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읽는 동화]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기사입력 2015-12-22 09:57 기사수정 2021-08-13 14:55

바람이 제법 차가워졌다.

코트 깃을 세우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조금은 더 빨라졌다.

Y는 카페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은행잎이 너무 많이 떨어져 나뒹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저분한 것 같은데 좀 쓸어낼까. 그냥 두는 게 운치 있으려나. 잠깐 갈등했지만 이미 두 손은 빗자루를 챙겨 들고 있었다.

“어? 너? Y 아니야?”

카페 앞 인도를 쓸고 있는 Y를 먼저 알아본 것은 J였다.

“어머! 팀장님!”

“이야, 오랜만이다. 더 예뻐졌네?”

J는 Y가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조그만 기획사의 사장이었다.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였던 J는 ‘사장’ 대신 ‘팀장’이라는 직함을 고집했었고, 직원들을 모두 동생이나 조카처럼 친근하게 대하던 사람이었다. 작지만 알찬 회사였고, 젊은 혈기들이 모여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했지만 연쇄부도로 인해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카페를 운영한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있다만, 여기일 줄이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잘 살고 있어서 다행이다.”

Y는 J를 위해 짙은 에스프레소를 한 잔 내려 건넸다. 그러나 J는 뜨거운 물 한 잔을 달라고 하더니 커피를 묽게 마셨다.

“커피 취향이 바뀌셨나 봐요?”

“그걸 아직도 기억하네? 요즘은 부드러운 게 더 좋아서.”

J는 부도 당시 주변의 인맥을 전부 동원해 모든 직원들의 일자리를 찾아주었다. 회사를 정리하면서 유일하게 일자리를 제대로 구해주지 못한 채 헤어지게 된 직원이 바로 Y였다. 회사의 어려운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던 Y. 이미 10년도 더 지난 일이건만 J는 그게 늘 마음에 걸려 미안했다.

“괜찮으면 소주나 한잔할래?”

커피를 두 잔이나 마시고도 지나온 세월에 대한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고, 마침 카페 손님도 없었고,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가을은, 제법 깊어가는 중이었다. 흔해 빠진 삼류 소설처럼 그렇게 두 사람은 뒤늦은 사랑에 빠졌다. Y에게는 어쩌면 10여 년 전, 차마 고백하지 못했던 사랑이었는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는 유부남이었으니까. 왜냐하면, 그는 늘 아내 자랑을 했으니까. 왜냐하면, 그는 어마어마한 딸바보였으니까.

“사모님과는 여전히 알콩달콩 잘 지내세요?”

“잘 지내지. 좋은 여자잖아.”

아내의 안부를 물었을 때 Y는 조금 서러웠던가. 부러웠던가. Y는 알싸하게 온몸을 감싸오는 소주의 힘을 빌려 신세한탄을 하고 말았다. 안정을 찾지 못한 채 여기저기 직장을 전전했던 지난 세월, 결혼도 하지 못한 채 허무하게 끝나곤 했던 몇 번의 짧은 연애, 칙칙한 낯빛과 주름진 얼굴만 남은 마흔의 카페 주인은 J의 아내를 떠올리자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런 Y의 쓸쓸함이 J의 다정함을 자극했던가. 그날 밤, J는 소주잔을 비우고 포장마차를 나오면서 Y의 어깨를 오랫동안 안아주었다. Y는 J에게 기댄 채 밤새도록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쓸쓸하고 혼란스러운 가을이 저물도록 그들은 헤어지지 못했다. 겨울은 너무 추웠으니까. 봄은 너무 황홀했으니까. 여름은 너무 뜨거웠으니까. 그리고 다시 가을은 그 서러운 시작보다 더 쓸쓸했으니까. 이별은 엉뚱한 곳에서 벌어졌다. J의 비밀과 거짓말은 아내에게 계절을 헤아릴 틈을 주지 않았다. 분노와 배신에 몸을 떨던 아내는 결국 J를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Y도 J를 떠났다.

이혼의 충격은 아내보다 J를 더 크게 쥐고 흔들었다. 지독한 외로움과 후회를 껴안은 채 세상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J의 고통은 참혹했다. 그건 Y가 위로하거나 대신 채워줄 수 없는 문제였다.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동안 J로부터 우러나오던 모든 매력의 원천은 아내였다. 그가 Y에게 주었던 따뜻한 웃음, 유쾌한 농담, 다정한 손길, 격정적인 몸짓. 그 사랑의 이면에는 그의 아내로부터 비롯된 단단한 안정감이 J에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Y는 몸서리를 쳤다. 떠나는 Y를 J는 잡지 않았다. 아내가 떠나는 순간, 이미 J는 Y를 떠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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