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스트레스가 켜켜이 쌓인 남편, 함께 보내는 시간이 영 답답한 아내. 깊어지는 황혼의 동상이몽,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사이를 회복하는 데 그리 대단한 방법은 필요하지 않다. 배우자의 상황을 이해하고, 어려움을 공유하고, 부족한 부분을 챙겨주는 것만으로도 신혼의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되찾을 수 있다. 아래 사례가 자신의 이야기 같아 ‘뜨끔’했다면, 부부 사이를 개선하는 생활 속 크고 작은 행동 가이드를 실천해보자. 시작이 반이다!
CASE 1
은퇴 증후군 VS 갱년기
김은퇴 35년 일한 대기업에서 퇴직했다. 한동안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유 시간이 좋았다. 그러나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왔다. 고생 끝에 얻은 명예와 남부럽지 않은 연봉, 화려한 인간관계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듯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당신 뒷바라지하느라 내 인생이 끝났다”며 언성을 높이고 잔소리를 한다. 잘나가던 시절이 꿈만 같고 매일이 우울하다.
이홍조 어느 날부터 몸이 자주 홧홧하더니 관절통, 근육통, 불면증까지 전에 없던 증상이 밤마다 괴롭힌다. 한평생 반복된 가사노동에 체력은 점점 떨어져가는데, 남편은 은퇴하고도 하루 종일 누워 일어날 줄을 모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동안의 인생이 부질없게 느껴지고, 억울함과 분함, 회한이 사무친다. 밤만 되면 20~30년 전 서운했던 일까지 하나하나 생각나 일일이 따지고 싶은 기분까지 든다.
행복 솔루션 베이비붐 세대가 사회활동을 하던 시절 직장은 밥벌이 수단 그 이상의 개념이었다. 성공의 상징이며, 정체성을 드러내는 지표였다. 또 오늘날과 달리 ‘워라밸’이라는 단어조차 없었던 당시에는 가족에 소홀할지언정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풍족한 지원을 해주는 것이 가정 평화를 위한 최선이라고 여겼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30~35년간 직장에 헌신하다 은퇴한 이들은 가정과 직장 모두로부터 버려졌다는 생각에 상실감을 느낀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자존감 회복이다. 먼저 아내는 앞선 상황을 이해하고 남편의 장점을 일깨워주는 것이 중요하다. 재취업을 독촉하는 대신 승진한 날, 큰 프로젝트를 성사한 순간,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자식 대학 보낸 때 등 생애 성취 경험을 되짚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물어보며 의욕을 북돋아준다. 회상의 시간을 가지다 보면 아내 또한 그동안의 삶이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남편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정에 최선을 다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또 남편 역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한 회사의 책임자가 아닌 배우자와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을 고민해보고, 가정에서의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한편 남편은 아내가 ‘갱년기’라는 인생의 터널을 지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가시 돋친 말과 행동이 진심이 아닌 호르몬 변화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외면하기보다 이야기를 들어준다. “왜 또 그래”, “당신 그거 병이야. 병원 가” 등의 반응은 전쟁의 총성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표현하는 게 어색하다면 갱년기 증상에 좋은 음식, 영양제 등을 챙겨주며 ‘당신의 상태를 이해한다’는 마음을 슬쩍 내비쳐본다. 나이 들수록 배우자의 건강을 챙기는 것만큼 소중한 애정 표현은 없다.
CASE 2
여가 시간의 동상이몽
강바다 회사 다닐 때부터 쉬는 날마다 낚시를 즐기는 것이 인생의 몇 안 되는 낙이었다. 은퇴 후에는 막연한 불안과 우울함이 찾아올 때마다 종종 바다를 찾는다. 낚싯대를 잡고 머리를 식히다 보면 복잡한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아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내가 혼자 즐기는 취미 생활에 불평을 토로한다. 운동은 취미가 없는데, 자꾸만 함께할 것을 강요해 잦은 언쟁이 벌어진다.
최운동 은퇴 전 해외 주재원이었던 남편은 집을 비우는 날이 잦았다. 그러다 간혹 시간이 나면 집에서 누워 있거나 홀랑 낚시를 하러 바다로 떠나버렸다. 용기 내 함께 운동할 것을 제안하면 “일 때문에 바빠 그렇다. 퇴직하면 같이 놀러 다니자”며 다음을 기약했다. 하지만 은퇴하니 이제는 “취미가 다르지 않느냐”는 핑계를 대며 함께하는 시간을 피한다.
행복 솔루션 20~30년 함께 산 부부라도 관심사가 다르면 공통의 취미를 갖기 어렵다. 은퇴 전부터 각자의 여가 시간을 보낸 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이가 더 소원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부부끼리 ‘따로 또 같이’의 영역을 찾아야 한다.
먼저 지난 일주일간 부부가 함께한 시간, 활동, 대화 내용 등을 적어본다. 그 다음 이를 반성의 지표로 삼아 ‘주 3회 저녁 식사 후 산책하기’, ‘주 1회 같이 문화생활 하기’ 등 실천하기 쉬운 부부 생활 강령을 만들어본다. 요일별로 정해도 좋다. 이를테면 월·수·금은 ‘부부 동반의 날’, 화·목·토는 ‘혼자만의 날’을 보내기로 약속한다. 다소 숙제처럼 느껴져도 긴 시간 쌓인 마음의 벽을 서서히 허물고 함께하는 시간을 길들이는 데 도움이 된다.
그 다음 서로의 취미에 발을 들인다. 반드시 같은 ‘활동’을 하지 않아도 좋다. 같은 ‘시간’을 보낸다는 데 방점을 둔다. 이를테면 남편이 낚시를 할 때 옆에서 자수를 하거나, 아내가 공원에서 조깅을 하는 동안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다. 상대는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존중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고, 본인은 배우자에 대해 알지 못했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같이 즐길 수 있는 활동을 찾고 싶다면, 서로의 관심사를 탐색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이때 배우자의 관심사를 다 안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데이터가 연애 시절에 멈춰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상대방을 알아가던 풋풋한 그때처럼 “당신이 요즘 재미있어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 “당신, 예전에 ○○하는 것 좋아했던 것 같은데 맞아?” 등 호기심 어린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CASE 3
다시 불붙은 경제권 전쟁
박지출 은퇴 전 가정의 경제권은 아내가 책임졌다. 월급은 타는 족족 아내에게 가져다주고, 30년 넘도록 용돈을 받아 썼다. 상호 합의 하에 이뤄진 결정이기에 큰 불만은 없었지만, 과자 한 봉지를 사더라도 아내 눈치를 보느라 답답할 때가 많았다. 노년기만큼은 주도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은퇴 후에는 소일거리를 찾아 직접 번 돈으로 골프용품을 사고 소소한 취미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마저도 아내가 간섭하려 든다.
오경제 남편이 피땀 흘려 벌어온 돈을 헛되이 쓰지 않기 위해 결혼 생활 내내 꼬박꼬박 가계부를 정리하며 재산을 불리는 데 힘썼다. 덕분에 노후 자금에 보탬이 될 건물을 사고, 투자로도 수익을 얻었다. 그래도 자식 결혼 전까지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데, 남편이 은퇴 후 소일거리를 시작한 뒤부터 벌이를 공개하지 않고 고가의 물건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변한 남편의 태도가 당황스럽다.
행복 솔루션 경제권은 신혼, 황혼을 막론하고 부부 사이 다툼을 일으키는 주된 요인 중 하나다. 결혼 생활을 갓 시작한 신혼부부는 경제권 쟁탈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언쟁이 오고 간다면, 황혼 부부의 갈등은 그동안 참아온 불만이 특정 계기로 폭발하면서 시작된다.
특히 가정에서 성 역할이 비교적 뚜렷한 베이비붐 세대 부부는 주로 남편이 돈을 벌고 아내가 경제권을 관리해, 돈 문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아내 쪽으로 힘이 편중되며 갈등이 빚어진다. 이에 많은 남편이 은퇴를 기점으로 재정 독립을 선언하고, 아내는 달라진 남편의 태도를 비협조적으로 느낀다.
비슷한 상황으로 갈등을 겪는 부부가 있다면 두 사람의 합의를 거쳐 경제권을 교체해보는 것이 좋다. 남편은 가계부 작성, 대금 납부 등 재정 관리를 오롯이 책임지고, 아내는 정해진 용돈으로 한 달간 생활하는 것이다. 역할을 바꾸면 각자가 진 부담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배우자의 고충을 깨닫고 서로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매달 ‘가계 대화의 날’을 정해두는 것도 방법이다. 가계 대화의 날에는 가계 자산과 부채, 현금 흐름 등을 공유하고 재테크 계획을 논의한다. 모래시계를 활용하면 발언권을 보다 공평하게 가질 수 있다. 날짜는 매월 말이나 초가 적당하다. 지난 한 달간의 재무 상황을 살펴보며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되 배우자의 잘못을 질책하지 않는다.
도움 김숙기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 원장
세계 최고의 기량을 뽐내는 선수들의 땀과 열정으로 가득한 도쿄올림픽. 생기 넘치는 10~30대 젊은 선수들 사이에서 더 돋보이는 이들이 있다. 바로 40~60대 시니어 선수들이다.
체력으로는 뒤처질지 몰라도 노장 선수들의 스포츠 정신과 열정, 기술, 헌신은 젊은 선수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쌓은 연륜과 노련함으로 오히려 더 빛을 낸다. 포기를 모르고 최선을 다하는 백전노장 선수들의 투혼은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전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하며, 도쿄올림픽을 빛내고 있는 노장 선수들을 소개한다.
66세 최고령 선수, 메리 해나(66)
이번 올림픽 최고령 선수는 여자 승마의 마장마술에 출전한 호주의 메리 해나(66)다. 이번이 여섯
번째로 올림픽에 출전한 해나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제외하고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부터 2016년 리우올림픽까지 출전했다.
하지만 아직 메달 기록은 없다. 메달을 받지 못해도 꾸준하게 대회에 출전하며 나이와 상관없이 기량을 과시하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도전 중이다. 그녀에게 나이는 도전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해나는 “메달을 목표로 삼기엔 조금 늦은 것 같긴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70대로 들어서는 2024년 파리올림픽에도 출전하려고 욕심을 내고 있다.
62세 최고령 메달리스트, 앤드류 호이(62)
‘호주의 승마 영웅’으로 불리는 앤드류 호이는 60대 나이로 이번 도쿄올림픽에서 하루에 메달을 두 개나 목에 걸었다. 지난 2일 종합마술 개인전에서 동메달을, 종합마술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호이는 이번 대회 최고령 메달리스트로 기록됐다. 호이는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아직 건강하다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밝혔다. 그는 1984년 LA올림픽부터 두 차례를 제외하고 모든 올림픽에 출전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와 1996년 애틀랜타에 이어 2000년 시드니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호주 역사상 한 종목에서 3연패를 달성한 최초의 남자선수가 됐다.
일곱 번째 금메달 수상, 이자벨 베르트(52)
이자벨 베르트는 52세 나이로 역대 올림픽 승마 종목 최초로 7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지난 7월 27일 열린 도쿄올림픽 승마 마장마술 단체전에서 자신의 7번째 금메달을 획득하며 저력을 과시했다. 베르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나서 마장마술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을 획득한 선수다. 이후 1996년 애틀랜타, 2000년 시드니, 2008년 베이징,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단체전 정상에 오르며 꾸준하게 메달을 쌓아왔다.
그는 자신의 6번째 올림픽인 도쿄 대회에서 변함없는 기량을 발휘하며, 지금까지 올림픽에서 11개의 메달(금 7·은 4)을 손에 넣었다. 국제승마협회에 따르면 베르트는 마장마술 세계 랭킹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41세 어린 신유빈과 막상막하, 니샤롄(58)
지난 7월 25일 탁구 여자 단식 64강전에서 자신보다 41세 어린 신유빈(17)과의 탁구 대결로 국내 팬들에게도 이름을 알린 니샤렌은 중국 국가대표 출신의 룩셈부르크인이다. 니샤롄은 역대 올림픽 여자 탁구 선수 중 가장 나이가 많다.
그럼에도 그는 신유빈과의 경기에서 41세의 나이 차이에도 막상막하의 경기를 보이며, 역전패했다. 풍부한 경험을 앞세워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니샤롄의 플레이에 신유빈만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연출됐다. 이런 모습에 국내 팬들은 얄밉다는 평부터 탁구에 통달했다는 평까지 하며, 그의 활약을 높게 평가했다.
9번 연속 올림픽 출전한 최초 여성, 니노 살루크바제(52)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9번 연속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최초의 여자 선수라는 대기록을 세운 주인공이다. 니노 살루크바제는 1988년 서울올림픽 사격 공기권총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땄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동메달을 추가했다.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는 아들 초트네 마차바리아니와 함께 출전해 올림픽 첫 모자 출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10m 공기권총에서 예선 31위를 기록한 뒤 시력이 떨어져 더는 힘들겠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통산 금·은·동메달을 한 개씩 남기고 물러나는 그에게 세계 스포츠계의 격려가 쏟아졌다.
40대 체조 여왕, 옥사나 추소비티나(46)
우즈베키스탄의 체조 여왕으로 불리는 옥사나 추소비티나. 그는 20대 중반만 돼도 환갑이라는 여자 체조계에서 40대까지 8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하며 ‘살아있는 전설’로 새 역사를 썼다.
그는 지난 7월 25일 여자 체조 도마 예선 경기에서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동료 선수와 코치, 운영진 모두에게 기립박수를 받으며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결선 진출에 실패한 뒤 추소비티나는 “나는 마흔여섯 살이다. 이건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나는 살아있고 행복하다. 아무런 부상 없이 여기 있고, 내 두 다리로 혼자 서있다”며 감격해했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보다 젊다. 오늘 도전하고 즐겨야 한다.”
니샤롄은 자신보다 41세 어린 선수와 경기를 끝낸 직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이를 잊은 노장 선수들의 투혼은 나이를 탓하며 도전을 포기하고 즐기지 못하는 수많은 우리들에게 의미있는 메시지를 선사하고 있다.
지구촌 최대의 스포츠 축제 올림픽 열기가 뜨겁다. 이 같은 분위기를 더 뜨겁게 만든 메달로 효도한 스포츠 선수들의 사연이 공개돼 화제다.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를 위해 도마와 골프장 필드에서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다.
2020 도쿄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여서정(19·수원시청)과 1996 애틀랜타올림픽 도마 은메달리스트 여홍철(50) 경희대 교수가 주인공이다. 여서정은 1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 기계체조 도마 결선에서 3위를 기록했다. 이번 동메달은 선수 개인에게 첫 올림픽 메달이자 한국 여자 체조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이어서 더욱 값졌다.
부녀는 실수하는 모습마저 닮았다. 여서정은 결선 2차 시기에서 난도 5.4의 비교적 쉬운 기술을 시도했으나 착지 과정에서 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세 발짝 물러나는 실수를 했다. 이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여홍철이 2차 시기에서 착지할 때 뒤로 밀렸던 장면과 똑같았다. 은메달과 동메달을 따낸 여홍철·여서정 부녀는 한국 첫 ‘부녀 올림픽 메달리스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여서정이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면서 여서정 가족이 11년 전 출연한 방송도 화제가 되고 있다. 2010년 9월 28일 KBS 교양프로그램 ‘여유만만’에 출연한 여홍철과 여서정의 발언이 재조명됐기 때문이다.
당시 여홍철 교수는 “2020년 올림픽에서 딸이 메달리스트가 되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체조를 시작한지 3개월 차였던 9살의 여서정은 “6, 7세부터 체조선수가 꿈이었다”며 “훌륭한 국가대표가 돼서 메달을 많이 따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1년 미뤄졌지만 대회 이름은 ‘2020 도쿄올림픽’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에 부녀는 결과적으로 그 꿈을 이룬 셈이다.
남자 골프 금메달리스트인 잰더 쇼플리(28·미국)의 올림픽 출전도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잰더는 그의 아버지이자, 유일한 골프 스승인 스테판 쇼플리가 못다 이룬 꿈을 위해 올림픽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독일계 미국인인 스테판은 젊은 시절 독일 대표 육상선수로 올림픽 출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서울올림픽을 2년 앞 두고 발생한 불의의 사고로 출전이 좌절됐다. 스무살 때 훈련하러 가던 길 음주운전 차량과 추돌 사고가 나면서 시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잰더가 목에 건 메달은 80여 년 전 할아버지인 리처드 쇼플리가 꿨던 꿈이기도 했다. 리처드 역시 국가대표급 육상선수로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준비했으나 부상으로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
대만 출신이자 일본에서 생활한 어머니 덕분에 일본 문화에 익숙한 잰더에게 이번 메달은 더욱 의미가 남달랐다. 잰더 쇼플리는 “아버지는 나의 성공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셨다. 어머니의 고향도 여기여서 내겐 많은 것들이 (메달 획득의) 동기가 됐다”고 말했다.
지난 1일 2020 도쿄올림픽 골프 남자부 4라운드에서 4언더파를 쳐 최종합계 18언더파 266타를 기록했다. 이로서 미국은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서 골프 부문 금메달을 획득했다.
“조건 때문에 필요한 의사를 구하지 못하는 곳에서 인술을 펼치고 싶다.”
장애인의 재활 치료를 위해 일평생 헌신해 온 의사 이미경(63)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재활의학과 전문의가 올해 성천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 씨는 의사로서 안정된 삶 대신 33년 동안 장애인들의 재활치료를 위해 희생과 봉사의 길을 걸었다. 생명존중 정신을 실천한 공로를 인정받아 성천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성천상은 국내 최초 수액제 개발과 필수의약품 공급을 통해 국민 보건 향상에 이바지한 고(故) 성천 이기석 선생의 ‘생명존중’ 정신을 기려 제정한 상이다.
이미경 씨는 1984년 가톨릭의과대학을 졸업했다. 현실적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의술을 펼치겠다는 신념으로 재활의학 전공의가 됐다. 그리고 1988년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상임의사를 자임했다. 2018년 정년퇴임 뒤 현재까지 촉탁의사로 상근하며 장애인 의료복지를 위해 힘 쏟고 있다.
이 씨는 의사와 사회복지사, 물리치료사, 특수교사 같은 각 영역 전문가들이 팀을 이뤄 운영하는 장애인 ‘전인 재활 시스템’을 정립했다. 장애재활 관련 도서 ‘스노젤렌, 우리아이 왜 이럴까?’를 발간하고, 국내 최초로 ‘장애 예방 비디오’를 제작해 재활기관에 배포하는 등 국내 장애인 재활의학 발전에 힘썼다.
1997년 ‘초영역 영유아 조기개입’ 모델을 국내 처음으로 보급했다. 또 뇌성마비 조기 진단법인 ‘보이타 진단법’을 2005년 확대해 보급한 것도 이 씨 업적이다. 의대생 700여 명에게 장애인 재활의학 분야의 임상 실습을 지도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장애인에게 의료 치료뿐만 아니라 교육, 직업, 사회심리 등 전인(全人)적 재활치료까지 지원하는 의사는 이미경 씨가 유일했다. 현재까지도 장애인 복지관에서 상근하는 의사는 이 씨 한 명뿐이다.
이성낙 성천상위원회 위원장(가천의대 명예총장)은 “의료제도 사각지대에 있어 진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장애인을 일평생 돌보며 재활의료 분야에서 선구자로 길을 걸어온 이미경 씨의 삶이 성천 이기석 선생의 생명존중 정신과 부합된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경기도 파주시 문발동(文發洞). ‘글이 피어나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이 동네는 예부터 문인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 유명했다. 이후 출판인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현재는 명실상부 한국 출판산업의 뿌리로 거듭났다. 파주출판도시를 기획하고, 반세기 동안 열화당의 대표이자 출판편집인으로 살아온 이기웅(82) 대표를 만나 지난 여정과 더불어 기획자로서의 철학과 책의 가치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21세기의 여명을 앞둔 1989년 젊은 출판인들은 새로운 시대로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 ‘출판도시’란 청운의 꿈을 품었다. 그로부터 어언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끝내 그들은 꿈을 이뤄냈으며, 그 터전에서 새로운 세대는 또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최근엔 출판도시 기획자인 이 대표의 삶과 경험을 바탕으로 출판도시의 과정을 담은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제 삶과 경험을 토대로 출판단지의 과정을 쓰겠다고 했을 때 저도 흔쾌히 동의했죠. 책은 기록의 유산으로 가치가 있잖아요. 다만 책 표지에 제 사진을 쓴다기에 정중히 재고를 부탁드렸죠. 결국 출판사의 뜻에 따라 지금의 표지로 책이 출간됐지만요. 저자와 출판사의 뜻은 충분히 존중하지만, 제가 주인공이 된 것 같아 개인적으로 좀 민망해요. 출판도시는 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죠. 단지 제가 한 일은 이사장으로서 순서상 맨 앞에 선 것일 뿐이죠. 가장 먼저 서 있다고 해서 같이 이룬 것을 제가 소유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면 책을 편집하던 편집자가 왜 도시를 기획하게 된 것이고, 어쩌다 맨 앞에 서게 된 것일까?
“말하자면 ‘공동성’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서였죠.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가치를 함께 실현해보자, 그런 의기투합이 이뤄졌어요. 당시 출판산업의 체계가 엉망이었어요. 편집, 인쇄, 디자인, 유통 등 출판의 프로세스를 한곳에서 효율적으로 운영해서 더 큰 시너지를 얻기 위함이었죠. 산업의 체계를 조정하고 선순환을 만들면 만들수록 더 양질의 책을 만들 수 있다고 봤어요. 그런 차원에서 출판도시를 기획했고, 당시 주위 사람들이 공동성이란 큰 달구지를 우직하게 이끌고 가는 공공의 심부름꾼이란 소임을 제게 맡겨주셨어요. 첨엔 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섰지만, 이왕 하기로 한 것이니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어요.”
편집은 나의 힘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순탄치 않았다. 파주에서 첫 삽을 뜨는 데까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원래 부지는 파주가 아니라 일산이었다. 애초에 계획대로라면 일산출판단지가 됐을지도.
“한국토지개발공사(현 LH)가 땅값으로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러서 일산에 자리를 잡으려고 했던 계획을 접고 지금의 문발리로 왔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고 아찔해요. 근데 운명적이라고 할까요?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문발의 뜻처럼 책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어요. 이 일에 뛰어든다고 했을 때 열화당 직원들이 모두 말렸어요. 하지만 이 일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완수하기 위해 무진장 노력했어요. 그때 우리 직원들을 살뜰히 챙겨주지 못해서 그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제일 커요. 한편으론 말없이 묵묵히 따라주었던 이들이 고맙기도 하고요.”
그림자의 뒷면에는 빛이 있기 마련이다. 그가 출판도시를 기획하면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꼽은 것은 처음으로 들어선 건물인 ‘인포룸’이었다.
“출판단지 내 첫 건물이 인포메이션 센터로 지은 ‘인포룸’이에요. 독일의 포츠담광장에 있던 빨간 컨테이너 박스 형태의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영감을 받아 건축가에게 부탁했어요. 그 건물보다 더 멋있는 건물로 만들어달라고. 완공된 건물을 본 그날을 잊지 못해요. 의리 있는 소 얘기가 있어요. 자신을 호랑이로부터 지켜준 주인이 죽자 따라 죽었다는 소의 얘기예요. 소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의리를 드러낸 것이지요. 남들에게는 많은 건물 중 하나겠지만, 제게는 남달랐어요. 출판도시를 만들면서 겪었던 곡절의 세월에 대한 보답이자, 저를 믿고 맡겨주고 도와준 모든 이에 대한 신의와 고마움이 그 건물에 담겨 있어요. 의리의 인포룸이라고 할까요?”
출판기획과 도시기획. 기획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것과 하나의 거대한 도시를 만드는 것은 다른 일로 보였다.
“전혀 다르지 않아요. 출판편집자 경력이 오히려 가장 큰 힘이 됐어요. 책은 문자의 도시예요. 정교한 설계가 이루어져야 독자들이 길을 잃지 않죠. 기획부터 시작해 감리까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어요. 책을 만드는 데 오탈자는 물론이고, 종이의 재질이나 크기, 색감의 상태 등 여러 가지로 고려할 것이 많아요. 편집자라면 시집은 시집답게, 학술서적은 학술서적답게 그 맥락과 목적에 맞게 편집할 줄 알아야 해요. 이 모든 것이 도시를 기획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무엇보다 책과 건축, 모두 인간의 삶을 담는 그릇이죠. 담는 물만 달라질 뿐 그릇은 변하지 않는 법이에요. 그래서 건축가들과 상의할 때 ‘편집회의 하러 가자’고 그랬어요.(웃음)”
물려받은 DNA와 정직한 삶
그는 어쩌다 출판편집자가 된 것일까? “얼결에 됐지만, 그 결은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그 결은 선교장에서 체득한 것이죠. 선교장은 우리 조상이 대대로 터전을 잡은 곳인데, 사랑채인 열화당은 지금으로 말하면 사립도서관 같은 곳이에요. 잊을 수 없는 게 ‘만권의 서책’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책이 많았어요. 거기서 저는 심부름을 하면서 자랐죠. 고등학교 때는 서점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콧수염이 인상적인 사장님은 ‘사지도 않을 거면 뒤적거리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죠. 뜨끔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보다가 나오곤 했죠. 책을 사는 날엔 어깨를 당당히 펴고 들어갔고요.(웃음) 친구들은 무섭다고 안 가는데 전 무서워도 갔어요. 제게 책은 공기와 같은 것이었고, 편집자는 자연스레 제가 해야 할 일이 됐죠.”
1960년대 중반부터 편집자로 일했고, 1971년에 출판사 열화당의 대표가 된다. 그에게 출판사 열화당은 운명과도 같았다.
“선교장은 언어와 미술의 학교였어요. 열화당(悅話堂)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구절에서 따온 것인데, 열화는 가까운 이와 정다운 얘기를 나눈다는 뜻이죠. 실제로 어른들은 상대의 얘기를 경청하면서 대화를 나누셨어요. 저도 그런 걸 본받고 싶었고요. 선교장 건물은 미학적으로도 정말 아름다워요. 하나의 작품처럼. 정교하게 건물을 만들었고, 문틀 하나 허투루 짜지 않으셨죠. 편집자로서 출판사 열화당을 통해 이런 정신을 이어가고 싶었어요. 미를 지향하되, 아름다운 언어의 가치를 발견하는 데 소홀히 하지 않는 일. 그게 열화당 대표로서의 소임이자 어른들이 물려준 DNA라고 생각했죠.”
책 ‘산의 기억’에 얽힌 일화를 통해 편집자의 자세를 엿볼 수 있었다.
“편집자로서 정직한 삶의 얘기를 좋아해요. 아름다움은 진실할 때 비로소 더 가치를 발휘하는 것 같아요. 이 책의 저자 김근원 사진가는 산악 사진으로 일생을 바친 분이에요. 산이란 게 얼마나 정직해요. 날씨란 변수에 그대로 영향을 받잖아요.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안개가 끼면 안개가 끼는 대로 고스란히 나타나죠. 3대가 덕을 쌓아야 일출을 볼 수 있다는 곳도 있고요. 정직한 산을 정직한 사람이 렌즈를 통해서 바라본 모습. 사진에 담긴 자연의 아름다움도 좋지만, 그 순수한 열정과 그가 겪었을 고생을 생각하니 눈물이 다 나더군요. 생전에 열화당과 작업하는 게 소원이라고 했는데, 그 소원을 이루어드리지 못해서 참 미안한 맘이 컸어요. 그때 제가 좀 덜 바쁘고, 그가 계속 졸랐다면 했을지도 모를 텐데. 지금이라도 아드님을 통해 그의 정신을 이을 수 있어서 참 기뻐요.”
‘어떻게’를 위하여
정직한 삶의 얘기에 귀 기울이는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바로 안중근이다. 열화당 근처 다리의 이름을 응칠교로 지었으며, 준비 중인 영혼도서관의 명칭은 안중근기념 영혼도서관이다. 그에게 안중근은 어떤 존재였을까?
“일본에서 출판된 안중근 관련 기록을 번역해 엮으면서 장군의 내면세계에 감탄했어요. 부정한 것은 용납하지 않는 시대정신으로 일본 법정에서 제국주의 일본과 법정 투쟁을 벌이죠. 동양 평화를 꿈꾸던 뜻을 옥중에서 계속 집필함으로써 제국주의를 향한 ‘말’과 ‘글’의 투쟁을 홀로 하셨어요. 이상을 이론으로 남기지 않는 자세. 끝내 실천으로 완성하고자 하는 마음가짐. 그것이 제게 큰 울림을 줬죠.”
안중근 정신의 핵심은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행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책은 무엇이고,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물어봤다.
“종이책 시장의 위기라고 하는데, 오히려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진정한 책을 만날 기회인 거죠. 디지털로 전환할 수 있는 건 빨리 전환하고, 정말로 가치 있는 책을 신중하게 기획해서 종이책으로 남겨야 한다고 봐요. 팔리는 예술을 하는 게 아니라, 가치를 남기는 예술이 필요해요. 가치란 말이 공허한데 개인적으로 삶의 진실한 기록을 담은 책이 가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현재 준비 중인 안중근기념 영혼도서관이 가치 있는 책에 깃든 저자의 진심을 모실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공적으로는 열화당이 이제껏 단단히 지켜온 가치를 오랫동안 유지했으면 좋겠어요. ‘왜’도 중요하지만 ‘어떻게’를 고민하고 싶어요. 물론 시대에 역행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깨졌다는 이유로 주춧돌을 버리는 게 아니라, 주춧돌이 깨져도 어떻게 하면 그것을 보존할지 우선 고민을 해보는 거죠. ‘좋음’이라는 가치에 머물지 않고, 그 가치를 위해 ‘어떻게’ 실현할지 고민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제 삶의 기록을 열심히 정리하는 작업 중이에요. 쓰려고 30분만 앉아 있어도 몸이 피곤해서 힘들지만, 글로 정리하면서 제 삶을 돌아보고 싶어요.”
그가 열화당을 운영하면서 아름다웠던 장면 중 하나로 꼽는 것은 바로 콧수염 사장님과의 재회였다. 열화당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강릉에서 그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다. 서점에서 책을 읽던 소년이 어엿한 출판사의 사장이 되는 시간 동안 젊었던 사장님은 백발의 노인이 됐다. 운영하던 서점을 정리하던 차에 그의 소식을 듣고 먼 강릉에서 그를 만나러 온 것이다. 그는 이 만남을 “데미안을 다시 만난 싱클레어”의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서점을 지키던 사장님처럼, 그가 책의 가치를 오랫동안 지키면서 달려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아름다운 장면이 그의 삶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열화당은 선교장의 사랑채이자, 그가 지금껏 이룬 모든 것의 근간이었다. 선교장의 어른들은 말의 가치를 중요시했고, 말을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을 근본으로 여겼다. 만권의 책에 둘러싸인 곳에서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눌 정도로 책을 좋아하셨다. 그로부터 배운 정신을 토대로 그는 ‘열화당’을 반세기 동안 운영해왔다. 열화(悅話)의 뜻처럼 정다운 이와 얘기하듯 책을 통해 저자와 독자가 소통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랑채를 만들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젊은 시절에 매료되었던 정읍의 고택이 다 쓰러져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고택을 출판단지 내의 부지로 옮겼다. 깨지고 닳은 주춧돌부터 시작해 기왓장 한 장 버리지 않고 그대로 문발리로 옮겨왔다. 깨진 기왓장을 버릴 수도 있지만, 그는 문화의 보존이란 이유로 절대 버리지 못하게 했다. 문틀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고 정교하게 틀을 짰던 선교장의 어른들처럼. 이제껏 그가 실천해온 삶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술적(美術的)인 출판을 지향하며 오랫동안 정직한 삶의 언어를 발견하고, 이를 아름다운 한 권의 책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하고, 끝내는 모두가 함께 누리는 하나의 정신문화가 될 수 있도록 하나의 도시를 계획하고 완성했다.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흔히 한옥의 미학을 일컫는 말로,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문자의 ‘주춧돌’ 위에서 그가 지은 책이란 ‘사랑채’는 검소했으나 누추하지 않았고, 아름다웠으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흔히 그를 책마을 연출가라 부르지만 그와 정다운 얘기를 나누며 잠시나마 엿본 그의 삶을 바탕으로 보건대, 그는 문자의 주춧돌 위에 美의 사랑채를 짓는 건축가였다. 그의 사랑채가 오랫동안 독자들과 열화의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며 마친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사랑은 언제 멈출 거나?”
“볶은 콩에 싹이 나면.”
어느 드라마 속 두 여인의 대사다. 40년 전 풋사랑을 우연히 마주치면서 시작된 가슴앓이, 어쩌다 보니 그도 혼자, 나도 혼자, 그렇다고 선뜻 그를 따라나설 수도 없는 현실의 굴레에서 걷잡을 수 없는 추억의 급물살을 맞는 주인공. 가까운 친구에게 자신의 속앓이를 털어놓는 그 소용돌이에 내가 똑같이 말려들 줄이야.
사는 동안 맞닥뜨리지 말아야 할 세 가지가 있는데, 옛사랑의 현재 모습이 그 하나란다. 나머지는 작가의 맨얼굴, 요리사의 손톱 밑이라나. 그런데 어쩌랴. 봐선 안 될 40년 전 옛사랑이 내 앞에 나타났으니.
내가 그를 다시 만난 건 드라마에서처럼 우연이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남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1년째 되던 해. 우울과 무기력으로 잿빛 세상을 버티고 견뎌내던 어느 봄날, 고향 친구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의례적인 안부에도 지쳐 있을 나에 대한 친구의 배려였을까? 거두절미하고 전화기 너머에서 대뜸 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ㅁㅁ 씨 기억나? 한번 만나볼래? 큰 의미는 둘 거 없고 잠깐 활기나 얻으라고. 너 혼자 됐다고 하니까 한번 보고 싶은가 봐. 네 남편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 사람으로선 네가 첫사랑 아니니.”
그의 이름을 되뇌는 순간, 나와 세상 사이의 가림막이 거둬지고 무채색 캔버스에 채색 물감이 번져갔다. 멈췄던 삶의 시간이 다시 흐를 수만 있다면….
그는 남편의 대학 선배이자 나를 사이에 둔 사랑의 라이벌이었다. 그와 남편의 성향은 동과 서, 남과 북만큼 달랐다. 남편이 내향적이라면 그는 외향적이었고, 남편은 선비 기질인 반면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남자다웠다. 학자 타입의 남편은 섬세함에 더해 자상한 면이 있었지만, 그는 대범하고 호방했으나 예민한 감수성이나 예리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40년 만의 해후임에도 남편과 세밀히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전부터 그의 기질과 성격을 알았던 것은 아니다. 남편과 살면서 가슴속에 아련히 그를 품고 있었던 것도 물론 아니다. 단지 그와 만난 3개월 동안에 파악한 것이니 걷잡을 수 없이 그에게 빨려 들어가는 내 마음의 반영이리라.
“ㅇㅇ이,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스무 살 고운 모습 그대로네. 그때 내가 너에게 청혼도 못 해보고 네가 내 후배와 결혼한 후 한 5년을 방황했지. 이러다 폐인 되겠다 싶어서 적당한 여자를 만나 뒤늦게 결혼을 했고. 물론 좋은 여자야, 무척 헌신적이고.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네 자리를 단 하루도 더듬지 않은 날이 없었어. 꿈에서라도 한번 같이 살아보고 싶었지.”
“호호. 오빠, 농담 말아요. 지금 내 나이가 60이 가까워오는데 스무 살 때 모습이 그대로 있다니. 그때 청혼하지 왜 안 했어요? 그랬다면 다시 생각해봤을 텐데.”
“장난스레 말하지 마. 그때 네 남편이 군에 있었잖아. 그 사이 너와 가까워질 수도 있었지만 그건 공정한 행동이 아니지. 더구나 내가 3년이나 선배인데 요즘 젊은애들 말로 후배와 썸을 타고 있는 여자에게 대놓고 구애하는 건 안 될 일이지. 그 친구가 제대한 후 너에게 결정하도록 하려고 했는데,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너와 그 친구가 많이 가까워져 있더군.”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활짝 열렸다. 남편과 나에 대한 배려심, 속 깊은 정의감 등이 그를 믿음직하고 매력적으로 느끼게 했다. 무엇보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마주 보며 대화할 수 있고 원하면 만질 수도 있다. 남편이 떠난 이후 가장 힘들었던 건 아무리 그 사랑이 컸다 해도 오감에 잡히는 한 조각의 그 무엇이 더는 없다는 것이었기에.
늦은 봄, 고즈넉한 교외의 일식 레스토랑에서 그는 머뭇대며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세 번째 만남이었다.
“ㅇㅇ아, 손 한번 잡아봐도 될까?”
나는 대답 대신 그에게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그의 두툼한 손이 내 손등 위에 살포시 놓였다. 따스하고 든든했다. 잠시 후 그의 손이 내 얼굴 언저리로 다가왔다. 그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주춤대는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아 다시 나의 손등 위에 얹어놓았다. 그에게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가슴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계절의 봄은 저물고 있는데 내 인생의 봄은 이렇게 다시금 찾아드는 걸까.
“꿈에서라도, 그도 아니면 다음 생에서라도 부부로 만나 한번 살아보고 싶었어. 그런 너의 손을 잡아보는 데만 40년이 걸렸구나. 지금이라도 부부처럼 여행도 가고, 애들처럼 놀이공원도 가고, 손 붙잡고 맛있는 집 찾아 전국을 돌면서 걱정 없이 웃고 즐기며 젊은 한때로 돌아가고 싶다.”
남자는 시각에 약하고 여자는 청각에 약하다고 했던가. ‘꿈에서라도 살아보고 싶었다’란 그의 말이 귓바퀴를 로맨틱하게 간지럽혔다. 황홀했다. 남편과 사별 후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기죽고 초라해진 내면에 자존감의 바람이 차올랐다. 허방을 딛고 있던 공허함이 메워지며, 구겨진 자존심이 펴지고, 우울증의 얼룩이 씻겨나갔다.
나는 그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며, 단 하나의 옛사랑이 아닌가! 허름한 중년 남녀가 남루한 외로움 때문에 그렇고 그렇게 만난 게 아니다. 환상이어도 좋았다. 설혹 착각이었다 해도, 허영이면 또 어떠랴.
하나로 흐르고 있는 그와 나의 시간도 물이 수소와 산소로 나뉘듯이 언젠가는 다시 분리될 것이다. 그가 나에게 가진 감정이 사랑이라 해도 결국 그는 가정으로 돌아갈 거라는 통속적인 결말을 나 또한 예상해야 할 테지. 복잡한 심사는 그뿐만이 아니다. 그를 향한 내 마음이 깊어갈수록 내 사랑의 방에는 아직 남편이 살고 있다는 것을 언뜻언뜻 확인한다. 내게 사랑의 방은 하나뿐일까. 그 방에 남편이 기거하고 있는 한 그를 온전히 들여놓을 수는 없는 것일까….
눈을 감고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의 오톨도톨한 점자혼용 명함을 손끝으로 더듬어본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상생 염원을 담은 정 이사장의 평생 화두 ‘동반성장’ 의지가 명함에도 아로새겨져 있다. 그의 일생은 동반성장이란 궤적을 따라 굵고 길게 이어지고 있다. 관악구 신림동의 ‘동반성장연구소’에서 그를 만나 참 좋은 시절, 그때는 그랬지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본다.
운이 꽉 찬 아이, 그래서 운찬이지
‘정운찬’, 이름을 짓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녀석 운이 꽉 찬 놈이구먼. 사주가 이렇게 좋은데 이름이 뭐 그리 대수라고 식전 걸음을 하셨나? 세상 나올 때부터 운을 가득 차고 나온 놈이니 이름은 운찬이지.”
충남 공주가 고향이지만 7식구가 상경, 도시빈민으로 동숭동 언덕배기 단칸방에서 살았다. 식구마다 칼잠에, 한 사람은 앉아서 자야 할 만큼 방은 비좁았다. 11남매 중 살아남은 5남매의 막내, 그나마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니 대박 운과는 애초 거리가 멀었다. 하기야 그는 태아 적 자궁이란 방마저 허락되지 않을 뻔했으니 세상 빛을 본 자체가 운이 좋았다고 할지.
당장 밥 한 숟가락이 절실했던 곤궁한 살림에 입 하나 더 느는 것이 무서워 어머니는 독한 약초를 진하게 달여 마셨다. 그런데 하필 그게 시궁창에서 아무렇게나 자라는 익모초(益母草)였으니, 이름 그대로 산모와 태아를 ‘이롭게’ 하여 노산임에도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 그로서는 기가 막힌 첫 운이었다.
그러나 27세 결혼 때까지 운찬은 여전히 ‘5무(無)의 흙수저’로 ‘운 찬’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키가 크나, 인물이 좋나, 부모가 있나, 돈이 있나, 장래가 있나.” 예비 장인 장모의 평가는 가혹했다. 그러나 타고난 운은 그를 저버리지 않아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프린스턴대 경제학 박사, 컬럼비아대 교수, 서울대 총장, 대한민국 국무총리, 동반성장위원회 초대 위원장, KBO 총재 등 올해 74세에 이를 때까지 그의 운은 숨 가쁘게 펼쳐졌다. 물론 그에게 운이란 성실성, 정직성과 같은 뜻, 다른 말이다.
어떤 학생을, 어떤 식으로, 어떻게 가르치든 대학에 맡겨야
▶서울대 총장 시절 / 2002. 7 ~ 2006. 7
서울대를 없애려던 노무현 정권으로부터 학교를 지킨 것을 비롯, 학원자율화 및 지역균형선발제, 소수정예화 정책을 폈다.
“대학에는 자율권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어떤 학생을 어떤 식으로 선발하여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든 전적으로 대학 재량에 맡겨야 한다는 뜻이지요. 지역 균형을 위해서는 전국 1700개 고교에서 최대 3명씩 추천받아 그중 1200명을 선발하는 지역균형선발제를 실시했습니다.”
또한 서울대 정원을 4000명에서 3000명으로 줄여 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자 했다. 도쿄대나 베이징대학이 3000명대, 하버드대는 1600명대, 프린스턴대·예일대·컬럼비아대는 1300명대인 것을 감안하면 대학 수준이 양질의 교육과 비례하는 것은 자명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밖에 기초교육 강화를 위해 자유전공학부를 신설하여 재학생들이 여유 있게 진로를 모색토록 했고, 대학 내 건물 증설보다 연구비 후원에 중점을 두었다. 삼성, 웅진 등에서 현금으로 1600억 원을 지원받아 그 가운데 100억 원을 자연과학대에 투입, 생명과학부에서 탁월한 인재를 배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특히 삼성의 도움이 커서 현금으로만 500억 원을 지원받았다. 한편 총장 공관을 부수고 그 자리에 교수 아파트를 증설하여 250여 세대에 삶의 터전을 보급했다. 그 일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칭찬을 받았다고 웃으며 회고했다.
세종시 총리 “한 나라에 행정부가 둘로 나뉠 수는 없다”
▶국무총리 시절 / 2009. 9 ~ 2010. 8
그가 국무총리가 된다고 했을 때 서울대 관계자들은 실망했다. 옛말로 하자면 총장은 대제학이고 총리는 영의정인데 자고로 대제학이 더 품위 있는 자리가 아니냐며. 그깟 총리가 뭐라고, 그것도 시시하게 이명박 정부에서 총리를 하냐며.
“당시 광우병 사태로 골머리를 앓으면서 탕평책의 일환으로 제가 발탁된 느낌이었어요. 무엇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당신도 서민 출신이고 나도 서민 출신이니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마음을 움직였죠. 경제, 사회 양극화 완화 기회가 아닌가. 어려운 사람 사정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이가 있을까 싶었던 거죠.”
양극화 완화, 경색된 남북관계 유연화라는 나름의 청사진을 품었지만 취임 6개월 만인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이 터지면서 남북관계는 곧바로 얼어붙었고, 설상가상 세종시 문제가 불거졌다.
그는 임기 시작도 전에 ‘세종시 총리’로 불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반쪽 행정수도 세종시는 원칙적으로 옳지 않다. 한 나라의 행정부가 둘로 나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 대신 세종시를 기업도시, 문화도시, 과학도시화하자고 제안했으나 수도의 꿈에 부풀었던 지역민의 반대는 거셌다. 공주 출신인 총리가 되레 고향 발전을 저지한다며 ‘매향노’란 소리마저 들었다.
“그 당시 매 주말마다 15차례 이상 방문하여 지역 대표들을 설득하고, 삼성·롯데·한화·웅진 등에서 기업도시 투자 명목으로 4조5000억 원을 약속받았어요. 그런데 그 안 자체가 국회에서 부결되면서 세종시 구상은 끝내 무산됐죠. 반대파한테서 차기 대권 노림수라는 오해까지 받으며 세종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결국 1년 만에 총리를 그만두게 된 거죠. 제 성정이 모질지 못하고, 무엇보다 정파적 언어를 이해 못 했던 데다 정치적 센스도 부족했다고 봅니다.”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2010년 5월, 한 중견기업인이 찾아왔다. 연 매출이 7000억~8000억 원 되는데, 대뜸 이민을 가겠단다. 납품가 후려치기를 더는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 사유였다.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 길로 대통령을 만났다. “중견기업인이 이민 가겠다고 하니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는 오죽하겠냐.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아니면 이 나라 파탄난다”고 직언했다. 그해 9월 경제인들이 청와대에 모였고, 같은 해 12월에 동반성장위원회를 설립, 발족했다. 총리직을 물러난 뒤라 그가 초대 위원장이 되었다.
코로나 무풍지대 한국 야구, 110개국에 중계방송
▶KBO 총재 시절 / 2018. 1 ~ 2020. 12
1982년 한국에 프로야구가 생긴 이래 매년 20여 회 야구장을 찾았고, 2008년에는 야구 해설도 했다. KBO(한국야구위원회) 총재가 된 후엔 야구계의 동반성장을 위해 노력했다.
“이대호의 연봉이 25억 원인 것에 반해 무명 선수는 2700만 원에 불과해요. 연 수입이 100배 가까이 차이 나는 거죠. 어떻게든 올려보려고 애쓴 결과 3000만 원으로 타결되어 미약하나마 선수 간 연봉 격차를 좁힐 수 있었지요.”
각 팀 간의 원활한 선수 교류를 위해 자유계약제를 개선하는 등 구단과 구단 간의 동반성장에도 주력했다. 세계야구연맹 총재와 미국, 일본, 대만, 호주의 커미셔너(총재)를 자주 만나 국제화에도 기여했다.
코로나 시대 최대 성과는 720회 전 게임을 다 치렀다는 것과 게임 기간 중 1군 선수 가운데 확진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 프로 스포츠에서 유일한 경우다. 또한 코로나로 인해 자국에서 경기를 하지 못하자 미국의 스포츠 전문 방송 ESPN이 전 세계 110여 개국에 한국 야구를 중계한 것도 뜻밖의 수확이었다. 임기 동안 2018년 아시아야구대회 우승, 2019년 세계야구대회 준우승을 한 것도 큰 보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2012년 6월 스코필드 박사 동상 제막식 참석차 토론토를 방문해, 보스턴과의 경기에서 시구를 한 이후, 2018년 미국 올스타 게임 때 뉴욕양키스와 뉴욕메츠 경기에서 또 한 차례 시구한 것이 큰 추억이 되었죠. 메이저리그에서 한 팀의 시구자는 연 10명 정도라 제가 운이 좋았던 거죠. 여담이지만 역대 KBO 총재 중 경비원, 미화원들과 함께 식사한 유일한 총재이기도 했습니다.”
약자에겐 비둘기, 강자에겐 호랑이
▶멘토 스코필드 박사와 조순 교수
캐나다인이면서 3.1운동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리는 스코필드 박사와의 만남은 그에게 신의 선물과도 같았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 후 1970년 국립현충원에 묻히기까지 한국의 가난한 학생들과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스코필드 박사님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제게는 아버지 그 이상인 분이셨죠. 중학교 때까지 재정적 지원을 해주셨고 저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셨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입주 가정교사로 학비를 벌면서 약자에겐 비둘기처럼 자애롭고 강자에겐 호랑이 같은 기개를 보여주신 박사님을 본받고자 했습니다. 제가 평생 추구해온 동반성장의 모본이 되신 거지요.”
그의 인생에 또 다른 멘토는 조순 교수. 조 교수는 한국 대학이 반정부 데모로 어수선했던 1960년대 후반에 경제학에 대한 그의 흥미를 북돋웠고, 미국 유학길도 열어줬다. 모교 강단에 섰을 때도 그의 옆에는 조 교수가 있었고, 반대가 극심했던 결혼도 조 교수가 중간에서 부드럽게 풀어준 덕에 성사될 수 있었다.
코로나 시대, 동반성장이 해법이다
▶48년 해로한 캠퍼스 커플 아내와 가족 간 동반성장도
“2012년 동반성장연구소를 설립한 이래 9년째 그 해법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76차례 현장 포럼을 진행했습니다. 동반성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뿐 아니라 빈부 간, 도농 간, 지역 간, 남녀 간, 세대 간 등 사회 전반에 적용돼야 하는 희망의 가치입니다. 코로나 이후 저성장과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화될 테죠. 지금도 재택근무자들은 또박또박 월급을 받는 반면 일용직이나 자영업자들은 고통에 내몰리고 있지 않습니까. 코로나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는 동반성장으로 가야 합니다.”
한편 가족은 어떤 동반성장을 해왔을까.
“아버지는 어린 제게도 반말을 안 하셨어요. ‘~ 하게, ~는 아니네’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어머니는 저를 핥으실 정도로 아껴주셨죠. 가난했지만 사랑을 흠뻑 받고 자라서 저도 제 아이들을 민주적으로 대합니다. 48년째 ‘동반성장’을 하고 있는 서울대 미대 출신의 아내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존중하며 키웠습니다. ‘아빠찬스’를 쓴 적도 물론 없고요. 아들과 딸이 아버지, 어머니를 존경한다고 하니 이만하면 가정 내 동반성장도 이룬 것 아닌가요?”
‘신아연 작가와 나누는 참 좋은 시절’ 다음 호에는 서울신문사 발행인, 한국일보사 일간스포츠 사장, 국민일보 대표이사, 경향미디어그룹 회장 등을 거치고, 한국추리작가협회장을 지내며 400여 편의 장편 및 중단편소설을 낸 베테랑 신문인이자 소설가 이상우 씨를 만납니다.
넷플릭스에 접속하면 종종 알파벳 ‘N’이 붙은 콘텐츠를 볼 수 있다.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의미하는 표시다. 본사의 순자본을 투자해 제작된 콘텐츠인 만큼 해외 작품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최근 시니어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국내 다큐멘터리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새로운 모습으로 넷플릭스에 나타났다. 그것도 6개국 버전으로, 알파벳 ‘N’을 달고 말이다. 국내 원작을 세계판으로 확장해 넷플릭스에서 선보이는 것은 거의 최초다. 이 이례적인 협업의 배경은 무엇일까? 시리즈의 총연출을 맡은 진모영 감독과 이야기를 나눴다.
Q. ‘님아’ 6개국 버전이 탄생한 계기는?
2015년에 ‘님아’ 원작이 LA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을 타고, 현지에서 개봉했어요. 당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책임자가 영화를 봤나 봐요. 2017년 컨퍼런스 콜이 왔더라고요. 원작을 감명 깊게 보았다며 ‘님아’의 전 세계 버전을 만들고, 원작자로서 총괄 프로듀서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죠.
Q. 넷플릭스와 ‘K-다큐’의 협업이 이례적이다.
원작을 제작할 때도 해외 개봉을 염두에 뒀어요. 그래서 여러 나라의 관객을 만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원작이 전 세계 버전으로 탄생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요. 요즘 한류 열풍으로 국내 드라마나 영화가 오리지널 콘텐츠로 제작되는 경우는 있지만, 다큐멘터리와 손잡은 선례는 드무니까요. 또 다큐멘터리 장르에서는 한 가지 소재를 시리즈화하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일종의 금기랄까요? ‘우려먹네’ 하는 시선이 좀 있거든요. ‘어벤저스’는 아무리 우려먹어도 인기가 많은데 말이죠.(웃음) 그런 분위기 속에서 원작을 교본 삼아 시리즈물을 제작하는 일은 흥미로운 시도였죠.
Q. 출연자 선정 기준이 있다면?
수십 년 동안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루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시니어 부부가 기준이었어요. 이 기준을 바탕으로 각국 감독님들과 출연자를 결정하는데, 브라질 감독님께서 동성 커플을 제안하시더라고요. ‘부부’(夫婦) 콘셉트다 보니 여러 논의가 오갈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영어 제목은 ‘Six Stories of True Love’(6개의 진실한 사랑)이거든요. 성별을 넘어 오랜 시간 사랑한 ‘커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문제될 게 없다고 판단해 출연을 결정했어요. 다양한 형태의 가정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었죠.
Q. 특별히 기억에 남는 시니어 커플은?
스페인 편이 원작 부부와 다른 듯 닮은 구석이 많아서 기억에 남아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올리브 농사를 짓는 부부죠. 원작 부부처럼 고령에도 서로에게 헌신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유쾌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요. 그러다 노화가 찾아오면서 각종 어려움을 맞이하고, 잘못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죠. 그 역경을 차근차근 극복해나가는 모습이 아름답더라고요. 사랑하는 방식은 비슷하지만, 우리나라와 또 다른 이국적인 풍경을 감상하는 재미도 있었어요.
Q. 6개국 커플에 공통점이 있다면?
남편이 가부장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아요. 성격이 부드럽고 다정하죠. 흔히 말해 ‘지고 산다’고 하는데, 사실 이 말도 다분히 남성 중심적인 관점이에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준다’는 식의 시혜적인 태도가 반영된 말이거든요. ‘님아’ 시리즈의 남편들은 지고 산다기보다 아내와의 관계가 그 자체로 평등해요. 동성 커플도 마찬가지죠. 평등한 소통과 적당한 유머가 오랜 세월 사랑을 이어갈 수 있는 비결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어요.
Q. 작품을 본 시니어 커플이 느꼈으면 하는 바는?
작품을 보며 배우자와 비교하게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상대방에게 완벽한 인격체가 되기를 요구하기보다는 ‘나는 상대방에게 그러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부처님, 예수님 같은 사람을 만나도 자신이 그 복을 받을 그릇이 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거든요. 무엇보다 작품 속 커플의 모습을 정답처럼 여기기보다는 참고할 만한 사랑의 교과서나 나침반 정도로 생각해주셨으면 해요. 사랑에는 정답이 없으니까요.
다큐멘터리 시리즈 ‘님아: 여섯 나라에서 만난 노부부 이야기’
장르 다큐멘터리 총괄제작 진모영
컨설팅 프로듀서 김선아 제공 넷플릭스
미국 일리노이대학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고, 영어 통·번역 분야로 진출하고자 했던 알렉스 강(57)은 우연한 기회에 ‘시니어 모델’을 접하고, 그 길로 뛰어든다. 이후 본격적인 시니어 모델 일을 시작한 그는 코로나19가 덮친 지난해 상반기에 시니어 모델 에이전시를 설립한다. 어학 박사에서 시니어 모델로, 시니어 모델에서 모델 에이전시의 대표가 된 그를 만나 그간의 여정을 들으면서 모델 및 대표로서의 철학과 멋지게 나이 듦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어느 날 우연히 본 한 잡지의 커버가 그의 인생을 바꿨다. 남성 잡지 ‘맨즈헬스’의 커버에서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중년의 남자를 보게 된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을 한 덕분에 건강이나 몸에는 자신이 있던 그였다. 그때부터 꿈을 품었다.
“그 잡지를 본 뒤 그분처럼 잡지의 커버모델이 되는 꿈을 갖게 됐어요. 그래서 일단 맨즈헬스가 주최하는 피트니스대회에 무작정 신청서를 냈지요. 그게 모델 시작의 첫걸음이었어요.”
그는 그 대회에서 유일한 50대였고, 그나마 비슷한 또래의 사람은 40대 참가자가 유일했다. 나머지는 모두 20~30대들이었다. 하지만 나이에 연연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멋을 어필했다. 그 결과 스포티즘 모델 분야에서 상위권에 드는 성과를 냈다. 이런 소식을 접한 지인이 시니어 모델을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이 일을 계기로 시니어 모델을 시작하게 됐다. 그가 시니어 모델이 된 것은 우연과 우연이 얽혀서 만든 필연이었다.
숨겨진 모델의 끼
하지만 책상에 앉아서 오랫동안 공부하던 사람이라서, 모델 일이 순조롭고 쉽지는 않았을 터. 어학 공부는 혼자 묵직하게 정진하면 되는 작업이지만, 모델은 아무래도 남들 앞에 서고 주목을 받는 일이라 부담스럽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전혀 반대였다.
“막연한 불안함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막상 해보니 이 일이 너무 즐거웠어요. 내 안에 나도 모르는 모델의 끼가 숨어 있었던 것 같아요. 어학과 비슷한 점도 있었고요. 어학은 언어의 표현을 다루잖아요. 모델도 비슷해요. 단지 수단이 언어에서 몸으로 바뀐 것이에요. 개인적으로 모델은 나의 몸으로 어떻게 멋을 표현할지 고민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모델로서 그가 가진 강점은 무엇일까?
“다른 모델들에 비해 키가 작지만, 전혀 주눅 들지 않았어요. 대신 워킹 실력이라든지, 무대를 장악하고 스스로 멋을 표현하는 능력이 좋아요. 단점을 상쇄할 만큼요. 무대에 서면 조금 긴장이 되지만, 그 무대에서 한바탕 논다는 생각으로 즐겨요. 이것이 모델로서 제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시니어 모델로서 특별한 몸 관리법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의 답은 간단했다. 운동을 통해 신체 능력을 향상하고, 더불어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멋을 간직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건강과 더불어 체력 관리 차원에서 운동을 꾸준하게 하고 있어요. 25년간 해왔더니 이제는 아예 습관이 된 것 같아요. 물론 대표가 되어 바빠진 이후로는 이전보다 운동 시간이 줄어서 아쉬움이 있죠. 예전에는 하루에 꼬박꼬박 2시간씩 일주일에 5일은 운동을 했는데, 요새는 4일 정도 하면 정말 많이 한 거예요.(웃음) 체력 관리는 물론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노력도 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예전에는 흰머리가 나면 염색을 하곤 했는데, 모델이 된 후에는 시니어 모델로서의 자연스러운 멋을 살리기 위해 그냥 놔둬요. 그게 인위적인 것보다 훨씬 나아요.”
모델에서 대표가 되기까지
그렇다면 모델을 하다가 왜 갑자기 모델 에이전시를 설립하게 된 걸까? 코로나19로 경기가 안 좋은 상황 속에서 어떤 의지가 그를 모델 에이전시 대표로 이끌었던 걸까?
“사실 에이전시 대표가 된다고 했을 때 가족부터 시작해서 지인들 모두가 말렸어요. 코로나 때문에 어떤 걸 해도 안 된다고 했어요. 원래는 지난해 3월에 오픈하려고 했는데, 조금 미뤄서 6월에 오픈했어요. 한 번 마음먹은 건 꼭 이뤄야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시니어 모델로 활동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고 그 연장선에서 제대로 된 에이전시의 필요성을 고민했어요. 절박함이 강력한 의지로 이어진 것 같아요.”
모델이 되는 것만큼 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가 된다는 것도 상당한 노력과 정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특히 코로나와 같은 악재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더 강인한 의지가 필요하다. 그의 의지를 불러일으킨 절박함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제가 시니어 모델을 하면서 보니 모델 중에 자존감이 낮은 분이 참 많았어요. 그동안 가족을 위해 살다가, 자식들을 다 출가시키고 이제 자신의 인생을 찾으러 오신 분들이에요. 연극배우나 가수를 꿈꾸던 찬란한 시절을 가슴에 묻고 가정을 위해 오랫동안 헌신하셨죠.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살아왔던 탓에 자존감이 낮고, 남들에게 많이 휘둘리는 모습을 봤어요. 불합리한 대우도 문제지만,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분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에이전시를 설립해보고 싶었어요.”
고심 끝에 에이전시의 이름을 ‘엘리트’라고 정한 것도 이런 마음에서 비롯됐다. 자존감 높은 엘리트 모델을 만들고 싶은 그의 포부가 담겨 있다. 엘리트에 담긴 최상의 의미처럼 좋은 강사진을 모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편법을 쓰지 않는 경영을 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욕심 없는 마음
모델 에이전시에는 전속 모델도 있는 법. 전속 모델을 뽑을 때 기준은 무엇일까? 그의 기준은 두 가지, 바로 ‘개성’과 ‘심성’이다.
“브랜드 가치가 있는 분을 전속 모델로 모시려고 해요. 단순히 외적으로 잘생기고 이쁜 사람보다 자신만의 고유한 매력이나 개성을 가지고 있는 분을 뽑아요. 예를 들어서 키가 작은 분이라도 충분히 시니어 모델이 될 수 있어요. 반대로 외적으로 아름답지만, 좋은 모델이 될 수 없는 분도 있고요. 최근에 뵌 분도 키는 작지만, 사진을 찍었을 때 자신만의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더군요. 그런 분이 모델로서 브랜드 가치가 있다고 봐요. 다른 한 가지는 심성이에요. 모델 일은 열정과 성실성, 그리고 좋은 심성이 갖춰지지 않으면 힘들다고 봐요. 내면적으로 성숙하고 멋진 사람이 표현력도 더 좋고요.”
최근에는 좋은 소식도 들려왔다. 엘리트 모델 에이전시의 전속 모델 윤영주 씨가 MBN 시니어 패션모델 예능 프로그램 ‘오래살고볼일’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이다. 그녀를 어떻게 전속 모델로 캐스팅한 걸까? 사실 그녀와의 특별한 인연은 없었다. 하지만 우연히 지인 소개로 슈퍼모델 출신 한 분을 알게 됐고, 그 사람을 원장으로 섭외했다. 알고 보니 윤영주 씨의 며느리였다. 그 인연이 전속 모델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계속된 우연이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낸 셈이다.
“코로나19 상황에도 불구하고 저희 에이전시가 이렇게 유지되고 있는 비결은 주위 분들 덕분이에요. 주변에서 제가 하는 일의 취지에 많이 공감해주셨어요. 또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던 분들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 생각해보니 제가 인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인복의 비결은 무엇일까? 주변에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은 건 그의 욕심 없는 마음 덕분일지도 모른다.
“평소에 욕심을 버리려고 노력해요. 소소한 욕심을 부리다가 큰 걸 놓치는 경우가 많잖아요. 자주 양보하고, 작은 것이라도 남들에게 베풀려고 해요.”
나만의 멋
도와주는 사람도 많고 회사 운영도 무탈하게 잘하고 있지만, 경영인으로서 고충은 없을까? 모델은 본인만 신경 쓰면 되지만, 대표는 모두를 아우르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므로 분명히 힘든 일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수강생이 코로나19 때문에 수업을 연기하는 경우가 많죠. 모집 인원이 채워지지 않으면 아쉽기는 합니다. 직원에게 월급을 주는 대표로서 나름의 고충이죠. 또 사람을 많이 대하다 보니, 거기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도 있고요. 그래도 경영인으로 사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운동할 때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성취하면 뿌듯한 것처럼 에이전시 대표로서 설정한 목표를 차례차례 이뤄나갈 때 참 보람 있어요.”
그가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모델 활동을 계속해서 하는 건 어떤 가치에서 비롯된 걸까? 그는 모델로서의 가치 중 하나로 ‘내면적 성장’을 꼽았다.
“외면적인 아름다움도 즐길 수 있지만, 이 일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건 내면적으로 성장했을 때예요. 사소한 것에 얽매여 치졸하게 굴지 않고, 누가 보든 안 보든 나쁜 짓 안 하겠다는 마음.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자세. 이처럼 이 일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많이 성장할 수 있었어요. 시니어 모델은 나만의 멋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모델이 아니더라도 살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멋을 찾을 때 비로소 더 젊게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는 멋지게 늙어갈 수 있는 또 다른 비결로 도전정신을 꼽았다. “도전하지 않을 때 비로소 늙는다”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면 그게 무엇이든 얼른 도전하면 좋을 것 같아요.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무도 몰라요. 설령 실패했더라도, 한 줌의 가능성은 있어요. 저 역시도 계속된 우연과 인연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전했다면 취미 삼아 시간을 하릴없이 보내는 것보다는 프로정신을 갖고 임하면 좋을 것 같아요. 마음가짐이 달라지면 행동도 달라지거든요.”
어학 박사에서 시니어 모델, 모델에서 에이전시 대표까지 그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 그만큼 에너지가 뜨거워서인지 인터뷰 내내 시종일관 유쾌하고 밝았다. 대표 입장에서 얘기를 할 때는 진중한 모습을 보였다. 신기한 건 그의 말처럼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사진을 촬영하는 동안에도 수강생과 강사들이 와서 연신 그와 스스럼없이 장난을 치거나 응원을 했다. 아카데미 내에 팬이 있을 정도라고 하니, 타고난 인복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는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옛말처럼, 튼튼한 몸과 더불어 단단하고 건강한 마음으로 모델 활동과 대표직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자신감은 있었지만, 자만심은 없었다. 모델로서 외면보다는 내면에 더 집중한다는 알렉스 강은 좋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 그리고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늘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사람답게 사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유혹과 변수에 휘둘리기 쉽고, 남들이 보지 않으면 나쁜 마음을 먹기가 참 쉬운 세상이다. 그렇기에 내면의 아름다움을 갖추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늘 자신을 점검하고, 좋은 방향으로 가려는 마음가짐. 진짜 멋지게 늙어가려면 그런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가 평소의 소신대로 늘 자신의 멋을 잃지 않고, 멋지게 늙어가기를 응원한다.
우리는 왜 낯선 타인을 보며 첫눈에 반하고, 불같이 사랑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식어버릴까?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지고, 상대를 욕망하고, 감정에 지배당하는 이유를 호르몬의 관점으로 흥미롭게 살펴봤다.
도움말 性전문가 박혜성 해성산부인과 원장
“그대를 처음 본 그 순간 난 움직일 수가 없었지. 그대 그 아름다운 모습 난 넋을 잃고야 말았지.” 읽는 순간 자동으로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 가수 박진영이 부른 ‘허니’의 가사다. 노래 속의 화자는 첫눈에 반한 상대에게 온갖 달콤한 말로 유혹하며 3분 30초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열렬한 구애를 펼친다.
대중가요부터 드라마, 영화 등 누군가에게 반해 사랑을 시작하는 전개는 시대를 막론하고 로맨스 장르에서 빠질 수 없는 단골 소재다.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6세기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도 있다. 염세적인 이들은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이 살면서 비슷한 경험을 한다.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2019년 미혼 남녀 총 48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중 48%가 ‘첫눈에 반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해피엔딩’은 아니다. 운명 같은 상대와의 열애도 더 이상 운명처럼 여겨지지 않을 때가 온다. 그 무렵 상대와의 설레었던 순간을 다시 떠올려보면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치 무언가에 홀렸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느껴지고,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까지 든다. 하지만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화학적으로 접근해보면 인간의 마음이 왜 이토록 갈대 같은지 명료해진다. 사랑은 일종의 호르몬 작용이다.
낯선 이도 가깝게 만드는 ‘사랑 호르몬’
피부와 체중, 모발 등 신체적인 변화를 좌우하는 호르몬은 인간의 정서적인 면에도 다양한 영향을 미친다. 그중 이끌림, 호감, 애착, 설렘, 쾌감 등 사랑할 때 느끼는 감정에 관여하는 호르몬을 ‘사랑 호르몬’이라고 부른다. 2005년에 개봉한 영화 ‘클로저’ 주인공들의 얽히고설킨 사랑 이야기를 보면 이 호르몬의 짓궂은 장난이 보다 쉽게 이해가 된다.
‘클로저’는 낯선 사람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고, 시간이 흘러 서로가 가까운 존재가 되었을 때 또 다른 낯선 사람에게 끌리며 벌어지는 네 남녀의 적나라한 욕망을 그린다. 내용은 이렇다. 소설가를 꿈꾸는 ‘댄’(주드 로)은 우연히 마주친 스트립 댄서 ‘앨리스’(나탈리 포트만)에게 첫눈에 반한다. 앨리스와 사랑을 나누며 그녀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낸 그는 책 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 만난 사진작가 ‘안나’(줄리아 로버츠)에게 또 다른 강렬한 감정을 느낀다. ‘안나’는 댄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만, 다가오는 그를 밀어내지 못한다. 내용만 보면 다소 ‘막장’ 드라마 같지만, 호르몬의 지배를 받는다면 현실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7초의 마법 ‘도파민’
“Hello, Stranger(안녕, 낯선 사람).” 영화 클로저의 첫 대사다. 런던의 도심 한복판,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댄과 눈이 마주친 앨리스가 건넨 말이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이들은 그렇게 사랑에 빠진다. 이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은 도파민으로 가득 차 있다.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할 때 우리 몸속에서는 도파민이 짧게 분비된다. 도파민은 뇌의 보상 센터에서 작동하는 신경전달물질로 기쁨이나 행복, 성취감 등이 밀려올 때 분비량이 늘어난다. 도파민이 분비되면 상대방에게 성적인 끌림을 느끼게 되고, 이 감정이 발전하면 사랑으로 이어진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데 7초면 충분하다”는 이야기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도파민은 집중력, 의욕, 에너지 등을 관장하기 때문에 적절하게 분비될 경우 몸에 활력이 생긴다. 그러나 그 양이 지나치게 많을 때는 무언가에 미친 듯이 몰두하고 빠져드는 상태가 되어 마약이나 도박을 즐기는 사람처럼 중독 증세를 보인다. 이런 이유로 도파민은 ‘중독 호르몬’이라고도 불린다.
행복과 깊은 연관이 있는 호르몬인 만큼 사랑에 빠진 이들은 도파민 분비가 활발하다. 헬렌 피셔 미국 럿거스 뉴저지 주립대학 인류학과 교수가 수십 쌍의 연인에게 상대방의 사진을 보여주며 뇌의 반응을 관찰한 결과 도파민 분비가 활성화되는 것을 발견했다. 사랑을 갓 시작한 사람들이 언제나 들떠 있고, 활기로 가득 차는 것은 바로 이 도파민 때문이다.
짧고 강렬한 ‘페닐에틸아민’
운명 같은 첫 만남과 아슬아슬한 ‘썸’을 거쳐 사랑을 시작한 연인은 서로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진다.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지 않고, 보고 있어도 그립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처럼 상대방에게 콩깍지가 쓰이고 무조건적으로 헌신하는 연애 초기단계에는 ‘사랑 분자’로 알려진 페닐에틸아민이 몸속에서 마구 분출한다.
페닐에틸아민은 아드레날린 같은 화학물질로, 이성을 마비시키고 열정을 샘솟게 한다. 쾌락중추뿐 아니라 인지능력에도 영향을 미쳐 커피를 여러 잔 마신 것과 같은 천연 각성 효과를 낸다. 댄과 앨리스가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고 관계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도파민과 페닐에틸아민의 역할이 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댄은 앨리스와 교제하는 도중 사진관에 들렀다가 낯선 여자 안나의 매력적인 모습에 반하고, 충동적인 입맞춤을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앨리스는 그에게 이별을 고한다. “보여줘, 사랑. 그게 어디 있는데?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어. 몇 마디 말은 들리지만 그렇게 쉬운 말은 공허할 뿐이야. 뭐라고 말하든 이젠 늦었어.”
앨리스의 이야기를 책으로 쓸 정도로 불 같은 사랑을 했던 댄의 마음이 어째서 이렇게도 빠르게 식어버린 걸까. 미국 코넬대학교 인간행동연구소 신디아 하잔 교수팀이 남녀 5000여 명에게 ‘애정의 지속도’를 조사한 결과 가슴이 뛰거나 스릴 넘치는 사랑은 18~30개월이 지나면 사라지는데, 특히 남자의 속도가 여자보다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연인 간 교제기간이 2년 정도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사랑 호르몬이 더 이상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래 만난 연인이나 수십 년간 함께 지낸 부부 사이에 권태기가 발생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오래 사랑하고 싶다면 ‘옥시토신’
식어가는 사랑의 유효기간을 늘릴 방법은 없는 것일까. 힘겨운 권태기를 겪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옥시토신에 주목해야 한다. 옥시토신은 누군가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고 느낄 때, 안정적인 기분이 들 때 분비된다. 옥시토신이 분비되면 친밀감, 유대감, 우정 등 긍정적인 감정은 극대화되고, 부정적인 기억은 일시적으로 사라져 상대방에게 애정이 깃든 행동을 하게 된다. 즉, 사랑에 빠진 기분이 든다.
옥시토신은 피부 자극에 매우 민감해 손잡기, 포옹 등 애정이 깃든 스킨십을 통해 주로 분비된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 잠자리를 가질 때 매우 활발하게 분비되고, 관계 중 절정에 이를 때 최고조에 달한다. 또 관계 중에는 옥시토신뿐 아니라 기분을 좋게 만드는 엔도르핀과 성장 호르몬도 함께 분비되어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관계가 끝난 직후 남성이 여성에게 더 깊은 애정을 느끼는 것도 같은 이유다. 체내에서 활성화된 옥시토신은 다시금 상대방을 갈망하게 만들고, 성욕을 극대화한다.
하지만 옥시토신이 일차원적인 자극을 주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신뢰감에도 깊게 관여한다. 예컨대 아이를 낳을 때도 자궁이 수축하면서 옥시토신이 분비되는데, 이 순간 산모는 출산의 진통을 잠시나마 망각한다. 이후에도 유대감, 애정 등의 감정을 통해 아이와 산모가 애착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해주고, 호감과 설렘을 넘어 한 차원 더 숭고하고 깊은 사랑을 키워낸다.
옥시토신은 안락한 감정과 연관이 있는 호르몬이다. 세월의 흐름과 관계없이 깊은 사랑을 나누고 서로를 보듬어줄 때 옥시토신도 증가한다. 오래 행복한 부부생활을 하고 싶다면 미운 구석이 있더라도 감싸주고, 안아주는 연습이 필요하다. ‘클로저’의 댄도 공허한 애정 표현 대신 진심 어린 행동을 보여줬더라면 앨리스가 마음을 의심하는 일이 없었을지 모른다. 즉 호르몬의 장난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진심이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아껴주는 순간, 사랑은 다시 시작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