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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이 간다
- 절정을 막 끝낸 꽃나무 줄기마다 꽃들이 시들해져 있다. 탐스럽게 피어나 눈부시던 때의 환호가 하루하루 멀어져가는 시간이다. 언제부터인가 비바람에 꽃잎을 떨어뜨리고 점차 허전해지는 꽃나무에게로 마음이 간다. 꽉 찬 충만함의 도도함에서 비워내고 덜어낸 모습에서 편안함이 보인다. 조금은 빈틈이 보여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과 비슷한 구석도 있구나 할 때 어쩐지 더 사람다워 보일 때처럼. 온 누리에 봄볕을 쏴아~ 뿌리며 달큰한 꽃향기와 보드라운 꽃잎을 흩날리더니, 이젠 다 털어버리자 가볍게 훌훌 날려버리자 하며 봄바람에 몸을 맡기며 비워내는 마음, 그게 더 아름답다. 아련히 마음이 간다. 빈틈없이 가득 채운 완성보다 더러더러 비어 있는 자리, 그 빈자리가 더 강한 생명력을 만들어낼 차례다. 곧 신록으로 가득할 것이다. 벌써부터 설렌다. 고개 들어 눈부시게 바라보던 벚꽃보다 발아래 이슬 머금고 수줍게 피어난 자잘한 들꽃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즈음이다. 봄꽃들이 끊임없이 피고 지고 하는 봄날이다. 여전히 예서제서 꽃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멀리 가지 않아도 주변에 봄꽃이 지천이다. 고궁에서도 봄날의 운치는 넘친다. 서울 봉은사에서는 홍매화가 봄소식을 전해왔다. 암벽 아래로 가끔씩 지나가는 기차가 함께 어우러지는 풍경이 아름다웠던 응봉산의 노란 개나리 물결도 빼놓을 수 없다. 윤중로의 벚꽃도 한창이다. 물론 동네 뒷산이나 공원에서도 이 계절을 누려볼 수 있다. 며칠 전 들렀던 현충원에서는 폭포수처럼 늘어진 수양벚꽃이 화려했다. 수양벚꽃은 효종대왕이 북벌정책의 일환으로 활 재료로 심은 나무라고 한다. 나라를 위해 가신 분들의 영령이 모셔져 있는 현충원과 잘 어울리는 꽃이라는 생각이 든다. 포물선 그리듯 늘어진 벚꽃과 그 아래 키 작은 풀꽃들이 봄볕을 받고 있었다.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가득한 현충원을 돌아보며 봄날 하루 힐링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꽃에게로 다가서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 한 시인이 이렇게 꽃을 노래했다. 이 봄, 실컷 꽃침을 맞아보고 그 속이야기까지 들어볼 일이다. 또 한 번 우리의 봄날이 간다.
- 2017-04-24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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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꼽은 서울 최고의 벚꽃명소
- “현충원에 벚꽃 필 때가 됐을 텐데...” 올해도 어김없이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3년 전 현충원에 벚꽃 구경을 다녀온 후,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수양벚꽃 보러 가자고 엄마한테 전화가 온다. 처음 현충원에 꽃구경 가자고 했을 땐 묘지에 웬 꽃구경이냐고 손사래를 치더니 한번 와보곤 홀딱 빠지고 말았다. 전화기를 타고 오는 엄마의 목소리에도 봄바람이 불었다. 4월이 되자 여기저기서 봄꽃축제가 열리고 있다. 그 중 으뜸은 벚꽃이다. 여의도 윤중로나 남산길, 석촌호수 등 벚꽃 명소에는 벚꽃나무 아래서 꽃비를 맞으며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 만큼 벚꽃이 만들어 내는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서울 최고의 벚꽃 명소로 꼽는 곳은 따로 있다. 바로 국립현충원이다. 우리나라 벚꽃은 대부분 왕벚꽃나무인데 비해 국립현충원의 벚꽃은 수양버들처럼 가지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수양벚꽃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수모를 겪은 효종이 북벌 계획의 일환으로 활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 수양벚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봄꽃을 즐기기에 국립현충원이 좋은 이유가 있다. 우선 현충원에 들어서면 묘역을 감싸고 있는 산 위에 형형색색의 꽃들에 눈호강이 시작된다. 벚나무 외에도 진달래, 개나리, 철쭉, 산수유, 목련 등 알록달록한 꽃들이 가득하다. 국립묘지이긴 하지만 43만 평이나 되는 넓은 곳이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온다. 20km 제한 속도를 지키면 승용차를 타고 현충원을 크게 한 바퀴 돌 수 있어 나이 드신 부모님도 만족해 하신다. 게다가 넓은 주차장이 곳곳에 있으니 벚꽃축제가 한창일 때도 주차 걱정이 전혀 없다.현충원을 한 바퀴 돈 후엔 수양벚꽃을 감상하기 위해 정문 근처 충무정을 찾아간다. 수양벚꽃이 무리지어 심어져 있는 데다 벚꽃의 가지가 땅에 닿을 정도로 늘어져 있어 숨막히게 아름답다.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카메라를 들고 아름다운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그래서 충무정 앞은 늘 붐빈다. 필자와 부모님도 이 곳에서 인증샷은 필수다. 널리 알려진 벚꽃 명소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인파에 휩쓸리느라 꽃구경을 제대로 하기 힘들다. 하지만 국립현충원은 대지가 워낙 넓으니 사람이 많아도 인파가 분산돼 호젓하게 꽃놀이를 즐길 수 있다. 또, 공원처럼 잘 꾸며져 있어 가족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산책하기 참 좋다. 이번 주말 쯤 벚꽃은 만개해 장관을 이룰 것이니 서둘러 나들이를 계획해야겠다.
- 2017-04-0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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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국보훈의 달] '빛과 소금’이 되고픈 짭짤한 청춘들-국가유공자 자녀 중심 대학생 의료 봉사단 ‘소금회’
-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5월 7일 토요일 오후. 하얀 가운을 입은 이들이 서울 동작종합사회복지관을 방문한 어르신들의 건강 상태를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라 부르기엔 앳된 얼굴을 한 그들의 가운에서 ‘소금회’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20년 넘게 동작종합사회복지관을 찾는다는 이들은 국가유공자 자녀 중심으로 꾸려진 ‘소금회 대학생 의료 봉사단’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한다는 소금회 학생들이 흘린 건강한 땀방울의 의미를 되새겨봤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1986년 결성한 소금회는 국가유공자 의대생 자녀들이 부모세대와 국가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의료 봉사단이다. 30년이 흐른 지금, 일반 의료계 전공자들도 참여할 수 있는 대학 연합 동아리로 발전했으며, 해외 의료 봉사도 나가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봉사단은 크게 진료반(의과대학 학생), 치과반(치과대학과·치위생학과 학생), 간호반(간호대학 학생), 약국반(약학대학 학생)으로 나뉜다. 의과대학은 서울대·연세대·한양대·중앙대·순천향대 학생들이고, 약학대학은 이화여대·숙명여대, 간호대학은 가톨릭대, 치과대학은 연세대, 치위생과는 영동대(永同大) 학생들이다. 재학생들로 구성된 봉사단이기 때문에 평균 연령은 24세 정도로, 대부분 대학교 2학년 때부터 2년간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소금회 창단 초기에는 의료 혜택을 받기 어려운 무의촌(無醫村) 주민들을 대상으로 의료 봉사를 했다. 동작종합사회복지관에선 20년 넘게 격주 토요일마다 어르신들의 말벗과 상담, 방문 진료를 진행하고 있다. 2003년 당시 소금회 회원들은 태풍 ‘매미’로 인해 전염병이 우려되었던 충북 영동군 상촌면 일대에서 봉사활동을 하였다. 그때의 인연으로 매년 여름이면 상촌면을 찾아 진료 봉사를 한다. 현충일에는 국립현충원 국립묘지를 찾은 국가유공자 유가족을 대상으로 무료 건강 검진과 응급 처치 등 의료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부모세대의 희생을 통해 배운 베풂의 미덕 매년 그들이 하계 진료 봉사를 위해 떠나는 상촌면은 병·의원이 한 곳도 없는 의료 취약지이다. 소금회 회원들은 3박 4일 동안 여름날 한낮 태양보다 더 뜨거운 마음으로 주민들을 위해 봉사한다. 지난해부터 소금회를 이끄는 이상원(李相沅·23·한양대학교 의학과 4학년) 회장은 “아직 학생들이기 때문에 병을 완벽히 치료하거나 아픈 것을 전부 해결해 줄 수는 없겠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작은 조언을 드리는 것만으로도 그분들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하니 정말 기쁩니다”라며 어린 학생들의 작은 손길이 어르신들의 건강한 삶에 일조하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회장뿐만 아니라 많은 소금회 회원이 3박 4일간의 봉사활동을 의미 있게 여긴다. “우리가 이렇게 뜻깊은 봉사 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국가유공자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부모세대는 우리에게 항상 자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난 이후 한국전쟁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을 거치며 지금의 이 나라를 만든 고마운 분들이죠. 그들은 자녀 세대가 잘 성장하기 위한 토대를 만들어 주셨잖아요. 건실하게 잘 자라고, 남을 위해 베푸는 자세로 국가와 사회 발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요.” 남을 위하는 봉사는 결국 나를 위하는 길 공부하고 학과 수업 따라가기 바쁜 의대생에게 주말과 여름방학은 잠시나마 머리를 식힐 수 있는 달콤한 휴식 시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봉사 활동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막상 결심을 했더라도 쉬는 날이 되면 침대를 벗어나기 어렵고, 친구들과의 약속을 저버리기 힘든 것이 현실. 그러나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봉사 활동에 참여한다면 자신의 삶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이 회장이다. “봉사는 자신의 일부분을 포기하며 그만큼 남에게 베푸는 것이라 생각해요. 자기 시간이 줄어든다는 점에서는 힘들다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죠. 부모님은 항상 남에게 베풀라고 가르치셨어요. 봉사 활동을 하다 보니 베푼다는 것이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베푼다는 것’이 참 막연했는데, 소금회를 통해 좋은 친구들과 체계적인 방법으로 여러 사람에게 베풀 수 있게 된 것 역시 감사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누군가에게 소금회에 대해 이야기하면 대개 부럽다는 반응을 보여요. 봉사 활동을 하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봉사하는 단체와 자신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그만큼 의미를 갖고 열심히 하기 힘들기 때문이죠.” 이 회장은 봉사에 대한 생각이 있다면 바로 시작하는 게 좋다고 이야기한다. 마음으로만 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 “일단 결심을 했다면, 어떤 단체에서 들어가서 무슨 활동을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는 게 좋아요. 제가 아직 누군가에게 조언할 처지는 아니지만, 또래의 친구들에게 한번 해보면 봉사의 참맛을 알 수 있을 거라는 말은 할 수 있어요. 물론 자신도 챙기기 어려운 세상이지만, 봉사란 그렇게 많이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조금씩 천천히 꾸준히 오랫동안 봉사 현장에 나간 소금회 회원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고맙다”는 인사다.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는 이 한마디가 봉사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큰 힘이 되고, 보람을 느끼게 한다. “한 달로 치면 총 7~8시간, 짧다면 짧은 이 시간이 누군가에게 큰 고마움 선사하는 것 같아요. 아무리 짧은 시간이더라도, 내가 의미 있는 무언가를 했다는 것이 뿌듯해요.” 지난 30년 동안 묵묵히 어려운 이웃의 빛과 소금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꾸준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소금회. 국가유공자 자녀를 중심으로 생겨난 봉사단체인 만큼 매년 현충일에는 국립현충원에서 뜻깊은 봉사를 한다. “올해 현충일에는 혈압, 혈당을 측정하고 간단한 건강 상담을 할 예정이에요. 보훈처 직원과 미리 만나 봉사할 내용을 보고하고, 현충원 내에 부스를 지정받아요. 소금회 회원들은 6월 6일 오전에 장비를 설치하고, 현충원 행사가 시작되면 본격적인 의료 봉사 활동을 시작합니다.” 또 다른 활동 계획은 없는지 물었다. 이 회장은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보다는 그동안 걸어온 소금회 활동의 명맥을 유지하고, 회원들의 변함없는 마음이 이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선배들이 활동해온 것 외에 추가로 무언가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저 우리가 보는 어르신들, 주민들이 앞으로도 건강하기만을 바랍니다. 또 함께 하고 있는 회원들, 그리고 미래의 회원이 될 학생들도 소금회 활동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부모세대의 헌신 덕분에 우리가 느낄 수 있었던 보람과 경험을 계속해서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어요.”
- 2016-06-0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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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을 맞으며] 6월엔 더 특별한 동작 충효길
- 집 밖으로 나서면 초록빛 싱그러움을 흠뻑 느낄 수 있는 6월. 그래서 이 계절에 숲길을 걷는 건 언제, 어디서나 즐겁다. 어딜 걷는다 해도 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연의 맛을 느낄 수 있겠지만 6월에 걸으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길이 있다. 나라를 위해 충의를 다했던 사람들을 추모하면서 깊은 산 속 정취까지 느낄 수 있는 곳, 국립현충원과 서달산을 잇는 동작충효길 1코스, 2코스가 바로 그 길이다. 국립현충원 하면 딱딱하게 느껴지지만 정문을 들어서면 묘역을 넓게 감싸고 있는 산 위 풍경이 아름답다. 50년 동안이나 산림을 일반에 개방하지 않았던 덕에 수풀이 우거지고 공기가 신선하다. 국립현충원은 한국전쟁 전사자는 물론 국가원수, 애국지사, 국가유공자 등 국가를 위한 공로가 현저한 자들이 안장된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단종에게 충절을 바친 사육신의 제사를 모시던 ‘육신사’가 있던 곳으로 전해지니 이곳은 충의를 갖고 나라를 위했던 사람들의 유훈을 들어볼 수 있는 뜻깊은 공간이다. 전직 대통령 묘역에서부터 장군 묘역, 일반병사 묘역을 둘러본 뒤 현충원 안의 연못, 공작지에서 호국 영령들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많은 사람이 숲 속 벤치에 앉아 있으나 새 소리만 무성할 누구의 목소리도 방해하지 않아 사색하기에도 참 좋다. 국립현충원을 돌아보고 상도출입문으로 나오면 서달산 숲길과 바로 연결된다. 편안하게 만들어진 숲 속 오솔길을 걷다 보면 양손을 힘차게 흔들며 걷는 사람들과, 삼삼오오 산책 나온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서달산은 해발 179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숲이 무성하다.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만나는 풍경이 다채로워 걷는 재미가 있다. 이 길의 자랑은 곧게 뻗은 잣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는 잣나무 숲길이다. 먼 곳에 있는 자연휴양림에라도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잣나무가 우거져 있다. 거기서 잠시 쉬며 잣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를 마시면 가슴 속까지 시원해진다. 몸이 불편한 사람이나 노약자들이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무장애길도 조성돼 있다. 총 463m 목재산책길로 만들어진 이 길은 경사로 8% 미만에 소나무, 잣나무, 산벚나무 등이 심어져 삼림욕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는 산 중턱에 만들어진 녹색쉼터는 걷기 불편한 사람뿐 아니라 잠시 쉬며 산속 공기를 마시려는 사람들에게도 인기만점이다. 이 길이 좋은 점은 간편한 복장으로 생수 한 병 손에 들고 손쉽게 걸을 수 있다는 점이다. 동작충효길 1코스 고구동산길은 지하철 9호선 노들역에서 시작할 수 있고, 2코스 현충원길부터 걷고 싶으면 지하철 4,9호선 동작역에서 출발하면 된다. 6월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호국보훈의 달’이다. 우리의 평화로운 삶 뒤에는 순국선열들의 희생이 있음을 기억하기에, 6월엔 충의 기개로 가득 찬 현충원에서 서달산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걸으며 나라를 위해 애쓴 사람들을 기억해 보면 어떨까?
- 2016-05-09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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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을 맞으며] 북이 미사일 쏜 날의 작은 단상
- “야! 여긴 아무렇지도 않다. 거리엔 젊은 연인들 넘쳐나는데 맥주 마시고 난리가 아니다! 비상은 거기만 걸린 거지, 여긴 관심도 없다! 잘 있다 와라!” 늦은 퇴근길 전철 안. 얼마 전 전역한 듯한 젊은이와 아직 복무 중인 현역병의 통화인 듯했다. TV 뉴스에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소식이 뉴스 앵커의 낭랑한 음성으로 들리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한참 소란을 떨고 라면이나 비상식량도 준비했을 법한데, 이제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조용하다. 둔감해진 것일까? 아니면 자신감에서 오는 여유일까? 젊은이들의 통화 내용처럼 전방과 후방의 분위기는 정말 달랐다. 그렇다고 살면서 늘 긴장해야 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조금은 걱정도 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던 산기슭에는 아직도 이름 모를 병사들의 영혼이 떠돌고 있다. 6월 6일 현충원에서는 호국 영령들을 위로하는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더구나 북에서는 지금도 전쟁놀음이 한창이다. 휴전 이후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남한은 부와 자유를 누리나 북은 전쟁 준비에 혈안이 돼 여전히 인민들을 동원해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이 자유스러움을 마냥 만끽해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이어서 더욱 그렇다. 필자가 군 복무를 한 지가 어언 40년이 되었다. 그런데 그 시절엔 국기 게양식이 있고 하강식이 있었다. 국기가 올라가고 내려가면 모두가 일손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에 맞추어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읊조리며 경례를 했다. 심지어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볼 때도 국민의례를 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통해 조금은 국가의 소중함이나 애국에 대해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찾아볼 수도 없다. 추억 속에서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국가란 무엇일까? 어느 날 태어나 보니 부와 자유가 넘쳐나는 부자나라였던 것은 아닐까? 힘겹게 목숨 바쳐 이 나라를 지켜낸 분들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군복을 벗은 지 40년이 돼 필자는 군부대를 찾는 기회를 얻게 됐다. 요즘 젊은 군인 중에 힘들어하는 병사들이 있어 선배들에게 한 수 배우고 싶다고 교육 요청을 해와 이에 응한 것이다. 특히 사건 사고가 많은 데다 지휘관은 부하들을 대하는 리더십이, 부하들은 상관, 동료와 함께하는 인성이 부족해 이 부분에 대해 좀 가르쳐 달라고 했다. 오랜만에 부대 안에 들어서서 군복을 입은 병사들을 보니 오래전 군 복무하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교육이 끝나고 군인들과 기념촬영을 하면서 내가 청소년기에 감명 받았던 모윤숙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원수가 밀어오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숨지었노라.' 그러면서 나는 젊은이들의 통화 속에 그 말이 귀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여긴 아무렇지도 않다.” ‘아무쪼록 그래야지. 그런데 그것은 오래도록 굳건한 국군이 지키고 있기에 가능한 거 아닌가 하네.’
- 2016-05-0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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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49년生, 세계지도는 내 인생의 이정표
- 김영희(金英姬) 前 대사 우리 동네에는 우물이 세 개 있었다. 동네 한가운데 마을 공동 우물이 있고 방앗간 집과 우리 집에 우물이 있었다. 1949년 한글날 태어난 나는 6·25전쟁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런데 우리 집 우물에 던져져 죽을 뻔했다는 얘기는 알고 있다. 농사를 많이 짓고 있는 집에다 큰아들이 국군 장교로 참전 중이어서, 인민군이 우리 가족을 몰살하기 위해 우물의 깊이를 재고 전 가족 이름을 적어갔단다. 옆 동네에서는 이미 우물 속 가족 몰살이 시행되고 있었는데, 인민군이 우리 식구 명단을 작성해간 이틀 후에 미군이 우리 동네에 들어왔단다. 훗날 내 어릴 적 얘기를 전해들은 미국인 내 남편은 한국전쟁에 자기 외삼촌 두 명이 참전했는데, 아마도 우리 동네를 탈환한 미군 중에 자기 삼촌이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형제는 아들 여섯, 딸 셋 9남매다. 그중 나는 여덟 번째로 막내딸이다. 나보다 20세 많은 큰오빠는 6·25전쟁에서 생사를 넘으며 수많은 공훈을 세웠고 충무, 화랑 등 많은 무공훈장을 받았다. 특히 전쟁 막바지에 남한의 전력 공급원인 화천댐에 대한 대규모 중공군의 끈질긴 공격을 중대 병력으로 격퇴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태극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지도를 바꾼 사나이’로 알려진 우리 오빠 김한준 대위가 2012년 사망했을 때, 장군 출신이 아님에도 육군장(陸軍葬)으로 국립현충원에서 장례식이 개최되었다. 세계지도를 보며 넓은 세상을 동경하다 내가 어렸을 때 시골에선 책이 몹시 귀했다. 그러나 나는 오빠, 언니가 많은 덕택에 여러 가지 책을 접할 수 있었다. 손에 잡히는 책은 무엇이든 읽었다. 책에는 모르는 세계, 모르는 나라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많았다. 그중 특히 내 관심을 끌었던 책은 세계지도였다. 나는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수없이 많은 나라들을 보면서 넓은 세계에 대해 꿈꾸고 상상했다. 넓은 세계에 대한 나의 동경은 장래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으로 이어졌다. 당시 나는 외교관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외교관이 되려면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 전혀 몰랐지만, 외교관은 해외에 나가 넓은 세상에서 일하는 직업이라는 것은 막연히 알았다. 내가 전주여고를 졸업할 즈음에 집안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교육열이 높으셨던 부모님은 9남매 뒷바라지에 매우 헌신적이셨고, 그동안 오빠, 언니들의 중, 고, 대학 입학으로 논밭은 거의 다 팔려나갔다. 나는 대학 대신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대학 진학을 마음속에서도 포기한 건 아니었고, 일단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학비를 벌고 야간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1968년 2월 고등학교 졸업 후 나는 5급을(현 9급) 국가공무원 시험과 서울시 지방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 1960년대의 실업률은 하늘을 찔러 매년 공무원 시험 응시율은 상상을 초월했고, 나아가 군대 가산점제도가 있어 여성의 공무원 시험 합격은 가뭄에 콩 나듯 했다. 다행히도 나는 두 곳 모두 합격했는데, 서울시 공무원을 택해 1969년 3월 서울시 중구청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970년 국제대학 야간학부에 입학했지만, 직장과 대학 생활을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구청의 민원실에서 호적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에 주민등록제도가 도입되는 시기였다. 구청의 민원실에서는 일일이 호적을 보면서 손으로 주민등록 카드를 밤늦게까지 작성하고 있었다. 오후 6시에 시작되는 야간대학 수업에 맞춰 퇴근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동료들의 격려와 눈총 속에서 겨우 1학년은 마쳤으나, 출석 미달로 학점은 엉망이었다. 인생을 바꾼 터닝 포인트 1970년 12월 어느 날, 명동의 백화점에 선물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 한 명을 만났다. 그 친구는 독일에 가려고 준비 중이라는 말을 했다. 내 귀와 눈이 번쩍 떴다. ‘해외개발공사’에서 간호보조원(지금은 간호조무사)을 양성하여 독일로 파견하는데, 자신도 그 파견단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해외개발공사 간호보조원 양성소에서 차기 입학원서를 받고 있는 중이란 말을 듣고,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독일 행을 결심했다. 그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내 결정에 모두가 반대했다. 독일에 가서 병원근무 마치고 독일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내 말에 모두가 황당해 했다. 안정된 공무원 직장을 버리고 막연한 해외 파견 꿈을 꾸는 나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했다. 독일에 정말 갈 수 있을지, 또 내가 희망하는 대로 병원 근무 후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며,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의 결심은 확고했다. 후회하게 되더라도 해보고 후회하겠다고 했다. 간호보조원 양성소 입학 자격은 ‘중학교 졸업 이상’이었으나, 들어온 여성들의 배경은 천차만별이었다. 고등학교 독일어 교사, 공무원, 은행원, 대학생 등 해외로 나갈 길을 찾던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는 유학생 외에 여성들이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양성소에서 9개월간 이론을 배우고 병원과 보건소에서 3개월의 실습을 거친 후 간호보조원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면 독일로 파견되는 과정이었다. 1972년 8월 27일 초조하고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나는 독일에 도착했다. 새벽의 쾰른 공항은 안개가 자욱하고 추웠다. 공항에는 독일 전 지역의 병원에서 한국 간호요원들을 데리러 온 사람들이 푯말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간호사 4명과 간호보조원 6명이 북독일의 작은 도시 웰첸 시립병원에 배치되었다. 내가 3년간 일해야 할 곳이었다. 나는 남자 정형외과 병동에서 일했는데, 대부분 교통사고를 당하고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거구의 환자들로 병원일은 중노동이었다. 그러나 나는 야간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가장 힘든 근무시간인 오전 근무를 자원했다. 외진 곳에 있는 병원에서 학교에 다니기 위해 자전거를 사서 타는 법을 배우고 밤길을 다녔다. 병원에서 일하는 3년 동안 나는 야간학교에서 독일어, 영어, 불어를 배우며 대학입학 준비를 했다. 한국에도 라디오가 있느냐고 묻는 환자도 있었지만, 우리는 환자들에게 인기 있는 동양에서 온 ‘천사’였다. 30년 만에 이룬 외교관의 꿈 우여곡절 끝에, 1975년 9월 나는 6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쾰른대학교의 예비과정에 입학했다. 드디어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과, 힘든 육체노동 없이 공부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온 세상을 얻은 기분이었다. 쾰른대학교에서 예비과정을 거쳐 교육학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10년 동안 나는 죽을 각오로 정말 독하게 공부에 매달렸다. 교육학 전공에, 부전공으로 철학,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을 공부했다.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1986년 초 나는 박사 학위를 들고 가슴에 큰 희망을 품은 채 한국에 왔다.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로 최루탄 가스에 찌들어 있는 여러 대학을 찾아갔지만, 학연 지연이 없는 내게 한국사회는 냉정했다. 그러나 절망은 없다. 위기는 새로운 기회다. 한국에서 실망하고 다시 독일로 간 내게 쾰른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겼다. 보수적인 쾰른대학교에서 외국인이 전공과목을 강의한 첫 사례가 되며, 1990년 7월까지 나는 4년 동안 독일 학생들에게 교육철학을 강의했다. 그사이 유럽에는 지각변동이 있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90년 5월 한국 외교부는 독일전문가 특별채용 공고를 냈다. 그 공고를 보는 순간 나는 가슴에 화살이 박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잊고 있던 내 어릴 적 ‘외교관 꿈’이 떠올랐다. 특별채용시험 면접 때 “한국은 나를 낳아 키워주었고, 독일은 내 정신을 살찌게 해준 나라입니다. 두 나라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먼 길을 돌아 30년 만에 꿈을 이루었다. 1991년 2월 말 폰 바이체커(R. von Weizsacker) 독일 대통령 국빈 방한 시 통역으로 나는 외교관 업무를 시작했다. 독일 담당관으로 본부와 독일을 오가며 통역한 정상은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과 독일의 라우(J. Rau), 헤어촉(R. Herzog) 대통령이다. 독일 통일 직후 우리나라의 통일 열기는 대단하여 매년 수많은 고위인사들의 독일 방문이 있었고, 자료 작성과 브리핑, 통역은 정무담당인 내 업무였다. 나는 주 독일 대사관에서 1등서기관부터 공사까지 역임한 후, 2005년 9월 주 세르비아-몬테네그로 대사로 임명되어 대한민국 세 번째 여성대사가 되었다. 선진국과 분단 극복의 꿈 현재 내 책상 위엔 커다란 세계지도 책이 놓여 있다. 뉴스에 주요 해외사건이 보도되면 지도를 펴 보고 그 주변 국가들을 살펴보며 머릿속에선 습관처럼 보고서를 쓰고 있다. 매년 지구를 거의 한 바퀴 도는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도 해외를 방문할 때는 항상 그 나라의 지도가 내 가방 속에 들어 있다. 화성에 착륙한 인간의 모습과 지도를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나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살았다. 지금도 매년 여름 3개월은 남편과 함께 베를린에 체류하며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개최되는 철학, 인문학 학회에 참석한다. 겨울 3개월은 보스턴에서 지낸다. 쾰른대학 학생 때 만난 남편은 현재 보스턴에서 철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세계 여러 곳을 방문하며 변화된 한국의 위상을 실감하지만, 삶의 여유가 있는 사회가 부럽기도 하다. 지난 반세기 우리 세대는 숨 가쁘게 달려왔다. 산업화, 민주화도 이루었다. 그러나 아직도 너무나 국내적인 시각에 머문 편협한 사회현상은 안타깝다. 세상은 넓고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다. 그리고 국제사회는 냉혹하다. 나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고 분단을 극복하는 꿈을 꾼다. 평생 분단과 함께 살아온 우리 세대와는 달리 다음 세대는 진정한 선진국의 시민이 되어 평화로운 대한민국에서 기차를 타고 베를린, 파리, 런던까지 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 김영희(金英姬) 외교관 퇴임 후 세계무대에서 얻은 경험을 젊은 세대와 공유하고자 '20대, 세계무대에 너를 세워라'(2010.3.)를 펴냈다. 우석대 초빙교수를 역임했고 전국의 많은 대학에서 특강했다. 언론의 독일통일전문가 토론에도 여러 번 참여했다. 현재 '여성평화외교포럼'(사) 이사.
- 2016-01-05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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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라이프 인터뷰] “죽음을 다루면서 삶을 더 알차게 살게 됐습니다”
- 유재철 씨를 설명할 때는 꼭 붙는 명칭이 있다. 바로 ‘대통령 염장이.’ 최규하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염하고 장례 전반을 진행한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들의 장례와 같은 국가적 행사뿐만 아니라 서경보 스님, 정몽헌 회장, 정대 스님, 법장 스님, 법정 스님, 여운계씨와 같은 큰스님들과 유명인사들의 장례도 도맡아서 진행했던 유재철 연화회 대표지만, 시작은 그저 평범한 한 명의 염장이였을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어떻게 해서 그는 염습이라는 쉽지 않은 분야를 자신의 업으로 받아들이고 장인의 소명의식으로 최고 전문가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을까? “염습은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와드리는 일이다. 염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잡념이 없어지고 몰입하게 된다.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되어 생각한 대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경지를 느끼는 고귀한 업으로 일한다.” 염습이라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아직 많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그러나 업의 험상궂은 이미지와는 달리, 유재철 연화회 대표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것은 맑고 순하다는 인상이었다. 그의 말속에서 자신이 맡은 일의 가치를 믿고 그 일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라 느껴졌다. 유 대표가 염장이가 된 것은 우연의 힘, 혹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의 힘처럼 보인다. 경기도 광주에 고향이 있는 유 대표는 일찍이 집안 내에서 시행되던 장례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까다롭고 복잡한 상례 또한 낯설지 않았다. 돌아가신 가족들을 위한 염을 진행하곤 했다. 즉 장례 문화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으며 염에 대해 일찌감치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방황 끝에 발견한 ‘대통령 염장이’의 시작 그러나 경험적으로는 익숙했어도 장례를 업으로 삼고자 하는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녔다. 27살부터 사업을 시작한 그는 아파트 섀시 설치, 방화문 제작, 의류 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그런데 그 어느 사업도 잘 풀리진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라도 광주에서 능인회라는 장의업을 하고 있던 친구들을 알게 됐습니다. 두 친구들은 불교 청년 운동에 소속된 젊은 사람들이었고 정직한 장의업을 통해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 일을 도우면서 저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그들의 성공을 보고 장의업을 배우겠다는 사람은 제법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 대표처럼 직접 염을 하는 것에 적극적이고 능숙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 유 대표는 이내 친구들의 인정을 받았다. 유 대표가 염을 업으로 하게 된 것은 방황 끝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염을 배우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다 그러나 일단 시작하게 되자 유 대표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염을 잘한다는 사람을 만나 배움을 구한 것도 그 증거다. 각 지방마다 각기 다른 지식들이 전수되고 있었고 유 대표는 그 하나하나를 확인하고 맞추며 정돈된 염습 체계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서른 살 중반에 광주 친구들에게 석달 배워 서울에 장의사를 시작했죠. 3년을 틈나는 대로 전국을 다니며 염하는 걸 배웠어요. 막상 가서 염하는 걸 보면 참고할 수 있는 분도 있었지만 배울 게 없는 분도 있는 등 상황이 여러 가지였어요.” 당시 장의업이나 상조회사들은 서울 밖 지방에서 발달되어 있었으나 시장으로서는 역시 서울이 가장 큰 규모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상조회사들은 지방에 머무르려 하고 있었고 영업 조직만 서울에 올려 놓은 형국이었다. ‘동네 장의사’보다는 뭔가 특색 있는 장의사가 되고 싶어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와 제일은행 본점 사이에서 처음 장의사를 시작한 게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침 그때 큰스님들이 많이 돌아가셨고 큰스님 장례를 한 번 치르면 손님이 수천 명씩 왔다. 이런 대규모 5~7일장을 10년 넘게 하면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동국대 대학원 장례문화학과를 다니기 시작한 것도 스님들과의 인연 덕분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도전이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의 장례 염장이로서 자신을 쌓아가던 유 대표에게 마침내 삶의 전환점이 왔다. 2005년 동국대학교 대학원의 장례문화학과를 다니며 석사 학위 논문을 쓰던 유 대표는 단체장에 관한 논문 작성에 착수했다. 대통령 관련 자료는 행정자치부에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모두 기밀이었다. 결국 유 대표는 김구 선생 자료와 비밀 해제된 육영수 여사의 장례 자료를 입수하여 논문을 준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06년 10월 22일 최규하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뉴스를 듣고 곧바로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을 찾아갔다. 뭔가 자신이 할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석사 논문 때 인연을 맺은 직원을 만나 ‘도와줄 게 없느냐’고 물었더니 ‘마침 잘 왔다’며 최 대통령 장례는 물론 2년 전 돌아가신 영부인 홍기 여사의 이장을 도와 달라고 했다. 최 대통령과 현충원에 합장하기 위해서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직이었을 때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육영수 여사는 큰 문제 없이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죠. 그러나 최규하 전 대통령의 부인인 홍기 여사는 최 전 대통령보다 2년 먼저 돌아가셔서, 미리 장례를 치르다 보니 현충원이 아니라 원주에 있는 선산에 안장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최규하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면서 홍기 여사를 이장하여 현충원에 함께 합장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겁니다.” 국장은 행자부에서 담당하는 일이었지만 매뉴얼은 없고 파편적인 자료들만 모아져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유 대표는 5일장을 진행하면서 날밤을 새면서 공부를 하고 그걸 쉼 없이 적용하며 악전고투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일들 투성이였지만 유 대표는 결국은 해냈다. “당시 최 전 대통령의 종친회도 장례 과정에 참석했었는데, 종친회에서 제안한 명정, 그러니까 관직과 이름을 쓰는 명정 문구를 봤더니 일반 양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최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 아닙니까? 좀 더 격이 높아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명정 문구로 교체할 수 있었죠.” 세 명의 대통령을 모시고, 장례의 최고 전문가가 되다 최 전 대통령의 장례는 유 대표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복사나 촬영을 불허하는 박정희, 윤보선 전 대통령 등의 장례 자료를 눈과 손으로 확인하고 익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40여 건에 달하는 대통령과 총리의 장례 역사를 공부하여 전체 장례에 대한 지식을 통괄할 수 있게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에게 장례 전체 일정에 대한 관리가 맡겨졌다. 그는 그때의 지식을 바탕으로 국가장 매뉴얼을 만들었다. “수원성은 건축 기록 덕분에 지금도 지을 수 있을 정도잖아요? 저도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게 지금은 저밖에 없어요. 행안부가 이사를 다니면서 자료가 사라졌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지식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낸 이론의 구축과 정리,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실제로 진행한 커다란 경험들까지, 유 대표가 단숨에 최고 전문가의 자리에 오르게 된 건 우연이 만들어준 다리에 최선을 다한 그 자신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래서 최 전 대통령의 장례 이후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 또한 유 대표의 관리 아래에 진행하게 됐다. 워낙 큰 일들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였었기에 정신이 없었지만 국가급 규모의 장례에 대한 경험이 이미 있었던 유 대표로서는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만큼 사연도 많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 때, 행안부에서 노제에 쓸 만장 2000개를 준비해 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우선 대나무를 구하는 게 걱정이었는데, 담양군청에 요청을 했더니 다음 날 트럭에 2000개를 실어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만장에 쓰일 글씨는 명정을 써주신 동방대학원대학교 정상옥 총장님께 부탁 드려서 교수님들과 재학생들, 총장님 선후배들이 모여서 800장을 만들었고, 조계사 지관스님이 만장을 쓰는 모습이 방송에 나가니 전국의 서예가들이 올라 와서 하루만에 1200장을 써주셨습니다. 그런데 1500개 정도 작업을 끝냈을 때, 발인 전날 오전에 행안부에서 이유는 묻지 말고 대나무가 아니라 PVC로 만장대를 교체하라는 전달을 받았죠. 밤샘해서 겨우 발인 날 새벽에야 완성하여 시청 앞으로 가져 갈 수 있었습니다.”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국가장이 가능할까? 아직 단체장, 특히 국가장에 대해선 민감한 문제들이 남아있다. 명칭이 제각각인 건 기초적인 문제 중 하나일 뿐이다. 그에 더해 우리네 정치와 역사가 만들어낸 미묘한 사안들이 돌출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국가장법을 보면 가족들이 요청하면 국가장을 치를 수 있고, 국가장을 치르면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어요. 그런데 노태우, 전두환 두 전 대통령은 서훈이 취소되어 현충원 안장대상자에서 제외되었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돌아가시고 가족들이 국가장을 요청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고 국가장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유 대표는 이어서 국가장이면 국가적인 공식행사인지 약식행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흔히 국가장이면 국가적인 공식행사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국가적인 공식행사인지, 아니면 약식행사인지를 가르는 건 애국가 제창을 하느냐 마느냐입니다. 문제는 국가장에서 애국가가 나온 적이 없다는 거예요.” 유 대표는 또한 국가장에서 종교 색채를 유지시키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볼 수도 있는 것이 국가장인데 식순에 4대종교 의식을 굳이 보여주는 건 시간적으로 낭비라는 것. 또한 다른 종교인이 봤을 때도 불만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장례는 엄연한 문화, ‘제대로 하자’ “우리나라 장례 문화에서 일제 문화 좀 없애고 싶어요. 특히 장례식에서 상주가 완장을 차는 건 일본 쪽 문화예요. 3.1 운동이 고종 황제 국장 치르면서 했잖아요.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얀 옷 입는 거에 거부감 있는 거야 일본인들이. 그래서 머리 자르고 까만 옷 입으라고 했어요. 그게 세련된 것처럼 보이게끔 선전도 했고. 그리고 모두가 까만 옷 입으니까 그 중에서 상주를 구분시킨다고 완장을 차게 한 거예요. 일제 때 했던 걸 왜 아직도 하고 있어요?” 유 대표는 인터뷰 말미로 가며 ‘제대로 하자’는 말을 거듭 했다. 그 말에서는 문화로서의 장례가 그 자체로 권위와 전통을 가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절실히 느껴졌다. 그것은 남들은 쉬이 가질 수 없는 극단적으로 드물고 특별한 경험들을 통해 유 대표가 얻게 된 고유한 꿈이자 마땅한 자격이기도 할 것이다.
- 2014-10-1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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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 개화시기 앞당겨져… 앞으로 2주면 다 진다?
- 본격적인 봄을 알리는 벚꽃의 개화시기가 전년보다 빨라졌다. 벚꽃 개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2월과 3월의 기온이 예상보다 높아지면서 개화 시기도 예년에 비해 앞당겨지고 있는 것이다. 벚꽃은 지난 25일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처음 개화한 후 서울에서는 28일 오후 개화했다. 벚꽃 개화가 서울까지 올라오는 데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기상청은 전국적으로 내달 4~6일 벚꽃이 절정을 이룰 것으로 내다봤다. 보통 벚꽃의 만개상태가 벚꽃은 절정 시기를 기준으로 5~7일 정도까지 이어진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4월 둘째 주까지는 전국적으로 벚꽃의 향연이 지속될 전망이다. 따라서 벚꽃 축제를 즐기려는 시민들의 발길도 분주해질 것으로 보인다. 남에서 북상하는 벚꽃의 경로에 따라 전국적으로 축제분위기가 고조되는 이전과 달리 전국적으로 동시에 벚꽃이 피면서 나들이객의 일정도 그만큼 당겨지기 때문이다, 특히 벚꽃 축제의 대명사인 경남 창원 진해는 4월 1∼10일 진해군항제를 기점으로 중원로터리, 여좌천, 진해내수면환경생태공원, 장복산 공원, 안민도로, 경화역, 제황산 공원, 해군사관학교 등 도시 곳곳에서 벚꽃 축제가 펼쳐질 예정이다. 서울에서는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여의도 윤중로가 대표적인 벚꽃길로 주목받고 있고 4월 초 벚꽃이 만개할 것으로 보이는 제주도에서는 4∼6일 제주종합경기장 부근에서 열리는 제주왕벚꽃축제를 필두로 전농로, 제주대학교 진입로 등에서 벚꽃 축제가 펼쳐진다.
- 2014-03-31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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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달 20일 여의도 벚꽃 절정, 꽃비 내린다
- 벚꽃의 계절이 돌아왔다. 본격적인 봄을 알리는 4월로 접어들면서 지역마다 벚꽃축제가 계획돼 있다. 그중 서울에서 대표 벚꽃 명소로 꼽히는 여의도 윤중로는 4월15일에서 20일이 벚꽃 개화가 절정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기상청은 올해 윤중로 벚꽃 개화시기는 4월11일이며 절정은 15일 전후로 예상된다고 예보했다. 보통 벚꽃은 절정 시기를 기준으로 5~7일 정도까지 만개상태가 이어지기 때문에 4월 셋째 주 주말인 20일까지 나들이객들은 윤중로의 벚꽃 향연을 만끽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맞춰 프리미엄 경제신문 이투데이는 서울영등포구청과 영등포문화재단 공동으로 ‘여의도 사랑의 봄꽃길 걷기대회’를 개최한다. 올해로 4회째를 맞는 이 행사는 4월 20일 오전 10시 국회동문 앞 특설무대에서 진행된다. 본지는 벚꽃이 만개한 여의도 국회일대 3㎞를 걸으며 가족 연인 친구 모든 시민이 함께 어울리는 축제의 한마당을 만들기 위해 매년 4월 이 행사를 열고 있다. 걷기대회 완주 후에는 행운권 추첨을 통해 LED TV, 최신 스마트폰 등 100여점의 푸짐한 선물을 증정하고 참가자 전원에게는 소정의 기념품과 간식도 제공한다. 자원봉사 참가 중ㆍ고등학생에게는 4시간(오전 8시30분~12시30분)의 자원봉사확인서를 발급한다. 서울에서는 윤중로 외에도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벚꽃길이 펼쳐진다. 가지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수양 벚꽃이 특징으로, 벚꽃 행사가 열리는 다음달 14∼20일엔 저녁 9시까지 연장 개장한다. 또 이 기간 동안 금천구 벚꽃십리길도 장관을 이룬다. 벚꽃 축제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한국관광공사는 3월 말∼4월 초부터 벚꽃이 만개하기 시작하면서 전국 곳곳의 꽃놀이 명소를 소개했다. 경남 창원 진해는 벚꽃 축제의 명소 중 명소로 꼽힌다. 4월 1∼10일 진해군항제를 기점으로 중원로터리, 여좌천, 진해내수면환경생태공원, 장복산 공원, 안민도로, 경화역, 제황산 공원, 해군사관학교 등 도시 곳곳을 벚꽃이 뒤덮을 것으로 전망된다. 제주에서는 4월 초 벚꽃이 만개할 것으로 보인다. 꽃잎이 크고 화사한 왕벚나무의 원산지답게 4∼6일 제주종합경기장 부근에서 열리는 제주왕벚꽃축제를 필두로 전농로, 제주대학교 진입로 등 곳곳에서 꽃망울이 터진다. 전남 순천에서는 송광사의 벚꽃 터널이 유명하다. 고속도로에서 송광사길로 접어들어 주차장까지 이어지는 10㎞ 구간에서 꽃비가 쏟아진다. 송광사 삼거리에서 주차장까지 이어지는 2㎞ 구간은 산책로로도 좋다. 전북 익산에도 곳곳에 벚꽃 명소가 숨겨져 있다. 보석박물관, 함벽정, 왕궁리 유적지, 송천마을, 함라산임도산책로 등이 가볼만 만하다. 충북에서는 충주호 주변을 따라 벚꽃이 줄지어 핀다. 4월 11∼13일 열리는 충주호봄나들이한마당을 전후해 푸른 물빛을 벚꽃이 새하얗게 물들인다. 18∼20일 열리는 수안보 온천제에서는 온천욕과 벚꽃놀이를 함께 즐길 수 있다. 또 대구에서는 달성군 옥포로가 세갈래 벚꽃길로 변신한다. 두류공원과 화원유원지, 인흥마을, 마비정 벽화마을, 대구수목원, 옛 구암서원 등도 명소다. 아울러 강원 강릉 경포호는 호수 주변을 따라 벚꽃이 만개하는 4월이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때로 꼽힌다.
- 2014-03-2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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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은 벚꽃의 계절…전국 꽃놀이 명소는
- 바야흐로 벚꽃의 계절이다. 전국이 벚꽃에 잠겨 본격적인 봄의 시작을 알리는 때다. 남에서 북상하는 벚꽃의 경로를 따라 축제 분위기도 고조된다. 벚꽃에 묻힌 향락객들의 발길이 바빠지고, 그 발길 속에서 약간은 들떤 듯한 기대감 같은 것에도 빠져든다. 한국관광공사는 3월 말∼4월 초부터 벚꽃이 만개하기 시작하면서 전국 곳곳의 꽃놀이 명소를 28일 소개했다. 경남 창원 진해는 벚꽃 축제의 대명사다. 4월 1∼10일 진해군항제를 기점으로 중원로터리, 여좌천, 진해내수면환경생태공원, 장복산 공원, 안민도로, 경화역, 제황산 공원, 해군사관학교 등 도시 곳곳에서 벚꽃이 눈송이처럼 흩날린다. 서울에서는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호젓한 꽃길이 펼쳐진다. 가지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수양 벚꽃이 특징으로, 벚꽃 행사가 열리는 14∼20일엔 저녁 9시까지 연장 개장한다. 제주에서는 4월 초 벚꽃이 만개할 것으로 보인다. 꽃잎이 크고 화사한 왕벚나무의 원산지답게 4∼6일 제주종합경기장 부근에서 열리는 제주왕벚꽃축제를 필두로 전농로, 제주대학교 진입로 등 곳곳에서 꽃망울이 터진다. 전남 순천에서는 송광사의 벚꽃 터널이 장관을 이룬다. 고속도로에서 송광사길로 접어들어 주차장까지 이어지는 10㎞ 구간에서 꽃비가 쏟아진다. 송광사 삼거리에서 주차장까지 이어지는 2㎞ 구간은 산책로로도 좋다. 전북 익산에도 곳곳에 벚꽃 명소가 숨겨져 있다. 보석박물관, 함벽정, 왕궁리 유적지, 송천마을, 함라산임도산책로 등이 가볼만 만하다. 충북에서는 충주호 주변을 따라 벚꽃이 줄지어 핀다. 4월 11∼13일 열리는 충주호봄나들이한마당을 전후해 푸른 물빛을 벚꽃이 새하얗게 물들인다. 18∼20일 열리는 수안보 온천제에서는 온천욕과 벚꽃놀이를 함께 즐길 수 있다. 대구에서는 달성군 옥포로가 세갈래 벚꽃길로 변신한다. 두류공원과 화원유원지, 인흥마을, 마비정 벽화마을, 대구수목원, 옛 구암서원 등도 명소다. 강원 강릉 경포호는 호수 주변을 따라 벚꽃이 만개하는 4월이 1년중 가장 아름다운 때로 꼽힌다.
- 2014-03-28 0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