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성산으로 추앙받는 백두산(白頭山·해발 2744m). 그러나 내 길을 잃고, 남의 땅을 거쳐 오르내린 지 어언 수십 년에 이르니 그곳이 진정 내 나라, 내 땅인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런 어리석은 마음을 꾸짖기라도 하려는 듯 어느 순간 눈앞에 나타난 꽃 한 송이가 백두산과 백두평원, 그리고 남한 땅이 식물학적 동질성을 가진 같은 땅임을 일깨워줍니다. 털개불알꽃, 애기작란화 등으로도 불리는 털복주머니란이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 등 자생식물의 수는 모두 4100여 종. 이 중 77종을 국가에서 멸종위기 야생식물로 지정, 관리하고 있습니다. 자생지는 물론 개체 수가 극소수라 특별히 관리하지 않으면 머지않은 장래에 아예 종 자체가 사라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지요. 그중에서도 특별히 9종을 멸종위기 야생식물 1급으로 분류해 특별 관리하고 있는데, 털복주머니란이 바로 그 9종의 하나입니다. 남한에선 강원도 함백산(咸白山·해발 1573m) 두문동재에서만 자랍니다. 환경부와 산림청은 단 두 곳뿐인 이곳 자생지에 각각 철조망을 두르고 감시카메라까지 설치해 특별 보호하고 있습니다.
털복주머니란은 역시 멸종위기 야생식물 1급으로 지정된 광릉요강꽃과 2급인 복주머니란과 함께 국내에 자생하는 복주머니란 속(屬) 3대 난초 중 하나로 키는 20~40cm, 꽃의 지름은 3~5cm로 전체적인 몸집이 광릉요강꽃이나 복주머니란의 절반 정도에 불과합니다. 함백산 자생지에서는 주로 6월 초순에 꽃이 피는데, 철책까지 두르고 보호 중인 총 개체 수는 두 곳을 합해 모두 100여 촉, 그중 꽃을 피우는 개체 수는 절반 정도에 불과합니다. 함백산 이외에 설악산에서도 발견되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현재 확인된 바 없으니, 그야말로 철책으로 둘러싼 두 곳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7월 초순 천지를 보기 위해 지프를 타고 백두산 북쪽 능선을 오르는 길에서, 그토록 귀하디귀한 털복주머니란이 차창 밖으로 펼쳐진 백두평원에 무더기로 피어 있는 걸 보았을 때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하시겠지요. 먼저 ‘고향 사람’을 만난 듯 반갑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리고 남의 땅, 남의 길을 통해 오르는 백두산이 바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우리의 땅임을 절감했습니다. 두 번째, 한시라도 빨리 백두산으로 향하는 내 길, 내 땅을 복구해 그곳에 자생하는 우리 꽃, 우리의 자연유산을 되찾아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을 느꼈습니다. 남한 땅에서 사라져가는 북방계 희귀식물의 보고이자 고향인 백두산과 드넓은 백두평원을 자유롭게 걸으며 만발한 야생화의 천국을 만끽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치는 걸 느꼈습니다.
줄기와 이파리는 물론 꽃잎 등 온몸에 솜털 같은 하얀 털이 빼곡히 나 있어 국명에 ‘털’ 자가 들어간 털복주머니란은 우리나라 외에 중국과 일본에서도 자라는 북방계 난초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백두산과 함백산에서 자란다는 것은 털복주머니란이 한반도의 중심 산줄기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을 따라 분포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한반도에서의 털복주머니란 자생지로, 백두산이 북방한계선이 되고 함백산이 남방한계선이 되는 셈이지요. 꽃 피는 시기는 함백산이 6월 초[사진1], 그리고 백두산이 7월 초이니 두 곳의 ‘꽃시계’가 딱 한 달 차이 날 뿐 같은 식물이 자라고 똑같은 꽃을 피우는 하나의 땅임을 말없이 일러줍니다. 그리고 이는 백두산에서 함백산 사이 백두대간 줄기에 놓여 있는 북한 지역의 고산지대에도 당연히 많은 털복주머니란이 자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흔히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없어진다고 한다. 멀뚱멀뚱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이기도 하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려보지만 세상은 아직 단잠에 코골이 중이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일찍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다정한 목소리가 있다. “안녕하세요. 박영주입니다.” KBS 1라디오 의 박영주(朴英珠·57) KBS 아나운서가 그 주인공이다. 매일 아침 97.3MHz의 라디오 주파수를 타고 들려오는 그녀의 모닝콜은 전국 방방곡곡 시니어 애청자들에게 비타민주스처럼 신선한 에너지를 선사한다.
새벽 4시, 평범한 사람이라면 침대에 누워 여전히 어제의 꼬리를 붙잡고 있을 법한 시간이다. 그러나 이토록 이른 시각에도 활기찬 하루의 포문을 여는 이들이 있다. 바로 의 애청자들이다. 상냥하고 은은한 박영주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덩그러니 놓인 새벽의 허전함을 사뿐히 채운다. 이미 애청자들과 끈끈한 교감을 이루고 있지만, 방송을 놓치고 있을 이들을 위해 박 아나운서에게 직접 소개를 부탁했다.
“새벽 4시부터 4시 40분까지, 시니어를 위한 종합 매거진 프로그램입니다. 새벽잠은 없고 그 외로움과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일찍 일어나는 분들이 이 프로그램을 듣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라는 이름으로 방송했어요. 청취자 층을 50대까지 확장하려는데, 그들을 실버라 부르긴 어울리지 않아 ‘시니어’를 사용하면서 가 됐죠. 이름이 바뀌고 얼마 뒤에 제가 진행을 맡아 3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건강, 추억의 음악, 영화 그리고 한시까지
새벽 프로그램인지라 다소 밋밋하게 흘러가리라 예상했다가 코너 편성표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9988 치매완전정복’, ‘행복밥상’, ‘낭독으로 읽는 고전소설’, ‘유성기로 듣는 우리 음악’, ‘그 시절 그 노래’, ‘추억의 영화’, ‘꿈꾸는 책방’ 등 건강을 비롯한 문화 전반에 대한 14가지의 콘텐츠가 한 주를 가득 채운다. 그녀가 소개한 ‘종합 매거진 프로그램’이라는 문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매일 리포트와 더불어 두 가지의 주제를 40분 동안 꾹꾹 눌러 담아 들려주니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다. 거기에 친근한 박영주 아나운서의 목소리까지, 그야말로 빈틈이 없다. 그중 청취자들의 반응이 가장 좋은 코너는 무엇일까?
“치매에 관한 정보 제공과 상담까지 해드리는 ‘9988 치매완전정복’이 반응이 좋아요. 또 ‘한시 산책’을 선호하는 분들도 많고요. 요즘 젊은이들은 한자를 잘 모르지만, 시니어 세대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한자를 다 배웠잖아요. 다들 그런 향수가 있는데, 일반 방송에서는 잘 안 다루죠. 그런 주제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각양각색 코너를 마련하는 데 제작진을 비롯한 진행자의 노고도 상당할 터. 여느 교양 프로그램 못지않은 탄탄한 구성은 시니어 청취자를 향한 그들의 깊은 고민에서 비롯됐다.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 제작진과 함께 논의해요. 우리 작가는 20여 년 문화 쪽에서 오랜 경력을 쌓았는데, 나와 또래도 비슷하고 취향도 잘 맞아요. 그래서 문화에 관해서는 속속들이 다 다룬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책, 음악, 영화, 시, 소설 등 미술이 빠지긴 했는데, 아무래도 라디오라서 미술이 지닌 시각적 요소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에요.”
평소 일주일에 두 번은 영화를 보고, 한 달에 두세 번, 많게는 대여섯 번 음악회, 발레, 오페라 등을 즐긴다는 박 아나운서다. 그녀의 폭넓은 문화적 소양과 더불어 어린 시절 추억은 다채로운 코너 구성에 힘을 실었다.
“중학교 3학년 때 학급 배정을 받아 교실에 가보니 담임선생님께서 커다란 전지에 윤동주의 ‘서시’를 써서 붙여놓으셨어요. 매일 조회, 종례시간이면 ‘차렷, 경례’를 하고 그 시를 다 함께 낭송하곤 했죠. 한 달 동안 매일 하나의 시를 외우다시피 읊다가, 다음 달이 되면 또 다른 시를 그렇게 써놓으셨어요. 그 순간이 굉장히 좋았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죠. 그렇게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사회에 시가 넘쳐나면 보다 더 좋은, 행복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시’ 코너를 넣게 됐어요. 그건 제가 강력하게 추진했던 코너라 남다른 애착이 있죠.”
사연 속 사연이 담긴 ‘부모님 전 상서’
요일별 달라지는 코너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토요일 방송분인 ‘부모님 전 상서’다. 청취자가 부모님께 띄우는 편지를 성우가 낭송하는 시간인데, 매주 애잔하고 감동 어린 이야기로 많은 이의 가슴을 적신다.
“부러웠던 사연이 있어요. 주인공이 어린 시절 동네에 전염병이 퍼졌는데 아무도 그 시신을 거두지 않아 아버지께서 홀로 수습하시다가 결국 전염병에 걸려 돌아가셨대요. 비록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자녀들의 우애가 대단했죠. ‘의좋은 삼 형제’라고 불렀는데, 큰형이 나무를 하면 꼭 두 동생의 집에 몇 단씩 놓고 가고, 작은 형이 시장에서 뭘 사면 그것을 셋으로 나눠 형과 아우의 집에 주고…. 결혼해서도 윗집 아랫집 다 같이 살았죠. 그러고도 아쉬워서 나란히 묻힐 곳을 마련하고 묘비명도 미리 써두었다는 거예요. ‘우리 삼 형제는 한평생 함께 살면서 우애를 나눴는데 그 정을 두고 가기 아쉬워, 밤하늘의 별을 보고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이야기를 나누고자 여기 나란히 묻힌다. 후세들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하며 잘 지내라.’ 그런 이야기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들으신다면 얼마나 뿌듯하실까요. 참 부러운 마음으로 사연을 소개했어요.”
이 코너는 편지의 내용에서 오는 감동뿐만 아니라, 편지 그 자체에서도 특별한 정을 느낄 수 있다. 스마트기기의 발달로 휴대폰 문자로도 라디오 사연을 받는 요즘, 의 청취자들은 젊은 시절 라디오 사연을 보냈던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정성 어린 손편지를 보내온다. 한평생 일하던 회사에서 쓰던 누런 갱지, 신문지 사이에 들어 있는 광고지 뒷면, 아들의 회사 로고가 찍힌 기안용지 등 빳빳하고 깨끗한 종이가 아닌 저마다의 알뜰함이 묻어나는 편지지가 인상적이다. 또 한글을 잘 몰라 구술을 해서 아들이 대신 적어 보낸 편지부터, 할아버지가 늘 하는 이야기를 타이핑해서 사연으로 보낸 손주, 손에 힘이 풀려 삐뚤빼뚤 쓰인 필체 등 그들이 보낸 사연에는 또 다른 사연이 담겨 있다.
청취자를 위하여, 그리고 청취자로부터
온기 어린 사연들만 보아도 어딘가 모르게 시니어의 감성이 물씬 느껴지듯, 청취자의 특징이 드러나는 몇 가지 귀여운(?) 오해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을 가볍게 넘기기보다는 청취자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개선하고자 노력한다는 박 아나운서다.
“우리 방송 이름이 ‘행복한 시니어’인데, 어떤 청취자께서 사연을 보내면서 ‘행복한 신녀’라고 써서 보내셨더라고요. 아마 ‘선녀’처럼, ‘신나는 여(女)’ 이런 식으로 의미를 생각하신 모양이에요. 우리는 당연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모를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려 해요. 또 제 이름을 ‘백영주’라고도 하고, ‘박영희’라고도 하고, 청력이 약해지셔서 그런 건데 더 또박또박 말씀드리려고 신경 쓰고 있죠. 가끔 리포터가 현장에 나가 청취자를 만나면 (코너가 많다 보니) ‘박영주 아나운서가 참 똑똑하다, 어떻게 그 많은 것을 아느냐’고 칭찬하신대요(웃음). 그러면 작가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해드리곤 하죠.”
그 외에 대표적으로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새벽 4시 생방송 진행으로 안다는 것이다. 대체로 라디오는 생방송이지만, 새벽 시간대 방송의 경우 사전 녹화로 만들어진다. 박 아나운서가 실제 방송을 녹음하는 시각은 오전 9시 출근시간 이후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벌써 33년째 KBS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몇 년 후면 은퇴를 맞이하게 될 박 아나운서에게 는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1985년에 입사해서 초창기에는 TV 프로그램을 많이 했죠. 15~20년쯤 지나면 TV 프로그램은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시니어 아나운서들은 라디오 프로그램에 주력하게 돼요. 이제 퇴직이 4년이 채 안 남았는데, 선배들도 그랬고 아마 이 프로그램을 하다가 떠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젊어서 한참 아이 키우고 할 때는 정말 앞만 보고 달려왔거든요. ‘음미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말이 있죠. 이제는 상당 부분이 온전히 나의 시간이거든요. 일상의 성찰도 있지만, 지난날을 되새겨보는 시간이 참 많아요. 아주 느린 호흡으로 참되게 나를 위해 집중해서 살 수 있는 시간을 복되게 가꿔나가 보려고요.”
현재도 시간을 내서 사단법인 ‘공감인’에서 진행하는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의 집단 치유 프로그램 치유활동가로 활약하는 그녀는 은퇴 이후에도 이를 유지하며 시각장애인 녹음 봉사자 교육 등에도 힘쓰고 싶다고 했다. 또 한 가지, 곁에 계시는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도 늘릴 계획이다. 이러한 다짐에는 ‘부모님 전 상서’ 코너가 교훈이 됐다.
“부모님은 늘 거기 계시고, 당연히 뒷바라지해주는 분들로 여겨왔는데, 이 코너를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여러 사연 속 공통 메시지는 ‘살아 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뵀더라면, 식사 한 끼 함께할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거예요. 저는 부모님이 살아계셔서 그걸 할 수 있는 처지거든요. 원래는 냉랭한 딸이었는데, 가능하면 더 자주 찾아뵙고, 더 살갑게 하려고 노력하죠.”
행복한 시니어, Just Do it!
는 청취자들의 노후뿐만 아니라 다가올 박 아나운서의 노후까지 행복으로 이끌어가는 듯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행복한 시니어’는 어떤 모습일까?
“글쎄요, 사람들은 행복을 어떤 특별한 상태라고 생각해요. 여행할 때, 친구와 대화할 때, 좋아하는 활동을 할 때 행복을 느끼죠. 그런데 진짜 그럴까요? 춤출 때 행복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가 춤을 출 때는 단지 춤추고 있고, 춤에 몰입해 있을 뿐이에요. 그럼 정확하게 행복한 순간은 언제일까요? 춤을 추고 나서 아닐까요? 그건 이미 춤을 추는 행복에서 벗어난 상태죠. 궤변 같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행복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라고요. 삶은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이고, 아마 삶이 끝나는 순간에는 ‘아! 그래도 행복했구나’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니 지금 ‘살아 있다면’ 행복한 시니어가 아닐까 해요.”
끝으로, 의 청취자와 독자를 위한 응원의 한마디를 부탁했다. 영화 마니아답게 노아의 방주를 모티브로 한 영화 의 대사를 언급했다.
“영화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네가 신에게 이 난국을 헤쳐갈 용기를 달라,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을 달라고 기도했을 때, 신이 과연 어떤 형태로 용기와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용기? 사랑? 그게 뭔데? 네가 행동을 하면 거기에 용기가 얹어진다. 또 네가 작은 호의를 베풀었을 때 거기에 사랑이 얹어지는 거다. 신이 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무언가를 했을 때 생겨나는 것이 용기이고 사랑이다.’ 나이 들면 뭔가를 하려다가도 못할 이유와 핑계를 찾거든요. 그럴 땐 그냥 무엇이든 일단 해보셨으면 해요. 무언가를 했을 때 거기 길이 있고 답이 얹어질 거예요. 자신을 믿고 저질러보세요. 저스트 두 잇(Just do it)!”
>박영주 아나운서
KBS 11기 아나운서로 입사이후, KBS 제3라디오 , , KBS 1TV 등 다수의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과 만났다. 현재는 를 진행하며 KBS 편성본부 KBS한국어팀 팀장을 맡고 있다.
‘닭님에게 손수 밥을 만들어서 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하는 시인이 있다. 흔히 우둔함의 대명사로 꼽는 닭을 ‘닭님’이라고 부른다는 것 자체가 비범하다. 경기도 여주군 도리마을 외딴집에서 700여 마리의 닭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홍일선(洪一善·67) 시인이 바로 그 사람이다. 1980년 여름호를 통해 등단해 , 등의 시집을 낸 중견시인인 홍 시인은 숲과 강, 그리고 생명들을 벗 삼아 자연이 전해주는 울림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고 있다. 그가 농촌으로 내려간 후 12년 동안 겪은 자연 속의 ‘거룩한’ 사연을 들어봤다.
1950년생, 올해로 67세. 농사일로 단련된 시인의 손가락은 거칠어 보였다. 어언 백발, 말간 피부, 서늘한 눈빛이 어우러진 순박한 농부이자 시인인 홍일선은 누구나 막연하게라도 상상해보는 귀농을 실천한 지 벌써 12년째다. 그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자연의 삶 속에서 대지로부터 은밀하게 울리는 북소리를 들으며 ‘공격’이 아닌 ‘공경’의 문학을 발견하고 있었다. ‘닭님’과 함께.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홍일선 시인의 ‘닭님들’
홍일선 시인은 지금 여주군 점동면 도리마을 중근이봉 자락 3000평 대지에 있는 외딴 집에서 700여 마리의 닭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가 ‘닭님’이라고 부르는 이 닭들은 보통 닭이 아니다. 닭님들은 그와 그의 아내가 막걸리 효소, 돌가루, 미강, 발효제. 옥수수 가루, 된장, 간장, 콩비지, 고추씨, 깻묵, 풀씨 등 14가지를 합쳐 정성 들여 만든 ‘맛있는 밥’을 매일 5시에 먹는다. 그리고 집 앞마당과 2만 평의 숲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산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저녁때가 되면 비닐하우스 집으로 알아서 들어온다.
비닐하우스에는 따로 난방 장치가 되어 있지 않다. 700마리의 닭 중 10퍼센트는 오소리, 솔개, 너구리, 삵 같은 야생 짐승들이 가져간다고 한다. 한마디로 완전히 자연 그대로 닭을 키우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0마리 정도는 계속 유지된다.
“왜 700마리냐 하면 닭님들이 저와 아내가 손수 만든 발효사료를 먹고 자라는데, 그걸 만들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거든요, 정말 바빠요, 700마리가 딱 이상적이에요. 우리 할아버지들이 다 했던 방식이고 자급자족이 가능한 정도죠. 최시형 선생의 ‘경물(敬物)’의 가치관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에요.”
경물이란 모든 사물을 아끼고 공경하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홍 시인은 경물을 통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고 진정한 생명농업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닭님이 내 마음을 알아준다”
홍일선 시인은 처음 닭을 키우게 된 때를 2007년 5월 어느 날인가로 기억한다. 그의 지인인 동화를 쓰는 이상권 작가가 전국 여러 곳에서 토종닭을 사와 용인에서 키우던 시절이었다.
“이상권 작가가 그러면서 굉장히 즐겁게 사는 걸 봤어요. 그러다 그가 직접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온 다섯 마리를 키우기 시작했죠. 조류독감이 터졌을 때였는데, 숨겨서 들어와야 했어요. 하지만 그랬는데도 기어코 이웃에서 신고를 하더군요.”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다섯 마리로 시작된 닭은 어느새 150여 마리로 불어났다. ‘사실 알을 안 낳아줘도 되는데 내 마음을 알아서 낳아주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자연스러운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닭이 불어나며 함께했던 행복한 시절이 있었어요. 가난했지만 이게 온전한 삶이다 싶었죠. 그런데 갑자기 이명박이라는 괴물을 만나게 된 거예요.”
어느 날 그 많던 닭들이 사라지다
홍일선 시인의 집 앞에는 ‘여강’이라고 불리는 남한강이 흐른다. 그는 강을 생각하면 우울하다. 그가 이명박 전 대통령을 ‘괴물’이라고 지칭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의 삶의 터전을 깡그리 부숴버린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4대강 사업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울분의 원인이었다.
“여기에는 나보다 먼저 살고 있었던 고라니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밤에는 고라니가, 낮에는 청둥오리와 같은 새들이 시를 썼어요. 그들이 내는 소리가 바로 시였죠. 달빛에 책을 읽고 강변에 앉아 묵상하는 일만으로도 황홀합디다.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었어요.”
그러나 4대강 사업은 자연이 내는 시를 죽이면서 인간의 소음을 토해냈다. 그러자 자연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2년 여 동안 새벽 다섯 시 반에 점호하듯이 어마어마하게 큰 포클레인과 덤프트럭 수십 대가 와서 밤 아홉 시 반, 열 시 반까지 계속 작업을 했죠. 집이 흔들릴 정도로 요란했습니다. 그때 고라니 시인이 사라졌죠. 청둥오리, 왜가리, 백로도 땅에 앉지 못하고 십 분을 넘게 하늘에서 선회하다가 저 끝에 겨우 앉더니 이내 떠나버렸어요. 여러 날 그러는 걸 봤어요.”
무엇보다 그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건은 그가 기르던 닭들이 한꺼번에 사라져버린 일이었다.
“어느 날 그 많던 닭들이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은 겁니다. 좌절했죠.”
생명의 경이로움에 머리 숙여지다
혼비백산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어딘가에서 삐약삐약 소리가 나는 겁니다. 아내는 환청이라고 했죠. 그러나 환청이 아니었습니다. 저 숲 쪽에서 어미 닭이 병아리 열다섯 마리를 데리고 온 겁니다.”
알에서 병아리가 나오려면 37.5℃를 유지하며 20일을 품고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 어미 닭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숲속에서 20일 동안 정성을 들여 알을 품고 부화시켜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닭이 열다섯 개의 알을 품으면 한날 한시에 부화되는 게 아니다. 사흘에서 닷새에 걸쳐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온다. 그 시간 동안 어미 닭은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새끼들을 품었을까.
기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자 다른 어미 닭이 또 열세 마리의 병아리를 데리고 숲에서 나왔고, 나흘째 되는 날에는 어미 닭 두 마리가 여러 병아리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인은 닭에게 고마움을 절절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 고마움은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인간이었는지를 뼈저리게 자각하게 해줬다.
“그때 저는 4대강을 피해 정선으로 갈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저 닭들은 그걸 견디며 살아냈던 겁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라는 인간이 뭔가 싶었어요. 민중시를 쓰고 민족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첫 마음으로 돌아가자고 마음먹게 됐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닭을 ‘닭님’이라 부르겠다고 했어요. 박근혜씨를 닭이라고 부르는 건 말도 안 돼요. 닭이 어떤 동물인데.”
표절하려면 대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표절하라
새로운 마음으로 홍일선 시인은 많은 생각을 했다. 특히 그가 업으로 삼고 있는 문학에 대한 생각은 보다 광활해졌다. 문학을 대하는 지점이 과거와는 달라진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 세대는 시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 기술자는 있어도 시인은 없습니다. 문학은 대지로부터 나오는 울림에 대한 교감이에요.”
그는 얼마 전에 있었던 신경숙 작가가 미시마 유키오의 글을 표절한 사건과 그에 대처하는 창작과비평사의 태도에 개탄을 금치 못했다.
“표절을 하려면 대지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표절하세요. 어머니 같은 강이 들려주는 언어를 표절하라고요. 감자는 땅을 가르고 나옵니다. 이건희와 이재용이, 스티브 잡스가 그런 걸 만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감자가 땅을 가르고 나오는 그 울림을 누가 듣겠습니까? 이명박이 듣겠습니까, 박근혜가 듣겠습니까. 예술인들이 들어야죠.”
신이 부여한 질서, 농업
이제 홍일선 시인에게서 문학은 생명의 근원을 생각하는 예술로 환원된다. 그는 ‘신이 부여한 질서를 회복하자’고 말했다. 그 질서란 바로 농업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농사를 다 지을 수는 없어요. 그러나 정신만큼은 농업 근본주의로 돌아가야 합니다. 농업은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농업의 재발견이 필요합니다. 퀭한 눈으로 아들을 기다리는, 그 어머니를 발견하는 일 말입니다.”
‘대지라는 거대한 생명을 제대로 섬기는 일이 내가 하는 문학’이라고 밝히는 그는 문학이라는 틀을 정의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닭을 닭님이라고 부르고 5덕(흙님, 숲님, 강님, 햇빛님, 곡식님)을 섬기며 더불어 사는 삶에서 시적 울림을 찾는 그에게 문학을 어떤 틀로 정의하는 것은 편협한 일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문학이란 살면서 실천되고 구현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문학에 무슨 고급이 있고 저급이 있을까요?”
공경은 거룩한 행복이다
아내, 아들과 함께 사는 홍일선 시인은 ‘여기에 온 게 참 좋다’고 거듭 피력했다. 그 말의 진실성을 의심할 여지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 와서 정말 행복해요. 제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공경하자는 겁니다. 그것은 농업과 대지에 대한 공경입니다.”
그가 말하는 공경이란 자연을 앎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공경이라는 말에는 쌀 한 톨이 어떤 경로로 입에 들어오는지 성찰하며 살자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쉽사리 놓쳐버리는 모든 작은 것들에 대한 배려 그 자체이기도 하다.
“공경은 거룩한 행복이죠. 서울에 있었으면 저도 황폐한 사람이 됐을 겁니다. 그래서 공경을 알게 됐다는 게 저에게는 행운이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달빛에서, 별빛에서, 들꽃에서, 장독대에서, 여울에서, 숲에서 솟구치는 울림들을 필요할 때마다 마중물로 사용한다. 그에게 이런 호사가 없다. 기우는 햇살을 받은 ‘닭님’의 벼슬이 유난히 붉어 보였다.
장수는 누릴 수 있으면 축복이고 누릴 수 없으면 재앙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장수하라는 말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은 나빠지고 삶의 질은 하락한다고 생각하기에, 차라리 병들기 전에 깔끔하게 죽는 게 좋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내 장수학계의 전문가인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뉴바이올로지 전공 석좌교수는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백세를 만나봤을 그가 밝히는 얘기는 충격적인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 고령화시대 백세청풍(百世淸風)의 기운으로 장수하는 사람들의 패러다임을 박 교수의 시각으로 들여다봤다.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뉴바이올로지 전공 석좌교수는 2000년에서 2009년 사이에 국내 최초로 백세인구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해 장수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꾼 인물이다. 그가 백세인구를 조사하게 된 이유는 매우 현실적이고 당연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됐다.
“사람이 늙으면 신체기능이 점점 떨어지는데 아주 늙었을 때는 어떤 모습일까, 그때가 되어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독립적으로 사는 게 가능할까? 저는 그것이 가장 큰 의문이었습니다.”
‘100세 정도 되면 생활이 형편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박 교수는 막상 조사를 하면서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만나자마자 힘자랑하던 백세인
“전남 곡성에서 만난 홍순갑 어르신은 당시 102세였는데 만나자마자 힘자랑을 했습니다. 마당에서 팔굽혀펴기 100개를 하고 계시더군요. 구례 산동면에 사는 101세 임종철 어르신은 뵈러 갔는데 지게를 메고 오시더군요. 그리고 손자가 100세 어르신을 모시는 게 아니라, 100세인이 쉰 살 손자를 데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더 기가 막힌 분은 쇼지 사부라 박사입니다. 102세 때, 저녁에 식사를 하다가 이 양반이 갑자기 한국말로 ‘한국에서 왔습니까?’ 하고 묻더군요. ‘예’라고 대답하니 ‘그럼 우리 한국어로 이야기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65세 정년에 딱 퇴직하여 ‘한글을 배워야 한다’ 싶어 한글을 배웠고 80세에는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100세 때 러시아어를 배웠고 104세 때 브라질에서 이분을 초청했는데 그때부터 포루투칼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90대가 인터넷을 하는 마을
박 교수가 조사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만난 국내 장수인들은 대략 250여 명에 이른다. 백세인들의 사례를 보니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새로운 깨달음이자 분명한 성공 좌표들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젊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공동체마저 만들고 있었다.
“도쿠시마에 가미가쓰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농업학교를 막 졸업한 젊은 사람이 농협의 직원으로 들어갑니다. 가서 보니 마을 주민이 2000명인데 65세 이상이 1000명이 넘었던 겁니다. 50% 이상의 인구가 노인인 초고령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인들은 자주 티격태격 싸웠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손쉽게 얻으려고만 했습니다.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아 ‘우리 일을 합시다’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도쿠시마 산속 마을에 있는 재료들로 일본 요리 장식용 패키지를 만들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동네 어른들이 단번에 그런 일을 하겠다고 했을 리가 없다. 겨우 3명이 시작했는데 이게 팔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물건이 팔리자 할머니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주문을 뺏어가려고 했던 거죠. 젊은 사람이 70~80세 사람들의 싸움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람이 꾀를 냈죠. ‘주문은 인터넷으로 받아가시오’라고. 그러자 처음에는 어르신들이 무슨 인터넷이냐며 난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딱 버텼고, 2년이 지나니 70~90대 마을 주민들이 컴퓨터를 하게 됐어요. 세계 최고령 인터넷 마을이 돼버린 거죠. 그렇게 해서 마을이 발전한 지 30년 이상이 됐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흉내를 내려고 해도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 돈이 많이 든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걱정하고 있다. 박 교수는 반대로 생각한다. 저비용 장수사회를 만들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장수인이 건강하게 일하며 생산 인력으로 생활할 수 있으면 되는 일이다. 앞서 소개된 고령화 마을의 기업화가 그 좋은 모델이란다. 그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슈퍼 노인의 시대가 오고 있다
“‘나이가 들어도 잘 살 수 있는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당당할 수 있는가?’ 있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생기는 많은 문제점들만을 생각했었는데 위에서 소개한 분들을 보면 안 그렇습니다. 그러니 패러다임을 바꿀 때가 온 거예요. ‘패러다임 시프트(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가 일어나야 합니다.”
박 교수는 ‘지금 놀라운 시대가 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슈퍼 노인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일본이나 유럽에는 100세인의 육상대회가 생겼습니다. 영국의 파우자 싱은 102세의 나이에 마라톤 풀코스를 8시간에 걸쳐 완주했습니다. 그는 단축 마라톤인 10km를 1시간 30분 만에 완주하기도 했습니다. 나가오카 미에코라는 100세 할머니는 수영 마라톤 1500m를 완주했습니다. 미국 돌푸드 사의 데이비드 머독 회장은 94세 때, 캘리포니아의 자기 목장에서 아침마다 한 시간씩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지금은 99세인데 아직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100세 장수가 보편화되고 있는 현실은 여러 통계 지표로도 증명되고 있다.
제대로 장수하며 일하는 사람들
빠른 속도로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있다. 평균 수명이란 것은 어디까지 갈 것이냐. 실제 사람들이 많이 죽는 나이인 최빈사망연령은 0세부터 100세까지 중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사망하는 연령의 개념으로 평균수명보다 더 길다. 최빈사망연령은 1950년부터 계속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82세, 최빈사망연령은 90세가 넘었다. 이제 고령사회에서는 실제 사람들이 제일 많이 죽는 나이가 중요하다.
“최빈사망연령 표준편차를 보면 옛날에는 10년 정도였는데 지금은 6년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 나이의 표준편차가 작아진다는 것은 죽는 사람들 나이의 차이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장수의 보편화’가 이뤄지고 있는 겁니다. 옛날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장수했는데 지금은 ‘somebody’가 아닌 ‘everybody’입니다.”
100세가 넘는 인구는 일본이 6만 명이지만 우리나라는 3000여 명이다. 미국은 7만 명, 중국은 5만 명 정도다.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건강한 노인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지표다.
“옛날에는 70이라는 나이는 죽어야 할 나이였죠, 지금 70이란 나이는 일을 못해서 안달 난 나이입니다, 저도 70입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죠. 건강한 노인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는 건강한 노인에게 ‘dependent Life(의존적인 삶)’를 가지게 하지 말고 ‘Independent(독립된)’할 수 있게끔 제도적인 문제를 바꾸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제대로 장수시켜버리자.’ 그러면 병원비가 안 듭니다. ‘장수인은 일을 시켜버리자.’ 그러면 복지비용도 안 듭니다. 이게 제 주장입니다.”
무조건 부지런하라
박 교수는 사람이 아무리 늙어도 변하지 않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그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20대 때 헤어진 애인이라도 딱 들으면 ‘아, 그녀’라고 생각이 납니다. 그다음에 변하지 않는 것은 ‘성격’, 즉 마음 씀씀이입니다.”
박 교수가 제시한 사례들 덕분에 백세가 되어도 인생은 젊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구체적인 방법을 들어봐야 할 때다. 건강하게 장수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법론을 묻자, 박 교수는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를 꺼냈다.
“다산 선생이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때 만난 사람이 황상(黃裳, 1788~1870)이란 사람입니다. 이분이 글을 잘 쓰셨는데, 라는 문집에 다산 선생과의 일화가 나옵니다. 다산 선생이 이분에게 ‘공부하라’고 말해서, ‘내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 수 있습니까?’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산 선생이 한 말씀이 세 글자였습니다. ‘부지런해라, 부지런해라, 부지런해라.’ 사실 장수라는 것도 이 3근계(勤戒)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장수도 그냥 이뤄지지 않습니다. 건강장수라는 것은 다 부지런해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많은 장수인들에 대해 연구할 때, 무엇을 먹느냐, 어떻게 생활하느냐가 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 공통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장수는 성실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백세라도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꿔라
부지런하라는 것은 무언가를 실행하라는 말과도 같다. 박 교수는 그 실행 부분을 간단하게 세 가지로 나눠서 설명했다.
“‘무엇이든 해버려라.’ 나이가 들었다고 핑계대지 마라. 못할 이유가 뭐 있냐. 그리고 나이가 들면 ‘받으려고 하지 마라, 줘라.’ 마지막으로 나이가 들면 ‘배워야 한다.’ 배워야 줄 것도 생기고 할 것도 생긴다.”
‘하자, 주자, 배우자. Do it, Give it, Prepare it. 行之 與之 習之.’ 그가 던지는 장수시대의 실천강령이다.
백세인들에게서 ‘움직이고(動), 적응하고(應), 머리를 쓰며(判), 느끼고(感), 절제(適)’라는 공통점이 발견됐다고 한다. 그는 “장수를 위해서는 유전자, 성격, 환경 등의 자연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운동, 영양, 관계, 배움, 참여 등의 생활습관이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중 ‘관계’가 가장 중요한 비결인 것 같다며 여기에는 부지런함이 포함된다고 했다. 결국 나이가 들수록 의존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스스로 독립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존재가 되는 게 중요하다.
“백세인들 중 고혈압, 관절염, 위장병이 있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당뇨는 거의 없어요. 당뇨는 생활습관 질환인데, 결국 장수와 생활습관도 연관이 있다는 거죠.”
“98세에 시집을 내서 100만 권이 팔렸다는 시바타 도요 할머니가 쓰신 시 중 ‘비밀’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99살이라도 사랑도 하는 거야, 꿈도 꿔, 구름도 타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100세가 돼도 연애하면 안 되겠습니까? 김형석 교수가 올해 한국 나이로 98세이신데, ‘뭐가 가장 하고 싶으냐?’ 물었더니 ‘연애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박상철 (朴相哲) 교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생화학 전공으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80년부터 2011년까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과학기술부 우수 연구센터인 노화세포사멸연구센터와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가천의대, 이길여 암·당뇨연구원장을 거쳐 현재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 고문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등이 있다.
시대를 상징하는 목소리가 있다. 포크음악의 전설 세시봉의 막내인 김세환의 목소리가 바로 그렇다. 1970년대를 수놓았던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노랫말과 귀공자 같은 외모와 함께 어우러져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화려하게 부활한 세시봉의 멤버로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이어가고 있는 그는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변치 않는 사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모습 그대로 천진난만한 긍정의 에너지로 가득했던 그와의 인터뷰.
관과 공연장에서 보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전혀 그 나이로 보이지 않는 놀랄 만한 동안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듣기도 싫어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내 마음, 내 현재가 중요하지.”
나이라는 숫자에 뭔가를 맞춰야 한다는 강박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 70대를 맞이하는 김세환의 철학이었다. 같은 70세라도 생각하는 게 다 다르잖냐는 그의 반문은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바꿀 수 없지만 속은 바꿀 수 있잖아요? 칠십이 되면 그 나이에 맞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 그건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애들한테도 물어봐요. ‘나 이러는 거 이상하냐?’ 그러면 ‘아니, 아빠는 어울려’라는 대답이 돌아와요. 그럼 오케이죠.”
내 마음, 내 현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김세환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이런 삶도 있구나 싶었다. 그 이미지를 총체적으로 정의하자면 긍정과 해맑음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며 “감사하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저는 지금 꿈이 없어요. 하루하루가 즐거우니까요. 범사에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그리고 저는 정말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고민? 지금은 없어요. 굳이 찾자면 아이들인데, 아이들이 아직 직업이 없으니까. 하지만 푸시 안 해요. 다 지 팔자니까요. 제 아버지도 그랬거든요. 아버지도 저에게 큰소리 한 번 친 적 없어요. 그래야 내가 편하죠. 내가 편해야 애들도 편하고. 렛 잇 비.”
“노래도 마이너는 싫다. 밝고 즐거운 노래가 좋다”고 말하는 그의 지론은 흡사 그의 노래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같은 삶의 태도다.
“글쎄요. 난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자랐으니까. 가요계에 나같이 고생 안 하고 가수 된 사람 없어요. 신인상 받고 그다음에 대상 받고. 그때가 총각이었을 땐데 집도 사고. 얼마나 감사해.”
물론 그도 사람이다. 인생에서 무조건 즐겁고 좋은 일만 있을 리 없다.
“저도 희로애락이 다 있죠. 그런데 슬프고 아픈 걸 굳이 계속 삭히는 건 싫어요. 빨리 잊어버려야지. 예를 들어 부부싸움 안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런데 부부싸움을 하면 내가 답답해. 그래서 내가 먼저 풀려고 해요. 난 비자금도 없어요. 비자금이 있다는 건 ‘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잖아요.”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르쳐주신 부모님
그는 자신이 긍정적인 성격이 된 것이 가족의 영향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100세까지 사셨던 어머니께 감사해요. 어렸을 때는 돈을 더 타내려고 어머니에게 거짓말도 하고 그러잖아요? 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예를 들어 어머니에게 ‘5000원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어머니는 옷장에 있는 가방에서 꺼내 가져가라고 해요. 그런데 애들 욕심에 6000원 가져가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하지만 어머니는 나중에 내가 더 달라고 하면 또 주실 거라는 확신을 주셨어요. 그래서 그런 욕심을 내본 적이 없어요.”
“나도 널 믿을 테니 너도 양심의 가책 없게 행동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은 바른 삶에 대한 지침과도 같았다. 그의 어머니는 얼마 전 10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한복만 입는 분이셨죠. 그래서 저는 학교 다닐 때 스타킹만 봐도 이상했어요. 집에 여자 스타킹은 아예 없고 남자 형제 셋이니 남자 신발만 잔뜩 있었어요. 아내와의 관계요? 며느리 눈치 보셨었지(웃음). ‘딸 같다 얘’ 이러고.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시집살이 절대 시키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본인이 많이 고생하셨으니.”
그의 어머니는 피아노, 아버지는 성악을 했다. 그가 노래를 하게 된 데에도 두 사람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그의 아버지 김동원은 당대의 모든 상을 휩쓸었던 대배우였다. 그러나 집에 들어오면 그런 간판에 매달리는 일 없이 아들에게 “나 팝송 하나 가르쳐줘라” 하며 함께 어울리는 아버지였다. 김세환의 긍정적이고 해맑은 자유분방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를 보며 우는 남자
“우리 마누라 끝내주지.”
아내와는 어떻게 만났느냐고 묻자 나온 대답이다. 거두절미하고 아내를 ‘끝내준다’고 표현하다니 팔불출도 이런 팔불출이 없다.
“아내와는 조병화 시인 딸의 결혼식 사회를 보게 되면서 만났어요. 한눈에 반했죠. ‘띠옹’ 하더라고. 첫사랑이었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말했죠. ‘나를 일단 사귀어보고 네가 선택해라. 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할게.’ 그리고 아직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고 있어요(웃음).”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첫사랑마저도 성공한 셈이다.
“그러게. 그래서 막장 드라마가 싫어요. 누군가는 재밌다고 열심히 보는데 난 싫어요. 피하고 싶고. 그래도 감정이 많아 영화 보면 막 울기도 해요. 에서 우승하는 거 보고 울기도 하고. 그러면 애들이 ‘아빠 왜 그래?’ 묻고. 막 소리 내서 우니까(웃음).”
그는 매사 긍정적이고 해맑은 사람이지만 싫은 것은 절대 못 참는 사람이기도 하다. “싫은 사람과는 같이 숨쉬기도 싫다”는 그는 사람의 성장 과정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했다.
“똑같은 나무라도 자라는 모습이 다 달라요. 사람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배우고 느끼는 게 중요합니다. 그게 안 되면 통제가 안 되니까요.”
그는 긍정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려면 상대를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는 간단하게 말했다.
“바꿔서 생각하면 편해요. 난 애들에게 ‘공부해’라고 말 못했어요. ‘만약 내가 자식이라면?’ 하는 생각을 하니까요. 제가 고3 때 텔레비전에 조영남이 나오면, 어머니는 나를 불러 ‘세환아, 조영남 나왔다. 이거 보고 공부해’라고 말씀하시곤 했죠. 나로선 참 고마웠지. 그렇게 느낀 고마움들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틈만 나면 자전거 탈 생각
김세환은 소문난 자전거광이다. 1986년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MTB를 타기 시작해서 벌써 30년 넘게 자전거를 타고 있다. 아니, 자전거에 대한 애착은 더 강해져서 요즘은 그가 속해 있는 자전거 클럽인 ‘한시반클럽’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자전거는 어느 면에서는 편해요. 헬멧 쓰고 안경 끼면 내가 김세환인 줄 아무도 모르니까요. 더구나 서 있을 일도 없으니. 그러니 나에게 딱 맞아요. 그리고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지. 땀은 나를 배신하지 않아요.”
그와 함께 자전거를 타던 사람들이 주말 오전에 볼일을 보고 한강에서 모이면 오후 한 시 반 정도가 되곤 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바로 한시반클럽이다. 1990년대 초부터 시작한 한시반클럽에는 40~60대에 속하는 스물다섯 명 정도가 모인다고 한다. 연령대로 보면 김세환이 가장 고참이다. “구멍이 나는 자전거가 있으면 주인보다 내가 고치는 게 더 빠르고 낫다”고 말하는 그를 중심으로 ‘형제보다도 더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다. 이 모임을 오랫동안 해올 수 있었던 것은 확고하게 짜인 규칙들 덕분이다.
“아, 운동만 잘해선 안 되겠구나 싶을 때가 있었어요. 사람이 삐딱해질 수가 있거든요. 한시반클럽만 봐도 강북 팀과 강남 팀이 생각하는 게 달라요. ‘그럼 오늘은 총무가 정한 대로 가자’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멤버의 관혼상제 때는 반드시 100% 참석하게끔 하고 있어요. 그러니 든든하죠. 또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잖아요. 우리 모임에는 죽음조와 보험조가 있어요. 죽음조는 엄청 달려요. 그 대신 일찍 가서 보험조가 올 때까지 기다리죠. 느림과 빠름이 있듯이 비우는 사람, 채우는 사람,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삶을 존중해주는 우리끼리의 규칙들이 생성되었어요. 이렇게 가다 보니 모임이 오래갈 수 있었다고 봐요.”
세시봉 멤버로서 받은 사랑 보답하고 싶어
김세환은 한시반클럽 외에도 해동방모임이라는 모임에도 참석하고 있다. 배우이자 연출가인 이해랑 가족들과 김세환의 아버지인 김동원 가족들, 그리고 연출가 윤방일의 가족들이 함께 만나는 모임이다.
연극계 거물들의 모임이 그들의 후손들 모임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참 드물다. 어쩌면 오랫동안 깊이 있게 모이는 사람들과의 꾸준한 관계가 김세환의 인간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 아닐까.
“인생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라면 아버지와 형을 꼽을 수 있겠어요. 아버지는 땅, 형은 기둥이었죠. 음악을 알려준 게 형이었으니. 가수를 안 했으면? 제가 신방과를 졸업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세시봉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나밖에 없어(웃음). 아마 방송국 피디가 됐겠죠.”
세시봉 멤버로서 그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많은 사람이 궁금해할 것이다. 그는 그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그 사랑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조만간 시청 앞 광장에서 무료로 공연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MC 없이 우리만의 공연으로. 이 얘기를 하니 다들 좋다고 했어요. 송창식에게만 말하면 돼요.”
후회되는 일은 없다, 오직 감사할 뿐
그는 매일 열한 시 전에 잠든다고 한다. 그리고 새벽 세 시나 네 시께 일어난다.
“그 새벽이 내 시간이에요. 인터넷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죠. 최고야 최고. 사진, 의상, 스키, 운동, 신문, 유튜브… 다 있어요. 그것만 해도 하루가 바빠요.”
단순히 그가 가수라서가 아니라, 그는 현재의 트렌드와 함께 숨 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가 나이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은 그러한 본능에 가까운 동시대성 덕분일 것이다.
“나를 의식하면 불편해집니다.”
김세환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일관된 지론을 듣다 보니, 그가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늙어가는 자신’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 것 아닐까.
“후회되는 거요? 하나도 없어요, 그저 감사할 뿐이지. 편한 대로 가는 게 삶이에요.”
늘 그래왔지만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후보 등록자들 사진이 길게 걸렸다.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당선 가능성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길거리 사진 외에도 투표 설명문, 투표용지 등 선거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종이만 해도 서울시 가로수 세 그 루 중 하나 정도의 나무가 소모되었다는 말이 있다. 현수막도 다 태워 없애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공해가 발생한다. 국가적으로 큰 낭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런 낭비가 계속되는 것은 대통령 후보 등록 기준이 너무 만만하기 때문이다.
후보자 등록 요건은 너무나 간단하다. 후보자가 정당원일 경우 소속 정당의 추천을 받으면 된다. 무명의 후보 등록자들은 거의 자비로 정당을 만들고 자천해서 후보 등록을 받을 것이다. 제 돈 써서 후보 등록하겠다는데 말릴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들어보는 정당 이름도 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한 시·도에서 선거권자 500명 이상, 5개 시·도 이상 추천 요건을 채우면 된다. 그러므로 최소 2500명이다. 물론 한 개인이 이만한 추천을 얻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종친회나 기업가, 조합 등 조직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그다음 필요한 것이 선거기탁금 3억 원이다. 선거에서 10% 이상 득표해야 이 돈을 돌려받을 수 있으므로 이 사람들은 그냥 날리는 돈이다. 서민들에게 3억 원은 큰돈이지만, 돈이 많은 사람이거나 자기 돈이 아닌 경우 3억 원은 만들 수 있다. 요즘 아파트 한 채 가격이 10억~ 20억원 하는 세상이니 그런 집에 사는 사람에게는 큰돈이 아닐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노리는 것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는 것을 평생의 명예로 삼거나 선거 후의 인지도 상승, 입지조건 상승이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도 않은 사람이 명함이나 이력에 ‘대통령 선거 출마’를 했다 하여 존경심을 나타낼 사람은 없다. 오히려 코웃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각자의 이유는 있을 것이다. 소위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라 정당은 만들어놓았는데 대통령 후보조차 만들어내지 못하면 정당의 존재나 자존심이 문제될 수 있다. 할 말이 있어서 출마했다는 사람도 있는데 상위권 후보들 외에는 국민들이 들을 기회가 없다.
매슬러의 인간 욕구 5단계에 보면 명예욕이 4단계에 있다. 3단계인 소속,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면 스멀스멀 명예욕이 생기는 모양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기에 비석에 ‘대통령 후보’ 글자를 새기고 싶을 수도 있다. 명예욕은 무섭다. 특히 남자들에게 그렇다. 이번 선거에서도 출마자 15명 중 여성은 단 한 명이었다. 개인의 명예욕 때문에 국가적 낭비가 발생되고 전 국민이 쓸데없이 피곤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탁금을 10억원쯤 올려야 한다. 추천인도 현행 2500명에서 10배쯤 올려 2만5000명은 되어야 한다. 유력 출마자라면 전혀 문제가 안 되는 기준이다. 대통령을 뽑는 것이 목적인데 그에 편승해서 이름이나 알리자는 것은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일이다.
발레공연 ‘돈키호테’를 관람했다. 발레는 매우 오랜만에 보는 거라 그 화려한 아름다움을 미리 상상하며 즐거웠다.
유니버설 발레단은 1984년 창단된 한국 최초의 민간 직업 발레단으로 1회 신데렐라 공연을 시작으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해외 17개국에 선보이며 최고의 발레단으로 성장했다.
현재는 문훈숙 단장과 70여 명의 무용수, 40여 명의 스태프가 세계 정상을 향해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모두 알고 있듯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가 쓴 희극소설로 스페인의 엉뚱한 기사와 그의 시종인 ‘산초판자’ 그리고 ‘로시난테’ 라는 말이 방랑하며 벌이는 무용담 이야기다.
그런데 이번 발레 공연에선 돈키호테가 주인공이 아니고 가난한 이발사 ‘바질’과 아름다운 선술집 딸 ‘키트리’의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공연 시작 전 무대에 문훈숙 단장이 올라왔다.
발레를 볼 때 알아두면 좀 더 즐거운 관람이 될 거라는 인사와 함께 해설과 동작 시범을 보여주었다.
부드러운 손짓 하나하나 설명 한마디까지 열심히 귀 기울였는데 실제 공연을 보는 동안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공연 ‘돈키호테’에서는 토슈즈를 신은 무용수 외에 스페인 구두를 신은 무용수가 대거 등장한다고 한다.
캐릭터 댄스로 그 나라의 민속춤 동작이 있어 그렇다는데 무대에는 정통 발레슈즈와 까만색의 구두를 신은 무용수가 섞여 있었다.
정통 발레복인 튜튜를 입고 토슈즈를 신은 깜찍한 모습도 보기 좋았지만, 정열적인 스페인 의상을 입은 무희의 춤은 매우 화려해서 즐거웠다.
일상사에 부채를 이용한다는 설명으로 거친 동작과 부드러운 손동작으로 시범을 보여주었다. 발레에도 대사가 있는데 말이 아닌 손동작과 몸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1869년 러시아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해 대성공을 시작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다는 스페인의 정열이 살아 숨 쉬는 유쾌한 희극 발레가 시작되었다.
지중해의 낭만과 정열이 녹아있는 무대와 의상, 유머 넘치는 발레 마임과 빠른 스토리 전개, 스페인풍의 경쾌한 음악, 강한 캐릭터들의 좌충우돌 해프닝까지 우리의 눈을 한시도 떼지 못하게 잡았다.
제1막은 용감한 기사의 무용담을 너무 많이 읽은 ‘돈키호테’가 자기 자신이 기사라 믿고 환상의 여인 ‘둘시네아’를 찾아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구해내겠다며 시종 ‘산초판자’와 함께 길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스페인 거리에 화려한 차림의 사람들이 탬버린으로 경쾌한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이때 빨강 의상으로 도도하면서도 발랄한 선술집 딸 ‘키트리’가 등장한다.
가난한 이발사 애인이 있지만, 아버지는 점찍어 놓은 사윗감인 멍청하지만 돈 많은 귀족 ‘가마슈’가 있어 이들을 반대한다.
제2막, 3막으로 나뉜 무대는 우여곡절 끝에 돈키호테의 도움으로 무사히 결혼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2막에서 ‘돈키호테’가 꿈을 꾸는 장면에 나오는 숲의 요정은 이 공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스페인풍의 발레와는 달리 정통 클래식 발레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어 절제된 고전 발레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발레 ‘돈키호테’는 화려한 기교와 테크닉의 클래식 작품으로 주인공뿐 아니라 군무의 탁월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남성 무용수가 발레리나를 한 손으로 머리 위까지 들어 올리는 리프트 동작과 연속 점프, 발레리나의 32회나 돈다는 ‘푸에테’ (한쪽 발을 축으로 발끝으로 서서 다른 쪽 발을 올려 크게 흔들며 회전하는 동작) 등이 필자의 마음을 환상의 나라로 이끌어 주었다.
웅장하고 흥겨운 음악에 맞춰 공연된 발레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현실에 돌아오기가 싫을 정도로 한동안 아름다움에 취해 있었다.
중고교시절 특별활동으로 발레반에 들어 잠시 발레 연습을 한 적 있다.
그때 계속했다면 필자도 젊은 시절 이런 무대에 섰을까? 가능하지 않은 엉뚱한 상상을 하며 즐거웠다.
동년기자로 활동한 지도 어느덧 만 1년이 돼가고 있다. 일상의 삶 속에서 나태(懶怠)에 빠져 글쓰기를 망각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내가 정말 글다운 글을 썼을까?” 하고 뒤돌아보며 반성을 하게 된다. 글쓰기에 대한 열정은 지난 1년 동안 한시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기자생활 1년 동안 덤으로 얻은 행운도 많았다. 대학로에서 두 번씩이나 연극을 관람했고 올 초에는 압구정동에서 이라는 뮤지컬도 관람했다. 젊어서는 살기 바빠 문화생활을 못했고 나이 들어서는 관심이 떨어져 고작해야 1년에 영화 한 편 보기도 쉽지 않았는데, 지난 1년 동안 동년기자로 활동하면서 문화생활까지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감사한 마음이다.
지난 2월 22일에도 큰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여의도 KBS홀 본관에서 공연된 이투데이 신춘음악회 에 초대된 것이다. 필자는 며칠 전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을 기다렸다. 그런데 당일 아침부터 날씨가 잔뜩 흐리더니 오후가 되자 오락가락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필자가 사는 인천공항 근처에는 진눈깨비와 비가 섞여 내리면서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퇴근시간에 맞춰 막내아들에게 회사로 나오라고 했다. 공연장까지 가는 방법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몇 번이나 확인해보았지만 쉽게 가는 노선이 잘 찾아지지 않았다. 결론은 회사 통근버스로 김포공항까지 이동한 다음 공항전철역에서 9호선 급행열차로 갈아타고 가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려 저녁 먹을 시간이 없었다. 가다 보니 허기는 또 얼마나 몰려오든지…. 서둘러 현장에 도착해 일단 표를 받아놓고 시간을 보니 공연시작 20분 전이었다. 빠듯하긴 했지만 저녁을 굶고 관람할 수는 없어 근처 김밥 집으로 달려갔다. 모처럼 아들과 둘이 마주 앉아 김밥과 라면을 시켜 먹으면서 오랜만에 서로의 관심사를 물으며 대화할 수 있어서 좋았다. 식사가 끝나고 부리나케 공연장으로 돌아오니 공연은 이미 시작되었고 겨우 안내를 받아 착석하고 관람을 했다.
오프닝 무대로 타악그룹 RUN의 ‘두드림’은 힘차고 역동적으로 리듬을 타고 있어 오랜만에 필자의 마음을 심쿵하게 만들었다. 겨울 끝자락에서 만난 ‘마음이 따뜻해지는 콘서트’는 오는 봄을 맞이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필자의 마음을 녹여줬다. 아들은 가수 린의 인기 드라마 OST곡을 제일 좋아했다. 자신의 세대와 공감이 되고 감성이 맞아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깜찍한 걸그룹 ‘모모랜드’의 공연은 싱그러워 젊은 층의 관람자들은 물론이고 시니어들도 한마음으로 공감하고 어우러진 멋진 공연이었다.
중견가수 김장훈의 넘치는 끼와 재치는 마력이 있었다. 관객과 함께 호흡하면서 어우러지는 모습에서 문화는 대중과 함께 호흡을 해야 그 힘이 발휘된다는 생각을 새삼 해보았다. 마지막으로 메인무대를 장식한 가수는 등장하기 전부터 한껏 기대를 갖게 한 대형 록 가수 전인권이었다. 가늠할 수 없는 울림통, ‘전인권 밴드’의 현란한 연주, 관중을 사로잡는 매력과 포스가 한껏 발휘된 무대였다. 공연의 마지막을 향해 치닫는 시간에 갈 길이 먼 필자와 아들은 아쉬움을 남긴 채 자리를 떠야 했다.
아들은 공연장을 빠져나와 지하철을 타러 가는 내내 공연의 잔상(殘像)에서 벗어나지지 않는지 따뜻하고 멋진 공연이었다고 끊임없이 조잘댔다. 황급히 돌아오면서 9호선 국회의사당역을 찾느라 이리저리 헤맨 필자와 아들은 영락없는 촌뜨기 신세였다. 겨우 지하철을 타고 두어 정거장쯤 갔을 때 무심코 안내방송으로 다음 정차할 역이 노량진이라는 멘트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반대 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타고 만 것이다. 일찍 집에 도착하려고 공연 엔딩도 보지 않은 채 조금 일찍 빠져나왔는데 반대로 가는 지하철을 타다니! 필자와 아들은 마주보면서 멋쩍은 웃음을 나누고 노량진역에서 내려 부리나케 반대 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갈아탔다. 우여곡절 끝에 공항전철을 타고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택시 잡기가 힘들었다. 승강장을 보니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30여 미터나 늘어서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걸어가다가 택시가 보이면 타자. 그게 더 빠르겠다.” 아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걷기 시작했는데 그날 밤, 집에 도착할 때까지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한 시간여를 눈길을 걸었다. 칼로 에이는 듯한 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여미고 귀를 손으로 감싸면서 걸었지만 아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걸어가는 길이 싫지 않았다. 오랜만에 부자가 함께 걷는, 눈 내린 밤길은 따뜻한 콘서트만큼이나 훈훈했다.
천재화가 이중섭의 삶을 조명한 연극 지난 9월 10일부터 25일까지 홍익대학교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공연됐다. 이번 공연은 이중섭 탄생 100주년과 연희단거리패 30주년 기념, 올봄 세상을 떠난 의 극작가 김의경을 추모하는 무대였다. 김갑수(1991년), 지현준(2014년)에 이어 연희단거리패의 새로운 간판 남자배우로 자리 잡은 윤정섭이 이중섭 역을 맡았다. 윤정섭은 말 그대로 ‘무대 위에 이중섭을 올려놓았다’는 평을 들으며 매 공연을 흥분과 슬픔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의 동년기자단은 공연 첫날 공연을 관람하고 관극 소감을 나눴다. 비전문가 시니어의 입장에서 공연에 관해 순수하게 나눈 대화 내용임을 밝힌다. 편집자 주
동년기자단 김종억, 백외섭, 최원국, 전용욱, 장영희
이중섭의 생애와 화가로서의 활동에 드리운 한국 현대사의 비극, 가난, 이데올로기 문제가 교직된다. 고향 원산에서 조선의 황소를 민족 혼으로 여기며 소나 한국의 자연을 그리던 중섭은 스승의 권유로 동경 유학을 떠난다. 그는 일본 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만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향으로 돌아온다. 연인 마사코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찾아와 결혼식을 올린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형이 공산당에 끌려가 처형당하자 어머니와 헤어져 가족들을 데리고 월남한다. 궁핍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예술정신을 고집하는 중섭 때문에 가족은 극심한 생활고를 겪게 되고, 마사코는 애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중섭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억누르며 그림에 몰두하지만 가난에 시달리고,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가 죽음을 맞는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장영희 연극 시작할 때 화가 이중섭이 언제 태어났고, 어떤 일이 있을 겪고 살아왔다는 것을 극 초반에 보여주는 장면이 멋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중섭 일대기를 표현하게 위해 사용된 소품과 음악 등이 감동이었습니다. 이윤택 연출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연극 곳곳에서 느꼈어요. 아주 작은 것들도 이렇게 세심하게 볼 수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김종억 맨 처음에 연극 제목인 과 연극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연출이 관객과의 대화에서 말했을 때 이중섭 화가의 그림을 보고 제목을 정했다고 해서 고민해 봤는데 저는 그 제목의 의미를 마지막 장면에서 찾았습니다. ‘길을 떠나는 것’은 이중섭의 죽은 영혼이 먼저 간 첫째 아들의 손을 잡고 먼 길을 떠난다. 그래서 길 떠나는 가족이구나라고 이해했습니다.
전용욱 저는 이 연극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중섭의 가족이 다 나타났다가 일제강점기 유학생활로 한국을 떠나는가 싶더니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태어나 살아왔던 원산을 어머니를 제외한 가족 구성원이 모두 떠나가잖아요? 이중섭 삶 자체를 가족이 흩어지고 모이는 상황을 하이라이트로 묶은 것 같습니다. 가족이 헤어지는 과정에 포커스를 맞추고 아이를 만나서 이승을 떠나 가족들한테 떠나는 과정 아닐까요?
김종억 그렇게만 설명을 하신다면 일반 평범한 사람이 다 그렇게 사는 것이지요. 특별히 이중섭이라는 화가의 삶에 집중을 하고 조명을 했다는 것은 그렇게 현실적으로 길을 떠나는 것에만 조명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 작가의 일대기를 통해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고뇌를 하고 또 그 속에서 화가로서 살아온 이중섭을 표현했다고 봅니다. 그냥 길만 떠나는 건만 생각했다면 일반이랑 똑같은 거잖아요.
장영희 저는 정말 기가 막히게 잘 맞는 제목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중섭이 원산에서 어머니를 떠나오고, 부인인 남덕이 일본으로 가버리면서 상당한 외로움을 느끼죠. 그러면서 자기의 성기에 소금도 바르고 안타까운 장면들이 나왔잖아요. 마지막에 하늘로 가는 장면에서는 아들과 함께 가요. 어머니, 남덕이, 아들들과의 이별로 인해 굉장한 상처를 받았구나. 그 의미에서 길 떠나는 가족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리고 연극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데 정말 가슴이 설렜어요. 이중섭이라는 영혼을 만나는 시간을 기다리는 거였잖아요. 그래서 아주 기분이 묘했습니다. 두 시간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지도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연극을 기다렸습니다.
전용욱 이중섭 보다 더 많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도 있어요. 그 사람이 시대의 아픔을 간직해왔기 때문에 인지도도 높고 그 사람을 택했기 때문에 극화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던 거라고 봅니다. 사실 나이 들어보니까 젊은 시절을 살아봐서 그런 건지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장영희 첫째는 이중섭이 화가로 살면서 돈이 없었죠. 일본에 갔더니 장모는 자기 딸만 지키겠다고 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잖아요. 이중섭 평전을 읽은 뒤 연극으로 봐서 그런지 실제 이중섭에게 있었던 일들을 이해하면서 볼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 에서 이윤택 연출가가 큰 아들을 목각인형으로 만들어서 표현한 마지막 장면이 최고의 명장면이었다고 생각해요. 연극이라는 특유의 매체를 통해서 우리한테 들려주고자 했던 것을 확실히 보여준 것 같아요.
김종억 누구나 결국에는 가야하는 곳이잖아요. 이중섭이 자기 부인을 사랑해서 일본으로 가고 싶어 했지만 결국은 “나는 여기 고향, 흙이 땅이 있어야 자기 작품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막상 못가는 모습을 보여줬잖아요. 고향, 땅, 어머니 이런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정서를 예술가는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나도 수필을 쓰는데 결국은 글의 밑바탕에는 어린 시절 고향이 깔릴 수밖에 없더라고요. 어린 시절 시골집이 지금의 인천 공항이 있는 곳이에요. 지금 내 마음 속에서만 자리하고 있어요. 언젠가 제가 미술을 배우면 상상 속에 있는 내 어릴 적에 집을 좀 그려보고 싶어요.
전용욱 유년기 땅, 우리 동네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소중하고 오래가는지 알 수 있는 거죠. 이중섭의 땅도 그렇게 밖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거 같아요.
최원국 저는 연극이 예술가로서 이중섭에 대한 이야기를 조명하는지 알았는데 예술가라면 어떻게 하면 예술가로서 성공했다 이런 것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인간 이중섭만을 다뤘더라고요. 예술가로서 성장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지 않을 거 같다고 느꼈습니다. 일본에서 딴 화가의 그림을 모방했다고 했을 때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았을텐데 생각했습니다.
백외섭 연출가 설명 중에 미술은 연극에서 표현을 할 수 없으니까 7분 동안 그린 것이고 무대를 하나의 그림처럼 표현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솔직히 연극을 많이 접해보지 않아서 그런지 사실 적응을 잘 못하겠더라고요. 이중섭에 대해서는 알고 있고 좀 재미있는 장면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연극에 익숙하지 않은 저 같은 사람을 위해 눈이 번쩍 뜨이는 무대가 좀 더 있었으면 했습니다. 연극을 좀 더 많이 보면 이해할까요?
장영희 저는 이 작품에서 핵심만 얘기했다고 생각해요. 연극에서 잘 표현했고 전달했어요. 그 사람의 고뇌, 사상, 왜 제목을 길 떠나는 가족이라고 지었어야 했는지 많이 공감했습니다. 이중섭의 생애에 대한 정보를 조금 알고 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김종억 인간적인 고뇌가 결국 어떻게 녹아서 좋은 그림을 그리게 됐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천상병 시인도 말입니다. 그 분 또한 남겨진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삶을 조명해보면 술을 한시도 입에서 떼지 않으시고 사시다 생을 마감했잖아요. 하지만 예술가로서 족적 남길만한 시를 남겼잖아요. 그런 삶의 과정 속에서 글을 남길 수 있다. 예술가의 현재성이 말할 수 있죠. 맥락에서 보면 이중섭도 정말 평탄한 집안에서 잘 만나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가세가 기울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등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 좋은 작품으로 승화됐다고 유추 해석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용욱 순탄한 삶을 살아서 좋은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예술가가 드물잖아요. 이중섭도 기복이 크고 힘든 삶을 살았던 거죠. 그랬기 때문에 시대에 남는 강렬한 작품이 나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잠 잘 시간인 한밤중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게 필자만은 아닌가 보다.
불면증 대처법으로 올라오는 많은 기사를 보며 아, 남들도 이렇게 잠이 안 와서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안도감이 들며 조금 위로가 되기도 한다.
불면증은 정말 지긋지긋하다. 자려고 누웠는데 시간이 지나도 잠이 안 온다. 눈은 감고 있지만,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이 떠오르는지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잠이 안 오는 이유?-
예전에 좋아했던 'you are the reason, I don't sleep at night' 이라는 팝송이 있다.
커피를 마셔 봐도, 담배를 피워도, 물을 마셔도, 아무튼 뭔 짓을 해도 잠이 안 오는데 그건 너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그렇게 ‘그대’라는 상대가 있어 마음이 쓰여 잠 못 이루는 낭만적인 불면이 아니라 필자는 이유 없이 잠을 못 자니 고민이다.
일주일에 이, 삼일은 꼴딱 밤을 새우기도 한다.
그런 날은 괜스레 시계를 들여다보며 몇 시나 되었는지 자꾸만 확인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한 시 두 시가 지나고 네 시쯤 되어 그때까지 못 자고 있으면 멀리 밖에서 버스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새벽 첫 버스가 운행하기 시작하고 일찍 일터에 나가는 사람들이 상상이 된다.
원래 필자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게으름쟁이였다.
오전 중 전화한 친구에게 잠에 취한 목소리로 받으면 아직까지 자고 있냐며 놀라기도 하고 “그래, 미인은 잠꾸러기라지?” 하며 농담도 한다.
어떤 날 친구와의 약속으로 아침 일찍 외출할 때면 많은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는 걸 보게 된다.
그럴 때 아침형 인간이 성공한다는 말을 떠올리며 게으름쟁이인 자신이 무안해서 반성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불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전날 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댔다거나 커피를 여러 잔 마신 날 그런 현상이 더한 것 같다.
커피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필자의 하소연에 자기들은 아무리 커피를 많이 마셔도 잘 잔다며 반박한다.
하긴 일이 있어 바쁘게 지냈거나 외출했던 날은 커피를 마셨어도 눕자마자 언제 잤는지 모르게 숙면을 한다. 그런 날은 아침에 눈 뜨면 컨디션이 좋고 상쾌하다.
그러니 잠을 못 잔다는 건 필자가 좀 나태했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억지로 자려하지 말고 긍정적인 사고를.-
예전엔 억지로 자 보려고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계속 세어보기도 했고 자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더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요즘 필자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어차피 일주일에 몇 번은 잠 못 드는 밤이다. 그러니 너무 괴롭게 생각하지 말고 억지로 자려고 노력하지도 말고 그 시간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설렁설렁 큰 기사에만 눈길을 주었던 요즈음 신문을 들고 와 미처 보지 못했던 기사를 찾아보기도 하고 전에 읽고 감동받았던 소설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옷장을 뒤집는 방법도 있다. 얼마간 정리하지 않은 옷장은 엉망으로 엉켜있기 마련이다.
옷들을 다 꺼내어 개켜서 차곡차곡 넣다 보면 꼭 필요했는데 못 찾아서 못 입었던 탱크톱(끈 달린 티셔츠)도 발견하고 옷장 구석에 틀어박혀 잊어버리고 있던 소품이 튀어나오기도 해서 기쁘다.
TV를 켜면 무료로 보는 영화도 지천이다.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필자에겐 최고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이제는 잠 안 오는 밤 괴롭게 생각하지 않고 다음 날 꼭 나가야 할 일이 없으면 그때 자도 되니 할 일을 찾아 책도 읽고 영화감상과 옷장 정리도 하고 있다.
잠 올 때 자고 잠이 안 오면 할 일을 찾으면 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