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가져온 뉴노멀 시대를 맞아 외출이나 여행 방법도 확연히 달라졌다. 자신을 지키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여행으로 가장 쉬운 것은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것, 집콕에서 벗어나 자동차 차창 밖 풍경만으로도 가슴이 탁 트이는 드라이브 스루 여행지가 멀리 있지 않다. 자동차로 가는 섬으로 떠나보자.
수도권에서 당일치기 섬 여행으로는 이야기를 품은 서해의 대부도 권역이 있다. 시화방조제와 연륙교가 건설된 덕분에 배를 타지 않고도 대부도, 선재도, 영흥도 세 개의 섬을 마치 육지인 양 이어서 오갈 수 있는 편리함이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더구나 자동차로 다니기 때문에 마음 내키는 대로 핸들을 돌려 귀하고 아름다운 장소를 예기치 않게 발견하는 즐거움을 맛보기도 한다.
서울을 벗어나 시화방조제 위에 세워진 시화나래휴게소에서 잠깐 쉬면서 바라본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바로 근처엔 붐비던 대부 여객터미널과 싱싱한 자연산 생선회를 먹을 수 있는 방아머리 수산물 직판장이 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한산하다. 그 옆의 텅 빈 방아머리 해수욕장도 역시 조용하고 푸르기만 하다. 달라진 세상을 여기서도 확인한다.
섬마을의 평온, 선재도 목섬
대부도와 영흥도를 잇는 징검다리 섬 선재도는 주변 섬과는 달리 작고 한적한 섬이었다. 선재대교를 건너자마자 내려다보면 홀로 떠 있는 동그란 섬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미국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33개 중 하나인 목섬. 하루 두 번 바닷물이 빠지면 곡선의 모래 갯벌이 나타난다. 그 길을 향해 걷는 이들에겐 멋진 추억의 길이 되고 목섬은 여전히 푸른 하늘과 갯벌과 해송이 함께한다.
선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선재도. 담벼락마다 동화처럼 아이들이 뛰놀고 봄날 꽃그늘 아래서 설레던 마음들이 피어나듯 고즈넉한 섬마을의 벽화가 정답다. 고양이가 조을고 있는 골목 옆으로 선재리 커피집의 잠자리 날개 같은 커튼이 저 혼자 바람에 날리고 있다. 모든 게 멈춘 듯 적막하다. 한때 인기 있던 마을의 갯벌체험이 잠잠하다. 입장료만 내면 호미와 장화를 빌려주고 1인당 1.5kg까지 바지락·동죽을 캘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정적만 가득하다.
이국적인 감성 카페
그나마 사람들의 발걸음이 있던 곳, 사진작가 김연용 씨가 운영하는 카페 선재도의 명물이었던 뻘 다방, 한때 줄을 서서 차를 주문했던 감성 카페의 앞마당은 해변과 갯벌이다. 갖가지 문화행사를 했던 이곳에 몇 명의 여행자만 오간다. 바다를 향한 풍경이 이국의 정취를 연상케 하고 곳곳이 사진 스폿이었는데 이젠 야외의 빈 의자에 뙤약볕만 내리고 있다. 나오며 돌아본 간판의 큰 글씨가 마음에 들어온다. "Hakuna Matata(걱정하지 마, 잘될 거야)."
숨어들 듯 고요한 측도
뻘 다방 옆으로는 측도로 들어서는 좁은 길이 보인다. 밀물 때는 선재도와 분리되고 썰물 때는 잠수 도로를 이용해 도보나 차량 통행이 가능한 아주 작은 섬이다. 물속에 세워졌던 기둥이 바닥까지 드러나고 그 바닷길을 건너 측도에 드니 세상과 아주 뚝 떨어진 느낌이다. 인적 없는 조용한 섬마을 뒤편 산 아래에 서서 바다 건너편 마을을 딴 세상을 보듯 본다. 세상모르게 숨어들어 한적하게 쉬고 싶을 때 딱 좋을 듯하다.
물속 길 따라 박혀 있는 전신주 / 그 기둥에 새겨 넣었던 돌의 말 / 하루에 두 번 물이 길을 낳을 때마다 / 상처를 열어 말리며 / 달을 향해 푸르게 웃었을까 / 밖으로 드러난 불안을 어루만지며 / 흔적을 수장할 물때를 기록 중일까 /
-박선희 시인의 '측도 가는 길' 중에서
배 타지 않고 다시 섬, 영흥도
그곳에 가면 100년이 넘은 꼬불꼬불한 소사나무 숲이 울창하고, 밀물과 썰물의 잔잔한 파도소리를 들려주는 십리포 해수욕장이 기다린다. 그리고 인천 상륙작전 당시의 거점이므로 해군 영흥도 전적비가 있다. 포구에 정박해 있는 서해교전의 퇴역함인 참수리호를 보며 역사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섬의 거대한 분재전시장 같은 소사나무 군락지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모두 구불구불 비틀어지고 뒤틀린 기이한 형상이다. 이런 독특한 생김새를 담기 위해 사진가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몇 년 전에 찾았을 때는 자연스러운 방풍림으로 그 자리를 지켰는데 이번에 가보니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주변에 울타리가 생겼다. 지금은 소사나무 숲 주변 벤치에 드문드문 떨어져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이들의 멋진 배경으로 든든하다. 염분이 많고 모래와 자갈의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 100년이 훌쩍 넘는 소사나무가 아름다운 숲이 되어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이 지역의 관광자원이 되어주고 있다.
소사나무 저편으로 펼쳐진 십리포 해변에 더러 사람들이 보인다. 영흥도 선착장에서 10리쯤의 거리에 위치했다고 해서 십리포다. 마치 철 지난 바다처럼 한적하다. 덱의 파라솔 위로 햇살이 쏟아지고 아무 말 없이 무수한 이야기를 품은 그 바다를 마음에 담는다.
시간의 흔적 켜켜이 쌓인 대부광산 퇴적암층
섬을 달리다 보면 바다만 보이는 게 아니다. 세월을 품은 이색적인 숨은 명소를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호수와 퇴적암층이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는 대부광산 퇴적암층을 찾아갈 생각에 핸들을 돌렸다.
입구의 풀숲을 조금 지나면서 범상치 않은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왠지 가슴이 뛴다. 7000만 년 전에 만들어진 퇴적암층은, 짙은 녹색의 수면을 뚫고 공룡이라도 튀어오를 듯 원시적인 풍경이 압도한다. 옛날엔 광산이 있던 자리였는데 1997년 초식 공룡의 발자국과 중생대 식물화석이 발견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다. 서울 근교에서 중생대의 환경과 공룡의 생생한 흔적을 볼 수 있는 귀한 기회다.
뒤편의 전망대에 오르니 호수와 퇴적층을 조망하기 좋다. 넓게 탁 트인 잔디밭으로 시원하게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옆길을 돌아 호수 뒤편의 전망대에서는 탄도항과 제부도가 보이고 요트가 떠 있는 전곡항도 볼 수 있다. 세월의 한 지점에 서서 바라보는 기억 속의 하루가 또 한 겹 쌓인다. 공룡은 사라졌지만 켜켜이 쌓인 오랜 시간의 흔적으로 가슴 두근거리는 시간. 이렇게 살아가는 시간도 여기에 또 한 켜 쌓일 테고 우리네 삶은 오늘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퇴적암층 주차장 옆으로는 제법 큰 규모의 대부도 365 시티 캠핑장이 있다).
바닷길 달려 섬 너머 제부도
예전 같으면 배를 타고 건넜을 섬 대부도와 선재도를 거쳐 영흥도까지 자동차로 휘익 달리니 시간이 여유롭다. 몇 번쯤 차에서 내려서 잠깐씩 둘러보았던 것 말고는 대부분 자동차로 달렸다. 길가에 바지락 칼국수 가게가 즐비했지만 떠나기 전에 샌드위치와 간식을 준비했다. 자동차 문을 활짝 열어놓고 서해의 바람을 맞으며 소풍처럼 점심을 즐기고 커피 한 잔의 맛을 누렸다.
시간이 제법 남는다. 남아 있는 늦은 오후의 시간에 제부도로 가볼까 즉흥적으로 방향을 바꿔 그 바닷길을 달렸다.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바닷물 갈라짐 현상은 제부도의 매력이다. 2.3㎞의 열린 바닷길 양옆으로 펼쳐진 갯벌 위로 하늘이 끝없이 푸르다.
늦더위를 피해 바다를 찾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거리를 두고 제부도의 바닷바람 속에 있다. 홀로 텐트 그늘에 앉아 바다를 향해 앉아 사색하는 모습이 그림 같다. 섬 남단의 매바위 부근에서 북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모래 해변에 멀찍이 거리 두고 텐트가 몇 개 자리 잡고 있다. 물 빠진 너른 갯벌 위에선 진흙투성이의 아이들이 즐겁다. 북적이지 않아도 제법 계절이 느껴진다. 해안 따라 즐비한 그늘 의자가 비어있고 사람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자연이 만들어낸 섬은 이럴 때 우리에게 위안이 되어준다.
수도권에서 가까워 이따금 찾아가는 곳이지만 이젠 발길이 닿는 곳들마다 예사롭지 않다. 낯선 듯 감사한 시간이 때때로 필요하다. 눈길 머무는 곳마다 풀숲, 모래밭, 산, 나무, 하늘, 바다, 갯벌, 햇살, 구름, 바람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지는 요즘이다.
신의 축복 탄도항 노을
느지막이 돌아가는 길이라면 탄도항의 일몰을 경험해볼 만하다. 일몰시간은 대략 저녁 7시 전후 즈음이다. 하루 두 번 물 빠짐 현상으로 바닷길이 열리면 건너편 누에섬까지 다녀올 수도 있다. 탄도항 제방둑에 미리 자리 잡고 앉으니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바다의 하루가 저물고 노을 속 사람들의 실루엣도 풍경이다. 신의 축복처럼 번져가는 노을만으로도 충분한 하루다.
추천 코스
시화방조제→대부도 방아머리 해수욕장, 방아머리항 선착장→선재도 벽화마을→목섬, 뻘 다방→측도→영흥도 십리포 해수욕장. 소사나무 군락→대부도 대부광산 퇴적암층→제부도 해안→탄도항 노을→서울
코로나19의 여파로 세상이 바뀌고 있다. 당연히 여행 풍속도도 달라졌다. 여럿이 다니는 여행은 점차 사라지고 혼자 혹은 둘이 떠나기 좋은 한적한 드라이브 코스가 인기를 얻고 있다. 인적이 드문 곳, 적당한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 곳을 선호하는 추세다. 그렇게 훌쩍 떠나 갑갑했던 마음을 풀어놓고 당일치기로 놀기 딱 좋은 곳이 있다. 바로 강화도다!
강화도령이 살았던 터전, 용흥궁
조선 25대 왕 철종(哲宗)이 강화도령이었던 시절에 지냈던 곳이다.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하는데, 당시 강화도령은 가족이 모반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14세 때 이곳 강화로 유배되었다. 원래는 보잘것없는 초가였으나 훗날 강화도령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 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집을 보수 단장해 용흥궁이라 불렀다. 사람이 살지 않아 좀 휑한 모습이지만 관리는 잘되어 있었다. 150년 된 고택의 안채와 사랑채, 별채, 마루, 작은 정원, 우물, 반질반질한 문고리를 보며 강화도령 이원범으로 살던 철종의 모습이 느껴져 짠했다. 14세부터 19세까지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산으로 땔감을 구하러 가기도 하며 평민으로 살았던 터전이다. 강화도령 이원범, 철종의 이야기가 깃든 용흥궁 담장에는 능소화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용흥궁은 강화 나들길 1코스다. 강화읍 관청리 441-0
한옥의 멋,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용흥궁 담 넘어 건너편 언덕에 전통 한옥으로 지어진 성당의 외양이 독특하다. 얼핏 보면 성당 같지 않고 마치 절처럼 보인다. 바실리카 양식과 동양 불교 사찰 양식을 융합한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마당 한쪽에는 불교를 상징하는 나무 보리수가 100년 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찰의 범종처럼 생긴 종도 보인다. 분명 성당인데 절의 분위기가 더 느껴지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건물이다. 서로 다른 전통문화를 존중하고 함께하는 남다름을 본다.
성당 입구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며 마음을 가다듬어본다. 상사화가 바람에 흔들리는 마당엔 초대 주교 고요한 신부의 비석과 성당 축성 100주년 기념비가 있다. 강화 시내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오는 높은 언덕이다.
댓돌 위에 신발을 벗고 들어서면 목재로 이루어진 깔끔한 실내가 성스러움을 더한다. 동서양의 오묘한 분위기가 잘 조합된 실내다. 열린 창으로 자연의 풍경이 한가득 들어온다. 양 벽면에는 강화성당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진열돼 있다. 밖으로 나가면 뒤편으로 낮은 담장의 사제관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약탈당한 계단 난간 등 건축물의 일부가 복원된 모습도 볼 수 있다. 주변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는 성당이다. 강화읍 관청길 27번길 10
소창길’을 아시나요
용흥궁과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을 나와 내려오다 보면 길가에 서 있는 커다란 굴뚝이 보인다. 1960~70년대에 강화도 산업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심도직물의 흔적이다. 직물 공장은 강화도 경제의 대표적 징표다. 강화도서관 옆으로 이화직물 터가 있고, 아기들 기저귓감으로 많이 쓰였던 친환경 직물 ‘소창’을 만들어내던 유명 직물 업체들이 터를 잡고 있다. 그래서 이 골목에 ‘소창길’ 코스가 새롭게 더해졌다. 강화 중앙시장 B동 3층에 위치한 ‘관광플랫폼’이 스토리워크 길 출발지다. 1960년대의 직물공장 전경과 소창 만드는 과정을 구경하고 체험할 수 있는데 현재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한산하다. 가는 길에는 100년의 세월을 품은 낡은 건물에 자리 잡은 ‘낙원 떡집’이 있다. 순수한 떡 맛을 자랑한다. 질 좋은 강화 쌀에 첨가물은 소금 한 가지밖에 안 넣는다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소박한 식사를 하고 싶으면 읍내 중심에 있는 50년 전통의 ‘강화국수’ 집으로 가면 된다. 강화도에 가면 알싸한 순무김치 맛도 봐야 한다.
※소창길 코스 중앙시장 관광플랫폼에서 출발해 심도직물 굴뚝 - 천주교 인천교구 강화성당 - 이화직물 터 - 금융상사 - 조양방직 - 동광직물 - 남화직물 - 상호직물 - 경도직물 - 소창체험관으로 이어진다. 2시간 정도 소요.
빈티지 감성 카페, 조양방직
과거의 방직 공장을 그대로 살려서 빈티지한 매력을 보여주는 레트로 감성 카페다. 조양방직은 1933년 홍 씨 형제가 민족자본으로 설립한 방직공장으로 한때 엄청난 전성기를 누렸다고 한다. 그 시절의 흔적들이 빈티지한 멋으로 탈바꿈해 핫한 카페가 됐다. 그 옛날 우리의 언니와 누나들이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기계를 돌리던 시절을 상상하도록 자극한다. 강화읍 향나무길 5번길 12
평화로운 궁궐터, 고려궁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해온 우리 민족의 역사가 있는 곳. 고려 왕조가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38년간 머물렀던 궁궐의 터다(사적 제133호). 당시의 궁궐은 1270년 송도로 환도할 때 몽골의 압력으로 모두 허물어졌고 행궁과 장녕전, 만녕전, 외규장각 등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지금은 강화 유수가 업무를 보던 동헌과 유수부의 경력이 업무를 봤던 이방청만 남아 있다. 푸른 잔디가 시원하게 깔린 자연 풍경이 평화롭기만 하다. 강화읍 강화대로 394
조용한 마음의 울림, 교동마을과 향교
느릿느릿 옛 시간을 즐기고 싶다면 시간이 멈춘 듯한 교동마을로 가볼 일이다. 예스럽고 정감 있는 마을을 둘러보다 보면 지치고 복잡했던 마음이 어느새 가라앉는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되면 강화읍에 위치한 강화 향교(고려 전기에 창건)와 우리나라 최초 향교인 교동 향교 방문도 빠뜨릴 수 없다. 강화나들길 1-18코스다. 강화군 교동남로 229-49
해안도로 따라 의미 있는 드라이브 코스, 덕진진
강화도에는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의 5진(鎭)과 광성보, 선두보, 장곶보, 정포보, 인화보, 철곶보, 승천보의 7보(堡)를 합친 강화 12진보(鎭堡)가 있다. 그중 덕진진은 김포 덕포진과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포대였다.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하며 해안도로를 따라 볼 수 있는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전적 시설 풍경은 산책과 드라이브 코스로 의미 있다.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섬에서 즐기는 슬기로운 문화생활 ‘도솔미술관’, ‘해든뮤지엄’, ‘전원미술관’
최근 서울과 같은 대도시를 떠나 작품 전시를 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고즈넉한 강화 땅에서 감상하는 개성 있고 멋진 미술관. 언택트 여행으로 유유자적 멋진 시간을 누려보자.
도솔미술관은 초지진과 가깝고 고즈넉해서 좋은 사람과 조용히 산책할 겸 가보면 좋은 장소다. 강화 들판을 달려 소나무가 예스러움을 더해주는 작은 마을에 다다르면 단정한 한옥 갤러리가 눈에 들어온다. 총 4개의 전시관이 있는 도솔미술관은 야외전시관, 2개 층의 실내 전시장, 별관으로 나뉘어 있다.
뜰안채 야외전시장에서는 사진작가의 아프리카 바오밥나무 작품이 전시돼 있다. 실내로 들어가면 별관을 비롯해 2개 층으로 이루어진 전시장에서 매달 바뀌는 전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장 창가에 걸터앉아 강화 들녘을 유유자적 내다보며 함께 온 사람과 조용조용 대화를 나누는 다정한 풍경이 아름답다. 강화군 길상면 길상로 210번길 52-71
해든뮤지엄은 갤러리로 걸어 들어가는 입구의 긴 경사면에서부터 설레게 된다.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건축물로 2013년 한국건축가협회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건축 베스트7’에 뽑히기도 했다. 실내 사진 촬영이 안 돼 아쉽지만 야외의 조각작품과 설치미술, 그리고 대형 미러가 볼 만하다. 정원의 휴식공간과 잘 어울리는 자연이 아름다운 곳. 강화군 길상면 장흥로 101번길 44
전원미술관은 강화도에서 출생한 한국화가 유광상 씨가 운영하는 갤러리다. 작가의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작품과 일본 유학 시절에 그린 그림 등을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다. 강화군 송해면 솔정리 561
이색적이고 따뜻한 ‘동네 책방’
강화군청 부근엔 볼거리가 많다. 강화성당과 용흥궁, 중앙시장, 궁터, 중앙시장 청년몰, 소창길…. 이곳들을 다 돌아본 뒤 한숨 돌리며 조용히 서점을 들러보는 건 어떨까. 소금빛 서점, 국자와 주걱, 책방 시점 등은 강화도 간 김에 누리는‘소확행’이다.
‘소금빛 서점’ 이 있는 고택 계단을 올라서면 대문 바로 앞 양옆으로 ‘그 여자 그릇 유림상회’와 ‘그 남자 책방 소금빛 서점’이 있다. 그 남자의 안목으로 고른 책들이 진열된 소금빛 서점은, 얼마 전 방영 종료된 SBS 드라마 ‘더킹: 영원의 군주’에서 배우 이민호가 책 읽는 장면을 찍은 장소로 더 알려졌다. 그 여자의 그릇 유림상회는 채색이 독특한 그릇 한 점쯤 갖고 싶게 하는 곳이다. 그 남자, 그 여자의 책과 그릇이 있는 감성 공간이다(서점과 그릇가게 앞의 대문을 열면 100년 고택 대명헌을 만난다. 김구 선생이 한동안 머물렀다는 운치 있는 한옥 숙박업소로 예약제로 운영된다).
강화읍 남문안길 7
‘국자와 주걱’은 한적한 마을의 한옥을 책방으로 꾸민 시골 책방 겸 북 스테이다. “작은 책방. 작고 불편함. 그러나 좋은 책. 따뜻한 밥상. 깨끗한 잠자리. 그리고 많은 정”이라는 책방 소개글이 다정하다. 책만 보러 갔다가 주인장의 푸근한 인심에 다시 찾는 곳이다. 큰 도로에서 마을길로 접어들어 꼬불거리는 좁은 길로 주춤주춤 운전해 들어가면 이 특별한 책방과 만난다. 강화군 양도면 강화남로 428번길 46-27
아름다운 일몰에 반하다, 장화리
강화도의 마지막 코스는 누가 뭐래도 일몰 풍광이 장관인 장화리다. 강화도 남부 해안도로를 따라 펼쳐지는 강화 갯벌과 서해의 해넘이는 여행자들의 관심사다. 이곳에서의 일몰 시간은 아주 짧다. 찰나의 장화리 노을 앞에서 두근두근하면서도 경건한 시간을 맛보며 강화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다.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어렵게 되자, 이국적인 국내 여행지가 주목받고 있다. ‘바다 위의 식물 낙원’이라 불리는 경남 거제도의 외도 보타니아도 그중 한 곳이다. 사실 외도 보타니아의 인기는 새삼스럽지 않다. 1995년 개장 이래 누적 방문객 수가 2000만 명이 넘는 거제 대표 명소이니 말이다. 나만 해도 그 방문자 수에 ‘4’를 더했다. 이번 방문 때는 비가 왔다. 비 오는 날의 섬 여행도 꽤 낭만적이었다.
바깥 섬이 식물의 낙원이 되기까지
거제도 남쪽 외딴 섬 외도(外島)는 미운 오리 새끼였을까. 마음 심 자를 닮아 ‘지심도’, 보배에 비길 만한 풍광을 지녀 ‘비진도’라 불리는 거제도의 다른 섬들에 비하면 이름조차 초라한 섬이었다. 그랬던 외도가 부침개처럼 운명이 뒤집히는 일이 벌어졌다. 50여 년 전 이창호(1934∼2003) 씨가 낚시하러 외도에 들른 것이 인연이 되어, 몇 년에 걸쳐 외도를 매입한 것이다.
이창호 씨와 그의 아내 최호숙 씨는 1969년부터 외도를 해상식물원으로 가꾸기 시작했다. 무시로 닥치는 태풍과 거친 파도에 맞서며 척박한 땅에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웠다. 외도는 기후가 따뜻하고 물이 풍부해 종려나무, 야자나무, 선인장 같은 아열대 식물이 자라기에 적합했다. 첫 삽을 뜬 지 26년이 지난 1995년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외도 보타니아를 선보일 수 있었다. ‘보타니아’(botania)는 ‘botanic’과 ‘utopia’의 합성어로서 바다 위 ‘식물의 낙원’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외도는 ‘보타니아’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름답고, 이국적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마치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된 것처럼.
국내 최초 해상식물원의 인기는 개장한 지 25년째인 지금도 여전하다. 외도행 유람선 선착장이 거제도에 7곳이나 있으며, 유람선이 매일 여러 차례 외도 보타니아를 왕복한다. 바람의 언덕과 더불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하는 ‘2019~2020 한국관광 100선’에도 들어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해금강 유람선 타고 바다 위 정원으로
외도 선착장 7곳 중에 도장포를 애용한다. 도장포 가까이에 외도 보타니아와 인기 쌍벽을 이루는 바람의 언덕과 신선대가 있어서다. 외도로 가는 길에 즐기는 해금강(海金剛) 유람은 덤이다. 선실 밖으로 나가 출렁대는 유람선에 몸을 맡기고, 파도를 가르며 달리는 기분이 상쾌하다.
해금강은 강이나 바다가 아닌, 바다 위로 솟은 바위섬이다. 금강산처럼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바다 위의 금강산’이라 부른다. 해금강 해안 절벽 위에는 거센 바람을 견디며 살아온 노송들과 석란, 풍란 같은 희귀한 난초들이 자생한다. 절벽 아래에는 파도가 오랜 세월 조각해놓은 십자동굴, 부엌굴 등의 해식동굴이 있다. 선장의 설명을 들으며 해금강의 기암을 바라보면 사자, 촛대, 기도하는 소녀처럼 보인다.
30분가량의 해금강 유람이 끝나면 외도 보타니아에 도착한다. 외도 모양을 형상화한 빨간 등대가 맨 먼저 반긴다. 선장이 1시간 반 뒤에 유람선으로 돌아오라고 당부한다. 순환형 산책 코스대로 걸으면 되므로 관람시간 90분이 턱없이 부족하진 않다.
유럽식 정원과 건축물로 꾸민 외도
외도 보타니아 관광은 아치 모양의 작은 정문을 지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세계 각국 방문객을 맞이하는 외도 광장에는 한글·영어·한자로 쓴 ‘외도 보타니아’ 조형물들이 장식돼 있다. 광장을 지나면 향나무 여러 그루를 연결해서 한 몸처럼 다듬어놓은 나무 작품이 보인다. 이곳의 인공미를 대표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이 나무는 눈이 부리부리한 뿔 달린 도깨비 또는 기세등등한 불꽃을 닮았다. 산책로 입구에 턱 버티고 서 있어 사찰의 사천왕상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선인장, 알로에, 용설란 등이 자라는 선인장가든을 지나면 외도 보타니아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비너스가든이 나온다.
지중해풍의 건축물과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뻗은 정원,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세워진 하얀 비너스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최호숙 씨가 영국 버킹검 궁의 뒤뜰을 모티브로 직접 구상하고 설계한 공간이라고 한다. 비너스가든 끝에 있는 유럽식 사택 ‘리하우스’는 KBS 드라마 ‘겨울연가’(2002)의 마지막 촬영 장소였다. 외도 보타니아를 전국에 소문낸 일등 공신이다.
이탈리아어로 ‘환영합니다’라는 뜻을 지닌 벤베누토정원은 사계절 꽃이 피는 꽃동산이다. 철따라 튤립과 양귀비, 수국, 동백 등이 피고 진다. 이 꽃들은 관람객들의 감탄을 먹고 자란다. 꽃길을 걷다 보면 짙푸른 동백숲길과 대숲길이 나타난다. 밀감나무 3000그루와 편백나무 8000그루가 늘어선 ‘천국의 계단’을 내려서면 야자수 산책로가 기다린다. 프랑스식 연못과 조각상을 배치해 이국적인 정취가 가득하다. 외도 보타니아는 구석구석 아름답다. 귀부인이 그려진 화장실 이정표마저 예쁘다. 화장실 벽 둥근 창으로 보이는 해금강과 외도 등대는 또 어떻고.
바람의 고향 도장포
외도 관람을 마치고 도장포로 돌아와 바람의 언덕에 오른다. 하늘이 맑으면 언덕 아래에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비췻빛 바다가 일렁인다. 바람의 언덕은 바다로 돌출한 곶이라 늘 세찬 바람이 분다. 풀들이 바람 부는 방향으로 일제히 누워 있다. 언덕 위의 풍차는 신나서 춤추듯 바람개비를 씽씽 돌린다. 비바람에 우산이 뒤집혀도 시원한 바람이 그저 반갑다. 만약 이 언덕을 ‘도장포 잔디공원’이나 ‘도장포 민둥산’이라고 이름 지었다면 얼마나 낭만이 없었을까.
풍차 왼쪽, 숲속 계단을 오르면 호젓한 동백숲길이 나온다. 이 숲길이 도장포마을 윗길로 이어진다. 윗길에서 굽어본 도장포마을 전경도 엄지를 치켜세울 만큼 장관이다. 마을 뒤로는 산이, 앞으로는 바다가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도장포마을 남쪽 바닷가에는 신선이 머물렀다는 신선대가 있다. 부안의 채석강과 지형이 비슷하다. 책을 포개놓은 듯 가로지층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 태곳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공룡 발자국 같은 작은 웅덩이도 수없이 많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는 파도가 으르렁대며 들락거린다. 신선대를 본 사람들이 웅장한 기암절벽과 절벽 아래 몽돌해변을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이색 명소&맛집◇
매미성 매미성은 2003년 태풍 매미 때문에 바닷가 경작지를 잃은 백순삼 씨가 자연재해로부터 작물을 지키기 위해 16년 동안 혼자 쌓아 만든 성벽이다. 처음에는 시멘트 벽돌로 쌓아 볼품이 없었다. 점차 네모반듯한 화강암을 쌓고 시멘트로 메우는 방식으로 바꿔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유럽 중세시대의 성을 연상케 해 이국적인 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실제 풍경보다 사진에 담았을 때 더 멋지게 보여 인생사진 명소로 유명해졌다.
경남 거제시 장목면 복항길
외도널서리 외도 보타니아 설립자인 최호숙 씨가 구조라해변에 유리 온실 콘셉트 카페인 외도널서리를 개장했다. ‘널서리’(nursery)는 ‘묘목을 기르는 땅’이라는 뜻으로 외도 보타니아와 통하는 면이 있다. 유럽풍으로 지어 외국에 여행 온 듯한 기분을 낼 수 있다는 점도 같다. 테라스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빛깔 고운 구조라에이드 한 잔 어떨까. 계절에 상관없이 초록 식물을 감상할 수 있는 게 큰 매력이다.
경남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로4길 21, 매일 10:00~21:00
예이제게장백반 거제도에서 이름난 무한리필 게장 백반집이다. 본점은 도장포에 있다. 바람의언덕점은 도장포와 가까워 외도 관광 전후에 들르기 좋다. 메뉴는 게장백반 한 가지다. 메인 요리인 간장게장과 꽃게장을 비롯해 불볼락구이, 간장새우, 충무김밥, 조개미역국 등 반찬이 한 상 가득 나온다. 작은 꽃게를 사용하지만, 살이 제법 차 있어 먹을 만하다. 쫀득한 맛이 일품인 간장새우도 리필된다.
경남 거제시 남부면 해금강로 132, 매일 10:30~21:00, 게장백반 1인분 1만5000원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2020년은 나의 고교 졸업 50년, 대학 입학 50년이 되는 해다. 고교 졸업 50년 행사와 기념 여행은 코로나의 위험 속에서도 이미 6월에 강행했다. 이보다 앞서 5월에는 대학 동기들이 모교에서 재상봉 행사를 했다. 많이도 달라진 교정을 둘러보며 반세기 전에 맺은 우정을 되새긴 모임은 재미있고 유익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은 탓일까. 고려대 독문과 70학번 동기들은 전북 군산 고창 일대를 도는 노래여행을 추가로 기획했다. 서울, 서천, 부산에서 각각 모인 여덟 명은 7월 25~26일 1박 2일 동안 호쾌(豪快)하게 술 마시고 창쾌(暢快)하게 노래했다. 동기인 전북대 독어교육과의 이신구 명예교수가 2월에 ‘헤세, 토마스 만 그리고 음악’이라는 책을 낸 이후, 단톡방을 중심으로 음악에 대한 관심과 화제가 풍성해졌다. 그래서 ‘한번 신나게 노래 부르며 놀아보기로’ 의기투합을 한 것이다.
늘 친구들을 도와온 캠퍼스 커플 김한옥(사업)-김영숙 부부가 앞장을 서고, 군산의 뮤직 카페 단골인 이신구 교수가 생각을 더해 노래경연 모임은 이내 결성됐다. 모인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목자(目眥, 눈이 가는 길 또는 눈의 방향)가 불량하다고 내가 늘 지청구하는 부산 사내 윤종기(1등 입학자다), 엄처시하(嚴妻侍下)에 사는 음악광 독일 전문가 배종은(그의 부인이 嚴씨다), 경쟁자 없이 동기회의 회장을 오래 맡고 있는 강국회, 서천에서 활동 중인 연극 연출가 고금석 등이다.
우리가 한바탕 푸지게 논 장소는 군산의 은파호수 옆 ‘Music4u’(뮤직포유) 카페. 토요음악회를 200회나 개최한 곳인데, 이 교수는 이곳에서 문학 강연도 해왔다고 한다. 카페 2층의 널따란 음악당에는 ‘4u’를 발음대로 옮긴 ‘抱裕’(포유) 액자가 걸려 있었다. 서로 너그럽게 안는 여유를 가지라는 뜻인가. 나는 서로 끌어안고 노는 抱遊, 이렇게 쓰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왜 그렇지 않던가. 흥이 나서 노래를 하다 보면 어깨를 겯거나 서로 안고 놀게 되지 않던가.
우리는 누가 무슨 노래를 잘 부르는지 이른바 각자의 18번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아내의 노래, 올챙이 멜로디(Unchained Melody), 엽서 한 장, 모란이 피기까지는, 명태, 메리케인부두 그런 노래들. 나는 이 중 ‘명태’(변훈 작곡)를 50년 전 대학 1학년 때 고금석에게서 배웠다.
고금석은 서예에 입문해 이미 입선도 두어 번 한 사람인데, 산곡(山谷)이라는 호를 쓴다. 내가 얻다 대고 중국 송나라의 서예가 황정견(黃庭堅, 1045~1105)과 같은 호를 쓰느냐고 따졌더니 그의 호가 산곡인 줄 몰랐다, 사는 동네 이름이 산너울이라서 그렇게 지은 것뿐이라고 했다. 괘씸하지만 용서해주기로 했다.
하여간 나는 50년 전 산곡에게 내 레퍼토리 ‘메리케인부두’(남일해 노래)를 떠넘기고 ‘명태’를 내 노래로 만들었다. 앞으로 내가 있는 자리에서는 절대로 ‘명태’를 부르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그러나 나는 치사하게 그가 없는 자리에서는 원래 내 노래인 것처럼 두 가지를 다 불렀다. 결국 산곡에게서 노래를 빼앗은 꼴이 돼버렸다.
이번 군산 여행에서 나는 노래를 되돌려준다고 했다. 그리고 50년 전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가 그는 ‘명태’를, 나는 ‘메리케인부두’를 불렀다. 그가 부르는 ‘명태’는 호소력이 컸다. 오래 연극을 해온 목소리의 울림이 좋은 데다 삶의 곡절과 간난신고(艱難辛苦)가 노래에서 우러나왔다. 그에 비하면 내 노래는 흥은 좀 있으나 스스로 들어봐도 그 이상의 무엇이 없다.
웃고 떠들고 노래한 뒤 호텔에 돌아와 산곡과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명태’를 부르며 둘의 가사를 대조해보았다. 내가 그에게서 배웠는데 왜 내 ‘명태’와 그의 ‘명태’는 다를까. 괄호 안이 그의 가사다.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 지어 찬물(큰물)을 호흡하고 길이나(기다란)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며 춤추며 밀려다니다가(뭉치고 펑퍼지고 몰려다니다가) 어떤 어진(착한)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집트(제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는 ‘명태’를 어떻게 부르게 됐는지 잘 모른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서 노래를 배운 뒤 가사를 찾아서 외우고 익혔다. 말하자면 나는 그동안 교과서처럼 살아왔고 산곡은 열정이 닿는 대로, 마음이 이끄는 데로 움직이며 살아온 게 아닌가 싶다. 이번에 노래를 되바꾸자, 도로 ‘명태’를 가져가라고 한 데 대해서도 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렇다고 ‘메리케인부두’가 돌려주기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닌 건 확실하다.
그런데 나는 이 노래를 어떻게 알았던가. 모르겠다. 1965년 무렵 남일해가 부른 노래라는 것만 알 뿐인데 이 기억도 정확한지 자신이 없다. 2절에 “트위스트 춤을 추는 신나는 그 리듬에”라는 가사가 나오는 걸 보면 1960년대인 건 확실하다. 원곡은 그렇지 않겠지만 나는 이 노래를 한껏 늘어지게 타령조로 부르곤 한다.
다음 날은 고창으로 옮겨 선운사, 미당 시문학관, 인촌 김성수 생가 등을 둘러보았다. 비 내려 수량이 풍부해진 선운사 계곡의 물은 검게 보였다. 참나무의 낙엽에 들어 있는 탄닌 성분이 녹아든 탓이라고 한다. 덕분에 수면에 비치는 풍경은 훨씬 더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마지막 일정으로 점심을 먹을 때, 산곡은 노랫가락을 한자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기민요였다. “바람이 물소린가 물소리 바람인가/석벽에 걸린 노송 움츠리고 춤을 추네/백운은 허우적거리며 창천에서 내리더라.” 푸른 하늘에 흰 구름, 그리고 소나무와 바람과 물. 짧은 노래에 한 폭의 그림이 들어 있다. 경기민요의 많은 소절 중에서 가장 시적인 대목이었다.
그렇구나. 산곡은 이미 내가 모르는 곳에 가 있고, 그의 노래는 더 풍부해졌구나. 그러니 굳이 ‘명태’를 되찾아갈 필요가 없겠지. 나는 더 이상 그에게 노래를 되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각자 ‘명태’를 깜냥껏 부르고 편한 대로 ‘메리케인부두’를 흥겹게 노래하면 되는 것이었다. 노래가 탄닌이 되어 그와 나, 그리고 우리 모든 벗들의 우정이 수량이 풍부한 냇물처럼 흐르고, 키 크고 잘 자란 나무처럼 여울지면(여울지다=식물의 열매나 꽃, 잎 따위가 몹시 많이 열리다.) 되는 거 아닌가. 노래는 부르는 사람의 것이고, ‘글이 곧 그 사람’이듯 ‘노래도 곧 그 사람’인 것이다.
서초구 양재천 영동1교에서 영동2교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다 보면 양재천 한가운데에 작은 섬이 하나 있다. 하천 퇴적물이 쌓여 생긴 이곳에 철학자 칸트를 테마로 한 산책길이 있다. 2017년에 조성된 공간이다. '사색의 문'으로 불리는 부식 공법 철제문을 지나 작은 목조다리를 건너면 바로 칸트의 길이 나온다.
독일 철학자의 이름이 왜 양재천 산책길에 등장한 걸까? 생뚱맞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벤치에 앉아 있는 칸트 청동상 옆에 새겨진 문구를 읽다 보면 금세 이해하게 된다. 벤치 좌우에는 칸트의 행복론이 씌어 있다.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
산책로 작은 숲속 길 곳곳에 만들어진 벤치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볼 수도 있고 원형으로 만든 나무 데크에 누워 나뭇잎에 가려진 푸른 하늘을 볼 수도 있다. 매트를 깔고 요가를 하기에도, 책을 읽기에도, 가만히 눈 감고 명상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원형 데크다.
사색 깊은 철학자의 행복론이라 하기에는 너무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행복은 산 너머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작은 일상이 중요하고, 내 옆에 늘 있어주는 가족과 지인들이 소중하며, 내게 맡겨진 일과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라는 것을. 어느덧 50대를 훌쩍 넘겨 장년층에 들어가니 걷고 산책하며 주위를 바라보는 게 좋아졌다. 운전하고 다닐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소소한 즐거움이다.
특히 마음이 복잡할 때나 머리가 어수선할 때는 운동화에 모자 하나 푹 눌러쓰고 이 길 저 길 가리지 않고 걸어 다닌다. 단지 두 다리로 걷기만 했을 뿐인데 걷고 난 후 땀에 흠뻑 젖은 몸이 개운하다. 이리저리 마음 괴롭히던 잡생각들도 사라져 마음도 한결 가볍다.
칸트는 매일 산책을 하며 사색했다고 한다.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가만히 앉아 나를 되돌아보는 일은 ‘잠시 멈춤’을 넘어 스스로를 다독이고 격려하는 힐링의 시간이다. 또 격조 있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양분이 된다. 서울 도심 속 양재천 한복판에 있는 작은 섬, 칸트의 산책길이 내게 소중한 이유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주춤하지만 한때 젊은이들이 일본 교토로 여행을 많이 떠났다. 그 여행 코스에 빠지지 않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은각사 옆에 위치한 철학자의 길이다. 일본의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산책하면서 사색을 즐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작은 마을을 흐르는 천 옆에는 오래된 벚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벚꽃이 만발하는 봄에 방문하면 벚꽃이 눈처럼 날리는, 말 그대로 꽃비가 내리는 운치 있는 길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이제 사색을 할 수 없다. 관광객이 길을 가득 메워 길을 걷다가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참 아이러니하다.
양재천 칸트의 산책길을 걸으며 문득 교토의 철학자 길이 떠오른 건 ‘본질에 충실하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산책길을 한 바퀴 돌고 오니 다시 출발했던 그 길이다. 들어갈 때는 행복에 관한 문구를 봤는데 나올 때는 다른 글이 보인다. “한 가지 뜻을 세우고 그 길로 가라, 잘못도 있으리라, 실패도 있으리라.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라, 반드시 빛이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 칸트의 행복론을 새기며 걷다가 이번에는 나의 꿈과 미래에 대해 생각해본다. 양재천의 흐르는 물을 잠깐 바라봤다. 두 아이가 물을 건너기 위해 징검다리를 조심조심 걸어가고 있다. 아이가 물에 빠질까봐 다정스레 손을 잡아주는 아빠의 모습도 보인다. 작은 일상의 행복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아니 모른다 해도 상관없을 듯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작은 미소가 퍼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니 말이다.
1년 중 가장 아름답고 활동하기 좋은 시기는 이맘때 봄이다. 4년 전 파주시와 고양시의 경계에 오픈한 66,115㎡(2만 평) 규모의 퍼스트 가든은 경기도에서 가볼 만한 곳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장소다. 사계절 다양한 꽃이 피고 지는 이곳에서 낮에는 여러 가지 체험을 할 수 있고, 밤에는 환상적인 야경을 볼 수 있다. 혼자서 혹은 여럿이서 하루를 보내기에 좋다.
서울에서 인접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 한적하다. 드라마와 뮤직비디오 등 수많은 영상물을 촬영한 장소이기도 하다. 가구제조업체 ㈜대주의 김창희 회장이 40여 년간의 제조와 유통 경험을 바탕으로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지금처럼 빼어난 공간으로 만들었다. 최근 봄꽃들과 초록 식물들이 그야말로 물이 올랐다.
유럽식으로 단장한 야외에서 여유롭게 산책을 하다 보면 화려한 꽃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야트막한 언덕 위의 지형을 그대로 살린 구조는 아기자기하다. 초입에서 생태 정원을 거쳐 자작나무 숲까지 한 바퀴를 둘러보려면 시간을 넉넉히 잡아야 한다. 곳곳에 평상과 나무 그늘 쉼터가 있어 자연의 바람을 맞으며 잠깐씩 쉬어갈 수 있다.
복합 문화시설을 표방하는 이곳은 16㎡(5평)에서 99㎡(30평) 크기의 정원을 30여 가지 테마로 다채롭게 꾸며져 있다. 식당, 카페, 웨딩홀 등 편의시설도 갖췄다. 입구에는 그리스 신전을 떠올리게 하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이 눈에 띈다. 유럽 고대 건축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코린트 양식의 구조물이다. 조금 더 들어가면 만나는 토스카나 광장. 꽃과 풍요의 여신 플로라로 장식한 분수대에서 물이 시원스레 흘러내린다.
정원 한쪽에는 아도니스와 아프로디테의 조형물이 있다. 아프로디테가 사랑했던 미소년 아도니스는 사냥을 하다 멧돼지에 물려 목숨을 잃는다. 아도니스가 죽으면서 흘린 피에서는 아네모네가 피어났고, 아프로디테의 눈물에서는 장미꽃이 피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는 지하세계와 지상세계를 오가면서, 겨울에는 땅속에서 지내다가 봄이 오면 새싹을 틔우는 식물의 신이 됐다. 지금도 서양에서는 농사의 풍요와 사랑의 결실을 축복하는 아도니스 축제가 펼쳐진다.
이 신화에는 사랑과 이별, 사계절의 변화, 축제의 기쁨 등 수많은 이미지와 상징이 녹아 있다. 퍼스트 가든은 이 스토리에 맞춰 4가지 테마의 정원을 만들어 시즌별로 다양한 축제를 연다. 봄에는 ‘꽃의 정원’, 여름에는 ‘물의 정원’, 가을에는 ‘축제의 정원’, 겨울에는 ‘빛의 정원’이라는 콘셉트 아래 새로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이달 초에는 튤립이 압권이었고, 이즈음엔 장미꽃이 만발했다. 매일 밤 ‘별빛축제’도 열리는데, 특히 요즘은 화려한 조명과 함께 운치 있는 봄밤 산책을 하기에 좋다.
왼쪽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대형 화단이 발길을 사로잡는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 분수를 중심으로 곳곳에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석상과 푸른 상록수가 조화를 이뤘다. 경사지에 이탈리아식 건물을 짓고 계곡 형태의 공간에 단을 쌓아 만든 구조도 독특하다. 거대한 벽화를 뒤에 두고 시원스레 쏟아지는 분수는 청량감을 준다.
신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장밋빛 향연으로 펼쳐지는 로즈 가든도 멋스럽다. 중앙을 따라 길게 펼쳐지는 길은 측백나무가 줄지어 있어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작은 식물원과 동물원에서는 새와 동물 먹이 주기와 승마 체험도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많다.
작년 12월에 오픈한 자동차극장에는 젊은층뿐만 아니라, 옛날 향수를 그리워하는 40~50대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매주 수요일 오후 8시와 10시에 최신작 영화 2편을 바꿔 상영한다. 규모는 차량 70대 정도를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다.
퍼스트 가든의 로고에는 ‘Happiness, Together’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나무, 사람, 지구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으로, 이곳에서는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곳을 찾은 어르신들은 자연 속 힐링을 체험하며 “여기가 천국”이라며 행복해한다.
“이곳에 있으면 무엇이 화려하고 과장되고 오만한 것인지, 무엇이 즐거우면서 신선하며, 창조적인지 분명하게 알게 된다.” - 헤르만 헤세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중에서
경기도 파주시 탑삭골길 260(상지석동 1021-3)
시대를 앞서간 명사들의 삶과 명작 속에는 주저하지 않고 멈추지 않았던 사유와 실천이 있다.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유와 사랑과 우정 이야기가 있다. 그 속에서 인생의 방향을 생각해본다. 이번 호에는 질투로 얼룩졌던 마티스와 피카소의 우정을 소개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젊은 예술가들의 산실로 불리던 파리에는 다양한 국적의 보헤미안들이 몰려들었다. 스페인에서 온 풋내기 청년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1906년 그는 그곳에서 운명처럼 한 사람을 만난다. 바로 당대 프랑스 화단에서 이름을 날리던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였다.
프랑스 북부 시골에서 태어난 마티스는 법학을 공부하다 그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20대 초반 파리로 갔다. 이후 회화 양식과 색채와 빛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해 명성을 얻었고 야수파의 우두머리가 됐다.
‘색채의 혁명가’,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던 이 대작가는 무명작가인 피카소의 그림을 보자마자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 만남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각별한 인연을 이어갔다.
마티스를 뛰어넘고 싶었던 피카소
그 무렵 마티스는 아프리카 원주민이 만든 조각품의 신비로움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골동품 가게에서 콩고 조각품을 구입한 그는 동료 화가들과 함께 감상하고 싶어 예술가들로 북적이던 아지트로 향했다. 마침 피카소도 그곳에 와 있었다. 그는 마티스가 가져온 ‘흑인 두상’ 나무 조각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간다는 말도 없이 황급히 일어나 자신의 작업실로 향했다.
두 사람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원시 아프리카 미술을 재해석해 화폭에 옮기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마티스는 아프리카 조각을 통해 인체의 비율과 ‘색채’를 고민했고, 피카소는 마법처럼 느껴지는 ‘초월적 힘’에 심취했다.
마티스가 아프리카 조각품의 원시성에서 영감을 받고 그린 ‘삶의 기쁨’(1906)과 ‘푸른 누드’(1907)가 발표됐을 때 비평가들은 “불편한 느낌을 주는 도발적인 작품”이라며 주목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피카소는 비판을 쏟아냈다. “무릇 화가라면 단순한 색깔로만 변화를 주는 게 아니라 형태적인 면에서도 새로운 시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며 그의 작품을 깎아내렸던 것. “색이 무엇인지 인류에게 가르쳐준 스승”이라는 말로 칭송되던 마티스의 작품에 대한 도전적 발언이었다.
피카소는 변신을 거듭하며 자신의 스타일을 찾았다. 마티스가 활용한 기법들은 철저히 지양했다. 자연과 인간의 경계가 있는 듯 없는 듯 곡선으로 처리하고 강렬한 색으로 아우라를 발산한 ‘삶의 기쁨’은 피카소에겐 매우 중요한 도전 대상이었다. 그는 바짝 긴장했고, 힘찬 직선으로 원시적 생명력을 표현한 ‘아비뇽의 처녀들’(1907)로 응수했다. 입체파의 시작을 알린 작품은 그렇게 탄생했다.
평론가들은 그림 경쟁을 벌이게 된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심리’를 분석하며 마티스보다 더 뛰어나고 싶었던 피카소의 속내를 지적했다.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해 미술계의 1인자가 되고 싶었던 피카소가 스승처럼 따랐던 마티스를 경쟁상대로 만들며 자신의 욕구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흠모와 질투의 ‘붓 대결’
마티스는 신중하고 사색적인 사람이라 홀로 조용히 작업하는 걸 좋아한 반면, 피카소는 사람들과 왁자지껄 어울리며 작업을 했다. 비슷한 취향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늘 서로의 작품에 끌렸다. 누가 먼저 시작했든 마티스와 피카소의 이른바 ‘붓 대결’은 그렇게 흠모에서 질투, 그리고 경쟁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피카소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맞춰 그림을 그리는 마티스를 강박증 환자로 몰아세우며 공격했다. 마티스도 이에 질세라 피카소의 콜라주 기법을 쓰레기라 비웃었다. 급기야는 서로가 자신의 작품을 표절했다고 주장하며 헐뜯었다.
피카소에게 실망한 마티스는 더 이상 그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교류를 끊었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흘렀고 두 사람의 입장은 뒤바뀌었다. 피카소가 미술계의 거장이 됐을 때 병약해진 마티스는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54년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러나 그가 생을 마무리하면서 남겼다는 한마디는 피카소에 대한 최고의 찬사였다.
“내 그림과 피카소의 그림을 함께 전시하지 말아주게. 불꽃같이 강렬하고 번득이는 그의 그림들 옆에서 내 그림들이 초라해 보이지 않게.”
마티스의 사망 소식을 듣던 날 피카소는 슬픈 얼굴로 창밖을 보며 “마티스가 죽었어, 마티스가 죽었어”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자책감 때문에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그는 ‘캘리포니아 아틀리에’를 그리며 떠나간 마티스를 추억하고 애도했다. “다시 태어나 그림을 그린다면 마티스처럼 그리고 싶다”고 말했던 피카소는 1973년 92세에 눈을 감았다.
겨울에 만나는 썸머 크리스마스, 상상만 해도 마음에 낭만이 밀려들어 오지 않는가. 지난겨울에 하와이를 다녀왔다. 전 세계를 펜더믹으로 몰아넣은 코로나19가 퍼지기 전이다. 12월의 썸머 크리스마스, 푸른 잎사귀들 사이로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거렸다. 반바지에 티셔츠 하나를 걸치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을 허밍 하듯이 따라 부르는 이들은 삶에 여유로운 순간을 선물하려는 하와이 여행자다.
발길 닿는 대로 유유자적, 오하우(Oahu)
일정이 길지 않아 오하우 섬에만 머물렀다. 특별히 하와이다운 관광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해가 뜰 무렵에는 와이키키 비치를 산책하였고, 차를 타고 가다 북적거리는 마을을 만나면 멈춰서 크리스마스 축하 공연을 관람하거나 별생각 없이 상점을 기웃거리며 하릴없이 걸었다.
산 능선에 자리한 집들이 근사해 보여 구불거리는 외길을 타고 올라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왜 이곳에 이런 집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해가 질 무렵이 되어 화들짝 놀랄 정도로 화려한 붉은 노을을 보겠다고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는 곳을 찾아서 이리저리 골목길을 달렸다.
계속 시야를 가리는 건물들에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주택가 사이를 걸었다. 한 컷을 찍고 서있으니 오른쪽 집에서 사람이 나와서는 너무나 아름답지 않냐며 말을 건넸다. 화산 폭발의 흔적, 솟아오른 산과 해안 풍경, 도시와 여행자들, 낯선 이와 함께 나누었던 짧은 감동의 순간까지 소소하나 벅차고 느릿한 여유가 묻어나는 여정이었다.
하나우마 베이(Hanauma Bay)에서 생애 최초 스노클링
하나우마 베이는 파도가 잔잔하고 에메랄드빛 물색이 아름다운 해안이다. 반원 형태로 해안선이 안으로 쑥 들어간 형태다. 하나는 ‘만’을, 우마는 ‘곡선’을 뜻하니 이름 그대로다. 해변을 여는 시간은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다. 전 세계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므로 비교적 한산하게 스노클링을 하기 원한다면 이른 아침에 도착하는 것이 좋다. 오후 늦게 가도 사람이 많이 줄어 한가해지지만 저녁 6시면 문을 닫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을 듯하다. 매주 화요일에는 해안이 문을 걸어 잠근다.
자연보호구역이자 해양생물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답게 반드시 해양생태계 보전에 관한 비디오를 시청해야만 해안으로 내려갈 수 있다. 10분여 '호누(Honu)'라는 녹색 바다거북과 바다 생물들에 대한 영상을 보며 바닷속 탐험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다. 한편으론 산호초를 밟지 않도록 주의하라는데 수영을 잘 못해 괜찮을까 싶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비디오 시청 후 해안으로 걸어서 내려갔다. 스노클링 장비(스노클링 마스크, 오리발)와 아쿠아 슈즈를 미리 챙겨 왔다. 해안에서 대여도 가능하다. 처음에는 겁이 났으나 어느새 바닷물과 친해지고 물속 열대어와 눈 맞춤하는 특별한 경험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스노클링의 성지답게 수중 도시인 산호초 군락과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가득하다. 운 좋으면 바다거북을 만날 수도 있다고 하는데 보지는 못하였다. 산호초 사이 맑은 바닷물 속을 유영하는 물고기를 뒤쫓았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숨바꼭질하듯 열대어와 함께 헤엄쳤던 바닷속이 그립다.
돌탑을 올리고 다시 또 올리던 청년
하나우마 베이에서 나와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차를 세울 수 있는 곳이 나오면 멈췄다. 몰아치는 바람과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에 세차게 파도가 쳤다. 넘실대는 파도 물결에 두 개의 점이 박혀있다. 아득하기만 한 바다 위에 두 명이 보드 위에 엎드려서 팔을 저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망망대해를 두려움 없이 헤쳐 나가는 저들이 대단해 보였다.
다음에 차를 세운 곳이 마카푸 포인트다.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절벽 전망대로 마카푸는 ‘튀어나온 눈’이라는 의미이다. 절벽 아래 해안에는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절벽 위에 서니 시커먼 구름이 갑자기 밀려오더니 간간이 비까지 뿌렸다. 세찬 바람과 떨어지는 빗방울에 사람들이 차 안으로 후다닥 피신하였다.
카메라를 든 나와 한 명의 청년만이 절벽 위에 그대로 서서 비와 바람을 맞고 있었다. 나는 셔터를 누르기 바빴고 그는 돌탑을 쌓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납작한 돌을 쉽게 얹는 것이 아니라 날카롭게 날이 선 큰 돌과 작은 돌을 번갈아 탑을 쌓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올려놓으면 무너져 내렸다. 다시 올리고 무너지고를 반복하면서도 청년은 돌탑 쌓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몇 컷 찍었다. 한참을 머물다 자리를 떠날 때까지 그는 여전히 돌을 올리는 행위를 반복하였다. 그는 분명히 원하는 모양대로 돌탑을 쌓았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소망에 대한 간절함이 옅어진다
하루가 지겹고 답답해질 때면 마카푸 포인트의 그 청년을 떠올린다. 돌탑을 쌓던 그가 품은 간절함의 크기를 가늠해 보며 앞으로 내가 이루고 싶은 소망의 크기를 생각한다. 마카푸 포인트의 그 청년은 소망이 버거워 멈추고 싶은 마음이 들지라도 멈춰 서지 말고 될 때까지 계속 나아가라고 말한다.
모든 예술가는 '돌+아이'여야 작품이 나온다고 믿는 사람 중의 하나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범하고 멀쩡한 정신으로 어떻게 그 위대한 예술작품들을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위대한 ‘돌+아이’ 중의 하나인 툴루즈 로트렉 전시회를 보러 갔다. 한국에서는 처음 열린다는 로트렉 작품 전시회. 물랑 루즈의 작은 거인이라는 타이틀로 열리는 로트렉 전은 예술의 전당에서 오는 5월 3일까지 열린다.
최근 미술계에 정착된 도슨트 해설도 풍성하다. 특히 젊은 관객들을 몰고 다녀 도슨트계의 아이돌로 불리는 정우철 도슨트의 해설 시간대에 맞춰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이 있을 정도이니 한 번쯤 경험해보는 것도 좋다. 작품 감상을 훨씬 풍성하게 할 수 있어 강추!.
전시회를 알차게 보려면 도슨트 해설 시간 전에 넉넉하게 도착해 미리 작품을 한번 훓어 본다. 도슨트 해설시 기본 작품에 대한 이해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정우철 도슨트의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1시간 정도 로트렉의 삶에 대한 스케치를 곁들인 작품 세계에 대한 해설을 듣고 나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래서 사람은 한 가지라도 더 배워야 하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 물랑 루즈의 빨간 풍차를 그린 화가, 난쟁이, 알코올 중독자, 매춘굴에서 살다시피 했던 성 도착자, 로트렉을 떠올릴 때 따라붙는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로트렉은 파리 최고의 귀족 가문 자제로 태어났다. 한데 이 가문은 재산을 타인에게 나눠주기 싫은 탐욕적인 가문이었다. 재산을 지키기 위해 사촌 간의 결혼으로 가문의 계승자를 돌려막았다. 계속된 근친결혼으로 인해 유전적으로 뼈가 부서지는 병이 대를 걸러 나타났고 하필이면 로트렉의 아버지 대를 건너 이 병이 로트렉에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불운의 귀족 로트렉은 14세 되던 해 넘어지면서 허벅지의 뼈가 부러지게 되고 이후 로트렉은 하반신 성장이 멈춰버렸다. 하반신 성장이 멈춘 채 상반신만 성장하는 난쟁이로 어른이 된 로트렉은 백작인 아버지처럼 승마나 사냥 등을 하지 못하고 대신 어머니의 지원으로 그림을 배우기 위해 화실에서 종일 그림을 그리며 아버지의 냉대와 멸시를 이겨내야 했다.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 로트렉은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천박한 귀족성에 치를 떨기도 했다는데 그가 그린 삽화 중 샌드위치를 게걸스럽게 먹는 귀족은 그의 아버지를 빗대 그린 것이라고 한다.
말풍선으로 “천박해, 너무 천박해” 까지 그려 넣은 로트렉은 아버지의 차별과 냉대, 멸시를 받으며 그림에 대한 집착을 키워낸 예술가다. 이에 반해 한없이 너그럽고 죄책감을 가진 채, 평생 로트렉을 보살피며 그의 마지막 죽음까지 지켜줬던 어머니는 로트렉에게는 인자한 성모 마리아 그 자체였다.
‘천박한 아버지와 성스러운 어머니’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부모에 대한 천착을 넘어 로트렉이 다음으로 천착한 것은 파리 몽마르트르 아랫마을의 유곽을 이룬 매춘부들이었다. 로트렉은 아예 이곳에 방을 얻어 자유스럽게 그들과 교류하며 귀족의 눈에 보기엔 뒤틀렸지만, 사실은 생존의 삶 그 자체인 삶의 한 단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기록했다. 그의 대표작 대부분은 물랑 루즈에서 춤을 추는 무희거나 노래를 부르는 가수,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매춘부 등을 그린 작품들이다.
현대 회화의 대가인 피카소가 존경했던 화가, 로트렉
피카소는 그의 작품 ‘푸른 방’에서 로트렉에 대한 존경의 오마주로 ‘푸른 방’ 작품 속 공간인 벽면에 로트렉의 작품인 메이밀튼 포스터를 그려 넣기도 했다. 로트렉이 없었다면 앤디 워홀도 없었을 것이라는 후대 예술가들의 평이 아니더라도 19세기 후반인 로트렉의 활동시대가 무색할 만큼 현대의 팝 아트 같다. 지금 2000년대의 작품이라고 해도 전혀 올드 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전문가 설명에 의하면 그림 전체를 꽉 채우기보다 사물의 특성을 극대화해 캐치하는 로트렉 특유의 기법 때문이라고 한다.
로트렉의 이 기법은 현대 회화에 가장 크게 미친 영향이라고 하니 조롱과 멸시, 냉대에도 굴복하지 않고 나만의 세계를 이룬 로트렉의 정신세계는 현대인 모두가 배워야 하지 않을까?
포스터와 삽화 등의 일러스트전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열린 로트렉 전시회를 통해 현대 포스터, 그래픽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트렉의 작품 세계를 돌아보며 나 스스로 나를 지키고 뭔가를 이뤄내는 일에 대한 자기 단련은 어디까지 계속돼야 하는지 화두를 자신에게 던져본다.
예술의 전당에서 5월 3일까지 전시가 계속되며 도슨트 가이드를 통해 관람해볼 것을 강력 추천한다(별도 요금 없음).
나이 먹어서 즐거운 일은 호수공원에 나가서 봄볕을 쪼이는 일이다. 일하다가 지겨워서 작업실 커튼을 열고 내다보면 공원에 봄볕이 가득하다. 나는 햇볕이 아까워서 하던 일을 밀쳐놓고 공원에 나가 양지쪽에 앉는다. 노인들이 많이 나와 있다.
햇볕을 쪼일 때 해와 나 사이에는 중간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다. 햇볕은 옷을 뚫고 들어와 내 몸속에 스민다.
자연을 받아들이는 행위들 중에서 봄볕을 쪼이는 일은 가장 관능적이다.
나는 젊었을 때 혼자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옷을 모조리 홀랑(!) 벗고 개울물 속에 들어가기를 좋아했다. 장마가 끝나고 며칠 지나면 물의 흐름이 순해지고 향기도 진해진다. 이때 개울물 속에 들어가면 몸의 구석구석에 와 닿는 물의 감각은 놀라웠다.
물이 숲의 향기를 싣고 내려와서 새로운 시간을 내 숨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물은 육신을 가진 생물로 변해서 내 몸을 안았다. 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려 와서 내 몸을 핥고 지나갔다. 머리가 두 쪽으로 쪼개져서 낡은 시간의 똥가루가 빠져나가고 창세기의 새벽처럼 순결한 세상이 전개되었다. 수묵 산수화를 그리던 조선의 선비들은 물을 멀리서 보고 그림을 그릴 줄만 알았지, 나처럼 홀랑 벗고 들어갈 줄은 몰랐던 것을 나는 답답하게 여긴다. 나는 봄부터 가을까지 산속에서 수행을 계속했고 겨울에는 얼음이 녹기를 기다렸다.
그 개울 아래쪽에 작은 절이 있었는데, 어느 날 새벽에 수행하러 갔더니 ‘나체 목욕 금지’라는 팻말이 박혀 있었다.
나이를 먹으니까 보는 눈도 있고 해서 이 짓을 더 이상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공원에 나가서 봄볕을 쪼이는데 이 즐거움은 젊은 날의 개울물 수행과 거의 맞먹는다. 나는 봄볕 쪼이기가 개울물 수행과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태양의 빛이 지구에 당도하기까지는 초속 30만 km로 달려서 8분 걸린다고 하니 이 무지막지한 공간과 속도는 물리학자들이 알겠지,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르지만 봄볕을 즐거워한다. 이 밝음과 따스함은 저 무한공간을 건너서 나에게 직접 다가온다. 나는 이 직접성의 사태에 경악한다. 나는 태양의 애무를 받는다.
봄볕을 쪼이면 잘한 것도 없이 상을 받는 것 같다. 봄볕을 쪼이면 어려서 어머니 속 썩인 일과 자라서 아버지 속 썩인 일과 함부로 지껄인 말들이 용서받고 있는 것 같다.
볕은 빛과 함께 우주공간을 건너서 내게로 온다. 빛은 스스로 아무런 색도 없지만, 이 세상의 모든 색을 드러나게 한다. 빛은 프리즘을 통과할 때 수억만 개의 색들의 스펙트럼으로 펼쳐지지만, 그 모든 색들을 다 합쳐서 아무런 색도 없는 백색광선이 된다. 모든 색을 다 아우러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이다. 봄볕은 그 빛 위에 실려 있다.
봄볕 속에서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안쪽에 분홍색 하늘이 펼쳐지고 그 위에 붉고 푸른 반점들이 별처럼 떠 있다. 반점들은 어디론지 흘러가고 또 다가온다. 그 반점들은 스스로 작동하고 있는 내 생명의 신호들이다. 신호들은 가물거린다.
봄볕은 생명을 깨어나게 하고 삶의 쓰라림을 위로한다. 겨울에 흰 눈에 덮인 공동묘지에 가면 삶과 죽음은 완벽히 차단되어 있다. 하얀 공동묘지에서 죽음은 범접할 수 없고 말 붙일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온다.
봄이 와서 흙이 부풀고 무덤들이 파래지는 한식날 성묘 가면 죽음은 삶의 연장으로서 평화롭다. 오래된 무덤에서는 슬픔의 날카로움이 풍화되어서 사람들은 울지 않는다.
봄에는 호수의 거북이들이 바위 위에 올라와서 한나절씩 봄볕을 쪼인다. 거북이들은 언 호수 밑에서 봄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바위 위에서 거북이들은 꼼짝도 않는다. 거북이들은 매우 집중되고 경건한 태도로 봄볕을 쪼인다. 거북이들은 눈을 감고 있는데, 거북이들의 눈꺼풀 속에도 반점들이 흘러 다니고 있을 터이다. 봄볕을 쪼이면서 나는 거북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북이의 즐거움을 안다.
작은 동물원의 미어캣들도 발딱 일어서서 봄볕을 쪼인다. 이것들의 자세는 교양 없어 보인다. 이것들은 몸을 활짝 열어서 봄볕을 맞는다. 아이들이 미어캣을 들여다보면서 미어캣 흉내를 낸다. 아이들의 뒤통수 가마에 봄볕이 가득하다.
닭들은 봄볕에 부푼 땅을 파고 들어앉아 흙을 파헤치며 뒹군다. 닭은 봄볕과 땅기운을 함께 뒤집어쓴다. 닭은 하늘과 땅, 양쪽을 다 안다.
봄볕을 쪼이면서, 나는 나와 거북이와 미어캣과 닭이 다 같은 중생임을 안다. 봄볕을 쪼이면서 나는 개울물 수행하던 젊은 날이 늙은이의 봄날 속에 살아 있음을 안다. 봄볕은 공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