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을 맞으며 ]어둠을 감춘 찬란한 빛 속의 6월

기사입력 2016-05-10 09:00 기사수정 2016-06-22 12:57

6월!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장미다. 아마 내가 장미꽃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유월은 장미의 계절이다. 6월을 생각할 때마다 끝없이 펼쳐진 장미 농원이 떠오른다. 메릴린 먼로를 닮은 농염한 붉은 장미, 수녀복 입은 비비언 리 닮은 백장미,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에 마리아로 나오는 잉그리드 버그만의 선한 눈동자를 닮은 노랑 장미 등 각양각색의 장미가 떠오른다. 마치 풍요로운 여름의 초입에 생명으로 요동치는 젊음의 모습을 닮았다.

그러나 그런 생명의 충일과 정반대로 한국인으로서 6월에 떠오르는 또 하나의 이미지는 6·25와 현충일이다. 생명이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장미는 붉은 피를 흘리며 산화한 거대한 죽음과 오버랩되며 맞닿아 있는 것이다. 생명과 죽음, 6월은 그런 의미에서 모순의 계절이라 할 만하다. 화려한 꽃으로 장식한 국립묘지에 가지런히 누운 젊은 영혼들을 생각하면서 유월은 그렇게 강렬한 생명과 죽음 사이의 모순을 일깨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사실 생명과 죽음은 둘이 아니다. 모든 생명의 귀결은 결국 죽음이기에 모순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고대 로마에서 개선하는 장군의 시가행진 뒤에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를 외치게 했을 것이다. 이 화창한 계절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꼭 전쟁과 현충일이 아니더라도 초여름의 강렬한 햇살 아래 더욱 짙어지는 어둠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도드라지기 때문일지 모른다.

행복한 삶일수록 두렵고 맞이하기 싫은 것이 죽음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과연 끝일까? 아니면 또 다른 세계의 시작일까? 시작이라 할지라도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죽음에 대해 가장 깊게 천착한 문학가는 톨스토이였을 것이다. 그는 늘 자신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에 대해 두려워했다. 그래서 소설 속에 죽음에 대한 고찰과 성찰을 많이 남겼다.

톨스토이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 지적이고 아름다운 안나는 정욕의 노예가 되는 순간 불행에 빠지고 결국 자살하고 만다. 한편 성실한 레빈도 행복한 가정을 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복을 놓아둔 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공포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레빈은 자신에의 몰입과 타인과의 소통, 그를 통한 자아의 성장을 통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다.

<안나 카레니나>가 연애소설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죽음에 대한 고찰인 셈이다. 그러니 첫 문장도 ‘행복한 죽음은 비슷하고 불행한 죽음은 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로 이해해도 될지 모른다. 문득 톨스토이의 이런 말이 생각난다.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 준비는 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이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죽음을 그냥 대책 없이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극복할 수는 있는가? 기독교적인 믿음을 빌리지 않더라도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영생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영생할 수 있을까?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모든 생명체는 DNA가 조종하는 아바타에 불과하다며 죽음은 끝이고 영생하는 것은 DNA뿐이라고 우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DNA를 남김으로써 영생을 이어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물론 자손 이외에도 자신의 존재를 남기는 방법은 많이 있다. 예컨대 예술가나 책을 쓴 학자들은 그들의 작품이나 책으로 이 세상에 흔적이나마 남길 수 있다. 그렇다면 평범한 우리는 어떤 것을 남길 수 있을까? 숭고한 죽음으로 후인들의 뇌리에 남을 수도 없다면 결국, 주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도리밖에 없다.

60이 넘은 이 나이에 두려운 것이 있다면, 시어머니도 남편도 아닌 자식들의 눈이다.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나를 아는 자식들은 이담에 나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나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바로 부모님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아버지 고향은 함경도 길주다. 6·25가 남긴 아픔 때문에 젊은 날 혈혈단신이 되셨다.

가정을 꾸미시고 아내도 무척 중요했겠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피를 나눈 사람은 내가 처음이다. 그러니 나를 향한 애착과 사랑이 어떠하셨겠는가? 물론 모든 부모의 자식 사랑은 깊고 끝이 없다. 내 아버지는 더했다. 퇴근길에 우리를 위해 늘 맛있는 것을 사오시고 불쌍한 할아버지에게 새 코트를 망설임 없이 벗어주시던 아버지. 아마도 북에 계신 외할아버지를 생각하셨으리라. 남의 자식도 제 자식마냥 거두시던 아버지는 인정이 퍽 많은 분이셨다.

작은 걱정이나 절망에 빠진 내게 책망 어린 위로의 말씀은 ‘의주를 가려면서 신날도 안 꼬았다.’이다. ‘큰일을 하려고 하면서도 조금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 많은 기억을 통틀어 내게 가장 깊게 뿌리박혀 있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 사랑 덕분에 지금도 힘들거나 절망적인 순간에 맞닥뜨리면 아버지 사랑이 에너지가 되어 견딜 만하다. 내가 아버지의 생물학적 DNA를 물려받았지만, 아름다운 기억을 덤으로 받은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고 아버지께 감사하며 살고 있다. 나는 과연 우리 두 딸에게 어떤 기억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그들에게 어떤 사랑을 줄 것인가?

국립묘지에 누워 있는 이름 모를 젊은 영혼도 언뜻 보기에 의미 없는 죽음으로 보이지만, 그들이 많은 사람을 살렸고 그 죽음 덕에 지금도 우리가 풍요하고 평화로운 안락 속에 사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우리에게 소중한 정신적 DNA를 물려주고 영생한 것은 아닐까? 붉은 장미 한 다발이 놓인 묘지를 바라보며 6월이 주는 찬란한 빛 속에 보이지 않는 어둠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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