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힐튼 헤드 섬(Hilton Head Island)이 은퇴자의 천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골프 애호가라면 PGA투어 RBC 헤리티지대회가 매년 열리는 아름다운 하버타운 링크스코스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힐튼 헤드 섬은 미국의 은퇴자들이 좋아할 요소를 거의 다 갖추고 있다.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고 눈이 거의 오지 않는 온화한 기후는 한파에 시달리는 뉴욕, 보스턴 등 도회지의 은퇴자들에게는 큰 매력이다. 30도를 넘는 여름 더위가 9월까지 이어지기는 하지만 수온은 수상 스포츠에 최적이다. 저녁이면 선선해지니 휴식과 숙면을 취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고즈넉한 대서양 해변과 하얀 요트가 즐비하게 정박된 마리나와 야자수가 어우러진 항구의 전경은 숨 막히게 아름답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넓게 펼쳐진 바다, 하얀 모래와 맑고 깨끗한 습지 그리고 이끼로 뒤덮인 울창한 떡갈나무 숲은 대자연이 주는 은퇴기념 선물이며, 넉넉한 남부 인심은 은퇴자들에게 기를 불러 넣어주는 활력소다. 눈부신 햇살 아래 짭짤한 갯바람을 맞으며 160㎞에 달하는 자전거 도로를 달리고, 30여 개 골프 코스에서 라운딩을 하다보면 인생 후반기의 허무감은 어느새 충만감으로 바뀐다.
카약, 승마, 테니스, 낚시 등 갖가지 스포츠와 취미활동은 힐튼 헤드 섬의 주요 일과다. 19㎞에 걸쳐 펼쳐진 해안을 따라 무리지어 유영하는 돌고래를 유람선을 타고 관찰하며 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붉은바다거북의 산란을 위해 해변의 조명을 모두 끌 때면 자연과의 일체감을 맛보게 된다. 저지대 늪지에서는 새우와 게를 쫓아다니는 푸른 왜가리와 큰 입을 딱 벌리고 햇볕을 쬐는 악어를 만나는 놀라움도 있다.
맨해튼(여의도의 30배)만한 넓이의 힐튼 헤드 섬에서는 4만여 주민이 오순도순 지내지만 해마다 250만 명의 외지인이 찾아와 한가하고 여유로운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쇼핑 환경도 맨해튼 수준이다.
특가 상품에서부터 디자이너 브랜드와 특별한 사람에게 선물할 독특한 기념품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200여 개의 아웃렛과 상점, 그리고 6곳의 마리나 빌리지 상가는 주민뿐 아니라 관광객의 눈길과 발길을 끌고 있다.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자동차로 5시간, 사바나에서 45분(57㎞) 거리에 있는 힐튼 헤드 섬은 큰 다리로 내륙과 연결되어 있어 여객선이 다니지 않는 섬이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이나 사바나국제공항에서 항공편을 이용하면 이동시간을 줄일 수 있다. 미국 동부 연안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힐튼 헤드 섬은 원래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따뜻한 기후와 야자열매, 풍부한 해산물을 즐기던 곳으로 1663년 영국의 윌리엄 힐튼 선장이 처음 이 섬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힐튼 헤드’라고 명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섬의 73%가 은퇴자를 위한 주택단지
힐튼 헤드 섬의 73%는 10개의 대단위 리조트형 주택단지가 차지하고 있다. 이 주택단지 가운데 상당수는 매입 자격을 55세 이상의 신중년으로 제한하고 있다. 대부분 단지에는 관리사무소를 중심으로 실내외 수영장, 피트니스센터, 테니스장, 연회장, 식당 등이 갖추어져 있고 호수와 숲, 골프 코스와 마리나가 인접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섬에 정착한 은퇴자들은 평균 6차례 이상 방문하여 생활환경을 체험한 후 주택을 매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웃과 격이 없이 지내는 이 섬의 분위기를 느끼고 썰물 때면 90m나 밀려나 숨겼던 민낯을 드러내는 갯벌을 산책하면서 돌고래가 수영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게 된다.
이 섬의 지난해 주택매매 가격은 단독주택의 경우 52만달러, 타운하우스와 아파트는 20만달러 수준. 침실과 화장실이 각 2개인 아파트는 20만~40만달러, 단독주택은 25만~45만달러, 그리고 침실과 화장실이 각 3개인 주택은 40만~70만달러를 호가한다. 바다 경치가 아주 좋은 주택은 150만달러를 훌쩍 넘고 700만달러를 호가하는 그림 같은 주택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6개월 정도만 빌려 살아볼 수 있는 아파트도 구하기 어렵지 않다. 스튜디오형은 월 평균 600달러, 침실 1개짜리는 800달러, 침실 2개짜리는 900달러 수준이다. 성수기인 여름철에는 며칠만 빌릴 경우에도 임대료가 치솟는다. 침실 1개인 주택이나 아파트도 전망이 좋으면 1주에 1200~1800달러, 해변을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면 1000~1200달러 정도다. 봄과 가을에는 20% 정도 할인되고 겨울에는 50%나 싸진다. 2억달러 넘게 투입해 새 단장을 한 리조트의 하루 방 값은 일반형 기준으로 130~340달러 수준이다.
주거비가 웬만한 휴양지나 은퇴자 생활지보다 비싸지만 주거비를 포함한 생활비 총지출은 맨해튼의 50%, 워싱턴이나 보스턴의 75% 수준을 넘지 않는다. 재산세가 다른 지역의 25% 수준인 데다 소득세, 소비세 등 각종 세율이 낮고 85세 이상의 주민에게는 더 낮은 세율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자동차보험과 휘발유 값이 저렴한 것도 수월찮게 도움이 된다. 이 지역 주민들 가운데는 현역 시절 주택을 구입해 별장처럼 이용하다가 은퇴 후 눌러앉은 사람도 적지 않다. 세컨드 주택을 구입하면 세제 및 금융 혜택이 있는 데다 에어앤비를 비롯한 휴가용 주택 알선 사이트가 붐을 이루면서 목 좋은 곳의 별장은 재테크 수단이 되었다.
미국 남부 사람들이 테러보다 더 무서워하는 것이 허리케인이다. 힐튼 헤드 섬 주민들은 1850년 이후 섬 주변 반경 80㎞ 이내로 81차례의 허리케인이 지나갔지만 큰 피해를 입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는 전설을 믿고 있다. 천혜의 지형 덕분인지 주민들의 후덕한 인심과 간절한 소망 덕분인지 알 수가 없다.
각양각색의 취미활동 그리고 평생교육도
힐튼 헤드 섬에서는 축제와 이벤트가 풍성하다. 해마다 열리는 다양한 뮤직 페스티벌, 해산물 축제, 고기잡이 경진대회, 카약과 보트 경주 등은 주민과 관광객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자리다.
멋을 살린 음악 카페, 길거리 밴드,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지어진 건물이 늘어선 메이 강변에 각종 포장마차와 공예품 전시판매점까지 어우러지면서 남부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16㎞ 떨어진 블러프턴의 소도심에서는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고 남북전쟁 때의 화재와 파괴를 견뎌낸 대농장주의 저택과 교회는 박물관과 관광안내소로 활용되고 있다. 수백 년 된 거대한 나무와 옛 건물은 그림엽서로도 간직되고 있다.
은퇴자들의 취향은 제각각이다. 요트, 카약, 낚시 등에 빠져 있는 ‘해양스포츠파’, 생태관찰 보존과 식물 재배에 몰입한 ‘에코파’, 골프, 사이클, 테니스와 달리기 등을 주로 하는 ‘육상스포츠파’, 공예품 만들기, 독서, 해변 일광욕, 흔들의자 등을 즐기는 ‘정중동파’ 등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봉사활동과 평생교육은 이곳 은퇴 생활자들의 공통된 일과다. 해안사구와 야생동물 서식지 보호에서부터 노약자 서비스, 도서관 운영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자원봉사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과 협력관계를 맺은 오셔평생교육원은 1600명의 은퇴 생활자들을 대상으로 400여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1년 회비 40달러에, 수업료는 과목당 15달러. 모두 다 합쳐 연간 95달러를 넘지 않게 책정되어 있다. 선생과 학생이 따로 없다. 자신의 전공분야를 가르치고 관심 분야를 배운다. 학습을 하다가도 기분이 내키면 밖으로 나가 현장학습에 들어간다.
미국의 주요 언론과 관련 전문매체의 힐튼 헤드 섬 예찬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2015년 최고의 은퇴 생활지’, ‘인생을 바꿀 건강한 봄철 휴가지’, ‘하계 모임을 위한 남부 최고의 장소’, ‘2016년 북미지역 최고의 골프 휴가지’, ‘캐롤라이나 남부 최고의 사이클 친화지역’, ‘미국 남부 5대 하계 가족휴가지’, ‘세계 50대 테니스 휴양지’, ‘미국 최고의 섬’, ‘인터넷 검색이 가장 많은 섬’, ‘사우스캐롤라이나 최고의 해변’, ‘2015년 세계 최고의 여행목적지’ 등등. 이런 찬사 덕분에 이 지역 은퇴 생활자들의 만족감은 더 커지고 있다.
발트 3국으로 불리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지 않은 나라다. 멀게만 느껴지고 접근이 어려울 것 같은 이 세 나라는 실제로 접해보면 매력이 넘친다. 이 중 으뜸은 에스토니아다. ‘발트 해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수도 탈린은 유럽에서도 가장 잘 보존된 중세 도시 중 하나다.
글·사진 이신화(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덴마크 왕이 만들어낸 성채 도시 ‘탈린’
“탈린은 꼭 가봐. 아름다운 도시야.” 발트 3국을 여행하겠다는 필자에게 여행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순전히 편리한 이동을 위해 정한 버스터미널 근처 숙소의 스태프는 친절하다. 교대로 바뀌는 중년 여성 스태프들은 한결같이 영어를 잘한다. “일찍부터 영어를 배워서.” 순조로운 언어 소통은 여행하는 데 아주 편리하다. 달랑 탈린 교통카드만 사서 여행하기로 한다. 묻지도 않았는데 “충전해서 또 쓰면 돼”라고 매표소 중년 여성은 친절을 보인다. 이 생애에는 다시 오지 못할 에스토니아.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네 나라를 각인시켜주고 있다.
발트 3국은 발트해 남동 해안에 위치해 있다. 예로부터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8세기부터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 ‘소련’의 일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앞선다. 20세기 들어 1918년을 기점으로 발트 3국은 각각 독립해 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다 1940년 또 소련에 합병되었다가 1990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 영향으로 1991년 8월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는 가난을 면치 못하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제 여행할 때는 그런 느낌을 받지 않는다.
발트 해의 핀란드 만 연안에 있는 항만도시인 탈린은 뱃길이 발달되어 이웃하고 있는 ‘잘사는’ 스칸디나비아 국민들이 많이 찾아온다. 그래서인지 탈린은 생각보다 많이 세련되어 있다.
탈린은 1219년,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가 에스토니아인들이 만든 성채 자리를 성으로 삼은 데에서 시작되었다. 탈린(Tallinn)이라는 이름도 ‘덴마크인의 도시’라는 뜻을 갖고 있다.
유럽에서도 가장 잘 보존된 중세 도시 중 하나로 ‘발트 해의 여왕’이라고 불린다. 보존이 잘된 이유엔 ‘안 좋은 기후’가 한몫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은 초토화하기 위해 탈린에 접근했다. 그날 안개가 많이 끼어 도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전투기는 발트 해에 폭탄을 쏟아붓고 돌아갔다. 이런 경우를 놓고 전화위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올드타운의 저지대는 상인과 서민의 옛 중세 분위기
탈린의 여행 시작은 구 시가지(old town)의 진입로인 쌍둥이 비루문(Viru Gate)에서 시작된다. 비루문은 올드타운으로 들어가는 6개 문의 하나로 1355년에 세워졌다. 원래는 성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파괴되고 현재 쌍둥이 탑만 남아 있다. 올드타운은 그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이 성곽으로 이어져 있는데 뿔 모양의 붉은 탑만 해도 46개. 일일이 세어볼 필요 없고 애써 구획을 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보고 느끼면 된다.
반질반질한 조약돌이 박힌 좁은 골목길에는 옛 향기가 물씬 배어 있다. 특히 카타리나(Katariina) 골목엔 중세 분위기가 여전하다. 13세기에 지어진 건축물이 많은 골목 자체로도 훌륭한 관광 상품이 된다. 골목 벽에는 중세기에 만들어진 듯한 석조물이 부서진 채로 남아 있다. 러시아 점령 시기에 러시아 군들이 세워놓은 안내 팻말에도 눈길이 간다. 입으로 유리를 불고 있는 그림 숍은 유리공예품을 전시해 팔고, 생선이 그려진 식당 앞에서는 메뉴판과 가격을 헤아려보게 된다. 오래되었다는 입간판이 달린 카페 앞에서 ‘커피 한잔 마실까’ 하며 어색하게 실내를 기웃거려본다. 손뜨개 상점 앞에 서 있는, 눈송이 스웨터를 입은 큰 인형을 보면 사고 싶은 욕망에 지갑을 만지작거린다. 똑같이 생긴 세 개의 건물이 눈길을 잡아끈다. ‘세 자매(15세기 건축물)’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은 현재 호텔로 이용되고 있다.
가장 넓은 시청사 광장(Raekoja Plats)은 여러 번 맞닥뜨리게 된다. 올드타운의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1406년에 세워진 시청사는 현재 콘서트홀로 쓰이며 고딕 첨탑에 오르면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오래전 시청사 근처를 저지대 거리라고 했다. 주로 상인과 일반인들이 이용했다. 성 올라프 교회(St. Olav’s Church), 각종 길드들의 회관, 카페, 식당들이 밀집되어 있다. 특히 이 광장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마기스트라트(Magistrat) 약국이 있다. 1422년 문을 열어 한 집안이 10대에 걸쳐 운영하고 있다. 약국 간판에는 징그러운 뱀 형상이 있다. 관광객들은 이 오래된 약국에서 약 사는 것보다 그저 구경하기에 여념 없어 보인다.
일찍도 찾아온 한겨울 어둠 사이로 거리 악사는 영화 주제가를 연주한다. 그 음률은 시청사 넓은 광장에 애달프게 퍼진다. 향수병에 젖은 여행객은 악사의 트럼펫 선율을 따라, 가로등 불빛을 따라 함께 부유한다.
영주나 귀족들의 영역, 토옴페아 언덕
저지대를 걷고 나면 으레 고지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토옴페아(Toompea) 언덕이라고 불리는데, 거의 영주나 귀족들이 살았다. 이곳은 두 개의 골목으로 연결되어 있다. 짧은 다리라는 뜻의 ‘뤼히케 얄그(Luhike Jalg)’와 긴 다리라는 의미의 ‘픽 얄그(Pikk Jalg)’ 거리다. 언덕배기에는 19세기에 세워진 알렉산드르 네브스키(Alexandr Nevsky) 성당이 있다. 겉모습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이 성당은 에스토니아인의 자존심을 건드린 건축물이다. 러시아인들은 에스토니아 최고 권력기관인 리이키코쿠(Riigikogu) 의회 앞에 보란 듯이 러시아 성당을 지은 것이다. 에스토니아 의회는 스웨덴 점령기부터 모든 주요 결정이 이뤄진 의사당이었다. 의회 옆으로는 집회 장소인 토옴페아 성이 있고 1233년에 세워진 루터교 성당 토옴키리크(Toomkirik)는 현재 길드 유물 전시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 외 18세기 귀족의 저택에 세워진 에스토니아 미술박물관, 1475년경에 높고 견고하게 세워진 탑, 키에크-인-테-셰크(Kiek-in-de-Kok) 등이 있다. 무엇보다 고지대에 서면 탈린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이리저리 장소를 옮겨가면서 조망하면 된다.
길을 따라 탈린 항 쪽으로 내려가면 16세기 탈린을 방어하던 요새 중 하나인 ‘뚱땡이 마가렛(paks margareeta)’ 성벽이 보인다. 1592년에 바다를 지키는 포탑으로 세워졌는데 성 안에는 감옥이 있었고 그 감옥의 교도관이 뚱뚱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해양박물관으로 이용된다. 공원을 지나 복잡한 도로를 건너면 탈린 항으로 이어진다. 항구 쪽에서 더 위쪽으로 가면 발트 해변(Lennusadam Seaplane Harbour)을 볼 수 있다.
시간이 있다면 발틱 역(Baltic Station) 맞은편에 서는 러시아식 재래시장을 찾으면 된다. 앤티크 제품부터 채소, 과일, 생필품까지 50여 개 상점이 문을 여는데 탈린 시내와는 전혀 다른 옛 소련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또 로카 알 마레(Rocca al Mare) 야외 박물관은 한적한 여정은 물론 시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발트 해를 가까이 산책하면서 호젓한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가는 길목에는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큰 쇼핑센터가 있다.
표트르 대제의 흔적 남은 카드리오르그 공원
또 하나 탈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구 시가지에서 동쪽, 약 2㎞에 있는 카드리오르그(Kadriorg) 공원이다. 울창한 숲과 호수가 조성되어 있어 산책하기에 좋은 곳. 이 공원은 18세기 제정 러시아 시절, 표트르 대제가 두 번째 부인인 예카테리나 1세를 위해 조성했다. 이 공원에는 바로크 양식의 카드리오르그 궁전이 있다. 이 궁전은 1718년에서 1736년 사이에 이탈리아인 니콜로 미케티(Niccolo Michetti)의 설계로 건축되었으며 표트르 대제 자신이 직접 벽돌 3장을 쌓기도 했다고 전해온다. 표트르가 이곳에 성을 쌓은 이유는 모스크바에서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를 하고 당시 해상무역의 중요성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탈린은 유럽 진출의 요충지였다.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궁전 내부에는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러시아의 16~19세기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 표트르가 건축 당시 거처했던 조그만 오두막집은 표트르의 개인 박물관이 됐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기에 좋은 공간이다. 해설사가 설명도 해준다.
그 외 건물 형태부터 현대적인 쿠무(Kumu) 미술관이 있다. 2006년에 문을 연 에스토니아 최대의 미술관으로, 2008년 ‘올해의 유럽 박물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다양한 예술품들을 접하는 공간이다.
이수호 여행 작가 (52개국 200도시 방문. 현직 여행기자 겸 작가) lsh5755@naver.com
◇ 일본 규슈 오이타 온천 투어
벳푸(別府)는 후쿠오카에서 차로 3시간 내외에 자리한 온천 마을이다. 이 지역의 2800개가 넘는 원천에서 분출되는 하루 온천 수량만 해도 자그마치 13만7000킬로미터다. 일본 전역의 온천 도시를 통틀어서 가장 많은 수치인데, 이것만 보더라도 벳푸는 온천의 천국으로 불릴 만하다.
벳푸 온천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지옥순례’에 참여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뜨거운 증기가 시도 때도 없이 뿜어져 나와 지옥(지고쿠)이라고 불렸다. 증기 온도에 따라 붉은색, 푸른색, 흰색 등을 띠며 색깔에 따라 바다지옥·스님지옥·피지옥 등 총 9개의 테마로 구분한 것이 특징이다. 한쪽에는 몸에 좋은 유황온천물에 족욕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발을 담가보자. 온천수로 익힌 달걀을 함께 까먹는 동안 즐거운 수다 삼매경이 펼쳐진다. 족욕탕 바로 옆에는 온천수를 직접 마실 수 있는 음수대가 있는데, ‘10년은 젊어진다’는 문구를 봤다면 온천수 한 잔을 안 마시고는 못 배긴다.
구로가와 역시 오이타(大分) 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온천 마을이다. 일본의 오랜 전통을 계승한 24개의 명품 노천 온천이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는 마을로, 성분이 각기 다른 온천수가 10종류 이상 솟아올라 ‘온천 백화점’이라는 별명도 지니고 있다. 200년~300년이 넘은 장수 료칸(旅館)이 대부분. 구로가와의 온천수는 나트륨과 유황이 많아 피로 해소는 물론 피부 미용에도 큰 효과가 있다. 그래서일까. 이곳은 일명 ‘미인탕’으로도 불리는데, 유독 여성 여행자들에게 높은 지지를 받는다.
오이타 현의 유후인(由布院)은 완만한 산세의 유후 산이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맑은 온천수가 사시사철 샘솟는 마을이다. 규슈 온천 여행으로 유명한 작은 마을이지만, 특유의 전통 공예 또한 남다르다. 유후인 거리 곳곳 개성 넘치는 공방과 미술관이 가득한데, 마치 우리나라의 인사동처럼 아기자기한 공예품과 추억을 선사한다.
메인 거리를 지나면 긴린코(金鱗湖) 호수에 닿게 된다. 바람도 숨죽이는 이곳은 해 질 녘 호수 위로 뛰어오른 물고기들이 금빛으로 보인다고 해서 ‘황금 비늘 호수’라는 뜻의 긴린코라고 불린다. 긴린코 호수는 바닥에서 차가운 지하수와 뜨거운 온천수가 동시에 흘러나오는 것이 특징. 특히 새벽녘 차가운 공기와 함께 어우러진 물안개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호숫가에 자리한 료칸에 머물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 물안개를 감상해보자. 긴린코 호수가 보여주는 쇼에 한동안 말을 잃을지도 모른다.
김 현 (전 KBS 연구실장, 여행연출가)
김현·조동현 부부의 '특별한 부부여행 코스' 네 번째 -「미국 서부 LA~샌프란시스코」
미국은 땅이 넓기 때문에 기차보다는 차를 렌트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특히 미국 서부는 경치가 기가 막히게 좋아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차를 직접 운전해 찬찬히 둘러볼 것을 추천한다. 우리 부부는 LA부터 시작하여 시애틀까지 올라갔다 내려왔지만, LA에서부터 샌프란시스코까지만 가는 것으로도 볼거리가 충분하다. 미국 서부를 돌기 위해서는 1번 도로와 101번 도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1번 도로는 순전히 해안을 끼고 도는 해안 도로이고, 101번 도로는 말 그대로 Freeway다.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려면 당연히 1번 도로를 이용해야겠지만, 좀 피곤할 수도 있으므로 101번 도로와 번갈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하여 샌타바버라, 솔뱅, 롬폭, 샌루이오비스포, 몬트레이, 패블비치 그리고 마지막으로 존 스타인벡의 도서관이 있고 영화 과 의 배경이 된 샐리너스를 거쳐 태평양 연안 제2의 도시인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는 것이 미국 서부 여행의 루트이다.
금문교와 케이블카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인들에게 일생 중 가장 가고 싶은 도시로 뽑힐 만큼 인기 있는 도시다. 샌프란시스코에도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유니온 스퀘어에 있는 ‘골드 더스트’가 그곳이다. 이곳은 과거 골드러시 시절 금광을 찾으러 온 사람들의 술집에서부터 시작됐는데, 100년 역사를 간직한 고풍스런 술집이다. 그곳에서 아내와 함께 ‘싱가폴슬링’을 한잔했는데, 그 맛도 맛이지만 바텐더의 친절함에 반했던 기억이 난다. 갑자기 우리 테이블로 종이비행기 하나가 날아왔는데, 알고 보니 바텐더가 계산서를 종이비행기로 만들어 손님들에게 날린 것이다. 그 기발함과 센스라니. 이렇듯 여행이란 소중한 추억을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는 일이리라.
또 미국 서부에 가면 반드시 봐야 하는 대표적 관광지 둘이 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과 레이크 타호.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요세미티 국립공원 안에는 빙하기 동안 빙하에 깎여 평평하게 된 암벽과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하프돔(Half Dome)이 있다. 하프돔은 말 그대로 돔이 반이 잘려나간 화강암 돔이다. 레이크 타호는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의 주 국경선에 걸쳐 있는 호수인데, 이 또한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얼마나 큰가 하면 비행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다다를 즈음 기장이 날개를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여 가면서 “여기가 레이크 타호입니다”라고 안내멘트를 해주는데,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데도 육안으로 확인 가능할 정도이다. 이색적인 건 미국은 비행사들도 승객들에게 관광을 시켜준다는 것이다. 그만큼 세계적 명소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는 의미일 수 있겠다.
10여년 전 여름, 한 사내가 한과 공장의 사무실 안에서 비닐 봉투에 든 상추 잎사귀 수십 개를 늘어놓고 살펴보고 있었다. 공장 인부들은 기이한 그의 행동이 이상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내가 사장인 탓에 모두 바라만 볼 뿐이었다. 매번 그런 식이었다. 그의 열정은 남들과는 다른 결과를 불러왔고, 그래서 그는 한과에 미친 한과광인(韓菓狂人)으로 불리기도 했다. 나라에서는 그런 그를 명인(名人)으로 부르기도 했고, 한과명장(韓菓名匠)이란 칭호도 부여했다. 한과문화박물관 김규흔(金圭欣·60) 관장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자취방 집주인의 강권에 나간 맞선자리. 찻집에서 만난 상대는 체구가 자그마한 아가씨였다. 그런 그녀가 신문지에 싼 무엇을 그에게 수줍게 내밀었다. 약과였다. 서울 월곡동에서 한과 공장을 하던 부모 몰래 싸온 것이었다. 처음부터 불타오른 사랑은 아니었지만, 만날 때마다 내미는 약과 뭉치는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게 하는 용매 역할을 했다.
경상북도 영덕의, 한과가 귀했던 작은 바닷가 마을 출신의 청년 김규흔에게 약과는 무척 달콤한 것이었다. 매달 나오는 월급을 아끼려고 크림빵 하나에도 큰맘 먹어야 했던 그에게 그 약과는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김규흔 관장은 어릴적 한과와의 추억을 이렇게 기억한다.
“어릴 적 한과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집안에 제사가 있거나 명절 때에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어서, 시장통에서 산 약과나 넓적한 한과, 빨간 옥춘 사탕이 전부였죠. 때때로 배가 아플때 할머니께서 약이라며 과자를 물려 주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한과가 발효식품이라서 그 장점을 체득해서 아셨던 것 같아요.”
한과공장을 하던 처가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그의 운명 속에 한과가 등장하게 만들었다.
“공장을 맡아 운영하던 처남이 군대를 가게 되자, 처가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죠. 그래서 다니던 제약 유통회사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을 해 보니, 한과가 사업성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친 듯이 다른 분야에서 일을 했던 제 눈에 한과 만드는 사람들은 너무 대충 일하는 것 같았어요. 제 계산으로는 검은깨를 하루에 2~3가마는 볶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걸리 마시랴, 담배 태우느라 겨우 1가마만 볶는 식이었죠. 그런데도 대목을 지나면 다들 목돈을 만지던 시기였어요.”
그렇게 한과 시장에 눈을 떠가던 즈음, 처남이 제대해 그의 설 자리가 줄어들었다. 3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셈이 밝았던 그에겐 충분한 준비시간이었다. 그래서 아내와 직원 한 명만을 데리고 월곡동에서 조금 떨어진 월계동에 공장을 차렸다. 성공한 회사를 보니 모두 궁(宮)이나 왕(王)자가 들어간다는 것에 착안에 회사 이름은 ‘신궁(新宮)’으로 지었다. 1981년의 일이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거래처를 확보하는 일이었어요. 다들 큰 공장 눈밖에 날까봐 소규모 업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죠. 오랫동안 어렵게 안면을 익히고, 신용을 쌓은 후에야 좌판 아래에 한 두 박스를 숨겨두고 몰래 팔아주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중부시장 같은 큰 시장 대신 월계동, 이문동, 장위동, 석관동을 돌면서 구멍가게에 외상 거래를 했죠. 자전거에 박스를 싣고 직접 돌았습니다.”
그의 성공의 원동력에는 이런 성실함과 함께 남과 달라야 한다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남들과 다르게 만들어야 팔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죠. 시장을 휘어잡던 큰 회사들은 늘 만들던 대로 만들어도 쉽게 팔아치울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요. 보통은 국화 모양으로 만들던 것을 코스모스, 연꽃, 해바라기, 무궁화 무늬로 바꾸어 만들었습니다. 약과판(藥果板)의 도안부터 제작까지 제 손으로 직접 했습니다.”
제대로 된 디자인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던 청년사업가였지만, 그에게는 사방 천지가 교실이고 교과서였다. 외화와 함께 외국 문물이 폭발적으로 밀려들어오던 시절, 거리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낮에는 배달하는 자전거에서, 늦은 밤 귀가길 버스 차창 너머로 만나는 세상은 한과 생각으로 가득찬 그에게 다양한 도형과 화려한 색상의 영감을 불어넣었다.
이런 노력이라도 알아본 것일까. 하늘이 도와줬다. 1984년 한과시장의 대목인 추석을 앞두고 마포구 망원동에 물난리가 났다. 그 주변에 밀집돼 있던 한과들이 한강물에 쓸려 내려가 버리자, 시장에 물량이 동이 났다. 덕분에 한과 시장 큰손들에게 외면받던 신궁전통한과가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고, 그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들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상인들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가장 신경썼던 것은 신용이었습니다. 매년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 역시 일종의 신용이었죠. 상인들이 신제품을 기대하도록 만들고, 거래처들이 다른 상인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는 무기를 쥐어주려 노력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의 흔적은 그가 2008년 건립한 한과문화박물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무로 직접 만들던 약과틀을 주조방식을 활용해 금속으로 대체하고, 대량 생산을 위해 원형 틀을 만들었던 기록들은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한과문화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것들은 한과의 역사이자 그의 역사인 셈이다.
앞서 언급한 ‘상추 실험’도 답습을 거부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그의 성향을 잘 나타내는 일화 중 하나다.
“보통 한과 공장들은 여름에 문을 닫았어요. 1년 매출의 90퍼센트 정도는 설과 추석에 모두 팔려나가기도 하고, 매출이 적은 여름에 한과를 만들어봤자 상해서 돌아오는 것들을 반품받기 바빴으니 아예 생산 자체를 거절한 것이죠. 거래처용으로 돌리는 스티커에 여름에는 만들지 않는다는 문구를 박아 넣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여름에도 한과를 만들고 유통시키고 싶어, 포장부터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다양한 포장지를 놓고 가장 빨리 시드는 상추로 실험을 했던 것이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핵심은 ‘산소투과율’에 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제대로 알았지만, 모든 공장들이 사용하는 포장재질은 한과를 쉽게 상하게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했다. 그리고 유통기간 6개월이라는 혁신적인 한과를 시장에 내놓았다. 이후에는 한국식품연구원에 연구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쌀겨에서 추출한 ‘감마오리자놀’을 한과에 첨가해 기름의 산화를 막고, 신선도를 유지하는 기술을 특허로 인정받기도 했다.
신궁전통한과가 궤도에 오르면서 그가 찾은 곳은 대학이었다. 1995년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시작으로 11개 대학원을 쉬지 않고 다녔다.
“대학원서 유통의 변화와 혁신을 미리 체험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통시장이 쇠락하고, 편의점이나 백화점, 대형마트 중심의 유통체계가 도입될 것이라는 것을 배워 대비할 수 있었죠. 늘 우리 것을 따라한 미투상품(모방한 유사제품)으로 괴롭히던 한과공장 사장이 자기네 제품을 유통시켜 달라고 제게 사정할 때 통쾌하기도 하면서,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2013년에는 대학 학부에 대한 미련 때문에 신흥대학 호텔조리학과에 입학해 작년 2월 졸업했다. 아들보다도 어린 학생들과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었다. 웬만한 교수보다도 많은 나이에 사회적으로 알려진 터라 손가락질이 무서워 대충대충 할 수 없었다. 이 과정은 한과의 세계화를 위한 과학적 지식과 계량화 등의 바탕이 됐다.
김규흔 관장의 한과에 대한 사랑의 집약체는 역시 한과문화박물관이다. 포천 산정호수 인근에 지어진 이 박물관을 한 번 둘러보면 그의 한과에 대한 철학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박물관에 체험을 위한 공간이 많은 것이 인상적이라 하니 반색하며 설명한다.
“맞습니다. 경험을 통해 아이들이 한과를 체득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어릴적 입맛이 평생을 간다고 믿기 때문에, 아이들이 한과를 외면하면 시장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때문에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전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 볼 수도 있고, 맛볼 수도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박물관을 바탕으로 한과 전문가 교육과정을 만들어 인력 배출에도 앞장섰다. 한과 만드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시장이 커지고, 활성화된다는 생각에서다.
“태권도가 세계적 스포츠가 된 것도 결국 태권도 선수들이 세계 각지에서 교육을 통해 그 정신을 보급했기 때문이죠. 한과도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과 전문가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7년 동안 300명의 전문가를 배출했습니다. 또 박물관 주변에 군부대가 많아 간부 가족을 대상으로 한과 교육을 진행했는데, 한미연합사령부로 전출 간 장교를 통해 미군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까지 진행한 적도 있습니다. 사람을 통해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맞아 떨어진 셈입니다.”
그가 한과를 만들어 오며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도 2000년 서울에서 열린 ASEM(아시아-유럽 정상회의)에서 세계 정상들에게 그의 한과를 맛보게 한 것이다. 이런 세계화의 끝에는 한과의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있다. 한과를 단순한 음식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그의 뜻이 담겨 있다.
“한과는 우리 민족의 얼이 담겨 있는 음식입니다. 차례와 제사, 명절 때마다, 우리네 희로애락(喜怒哀樂)과 늘 함께하면서 우리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죠. 조선시대에는 한과의 종류가 254종이나 됐습니다. 그중 지금 저희가 재현하는 것이 160가지 정도 되고요. 이런 풍성한 문화를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작년 한과협회를 사단법인으로 설립했고, 올해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해 나갈 계획입니다.”
김 관장의 말을 듣다보니 멋진 외국 호텔의 디저트로, 세계 과자들이 모여든다는 일본의 답례품(미야게, みやげ) 시장에서 우리의 한과가 자리 잡을 날이 머지않았음을 기대하게 된다.
백제는 삼국 중 한반도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을 차지한 복 받은 나라였다. 그러나 가장 먼저 망했다. 왜 그랬을까?
백제 땅은 고구려, 신라는 물론, 중국, 왜와도 교류할 수 있는 한반도 서남 요지였다. 북으로 고구려라는 강국이 있었지만 고구려는 대부분의 시기 중국의 위협에 대항하느라 여념이 없어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절 중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백제를 크게 위협하지 못했다. 약체인 신라는 백제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양국 간의 전쟁에서 백제가 대부분 공세를 취했다. 황해는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백제를 보호하는 안보의 장벽이 되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교통로였다. 멸망 당시 호수(戶數)도 76만호로, 고구려 69만호보다 많았다. 역설적이지만 이 축복이 백제 멸망의 원인이었다. 경제적 풍요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여건 속에서 백제는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안보불감증에 빠졌다고 하겠다.
6세기 이후 대외관계에서 백제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동맹외교의 실패도 백제가 제일 먼저 범한다. 백제는 때때로 중국에 접근해서 고구려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개로왕은 472년 당시 분열되었던 중국의 최대 강국인 북위(北魏)에 표문을 보낸다. 장수왕 시대이니 고구려의 남진을 우려한 것이다.
개로왕은 “지금 고구려를 거두지 않는다면 앞으로 후회를 남기게 될 것”이라면서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부추긴다. 그리고 ‘마음과 힘을 다해’ 호응하겠다고 다짐한다. 자신의 딸을 보내 후궁에서 비질을 하게 하고 아들은 바깥 마구간에서 말을 기르게 할 것이라는 등 비굴한 언사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북위가 백제의 요청을 거부하자 개로왕은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끊어버렸다.’ 요즘 식으로 “아니면 말고”라면서 “그럼 관두자”고 한 것이다.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동맹의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한 행위는 동맹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큰 실책이었다. 동맹관계는 강대국이 주도하며 약소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강대국을 유도하는 데에는 엄중한 한계가 있다는 점을 백제는 잊은 것이다. 개로왕의 편지는 단기적으로는 3년 뒤 이를 구실로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하여 개로왕을 죽인 비극으로, 장기적으로는 백제의 파멸로 이어진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삼국통일 이전 시기 삼국은 모두 중국을 상대로 치열한 외교전을 벌인다. 조공 사절의 파견이라는 기준에서는 어느 한 나라가 특별히 열성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589년 수(隋)가 중국을 통일하자 백제는 고구려보다 1년 빨리 사절을 보내 수가 진(陳)을 평정한 것을 축하한다. 수는 백제의 계속된 조공에 대해 “해마다 조공할 필요는 없다”면서 ‘흡족히’ 여겼다. 백제 무왕이 죽자(641) 당 태종은 현무문에서 애도식을 행했는데, 훗날 가장 친당적(親唐的) 인물로 알려진 신라 무열왕 김춘추가 죽었을 때 당이 보여준 조문 형식과 같은 것이다.
백제는 598년 수가 요동에서 고구려와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풍문을 듣고 수에 사신을 보내어 길잡이가 되기를 자청한다. 개로왕이 북위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요청한 것을 반복한 것이다. 그런데 수 문제(文帝)는 “고구려를 토벌하려 했으나…이제 용서했다”면서 침공을 보류했음을 알린다. 이 역시 북위의 답신과 비슷하다. 이 말을 전해들은 고구려가 ‘고깝게 여겨’ 백제의 국경을 침공한 것도 동일하다. 백제는 성장하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적으로 만든 것이다.
백제는 607년 수에 고구려 토벌을 또다시 요청하고 침공 1년 전인 611년에는 군사일정을 묻는다. 그런데 수가 실제로 고구려를 침공하자 백제는 ‘국경의 군비를 엄중히 하고 수를 돕는다고 공언했으나, 실제로는 두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백제는 고구려와도 ‘몰래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양다리’ 작전을 펼친 것이다. (신라도 611년 수에 군사를 청했다.)
당이 고구려를 침공하던 645년에도 백제는 군사는 보내지 않고 황금색으로 옻칠한 쇠 갑옷을 당 태종에게 바쳤다. 체면치레만 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가 ‘당을 돕기 위해 군사 3만을 출병시킨 틈을 타서’ 신라의 성 7개를 습격하여 빼앗는다. 백제의 신라 공격은 고구려-백제 간에 협력관계가 발동된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백제는 중국에게 계속 고구려를 비난하고 있었다.
백제의 자의적인 외교행태에 비해 신라는 왕실 자제나 고위 관리를 수-당의 조정에 보내 우호적 기반을 다진다. 650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한다고 지원을 요청하지만 당이 실질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아도 끈질기게 기다리면서 정책 변화를 주시하다가 당이 고구려를 침공하자 군대를 보내 지원하는 성의를 보인 것이다.
‘국가이익’과 ‘국제신의’라는 문제는 국제정치의 오랜 딜레마이다. “국가에게는 친구가 없으며 단지 이익만이 있다”는 말은 영국이 유럽에서 세력 균형정책을 정당화한 논리이다. 대외정책의 최종 결정자는 몰인간적인 국가가 아니라 국가라는 조직체를 통치하는 군주, 대통령, 총리와 같은 인간이다. 이들은 국익이라는 틀에서 어려울 때 지원한 상대국의 신의도 주요한 고려사항으로 꼽는다.
신라는 고구려-당 전쟁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당에 대해서 신의를 지켰다. 당 태종이 고구려 전선에서 패퇴하여 귀국한 후 ‘요동 전역(戰役)’을 돌이켜볼 때 어떤 기분을 가졌을 것인가는 자명하다.
당은 고구려에 패한 이후 삼국 문제를 한반도의 삼국 관계라는 ‘국지적(local)’ 차원이 아닌 ‘요동문제’라는 ‘지역적(regional)’ 차원이라는 더 큰 틀에서 검토하면서 그들의 정책 수행에 도움이 될 국가가 누구인가 검토하는데, 이때 당의 신라 선택은 당연한 것이었다.
백제의 흥망을 대외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동맹에 살고 동맹에 죽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신라와의 나-제동맹이 운용된 시기에 백제는 안전했고, 이 동맹이 약화하면서 그 대안으로 통일제국으로 등장한 수와 당에 접근하지만 실패하여 망했다고 하겠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아름다움’은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정의가 필요치 않은 것은 기본이 충만할 때다.
스위스의 전 지역에 대한 평가는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치 않다. 스위스는 가는 곳마다 ‘아! 너무 좋다’, ‘이 도시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 아름다움 속에서 살아온 덕분일까? 스위스 사람들은 여행객들에게 한결같이 친절을 베풀어 준다. 보드라운 속살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다가와 상대를 배려한다.
>>글 이신화 여행작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베른에서 만난 아인슈타인
필자는 알프스를 기대고 있는 프랑스 남부의 안시(Annecy)에서 국경을 벗어나 제네바(Geneve)에 도착한다. 제네바의 레만 호수에는 하늘 높이 분수가 솟구치고 있다. 롤렉스 간판들, 거리의 꽃시계 등이 시계의 나라임을 다시 인식시켜 준다. 주마간산으로 도심을 돌아보고 베른(Bern)으로 장소를 이동한다.
스위스의 수도, 베른은 가을비에 촉촉하게 젖었다. 수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작다. 기차역 주변 말고는 인적도 뜸해 번잡한 구석을 찾을 수 없다. 숙소에서 준 대중교통 프리 티켓도 필요치 않다. 그저 작은 소읍의 풍치를 걸어 다니면서 보면 된다. 베른은 스위스 최초로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구 시가지의 골목에는 유럽에서 가장 긴 아케이드가 이어진다. 베른 도시가 생성됐던 12세기 후반에 지어지기 시작해 16세기 중반에 완성된 건물들이다.
그 건물에는 저장고 형태의 반 지하 상점이 늘어서 있다. 엇비슷한 건물 형태에 잠시 길을 잃을라치면 그럴 때마다 이 도시의 시계탑이 랜드마크 역할을 해준다. 시계탑은 감옥탑 이전에 베른의 출입구 역할을 했던 곳. 매시 정각 4분 전, 곰들과 광대들이 나와 춤을 추는 시간. 그 즈음이면 관광객들은 고개를 외로 꼬고 있다. 아랑곳하지 않고 시계탑 아래로 버스들이 오간다.
그것 말고도 자꾸만 시선과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은 다양한 테마로 만들어진 인형과 석조물이 아우러진 작은 분수들. 거기에 가는 곳마다 만나는 곰 형상들. ‘베른’이라는 이름 자체가 도시를 세운 체링겐 가문이 곰 사냥을 해서 시작됐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뉘데크 다리 건너편에는 곰 공원도 있다.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미공원 가는 길목이라서 으레 발길을 멈추지만, 왠지 어설프기만 한 곰 공원에 배시시 웃음 짓는다. 그 외 스위스 최대의 고딕양식 건물인 대성당(높이 100m)과 국회의사당 등이 포인트다.
욕심 없이 베른 시가지를 배회하다가 한 유명한 인물을 만난다. 아인슈타인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이 많을 텐데 왜 베른에서는 거대한 아인슈타인 박물관을 만들었을까? 아인슈타인과 베른은 어떤 연계가 있을까? 아인슈타인은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취리히 공과대학을 다녔고 베른에 온 것은 직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력은 어느 곳에서나 많이 나오니까 생략하기로 하고 흥미로운 사적인 삶을 들여다보자.
아인슈타인은 취리히 공과대학 동창으로 상대성 이론 논문 작성을 거들었던, 첫 아내 밀레바 마리치와 결혼했다. 그가 결혼해 살았던 아파트는 구 시가지에 ‘아인슈타인 하우스’로 남아 있다. 그런데 역사박물관에서 더 자세하게 아인슈타인의 사생활을 엿보게 된다. 그의 첫사랑은 물론이고 그가 사랑했던 마지막 사랑까지 소개되어 있었다. 오직 연구만 하는 ‘샌님’이라는 고정관념이 확 깨지는 순간이었다. 아인슈타인에게는 몇 명의 여자가 있었던 것일까? 아인슈타인은 결혼생활 16년 만에 이혼했다. 이혼 사유는 아인슈타인의 간통이었다. 이혼 위자료는 아직 타지도 않은 노벨상의 상금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혼 후, 달랑 넉 달 만에 내연의 관계였던 사촌 엘자 뢰벤탈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바람기는 재혼 후에도 잠들지 않아 평생 비서와 유부녀, 소련의 여성 스파이 등 여러 명의 연인을 두었다. 더불어 그는 아이들도 살갑게 돌보지 않았다. 밀레바와 혼전에 얻었던 딸은 출생 이후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혼 후에는 두 아들과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둘째 에두아르트는 아버지가 가족을 버렸던 일을 평생 용서하지 않아 두서없는 원망의 편지들을 보내곤 했고, 결국에는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쳤다. 아인슈타인은 1932년 히틀러 집권 3주 전에 아슬아슬하게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미국에서도 생활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하여튼 유명인들의 ‘가십(gossip)은 오랫동안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젊은 처녀의 어깨’라는 융프라우 요흐에 올라
베른에서 기차로 툰(Thun)호수 - 스피에츠(Spiez) - 인터라켄(Interlaken)까지 40분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융프라우 요흐((Jungfrau Joch, 3454m)까지 오르려면 산악열차를 타야 한다. 시작점은 인터라켄의 동역(Ost)이다. 동역에서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까지 올라가 다시 열차를 갈아타면 북벽 아이거 바로 밑 동네인 클라이네 샤이덱(Kl Scheidegg, 2061m)에 멈춘다. 이곳은 융프라우 정상과 그린델발트(Grindelwald, 1034m)로 가는 열차가 두 갈래로 나뉘는 환승역이다. 만년설을 가득 덮고 있는 위풍당당한 아이거 북벽이 우뚝 서 있다. 설산을 눈앞에 두고 마을 길 따라 1~2시간 정도 트레킹을 즐긴다. 가까스로 오르내리는 산악열차와 넓은 초지에 펼쳐지는 야생화, 햇살과 시간에 따라 바뀌어가는 산 그림자, 그림 같은 집들, 작은 호수, 레포츠를 즐기는 사람 등. 그 아름다움의 매력은 군더더기 말이 필요치 않다.
이 마을을 비껴 융프라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악열차에 오른다. 아이거와 묀히의 암반을 뚫고 설치한 톱니바퀴 레일은 총 9.3㎞. 1896∼1912년 건설되었으며, 최대경사도 25도의 압트식(Abt-System)으로 오르는 데 50분이 걸린다. 열차를 내려서는 그저 화살표만 따라가면 된다. 레스토랑도 있고, 초콜릿을 직접 만들어 판매도 하고 한 조각 선물도 준다. 얼음궁전(Ice Palace)을 관람한 후 통로를 따라 나가면 900m 두께의 눈밭, 플래토(Plateau)에 도착한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스핑크스 전망대(3571m)가 있다. 북동쪽에는 묀히와 아이거, 남동쪽에는 알레치 빙하, 남쪽에는 알레치호른, 더 멀리에는 몬테로사 산이 있다. 하지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기상 때문에 온전한 풍치를 보는 일은, 순전히 운에 맡겨야 한다. 결국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클라이네 샤이덱 주변에 펼쳐지는 풍광과 그린델발트 마을을 에둘러 봤으니 충분히 행복한 여정이다.
◇007 촬영지, 쉴트호른의 길목 마을, ‘뮈렌’ 아름다워
융프라우보다 느낌이 더 좋은 곳은 쉴트호른(Schilthorn, 2970m)이다. 라우터브루넨(806m)을 기점으로 찾아가야 한다. ‘울려 퍼지는 샘’이란 뜻을 가진 라우터브루넨은 정말로 아름다운 산골 마을이다. 247m의 슈타우프바흐 폭포를 비롯해 70여 개의 폭포가 연이어 높은 암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1749∼1832)는 1779년, 이곳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낭만파 음악가 멘델스존(1809∼1847)은 폭포 앞에서 괴테와 함께 그림을 그리며 보냈다. 시인 바이런(1788∼1824)도 이 폭포에 시를 남겼다.
폭포를 지나 마을 농장 길을 따라 4㎞ 정도 걸어가면 쉴트호른 케이블카를 타는 곳이다. 5~6번 정도 정차와 운행이 반복된다. 특히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산비탈을 등지고 사는 뮈렌(Murren, 1650m)이라는 마을은 그림 같이 아름답다. 고요할 정도로 조용한 고산 마을, 거칠고 척박한 높은 산봉우리 속에서도 화사한 꽃 화분으로 예쁘게 꾸미고 가꿀 줄 아는 사람들. 이 마을에 어찌 반하지 않겠는가? ‘이 높은 곳에서 뭐 먹고 살지?’ 하는 한국식 사고가 부끄러워지는 마을이다.
쉴트호른 전망대는 융프라우하고는 다르다. 터널이 아닌 시원한 야외 공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융프라우 요흐를 비롯해 묀히와 아이거 봉우리 3개가 한눈에 들어온다. 또 이곳은 유명한 시리즈 영화인 007 촬영장소로 활용되어 마치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재미도 준다. 전망대의 식당(피츠 글로리아, Piz Gloria)’은 야외 풍경을 보면서 즐기라고 뱅글뱅글 움직이고 있다. ‘007 제6탄-여왕 폐하 대작전’에서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식사한 곳에서 주인공인 것처럼 파스타를 먹는다. 분명코 융프라우만 보고 왔다면 반쪽 여행만 하게 되는 꼴이 될 것이다.
◇귀족, 부자들이 만든 휴양도시, 생 모리츠
한국 여행객 대부분이 융프라우 다음으로 가는 곳은 루체른(Luzern)이다. 필자는 루체른을 거쳐 생 모리츠(ST.Moriz)로 향한다. 스위스 여행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열차 여행이다. ‘Express’라는 이름으로 열차 관광 상품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중 빼어난 명품 열차가 베르니나(Bernina) 익스프레스다. 베르니나는 스위스를 가로질러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오래된 산악 열차다. 2008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열차 코스가 있다. 투시스(Thusis) ~ 생 모리츠(61.6㎞, 알불라 라인), 생 모리츠 ~ 티라노(Tirano)(60.6㎞, 베르니나 라인)를 합친, 122㎞ 구간이다.
이 열차 구간에 생 모리츠가 있다. 생 모리츠는 스위스 동쪽 끝 부분인 그라우뷘덴(Graubunden) 주의 엥가딘(Engadin)산맥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세계적인 휴양도시다. 스위스에서는 가장 일조량이 많다. 365일 중 320일이 맑은 마을. 그래서인지 생 모리츠에 도착하면 ‘그 맑음’에 눈이 부시다. 이 마을에는 예로부터 이름난 명사(코코샤넬 등)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스위스가 관광산업을 시작했을 때 돈 많은 영국 귀족들이 유서 깊은 호텔을 세웠고 스위스에서 가장 먼저 전기를 끌어들인 곳도 바로 생 모리츠다. 봅슬레이가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당시엔 영국 귀족들의 스포츠였다고 한다. 그 흔적들이 생 모리츠에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을은 고산을 기대어 터전을 잡았고 그 중간에 호수가 있다.
가파른 언덕이 있는 도르프(Dorf)와 온천이 모여 있는 바트(Bad), 두 마을로 이뤄져 있다. 도르프란 독일어로 ‘마을’, 바트는 ‘온천’이라는 뜻인데, 예로부터 온천으로 유명해 붙여진 이름이다. 호화로운 호텔과 부호들의 별장이 즐비하고, 류머티즘이나 심장병에 효험이 있다는 온천 근처에는 리조트도 들어서 있다. 그저 휴양도시라서 오래된 문화유적도 없다. 긴 역사의 흔적도 없다. 마을에 짙게 내린 가을 풍치와 산정의 겨울 풍치를 보면서 호숫가를 에돌아보면 된다. 흰 설국이 된다면 더 멋질 것이며, 이 도시는 엄청나게 북적거릴 것이다. 생 모리츠를 벗어나면서 자꾸만 미련이 남는다. 너무 아쉬워서 베르군(Bergun, Bravuogn) 역에 내려 한참이나 시간을 소요했다.
또 취리히로 나오는 길목에서는 ‘마이엔펠트(Maienfeld)에서 하룻밤을 유했다. 이 마을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배경이 된 곳. 이 마을에는 하이디와 할아버지가 살았던 집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박물관이 있다. 조용한 스위스의 시골마을에서의 하룻밤. 와이너리가 유난히 많은 이 마을의 호텔 바에 앉아 와인 잔을 기울인다. 동네사람들만 왁자하게 떠들던 그날 밤, 여행객의 상념은 깊어간다. 왜 스위스를 떠나는 게 이리도 힘이 드는 것일까? 단지 고국 떠난 여행객의 짙은 외로움만은 아니었으리라.
교통편 한국에서는 취리히 공항을 경유하는 게 일반적이다. 또 파리,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각지에서 열차가 수시로 연결된다. 취리히 공항에서 베른까지는 1시간 단위로 열차가 오간다. 각 여행지 선택은 다음 일정에 의해 결정하면 된다. 생 모리츠는 이탈리아와 인접해 있고, 베른, 제네바는 프랑스와 통한다.
현지 교통 정보 스위스는 철도가 발달된 도시. 대부분 기차로 이동하면 된다.
스위스 카드 구입하기 스위스 패스는 아주 유용하다. 카드마다 특전이 다르므로 선택을 잘 하는 것이 좋다. 패스를 이용하면 열차는 물론 포스트버스 등 대중교통 대부분을 이용할 수 있으며 케이블카 할인, 박물관 무료 등 혜택이 많다.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다면 날짜에 맞는 카드를 구입하면 된다. 또 스위스 철도는 유레일패스로도 이용할 수 있지만 할인 적용이 다르다. 열차 시간표는 홈페이지(www.rhb.ch)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운행 시간은 유럽 전역에서 아주 정확하다.
대표 음식들 퐁뒤(Fondue)가 있다. 기본적으로 긴 꼬챙이 끝에 음식을 끼워 녹인 치즈나 소스에 찍어 먹는 요리다. 18세기 초 알프스의 사냥꾼들이 사냥 중 모닥불에 치즈를 녹여 마른 빵을 부드럽게 적셔 먹은 것에서 유래했다. 또 초콜릿이 유명하니 선물용으로 구입해도 좋다.
숙박정보 스위스는 우리나라에 비해 환율이 높다. 비싼 호텔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값싼 호스텔을 이용하면 된다. 융프라우나 쉴트호른을 가려면 으레 라우터브루넨을 경유해야 한다. 라우터브루넨의 작은 마을의 밸리 호스텔(Valley Hostel)은 편하게 잘 되어 있다. 생 모리츠는 휴양지라서 숙박 가격이 비싼 편. 유스호스텔을 이용하면 아주 좋다. 스태프들이 친절하고 음식이 아주 맛이 좋다.
화폐단위 유로 대신 스위스 프랑을 쓴다.
언어문제 스위스 인들은 노인층까지도 영어를 잘 구사한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아 관광 안내소에는 한국어로 된 팸플릿도 있다.
유의할 점 여행 떠나기 전, 융프라우에 대한 정보는 많이 복잡할 수 있다. 미리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현지에 가면 관광체계가 잘되어 있다. 역에 가서 목적지만 말하면 그들이 알아서 표를 끊어준다. 한국에서는 할인 티켓을 프린트해 가는 게 좋다. 또 여행 중 농장의 철조망을 유의해야 한다. 전류가 흐르고 있어서 가까이 가면 감전의 우려가 있다.
9월의 초가을 햇살이 따갑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중국의 문장 가운데, 가을 햇살을 노래한 글로서는 소동파의 가 가장 유명하다. 이 는 소동파가 그의 친구였던 조영치(趙令?)가 안정군왕(安定郡王)에 봉해졌을 때, 가난한 농민들의 삶과 애환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지어 준 글이다. 글 내용을 발췌해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조(越)나라에 현공자(賢公子)라는 왕손(王孫)이 있었는데…. 동파거사(東坡居士)에게 말하길, “내 마음은 가을볕(秋陽)처럼 밝게 빛나고 내 기운은 가을볕처럼 엄숙하고 맑습니다…. 대저 이 가을볕을 즐기며 부(賦)를 쓸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라고 물었다.
동파거사가 웃으며 말하길, “공자께서 어찌 가을 햇살을 아신단 말입니까?… 저같이 고생을 해본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가을햇살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름이 와서 장마가 지면, 구름이 김 오르듯 끼고 비가 흩뿌리니 이윽고 벼락이 쳐서 큰비가 내리면 강물이 범람하여 강과 호수가 하나되고, 땅의 신(神)인 후토(后土)도 수몰(水沒)되는 듯, 배가 성곽(城郭)까지 다니고, 물고기가 방안까지 들어올 지경입니다. 밥그릇마다 곰팡이가 들어차고, 개구리와 지렁이가 방석과 돗자리를 돌아다니니, 밤잠을 자다가도 습기를 피해 잠자리를 다섯 번 옮길 지경이며 낮에는 옷을 말리는 데도 세 번 장소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괴롭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부족합니다. 삼오(三吳)지역에 한 뙈기의 논을 손수 경작해 보십시오. 곡식이 맺히나 영글지 않고, 벼가 이삭이 패나 진흙탕 속에서 뒹굴어야 합니다. 논둑은 툭하면 터져 도랑과 교통(交通)하고, 담벼락은 뚫리거나 무너지기 일쑤입니다. 벽을 칠하다가 칠이 떨어져 얼굴은 항상 얼룩덜룩하며, 젖은 땔감을 때느라 매운 연기로 인해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솥은 항상 비어 있고, 사방에는 항상 근심만이 가득합니다. 황새와 학만이 처량하게 정원에서 울고, 아녀자들은 저녁 늦게까지 깊은 한숨 내쉬며 먹을 식량이 얼마나 남았는지 세느라, 평생토록 옷가지에는 신경 쓸 틈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홀연히 밤하늘에 뭇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등심지가 길게 맺히기 시작합니다. 서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처마의 풍경을 울리기 시작합니다.”
노비(奴婢)가 기뻐 고(告)하길 “비가 그칠 상서로운 조짐이 있습니다” 하니,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 하늘을 보며 헤아리매 장경성(長庚星) 별빛이 담담(澹澹)히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태양이 동쪽 양곡(暘谷)에서 떠서 서쪽 부상(扶桑)으로 지는 한나절 동안, 눈 깜박할 사이에 긴 해 그림자가 마루기둥을 길게 덮습니다. 이 같은 가을이 오면, 마냥 좋아서 취하여도 깬 것 같고, 벙어리도 입을 열 것 같고 앉은뱅이도 일어나 걸을 것 같습니다. 이 수확의 계절을 맞는 그 기쁨은 고향땅에 돌아가 부모와 형제를 처음 뵐 때 같으니, 공자께서 이 같은 기쁨이 있으십니까” 라고 물었다.
이 문장의 ‘方夏?之淫也, 雲烝雨泄(여름이 와서 장마가 지면, 구름이 김 오르듯 끼고 비가 흩뿌리니…)’로 시작되는 표현은 여름철 장마에 따른 농민들의 애환을 그린 절절한 표현으로, 천여 년의 세월을 격하고도 마치 눈에 보이듯 가슴에 와 닿는 명문으로 꼽히는 문장이다.
‘한반도 북방계 식물의 뿌리를 찾아본다’는 거창한 구호와 함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2015년 7월 14일부터 8월 2일까지 외교부와 코레일이 공동 주관하는 ‘유라시아 친선특급’에 참여한 것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 다시 모스크바에서 베를린까지 2612km, 총 1만1900km의 거리를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19박 20일간의 대장정에 나서며 우선은 차창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시베리아 숲으로 들어가 식생을 관찰하겠다는 나름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분단된 조국에서 살아온 탓에 한나절 이상의 열차 생활을 해본 경험조차 없어 20일 간의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는 미지의 여행길이었지만, 야생화와의 만남은 시작부터 대박이었습니다. 저녁 9시 35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밤새 어둠을 달린 열차가 시베리아 벌판에서 첫 여명을 맞을 즈음 차창에선 이미 분홍색 꽃물결이, 열차에서의 첫 밤을 설친 이방인의 잠을 저만치 쫓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국내의 경우 강원도 태백 지역이 남방한계선으로 대관령 등 몇몇 지역에서 수십에서 수백 포기 정도 자생하는 게 전부인 분홍바늘꽃이 철로와 자작나무 숲 사이 풀밭에 간단없이 피어 시베리아 횡단 철길 내내 꽃물결을 이루다니, 과연 북방계 식물의 텃밭임을 실감했습니다.
국내에 자생하는 4종의 바늘꽃 가운데 바늘꽃과 돌바늘꽃은 흰색의 꽃도 작고 키도 1m 미만으로 작은 데 반해, 분홍바늘꽃과 큰바늘꽃은 키도 1.5m 안팎으로 클 뿐더러 꽃색도 분홍색으로 화려한데, 둘 다 북방계 식물입니다. 꽃이 진 뒤 맺는 씨방이 바늘처럼 길다고 해서 바늘꽃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겨울에는 이른바 ‘설국열차’라 불릴 만큼 철로 좌우가 눈으로 뒤덮인다면, 여름에는 분홍바늘꽃을 비롯한 숱한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야생화 천국입니다. 남한에서는 이미 멸종되고 북한 일부 지역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진 좁은잎해란초와 애기황새풀, 바이칼꿩의다리 등이 역시 쉴 새 없이 철길 좌우에서 얼굴을 내밉니다.
블리디보스토크를 떠난 열차가 4일 만에 바이칼 호숫가로 들어섭니다. 바다처럼 넓은 바이칼 호를 열차가 다가섰다 멀어졌다 반복하는 사이 동은 트고 새벽 햇살을 받은 분홍바늘꽃이 푸른 물결을 배경으로 출렁입니다. 달리는 열차에서 흔들리는 가운데 담은 분홍바늘꽃 사진이 오히려 수채화처럼 멋진 분위기를 선사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짝사랑하듯 멀리서 바라만 볼 수는 없는 일. 마침 이르쿠츠크에서 내린 ‘유라시아 친선특급’ 원정대가 바이칼 호수 인근의 ‘건축-인류학 박물관 딸지’를 둘러보는 사이 호숫가 숲으로 달려가 푸른 물결을 배경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분홍바늘꽃을 카메라에 담는 데 성공했습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여정은 옛말을 깨닫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날 무렵 한창 피어나던 분홍바늘꽃이 어딘가부터 다소 시들해 보이더니 열흘쯤 지나 모스크바를 지날 무렵부터는 분홍의 꽃 색을 잃고 옆구리에 기다란 씨방을 잔뜩 달고 서 있는 게 어느덧 황혼을 느끼게 합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분홍바늘꽃이 피고 지는‘한여름 밤의 꿈’을 경험하는 색다른 여정이었습니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확산의 여파로 감염병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하지만 메르스와 같은 신종 감염병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감염병에는 예방법이 있다. 적절한 시기에 예방백신을 접종하고 면역력을 높이면 더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중앙대학교병원 감염내과 정진원 교수와 함께 감염병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봤다.
감염병, 너무도 포괄적인 개념인데 쉽게 설명한다면?
우리 인체에도 많은 바이러스가 살고 있고, 대부분의 바이러스가 인체에 들어와도 큰 해를 끼치지 못한다. 면역 체계가 작동해서 병이 발병하기 전에 퇴치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면역이 약해져 있거나 독성이 강한 바이러스가 침투했을 때 감염증상을 보이게 된다.
여기서 잠깐,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 바이러스라는 예를 들었던 것이고 사실은 더 큰 개념에서 생각해야 한다. 세균, 스피로헤타, 리케차, 진균, 기생충 등 다양한 병원체로 인해 감염병이 발병한다.
전파 양상은 어떠한가?
전파되는 경로는 다양하다. 메르스처럼 접촉이나 비말감염으로 전파되는 경우도 있고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과 같이 성교나 수혈과정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말라리아, 뇌염,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 등은 모기를 매개체로 전파된다. 병원체를 보유한 동물이나 사람의 피를 빨아먹은 모기는 건강한 신체의 피를 빨면서 병원체를 체내에 침투시키게 된다. 인플루엔자(독감)는 병원체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 호흡과 함께 인체에 침투한다.
신중년이 특히 주의해야 할 감염병은?
면역력이 약해지는 시기에는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세 가지 감염병이 있다. 폐렴, 대상포진, 인플루엔자(독감)다. 문제는 예방접종을 하는 등의 관리가 안 되면 신체에 큰 타격을 준다는 점이다. 가볍게 생각했던 독감이 원인이 돼 사망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면역력이 떨어진 시기에는 항상 주의해야 한다.
폐렴, 대상포진, 인플루엔자의 원인과 예방법은?
우리나라 사망원인 중 6위인 폐렴은 주로 ‘폐렴사슬알균’으로 인해 감염된다. 이 균은 급성 중이염, 패혈증, 뇌수막염 등을 흔히 일으키고, 중증 감염의 경우 환자의 사망률도 매우 높다. 그러나 폐렴사슬알균 백신을 통해 감염을 예방할 수 있다. 65세 이상이라면 누구나 1회 접종하는 것이 좋다. 65세 이전의 접종자는 65세 이후에 5년 경과 후 추가로 접종하면 된다.
대상포진은 어렸을 때 감염된 수두바이러스가 몸 안 신경 속에 숨어 있다가 성인이 된 후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다시 활성화되어 수두처럼 반점이 생기는 병이다. 하지만 중년 이후가 되면 발병률이 상대적으로 높아지게 된다.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는 것이 특징이며, 드물게 시각 손실이나 난청 등의 심각한 후유증이 생기기도 한다. 60세 이상에게 1회 접종을 권하고 있다.
인플루엔자(독감)는 누구나 앓는 호흡기 감염증이지만, 암환자나 만성질환이 있는 노약자는 폐렴을 부르는 원인이 되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65세 이상 연령층에서는 위험성이 더욱 높다. 매년 가을에 인플루엔자 백신을 맞는 것이 좋다.
면역력 증가를 위한 해법은?
면역력 증가를 위해서는 먼저 면역력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요인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면역력이 떨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스트레스’라고 말할 수 있다. 개별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아들이는 강도의 차이가 있는 만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규칙적인 생활과 꾸준한 운동이 가장 수월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매일 30분 정도 가벼운 걷기 운동을 빼먹지 않고 하는 것이 좋다.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지키기 위해 손쉬운 방법임에는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스트레스 완화에도 도움이 된다. 또 면역력 증대를 위해 제철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는 게 좋다. 육류와 채소류를 적절히 혼합해 먹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8월 제철음식으로는 토마토, 블루베리, 전복, 참나물, 고구마 등이 있다.
풍토병이라는 말이 없어지는 추세다. 그렇다면 해외여행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은?
해외여행을 할 때 일반적으로 필요한 감염병 예방백신은 A형 간염, 장티푸스, 수막알균, 수두, 홍역-풍진-볼거리, 광견병, 황열, 폴리오 등이 있다. 이들 예방 백신은 여행하고자 하는 나라에 맞춰 병원에서 적절한 상담을 통해 사전에 접종이 가능하다.
실제로 중앙대병원을 포함해 대다수 종합병원은 여행의학클리닉을 운영하고 있으니 이를 이용하는 게 좋다. 통상 여행 출발 4~6주 전 병원의 여행의학클리닉을 미리 방문, 전문의사와의 상담과 건강검진을 하게 되는데, 건강검진은 단기 여행인 경우 기본적인 검사가 시행되고, 장기 체류인 경우 정밀종합건강검진을 할 수 있다.
건강검진의 결과, 여행 목적지, 여행 기간에 따라서 예방 접종, 각종 질환 및 주의사항에 대한 설명 및 안내서, 여행자 상비약 처방, 영문 진단서(필요한 경우)등을 발급 받고, 귀국 후 발열 등 건강 이상 발생 시 후속 진료를 받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을 갈 때, 어떤 예방접종이 필요한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중남미 지역을 여행할 때 도시를 벗어나거나 장기 체류할 경우 장티푸스 예방 백신 접종을 하고 여행 전 말라리아 약을 복용해야한다. 이들 지역에서 동물과 접촉이 많을 것이 예상되는 경우나 한 달 이상 장기간의 여행을 하는 경우에는 광견병 예방접종을 하는 것이 좋다. 홍역이나 수두에 면역이 없는 경우에도 이에 대한 접종 또는 추가 접종을 해야 한다. 특히 유럽이나 미국, 사하라 사막 이남의 중부 아프리카 지역이나 중동의 시골지역을 여행 또는 장기 체류하는 경우나 게스트하우스, 유스호스텔 같이 여러 사람이 같이 쓰는 숙소를 이용하는 경우 수막구균 백신을 접종하는 것이 좋다. 이들 예방 백신은 접종을 하고 3~4주쯤 지나야 병에 대항하는 항체가 최고치에 도달하기 때문에 해외여행 전 서둘러 접종을 할 필요가 있다.
해외여행 감염병 예방 건강수칙
1. 해외여행 전에 반드시 여행의학 전문가를 찾아 풍토병에 대한 상담 및 예방접종과 예방약(말라리아, 장티푸스, A형 간염, 파상풍 등) 처방을 받는다.
2. 여행 중 곤충기피제를 사용하고 긴소매 복장 등으로 벌레나 모기에물리지 않도록 주의한다.
3. 설사약과 해열제 등 여행용 상비약품을 준비한다.
4. 끓인 물이나 상품화한 물을 먹는다.
5. 현지 음식은 익힌 음식으로 잘 골라 먹어야 한다
6. 맨발 등 상처나 노출에 주의한다.
7. 강, 호수 등에서 수영이나 목욕을 하지 않는다.
8. 성관계 등 오염된 체액에 접촉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 감염내과 전문의 정진원
현 중앙대 의대 교수, 2012~2013 미국 메이요클리닉(Mayo Clinic) 교환교수 근무
대한내과학회 정회원, 대한감염학회 정회원, 대한화학요법학회 정회원
대한병원감염관리학회 정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