 Tip •귀촌 준비에 너무 강박감을 갖지 말자. 준비를 충실히 해도 실패할 수 있다. 미장이나 목공처럼 실용적인 기술을 미리 배워두는 건 현명하다. 돈벌이 목적의 귀농이라면 더욱더. •농사에 미리 겁먹을 필요 없다. 수익은 열악하지만 내가 뜻한 대로의 영농을 할 경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일테면, 기계나 비료를 쓰지 않는 줏대 있는 농법이 그렇다. •가급적 마을 변두리에 거처를 마련하자. 원주민들과의 갈등 소지를 줄일 수 있으니까. •민박을 할 경우엔 일단 돈벌이 목적보다 손님과의 소통을 중시하자. 열쇠만 건네면 그만인 펜션과 달리, 민박은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게 매력이며, 성공의 첩경이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9-07-04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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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천히 걷는 ‘남해 바래길’
- 지자체들이 지역 특성을 살린 멋진 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길을 찾아 길을 걷는 전국의 ‘걷기 여행 코스’를 연재로 소개한다. 치유하는 길 ‘남해 바래길’ 한반도 남쪽 지리산 끝자락에서 다리 하나를 건너야 만날 수 있는 군(郡)이 있다. 남해군이다. 남해군은 남해도, 창선도라는 2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려해상 국립공원에 속하는 지역으로 남해바다의 잔잔함과 따사로운 햇살이 어우러지는 푸근한 곳이다. 난류의 영향으로 온난한 기후지역이어서 아열대성 식물이 자라는 식생을 보인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지역. 이곳에 느리고, 여유 있게 걸으며 자기를 치유하는 길이 있다. ‘남해 바래길’이다. ‘바래’라는 말은 옛날 남해의 어머니들이 가족의 먹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바닷물이 빠지는 물때에 맞춰 갯벌에 나가 파래나 미역, 고둥 등 해산물을 직접 채취하는 작업을 일컫는 남해 사람들의 토속어다. 현재 8개 코스가 만들어져 운영되고 있으며, 2020년에 한 개 코스를 추가로 개통할 예정이다. 남해의 바다는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편안함이 느껴지는 바다다. 높은 파도의 분노가 어울리지 않는 섬과 풍경이다. 바래 길을 걷는 내내 잔잔한 파도와 햇살에 반짝이는 파도들이 마음의 평화를 준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조금 쉬었다 가라’ ‘천천히 가라’고 계속 속삭인다. 쉬엄쉬엄 천천히 걷는 길이 ‘남해 바래길’ 이다. 어느 사이엔가 내 안에 있는 ‘빨리 빨리’가 사라진다. 걷는 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렇게 나를 놓으면 되는 길이다. 추천 게스트 하우스 서상 게스트 하우스: 경남 남해군 서면 남서대로 1687번길14 추천 맛집 길을 걸은 후 흐르는 땀을 시원한 물회에 식혀 보자.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해살이 물회: 경남 남해군 남면 남서대로 790
- 2019-05-15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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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향기[春香] 따라 오감만족 남원을 거닐다
- ‘남원’ 하면 춘향, ‘춘향’ 하면 광한루원만 생각났다. 남원에는 진정 광한루원 말곤 갈 데가 없을까 궁리하던 때에 마침 김병종미술관이 개관했다. 미술관이 좋아 남원에 들락거렸더니 식상했던 광한루원이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된 동네 빵집과 걷기 좋은 덕음산 솔바람길도 발견했다. 이 산책로가 미술관과 연결되는 것을 알고 얼마나 기뻤던지. 남원을 여행하며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 시가 종종 생각났다. 걷기 코스 남원역(남원시외버스터미널)▶차량 이동▶광한루원 북문▶남문▶요천 섶다리▶덕음산 솔바람길 입구▶전망대 레스토랑▶남원국립국악원▶그네매점(또는 약수터매점) 뒤 덕음산 솔바람길 입구▶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남원항공우주천문대▶춘향테마파크(또는 덕음산 오감만족숲) 상상 속 달나라를 구현한 광한루원 광한루원에는 남문(정문)과 서문, 북문이 있다. 오늘 걷는 코스는 북문으로 입장해 남문으로 나가는 것이 동선상 편하다. 북문 앞에는 고품격 한옥 호텔인 남원예촌과 규모 있는 한정식 전문점들이 자리했다. 이 일대는 남원 제일의 관광단지라서 거리가 깔끔하고 작은 쉼터도 조성돼 있다. 주중 낮 동안 일반인 관람이 허용되는 남원예촌을 잠시 둘러본 뒤 광한루원 북문으로 입장한다. 광한루원의 중심 건물인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춘향사당이 코앞이다. 조선 중기 사람들은 달나라에 옥황상제와 선녀가 산다고 생각했다. 이 상상을 지상에 구현한 것이 광한루원이다. 광한루는 옥황상제가 머무는 달나라 궁전이며, 광한루 앞 연못은 은하수를 상징한다. 연못에 섬처럼 떠 있는 세 개의 섬은 지상낙원, 즉 영주산(한라산), 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을 뜻한다. 중국 ‘사기’에 등장하는 전설 속 세 산(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본떠 일컬은 것이다. 나무다리로 연결된 세 섬을 차례로 들러본다. 팽나무가 우거진 영주산 영주각에 올랐다가 봉래산의 대숲을 지나고, 방장산 숲에 숨은 작은 방장정에선 잠시 쉬어간다. 방장정 옆으로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돌다리 오작교가 보인다.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널 때 걸었던 오작교를 본떠 만들었다. 다리 길이가 57m에 달하는 국내 최장 연지교다. 조선 후기 소설 ‘춘향전’에서 성춘향과 이몽룡이 처음 만났던 장소로 등장하기도 한다. 오작교를 건너며 연못을 굽어보니 잉어 떼와 천연기념물인 원앙 수십 마리가 떼 지어 노닌다. 광한루원은 원앙과 잉어에게도 지상낙원인 듯하다. 연못가 버드나무와 짝꿍처럼 잘 어울리는 수중 누각 완월정에 올랐다가 남문으로 나선다. 솔숲이 우거진 덕음산 솔바람길 광한루원 남문으로 나오면 바로 요천변이다. 요천 제방에 올라 벚나무 가로수길을 걷는다. 가로수가 우거져 그늘이 짙다. 덕음산 솔바람길로 가려면 승월교나 섶다리를 이용해 요천을 건너야 한다. 흔한 시멘트다리 대신 섶다리를 선택해 건넌다. 이 섶다리는 옛날부터 요천에 섶다리 두 개가 있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근래에 만든 쌍섶다리다. 섶다리를 건너면 춘향테마파크와 식당, 놀이공원, 국립국악원 등이 있는 춘향촌 입구가 보인다. 춘향촌 입구 왼쪽에 ‘덕음산 솔바람길’ 입구가 있다. 나무계단을 조금 오르면 솔숲길이 이어진다. 잔잔한 오르막길을 10분 정도 걸었을까. 숲길이 전망대레스토랑 앞 전망대로 인도한다. 이곳에 서서 남원 시내를 굽어본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 같고, 도심 가운데로 요천이 흐른다. 남원의 젖줄 요천은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가 남해까지 간다. 탁 트인 남원 풍광을 감상하고, 포장도로를 따라 국립민속국악원 방면으로 내려간다. 국립민속국악원은 판소리의 성지인 남원의 국악 수준을 잘 보여주는 공연장이다. 주말마다 국내 최고 수준의 전통 공연을 선보인다. 주말에 이 길을 걷는다면, 공연시간을 미리 알아두는 게 좋다. 국립민속국악원 뒤쪽으로 이동해 덕음산 솔바람길의 또 다른 입구를 찾는다. 나무계단을 오르자 김병종미술관까지 이어지는 데크 산책로로 연결된다. 길 곳곳에 전시돼 있는 시, 그림, 캘리그래피 작품을 감상하고, 솔숲 향기를 맡으며 느리게 걷는다. 데크에서 내려오면 바로 김병종미술관이 보인다. 국립민속국악원에서 미술관까지는 15분 정도 걸린다. 남원의 뜨는 명소 김병종미술관과 화첩기행 북카페 2018년 3월 개관한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은 남원 출신 한국화의 거장 김병종이 자신의 작품을 남원시에 기증하면서 건립이 기획됐다. 덕음산 기슭에 위치해 있어 실내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눈길 닿는 곳마다 푸른 숲이다. 김병종 화가의 작품은 1층 상설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김병종 화가의 초기작이자 그의 이름을 미술계에 알린 ‘바보예수’ 시리즈를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이해하기 쉽고, 동심이 느껴져 절로 미소 지어진다. 김병종 화가는 여행 에세이 ‘화첩기행’을 저술해 문학가로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여줬다. 상설전시장 옆에는 화첩기행 북카페 ‘미안’도 자리해 있다. 남원에서 나고 자란 청년 카페지기가 ‘미술관 안에 있는 카페’라는 뜻을 담아 ‘미안’이라 이름 지었다며 환하게 웃는다. 카페 한쪽 벽면에는 김병종 화가의 작품과 그가 기증한 미술, 인문학, 문학 관련 도서 등 약 2000여 권이 진열돼 있다. 나머지 벽면은 통창을 설치해 물이 가득한 정원이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보인다. 오랜만에 맘에 쏙 드는 미술관과 카페를 만나 걷는 즐거움이 커진다. 볕 잘 드는 창가에 앉아 맛있는 커피와 빵을 먹으며 지친 다리를 쉬어간다. 춘향테마파크 걸을까, 오감만족숲을 걸을까 미술관에서 걷기를 마치고 광한루 쪽으로 내려가도 되고, 더 걷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항공우주천문대를 거쳐 춘향테마파크 또는 덕음산 오감만족숲으로 내려가도 좋다.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광한루원이 멀지 않다. 항공우주천문대는 미술관 뒤쪽으로 난 길 끝에 있다. 미술관에서 약 300m 거리다. 오르막을 살짝 오르면 돔 형태의 지붕을 얹은 천문대를 만난다. 여러 대의 천체망원경을 통해 낮에는 태양의 흑점을, 밤에는 달과 별자리를 관측할 수 있다. 기상이 좋지 않으면 관측을 할 수 없으니 날씨를 봐가며 입장해야 한다. 천문대 뒤쪽, 솔바람길 이정표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면 춘향테마파크 뒷문이 나온다. 이 문은 춘향테마파크의 가장 위쪽 구역에 있으니 아래로 내려가면서 관람하면 된다. 춘향테마파크는 춘향을 주제로 한 문화예술공원이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의 촬영세트장이 남아 있다. 뒷문 근처에는 월매집, 춘향과 이몽룡이 첫날밤을 보냈던 월매집 부용정, 춘향이 변 사또에게 고초를 당했던 관아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춘향테마파크에 입장하지 않고, 뒷문 앞에서 이정표를 따라 오감만족숲/광한루 방면 숲길로 5분 정도 내려가면 오감만족숲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오감만족숲은 2017년에 덕음산 기슭에 조성한 공원으로 걷기 좋도록 지그재그형 산책로를 만들어놓았다.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면 승월교로 바로 연결된다. 주변 명소 & 맛집 전통시장의 정취가 물씬 남원공설시장 광한루 서문 앞에 있는 상설시장이다. 오일장날에는 아침부터 붐빈다. 남원에는 산과 강이 있어 농수산물이 풍부하다. 특산물을 구경하며 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남원산 미꾸라지가 흔하다. 시골 시장에서도 보기 드문, 오래된 뻥튀기 가게도 있다. 온갖 곡식은 물론 무까지 튀겨준다. 남원 사람들이 이 시장에서 즐겨 사 먹는 또 다른 인기 메뉴는 닭발 튀김. 뼈를 발라낸 닭발에 튀김옷을 입혀 바삭하게 튀겨낸다. 맥주 안주로 제격이다. 남원시 의총로 51, 4와 9로 끝나는 날이 오일장. 맛의 고장 남원 맛집 남원에서는 남원산 미꾸라지와 된장을 넣고 푹 끓인 추어탕이 유명하다. 광한루원 서문 쪽 요천변에 추어탕 거리가 형성돼 있다. ‘새집’, ‘현식당’, ‘부산집’이 입소문 났다. 광한루원 북문 앞에 있는 남원 한정식 전문점 ‘종가’도 추천할 만하다. 보리굴비 정식을 주문하면 홍어찜, 육회, 전복구이 등 맛깔난 전라도 음식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 돌솥비빔밥 전문점인 ‘반야식당’도 광한루 인근에서 오래 장사한 소문난 집이다. 최근 뜨고 있는 ‘집밥, 담다’는 ‘따뜻한 가정식 한 끼’를 표방하는 젊은 감각의 음식점이다. 정갈한 식단으로 호평받고 있다. 예약은 필수. 남원 사람은 다 안다는 명문제과 남원에서 오래 장사한 동네 빵집이다. 가게는 작고 허름하다. 다른 빵집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빵을 개발해 인기를 얻었다. 남원에서는 이미 유명한 곳인데 ‘백종원의 3대천왕’에 출연한 뒤로 손님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평일에도 줄을 서며, 오후 늦게 가면 인기 빵은 동나 살 수 없다. 3대 인기 빵은 생크림소보로, 꿀아몬드, 수제햄빵이다. 광한루원 북문에서 도보로 10여 분 거리에 있다. 남원시 용성로 56. 걷기 Tip ❶ 5월 8일부터 12일까지 광한루원과 요천 일대에서 제89회 춘향제가 열린다. 광한루원은 야간 조명을 밝히는 밤에 산책해도 좋다. ❷ 4월 24일부터 5월 19일까지 바래봉 철쭉제도 열린다.
- 2019-05-1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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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 악양면, 차향 머금은 봄바람 쐬러 갈까요?
- 4월의 찬란한 신록을 만나기 위해 하동으로 간다. 악양행 버스를 타고, 화개천 옆을 지난다. 간밤에 흩날렸을 벚꽃 잎을 상상하며 아름드리 벚나무 가로수 길을 달린다. 오른쪽 차창 밖으로 은빛 섬진강과 푸른 보리밭이 봄볕에 반짝거린다. 섬진강가 산비탈에는 야생차밭이 연둣빛 생기를 뽐낸다. 걷기 코스 화개시외버스터미널▶시내버스 타고 악양면으로 이동▶매암제다원(매암차박물관)▶하덕마을 담장 갤러리▶드라마 ‘토지’ 촬영지▶박경리문학관▶최참판댁▶시내버스 타고 화개장터 또는 화개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 산자락 아래 볕 좋은 동네 악양 화개시외버스터미널에 악양행 시내버스가 들어온다. 버스에서 내린 행복버스 안내 도우미가 연로한 승객들을 부축해 승하차를 돕는다. 기사도 승객이 승하차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한다. 안내 도우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악양(개치)정류장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도보 1분 거리에 매암제다원이 있다. 매암제다원은 3대에 걸쳐 40년 동안 친환경 자연농법으로 차밭을 가꾸고, 악양에 전해오는 전통 제다법으로 차를 만드는 곳이다. 다원 안으로 들어서 매암차박물관 옆을 지나자, 초록빛 야생차밭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다원에 따사로운 봄볕이 가득하다. 높을 岳(악), 볕 陽(양) 자를 쓰는 악양다운 풍광이다. 마침 매암차박물관의 장효은 학예실장과 이윤경 기획실장이 야외에서 차담을 나누고 있다. 매암제다원에서 파는 차가 녹차가 아닌 홍차인 이유를 묻자 장 실장이 “많은 사람이 녹차나무와 홍차나무가 다른 나무라고 생각하는데, 같은 나무예요. 찻잎을 발효하면 홍차 잎이 돼요. 악양 사람들은 옛날부터 홍차로 만들어 먹었어요. 서양 홍차는 우리나라 찻잎보다 크고, 맛과 향이 진하죠”라고 대답한다. 이 실장도 거든다. “이곳 할머니들은 찻잎을 잭살이라 불러요. 4월에 처음 딴 찻잎을 참새 雀(작), 혀 舌(설) 자를 써서 작설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에서 유래한 것 같아요. 식구들이 감기나 배앓이를 하면 잭살을 한 움큼 넣고 푹푹 우려 약차로 만들어 먹였대요.” 1300여 년 전, 우리나라에 차가 처음 전래된 곳이 하동이다. 임금에게 차를 진상했던 곳도 하동이다. 악양과 화개 산비탈에 자리 잡은 대규모 야생차밭은 한없이 경이롭다. 하동 사람들의 차 사랑과 자부심이 대단할 만하다. 은은한 차 한 잔의 위로 2만여 평의 차밭이 굽어 보이는 매암제다원 마당에 매암다방이 있다. 나무꾼이 살 것 같은 아담한 오두막이다. 실내에 차밭이 보이는 벽마다 큰 창을 내어 자연을 담은 액자처럼 꾸몄다. 실내에 있기에는 아까운 계절. 찻그릇을 담은 차 쟁반을 들고 나가 차밭이 잘 보이는 감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는다. 간지러운 봄볕을 즐기며 찻잎을 우린다. 찻잎에 뜨거운 물을 붓고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발효된 홍차는 녹차보다 맛이 순하고 구수하다. 찻잔이 작으므로 마주앉은 이의 잔을 수시로 살펴야 한다. 서로 잔을 채워주며 따스한 차담을 나누라고 찻잔이 작은 것일까 생각해본다. 찻잔 위로 스치는 봄바람에 참새 혓바닥 같은 찻잎들이 쫑긋거린다. 연둣빛 여린 찻잎에서 천 년을 이어온 생명력을 느낀다. 다원 입구에 있는 매암차박물관은 일제강점기에 수목원 관사로 사용했던 적산가옥이다. 흰 목조 건물과 푸른 차밭이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경을 그려낸다. 차와 관련한 다양한 유물 130여 점을 전시한다. 차 문화사 강좌, 차 만들기 체험, 차 따기 체험, 하동 차문화 기행 등 문화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매암제다원(매암차문화박물관) 여름철 10:00~19:00, 겨울철 10:00~18:00, 월요일 휴무, 관람 무료, 매암다방(셀프) 찻값 3000원. 사계절 차꽃 피는 하덕마을 매암제다원을 나와, 시골길을 타박타박 20분쯤 걸어 하덕마을에 도착한다. 27명의 작가가 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 사진, 조형물을 만들어 골목을 아름답게 꾸며놓았다. 벽화뿐만 아니라 나무, 철, 도자기를 활용한 다양한 작품이 담장에 전시돼 있다. 마을 입구 ‘팥이야기’ 카페에서 출발해, 발소리를 죽이고 고요한 돌담길을 스며들듯 거닌다.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하얀 차꽃이 흩날리는 그림 ‘차꽃’과 매화가 핀 찻잔과 보름달을 그린 ‘달 아래에서’, 장식장에 찻잔이 가득한 ‘찻잔’ 벽화가 눈길을 끈다. 기와지붕 처마에 거꾸로 매달린 차꽃 조형물은 이름도 어여쁜 ‘꽃비내림’이다. 담장 위에는 농악대를 형상화한 철 조형물이 곡예를 한다. 가만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난다.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공통된 정서는 ‘푸근함’이다. 시골 정취가 가득한 하덕마을과 정감 있는 예술작품이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낸다. 오랜만에 맘에 드는 골목길을 만나 가슴이 설렌다. 마을 중앙에 있는 ‘차꽃오미’ 한옥 민박집에도 잠시 들른다. 위엄 있는 솟을대문과 잔디가 깔린 앞마당과 100년 된 고택의 조화가 멋스럽다. 하동군 악양면 악양서로 227. 최참판댁에서 평사리 들판을 굽어보며 하덕마을을 뒤로하고, 박경리 소설 ‘토지’를 드라마화한 토지 촬영장으로 향한다. 찻길 옆 인도를 따라 걷는다. 구재봉 자락에 40만여 평에 달하는 악양면 평사리 들판이 펼쳐진다. 들판 한가운데에 깃대처럼 서 있는 부부송(夫婦松)이 옛 친구 만난 듯 반갑다. 하덕마을에서 약 15분 걸으면 오른쪽에 ‘토지’ 촬영장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나온다. 이곳이 평사리 상평마을 입구다. 여기서 ‘토지’ 촬영장까지 10분 정도 다시 오르막길을 오른다. ‘토지’ 촬영장에 용이네, 판술네, 두만네, 월선네, 김훈장댁, 송관수네가 살았던 초가와 읍내 장터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당에는 황소와 토끼가 살고, 곳간에는 장작이 그득하다. 사립문 옆에는 샛노란 산수유와 개나리, 목련이 탐스럽게 피었다. 텃밭에는 상추가 싱싱하게 자란다. 실제 사람이 사는 마을처럼 관리한다. 일부 한옥은 민박집으로도 사용한다. 촬영장 바로 위에 2016년에 개관한 박경리문학관이 있다. 박경리의 유품과 작품, 각 출판사가 발행한 소설 ‘토지’ 전질, 초상화 등이 전시돼 있다. 문학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최참판댁 솟을대문에 이른다. 서희가 자란 별채와 최치수가 머물렀던 사랑채가 그 모습 그대로다. 최치수인 양 사랑채 마루에 올라서서 평사리 들판을 굽어본다. 아득한 섬진강에 봄 아지랑이가 아롱거린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09:00~18:00, 연중무휴. 주변 명소 & 맛집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화개장터’ 화개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화개장터다. 화개장터는 하동군과 전남 구례군과 광양시의 경계 지점에 있다. 한국전쟁 전만 해도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한데 모여 각 지방의 토산물들을 사고팔았던 곳이다. 원래 위치는 화개천의 화개교 아래였는데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상설시장이 됐다. 시골 오일장의 구수한 정취는 사라졌어도 파는 물건과 음식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지리산에서 채취한 산나물과 약초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동 향토음식 전문점 ‘은성식당’ 섬진강가에 자리한 은성식당은 하동 특산물인 재첩, 은어, 참게를 이용한 요리를 판다. 재첩국, 은어튀김, 참게탕이 인기가 많다. 섬진강에서 채취한 재첩을 넣고 맑게 끓인 재첩국은 하동에서 먹어야 제맛이다. 송송 썰어넣은 부추가 향긋함을 더한다. 집게다리에 털이 북슬북슬한 참게에 된장과 고추장을 풀어 푹 끓인 참게탕은 구수한 맛이 별미다. 밑반찬도 모두 맛깔나다. 창밖으로 보이는 섬진강과 차밭 풍광은 덤이다. 팥 전문 카페 ‘팥이야기’ 하덕마을 입구에 있다. 도시에서나 볼 법한 이층 양옥이어서 눈에 금세 띈다.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고풍스럽다. 빈티지한 가구와 소품을 활용한 감각이 돋보인다. 대표 메뉴는 단팥죽과 팥빙수다. 작은 놋그릇에 담겨 나온다. 단팥죽의 당도가 적당하고, 팥의 풍미가 한껏 느껴진다. 식사 대용으로는 양이 부족하지만, 커피 한 잔 값에 맛있는 단팥죽을 맛볼 수 있으니 만족스럽다. 팥이야기에서 1분 정도 걸어가면 토속적인 분위기의 ‘타박네’ 카페(055-883-251)가 나온다. 팥소가 듬뿍 든 우리 밀 찐빵을 판다. 여행 정보 걷기 Tip -위에 소개한 코스는 수도권 기준, 당일 여행이 가능하다. 대중교통으로도 가능. -하동을 구석구석 여행하고 싶다면 주민공정여행 프로그램인 ‘놀루와’를 이용하면 된다. 하동 토박이가 여행 상담, 개별 맞춤 여행을 추천·진행한다.
- 2019-04-17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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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기 동호회 ‘신나는도보여행’ 오순도순 함께 걸어요!
- 산으로 들로 향하기 좋은 봄이 왔다. 움츠렸던 몸 기지개 펴듯 꽃망울 터지는 요즘, 크고 작은 여행 모임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다음카페의 걷기 동호회 ‘신나는도보여행’도 시동을 걸었다. 한 해 동안 건강하게 잘 걷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시도제에서 느린 걸음으로 서로를 생각하며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을 만나봤다. 버스로 두 시간 달려 도착한 곳은 강원도 횡성군의 청태산 자연휴양림. 다음카페 ‘신나는도보여행’이 시도제를 위해 선택한 장소다. 산악회는 ‘시산제’라고 하는데 걷기 모임이기에 명칭을 달리해 ‘시도제’라고 부른다. 거의 매일 소모임으로 북한산이며, 곳곳의 도보길을 다니는데 이날만큼은 많은 인원이 함께했다. 올해 도보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이다. 무릎관절의 무사안위 염원(?)하는 시도제 휴양림 입구 주차장 맞은편에 마련된 무대 위의 시도제(始道祭) 상에는 시루떡, 고기, 포, 대추, 과일 등의 음식이 차려졌다. 실제 돼지머리를 대신할 큼지막한 빨간 돼지 저금통도 올려 구색을 맞췄다. 걷다가 당이 떨어질 걸 대비해 준비하는 젤리도 상에 올랐다. 시루떡 위에 ‘신나는도보여행’ 회원이 가지고 다니는 작은 깃발 두 개를 꼽고, 현수막까지 걸고 나니 분위기가 제대로 난다. 모두들 오래도록 건강하게 함께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축사를 낭독하고 한마음으로 절도 하면서 시도제를 마쳤다. 올해로 결성된 지 2년을 조금 넘긴 ‘신나는도보여행’은 신미숙 카페지기가 만든 모임이다. 다른 도보여행 카페에서 길 주최자(아는 길을 카페에 공지하고 도보여행 시 앞서서 걷는 사람)로 시작해서 운영자를 거친 도보여행 고수이기에 찾는 이들이 꽤 된다. “5년여 한곳에 소속돼 있다 보니 제 성향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보이더라고요. 활동을 접고 쉬었는데 저와 길을 걷던 분들이 섭섭해 했어요. 우리끼리라도 만나서 걷자는 마음으로 카페를 열었습니다. 정말 많은 고민 끝에 ‘신나는도보여행’을 만들었어요.” 청태산 길을 걸으면서 회원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예전부터 걷기를 통해 신미숙 씨를 알았다고 했다. 특히 ‘신나는도보여행’은 누구나 쉽게 오가는 카페가 안 됐으면 해서 비공개로 운영하고 있다. “카페 운영이 공개가 되면 일단 저희 초상권도 문제이고 일정이 노출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지요. 자연 훼손도 문제예요. 저는 여행에 앞서 걸어보고 새로운 여정으로 연결해서 다닙니다. 가끔은 보호하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생명들을 만날 때가 있어요. 그런데 한 번 알려지면 사람들이 떼로 몰려가더라고요. 조용하던 길이 그렇게 훼손되는 걸 너무 많이 봤거든요.” 함께하는 사람들은 질서를 잘 지켜줘서 좋다. 얼마 전 들어온 신입 회원 박연희 씨는 그동안 다른 동호회에서 활동했는데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피로를 느꼈다고 토로했다. ‘신나는도보여행’의 경우 도보할 때와 버스 안에서의 음주를 철저히 금지한다. 카페지기가 준비해간 술 이외에는 마실 수가 없다고. 단 도보가 끝나고 나면 한두 잔 하면서 회포를 푼다. 회원 대부분이 50~60대이다 보니 될 수 있으면 편안하고 안전한 여행을 지향한다. 저렴한 경비로 많은 곳을 걷기보다는 좋은 길 하나라도 제대로 걷고자 한다. “우리들은 그럴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애들도 다 키웠고 직장생활 마쳤잖아요. 힘들게 무박에다가 좁은 버스에 끼어다니지 말고 회비를 좀 더 내더라도 우아한 여행을 해보자 했어요. 회원이 빠르게 느는 건 아니지만 저희 모임 취지에 공감하는 분들만 와요.” 그래서 현재까지 회원 모집은 지인들의 소개로 이뤄졌다. 지인 추천이라 신뢰도 높고 좀 더 편안한 카페로 정착하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이 모임에는 퇴직 교사가 유난히 많다. 취재 당일에도 10명 정도의 퇴직 교사가 참여했다. 물론 회원 전체가 다 모이면 교사들이 이보다 더 많다. 신미숙 카페지기와 이전에 같은 동호회에서 활동했던 김경숙(해피·62) 씨도 교사 출신이다. “여기서 활동한 지는 2년 됐습니다. 은퇴하고 뭘 할까 고민하다가 도보여행을 하게 됐습니다. 산들네(신미숙 씨 닉네임)가 주최하는 모임에 가야지 생각했는데 따로 동호회를 만들었더라고요. 시니어는 이렇게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여행 다니기가 쉽지 않아요. 길 안내하는 사람이 봉사정신이 없으면 동호회도 운영하기 힘들고요. 일단 여행을 좋아해야 해요. 우리나라가 고령사회로 접어들었잖아요. 나이 들면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여기 와서 사람들과 걷다 보니 몸이 개운해졌어요. 무릎 통증도 사라졌고요. 혼자서는 걷기 힘든데 이런 동호회가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고 너무 감사하죠. 시니어가 건강해야 국가 경제 또한 건강해지는 거예요.” 한 달이면 열흘 정도 걷는다는 김경숙 씨는 외국 트레킹도 해봤지만 경치가 좀 다를 뿐 우리나라 산을 걷는 것이 훨씬 좋다고 한다. 이날 후미에서 회원들을 챙기면서 걷던 정영일(코아이·64) 씨는 도보여행을 시작하기 전에는 뒷산에도 못 올라갈 정도로 약골이었는데 지금은 북한산 둘레길 걷기 모임 리더로 활동 중이다. “이전에는 걷는 게 힘들어요. 자꾸 참여하다 보니 늘더라고요. 지리산 둘레길도 완주했고, 서울둘레길은 세 번인가 돌았어요. 저도 걷기 모임에서 리더로 활동하잖아요. 선두로 걸으면서 속도 조절도 하고, 회원들 상황을 살펴가며 쉬어야 할 때를 적절히 판단해야 합니다. 시간 맞춰서 식사도 해야 하고요. 북한산 둘레길이 71.8㎞입니다. 회원들과 만날 때마다 10㎞ 정도씩 걸어요. 지금까지 두번 걸었어요. 다음주에 회원들이랑 또 갈 거예요.” 그런데 정영일 씨가 ‘신나는도보여행’에 나오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바로 술 마시는 재미란다. “퇴직하고 좀 쉬다가 요즘 하는 일이 있는데 늦게 끝나다 보니 평소에는 시간이 없어요. 여기는 술 마시는 재미로 와요. 걷는 시간도 유익하지만 끝나고 나서 친한 사람끼리 어울려서 한잔 마시는 게 참 좋습니다.” 신미숙 카페지기는 같은 취미를 통해 만나게 된 회원들을 가족이나 옛 친구보다 더 자주 본다고 했다. 앞으로도 도보여행을 통해 함께 건강도 지키고 마음을 나누면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기를 바란다. “너무 무리해서 걷는 건 싫어요. 길을 걸으면서 그 시간에 취하고, 행복을 느끼고, 야생화 한 송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바라보는 마음, 그게 중요해요. 정상을 향해서 가는 것이 도보의 목적은 아니잖아요?(웃음)”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2019-04-10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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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류’ 기인 예술가의 미치광이 같은 예술혼
- 간혹 그의 목소리는 흡사 파도처럼 올라갔다가 거친 자욱을 남기며 내려오는 듯했다. 스스로 일류를 넘은 ‘특류’라고 말하는 국내 최고의 전각(篆刻) 작가 진공재는 인터뷰 도중 간간이 자신의 이야기에 쏠린 감정을 타고 폭풍처럼 말을 쏟아내곤 했다. 그 근저에는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은 날선 도끼가 서려 있었다. 타협하지 않는 예술혼과 부패하지 않는 태도로 평생을 살아오며 실력과 배짱과 자존심으로 무장한 진짜 예술가, ‘58년 개띠’ 세대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줄 진공재(陳空齎)를 만나 그의 거친 예술가 삶의 여정을 들여다봤다. 차고 넘친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고독하고 단호하다. 국내 최고 전각 장인으로 평가받는 진공재 작가를 만나니 흔히 광기의 예술가라고 하면 연상되는 거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흡사 ‘서편제’에서 궁극의 소리를 찾아 끝없이 방랑하던 소리꾼의 모습도 떠올랐다. “남원에서 5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죠. 열네 살까지는 정말 행복하게 살았어요. 어머니와 함께였거든요. 그런데 중학교 1학년 때인 1971년에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진공재 작가는 어머니가 사망한 시간을 분 단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정도로 충격적인 날이었다. “다른 집들은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우리 집은 내가 불을 피워야 연기가 나.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 집을 떠나보자 하고 1974년에 자전거 팔아 3400원을 챙겨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어요.” 그 얼마나 많은 소년 소녀들이 각박한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던 시절이었던가. 1974년은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해였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지하에서 파낸 흙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밥벌이로 시작한 도장 파기 소년 진공재는 인쇄소, 중국집, 노점상 등 별의별 일을 다 하기 시작했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인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그가 경기도 안양에서 도장을 파기 시작한 것 또한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평소에 새기는 걸 좋아했죠. 학교에선 서기 일도 했었고. 그런데 길에서 도장을 파다 보니 밥벌이는 되는데, 밥만 먹어선 충족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서예를 배웠죠. 독학자습이었어요. 그렇게 서예를 하다 보니 그림이 나오더군요. 글씨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글씨가 되듯이….” 서화동원(書畵同源). 서와 화는 뿌리가 같다는 말이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이 합쳐져서 그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런데 시절이 1980년대였다.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불같은 성질에 기름을 부은, 군부독재 시절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암울한 시대에 눈을 뜬 거죠. 그래서 저항하기 시작했어요. 20대 후반이었는데, 사실 대학생도 아니고 학생운동가도 아니고 노동운동가도 아니고 그저 길거리에서 도장 파서 먹고사는 사람일 뿐이었어요. 그렇지만 후회는 없어요.” 스물일곱 살에 우연히 만난 아내와 사랑하게 되어 결혼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내와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데모 전선에 뛰어들었다. 실력만으로 오른 최고의 자리 아이는 1987년 8월 3일에 태어났다. 그런데 아이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백 일도 안 됐는데 감기, 모세기관지염, 폐렴, 장염까지 온 거예요. 아이들은 공기가 좋은 곳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 시절 우리 가족은 지하실에서 살았거든요. 의사가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면서 공기 좋은 시골에 가서 살라고 하더군요. 부랴부랴 짐 챙겨서 전라도로 내려갔죠.” 그는 서예 솜씨 덕분에 전북 도청 고용직 공무원으로 들어갔고 아이도 다행히 얼마 안 있어 병이 나았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예술가 기질, 방랑가 기질이 다시 돋았다. “공무원이 내가 갈 길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보따리 싸서 다시 도장을 파기로 했죠. 1990년에 전주를 떠나 인천으로 갔어요. 거기서 서예학원을 개원했는데 3개월 하고 망했어요. 다시 경기도 안양으로 갔어요.” 처음 도장을 파기 시작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1991년 대한민국 서예대전 전각 부문에 작품을 출품해 최고상을 받았다. 아무런 ‘빽’도 없이 오로지 실력만으로 이뤄낸 결실이었다. 그 길에서 그는 전각과 서예, 동양화가로서 일가를 이룬 석도륜 선생을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계 다 썩었잖아요. 서예계도 마찬가지였죠. 문중끼리 다 해먹고…. 그런데 나 같은 이름 없는 사람에게 최고상을 준 분이었어요. 성철 스님과 함께 승려 생활을 하다 환속하셨죠. 2011년에 돌아가셨는데, 그 이후로 제가 담배를 끊었어요.” 전각(篆刻)은 심각(心刻) 예술이다 당시 서예계의 부정부패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1992년 그는 서예계 인사들이 비리로 구속되고 난리가 나자 소위 ‘혁명’을 하러 협회로 들어간다. 한국청년서예가협회 대표였던 그는 “다 나와라, 새로 집행부를 구성하자” 하고 외쳤다. “아무도 나를 못 건드렸죠. 전부 스승과 제자로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잘못된 거라면 고쳐야 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일 마치고 나오려 했는데 어떤 분이 ‘네가 지금까지 한 게 있으니 그대로 나오면 안 된다, 도로 돌아가게 된다’고 말씀해주시더군요. 그래서 다시 협회에 들어갔죠.” 이때가 그의 공적인 삶이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었다. 1995년에는 중국서령인사 전각평전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수상을 받았고, 1998년에는 ‘채근담’ 1만6600여 자를 새기는 대작을 완성했다. 그 와중에도 서예협회 경기도지부장, 서예협회본부 이사, 한국전각학회 감사를 맡아서 활동했다. 그러나 공적으로 화려한 간판들이 과연 그에게 큰 의미가 있었을까? 그의 성정이 짐작이 된다면 예상 가능하겠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2003년 3월 29일이었어요. 생각해보니 나는 아무것도 안 해먹은 빈 껍데기야. 그런데 벼슬하면 뭐 해먹었다고 똑같이 욕먹고…. ‘여기를 떠나자’ 싶어서 맡고 있던 직위들을 한날한시에 다 내려놨어요. 그리고 집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올라가기로 하고 보따리 싸서 지리산으로 갔죠.” 그는 부질없음을 깨닫고 홀연히 떠났다. 방랑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끝없는 방랑벽, 다시 떠나다 평생 39번을 이사했다. 지금도 그는 임대사무실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한다. “왜 그렇게 돌아다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정적으로 뭔가 쌓이는 것도 없고 붙잡는 사람도 없고 술맛도 떨어지면 떠나게 되는 거죠.” 어느 곳에서는 202호 스님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를 본 건물주가 야반도주한 스님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단다. 그는 자신의 호가 마흔아홉 개인데 ‘202호 스님’도 그중 하나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굳이 스님 아니라고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냥 그렇게 생각하라고 했지. 어차피 전기세 받을 때만 볼 테니.” 2005년에는 그의 방랑벽이 해외로도 뻗어나갈 기회가 왔다. 정부에서 독일을 함께 가자고 연락을 한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행사가 매년 열리는데 그 해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초청을 받아 행사 일환으로 전각 시연을 보여주고 싶으니 그에게 허락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내가 어디를 못 가겠냐, 대신 거기서 작품을 팔 수 있으면 가겠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사람인데 보름 동안 거기 가 있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했더니 받아주더군요.” 독일은 그에게 좋은 방향이었던 모양이다. 그 스스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할 정도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의 작업물을 받았다. 그 사람들 중에는 독일 녹색당 당수도 있었고, 독일 방송국에서는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정도였다. 가난을 즐길 줄 알면 멋지게 산다 평생을 강렬하게 살아온 그도 이제 환갑이 됐다. 나이 들어감에 대해 그가 느끼는 바가 궁금했다. “내 종교는 세 개예요. 열여섯 살에서 서른 살까진 새옹지마교였죠. 인생사 새옹지마다. 서른 살에서 예순 살까진 천지조화은혜교였죠. 천지가 사람을 절대 굶기지는 않더라. 밥은 주더라. 그리고 예순 살 이후는 안빈낙도교나 믿을까 해요. 가난을 즐길 줄 알아야 해요. 가난을 즐길 줄 알면 나이 들어도 멋지게 살 수 있으니까요.” 흔히 예순 살이 넘으면 사주팔자도 없다고 한다. 다시 한 살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기 전 열네 살까지는 행복하게 살았으니, 일흔네 살까지는 행복한 삶을 살 거라고 봤다. “앞으로 14년은 황금기예요. 그 이후로는 삶을 구걸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자신으로 사는 거죠.” 그는 최근 딸 덕분에 아내와 함께 안나푸르나를 갔다 왔다. 거기서 인생 최고의 환희를 맛봤다. 자연 속에서, 안나푸르나의 굽이진 길에서 느낀 것이다. 그의 삶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지표가 있다. 바로 손녀인 하리다. “손녀가 나를 너무 좋아해요. 얘를 위해서라도 오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는 이제부터 오직 전각만을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올여름에는 인사동에서 자신의 학습 단계에서부터 현재까지를 총정리해서 집대성하는 전시를 열 계획이다. 내 예술의 가치는 절박함 그가 현재 머무르는 곳은 의왕시 청계산 자락. 작업실 이름은 비니루(扉泥陋)다. 사립문 비(扉), 진흙 니(泥), 더러울 루(陋) 자를 쓴다. 한자 음 그대로 비닐하우스로 된 공간이다. 2년여 전 경상북도청 신청사 1층 로비에 설치된 ‘심상서화각의향연’이라는 돌판새김 작업을 했다. 이 작품을 만들고 그동안 28% 이자를 내고 있었던 캐피털 빚을 전부 갚을 수 있었다. 싹 갚고 나니 3000만 원이 남았다고 한다. 그 돈을 전부 이 작업실을 만드는 데 썼다. “나는 평생 석도필묵(石刀筆墨)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에요.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하고 싶어요.” 그는 젊은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 밥을 먹고살 수 있는가를 알아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밥벌이를 위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데, 좋아하면서 밥을 먹고살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큰 행운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형편이 어려워서, 곤궁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왔어요. 대충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내 예술의 가치는 절박함에 있었다고 봐요. 나는 삶을 위해서 예술을 하는 거예요.” 눈을 사랑하면 얼어 죽을 각오로… 멀고도 굽이진 길을 돌고 돌아온 그가 삶류 작가라고 자처하는 이유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작가가 아니라 오로지 밥벌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일류라지만 나는 특류다. 자만심 있는 삶류다”라고 말하는 그는 홀로 이뤄낸 자신만의 세계에 대한 자긍심이 있었다. 그런 자부심을 가진 그가 평생 안고 있는 석도륜 스승의 말씀이 있다. “눈을 사랑하면 얼어 죽을 각오를 해라. 눈을 사랑하기로 해놓고 따뜻하길 바란다면 눈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과연 그가 품고 있을 만큼 깊은 여운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그는 “있는 그대로 여겨지고 싶다”고 대답했다. 여러 의미를 함축하는 말이었다. 오롯이 자신의 노력으로 일가를 이루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섰기에 그는 자유로울 수 있다. 따라서 진공재 작가에 대한 설명은 그 어떤 것도 필요 없다. 진공재와 그의 작품들만으로 충분하다. 이제 다시 한 살이 된 그가 스스로 ‘황금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앞으로의 14년. 어떤 작품들로 자신을 말하게 될지 기대가 크다.
- 2019-03-04 0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