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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볕 따라 충청도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
- 고요히 혼자 떠나 볼 수 있는 때다. 물론 둘이, 여럿이도 괜찮다. 온몸에 한기가 엄습하고 찬 이슬이 피부에 촉촉이 느껴지는 저수지의 새벽이다. 일출 이전의 어둠 속에 서서 물체를 확인하는 시간이 주는 혼자만의 충만함, 여럿이 함께 있다 해도 이럴 때는 혼자가 된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괴산의 문광저수지에 도착한 것은 새벽 여섯 시가 될 무렵이었다. 동트기 전 어스름 새벽안개의 정적을 느끼며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근처 자동차에서 커피를 꺼내 마시던 분들이 거리낌 없이 한 잔 건네 온다. 따끈한 차 한 잔의 고마움이 더 따스히 온몸에 스민다. 그 동네 사는데 이렇게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물안개가 신비할 때면 자주 나온다고 했다. 보온병에 커피 가득 담아서 나오는 그들의 새벽 나들이가 부럽고 순수하게 차 한 잔 나누어주는 인심이 고맙다. 저수지의 어둠이 조금씩 걷히고 낚시꾼들의 수상 좌대의 빨간 지붕들이 이쁜 반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꽂아놓은 듯한 고목들의 무수한 반영들이 저수지의 파문에 아른거리며 비구상 그림을 연상시킨다. 차츰 은행나무길도 노란 색감을 자랑하고 가끔 지나가는 차량들의 바퀴 사이로 은행잎이 회오리치듯 날린다. 마침 그 지역 사진작가협회 회원께서 나와 사진 찍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고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시어 셔터를 누르는 즐거움이 더 컸다. 그리고 괴산만의 맛난 음식점으로 이끌어서 정갈한 나물반찬으로 시골 아침밥을 먹었다. 그런데 어딜 가나 각자 부담이 확실한데 그분께서 굳이 식사비를 계산하신다. 부담을 드릴 수 없어서 드리는 돈을 한사코 받지 않아 그분의 트렁크에 선물을 실어드렸다. 그리고는 또 다른 멋진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안내도 받는 멋진 수확에 감사할 따름이다. 연로하시지만 인자한 모습으로 차분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는 그분의 순박하고 선한 마음씨가 훈훈하다. 어차피 충청북도 지역에 왔으니 대청호를 들릴 일이다. 대청호는 넓다. 충북 청주 옥천, 보은은 물론이고 대전도 걸쳐져 있어서 대청호 오 백 리 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호수 주변에 작약이 필 때도 있고 자연의 풍광이 시시때때로 다르거나 위치에 따라 풍경이 다른 몇 군데가 있다. 현재 6구간까지의 길이 있어서 가을을 맛보고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이번에는 가을바람에 어울리는 갈대습지를 찾았다. 호숫가의 갈대가 반짝이며 바람에 일렁인다. 갈대가 배경이 되어주는 가을호수다. 거기서 조금 더 내려가니 호수를 중심으로 넓은 잔디밭이 있었고 한가로이 벤치가 누군가를 기다린다. 천천히 거닐며 호수에 풍덩 빠져있는 푸른 가을 하늘의 반영에 감탄했다. 그때 벤치에 조용히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두 여자분이 "우리 둘 모습 좀 찍어주실래요?" 하며 휴대폰을 내밀기에 가을 풍경에 잘 어울리도록 구도를 잡아 찍어줬다. 그리고 앞모습뿐 아니라 “뒷모습의 분위기가 더 좋아서 한 장 더 찍어드릴게요” 했더니, "어머, 고맙습니다. 우리 둘이 지금 환갑 놀이하는 거예요." 하면서 따뜻한 연륜의 미소를 보여준다. 갈대와 가을 하늘이 넓게 펼쳐진 호숫가 벤치에 앉아 친구와 살아온 시간을 자축하는 모습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환갑이나 무슨 기념일이면 해외로 여행을 떠나거나 멋들어진 잔치를 했다는 말들을 듣기도 하는데 이분들의 모습이 특별하고 이뻐서 몇 번씩 뒤돌아보곤 했다. 아름다운 정경이 아름다운 가을을 만들어 준다. 가을바람 따라 이름 모를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온 힐링의 시간을 더듬으며 그 분들처럼 따뜻한 차 한 잔이나 미소를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잘 나이 먹어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세상은 흉흉한 뉴스가 연일 나오는데 가을은 이렇게 눈치 없이 이쁘기만 하다.
- 2017-11-03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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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부의 땀 배인 흙과 땅을 만나는 곳, 농민문학기념관
- 평범한 문학관을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에 위치한 이 작은 문학관은 지자체나 정부의 지원을 받는 안정된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문학관과는 완전히 다르다. 소설가 이동희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농민문학기념관은 그의 소장품들과 사유물 그리고 농민문학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번듯한 입구나 잘 차려 입은 안내인은 없지만 농민문학이 표현하고자 하는 삶의 치열함이 느껴진다. 이곳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따라 누구에게는 훌륭한 박물관이 되기도 하고, 누구에게는 학교 또는 도서관이 되기도 한다. 둘러보니 농민문학을 이야기할 장소로 여기만 한 곳이 있을까 싶다. 전형적인 농촌마을. 당연히 대중교통을 이용한 방문은 불편하다. 영동과 물한을 왕복하는 버스가 문학관 앞 노천리에 서지만 하루 다섯 번만 운행된다. 다행히 고속도로가 멀지 않아 경부고속도로 황간IC로 나오면 차로 20분 거리다. 과거의 흔적만 남은 마을 앞 가게 터를 지나 골목으로 좀 걸어 들어가자 마을회관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니 농민문학기념관 앞이다. 관장이자 창립자인 소설가 이동희의 사택을 겸한 곳이기 때문에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가정집과 구분하기 힘들다. 마당에는 작은 텃밭까지 있다. 민초의 삶 다룬 농민문학 이곳을 방문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농민문학에 대해서다. 농민문학에 대한 정의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어왔다.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시작됐던 1930년대 초에는 일종의 노동자문학의 하위 개념으로 빈농을 계몽해 사회주의 사상을 따르도록 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이후 농촌의 자연이나 지방색, 농민의 생활을 그린 문학으로 변화해왔다. 대표적인 농민문학으로 손꼽히는 작품은 이광수(李光洙)의 , 이기영(李箕永)의 을 필두로, 이무영(李無影)의 ·, 김동리(金東里)의 등이다. 이동희 관장은 농민문학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4차 산업시대에 접어든 농촌은 과거와 많이 바뀌었지만 땅과 흙은 변한 것이 없어요. 농민에게는 쌀이 떨어지고 보리도 나지 않는 절량기를 버텨온 정신이 있어요. 흙의 마음 말이에요. 농민문학은 그것을 표현하고 추구하는 문학입니다. 밭 갈고 논매는 이야기보다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직면해야 하는 삶의 이야기가 소재가 됩니다.” 소설가 이동희 일생의 자료 모아놔 농민문학기념관이 설립된 것은 2005년 2월 10일. 문학관 설립에는 이동희 관장의 스승인 소설가 이무영을 기념하기 위한 취지도 있다. 이동희 관장은 문학 지망생 시절 단국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하면서 이무영 교수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그의 가르침을 통해 소설가로 활동하게 되었고, 단국대학교에서 스승의 강의를 이어받아 1978년부터 2003년까지 국문과 교수로 강단에 섰다. 대표작으로는 소설 과 등이 있다. 문학관 설립을 위해 이 관장은 한국전쟁 때 소이탄을 맞아 불탄 옛집 터에 흙벽돌을 쌓기 시작했다. 너와로 지붕을 이어 복원한 생가에 모교 연구실에 있던 책과 자료를 5톤 트럭으로 네댓 번 날라야 했다. 현재 농민문학기념관에는 농민문학 작가인 이무영 선생의 작품을 비롯해 소설가 류승규, 오유권, 박경수, 김용호, 구상, 권웅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영동 지역의 작가 박희선, 박운식, 장지성 등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이 문학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도서는 단행본과 잡지를 포함해 약 5000권 정도다. 여기에는 1930년대 농민문학의 영향을 받은 북한의 책들과 잡지 도 포함되어 있다. 연변문학예술연구소에서 편찬한 , 한글 소설을 출간하는 중국 출판사의 단행본도 전시되어 있다. 이 관장은 이 문학관을 기반으로 한 모임 ‘한국농민문학’을 바탕으로 계간지 도 출간 중이다. 한국농민문학 회원은 약 500명. 1990년에 창간호를 발간해 2017년 여름호까지 통권 102호를 출간했다. 지역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도 해 규모는 작지만 이 문학관을 통해 다양한 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창작교실 ‘농민문학 사랑’을 운영하고 있고, 전원문학 콘서트도 연다. 얼마 전에는 농민문학 4대 작가 이무영, 류승규, 오유권, 박경수의 활동전도 열었다. 때로는 인근에 위치한 매곡초등학교 학생들의 글짓기 사랑방이 되기도 한다. 전교생이 30여 명에 불과한데, 그중 절반가량이 문학관에서 글쓰기를 배운다. 이 관장은 “아이들의 삶의 수양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아이들 반응도 좋다”고 설명한다. 학생들이 관심 있는 책을 선정해 독서 후 토론도 하고 독후감 쓰기, 시·수필·소설에 대한 설명이 수업으로 진행된다. 이 관장의 희망은 문학관 자료들이 필요한 많은 사람에게 쉽게 쓰이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관련 협회와 다른 문학관, 박물관과의 교류를 통해 안목도 넓히고 공부도 많이 하고 있어요. 시골 농촌의 작은 시설이지만 세계적인 문화유산과 호흡하고 있는 셈이죠. 소장품 등록이나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통해 궁벽한 지역의 자료가 중앙으로 연결되도록 하고 싶어요. 또 한 집 한 집 민족의 애환을 지니고 있는 지역 농가를 개발해 마을 전체가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갖게 하는 연구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 관람 정보 주소 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622-3 전화 043-743-5186 관람시간 10:00~17: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명절 관람료 무료
- 2017-10-3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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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이 빚은 조각품, 舊石器人 형상
- 자연의 조화는 언제 보아도 신비스럽다. 사람의 힘과 손놀림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조각이나 그림을 만들어낸다. 그러한 모습을 발견한 순간은 늘 기쁨이고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샘솟는다. 때로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절감한다. 충청북도 단양지역의 천동동굴(충청북도 기념물 제19호) 관람 여행에서 최초로 발견한 구석기인(舊石器人)을 닮은 형상(사진) 또한 그렇다. 이 형상은 동굴 관리기관에서 이미 발견해 놓았거나 다른 사람이 이미 찾은 형상이 아닌 처음 발견이다. 동굴 현장이나 안내 유인물에도 그런 내용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단양지역은 선사 문화의 발상지로서 여러 동굴과 유물들을 만나 볼 수 있는 곳이다. 중기 구석기 시대부터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물들이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남한강 일원에서 발견되고 있고 그 유물들을 “수양개 선사유물 전시관”에서 관람할 수 있다. 석회암이 발달하여 만들어진 동굴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거주 공간이었다고 한다. 동굴 속에서 돌로 ‘주먹 도끼’나 ‘주먹 찌르개’를 만들고 있는 모습의 구석기인을 빼닮은 이 형상은 선사 문화와 연결하여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료임엔 틀림이 없기에 제보하여 활용하도록 할 계획이다. 이 형상은 일반인의 평범한 시각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 즉 앵글을 달리하여 보면 찾을 수 있다. 필자는 사진작가로서 자연이 빚은 형상을 찾아 촬영하기를 좋아하고 실제로 많은 종류의 형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중 일부는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필자는 하나의 피사체를 촬영할 때도 여러 각도와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기를 즐겨 한다. 구석기인의 형상 역시 그런 행동의 결과에서 얻은 사진이다. 카메라로 또 하나의 이야기를 썼다. “세상사는 생각하기 나름이고 보기 나름이다.”라는 말이 사진에서도 적용된다. 다시 보아도 여지없는 구석기인 형상으로 자연이 빚은 조각품이다.
- 2017-06-12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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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근리 사건 재조명한 영화, <작은 연못(A Little Pond)>
- 이상우 감독의 다큐멘터리 전쟁영화다. 한국전쟁 때 미군에 의해 수백 명이 죽은 영동군 노근리 사건을 영화한 것이다. 문성근 등 알려진 배우들도 몇 명 출연했으나 딱히 주연 배우라고 꼽을 만한 사람도 없고 줄거리도 단순한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떼지 못하고 봤는데 그것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필자의 고향이 영동이라 출연 배우들의 말투가 정겨웠다. 1950년 7월, 평화로운 충청북도 황간의 한 작은 마을은 한국전쟁이 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했다. 노인들은 나무 그늘에서 한가로이 장기를 두고 있었고 젊은이들은 논밭에 나가 일을 했을 정도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었다. 초등학교에서는 합창대회 연습이 한창이었다. 그런데 이 평화로운 마을에도 전쟁의 여파가 밀려온다. 미군들이 간간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하늘에는 전투기들도 보였다. 전쟁 초기 북한군에 밀린 미군들이 저지선으로 이 마을을 선정한 것이다. 미군들은 곧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주민들에게 피난을 권한다. 남쪽이 아닌 동네의 깊은 산속으로 피난을 가면 산에 숨어 있는 빨치산들에게 습격을 당할 수 있으니 남쪽으로 피난을 가라고 몰아쳤다. 실제로 필자의 조부모와 동네 어르신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대부분의 주민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지 않고 깊은 산속으로 몸을 피했다고 한다. 이 지역은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줄기로 깊은 산이 많기도 했다. 남쪽으로 피난길에 나선 수백 명의 주민들은 미군 트럭을 보면 길을 비켜주었다. 그런데 하늘을 몇 차례 선회하던 미군 비행기에서 갑자기 긴 피난민들의 행렬로 폭탄과 총알을 쏟아 부었고 주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했다. 피난민 속에 위장한 적군이 섞여 있다는 정보에 의해 사살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노근리 쌍굴 터널로 몸을 피한 피난민들마저 저지선에 있던 보병부대의 사격으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무참하게 살해을 당했다. 기록에 의하면 단 25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 사건은 그간 묻혀 있다가 1999년 AP통신의 최상훈, 찰스 J. 핸리, 마사 멘도자 기자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들읁 노근리 사건에 대한 취재 보도로 2000년 퓰리처상까지 수상했으며 이어서 ‘The Bridge at No Gun Ri’라는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다. 언론의 힘이다. 아쉬운 부분은 당시 피난민이 500여 명이었고 실제 희생자가 300여 명이 넘었다는데 피난민으로 나온 엑스트라 출연은 몇십 명에 불과해서 사실감을 감소시켰다. 그만한 인원 동원이 어려웠다면 컴퓨터 그래픽으로라도 커버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고 본다. ‘작은 연못’이라는 제목도 내용과 동떨어져 영화를 보는 내내 연못을 찾느라고 관심을 가져봤으나 못 찾았다. 굳이 연못이라면 노근리 쌍굴 앞의 웅덩이일지 모른다. 이 영화에 기꺼이 자신의 음악을 쓰게 해준 김민기에게 보답하기 위함이었는지 모른다. ‘작은 연못’은 1993년 김민기의 4집 앨범의 타이틀이다.
- 2017-03-23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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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그 순간] 정유재란 답사, 울산왜성 전투 왜병들에게 왜 비극적이었나
-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의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정유재란 때 울산왜성은 일본군 최전선 보루였다. 위도 상으로는 가장 북쪽이었고, 방위로는 일본과 가까운 동쪽 끝이었다. 일조유사시 언제라도 도망쳐 가기 쉬운 위치였다. 호랑이 같은 조선수군도 없고, 망망대해와 맞닿아 철수작전에 큰 장애가 없는 전략적 요지였다. 그런 지리적 요인에다 왜군 선봉대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본진이어서 울산성은 정유재란 전투 중 손꼽히는 현장이 되었다. 허물어진 성벽만 남은 학성공원에서는 전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성이 무너진 것은 세월의 작용이지, 전투 때문이 아니다. 서울을 떠나 밤늦게 돌아온 울산 나들이에서 그 처참했다는 울산왜성 전투의 흔적은 찾아보지 못했다. 성터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천지개벽 같은 변화에 세월의 두께만 느꼈을 따름이다. 먹을 것이 없어 적병의 시신을 뒤졌다거나, 기갈을 면하려고 제 오줌을 받아 마시고, 말을 잡아 피를 마셨다는 아수라장을 엿볼 단서는 찾아내지 못했다. 울산왜성은 3개 층으로 된 구조다. 해발 25m 지점에 산노마루(三之丸), 조금 위에 니노마루(二之丸), 맨 위에 혼마루(本丸)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석축 일부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큰 돌을 다듬어 경사면에 비스듬히 축대를 쌓은 것이 전형적인 왜성이다. 성문을 들어서면 급하게 방향을 꺾도록 돼 있는 호구(護口)도 그렇다. 기마병이나 보병에게 성이 뚫려도 바로 본성으로 달려갈 수 없도록 여러 굽이를 만들어 속도를 늦추려는 설계다. 호구에서 병력이 주춤거리는 사이 침입자에 대한 공격을 쉽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때 없었을 것은 너무 많았다. 우선 허허벌판이었을 격전지가 지금은 대도시 울산의 도심지가 되었다. 42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너져 내린 성터에 수목과 초개가 우거져 울산성은 야산의 모습으로 변했다. 격전지가 공원으로 변해 울산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가 된 것이 제일 큰 변화일 것이다. 해발 50m 성 마루에 오르면 사방에 보이는 것은 온통 아파트와 빌딩 숲, 그리고 공장들이다. 상전벽해라는 말로는 표현이 한참 미흡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뜬금없이 대중가요 ‘울산 큰 애기’가 떠올랐다. 1960년대 초부터 방방곡곡에 울려퍼진 이 노래 가사가 너무 신기하고 이채롭게 느껴진다. 두 세상을 살고 있는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내 이름은 경상도 울산 큰 애기 / 상냥하고 복스런 울산 큰 애기 / 서울 간 삼돌이가 편지를 보냈는데 / 서울에는 어여쁜 아가씨도 많지만 / 울산이라 큰 애기 제일 좋대나 / 나도야 삼돌이가 제일 좋더라. 반세기 남짓 전 울산은 큰 애기와 삼돌이의 연정이 아름답던 동해안 갯마을이었다는 증언이다. 눈 아래 펼쳐진 풍경과 비교하자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50년 세월의 간격이 이러할진대 420년 세월이야 어떠하랴. 이 노래 가사 2절에는 “성공할 날 손꼽아 기다려만 준다면 좋은 선물 한 아름 안고 온대나”란 소절이 있다. 답답한 시골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성공’을 향해 서울에 간 연인을 다소곳이 기다리면서 선물받을 날을 꿈꾸는 큰 애기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울산성은 차츰 지옥으로 울산왜성 전투가 왜병들에게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성을 빼앗고 이 땅에서 왜를 몰아내지 못한 전투 결과로 보면 분명 조명연합군의 패전이지만, 왜군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그 비극성이 잘 전해져온다.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서쪽 산악지대에서 발원한 태화강은 동쪽으로 곧게 흐르다가 급히 동해로 든다. 그 하구 언저리에 제법 널찍한 들판이 형성되어 까마득한 옛날부터 인간이 터를 잡는 살기 좋은 땅이었다. 들판 한가운데 외로이 솟은 야산에 가토 기요마사는 성을 쌓았다. 급히 자리를 잡았던 탓인지 성안에는 식수가 없었다. 남쪽으로 좀 더 가면 임진년에 쌓은 서생포성이 있는데, 태화강 너머에 진을 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던 걸까. 직산 싸움에서 패하고 도망쳐 내려가다가 잡은 입지라 했다. 조명연합군은 그 성을 둘러싸고 군량과 탄약 등의 보급품과 식수공급 루트를 차단했다. 벌판에 우뚝 고립된 성을 몇 겹으로 둘러싼 조명연합군 포위망에 갇혀 현지조달도 막힌 상황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의 운명적 대결을 그린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소설 에는 당시의 참상이 이렇게 그려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 병사들의 다리는 가느다란 막대처럼 되었고, 그 때문에 각반이 흘러내렸으며, 얼굴은 여위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한다. 물을 찾아 야밤중 성 밖의 우물가에 가보면 우물 안에 시체가 던져져 있어서 물을 먹을 수 없도록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성내의 소와 말은 모두 잡아먹었다. 그것이 동나자 적병의 시체에서 먹을 것을 구했다. 담벼락 흙을 빗물에 풀어 마실 때도 있었다. 두 달이 지나자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울산성은 차츰 지옥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기록이란 한 참전무사가 남긴 ‘조선이야기[朝鮮物語]’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낮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밤이면 우물을 찾아 성을 빠져나오지만 우물마다 돌로 메워졌거나 시체가 썩어가고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태화강 강변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피로 물든 강물이라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지옥과도 같은 울산성에서 기아에 빠진 가토 기요마사의 농성군은 구원군의 손에 간신히 구조되어 한숨을 돌렸다. 4만의 조명연합군은 3만의 일본군을 보고 철수했다. 그들 역시 일본군의 총격으로 상당한 사상자를 냈기 때문이었다. 포위에서 해방된 농성군이지만 양식이 떨어진 그들은 종이를 씹고 담벼락의 흙을 파먹었다고 한다. 기요마사의 수염도 자랄 대로 자랐고, 뺨이 말라서 쑥 들어간 채 구원군 앞에 나섰다.” 4만 병력 조명연합군의 철수 울산성의 참상은 라는 기요마사 문서에도 나온다. “성내의 사기 조상(阻喪)은 정점에 달했다. 식량과 식수가 없어 성병(城兵)은 벽토(壁土)와 종이를 먹었고, 자기 오줌과 군마의 피를 마시는 판이었다.” 이런 극한 상황을 겪은 가토는 훗날 구마모토 성을 지을 때 천수각 다다미에 고구마 잎줄기를 섞어 짜도록 했다. 식수난 경험으로 성내에 우물을 120개나 팠다. 지금도 당시의 우물이 20여 개 남아 있다. 일본 측 기록에 나오듯 4만 병력의 조명연합군은 완공도 되지 않은 평지성을 오래 포위하고도 왜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먼 나라에 와 피를 흘리기 싫었던 명군 장수 양호(楊鎬)와 마귀(麻貴)가 내린 통한의 결정이었다. 35km 남쪽 서생포에서 달려온 왜군 1만3000명에게 배후를 공격당하자 싸워보지도 않고 철수한 것이다. “중국 장수가 군대를 후퇴시키면서 먼저 보병을 내보내고, 스스로 기병을 거느리고 뒤를 막으면서 후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장수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 산 위의 적들이 줄지어 내려와 한꺼번에 사살했는데, 보병 중에 살아 돌아온 자가 많지 않고, 기마병도 죽은 자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갑옷과 투구를 버리고 맨몸으로 탈출하기도 했는데, 아군의 사상자도 많았습니다. 당당했던 대세가 순식간에 꺾이고 다 죽어가던 적이 도리어 흉독한 기세를 멋대로 부렸으니 진실로 통곡할 일입니다.” 에 실린 이 한 줄의 보고서가 역전된 전투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용열한 원군 장수의 결정이 조선 민중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생생한 증거다. 울산왜성은 아직 완공도 안 된 상태였다. 포위작전을 조금만 더 끌었어도 승리는 저절로 굴러들어왔을 것이다. 조명연합군의 첫 공격이 12월 23일이었으니 착공 2개월여도 못 되었을 때였다. 맹렬하게 불화살을 쏘아 일본군의 출진기지였던 규슈 나고야(名護屋)성 임진왜란 박물관에 걸려 있다는 울산성전투도에는 전투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묘사되어 있다. 들판에 홀로 솟아 있는 울산왜성을 조명연합군이 개미떼처럼 둘러싸고 공격을 퍼붓는 장면이다. 전투 중에도 성안에서는 말을 잡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종군승려 케이넨(慶念)의 종군일기 에는 전투 상황이 이렇게 씌어 있다. “아침에 연기가 솟아오르고 대포소리가 연달아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적군이 기습을 해왔다고 한다. 적군은 돌담 밑에서 맹렬하게 불화살을 쏘아댄다. 성안에는 물건들이 수없이 많은데 침구와 의복, 재물과 보석 등을 담은 상자에 불이 붙었다. 타오르는 연기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화재로 많은 무사와 인부들이 타죽었다.” 울산성 건축물 외곽에는 사방으로 삥 둘러 목조회랑이 설치되어 있었다. 바깥쪽으로 작은 창구를 설치해 거기에 총을 걸고 결사적으로 소총을 쏘았다. 수많은 창구에서 불을 뿜는 총격으로 조명연합군에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13일간의 전투에서 피아 1만2000명 가까이 죽었다는 기록이 전투의 참상을 말해준다. 연합군 포위망이 열흘 넘도록 이어지자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 기요마사는 인근의 동료 장수에게 보낸 문서에서 자결의사를 비추기도 했다. 라는 일본 기록물에는 “나는 여기서 할복자살을 할 것이니 당신은 그 성에서 (할복) 하시오”라는 말이 나온다. 케이넨 일기에는 “드디어 물도 식량도 떨어졌다. 더 이상 성을 방어할 수 없게 되었다. 내일은 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밤새 부처님의 자비에 감사드리고 그 마음을 읊는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기요마사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은 인근에 주둔했던 일본군 지원 덕분이다. 왜성을 에워싼 조명연합군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태화강 하구를 봉쇄해 지원병력의 울산 접근을 차단했다. 바닷길로 울산에 온 병력이 격퇴당한 기록도 있고, 육로로 인근 양산에 온 적을 물리친 기록도 있다. 그러나 끝을 보지 못했다. 방심 아니면 포기였을 것이다. 기요마사 지원에는 숙적 유키나가 군대도 동원되었다. 둘은 불구대천지수 사이였지만 상대가 적군에게 함락되는 것만은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마지막 전투 울산왜성 전투는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였다. 너무 혼이 났는지 일본군은 그 뒤로 수성전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몇 달 뒤 히데요시 사망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를 계기로 임진·정유 7년 전쟁은 끝났다. “성주님이 나에게 배를 타라고 하신다. 너무도 기쁘고 도무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성을 내려올 때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렸고,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울산성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간 병사가 남긴 이날의 감회 한마디가 전쟁의 비극을 잘 말해준다. 정유년에 다시 쳐들어온 왜군은 한양을 목표로 진군하다가 충청도 직산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게 패했다. 전열을 가다듬어 남쪽 해안으로 퇴각한 그들은 각 군별로 농성 준비에 들어갔다. 기요마사가 울산에 당도한 것은 그해 10월 말이었다. 기요마사 토벌을 목적으로 경주에 본진을 설영한 조명연합군에 맞서기 위해 기요마사는 태화강 북안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쌓은 서생포성을 두고도 가까운 북쪽에 또 성을 쌓은 것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한양을 다시 도모하려면 태화강 북안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축성에 동원된 병력은 가토의 부장(部將) 구키 히로다카(九鬼廣隆) 등 5개 부대 병력 1만60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 일본에서 차출되어온 일반 농민 등이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케이넨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새벽부터 산에 끌려가 건축자재 벌채에 동원되었는데,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다 감독에게 들키면 목이 잘렸다 한다. 기요마사는 ‘일곱 자루의 창’이라 불린 히데요시 근습(近習) 가운데 주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가신이었다. 입이 무겁고 충직한데다가 무술까지 뛰어났으니, 그만한 자격을 갖춘 사무라이가 없었다. 유키나가는 머리는 좋지만 무(武)가 부족하고, 이시다 산세이(石田三成)는 머리만 뛰어난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주군 히데요시 인척이었다. 기요마사의 어머니는 히데요시 부인과 시누이 올케 사이였다. 히데요시 문하에서 그는 단연코 으뜸가는 사무라이가 되었다. 타고난 체격 조건과 근면성, 주군과의 관계를 의식한 충직성이 그를 모범적인 무사로 만들었을 것이다. 무사로 인정할 수 없는 유키나가에게 조선출진 제1군 장수의 명예를 빼앗긴 그는 사사건건 유키나가와 대립했다. 그러나 우직한 그는 유키나가의 지략을 당하지 못했다. 기요마사는 조선의 왕자 임해군을 인질로 잡은 일과 한국의 호랑이를 다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임금이 몽진한 평안도 방면을 유키나가에게 빼앗기고 함경도 방면을 맡게 되었는데, 뜻하지 않게 조선의 왕자 둘을 인질로 잡았다는 것이다. 함경북도 회령에 피란해 있던 임해군과 순화군은 거기서도 횡포를 멈추지 않았다. 수령을 닦달하고 아랫사람들을 시켜 백성들을 노략질했다. 민심이 극도로 이반되어 있는 터에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이 일어났다. 왕자들의 한심한 작태에 혀를 차던 그는 제일 먼저 두 왕자를 붙잡아 기요마사에게 넘겨버렸다. 그는 호랑이를 사냥해 호피를 히데요시에게 바쳐 신임을 사기도 했다. 일본은 호랑이가 없는 나라였다. 그러니 영물의 상징인 호랑이보다 귀한 선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호랑이 고기가 강정식으로 좋다”는 시의들 말을 들은 히데요시는 고기도 보내라고 지시했다. 기요마사는 내장까지 말려서 바쳤다. 59세에 아들을 얻은 후로 그는 더욱 호랑이고기를 찾았다 한다. 이런 이야기가 기요마사와 호랑이가 엉킨 전설의 연원이다. 지금도 구마모토 토산품에는 어김없이 호랑이 이미지가 들어간다. 축제 때가 아니어도 기요마사가 호랑이를 잡는 모형이 번화가에 장식된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서 유명해졌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수립을 중재한 미국의 요청으로 1954년 일본을 방문해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와 마주앉은 자리였다. “한국에는 호랑이가 많다던데 아직도 많습니까?”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요시다 총리가 이 대통령에게 운을 떼었다. 이 말에 대통령은 “이젠 없습니다.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이 다 잡아먹었습니다” 하고 말을 받았다. 동석했던 김용식 주일공사에 의해 이 말이 전해지자, 재일동포 사회는 통쾌한 반격이라고 크게 반겼다. 물론 국내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기요마사 승자의 영화 히데요시 사후 기요마사는 주군을 배반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편에 섰다. 천하의 패권을 놓고 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 때 유키나가가 히데요시 아들 편에 섰던 것과 너무 대조적인 처신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유키나가가 비참한 최후를 마친 것과 대조적으로 기요마사는 승자의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자신을 길러준 히데요시를 배반한 죄의식 때문이었는지 도쿠가와, 히데요시 양 가문의 화친을 위해 애쓰다가 50세에 세상을 떴다. 그 일을 못마땅해 한 도쿠가와 측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울산 방문은 해군 상륙함(LST) 일출봉호 진수식 참석이 목적이었다. 막강한 기동력과 화력을 갖춘 그런 배가 당시에도 있었다면 울산전투가 그렇게 치욕적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망상에 젖다가 귀경 KTX에서 부족한 잠을 청했다. LST는 없어도 압도적인 병력과 전세의 이점을 살리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워 쉬 잠을 이루지 못했다.
- 2017-02-03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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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철의 야생화] 스산한 가을 향이 강하게 묻어나는 꽃 ‘가는잎향유’!
- 자연에 다가갈수록 오감이 살아난다고 합니다. 만추의 계절 무르익은 오곡백과는 우리의 미각을 자극합니다. 울긋불긋 물든 단풍은 회색의 건물들에 가로막힌 시각을 되살려 줍니다. 깊어가는 가을을 노래하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는 TV와 컴퓨터 등 각종 전자 음향에 지친 청각에 청량한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아침저녁 피부를 스치는 선선한 가을바람은 여름 무더위에 무뎌진 촉각을 곤두서게 합니다. 그리고 저 높은 바위 절벽에서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피어난 ‘가는잎향유’는 그 어떤 허브 식물에 못지않은 강한 자연의 향으로 인공의 냄새에 지치고 둔화한 우리의 후각을 다시 일으켜 줍니다. 가을의 스산함을 포개고 또 포개서 농축한 듯 강하디강한 자연의 허브 향을 풍기는 꽃, 계절의 변화를 후각으로 느끼게 하는 꽃, 바로 가는잎향유입니다. 가을이 깊어 감을 절감하는 ‘시월의 어느 날’, 바로 그 어느 날을 닮은 가장 가을다운 꽃이 가는잎향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 길 낭떠러지 끝에 똬리를 틀고 앉아 온갖 세파에서 벗어난 듯 세상을 굽어보는 모습은 한여름 남덕유산 정상에서 만났던 솔나리와 참으로 많이 닮았습니다. 툭하면 생태계를 해하려 드는 인간의 범접을 꺼리는 듯, 절벽 끝에 달라붙어 굽이굽이 펼쳐지는 산줄기를 내려다보는 가는잎향유 군락은 누구든 한 번 보면 평생 잊지 못할 만큼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깊어가는 가을만큼이나 가을의 향 또한 짙어집니다. 해서 사진을 담는 내내 눈이 즐겁고 코가 호강을 하게 만드는 꽃이 바로 가는잎향유이기도 합니다. 폐부까지 파고들 듯 강렬한 천연의 향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산자락에 쌓이는 낙엽의 두께가 두꺼워질수록 가는잎향유의 젓가락처럼 가는 잎도 연두색에서 홍갈색으로 변하며 손을 대기만 해도 부서질 듯 바싹 말라 가지만, 꽃과 잎 등 높이 50cm 정도의 전초에선 박하 향보다도 진한 천연의 향이 우러나와 가슴속으로 파고듭니다. 그런데 가는잎향유의 깊고 강한 허브 향에 취하고 즐기는 건 사람만이 아닙니다. 가는잎향유 자생지에는 늘 숱한 벌과 나비들이 몰려들어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니며 황홀한 만추의 성찬을 즐깁니다. 그러는 사이 야생화 애호가들은 가는잎향유의 자줏빛 꽃에 취해서, 꽃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벌·나비들의 바쁜 날갯짓에 반해서 넋을 잃고 연신 셔터를 눌러 댑니다. 꽃은 물론 깻잎 같은 잎과 줄기가 기름을 머금은 듯 반질반질 윤기가 돌 뿐 아니라 전초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고 해서 꽃향유(香)라 부르는 꿀풀과 향유속 식물의 하나입니다. 마주나는 이파리가 젓가락처럼 길고 가늘다고 해서 가는잎향유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아직은 멸종 위기 식물이 아니지만, 서식지가 일부 지역에 한정돼 있어 각별히 신경 써서 보호하고 관리해야 할 우리의 토종 식물 자산입니다. Where is it? 조령산·월악산·속리산 등 충청북도 보은군과 제천시, 경상북도 문경시를 지나는 산악 지대에 자생한다. 특히 깎아지른 바위 절벽에 주로 자리 잡고 있어, 멀찌감치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여간 위험한 게 아니어서 야생화 사진 작업에 익숙한 전문가들도 아주 조심하며 다가서는 꽃의 하나다. 문경 새재로 유명한 조령산 절벽 곳곳에 자생하는 가는잎향유가 전망 좋고 꽃 무더기도 풍성해 인기다. 몇 해 전 문경 새재 길에 자전거 전용도로를 내기 전에는 큰길을 따라 연이어 무더기로 자랐는데, 지금도 새재 길 절개지 일부에서만 만날 수 있다. >>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서울신문 기자로 29년 일했다. ‘김인철의 야생화산책’ (ickim.blog.seoul.co.kr)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야생화 화첩기행’ (푸른 행복) 저자.
- 2016-09-29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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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 달
-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열광하게 했던 리우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많은 선수가 그동안 피땀 흘려 노력했던 결과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메달을 따고 못 따고, 메달의 색깔을 떠나 그동안 수고했던 모든 선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스포츠는 국경과 사상이나 이념 그리고 종교를 떠나 모두를 아우르는 가장 순수한 경기다. 말 그대로 지구촌의 축제다. 메달의 색깔에 따라 환희가 오가지만, 아쉽게 4위에 그쳐 메달을 놓친 경우도 있다. 우리의 국민요정 리듬체조 손연재 선수가 그렇고 여자골프 양희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의 도전은 아름답다.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는 경기를 펼쳤다. 모든 국민도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그들이 있었기에 그동안은 참 행복했다. 누구에겐가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을 참 보람된 일이다. 아니 누구 때문에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많은 교훈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교훈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었다. 펜싱의 박상영 선수가 막판 대역전극으로 에페 개인전에서 헝가리 선수 게라 임레 선수에게 14대 10의 패배위기를 막판에 뒤집으며 금메달을 거머쥔 것은 감동이었다. 패색이 짙어가는 그 위기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주문을 자신에게 외우며 뛰어나가는 그 정신은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용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사격에 진종오 선수 또한 집념의 승리였다. 남자 50M 권총 결선에서 9번째 탄환이 만점 10.9에서 6.6을 기록한 것, 이렇게 점수가 나와 버리면 가망이 거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필자도 고등학교 때 사격선수여서 그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타킷의 검은 중심을 벗어나 버리면 스스로 좌절하고 포기하기 마련이다. 그때부터는 불안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져 그다음 점수도 좋은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진종오 선수는 역시 특등 사수다웠다. 그 실수를 탁월한 집중력으로 극복하고 드디어 금메달을 확보한 것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공기소총 충청북도 대표 선수로 태릉 선수촌에서 전국대회를 위해 보름 동안 합숙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지도를 받았는데 그 교훈이 지금도 나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언제든 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수에 집착하다 보면 더 큰 어려움에 휩쓸려 버릴 수가 있다. 그때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배운 그 한마디다 ‘이미 날라가버린 탄환은 잊어버려라’ 이말 한마디는 나에게도 큰 힘이 되었고 이번 진종오 선수에게서도 바로 입증이 되었다. 결국, 진종오 선수는 그 충격적 실수를 이겨내고 금메달을 따 사격 3연패를 달성했다. 실수를 이겨내고 다시 도전하는 힘!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이정표가 된다. 그 교훈은 이번 올림픽에서도 보았듯 바로 는 그 말과 연결된다. 올림픽이 주는 크고 작은 감동 속에는 이러한 교훈이 있어 어떠한 드라마 보다도 짜릿한 맛이 있지 않나 싶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은 잊어버려라.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 미국사회 한 번 믿어보자 안 믿고 살려니 안전불안증 생기겠다 ” 마음먹으니 사회란 한 구석에서는 늘 사건사고가 있는 거로 이해가 되었다, 그 후로는 격주로 전화하면서도 서로 걱정하는 일은 없어졌다.
- 2016-08-22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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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도전하는 힘!
-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열광하게 했던 리우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많은 선수가 그동안 피땀 흘려 노력했던 결과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메달을 따고 못 따고, 메달의 색깔을 떠나 그동안 수고했던 모든 선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스포츠는 국경과 사상이나 이념 그리고 종교를 떠나 모두를 아우르는 가장 순수한 경기다. 말 그대로 지구촌의 축제다. 메달의 색깔에 따라 환희가 오가지만, 아쉽게 4위에 그쳐 메달을 놓친 경우도 있다. 우리의 국민요정 리듬체조 손연재 선수가 그렇고 여자골프 양희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의 도전은 아름답다.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는 경기를 펼쳤다. 모든 국민도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그들이 있었기에 그동안은 참 행복했다. 누구에겐가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을 참 보람된 일이다. 아니 누구 때문에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많은 교훈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교훈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었다. 펜싱의 박상영 선수가 막판 대역전극으로 에페 개인전에서 헝가리 선수 게라 임레 선수에게 14대 10의 패배위기를 막판에 뒤집으며 금메달을 거머쥔 것은 감동이었다. 패색이 짙어가는 그 위기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주문을 자신에게 외우며 뛰어나가는 그 정신은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용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사격에 진종오 선수 또한 집념의 승리였다. 남자 50M 권총 결선에서 9번째 탄환이 만점 10.9에서 6.6을 기록한 것, 이렇게 점수가 나와 버리면 가망이 거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필자도 고등학교 때 사격선수여서 그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타킷의 검은 중심을 벗어나 버리면 스스로 좌절하고 포기하기 마련이다. 그때부터는 불안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져 그다음 점수도 좋은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진종오 선수는 역시 특등 사수다웠다. 그 실수를 탁월한 집중력으로 극복하고 드디어 금메달을 확보한 것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공기소총 충청북도 대표 선수로 태릉 선수촌에서 전국대회를 위해 보름 동안 합숙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지도를 받았는데 그 교훈이 지금도 나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언제든 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수에 집착하다 보면 더 큰 어려움에 휩쓸려 버릴 수가 있다. 그때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배운 그 한마디다 ‘이미 날라가버린 탄환은 잊어버려라’ 이말 한마디는 나에게도 큰 힘이 되었고 이번 진종오 선수에게서도 바로 입증이 되었다. 결국, 진종오 선수는 그 충격적 실수를 이겨내고 금메달을 따 사격 3연패를 달성했다. 실수를 이겨내고 다시 도전하는 힘!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이정표가 된다. 그 교훈은 이번 올림픽에서도 보았듯 바로 는 그 말과 연결된다. 올림픽이 주는 크고 작은 감동 속에는 이러한 교훈이 있어 어떠한 드라마 보다도 짜릿한 맛이 있지 않나 싶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은 잊어버려라.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 2016-08-22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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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와 힐링] 흰색- 분홍색-상아색 갖가지 색에 그윽한 향기까지 '미선나무'
- 미선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충북 진천과 괴산지역 야산에서 자라는 낙엽활엽 관목이다. 충청북도 괴산군(147호, 220호, 221호), 영동(364호), 전북 부안(370호)에 있는 미선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됐고, 산림청 희귀 및 멸종위기 식물173호, 환경부 보호양생식물49호로 지정된 상태다. 높이가 1.5m로 큰 집단을 형성하여 번식한다. 내한성-내음성은 강하고, 내공해성은 보통이며 토양은 다소 비옥하고 항시 수분이 있는 곳을 좋아한다. 어린 가지는 네모가 지며 털이 없고 홍갈색 또는 갈색을 띤다. 잎은 2줄로 마주나고 타원형 달걀꼴이며, 끝은 뾰족하나 가장자리는 밋밋하다. 꽃은 흰색, 분홍색, 상아색등으로 3~4월에 피며 은은한 향기가 있다. 미선나무는 이른 봄 잎이 나오기 전에 개나리꽃과 비슷하게 생긴 하얀 꽃이 피며, 향기 또한 그윽해서 훌륭한 조경수로 대접을 받고 있는 소중한 나무다. 미선나무의 종류는 흰색 꽃이 피는 것이 기본종이다. 분홍색 꽃이 피는 것을 분홍미선, 상아색 꽃이 피는 것을 상아미선, 꽃받침이 연한 녹색인 것을 푸른미선, 열매 끝이 패지 않고 둥글게 피는 것을 둥근미선이라고 한다 열매는 반달같은 2개의 종자를 가지며 9월에 익는다. 뿌리는 약용에 사용하기도 한다. 미선나무의 열매는 아주 신기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둥근 부채꼴을 하고 있다. 둥근부채를 한자로 단선(團扇)이라 하는데 미선나무의 한자명은 단선목이다. 일본사람들도 단선목이라 쓰고 ‘우찌와노기’로 발음한다. 중국 송나라 시에 ‘버들숲 옆 조각한 말안장 위에는 귀공자가 타고 있고 꽃밭 주변에는 아름다운 여인네들이 단선으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가고 있다’는 문구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사대부 집안에서는 심지어 겨울철이라도 둥근 부채로 낯을 가렸다고 한다. 단선은 하나의 장식품의 구실도 했다. 미선나무의 열매는 직경 약2.5cm 되는 거의 둥근꼴이고 편평하며 부채살과 같은 맥(유관속)이 발달해 있고 끝이 약간 오므라들고 있다. 사람이 부채를 만들 때 미선나무의 열매에서 지혜를 얻은 것처럼도 생각될 정도이다. 미선나무 원산지의 환경을 보면 흙이 거의 없다시피한 굵은 돌밭인데 돌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한여름 햇볕을 받아 높은 온도로 달아오른 돌의 뜨거움을 마시고 즐기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좋은 땅이 많은데도 돌밭을 택한 것은 무언가 사연이 있을 법하다. 떨어진 열매가 돌틈 사이가 아니면 싹터서 살아남기 어려웠던가. 아니면 그러한 곳이 다른 경쟁자를 회피하는 데 알맞았던가. 미선나무의 활용 가능성은 높다. 우선 꽃을 이용한 기호용 상품 개발도 필요해 보인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차 문화가 발달해 녹차 생강차, 둥글레차, 인삼차 감잎차 등이 많이 음용되고 있다. 따라서 미선나무의 꽃향기를 이용한 미선차로 개발이 필요하고, 이러한 것은 지역상품화가 될 수 있다. 건강상품으로도 각광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외국에서는 장미꽃, 레몬 등을 활용해 목욕탕에 향을 이용한 목욕법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쑥탕, 녹차탕 인삼탕 등과 같은 것이 있다. 미선나무도 마찬 가지로 꽃을 이용한 목욕법을 개발한다면 사람들로 부터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2014-04-25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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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라이프]은행지점장실에서 보일러실로 일터를 옮긴 이만호씨
- 중.장년의 희망은 오직 기술뿐 !. 자신과의 싸우며 기술 배우기를 3년…… 수백 통의 이력서로 취업 활동 후 드디어 취업에 성공! 저는 56년생으로 2010년 10월 은행 경영의 악화의 원인으로 고액 연봉자들의 대대적인 명예퇴직을 유도하여 전직원의 25%인 3800명이 퇴직할 때. 저 또한 나이가 정년에 가깝고 경영악화의 주범으로. 그리고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하여 자리를 양보하고 퇴직을 하였습니다.. 2010년 11월부터 그동안 여행하고 싶었던 몇 몇 곳을 선정하여 나 홀로 도시락을 배낭에 넣고 전국으로 여행 다녔으나. 마음은 항상 퇴직 후 무엇 하며 노후를 보낼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가볍지만은 아니하였습니다. ◆무엇으로 제2인생 준비할 것인가? “노력하는 자에겐 하늘이 돕는다” 퇴직을 결심하고 돈을 절약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 집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로 이동하기 위해, 그동안 타지 않았던 자전거를 수리하기 위하여, 동네 자전거 수리점을 찾아가서 고치면서 기다리는 중에 주인 사장님의 친구분들이 옆에 있어, 물었죠, ‘이 자전거 가게 사장님은 노후 걱정은 안하셔도 되겠다’고, 그랬더니 가게 주인 사장님의 친구분들이 하시는 말씀이’이 자전거 가게를 이 자리에서 40년을 했는데 큰돈은 벌지 못해도 자식을 공부시키고 결혼도 시켰으며, 작은 건물도 구입했노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또한 같은 60대 나이에 은퇴도 없고 자식들에게도 손 내 밀지도 않고 친구들 모임에 회비를 낼 수 있고 가끔 막걸리도 사주는 친구들 중 가장 유일하며,가장 행복한 친구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아! 그렇구나. ‘기술만이 남은 여생 30년을 보낼 수 있겠구나’를 생각하였으며, 나도 자전거 수리를 배워, 노후를 보낼까를 생각하면서 삼천리 자전거 홍보부에 근무하는 후배를 만나 자전거 수리점에 대하여 많은 의견과 자문을 받아 보는 등 여러가지로 고민하며 수일을 보냈습니다., 2010년11월 은퇴 후, 12월 중순에 은행으로부터 2년 계약직(지점감사업무)으로 근무할 수 있다고 통보 받아 1월 초에 근무지로 출근하던 중. 지하철역에 붙여있는 홍보 벽보에 서울시에서 기술교육을 무상으로 가르쳐 준다는 포스터를 보았으며. 아! 그렇구나 내가 여생은 큰 힘 들이지 않고, 적은 수입이라도 뭔가 할 수 있는 일거리로 보람을 느끼며 앞에서 언급한 자전거 가게 사장님과 같이 뭔가 기술을 배워 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며, 늙어서 할 수 있는 기술이 뭔지를 고민하였습니다. ◆어떤 기술을 배울 것인가? 그동안 강남의 대형 점포 지점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알고 지냈던 사장들과 식사하는 중에 ‘조경과 보일러, 목공, 자동차 수리, 조리 기술 중 어느 기술을 배우는 것이 미래가 가장 유망 하겠나’를 물었더니, 조경 쪽으로 교육 받으라고 하였으며, 조경은 무료교육 대상자 모집에서 연령제한이 없었으나, 보일러, 자동차 수리 등은 만 55세는 이후 노령자는 지원대상에서 제외된다고 하여, 연령이 제한되기 전에 보일러, 자동차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였으며, 보일러 기술은 월급이 적지만 힘이 들지 않는 직종이라 생각하여, 2011년 2월에 서울종합직업학교(현 동부기술교육원) 보일러과에 지원하였습니다. 등록 후 합격자 발표만을 손 꼽고 기다렸으나, 합격자 발표일에 제 이름 석자가 없었기에, 아! 그럼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를? 또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발표일 3일 후 기술학교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등록학생 중 몇 명이 주간으로 등록을 변경하게 되어 야간학생 결원이 있어 예비 합격자 중에 제가 포함되어 합격 했으니 3월 3일부터 학교에 나와서 기술을 배우라고 하여, 3월부터 기술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기술 취득과정 (1) 보일러 기능사 취득 과정 2011년 3월부터 고덕동 소재 서울종합직업학교에 오후 6시부터 9시 30분까지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6개월 공부하였으며, 실습할 때는 30년간 책상에 앉아서 근무한 은행원이 보일러 용어 하나하나가 생소하여 용어를 익히는데 부단히 노력하였으며, 특히, 가스나 전기 용접시에는 옷을 태우기도 하였으며, 손이나 발을 다치기도 하는 등 잦은 실수를 연발하여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로부터 웃음꺼리가 되기도 하여 창피하기도 하였으며, 개인적으로 자존심이 많이 상했으나 참고 견디었습니다. 필기시험은 과거 5년간 시험 출제 문제를 컴퓨터에 입력하여 어느 문제가 자주 출제되는지를 분석하고 외웠습니다. 입학 2개월 후 용어도 잘 모르던 제가 현장에 근무하면서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하여 입학하여 공부한 학생들도 낙방하는 보일러 기능사 필기시험에 합격하였으며, 5월부터 보일러 기능사 2차 실기시험을 준비하였으며, 6월에 최종 합격하여 보일러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2) 공조냉동 기능사 취득과정 공조냉동시험 준비는 기술학교에서 보일러시험 끝난 후 기초적인 내용을 가지고 졸업할 때까지 약 2개월간 배우고 실습하였으며, 학생들이 쉴 때도 수업이 끝난 후에도 틈틈이 홀로 가스 용접 실기에 매달렸으나 무난히 1차 필기시험에 합격한 것과는 달리 2차 시험인 실기 시험에 낙방하여 10월에 재 응시하여 12월에 어렵게 합격하여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3) 에너지산업기사 취득과정 공조냉동을 가르쳐 주시는 교수님께서 보일러, 공조냉동 자격증을 취득 후에는 요즘에 인기 있고 정부차원에서 각종 지원되는 에너지관리 기사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셨으나, 정해진 수업기간이 끝나 학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기술학교 보일러 과정을 끝마친 후 또 다른 기술을 준비 중에 기술학교 홈페이지를 열어 보았더니, 에너지 관련 수업이 9월부터 진행된다고 하여 9월에 지원하여 9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에너지관리기사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에너지 기사시험은 실무 경력이 없어 에너지관리 산업기사 시험만 응시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시험은 1년에 1회밖에 없으며, 2011년의 경우는 124명이 응시하여 한 명도 합격하지 못하는 아주 어려운 시험이라고 유념하여 공부하라고 하였다. 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공부할 때는 33명이었으나, 각종 공식이나 수치 계산 등으로 점차 공부가 난해 함을 느끼고 또한 수업하는 교실이 추워서 공부하기가 너무 힘드니까, 다들 중간에 포기하였으며, 마지막 남은 3명의 학우들도 포기하자고 하였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금년 아니면 내년에 공부한다고들 하지만 저의 경우는 나이가 60대를 바라보니 지금 이 기술 공부를 포기하면 갈 곳이(취직할 곳)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하며 끝까지 기술 공부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2011년에는 한 명도 합격하지 못하는 어려운 시험이지만, 2012년에는 내가 한번 도전하여 합격 했다는 소문을 듣게 하겠다고 하면서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에너지관리시험 준비하기를 7개월,.. 드디어 1차 시험을 무사히 합격하고, 2차 실기시험을 주관식을 치르게 되었으며, 합격자 발표 전날 밤 꿈에, 합격자 명단을 보니까 4명이 있는데 나의 이름이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합격자 발표하는 날 인터넷 검색을 하니, 전국에 단 4명만이 합격하였으며, 그 명단에 제 이름이 있어 크게 감동했으며 노력하는 자는 하늘이 돕는 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근무하던 지점의 은행 직원들이 더 좋아했으며 같이 공부한 동료학생들과 교수님으로부터 축하 전화를 받았습니다. 1차 시험에 60점으로 겨우 통과했는데, 2차 시험은 과연 몇 점이나 되는지? 인터넷으로 검색 했더니, 문답 50점 만점에 22점, 동영상 문제 50점 만점에 38점으로 더도 덜도 아닌 합격점수 커트라인인 60점으로 합격하여 감동의 드라마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4) 전기기능사 취득과정 보일러, 공조냉동, 열에너지관리산업기사 자격증 있으면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은행보다는 조건이 더 좋은 곳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취업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전경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 가입하여 컨설턴트와 상담도 하고, 베이비부머 취업박람회에 참가하는 구직활동에 전념하였지만 성사되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회 전반적으로 많이 활용되며 취업대상업체가 더 광범위한 전기기술을 배워 기술력을 더욱 향상시켜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전기기능사과정 교재와 동영상 C/D를 구입하여 혼자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아, 전기기술을 가르쳐 주는 기술학교 야간과정에 등록하여 9월부터 수업을 듣게 되었으며, 수업 듣는 그해 12월에 같이 수업 듣는 학생들보다 먼저 1차 필기 시험과 2차 실기시험을 통과되어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5)전기산업기사 자격증 취득 도전기 2012년 12월에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추가로 취득하여 이젠 취업이 쉽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여러 곳에 취업활동을 하여 00시설관리공사, 00회사, 00구청 등 무려 수십 곳에 서류전형에 합격하여 면접을 보았으나 결과는 역시 나이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젊은이에게 밀려 나기를 수십 번…. 아~!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능사 자격증만으로는 나이에 대한 한계를 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점점 나이에 따른 압박관념에서 모든 일이 점점 위축되었으며, 노후에 대한 자신감과 활기를 잃어가며 가족들 간의 유대도 소홀해 지며, 패배의식이 팽배해져 가며, 우울증으로 지내기를 수개월 지난 후 어느 날 한편의 신문에 실린 다음의 이야기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참판집 종으로 일하며 ‘도둑공부’… 신분벽 넘어 형조판서 우뚝 공부하고 싶은 노비의 열망이 높은 신분의 장벽마저 뛰어넘었다. 참판 집안의 종에서 형조판서로 우뚝 선 반석평(潘碩枰·?∼1540)의 이야기다. 그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조상이다.19세기의 족보 ‘만가보’에 따르면 석평은 충북 음성에서 아버지 반서린(양반으로 추정)의 서자로 태어났다. 석평은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노비 신분으로 서울의 이 참판 집에서 종노릇을 했다. 본래 똑똑했던 그는 얼마나 공부가 하고 싶었던지 자기 또래였던 주인집 아들 이오성이 방에서 글을 배우고 있을 때 밖에서 ‘도둑공부’를 했다. 땅바닥에 글씨를 쓰면서도 배우는 대로 외우는 영리한 아이였다. 석평의 도둑공부를 알게 된 이 참판은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석평은 이 참판에게 집을 나가 공부를 더 해서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당시 종은 공민권이 없어서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다. 석평의 재주와 성품을 남달리 여긴 이 참판은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석평의 노비문서를 불태워 없애고 아들이 없는 친척 양반집에 양자로 보낸 것이다. 석평은 1507년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했다. 이후 예문관검열(예문관에서 사초를 기록하던 정9품 벼슬)이 되었다. 경차관으로 함경도에 파견되어 여진의 동정을 보고했으나 천얼(賤孼) 출신이라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16년 문신 안당의 추천으로 경흥부사가 되었고 이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병조참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충청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1531년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예조참판,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 관찰사, 형조참판,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형조판서(정2품·지금의 법무부 장관에 해당)를 지냈다. 그는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석평이 형조판서일 때 길에서 옛 주인집 아들 이오성이 거지가 다 되어 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석평은 초거(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던 수레)에서 내려 그의 앞으로 달려가 절했다. 석평은 왕에게 자신의 원래 신분을 밝히고 자신의 벼슬을 깎아 이오성에게 주기를 청했다. 조정에서는 이를 오히려 기특하게 여겨 용서하고, 이오성에게 사옹원 별제 벼슬을 내리고 석평의 관직도 그대로 유지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석평과 조정을 모두 높이 평가하며 “이와 같이 한다면 세상 풍속이 어찌 분발하지 않겠으며 재주 있고 덕 있는 자가 어찌 감동되지 않겠는가”라고 썼다. 물론 석평의 출세가 법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이 참판이 스스로 노비문서를 불태워 양인이 되게 해 주었고 석평이 노력해 정식으로 문과에 급제했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의 처지를 보살펴 준 이 참판의 아들이 거지꼴이 된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고 양심고백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 중종실록에는 석평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특히 그가 종 출신이지만 문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으로 등용된 바람직한 사례로 든 것이 인상적이다. 위 기사에 힘을 얻어 다시 전기산업기사에 도전하면서 취업 활동을 해 보겠다는 마음에서 2013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도시락을 지참하여 인근 도서관에 9시에 도착하여 밤 10시까지 공부하였으며, 친목회,동창 모임 등 참석하지 않고 기술 공부에 홀인 하였습니다.2014년 3월 제1회 전기산업기사에 시험을 응시했으나 역시 유사직종에 근무한 경험이나 유사한 학과에 공부하지 않는 터라, 또다시 5~8점 차이로 낙방하는 쓴 맛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격증으로 재 취업! 전기기능사는 어느 정도의 노력으로 합격하였으나, 역시 기사 시험은 실무나 관련 학과와 인연이 있어야 이해가 쉬워 기사 시험 응시에 쉽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도서관 다니며 공부하다보니 경제적 어려움과 마음마저 우울해지게 되어 기사 시험 종료와 동시에 취업하겠다는 마음으로 매일 전경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홈페이지와 노동부의 워크넷에 등재된 채용공고를 검색하던 중에 2014년 2월 27일 국민은행 본점 시설과 근무 직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을 보고 28일 이력서를 제출하여 가진 자격증으로 응시하여 서류 전형과 면접을 거친 후 2014년 3월5일부터 근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취업을 준비하시는 분들께 결론적으로 말하면 눈높이를 낮추면 미래가 보이며 국가나 사회나 자식들에게 손을 내 밀수 있는 것보다 은퇴후에도떳떳한기술하나라도배우고익히면,개인이 행복하고 가정이 건전하며 나라가 튼튼해진다고 확신합니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다음 세가지만 유념 하시면 됩니다. 첫째, 지난 것 다 잊으시고, 오직 기술만이 살길이라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과거에 지점장을 했느니? 정부, 재계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했느니? 월급을 얼마나 받았느니? 이런 생각을 버리고 가장 낮은 자세라야 기술을 배울 수 있으며, 같이 배우는 옆 학우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요즘 시대는 과거 어느 학교 출신인가, 어느 직업을 가졌나 보다는 오직 자격증만이 살길입니다. 자격증 없이는 사회적으로 대우도 못 받으며 월급도 많이 받지 못합니다. 물론 경력도 중요하지만 당장 회사에 취직을 한다든가, 사업을 하려고 한다면 자격증을 소지해야만 우선 지원서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금이 넉넉하여 쉽게 회사나 가게를 차리실 수는 있겠지만, 기술이나 경험이 없이 시작하는 것은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지게 됩니다. 둘째, 처음 시작하는 아름다운 마음 변하지 마시고 끝까지,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기술을 배울 때는 하루 빠지시면 그 다음 수업과 연결이 안 됩니다. 특히, 기술을 배우시는 분들은 더 더욱 그렀습니다. 용어 등이 생소하기 때문이며, 교수님께서 설명하시는 용어들을 그때그때 듣고 놓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저와 같이 보일러과에 등록하신 분들 중에 열심히 참석하신 분들은 보일러 기능사 자격증을 다 취득하셨으며, 또한 공조. 냉동자격증 까지 바라보고 공부하여 원하는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반면에 상반기 공부했던 학생들 중에 출석이 부진 했던 분들은 교수님께서 출제 예상 문제를 가르쳐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결석이 빈번하여, 불합격 원인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물론, 기술을 배우시려고 하신다면 중간에 여러 가지 극복하셔야 할 일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저의 경우는 야간으로 기술 받는 기간 중에도 여러 회사에서 같이 근무하자는 제안이, 유혹이 많았습니다. 물론, 2~3년은 현재보다는 더 많은 월급 받고, 대우도 받으며 살겠지만,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하여 정중히 거절하였으며, 또한, 연말 연시 때나 주말에 동창, 동료직원, 각종 사회모임으로부터 회식, 등산, 골프, 낚시 등 많은 종류의 유혹들도 있었지만, 제2인생을 준비한다고 양해를 구하고, 회사 퇴근 후나 주말에는 곧바로 기술학교로, 도서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말입니다. 셋째, 같이 공부하시는 분들과 협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를 잘하면 또 다른 하나를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즉, 필기 시험에 자신이 있는 분은 실기 시험에 약한 분들이 있고요. 실기시험에 강한 분들은 필기 시험에 약한 분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같이 공부하시는 분들은 서로 협력하여 같이 합격하실 수 있도록 상호 서로 도와주라는 뜻 입니다. 그래야, 힘들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는 기억력이 약하여 외워도 외워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게 되고. 특히 실기시험은 완전 빵점 인생 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공부하시는 분들을 위해 필기시험에 대비하여 교수님께서 설명하신 내용을 요약하여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제공 하였더니, 필기시험에 도움 받은 동료 학생들이 실기 때는 제가 모르는 각종 공구들, 밸브들, 전기용접 및 가스용접 등등… 많은 도움을 주어 쉽게 실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지난날들을 회상해 볼 때 힘들었지만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에게 은행 지점장이 겨우 보일러 기능사 공부 하냐고 비아냥거리는 소리와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만, 기술만이 남은 30년 인생을 하나님을 위하여! 소외된 이웃을 위해 자원봉사하며! 내가 배운 기술로 겨울을 따뜻하게, 여름을 시원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너지를 절약하도록 기술을 펼치며 보람 있게 살며, 멋지게 보내리라 확신하기 때문에 선택한 것입니다. 끝으로 이 모든 것들을 먼저 기도로 준비했으며, 다음에는 앞뒤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위 내용은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협력센터에서 올해 초 실시한 중장년 재취업 성공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작입니다.
- 2014-04-17 1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