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강남의 병원들 사이에선 새로운 ‘보트피플’이 생겼다는 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 지난해 말 문을 닫고 먹튀(선불 치료비를 떼어먹고 도망간)한 교정 치과 때문에 생긴 말이다. 치료가 2~3년 걸리는 교정 치료의 특성상 중단된 치료를 계속할 만한 병원을 찾기 위해 몰려다니는 이들을 보트피플로 일컫는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주변의 개원의들은 병원을 선택할 때 주의 깊게 살폈다면 피해를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대체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우리나라 의료법 체계에서 병원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쉽게 설명하면 입원병상이 없는 의원급 의료기관은 1차, 입원병상을 갖춘 병원급 기관은 2차, 100병상이 넘고 7개 진료과목 이상 운영하고 있으면 3차, 즉 종합병원이다. 의료법을 처음 계획한 이들은 1차에서 3차까지 순서에 따라 환자가 이동하길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환자가 입맛에 맞춰 취사선택하는 구조가 됐고, 일부 과목은 모든 의료기관이 경쟁하는 구조다.
소위 TOP 5를 중심으로 이들과 경쟁하는 대형 대학병원, 종합병원들은 많은 투자와 인재확보 경쟁으로 인적교류도 활발해져 상당수 평준화가 이뤄진 상태. 명의를 확보하기 위해 본교 출신을 우대하는 ‘순혈주의’는 깨진 지 오래고, 여러 공신력 있는 기관을 통한 평가도 이뤄지고 있는 상태여서 “어떤 과목은 어디가 잘한다”는 식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졌다. 병원 관계자들은 “출신 학교보다는 EBS 출연 경력이 더 우대받는다”고 이야기할 정도.
그래서 여기서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1차 의료기관, 즉 의원급 의료기관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구관이 명관이다
우리가 흔히 포괄적으로 병원이라 부르는 의원급 의료기관은 기본적으로 개인사업자이지만 사회적 책무를 함께 지고 있는 사업장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이들 의료기관이 오랜 기간 운영되고 있다는 것은 치료와 장기적 환자 관리, 병원 경영 등을 효과적으로 해내고 있다는 증명이 된다.
흔히 병원을 차리면 돈을 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에 따르면 2015년 일반 의원의 폐업률은 70.6%, 한의원은 79.3%에 달했다. 매년 10개 병원이 생기면 7개 이상의 병원이 문을 닫는다는 의미다. 만약 주변에 오래된 의원이 있다면 살아남을 만한 이유를 가진 곳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일반적으로 개인 의원이 치명적인 의료사고를 일으켰을 때 일정 기간 공백을 두고 다른 곳으로 옮겨 새로운 병원명으로 개업하는 것이 관례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오래된 병원은 그러한 큰 의료사고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치료비는 도덕적 잣대가 아니다
많은 환자가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치료비에 대한 착각이다. 최근 ‘착하다’라는 단어의 의미가 다양하게 쓰이면서 치료비가 적게 드는 치료를 우선시하는 병원 혹은 치료비를 깎아주는 의사에게도 ‘착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치료비가 지나치게 싸다는 것은 의료기관의 절박한 상황의 방증일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먹튀 치과도 평균적으로 200~300만원 정도 하는 교정 치료비를 66만원에 해주겠다면서 환자들을 유혹했다.
일부 항목을 제외하면 국민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진료 분야의 치료비는 병원에서 임의로 정한다. 그러나 치료비가 왜 그 금액인지 100% 설명할 수 있는 개원의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주변의 ‘시세’를 고려하는 경우도 많고, 직원의 의견을 반영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나름의 진료 철학이 반영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제시된 가격이 주변보다 높다고 생각되거나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듣지 못하면 병원을 불신한다. 견적서만으로 상품 성능을 평가하는 셈이다.
강남의 한 교정 치과 원장은 “결국 치료라는 것은 환불이 불가능한 상품을 구매하는 것과 다름없어요. 몸을 치료하고 나면 제품을 되돌려 보내듯 무를 수 없으니까요. 의사도 도덕적 책임을 갖고 진료를 해야겠지만, 환자도 상품을 고를 때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한 이유입니다”라고 말했다.
병원보다는 의사를 제대로 선택
환자들은 병원이 자신을 치료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내가 만난 의사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병원 이름은 분명히 기억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하지만 병원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를 혹은 내 가족을 누가 치료하는지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문제가 된 먹튀 치과는 홈페이지에 의료진 이름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결국 모든 의사들이 고용된 ‘사무장 병원’ 형태로 운영되었다는 것이 수사를 통해 밝혀졌다.
의료법상 많은 의원이 홈페이지에 상세하게 의료인의 약력을 밝히진 않지만, 자랑할 만하다면 최소한의 정보는 공개하는 분위기다. 의사가 뭘 전공했고 학자로서 어떤 학술 활동을 했는지 상당 부분 공개가 되는 것이다. 포털 사이트나 의학 관련 매체에서 이름만 검색해봐도 의사의 평판은 가늠할 수도 있다.
특정 분야의 경우 관련 학회 홈페이지를 참고하는 것도 방법이다. 예를 들어 대한성형외과학회나 대한피부과학회, 대한치과교정학회 등의 학회들은 모두 병원찾기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들이 네이버에서 병원 검색이 되는 것을 모르고 번거롭게 예산을 들여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해당 분야를 제대로 전공한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비 전공자가 성형외과나 피부과 간판을 걸고 운영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발품을 팔아라
목동의 한 정형외과 원장은 많이 다녀볼 것을 추천한다. “의외로 환자와 의사 간에는 궁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강압적인 의사에 고분고분 따르는 환자도 있고, 납득해야 따르는 환자도 있습니다. 이런 환자는 친절하게 잘 설명해주는 의사와 잘 맞아요. 궁합이 잘 맞아야 치료도 잘 됩니다. 그런데 이런 궁합을 맞추려면 수고스럽더라도 병원을 많이 다녀보는 것이 좋아요.”
또 많은 상담을 통해 환자가 교육되는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병원에서 상담을 받다 보면 해당 질환에 대한 지식이 생기고, 그러다 보면 어떤 병원이 자신에게 맞는지 안목도 생긴다. 결국 병원을 선택하는 것은 환자의 몫이다.
매달 시니어의 제2인생과 직결된 새로운 직업을 소개해온 이 코너가 2017년 정유년(丁酉年)을 맞이해 새해 각오와 어울릴 만한 주제를 준비했다. 바로 특정한 직업이 아닌 ‘창업’이다. 취미활동이나 공부를 통해 익숙해진 일 혹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회사를 세우는 것. 창업은 시니어에게는 거창한 일로 여겨지지만, 벤처나 스타트업이 뜨고 있는 요즘 사회에선 어렵지만도 않다. 또 시니어의 창업을 돕기 위한 관련 기관의 도움도 쏠쏠하다. 새해 계획을 이미 세워놨다면 ‘창업’이라는 꿈을 하나 더 집어넣어보면 어떨까?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올해 사업 활동 결과는 이상이며, 내년 사업 계획을 보고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스크린의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응시하는 사람은 말쑥한 정장 차림도, 대기업 임원도 아니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 여성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니어의 모습.
지난해 12월 7일 도심권50플러스센터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가 진행하는 인큐베이팅 지원사업에 참여한 단체들이 지난 1년간 사업 결과를 평가하고 다음 해 활동을 소개하는 자리. 현장에선 센터에 의해 ‘보육’되고 있는 스타트업 기업 10개 업체의 대표자들이 모여 성과를 자축했다.
비록 프레젠테이션이 서툴러도, 아직 대표라는 직함이 쑥스러워도, 한 회사를 설립해 성장시키고 있다는 보람 때문인지 이들의 표정은 밝아보였다. 이들은 어떻게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을까.
창업은 ‘소자본’ 1억원 내외로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2017년 한국경제 7대 이슈’ 보고서에서 60대 이상의 연령층에서 경제활동인구 증가가 취업자 증가보다 커 고용 여건이 악화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그만큼 시니어들의 취업활동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취업활동이 어렵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대안 중 하나는 ‘창업’. 그러나 막상 사업을 시작하려 해도 종목 선정이나 자금 마련, 동료나 직원 확보, 판로 개척 등 막막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시니어들은 어떻게 창업을 추진할 수 있을까?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는 최근 은퇴 후 창업 시 망하지 않는 5가지 원칙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소자본으로 창업하기 ▲365일 묶여 있는 창업 피하기 ▲가족의 지지 확보하기 ▲잘 알고, 좋아하는 일 선택하기 ▲사업가 마인드로 무장하기 등이다.
소자본 창업을 추천하는 이유는 상당수의 시니어들이 창업할 때 은퇴 자금을 한꺼번에 투자해놓고 사업이 안 되면 곤란을 겪기 때문이다. 또 잘 알지 못하거나 가족의 도움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다면 그 사업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창업 금액은 1억원 내외가 적당하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창업진흥원의 시니어 창업기술센터 프로그램을 활용하자
창업을 원하는 시니어들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장치들이 정부기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기관 중 하나는 창업진흥원. 만약 어떤 ‘아이템’을 갖고 사업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창업진흥원을 노크해보라. 창업진흥원에서는 각 지역 23개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를 운영하면서 시니어의 창업을 돕고 있다. 또 별도의 시니어 기술창업스쿨을 통해 창업에 필요한 기술교육도 제공하고 있다.
창업진흥원 지식서비스창업부 이경희 대리는 창업진흥원의 활동을 이렇게 설명한다.
“창업진흥원에서 기술창업, 즉 기술을 바탕으로 한 창업을 지원하는 이유는 시니어의 창업에 가장 적합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시니어들은 창업에 올인할 경우 사회적 약자가 되기 쉽고,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은 창업은 폐업률이 높습니다. 때문에 창업에 필요한 지식과 준비 과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기술교육을 지원해 안정적인 창업활동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창업진흥원은 지난해까지 진행했던 시니어 기술창업스쿨을 올해부터는 각 지역의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로 이관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다.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는 교육뿐만 아니라 설립된 회사들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입주공간지원 사업, 창업자금지원, 마케팅활동지원 등 다양한 도움을 주고 있다. 기업이 설립되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지원받을 수 있는 셈이다. 또 시니어에 국한된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창업진흥원의 창업지원 교육이나 프로그램들은 연령 제한이 없기 때문에 창업 전 꼼꼼하게 살펴보고 도움을 받으면 좋다.
모임과 함께 사업 계획 다듬은 뒤 출발해도 늦지 않아
하고 싶은 사업은 있는데 누군가의 힘을 빌리고 싶다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바로 서울50플러스재단 산하 각 지역의 50플러스센터에서 운영하고 있는 커뮤니티와 인큐베이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도심권50플러스센터가 대표적인 사례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의 정현주 대리는 현재 센터를 통해 성장하고 있는 회사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센터에서는 2016년 현재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통해 10개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사업계획 심사와 인터뷰를 통해 10개 업체를 선정해 사무공간을 제공하고, 각 분야 전문가들의 멘토링을 통해 사업이 다듬어질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또 지자체나 다른 기관과의 연계가 필요하다면 저희가 다리 역할을 하고, 사업 내용에 따라 센터가 직접 돕기도 합니다.”
센터에서 지원 기업을 선정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은 일반 창업지원 기관과는 다소 다르다. 기업 활동을 통한 이윤이나 생존을 위한 기존 기업 혹은 청년창업 기업과의 경쟁에 그 초점이 맞게 되면 취지와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거나, 사회 참여적 조직, 협동조합, NPO(비영리 민간단체)를 지향하는 곳을 우선시한다. 물론 사업성이 있어야 함은 기본이다.
이 때문에 상당수 기업들은 전 단계로 센터 내 커뮤니티를 선택한다. 동호회 활동과 비슷한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사업 계획을 보완하고 아이디어를 덧붙이는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다. 또 센터 내 활동을 통해 인력을 확보하기도 한다.
실제로 현재 인큐베이팅에 참여하고 있는 기업 중 일부는 이미 협동조합을 갖췄거나, 사단법인의 형태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 참여 기업 중 한 곳인 주식회사 리스타트의 경우 창업투자회사를 통해 자금 투자를 약속받기도 했다. 준비하고 있는 기업의 일자리와 은퇴 후 구직자들을 맞춰주는 서비스가 좋은 평가를 받은 덕분이다.
| 전국 시니어 창업 기술센터 |
서울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로 232 서울테크노파크 1203호(02-944-6038), 서울특별시 마포구 매봉산로 18 마포창업복지관 601호(070-7727-4101),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 211 성북벤처창업지원센터 B104(02-941-7257) | 경기 경기 의정부시 경의로 114 영빈빌딩 4층(031-828-8877), 경기 수원시 영통구 광교로 107 창업보육동 B2(031-259-6692), 경기 성남시 분당구 야탑로 205번길 26, 213호, 214호(031-707-5962) | 부산 부산광역시 남구 신선로 365 행정관 302호(051-629-7971) | 울산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곡천동문길 20-22(052-277-1996),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진순환도로 1138(HRC빌딩8층)(052-219-8632) | 대구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수로 64, 1층(053-784-8261),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로 128, 1층(053-643-7994),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서대로 675, 복지관 3층(053-589-7932) | 경북 경북 칠곡군 왜관읍 공단로 1길, 2층(054-973-9605) | 인천 인천광역시 남동구 인주대로 506-1 서울외과 4층(032-567-5051) | 광주 광주시 동구 금남로 238 무등빌딩 10층(062-236-3262) | 경남 경남 양산시 주남로 288 영산 테크노폴리스 산학협력관 3314호(055-380-9577), 경남 진주시 동진로 33 경남과학기술대학교 8동 3층(055-751-3610) | 강원 강원 춘천시 동면 장학길 48 한림성심대학교 산학관 1층(033-240-9833) | 충북 충북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377-3 서원대학교 글로벌관 B203호(043-217-1311), 충북 청주시 상당구 교서로 8-2, 3층(070-4814-6515) | 전북 전북 전주시 덕진구 기린대로 945-6 소상공인희망센터 희망관 1층(063-717-1322), 전북 익산시 인북로 187, 1층(063-841-7480) | 전남 전남 목포시 석현로46 목포문화산업지원센터 1층(061-280-7492)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어린 친구들이 쓰는 말로 표현하면 ‘성공한 덕후(마니아)’ 같다고. 다른 분야가 아닌 ‘불교 덕후’. 그러자 웃으며 그가 화답했다. “맞아요. 덕후는 나쁜 표현이 아니에요. 결국 한 분야에 능통하고 깊은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미래를 주도하며 세상을 바꿀 거예요.” 이렇게 스스로를 덕후라 말하고 있는 그는 바로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이자 치과의사이기도 한 김성철(金星喆·58) 교수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들었어? 남일이가 죽었대. 숙명여고 애들이랑 대성리에 갔잖아. 물에서 못 나왔대.”
서울고등학교 1학년 학생 김성철은 친구의 죽음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남일이와 같은 미술반이었던 그 역시 그곳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여학교 클럽과의 비공식적인 교류는 학교에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동행하지 않았다. 그저 혼나는 것이 겁이 났기 때문에. 처음엔 무덤덤했다. 그저 교실에 빈자리 하나만 눈에 띌 뿐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 사고로 인해 그해 여름방학에 떠난 학교 해양훈련은 엄격해졌다. 선생님들은 안전사고가 생길까 노심초사하며 엄하게 감시를 했다. 아이들은 수군거렸다. 모처럼 신나고 재미있어야 할 행사가 힘들기만 한 것이 죽은 남일이 때문은 아니냐고. 그런 일들을 겪으며 어린 김성철은 조금씩 죽음이라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고.
김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표현했다. ‘마음의 병’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고.
“그렇게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무작정 책을 보기 시작했어요. 사춘기 소년이었으니까. 알베르 카뮈의 이나 장 폴 사르트르의 와 같은 실존주의 문학 작품들이었죠. 또 엠마누엘 칸트의 같은 철학책들도 있었어요. 뜻도 잘 모르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죠.”
화가가 되고 싶었던 소년
사실 미술반에 들어갔던 것은 화가가 되고픈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화가를 꿈꾸는 모든 소년, 소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가족에게 그 꿈을 털어 놓는 것은 쉽지 않았다. 치열한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놀고먹는’ 예술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는 것은 ‘죄악’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좋은 학교에 어려운 시험을 거쳐 들어간 우등생이었기에 주변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고3이 된 김성철 학생은 이과인 전공에 미술이라는 취미를 덧대려면 건축학과가 좋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건축이라면 그림에 소질 있는 손재주도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손재주에 대한 담임선생님의 생각은 좀 달랐다. 선생님이 추천한 것은 ‘치과대학’이었다.
그 추천에 반감이나 저항은 없었다. 무엇보다 치과의사가 되면 근무시간이 짧다는 것이 매력이었다. “치과를 하는 친구는 늦게 출근해서 오후 일찍 퇴근한데, 그리고 골프 치러 간다더라”라는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시간에 그림을 실컷 그리면 되겠다 싶었다. 그림을 그리며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큰 고민 없이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치과대에 입학해서도 그림 그리기는 멈추지 않았어요. 학교에서 그림에 관심 있었던 친구들과 함께 아틀리에를 차렸어요. 대학 입학 후 우리가 다니던 화실에 매달 내는 돈만 모아도 월세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2년을 열심히 그렸어요. 학교가 있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시작해서, 전공이 다른 친구들 때문에 서대문구 북아현동까지 4번을 옮겨 다녔어요.”
마음의 병에 해답을 얻다
김 교수는 그 와중에서 가슴 한편에 풀리지 않는 무엇이 있었다. 바로 친구의 죽음에서 비롯된 마음의 병이었다. 그러다 만난 것이 이다. 밀교사상과 선종 사상을 설한 대승경전으로, 그는 이 경전을 읽다 죽음에 대한 의문이 조금씩 풀려가는 것을 느꼈다고.
“책에서 변치 않고 죽지 않는 것은 무엇이냐는 파사익(波斯匿)왕의질문에 부처는 이렇게 대답해요. 저 흐르는 강의 모습이 어릴 때와 지금이나 차이가 없듯, 그대 역시 외모는 바뀌었지만 보는 성품은 그대로라고. 원래의 나는 멸(滅)함이 없다는 설명을 듣고 하나의 깨달음과 함께 불교 교리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허겁지겁 불교에 관한 책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그의 ‘덕후’적인 기질이 발휘된 것이다. 그래서 시중에 출판된 불교 관련 책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더 이상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서점에 나와 있는 책들을 다 읽고 나니 불교에 관해 더 깊이 알 수 있는 책을 구할 수 있는 곳은 국내에 단 한 곳뿐이었다. 불교학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동국대학교 도서관. 그 도서관을 편하게 들락날락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은 동국대학교 학생이 되는 것뿐이었다. 불교연구원을 설립한 이기영(李箕永) 교수의 강의를 청강까지 했지만, 그것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1987년 동국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 교수가 있었던 인도철학과였다.
“치대에서 만난 아내는 처음에 이해를 못했어요. 책 때문에 대학원에 가다니. 그것도 치과의사가 인도철학과에 말이죠. 그래도 2년만 기다리면, 그 이후에는 마음껏 도서관을 다닐 수 있으니 참아 달라고 부탁했죠. 처음엔 학부 출신 학생들에 비해 많이 모자랄 것 같아 걱정했는데, 별 차이가 나진 않았어요. 알고 보니 제가 닥치는 대로 읽었던 책들이 대부분 불교학과 학부생들의 교과서였어요.”
그렇게 대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불교라는 학문에 대한 갈증은 더 커지기만 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아내는 이번에는 선선히 응해줬다.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당시엔 이미 치과를 차려 개원한 상태였기 때문에, 치과의사와 박사과정 대학원생이라는 두 가지 신분을 유지하게 됐다.
번역서 통해 불교학계에서 ‘주목’받다
그가 불교계에서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번역해 1993년에 발표한 이라는 책 덕분이었다. 은 나가르주나(중국에서는 용수(龍樹)라 불림)라는 1800년 전에 활동한 인도의 고승이 쓴 책으로, 나가르주나가 쓴 책들은 대승불교의 뿌리가 된다. 은 인도철학, 불교철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책이지만, 그동안 이 책은 제대로 번역돼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었다. 그가 번역하기 전까지.
“일반 불교학과는 일본어 정도만 할 줄 알면 됐지만, 인도철학과는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까지 할 줄 알아야 했어요. 영어는 기본이고.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언어를 익히는 것을 잘해서, 그간 번역이 안 된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가 불교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씌어진 원전을 직접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다른 학자들이 원전과 비교하며 연구할 수 있도록 해놓았죠.”
어쩌면 이 선택도 가장 ‘덕후’다운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여하튼 그동안 국내의 많은 불교학자들이 해내지 못했던 일을 현직 치과의사가 이뤘다는 점에서 불교계는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5년 대승불교의 공(空) 사상을 체계화한 개론서인 을 번역해 다시 세상에 내놓는다. 인도의 불교학자 무르띠(Murti)가 영어로 저술한 책이다.
그리고 내놓은 세 번째 책 으로 학계의 찬사를 받게 된다. 은 중론을 쓴 나가르주나가 에 대한 비판을 반박한 책이다. 이 책은 현재 산스크리트어 원전과 티베트역본, 한역본이 남아 있는데, 김 교수는 이 3가지 언어를 각각 우리말로 번역해 정확한 뜻과 번역의 배경을 알 수 있게 했다. 물론 후학을 위한 문법적 해설도 잊지 않았다.
3가지 책에 대한 번역이 끝나 있을 때, 그는 이미 불교학계에서 ‘불교에 관심 있는 치과의사’가 아닌 ‘불교학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치과 폐업하고 대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치고 나서 그가 준비한 것은, 치과를 쉬고 인도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었다. 불교 발상지에 가서 좀 더 깊은 공부를 하고 싶은 학문적 욕심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불교학에 대한 욕심’을 멈추게 만든 것은 가족도 치과도 아니었다. 바로 동국대학교였다.
“제가 전공한 공(空)사상 분야의 전공교수님이 건강이 나빠져 퇴직하셨다면서, 그 강의를 맡아 달라고 제안이 왔어요. 사실 그 분야는 논리학과 수학이 바탕이 되어야 해서, 일반 불교학자들 중에도 능통한 사람은 많지 않았거든요. 그것을 인연으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물론 치과는 그만뒀고. 단지 강의를 나가는 것이 아니라 치과의사로, 그리고 서울에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었지만 주저함은 없었어요.”
공사상은 의 ‘색즉시공’을 떠올리면 쉽다. 물질이 곧 비었고 빈 것이 곧 물질이니 감각과 생각과 행함이나 의식이 이와 같다는 뜻이다. 흔히 공(空)을 무(無)와 혼동하기 쉬운데, 공(空)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無)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흔히 우리가 살면서 큰방, 작은방 이런 표현을 하죠. 하지만 어떤 방을 보고 큰방이라고 부를 땐 이미 우리 기준엔 비교할 수 있는 방이 들어서 있는 거예요. 그런 이분법적 생각이 우리를 힘들게 하죠. 게다가 요즘의 승자가 독식하는 신자유주의는 이것을 더욱 부추겨 우리 삶을 어지럽게 하고 있어요. 늘 비교당하고, 경쟁하는 삶 말이에요. 이 신자유주의는 하나의 경제 원리일 뿐인데 우리는 이것을 행정과 교육, 문화에까지 도입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나 같은 프로그램을 보세요. 예술을 도구로 경쟁하고 있잖아요. 그 프로그램을 통한 폐해가 여실히 드러나죠. 결국 크게 소리 지르며, 성량이 큰 사람이 이기는 구도로 변질되잖아요. 노래라는 예술이 큰소리를 내는 시합이 아닌데, 경쟁을 통하다 보니 결국 획일화되는 것이죠.”
이런 사회적 변화 속에서 가장 외면 받고 있는 세대 중 하나가 바로 시니어들이다. 육체적 수명은 점점 길어지는데, 성과주의로 인해 설 곳을 잃고 사회적 수명은 짧아졌다. 그들에게 김 교수는 어떤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을까?
죽음에 대한 공포도 나름의 노력과 수행이 더해진다면 극복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타적인 삶을 사세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종족을 보전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데, 자식이 아닌 다른 사람을 돕는 것도 일종의 종족 보전 본능이에요. 나라는 개체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동족을 보존하면서 그 욕구가 충족되는 셈이죠. 거기에 수행을 통해 내가 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있는 제2의 삶을 살 수도 있고요.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머리로 깨닫고, 수행을 통해 마음에서 욕심, 분노, 교만과 같은 번뇌를 지울 수 있다면 가벼워진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빈자리 채워가며 기여하고파
앞으로 그의 목표는 한국 불교학에서 필요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그가 그동안 번역서들을 내놓으면서 기여했던 것처럼.
그가 2014년에 내놓은 같은 책들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진화생물학, 일반적으로 종교와 대립각을 세운다고 여겨지는 ‘진화론’을 불교적 관점에서 해석했다. 최근 각광받는 뇌과학도 불교적 관점에 분석해냈다.
“뇌과학에서 밝혀내지 못한 마지막 키워드는 바로 ‘마음’이에요. 뇌파나 뇌의 기능에 대해서 뇌과학자들은 많은 연구결과를 내놓았지만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죠. 하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과학적 연구 결과를 모두 포용하면서 마음이나 윤회(輪廻)까지 설명할 수 있어요. 그게 불교학의 힘이죠.”
한국이 출산율을 높이고자 최근 매년 10조 원 이상을 쓰는데도 출산율은 2015년 기준 1,24명으로 1.3명의 벽을 뚫지 못하고 있다. ‘1960년 합계 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자녀수) 6.0명→1990년 1.5명→2013년 1.22명→2015년 1.24명인 것이다. (2015.1.11.통계청‧‧보건복지부 잠정집계)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이대로 가다간 2100년 인구는 지금의 절반인 2,468만으로 줄어들 것이란 예상이다. 심지어 2500년에는 중남미 소국인 바하마 인구수준인 33만 명 수준이 될 것이란 최악의 시나리오를 내놨다. 전문가들은 취업-결혼-첫 출산-둘째 출산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끊어졌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문제가 심각하다.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환경이 안 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남편은 벌고 아내는 아이를 기르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었다. 아니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살면서 자녀를 봐주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벌어 집 장만하기가 요원하다. 둘이 죽자 하고 벌어야 집도 마련할 수 있다. 핵가족 시대가 된 요즘 아이만 덜컥 어른들에게 맡기기도 여의치 않다. 그나마 국공립 어린이집은 경쟁이 치열할 정도다.
아는 지인 중 한 사람이 의대를 나와 고향에 가서 산부인과를 개업하고 고향에 봉사하고자 했다. 그런데 몇 년 만에 접고 올라와야 했다. 아기를 받아본 것이 몇 명 안 된다는 것이다. ‘이래 가지고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라는 그의 말이다. 어느 TV에서는 일부 산부인과는 폐업하고 피부과를 개업하였다며 비싼 산부인과 기계가 먼지가 쌓인 채 덮여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골 마을에 아기가 없다. 노인들만이 마을을 지키는 시골이 늘어난다. 그러다 보니 폐교도 늘어난다. 어린 학생들로 넘쳐나야 할 학교가 전교생 다 합쳐 4명이라는 뉴스를 보며 마음이 아프다. 그 학교도 6학년 두 명이 졸업하면 조만간 문을 닫을 것이라 한다.
출산에 따른 가족계획표어를 살펴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1963년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
1966년 ‘3명의 자녀를 3년 터울로 35세 이전에 단산하자’
1971년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1980년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1986년 ‘하나로 만족합니다. 우리는 외동딸’,
1990년 ‘엄마건강 아기 건강 적게 낳아 밝은 생활’ 등 이었다.
2004년 “아빠! 하나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라는 내용의 가족계획 표어가 선보였고, 2006년 “낳을수록 희망 가득 기를수록 행복 가득”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출산을 장려하는 내용으로 변했다.
2010년대 ‘하나는 외롭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동생입니다.’라는 표어와
‘아들딸 구별 말고 많이 낳아 잘 기르자!’ 하는 표어가 등장했다.
출산장려에 나선 보건 복지부가 전 국민에 출산장려 공모를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자녀는 평생 선물, 자녀끼리 평생 친구." 이 표어가 2014년 7월 제3회 인구의 날에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출산장려 국민표어 공모전에서 우수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물론 표어가 출산장려를 촉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노년인구는 늘어나는데 생산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가분수 형의 인구구조로는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지금이 그 전환점인 것만은 확실하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제 그 몫은 정부에 있다. 여건만 되면 더 낳겠다고 한다. 국가가 그들에게 믿음을 주어야 할 차례다. 국가가 아이들을 키워준다는 믿음이다. 그래야 아이 울음소리가 도심 한가운데서 부터 저 지리산 꼴짜기 마을까지 우렁차게 울려 퍼질 것이다.
10여 년 전 필자가 개인회사를 차릴 때 지인의 소개로 세무사를 소개받고 사업자등록증을 냈다. 무역 중개업이었다. 초기에는 사업이 꽤 잘 되어 거래가 많으니 세무사도 할 일이 많았다. 세무사는 국내 회사만 상대하다가 영어가 등장하는 서류는 필자의 업무가 처음이었다. 무역을 모르니 용어도 모르고 어떻게 비즈니스가 되는지 반복해서 가르쳐 줘도 이해를 잘 못했다. 그러면서 월 10만원의 수수료를 지급했다.
그러다가 사업이 점차 시들해지자 일 년에 거래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줄었다. 분기별로 거래를 신고해야 하는데 분기에 거래가 한 건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수입은 점점 적어지는데 세무사 수수료는 고정비로 나가니 수수료를 좀 내려달라고 해봤다. 월 10만원이 최저라서 더 못 내려준다고 했다. 거래가 없어도 월 10만원은 내야 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거래도 일천한데 10년 동안 꼬박 월10만원의 수수료를 내야했다. 세무사가 도와주기는커녕 내 피를 빠는 기생충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는 한해에 거래가 한 두건으로 줄어들었다. 내가 낸 주문을 생산해주는 중국의 인건비가 너무 올라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사업을 접었다. 드디어 폐업신고를 하고 세무사에게 주는 수수료도 끊었다. 거래는 직접 생산 공장에 연결해주고 나는 손을 뗐다.
무역협회에서 마침 회원들 대상으로 무역 애로사항 공모전을 했었다. 거래는 뜸한데 고정비로 나가는 세무사 수수료에 대한 내 경험을 써서 보냈더니 1등상에 선정되었다. 개별적으로 세무사를 쓰지 말고 다른 업종처럼 대행사를 만들어 염가로 세무 대행을 해주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내 경우는 일 년에 한 두 건이니 건당 수수료를 지급하는 방식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런데 아직도 그렇게 실행이 안 되고 있다.
해마다 5월이면 국세청에서 세금 신고에 대한 공문 편지가 등기 우편으로 날아온다. 내가 통역 겸 고문으로 일해 주는 회사에서 내게 주는 약간의 고문료를 세무 신고하기 때문에 날아오는 것이다. 얼마 안 되는 금액인데 굳이 세무 신고까지 해야겠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내게 유일한 소속회사로서 그 가치가 있다. 사회 활동을 하다 보면 회사 이름을 적어야 할 때가 있는데 당당히 그 회사 이름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직업란에 ‘무직’이라고 적는 것과 소속 회사를 적는 것은 본인이나 상대방이 볼 때에도 큰 차이가 있다.
5월에 국세청에서 등기우편이 날아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세금 내라는 얘기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홈텍스’라고 집에서 컴퓨터로 세무처리를 하는 방법을 설명한 안내장도 들어 있지만, 그냥 봐서 하기는 어렵다. 처리할 때까지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면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그래서 옛날 세무사에게 한 두 해 신세를 졌다. 옛정을 생각해서 그냥 처리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더 이상은 그냥 처리해줄 수 없으며 처리를 원하면 또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해는 직접 세무서에 찾아 갔다. 필자처럼 세무신고 문의를 하려는 사람들로 문전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리려니 이렇게 시간투자를 해야 하는 것도 수수료에 들어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차례가 되었을 때 창구 직원이 줄을 잘 못 섰다며 다른 줄로 가라고 했다. 황당한 일이었다. 다른 줄로 옮기면 줄이 더 길어 그날 처리가 불가능해보였다. 필자가 난감해하자 창구 직원이 가만히 서류를 보더니 국세청 등기 서류내용이 틀림없으면 밑에 사인해서 접수 통에 넣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을 세무사는 대가를 지불하라고 했었다. 세무서에서는 긴 줄을 서라고 했었다. 인터넷으로 처리하지 못한 내게도 잘못이 있지만, 이의 없으면 사인해서 반송하라든지 세무서에 방문해서 접수 통에 넣으면 된다는 설명만 있었더라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서류를 접수해 놓으면 다음 달 국세 환급통지서가 날아온다. 종합소득세 공제초과라며 이미 낸 세금의 일부를 돌려주는 것이다.
올해는 등기 공문 편지에 반송 봉투까지 들어 있어 바로 사인해서 보냈다. 아주 간단한 일이다. 그걸 세무사는 그렇게 생색을 냈었다.
부재중에 등기 우편물이 국세청에서 와 있다고 현관문에 쪽지가 붙어 있었다. 우체국에 와서 찾아가라는 것이다. 다른 등기우편물은 그냥 편지함에 넣으라고 할 수 있지만, 국세청 공문이라니 그럴 수도 없었다. 또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이제는 환급 통보서류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체국에 가보니 과연 짐작대로 환급통보서였다. 우체국에 신분증과 함께 환급통보서를 제시하면 바로 현금 지급한다는 내용도 함께 있었다.
밥만 해 먹는 여자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폐업 하고나서 꼭, 10년! 집에서 밥만 해먹고 사회활동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밥만 해 먹으면서 가정 살림만 한다고 하면 누구든지 한심하게 본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사회활동을 해야만 훌륭하고 대단하게 여겨 주는 것이 요즘 사회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집에만 있다. 그렇다고 살림살이를 반짝반짝하게 닦아 빛이 나게 하며 살아가는 주부도 아니고, 요리솜씨가 뛰어나 특별하게 내세울 나만의 ‘필살기 메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살림도 대충하고, 청소도 대충하면서도, 남들처럼 취미하나도 계발하지 못하고 무취미로 살아가는 ‘게으른 은둔자’다.
게으른 은둔자
사람들은 동호회다, 친목계다, 동창회다 해서, 갖가지 모임을 만들어 가며 사람들을 사귀고, 만난다. 그러나 필자는 집에만 있어도 세상 편하고 좋다. 밖에 나가는 일은 꼭 필요 할 때만 나간다. 병원갈 때, 은행이나 관공서에 볼 일이 있을 때, 가끔 언니들이나 지인을 만날 때, 교회에 갈 때, 그리고 대부분 반찬거리 사러 대형마트에 갈 때뿐이다. 집에 화수분이라도 하나 있어서 반찬거리가 저절로 생겨난다면 외출 할일도 없을 터이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화수분이 내게는 없다. 그래서 주 1회 정도, 반찬거리 사러 할 수 없이, 사람이 북적거리는 대형마트엘 간다. 사람 많은 곳에서 휘둘리다가 오면, 너무 피곤해 초주검이 되곤 한다.
집에만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필자에게 묻는 말은 하나같이 ‘심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천만의 말씀! 그것은 사람들이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이렇게 살아도 하루 24시간이 항상 모자란다. 재미있는 영화보기, 다양한 프로의 TV시청, 그리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책들을 읽기에 하루는 너무나 짧다. 그러니 살림을 대충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필자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것보다 책이 더 좋고, 영화나 TV가 더 재미있다. 이렇게 은둔자가 된 것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답답해하는데, 이런 은둔을 반기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다. 필자에게 마음 놓고 밥을 시켜 먹으려는 사람, 바로 남편이다.
구석기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하루는, 오전에 야쿠르트 영업사원이 우리 집의 벨을 눌렀다. 문을 열고 나가니 깜짝 놀란다. 벨을 눌렀기에 나간 것뿐인데 왜 필자를 보고 놀라는 것인지 물어 보았다. “이 시간에 집에 계시네요?” 마치 신기한 뭔가를 보듯 한다. 내가 물었다. “이 시간에 우리 집에 내가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해요?” 야쿠르트 판매사원이 대답했다. “아니요, 요즘은 이 시간엔 집집마다 주부들이 나가고 집에 없거든요. 돈을 벌기 위해 나가든지, 취미활동을 하러 나가든지, 다들 나가고 없는데, 그런데 집에 계신 분도 있네요” 그녀는 집에 있는 필자가 마냥 신기한가보다. 마치 구석기사람이라도 본 듯이 그런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렇게 이상한가?’ 하긴 요즘은 모두들 바쁘게 살아가는데, 혼자서만 한없이 늘어져 있다는 생각도 가끔 하긴 했으니까, 야쿠르트 판매사원의 말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서 밥을 열심히 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것 까지는 아니라도, 당당한 일임엔 틀림이 없다. 그런데도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야쿠르트 판매사원의 말에 필자는 은근히 민망하고 부끄러운 생각까지 든다.
경제활동을 꿈꾸며
며칠을 두고 은둔생활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나이가 더 많아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오기 전에, 어서 털고 일어나 경제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인들은 취득하기 어려운 자격증을 묵혀 두는 것이 너무 아깝다고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다시 개설하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건 부동산 중개업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많이 걸어 다녀야 하고, 누군가 에게는 전 재산일 수도 있는, 고객의 큰 재산이 오가는 일을 해야 하므로 순발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직업이지, 시니어들이 할 수 있는 직업은 절대 아니다. 또, 멀지 않아 대기업과 외국기업들이 부동산 법인을 만들어서 부동산 중개업시장에 진입하는 날이 다가 올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부동산중개업의 경기가 좋지 않을 때이고 보니, 더더욱 사무소 개업은 할 수가 없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인터넷에 들어가 ‘서울시일자리플러스센터’에 구직 신청을 했다.
취업교육을 받다
하루는 ‘서울시어르신취업훈련센터’에서 취업교육을 받으라는 문자가 왔다.
취업교육을 받으러 가보니까, 여러 가지 교육이 다양하게 있어서 그때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들꽃 가드닝 교육, 동년배 상담가 교육, 도슨트 교육, 취업설계아카데미 교육등 그 외에도 다수의 교육을 더 받았다. 교육을 받고나서 그걸로 취업을 해보려고, 내게 맞을 것 같은 교육만 골라서 받았다. 그러다보니, 1년이 어느새 꿈결같이 흘러갔다.
취업을 못해 크게 실망
교육을 받고나면, 처음에 내가 그 교육을 선택 했을 때와는 결과가 달랐다. 필자가 직업으로 가지기에는 힘들고, 자신도 없고, 취업할 분야를 선택할 수가 없었다. 실망도 많이 되고,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교육 받을 때, 강사들이, 정말로 재미있고, 취미로 즐길 수 있는 분야를 직업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이 재미있어야 싫증 내지 않고 오랫동안 할 수 있을 테니까, 뭘 잘 할 수 있을지 꼭 취미부터 찾으라는 것이다. 나는 맞는 취미를 못 찾아서 지금까지도 취미생활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취업도 어려운가보다. 취업을 포기할까? 아니면 진로를 바꿔 볼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 진로를 ‘상담’ 쪽으로 바꾸어 보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적성 진로검사를 받다
센터에는 그만 다니려고 상담분야의 교육기관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였는데, 센터 강사님이 ‘취업설계아카데미교육’을 받아 볼 것을 적극 권유 하셨다. 뿌리칠 수가 없어서 이번 교육만 한 번 더 받아보고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하고, 교육을 받았다. ‘취업설계아카데미교육’은 직업상담 분야의 프로그램이 들어 있어서 ‘진로검사’도 받게 되었다. 이때는 이미 상담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울어 있어서 결과가 상담관련분야로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술적, 진취적, 탐구적’ 뭐 이런 단어만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상담분야로 전환 하려던 계획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갑자기 앞이 캄캄하고 막막해졌다. 지금 까지는 예술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온 사람인데, 예술이 왜 별안간 튀어 나오느냐 말이다. 상실감에 허탈해하는 이 모습을 본 담당 복지사가 ‘본인이 좋아하는 교육만 받지 말고, 관심 없는 분야도 골고루 받아 보면, 의외로, 관심 없던 분야에서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을 수도 있다’고,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었다. 생각해보니 복지사의 조언이 정말 맞는 말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교육을 골고루 다 받아 보기로 결심 했다.
방송인 교육을 받으며
‘취업설계아카데미교육’을 마치고 났을 때, 마침 ‘방송인교육’의 교육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복지사의 조언대로 평소엔 전혀 관심조차 없었던 ‘방송인교육’을 신청했다. 방송인 교육은 시니어 연기자, 모델, 리포터와 같은 방송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전문직 교육이다. 연기엔 관심 없지만, 커리큘럼을 살펴보니 방송기사작성과 리포터교육은 글쓰기가 있어서 받아보면 좋을 것 같았다. 리포터교육을 받으면서, 자기 소개하는 글을 발표했을 때와 리포터 기사작성을 했을 때 두 번 모두 강사에게 칭찬을 들었다. 고칠 것이 하나도 없고, 지금 바로 현장에 가서 리포터를 해도 되겠다고 했다. 큰 박수도 두 번이나 받았다. 도슨트 교육과 시니어 기자교육을 받을 때도 같은 칭찬을 받았다. 이렇게 여러 번 강사들에게 칭찬을 듣고 보니, 교육생들 사이엔 필자가 글을 잘 쓴다고 소문이 났다.
시니어 잡지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기자가 되다
시니어기자교육이 끝날 무렵에, 마침 경제신문 ‘이투데이’에서 만들고 있는 시니어잡지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 시니어기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 모집광고를 보고, 필자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바로 이거다. 여기서부터 시니어의 새 삶을 시작해야지!” 필자는 그 길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시니어기자 지원서를 냈다. 운이 좋게도 합격되어서, ‘기자’가 되는 어릴 적 꿈은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시니어기자인 ‘동년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글쓰기로 삶을 꽃 피우리라!
글을 잘 쓴다고 소문이 나고 보니, 소문 난대로 정말 글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글쓰기를 해볼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가 하나 또 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문예반은 아니지만, 방과 후에 집에서 원고지를 묶어놓고, 혼자서 취미로 틈틈이 시를 썼다. 그 덕분에 중학교 3학년 때는 학교 대표로 뽑혀서 대학교 백일장에 나가 장려상도 탔다. 상을 타고 보니, 시인이 되어서 기자를 해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건 언니들이 보던 여성월간지를 보고서 부터였다. 시인인데, 유명 인사를 인터뷰하러 다니는 걸 읽어본 후로는 필자도 ‘시인이면서, 기자가 되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생각했다. 그 티끌만한 작은 경험을 움켜지고, 지금부터라도 ‘글쓰기’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시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또, 시인이 되지 못하면 어떤가! 글쓰기를 하는 순간들이 행복한 날들이 될 것이고, 필자의 남은 삶을 아름답게 꽃피워 낼 것이다. 이 화려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삶의 노을이 지기 전에, 서둘러야겠다.
요즘에는 외식 매장을 운영해 성공하기 힘들다. 치열한 과당 경쟁 속에서 10명 중 9명이 실패를 경험하고 있다. 최근 정부 보고에 따르면 신규 창업자 약 99만 명 중 84만 명이 폐업해 창업 성공률은 15%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식당업을 포함해 사람의 감성을 움직여야 하는 서비스업은 성공하는 공식이 따로 있다. 평생을 식당업이 아닌 경리, 회계, 총무, 인사, 기획, 생산 등 업무에 종사한 사람이 10%의 창업자만 성공하는 시장에서 살아남는 공식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매출-비용=이익’이라는 공식으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이익=매출-비용’의 공식과 전자의 공식은 순서만 바꾼 것 같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식당 창업을 위해 지금껏 생각해 온 선입견을 배제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선입견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청년 창업자의 성공 가능성은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 취업 대신 창업을 선택하는 청년층이 증가 추세에 있다. 20대 후반 대학교 졸업을 앞둔 자녀를 둔 부모 입장에서 청년 창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다. 최근 청년층 중에는 취업보다는 창업 쪽을 선택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어려운 취업문을 뚫기보다는 창업을 통해 성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청년 창업의 종류는 무척 다양하다. 단순한 외식 매장 창업은 물론,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이나 아이디어 상품을 개발해 유통하는 창업, 적은 자금으로 승부하는 청소업 등의 무점포 서비스업에도 진출하고 있다.
하지만 청년 창업은 선입견이 없어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경험과 인맥 부족으로 실패하는 경우도 많아 부모님들이 청년 창업에 대해 우려하는 경우도 많다.
20대 청년 창업의 꿈을 이룬 이민수(25세) 씨의 경우 선입견을 버리고 자신이 부족한 경험과 인맥을 노력으로 승화시켜 성공한 경우다. 10평 남짓한 김밥전문점을 운영해 월 평균 2500만 원 이상 매출을 올리고 있는 이 씨. 이 씨의 성공 비결은 뭘까. 4가지를 짚을 수 있다.
첫째는 운영에 편리함을 더했다. 적은 인력으로도 운영이 가능하도록 주방과 카운터를 일체화함으로써 인건비를 절감하고 이렇게 절감된 원가를 음식에 반영해 푸짐하게 제공했다. 이 씨는 대학교를 갓 졸업한 터라 이런 부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지만, 외식업 창업으로 진로를 결정하면서 동종 업종에 종사하는 점주를 친밀하게 대한 결과 노하우를 빠르게 습득해 자신의 사업에 적용할 수 있었다.
둘째는 대중성 있는 메뉴를 선택했다. 외식업은 유행에 민감하다. 그 때문에 유행을 덜 타는 김밥전문점을 선택한 것이 성공 비결이었다. 김밥은 남녀노소 누구나 가볍게 구매하며, 유행 또한 타지 않는다고 김 씨는 판단했다. 특히 김 씨 매장은 김밥 재료를 다양화하는 차별화를 통해 20~30대 고객의 호기심을 자극해 성공할 수 있었다.
셋째 성공 비결은 지속적인 메뉴 개발에 있다. 김 씨는 1개월마다 김밥 하나를 개발한다는 생각으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신제품이 계속 나오다보니 하나의 메뉴에 쉽게 질리는 20~30대 고객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넷째는 원가 절감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점이다.
매일 구매해야 하는 재료의 원가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식재료 공급 회사의 상품 가격을 비교하고 품질에서 차이가 없다면 가격이 저렴한 상품을 적극 도입해 사용했다. 결제 조건을 명확하게 맞춤으로써 신뢰를 얻어 에누리 혜택도 얻고 있어 작은 매장이지만 수익성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어려운 외식 창업에서 청년 창업의 성공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이 씨와 같이 자신의 매장을 차별화하려는 노력과 노하우를 습득하려는 노력이 더해진다면 성공의 길은 멀지 않다.
이 씨의 사례처럼 청년 창업은 젊은이 특유의 빠른 습득력에 노하우와 전문지식이 더해지면 성공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따라서 자녀의 창업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녀가 진출하려는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을 쌓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또한 자부심을 가질 만큼 흥미를 갖고 있는지 등을 파악한 후 조언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글=이준혁 희망창업연구소장)
금융권 생활 20년, 돈 냄새를 누구보다 잘 맡는 사람이 있다. 퇴직 후 10년, 불운의 연속으로 실패에 쓴 맛을 본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이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NGO단체 (사)러브 월드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있는 박근배 사무국장이다.
그는 자신을 한때 ‘잘 나갔던 사람’이라고 자신있게 표했했다. 그러나 전혀 거만하거나 거북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본 경험도, 바닥에서 헤메던 경험도 있던 사람의 여유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은행연합회에서의 20년 직장 생활에 회의를 느끼거나 후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시절이 내 삶에서 가장 화려한 날이라고 표현 할 뿐이다.
◇ 잃어버린 10년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박씨의 퇴직 후 10년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지난 10년 간 3차례의 사업에서 실패해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 탓이다.
2003년 은행연합회에서 나온 후 그가 도전한 첫 사업은 골프연습장. 골프마니아다운 야심찬 행보였다. 그러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골프 프로 티칭 자격증까지 보유하고 있었지만, 경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호기롭게 시작했던 골프 연습장은 얼마 되지 않아 폐업을 하게 된다. 씁쓸한 결과였다.
가장 운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두 번째 사업이다. 2007년 그가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수고기 수입 사업이었다. 소고기 수입 회사의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전국적으로 촛불시위가 확산됐다. 박씨에게는 악재였다. 대한민국 사람 그 누구도 수입 소고기에 눈을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 2007년을 회상하며 말을 이어나가던 박씨의 얼굴에 허탈한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에 기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태국 골프투어회사 경영은 불운의 마침표였다. 그가 태국에서 골프투어회사를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태국은 반정부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시위는 과열양상을 보이나 싶더니 이윽고 유혈사태까지 벌어져 한국발 태국행 비행기는 파리만 날리게 됐다. 태국을 찾던 관광객들은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으로 발길을 돌렸다. 부푼 꿈을 안고 찾은 태국도 그에게 재기의 발판이 되지는 못했다.
그야말로 잃어버린 10년이었다. 은행연합회에 재직하면서 모은 돈도 모두 날려버렸다.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들이었다. 오직 신앙에 의존해 극복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수년이 흘렀다. 그때는 절망의 기운으로 몸서리쳤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값진 경험이 됐다.
“‘아 이게 하느님의 뜻인가’하고 받아들이게 됐어요. 그러면서 깨달았죠. 나이가 들고 이 세상을 뜨면 가지고 가지도 못할 돈. 이것을 쫓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요.”
◇ 주는 것? 얻는 것이 더 많은 NGO 활동
박씨에게 3번의 쓰디쓴 실패 경험은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만들어줬다. 그중에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자문도 있었다. 그 심오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지난해 필리핀에서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찾은 그곳의 여름은 태풍 하이옌 피해로 아수라장이었다. 특히 많은 사람이 얽히고설킨 집단 이재민 수용소는 처참함 그 자체였다.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 다짐했다. 이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고 미래를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말이다.
박씨는 다짐을 실천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 활동 범위 또한 국내·외를 넘나들었다. 국내에서도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가족들이 한국어 교육과 건강 검진까지 받을 수 있는 토털 케어 센터가 바로 그것이다. 자원 봉사의 현장에서 봉사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 활기를 찾고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볼 때 덩달아서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NGO 활동의 매력이라고 그는 얘기한다.
박씨가 NGO 활동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베푸는 것만으로 보람을 느꼈다면 결코 이 일을 오래 지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봉사와 온정이 전해지는 현장에서 삶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배울 수 있는 것. 살아가는 힘과 원동력을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이 박씨가 손을 놓지 않는 이유다. 자신의 힘을 보태고자 날아간 필리핀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보탠 힘보다, 더 많은 힘을 얻어 돌아왔다고 말한다.
“동남아 봉사활동을 가면 오히려 배우는 것이 더 많습니다. 항상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어야 감사할 줄 알았던 저였는데 그것이 행복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남아 사람들의 순수한 모습과 넉넉하진 않아도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모습. 이것을 보면서 진짜 행복함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배우게 됐습니다.”
◇ 영혼이 즐거워야 인생이 행복하죠
“제가 러브 월드 활동을 하면서 느낀 것은 저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는 거예요. 이것으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저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죠. 또 나로 인해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깨달은 후에는 영혼이 즐거워집니다. 이게 바로 행복한 인생인가 봅니다.”
박씨는 행복은 영혼의 즐거움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에게 돈은 이제 전혀 보람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적어도 금융권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쌓여가는 통장의 잔액이 보람의 척도이자 행복의 척도였지만 말이다.
그가 영혼을 즐겁게 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NGO 활동. 삶의 보람을 찾은 덕분인지 몇 년 전까지 실패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인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밝고 패기가 넘친다.
그가 보람 있는 인생 후반전을 살고자 하는 신중년들에게 하는 조언이 있다.
첫째, 자신을 위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 동안 가정을 위해 너무 많은 부담을 짊어지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보람된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그에게는 NGO 활동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둘째, 예전의 지위나 기억들을 내려놓는 것이다. 퇴직 이 후는 그야말로 인생 후반전이자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잘 나갔던’ 때를 기억하며 상대방이 그때의 지위로 생각해주고, 행동해 주길 바란다면 보람 있는 일을 찾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을 거란 것이다.
인생 후반전을 행복하게 살고 있는 박씨. 그가 러브월드 활동을 하면서 생긴 철학이 있다. 항상 가슴과 머리에 새겨 놓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죽을 때 가져가는 것은 오로지 육신뿐. 보람 있는 삶을 살아 멋진 이름 남겨놓고 가자.’
앞으로 퇴직금을 일시금이 아닌 연금으로 받으면 세금이 30% 줄어든다. 지금까지는 일시금 방식과 연금 방식의 세금부담에 차이가 없어서 대부분의 퇴직자는 퇴직금을 연금으로 수령할 유인이 없었다.
7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6일 발표한 2014년 세제개편안을 통해 근로자의 노후소득 보장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했다. 우선 퇴직금을 일시금이 아닌 연금으로 받으면 세금 부담을 30% 줄여준다. 이번 개편안에 따르면 10년을 근속한 뒤 퇴직금으로 1억원을 받을 경우 일시금보다 연금을 선택하는 쪽이 세금을 106만원 덜 내게 된다.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받는 것보다 연금으로 받는 게 유리하도록 과세 체계를 바꿔 근로자의 퇴직연금 가입을 장려하는 것이다. 별다른 노후 대책을 세우지 못한 퇴직자들이 유일한 안전판인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받아 탕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정부는 또 퇴직연금 적립을 유도하기 위해 세액공제 대상 퇴직연금 납입 한도를 기존의 연간 400만원에서 연간 700만원으로 300만원 늘렸다. 현재는 연금저축과 퇴직연금을 합한 세액공제 한도가 400만원으로 납입액의 12%인 48만원의 세금을 환급받지만 별도로 퇴직연금의 세액공제 한도 300만원을 추가한 것이다. 이에 따라 퇴직연금의 추가 불입 한도를 채우게 되면 연간 36만원의 세금을 더 돌려받을 수 있다.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받을 때 적용하는 공제는 40% 정률공제에서 15∼100%의 차등공제로 2016년부터 바뀐다. 퇴직소득 공제 기준을 급여 수준에 따라 차등화해 고소득자에게 유리했던 제도를 손질하겠다는 것이다. 퇴직 당시 급여가 1억2000만원이 넘는 퇴직자의 세 부담은 늘어나고 그 미만 퇴직자의 부담은 줄어든다.
소기업·소상공인이 폐업·노후대비 자금 마련을 위해 연간 300만원 한도로 불입하는 노란우산공제의 불입원금과 운용수익을 퇴직소득으로 분류해 낮은 세율로 과세하기로 했다. 10년 동안 한도까지 불입할 경우 기존 76만원이었던 세 부담은 17만원으로 줄어든다. 20년 불입할 경우 세 부담은 322만원에서 48만원으로 낮아진다.
퇴직 후 창업 전선에 뛰어든 '베이비붐 세대' 자영업자들은 더 팍팍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6일 발표한 ‘자영업자 가계부채의 특징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자영업자 중에서 베이비붐 세대 가구의 가계부채 규모는 지난해 1억1760만원으로 한 해 전 9927만원보다 18.5% 급증했다.
베이비붐 세대를 제외한 자영업 가구의 가계부채는 지난해 9163만원으로 0.3% 감소했다는 점과 구분된다.
2012년 기준으로 보면 은퇴한 베이비붐 세대가 대거 창업전선에 뛰어들면서 1∼99인 규모의 영세업체를 위주로 사업체 수가 13년 만에 가장 많이 증가했다.
전체 자영업자는 2012년 713만명에서 2013년 705만명으로 줄었지만, 50대 베이비붐세대 자영업자 규모는 212만명에서 217만명으로 오히려 늘었다.
문제는 베이비붐세대 자영업자 가구가 느는 것과 동시에 이들 가구의 가계부채도 가파르게 증가해 위험 수준에 다다르고 있다는 점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 후 창업하면서 사업자금 마련을 위해 부채를 크게 늘리지만, 주로 음식·숙박업 등 불경기 취약 업종을 선택하고 사업수완도 서툰 탓에 실패를 겪고 빚더미에 올라앉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한국 사회가 가계부채로 신음하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소득이 불안정하고 내수 경기에 민감한 자영업자들은 더 어려운 시간을 겪고 있다.
지난해 자영업자 가구의 가계부채는 총 부채의 43.6%를 차지한다. 가구당 부채규모도 자영업자 가구는 1억16만원으로 임금근로자가구의 5천169만원의 배에 가깝다.
이자 부담도 만만찮다. 자영업자 금융대출가구의 2013년 연이자 지급액은 526만원인 반면, 임금근로자 금융대출가구는 그 절반이 안 되는 245만원이다.
빚을 갚는 능력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자영업자 금융대출가구의 연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 비율은 2013년 226.0%로 임금근로자 가구의 126.2%보다 100%포인트 높다.
지난해 감소한 자영업자 6만7천명 가운데 82%(5만5천명)가 도소매 및 음식숙박업을 하다 폐업했다. 2011년에 새로 창업한 99만4천명 중 85%(84만5천명)가 작년까지 폐업 수순을 밟았다는 통계도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직장에서 은퇴한 베이비붐 세대가 과도한 부채에 의존해 성급하게 창업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당국의 대책이 필요하다”며 “유사업종간 과다 경쟁이 발생하지 않고 견실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업종을 선정하고 경영 노하우를 교육하는 시스템이 확충돼야 한다”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