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xhibition
보그 라이크 어 페인팅: 사진과 명화 이야기
일정 10월 7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창간 125주년을 맞은 잡지 의 아카이브에서 엄선한 이미지들로 패션 사진과 명화의 관계를 재조명한다. 세계 3대 패션 사진작가로 불리는 파울로 로베르시, 피터 린드버그, 어빙 펜 등의 작품들을 통해 고흐, 달리, 클림트 등의 명화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전시했다. 사진의 대상이나 구성, 기술은 피카소의 입체파 회화에서 앤디 워홀의 팝 아트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장르를 아우른다. 특별 섹션으로 마련한 ‘보그 코리아’에서는 전통 수묵화의 절제미와 여백이 드러나는 패션 이미지들을 소개한다.
김영태의 편지들: 문인교신전
일정 7월 12일까지 장소 영인문학관
초개 김영태 시인의 서거 10주기를 맞아, 그가 생전 문인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았다. 아울러 시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이들의 자료까지 대여받아 함께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했다. 문인들의 편지인 데다가, 두 사람 간 주고받은 편지가 모두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그 의미와 특별함을 더한다. 특히 마종기 시인과 주고받은 편지는 160통에 달한다. 안수길, 어효선, 김구용, 박재삼 등 작고한 문인들의 편지뿐만 아니라 초개 선생이 직접 그린 이병주, 최인훈, 최인호 등의 캐리커처까지 만날 수 있다.
◇ book
인생의 재발견(바버라 브래들리 해거티 저·스몰빅인사이트)
탐사 전문기자로 30년간 지낸 저자가 중년을 둘러싼 8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직접 파헤친다. 심리학, 생물학, 사회학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의 인터뷰와 상실을 경험한 이들의 사례를 통해 중년 이후 삶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전문가와 함께 준비하는 스마트 라이프 디자인(삼성생명 은퇴연구소·미래의창)
연금, 재테크, 상속 문제에서부터 건강, 여가, 관계, 자기계발에 이르기까지 노후 대비에 관련한 전반적인 정보를 담았다. 중장년은 물론 2030세대에게도 도움이 되는 전문가의 현실적인 조언이 실려 있다.
◇ movie
플립(Flipped)
를 연출한 롭 라이너 감독이 2010년 미국에서 발표했던 영화로, 네티즌의 성원에 힘입어 국내 개봉을 확정지었다. 공식 개봉 전부터 네이버에서 영화 평점 10점 만점의 9.45점을 기록하는 등 호평을 얻었다. 포스터 속 ‘누구나 일생에 한 번 무지개처럼 찬란한 사람을 만난단다’라는 문구는 영화 속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하는 대사로 애틋한 감성이 묻어난다.
개봉 7월 13일 장르 로맨스 감독 롭 라이너 출연 매들린 캐롤, 캘런 맥오리피, 존 마호니 등
프란츠(Frantz)
상실을 경험한 독일 여자와 비밀을 간직한 프랑스 남자 사이의 거짓과 진실, 용서와 사랑이라는 미묘한 감정을 그렸다. 프랑스와 독일이 겪은 전쟁의 아픔을 실질적으로 담아내는 등 리얼리즘에 초점을 둔 작품이다.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섬세하고 깊이 있게 표현한 여주인공 폴라 비어는 이 영화로 2016 베니스영화제 신인여우상을 받았다. 흑백과 파스텔 톤으로 담아낸 영상은 클래식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개봉 7월 20일 장르 드라마 감독 프랑수아 오종 출연 피에르 니네이, 폴라 비어 등
◇ stage
김씨네 편의점
캐나다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미스터 김’의 인생 후반전과 가족의 모습을 그렸다. 자신의 인생 이야기가 자식을 통해 이어지길 바라는 부모 세대, 그리고 그런 부모와는 다른 정체성으로 살고자 하는 자녀 세대의 갈등을 유쾌하게 풀어나간다.
장소 백성희장민호극장 일정 7월 13~23일 연출 오세혁 출연 장용철, 최현미, 이화정 등
나폴레옹
나폴레옹과 그의 연인 조제핀, 노련한 정치가 탈레랑, 세 사람을 주축으로 한 나폴레옹의 웅장한 여정이 펼쳐진다. 객석과 무대에 40문의 대포가 설치될 ‘워털루 전투’, 다비드의 명화 ‘나폴레옹의 대관식’ 등 역사적 사건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장소 샤롯데씨어터 일정 7월 15일~10월 22일 연출 리처드 오조니언 출연 임태경, 한지상 등
캣츠
화려한 무대와 음악으로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뮤지컬 의 오리지널 팀이 내한한다. 이번 공연은 더욱 역동적인 군무와 더불어 의상의 색깔이나 패턴, 헤어스타일 등이 업그레이드돼 이전 공연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장소 국립극장 해오름 일정 7월 11일~9월 10일 출연 맷 안토누치, 애덤 배일리, 로라 에밋 등
1945
동아연극상에 빛나는 작가 배삼식이 이후 6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1945년 해방 직후, 위안소를 탈출한 명숙과 미즈코의 역경을 통해 요동치는 시대 속 민족의식과 생존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이들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장소 명동예술극장 일정 7월 5~30일 연출 류주연 출연 박윤희, 김정은, 성여진 등
골목길은 어쩐지 큰길보다는 뭔가 비밀스럽고 은밀한 느낌이 있다. 어린 시절 숨바꼭질이나
술래잡기하던 정다움도 느껴지고 꽃다운 젊은 날 좋아하는 사람과 거닐며 가슴 떨렸던 수줍
은 기억도 떠오른다.
어린 시절 필자는 10살까지 대전의 대흥동 주택가에서 살았다.
골목 안쪽에 우리 집이 있었는데 그 골목은 다른 곳보다 무척이나 좁았다.
어릴 땐 몰랐지만, 어른이 되어 그리움에 한 번 찾아가 보니 뚱뚱한 사람은 통과하기 좀 힘
들 정도로 좁은 길이었다.
그래도 그 골목은 좁아서인지 더욱 골목 안 우리 친구들의 천국과 같은 놀이터였다.
지금과는 달리 어릴 때의 필자는 매우 개구쟁이였던 모양이다.
노래도 잘했다는데 아이들의 동요가 아닌 당시 유행하던 강화도령이나 제목도 모르지만 ‘반
짝이는 불빛 아래 소곤소곤 소곤대던 그으 나알밤~’이란 가요를 구성지게 잘도 불러 재껴
서 동네 어른들은 필자만 보면 “노래 한 자락 해봐라.”고 하셨다.
그 골목에서 즐거웠던 일은 동네 아이들과 연극을 해보자고 작당했던 일이다.
무대는 좁은 골목 안 용호네 대문 위쪽과 반대편 전봇대에 줄을 매달고 담요를 걸쳐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큰 무대를 만든 것처럼 즐거웠고 춘향전을 한다며 담요를 들치고 나와
연기를 펼치며 깔깔대었다.
정말 그땐 어른들도 볼거리가 없었던지 철부지 동네 꼬마들이 하는 연극에 신문지나 가마니
를 깔고 앉아 귀엽다며 칭찬하고 웃어주셨다.
그렇게 골목길은 필자의 어린 시절 잊지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기도 한 곳이다.
작년에 우리 동네 뒤쪽으로 산책로가 새로 조성되었다.
2km의 길이로 펼쳐진 산책길은 중간 한 부분 100여 미터 정도 골목길을 통하게 되어있다.
처음 그 골목을 지나며 필자는 깜짝 놀랐고 낯설지 않은 느낌에 내심 반갑기도 했다.
좁다란 골목이 어린 날 개구쟁이 모여 놀던 그 골목과 매우 닮았기 때문이었다.
약간은 후줄그레한 지저분한 회색 담벼락이 이어졌는데 어느 날 지나다 보니 담장 치장이
한창이었다.
아마 개인이 하는 건 아니고 지자체에서 골목단장사업을 하는 것 같다.
연말이 가까워져 오면 할당받은 예산을 없애기 위해 잘 깔려있는 멀쩡한 보도블록도 교체하
는 등 무리하게 예산 집행을 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골목을 깔끔하게 단장하는 데 쓰인다면 칭찬해 줘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산책 때문이든 그저 통과하는 것이든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산뜻하고 기분 좋은 느낌을 줄 수 있어서이다.
각 집마다 색상을 달리해서 칠하는 페인트의 색이 너무 고와 어느 집 담장이 더 예쁜지 감상해 보는 것도 즐거운 눈요깃거리가 되었다.
파스텔 톤으로 인디언핑크, 연하늘색, 연보라 연노랑 등 은은한 색의 담장이 뽐내듯 이어졌
고 골목 끝 부분의 좀 큰 담장에는 사계절을 표현한 벽화가 그려졌다.
이제는 골목을 지나며 우중충한 모습을 보지 않게 되어 기분이 좋다.
봄을 상징하는 꽃잎 담장도 있고 가을 단풍을 그려놓은 담장도 있다.
동심의 세계로 이끌 것만 같은 겨울 눈 내리는 공간에 다정히 서 있는 눈사람 한 쌍도 정겨
운 풍경이다.
누구의 발상으로 수십 년간 우중충했던 골목을 이렇게 예쁘게 바꾸게 되었을까?
골목 안 주민들도 좋겠지만 화사한 골목길을 지나는 나그네들도 산뜻한 기분일 것 같다.
오늘도 골목을 지나며 어떤 담장이 더 예쁜지 기분 좋은 감상을 했다.
올 여름은 내 생애 최고의 살인 더위였다. 실제 데이터는 아닐지 몰라도 기억과 느낌으론 그랬다. 그 온도의 높이 보다 그 지독한 더위가 낮 뿐 아니라 열대야로 보름 이상 이어짐이 몹시 참기 힘들었다. 그런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일 뉴스에서 전기요금 폭탄이 중요 이슈까지 다뤄지니 에어컨도 마음 놓고 켜기가 두려웠다.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으로서는 가히 지옥을 맛 본 여름이었다.
이런 올 여름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곳. 요금폭탄 걱정 없이 시원함을 만끽하며 보낼 수 있었던 곳. 바로 나만의 아지트 우리 동네 도서관이다.
자전거 타고 가는 길도 예술
서둘러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냉커피를 타서 보온병에 담고 간편한 과일을 약간 준비해 집을 나선다. 우리 집에서 도서관 까지는 자전거로 10 여분 거리. 아파트 단지를 벋어나자마자 시에서 조성한 ‘시민의 강’ 이라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자전거로 달리게 된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강이라기보다는 시냇물에 가까운 길이지만 제법 자연미도 있고 예쁘다. 물길 따라 나무, 풀, 꽃들이 계절을 느끼게 해주어 평소 저녁 산책을 다니는 길이기도 하다. 그 길 끝에 나만의 아지트 도서관이 있다. 가는 길 중간 중간에 간이 도서관과 벤치도 있다. 날씨만 좋다면 도서관 까지 가지 않고 자전거를 세우고 그 벤치에 앉아서 책을 볼 때도 있다. 봄. 가을에는 그 벤치가 나의 아지트로 도서관을 대신하곤 한다. 필자는 이 길을 자전거로 달려 도서관에 갈 때마다 부천시민으로 지방세를 꼬박꼬박 내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가 않고 뿌듯하다. 그 길을 달려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면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창가 자리가 있다. 통유리로 되어 있고 작은 파스텔 칼라 의자가 놓여 있다. 그 자리에 앉으면 창을 통해 공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무더위도 맹추위도 돈 워리, 주말에도 늦저녁에도 오케이, 비가 오면 땡큐
올 여름처럼 살인적인 더위에 가져간 냉커피가 생각이 안날 정도로 에어컨이 말 그대로 빵빵하게 나오고, 와이파이도 팡팡 터지고, 만화책부터 전문서적까지 원하는 책 마음껏 볼 수 있는 곳. 과연 이곳 보다 더 좋은 아지트가 또 있을까? 필자는 이번 여름 거의 매일 도서관에 출근 하다 시피 했다. 그리고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책을 보며 지냈다.
그렇다고 이곳이 어디 더위만 피할 뿐이겠는가? 한 겨울 추위에는 냉커피를 따뜻한 커피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이 고마운 나의 아지트가 평일 금요일 만 빼고 주말에도 문이 열려 있다. 평일엔 저녁 10시까지 이용이 가능하다. 비가 오면 오히려 더 이곳을 찾는다. 통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준비해간 커피를 마시다 보면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북카페가 된다. 북카페에 음악을 빠질쏘냐? 음악은 핸드폰에 이어폰을 꽂고 들으면 간단히 해결된다. 와이파이가 되니 데이터 사용료 걱정 없이 음원사이트에서 분위기에 맞는 나만의 음악을 찾아서 들으면 뭐 하나 빠짐없는 북카페 완성이다. 실내가 지루할 때 즈음 잠깐 밖으로 나가보자. 문 열고 나가 몇 발자국만 가면 자그마한 인공폭포와 근사한 정자도 있다. 날씨가 너무 덥거나 춥지만 않다면 간단히 준비해간 과일이나 간식을 먹으면서 소풍 기분을 내면 잠시 쉴 수도 있다. 안팎 모두 완벽한 나만의 아지트 이다.
나만의 아지트로 가는 길은 누구도 눈치 채기 어렵다. 아니 길이 없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북한산 좁은 등산로를 오르다가 오 부 능선 어느 지점에서 등산로를 살짝 빠져서 큰 나무 사이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약간 경사가 있는 비탈길을 내려간다. 그 비탈길은 나무가 빽빽해서 주변 지형과 하늘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조심조심 내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마술처럼 눈앞에 넓고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고 그 바위에 오르면 시야가 확 트인다. 북한산 인수봉의 거대한 자태가 하늘에 닿아 있고 그 아래로 흘러내리는 수많은 능선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계절마다 찾아오는 자연의 향연
봄에 그 바위에 앉으면 어린잎의 연두, 산수유의 노랑, 진달래의 연분홍이 그려내는 색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파스텔조의 색깔을 찬란한 햇빛이 더 가볍고 투명하게 만든다. 수채화가 따로 없다. 봄바람이라도 지나가면 그 바위에 누워 바람과 햇살을 동시에 온몸으로 만끽한다. 눈을 감고 가만히 귀 기울이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멀리 산새들의 노랫소리도 들린다.
짙은 초록으로 물든 여름에는 비 오는 날이 좋다. 숲에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에 묻혀 세상 소란스러운 소리가 다 사라진다. 눈을 감고 들으면 어느 거대한 폭포 속에 들어온 듯 착각에 빠진다. 소나기가 숲에 부딪히며 내는 ‘쏴~아’하는 소리는 속을 시원하게 해 준다. 어느 순간 소나기가 지나가면 계곡마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구름 사이로 바다색 하늘이 나타난다. 잠시 조용하던 산 벌레들이 다시 합창을 시작한다. 여름엔 이곳 바위에서 낮잠을 잔다. 우산을 펴고 그 그늘에 얼굴을 넣고 눕는다. 한여름 숲에서는 냉장고 바람이 살살 불어온다. 잠시 눈을 붙이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개운해진다. 삶은 달걀 하나, 김밥 한 줄로 요기가 충분하다. 그곳에는 바다색 하늘과 빛나는 인수봉과 수많은 초록 능선이 있다.
봄이 수채화라면 북한산의 가을은 유화다. 북한산 능선들이 어느 순간 온통 노랗고 붉게 변한다. 그 바위에 앉아 있으면 저 북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인수봉을 타고 넘어온다. 겨울이 가까이 왔다. 떡갈나무 잎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다리를 세우고 카메라를 장착한다. 거대한 자연 캔버스를 배경으로 셀카를 여러 장 찍는다. 그렇게 또 하나의 가을 시간을 박제로 보관해 둔다.
동양화를 닮은 겨울 산은 화선지에 그린 수묵화처럼 단아하다. 겨울나무를 보면 버리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 바위에 서서 훤히 다 드러난 능선과 비탈에 서 있는 나목들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가지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이 소리를 낸다. 지난여름 초록이 다 부질없이 느껴진다.
◇바위의 영속성과 살아 있는 것들의 유한성
북한산에는 꽃이 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낙엽이 지나가면 텅 빈 곳이 된다. 그리고 또 다른 봄이 오고 연두색 이파리가 돋아난다. 수많은 계절이 왔다가 사라져도 그 바위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그 바위는 변하는 것과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만날 수 있는 필자의 숨겨진 아지트다
대전의 보문산(寶文山) 사정(沙亭)공원에는 시비(詩碑)들이 있어, 언제 가도 느리고 깊은 산책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1879~1944)의 이란 시가 발길을 붙잡는다. ‘출세의 해탈도 꿈입니다.’ 가슴에 꽂히는 구절을 새기며 추수 김관식(秋水 金冠植·1934~1980)의 를 읽는다. ‘저는 항상 꽃잎처럼 겹겹이 에워싸인 마음의 푸른 창문을 열어 놓고,’ 하늘을 바라본다.
다시는 못 올 눈물의 서정시인 박용래(朴龍來·1925~1980)의 ,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시비를 어루만지며 시혼(詩魂)에 젖어든다. 멧새의 울음 따라 후드득 아침이슬이 떨어진다. 화강석이나 오석(烏石)을 잘 다듬고 깎아 예인(藝人)들의 글씨로 새긴 전아(典雅)한 시비는 눈을 트이게 하고 마음까지 맑게 한다.
“박용래 시인의 시비 위에는 선생님의 브론즈 소녀상이 있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워낙 순진무구한 시인인지라, 항상 하늘을 바라보는 순수한 소녀상을 빗돌에 더하고 싶었어요.” 대전시립미술관 찻집에서 최종태(崔鍾泰·1932~ )조각가와 나눈 대화였다. 전에도 전시장에서 여러 번 뵙고 인사는 드렸으나 그날은 선생 부부와 우리 부부가 전화로 약속을 하고 만난 뜻 깊은 자리였다. 마침 그해(2005년) 7월 20일부터 9월 7일까지 그곳에서 전작전(全作展) 형식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초기작부터 나무 돌 브론즈의 조각들은 물론 파스텔화, 드로잉, 매직화(magic pen으로 그린 그림), 조각의 구상 단계의 연필 스케치까지 미술관 전체에서 한 예술가의 모든 숨결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선생의 조각 작품은 수집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현대나 가나화랑에 부탁해도 일이년 기다리기가 다반사였다. 작품이 완성도에 이르기까지 오래 걸리고 과작(寡作)일 뿐더러 미술품 경매시장에도 작품이 나오지 않아 몇 년에 한 번 열리는 전시회만 기다려야 비로소 선생의 작품을 소장할 수가 있다. 선생의 작품을 수집하려 돈을 모으다가 다른 미술품을 수집하곤 하였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판화, 드로잉, 매직그림들부터 사 모았다. 지금 생각해도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뜻을 세우고 기다린 끝에 지금은 몇 점의 조각 작품도 수집하게 되었다. 이 파스텔화는 인사동 노화랑에서 을 열 때 오백만원을 주고 바로 구입한 작품이다. 이 그림이 큰 사진으로 일간지에 소개되는 바람에 예서제서 구입하고자 해서 오픈 날 바로 떼어왔다. 선생은 수상집에서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 아주 깜깜한 지경에, 파스텔로 그림그리기를 하므로 그 어려움을 견디어냈다.”고 술회한 바 있다. 1984년에는 파스텔화만으로 전시회를 열어 국내외의 큰 호평을 받았다.
“나는 남자 그림은 네 명만 그렸다. 예수, 아기예수, 요셉, 그리고 내 손자뿐이다.”고 한 걸 보면 이 그림은 아기예수와 성모일 테지만, 성화(聖畵)가 아닌 여느 엄마가 아들을 기꺼워하는 모습으로도 읽힌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애수와 명상에 잠긴 눈망울에서 깊은 고요와 환희를 감지하게 된다.
조치원 인근 야산 기슭, 허름한 작업장에서 유영교(劉永敎·1946~2006) 조각가를 만났다. 잔설 위로 햇빛이 부서지고 바람이 제법 맵게 불었다. 40kg짜리 LP가스 빈 통으로 만든 난로에서는 장작불이 이글거리고 여기저기 색을 달리하는 대리석덩이가 흩어져 있었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대리석 산지 카라라(Carara)에서 수입했다고 했다. 오전 작업을 끝내고 티 타임이라며 녹차를 따라 주었다. 흙에 뒹구는 저 돌덩이를 보며 얼마나 많은 사색과 명상으로 형상을 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고뇌의 흔적으로 가득 찬 밑그림들이 벽에 빼곡하게 붙어 문풍지처럼 나부꼈다.
유영교 조각가는 1976년 홍익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78년 이탈리아로 유학하여 2년간 국립미술아카데미에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조각가 에밀리오 그레코(Emillio Greco·1913~1995)와 페리클레 파치니(Pericle Fazzini ·1913~1983)를 사사했으며 그 후는 대리석 산지인 카라라 지역으로 옮겨 6,7년간 조각 작업을 하며 돌의 성격을 파악하고 국제적 미술 감각을 익혔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1475~1564)의 명작들도 카라라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유서 깊은 그곳에서의 작품 활동이 우리나라 많은 후학들의 카라라 진출의 교두보가 되었다.
1986년 귀국하고 대학에도 출강하면서 열정적으로 빼어난 대리석 작품을 탄생시켰다. 1996년 개인전에서는 초기의 소박한 여인상, 모자상 가족상에서 합(合)형태의 반추상과 구도자(求道者) 선승(禪僧) 등 심오한 인간 내면의 정신을 표출하고자 노력하였다.
“나의 작품들의 모티브는 자연에서 찾는다. 자연을 볼 때 바쁜 우리 눈으로 보지 말고 매우 느리게 돌아가는 자연의 시간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의 얼굴이 나타나는데, 그 고운 형상은 침잠의 미소를 짓게 한다.”고 작가노트에 쓰고 있다. 50세 이후로는 조각을 환경의 매체라 인식, 건축공간과 하나 되는 움직이는 조각을 시도하여 등의 역작을 남겼다.
이 천재 조각가의 서거 소식을 듣고는 먹먹한 가슴으로 하늘만 바라보았다. 아 아 무심한 하늘이시여!
이 은 대리석 작업이 무르익던 1992년 작으로, ‘이 애가 내 아들이에요!’ 엄마의 대견해하는 표정만으로 더없는 기쁨을 준다. 엄마의 풍만한 미소가 잔뜩 찌푸린 아들의 얼굴과 대조되어 웃음을 자아낸다.
여름의 한가운데, 배롱꽃을 바라볼 수 있음은 크나큰 축복이다. 긴 꽃타래에 꽃망울이 다투어 터지며 백 일간 피고 지고 한다 하여 나무 백일홍이라고도 부르는 담홍색, 보라, 흰색의 꽃은 그 기품 또한 맑고 깊다. 고창의 선운사나 안동 병산서원에 가시거든 수백 년 한자리에서 꿋꿋이 풍상을 견디어 온 배롱나무 꽃그늘에 서서, 굽은 둥지에 살며시 귀를 대고 영겁의 소리를 들어보시라.
“얘야, 나는 저 나무 백일홍이 활짝 필 때, 저승 가는 등불로 삼았으면 좋겠구나.” 하시던 어머니가 엄동의 눈꽃 속에 저승으로 가셨기에 더욱 안타까운 꽃, 긴긴 여름을 애틋하게 한다.
어머니에게 과연 나는 기껍고 대견한 아들인 적이 있었을까.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소녀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은 대구시 삼덕동이었다. 그곳 삼덕동의 중앙초등학교에서 4학년까지 다니다가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와서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교동초등학교로 전학하던 그때가 소녀에게는 서울 사람의 시작이었다.
어린 시절 삼덕동 소녀의 집에는 동네에서 제일 큰 마당이 있었고 여름에는 그 마당 한가득 형형색색의 이름 모를 꽃이 피고 졌던 기억들이 어렴풋하다. 밤중에 화장실 가는 일이 큰일 중 큰일이었던 기억, 화장실에 가기 위해 누군가를 깨워서 같이 대청마루를 지나칠 때 발바닥에 닿았던 얼음장 같았던 마루 촉감의 기억도 아직 남아 있다.
또 겨울 어느 날 밤 소녀의 집에서 그리 가깝지 않다고 생각했던 성당의 뾰족지붕이 겨울밤 투명한 마루 유리창을 통해 한눈에 들어왔던 기억도 뚜렸하다. 뾰족지붕에 돌려져 있는 색등 때문에 선명한 삼각형이 된 성당 지붕은 심지어 반짝이기까지 하면서 어린 소녀의 눈에 요지경처럼 들어왔다. 소녀의 집과 성당 사이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던 시절 반짝이는 삼각형 지붕은 소녀에게는 까만 밤하늘의 디즈니월드 이상이었다. 발이 시린 줄도 모르고 오래오래 서서 바라본 반짝이던 성당 지붕 크리스마스 불빛의 황홀했던 환상도 뇌리에 깊이 박힌 추억이다. 싸인지라고 불렀던 파스텔톤 빛의 색 도화지를 두 살 위 언니를 졸라 겨우 얻어냈을 때의 기억. 아마 소녀는 죽을 때까지 이 보잘 것없는 기억들의 불씨를 마음속 깊이 살려 둘 예정이다.
소녀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하시던 일을 서울로 옮기면서 소녀의 어머니, 아버지는 1년 이상의 원조 주말 부부를 하시다가 아버지의 인솔 하에 대식구 모두가 소녀가 4학년이 되던 해 서울로 이사 왔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하여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기를 원하신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소녀는 나중에야 해본다.
아버지가 서울에 가셨던 어느 여름날 삼덕동 시절. 소녀는 할머니, 고모, 어머니가 대청마루에서 대수롭지 않게 하는 지나간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소녀가 우연히 들은 그 얘기는 이랬다. 엄마가 소녀의 언니를 막 뱃속에 가질 때 한국전쟁이라는 것이 일어났다. 당시 군대 사정은 잘 모르지만 소녀의 아버지는 3대 독자여서 전쟁터로 나가는데 면제를 받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1.4후퇴 이후 인민군이 부산까지 내려오면서 전황이 매우 급해졌다. 장소 불문하고 아무 준비 안 된 사람이라도 눈에 띄는 민간인 남자는 군복도 없이 삼엄한 감시하에 무조건 전쟁터로 차출됐다는 것. 그런데 그즈음 외출 중이던 소녀의 아버지도 영문을 모르는 채 그 대열에 끼게 된다.
군인도 아닌 오합지졸 민간인 행렬은 전쟁터로 향하는 첫발을 떼면서 삼덕동 집 앞을 지나가게 된다. 그곳을 지나가다 소녀의 아버지는 윗옷 호주머니에 단단히 꽂아뒀던 ‘보물 1호’ 파카 만년필을 집 담장 안으로 던져 넣었다. 담장 밑에 던져진 소녀 아버지의 만년필을 발견하고 사태를 짐작한 남은 식구들은 모두 패닉에 빠진다.
낮에 붙들려 걷기 시작한 행렬은 만 하루 이상을 걷다가 자정이 되어갈 무렵 이름 모를 곳에서 잠시 쉬게 된다. 잠시 후 곧장 전쟁터로 가서 군복도 없이 인민군의 총알받이가 되든, 잘못되면 국군에게 총살당하더라도 이 대열에서 빠져나와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 선택이 둘뿐인 찰나의 순간 수많은 생각을 했을 소녀의 아버지는 후자를 선택한다. 칠흑 같던 밤 행군을 잠시 멈춘 사이 아버지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다 다음날 밤 마침내 불빛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퉁이마다 총을 들고 보초 서고 있는 군인을 만나게 된다. 아무 결정권이 없는 처음 만난 군인은 소녀의 아버지를 미군에게 데리고 간다. 모든 각오를 하고 있던 아버지는 있는 그대로 얘기하게 된다. 당시 영어가 신통치 않았을 아버지와 미국 사람이 어떻게 대화가 통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버지는 자신의 민간인 신분과 산달이 가까운 아내 얘기를 미군에게 하였다. 아버지와 뜻이 통한 미군은 아버지를 통과 시키고 집으로 돌아가는 곳곳에서 만나게 될 보초를 통과할 수 있는 메모까지 써준다.
군인이 아니었던 아버지는 난생처음 만난 외국 군인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소녀의 가족은 건재할 수 있었으며, 소녀도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갓 여고를 졸업했던 20세 남짓 된 소녀의 고모는 어느 날 외출에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뜬금없이 붉은 완장을 두르고 집으로 들어와 식구들을 기겁시켰던 얘기도 소녀는 곁들여 듣게 된다.
생각해보면 당시 사람들은 모두 2년 전에 상영했던 영화 ‘국제극장’의 주인공인 것만 같다. 이데올로기가 뭔지도 몰랐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몰랐을 시대의 사람들이 겪었던 역사의 환란.
초등학교 시절 ‘상기하자 한국전쟁'의 달을 맞아 글짓기, 포스트 그리기 시간이 돌아오면 호국 영웅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듣는다. 그러나 겪어보지도 못한 소녀 가족 환란의 이야기는 소녀에게 혼자만의 비밀이 되어 시시때때로 그 비밀과 싸워야 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사회의 규칙에 조금씩 눈 떠가며 민간인이었던 아버지의 상황이 이해된 소녀는 비로소 혼자의 비밀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이제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지금 루마니아 작가 콘스탄틴 게오르규가 쓴 장편 소설 ‘25시’를 생각해낸다. 소녀는 중학생 어린 나이에 명동성당 앞 중앙극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었을 때 읽어본 소설 ‘25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었다.
게르만도, 유대인도 아니고 아무런 이데올로기도 가지지 않은 루마니아 시골의 순박한 농부 요한 모리츠와 그의 가족이 역사 속의 희생물로 바쳐져 버린 슬픈 비극의 운명이 떠오른다. 요한 모리츠는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유대인, 연합군, 다시 미ㆍ소의 소용돌이 속에 끝없이 갇혀버린 어이없이 허무한 인생의 이야기지만 요한 모리츠, 그의 이름은 온갖 강대국 사이에 끼어 고난의 운명에 처하는 약소민족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지금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또다시 돌아온 6월에 이제 모두 돌아가시고 안 계신 소녀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철없이 붉은 완장을 차고 들어와 식구를 놀래게 했던 고모, 그들이 60년도 훨씬 전에 걸어왔던 그 길과 혼자 간직했던 비밀들이 아주 오랜만에 생각이 나 아무도 몰래 그 시절 그 소녀의 해맑은 웃음을 다시 한 번 만들어 본다.
5월의 산은 온통 연두색 이파리들이 점령한 가운데 중간중간 하얀 이팝나무 꽃 무리가 섞여 마치 파스텔화 같다. 온통 생명으로 가득한 5월은 말 그대로 ‘계절의 여왕’답다.
경북 상주보를 지나 긴 교량을 타고 넘으니 상주자전거박물관이라는 이정표가 눈에 띄었다. 잠시 그곳에 들러 자전거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휴식을 취한 다음 구미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강 주위로 길게 펼쳐진 평야에서는 일손 바쁜 농부들의 바쁜 일상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엊그제 비가 온 덕분에 찰랑찰랑 물 잡힌 논에서 농사 준비에 바쁜 그들의 옆을 지나칠 적에는 은근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개구리의 합창 소리가 가슴을 적셔왔지만 어린 시절, 이맘때쯤이면 농촌 들녘을 장악했던 ‘송아지 찾는 어미 소의 헤설픈 울음소리’는 간데없고 트랙터의 굉음만이 가득해 마음이 허전했다.
서울에는 이틀 연속 비가 온다고 하는데, 이곳만은 햇살이 싱그러웠다.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데 우리의 자전거길만이 햇살이 비추니 이만한 행운이 또 어디에 있을까?
오늘의 본래 계획은 칠곡군이었다. 칠곡군에서 부산 을숙도까지 점프해 3일 차의 힘든 여정을 대비하기로 했는데, 구미시 구미보에 도착해 전망대를 구경하면서 잠시 쉬다가 아뿔싸, 너무 오랫동안 지체한 것이 화근이었다. 발 뻗은 김에 누워버린다더니 노곤한 몸으로 더는 못 가겠다는 회원들의 아우성에 다시 중지를 모아 오늘은 여기까지 라이딩을 마치기로 했다.
구미보에서 차를 불러 타고 부산 을숙도를 향하는 중에 을숙도를 불과 30여 분 남겨두고 고속도로에 장사진을 친 차량 행렬을 만났다. 할 수 없이 일정을 변경해 경남 김해시에서 묵어가기로 하고 차를 돌렸다. 애초에 부산에 가면 자갈치시장에 들러 꼼장어 구이나 붕장어 회에 소주 한잔은 꼭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일정이 차질을 빚어 부산은 가지도 못한 것이다. 더구나 김해시에서 장어집을 찾는 데만도 꽤 시간이 걸렸다. 비록 늦은 저녁이나 세 분 회원님들의 찬조로 바닷장어의 깊은 맛을 맘껏 느끼고 내친김에 펜션까지 소개받아 김해시 신어산 자락에 있는 신라농원펜션에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묵게 됐다.
상동면에 있는 신라농원펜션은 신어산 자락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과 계곡 물소리가 일품이어서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의 피로를 다소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피로가 엄습해 왔지만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자전거 하룻길에 대한 담소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른 채 이어갔다.
정녕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일까? 신어산 자락의 초승달도 구름에 숨고 밤벌레 소리만 적막한데 여기저기서 코 고는 소리와 잠꼬대 소리가 창문을 넘었다. 그렇게 둘째 날 밤도 깊어만 갔다.
친구들과 오르는 경기 동두천 마차산은 온통 연두색 파스텔화다. 정상에서 태풍급 폭우를 맞으면서도 누구 하나 힘들어하지 않았다. 나무 향기 가득하고 쏟아지는 빗줄기가 미세먼지까지 말끔히 씻어낸 쾌적한 ‘전원’이기 때문이다.
시니어는 은퇴 후 편리한 도시를 떠나 전원생활을 꿈꾸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원에서 살다가 짧게는 수 개월, 길게는 몇 년 사이에 도회지로 되돌아온 이웃을 종종 보았다. “어릴 적 추억 속의 전원과 현실의 그것은 전혀 다르고 고독감, 교통 여건과 편의·의료 시설 부족이 큰 문제”라고 역 귀향 사연을 말했다.
장래를 생각해 전원에 투자했다가 큰 손해를 보고 철수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시니어는 이러한 함정에 빠져들지 않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도시에서 전원처럼 쾌적하게 생활할 방법을 찾자.
첫째,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는 ‘소유’보다 편리한 ‘이용’이 대안이다. 사실 시니어가 부동산에 장기 투자할 이유가 별로 없다. 투자비용, 관리비, 제세 공과금 등 ‘소유비용’이면, 마음에 드는 전원을 찾아 즐기거나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서해안 명승지에 전세 들어, 바다낚시와 조개잡이로 얼굴을 검게 그을리면서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는 친구가 있다. 2년 계약이 끝나면 다음에는 깊은 산골로 갈 예정이라고 자랑했다. 일부 명승지에서는 월 단위 임대사업도 최근에 유행하고 있다. 동호인끼리 한 주일씩 교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둘째, 멀리 다니기 어려우면 도시에서 전원생활을 즐기자. 관악에서 정들어 산 지 어언 30여 년이 넘었다.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사는 고향처럼 느껴지는 아담한 ‘전원마을‘ 이다. 집 앞과 뒤, 옆으로 초·중·고등학교가 연이어 있다. 아이들은 전학 한 번 안 하고 학교를 마쳤다.
울창한 숲 덕분에 여름철에는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시원하다. 계곡 물놀이장은 어른·아이들 천국이 된다. 서울·관악산 둘레길이 잘 꾸며져 누구나 산책하기도 좋다. 아침마다 경쾌한 음악소리에 맞춰 체육공원에서 열심히 운동할 수도 있다.
이보다 더 쾌적한 전원이 어디에 있겠는가? 매주 배낭 메고 친구들과 찾는 북한·도봉·청계산은 우리 차지다. 전원생활! 바로 내 앞에 있다.
이재준
안네 소피 무터(Anne Sophie Mutter, 1963~ )의 바이올린 독주회 맨 앞자리에 김영태 시인과 나란히 앉아,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 k.304를 들었다. 41개 바이올린 소나타 중 유일한 단조의 선율은, 봄밤을 깊은 심연의 사색에 잠기게 하였다.
연주가 끝나고 울퉁불퉁한 돌길을 휘적휘적 걸으며 잠시 하늘을 보았다. 아련한 산사나무 꽃향기 사이로 멜로디의 여운이 눈물 되어 흘렀다. 긴 계단을 내려와 차도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얼마 전 부군을 사별한 안네의 망부곡 같았어요. 검은 의상은 상복일 테지요.”
스스로를 ‘풀먼지 같은 존재, 어눌한 말주변’에 빗대어 초개눌인(草芥訥人)이라 자호(自號)한 분이 김영태(1936~2007) 시인이다. 비교적 작은 키에 작은 손으로 평생 글쓰기와 그림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홍익대 회화과에서 김환기 화백(1913~1974)의 훈도를 받았고, 재학 중 박남수 시인(1918~1994)의 추천을 거쳐 ‘사상계’잡지에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17권의 시집을 비롯하여 소묘집, 시론집, 산문집, 무용평론집 등 70여 권의 저작물은 가히 초인적인 문화 활동이란 말 이외에 더 무슨 수사가 필요할까.
일찍이 독일문화원에서의 첫 전시를 비롯해 7~8회 회화전도 열었으나 그림 수집의 인연은 아주 늦게 찾아왔다. 그의 화풍은 독특해서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프랑스산 판화지에 철필과 몽당붓을 짙은 먹이나 검은빛 잉크에 찍어 윤곽의 선을 구획하고, 유화용 까칠한 붓으로 면을 마감하는데, 서예의 갈필(渴筆)같이 선묘(線描)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림의 기초 단계인 스케치 실력이 상당하지 않고서는 강철 같은 선(線)을 뽑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2007년 이른 봄 초개 선생 댁에서 ‘토슈즈 끈을 매고 있는 헤르미아’를 만났다. 셰익스피어 원작을 멘델스존이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으로 작곡했고, 이를 무용으로 공연한 발레리나의 포즈를 형상화한 빼어난 작품이다. 물 흐르듯 먹의 농담이 한 송이 꽃으로 살아 있다.
드로잉(drawing)을 선인들은 화골(畵骨)이라 일컬었다. 그리기의 단단한 뼈대가 곧 선긋기에 있음을 강조함이다. 유화나 짙은 수채화 등은 물감을 덧칠하여 잘못 그린 선들을 감출 수 있으나, 연필, 목탄, 먹, 파스텔은 그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는 게 매력이다. 초개 선생의 그림 속에는 일절 꾸밈이 없다. 색칠의 남용도 없다. 탄탄한 구성과 간결한 선들의 얽힘이 화면 가득 흐른다.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2)의 피아노곡을 즐겨 듣고, 모차르트 음반을 많이 소장하였다.
2007년 7월 운명하기 전까지 화랑가를 산책하고 음악회, 무용 공연장을 찾았다. 생전에 그가 즐겨 앉았던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가열 123번 좌석은 그를 추모하는 예인들에 의해 ‘초개눌인 석’으로 명명 헌정되었다.
문학과지성사는 1978년부터 문학과지성 시인선(詩人選) 시리즈로 시집을 475권째 발간해 오고 있는데, 표지에는 시인의 얼굴을 컷으로 표현하는 게 특징이 다. 이 컷은 2007년 김영태 선생이 작고하기 전까지는 김영태, 이제하 두 분이 그렸으나 이후는 이제하 선생이 혼자 그리고 있다. 컷을 그리기 전에 시집의 원고를 읽고, 시인들이 제공한 얼굴 사진을 보고 컷을 그리는데, 선이 잘 풀려 나올 때는 불과 몇 분 만에, 안 풀릴 때는 수주일이 걸린다는 말을 두 분에게서 들었다.
이제하(1937~ )는 시인, 소설가, 화가, 영화평론가의 그 어느 장르에서도 건필을 견지하고 있는 분이다. 자작곡의 노래에 기타반주로 음반도 취입한 바 있다. 홍익대 조소과에서 미술공부를 하였으나 중도에 독창적인 창작의 길로 전환하였다. 경남 마산에서 고교시절인 1956년 ‘새벗’잡지에 동화가 당선되어 문학도의 선망이 되었고, 1959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고교 시절에는 김상옥(1920~2004), 김춘수(1922~2004), 김남조(1927~ ) 같은 시인들에게 국어수업을 받았음을 자부하기도 했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광화사’등의 소설로 이상문학상등을 수상하였다. 1955년 제작된 영화 ‘나의 청춘 마리안느’에서 따온 마리안느 카페를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평창동에서 시작된 카페가, 대학로로 옮겨와 시인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음악과 커피 와인 향 속에서 예술을 토론하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성악가, 대중가수, 국악인들은 주저 없이 절창을 부르고 있다. 그의 문체는 회화적이고 환상적 리얼리즘이라 평가 받는다. 그의 그림 속에는 시혼(詩魂)의 알레고리가 녹아 있다.
마리안느를 드나들며 몇 점의 그림을 수집하던 중, 2008년 인사동 전시회에서 ‘말과 소년’ 드로잉을 구입하였다. 파스텔로 단숨에 그린 원숙한 드로잉이다. 늠름한 말이 실내 어느 공간에 들어와 있고, 소년이 말을 다독이고 있다. 한 여인이 옆에 앉아 있다.
이제하는 ‘도시에서 태어나야 하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 혹은 그 긴장하는 접점으로 말[馬]을 실내로 끌어들인 야생의 한 이미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제하 그림 속의 말은 자연과 야성의 모티브가 된다. 자연을 거스를 수 없으나 쉽게 동화되지도 못하는 인간들의 고뇌와 갈등을 오묘한 색상으로 표출하고 있다.
1998년에는 김영태, 이제하 2인 드로잉전이 열려 한자리에서 개성 강한 두 예술인의 세계를 감상할 수 있었다.
송나라 문장가 소동파는 당나라 대시인 왕유의 시를 보고 시중유화(詩中有畵)요, 화중유시(畵中有詩)라 하였다. 김영태, 이제하 두 예술인의 문장 속에는 격조 높은 그림이 보이고, 그림 속에서는 시와 음악이 흐른다. 이들의 고양(高揚)된 예술세계는 우리의 혼탁한 일상을 정화시킨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동·서양의 많은 미술가들이 배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즐겨 그리거나 조형물 또는 설치미술로 남겨왔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쳐 있고 강도 많아서 유년기, 성장기, 노년기 중 한때를 바다나 강 곁에서 살아 온 우리들에게 배는 아주 익숙한 풍경이다.
배는 물을 건너는 교통수단일 뿐 아니라 어업을 생계로 하는 이들에게 곧 삶의 터전이었다. 문학을 비롯해 여러 예술 장르로 배에 얽힌 주제는 독자들에게 많은 상상력을 키워 주기도 하고, 질박한 서민 애환에 공감대를 형성해 주기도 했다.
화가들은 마음 속 정서를 점, 선, 면으로 분할한 구도 속에 색채로 표출해 낸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시각을 통하여 화가의 깊은 정서에 접근하게 된다. 그 접점이 화가가 의도하는 사유에 근접하든 아니든, 그림을 보고 속뜻을 풀어 가는 과정이 보는 이들에게 때론 안온한 열락을, 혹은 거친 갈등의 아픔을 가져 온다.
그림 속의 배는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만, 언젠가 그 배는 물 위로 흘러갈 것이란 우리들의 인식이 잠재되어 있어, 배는 머무르되 물은 흐르고, 물은 잠시 머무르되 배는 흐른다.
박석호(1919~1994) 화가의 배 그림 ‘고선(古船)’을 처음 보았던 순간의 감흥은 아직도 생생하다. 인사동 어느 화랑의 유리 진열대에 덩그러니 혼자 걸려 있던 거칠게 짙은 청회색의 배 한 척이 두 눈 가득 다가왔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꿈을 꾸듯 하염없이 배를 바라보았다. 짙은 납빛 하늘에, 유려한 필선의 흐름이 돛과 배의 몸통을 슬며시 구분 지어서 그렇지, ‘저런 배도 있을까?’ 그렇게 며칠을 유리 밖에서 살피며 그림이 눈에 익을 때까지 천천히 의식을 작품 속에 이입해 보기도 했다. 초겨울 찬비가 내리는 저녁, 그림 중앙 작은 사각의 조타실과 선실 창틈으로 새어 나오는 노란 불빛에 시선이 빨려 들어가면서, 다소의 조급함이 풀리기 시작했다. 거친 마티에르에 여리게 스미고 번져 나오는 그 불빛, 거센 풍파에 깨지고 부서진, 아픈 여정을 이제 막 돌아온 고선(古船)에서, 그래도 내일의 새 항해를 꿈꾸는 화가의 자화상이리라 깨닫는 찰나, 그것은 환희이며 동시에 아픔이었다. 내가 소장하는 첫 번째 배 그림이 되었다.
홍익대학교 미대 1회 졸업생인 박석호는 이미 남관(1911~1990) 선생의 화실에서 미술의 기초 실력을 닦고, 김환기(1913~1974) 선생의 빛나는 제자로 인정받으며, 졸업 후 바로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박석호는 1966년 학교의 부조리한 인사에 강하게 저항하다 동료 교수 4명과 함께 주저 없이 강단을 뛰쳐나오게 된다.
신산한 삶 속에서도 산과 들, 사찰, 바닷가로 자유롭게 다니며 민초들의 힘겨운 삶의 현장과 주변의 보잘것없는 스산한 풍경까지 농밀한 화필로, 밀도 높은 작품을 이루어 간다. 1980년대에서 생의 말년까지 십 수 년은 배 그림을 유난히 많이 그렸다. 어시장, 이름 없는 작은 포구에 옹기종기 정박하는 어선, 이제는 배의 기능을 마친 앙상한 용골의 폐선, 비를 머금은 어부의 귀항 등을 유채, 수채, 파스텔의 재료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그렸다. 1994년 운명할 때 화실에 걸려 있던 유작이라 칭하는 ‘한촌(寒村)’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4호 사이즈의 작은 화폭이 수평으로 양분되고 하늘은 온통 노을과 구름으로 뒤덮였다. 먹청빛 짙은 바다 가운데 작은 배 한 척이 무심히 머물러 있다. 두세 번의 거친 붓질만으로도 작은 배는 시선을 확 사로잡는다. 붉은 노을빛이 바다에 어리고, 배 그림자도 파도의 흔들림 없이 잔잔한 바닷물에 번져 있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대구의 한 화랑에서 다른 화가의 배 그림 ‘새벽어촌’을 구입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배를 접안할 시설조차 마땅치 않은 남도 어느 포구에 작은 어선 위로 두 사람의 어부가 짐(물고기)을 들어 다른 한 사람의 등목에 얹고 있다. 배 위 어부의 등으로 하얗게 서리가 덮였다. 짐을 나르려는 어부는 발목이 젖은 모래에 박히고, 목에서 어깨까지 짐의 무게에 짓눌려, 목과 얼굴은 짐 상자에 녹아 붙어 버렸다. 손에 낀 장갑도 허연 성에에 뻣뻣하다.
어쩌면 평범한 어촌 일상이 보는 이를 잔뜩 긴장시킨다. 신선하게 느끼던 바다의 푸른 빛깔도 한 조각 얼음 되어 가슴에 박힌다. 침도 삼킬 수 없는 그 막막하고 아픈 고단함이 나를 깨운다. 크게 꾸짖는다.
‘너는 게으르지 않은가’
손장섭(1941~)은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치열하게 한 세대를 살아가는 올연한 거목 같은 화가이다. 우리나라 질곡의 긴 역사를 회화로 펼쳐 왔다. 해방, 남북분단, 민주화의 투쟁에 거침없는 화필로 포효해 왔다. 그러나 언제나 그의 그림 기저에는 우리네 이웃 서민들의 팍팍하고 고단한 삶을 따뜻이 어루만지고 있다. 특히 그가 자라온 어촌의 아낙들과 고깃배의 그림들은 하얀 물감을 덧바르는 특이한 채색으로 경직된 선의 분할이 서정적인 풍경으로 바뀐다.
‘외포리의 저녁’이라는 표제가 붙은 그림은 내가 세 번째 소장한 배 그림인데, 미술품 경매회사의 온라인 경매를 통해 구입한 작품이다.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에 머무르고 있는 배를 실경으로 담담히 그린 서경적인 작품이다. 석양의 하늘은 이미 붉은 노을로 질펀하다. 바다 건너 낮은 산들이 띠를 이루며, 모래톱에 배 너덧 척이 머물러 있다. 왼편 가까이 거의 부서진 하나는 배로서의 소임을 다 마친 채, 서서히 해체 되어 가는 폐선으로 보인다.
그런데, 바다에 녹아든 노을의 긴 그림자가 이 배를 포근히 휘감고 있다. 바닷물 가까이 우뚝한 큰 배는 당당한 위용으로 시선을 압도한다. 서너 개의 돛대가 노을을 수직으로 가른다. 뱃머리 돛대 위 푸른 깃발은 바람에 나부낀다. 범상치 않은 구도에, 잔잔하며 거친 붓질이 황혼녘의 포구를 아련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 그림을 한 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생 초·장·노년이 파노라마처럼 흐르고 있음은 나만의 감성일까?
이 그림의 화가 김태(1931~)는 함경남도 홍원의 해변마을에서 출생하여 월남, 서울대 미대를 졸업, 모교 교수로 정년을 한 사람이다. 비교적 과작(寡作)인 편인 이 화가는 특이한 구도, 과감한 붓터치, 원색의 광휘가 보는 이들을 그윽한 그림의 세계로 이끄는 매력이 있다. 특히 한적한 어촌이나 해변마을의 배가 있는 실경들은 우리에게 고향의 어린 시절 향수를 담뿍 느끼게 한다.
그림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그렇지만 그림을 제대로 보고 읽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림이란 표면을 통하여, 화가가 표출하고자 하는 세계에 발을 들여 놓으려는 진지한 자세가, 그 예술혼에 근접하려는 깊은 사색이, 화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살피는 과정이, 좋은 그림을 만나고 소장하고, 그 그림을 대할 때 깊은 마음 속 정화를 체험할 수 있다.
달빛이 유리창으로 고여 오는 늦은 저녁, 설거지를 마친 노처와 나란히 배 그림 앞에 앉아, 마른 뱃전을 적시는 바람 사이로 아련히 유년(幼年)의 바다를 떠올리고, 아직도 그 바다를 건너지 못하는 빈 배 위에 흰 세월 너울만 얹고.....
>> 글.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