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 주차장에 차를 두고 무소유길을 오른다. 1km 남짓한 숲길이라 오르내리기 쉽다. 불일암에선 법정 스님의 수목장 묘를 놓치지 말자. 하산 뒤엔 조계산의 양대 거찰인 송광사와 선암사를 비교 답사한다. 풍경도 풍토도 서로 완연히 다르다.
얼씨구! 매화꽃 핀다. 조계산 기슭 곳곳에 매화가 지천이다. 이미 피었거나 피고 있거나 피어날 채비를 하거나, 여기저기 오나가나 보나마나 천지간에 매화다. 그렇다는 건 하고많은 초목 중에 유독 매화가 꽂히듯 쏘옥 눈에 들어온다는 뜻이다. 딴엔 매화에 취미가 있으니 이게 호사다.
예로부터 매화는 애호가들을 몰고 다녔다. 아직 봄 일러 눈발 날릴 때부터 매화는 홀로 고고히 피어 춘색몰이를 선동한다. 동면에서 겨우 깨어난 산야로 성급히 짓쳐드는 매화의 기세에, 은은해서 더 멀리 가는 향에, 희고 차가운 꽃잎의 미색에 사람들은 들떠 입방아를 찧었다. 어떤 고인은 매화를 아내 삼아 청산에 은거했다. 조선의 명인 강희안은 매화에게 정1품 벼슬을 내렸다. 퇴계는 한술 더 뜨셨구나. 이렇게. “아아.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벌 나비들, 매화를 가만 두고 보진 못하리라. 꿀을 얻기 위해 온몸을 들이밀 것이다. 그게 꽃이 바라던 바이며, 그게 기대했던 열락이며, 그래서 혼신의 힘을 다해 농밀한 체취를 풍긴다. 활활 타오르는 뭔가 황홀한 게 꽃과 나비 사이에 있을 게다. 그러나 다 지나간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꽃 피어 열흘 붉긴 어렵고 지기는 쉽다. 사람의 일도 이와 다를 게 있던가. 청춘남녀의 사랑도, 검은 머리 파 뿌리 되는 해로(偕老)도, 만개처럼 은성했던 삶도 종국엔 감쪽같이 시든다.
홀리고 끌리어 매화 앞에서 한참을 노닥거리다 숲길로 접어든다. 송광사 옆댕이에서 시작되는 ‘무소유길’을 걸어 오른다. 무소유를 설하길 평생 거듭했던 법정 스님이 즐겨 거닌 산길이다. 길 끝엔 불일암(佛日庵)이 있을 게다. 법정 스님이 많은 날들을 보낸 암자다. 경전을 읽거나 화두를 타거나, 채마밭을 일구거나 글을 쓰거나, 스님은 불일암에 수시로 머물며 할 일을 다 했다. 산수 간에 몸을 두는 게 수행승의 일이지만, 긴히 덧정 들고 딱히 속정 깊어서였을까, 그는 불일암을 각별히 좋아했더란다.
정겨워라, 초봄 숲. 정겨운 건 정 주고 봐야 한다. 흙을 들어 올리고 빠끔히 낯을 내미는 풀들을 보라. 어린것의 첫 어금니처럼 애틋하고 장하지 않은가. 저마다 미끈한 지체를 뽐내는 저 길찬 나무들은 편백이거나 삼나무다. 길 물매는 순해 걷기에 좋다. 이 나라 어디에나 있는 유정한 숲길이다. 쉬 오를 수 있어 만만한 산길이다. 그러니 길과 사람이 죽이 맞는다.
무소유길의 백미는 대숲 사이로 난 오솔길이다. 본새 없이, 하릴없이 목 깁스처럼 빳빳할 뿐 단 한 번을 굽힐 줄 모르는 대나무는 어쩌면 아집의 화신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대나무에게 대 회초리 맞아도 싸다. 꺾일 줄 모르니 절개의 상징이요, 속이 텅 비었으니 무욕의 표징이지 않은가. 대나무 죽창은 혁명의 무기였으며, 대나무 피리는 청아한 선율로 사람의 시름을 재운다. 불교하고도 인연이 깊은 게 대나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을 한 대밭에 세운 죽림정사는 최초의 불교 사원이며, 선가의 스승들은 죽비를 높이 들어 공부에 게으른 제자의 등짝을 후려친다.
대숲을 지나 이윽고 불일암에 닿는다. 대나무와 조릿대 무성히 어울렸으니 사립부터 초록이 짙다. 초록으로 지은 대의 터널이다. 걸어드는 초입이 숫제 컴컴하다. 그리곤 이내 햇살 아래로 채마밭과 요사채가 환히 드러난다. 소박한 구색은 여염집에 가까우며, 고요하기론 물속을 닮았으며, 단아한 기품은 연꽃을 연상시킨다. 이 모든 그윽한 풍경에 법정 스님의 눈길이 스쳤을 테지. 모든 사물에 스님의 손길이 어렸을 테지. 임종 즈음, 제자가 물었다. “생사의 경계가 어떠합니까?” 두고두고 모실 한 말씀 달라는 질문이었다.
“원래부터 없다.”
돌아온 건 그 한마디. 투병엔 격통이 따랐으나 종신(終身)은 그답게 가벼웠다. 장례식 하지 말라, 관 짜지 말라, 사리 찾지 말라, 탑도 비도 세우지 말라. 제자들에게 남긴 당부가 그랬다. 걸리적거릴 게 없는 활보로 이승을 건너셨구나. 불일암 뜰, 후박나무 그늘 아래에 유골을 남기고, 큰스님 후련히 떠났다.
화려한 액세서리, 깔끔한 외투, 잘 정돈된 소매와 옷깃. 센스 있는 옷차림은 눈길을 끈다. 하지만 향기로운 사람에겐 눈길이 머문다. 길을 걷다 우연히 코끝을 스친 향기는 절로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패션의 완성은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향수다.
보이지 않는 패션, 향수
어떤 향기를 맡고 자연스레 내가 만났던 사람, 어린 시절 추억의 한 장면이 떠올랐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향기를 맡고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한다. 이후 사람들은 향기가 과거의 기억을 불러오는 것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불렀다. 또 미국 모넬화학감각센터의 레이첼 헤르츠(Rachel Herz) 박사는 실험을 통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향기가 더 자극적이고 매혹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향기는 상대방에게 나를 제대로 각인시킬 수 있는 또 하나의 명함인 셈이다. 당신은 어떤 향기로 기억되고 싶은가?
나만의 향기를 찾아서
국내 향수 브랜드 ‘톰빌리’의 퍼퓸 디렉터 박재석(29) 씨는 먼저 내가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를 파악한 후 각각의 향이 지닌 매력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당신이 활발한 이미지의 사람이라면 시트러스 계열의 향수를 활용해 활발함을 더 강하게 표현할 수도 있고, 좀 더 무거운 계열의 향으로 활발한 이미지를 중화시켜 균형을 맞출 수도 있다.
향수공방 ‘센토리움’을 운영 중인 오원택(33) 씨는 겨울에는 긴 소매, 여름에는 짧은 소매의 옷을 입듯 향수도 하나의 패션으로 계절에 맞춰 사용하라고 조언한다. 봄과 여름에는 가볍고, 경쾌하고, 싱그러운 느낌의 시트러스, 그린, 플로럴, 프루티 계열의 향수를 쓰고 가을과 겨울에는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의 애니멀, 우디, 바닐라, 구루망(쿠키 같은 디저트류) 계열의 향수가 좋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향이어야 하며, 향수로 개성 있는 스타일링을 연출하려면 다양한 향을 직접 맡아보고 경험해봐야 한다.
①시트러스(Citrus) 레몬, 자몽, 라임 등 감귤류의 향으로 상쾌하고 활동적인 느낌을 준다.
②아로마틱 (Aromatic) 라벤더, 바질 등 허브류의 향으로 진중한 느낌을 준다.
③플로럴(Floral) 장미, 재스민 등의 꽃향기는 우아한 느낌을 준다.
④프루티(Fruity) 시트러스와는 다른 달콤하고 싱그러운 과일 향으로 발랄한 느낌을 준다.
⑤우디(Woody) 나무 향으로 향긋 하면서도 무게감이 있어 중후한 느낌을 준다.
향수, 제대로 맡는 법
향수의 향을 맡는 과정을 ‘시향(試香)’이라고 한다. 시향을 할 때는 향수와 시향지 사이에 7~15cm 간격을 두고 향수를 분사해야 한다. 시향지에 너무 가까이 대고 분사할 경우 본연의 향취가 느껴지지 않는다.
향수는 분사 후 시간 경과에 따라 톱 노트, 미들 노트, 베이스 노트 3단계로 나뉘는데 톱 노트는 15분~2시간, 미들노트는 3~5시간, 베이스노트는 10~15시간 향이 지속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향수를 뿌린 직후의 향, 즉 톱 노트만 맡는다. 향을 단계별로 제대로 느끼려면 시간적 여유를 충분히 갖고 맡아야 한다. 반나절 정도라면 베이스 노트의 향까지 경험할 수 있다. 만약 그럴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최소 15분 정도의 시간을 갖고 시향할 것을 권한다. 또 한 번에 3개 이하의 향수만 시향하는 게 좋다. 너무 많은 종류의 향수를 연달아 시향하면 후각이 무뎌져 나중에는 향을 제대로 못 맡게 된다. 이럴 때는 ‘커피’를 활용해보자. 커피 원두 향이 피로한 후각을 진정시켜준다.
마지막으로 피부에 ‘착향(着香)’을 해봐야 한다. 사람마다 고유한 체취가 있고 피부 온도와 습도 차이에 따라 같은 향수라도 향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잔향까지 마음에 들어도 꼭 착향을 해본 뒤 구매해야 후회가 없다.
향수, 제대로 입는 법
이렇게 고른 당신만의 향수, 어떻게 뿌리는 것이 좋을까? 향수는 기본적으로 맥박이 뛰는, 온기가 있는 부위에 뿌린다. 손목 안쪽, 목 뒤, 왼쪽 가슴 부근이 대표적이다. 손목에 향수를 뿌린 후엔 가볍게 톡톡 두드려주면 된다. 간혹 양 손목에 뿌려 비비는 사람이 있는데, 향수의 노트가 뭉개져 본연의 향을 잃어버린다. 팔꿈치 안쪽은 옷으로 덮여 있는 경우가 많아 향을 은은하게 오래 즐길 수 있다. 여름에는 소매가 짧은 옷을 주로 입기 때문에 발향이 강한 편이다. 이외 외투 안쪽, 넥타이 뒷면, 바지, 치마 등 옷에 뿌려도 된다. 다만 실크와 가죽옷에 뿌리면 옷이 상하거나 향이 변할 수 있으므로 피하는 게 좋다. 향의 지속력을 높이고 싶다면 피부를 촉촉하게 유지하면 된다. 무(無)향 로션을 바르고 그 위에 향수를 뿌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화향백리(花香百里), 주향천리(酒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 꽃의 향기는 백 리를 가고, 술의 향기는 천 리를 가지만,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는 말이다. 그만큼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는 특별하다는 의미다. 당신만의 향기로 누군가에게 오래 기억되고 싶다면 집을 나서기 전, 가볍게 향수를 걸쳐보자.
빅토르 위고 하면 ‘레미제라블’, ‘레미제라블’ 하면 ‘장발장’을 빼놓을 수 없다. 이렇듯 자신의 이름에 나란히 할 만한 작품과 캐릭터를 만나는 것은 소설가에게 크나큰 로망이라 하겠다. ‘불멸의 이순신’, ‘나 황진이’, ‘허균 최후의 19일’ 등 다작의 장편소설을 통해 실존 인물의 삶을 재조명해온 소설가 김탁환(金琸桓·50). 그는 최근 집필한 장편소설 ‘이토록 고고한 연예’의 주인공 ‘달문’이야말로 20여 년 소설가로 살며 만난 ‘인생 캐릭터’라 말한다.
김탁환의 인생 캐릭터 달문을 묘사하자면 이러하다. 귀밑까지 찢어진 입, 짓뭉개져 입보다 더 낮은 콧등, 날 때부터 털 하나 없는 눈썹, 쏟아질 듯 흔들리는 커다란 눈망울, 시궁창 냄새처럼 풍기는 체취. 완벽한 추남(?) 설정이지만, 소설을 읽고 난 독자라면 그의 아름다운 성정에 매료되고 만다. 세상일에 초연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자기희생을 마다치 않는 착하디착한 사내 달문.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뛰어난 춤사위로 여러 사료에 기록된 이른바 ‘조선시대 연예인’이었던 것. 실제 인물이면서 연암 박지원의 ‘광문자전’의 주인공 ‘광문’과도 같은 달문의 존재를 김탁환이 알게 된 것은 스무 살 무렵. 분명 매력적인 캐릭터라 여겼고, 달문에 대한 글을 써보라는 권유도 많이 받았지만 쉽사리 글로 옮길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20대엔 달문의 1%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소설가가 되고 나서 10%쯤 알았을까? 달문을 처음 만나고 3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생에서 수많은 사람과 사건을 겪고 나서야 그의 삶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었죠. 좋은 인물을 잘 이해해서 독자들에게 글로 보여줘야 하는데, 나는 실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한 7년은 못 쓰겠다고 미뤄온 것 같아요.”
그러던 중 2014년 4·16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이에 김탁환은 한동안 ‘거짓말이다’,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등 세월호 관련 소설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거리로 나가 희생자들의 슬픔에 귀 기울였고, 자기 아픔처럼 촛불을 밝혔던 수많은 ‘달문’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을 통해 평생 자기희생을 자처하며 거리의 사람들과 함께한 달문이라는 인물이 이해됐고, 소설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작품을 만들면서 달문을 알아가다 보니 내가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이 생기더라고요. 세월호 소설을 쓰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내게 수고한다든지 고맙다든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정작 나는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몰랐거든요. 달문의 삶을 잘 이해하고 나니, 그동안 규정짓지 못했던 내 행동까지 이해되더군요.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면 거리로 나가 그들의 아픔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 내 이익이 없더라도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다는 것. 나는 고작 3~4년 했는데, 달문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구나. 그런 점에서 달문이 인생 대선배처럼 느껴졌죠.”
하지 않는 것을 하는 자의 고고한 인생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그는 작품 제목을 통해 달문을 ‘고고하다’는 표현으로 압축했다. 주인공의 외롭고 가난한 생애와 세상일에 고상하고 초연한 태도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설명을 더하자면, 달문은 외롭고 가난하지만 불행하지 않았고, 고상하고 초연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캐릭터다. 달문이 그러듯 고고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달문의 특징은 남들이 하는 건 안 하고, 남들이 안 하는 건 한다는 거예요. 가령 사람들은 돈을 벌면 저축하는데, 달문은 돈을 모을 생각도 안 하고, 있는 돈도 모두 어려운 이들에게 나눠줘 버리죠. 다른 사람들 눈에는 자기네가 하는 걸 하지 않으니,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인간의 본성 중 대표적인 게 바로 ‘경쟁’이라는 건데, 달문은 경쟁하지 않죠. 자발적으로 경쟁에 끼지 않음으로써 경쟁이라는 것 자체를 무력화해버려요. 그러니 세상일에 초연할 수밖에요.”
물론 달문의 고고한 삶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살아봄직하다고 느끼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심정적으로 원할 뿐,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으리라 여겨졌다. 이에 그는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달문은 뭔가를 갖고 있어서 그런 인생을 사는 게 아니에요. 무소유의 삶이죠. 오히려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달문은 다 내려놓고 살면서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것 딱 하나만을 취하죠. 그게 바로 춤이고, 아름다운 춤을 갈고닦는 일에는 치열한 모습을 보여요. 제 경우엔, 장편소설 쓰는 게 그 하나입니다. 전에는 이것저것 관심이 많고 귀가 얇아 기웃기웃했는데 나이 들수록 그런 부분이 많이 정리됐어요.”
그의 삶이 간결해졌다는 건 책의 작가 소개란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전 책들만 하더라도 대표 작품과 이력들로 빼곡했던 글귀들이 ‘소설가 김탁환’ 단 여섯 자로 단출해진 것. 그의 이름 앞 ‘소설가’라는 단어가 마치 달문의 생애처럼 고고하게 느껴진 순간이다.
오르막을 향했던 삶, 내리막을 고민할 때
소설 속 달문은 “나의 미래를 만나러 간다”며 명창, 고수, 광대 등 여섯 명의 선배 재인(才人)을 찾아 나선다. 달문은 “선배들이 재인으로 산 걸 온통 후회하며 쓸쓸히 떠나게 하긴 싫었다”며 그들에게 자신이 산대놀이로 번 돈을 아낌없이 나누어준다. 세상만사에 초연하리라 여긴 달문 역시 나이 듦에 대한 고민은 있던 터였다.
“달문은 춤꾼인데, 나이 들어 몸이 성치 않으면 춤을 출 수 없잖아요. 선배들처럼 비참하게 늙어갈 수 있으니, 더 예민할 수밖에요. 당시 이름 날리던 재인이라 그 분야에서는 정상에 있었지만, 어떻게 내려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런 점에서 나이 든 작가들의 작품을 읽곤 해요. 그들의 글을 보면 말년에 구력이 더해져 빛나는 통찰의 문장이 있는가 하면, 이전만 못 한 부분도 있거든요. 서글프더라도 늙어서 내가 못하는 것들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때 필요한 게 바로 삶의 지혜라고 봐요.”
소설가로서의 오르내림을 고민하며 충실히 살아가는 그이지만, 20대 후반까지 자신이 소설가가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거쳐 박사과정을 수료하며 10년 가까이 문학을 해오면서도 소설만큼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분야라 단정 지었었다.
“결국 비평가로 등단했는데, 지나 보니 스스로 알겠더라고요.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은 되겠지만, 더 이상은 아니라는 걸요. 그러다 사관학교 가서 교관으로 지내며 소설 한 편을 썼는데, 그 작품을 읽고 누가 편지를 보냈더군요. 소설에 재능이 있으니 꼭 소설가가 되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죠. 그분이 바로 황현산 선생님이에요. 사실 그러고 기회가 없어 잘 만나 뵙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그런 말씀을 하셨죠. ‘김탁환 너를 발견한 사람은 바로 나다’라고요. 그래서인지 황현산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처음 소설가가 됐을 때가 생각나요. 제 인생에 빼놓을 수 없는 분인데, 지금 많이 아프셔서 마음이 좋지 않아요.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이틀 뒤인 8월 8일 우리 시대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의 부고가 들려왔다. 안타깝게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문득 언젠가 ‘왜 소설을 쓰느냐’라는 질문에 “작은 기적을 믿기 때문”이라던 김탁환의 대답이 떠올랐다. 그가 말하는 작은 기적이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독자가 자신이 쓴 소설을 읽고 그의 인생을 찬찬히 돌아보게 됐다는 엽서를 받는 일이다. 그의 바람처럼, 거리로 나온 수많은 아픔을 다독이며 작은 기적을 이뤄갈 김탁환의 소설들을 기대해본다.
요즘, 같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시니어들이다 보니 특유의 냄새를 느낄 때가 많다. 가장 흔한 것이 구취이다. 노인들은 성장기보다 충치가 덜 생긴다고 한다. 충치가 있으면 치과에서 가만 놔두지 않으므로 충치 때문에 생기는 냄새는 아니다. 혹시 잇몸이 약해져서 생기는 치주질환일 수는 있다. 나이가 들면 침샘 분비가 적어져 구취가 되는 경우도 있다.
구강 내의 특정한 문제가 아니더라도 구취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많다고 한다. 육체적 피로, 정신적 스트레스, 생리적 변화 등으로 구취가 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문제는 나이가 들면서 심해진다는 것이다.
노인이 되면 의학적으로는 ‘노넨알데하이드’라는 물질이 쌓여서 냄새가 나게 된다고 한다. 자동차로 얘기하면 불완전 연소로 인한 검은 매연 같은 현상이다.
그밖에 노인 냄새를 복합적으로 구성하는 것을 보면 여러 가지가 있다. 자주 씻지 않거나 입고 있는 옷도 세탁을 자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리적으로도 요실금이나 변실금이 더해지는 경우도 있다.
노인들은 체력이 떨어지면서 땀나는 힘든 일은 안 하려 한다. 운동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노폐물 배출이 안 된다. 땀을 안 흘렸으니 샤워를 안 해도 되고 옷도 매일 세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노인들이 선호하는 무채색의 옷들은 때가 안 보이니 그런 게으름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냄새는 배는 것이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아직도 정장을 선호한다. 그런데 그 양복이라는 것이 새로 산 것이 아니고 평생을 입던 오래된 옷이다. 양복은 세탁비도 비싸니 자주 세탁하기 어렵다. 거기서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이다.
노인들은 수입이 없으므로 집에서 눈치보고 사는 경우가 많다. 매일 빨래 감을 쏟아내기가 미안한 것이다. 어지간하면 그냥 또 입는다. 그래서 자주 보는 노인들은 매번 같은 옷을 입고 나오거나 몇 벌 안 되는 한정된 옷을 입고 나온다.
노인들의 침구에서도 냄새가 밴다는 것이다. 노인 방에 들어가면 나는 특유의 냄새도 체취와 침구에서 나는 냄새가 섞인 겻이다. 요즘처럼 공동 주택에 사는 경우는 구조상 햇빛에 침구를 말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정작 본인은 자신의 냄새를 못 느낀다. 같이 사는 배우자도 으레 그 사람의 고유한 체취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따로 지적을 안 하는 것이다. 어쩌다 온 순진한 손주들이 ‘할아버지 냄새’난다고 지적한다.
필자는 운동을 일상화 하고 있다. 그리고 땀을 흘렸으니 저녁 샤워는 물론 아침 샤워를 중시한다. 밤새 밴 냄새도 씻어버리고 향긋한 비누 냄새를 좋아한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격한 운동을 한다. 마라톤이나 댄스 연습을 격렬하게 하면 땀이 비 오듯 한다. 몸속의 노폐물들이 한꺼번에 다 나가는 듯한 쾌감이 있다.
아침 6시 40분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덜컹덜컹 몸이 흔들린다. 바깥 풍경은 오랜만에 선명히 잘도 보인다. 세련되지 않지만 뭔가 여유롭고 따뜻한 느낌이랄까? 한국 예술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부산포 주모(酒母) 이행자(李幸子·71)씨를 만나러 가는 길. 옛 추억으로 젖어들기에 앞서 느릿느릿 기차 여행이 새삼 낭만적이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들어간 부산포. 작은 낙서, 그림 하나, 스치는 공기까지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다.
부산의 마지막 주모를 만나다
부산 지하철 1호선 중앙역에서 용두산 공원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은 깨끗하고 단정하다. 신식으로 잘 닦인 거리. 오래된 주점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오른쪽으로 난 작은 골목에 釜山浦(부산포)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이곳에 우리나라 예술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주모 이행자씨가 있다. 깡마른 체구에 걸걸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행자씨는 중앙동 바로 옆 동광동에서만 42년째 주모로 살고 있다. 혹자는 이행자씨를 부산의 마지막 주모라고 말한다. 남들 다 떠나갈 때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옛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주막은 현재 부산포 하나다. 의미를 모르면 동네 흔하디흔한 주막, 조금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값진 역사와 예술가의 정이 흐르는 곳, 부산포다.
주막의 분위기는 주모가 잡는다
부산의 중앙동과 남포동 일대는 10여 년 전만 해도 부산의 굵직한 화랑들과 함께 인쇄 골목이 형성돼 있어 문인과 화가들이 넘쳐나는 이른바 예술의 거리였다. 지금은 해운대 일대로 예술 관련 사업이 옮겨가 작가들의 발길이 뜸해진 지 오래다. 외딴섬처럼 덩그러니 남겨진 부산포지만 그 안에는 옛 예술가들의 체취와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낙서 하나하나, 벽에 펜으로 휘갈긴 듯 그린 그림 속 인물은 한국 문단과 화단을 주름잡던 일류 작가군단이다. 매일 문지방이 닳도록 부산포를 오간 문화 예술인만 수백은 될 것 같다. 부산포 주모 이행자씨가 이토록 작가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내 고집대로 한 거지 뭐. (화장) 진하게 하고 나와서 하하 호호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그러니까 손님은 없어. 옛날이야 줄 섰지만. 내 성질이 개떡 같아. 손님들도 내쫓아요. 욕하는 사람, 슬리퍼 신고 오는 사람 다 쫓아내. 슬리퍼는 점심에 밥 먹을 때는 괜찮은데 저녁엔 옛날 어르신들 계시고 이라니까. 분위기도 내가 만들어주는 거지. 그냥 손님들이 만드는 게 아니야. 그래서 뺨때기도 때리고 젊을 때는 말 못해. 마대자루 들고 패지, 물바가지로 퍼붓지. 소문이 났어. 좋게 날 리가 없지.”
베테랑 주모의 애틋한 고객 관리(?)는 바로 어르신들을 제대로 알아보고 보살피는 게 전부였다. 이행자씨가 말하는 그 어르신들이란 1900~1920년생 한국 예술계 전설적 인물이 줄을 잇는다. 독립운동가이자 예술인 먼구름 한형석을 비롯해 오제봉, 김정한, 김종식, 오영재, 천재동, 공초 오상순, 하인두, 시인 구상까지 평생을 살아도 만나 뵙지 못할 귀한 인물들을 주모로서 극진히 맞이했고 술동무로 가시는 날까지 정성을 다해 모셨다. 손님을 가려서 받게 된 것도 문화계 원로 선생님을 모시는 일종의 방법이었다.
“손님들이 이상한 행동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들어왔는데 뭔가 느낌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장사 안 한다고 하고, 소주 보여도 소주 없다고 하고. 보면 알지. 매너가 엉망인 사람이 보인다고. 술 먹고 변할 사람들도 보이고.”
그런데 이행자씨에게는 철칙 하나가 있다. 절대 욕은 안 한다.
“내는 고함은 지르는데 욕은 하지 않아. 근데 누가 나더러 욕쟁이 할머니래. 와? 내가 욕하는 거 봤나. 내가 욕하면 쫓아내는데. 욕하는 사람이 나는 제일로 혐오스럽다. 나도 욕할 줄 알거든. 그런데 안 할 뿐이야.”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
이행자씨는 서른 초반이던 1970년대 말 ‘대구집’으로 문을 열었다. ‘골목집’이란 이름을 지나 1994년 지금의 부산포로 주막 간판을 바꿨지만 주모도 그대로 추억도 그대로다. 그렇다고 마냥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이상신호가 왔다.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믿고 지냈던 사람에게 보증을 서줬다가 건물이고 가게고 순식간에… 30여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것을 한 번에 다 날렸으니 난 어땠겠어.”
며칠씩 잠도 안 자고 하루 종일 담배만 3갑씩 피웠다.
“1세대 선생님들은 동동주하고 맥주하고 타서 ‘동맥’이라고 하시면서 섞어 드셨다 아이가. 그게 맛이 괜찮아. 30~40대부터 그렇게 술을 먹었는데 일 터지고 한 달 내내 그렇게 마셨어. 돈이고 뭐고 다 귀찮고. 술도 안 받는데 계속 그렇게 먹었어. 결국 몸이 고장 난 기지.”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한 달도 안 돼 치아가 빠지기 시작했다. 위암 초기였다. 그때 이후로 술은 끊었지만 담배는 손에서 떼지 못했다. 그렇게 쓰러진 주모 이행자를 위해 부산 예술인들을 주축으로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 판화가 주정이가 주축이 돼 주모 이행자씨를 돕는 특별전을 펼친 것. 그게 바로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2009. 7. 14~8. 31)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른들을 내가 잘 모셨어. 부산포를 살려야 한다 그라셔서 살려주신 거지. 대학에 있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전업 작가들이시고. 정말 십시일반 해서 도와주셨어.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하시던 이두식 선생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작품을 내주셨고.”
이 전시회를 통해서 3000만원이 훨씬 넘는 자금이 모였다. 그래서 현재의 부산포 자리로 옮겨 명맥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 새로운 곳으로 이전해 다시 활기차게 생활을 하지만 몸은 성한 곳이 없다. 예전에는 일하는 사람을 뒀지만 지금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주모 이행자씨의 손을 거친다. 이렇게 한 것이 6년째. 손가락에는 류마티스가 왔고 복숭아뼈 양쪽에 물이 차 추석쯤 병원에 가 치료를 받을 생각이다. 위암 정기검진을 받아야 할 시기가 지났는데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나는 지금 병원에 가면 눕혀서 못 나와. 병원 가면 문 닫아야 해. 그래서 안 간다 아이가. 한 1년 넘었어. 병원에서 전화 오면 ‘괜찮소. 나 아직 빨딱거리고 잘 돌아다니거든’ 이런다(웃음)! 약만 먹고 안 간다.”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좋아하던 산도 다리가 좋지 않아 갈 수 없다. 지리산이고 설악산이고 선생님들과 많이 오르고 종주도 했다.
“그 대신에 용두산 공원은 좀 걸어. 시간 있으면 올라가. 이제 아픈 것도 모르겠어. 이러다 병도 친구 삼아서 함께 같이 있다가 같이 죽자 한다(웃음).”
부산포 주모, 문화계 원로와 어깨를 나란히
“그림 작품 같은 거 잘 보시겠어요?”
이 질문에 피식 웃으면서 짧게 대답한다.
“살다 보면 눈에 보이지 뭐. 세월이 40년인데 좀 안 보이겠어?”
문화계 원로에 대한 얘기를 듣다 보니 주막 주모가 아니라 화랑 관장님과의 대화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이행자씨도 그런 얘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주모가 아니라고.
“많이 배우지. 좋은 얘기를 많이 듣고 해서 가끔 보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도 보여. 자기 스스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시인들한테도 이게 시냐? 편지 썼냐? 그런다(웃음).”
문화계 인사는 물론 방송국, 신문사 등 언론인, 대학 총장, 의사 등등이 주모 이행자씨의 고객이자 친구, 모시는 선생님들이었다.
“여행도 그런 분들이랑 많이 다녔어. 1993년도에 러시아에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러시아 가는 게 쉽지 않을 때잖아. 근데도 갔었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레 을 봤는데 정말 너무 잘 봤어. 진짜 값진 인생 살았다. 돈 주고도 못 사는 삶을 살았어. 결혼? 안 해도 돼. 외로워? 뭣 때문에 외롭노?”
결국 이 특별한 주모는 선생님들의 사랑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고 일평생 결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안 갔어. 그때 당시만 해도 희귀동물 같은 사람이었어. 드레스를 입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 해본 적이 없어.”
행여나 프러포즈를 해오고 연애하자는 자가 있으면 이행자씨한테 걷어차이기 일쑤였다.
“내가 깡패가 됐잖아. 우리 집에 옛날에 왔던 손님들, 어르신들 빼고 내 발로 팔꿈치로 안 차여본 사람이 없다. 어른들 말고는 다 맞았을 거다. 하도 집적거리니까.”
이행자씨는 어떤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매일 찾아오는 어르신과 대화하고 이야기 듣는 그 시간을 기다리고 사랑했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대가라는 사람들이랑 대화라도 하려면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신경 써야겠어. 아닌데도 맞다고 해줘야 하고 달래줘야지. 문인들이 아주 잘 삐진다. 붙어 싸우다 술 먹으면 또 화해하고 그랬다.”
당시에는 거의 가족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르신들이 한창 부산포에 드나들 때는 젊은 사람들은 들어와 앉을 자리도 없었다.
“그 시절에는 흥이 나서 놀다 누군가 지명하면 무조건 노래를 불러야 했어. 근데 절대로 젓가락 숟가락 못 두드리게 했다. 여기는 그냥 막걸리집 아니라고 절대 못하게 했다. 끝나면 박수치고 흥 나면 소리 안 나게 박수쳤지.”
이렇게 부산포 안을 가득 채우는 작가들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정확하게 돈을 받을 수 없을 때였다. 가난한 시절 라면값도 없던 분들이 많았다.
“대학교수도 있었지만 작품 활동만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감자 주고 우거지 주고 그럼 술 마시고 잡숫고 그냥 가셨다. 어른들이라 외상값 장부도 없었다.”
그냥 술만 팔면 될 텐데 스스로 예술가의 가치를 흠뻑 느꼈기에 정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르다고 했잖아. 요즘은 택도 없다(웃음). 주는 만큼 받아야지.”
주막이니까 주모로 불러야지
지금도 주모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모로 불리는 건 싫다. 누군가 무심코 그렇게 부르면 “내가 느그 이모도 아닌데 왜 그리 부르노!” 하며 부산 사투리가 강하게 터져 나온다.
주모라고 불리는 게 그럼 왜 좋을까?
“옛날에 동동주 팔고 그러던 곳을 주막이라고 했잖아? 어르신들이 있었던 곳. 그러니까 주모지. 원래 여기 세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거 하나 남았어. 강나루는 시인 마누라가 하는 곳이었는데 거기도 어려울 때 시인들이 시화전도 열어주고 했던 곳이야.”
그렇다고 모두가 주모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부산 사진의 역사라고 불리는 김탁돈(동아대 전 신문방송학과 교수) 정도는 돼야 부를 수 있단다.
“내가 올해 일흔두 살이니까 한 10년 더 살면 될까?”
갑작스러웠다. 아직도 젊고 생생한 주모의 입에서 그리움이 느껴졌다.
“어른들 참 많이 모셨지. 부산 세관장, TBC 사장, 대학 총장, 회장. 안 온 사람이 없어. 근데 이제 다 돌아가셨다. 나도 선생님들 따라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네. 지금도 선생님들 모여서 동맥 한잔씩들 하시겠지?”
부산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아직 물색 중이라고 했다. 술 팔고 밥 팔면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이 자리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정말 부산포를 다 접고 나면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옛날에 건물 있을 때는 시골 들어가 살려고 했는데 그건 안 되겠고. 슬슬 산책하고 살 수 있을까 몰라. 성질이 급해서 뭘 할는지. 뭐 일하면서 살겠지.”
쑥은 들국화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서 ‘모든 풀의 왕초’란 닉네임을 달고 있다. 히로시마 원폭 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식물이지만 좀처럼 자신을 앞세우지도 않고 빈터나 길가 논두렁 밭두렁 산속 아무데서나 낮은 키로 ‘쑥쑥’ 자라나 사람에게 제 몸을 보시한다. ‘쑥’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쑥도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종으로 진화해 산쑥, 들쑥, 덤불쑥, 참쑥, 물쑥 등 40여종이 한반도에 분포해 있다고 한다. 특히 강화 개똥쑥은 암 치료에 효과가 있다하여 몸값도 제법이다. 암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내 남편도 치료 중 그 쑥을 달여 마시곤했다.
쑥은 한국전쟁 전후 구황식품 중 으뜸이었다. 혹독한 겨울 추위가 풀리기 시작하면 겨우내 웅크렸던 뿌리들이 솜털 보송보송한 쑥잎을 쑥쑥 밀어올린다. 아득한 보릿고개를 넘어야할 때 기다렸다는 듯 언니 엄마들은 논두렁 밭두렁에 파릇파릇 자라난 쑥을 뜯어다가 보릿겨, 밀기울 등과 반죽하여 아무렇게나 반데기를 만들어 쪄서 간식이 아닌 주식으로 연명하던 기억이 내 해마에 ‘보릿고개’란 압축 파일로 저장되어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떡이 쑥개떡이다. 쑥개떡도 못 먹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보릿고개를 유령처럼 떠돌기도 해서 그 유령을 만날까봐 안채와 떨어져 있던 화장실에 갈 때도 밤이면 어른들을 동행하곤 했다.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처럼 먹거리가 풍성한 세상에서 자란 젊은이들은 마치 단군설화 속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어 환웅과 결혼하고 단군을 낳았다는 신화쯤으로 여길듯하다.
시간이 흘러 쑥개떡이 각광 받는 웰빙 식품이 되었다. 맵쌀가루와 찹쌀가루를 섞은 데다 데쳐서 말려 빻은 쑥을 섞고 달작지근하게 익반죽해서 강낭콩을 켜켜이 박아 쪄 놓으면 쫄깃하고 향이 좋아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고 쑥의 따뜻한 성분과 풍부한 섬유질 때문에 배탈이 나지 않는다. 특히 부인과 병인 만성 허리 어깨 결림, 냉, 대하증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쑥떡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구정무렵이면 올케언니가 볶은 콩가루와 찹쌀로 만든 쑥떡을 한 넙데기씩 보내 주시곤했다. 출출할 때면 한번 먹을 만큼 렌지에 돌려서 콩가루 묻혀 먹는 맛이란 일품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올케언니가 연로하셔서 그러한 노동이 불가능한 탓에 그 맛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늘 약한 허리 핑계로 엎드린 일을 회피하던 내가 2년 전 여름 한철 보양식을 마련하겠다는 기대감으로 지인들을 따라 쑥을 캐러 갔다. 시누이가 주말에 내려가 농사를 짓는 강화도 외포리 뚝방에 해풍 먹고 자란 쑥들이 순한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농약이 닿지 않아 쑥 체취의 장소로서 이만한 곳이 없으리라. 북녘땅이 가까운탓에 들려오는 총소리를 삭히느라 그랬는지 고개가 비틀어진 놈도 있어 바로 세워 놓고, 뚝방의 해면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겨 “칠년 묵은 병에서 삼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맹자의 말을 되새김질하면서 경사를 오르락내리락 쑥을 뜯었다. 지인들이 한 웅큼씩 보태주기도 해서 배낭의 배가 불룩해졌다. 어릴 적 동네 언니들 따라 쑥을 캐 본 후로 처음인지라 자뭇 설레는 마음으로 직접 쑥개떡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쌀을 불리고 쑥을 씻었다. 아랫집 아주머니의 조언을 받아 생 쑥과 불린 쌀을 방앗간에 가지고 갔더니 쑥 빠는 삯이 두 배가 들어갔다. 생 쑥을 빠러 온 사람은 처음이라며 방앗간 주인장으로부터 핀잔을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생 쑥은 쓴맛이 그대로 남아있어 쑥개떡을 해도 써서 먹기가 거북하단다. 생 쑥만이 떡을 파랗게 할 것이란 고정관념이 나의 첫 작품을 망치게 한 셈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쌀가루와 빻은 생 쑥을 익반죽해서 손바닥만 하게 넙데기를 만들어 냉동실에 차곡차곡 쟁여 놓으니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한 개씩 찜기에 쪄서 먹은 나만의 점심 먹거리, 내 60조의 세포막을 뚫고 쑥쑥 일어서는 쌉쌀한 향기에 당시 개보다 더 잔인하게 한반도를 짓밟던 메르스도 비켜갔다.
*송시월 시인은…
1945년 전남 고흥출생. 1997년 월간 등단.
시집으로 (2015년 문광부 추천 세종 우수도서 선정)이 있다.
제 1회 푸른시학상 수상 계간 편집위원.
매년 여름이면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 바로 땀이다. 땀을 흘려도 티가 잘 나지 않는 검은색 티셔츠를 입어봤지만 냄새까지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애써 향수를 뿌려보지만 땀 냄새와 섞인 향수는 더 역한 냄새가 날 뿐이다. 올여름 땀 걱정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제품을 모아봤다.
강동성심병원 피부과 김상석 교수 각 브랜드 제공
STEP 01>데오도란트
겨드랑이에 집중된 아포크린샘에서 분비되는 땀에는 지방 성분이 많다. 심지어 피부 박테리아가 이를 분해하면서 냄새를 풍기게 된다. 데오도란트(Deodorant)는 땀 냄새를 제거, 억제하는 제품이다. 스프레이형, 롤 온형, 스틱형, 티슈형, 크림형 등 다양한 유형 중 자신에게 맞는 제품을 선택해 사용할 수 있다.
STEP 02>드라이샴푸
여름철, 땀 때문에 떡 지고 축 처지는 모발이 걱정이라면 드라이샴푸를 써보자. 머리에 물을 묻히지 않고도 간단하게 기름기와 냄새를 없애준다. 쌀이나 옥수수 등 식물과 곡물 추출 파우더가 두피와 모발의 피지와 노폐물을 흡착시켜주는 원리다. 뿌리기만 해도 유분과 불쾌한 냄새를 잡아주고 모발의 볼륨을 살려 스타일링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STEP 03>바디 스프레이
외출하고 나면 줄줄 흐르는 땀. 닦는다 해도 몸에 남은 땀 냄새는 어쩔 수 없다. 냄새를 없애려고 독한 향수를 뿌려댄다면 냄새가 섞여 오히려 불쾌지수만 상승한다. 바디 스프레이/바디 미스트는 땀 냄새를 억제하는 동시에 은은한 향기를 남겨 사무실이나 실내에서 오랜 시간 있을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STEP 04>기타
올해도 곧 다가올 폭염을 대비해 쉽게 체온을 낮춰줄 다양한 아이디어 상품이 나오고 있다. 휴대용 선풍기, 붙이는 쿨팩 등 휴대하기 간편한 상품부터 쿨 매트, 얼음주머니처럼 집 안에서도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아이템을 소개한다.
Dr. said 젊었을 때와 다르게 갑자기 땀이 나지 않는 게 정상일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피부 노화도 진행됩니다. 또 노화된 피부의 장벽기능으로 땀 분비 및 미세순환이 감소됩니다. 이로 인해 피부건조증, 피부가려움증 등이 유발될 수 있습니다. 피부건조를 개선하려면 꾸준히 보습제를 사용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Dr. said 땀이 너무 많이 나거나 액취증으로 고생하는 시니어가 받을 수 있는 치료는 무엇일까?
피하지방층에 존재하는 땀샘의 분비물이 혐기성 세균에 의해 분해되면서 체취가 발생하는데 이를 액취증이라고 합니다. 비수술적 방법으로는 국소 약물요법, 보톡스 병변 내 주사법, 이온삼투 요법 등이 있으나 대부분 효과가 일시적입니다. 수술적 방법은 외과적 절제술, 초음파 지방흡입술, 지방흡입술, 전기소작술 등이 있습니다.
‘몽골’ 하면 내 머리엔 초원과 말이 떠오른다.
요즘이 그렇다.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동산과 구릉에는 긴 겨울을 이겨낸 풀들의 환호성이 온갖 색으로 피어나고 있다. 그 꽃의 색과 들풀의 향기는 그 동산 안으로 들어가 본 사람만이 안다. 멀리 소문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제일 좋은 방법은 말을 타고 들어가 보는 것이다. 몽골의 부드러운 구릉을 거닐고, 개울을 건너는 데는 말 이상 좋은 게 없다. 말 위에서 내려다보는 풀밭은 그 색과 향기로 어지럽다. 사륜구동차로 언덕을 올라 원하는 들판 가운데 서서 사람 키 높이로 사방을 둘러볼 수도 있지만, 원하는 곳으로 말을 몰아 말 등에 앉아 느끼는 각도와는 사뭇 다르다. 수시로 일렁이는 바람에 묻어오는 허브 향이 감지되면 나도 모르게 그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리게 된다.
물론 몽골에도 깊은 숲과 높은 산이 많지만, 지금 얘기하는 몽골 초원과 연결된 부드러운 산에는 대부분 땅바닥을 기는 발목 높이의 풀과 꽃들이 땅을 촘촘히 덮는다. 가끔 키 큰 풀이 눈에 띄지만 커봐야 무릎을 넘진 않으니 두세 살배기 아기와 손잡고 걷기에도 아무 무리가 없는 꽃동산이다. 평화 그 자체가 가득 전해진다. 더구나 조금만 들어가면 주위에 아무도 없다. 초록 잎에 적당한 높이의 색과 모양의 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다. 저절로 입에서 새어 나오는 감탄사와 신음을 막을 수 없다. 견디지 못하고 말 세우기를 여러 번 되풀이하다 결국 말에서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말 등에서 덩어리 덩어리로 보기 아까운 군락으로 피어 있는 가냘프고 부드러운 녀석들을 만나면 어쩔 수 없다.
초원에 들어서면 꽃은 작고 시간은 많다. 지금 몽골의 초원은 어디라도 바닥이 깨끗해 무릎을 꿇을 수 있고, 엎드릴 수도 있다. 흙이 옷에 묻지 않을 정도다. 가까이 볼수록 체취가 느껴진다. 내려다볼 때와 눈높이를 맞추었을 때의 모습 차이만큼 심장이 귀 앞에서 뛴다. 사진을 하며 알게 된 이 땅에 어울리는 말이 있다.
“내 몸을 낮추니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 땅의 주인은 이 땅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입니다”
거기에서 조금 더 들어가고 싶다.
“꽃을 본다는 것은 세상을 보고 하늘을 본다는 것이다. 꽃을 오래 본다는 것은 우주를 가까이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꽃에는 같은 꽃이라 해도 비교되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기에 바람이 불면 제각기 언제라도 흔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모두 하나같이 당당하다. 아무리 작은 꽃도 우연히 핀 것은 없다. 만약 저 작은 한 송이가 없었다면 이 우주는 그만큼 완성되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그렇게 꽃은 구체적이지 않은 추상이다. 추상의 끝자리인 바람과 냄새에 어질병이 인다. 말에 올라타 ‘추~’ 바람 소리를 내며 튼실한 말 엉덩이를 때린다.
말을 달리게 할 때는 어지러움을 견딜 수 없을 때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색과 향을 맡기 위해 잠시 바람을 쐬는 공간이 시작된다. 어느 만큼의 속도가 지나면서 눈썹이 느껴지며 말과 바람을 탄다. 귀에는 바람을 넘어서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며 후끈한 열기가 안장으로부터 올라온다. 말은 더 달리려 한다. 그때 능선 오르막길로 몰면 말의 거친 숨소리와 땀으로 젖어드는 공기가 느껴진다. 호흡을 조절하며 올라선 능선 꼭대기에 서서 바라보는 초원의 하늘과 구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겨우 말 하나의 위치만큼 높아졌을 뿐인데 그 풍광은 많이 다르다.
이날도 역시 쾌청하고 한낮은 31도의 무더운 날씨였다. 미리 알아봤던 여행 내내 흐리고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틀려서 너무나 고마웠다. 아침식사는 일본 가정식을 택했다. 김치 없이 하는 식사가 심심했지만 그래도 깔끔한 아침상을 받았다. 실이 죽죽 늘어나는 낫또를 보고 손녀가 거미줄 같다며 웃었다.
스케줄은 아기들을 위해 ‘해양 박 공원’에서 ‘오키짱 쇼(돌고래 쇼)’를 관람하고 ‘추라우미’ 수족관에서 커다란 고래상어를 보기로 했다. 사실 필자는 돌고래 쇼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살아야 할 돌고래를 훈련시켜 사람들 구경거리로 만든다는 게 마음 아프다. 돌고래는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이런 쇼는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아기들이 좋아한다니 어쩔 수 없이 관람하기로 했다.
‘해양 박 공원’에 가는 동안 점심시간이 되어 북부에 있는 100년 전통을 가진 음식점 ‘우후아(대가)’에 들렀다. 길 옆 숲속 깊은 곳에 자리한 고풍스러운 이 음식점은 규모가 매우 컸으며 마당이나 안쪽 어디에든 크고 작은 모습의 다양한 ‘시사’가 이곳을 지키겠다는 듯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구(흑돼지)구이 정식, 아구 우동, 돈가스 정식 등의 메뉴가 있는 정통 일본식 집이었다. 검은색 목조건물인 이 음식점은 마룻바닥이 넓은 대청으로 되어 있었고 2층으로 오르내리는 좁은 나무 계단이 아기자기했다. 곳곳에 숨어 있는 작은 다다미방도 흥미로워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폭포가 흘러내리며 자연의 운치를 물씬 풍기는 일본식 구조의 집이었다. 이제까지 깔끔한 휴양지만 보았다면 이곳은 일본의 체취가 느껴지는 정감 넘치는 곳이어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우후아’에서 점심을 마치고 ‘추라우미’ 수족관이 있는 ‘해양박 공원’으로 갔는데 규모가 엄청났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 속에 유모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걷느라 땀깨나 흘렸다. 평일인데도 우리나라 제주도 같은 관광지여서 그런지 일본 사람들도 많았다. 돌고래가 안쓰럽긴 해도 손녀 손자를 안고 손뼉을 치며 쇼를 관람했다.
돌고래 쇼가 끝난 후 추라우미 수족관에 가니 지인 한 분이 생각났다. 코엑스 아쿠아리움 부사장이신 지인은 코엑스 수족관을 직접 설계하셨는데 아쿠아리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신 분이다. 규모는 비슷했다. 코엑스 아쿠아리움이 수만 마리 정어리 떼의 군무가 멋지다면 이곳 ‘추라우미’는 거대한 고래상어가 놀라웠다.
날씨가 너무 더워 좀 지쳤을 때 저녁식사로 ‘플리퍼’라는 유명 음식점에서 스테이크를 먹는다고 해서 기운이 번쩍 났다. 역시 여행은 식도락이 빠질 수 없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우리 나이가 되면 가장 맛있는 밥은 남이 해주는 밥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여행 동안 손 하나 까딱 않고 맛있는 음식을 매일 먹으니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숙소에 돌아와 아기들을 재운 후 아들과 며느리가 근처 ‘이자카야’에서 술 한잔 하고 오겠다면서 나갔다. 다정하게 나가는 모습에 나까지 덩달아 즐겁고 흐뭇했다.
한 잔의 와인을 따르자.
그리고 잠시 와인이 전해 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여유와 낭만을 가져 보자. 1년 내내 훌륭한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절대 필요조건인 최상의 포도를 생산하려 땀을 쏟으며 온갖 정성을 다한 농부의 숨결이 서사시처럼 짠하게 전해 온다. (포도밭) 포도가 충분히 땅의 기력과 태양의 따스함을 받으며 당도와 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인간의 주조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최고 품질의 포도가 없으면 훌륭한 와인은 절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만큼 와인은 자연의 산물이자 선물이다. 여기에다 인간의 간단없는 노력이 첨가된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어우러져 연주하는 합주곡에 한 번쯤 겸손한 마음으로 귀 기울여 봄이 어떨까? 모든 것이 바쁘고 팍팍하게 돌아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남다르고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다시 한 잔의 와인을 따르자
그리고 잠시 숨을 돌리자. 그 한 잔의 와인 속에는 오랜 인간의 역사와 문화가 비밀스러운 코드처럼 속삭이고 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와는 상관없는 서양의 역사와 문화라고 치부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역사도 문화도 새롭고 낮선 것들이 서로 만나고 상충하며 상호 보완적으로 발전하는 것 아니겠는가! 각자의 경험과 상상에 따라 무수한 얘기들이 들려올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상징되는 와인, 최후의 만찬에 예수가 제자들과 나누어 마셨던 와인, 방주 이후 처음으로 포도나무를 심고 와인을 주조해 무척이나 즐겨 마시며 900살이 넘도록 장수한 노아, 그리스의 밤 와인 향연이었던 심포지엄, 로마의 광란적인 ‘바카날레’, 와인의 주신인 디오니소스, 루이 16세가 단두대로 끌려가기 전에 마셨던 마지막 와인, 프랑스혁명 당시 넘쳐났던 혁명의 와인, 나폴레옹이 애호했던 샹베르텡, 아비뇽 유수 이후로 교황의 와인이 된 샤토네프 뒤파프 등등.
한 잔의 와인에는 지난날의 무수한 이야기와 사건들이 담겨 있다. 조금 지나친 표현일지 모르지만, 와인은 서구 문명의 중요한 한 축이다. 따라서 와인은 서구 문명이란 거대한 곳간을 열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열쇠가 된다고 믿는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와인을 취감을 위한 단순한 알코올로 마시는 데 그치지 말고 와인이 수천 년 동안 간직해 온 인간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가며 음미해 보면 어떨까?
다시 한 잔의 와인을 따르자
그리고 와인이 발산하는 미묘한 색깔에 눈길을 멈추며, 잠시 환상에 젖어 보자. 레드 와인의 경우 가장자리가 보라색을 띠는 검붉은 빨강에서 체리 빛이 도는 옅은 빨강까지 그 느낌이 다양하고 현란하다. 화이트는 잔의 가장자리에 초록색을 띠는 옅은 노랑에서 짚 색을 거쳐 황금의 짙은 노랑까지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 로제는 옅고 투명한 빨강에서 잿빛이 감도는 분홍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미각을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샹파뉴라면 쉼 없이 치솟아 오르는 거품의 윤무를 음미해 보자. 몸의 일부가 간지러운 듯한, 아니면 가벼워지는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거품이 잠자는 우리의 여러 감각을 깨우는 느낌에 젖어 보자. 그리고 색상의 짙고 옅음과 투명함을 눈여겨 살펴보자.
다시 한 잔의 와인을 따르자.
당연하지만 잔은 3분의 1이상을 채우지 말자. 황홀한 향들이 잔의 나머지 공간에서 자유롭게 머무를 수 있도록. 이제 천천히 코로 잔을 옮겨 깊숙이 들이마셔 보자.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고 와인이 발산하는 향에 매료되어 보자. 갓난아기가 엄마의 젖무덤을 찾아 젖꼭지를 빠는 것은 본능이지만, 그 본능을 인도하는 것이 바로 냄새다. 엄마의 고유한 체취가 갓난아기에게는 유일한 등대인 것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맡아온 여러 향들에 대한 추억을 되새겨 보자. 그리고 과일 향, 꽃 향, 미네랄 향, 동물 향 그리고 때로는 화약 향까지 다양한 와인 향의 팔레트를 느껴 보자. 이런 과정에서 기억의 지층 깊은 곳에 숨겨 있던 어떤 기억들이 문득 기억의 표면 위로 떠오를지도 모른다.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다시 한 번 더 향을 맡아보자.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던, 기화성이 덜한 미세하고 미묘한 향들이 미각을 자극할 것이다.
잠시 얘기를 돌려보자. 쟝-피에르 빌램(Jean-Pierre Willem)이라는 프랑스 의사가 있다. 가봉에서 슈바르츠 박사의 마지막 조수 생활을 했으며,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의사로서 가장 많이 활동해 기네스북에도 오른 사람이다. 지금은 ‘맨발의 의사회’를 창설해 가난한 국가의 의료봉사를 지원하고 있다. 몇 년 전에 한국을 다녀가기도 했다. 특히 향 치료(aroma-therapy)에 관한 저술을 많이 했으며, 이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이기도 하다. 그는 나에게 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을 들려주며, 그곳에서는 정신 질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향을 이용한다고 했다. 덧붙여 향은 인간의 뇌에 바로 작용을 하기에 가장 심오한 치료법이라고도 했다. 프랑스의 일부 병원에서 환자의 고통을 줄여주고 치료의 효능을 높이기 위해 향, 특히 바닐라 향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미처 우리가 깨닫고 있지 못하지만 향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을, 그리고 와인은 향의 정원이란 점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에 잠시 우회해 보았다.
자, 이제 다시 와인을 한 잔 따르자d
그리고 한 모금 입 안에 머금어 보자. 정신을 가다듬고 보물찾기라도 하듯 와인이 간직한 신비의 베일을 한 겹 한 겹 벗겨 보려 노력하자. 삼키기 전에 와인이 전해 주는 다양한 맛과 질감을 최대한 여유롭게 즐기자. 벨벳이나 실크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것도 있을 테고, 거친 타닌이나 높은 산도로 까칠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미래로 생각의 물꼬를 터 보자. 방금 마신 이 와인이 1년, 2년, 3년… 10년 후에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그렇게 세월이 지난 후, 나는 그리고 우리는 또 어떻게 변해 있을까? 훌륭한 와인처럼 시간과 더불어 보다 성숙하고 깊이와 조화를 더한 멋있는 사람으로 발전해 있을까? 아니면 하찮은 와인처럼 쇠약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이제 와인에 대한 총체적인 느낌을 솔직한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 보자. ‘이 와인 참 괜찮네요’ ‘마시기에 편한 훌륭한 와인이네요’ 정도로도 충분하다. 이제는 더 이상 와인을 잔에 따라야 할 당위성 혹은 필요성은 없다. 이미 마실 만큼 마시지 않았나? 분위기와 즐거움을 위해 계속하려면 그렇게 하시라.
끝으로 와인의 속삭임에 다시 한 번 귀 기울여 보자. 와인은 우리에게 속삭인다. “난 오직 당신의 즐거움을 위해 태어났어요. 그 즐거움은 좋은 사람들과 나누면 나눌수록 커져요. 즐거움이 커지려면 가능한 한 과음은 피하세요. 특히 다른 술을 잔뜩 마시고 절 맨 마지막에 마시는 것은 모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