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노(NO-老)족 지리산 종주기

기사입력 2019-08-06 10:34 기사수정 2019-08-06 10:34

(김종억 동년기자)
(김종억 동년기자)

45년 전 육군 소위로 임관했던 동기들이 성삼재에서 뭉쳤다. 대부분은 연고지가 서울이었지만 대구와 구미에서도 각각 한 명씩 합류했다. 총 13명의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곧 성삼재를 들머리로 지리산 종주 등반이 시작됐다. 전날, 서울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구례역에 내린 시간은 새벽 3시 15분경. 구례버스터미널에서 성삼재까지는 버스로 올라갔다. 성삼재에 올라서자 세찬 바람이 불었다. 갑자기 한기가 몰려왔다. 그때 대구에서 온 동기가 따끈한 커피와 간식거리를 내놓았다. 칼바람 속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은 그야말로 감동이었다.


성삼재에서 만난 13인의 용사들

노고단(1507m)은 천왕봉, 반야봉과 함께 지리산의 3대 주봉으로 손꼽힌다. 새벽을 깨우는 새소리와 오락가락하는 구름이 동기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가파른 돌계단과 우거진 숲을 헤치며 가다 보니 현역 시절 펼치던 특수작전이 떠올랐다. 장마가 시작되는 한여름에 무모하게 시작한 종주였지만, 모두의 간절한 바람 덕분인지 날씨는 최상이었다. 가끔 햇볕을 가려주는 구름까지 있어 걷기에도 좋았다.

그러나 일행들은 얼마 안 있어 끝없는 오르막과 내리막길에 서서히 지쳐갔다.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는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3박 4일간 먹고 마실 것들로 꽉 채운 배낭 무게가 덜컥 겁이 났다.

다리에 힘이 빠져갈 무렵 13인의 용사들은 삼도봉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해발 1501m의 삼도봉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다. 배낭을 풀고 서너 명씩 편성된 조별로 식사를 준비했다. 우리 조는 ‘핫쿡’이라는 비상식량을 준비해갔다. 군대에서나 먹어봄직한 일종의 전투식량인 셈인데, 발열체에 찬물을 부으면 100℃ 이상의 고온 증기가 발생하면서 물이 뜨거워지고, 가공된 봉지쌀에 이 물을 부으면 밥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사용법을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찬물을 덜컥 쌀에 부어놓고 기다렸다. 한참이 돼도 소식이 없어 들여다보니 그 모양이었다. 마주 보고 웃을 수밖에. 어쨌거나 밥도 아니고 죽도 아닌 점심을 먹고 다시 이동을 했다.

까마득하게 보이는 토끼봉을 넘고 명선봉을 굽이굽이 돌아야만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발바닥이 화끈거리고 어깨는 말 그대로 천근만근이었다. 직업군인 시절에 메고 달리던 배낭의 무게는 이제 버거웠다. 그 이유는 세월 탓이겠지만 마음은 이 여정을 반드시 완수해내리라는 굳은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오후가 되니 점차 하늘이 맑아지고 멀리 보이던 봉우리들이 얼핏얼핏 시야로 들어왔다. 봉우리 사이로 펼쳐진 운해(雲海)는 장관이었다.


첫 번째 숙소, 연하천 대피소

천신만고 끝에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했다.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과 하중을 견디지 못한 발이 화끈거리고 무릎도 아팠지만 대피소에 도착했다는 기쁨이 더 컸다. 부지런히 쌀을 씻어 안치고 합동으로 반찬을 준비했다. 요즘은 참 편리한 세상. 인스턴트 북엇국은 뜨거운 물만 넣으면 맛있는 국으로 변했고 볶은 김치에 참치를 넣어 끓이니 칼칼한 김치찌개가 금세 탄생했다. 각자 가져온 반찬과 먹거리들은 칠첩반상 부럽지 않았다. 단백질 보충하자며 고기까지 굽자 일행들이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다.

연하천 대피소는 최근 리모델링을 해서 그런지 겉모양도 예뻤고 내부도 많이 개선됐다. 여장을 풀고 뻐근한 몸을 뉘었으나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창밖으로 빗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아! 장마가 시작되려나?’ 내일 아침엔 비가 멎어주기를 기도하며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밤새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자 뚝 그쳤다. 지리산 새벽을 깨우는 새소리를 녹음한다고 일찍부터 일어나 설쳐댔다. 아침을 간단히 먹은 뒤 다시 배낭을 멨다. 그런데 무게가 여전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서는 쓰레기를 버릴 수 없다. 먹은 만큼 발생한 쓰레기를 다시 배낭에 넣으니 부피도 거의 그대로다. 걱정했던 몸과 다리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김종억 동년기자)
(김종억 동년기자)


시련 속에서 맞이한 천왕봉 일출

너럭바위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오르면 또 나타나는 봉우리를 돌아가는데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온몸에 식은땀이 나고 어질어질했다. 옆 사람에게 누가 될까봐 말도 못하고 견디며 걸어가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사무총장에게 소화제를 청해 복용했다. 그런데도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행렬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땀이 비 오듯 흘러 잠시 앉아 쉬는데 동기가 소금을 건네며 먹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먹자마자 모든 것을 토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벽소령 대피소를 지나 세석산장까지 가는 길은 험하고 멀었다. 기운이 없어도 무엇 하나 넘길 수 없었다. 한 번 고장 난 속은 모든 음식을 거부했다. 속에서 불이 난 듯 갈증이 일어나 찬물만 들이켰다. 먹은 물까지 다 토해내 기운이 다 떨어져 갈 무렵 드디어 세석산장에 도착했다. 동기들이 점심을 준비해서 먹을 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실내에 들어가 누웠다.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추웠다. ‘아! 지리산 종주는 여기서 끝인가보다’ 했다. “조금이라도 뭘 넘겨야 할 텐데” 하며 걱정하는 동기들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꼭 종주하고 말겠다는 신념과 일행들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수시로 충돌했다.

둘째 날, 배낭 속 물건을 나누어 지겠다는 동기들의 호의를 마다하고 배낭을 다시 멘 뒤 장터목으로 향했다. 장터목에 도착해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한 채 누워 있으니 일행이 북엇국이라도 먹으라며 권했다. 지리산 종주의 마지막 코스인 천왕봉을 올라야 하는 여정이 남아 있어 기운을 차리려면 억지로라도 먹어야 했다.

다음 날 새벽 2시 30분. 여기저기서 부스럭대며 배낭 꾸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일어나 어둠 속에서 배낭을 찾았다. 헤드랜턴을 준비해왔는데, 막상 쓰려고 보니 배터리가 다 방전되어 쓰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할 수 없이 일행의 도움을 받았다. 새벽 산행인데도 가파른 돌계단을 연속으로 올라야 했다. 산을 오르기 전, 동기가 건네준 홍삼진액을 마시고 나니 그런대로 힘이 났다. 깎아지른 절벽을 한 시간 남짓 올랐을까? 드디어 통천문이 보였다. “아, 이제 천왕봉에 다 왔구나” 하고 안내 표지판을 보니 아직 400여 m가 남았다. 희끄무레하게 동이 터오는 산 아래 쪽으로 아련한 불빛이 보였다. 진주시였다. 오락가락하던 구름은 이제 산 중턱으로 밀려나 푹신한 솜이불을 깔았다. 쏟아지는 별빛이 가슴을 뻥 뚫어줬다.

멀리 운해 위로 펼쳐진 하늘 색깔이 변하기 시작했다. 천왕봉으로 몰려오는 바람이 살을 에듯 파고들었다. 준비해간 패딩을 황급히 꺼내 입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동쪽 하늘 운해 위로 붉은 손톱 모양의 해가 살짝 걸쳐지자 모두가 “와!” 하며 탄성을 질렀다. 솟아오르는 해의 모습은 정말 신비로웠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 힘들었던 여정은 눈 녹듯 사라져버리고 감동만 밀려왔다. 장엄하게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고 있자니 “45년 전 동기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힘든 상황 극복하고 여기 서 있게 해줘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가족과 건강하게 열심히 잘 살아준 나 자신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법계사 스님들

천왕봉 일출의 감동을 뒤로하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다리가 아파 진통제까지 복용하면서 올라간 동기는 너무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서서히 원기를 회복해갔다. 로터리 대피소 쪽으로 내려오다 법계사 일주문과 마주했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 자리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1450m)에 위치한 법계사는 544년(신라 진흥왕 5년)에 인도에서 온 고승 연기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면서 창건한 적멸보궁 도량이다. 법계사를 돌아보다 만난 스님 두 분은 뜰에서 열심히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 겨울에나 신을 법한 털신을 신고 있다. “스님, 어찌하여 한여름에 털신을 신고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여기서는 이 신발이 딱 맞습니다. 여름이어도 아침저녁 기온은 초겨울과 비슷하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다 일주문 밑에서 일본인이 지리산과 법계사의 혈맥을 누르려 박아둔 쇠말뚝을 봤다. 이 깊은 곳까지 간교한 음모를 뻗쳤다니… 충격적이었다.

구례에서 출발한 지리산 종주는 천왕봉에서 정점을 찍고 경남 함안군 대산면 중산리에서 막을 내렸다. 3박 4일간의 짧지 않은 여정 속에서 35㎞의 산행을 완주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지치고 힘들 때 옆에서 지켜준 동기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종주였으리라. 변함없는 배려와 우정이 고맙다. 육십 고개를 넘어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도전한 지리산 종주 등반. 내 삶에서 잊히지 않을 이 길은 남아 있는 또 다른 인생 여정에 이정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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