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 시객 김시습과 충신 송간 이야기 담은 고흥 재동서원

기사입력 2024-08-09 06:55 기사수정 2024-08-09 06:55

[지역 문화유산 순례기] 전남 고흥군 재동서원과 쌍충사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고흥 가는 길은 무척 멀지만, 국토를 인체에 비할 때 오장육부 저 밑에 달린 맹장이 고흥이다. 고흥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가는 길이 즐겁다. 고흥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거의 산 절반, 바다 절반이다. 게다가 오염되지 않아 쌩쌩하다. 유독 순정한 땅이다. 과욕과 과속의 레이스에서 벗어나 순한 삶을 꾸릴 만한 산수가 여기에 흔전만전하다. 자연생태와 함께하는 삶을, 또는 디지털 문명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미래 지향적 삶을 상상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 이주를 꿈꿀 만한 곳이다. 이런 생각을 잠꼬대로 간주하는 이도 많겠지만. 아무려나 모처럼 고흥을 찾은 오늘도 눈길과 발길은 번번이 산과 바다로 흘러간다. 이곳의 역사에도 관심이 쏠린다. 고흥의 옛일을 알면 고흥이 더 잘 보이리라.

대서면에 있는 재동서원으로 들어선다. 야트막한 산 아래 아늑한 터에 위치한다. 초록을 토하는 숲과 수목의 가지에 지펴진 꽃들로 서원 일대가 환하다. 홍살문을 들어서자 재동서원의 본질을 웅변하는 충효비가 보인다. 이어 외삼문을 지나자 동재와 서재가 나오고, 내삼문을 통과하자 서재 송간, 매월당 김시습, 송대립, 송희립 등 충신들을 배향한 서동사가 보인다. 그 밖에 창효사, 경호재, 양호문, 강당, 유물관, 그리고 충신들의 행장을 기린 비석들이 경내에 산재한다. 다양한 구조물마다 완결성을 갖추었다. 하나하나 나누어 봐도 개성이 느껴진다.

이채로운 건 사당 서동사의 주벽(主壁, 사당에서 여러 위패 가운데 주장이 되는 위패)이 두 개라는 점이다. 왼편에 충강공 송간, 오른편에 청간공 김시습의 위패가 나란히 봉안되었다. 재동서원은 여산 송씨네 문중 사당을 연원으로 해 개설되었다. 즉 여산 송씨의 고흥 입향조이자 충신인 송간이 사당의 주인인 셈이다. 그런데 어떤 연고로 객(客)에 불과한 김시습의 위패가 주벽의 자리에 올라가 있을까. 남의 집 사랑방이 아닌 안방을 공유한 형국이니 파격이다. 송간과 김시습. 둘 다 우뚝한 충렬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흡사했다. 드라마틱한 일생도 비슷했다. 그러나 삶의 양상은 서로 달랐다.

나이 겨우 3세 때 해학적인 시를 읊조린 꼬맹이가 있다. 맷돌에 보리 가는 모습을 보고 읊은 게 이랬다. ‘비는 오지 않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김시습의 작품이다. 그는 오나가나 신동 소리를 들었다. 장차 거목으로 쓰일 걸 의심할 바 없는 ‘국민신동’이었다. 그런데 한순간 세상이 요동쳤다. 난세가 들이닥쳤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권을 탈취하는 반역을 일으킨 것. 김시습 나이 19세 때의 일이다. 김시습이 보기에 그건 역성혁명보다 난잡한 패도(覇道)였다. 멀쩡하던 총신들마저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 세조의 하수인으로 쓰여 좁쌀만 한 희망조차 없는 세상이 도래했다고 봤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이렇게 눈 뜨고는 못 볼 시대의 타락에 휩쓸릴 수 없었던 김시습은 과시 공부를 때려치우고 삭발한 채 끝없는 방랑길에 나섰다. 그의 길벗은 항상 고독과 시였다. 평생을 통해 체제에 안티를 걸었다. 타락한 권력의 건너편에서 시대를 조롱한 방외지사였으며, 곡학아세의 선수들을 대차게 깐 아웃사이더였다. 가렴주구를 특기로 삼은 벼슬아치들은 그에겐 고작 벼룩에 불과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는 법. 김시습은 벼룩 소굴을 벗어나고자 늘 어디론가 떠나는 방랑 시객이었다.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은 뒤 계룡산 동학사에선 단종 초혼제가 펼쳐졌다. 김시습이 제주를 맡았다. 그가 손수 쓴 초혼제문을 낭송하며 소낙비처럼 통곡했다던가. 조상치, 조여, 정지산 등 7인이 초혼제에 동참했다. 이들을 ‘단조초혼칠현신’이라 일컫는데, 여기에 송간도 포함된다. 즉 김시습과 송간이 초혼제에서 함께 단종을 애도했다. 조정이 살벌하게 눈을 부라리고 있는 시국에 감히 초혼제를? 필시 7인 모두 목숨을 걸다시피 한 위령제였을 테다. 이 초혼제는 순조 때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동학사를 복원할 때 대들보에 감춘 기록물이 비로소 발견되었던 거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김시습과 송간의 인연을 헤아릴 수 있다. 재동서원 사당에 김시습의 위패를 주벽으로 모신 연유도 이해할 수 있고.

그렇다면 송간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단종 사후 세조가 형조판서 벼슬을 내렸으나 물리치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세사를 오물 덩어리로 간주한 채 철저하게 외면, 고흥 산야에 광석처럼 묻혀 여생을 조용히 은거했다. 천하를 바람 따라 방랑하며 시로써 불의한 정치를 삿대질하고 자연을 노래하는 한편, 광기에 가까운 좌충우돌을 했던 별난 자유인 김시습과 양상이 사뭇 달랐다. 김시습은 평생 수만 편의 시를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시만 해도 무려 2000여 수. 반면 송간이 남긴 문장은 ‘일체 나의 시문을 남기지 말라’고 문중에 당부한 간찰 한 점이 있을 뿐이다. 이를 비교해 김시습에게서 한결 심층적인 정신을 느낄 수 있지만, 송간의 삶에 비치는 허무 아우라와 염세의 기미 역시 가슴을 친다. 시대의 탁류에 눈감거나 은근슬쩍 편승하는 대신, 의기(義氣)로 간절하게 밀어붙인 삶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둘 다 명민한 교사다.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열혈 영혼이다.


(주민욱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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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대인 클래스

이제 쌍충사를 볼까? 도양읍 녹동항 인근 언덕배기에 있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남다른 행적을 남긴 장수 이대원과 정운의 충혼을 모신 곳이다. 녹도 만호(萬戶, 종4품 무관) 이대원은 용맹했으나 불운한 장수였다. 그는 왜구와 수차례 해전을 치러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겨우 22세 나이에 전사했다. 부조리한 죽음이었다. 승전을 거두고 적장을 포로로 잡아온 그의 전공을 가로채려다 실패한 상관 심암이 앙심을 품고 일부러 사지에 몰아넣은 게 아닌가. 수군 100여 명으로 왜선 18척을 치라는 터무니없는 명령을 강요했으니 말이다. 이대원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그는 지원군을 애타게 기다리다 속적삼에 피로 쓴 절명시를 남겼다. 결국 적선의 돛대에 묶인 채로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처절한 곡절이 아닐 수 없다. 저열한 갑질로 약자를 죽음으로까지 유도하는 비극이 일쑤 벌어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난세는 이렇게 이어진다. 종지부를 찍을 길이 없다.

만호 정운은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의 휘하에 있으면서 종횡무진 전장을 누볐다. 그는 강직하기가 대꼬챙이와 같았다. 이런 성정이 오히려 출세의 발목을 잡아 49세가 되어서야 만호 벼슬을 얻었다. 그는 진취적인 머리로 주어진 책무 이상의 군무를 노련하게 해치웠다. 군기와 병선을 치밀하게 점검하고서야 전투 준비를 완료하는 식으로. 이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그를 믿어 최측근으로 삼고 조력을 받았으며, 정운은 잦은 승전고로 보답했다. 그는 부산포 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이순신은 땅을 치며 목 놓아 울었다. 제문을 쓰면서도 울었다. ‘슬프다, 슬프다’를 연발한 제문이 현존한다. 수하를 진심으로 아낄 줄 알았던 이순신. 대인의 클래스가 역시 다르다.


송시종 고흥문화원 원장

‘임란 극복 기념관’ 건립 필요해


‘전라도 고흥 땅엔 장사가 많다.’ 이는 ‘영조실록’에 나오는 기록이다. ‘고흥에서 힘자랑하지 말라’는 얘기도 들린다. ‘박치기 왕’으로 불린 레슬러 김일, 복서 유제두와 박종팔 모두 고흥 출신 스포츠맨이다. 장사가 많이 나온 고장이라는 실록의 전언이 현대에도 유효한 셈인가? 그런데 고흥의 매력은 어쩌면 생동하는 자연생태에 있다. 때 묻지 않은 산수를 근거로 고흥을 ‘살 만한 곳’으로 여기는 이들이 흔하다. 이에 대한 송시종 고흥문화원 원장의 생각은 어떨까?

“고흥은 한마디로 ‘신이 아껴놓은 땅’이라 할 만하다. 예로부터 영주(瀛州,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의 하나)골로 불렸다. 그 정도로 산자수명한 고장이다. 너른 옥토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청정 해역에서 나오는 어패류도 풍부해 먹고살기에 족했다. 전통처럼 이어진 순후한 인심 역시 고흥의 자랑거리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고흥 역사의 특별한 대목을 소개한다면?

“고대 고분이 다수 산재해 고흥 땅에 일찍이 독자적 고대문명이 존재한 걸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엔 분청자기 주산지로 명성이 높았다. 이곳의 운대 도요지에서 생산된 분청자기가 해외로 수출되기도 했으니까. 현재 전국 유일의 ‘분청문화박물관’이 고흥에 있다. 전란 때마다 분연히 일어서 구국 활동에 나선 선조들의 행장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특히 임진왜란 때 고흥은 전쟁의 한 중심지였다. 고흥 사람들이 대거 수군으로 참전해 구국의 전투를 치렀다.”


그간 고흥문화원을 이끌며 거둔 주요 성과를 꼽는다면?

“무엇보다 한자 교육의 필요성을 중심에 두고 관련 사업과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했다. 성과도 컸다. 가령 한자 수업 수강생들과 함께 제16회 ‘전국서당문화한마당대회’에 나가 대통령상을 받았다. 선조들이 불렀던 ‘흥타령’을 직접 편곡해 ‘효행가’를 만들기도 했다. 이 노래 역시 전국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고흥우주항공축제’ 때 서당 문화를 주제로 한 이벤트를 펼쳤더라.

“과학과 전통의 만남을 의도한 이벤트였다. 과학의 혁신 못지않게 중요한 게 전통문화의 가치다. 이를테면 서당 문화를 통해 함양된 선비정신을 현대에 계승하는 일은 얼마나 소중한가. 한문 역시 마찬가지다. 한자 공부를 통해 인격 수양을 할 수 있다는 게 평소 지론이다.”

송 원장은 소싯적에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랐다. 제도권 교육 대신 서당 공부를 했다. 일찍이 한자에 달통한 실력으로 향토의 한문 고적 다수를 번역한 바 있다. 그는 재동서원에 배향된 충신 송간 선생의 29대 손.


고흥은 고 천경자 화백의 고향이다. 생가도 남아 있다. 기념미술관 설립이 필요하지 않을까?

“부끄러운 대목이다. 진작 천경자기념관이 만들어져야 했다. 만시지탄이지만 현 군수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어 머잖아 성과를 거둘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지역사회에 부각된 문화 이슈는?

“고흥은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의 전사(戰史)가 서린 곳이다. 고흥인들도 대거 참전해서 싸웠다. 고흥 녹동 앞바다에서 벌어진 ‘절이도 전투’의 승전은 온전히 고흥 출신 수군의 전투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현창사업은 미미하다. ‘임란 극복 기념관’ 건립 요구 여론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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