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 한국농구의 살아 있는 전설, 김영기(金英基)

기사입력 2016-01-28 16:02:52기사수정 2016-01-28 16:02

변화와 혁신을 통해 재미있는 농구경기 만들다

중·장년 스포츠 팬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스포츠의 매력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동대문운동장(축구장·야구장·테니스장·수영장)이나 효창운동장 그리고 리모델링을 하기 전 장충체육관 등에 가면서 스포츠의 세계로 들어섰을 수도 있고 국제대회에 출전한 우리나라 선수들의 활약상을 라디오 중계방송을 통해 듣게 되면서 스포츠의 매력에 끌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다니는 학교에 운동부가 있어 응원에 동원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스포츠에 익숙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글쓴이는 두 번째 사례에 든다.

▲2015년 1월 8일 서울 잠실실내보조체육관에서 자유투 연습을 하는 KBL 김영기 총재. <사진제공 KBL>
▲2015년 1월 8일 서울 잠실실내보조체육관에서 자유투 연습을 하는 KBL 김영기 총재. <사진제공 KBL>

1960년대 중반, 강원도 신철원군 갈말면 지포리에 있는 신철원국민학교에 다니던 아이는 라디오 중계로 1964년 도쿄 올림픽 복싱 정신조와 사쿠라이(뒷날 스포츠 기자가 된 뒤 당시 자료를 살펴보고 사쿠라이 다카오라는 ‘풀 네임’을 확인했다)의 밴텀급 결승전 경기, 그리고 1964년과 1965년 캐시어스 클레이(뒷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와 소니 리스턴의 프로복싱 세계 헤비급 타이틀매치 등을 들었다. 그 아이는 물론 글쓴이다.

그런데 중학교 때 이 아이는 이번 호의 주인공인 김영기(金英基) 때문에 또 다른 스포츠의 매력에 빠졌다.

현직 프로농구연맹(KBL) 총재인 김영기는 배재고~고려대를 거쳐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국가대표를 지냈다. 김 총재는 화려한 드리블로 대표되는 뛰어난 개인기로 농구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김 총재는 1965년 은퇴한 뒤 직장 생활 틈틈이 박정희장군배 동남아시아여자농구대회, 미국프로농구(NBA) 등 각종 경기의 해설을 맡아 선수 시절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밀워키 벅스와 같은 NBA 구단 이름이나 오스카 로버트슨, 빌 러셀 등 1960년대 NBA 스타플레이어의 이름을 김 총재의 해설로 알게 됐다.

김 총재는 각종 기록을 근거로 특정 팀 간 승패는 물론 예상 스코어까지 내놓아 농구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요즘 같으면 스포츠 통계 회사에서 컴퓨터로 할 일을 거의 반세기 전에 수작업으로 한 것이다. 특히 1967년 서울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때는 이 같은 예상이 족집게처럼 들어맞아 농구 팬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KBL 센터에서 공을 들고있는 KBL 김영기 총재. <사진제공 KBL>
▲서울 강남구 논현동 KBL 센터에서 공을 들고있는 KBL 김영기 총재. <사진제공 KBL>

김 총재의 해설은 그의 선수 시절 경기력만큼이나 뛰어났다.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 일화를 스포츠 기자가 된 뒤 김 총재에게 이야기했더니 김 총재는 “우연히 맞혔을 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제는 폐간된, 2000년대 초반 스포츠 팬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스포츠 2.0’은 배재고등학교 시절 김영기를 “179㎝의 키, 가냘픈 체구였지만 리드미컬한 드리블, 요즘 더블 클러치라고 하는 이중 모션과 아마도 한국 농구 사상 처음일, 한 손 슛을 던지는 선수”라고 설명했다.

한국 남자 농구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이어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 1936년생인 약관의 김영기가 출전했다. 한국 농구의 경기력이 세계 수준에 크게 못 미쳐 출전 15개 나라 가운데 14위에 그쳤지만 우승국 미국의 빌 러셀 같은 뛰어난 선수들의 플레이와 선진적인 전술을 본 것은 뒷날 지도자 김영기에게 큰 공부가 됐다.

김영기는 1964년 도쿄 대회에 두 번째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당시로는 노장인, 우리나라 나이 29세 때였다. 1960년대 후반, 지도자와 선수로 힘을 모아 한국 남자 농구의 1차 전성기를 이끌게 되는 신동파가 20세로 대표팀의 막내였다. 이 대회에서도 한국은 세계의 벽을 실감했다. 출전 16개국 가운데 꼴찌에 그쳤다. 개최국 일본은 10위에 올랐다. 이 무렵 한국 남자 농구는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필리핀과 일본에 이어 3위를 하는 등 아시아권에서도 3위 안팎의 실력이었다.

농구인 김영기의 진가는 은퇴 이후 더 빛났다.

김영기는 33세 때인 1969년 11월,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팀 코칭스태프에 합류했다. 보직은 코치였으나 실질적인 사령탑이었고 대표 선수들 가운데 김영일, 김인건, 신동파 등은 선수 생활을 함께한 직계 후배들이었다. 9개 나라가 출전한 이 대회에서 한국은 개최국 태국에만 93-92로 아슬아슬하게 이겼을 뿐 일본과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 등을 가볍게 물리친 뒤 실질적 결승전인 필리핀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95-86으로 이겨 대회 사상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신동파가 기록한 50점은 신세대 농구 팬들에게도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김영기는 신동파를 슈터로 활용하면서도 그에게만 의존하지 않는 공격 전술과 다양한 수비 전술로 한국 남자 농구를 아시아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 무렵 다른 종목들도 그랬지만 아시아 정상에 오른 대표팀은 김포국제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등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1년여 뒤인 1970년 12월, 역시 방콕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김영기가 이끄는 남자 농구 대표팀은 조별 리그에서 이란을 110-77, 홍콩을 116-51로 연파한 데 이어 필리핀을 79-77로 따돌리고 조 1위로 6개국이 겨루는 결승 리그에 올랐다. 한국은 결승 리그에서 필리핀에 65-70으로 잡혔으나 강호 이스라엘을 81-67로 물리쳐 물고 물리는 혼전 속에 금메달의 영광을 안았다. 서울에서 열기로 돼 있다가 재정 문제로 반납한 이 대회에서는 농구와 축구가 동반 우승하는 쾌거를 이뤄 온 나라가 열광의 도가니가 됐다.

두 대회 사이에 한국 농구사에 오래도록 남을 또 하나의 기록이 수립됐다. 한국은 1970년 5월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제6회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11위를 기록했는데 이 성적은 2015년 현재 최고 순위다. 이 세 차례 대회에 출전한 한국 남자 농구 대표팀의 지휘관이 김영기다.

김영기는 농구인의 범주에만 머물지 않았다. 1982년 대한체육회 이사와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1983년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지내며 체육 행정가로서 활동했고 40대 후반의 나이였던 1984년에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한국 선수단 총감독을 맡았다. 이 대회에서 고려대학교 후배인 조승연 감독이 이끄는 여자 농구가 중국을 제치고 은메달을 차지했다.

1985년부터 12년 동안 대한농구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한 김영기는 1997년 KBL 전무이사를 맡아 프로농구 출범에 큰 힘을 보탰다. 이후 KBL 부총재를 거쳐 2002년 11월 KBL 제3대 총재로 추대돼 1년 5개월 동안 프로농구를 이끌었다. 2003년 12월 국내 프로농구 사상 첫 몰수 경기 파문으로 2003~2004년 시즌 뒤인 2004년 4월 사퇴해 10년간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으나 지난해 5월 제8대 KBL 총재로 선임되면서 일선으로 돌아왔다. 이는 오랜 기간 농구계 원로로서 쌓아온 신망의 결과다.

그의 또 다른 이력이 있다. 기업은행 지점장과 신용보증기금 전무이사, 신보투자 사장 등 금융인으로서의 경력이다. 선수 시절 그는 미국의 유명 스포츠 전문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를 탐독했다. 요즘 스포츠계의 화두인 ‘공부하는 운동선수, 운동하는 학생’의 본보기다.

▲2015년 10월 26일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2015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 때 인사말을 하는 김영기 총재. <사진제공 KBL>
▲2015년 10월 26일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2015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 때 인사말을 하는 김영기 총재. <사진제공 KBL>

농구에도 ‘거스 히딩크’가 있었다

농구 올드 팬 가운데 남자 농구 대표팀이 서울 용산에 있는 미 제8군 체육관에서 미군과 친선경기를 하는 장면을 TV로 본 적이 있는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1964년 도쿄 올림픽 참패 이후 한국 남자 농구에 축구의 거스 히딩크 같은 인물이 나타났다. 1965년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은 미 제8군 소속 찰스 마콘 소위다. 미 제8군 사령부가 대한농구협회에 코치로 추천한 마콘 소위는 미국 대학 농구의 명문 데이비슨 칼리지의 주전 가드 출신이었다. 데이비슨 칼리지는 1964~1965년 시즌을 앞두고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가 전미 대학 랭킹 1위로 꼽을 만큼 1960년대에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농구 본고장의 명문대 출신인 젊은 장교는 열과 성을 다해 한국 남자 농구 대표 선수들의 훈련을 도왔다. 마콘 소위가 1967년 임기를 마치고 한국을 떠나자 그의 자리를 제프 거스플 중위가 이어받았다. 거스플 중위는 페어레이디킨슨대학교에서 선수 생활을 한 농구인이었다.

이들의 노력과 함께 미 제8군은 1968년 1월 남자 농구 대표팀의 미국, 캐나다 원정을 지원했다. 이인표, 신동파, 김무현, 김인건, 유희형, 박한, 최종규, 신현수, 곽현채, 김정훈은 미군이 제공한 군용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 본고장 농구를 익혔다. 북미 원정에 코치로 참가한 거스플 중위는 이후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한국 선수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마콘 소위와 거스플 중위가 떠난 이후 한국은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드디어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다.

>>>글 신명철 <스포티비뉴스> 편집위원,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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