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토리텔링] 육체가 곧 연기인 진정한 액션 스타의 계보

기사입력 2015-10-06 08:44 기사수정 2015-10-06 08:44

공룡처럼 멸종할 위기

우리나라 액션 스타의 계보는 곧 홍콩 스타의 계보다. 액션 영화가 ‘다치마와리’ ‘으악새’ 등으로 폄하되던 한국 영화계에서 토종 액션이 만들어지기는 쉽지 않았다. 홍콩 영화계는 달랐다. 그곳 영화인들은 중국 무술을 떠받들었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으려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이어진 그들의 창의적이고 효과적인 노력은 자국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글 김유준

◇ 호금전과 장철, 그리고 왕우

1960년대, 아시아 화교 문화권에서 무협극이 빠르게 인기를 얻어가고 그에 발맞춰 쇼브러더스를 비롯한 홍콩의 영화 스튜디오들이 새로운 무협 영상을 만들려던 시기. 그때 홍콩 영화계에 두 명의 거장이 있었다. 호금전과 장철. 두 감독은 홍콩을 무협 액션의 본거지로 만드는 데 거대한 몫을 담당했다.

호금전은 무술에는 문외한이었다. 칼춤과 경공이 난무하는 스토리를 다루면서 그가 관심을 둔 것은 경극과 무용에 바탕을 둔 아름다운 움직임과 꽉 짜인 미장센이었다. “무협 세계는 대부분 상상임에도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것이 이상하다. 내 관심은 액션과 풍경의 관계에 있다.”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협녀>를 비롯해 <대취협> <소오강호> 같은 호금전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상 그 자체였다. 결투 장면을 액션인 듯 아닌 듯 그려내는 연출 스타일 아래에서 스타가 탄생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그의 영화에서 정패패 같은 여성 배우가 더 돋보인 것은 그런 연출 스타일과 무관하지 않다.

장철 감독은 정반대였다. 세련된 화법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영화에서는 몸과 몸이 맞부딪치는 격렬한 움직임이 속출했고, 카메라는 그에 유치하다 싶을 만큼 급격히 줌인했다. 그런 영상 속에서 무술에 능한 배우가 주목 끌 것은 당연한 일. 장철은 그렇게 왕우(王羽)를 스타로 만들었다.

1967년 <단장의 검>으로 합을 맞춰본 장철과 왕우 콤비는 이듬해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를 발표해 홍콩 영화 역사상 최초로 100만 홍콩달러 이상 벌어들이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 흥행을 바탕으로 <돌아온 사나이 외팔이> <신 외팔이> 등으로 외팔이 무사(독비도: 獨臂刀) 시리즈가 이어졌고 그 인기는 바다를 넘어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전해졌다. 호금전과 달리 작품을 빨리, 많이 만드는 장철의 연출 스타일에 힘입어 왕우 외에 강대위(깡따위 또는 장다웨이), 적룡 등도 스타덤에 올랐다.

피바람이 몰아치는 장철식 영상이 대세가 되면서 홍콩 무협 액션의 기조까지 뒤바뀌었다. 허황된 칼춤은 시나브로 자취를 감췄고 스크린에서는 팔과 다리가 부러질 듯 맞부딪쳤다. ‘챙챙’ 하는 금속성 음향이 베개를 몽둥이로 두드리는 듯한 효과음으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의 시대배경이 점점 더 현대에 가까워지는 경향도 짙어졌다. 이런 현상은 이소룡이라는 불세출의 스타가 출현함으로써 절정을 맞았다.

◇ 작은 용의 등장과 죽음

이소룡은 실제로 무술의 달인이었다. 영춘권의 일대종사로 영화화되기도 한 엽문, 태권도 고수인 이준구 사범 등은 이소룡의 무술 스승. 이소룡은 그밖에 유도, 가라테, 권투 등 세상의 모든 무술에 관심이 많았다. 아역배우로 활동한 홍콩에서의 유년기 이후 미국에서 청년기를 보낼 즈음에는 무술 연마에만 힘을 쏟아 나중에 절권도라는 무술을 창안하기도 했다. 실력에 비해 영화계에서의 활약은 미미했다. 1966년 미국 무술가의 도움으로 TV시리즈 <그린 호넷>에 조연으로 출연했지만 반향은 크지 않았다.

이소룡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다시 홍콩으로 돌아오고부터. 1971년 액션 영화의 거장 나유(로웨이) 감독의 <당산대형>에서 주연을 맡아 놀라운 히트를 기록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어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가 홍콩과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에서까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아시아를 뛰어넘는 세계적 스타 ‘브루스 리’가 탄생한 것이다.

이소룡의 트레이드마크는 일그러진 표정과 단순하면서도 폭발적인 움직임. 무도가들은 그 기괴한 기합 소리와 표정을 연기가 아닌 ‘발경(發勁)’의 결과로 이해한다. 무술에서 발경이란 ‘짧은 시간 안에 격렬하게 타격함으로써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 그런 필살기를 펼치는 순간이라면 소리를 지르고 인상이 일그러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이소룡의 시대는 화려했으나 길지 않았다. 느닷없이 나타나 3년 동안 온 세상을 흥분시켰다가 1973년 7월, 마지막 주연작 <사망유희>를 채 완성하지 못하고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나 유성처럼 사라진 것이다.

이후 홍콩 영화계에는 액션 배우의 예명에 용(龍) 자를 붙이는 유행이 생겨나 순식간에 별의별 용들이 군웅할거하며 이소룡의 빈자리를 메우겠다고 나섰다. 성룡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다.

▲<정무문:100대1의 전설>의 견자단, <백사대전>의 이연걸, <폴리스 스토리 2014>의 성룡. 왼쪽부터
▲<정무문:100대1의 전설>의 견자단, <백사대전>의 이연걸, <폴리스 스토리 2014>의 성룡. 왼쪽부터

◇ 성룡 액션의 시작

이소룡이 사라지며 액션 영화는 주춤했다. 이소룡의 엄청난 주먹질과 발차기에 맛들인 관객들은 후계자를 자처하는 잡룡(?)들의 몸부림에 좀처럼 열광하지 못했다. 1976년부터 <소림사 십팔동인> <소림 삼십육방> 등 소림사 관련 영화들이 히트했고 그와 함께 황가달, 류가휘 같은 스타가 탄생했지만 이소룡이 남겨준 흥분을 잠재울 만큼은 아니었다.짧은 순간의 격렬한 움직임만으로는 도저히 이소룡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일까. 이후 홍콩 영화계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움직임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어느 제작자의 감정싸움이었다.

오사원은 뛰어난 프로듀서였지만 쇼브러더스 영화사의 상층부와 다툼이 잦았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프로덕션을 세우리라 결심한 것이 1970년대 후반. 오사원은 평소 눈여겨봤던 무술감독 원화평을 연출자로 키우려 했다(원화평은 나중에 <매트릭스>에서 무술감독을 맡았다).

두 사람이 첫 영화의 주연으로 낙점한 배우는 성룡. 성룡은 존재감 없는 외모(쌍꺼풀 수술로 그나마 또렷해졌다)로 한국과 홍콩을 오가며 그저 그런 영화에 출연하던 2류급 배우. 그러나 재빠른 몸동작만큼은 최고였다.

1978년, 초일류 제작자와 초일류 무술감독과 초일류 스턴트 배우라는 삼각 조합은 <사형도수>라는 독특한 영화를 세상에 선보였다. <사형도수>의 액션은 춤도 아니고 무술도 아니었다. 흡사 우스꽝스러운 광대짓 같았다. 그러나 성룡의 앳된 외모와 걸출한 움직임에 힘입어 장난 같은 동작은 도리어 관객들에게 통쾌한 웃음을 안겨줬다. 이어 성룡은 <취권>까지 히트시키며 승승장구한다(우리나라에서는 <취권>이 먼저 개봉했다). 이른바 코믹 액션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소권괴초> <사제출마> <용소야>…. 거듭된 성공에도 성룡은 도취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대배경을 현대로 바꾸고 영화의 성격마저 액션 중심에서 코미디 중심으로 뒤바꿔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첫 번째 시도는 홍금보 감독의 <오복성>(1983년). 성룡은 조연도 마다하지 않으며 절친한 동료의 영화적 실험에 동참했고, 흥행 성공으로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이어 성룡은 감독, 각본, 주연까지 맡은 <프로젝트 A>를 세계적으로 히트시켰다. <쾌찬차> <복성고조> <폴리스 스토리> <용형호제>…. 성룡의 성공가도는 끝이 없었고 급기야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 영웅, 본색을 드러내다

성룡의 액션은 거의 독과점 상태였다. 구르고 때리고 피하는 액션으로는 어느 누구도 그 아성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장철의 조감독 출신인 오우삼은 ‘주먹 아닌 총’으로 블루오션 개척에 나섰다. <영웅본색>은 그 찬란한 결과물이었다.

현대판 협객전이라 할 만한 이 작품은 홍콩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히트했다. 상영 시간이 끝났음에도 관객들의 성화에 못 이겨 밤새도록 영사기를 돌렸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영웅본색> 이후 액션 영화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다. 협객들은 칼집 대신 홀스터를 찼고, 도복 대신 레인코트를 입었다. 기합과 초식은 자취를 감췄고 방아쇠를 당기는 무심한 표정만이 스크린을 아로새겼다. 권총을 속사포처럼 내갈긴 후 담배를 피워 무는 모습이 가장 멋졌던 배우 주윤발은 그런 영화의 홍수 속에서 독보적으로 빛났다. 장국영, 유덕화, 장학우, 이수현 등이 그 뒤를 따랐고, 적룡을 비롯한 옛 스타들이 다시금 인기를 얻었다.

성룡 액션을 넘어서려는 움직임은 이른바 ‘홍콩 누아르’만이 아니었다. 서극은 일찍이 <촉산>에서 특수 촬영 기법으로 고대 무협의 세계를 재현하려 했지만 흥행에 실패했다가 1987년 무술감독 출신인 정소동에게 연출을 맡긴 <천녀유혼>에 이르러 기어이 성공했다. ‘SFX 무협영화’로 불린 이런 흐름 또한 아류작들을 양산하며 오랫동안 유행을 이끌었다.

중국 본토의 무술대회 선수권자인 이연걸을 내세워 정통 권법 영화를 부흥시키려는 움직임도 주목할 만했다. 이연걸은 1979년까지 중국 무술대회를 5연패한 달인. <소림사> 시리즈로 얼굴을 알린 뒤 서극 감독에게 발탁돼 <황비홍> 시리즈를 히트시키며 일약 초일류 액션 스타로 발돋움했다.

액션의 숱한 유행은 21세기가 시작되며 잦아들고 있다. 성룡도, 주윤발도, 이연걸도 예전 같지 않다. 더불어 세계 무술 영화의 거점이던 홍콩 영화계는 힘을 잃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다음 날 곧바로 ‘표절작’이 뿌려진다는 후안무치한 골육상쟁의 분위기 속에서 하루하루 스러져갔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액션 스타의 계보 역시 지금에 이르러 더 이상 쓰이지 않고 있다.

전 세계 영화계에 개인기 대신 규모로 몰아붙이는 대형 액션만 횡행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이제 육체의 움직임에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액션의 일대 위기다. <미션 임파서블: 로그 네이션>에서 에단 헌트는 이렇게 말한다.

“절박한 순간이라면 필사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지금 액션 영화계는 절박하다. 광야를 내달리는 초인적 영화인의 ‘필사적 조치’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육체가 곧 연기인 진정한 의미의 액션 스타는 공룡처럼 멸종할지도 모른다.

▲이대근
▲이대근

◇ 우리나라의 액션 스타

으악새 영화. 한때 우리 관객들은 우리나라 액션 영화를 그렇게 불렀다. 허공을 내지른 주먹에 악당들이 “으악” 하고 제풀에 몸을 날리며 쓰러진다고 해서 붙은, 실로 치욕적인 별명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액션 스타가 탄생하기는 쉽지 않았다. 장동휘, 박노식, 이대근 등이 이른바 ‘다치마와리 영화(몸싸움 영화)’에서 주연을 맡기는 했으나 영화계의 본류는 아니었다.

▲성룡과 황정리
▲성룡과 황정리
▲황정리
▲황정리

정창화 감독 같은 액션 전문 연출자, 황정리처럼 액션만 고집한 배우는 척박한 우리나라 영화계 대신 홍콩에서의 활약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정창화 감독은 <죽음의 다섯 손가락> 등을 히트시키며 일급 감독 반열에 올랐고, 황정리는 성룡의 <취권> 등에서 악역으로 활약했다.

한용철은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활약한 거의 유일무이한 액션 스타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재미교포 출신(미국식 이름은 ‘챠리 셀’)으로, 무술의 달인은 아니었으나 발차기가 멋지다는 이유만으로 1973년 새로운 액션 스타를 찾고 있던 이두용 감독에게 발탁됐다. 결과는 대성공. 다리를 쭉 뻗어 순식간에 상대 뺨을 연타하는 광경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며 인기를 끌었고, 그와 함께 <용호대련>을 비롯해 2년 동안 여섯 편의 액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하지만 지나친 다작 탓인지 인기는 곧 가라앉고 말았다. 챠리 셀 외에 바비 킴이라는 또 한 명의 재미교포 배우가 반짝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비행기 안에서 소동을 피운 가수와는 다른 사람이다). 연예계 슈퍼스타 겸 액션 영화 애호가 겸 무술인이던 전영록이 이두용 감독과 함께 ‘돌아이’ 시리즈를 선보이며 잠시 인기를 끌기도 했다.

>>글 김유준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로드쇼><프리미어>, 남성교양지 <에스콰이어>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은 천재이다>(도서출판 현재)등을 번역했다. 현재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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