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년 사이 ‘시 읽기’ 열풍… 왜 이들은 시를 다시 읽는가

기사입력 2025-06-02 09:31 기사수정 2025-06-02 09:31

노후 희망 찾는 감정의 쉼표… 정체성과 삶의 흔적을 되짚는 도구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주인공 애순이는 시인을 꿈꾸는 문학소녀였다. 시대적 제약과 가부장적 현실 속에서 시를 쓰는 삶은 쉽지 않았지만, 애순이는 줄곧 마음속으로 시인을 꿈꾸었다. 시를 향한 마음은 끝내 좌절됐지만, 시는 그녀의 삶과 태도에 녹아 있었다. 이 드라마는 시가 단순한 직업이 아닌, 존재의 방식이며 삶의 감도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시를 읽는다는 건 결국 내 안의 조용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지금 우리는 왜 시를 다시 읽는가?



감정의 쉼표가 되는 시

시집은 꾸준히 출간돼 판매되고 있다. SNS에서는 짧은 시 필사 열풍이 부는 등 시는 독서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그뿐 아니라 공공도서관에서는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시 관련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는 시가 새로운 자기표현의 언어로 떠오르고 있으며, ‘짧지만 깊은 문장’은 일상의 쉼표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미국의 독립 데이터 리서치 기관인 워드레이티드(WordsRated)는 2024년 미국 내 시집 판매가 1250만 부를 넘어서며 코로나19 이전 대비 약 30% 성장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역시 대형 출판사들이 꾸준히 시집을 내고, 독립출판 시집도 감성 독자층을 중심으로 반향을 얻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정서적 필요에 따른 반응이다.

이는 디지털 플랫폼의 폭발적인 성장과 짧은 콘텐츠 중심의 소비로 인해 인간 내면의 감수성과 집중력이 빠르게 고갈됐고, 역설적으로 짧지만 깊은 감정의 언어인 시를 통해 감정 피로 사회에 단단한 쉼표를 찍는다고 볼 수 있다. ‘요약된 한 줄’이 아니라 ‘깊이 있는 한 줄’을 원하는 셈이다.

이병률 시인은 시를 읽는 이유에 대해 “시는 사람을 물들인다. 나쁜 공기를 환기시키듯 내면을 정화한다”고 말했다. 시는 의미의 문장이 아니라 감정의 문장이기 때문에, 독자는 시를 통해 자신을 다시 감각하게 된다. 감정의 여백을 허용하는 시적 언어는 결국 나를 견디게 하는 문장으로 작동한다.

‘창작과비평’ 2024년 여름호는 한국 시의 역할에 대해 “시는 사회적 고통과 불평등을 비추는 거울이자, 공동체적 상상력을 환기시키는 언어”라고 짚은 바 있다. 단지 아름답고 감성적인 언어가 아니라, 지금 시대를 이해하고 재구성하게 만드는 정신적 도구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시를 통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마음의 형태를 가장 응축된 언어로 마주하는 것이다.


자기 치유와 감정 조절의 언어

국립정신건강센터의 ‘국가 정신 건강 현황 보고서 2023’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74%가 지난 1년간 한 가지 이상의 정신 건강 문제를 경험했으며, 가장 흔한 문제는 스트레스(46%)와 우울감(40%)이었다. 특히 중장년층과 시니어 세대는 이러한 정서적 어려움을 겪는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는 감정을 표현하고 정리하는 데 유용한 도구로 주목받고 있다. 시의 상징적 언어와 은유는 직접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게 하며, 이는 억압된 정서를 해소하는 데 효과적이다. 또한 시를 읽고 쓰는 행위는 감정을 정돈하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2023년 영국 노팅엄트렌트대학교와 플리머스대학교가 공동으로 연구한 ‘시 읽기와 쓰기가 정신 건강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에 따르면 시 읽기는 불안 완화, 스트레스 감소, 고립감 해소에 긍정적 효과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상징과 은유로 감정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시의 언어는 ‘우회적 감정 처리’라는 측면에서 심리치료적 효과를 갖는다.

이 연구는 시를 읽을 때 인간의 감정과 공감 능력, 자아 성찰과 관련된 뇌 부위가 활발히 작동하며, 감정 기복을 안정화하는 데도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특히 반복적이고 리드미컬한 시어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상징적인 언어는 억눌린 감정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게 만든다고 했다. 영국의 엑서터대학교는 ‘시를 읽을 때 뇌의 특정 영역이 활성화되며, 감정 조절과 깊은 사고에 관여하는 부분과 관련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는 시가 단순한 문학적 경험을 넘어, 심리적 안정과 자기 이해를 돕는 도구 역할을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시를 읽거나 쓰는 것은 단지 문학 행위가 아니다. 감정을 정리하고 재해석하는 자기 성찰의 경험이다.

국내에서도 심리상담 현장에 ‘표현적 글쓰기’ 기법이 확산되며, 시를 통한 정서 조절 및 자아 회복이 주목받고 있다.



공감과 연대의 도구

시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감정을 다루는 가장 민주적인 언어다. 최근 전국 공공도서관, 복지기관, 평생교육센터 등에서 시 창작과 낭송, 필사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세대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

SNS 필사 열풍도 같은 맥락이다. 누군가의 시를 손 글씨로 옮겨 쓰는 행위는 곧 자신의 감정을 되새기는 일이다. 시는 ‘당신의 감정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가장 간결하게 전한다. 김응교 교수는 “시는 사회적 고통과 불평등을 비추는 거울이자, 공동체적 상상력을 환기시키는 언어”라고 설명하며 “시는 공적 담론의 자리를 언어적으로 만들고, 타인의 삶을 사유하게 한다. 이로써 시는 사회적 감정의 미세한 결을 읽게 만드는 ‘정서적 공동체의 언어’로 기능한다”고 설명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도 전국적으로 시를 매개로 한 세대 융합형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며, 참여자들은 “시를 통해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는 반응을 보였다. 시는 가장 개인적인 언어지만, 그만큼 가장 넓게 퍼지는 공감의 언어이기도 하다.


삶을 재서술하다

고령화 시대, 시니어 세대에게 시는 단지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정체성과 삶의 흔적을 되짚는 자기 서사의 도구가 된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나를 위한 시쓰기’ 프로그램이나 부산 해운대도서관의 ‘백세시대 시쓰기 교실’처럼, 자전적 시를 쓰고 낭송하는 활동은 기억을 복원하고, 감정을 정돈하며, 자존감을 회복하는 감정 훈련으로 이어진다. 김응교 교수는 읽고 쓰고 더 나아가 현장 답사를 하는 삼위일체 공부는 시니어 자존감 회복에 큰 효과를 가져온다고 설명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운영하는 ‘어르신 문화활동 지원사업’에서도 시 창작 프로그램은 주요 콘텐츠로 편성되고 있다. 노인복지관, 문학관, 평생교육기관에서 진행하는 이러한 활동은 시를 통해 감정을 구조화하고, 삶을 해석하며, 남은 시간을 재구성하는 데 기여한다. 실제로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발표한 ‘2022 어르신 문화예술 교육 성과 보고서’에 따르면, 참여자의 78%가 “시를 쓰며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응답했고, 65%는 “감정이 정리되고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답했다.

또한 2024년 기준 전국 17개 시·도에서 운영 중인 ‘시니어 문학교실’은 참여자의 글쓰기 결과물 일부를 지역 문학회와 연계해 시집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삶을 기록하고 언어로 되살리는 경험은 단순한 취미 활동을 넘어 자존의 감각을 회복하는 의미 있는 여정이다.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윤동주의 ‘길’ 같은 시는 오래된 기억을 깨우고, 잊혔던 감정을 다시 건드린다. 시니어들은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필사와 창작 활동을 통해 ‘나를 다시 말하는 연습’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시를 쓰는 것은 나를 정리하는 일이고, 나를 돌보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 들수록 시가 더 필요하다”라는 말처럼, 시를 읽고 쓰는 일은 단지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 아니다. 오늘의 나를 돌보는 일이자, 새로운 내일을 준비하는 조용한 연습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다시 시를 읽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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